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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29화 (29/199)

29화 1차 서토 정벌(2)

29화 1차 서토 정벌(2)

영주자사 고보령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속은 둔기로 후려 맞은 듯 아팠다.

너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만일, 지옥도(地獄道)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병충해라는 게 언제 발생할지 가늠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이건 규모가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감히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황충이었다.

게다가 황충은 오직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었기에 인간은 감히 저항할 수 없었다. 그저 지옥이 빨리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게 전부였다.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무려 3천 호의 거란족이 고구려로 떠났다.

황충이 영주를 뒤덮은 상황이었기에 막을 방법은 없었다.

아니, 애초 거란은 섣불리 강제할 수도 없는 무리였다. 비록 자신이 영주를 지배하고 있으나 거란은 순수한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동맹에 가까운 관계였다.

만일, 이주를 막으려고 했다가는 영주 내부에서 피바람이 불었을지도 모른다. 황충이 도래한 상황에서 거란족과 유혈 충돌을 일으키는 건 최악의 정치적 판단이었기에 고보령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하필이면 고구려라니.’

과거 북주가 북제를 무너뜨렸을 때 황족 고소의를 황제로 옹립하여 부흥을 결의했다.

그러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 뒤 전략을 변경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배산에서 온달에게 무참하게 패배했다.

그러니까 현재 적국 고구려로 3천 호라는 엄청난 인원이 넘어간 것이었다.

상황이 최악이었는데 시기는 더 최악이었다.

다시 돌궐과 연합하여 수나라를 견제하기로 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도 전에 상황이 고약하게 돌아간 것이었다.

‘민심의 동요를 막아야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황충이 빨리 물러나고, 더는 이탈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차피 고구려는 영주를 공격하지 않는 세력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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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성은 흡족함을 숨기지 않았다.

과거 고구려는 북주의 압박에 거란족 1만 호를 되돌려줬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한 수로 거란족 3천 호를 확보하여 오욕을 되갚아줬으니 태왕으로서 기분이 좋은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는 주로 비슷하게 반복되는 것이기에 훗날 양견이 북주의 사례를 언급하며 3천 호를 돌려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양견이 제발 이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수나라를 도모하거나 무너뜨리는 게 아니옵니다. 우리 고구려가 서토의 일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옵니다. 만일, 저들이 거란족을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할 때 거절한다면 오히려 수나라가 외교적으로 압박을 받을 것이옵니다.”

연자유의 말이 옳았다.

양견이 거란족을 다시 내놓으라고 할 시기는 절대 통일 중국을 이뤘을 때가 아니다. 내부 정비를 마친 뒤 살짝 우리 간을 보려고 할 때일 것이다. 이때 우리는 대차게 거절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하니 수나라가 하루라도 빨리 사신을 보내오는 게 좋은 일이옵니다. 아니, 수나라는 중요하지 않사옵니다. 어차피 그들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건 없사옵니다. 폐하. 우리는 과거 거란족 1만 호를 되돌려 보낸 일이 있었사옵니다. 고구려로서는 정세를 판단하여 내린 적절한 조치였으나 늘 세력을 살피는 거란족은 사정이 달랐을 것이옵니다.”

“그랬을 것이오. 아마 우리가 자신들을 지켜줄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였을 것이외다. 그러나 이번에 확실하게 담보한다면 사정은 확실하게 달라질 것이오.”

고양성의 판단은 정확했다.

아직은 단일 세력으로 생존을 도모하기 어려운 거란족은 늘 북중국과 돌궐 그리고 고구려의 정세를 살피며 곡예 놀이를 했다. 그 와중에 애석하게도 고구려는 과거 그들의 신뢰를 상실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넘어온 거란족 3천 호는 고구려로서는 아주 중요한 기회였다.

더욱이 중국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했기에 어설픈 헛소리는 발로 차버리며 무조건 사수해야 했다. 그래야만 거란족이 고구려가 ‘핵우산’이 될 수 있다고 확실하게 신뢰할 것이니 말이다.

“역량을 동원하여 거란족을 융숭하게 맞이해야 할 것이오. 요동 전선의 군량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이 굶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외다.”

