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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32화 (32/199)

32화 창조

32화 창조

나의 재촉에 의연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금 보니 목소리가 참 좋다.

신뢰감이 절로 생길 정도였다.

“대인. 맹가는 ‘풍년이 든 해에는 백성이 착실하지만, 흉년이 들면 거칠어진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재질은 원래 선할지라도 주변의 여러 요소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즉, 군왕은 백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해서?”

“약탈의 적법한 계승자를 자처하신 이후 만백성이 착실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귀족의 대동단결이 동명성왕 이래 최고의 공고함을 자랑하고 있지요. 소승은 참으로 감탄했습니다.”

확실히 약탈을 공인하면서 사기가 올라가긴 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유서 깊은 전투 본능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말이다.

“무릇, 편안하게 해주고자 백성을 부리면 고생스러워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한데, 누구도 고생스러워하지도 않고 오직 편안한 길이니 어찌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맹가는 군주가 어진 정치를 행하면 백성들은 윗사람을 친애한다고 했습니다. 작금의 고구려가 바로 이러합니다.”

“······.”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맹가는 사람이라면 항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항산이 없는데 어찌 항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전통은 우리 고구려 백성에게 풍요로운 항산의 길을 열어낼 것이니 참으로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점차 느낌이 왔다.

지금 의연은 ‘약탈’을 이론으로 정립하고 있었다.

실제로 맹가 그러니까 맹자가 뭐라고 떠들었는지는 전혀 알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백성을 교화시키지 않고 전쟁에 쓰는 것을 일러 백성에게 재앙을 입힌다고 했지요. 한데, 전통을 다시 일으킨다는 건 백성에 대한 참된 교화가 될 것이니 소승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말았습니다.”

“늦게나마 알았으니 다행일세.”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더 들어보십시오. 맹가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백성을 가르쳐야 하는데 가장 중시하는 것 중 하나가 활쏘기였습니다. 한데, 고구려가 가장 고구려다운 건 말을 타고 활을 쏠 때가 아니겠습니까. 오늘에 이르러서 대인께서 만백성이 언제라도 활을 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셨으니 어찌 한낱 교육기관의 효과와 비교하겠습니까.”

감탄, 또 감탄하며 대꾸했다.

“맹가는 손이 작아서 그런 것일세. 자네의 말대로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활을 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나라일세. 다시 이를 부흥하고자 하는 것이니 어찌 탈이 있겠는가.”

“바로 그렇습니다. 하여, 고구려의 백성은 콩과 조를 물처럼 풍족하게 쓸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니 어찌 어질어지지 않겠습니까. 만백성이 군자로 갈 수 있는 길이 바로 전통의 계승이었습니다.”

약탈로 부유해지는 것이 곧 군자로 가는 길이다.

마음에 들었다.

“오늘에 이르러서 고구려는 농서를 보급하였습니다. 하여, 오곡이 풍성하게 익으니 그야말로 태평성대가 늘 예고되었습니다.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우리 백성은 이토록 즐거운데 서토는 기근으로 근심이 가득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거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네.”

“그러나 어찌 해결책이 없겠습니까. 맹가는 또 말했습니다. 백성들이 고통의 구덩이에서 허덕일 때 정벌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소승은 서토에서 괴로운 백성을 참으로 많이 봤습니다. 이때 고구려가 전통을 구현하여 그들을 이 땅으로 이주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진심이다.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다.

미치도록 흥분됐다.

“소승은 대인께서 단지 왕권 강화를 도모하고자 유학을 중흥하고자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전통의 계승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유학은 전통을 뒷받침할 가장 유력한 학문이라는 걸 말입니다.”

여기까지.

더 들어볼 필요는 없다.

맹자와 안 친한 내가 들어도 머릿속에 그대로 들어왔다.

“대인. 소승은 결심했습니다. 작금의 고구려에 유학은 꼭 필요한 학문입니다. 전통을 이론으로 익힌 백성은 평소보다 백 배의 위력을 낼 것이니 어찌 참을 수가 있겠습니까.”

“참지 말게. 자리를 하나 내어주겠네. 학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게.”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더불어 백성들에게도 교화하겠습니다.”

