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태왕 그리고 황제(1)
41화 태왕 그리고 황제(1)
나와 고정의 그리고 평강공주만 남았다.
평강공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찻잔을 바라봤다.
“찻잎을 찧어서 떡처럼 만든 병차로군요.”
“그렇습니다. 서토의 나라, 진에서 가져온 것인데 맛이 괜찮을 겁니다.”
“내가 차를 즐기지는 않지만, 막리지가 내어온 것이니 맛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 찻잔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의아하여 쳐다보고 봤는데
“막리지. 공주께서는 음주를 즐기시는 걸 잊으셨소?”
고정의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평강공주의 미소가 진해지고 눈가가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걸 보니 정말인 것 같았다.
“이런. 소인이 결례를 범했습니다.”
재빠르게 술상으로 교체시켰다.
그러자
“참으로 맛이 좋습니다.”
그새 맛을 본 평강공주의 목소리에는 만족스러움이 가득했다.
심지어 술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순식간에 두 세잔을 연거푸 들이켠 뒤에나 손가락의 떨림이 멈췄다.
“참으로 오랜만에 고구려가 웅비(雄飛)하고 있습니다. 한데, 고구려라는 석 자와 어울리지 않는 규모가 움직입니다. 오죽하면 왕실이 개입하겠다고 선언하는 일이 발생하였겠습니까.”
볼수록 카리스마가 대단했다.
온달이 공주라면 깜짝 놀라며 없는 곳에서도 눈치 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엄청난 주당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공주께서 참으로 옳은 말씀을 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 넘실대는 정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규모였습니다. 첫술에 배를 채울 수는 없으나 국내성에서는 기병 3만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좋군요. 첫술에 배를 채울 수는 없으나 서토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니 어쩌겠습니까. 확실하게 해야지요. 왕실에서 기병 1만을 내겠습니다.”
무슨 약탈을 총력전 규모로 하나?
이 시절 고구려의 기병을 모조리 동원하면 5만 명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전체 기병의 80%를 중국 약탈에 동원하겠다는 것이었다.
황당해서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조금 전 강이식이 군선 100여 척을 이끌고 다시 출병했습니다. 전과 규모가 다르니 큰 성과가 있을 겁니다.”
“좋군요. 하면, 두 분도 잔을 채우세요.”
“······.”
그렇게 난 쓰러졌는데 마지막 순간, 고정의가 서역무를 추고 평강공주가 신나서 웃는 걸 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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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 두 발로 움직이긴 했는데 정말 속이 쓰렸다.
사촌이 땅을 사서 속이 쓰린 게 아니라 술을 너무 마셔서 진짜 속이 쓰렸다. 위액을 토해낼 만큼 속이 아팠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돼지 목장이었다.
“음? 자네가 여기 있었군.”
책임자인 가서일은 없고, 이문진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를 본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대인. 한수 물이라도 드셨습니까?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으십니까?”
“하하하······.”
말해 뭐하겠나?
또, 그렇다고 공주와 술 먹다가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것도 웃긴다.
그래서 대충 웃음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가서일은 또 어디 갔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중요한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도통 알 수 없는 인사로군. 한데, 자네는 어찌 왔나?”
“소생이 판단할 때 조만간 도성의 인분이 고갈될 것 같습니다. 가축의 분뇨로 대안을 세워두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할 듯하여 미리 준비하러 왔습니다.”
“허. 벌써 그렇게 되었나? 생각보다 빠르군.”
“정확한 원인은 더 상황을 파악하며 진단해봐야겠으나 현상은 부정할 수 없지요.”
가축의 분뇨가 인분보다는 한 단계 낮은 등급의 비료다.
그러나 이건 인분이 워낙 탁월한 효과를 내는 것이지 가축의 분뇨가 형편없는 건 아니다. 충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이문진이 알아서 잘 해낼 것이니 내가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유학자들은 좀 어떤가.”
“새로운 강사의 역량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성과가 분명히 나올 겁니다.”
“적당한 때 그들을 대상으로 다시 시험을 치를 것이네. 합격하면 관복을 입게 될 것이네.”
이 시절 고구려 관복이 존재하긴 한다.
