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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28화 (28/199)

28화 1차 서토 정벌(1)

28화 1차 서토 정벌(1)

이문진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종일 뛰어다니며 일을 처리했으나 해야 할 일은 늘어만 갔다. 고구려 전역에 농법을 보급하는 건 홀로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버거운 일이었다.

최초 농법을 입안하고 일을 실무 역량과 무관하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키운 막리지 왕고덕은 내용을 이문진에게 전한 뒤 사실상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모든 걸 전하고 관리하는 건 어디까지나 이문진의 일이었다.

사실상 고구려 신농법의 총책임자가 된 것이었다.

이는 참으로 기쁜 일이었으나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홀로 달려왔던 고난의 행군도 이제는 끝이었다.

이문진은 빙그레 웃으면서 앞을 바라봤다.

300명은 되는 인원이었다.

이들 중 원래 유학자였던 이들도 있고, 뒤늦게 글자를 익힌 이들도 있었다.

또한, 왕고덕의 식객도 있었고, 다른 귀족의 식객도 있었다.

이들 모두 과거시험에 통과했기에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있었다.

원래 유학자였던 이들은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외의 사람들이 과거시험을 통과한 비결은 간단했다. 난도를 대폭 낮췄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전역을 향한 농업의 보급은 인력의 부족으로 연결되었기에 과거시험 자체가 천자문을 확인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하니 유학 교육은 차츰 진행해야 할 과제였다.

그런데도 이문진은 기쁠 수밖에 없었다.

글자를 아는 300명이라는 건 홀로 고구려의 농지와 싸운 이문진에게는 가뭄의 단비 아니 천군만마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않고 그냥 말했다.

“이건 왕 대인께서 이르신 말을 적은 왕씨농서일세.”

“오. 그 서책에 시비법이 적혀 있습니까?”

“시비법은 물론이거니와 목축에 대한 방법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네. 오늘부터 자네들은 이를 익혀서 농법을 전해야 할 것이네.”

“누구에게 전합니까.”

“구체적인 대상은 없네. 들고 다니며 고구려에서 경작하는 모든 이에게 전해야 할 것이네.”

“그 말씀은······?”

“고구려 5부마다 적당한 인원이 파견될 것이네. 보급되는 수준에 따라서 대인께서는 따로 포상도 하신다고 하셨네.”

“오!”

관리인들은 크게 기뻐했다.

평소 손이 큰 왕고덕이 포상한다고 하니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문진은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떤가? 더 열심히 해야 할 동기부여가 되는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특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네. 지역마다 적용해야 할 농법이 다른데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탈이 생길 것이네. 내 말을 알겠는가?”

“물론입니다. 한데, 귀족에게 전하지는 않습니까?”

“전해야지. 그런데 하루아침에 농서를 수천 권 만들어낼 수는 없지 않겠나? 자네들에 나눠줄 수량을 필사한 걸세.”

“알겠습니다. 한데

“한데, 선생.”

“왜 그러는가?”

“내일부터 익혀도 되는 것입니까?”

이문진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런. 오늘 밤에 치러지는 제천행사에 가봐야겠지?”

“그렇습니다. 듣자니 동맹제만큼 크게 진행한다고 했습니다. 가봐야지요.”

“한데, 선생. 대체 이번 제천행사는 무슨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동맹제는 아닌데, 동맹제라니요?”

관리인들의 쏟아지는 물음에 이문진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태왕 폐하께서 고구려의 풍년을 선언하신 뒤 서토에 병충해를 내리실 것이네.”

“예······?”

이들 중 황충의 알을 가져온 이도 있다.

또, 모두 왕씨농서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일국의 일이라는 건 그림을 볼 수 없으면 사정을 정확하게 어려운 법이었다.

“오늘은 마음껏 즐겨야지.”

“선생도 가십니까.”

“하하하! 고구려인이 어찌 음주 가무를 마다하겠는가.”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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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밝게 뜬 밤, 남녀노소가 가득 모여 있었다.

