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제국의 시작
48화 제국의 시작
너무 바쁘다.
정말 바빴다.
정세의 부름에 화답하려면 언제라도 돌궐을 지원할 ‘물자’를 확보해야 한다. 이는 실로 길고도 험한 길이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한데, 올해는 이미 주요 작물의 추수가 진행됐기에 다른 부분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문진을 불렀는데 영농후계자답게 자신만만했다.
“뽕나무 재배는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내년이면 제법 성과가 나올 겁니다.”
돌궐이 비단을 좋아하니 우리도 뽕나무 사업에 더 열과 성을 다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년부터는 귀족의 신 경작지 조세도 비단으로 징수할 것이니 문제는 없었다. 나는 듬직한 이문진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자네라면 내 말을 이해할 것이네. 우리는 ‘제법’이 아니라 아주 큰 성과를 내야 하네.”
“소생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이 점을 중점적으로 진행할 겁니다.”
“더불어 이번 농한기에 귀족들이 치수 관개 사업을 잘 시행해야 한다는 걸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네. 자네가 세밀하게 챙기게. 전권을 줄 것이니 불평을 토로하거나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엄히 징계하게.”
“그래도 통제할 수 없으면 명단을 적어서 가져오겠습니다.”
“잘 적어오게. 명단의 이름은 살생부가 좋겠군.”
“참으로 좋은 이름입니다.”
살생부에 적히면 농법상 불이익을 주면 된다.
살생부라는 이름값이 아깝지 않은 졸렬한 보복을 해줄 생각이었다.
“한데, 대인. 우경을 대폭 확대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백번을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일일세. 한데, 아직도 소가 안 오고 있으니 내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네.”
“실은 소생이 여러 유생을 동원하여 세밀하게 알아봤습니다.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아버렸습니다.”
“함께 놀라고 싶군. 그러니 서둘러 내가 놀라도록 해주겠나?”
“몇 달 내로 동원할 수 있는 소가 5만여 마리에 육박합니다.”
“······”
나는 눈을 껌뻑이며 이문진을 계속 쳐다봤다.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내 귀로 ‘50,000’이라는 천문학적 수치가 꽂힐 리가 없다.
“자네가 나를 놀래 켜야 한다는 시대적 과업에 눈이 멀어 괜한 말을 한다고 여기고 싶네.”
“소생의 손목을 걸 수 있습니다.”
“······.”
나는 이문진의 손목을 쳐다본 뒤 시선을 돌렸다.
상추에 돼지고기를 올리는 연자유가 보였다.
아주 잘 먹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게도.
“자네 혹시 우리 대화 안 들리나?”
“다 듣고 있습니다. 기다려보십시오. 이것 좀 먹어야겠습니다.”
“당당하군.”
내가 잘못한 줄 알았다.
눈 깜짝할 새에 쌈하나를 해치운 연자유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이제 해명이라는 걸 해보겠나?”
“무슨 해명을 말합니까. 소 5만 마리를 이르십니까?”
“왜 안주나?”
“소가 당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전달은 했나?”
“물론입니다.”
“응?”
“며칠 전에 했습니다.”
“······.”
뻔뻔할 정도로 당당해서 내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자유는 다시 쌈을 싸며 말했다.
“일전에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돼지로 성과를 내야 소를 제대로 보태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돼지가 신라의 영토를 잘 약탈하는 걸 본 뒤 진행했습니다. 나는 약조를 지켰습니다.”
“더불어 우경을 확대해야 하는 정세적 요구도 있을 것이고.”
“물론입니다. 모두 정무적 판단입니다.”
이러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물어볼 건 물어봐야 했다.
“소가 왜 그리 많은가? 아니, 왜 사용하지 않은 것인가.”
“창칼이 많아도 병력이 부족하면 창고에 넣어두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소가 아무리 많아도 경작할 곳도 없었으며, 귀족에게 나누자니 첨예한 대립이 이어진 고구려에서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참으로 소가 살기 좋은 나라였군.”
“하하하. 분명 그러긴 했습니다. 한데, 이제는 아니겠지요.”
연자유는 기분 좋게 쌈을 입에 넣었다.
그냥 피식 웃었다.
그때 손님이 찾아왔다.
막리지 고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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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유는 기어이 밥을 다 먹고 물러났다.
강렬한 눈빛을 보내던 고정의를 아예 무시하면서 고기와 상추까지 싹 다 먹고 갔다. 두 사람의 신경전을 보면서 그냥 웃음만 나왔다.
