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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46화 (46/199)

46화 시작되는 지각변동

46화 시작되는 지각변동

백 가지 변수가 작용하는 게 외교라는 것이었으나 양견은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고구려가 무도한 행위를 하는 건 사실이오. 감히 사신을 보내지도 않았으며, 소화조차 할 수 없는 영주를 억지로 도모했으니 말이오. 그러나 그들이 본국을 향해서 불순함을 품었다고는 할 수 없소.”

한 마디, 한 마디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

반면, 고경은 특별한 대꾸를 하지 않고 묵묵하게 듣고만 있었다.

“나는 고구려와 돌궐의 국세를 단순히 비교하는 것이 아니오. 고구려와 돌궐이 원하는 건 다르다는 것이외다.”

돌궐은 막대한 세폐를 원한다.

하지만 고구려는 늘 그렇듯 제 영역의 안정을 원했다.

그래서 돌궐은 대적이지만, 고구려는 아니었다.

“게다가 고구려의 후방에는 신라가 존재하는데 어찌 경거망동할 수 있겠소이까.”

“그런데도 기어이 영주를 도모했다는 건······허. 신라와의 일전을 대비하기 위한 노림수일 수도 있사옵니다.”

“바로 그것이외다. 고구려는 신라를 어찌해야 하기에 서쪽 변경의 안정을 원한 것이오.”

양견은 장계를 내밀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열 번을 더 살펴봤소. 하지만, 이번 일에 고구려의 구체적인 의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소. 애초 고보령을 제거한 것도 고막해족이었소. 거란족은 신의라고는 찾을 수 없는 무리이기에 사정을 보고 일시적으로 신속을 청하였을 뿐이외다. 이를 토대로 볼 때 고구려는 영주를 제 영역을 취할 생각이 없었소. 즉,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이오. 허둥지둥하고 있다 이 말이오.”

“늘 그렇듯 동방의 패권을 공인해주길 청하며 영주를 반환할 것으로 보시옵니까?”

“그러하오. 과거 고구려는 북위가 혼란스러울 때 영주로 진군하여 무려성을 도모했소. 하지만, 북제가 압박하자 유민 5천 호를 쇄환한 역사가 있소. 이게 그들의 역사요.”

세상이 아무리 변하여도 수백 년의 역사가 구축한 일국의 기조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더욱이 작금의 고구려는 국세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이러하니 급작스러운 서진 정책을 펼칠 수는 없다. 일국의 대외정책은 이러한 것이다.

“돌궐은 군사력을 앞세워 우리의 고혈을 짜내지만, 고구려는 조공을 바치며 허울뿐인 동방의 패권을 얻고자 하는 것이오. 돌궐과 고구려의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외다.”

모든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고구려가 영주를 도모한 일은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는 영주를 소화할 역량이 없다. 아니, 애초 의지를 확인할 수도 없었다.

양견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가장 중요한 사안을 언급했다.

“돌궐은 머지않아 대군을 일으킬 것이외다. 세폐를 중단했을 때 예고된 일이었소.”

돌궐에 세폐를 바치면 북방의 안정을 이룰 수 있으나, 수량이 너무나도 막대했다. 국고가 흔들리는 수준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과거 북제와 북주가 공존하던 시절에는 돌궐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감당하기 어렵고, 경쟁 세력이 눈앞에 있기에 양측 모두 세폐를 바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게다가

“세폐를 바치는 건 결국, 국세를 갉아 먹는 일이오. 그러는 순간 진을 도모할 수도 없고, 돌궐과 겨룰 힘을 키울 수도 없으니 말이외다.”

너무나도 분명한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그래서 양견은 과감하게 단절을 선언한 것이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감내해야 했다.

그래야만 진정한 ‘천자’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돌궐의 남하는 기약 없이 미뤄질 것이외다. 영주를 도모한 고구려와 겨뤄야 하는 정세가 펼쳐졌으니 말이외다.”

고구려가 너무나도 기특하다.

