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농자천하지대본(5)
23화 농자천하지대본(5)
분위기가 전과는 달랐다.
산만하고 살벌하다고 해야 할까?
늘 호탕하게 웃으며 전쟁을 부르짖던 고구려인들에게서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몇 명이 여기저기 다친 상태였다.
피도 보였다.
놀라서 물었다.
“자네들 싸웠나? 한심하군.”
“허. 대인. 소인들을 대체 어찌 보고 이러십니까.”
“애도 아니고 왜 싸웁니까.”
“맞습니다. 싸움은 남쪽이나 서쪽으로 가서 하는 것이지요.”
“평소 우리끼리 싸우면 전투할 때 큰일 납니다. 미워서 안 도와주고 싶어지니 말입니다.”
고작 한마디 했는데 여기저기서 득달같이 따졌다.
거참. 무서워서 말을 할 수가 없다.
“아니, 그러면 왜 피를 흘리고 있나? 넘어졌나?”
“허. 돼지 새끼들이 열받게 해서 이렇게 됐습니다.”
“응?”
“이놈들이 울타리 밖으로 탈출하려고 하길래 손을 좀 봐줬더니 건방지게 덤비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주 박살을 내줬습니다.”
“······.”
“아주 건방집니다. 하는 거라고는 먹고 싸는 것밖에 없는 돼지 새끼들이 말입니다.”
······돼지가 도망칠 일은 없겠구나.
여기저기 피를 묻히고 씩씩거리는 사내는 정말 소도 잡을 것만 같았다.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소는 한 마리씩 잡아 올 덩치이긴 했다.
모든 고구려인이 다 이런 체격은 아니었는데 전쟁 좋아하는 백성은 높은 확률로 이랬다.
그나저나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하기 어려운 가보다. 돼지나 잡고 이러는 걸 보니까.
“자네들은 왜 돼지에게 호승심을 느끼나?”
“기분 나쁘지 않습니까. 돼지 따위가 건방지게 말입니다. 허. 이제 알 거 같습니다. 저 돼지들 딱 신라인들처럼 생겼습니다.”
“응? 그러고 보니까 진짜 신라인처럼 생겼는데?”
“지독하게 닮았군.”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신라에서 온 돼지였군.”
“자. 들어가지. 더 패주자고.”
황당해서 말리려고 할 때였다.
“다들 뭐 하나?”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들리자 조금 전까지 돼지에게 호승심을 보이던 이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진짜 순식간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가서일을 바라봤다.
“자네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가?”
“소생은 평생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소생은 붓을 잡을 때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습니다. 그 손끝에 느껴지는······.”
“됐네. 어련하시겠나.”
“한데, 어찌 오셨습니까.”
“아. 탈이 없는지 보러 왔네.”
내 물음에 가서일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수퇘지가 가장 문제지요.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음.”
“울타리도 몇 번 부러져서 두들겨 팼습니다.”
“······.”
이 사람들에게 돼지 맡겨도 될까?
남진하기 전에 다 멍들어 죽는 게 아닐까?
본질적인 의문이 치솟았다.
“아주 고집이 있었으나 여기 일하는 이들도 보통은 아닌지라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눈빛으로 통제하는 당신이 더 보통이 아니야.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이대로 강행해도 문제는 없겠나?”
“고생은 하겠지요. 그런데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되는 것이지요. 무조건 해내겠습니다.”
“인력을 더 보강하면 아주 사나운데 통제할 수 있는 돼지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먹는 건 잘 먹었으면 좋겠네.”
“방목을 생각하십니까?”
“사육하면 제일 좋은데 방목해야 할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걸세.”
“한데, 돼지의 분뇨를 모아야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조금 적게 모아도 될 것 같네. 그러니까······.”
자고로 실무 책임자에게는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돼지 3만 대군을 꾸려 한강으로 진군하겠다는 나의 원대한 말을 들은 가서일은 그냥 담담하게 반응했다.
“좋군요.”
괜히 민망해졌다.
“훗날 이 내용을 벽화로 그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래. 참으로 좋은 생각일세.”
예술인의 예술혼은 걷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네가 볼 때 돼지를 잘 키울 수 있겠는가?
“순한 돼지도 있습니다. 이놈들은 울타리에 가두고 설치는 놈은 방목하면서 잘 버무려주면 될 것 같습니다.”
“······.”
“음. 그리고 역을 내려서 목장성을 세울 수는 없으니 울타리라도 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을 대비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수퇘지가 울타리와 겨루려는 순간 잡아서 패면 될 것이니 말입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때리지는 말고.”
“어쩔 수가 없습니다. 또한, 실제로 몇 번 맞고는 탈출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신 있습니다. 그러니 소생을 믿어주십시오.”
“······어련하겠나. 알아서 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현장 책임자의 판단은 존중해주는 게 옳았다.
“그런데 말은 준비가 되겠습니까?”
“말?”
“방목하려면 말이 있어야지요.”
“아.”
“저들은 말을 아주 잘 탑니다. 아마 방목하면서 말을 타게 하면 신이 나서 일할 겁니다. 음. 생각해보니 말을 타며 돼지를 방목하는 고구려인이라. 허. 운치 있군요. 그림으로 남겨야겠습니다.”
