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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40화 (40/199)

40화 경쟁(3)

40화 경쟁(3)

평양 도성은 난리가 났다.

아니나 다를까 귀족들은 미친 듯이 달려왔다.

정말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며칠은 굶은 사냥개가 물어뜯으러 오는 줄 알았다.

“대인!”

“불필요한 말은 서로 넣는 게 좋지 않겠나? 왜 갑자기 조세를 바꾸느냐는 식의 말은 하지 말게. 이건 모두 신 경작지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싫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말게. 머리 아파.”

“아니, 그게 아니라 소인들도 뽕나무 재배를 하겠습니다.”

“뭐 하러 그리하나? 약탈하고, 황충의 알 구하고, 농사짓느라 죽을 만큼 바쁜데 괜히 무리하지 말게.”

“아닙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바쁘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뽕나무 재배의 정치적 의미를 깨달아버린 귀족들은 열과 성을 다해서 외쳤다.

아니, 이건 애초에 초안을 거부해서 생긴 것인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나는 수정안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분명 뒤늦게 숟가락을 올리면 손목을 잘라버린다고 했네. 설마 잊었나?”

“그, 그게 아니라······.”

“백성들이 양잠업을 크게 일으키길 바라면 될 것이네. 그대로 부족하다 싶으면 부지런히 약탈해오게. 이미 길은 다 열어줬네. 한데, 귀족 체면에 남의 밥상에 숟가락이나 올릴 생각이나 하는가?”

“대인.”

“듣기 싫으니 썩 물러가게!”

그때

“고 대인께서 오셨다고?”

“갑자기······이런 경사가 있나?”

“그런데 조금만 있다가 가지.”

“당장 급한 건 아니지 않겠는가?”

“지금 중요한 건 뽕나무일세.”

대수롭지 않은 대화가 잠시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벽화 기행을 떠났던 가서일이 보였다.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원래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대인. 일단 다시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보시지요.”

“되었네. 난 원래 차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세. 내가 늘 하던 대로 차별하겠다는데 자네들이 왜 이러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온화하고 관대한 대인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바로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진실입니다.”

“괜찮네. 나는 차별주의자라서 자네들을 차별할 것이네.”

“대체 누가 대인께 그런 말을 했단 말입니까! 사지를 찢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두 동참하긴 했는데 늘 그렇듯 앞선 사람이 책임을 뒤집어쓰는 법이었다. 일제히 시선이 고식에게로 향했다. 그는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 차분하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런데 자네, 대 돌궐 외교를 정리하긴 했나?”

“국가의 중대사입니다. 어찌 서두를 수가 있겠습니까.”

“서두르지 말고 집중하라는 말일세.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으니 성과가 제대로 나올 수가 있나? 의연이었다면 벌써 정리가 끝났을 것인데 참으로 답답하군.”

“허. 대형. 어찌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는 겁니까. 돌궐은 내가······.”

“성과나 가져오게. 의연에게 일을 넘기기 전에.”

“흥! 기다리십시오! 깜짝 놀라게 해줄 테니.”

이 말과 함께 빠르게 고식이 퇴장했다.

막상 이렇게 되니 귀족들은 입장이 애매해지긴 했다.

고식을 원인 제공자로 몰아서 정리하려고 한 건 좋았으나, 한편으로는 내게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는 태대사자가 가버렸으니 이게 또 문제였다.

어쨌거나 나로서는 상황을 대충 정리한 셈이었다.

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고, 앞으로 최선을 다해서 비단을 구하고자 할 것이니 고구려의 양잠업은 아주 잘 발전할 것이다.

그래서 마무리를 하려고 할 때였다.

“참으로 답답하도다!”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렸다.

쳐다봤는데 조금 전 귀족들이 대수롭지 않게 넘긴 국내계의 수장 고정의가 눈을 부라리며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상당히 카리스마가 있었다.

“자네들은 대체 일을 어찌 처리하는 것인가?”

오자마자 호통치자 국내계 귀족은 움찔했다.

고정의의 장악력을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웃긴 건 앞에서는 이렇게 꼼짝도 못 하는데 조금 전에는 너무 대차게 무시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고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귀족에게 정파의 줄서기보다 ‘이권’이 더 중요하다는 걸 말해주는 사례라고 봐야 했다.

“전통을 손상하는 제도에 동의하고, 차별이 공인되었는데도 물러섰다. 이러고도 자네들이 고구려 천년의 역사를 계승하는 국내계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가?”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졌다.

게다가 상대는 지금껏 내가 마음대로 휘어잡을 수 있었던 귀족과 체급 자체가 다른 사람이었다. 만일, 고정의가 국내계 귀족을 동원하여 발목을 잡기 시작하면 상당한 파열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첫 일성만 봐도 이리 나올 가능성은 너무 컸다.

이거 아무래도 앞으로 상당히 피곤해질 것 같았다.

물론, 심각하게 우려하지는 않았다.

정리할 자신도 있었고.

그리고 남의 집에서 정파의 모임이나 할 생각인 듯하여 내쫓으려고 할 때였다.

“그런데 고구려 말은 ‘어’ 다르고 ‘아’ 다르다. 자네들이 내게 보낸 서찰‘만’ 본다면 분명 고구려의 국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한데, 아니지 않나?”

더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막리지를 내리고 국내성으로 돌아간 건 고구려가 더는 무의미한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숙청의 역사가 멈추기를 바라였기 때문이었네. 자네들은 이를 잊었는가.”

