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사상투쟁
45화 사상투쟁
몇 번을 곱씹어도 위대했다.
진심 어린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대업이었다.
돼지 500마리의 힘이란 이토록 대단한 것이었다.
대체 누가 만물의 영장을 인간이라고 하였던가.
인간이 가지 못한 전인미답의 길을 걷는 돼지의 위대한 발걸음을 목도한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돼지의 남진은 실로 중요한 정치, 외교, 군사적 업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와 신라는 가뜩이나 험악한 관계였다. 당장 피가 튀는 전쟁은 소강상태라고 하지만 언제라도 대군을 일으켜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적대국이 아닌가.
이러할 때 북쪽에서 ‘고작’ 돼지 몇 마리 내려가서 ‘농작물’ 좀 먹었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서 따지고 할 사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속내는 복잡하겠지만 어색하게 웃으면서 넘어가야 할 것이다.
신라인들이 생각이라는 걸 하면 그냥 넘어갈 것이라는 말이다.
그나저나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까 수만 마리의 돼지를 꾸려서 총력전을 펼치는 것보다 소규모 게릴라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 상황도 조금 애매하긴 했다.
초안은 2~3만 마리의 돼지를 출병하는 것이었으나 의도치 않게 돼지고기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분뇨 시비법도 점차 확산하는 상황이었기에 돼지를 함부로 ‘낭비’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즉, 심도 있는 정치 외교 군사적 논의를 거쳐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대업은 잠시 보류할 수밖에 없는 심대한 내부적 상황이라고 할까?
어쨌거나 여기까지는 딱 기분이 좋았다.
강이식이 내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정말 너무 답답했다.
어찌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강이식에게 화를 냈다.
“자네 이게 대체 무슨 경우인가?”
“······송구합니다. 작전을 수행하는 무장으로서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누가 변명하라고 했나? 사실관계는 정확하게 말하라는 걸세! 답답하군. 정말.”
내가 먼 나라로 가서 고생하고 온 강이식을 타박하는 건 아주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군선 100여 척을 이끌고 가서 잡아 온 사람이 고작 200명에 불과하네. 내가 이를 어찌 생각해야 하나?”
무려 100여 척의 군선을 이끌고 갔는데 성과가 너무 겸손했다.
대체 누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였는가.
돼지보다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대인. 구차한 변명처럼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무슨 신라인이 패수에서 낚시하는 소리를 하고 있나? 서토에 넘치는 게 사람인데 없다니?”
“소장이 일전에 천여 명을 잡아 올 수 있었던 건 무주공산을 타격하여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대충 한 마디로 축약하면 내륙으로 도주하는 데 추격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약탈하러 갔다가 수나라 군대와 일전을 치를 수는 없었을 것이니까.
“게다가 사실 포로 천 명을 끌고 오는 것도 천운이긴 합니다.”
만 단위 병력이 마음 독하게 먹고 약탈해도 천 명을 포로로 끌고 오는 건 사례가 잘 없다. 그러나 이미 나는 첫 삽으로 천 명을 올려봤는지라 지금의 성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원래 사람의 욕심이라는 건 끝이 없는 법이니까.
다 이해하겠는데 그냥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그냥 한숨만 쉬지 않고 새어 나왔다.
나의 불편함을 느꼈을까?
강이식이 평소와는 달리 눈치를 슬쩍 보며 말을 꺼냈다.
“한데, 대인.”
“되었네.”
“그게 아니라 소장이 몇 가지 챙겨온 게 있습니다.”
“병사들에게 나누게. 다 같이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재물은 그리하면 될 일인데, 서토에서 작물을 가져왔습니다. 대인께서 농자천하지대본을 이르셨으니 마음에 드실 것 같습니다.”
“어째서 고구려인들은 가장 중요한 말을 마지막에 하는 것인가! 나는 자네가 당장 꺼낼 것이라고 믿고 있네.”
강이식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고구려에 없는 작물이라는 의미였다.
아니,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이 시절 중국은 고구려보다 작물의 종류가 몇 배나 많다는 걸 말이다.
대체 어떤 작물일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니 어느새 병사들이 양손 가득 잔뜩 들고 들어왔다. 대충 봐도 상당히 많은 종류였다.
서둘러 하나씩 확인했다.
그리고
“허······.”
나도 모르게 노여움이 새어 나왔다.
“수나라라는 참으로 이기적인 족속이 아닐 수 없네.”
“그렇습니까?”
“보시게. 이 귀한 작물들을 자기들만 먹었다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아니, 자기들 입만 입이고, 우리 입은 아가리란 말인가? 어찌 먹는 거로 이럴 수가 있는가. 참으로 이기적인 무리가 아닐 수 없네.”