족히 수천 명은 되는 인원이었다.

아니, 사람의 눈이라는 건 수천 명, 수만 명을 정확하게 구별하기 어렵다.

평양 도성의 백성이 모두 뛰쳐나왔다고 보아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오늘 밤만큼은 특별한 질서가 없었다.

그냥 모두 춤을 추며 술을 마셨다.

술은 적당하게 제공됐다.

이 시절 술이라는 건 결국 양조주였기에 귀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미 대동단결을 이뤘기에 귀족들이 십시일반 마련했다.

또한, 군데군데 벌꿀 주까지 제공하였기에 백성들은 마음껏 마시며 즐겼다.

여기에 돼지고기가 마련되었다.

종일 굶주린 이라도 오늘만큼은 배불리 먹고 즐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가히 환상의 밤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태왕 폐하께 영광을!”

누군가가 선창하면

“영광을!”

“영광을!”

“영광을!”

“영광을!”

일제히 후창했다.

“서토에 황충을!”

“황충을!”

“황충을!”

“황충을!”

“황충을!”

“신라에 절망을!”

“절망을!”

“절망을!”

“절망을!”

“절망을!”

······정말로 난리가 난리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어지간한 축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였다.

뭐. 이 시절에 이렇게 대규모로 음주 가무를 즐길 일이 거의 없으니 이해는 할 수 있었으나 적응하기 어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광란의 무대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봤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가서일이었다.

“응? 자네 여기서 뭐 하나?”

“고구려 역사에 없던 제천행사를 치렀습니다. 소생은 이를 지켜봐야 할 역사적 책무가 있습니다.”

“아.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 자네는 어디에나 있는 사람이었지.”

“그렇습니다. 그래야만 벽화를 그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혀가 꼬이긴 했다.

“자네 술 먹고 제대로 관찰할 수 있나?”

“고구려인이 어찌 음주와 가무를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반역이지요.”

“어련하시겠나.”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왕씨 농서를 고구려 전역에!”

“고구려 전역에!”

“고구려 전역에!”

“고구려 전역에!”

이문진도 미친 듯이 놀고 있었다.

그리고

“배산의 전우들이여!”

“전우들이여!”

“전우들이여!”

“전우들이여!”

온달도 전우회를 하고 있었다.

더 있었다.

“하하하! 배산이라고 하였나? 어림도 없도다! 노장은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돌궐을 격파한 고흘이 노인들과 추억팔이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흘과 나눈 대화가 하나 떠올랐다.

-막리지! 친위대를 만든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하하하! 내가 최선을 다해서 훈련을 시키겠네!

-음. 장군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내가 왜 상관이 없나? 응당 내가 해야지.

그러기에 그냥 무시했다.

친위대는 을지문덕이 맡을 거라서.

그나저나 이 사람은 왜 아직 안 오는 걸까?

오곡이 여기저기 익어가는 시절이었으니 황충의 알을 북평군에 살포하고 복귀해도 남을 시간인데 말이다.

거기서 시라도 한 소절 쓰고 있는 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오오오오!”

“오오오오!”

“오오오오!”

“오오오오!”

평양도성이 떠나갈 정도의 엄청난 소란이 일어났다.

고구려에 이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바로

“태자 전하!”

차기 지존 고대원이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또한, 백성들이 내미는 술을 주저 없이 마음껏 마셨다.

순식간에 얼굴에 취기가 오른 그는

“한수는 우리의 땅이다!”

시원한 선창을 내질렀다.

만백성이 미친 듯이 후창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모처럼 멀쩡한 목소리, 혜자였다.

나는 엷게 웃으면서 말했다.

“농업이 잘 자리 잡으면 종종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가 있을 것이오.”

“하하하. 백성들이 참으로 좋아할 겁니다.”

“그러니 말이외다. 백성도 좋아하고, 고구려도 좋은 일이지요. 안 그렇소? 대사?”

