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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42화 (42/199)

42화 태왕 그리고 황제(2)

42화 태왕 그리고 황제(2)

냉정하게 평가할 때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서로 피를 본 사이였으니 특별한 계기가 없는 이상 적대관계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나라의 등장으로 천하의 정세가 변화했다. 고구려나 돌궐 모두 수나라를 견제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케케묵은 과거에 연연하는 건 우매한 행위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통일 중국을 막아야 하는 시대적 과업이 있었고, 돌궐은 고보령이 증발한 이상 고구려와 관계를 새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공공의 적을 두고 이해관계가 일치했기에 악수하고 사진 찍는 것만 남은 정세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이건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는데 공동성명을 발표하더라도 우리에게 최대한 유리한 문구를 집어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를 담당해야 할 고식의 준비가 아직‘도’ 미흡했다.

극악할 정도로 느린 일 처리에 속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급박한 상황에 고식의 말은 참으로 대단했다.

-며칠만 시간을 끌어 주십시오. 내가 말끔하게 정리하여 나타나겠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들이 협상을 요구할 것이네.

-대형. 어찌 쉽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십니까. 원래 외교는 험난한 것입니다.

-그게 자네가 할 말인가?

-비책을 알려드리지요. 전례 없는 환대와 극진한 연회로 그들의 혼을 빼놓고 계십시오.

-······.

정말 명문이 아닐 수 없다.

무조건 역사에 남기고 말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로서는 고식을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외교적 수사가 오가는 치열한 협상은 잠시 미루고 연회를 강행했다.

그리고

“하하하! 고구려의 꿀주는 천하제일이외다!”

“하하하! 상추에 돼지고기를 쌈 싸 먹으니 맛이 백 배는 더 좋아졌습니다!”

“하하하! 음주와 가무는 늘 좋은 것이지만 고구려의 음주와 가무가 천하일품이군요!”

“하하하! 고구려는 희망의 땅이 분명합니다!”

고식의 ‘계책’은 성공적이었다.

환상적인 연회로 돌궐 사신단의 혼을 빼놓아버린 것이다.

그들 역시 가장 중시하는 게 고구려와 우호를 증진하는 것이었으니 우리의 극진한 환대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협상 이야기도 나오지는 않았다.

술 먹느라고.

고구려의 국력을 동원한 회심의 계책이었기에 성과를 내고 있었으니 외교란 참으로 치열한 것이었다. 이래서 고구려 사람들이 그냥 들이박는 걸 좋아한 것 같다는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언제까지 시간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환상적인 연회이지만 언젠가는 환상에서 벗어날 것이니 말이다.

제발 고식이 하루라도 빨리 돌궐의 허를 찌르는 협상안을 도출해오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불청객이 등장했다.

사극이나 여러 소설을 보면 흔히 접하는 장면이 있었다.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호들갑을 떨면서 극진한 대우를 하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그건 정말 소설 속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왜 왔소?”

현실은 이랬다.

소설이나 사극은 다 거짓말이다.

고구려는 이래도 됐다.

나는 탐탁지 않다는 걸 온몸으로 표출하며 수나라 사신단을 위아래로 쳐다봤다.

“아니, 말도 없이 남의 나라에 대뜸 찾아오는 건 대체 무슨 경우요?”

“······사신단을 파견할 때 어찌 미리 말하오?”

“됐소. 그런데 왜 왔소?”

수나라 사신단 정사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갈대보다 거세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됐다. 듣기도 전에 대충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지금 돌궐 사신단이 와 있어서 우리가 정신이 없소. 적당한 곳을 내어줄 테니 기다리시오.”

“뭐, 뭐요? 돌궐이라니요? 그들과 밀약이라도 체결한다는 것이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밀약이라니? 대놓고 협력할 건데 왜 밀약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오?” “그, 그런 말이 어디 있소? 아니, 애초에 숨기지도 않소?”

“우리가 왜 숨겨야 하오? 또, 본국이 외교 할 때 수나라의 허락이라도 받아야 하오?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말이오?”