그러나 조선처럼 체계적인 관복은 아니고 대충 디자인에 대한 지침만 있었다. 거기에 어떤 금은보화를 추가하고 디자인을 더 할 건지는 귀족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마음대로 입는 관복이었다.
물론, 유학자들에게 내릴 관복은 아주 검소하고 수수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식솔을 부양할 수 있는 ‘수단’도 내려야겠지.”
“혹시 그 수단이 황무지는 아니겠지요?”
“이런. 자네 어찌 알았나? 아직은 황무지가 많으니 관리가 솔선수범하여 경작하면 백성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네.”
조선처럼 조세를 징수할 수 있는 토지 수조권을 주는 방법도 고려해봤다. 그런데 이건 아직은 현실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직 미개발지역이 넘쳐나는데 수조권은 태동도 시킬 필요가 없다. 이건 훗날의 일이다.
“상당히 당황할 것 같습니다만.”
“자네 유학자가 왜 유학자인지 아나?”
“왜입니까.”
“손해를 보더라도 조정에서 시키면 해야 하고 또, 잘해서 유학자일세. 그들은 원래 그래. 아니, 그렇게 시작해야 하는 것일세. 이를테면 고구려 유학의 전통이라고 할까? 살신성인? 뭐 이런 것일세.”
“음. 나쁘지 않군요. 원래 유학자는 남들보다 고생하긴 해야 합니다.”
“자네라면 내 말을 이해할 줄 알았네.”
“모두 동의할 겁니다. 경전을 읽고, 밭을 갈며, 황충의 알을 구하다가 전쟁이 발생하면 선두에서 활을 쏘며 싸우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역할이 아닙니까.”
평시에는 공부하고 일하고, 전시에는 선봉에서 싸우고.
이 사람들이 관복을 입으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정착되는 것이다.
“물론, 워낙 농사를 싫어해서 볼멘소리가 나오긴 하겠지만······.”
이문진이 슬쩍 돼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돼지고기를 상추에 싸서 구워 먹게 해주면 참으로 좋아할 겁니다.”
“이런. 이미 그들이 미식가가 되었나?”
“하하하. 그 맛을 어찌 잊겠습니까? 실은 오늘도 돼지고기를 좀 얻어갈까 싶어서 들렸습니다.”
싱긋 웃으며 인부를 불렀다.
“돼지 10마리 정도 잡아서 보내게.”
“13마리 정도 잡는 건 어떻습니까.”
“어째서 3마리를 더 잡아야 하나?”
“소인들도 돼지고기의 맛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하하하. 그리하게. 아. 혹시 지금 돼지가 몇 마리인가?”
“처음에는 목장이 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몇 곳이 더 생겼습니다.”
가서일이 홍길동처럼 신출귀몰하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지만 일은 정말 잘했다. 빈틈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고, 돼지 목장도 가파르게 성장시켰다.
“그러면 한 500마리 정도 따로 빼낼 수 있겠나?”
“500마리나요?”
“조만간 추수할 계절이 아닌가. 500마리 정도 이끌고 한수 이북에 풀어보게. 경과를 확인해봐야겠으니 말일세.”
“오. 갑니까? 드디어? 좋습니다. 소인이 잘 해보겠습니다.”
“무리하지는 말게. 돼지는 모두 죽어도 되니까 경작지를 돼지가 얼마나 잘 처리하는지만 확인하게.”
“하하하. 물론입니다. 한데, 대인. 소인의 귀가 밝아서 의도치 않게 두 분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쭤보는 것인데 유학이라는 걸 익히면 관복도 입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이런. 자네도 관심이 생긴 것인가?”
“소인이 해도 되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면, 일단 천자문부터 익히게. 그러나 이곳을 비울 수는 없으니 낮에는 돼지를 키우고 밤에는 부지런히 익히면 될 것이네. 알겠나?”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잠을 줄이는 것이지요.”
“바람직한 자세일세.”
듣고 있던 이문진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뭐가 됐든 글자를 아는 ‘지식인’이 늘어나는 건 장기적으로 국력의 신장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즐거운 대화를 이어갈 때였다.
“형님!”
