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청산(1)
26화 청산(1)
예상대로 귀족들의 동요는 컸다.
웅성거림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당혹감이 잔뜩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대, 대인. 손을 떼라니요? 아니, 그러면 이 넓은 경작지는 어찌합니까?”
“그런 걱정은 왜 하나? 내가 누군지 잊었나? 나 혼자 해도 충분하네.”
“!!!”
괜히 하는 엄포가 아니라는 걸 이제 확실하게 느낀 것 같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변화가 시작됐다.
여태껏 내게 예의를 다하고, 공손하던 귀족들의 분위기가 아예 바뀌었다.
몇 초 전까지만 거세게 일렁이던 당혹감이나 허둥거림도 완전히 사라졌다.
게다가
“······.”
“······.”
“······.”
지금 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침묵의 강도를 강하게 만들고 있었고,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무려 수십 명의 귀족이 말이다.
침묵의 농도가 절정으로 진해지자 다시 ‘말’이라는 것이 나왔다.
“대인께서 이르신 농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인과 소인들의 맺은 계약은 수확량의 5할이었습니다. 몇 석이 아니라 5할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또한, 농사는 풍년이 올 수도 있고, 흉년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한데, 대인의 행동은 마치 흉년이 오면 언제든지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이건 누가 결정하는 겁니까? 아. 대인께서요?”
“대인의 농법을 잘못 시행했을 뿐 소인들은 계약을 파기할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수확량의 5할을 내지 못하겠다고 한 게 아니니 말입니다.”
“아직 수확하지도 않았는데 불가능한 일이지요.”
“지금은 대인께서 명분도 없이 계약을 파기하는 겁니다.”
“책임의 소재는 대인께 있는 것이지요.”
지금껏 내게 보인 공손함이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준이 아니라 불순했다.
아니, 단지 불순함이 아니라 농사나 경작지를 넘은 정치적 압박이라고 봐야 했다.
아직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무형의 압박이 충분했다고 여긴 것일까?
건조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목소리들이 다소 풀리듯 부드러워졌다.
“대인. 이러지 마십시오.”
“예. 우리 그동안 좋았습니다. 잘해왔으니까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이러시는 건 대인답지 않으십니다.”
이건 뭐라고 할까?
이들이 나의 퇴로를 확보해주는 정치적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대인. 이미 인분을 확보하느라 막대한 비용을 사용했습니다.”
“평양 도성만이 아니라 국내성에서도 인분을 모조리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조법도 일러주지 않으시고, 손을 떼라니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대인. 소인들은 그동안 대인께서 요구하신 모든 걸 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 한 작은 실수로 이러시는 건 대인답지 않으십니다.”
“하하하. 그러지 마시오. 자비를 베풀어주시지요.”
평양에서 국내성까지, 계파가 섞인 수십 명의 귀족이었다.
왕고덕이 아무리 고구려 최고의 귀족이라고 할지라도 이들 전부와 힘겨루기를 할 수는 없다. 심지어 평양계까지 보태고 있으니 이는 더 말할 필요 자체가 없었다. 아니, 이건 애초에 고양성이라고 할지라도 방법이 없다. 귀족들이 계파를 초월하여 이렇게 대동단결하여 반발하는데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고구려 전체와 싸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앞서 힘을 보여 준 뒤 내게 퇴로를 열어준 게 맞다.
체면을 살려줄 테니 좋게 타협하고 넘어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귀족들을 빤히 쳐다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건 자네들 사정일세.”
“······.”
타협을 거절하고 퇴로를 닫아 버린 짤막한 내 말에 분위기는 무서울 정도로 굳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걸음을 더 나갔다.
“식객도 다 해산시키게. 자네들의 식객에게는 한 글자도 알려줄 수 없으니까.”
“······.”
부드럽게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손등은 아래로 향했고, 손바닥은 하늘을 바라봤다.
“덤벼도 좋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진심이었다.
그러나 저들은 절대로 나를 이길 수 없다.
하늘이 두 쪽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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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는 무겁고 분위기는 삭막했는데 원인은 늘 그렇듯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양측으로 갈라진 진형이 원인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논의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소.”