외교적 수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자연산 언어에 정사는 말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좀 과했다. 그래도 사신단인데 길거리에 세워놓고 있으니 말이다. ‘적국’의 사신도 이렇게 대하지는 않는 국제적 관례를 되돌아볼 때 아직은 ‘적국’이 아닌 수나라의 사신단이니 최소한의 대우는 해주는 게 옳지 싶었다.

“그, 그런······.”

“그래도 시기는 잘 맞추셨소. 먹을 복은 있구려. 어제 돌궐 사신단의 연회를 하고 남은 돼지고기가 있으니 내어주겠소. 먼 길 왔으니 일단 주린 배나 좀 채우시오.”

“······.”

“먹고 쉬고 있으시오. 일몰 이후에 기별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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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소설이나 사극을 보면 중국 사신과 만날 때 치열한 내부 논의를 거쳤던 것 같다. 외교에서 전략과 전술이 중요하다는 건 이미 며칠간 이어진 대돌궐 외교로 충분히 경험했다.

그런데 수나라 상대로 돌궐 외교처럼 머리 아프게 계산기 두들길 시간은 없다. 어차피 약탈하고 있는데 외교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편히 앉으시오.”

연회장에 들어온 수나라 사신단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다.

그때

“참으로 반갑소! 고구려에서 귀국의 사신을 만날 줄은 몰랐소.”

돌궐 사신단은 호탕하게 웃으며 수나라 사신단을 반겼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수나라 사신단이 이 자리에서 대놓고 돌궐 측을 향해서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대놓고 적대하는 관계는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반면, 이미 환상의 연회가 절정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돌궐 사신단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그러니 저토록 환대하지 않겠나 싶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소? 술상이 식어버렸소. 새로 차리려니 이것도 다 비용이건만.”

“······됐소. 그냥 두시오.”

“과연 통이 크시오.”

“······.”

나는 굳이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술잔을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한데, 대체 왜 오셨소? 아까도 말했지만 예고도 없이 방문하여 돌궐 사신단에 폐를 끼치고 있소. 다행스럽게도 돌궐 측에서 호탕하게 넘겨서 탈은 없지만 말이외다.”

“하! 이보시오! 고구려‘구’가 창궐하여 본국의 백성을 잡아갔소. 설마 이를 모르시오? 본국과 척질 생각이 아니라면······.”

“알고 있소.”

“알고 있다면······하. 하는 데도 대충 덮고 모르쇠로 일관하려고 한 것이오? 되었소. 그들을 모두 쇄환하시오.”

“음.”

“게다가 내가 오는 길에 고구려구 100척과 만났소. 뻔뻔하게 약탈하러 간다고 하였소. 이들도 조속히 해결해야 할 것이오.”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돌궐 사신단은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수나라 사신단을 바라봤다.

“아까도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수나라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내정에 토를 다시오?”

“뭐, 뭐요?”

“그리고 고구려구라고 하셨소? 그들을 해적이라고 한 것이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소. 그러니까 우리 사병을 해적이라고 한 것이오?”

“사병······? 하면, 고구려의 귀족이 본국을 약탈한다는 것이오? 이를 그냥 둔다는 말이오!”

“오다가 만난 그 군선의 절반이 내 사병이오.”

정사는 잠시 멍하게 쳐다보더니 더듬거렸다.

“그, 그런······.”

“낭만을 모르는 귀공은 참으로 불쌍하오.”

“낭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그런 게 있소. 한데, 지금 우리를 무시하오?”

“대체 무슨 말이오!”

“아니, 우리가 바다로만 약탈하겠소? 장성 이남도 부지런히 약탈하고 있소. 서운하게 이건 왜 언급하지 않소?”

나는 고개를 돌려서 국내계 귀족을 바라봤다.

“국내계 귀족은 듣고 있소? 존재감이 이렇게 없다니 참으로 답답하오! 내가 부끄럽소이다.”

내 말에

“참으로 불쾌하오.”

다시 막리지로 복귀한 고정의가 노발대발했다.