연자유가 굳이 여기까지 나를 찾아왔다.
흐린 눈으로 쳐다보며 강하게 따져 물었다.
“자네 콩 농사는 대체 어찌 되어가고 있나? 분명 소를 보내겠다고 했는데······.”
“돌궐의 사신이 요동에 이르렀습니다.”
중대사안이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이를 상기하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우리 아직 대돌궐 외교를 분석하지 못했지 않나?”
“그렇습니다.”
“고식은 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정말 어이가 없군. 일단 안학궁으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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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사신은 근엄한 표정을 하며 망망대해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고구려가 있었다.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도다.”
수나라가 건국되었거늘 고구려는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응당 예를 취해야 하거늘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도 불경하건만, 최근 ‘고구려구’까지 창궐했다. 수나라 황제 양견은 대로하며 고구려에 분명한 책임을 묻고자 했다.
“과거 압력에 밀려 거란족 5천 호를 쇄환한 고구려가 아닌가. 적당하게 위협을 가하면 불미스러운 일은 잘 정리할 것이다.”
고구려는 적당하게 대우만 해주면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도 별다른 탈은 없을 것으로 예상됐기에 큰 고민은 없었다.
아니, 사실은 다른 생각에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고구려의 콩과 상추가 천하제일이니 이참에 많이 구해야겠군.”
고구려의 특산물을 확보할 생각에 입꼬리가 씰룩였다.
생각만큼 평화롭고 아늑한 일정이 되길 바라였다.
등을 돌려서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였다.
“대, 대인!”
황급한 외침이 들렸다.
의아하여 몸을 돌렸는데
“······.”
말문이 막혔다.
손바닥으로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고개까지 저었다.
그리고 다시 확인했는데 변화가 없었다.
무려
“······.”
100여 척에 이르는 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수나라 사신은 입을 벌리고 눈을 껌뻑였다.
어떤 대응을 하기도 전에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수나라 사신단은 무거운 침묵이 지배했다.
그리고
“누구요?”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신은 치밀어 오르는 불안함을 겨우 눌렀다.
힘겹게 목울대로 침을 넘기며 말했다.
“우리는 수나라의 사신단이오. 귀공은 누구기에 이렇게 많은 군선을 이끌고 있소?”
“아. 사신이셨소? 아쉽군.”
“그게 무슨 말이오? 그리고 누구인지 물었소.”
“고구려에서 온 강이식이라고 하오.”
“허. 하면, 응당······.”
“사실 배가 보이길래 재물이나 좀 나누자고 말하려 했으나 사신단이라고 하니 그냥 보내주리다.”
“······.”
설마 했는데 역시 고구려구였다.
불안한 예감은 왜 늘 사실이란 말인가.
사신은 떨리는 손을 겨우 참으며 말했다.
“지금 어디로 가오?”
“보면 모르시오? 수나라로 가고 있소. 왜 가는지도 말해야 하오? 이유는 뻔하오만.”
“이보시오! 내가 사신단의 정사로서 이 문제를 고구려에 강하게 항의할 것이외다!”
사신은 눈을 부릅뜨며 따졌다.
그러나
“하면, 여기서 한번 해보자는 것이오?”
돌아오는 강이식의 말은 너무나도 싸늘했다.
사신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상관없소만.”
애초 사신단이 100척의 군선을 상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아니······남쪽의 진나라도 있다는 말을 한 것이오.”
“음. 좋은 생각이긴 한데 오늘은 수나라로 가고 싶소.”
“이, 이보시오. 어찌 수나라 사신단을 앞에 두고······.”
“괜한 객기 부리지 말고 보내줄 때 그냥 가시오. 그래도 사신을 해하는 건 아니라서 그냥 보내주는 것이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정리할 수 있기도 하오. 아시겠소? 하면, 먼저 가겠소.”
“······.”
“허. 그 나라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예의가 없소? 사람이 인사를 하는 데 왜 무시하시오? 또 봅시다.”
“······그리하지요.”
“좋소. 빨리 일을 처리하고 귀국할 것이니 우리 도성에서 봅시다.”
강이식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구려의 군선은 다시 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가서일의 가느다란 눈이 담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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