“어떻소? 돌궐이 고구려를 쉽사리 제압할 수 있겠소?”

“폐하. 고구려가 소국이지만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이옵니다. 아무리 돌궐이라고 할지라도 가볍게 볼 수는 없사옵니다.”

“승패를 떠나서 고구려와 혈전을 치르게 된다면 장성을 넘을 여력이 남을 수는 없소.”

바로 이래서 양견은 너무 기분이 좋았다.

하늘이 움찔할 만큼 크게 웃으며 즐거워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면 사신의 파견은 조금 더 미룰 것 그랬소. 크게 치하해야 하니 말이외다.”

만일, 전략적인 측면으로 영주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황제의 조서를 내렸다면 고구려는 크게 감읍했을 것이다. 물론, 천하를 평정한 뒤에 다시 가져오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양견은 이 부분이 다소 아쉬웠다.

“그러나 고구려구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긴 했사옵니다.”

“하하하. 그 또한 고구려가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외다. 그들도 지금 얼떨결에 영주를 도모하여 현실에 취한 상태일 것이니 깨고 싶지 않지 않겠소? 그러니 우리의 눈치를 살필 것이외다.”

자연스레 북방의 근심이 해결되고 있었다.

남은 건 오직 남방이었다.

늘 그렇듯 양견은 자신감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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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의 대카간 섭도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모든 준비가 순차적으로 잘 이뤄졌는데 결정적인 순간, 가장 큰 부분에서 일이 꼬였다. 아니, 꼬인 게 아니라 지독하게 뒤틀렸다.

“휴······.”

“고구려가 손을 잡지 않을까 우려되십니까.”

친족, 지근찰의 말에 섭도는 낮게 한숨을 쉬더니 쓰게 웃었다.

“이번 원정에 우리 돌궐의 운명이 걸려 있네. 한데, 한 축을 담당하기로 한 고보령은 죽었고, 적대적인 관계인 고구려가 영주를 확보하지 않았는가. 만일, 고구려가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남하는 시작도 하기 어려울 것일세.”

“그렇습니다. 고구려와 일전을 치르면 장성을 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천년의 거목일세. 세월의 값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영토가 넓지 않고, 백성의 수는 적다.

그런데 고구려의 군사는 비정상적으로 많았고, 위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미 혈전을 치른 역사가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늘 근심과 걱정이 많았던 섭도는 한숨만 계속 터져 나왔다.

“이계찰이 잘 해낼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껏 고구려는 늘 저들과 손을 잡았네. 이번이라고 하여 다르겠는가.”

“······.”

“내가 속이 너무 답답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네.”

“······.”

“우리 40만 대군과 토욕혼 그리고 남쪽의 진나라까지 힘을 보태서 수나라를 도모하기로 한 대계가 이토록 허무하게 끝을 보게 될까 두렵다네.”

“······.”

끝을 보이지 않는 근심과 걱정이었다.

지근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펼쳐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대안을 수립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구려가 영주를 취했다는 소식을 접한 소카간들이 술렁이는 걸 보지 못했나? 그들은 고구려와 대치하고자 수만의 병력을 내어놓을 생각이 전혀 없네.”

“······잠시 미루는 것도 대안입니다. 어차피 소카간들은 당장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언제라도 나를 노릴 수 있는 이들일세. 이번이 아니면 어찌 될지 가늠할 수 없어. 반드시 정벌은 감행되어 성공해야 해. 그래야만 내부의 분란을 일소할 수 있네. 게다가 정벌이 성공해야만 종래 이어진 돌궐 중심의 질서를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인가. 그런데 고구려가 난입하면서 내부의 분란이 커지고 있다는 말일세.”

“······.”

“대안은 없네. 무조건 고구려를 설득해야 해.”

“이계찰이 잘 해낼 것입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늘······.”

‘또’ 이어진 근심과 걱정이었다.

지근찰의 볼이 미세하게 씰룩였다.