오늘의 제천행사 준비는 혜자가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번 행사가 단지 음주 가무를 즐기는 수준이었다면 혜자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거대한 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었기에 ‘잘’ 준비해야 했다.

“이미 귀족은 빼앗지 않고 나누고 더 내주기에 통제가 되었습니다. 반면, 백성은 신정(神政)이 적합하지요. 귀족도 백성을 이리 다스리는 걸 가장 좋아하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기도 하지요.”

“불교가 그러자고 있는 게 아니겠소? 그래서 대사께서 이번에 역할을 맡은 것이기도 하오.”

“그렇긴 합니다만······.”

혜자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유학을 되새겼나 보구려.”

아직 유학은 기틀도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유학자가 양성될 때 나는 과감하게 관료제를 도입할 것이다.

더 시간이 지나면 고구려는 아예 환골탈태하게 될 것이다.

귀족도 관료제에 포함할 것이니 말이다.

혜자는 내가 유학을 크게 보급하려는 이유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불교의 자리를 빼앗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두 개는 아예 별개의 영역이었다.

이를 말하려고 할 때였다.

“유학이 아니라 대인께서 약조하신 큰 사찰은 언제 첫 삽을 뜰지 걱정되었을 뿐입니다.”

“이런. 내가 괜한 말을 했구려.”

“백성도 좋고 귀족도 좋고 고구려도 좋으니 소승도 좋아지면 부처님께서 환하게 미소 지으실 겁니다.”

“하하하. 조만간 가서일에게 설계도를 준비하라고 하겠소.”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하시기에 그저 미소 지으실 겁니다.”

“한데, 제천행사에 폐하께서 등장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소?”

“대인. 최소한의 퇴로라고 생각해주십시오. 소승은 이리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100%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고양성이 백성들 앞에 직접 등장하는 건 정치적으로 무리수가 있다는 의미였다.

틀린 말은 아니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저 멀리서

“왕 대인!”

누군가가 나를 애타게 불렀다.

초면이었는데 너무 간절하게 나를 찾았다.

그럴 만도 한 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이 술을 먹여서 정신이 혼미할 것이었다. 게다가 돼지고기를 별로 안 좋아하는지 입에 넣어줄 때마다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고구려 사람들은 무척이나 집요하기에 그를 자유롭게 놔둘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내가 어찌해줄 상황도 아니었다.

이 판에서는 막리지라고 할지라도 잡히면 원샷이었다.

고대원도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원샷하는데 나라고 다르겠는가.

그래서 뒤로 몇 걸음 더 물러나는 보신주의를 보여줬다.

“대인······.”

놀랍게도 살아서 내 앞까지 왔다.

엄청난 주량의 소유자가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했나?”

그의 말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니까 을지문덕이 자기는 안 오고 부관을 보냈는데 내용이 정말 황당했다.

“영주에 황충을 일으켰습니다.”

오만상을 찌푸렸다.

눈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봤다.

“나는 분명히 북평군에 황충을 일으키라고 했네. 한데, 영주? 하. 을지문덕은 지금 어디에 있나? 왜 직접 오지 않은 것인가?”

“무려하에서 영주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 대체 왜······자네는 왜 지금에서야 온 것인가?”

“송구합니다. 실은 최대한 천천히 가라고 하였습니다.”

“을지문덕이 일부러 그런 명령을 내렸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을지문덕이 이랬다고 하니 배신감이 너무 컸다.

그때

“대인!”

누가 또 달려왔다.

듣기도 싫었다.

그런데

“기근을 감당하지 못한 영주의 거란족 3천 호가 신속을 청하였습니다.”

을지문덕이 잘했다.

바로 고개를 돌렸다.

혜자와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끄덕였다.

혜자가 양팔을 벌리며 나섰다.

“모두 집중하라!”

당대 최고의 고승이었기에 자연스레 시선이 집중됐다.

“태왕 폐하의 위력이 영주에 뻗치셨도다!”

“······.”

“거란족 3천 호가 고구려의 백성이 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천하제일의 위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그리고 단 1초 만에 평양 도성은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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