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청산(2)
27화 청산(2)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이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 거병할 사안도 아니었고, 단지 화가 치밀어 나갈지라도 이탈은 곧 내란을 일으키겠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행여, 정말 욱하는 마음에 내란을 일으키겠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따로 다시 모이는 게 상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불순한 움직임을 그냥 보고만 있지도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여기서 나갈 수 없다.
귀족들이 속으로 하는 생각은 너무 훤하게 보였다.
고까운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고개를 비틀며 귀족들을 바라봤다.
“내가 왕씨 가문의 수장이며 막리지라고 하여 자네들이 그간 내 말을 잘 들은 건 아니지. 안 그런가?”
“······.”
“내가 평소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자네들이 내 의견을 따른 게 아닐세. 그렇지 않은가?”
귀족들이 신농법과 경작지의 확보에 열과 성을 다하며, 내 말에 눈치를 살피는 건 아둔해서가 아니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지금 내가 하는 건 고구려 정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다. 상황이 무르익으면 귀족 가문 한 두 개 정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집단의 생존과 직결하는 일이었다.
이는 바로
“사병의 유지와 확대를 위해서 내 말을 따르고 있을 것이다.”
사병이라는 존재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귀족들이 그동안 내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따라온 이유였으며, 연자유가 농법의 무분별한 확대를 경계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머릿속에는 사병을 확충할 생각이 가득하니 내 말을 듣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아닌가?”
사병.
이 시절 고구려는 철저한 사병 체제였다.
고작 수십 명의 사병은 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고구려에서 유서 깊은 가문이라고 한다면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사병이 네 자릿수였다.
이미 몇 번 언급한 대로 수틀리면 수천 명의 사병을 동원해서 피 터지는 내전을 일으키는 나라였다. 여기서 패배하면 귀족이 수천 명씩 쓸려나가는 나라였으니 사병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지겠는가. 이러하니 고구려에서 사병의 확충과 유지라는 가치는 수백 년 이어진 가문을 지키는 최고이자 최선의 수였다.
고구려의 세계관은 그냥 이랬다.
사병의 규모가 곧 권력인 세계관이었으니 어떻게든 엄청난 수의 사병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자니 막대한 군량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고, 수확량을 늘릴 방법이 있으면 눈에 불을 켜고 덤비는 건 당연했다.
바로 이랬기에 이들이 내게 아무런 토를 달지 못한 것이었다.
또, 내가 중간마다 독소 조항을 아무리 추가해도 수긍하게 된 것이다.
어차피 1년이었다.
“왜들 그러나?”
“······.”
“자네들도 ‘혹시나 하고’ 1년을 바라보고 있었던 게 아닌가?”
“······.”
이들도 1년을 바라보고 있다.
만일, 농업이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이들이 손해 보는 건 1년이라는 시간에 불과할 것이니 말이다. 우습게도 고구려의 기풍은 변화를 배척하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요구에도 가만히 있어‘본’ 것이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말이다.
“그러면 안 됩니까? 고구려에서 사병을 확대하는 것이 어찌 잘못이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고구려는 사병의 나라입니다. 사병이 없으면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습니다.”
고구려의 국방은 철저하게 사병이 책임졌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번에도 잉여 생산물이었다.
고구려 조정은 단독으로 절대 30만 대군을 보급할 수가 없었다.
평시와 전시 모두 운영할 능력이 없었다.
반면, 30만 대군을 수십 개의 귀족 가문이 나눠 관리한다면 보급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고구려는 사병이 국방을 책임지게 되었다.
“잘못이라고 한 적은 없네. 더 하게.”
“한데, 사병을 만 악의 근원처럼 이르시며 더 하라고······예?”
“왜 놀라나? 사병을 더 확충하라고 했네. 말리지 않겠네.”
“아니······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확충한 뒤 거하게 싸워야지. 고구려의 전통처럼.”
“······.”
과거 고양성은 장수왕의 왕권 강화가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고 했다.
모두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동의할 수도 없다.
장수왕은 그 시절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의 시기, 고구려가 조선 아니, 고려의 수준으로도 중앙집권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바로 보급할 수 없는 능력, 군량의 부족을 만든 생산력의 한계에서 기인했다.
이 나라는 잉여생산물이 부족하였기에 왕권 강화를 하다가 만 것이다.
