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경쟁(2)
39화 경쟁(2)
고정의는 몇 번이나 손바닥으로 눈을 비볐다.
두 번, 세 번, 네 번······눈이 따가울 정도로 반복한 뒤 다시 서찰을 들어서 읽었다.
그러나
“······.”
내용은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이미 인지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걸 의미했다.
이 놀라운 사실에 서찰을 든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
결국,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감당하지 못했다.
고정의가 이토록 격앙된 반응을 보이는 건 드문 일이었기에 가서일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무슨 내용이기에 그러십니까.”
“약탈의 성과 1할을 조정에 바치기로 했다는군.”
“흥미롭군요. 그런데 그 일이 이토록 화를 내실 일입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화를 참지 못하는 고정의의 볼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하지 못한 가서일이 답답하기도 했다.
“대체 어떤 전승의 기록에 이런 내용이 있나?”
“없긴 하지요. 그렇군요. 전통에 손을 대는 걸 원치 않으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손을 대는 순간 전통이 아닐세. 새로운 것이네.”
가서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를 보였다.
“왜 문제가 되는지 소생이 듣고 잘 기억하고 싶습니다만.”
“생각이라는 걸 해보게. 애초 고구려의 국방은 우리 사병이 책임지고 있네. 한데, 가문이 전력을 사용하여 확보한 대가를 왜 또 바쳐야 하는가? 선대가 이러하지 않은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일세. 작금의 방침은 전통을 난도질하는 것일세.”
“음.”
“대체 국내계 귀족은 무슨 생각으로 이를 용인했단 말인가.”
“대인께서 막리지의 요구는 다 수용하라고 하셨으니 그들은 말을 잘 들은 것이지요.”
“······.”
논리정연하고 태연한 가서일의 말에 고정의는 황당함이 담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데 이게 또 맞는 말이라서 잠시 말문도 막혀버렸다.
심지어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어디 이뿐인가? 다른 나라 사람을 차별한다고 하네.”
“예? 차별이라는 두 글자가 어찌 고구려와 양립할 수가 있습니까. 어처구니가 없군요.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까?”
“막리지일세.”
“허. 이럴 수가 있나. 이건 대인께서 화를 내실만 합니다. 국내계 귀족들은 이 또한 동의하고 말았을 것이니 말입니다.”
“아닐세. 이는 격렬하게 반대하였다고 하네.”
“음? 하면, 그 부분에 대해서 노여워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들이 방침을 어긴 것인데요?”
“······.”
우습게도 이것도 맞는 말이었다.
고정의는 또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금세 정신을 바로 잡았다.
“이걸 더 지켜볼 수 없네.”
“하면, 도성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그래야겠지. 일이 더 고약해지기 전에 막아야 하네.”
“아쉽군요. 대인과 함께 사병의 출병을 보고자 했는데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출병은 보류할 것이네.”
“예······?”
늘 가느다란 상태를 유지했던 가서일의 눈동자가 커졌다.
평생 이렇게 커진 적이 없었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휩싸인 것이다.
“대인. 재고해주십시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틀린 걸 바로 잡기 전에는 출병이 없을 것이네. 그러니 괜한 말은 넣어두게.”
“······.”
국내성의 사병이 출병하는 장면을 보고자 여기까지 달려온 가서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정의의 뜻을 꺾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감축드립니다.”
“무슨 말인가. 이 시국에 감축이라니.”
“전통의 심각한 훼손. 대인께서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복귀로군요.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이렇게 보답받으시니 감축드려야지요.”
“자네의 그 작은 눈에는 참으로 많은 것이 담기는군.”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해서, 이참에 대대로에 오르실 겁니까?”
“하하하. 과한 해석일세.”
“그렇습니까?”
가서일은 여전히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한데, 서찰이 오고 가는 시간을 고려할 때 매사 지도하실 수는 없습니다.”
“국내계가 전폭적으로 동조하다 보면 막리지 왕고덕이 헛발질할 것이라고는 생각했네. 물론, 이토록 거대할 줄은 몰랐지만 말일세.”
가서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생은 평양계이지만 이번은 대인의 편을 들어야겠습니다. 차별은 고구려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잘 보고 기억하게. 고구려가 어찌 나아가는지 말일세.”
“이왕이면 구도가 잘 나오게 보여주십시오. 소생은 그려야 하니 말입니다.”
“하하하! 물론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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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중농은 권농상(勸農桑)이라고 하였다.
권농상이라고 하면 농업과 길쌈업을 이르니 나의 뽕나무 재배는 정확한 ‘농자천하지대본’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음.”
“음.”
“음.”
우리 전투 민족 고구려인들은 모처럼 순응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소인들에게 명주실을 내리신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구체적으로 일러주시면 소인들이 활을 잠시 내릴 의향이 있습니다.”
명주실을 짜서 만든 천이 곧 비단이었다.
아무리 전투 종족으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비단이 얼마나 귀한 건지 모를 수는 없다. 그런데 내가 비단의 원료인 명주실을 준다고 하니 모두 순한 양이 된 것이다. 농사지으러 가자고 할 때 눈을 부라리던 것과는 참으로 비교되는 순간이었다.
“일단 집마다 뽕나무를 구해서 심게. 아니군. 이건 내가 구해주겠네. 그러니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신청하게.”
“정말 그것만 하면 소인들이 명주실을 구할 수 있는 겁니까?”
“그렇다니까.”
뽕나무를 3년 재배하며 한 그루당 뽕잎 30근을 거둬낼 수 있다.
이 뒤로 누에와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면 명주실을 넉넉하게 얻어낼 것이니 내 말은 진실이었다.