정말 아무리 대단한 정치인들이라고 해도 싸우는 건 정말 유치했으니 말이다.
나는 여전히 웃음을 유지하며 가볍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 번 자리를 청할까 싶었소.”
“나 역시 기다리다가 먼저 오게 되었소.”
고정의는 내가 만난 고구려인 중에서 가장 입체적이었다. 호전적인 무장, 노회한 정치인에서 넉살 좋은 귀족의 모습까지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꺼내며 행동했다. 게다가 국내계 귀족의 수장이라고 하여 반드시 왕권을 견제할 것이라는 단순한 도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만날 때마다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첨예한 대립이 있던 고구려에서 일파의 수장까지 오른 인물이니 이런 모습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왕 막리지. 내가 요즘 수나라 걱정에 잠을 잘 수가 없소.”
“그 나라는 왜 걱정하시오?”
“나는 정말로 수나라가 잘됐으면 좋겠소.”
“무슨 말이오?”
“그래야만 우리가 가져올 게 많으니 하는 말이오. 해서, 근심이 많소.”
“하긴. 장차 우리만이 아니라 돌궐도 가야 하고, 다른 세력도 가야 하는데 수나라가 크게 번영해야 하지요. 이는 진실로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긴 하오. 나는 고 막리지의 고민을 전적으로 이해하오.”
웃기게도 나와 고정의는 은근히 합이 잘 맞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왕고덕도 잘 지냈다. 이는 고구려 내부의 권력 다툼을 타협으로 종식하려고 한 두 사람의 고민이 잘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두 사람은 분명한 경쟁자이기도 했다. 공세를 펼치고 방어하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까지나 타협은 내전을 일으키지는 않는 수준이었다.
“그래요. 듣자니 이를 제3의 길이라고 부른다고 들었소.”
“그렇소. 지금껏 없던 방향이기에 그렇게 부르는 게 적합하오.”
“어차피 왕 막리지가 주창한 것이니 뜻대로 부르시오. 그나저나 우리 고구려의 군사력이야 더 보탤 건 없소. 남은 건 결국, 돌궐을 비롯한 여러 세력을 지원해줄 능력을 갖추는 것이외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오.”
“물론이오. 한데, 못할 건 또 무엇이겠소?”
“그건 그렇소.”
반론은커녕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동의했다.
대화가 참 편했다.
“그러자면 신속을 청한 거란족과 고막해족 그리고 우리의 영향력에 있는 말갈족을 확실하게 포섭하는 게 순서요.”
“나는 고 막리지가 적절한 방책을 수립하였을 것으로 여기고 있소.”
“허.”
“아니시오?”
“나라고 하여 뾰족한 대책이 있겠소?”
고정의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말과 풍습이 다르오. 일국의 깃발로 묶어낸다는 건 어렵소. 이건 고구려가 아니라 누구라도 불가능하오.”
말처럼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사실 거란족과 고막해족이 우리에게 신속을 청하긴 했으나 언제라도 말을 갈아탈 수가 있었다. 작은 허점만 보이면 당장 오늘이라도 수나라로 달려갈 무리였다.
그래서 나도 생각이라는 걸 해봤다.
결론은 의외로 간단했다.
“고 막리지의 말이 옳소. 한데, 그러한 건 결국, 그들을 변방에 두기에 발생하는 일이오. 변방에 있으니 늘 힘의 균형을 살펴 좌고우면하고, 제대로 동화가 될 수 없는 것이오.”
“변방이라고 말하지만, 외부의 세력을 흡수하는 것이오. 그러니 자연스레 세력권이 형성된 것인데 이를 어찌할 수가 있소?”
원 역사에서 거란족은 요나라, 여진족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건국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이들이 강성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 시발점은 고유의 전통을 유지하며 세력권을 사수했기에 발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로 거란족과 여진족 모두 소멸했다.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었다는 게 최종 결론인데, 물리적으로는 ‘이주’로 시작한 일이다. 나는 이를 놓칠 수가 없었다.
“고 막리지. 냉정하게 봅시다. 수나라를 어찌하는 데 우리와 돌궐 정도면 충분하지 않소?”
“공의 말에 담긴 의도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겠으나 수나라를 상대하는 것만 본다면 거란과 고막해가 없어도 충분하오.”