“그러니 말이외다.”
왕고덕의 경고에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계파를 초월한 회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평양계와 국내계가 사이 좋게 마주 보며 앉게 되었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는 없었다.
“불필요한 말은 넣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소?”
“그래야지요.”
“왕 대인께서 날카롭게 말씀은 하셨으나 경작지를 거두지는 않으실 것이오.”
“그렇겠지요. 경작지는 그대로 두고 계시니 이는 다른 협상안을 가져오라고 이르신 것이나 다름이 없소.”
시작은 나름대로 평화로웠다.
그러니까 시작만 그랬다.
“애초에 국내계 귀족들이 너무 매섭게 압박했소.”
“뭐요? 이 사달이 난 게 우리 탓이라는 것이오?”
“적당하게 웃으면서 왕 대인의 체면을 살려줬다면 되었소. 그런데 대뜸 정치적으로 압박했소. 보시오. 그리되었는데 왕 대인이 대충 넘어가실 수가 있겠소? 수십 명의 귀족이 보는 앞에서 고개를 숙이라는 것인데 어찌 쉽사리 웃으면서 ‘자네들의 뜻대로 하지.’ 이러실 수가 있소? 아무리 계파가 다를지라도 왕 대인이 평소 국내계를 얼마나 챙기셨소? 참으로 배은망덕하시오.”
“허. 그러는 평양계는 구경만 했소? 물론, 시작은 우리가 했으나 그 뒤 평양계도 동참하여 왕 대인을 압박했소. 내 말이 틀렸소?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쪽은 아예 같은 계파가 아니오? 계파의 수장을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맹렬히 몰아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책임 회피를 하는 것이오?”
원래 정치인들이 늘 싸우는 이유는 책임 소재였다.
실질적인 문제 해결의 방안을 두고 싸우지는 않았다.
그냥 본능이었다.
“그만하시오. 우리가 지금 책임 소재로 싸울 때가 아니외다.”
“그렇소. 결국은 왕 대인을 달래야 하오.”
“옳소. 누가 시작했고, 누가 부채질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소. 온화한 왕 대인께서 한마디를 하셨다고 하여 들이박은 것 자체가 문제요. 좋게 고개를 숙이면서 웃음으로 사정하면 적당하게 양보하셨을 건데 이걸 못한 게 아니겠소?”
“사실 왕 대인께서는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런 식으로 노여움을 표출하지는 않으셨소. 그러나 이번 농사는 왕 대인께서 크게 힘을 기울이고 계셨는데, 우리가 마음대로 하니 평생 최고로 화를 내신 것이외다.”
“바로 그것이오. 하면, 어찌 하는 게 좋겠소?”
“이런 건 정도가 없소. 그냥 찾아가서 사정하는 게 옳소.”
“하긴. 왕 대인께서 어떤 주춧돌을 쌓고 계시는 것도 아닐 것이니 말이외다.”
“그렇소.”
그러나
“크, 큰일 났소!”
귀족 한 명이 사색이 된 상태로 회합장에 뛰어 들어왔다.
“와, 왕 대인께서 경작지에의 우리 농부들을 모두 쫓아내셨소!”
이 말에 귀족들의 표정이 무참하게 일그러졌다.
“하. 과하시군.”
“선을 넘으셨소.”
“갑시다.”
“그래야지요.”
귀족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운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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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도성은 발칵 뒤집혔다.
내가 ‘선전포고’를 한 뒤 경작지에서 귀족의 인부를 모조리 내쫓았기 때문이었다.
막상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귀족들은 격렬하게 항의했다.
집까지 쫓아와서 진짜 ‘개’처럼 따졌다.
아예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살기까지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어제 보였던 정치력과 최소한의 예의조차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무례함이었다.
그런데 단지 경제적 이유 때문일까?
이들이 곳간을 더 채우고자 이러는 걸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부자가 더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게 당연하다고 하지만 이들은 단지 부자이기만 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정치권력을 위하여 외길을 달려온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부자’들이었기에 단지 돈만 바라보는 부자의 세계로는 절대 접근할 수는 없었다.
이건 일단 됐고.