“그건 알아서 하게. 그래. 몇 마리가 필요하겠나?”
“일단 인력은 200명 정도 충원해주시고, 말은 1천 마리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
가서일, 전생에 뭐였을까?
어쨌거나 이건 연자유와 잘 이야기해봐야겠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걸 말했다.
“부지런히 새끼를 치도록 해야 할 것이네.”
그러면서 문서를 하나 내밀었다.
제민요술 등에서 돼지의 산후조리와 관련한 내용을 따로 적어 정리한 것이었다.
“자네만 믿겠네.”
“돼지 500마리당 인력 100명과 말 500마리를 충원해주셔야 합니다.”
“······일단 진행해보게. 적은 인력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길 바란다네.”
“물론, 절반의 인력만 있어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어 나가는 돼지의 수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충원하겠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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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왕명을 수행하던 의연은 최근 이뤄진 고구려의 변화를 유심히 살폈다.
“농업과 유학이라.”
“넣어두게.”
“아니, 어찌 그러십니까. 소승은 그냥 곱씹어본 겁니다.”
혜자는 넘치는 의욕을 감당하지 못하는 의연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곱씹으면 꼭 행동으로 옮겨서 한 말일세.”
“이런. 어찌 아셨습니까.”
“자네가 불가에 출가할 때도 그러지 않았나? 왕권 강화를 갈망하는 왕 대인의 간곡한 호소를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홀로 며칠 곱씹었네.”
“그걸 기억하고 계십니까? 하하하. 소승이 원래 홀로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더디게 하지는 않습니다. 고민은 어디까지나 고민이지요.”
“알지. 머리를 깎으면서도 출가 안 하고 고민하지 않았나? 심지어 법명을 받았을 때도 출가를 결심하지 않았네. 법복을 입고 다니면서도 승려가 아니라고 했네. 자네가 승려임으로 선언한 건 서토로 떠나기 하루 전날이었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군. 대체 왜 행동이 그렇게 빠른가? 머릿속으로는 계속 생각하고 있으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몸서리치는 혜자를 보며 의연은 빙그레 웃었다.
“어떤 과정을 거칠지라도 잘하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승은 여태껏 실수한 적이 없습니다. 늘 잘했고 승승장구했지요.”
“그저 자네 인생에게 실수를 할 뿐이지.”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하는 말일세. 이번에는 괜히 곱씹다가 실수하지 말게.”
“무슨 말씀입니까?”
“고구려는 늘 국시가 거론될 때는 정치 질서에 변화가 생겼고 종국에는 대규모 숙청이 있었네. 한데, 이번은 다르다네. 기층의 변화부터 시작되었지 않은가. 늘 주체 세력이었던 귀족은 객체화가 되고 있네. 나는 이를 가볍게 여기지 않네.”
“음.”
“누군가의 의도를 떠나서 휘말린다면 큰 화가 미칠 것이네.”
진심이 가득 담긴 경고였으며 충고였다.
의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대사. 단지 호기심이 아닙니다. 농업과 유학은 고구려의 체질을 아예 바꿀 것인데 이를 알아보지 않는 건 소승에게 참을 수 없는 괴로움입니다. 심지어 소승은 고구려의 누구보다도 유학을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자네가 유학에 조예가 있다는 건 알고 있네. 그래. 하면, 알아만 볼 것인가? 멈출 수 있는가?”
“반대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반대할 것인가.”
“농업과 유학의 결합을 더 곱씹어보겠습니다.”
“허.”
혜자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반대를 결정했나? 그러지 말고 이번에는 철저하게 다 곱씹은 뒤 행동하게. 이보게. 벌써 일어나지 말고.”
“하하하. 이런. 또 오겠습니다. 대사.”
의연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떠났다.
그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혜자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불자와 유자의 길이 어디서 만나는지가 중요할 것인데.”
눈으로 보면 잔잔한 파도였으나 파급은 묵직했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 어찌 처신해야 하는지 혜자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래서 왕고덕에게 전폭적으로 협조하는지도 모른다.
또, 그래서 의연이 싫은 말은 최대한 삼가며, 불자로서 잔잔한 몇 마디 말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오늘 그의 말은 불자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비판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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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하다.
그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궁극의 방패가 있다.
“남진해야지. 안 그런가?”
“하.”
연자유는 기가 막혔는지 그냥 쳐다만 봤다.
하지만, 나는 잘못한 게 없다.
“만백성의 염원을 담은 남진을 준비하는 것인데 어찌 반대하나? 참으로 당황스럽군. 안 내키면 지금이라도 가서 다 취소하겠네. 아니, 을지문덕부터 다시 소환하겠네. 그 먼 길을 뭐 하러 보내나? 나도 이렇게 살다 가면 그만일세. 사는 데 불편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
“관두게.”
“말 1천 필을 지금 어디서 구합니까.”
나는 버럭하며 말했다.
“거기까지 내가 다 할 거면 자네는 왜 그 자리에 있나?”
“허.”
“관두게.”
“휴. 알겠습니다. 구해오겠습니다.”
