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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47화 (47/199)

47화 전 세계의 유목민족이여, 단결하라

47화 전 세계의 유목민족이여, 단결하라

전통의 해석을 두고 펼쳐진 수정주의 논쟁이 끝난 뒤 다 물러났으나 나와 고식은 남았다. 그리고 고양성은 어느 때보다 진중한 표정이었다.

“태대사자.”

“예. 폐하.”

“짧고 정확하게 정리해야 할 것이오.”

고구려에서 자료를 가장 잘 정리하는 사람은 바로 고식이었다.

고구려에서 정세 분석을 가장 탁월하게 하는 이는 고양성이다.

지금 최고와 최고가 만나서 천하의 정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현재 돌궐은 대카간인 섭도의 정통성이 상당히 부실한 상태이옵니다. 그는 원래······.”

“현상만 이르시오. 과거의 일은 되었소.”

“황공하옵니다. 섭도는 흔들리는 정통성을 다잡고자 여러 명의 소카간을 둔 상태이옵니다. 물론, 돌궐의 오랜 전통이긴 하오나 이번에는 다소 의미심장한 부분이 많사옵니다.”

“이르시오.”

“그러니까······.”

고식의 정리에 의하면 지금 돌궐의 아사나 종실은 굉장히 복잡한 구도였다.

1. 3대 무칸카간이 죽었을 때 아들(대라편)이 어려서 동생이었던 타스파르 카간이 즉위했다.

2. 4대 타스파르 카간은 죽을 때 조카(대라편)을 후계로 지목했다.

3. 그러나 대라편의 모계가 천하다는 이유로 반대가 심했다.

4. 결과, 타스파르 카간의 아들인 암라가 대카간에 즉위했다.

5. 그러자 대라편이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결과 암라는 섭도에게 대카간을 넘겼다.

후계 구도부터 복잡하게 꼬인 상태였다.

잠재적 경쟁자가 득실한데, 1순위도 아니었던 대카간 아사나 섭도의 권위가 제대로 세워지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도 나름대로 방책을 사용하기는 했다.

“경쟁자였던 암라와 대라편을 각각 북면카간과 아파가한에 봉했사옵니다.”

특히 북면카간은 초원의 중앙부를 통치하지만 차기 대권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돌궐의 차기 대카간은 북중국의 동쪽을 통치하는 동면카간인데 아사나 섭도는 이 자리에 동생인 처하루를 봉하였다.

나름대로 소카간을 두어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고, 자신의 친위세력을 키워낸 인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기에 아사나 섭도는 살얼음판을 걷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 원정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근심과 걱정이 많을 상황일 것이다.

돌궐 종실에 대한 브리핑이 끝나자 고양성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대카간이 대대적인 남정을 시도하는 건 대외적으로는 돌궐이 주도하는 질서를 유지하고, 대내적으로는 불안정한 권위를 확립하기 위함이외다.”

“그러하옵니다. 수나라로부터 얻어낼 세폐가 곧 돌궐의 질서이자 대카간의 권위로 직결될 것이니 말이옵니다.”

“반대로 원정에서 실패하면 돌궐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오. 그러나 40만 대군을 동원한 돌궐의 패배를 상상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오.”

“하오나 신은 내분의 씨앗을 보았사옵니다.”

자료를 총괄한 고식으로서는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고양성은 고개를 저었다.

“돌궐 내부가 복잡하긴 하지만 내분이 발생할 정도는 아니외다.

“폐하. 신이 주목한 건 서역 일대를 방비하는 서면가한인 달두가한이옵니다.”

이 시절 돌궐의 세력권은 실로 광범위했다.

동쪽으로는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했고, 서쪽으로는 중동 지역까지 이르렀으니 가히 세계제국이라고 할만했다.

이 중 서역을 책임지는 서면가한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대카간이 가장 견제하는 세력도 서면가한이옵니다. 그러니 만일, 내분이 발생한다면 시발점은 서면가한이 될 것이옵니다.”

“태대사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소. 한데, 돌궐 종실의 문제가 대적과의 일전을 앞두고 분열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외다. 내전을 일으켜 이길 가능성과 힘을 합쳐 수나라를 이길 가능성, 두 가지의 경우를 비교해야 할 것인데 후자가 더 크오. 확보할 수 있는 이권도 그러하오.”