“좋은 의견일세.”

문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말보다 더 오래 생명력을 가지는 게 있다.

“혹시 이 내용을 여기저기 벽화로 그린다면 효과가 있겠나?”

“그리할 수 있다면 사방 천지에 군자가 춤을 추는 효과를 낼 것입니다. 한데, 이를 할 사람이 있습니까? 대충 그렸다가는 내용은 없고 그림만 남을 것입니다.”

“있네. 가장 잘할 만한 사람이.”

“좋군요. 하면, 소승이 잘 준비하겠습니다. 하하하! 실은 늘 생각해봤습니다. 소승이 공도나 맹가보다 부족한 게 무엇인지 말입니다. 결론은 없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아. 물론, 부처님보다는 한참 부족하지만 말입니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이 사람, 이러다가 진짜 고구려 유학의 시조로 추앙받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건 상관이 없지만 매사 확실하게 하는 게 좋았기에 잔잔한 경고를 하나 던졌다.

“그러나 명심하게. 자네가 승려라고 하여 유학을 불교의 아래로 규정하는 위계를 만들면 참으로 곤란할 것이네. 애쓰지 않아도 불교의 자리는 내어줄 것이니 욕심내지 말게.”

“대인. 소승은 유학이 아니라 전통을 계승하는 고구려 유학을 보급할 겁니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자세도 좋고, 관점도 좋다.

의연, 이 사람. 정말 인재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조금 전에 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일세. 자네가 하기에 따라서 공도와 맹가의 자리에 자네가 앉을 수도 있을 것이네. 그러니 최선을 다하게.”

“소승이 사실 승려이지만 명예욕이 있지요. 원래 유학자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 자리 소승이 앉아야겠습니다.”

“이런. 부처님이 노하시겠군.”

“허. 그 말씀 취소하십시오. 부처님은 자비로우셔서 노하실 줄 모릅니다.”

“하하하! 알겠네. 내가 실언했네.”

오늘 나는 새로운 유학의 창조를 엿보게 되었다.

고구려가 딱 맞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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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의 병력을 이끌고 무려성이 당도한 온달은 영주의 상황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백만대군이 약탈해도 이보다 처참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는 아니었다.

상당히 난처한 상황과 봉착했기 때문이었다.

“부마께서 어찌 이리도 고집을 피우십니까. 무려성의 일은 가라달의 판단이 최우선하다는 걸 모르십니까?”

“내가 어찌 모르겠소? 그러나 폐하께서는 견제를 이르셨소. 이를 어길 수는 없소.”

“물론입니다. 어찌 감히 폐하의 어명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영주는 크게 흔들렸습니다. 이런 변수가 있을 때는 전장을 책임지는 가라달은 왕명와 배치되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건 고구려의 전통입니다.”

다른 가라달이라면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러나 이곳은 고구려 최전방인 무려성이었기에 가라달의 권한이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작전권을 거두는 왕명을 가진 장수가 오기 전까지는 불변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고승도 상당히 능력이 있는 장수였으니 더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하면, 달리 여쭙겠습니다. 부마께서 보실 때 지금 진군하면 승산이 없을 것 같습니까.”

“아니외다. 지금 몰아친다면 고보령은 큰 낭패를 볼 것이오. 즉, 10할의 승산이 있소.”

“한데, 어찌 이토록 머뭇거리는 겁니까.”

“끙······.”

온달이 고민을 이어가지 고승은 답답함을 참지 못했다.

지켜보던 을지문덕은 조심스레 중재하듯 개입했다.

“안학궁의 논의 당시에는 영주의 사정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고보령이 고작 영주 자사에 불과하지만 수만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기에 섣부른 교전을 피하는 방침이 내려진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부마께서도 보셨듯 상황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합니다.”

“그렇지. 문덕, 자네의 말이 옳아.”

고승은 늘 그렇듯 맞장구를 쳤다.

을지문덕은 화답하듯 다시 말을 이었다.

“소장도 북평군의 대계를 펼치라는 왕 대인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대승이었습니다. 고보령을 궁지로 몰았으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전장은 지휘관의 판단이 최우선입니다.”