“소인들이 어찌 잊겠습니까. 하여, 대인께서 국내성으로 간 이후에도 왕 대인과 늘 협조하며 정국을 이끌어 왔습니다. 단적으로 농업의 진흥부터 지금까지 모두 협조했습니다.”

“한데, 어찌하여 내게는 상황을 왜곡하는가?”

“예······?”

상황이 흥미로워졌다.

나는 강 건너 불구경을 시작했다.

“1할을 징수하고, 양잠업을 권장하는 건 고구려의 체질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한 방안으로 귀결되었거늘 이를 단지 정략적으로 단점만 꼭 집어서 내게 서찰을 보낸 건 대체 무슨 의도였는가?”

“대인. 소인들은 그게 아니라······.”

“시끄럽네!”

고정의는 버럭버럭 화를 냈다.

“천하를 호령하던 고구려의 국세가 흔들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분열이 아니었나? 하면, 고구려의 역사를 계승했다고 자부하는 국내계 귀족은 어찌 행동해야 하나? 분열을 종식할 수 있는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

“물론, 이는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이기에 무엇을 해야 할지 쉽사리 가늠할 수 없네. 한데, 나는 도성에서 일련의 일을 살펴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을 알게 되었네.”

“······.”

“작금의 일들은 일관되게 체계로서의 왕권을 강화하는 흐름이라는 걸세.”

“······.”

왕권 강화라면 경기를 일으킬 것만 같던 고정의의 입에서 참으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간 평양계가 근왕파였고 국내계는 아니었다. 왜 이리되었는가? 토사구팽의 역사로부터 시작된 탄압과 숙청이 이어졌기에 그러했다. 한데, 농자천하지대본 이후 시작된 고구려의 왕권 강화는 전처럼 숙청과 피로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모든 귀족을 더 풍족하게 만들어내며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고구려의 국세를 팽창하게 하는 길이었네.”

“······.”

“이를 읽지 못하고 무의미한 내용만 단적으로 보낸다는 건 자네들은 아직도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걸세. 참으로 한심한 건 나 역시 상황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막리지가 다시 피의 역사를 도모한다고 여겼다는 걸세. 하여, 여기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나의 우매함도 참으로 부끄럽도다.”

한 마디로 나의 정책이 왕과 평양계만을 위한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위축될 국내계를 향해서 숙청이 또 진행될 것을 우려하여 숨도 안 쉬고 달려왔다는 말이다.

상황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농업의 진흥이 선언된 이후 귀족들이 볼멘소리, 푸념 따위를 잔뜩 적어서 고정의에게 보낸 것이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내용만 접한 고정의로서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부랴부랴 내려왔는데 상황이 그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건 고정의가 대단한 것이다.

모든 사안을 이렇게 연결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니었다.

괜히 국내계의 수장으로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한데, 자네들은 마치 막리지가 무의미한 행위로서 전통 자체를 훼손하는 것처럼 말했네. 내가 만일, 직접 도성에 와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면 국내계는 다시 정쟁을 시작했을 것이네. 이리했다면 참으로 오욕의 역사가 아닌가?”

정쟁이라는 게 복잡한 정치 공학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냥 세력의 수장이 지침을 내리면 그게 정쟁의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고정의가 ‘농업 반대!’ 이렇게 선언하면 바로 정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진실로 국내성의 귀족이 천 년 역사의 계승자라고 자부한다면 죽을 때까지 심장에 새기게.”

고정의는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우리가 가장 올곧게 계승해야 할 전통과 역사는 패권일세. 고구려의 위대함이라는 걸세. 이를 위한 방법은 무엇이라도 상관이 없네. 행위로서 전통을 변경하는 건 백 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일세.”

“······.”

“작금의 농업 진흥은 오로지 이를 위한 길이기에 반대할 이유는 없네.”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을 끝낸 고정의가 나를 쳐다봤다.

“막리지의 정책을 찬성하오. 차후 우리는 경작지의 조세를 비단으로 준비하겠소.”

“고맙소.”

“또한, 내가 크게 오해하여 국내성 기병의 출병을 미뤘소. 바로 잡겠소.”

“그 또한 고맙소.”

바야흐로 대동단결이 완벽하게 이뤄질 때 뜻밖의 방문객이 있었다.

“평양계와 국내계, 국내계와 평양계의 수장이 이렇게 대타협을 선언하다니 오늘은 참으로 뜻깊은 날이군요.”

강렬한 내용과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평강 공주였다.

우리는 일제히 예를 표했다.

“공주께서 어찌 오셨습니까.”

“우리 귀족들이 모두 모여서 말이 많다기에 직접 보러 왔습니다. 한데, 마무리가 깔끔하니 참으로 기분이 좋군요.”

이미 언급했듯 평강 공주의 정치력은 고구려 최상위 수준이었다.

오늘 양잠업을 둘러싼 귀족들의 행동을 직접 제압하려고 했다는 말이었는데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 무언가가 더 있을 수밖에 없다.

그녀의 미소에는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세상은 이런 힘을 자신감이라고 불렀다.

“부마가 고보령의 수급을 보내왔습니다.”

평강공주는 모든 귀족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곧장 영주를 도모하여 고구려의 위력을 만방에 떨치니 거란족과 고막해족이 신속을 청했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변방의 승전고에 모두 침묵했다.

조용히 평강 공주의 말을 기다렸다.

“즉시 수만의 대군을 이끌고 장성을 넘었으니 어찌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신감은 현실로 구현됐다.

“이제 왕실도 약탈에 직접 나서겠습니다.”

새로운 선언이 이뤄졌다.

이는 사실상 약탈의 총력전 선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오오오오!”

“오오오오!”

“오오오오!”

“오오오오!”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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