그리고 이건 정말 잘 자란 뽕나무를 말하는 것이다. 그전에는 소량이라도 구해낼 수 있다. 처음부터 최상급을 바라보고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좋습니다. 도성의 백성들을 모두 규합해보겠습니다.”
“서두르게.”
십 수명의 백성을 해산하고 나니 이문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왜 왔나? 내게 차별받고 싶어서 온 것인가?”
“이런. 대인께서 속이 많이 상하셨나 보군요.”
“속이 상한 게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을 뿐일세. 한데, 왜 왔나? 나는 자네가 왜 내 집에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군.”
“하하하. 대인께서 농자천하지대본을 더 확고하게 세우고 계시는데 소생이 어찌 그냥 있겠습니까. 그러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소생을 바라봐주시길 바랍니다.”
“됐네.”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으나 이문진은 방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고개를 절레 저으며 말했다.
“의문이 있나 보군. 그냥 묻게. 눈치 살피지 말고.”
“조금 전에 백성에게 집마다 뽕나무를 재배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백성이 직접 양잠업을 하게 한다는 겁니다. 탈은 없겠습니까.”
“내가 양잠업‘만’하게 한다고 했나? 물론, 때가 되면 양잠업의 전업화가 이뤄지겠으나 아직은 어림도 없네. 어디까지나 ‘부업’의 수준으로 단계를 밟아야 하는 것이니 말일세.”
“그러면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뽕나무는 경작지가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만큼 재배가 간단하다는 걸 의미하지만 규모가 크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데, 대인께서는 수나라 사람 1,000명을 따로 양잠업에 일하도록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고구려에 1,000명이나 일할 뽕나무가 있습니까?”
조선 왕조도 내내 양잠업을 권장했으나 거센 저항에 봉착했고 제대로 뿌리 내리지는 못하였다. 조선 중후기 시장 화폐 경제가 발전한 뒤 양잠업이 부의 상징으로 우뚝 서기 전에는 말 그대로 귀찮고 힘든 3D업종이었다.
“양잠업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참으로 고된 작업일세. 백성이 알아서 성과를 내면 좋은 일이지만 쉽지 않은 일을 마냥 기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적절한 곳을 찾아 양잠업을 크게 일으킬 생각이네. 뽕나무밭을 크게 조성하겠다는 걸세.”
“대규모 뽕나무밭이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우리 고구려는 뽕나무 재배가 쉽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무조건 가능한 일이니까.”
보편적으로 북부 지역은 뽕나무 재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건 그냥 그들의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조선시대 평안도에서만 43곳의 군현에서 뽕나무를 재배하게 되었고,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양잠업의 주산지가 되었다.
함경도도 쉽지만은 않았으나 기어이 대대적으로 보급해낸 역사가 있다.
결국, 의지의 문제다.
의지하면 고구려라서 능히 가능했다.
물론, 이걸 내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은 없다.
내 권한으로 그냥 집행하면 된다.
무조건 성과를 낼 것이니 말이다.
나의 단호함에 이문진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토록 크게 양잠업을 일으키신다면 귀족들도 천천히 동참할 겁니다.”
사실 양잠업만 바라볼 때 귀족의 전면적인 결합이 가장 좋은 방법이긴 했다. 이미 언급했듯 양잠업은 정말 고달픈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고려할 때 조선의 양반들보다 대민 장악력이 더 서슬 퍼럴 수밖에 없는 이 시절 귀족의 협조는 양잠업 발전에 상당한 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이미 버린 패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수로 1,000년을 앞질러서 고구려에 양잠업을 대거 보급할 것인가.
이건 생각보다 아주 간단했다.
“귀족은 양잠업에 손을 댈 수 없도록 할 것이네.”
“귀족들의 반발을 제압할 방법이나 가능성을 묻는 건 의미가 없겠군요. 하면, 귀족의 역할은 따로 있을 것 같은데 이를 일러주실 수 있습니까?”
“귀족은 모든 조세를 명주실 혹은 비단 따위로 내게 될 것이네.”
“······.”
“백성은 비단을 만들고 귀족은 백성에게 비단을 구해야겠지. 하면, 자연스레 고구려는 양잠업이 성행할 수밖에 없네.”
이 시대 귀족은 조선의 사대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하고 사치스러웠다. 한 마디로 구매력이 확실한 고객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비단을 구매하고 조세로 낸다면 고구려에서 양잠업은 급격하게 성장할 수밖에 없다. 생산자로서는 확실한 소비자가 있으니 일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귀족이 개인의 사치를 위해서 비단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며, 조세 구조로 인하여 억지로 비단을 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슨 이유라고 할지라도 좋은 방향으로 귀결될 것이다.
“놀라운 말씀이군요.”
“차별하는 말일세.”
이문진은 내 말을 다시 곱씹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양잠업을 일으켜 조세 제대로 틀어내면 왕권은 강화될 수밖에 없지요.”
“역시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아는군. 아주 제대로 봤네. 고구려의 왕권이 늘 부실한 이유는 숙청과 인맥으로 유지했기 때문일세.”
“하지만, 체계로서 왕권을 지탱하는 구조를 만들면 결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요. 새로운 조세 제도의 확립은 이를 가능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인재는 인재였다.
나는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태왕이 성주의 대표가 아니라 고구려가 곧 태왕인 세상, 이게 곧 차별일세.”
“그것은 좋은 차별이군요.”
누에가 무럭무럭 자라서 국가가 곧 왕인 세상을 열어낼 것이다.
왕권이 늘 절정인 세상 말이다.
“한데, 대인께서 운영할 뽕나무밭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때가 되면 좋은 값에 팔 것이네.”
이미 평강공주가 구매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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