“실은 소장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싹 긁어왔습니다.”
“참으로 잘했네.”
“특히 택산(마늘)은 우리나라에 없는 건 아니지만 귀한 작물이 아닙니까. 이걸 쌓아 놓고 먹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십수 개의 작물 중 특히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마늘과 아욱이었다.
제민요술에 의하면 이 친구들은 지금쯤 파종할 수 있다.
추수가 끝났다고 봄까지 편히 놀고먹을 밭을 이용해서 추가적인 수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주식이 아니라 채소에 불과하지만, 이 모든 건 풍요로움으로 귀결될 것이니 기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른 작물은 잘 보관해두고 혹시라도 상하면 다시 가져오라고 하면 된다.
좋아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는데, 비보(悲報)가 전해졌다.
발신지는 영주, 발신자는 온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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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마음을 이끌고 안학궁에 당도했다.
고양성과 귀족들의 표정도 무거웠다.
이미 한숨이 바닥을 뚫어버린 상태였다.
“폐하. 신은 너무나도 참담하여 눈물이 흐르옵니다.”
막리지 고정의가 정말로 한탄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벌써 약탈 종말점이 도래하다니······하늘이 우리 고구려에 어찌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단 말이옵니까.”
영주 전선에서도 약탈이 ‘엄청난’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결국, 강이식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폐하. 신이 다 분석할 수 있사옵니다. 기다려주시옵소서.”
고식이 재빠르게 나섰다.
고구려에서 그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에 당연히 믿음직스러웠다. 동시에 극악한 속도도 다 알아서 두려웠다. 아마 이번 사안의 분석이 끝나면 고구려에는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다.
서둘러 나서려고 할 때
“되었네.”
고정의가 선수를 쳤다.
“주된 약탈 지역인 북평군은 2,300호 정도이옵니다. 바다와 육지에서 여러 차례 약탈을 감행했다면 지금은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것이옵니다.”
인구가 만 명 정도인데 2천여 명 전후가 끌려갔으니 무인지대라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그물을 던져서 마구잡이로 잡아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낚싯대로 한 명씩, 한 명씩 잡아 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구려 천년의 역사가 장대하게 뻗어나가야 하거늘 수나라는 왜 이리도 협조하지 않는지 모르겠사옵니다. 참으로 이기적인 무리가 아닐 수 없사옵니다.”
고정의의 한탄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이대로는 곤란하옵니다.”
“마땅한 방책이 있소?”
“수나라가 협조하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대가를 치러야지요. 신은 전통이 집행된다고 들었을 때 응당 기주 전역을 대상으로 한다고 여겼사옵니다. 북평군은 조기에 약탈 종말점이 도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사옵니다.”
“하면, 북평군을 포위하고 기주로 남하하자는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어찌 어려움이 있겠사옵니까?”
참고로 고정의는 국내계였다.
그런데 정말 호전적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은 전쟁을 반기지 않사옵니다. 하오나, 이는 전쟁이 아니옵니다. 고구려의 역사를 올곧게 세우는 것이니 어찌 전쟁과 비교할 수 있겠사옵니까. 만일, 폐하께서 윤허하여 주신다면 신이 온 힘을 다하여 약탈 종말점을 걷어내겠사옵니다.”
전쟁은 싫지만, 약탈은 좋아하는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국내계라서 그랬다.
그리고
“하하하! 고 막리지가 참으로 바른말을 했사옵니다. 폐하. 이참에 신이 선봉에 서겠사옵니다.”
고흘이 나섰다.
규모와 별개로 고흘이 병력 이끌고 나서면 약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이름 두 글자가 곧 고구려의 정규군과 직결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 시절 고구려에서 고흘의 위상은 고려 말 최영보다 윗줄이었다. 중국도 씹어 먹었던 당대 최고의 군사력을 가진 돌궐을 패퇴시키는 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양성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래서 이제 내가 나서야 할 때라는 걸 직감했다.
“두 분의 의견은 의견으로만 남겨야지요.”
“아니, 자네는 어째서 몸을 사리나? 전통을 부활시킨 건 자네일세.”
“장군. 돌궐이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기로 했습니다. 한데, 우리가 그걸 못 기다리고 굳이 수나라 병력과 기주에서 대치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이길 수 있네. 돌궐도 정리해주지.”
은근슬쩍 전쟁으로 판을 키우는 고흘이었다.
고정의는 이미 분위기를 파악하고 발을 뺐다.
“허. 장군은 지금 전통의 가치를 심대하게 훼손하는 수정주의를 주장하는 겁니다.”