“그래서 하는 말이오. 수나라는 우리와 돌궐이 잘 해결하지요. 안 그래도 수나라가 잘 안될까 봐 걱정하고 있는데 숟가락 올릴 식구를 줄이면 더 좋다고 생각하오.”
“도통 무슨 말씀이시오?”
“그들을 이주시키는 게 어떻소?”
“······농이 과하시오.”
“그들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면 되오. 아. 말과 풍습은 당연히 존중해줄 것이오.”
“들어나 보지요. 그래. 그들을 어디로 이주시킬 생각이시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지도로 손가락을 뻗었다.
가리키는 곳을 본 고정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한성······?”
“그렇소.”
“이곳을 내어준다는 것이오? 도성의 지척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평양계 귀족의 거점이오.”
“내가 평양계 귀족의 수장이오. 내주면 그만이오. 고구려가 웅비(雄飛)할 대계를 집행하는데 정파의 이권을 앞세운다면 엄히 다스려야지요.”
“······.”
“거. 국내성도 아닌데 왜 그러오?”
“말씀이 과하오. 국내성은 국내계의 거점이라는 걸 떠나서 고구려의 왕도였소.”
“그러니까 국내성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물었소.”
“······.”
고정의의 눈동자는 계속 흔들렸다.
목울대로 마른침까지 넘어가는 게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반발이 거셀 것이오. 아니, 애초에 그들을 여기까지 불러서 무엇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오?”
“때가 되면 우리는 남진하지 않겠소?”
“그렇소······.”
“한수를 넘겨주면 좋지 않겠소?”
“······.”
고정의는 계속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의 좌고우면이 한수라는 옥토를 차지한 뒤에는 어찌 되겠소? 설마 우리를 두고 신라를 바라보겠소? 고작 신라 따위를 바라보며 저울질할 가능성이 있소?”
“없소.”
“게다가 영주에서 우리와 수나라 사이에 있는 것보다는 한수에서 우리와 신라 사이에 있는 게 그들도 더 좋지 않겠소?”
“······.”
“그러니 약조하면 되오. 때가 되면 고구려의 3만 강병이 남하할 것이다. 너희도 손을 보태라. 그러면 한수를 내어줄 것이다. 어떻소?”
“성도 지어주고, 제도도 일러주되 고구려의 질서에 편입하는 조건이라. 아니, 한수에 터를 잡으면 그들은 고구려가 될 수밖에 없소. 그렇소. 이것이 옳소.”
“바로 그것이오.”
세세한 일은 차후 정책을 수립하면 될 일이다.
나와 고정의는 큰 틀을 결정하는 사람들이니까.
“박고와 동라는 돌궐의 세력권에 있소. 그런데 불만도 만만치 않더이다.”
“그렇소. 돌궐이 과한 요구를 한다고 들었소.”
“미리 교섭해두면 그들의 불만이 커질 때 데려와도 되오.”
“그들도 한수에 넣소?”
“물론이오. 한수가 영주보다는 좁으나 그들 모두를 수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소.”
고정의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그 역시 이 계획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돌궐과 수나라를 약탈할 때 거란과 고막해 그리고 박고와 동라가 한수를 굳건하게 지킨다면 천하에 두려울 게 없겠구려. 왕 막리지. 이는 참으로 좋은 계책이오.”
정확했다.
우리는 딱 한번 출정한다.
그 뒤로 남쪽 전선은 거란과 고막해가 담당한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수나라만 팰 수 있게 된다.
“하하하! 나는 고 막리지가 동의할 줄 알았소. 그리고 보시오. 그들도 천성이 어디 가지 않을 것이니 때가 되면 부지런하게 신라를 약탈할 것이외다. 좋지 않소?”
“벌써 설레고 있소. 이는 참으로 낭만적이외다.”
“하하하! 그렇소. 낭만 그 자체요.”
이것이야말로 제3의 길이 아니겠는가.
고정의도 미친 듯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갑자기 하늘에서 수만 명의 거란족과 고막해족이 나타난 것이니 신라 놈들이 기겁할 것이외다. 생각만 해도 흐뭇하오.”
“바로 그것이오. 물론, 모든 요구를 우리가 수용해야 하기에 쉽지는 않을 것이오. 하지만, 나와 귀공이 손을 잡으면 능히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어떻소?”
“해봅시다.”
고정의는 흔쾌히 동의하면서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안 그래도 수나라가 잘 안될까 봐 걱정했는데 이러면 군식구도 줄어드는 것이니 너무나도 좋소.”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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