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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49화 (49/199)

49화 고귀한 나라

49화 고귀한 나라

대카간 아사나 섭도는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꽉 막혔던 속이 한 번에 꽝 뚫린 것처럼 너무 개운해서 미친 듯이 웃었다.

“하하하! 하늘은 우리 돌궐의 편이었네. 필시 그러한 것일세!”

그런데 누가 봐도 하늘이 뚫릴 만큼 호탕하게 웃을만한 일이었다.

이계찰이 가져온 외교적 성과는 즉위 이후 불안정했던 내외적인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정도로 큰 것이었다.

“참으로 고생하셨네.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하다니.”

적대 국가로 늘 배후의 불안한 존재였던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했다.

그런데 성과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사신단에게 윽박질렀다고?”

“하하하. 윽박이 아니라 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작금의 정세에서 고구려 철저한 중립만 선언해도 엄청난 성과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작 이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상대로 사실상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는가.

그토록 긴 세월 고구려가 사수했던 외교적 원칙을 완벽하게 허물어버리는 결정이었다.

이계찰은 목을 가볍게 풀며 말을 꺼냈다.

“우리 돌궐의 사신단이 도착한 뒤에 수나라 사신단이 당도했습니다. 소식을 접한 신은 참으로 답답하였습니다. 그간의 고구려를 상기할 때 필시 우리 돌궐을 박대할 것이니 말입니다.”

“암. 다 떠나서 우리와 고구려는 적대관계였으니 말일세. 그러나 감히 그리했다면 내가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야!”

이미 모든 것이 해결된 상태였다.

그러하니 아사나 섭도는 돌궐 특유의 호전성을 유감없이 꺼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계찰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들과 우리 사신단을 대면하게 했습니다.”

“상당히 당황스러웠겠군.”

“한데, 우리 사신단 앞에서 그들을 대놓고 면박주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계찰은 당시의 일을 빠지지 않고 말했다.

곱씹을수록 대단한 일이었다.

아사나 섭도는 미친 듯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들으면 들을수록 흡족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고구려는 천년을 지탱한 나라일세. 이토록 장구한 세월을 버틴 나라가 오랜 외교적 방침을 뜯어낼 정도로 우리의 승산이 확실하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습니다. 게다가 비록 약탈에 불과할지라도 고구려의 대군이 장성을 넘는다면 수나라는 군사 동맹으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손해 볼 게 없습니다.”

“바로 그것일세!”

“한데, 고구려 군이 장성을 넘으면 탈이 생기지는 않겠습니까.”

지근찰이 조심스레 우려를 표했다.

그러자 이계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의 영토나 세폐에는 관심이 없소. 그저 약탈이나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소.”

“정말 그 정도로 만족한다고 하였소?”

“그 정도가 아니라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가장 냉정한 판단을 한 것이오. 고구려가 아무리 강성할지라도 제 땅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것에 불과하오. 홀로 수나라를 어찌할 수 있는 위력은 없다는 것이외다. 이러한데 전쟁 이후 수나라 조정에 세폐를 요구한들 나오는 게 있겠소?”

전쟁에서 이겼다고 하여 막무가내로 조건 수용을 요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수나라로서는 전통적으로 진행되었던 돌궐에 대한 세폐와 과거의 왕조에 조공을 바치던 고구려에 세폐를 내미는 건 아예 결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음. 아무래도 거절하겠지요. 무리하게 요구하면 우리에게도 화가 미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렇소. 그들은 고구려에 세폐를 주는 걸 동의하지 않을 것이오. 남은 건 고구러가 장성 이남의 영토를 취하는 것이오. 한데,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오.”

“그렇긴 하오. 단지 군사력만 있으면 깃발을 꽂을 수 있었던 고보령과 고구려는 다르지요. 애초 이질성이 클 수밖에 없으니 말이외다. 고구려도 이를 잘 알 것이외다.”

“그렇소. 그러니 고구려는 약탈에 그치고자 한 것이오. 물론,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볼 수는 있소. 한데, 우리가 수나라 군과 싸울 동안 후방을 약탈하겠다는 것이외다. 즉, 최소한 수나라 기주 땅을 모조리 짓밟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소. 그들로서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외다.”

고구려군의 규모가 10만은 넘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런 대군을 이끌고 무주공산이 되어 있을 기주를 총력으로 약탈한다면 가히 일국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이 나올지도 몰랐다.

“물론, 전제는 우리가 기주의 약탈은 양보하는 것이외다. 한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겠소? 단지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했다는 것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으니 말이외다.”