나는 불청객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툭 던지듯 말했다.
“이러다가 내란을 일으켰겠지.”
“아니, 대인. 그러니까······예?”
내란, 조금 더 친근하게 말하면 역모.
이를 언급하자 분위기는 경직됐다.
“평양계 그리고 국내계, 합쳐서 귀족. 원래 제 입맛에 맞는 태왕이 즉위하지 않으면 내란을 일으키는 게 고구려의 유구한 전통이 아니었나?”
“대인.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란이라니요? 이번 일은 대인과 소인들의 일입니다.”
“나와 자네들의 일이니 내가 말을 하는 걸세. 그리고 내가 어디 틀린 말을 했나? 태왕의 정치적 기반 아니 ‘지역’이 어딘가에 따라서 내란을 일으켰네. 그러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태왕이 누구냐에 따라서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으니 내란을 선택한 거 아니겠나?”
“대인. 우리 평양계는 내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상황이 괴이하게 돌아가니 평양계부터 구조선에 올라탔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는 저들을 구조해줄 생각이 없었다.
평양계 귀족들을 바라보며 비웃었다.
“그건 자네들이 원하는 걸 얻었으니 그리한 것이지.”
“아니······.”
“자네들은 근왕파가 아니던가? 그런데 왜 근왕파인가? 군왕을 하늘처럼 떠받들기에 근왕파인가? 아니지. 군왕이 자네들과 한배를 타고 동고동락해서 근왕파지. 아닌가?”
왕권강화는 왕권‘만’ 강화하는 게 아니었다.
본질적으로 근왕파의 힘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달리 말할 때 국내계 귀족이 ‘옹립’한 태왕이 등장하면 그들이 근왕파로 입장이 바뀔 것이다. 왕의 행위가 자신들의 이익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지금껏 왕은 주로 평양계와 가까웠기에 그들이 근왕파였던 것에 불과했다.
이는 너무나도 기형적인 구조였으며 결과적으로 고구려는 지금껏 왕권 강화를 이룬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왕은 존재하기 위해서 근왕파‘인’ 귀족의 세력을 키운 것이니까.
아니, 상식적으로 왕권이 강대한데 태자 책봉에 불만을 품고 내란을 일으킬 리가 없다. 또, 왕이 바뀌었다고 귀족들이 신왕에게 들이박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니 이 시절 고구려의 왕권 강화는 왕권의 전제화 혹은 절정의 왕권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평양계와 국내계의 대립으로 인한 정치적 분열의 다른 말에 불과했다.
나는 이를 적나라하게 말한 것이다.
그러자
“대인. 경작지의 일입니다. 어찌 이러십니까.”
저들은 다시 어물쩍 현상을 꺼냈다.
“일전의 일은 소인들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늘 그렇듯 본질은 귀찮고 아프며 복잡한 것이니 말이다.
지금은 경작지 문제만 잘 마무리하면 대충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습니다. 비약이 과하십니다.”
“또한, 작금의 고구려는 내란이 없습니다.”
“하하하. 대인. 경작지를 분배하는 일인데 내란이라니요. 대체 어떤 이가 그토록 생각이 없겠습니까.”
이렇고, 저렇고 말이 너무 많다.
나는 정치적 언어가 난무하는 게 싫고 귀찮다.
그래서 딱 잘라서 말했다.
“왜 관계가 없나? 내란을 일으킬 힘을 비축하는 게 자네들의 최대 목표가 아니었나?”
“······.”
“······.”
“······.”
“······.”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모두 나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는 평양계와 국내계가 없었다.
‘나’와 ‘저들’이 있을 뿐이었다.
“확실하게 말해주겠네. 내란을 일으킬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시도하게.”
이걸로는 부족한 듯하여 말을 더 보탰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야겠군. 자네들이 대동단결하여 덤비면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네. 그러니까 말일세. 지금은 그렇다는 걸세.”
“······.”
“오직 지금만 승산이 있으니 더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가서 회합하게. 한데, 이건 명심해두게. 내게 1년이라는 시간이 있으면 자네들은 모두 죽어. 그러니 지금 당장 거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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