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만리장성 너머로(1)
36화 만리장성 너머로(1)
시대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화답하고자 결의를 세웠던 거란족은 크게 술렁였다. 실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털보 돌라는 눈을 부릅뜨며 눈이 찢어진 부족장을 노려봤다.
“분명 고구려는 장성 이남을 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소. 한데, 그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고구려의 수군이 북평군을 약탈했소. 입이 있으면 해명이라는 걸 해보시오.”
안 그래도 눈이 찢어진 오적의 눈은 놀라울 정도로 가늘어졌다.
헛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내가 상황을 분석한 건 사실입니다. 한데, 어찌 다 정확하게 맞출 수 있습니까?”
“정확하게 맞추는 건 바라지도 않소. 아예 완벽하게 틀렸으니 내가 이러는 것이오!”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요. 아니, 말이야 바른말로 내가 결정한 일입니까? 아니지요. 모두 동의한 게 아니었습니까? 내 말이 틀렸습니까? 참나. 이거 무서워서 말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됐습니다! 나는 이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알아서들 하세요!”
오적은 명실상부 거란족 최고의 분석가였다. 그가 손을 떼면 논의는 질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적의 말대로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더라도 결정은 모두 함께 내렸다. 그런데 매번 결과가 좋지 않을 때마다 의견 낸 사람을 탓하면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자연스레 부족장들의 시선이 돌라에게로 향했다.
물론 돌라의 부족이 가장 강성하다고 할지라도 거란을 아우르는 건 아니었다. 결국, 돌라는 멋쩍게 웃으며 오적에게 사과했다.
“······내 말이 과했소.”
“됐습니다. 지금 이런 말이나 주고받을 때가 아닙니다. 애초 우리는 결정적일 때 고구려에 신속의 뜻을 밝혀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이토록 공세적이라면 상황은 아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적의 말에 모두 귀를 기울였다.
“이번 고구려의 북평군 공격은 상황과 규모를 볼 때 전초전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조만간 수백 척의 군선으로 수나라를 크게 흔들 겁니다. 나는 고구려 기병이 장성을 공격할 때라고 예측합니다.”
“하면, 우리는 어찌하는 게 좋다는 말이오?”
“상황을 냉정하게 봐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거란족만 생각한다면 영주에서 힘의 균형이 이뤄지는 게 가장 좋긴 합니다. 장성 이남으로 가려는 고구려입니다. 너무 많은 힘이 실리면 우리의 처지가 어찌 될지 모릅니다. 지난번에 고구려의 흐름에 발맞추고자 한 건 어디까지나 장성 이북으로 멈출 때의 경우였습니다. 하지만······.”
오적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정찰병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고, 고막해가 고보령의 수급을 취하여 고구려에 신속의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뭐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아무리 한 차례 패배한 고보령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쉽사리 무너질 수도 없다. 더욱이 상대가 고구려도 아니고 고막해라면 더 믿을 수 없었다.
“원군으로 위장하였다가 고보령을 제거했다고 합니다.”
영주를 지탱하던 힘의 균형이 단번에 무너졌다.
고보령이 없는 영주 땅에서 고구려가 고막해를 품었다.
거란족의 처지가 그야말로 풍전등화 아니 닭 쫓던 개가 되었다.
부족장들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결국, 돌라가 버럭 하며 화를 냈다.
“내가 뭐라고 했소이까! 빠르게 고구려와 접선해야 한다고 했소! 시기 다 놓치고 이게 뭐란 말이오! 지금 신속을 청해도 고막해보다 처우가 좋지 않을 것이외다!”
오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야 했다.
예측이 어긋날 수는 있는데 너무 완벽하게 틀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고구려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고구려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기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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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막해가 거란보다는 세력이 약하지만 3만의 정병을 동원할 수 있는 유력 세력이었다. 그들이 고보령의 수급까지 취하여 신속을 청했다.
만일 그들이 작은 서운함이라도 느끼게 한다면 천하가 고구려를 비웃을 것이다. 해서, 고승은 성대히 대접하고 대우했다.
“가라달. 그들의 요구가 무엇이었소?”