여기까지는 역사였다.
그리고 오늘은 역사가 될 것이다.
숨을 몰아쉬었다.
어쩌면 이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도 강하게 치솟았다.
만일, 내가 10년만 더 빠른 역사에서 시작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절대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선 역사라는 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자네들이 피 터지게 싸울 동안 고구려는······.”
역사가 될 오늘은 내일을 바꿔야 한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끄는 것이다.
“서토를 벌할 것이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전통(傳統).
내가 비꼬듯 말하였으나 내란은 역사가 만든 기형적인 정치 현상일 뿐,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고구려의 전통이 될 수 없다.
고구려가 장구한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외세와 대항할 때 모든 걸 바쳐 공고하게 뭉쳤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의 전통이며 여기에 반론의 여지는 없다.
‘서토’의 등장과 함께 이권을 탐하던 귀족은 사라졌다.
오직 고구려의 위정자만 존재했다.
서론을 걷어내고 바로 본론으로 들었다.
이 자리에 세세한 내용을 하나씩 일러줘야 할 정도로 무지한 이들은 없었으니까.
“동방의 패권이라고 하였네. 우리의 국세가 강성했기에 서토에서 동의한 것일세. 한데, 나는 이것이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네. 왜 우리가 저들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동방은 응당 우리의 천하이거늘 어째서 서쪽에서 고개를 끄덕여야 실체가 있는 것인가?”
“······.”
“나는 이해할 수 없으며, 동의도 할 수 없네.”
수백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쟁투로서 역사를 이어온 나라다.
이들의 DNA에는 이것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을 수밖에 없다.
역사는
“해서, 이제 고구려가 직접 패권을 행사할 것이네.”
이를 ‘자부심(自負心)’이라고 한다.
“저들이 동의하여 우리가 동방의 패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동의하기에 저들이 존재하는 것일세. 하여, 고구려의 동의가 없다면 서토는 통일될 수 없네. 저들은 분열하고 다투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리니까.”
그리하여
“하여, 누구도 요동을 탐할 수 없을 것이며, 천하가 간절하게 바라만 볼 것이네.”
동방의 패권, 이는 곧 천하의 질서를 좌지우지하는 유일무이한 권력이 될 것이다.
“천하의 모든 권력이 평양 도성에서 구현되는 질서가 구축될 것이네.”
고구려가 중국의 통일을 막을 것이다.
고구려의 천하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통일 중국이 도래하지 않으면 저들은 절대 우리를 범할 수 없을 것이니 말이다.
누구도 ‘불가능’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중국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판단 이전에 고구려인으로서의 DNA가 나선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분열을 멈출 수 있다.
“분열은 저들에게나 어울리는 말일세.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아.”
고구려의 분열은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역사는 이를 ‘토사구팽’이라고 말한다.
이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으면 절대로 나아갈 수 없다.
그리고 역사의 청산은
“토사구팽을 주도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사죄하겠네. 약조하겠네. 고구려의 역사에 더는 토사구팽이 등장하지 않을 것이네.”
절절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인께서 오해하시는 게 있습니다. 이건 정말 당혹스럽군요.”
오해가 있다고 한다.
“우리의 사병이 내전의 수단이었다는 걸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단지 정치적 수단이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줄곧 고구려의 국방을 지키며 패권을 입장하는 위력이었습니다.”
“또한, 이는 당연히 우리의 일입니다. 사실 평양계 귀족이 저들과 제대로 싸워나 봤습니까? 앉아서 외교나 해봤겠지요.”
“그렇지요. 서토와 피 터지는 항쟁을 주도한 건 우리 국내계였습니다. 평양계가 싸워봤자 남쪽의 신라 정도인데 이것도 제대로 감당 못해서 밀렸지요.”
“애초 이 문제는 소인들과 논의하시는 게 옳습니다. 이건 소인들‘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인데 장수 태왕 시절 양주 정도는 확실하게 도모했어야 합니다.”
“암. 지당한 말일세.”
토사구팽에 가려진 그들의 역사는 ‘자부심’ 그 자체였다.
“말씀이 과하시오! 우리 가문의 중시조께서는 연나라와 항쟁했소!”
“거. 시끄럽소. 여기에 연나라와 안 싸운 가문이 있소?”
“뭐, 뭐요?”