“이보시오. 수나라가 이렇게 우리를 박대하니 참을 수가 없소. 3만의 기병이 국내성에서 출병하기로 했지만, 보병도 1만 명 정도 보태야겠소. 참으로 수치스러워서 내가 잠도 못 잘 것 같소.”

“하하하! 고 막리지. 분발하세요. 이러다가 전통의 계승을 평양계에게 다 빼앗기겠소이다.”

“하! 어림도 없소! 전통의 적법한 계승자는 우리 국내성이외다!”

“알겠는데 수나라에서는 인정을 안 하지 않소이까. 언급도 없다는 건 모기가 피를 뽑아가는 수준이라는 것이외다. 게다가 원래 이런 건 공인을 받아야 하는 법이외다.”

“이런!”

고정의는 진짜 죽일 기세로 수나라 사신단을 노려봤다.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이런. 결례를 범했소. 사신단을 앞에 두고 우리끼리 다투다니. 너그럽게 이해하시오.”

“하! 이보시오! 지금 고구려의 귀족이 본국의 약탈을 대놓고 말하였소. 이건 분명한 선전포고요.”

“귀공이 먼저 우리의 내정에 관여했소. 이에 대한 항의를 선전포고라고 여긴다면 어쩔 수 없구려.”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끝내 수나라 사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상을 엎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고구려의 무례함과 오만방자함을 잊지 않을 것이외다. 이 모든 걸 우리 폐하께 고할 것이오.”

“······.”

“잘 들으시오. 본국은 남진이 아니라 동진할 의지가 충분하오. 오늘의 일로 수십만 정예군의 말머리가 이 땅으로 향할 것이니 뒤늦은 후회나 하시오.”

“······.”

“하. 왜 말이 없소? 이제 상황을 파악하셨소?”

우리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나라 사신은 오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상황 파악이라.”

장내의 어수선함을 정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일제히 예를 취하였다.

“폐하께서 오셨습니까.”

고양성이었다.

수나라 사신은 당황한 듯 멈칫하더니 어물쩍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고양성은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눈빛이 참으로 낮게 깔려 있었다.

“천하의 중심, 중원.”

그의 말이 시작되었다.

“너희는 너희의 땅을 중원이라고 부른다지? 그리고 군주를 황제라고 부른다고 들었다.”

“그러합니다.”

“이는 황제가 천하의 유일한 절대자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한데, 이를 누가 동의하나?”

“······.”

고양성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직 진실만을 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들을지어다.”

천년의 자부심이 용솟음치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이 나라 고구려가 있는 이상 너희의 땅은 절대로 중원이 될 수 없다. 또한, 황제는 절대자가 아니다. 너희의 땅은 고작 서토에 불과하며, 황제는 그 땅을 통치하는 군주를 지칭하는 너희의 두 글자에 불과하다.”

천년의 자부심은 이제 막 태동한 수나라를 비웃었다.

“기어이 너희 땅을 중원이라 칭하여 황제의 천하를 선언하고 싶다면 이 나라 고구려를 멸하고 천 년간 이어진 태왕의 역사를 지워야 할 것이다.”

이는 천하의 그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세월.

바로 천년이었다.

“선전포고라고 하였느냐? 수십만 대군이라고 하였느냐?”

오늘

“오라. 기꺼이 응해주겠노라.”

고양성은 고구려의 길을 천하에 선언했다.

“수십만이 아니라 백만이라도 좋다. 너희는 절대로 요동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니.”

단호한 선언이 다시 이어졌다.

아니,

“이 길의 끝에 태왕과 황제, 둘 중 누가 남을지 이르겠노라.”

고구려 태왕의 왕명이 내려졌다.

“황제는 절대로 태왕을 이길 수 없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이 나라의 국호가 고구려이기에 그러하다.”

위엄은 절정을 향하였다.

“고구려는 기어이 황제의 역사를 말살할 것이니 천하의 역사는 곧 태왕의 역사다.”

고양성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요동에 오면 오직.”

고구려가 답하였다.

“죽음뿐이옵니다.”

다시 태왕이 화답했다.

“오라.”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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