이계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구려군은 전투를 치르지 않겠지만 수나라 조정도 그렇게 여기겠소?”

“내가 이를 유추하지 못하였소. 그렇군요. 수나라는 고구려와 우리가 철저한 군사 동맹을 체결하여 전쟁을 일으켰다고 여길 게 분명하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외다.”

“바로 그것이오. 우리의 40만 대군과 고구려 10만 대군이라. 고보령 따위와 손을 잡는 것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위력을 낼 수 있소. 수나라가 조기에 항복할지도 모르오.”

“하하하!”

아사나 섭도는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천년을 지탱한 나라일세. 그들도 아는 것이야. 철저하게 갈라진 화북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일세. 이를 바라보고 있지 않겠나?”

초유의 난세가 수백 년간 이어진 천하였다.

이토록 긴 세월, 패권을 다투며 천년을 지탱했다는 건 그 자체가 곧 역사였다.

이를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세력은 천하에 존재하지 않았다.

“소카간들에게 이를 알리게.”

선대도 이루지 못한 외교적 쾌거였다.

자연스레 대카간의 권위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아사나 섭도에게 걸릴 것은 없었다.

오직 총력전으로 수나라를 응징하는 것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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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평군의 장계를 읽는 양견의 표정은 참으로 야릇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었다.

“거란족이 장성을 넘었는데 고구려군의 깃발도 보였다······?”

그동안 축적한 경험과 지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한데, 이것만이 아니었다.

“거란족이 수만이고, 고구려군은 수천에 불과하옵니다.”

고경의 말대로 이 또한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폐하. 백 번을 생각해도 거란족은 주력이 될 수 없사옵니다. 한데, 규모가 압도적이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사옵니까.”

“······고구려가 거란족을 획책하여 장성을 넘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거란족이 미치지 않고서나 고구려의 깃발로 위계를 꾸밀 수는 없사옵니다. 게다가 실체를 대리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옵니다. 폐하. 이 장계의 내용을 볼 때 북방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사옵니다.”

난세를 돌파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정보의 명확함이어야 한다. 파악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는 건 판단의 혼란을 키우고 종국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폐하. 만일, 고구려가 장성 이남을 탐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옵니다.”

“한데, 말이외다.”

양견의 머릿속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만일, 고구려가 선제공격한 것이라면 명확하게 제 정체를 밝히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차피 전면전을 치러야 하는데 구태여 숨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는 경우의 수는 한 가지였다.

“현상만 보면 약탈이외다. 한데, 약탈한다면 우리와 적대하는 것이외다. 대체 고구려가 뭐가 아쉬워서 본국과 적대관계를 각오하면서까지 약탈한다는 것이오? 심지어 거란족의 뒤에 숨어서.”

“폐하. 약탈이 아닐지도 모르옵니다. 거란족을 앞세워 우리의 역량을 떠보는 것일 수도 있사옵니다.”

“고구려가 장성 이남을 도모할 역량이 되오? 어불성설이오. 고구려는 군사력을 앞세워 제 영역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는 나라외다. 만일, 그들이 장성 이남의 땅을 탐하고자 했다면 진작에 시도했을 것이오. 한데, 작금의 정세에서 그리할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양견조차 말을 하면서 이 상황을 매끄럽게 정리하지 못했다.

또한, 고경도 개운하게 답변할 수가 없었다.

“폐하. 우리 사신단이 귀국할 때까지 판단을 보류하는 건 어떠하옵니까.”

현재로서는 가장 합당한 결론 도출이었다.

어차피 당장 장성 이남에 거대한 변고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발생한 사실은 ‘약탈’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런데 양견은 머릿속이 아직도 복잡했다.

정보의 양이 한정적이긴 했으나 그의 냉철한 사고가 모든 것을 쉬지 않고 분석하기에 발생한 현상이었다.

“바다에서도 약탈이 발생했소.”

“그러하옵니다.”

“육지에서도 발생했소.”

“······그러하옵니다.”

여전히 명확한 건 없다.

매끄럽고 명료하게 답을 도출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양견은 전과 다른 정세가 펼쳐진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걸 더불어서 바라보니 괴이한 결과였으며, 이것이 기존에 확보해둔 답과는 아득히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확인해봐야겠소.”

“수가 있사옵니까?”

“과거 북제가 대군을 이끌고 압박하자 고구려는 유민을 쇄환하였소. 이를 다시 반복하여 값을 도출해보는 게 옳소.”

“하오시면······.”

“준비하던 남정군을 기주로 보내시오.”

어차피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남쪽의 진나라가 아니었다.

고구려의 의도였다.