“아직은 영주에 머물고 싶어 하기에 수용했습니다. 어차피 수만에 이르는 그들을 요동으로 이동하는 건 안학궁의 권능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맞는 말이오. 또, 오히려 잘된 일이오.”
온달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고보령은 죽었고, 3만의 정병을 동원할 수 있는 고막해가 세력을 모두 들어 신속을 청하였소. 하면, 우리는 그들을 환대하고 대군을 이끌어 영주를 품으면 될 일이오.”
고보령을 타격한 것과 영주를 아예 도모하는 건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아무리 무려성의 가라달이라고 할지라도 권한을 넘어선 일이었다. 자연스레 부마인 온달의 판단에 따라서 차후의 일이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분명 국지전에도 심각하게 고민하던 온달이 전과는 아예 다른 호전적인 발언을 쏟아내기에 고승은 의아하여 쳐다봤다.
“폐하께서 견제하라고 하명하셨소. 한데, 고보령이 죽었으니 영주를 취하여 수나라를 견제하는 게 왕명의 올곧게 따르는 것이오.”
오직 ‘견제’라는 단어로 모든 걸 정리했다.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한 고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내가 이끌고 온 병력으로는 영주를 점령하는 게 쉽지 않소. 무려성에서도 함께 나서줘야겠소.”
“너무나도 쉬운 일이지요. 응당 그리할 겁니다.”
“우리가 발 빠르게 영주를 도모하기 시작한다면 거란족은 빠르게 고개를 숙일 것이외다.”
“그렇습니다.”
급변하는 정세였으나 모두 고구려에 이로운 방향이었다.
온달은 자신감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부장이 서찰을 들고 들어왔다.
“국내성으로부터 온 서찰입니다.”
“국내성?”
서찰을 펼쳐 내용을 확인하던 온달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내용입니까.”
“평양은 바다, 국내성은 육지에서 각자 나눠 전통을 집행하기로 했다고 하오.”
“전통이라니요? 천하의 인심이 야박해진 세월이 수백 년이거늘 어찌 귀족들이 감히 나서며 전통을 언급한다는 말입니까? 소인이 늘 동의하는 사람이지만, 이건 곤란한 일입니다.”
“그게 아니오. 왕 대인이 전통의 적법한 계승자가 되셨소.”
“예? 정말입니까? 폐하께서 윤허하셨습니까?”
“물론이오.”
고승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기야 덜덜 떨면서 말을 이었다.
“정녕 가문이 알아서 기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적의 영토에 법도를 이른 전설과도 같은 역사가 재현된 것입니까?”
“재현의 수준이 아니외다. 가문의 행위로 적이 공격해올지라도 모든 책임은 고구려로 귀속되게 되었소. 이는 전설을 넘어선 전설로 기록될 것이외다.”
“이럴수가······.”
역사란 이토록 중요한 것이었다.
고승은 감격하여 끝내 울먹이고 말았다.
“전통을 집행하는 행위로 100만 대군이 공격해와도 가문에 사소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건 선대의 위명을 넘어설 수 있는 위대한 결정이 분명합니다.”
그러더니 미친 듯이 웃었다.
또, 여전히 물기가 담긴 목소리가 울렸다.
“하하하! 말 타고 자웅을 겨루려면 수만의 대군이 필요하던 야박한 세월은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천하의 인심은 차가웠지요.”
“그렇소. 드디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게 되었소. 또한, 상황을 고려할 때 조만간 국내성의 가문들이 사병을 출병할 게 분명하오.”
“국내성에서 전통을 집행하고자 나선다면 기병만 수만 명이 올 겁니다. 보병은 불필요하니 말입니다.”
고승은 국내계 귀족이었기에 국내성의 사정에 통달했다.
온달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소? 하면, 가라달이 영주를 책임져주겠소?”
“허. 부마께서 직접 장성 이남으로 가시고자 합니까.”
“그렇소. 생각해보시오. 내가 그래도 부마인데 가장 먼저 전통을 집행해야 왕실의 체면이 살지 않겠소? 내가 기병을 이끌고 장성 이남으로 가서 서토인을 데려오겠소.”
약탈은 성을 점령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논밭을 공격하여 ‘무언가’를 가져와도 충분했다.