“참으로 지당하신 하교이시옵니다. 이참에 그들을 요동 인근으로 이주하게 하여 옥토를 내리시는 게 어떠시옵니까. 목축을 원하면 목축을, 농업을 원하면 농업을 할 수 있게 지원한다면 그들은 진심으로 감화될 것이옵니다. 이 문제는 국내성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이니 어려움은 없사옵니다.”

지금껏 고구려는 ‘동화(同化)’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천천히 그리고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동화될 수 있도록 했을 뿐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턱대고 고구려로 수용하기에는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외곽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며 신속하게 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바로 말갈이 이러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랐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고구려’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미 콩은 살충제의 효과만으로도 크게 성과를 보았으며, 패서 일대는 작물이 잘 자랐기에 대풍(大豐)이 예고되었다.

점차 광범위한 개발이 진행될 것이니 2년 뒤, 3년 뒤 고구려는 너무나도 풍요로울 예정이었다.

이럴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인구’였다.

장기적으로 백성을 늘려가는 게 원칙이지만, 외부에서 데려오는 건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그리고

“큭. 그나저나 음흉한 고보령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너무나도 궁금하오.”

고양성이 웃으면서 영주 자사 고보령을 언급했다.

그 말과 함께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참으로 무능한 사람이오. 북제를 다시 일으키려면 북주와 싸우기 전에 외교에 집중해야 하거늘 돌궐과 척지더니 급기야 우리를 넘보았소. 북위, 북제, 북주도 하지 않은 짓을 고작 영주를 가진 고보령이 말이외다.”

사실 우리는 아직 수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었다. 무려성과 수나라 본토 사이에 있는 영주를 고보령이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황을 다시 볼수록 을지문덕의 판단은 참으로 적절했다.

황충의 애벌레는 습도가 잘 유지되어야만 발육한다. 또한, 물이 너무 많으면 죽지만 없어도 생활력이 약해진다.

귀족의 사병이 동원되어 포획한 막대한 수량의 황충의 알은 여차하면 고구려 본토에서 부화할 가능성이 있었다. 섣불리 북평군까지 옮기려다가 오폭의 가능성이 커졌을 것이다.

이 모든 변수를 고려했을 을지문덕은 완벽한 판단력에 기초하여 영주에 정밀 타격을 제대로 해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시기까지 잘 고려해야 한다는 교훈도 하나 얻었다.

그래야만 수나라 본토를 타격할 수 있다.

“한데, 신은 고보령이 기특하옵니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신이 폐하께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니 말이옵니다. 하하하!”

“······.”

“······.”

“······.”

분위기 파악 능력이라고는 없는 온달이 헛소리했다.

모두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양성의 눈치를 살폈다. 볼이 씰룩이는 걸 보니 단전에서 무언가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싸늘했다.

그때 의연이 재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폐하. 역시 변수는 돌궐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런가?”

고양성은 대꾸했으나 시선은 여전히 온달에게로 향해 있었다.

온달은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바닥만 바라봤다.

“부마는 말을 줄이도록 하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신은 그저······.”

“말을 줄이라고 했다. 태대사자. 돌궐의 사정은 어떠하오?”

“폐하. 신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시옵소서.”

“폐하. 신이 알기로는 고보령은 돌궐과 힘을 보태어 수를 공격하려고 했던 것 같사옵니다.”

의연이 재빨리 끼어들자 고식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허. 의연. 돌궐의 일은 내가 맡기로 했는데 자네가 왜 나서나?”

“아. 대인께서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시어 소승이 한 마디만 보탠 것입니다.”

“나도 자네가 말한 내용 정도는 알고 있네. 그러나 폐하께 고하는 일인데 완벽하게 일목요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에 미뤘을 뿐일세. 또한······.”

고식의 말이 길어졌다.

그런데 의연은 그냥 고양성을 쳐다봤다.

“가볍게 본다면 그들이 수를 견제하기에 좋아 보이지만 어차피 될 일이 아니긴 하옵니다. 돌궐 내부의 정세도 심상치 않으며, 무엇보다 고보령이 수나라를 어찌할 것이라고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옵니다. 그는 영주도 버거운 인물이니 말이옵니다.”