“그리고 말은 바로 하시오. 연나라와 싸울 때 고구려를 이끈 건 명백하게 우리 국내계 귀족이었소. 내 말이 틀렸소?”
“······그러나 동방의 패권을 도모하게 된 건 우리 평양계의 역사요.”
“왕 대인의 말씀을 듣지 못하셨소? 그 패권, 이제 우리가 결정하자는 것이외다. 그리고 그게 어찌 평양계만의 역사요? 고구려의 역사지.”
“아니, 서토와 싸운 건 국내계의 역사라고 하지 않으셨소?”
“그때 평양계가 있기나 했소? 그때는 국내계의 역사가 곧 고구려의 역사였소. 내 말이 틀렸소?”
양측의 논쟁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저들이 오늘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은 건 정치 공학의 결과가 아니었다.
고구려의 귀족이기에 그러한 것이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을 알기에.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선대의 일로 꺼내어 누구의 이권을 줄이거나 뺏지는 않을 것이네. 이리하면 다시 반목이 시작될 것이니까.”
고구려의 숙청은 오직 자원의 부족으로 발생했다.
그러나 나는 이를 해결할 수 있다.
“더는 고구려에 내란이라는 건 없을 것이네. 숙청도 없을 것일세. 나는 오늘 과거를 털어내었네. 그대들은 어떠한가.”
“평양계가 피의 숙청만 치우면 동의하겠습니다.”
“국내계가 피의 복수만 치우면 동의하겠습니다.”
“하면, 되었네. 농법을 전면 보급할 것이네. 고구려 모든 영토에 신농법을 시행하여 사병을 마음껏 확충하게.”
중국의 통일을 막는 것이 가장 좋은 경우의 수다.
그러나 이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결국 대대적인 전쟁이 발생한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농법의 전면적인 보급이 단행되어야 한다.
“두 배. 60만 대군일세.”
“······대인. 백성이 300만인 나라입니다.”
“생각이 짧군.”
“예?”
“오늘부터 태어난 아이들이 굶어 죽지만 않으면 백성의 수는 급격하게 늘어날 것이네. 그러니 굶는 백성이 없도록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20년 해보게. 고구려의 사병은 60만이 될 것이네.”
“······.”
우리 역사에도 이제 100만 대군 한 번 나올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치밀한 작전이 아니라 물량으로 적을 압살할 때가 됐다.
“한데, 대인. 우리 고구려도 남쪽에 적이 있습니다.”
“고작 신라 따위가 어찌 고구려의 역사가 일필휘지로 써 내려지는 걸 막겠나.”
“방도가 있습니까?”
왕권 강화는 귀족의 힘을 억누르고 숙청한다고 하여 이뤄지는 게 아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상황에 맞게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귀족의 힘이 강성하고, 사병의 규모가 압도적일지라도 왕권이 더 강대하면 될 일이다.
과거 장수왕 시절처럼 중재가 아니다.
왕권이 귀족 전체를 압도하게 할 것이다.
오직 왕이 귀족 전체를 압살하는 힘을 가진다.
오직 태왕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
태왕의 손짓으로 죽음을 불사하는 친위대.
3만 명.
이것이 고구려에 필요한 왕권 강화였다.
다 같이 강해진다.
하여, 모든 것이 고구려로 수렴한다.
이것이 내 해답이었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농자천하지대본이었다.
“60만의 사병이 요동을 지킬 동안 3만의 태왕 직속 친위대가 신라를 벌할 것이네.”
“좋군요.”
이 순간 누구도 ‘나’를 말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귀족’을 말하지 않았다.
오직 고구려를 말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가보지요.”
“원래 우리는 양쪽과 싸웠고, 다 이겼습니다.”
“양쪽과 동시에 못 싸우는 건 서토의 전통에 불과하지요.”
고구려는 귀족이 분열하지 않았다.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았고,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았기에 반목했을 뿐이다.
빼앗지 않고 함께 늘려간다면 이 나라는 영원히 나아갈 것이다.
60만 사병을 보유한 나라, 태왕의 손짓으로 3만의 대군이 움직이는 나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고구려다.
오늘 우리는 손을 잡고 왕권 강화를 이뤄냈다.
가서일과 눈이 마주쳤다.
싱그럽게 웃었다.
그의 손이 만들어낼 오늘의 벽화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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