“수, 수정주의?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대체 언제 우리의 선대가 적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전통을 집행했습니까? 언제나 적의 빈틈을 노리고 유유히 빠져나왔습니다. 우리는 이를 낭만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데, 장군의 방책에 대체 어떤 낭만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전통이라고 주장한다면 결국 수정주의라는 겁니다.”
“······.”
“고구려 최고의 무장이라는 분이 낭만도 모르는 수정주의자라니.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듣도 보도 못한 수정주의자로 낙인찍어버리자 고흘은 눈만 껌뻑였다.
상당한 내상을 입은 것 같았다.
정리는 이만하면 됐다.
“폐하. 차라리 잘된 일이옵니다. 신이 되새겨보니 영주를 도모하고 거란족과 고막해족이 신속을 청하였사옵니다. 그러하니 당분간만이라도 모든 힘을 동원하여 내실을 다지는 게 옳사옵니다.”
“염두에 둔 게 있소?”
“약탈이 전통이라면, 농자천하지대본은 전통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기조이옵니다. 전통을 수행하는 우리 귀족들의 사병은 더 위력적인 내일을 대비하여 관개 수로를 확보하는 게 옳지 않겠사옵니까? 대대적인 저수지 축조가 아니라 귀족이 자신의 경작지 근처에 사병을 동원하여 시행한다면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자유가 죽일 듯이 노려봤다.
왜냐면 귀족이 직접 나서는 순간 중앙에서 따로 인력을 동원하여 실태 조사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즉, 연자유는 헛고생한 꼴이니 열이 받는 건 당연했다.
됐다. 그냥 나중에 밥 한 끼 사주면 된다.
옹졸한 성격이 걱정됐지만 어쩌겠는가.
“아니······.”
“막리지······.”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사병을 동원하여 역사를 일으키는 게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확실하게 말했다.
“내실이 튼튼하지 않을 때 무리한 대외 행보는 파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소. 혹시 귀공들은 약탈 자체에 매료되어 달린 것이오? 그 또한 농사를 잘해보자고 시작했소.”
틈이 보였을까?
수정주의자로 낙인찍힌 고흘이 재빨리 나섰다.
“자네 무슨 말을 그리하나? 전통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거늘. 그것이야말로 수정주의일세.”
“대체 언제 우리의 선대께서 약탈 자체를 즐기셨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약탈이라는 행위가 전통이 될 수가 없지요. 그 모든 건 결국 고구려의 풍요로움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기에 약탈이 전통으로 자리 잡으며 목적이 되었고, 본질을 가지게 된 겁니다.”
“아니······.”
“장군께서는 어찌 전통의 가치를 계속 수정하십니까?”
고흘의 얼굴은 빨개졌다.
나는 고양성에게 쐐기를 박기로 했다.
“우리의 전통은 이 땅을 더 풍요롭게 해야 하옵니다. 저들은 말로 하면 알아듣지 않는 이기적인 족속이기 때문이옵니다.”
“자세히 말해보시오.”
“이번에 강이식이 서토에서 우리 고구려에는 없는 작물을 구해왔사옵니다. 이는 수백 년간 저들‘만’ 몰래 먹은 것이옵니다.”
“허.”
“만일, 저들이 좋게 말로 해서 되었다면 어찌 약탈이 전통이라는 숭고한 가치로 자리잡을 수 있었겠사옵니까.”
그리고 한 마디를 더 보탰다.
“폐하. 지금 파종하여 내년 봄에 수확할 수 있는 작물도 있었사옵니다.”
고구려식 이모작을 언급하자
“참으로 편협한 무리로다.”
고양성이 확실하게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아니, 막리지. 그 좋은 걸 수나라 놈들은 몰래 먹었다는 말이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건 아니지요.”
귀족들은 수나라를 강렬하게 성토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의 약탈이 다른 세력과 다른 이유는 취한 건 반드시 고구려의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오. 사용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여, 전통이오. 여기에 손을 대는 건 수정주의지요.”
모두 동의했다.
고흘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봤으나 모른 척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당분간 내치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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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하늘이 놀랄 정도로 호쾌한 웃음이었다.
“돌궐의 아사나섭도(사발략가한)가 크게 당황했을 것이오. 생각만 해도 너무 우습소. 내가 기분이 너무 좋소.”
수나라 황제 양견은 도무지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반면, 고경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고구려가 영주를 도모하여 돌궐이 난처하긴 할 것이옵니다. 하온데, 고구려의 행보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되돌아보면 고구려는 아직 사신도 보내지 않았사옵니다. 이 점도 신은 우려가 되옵니다.”
고경의 신중론에 양견은 고개를 저었다.
“고구려는 돌궐과 비교할 때 대적(大敵)이 아니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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