“의연. 자네 지금 내 말은 전혀 듣지 않는 것인가?”

“대인.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저 몇 마디를 보탠 것이 전부였습니다. 차후 대인께서 돌궐에 대한 완벽한 분석을 끝내시면 소승이 어찌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서두르십시오. 천하의 모든 이목이 대인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의연이 태연하게 대꾸하자 고식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자칭 돌궐 전문가인데 의연이 돌궐에 대해서 아는 체를 하자 언짢은 것 같았다.

그런데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폐하. 이리되었다면 차라리 우리가 영주의 지배권을 더 공고하게 가지는 게 나을 듯싶사옵니다. 전역을 통치하긴 어렵지만 고보령을 무력화시킬 수만 있다면 거란은 물론이거니와 고막해까지 우리에게 신속을 청할 것이옵니다. 이보다 좋은 일은 없사옵니다.”

원래도 공격적인 방침을 정했으나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자는 말이었다.

연자유의 제안에 고양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소. 하면, 조금 더 공세적으로 접근하리다. 부마.”

“예. 폐하.”

“기병 2천, 보병 3천을 내릴 것이네. 절대로 잊지 말게. 이는 총력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견제일세.”

“물론이옵니다. 신은 여태껏 한 번도 명을 어긴 적이 없사옵니다.”

“폐하. 신이 가도 되옵니다. 맡겨주시옵소서.”

“장군은 태대사자와 함께 돌궐에 대해서 정리하시오. 너무 느리니 장군이 보태야 하오. 이건 태대사자가 늦게 정리하여 발생한 것이니 그를 원망하시오.”

출정을 윤허 받지 못한 고흘은 수염을 덜덜 떨며 원인 제공자를 노려봤다.

고식은 당황한 듯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먼 산을 쳐다봤다.

“한데, 막리지는 어째서 말이 없소?”

“계책을 생각하고 있었사옵니다.”

“묘안이 있소?”

“물론이옵니다.”

“어서 말해보시오.”

나는 온달을 쳐다보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부마. 출정할 때 벌을 좀 챙겨가시오.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외다.”

“······.”

애석하게도 아직 많은 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시범적으로 도입해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온달은 어물쩍 물었다.

“······어느 정도를 챙겨가면 됩니까.”

“2~3천 마리 정도 될 것이오.”

“······.”

“힘들게 확보한 것이니 낭비하지 말고 잘 사용하시오.”

“······.”

“하하하! 부마! 애쓰시오!”

구체적인 내용을 들은 고흘은 크게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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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최전방 무려성의 가라달 고흥은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기가 막혔네. 참으로 기가 막혔어.”

만일, 을지문덕의 기민한 판단이 아니었다면 황충은 고구려 영토에 ‘강림’하고 말았을 것이다. 현재 파악되고 있는 영주의 상황을 고려하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을지문덕은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가라달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주지 않으셨다면 소장이 어찌해낼 수 있었겠습니까.”

“되었네. 내가 다른 이의 공을 탐할 정도로 염치가 없는 사람이 아닐세. 이건 누가 보더라도 자네의 공일세.”

“부끄럽습니다.”

“한데, 어찌 그토록 대범하게 영주로 수레를 옮길 생각을 했나?”

“원래 잠입은 대범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습니다.”

을지문덕은 처음부터 실패를 고려하지 않았다.

고흥은 다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제 어찌할 생각인가?”

“음. 그렇지 않아도 청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네.”

“서토의 말에 능한 병사 100명 정도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음. 상인이나 이런저런 사람까지 다 보태면 가능은 할 것이네. 한데, 그들은 어째서 찾나?”

을지문덕은 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화공을 펼쳐볼까 합니다.”

“화공? 그런데 잠입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인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장은 천하에서 잠입에 가장 능하다고 자부합니다.”

을지문덕은 자신감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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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충이 만들었던 지옥은 지옥도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지옥도였다.

“······.”

영주자사 고보령의 눈동자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숨을 쉴 의욕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원인은 알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황충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충이 죽기 전 발악하듯 날뛰더니 민가와 들판에 그대로 꼬꾸라졌다.

결과, 엄청난 규모의 화마가 강림하게 되었다.

순식간에 영주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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