말을 구하게 되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밥 먹지. 자네 오면 주려고 사슴 고기를 준비해뒀네.”
“이미 입맛이 없어졌습니다. 싹 사라졌습니다.”
“혼자 먹겠네. 그런데 소는 언제 오나?”
“며칠 내로 당도할 겁니다. 그런데 세 번은 권하는 게 고구려 법도 아닙니까?”
“어서 들게. 그러면 날랜 이로 3천 명 정도 준비할 수 있겠나?”
“형님?”
그의 목소리에서도 살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당당했다.
“일전에 말한 그 일을 도모할 때가 됐네.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네.”
“확실합니까?”
“물론일세. 그들이 돌아가며 농사를 짓고, 훈련도 하고 그럴 것이니 염려 말게. 내가 다 계획이 있네.”
“하. 형님이 농업을 부르짖으면서 평양 도성이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결과로 화답하겠네. 그거 그냥 먹지 말고 상추에 쌈을 싸 먹게.”
“됐습니다.”
“먹어보게. 괜찮네.”
“거참. 음······괜찮군요.”
“앞으로는 그리 먹게.”
모처럼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질 때였다.
사랑채의 문이 열리더니 이문진이 들어왔다.
그런데
“······.”
“······.”
“······.”
나와 연자유 심지어 이문진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상호 간에 어색한 눈길을 주고받은 뒤 안쓰럽게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벌에 쏘였나?”
“황충의 알을 구하다가 벌집을 건드렸습니다.”
“······괜찮나?”
“······.”
FM 이문진이 이런 반응이라면 진짜 아프다는 의미였다.
“의원에게 안 가봐도 되겠는가?”
“이미 다녀왔습니다. 소생은 괜찮은데 다른 이들은 제법 크게 다쳤습니다.”
“허.”
벌은 무서운 곤충이다.
“······.”
그래. 무서운 곤충이지······?
여차하면 사람도 죽이고······?
지식을 꺼내 봤다.
대한민국 기준 동아시아 ‘현존 최고’ 농서였던 가사협의 제민요술은 화북 지역의 농법을 집대성한 것으로······됐고. 정확한 편찬 시기를 가늠할 수 없으나 550년 전후였다. 지금으로부터 바로 직전이었는데 제민요술에는 ‘양봉’에 대한 기록이 없다.
돼지는 있고 소도 있고 양, 닭, 나귀, 노새, 거위, 오리 심지어 물고기 기르는 방법도 있는데 양봉은 없다.
그러니까 이 시절 벌을 키워 꿀을 확보하긴 했으나 농서에 기록될 정도로 집대성된 것이 아니라고 유추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양봉 기술이 제대로 발전한 건 여말선초다.
결론적으로 나는 천재라는 것이다.
이 정도면 근현대에 회귀에서 핵탄두를 개발하는 수준이 아닐까 싶다.
“지필묵 꺼내게.”
“예? 대인. 소생의 손가락이······.”
“형님. 일단 밥부터 먹이시지요. 게다가 벌에 쏘인 사람인데 어찌······.”
다 무시하고 말했다.
“수나라와 신라의 국경을 일거에 교란할 방책이 떠올랐네.”
“자네 뭐 하나? 당장 지필묵 챙기게.”
“이미 붓을 들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할 일을 전했다.
“자네는 인력 200명 전후를 준비해주게. 문진은 적고.”
“형님. 갑자기 200명은 왜······?”
“시끄럽네. 200명으로 양국의 국경을 교란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따지나? 아. 준비됐나? 적게. 벌이 다른 곳을 향하여 이동할 때는 둥글게 무리를 이어서 간다네.”
벌이 낮게 날면 먼 곳을 향하고, 높게 나면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것인데, 기다렸다가 고운 모래흙을 벌 떼에게 뿌려 맞게 하면 잠시 멈춰서 수목 따위에 매달린다.
“이때 득달처럼 달려들어서 잡아야 할 것이네. 또한, 표주박 안에 꿀을 약간 발라서 벌떼 곁에 기울여서 벌떼를 쓸어서 넣는 방법도 있네. 그리고 여왕벌은······.”
솔직히 어떤 방법을 양봉을 일궈낼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이럴 때는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다 해보면 된다.
임원경제지, 천공개물, 산림경제, 사시찬요, 본초강목, 봉기 등 내가 아는 양봉과 관련한 모든 내용을 쏟아냈다.
이 중 한 가지는 성공할 것이다.
물론, 벌집에 모든 벌이 옹기종기 모여있지는 않다.
나가서 일하느라 바쁠 것이다.
그런데 모여 있는 애들만 있어도 충분하다.
벌집을 대량으로 확보하면 되는 것이니까.
또, 일하러 갔는데 집이 없어진 애들도 잘 활용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황충과 돼지 그리고 벌.
자연의 백만 군세로 동아시아 전역에 재앙을 내린다.
그리하여 이 땅이 곧 농신(農神)의 성지(聖地)로 거듭날 것이다.
다시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시절 농업 전문가는 인프라가 없으면 아무런 힘도 낼 수 없는 과학자 100명보다 강력하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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