‘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지금은 대고구려 외교의 결과를 기다리며 남정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만일, 고구려가 동맹을 거절하면 어찌할 건지도 결정해야 할 때였다.

그런데 모든 게 중단됐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지근찰은 목울대로 무언가 치솟았으나 겨우 참았다.

그래야만 했다.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애써 침착하게 정상적인 말을 꺼냈다.

“만일, 성사만 한다면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오랜 세월 적대하던 고구려가 대카간의 손을 잡은 것이니 소카간들은 더 머리를 조아릴 것입니다.”

말 그대로 최고의 경우였다.

외교적으로 틈을 보이지 않았던 고구려와 동맹을 체결한다면 소카간들은 경거망동할 수 없다.

“그렇지. 그래서 이계찰이 성공해야 하네. 이것 외에는 대안이 없어.”

“그는 해낼 겁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늘······.”

지근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용맹하며 명쾌한 소카간들이 떠올랐다.

그냥 그들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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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후의 보고를 들은 진나라 황제 진욱은 크게 탄식했다.

“고구려가 영주를 도모했다고 하였소?”

“그러하옵니다.”

“······.”

병색인 완연한 그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한숨은 너무나도 깊었다.

“고구려가 고보령을 제거하고 영주를 도모했다는 건 수나라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분명하오.”

“폐하.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큰 건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정확한 건 아니옵니다. 이를 파악해야 하옵니다.”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는 주라후의 말에도 진욱은 여전히 탄식만 했다.

“하아······돌궐과 연계하여 수나라를 남북으로 압박하기로 한 맹약을 시행하지도 않았거늘 어찌 이런 일이.”

북진을 위한 준비가 마무리 단계였다.

빠르면 몇 달 내로 대군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개입하여 북방의 변수로 작용했다.

“돌궐이 남하하지 않으면 우리는 북상할 수가 없소. 작은 승리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데 어찌 경거망동할 수가 있겠소?”

나오는 한탄과 한숨밖에 없었다.

진욱은 가슴이 너무나도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냥 이대로 쉬고 싶었다.

“하늘은 기어이 수나라를 도와주시는 것인가.”

홀로 시작한 한탄은 절망과 하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주라후는 고개를 저으며 강건하게 말을 꺼냈다.

“폐하. 어심을 굳건히 하셔야 하옵니다. 수나라 황제는 야심이 큰 인물이옵니다. 언제라도 남정을 도모할 수 있사옵니다. 지켜만 본다면 화가 미칠 것이옵니다.”

“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이러는 것이외다.”

“우선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옵니다.”

“더 파악할 상황이란 대체 무엇이오?”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는 것은 어떠하겠사옵니까?”

지금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했으나 진욱은 쉽사리 판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머릿속이 어지러웠고, 아팠다.

체한 듯 속이 너무 답답했다.

아니, 그냥 무기력해졌다.

“그러한들 변화가 있겠소? 짐은 천하의 정세가 너무나도 두렵소.”

“폐하. 잊으셨사옵니까. 고구려의 왕은 전통적인 외교의 틀에서 벗어났사옵니다. 영주로 진군한 일을 단지 돌궐의 견제라고 단정할 수는 없사옵니다.”

“음.”

“우리가 적극적으로 다가간다면 꼭 동맹은 아닐지라도 중립은 지킬지도 모르옵니다.”

“휴······.”

희망적인 관측이었으나 진욱은 그냥 머리가 지끈거렸다.

급기야 속이 울렁거렸다.

“폐하······.”

패기가 넘쳤던 황제의 과거 모습을 떠올린 주라후는 속이 따가웠다.

어찌하다가 기력이 이토록 떨어졌는지······참으로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렀다.

“폐하. 아직 결정 난 건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신이 대군을 키워내고, 고구려를 설득할 수만 있다면 다시 기회가 올 것이옵니다.”

“······알겠소. 그리하지요. 이만 물러가시오. 잠시 쉬어야겠소.”

진욱은 그저 쉬고 싶었다.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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