온달은 지금 장성을 우회하여 수나라를 약탈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부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당연히 먼저 가셔야지요. 영주는 소장이 정리하겠습니다.”
“하하하! 참으로 좋소.”
“필요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이르십시오.”
병력은 기병 2천 명이었다.
점령이 아니었기에 충분한 규모였다.
그러나 부족함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하하. 괜찮소. 잊으셨소? 나 온달이오.”
지휘관은 고구려 최고의 무장으로 손꼽히는 온달이었다.
“한데, 문덕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군요.”
“하하하. 걱정하지 마시오. 문덕의 잠입과 협상은 고구려 제일이오.”
“전략과 전술도 뛰어나더군요. 장차 고구려군을 이끌 재목이 분명합니다.”
“물론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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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은 뒤 좌우를 돌아보는 을지문덕의 행동에는 힘이 넘쳤다.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뒤 돌라가 먼저 말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물어볼 게 있소.”
을지문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막해가 대공을 세운 뒤 신속을 청한 상황에서 거란족은 처지가 곤란해졌다. 그러나 거란족은 적대세력이 아니었기에 과하게 압박하기보다는 넉넉하게 공간을 열어주는 게 옳았다.
“귀국의 수군이 북평군을 공격했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오?”
“······.”
을지문덕은 태연하게 쳐다봤다.
그러나 머릿속은 맹렬하게 움직였다.
‘우리 수군이 북평군을 공격했다?’
금시초문이었다.
애석하게도 장성 이남의 일을 거란족보다 먼저 파악할 수는 없는 건 당연한 현실이었다. 이들은 세력을 마주하고 있었으나 고구려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단 하루라도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니었다.
아직 이를 몰랐다는 건 고구려의 서부 전선의 통제 능력이 상당히 약해졌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사실 북평군까지 황충의 알을 운송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가 크긴 했다.
물론, 이건 어제까지의 일이 될 것이다.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
시작부터 오늘까지 모든 순간을 되새겼다.
영주에 병충해를 퍼트렸고, 화공을 펼친 뒤, 온달이 왔고, 고보령이 죽었다.
그리고 현재 영주의 점령이 지척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초안이 떠올랐다.
‘초안은 북평군에 병충해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오직 이 내용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왕 대인은 정직한 분이시다. 분명 고보령이 아니라 수나라를 타격하고자 하셨다.’
병충해의 성공이 도성에 전해지고 온달이 출병하고 수군이 움직인 시간까지.
‘병충해가 수나라에 닿지 않자 수군을 일으키신 것인가. 하지만 대체 왜? 이리하실 거라면 처음부터 영주에 대군을 일으켜도 될 일이었다.’
동시에 수백 년간 고구려가 펼쳐온 방대한 쟁투의 역사가 을지문덕의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은 하나, 오직 전통의 집행이다.’
결론이 나왔다.
을지문덕은 심장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천년의 자신감을 담은 미소를 지으며 거란족 부족장들을 지그시 바라봤다.
“나라면 수군의 행보를 묻기 전에 아직 싸우지 못하여 공이 없는 걸 우려할 것이외다.”
“······.”
“그러니 내가 묻겠소. 거란은 어찌할 것이오?”
논의의 시간이 필요한 듯 부족장들은 머뭇거렸다.
그때 정찰병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시선이 일제히 쏠렸는데 을지문덕이 손을 내저으며 그를 막았다.
“나는 귀공들의 판단을 먼저 듣고 싶소. 답변에 따라서 처우는 달라질 것이오.”
“······.”
약간의 침묵을 유지하며 다들 눈빛을 교환했다.
판단에 따라서 고막해를 다시 앞지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좋소. 함께 하겠소.”
돌라로부터 답변이 나왔다.
을지문덕의 엷은 미소를 짓자
“고구려군이 장성 이남으로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지휘관은 고구려의 부마입니다.”
정찰병의 말이 들렸다.
그리고
“전군을 동원하리다.”
거란족 정병 4만 명의 참전을 ‘제안’했다.
또 그리고
“수락하겠소.”
을지문덕이 ‘동의’했다.
천년을 이어온 쟁투의 역사는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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