“천하를 손에 올리지 않은 상태이기에 작은 변수도 확실하게 제압해야 하오. 상대는 천년을 버틴 거목이라는 걸 절대 잊지 마시오.”

이 값에 따라서 돌궐에 대한 외교 젼략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돌궐만이 아닌 수나라의 외교 방침이 좌우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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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황제 진욱은 크게 기뻐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하하. 그러니까 고구려가 거란족을 앞세워 남하했다는 것이오?”

모처럼 듣는 황제의 웃음에 주라후의 표정도 밝아졌다.

“폐하. 아직 정확한 건 아니옵니다. 하지만, 분명 고구려의 깃발도 포착이 되었사옵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외교는 결국 직관적이외다.”

실의에 빠져 한탄만 하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생기가 넘쳤고,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고구려의 깃발은 고구려만 사용할 수 있소. 이를 대리할 수 있는 세력은 없소. 아무리 수나라와 돌궐의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여 고구려의 깃발을 동의 없이 사용했다가는 무슨 화가 미칠지 모르오.”

단지 영토나 백성의 수로만 비교하면 고구려는 작은 나라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런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면 고구려가 천하의 패권을 좌지우지하는 일국이 될 수가 없다. 물론, 고구려가 유일 패권을 가지는 건 아니지만, 패권을 바라보는 모든 나라가 손을 내미는 위치에 있다. 이건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영토가 작다고 하지라도 30만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오. 천하가 분열되었는데 감히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나라가 있다고 생각하오? 없소. 한데, 고작 거란족이 그랬다? 어불성설이외다.”

“고구려 후방에 신라와 백제가 있긴 하옵니다. 이들은 늘 고구려의 심기를 건드리지요.”

“하하하! 그 땅이 원래 좀 사나운가 보오.”

진욱의 가벼운 농에 주라후는 엷게 웃었다.

‘그래. 어차피 수나라와 대립해야 한다. 고구려는 먼 나라이고, 장성의 일도 당장 우리와는 무관하다. 그렇다면 폐하께서 의욕을 보이실 수 있게 하는 게 가장 합당하다.’

생각을 정리한 뒤 진나라의 내치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말을 꺼냈다.

“폐하. 일이 이렇게 풀리니 참으로 다행이옵니다. 또한, 혹시 모를 일이옵니다. 고구려와 돌궐이 손을 잡았을지 말이옵니다.”

“오. 근거가 있소?”

“고구려가 진정 장성 이남을 바라본다면 응당 돌궐과 화해하는 게 맞지 않겠사옵니까?”

“허. 오랜 적대관계인 두 세력이 손을 잡았다면 만리장성의 붕괴는 순식간일 것이외다.”

“그러하옵니다.”

진욱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북진 준비는 어찌 되어가고 있소?”

“신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챙기고 있사옵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이미 사신단이 고구려로 향했다. 만약, 그들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면 폐하께서 다시 실의에 빠지실 수도 있다.’

확실하지 않은 변수는 제거하는 게 옳다.

주라후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폐하. 일이 이렇게 풀리니 사신단은 다시 거두는 게 좋지 않겠사옵니까?”

“하하하! 아니외다. 고구려와 연계하는 건 좋은 일인데 뭐 하러 그러겠소? 이참에 확실하게 쐐기를 박는 게 좋소.”

“하오나 폐하.”

“아아. 되었소. 외교는 잠시 잊고 북진을 더 많이 챙기시오.”

이러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주라후는 다른 방법을 취했다.

“하오면 차라리 더 서두르는 건 어떠하겠사옵니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고구려 외교의 결과가 엉망이면 다시 보류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지금 최대한 추진해야 했다.

“서두른다고 하셨소?”

“남쪽에 변고가 터졌다는 걸 안다면 돌궐과 고구려의 발걸음도 빨라질 것이옵니다.”

“음.”

“수의 몰락이 명약관화이니 주도적으로 공세를 취한 나라가 더 큰 과실을 취하는 게 옳지 않겠사옵니까?”

“그 또한 옳소. 하면, 최대한 일을 서두르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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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었다.

내가 고구려로 온 이후 이렇게 황당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신라가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돼지 500마리의 일로 온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보자마자 말했다.

“뭔가?”

“허. 참으로 무례하시오!”

“돌아가도 좋고.”

존대 듣고 싶으면 우리보다 잘 나가던가.

심지어

“우리는 알이 하나였는데 자네 나라는 여섯명이 알을 품었네. 필시 알도 6개가 분명해. 그러니 우리가 더 고귀하여 반말해도 되는 것일세.”

시작도 우리가 6배나 더 고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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