사실 고구려의 입장만 고려할 때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돌궐이 수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 이후 북중국이 다시 분열된다면 고구려는 예정된 태평성대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하지만, 외교는 늘 최악을 대비해야 하는 법이기에 오늘의 논의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지금껏 고야성의 정세 판단은 틀린 바가 없었기에

“폐하께서 그리 판단하신다면 그러한 것이옵니다.”

고식은 수긍하며 물러섰다.

“그런데······.”

고양성의 목소리는 다소 낮게 깔렸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펼쳐진 지도를 유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돌궐이 장성을 넘었을 때 만일, 우리가 배후를 타격한다면 그들은 수나라를 이길 수 없소. 즉, 내부가 아니라 외부라면 사정이 달라진다는 것이외다.”

“외부라고 하셨사옵니까.”

“그렇소. 태대사자. 서면가한의 세력은 서역에 이르오. 어떻소? 그곳에 서면가한과 적대하는 세력이 없소? 첨예하게 대립하는 세력 말이외다.”

“있사옵니다.”

“어디요?”

“파사국(사산조 페르시아)이옵니다.”

극악할 정도로 일 처리가 느린 건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정확하고 완벽한 결과를 원하는 고식의 성격이 반영된 것이었다. 지금 보듯 그의 자료는 실로 방대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숙지한 고식이 자잘한 내용은 모두 생략하고 고양성이 필요한 정보만 정확하게 언급했다.

더불어 이 모든 건

“돌궐의 원정이 이뤄질 때 파사국이 배후를 공격하면 서면가한이 퇴각할 수도 있소.”

고양성을 만나 역사가 되고 있었다.

“하오시면 폐하께서는 서면가한이 대카간의 거역할 수 있다고 판단하시옵니까?”

“이번 원정이 성공한다면 대카간의 위력이 모든 돌궐을 제압하겠지만 아직은 아니오. 지금 돌궐은 완벽한 분열도, 철저한 단합도 아니외다. 서면가한은 돌궐의 대의보다는 제 세력의 안위가 더 중요할 수밖에 없소.”

“만일, 서면가한이 수나라 정벌 중 퇴각한다면······.”

“돌궐은 전면 철수하게 될 것이외다.”

“······.”

고양성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불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입술을 잘게 깨물며 지도를 세세하게 살폈다.

그의 손가락이 돌궐의 영역을 천천히 그리고 복잡하게 오갔다.

“돌궐이 물러나도 되오. 그들이 스친 곳은 큰 피해를 볼 것이니 말이외다.”

원래 우리는 승자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누가 이기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성과를 내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물러날 때 물러나더라도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야 하오. 하지만, 서면가한의 이탈로 물러나는 건 곤란하오.”

패배에도 경우의 수가 있었다.

“서면가한이 제 세력의 이권을 돌궐의 국세보다 중요시한다는 걸 수나라가 파악한다면 곧장 이간책을 펼칠 것이오.”

“그 수는 간단하고 명료할 것이옵니다. 파사국의 공세에 직면한 서면가한으로서는 수나라가 막대한 물자를 지원하면 대카간을 버릴 것이옵니다.”

“돌궐이 수나라가 주도하는 분열의 시대를 맞이한다······? 이건 곤란하오. 막아야 하오.”

“폐하. 혹시 전면적인 참전을 고려하시옵니까?”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말아야 하오. 만일, 수가 돌궐을 좌지우지한다면 우리는 가장 끔찍한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니 말이오.”

분석대로라면 돌궐은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진 또 하나의 결론은 고구려가 대대적인 참전을 하여 돌궐의 승리를 견인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논의가 여기까지 이르자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물었다.

“참전은 불가하옵니다.”

고양성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쉬지 않고 내 생각을 말했다.

“만일 참전하였을 때 승리의 과실은 어찌 나누게 되는 것이옵니까.”

이는 전쟁의 본질이었다.

고구려, 돌궐 연합군은 전쟁의 과실을 양분할 수 있을까?

애초 돌궐의 동맹이었던 고보령은 이 문제를 가볍게 해결할 수 있었다.

돌궐과 고보령은 공동의 적을 상대하지만, 원하는 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고보령은 영토 그리고 돌궐은 세폐였다.