고승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일찍이 부마께서는 고보령과 배산에서 싸워 대승을 일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부마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알면 고보령은 아연실색할 겁니다.”

“그냥 봐도 기겁할 건데, 지금 영주의 상황을 보십시오.”

“승리는 이미 확정적입니다.”

“아울러 부마께서도 전격적인 진군이 옳다고 판단하셨는데 무엇을 더 머뭇거립니까.”

배산 전투가 언급되자 온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칼이 휘둘러지는 전장에서의 판단은 누구보다도 기민하지만, 이런 결정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근심이 가득할 때 떠오르는 게 있었다.

-부마는 말을 삼가라.

하늘 같은 태왕의 말이었다.

그래서 말을 아끼고 고개만 끄덕였다.

고승과 을지문덕의 표정이 환해졌다.

“참으로 현명하십니다.”

“부마께서 큰 결정을 하셨습니다.”

“······.”

그 즉시 고승이 말했다.

“문덕. 말만 하게. 내가 다 지원하겠네.”

“하하하. 이미 계책은 마련되어 있습니다.”

“허. 자네는 참으로 빠르군. 그래. 내가 할 일은 없겠는가?”

“소장을 믿어주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참으로 바람직하군. 하면, 부마께서 이끌고 오신 병력을 모두 내어주겠네.”

“기병만 내어주시면 됩니다. 기동력이 가장 중요할 듯하니 말입니다.”

온달은 여전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고구려 최고의 무장 중 한 명이었으나 그에게 태왕의 그늘은 너무나도 진했다.

그래서 바라만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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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엉망인 영주는 비상사태였다.

느닷없이 고구려 기병 수천 기가 경계를 넘어왔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러한데 동맹관계에 있던 거란족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영주의 자체적인 역량으로 요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평소라면 침착하게 대응했겠으나 황충과 화마로 엉망이 된 상황이었기에 요격 준비가 쉽사리 이뤄질 수가 없었다. 아니, 이미 고구려 기병은 영주 관내로 진입한 상황이었다.

고보령은 뒤늦게 병력을 이끌고 요격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온달······.”

고구려의 깃발을 보니 온달이 직접 왔다.

배산의 뼈아픈 패배가 떠오른 그의 안색은 와락 일그러졌다.

‘하필이면 이토록 어수선할 때 온달과 만나다니.’

치열하게 겨뤘기에 온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도무지 인간의 능력이라고는 볼 수 없었던 엄청난 무력과 용맹 그리고 불시의 상황에 대처하는 정확하고 냉정한 판단력은 지금 생각해도 살이 떨릴 정도였다.

아니, 자다가 악몽을 꾼 적도 있었다.

그런 온달과 최악의 상황에서 만난 것이다.

“대인. 적군이 돌격을 시작했습니다.”

예상대로 고구려 기병은 저돌적으로 돌격을 시작했다.

초전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온달다운 행동이었다.

아마 저 어딘가에 미친놈처럼 눈을 뒤집으면서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고보령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전군······.”

그런데 고구려 기병이 돌격하다 말고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수십 개였다.

마치 봇짐처럼 생겼는데 어느새 지척에 이르렀고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

그때

-쏴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앙!

고구려 기병의 불화살이 수십 개의 봇짐을 정확하게 맞췄다.

불이 붙었다.

그런데

-위이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이잉~

-위이이이이이잉~

전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괴이한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수천 마리의 벌이 두 발 달린 검은 머리 짐승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갑자기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대열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고구려군과 창칼을 마주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대, 대열을 유지하라!”

악을 쓰며 외쳤으나 벌이 쏘아대는 상황에 명령이 제대로 내려질 수가 없었다.

아비규환이 이어지는 바로 그때였다.

-쏴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앙!

-쏴아아아아아앙!

엄청난 수의 화살이 날아왔다.

고보령의 눈동자에는 절망이 감돌았다.

지도 출처 :  [570년 후반~580년 전반 요서 지역의 정세와 고구려의 대외관계 / 이정빈]

(1. 지도에 표기된 대릉하와 의무려산의 동쪽은 즉, 요서동부는 고구려의 영역입니다.)

(2. 황룡성이라고 표기된 곳이 고보령 세력의 중심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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