결과, 고보령은 북제를 다시 일으키고자 한 것이며, 돌궐은 북중국의 분열을 도모하려고 한 것이다.

두 세력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고보령과 너무나도 달랐다.

만일, 참전하여 승리할지라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모호했다.

“폐하. 고구려가 장성 이남의 영토를 도모할 수 있사옵니까?”

전쟁의 승리가 곧 영토의 확장으로 귀결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어차피 우리는 감당할 수도 없지 않사옵니까.”

지금 가지고 있는 땅도 소화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이런 원론적인 문제를 벗어나서 장성 이남의 영토는 고구려가 군림하는 세계와는 다른 차원이었다. 정벌이 아닌 정복하려면 온 국력을 투입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럴 여력이 있는가.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없다고.

“그 외의 것을 얻고자 한다면 오히려 돌궐과 분쟁이 발생할 것이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수나라를 이롭게 할 뿐이옵니다. 하면,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참전하는 것이옵니까.”

되새겨본다.

우리는 아니 나는 무엇을 막고자 여기까지 왔던가.

단지 ‘수나라’가 아니다.

통일 중국의 출현 자체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래. 그러니 백 보 양보하여 대승적으로 참전할 수 있다.

오직, 통일 중국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 불과하다.

당대를 살아가는 고구려인들은 나와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이 시절 고구려인들에게 수나라는 백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을 공격하고야 마는 대적이 아니다. 북위 이래 존재했던 무수한 나라 중 하나에 불과했다.

10만의 대군을 출병하여 싸웠건만 단지 수나라의 몰락에만 만족하겠는가.

어불성설이다.

그랬다가는 고구려가 흔들린다.

거센 반전 여론이 일어날 수도 있고, 왕권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송두리째 뽑힐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이르러서 나는 내가 무슨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다시 깨달았다.

돌궐은 실패했다.

이는 원 역사다.

그러나 역사가 뒤틀리기 시작한 지금은 어떠할까?

더 처참하게 실패할 것인가, 아니면 성공할 것인가?

이번 돌궐의 원정에 우리의 운명이 걸려 있다.

이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이었다.

왜 우리의 운명을 저들의 전쟁에 맡겨야 하는가.

우리의 운명은

“폐하의 혜안이 현실로 구현되었을 때 처참하게 몰락할 돌궐에 대한 지원.”

오직 우리가 개척하는 것이다.

“그 지원, 우리가 할 수는 없는 것이옵니까?”

“지금 무엇이라고 하였소?”

“흔들리는 돌궐을 우리가 지원할 수 있사옵니다. 그들이 수나라가 아니라 고구려에 의존하게 할 수 있사옵니다.”

“······.”

“신을 믿으시옵소서. 신은 반드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사옵니다.”

우리의 농업은 기어이 이를 수행해낼 수 있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지도를 가리켰다.

“말갈.”

옮겼다.

“거란 그리고 고막해족.”

다시 옮겼다.

“토욕혼.”

또 옮겼다.

“박고 그리고 동라.”

다시 옮겨졌다.

“돌궐까지.”

일찍이 인류사에 길이 남을 대학자가 있었다.

그가 남긴 불후의 명언이 있었다.

“천하의 유목 세력이 고구려를 중심으로 공고히 뭉쳐야 하옵니다.”

“······.”

“그리하여 우리가 잃을 건 만리장성이며, 얻을 건 끝없는 서토의 물자이옵니다.”

다시 말했다.

“폐하. 약탈의 종주국은 바로 우리 고구려이옵니다.”

“······.”

“그러한데 이 질서를 우리가 가질 수는 없는 것이옵니까?”

다시 물었다.

“정녕 그러하옵니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구려의 태왕으로서 묻겠소. 모두 답하시오. 정녕 그러하오?”

위엄이 넘치는 고양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 즉시

“어찌 그러하겠사옵니까.”

문이 열리며 고정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부복하며 외쳤다.

“폐하. 참으로 탐이 나는 질서이옵니다.”

그를 시작으로 문밖에서 중대 결정을 기다리던 십수 명의 재상들이 일제히 부복하며 외쳤다.

“폐하께서는 탐하시옵소서.”

“신들이 기어이 가져오겠사옵니다.”

그리고

“윤허하오.”

고양성이 화답했다.

“그 질서, 내게 가져오시오.”

제3의 길이 선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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