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농자천하지대본(3)
21화 농자천하지대본(3)
고구려는 북위와 북제 그리고 북주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여기까지 왔다. 북중국의 주인이 바뀌는 걸 여러 번 경험했기에 더 긴장했다. 그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저들은 늘 새로운 시작을 알릴 때 고구려를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양성을 중심으로 고구려의 중추가 모두 모였다.
모두 모였을 때 중국의 정세를 파악하고 온 의연이 차분하게 발제를 이어갔다.
“양견은 뛰어난 인물이옵니다. 그가 수나라의 황제가 되었다는 건 우리로서는 좋지 않은 징조입니다. 또한······.”
양견의 객관적인 능력은 이미 의미가 없다.
수나라가 등판했다는 것 자체가 재앙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심장이 따가워질 정도였다.
어차피 이기는 역사라는 건 알지만,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나는 글자로 봤을 뿐이다.
역사의 한 장면으로 인지했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수나라와 싸웠던 고구려의 처절함을 어찌 활자로 담담히 읽은 내가 다 알 수 있겠는가.
수백만 명을 동원하는 통일 중국의 압박이라는 건 아무리 담대하다고 할지라도 쉽사리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더 고민이 깊어지는 대목은 이 시절 고구려인들에게 수나라의 등판은 북위-북제-북주로 이어졌단 왕조의 교체로만 인지될 것이라는 부분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농업 정책에 전념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힘을 비축하며 고구려는 ‘여기서도’ 이겨낼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고구려인들을 만나며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일까?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 시절 사람들을 떠올리니 꼭 기다리는 것만이 능사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양견······수나라······.”
고양성의 무거운 목소리에 상념을 거두었다.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졌고 표정은 어두웠다.
“폐하. 어찌 그리도 근심이 가득하시옵니까.”
묵직한 저음의 주인공은 백발이 성성한 노장, 고흘이었다.
“심려치마시옵소서. 만일, 양견이 무도한 행동을 한다면 신이 대군을 이끌고 물리칠 것이옵니다.”
고흘은 일흔이 다된 나이었는데도 강렬한 노익장을 과시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을 허언으로 듣지 않았다.
선왕 시절 고구려의 요서 통제력을 무너뜨리고자 백암성을 공격하던 돌궐을 격퇴한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여담이지만 그는 최고라는 수식어답게 만 단위 병력을 아무런 무리 없이 통솔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장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으나
“당장 왕명을 내리신다면 신이 진군할 것이옵니다. 신을 믿어주시옵소서.”
고구려인답게 호전적이었다.
아니, 최고의 무장답게 스케일이 남달랐다. 다른 귀족이나 백성들처럼 고작 신라를 상대하는 남진이 아니라 대륙을 해서 칼을 꺼내자고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의 말에 고양성은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찌 장군을 믿지 못하겠소. 나는 양견이 ‘찬탈’했기에 우려하는 것이외다.”
“폐하. 어찌하여 찬탈을 우려하시는 것이옵니까?”
“내전이 아니라 찬탈이라서 그러오. 나라의 주인이 바뀌는 건 늘 있는 일이오. 그런데 바뀔 때 바뀌더라도 수십만 명 아니 최소한 수만 명의 병력이 충돌하여 양패구상의 끝에 바뀌어야 하는 것이외다. 저들은 분열하고 다퉈야 하오. 새로운 나라가 태동할 때 치열하게 싸우고 죽어야 하오. 그래야 쇠약해지기 때문이오.”
중국에서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고양성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모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만 저들은 숨을 고르며 남쪽으로 가지 못하고, 동쪽으로도 억지웃음을 짓게 되오. 한데, 찬탈이라니. 너무 손쉽게 저 넓은 땅을 차지했소. 참으로 개탄스럽소. 몇 명 죽지도 않았는데 저 땅의 주인이 되었으니 얼마나 의기양양하겠소이까.”
“폐하. 만일, 양견이 감히 고구려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고자 날뛴다면 신이 기어이 정벌할 것이옵니다.”
“하하하!”
고양성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장군.”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패권은 우리의 힘으로 확보하는 것이외다. 내가 이미 이를 입증했거늘 아직도 저들에게 패권을 구걸하고자 하오?”
“신이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이 죄는 전쟁에서······.”
“그만하시오.”
고양성은 손을 내저으며 의연을 바라봤다.
“어떤가. 내전으로 힘을 쏟았기에 수세적으로 수성에 임했던 시절과는 달리 넘치는 힘으로 남진을 시작할 것이라고 보는데.”
“신도 그리 보았사옵니다. 양견은 진을 정벌하고자 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당장 도모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 역시 내부를 정비하긴 해야 할 것이니 말이옵니다.”
“결국, 시간문제인가. 역시 가장 좋은 경우의 수는 양견이 남진에 실패하여 남북의 대치가 고착되는 것일세. 하지만, 어찌 요행에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러하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나라의 등장을 그간 있었던 왕조의 교체로만 인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지금부터 고구려의 모든 방침은 양견이 남정에 성공할 수도 있다는 가정 아래 움직여야 할 것이네.”
고양성의 판단은 결이 달랐다.
“모두 내 말을 이해하셨소?”
역사를 아는 나로서는 감탄만 새어 나왔다.
거의 완벽한 수준의 정세 분석이었으며 예측이었다.
괜히 이 시절 사람들이 고양성을 외교의 절대자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지도를 보던 그의 입가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만일, 양견이 서토를 하나로 통합하면 넘치는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외다. 동방의 패권이 존재했던 역사 자체를 박멸하고자 할 수 있으니 방비해야 하오.”
“폐하. 심려치마시옵소서. 신이 선봉에 서겠사옵니다.”
고흘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냥 앉아 있으시오.”
외교 문제를 논의할 때는 가만히 있으라는 책망이었다.
고흘은 멋쩍게 웃긴 했는데 별로 민망해하는 느낌도 아니었다.
“그러하옵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는데, 느리기까지 했다.
바로, 고씨 가문의 수장, 태대사자 고식이었다.
원래 고씨는 아니었는데 선대 고밀이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며 왕성을 하사받았다. 중요한 건 아니고 지금은 연자유와 더불어 차기 평양계의 수장으로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바꿔 말해서 내 밑이다.
“지금 우리는 싸우기보다는 내실을 다지고 적의 빈틈을 노려야 하옵니다.”
고구려인치고는 드물고 느릿한 말투였고 얼핏 들으면 온건한 외교파인 것 같지만 결국, 고식 역시 호전적인 물이었다. 아직 아무런 생체 반응을 보이지 않은 수나라를 이미 ‘적’이라고 규정한 것 자체가 그랬다.
하긴, 보수파에 속하는 국내계도 국시는 남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연나라와 전쟁으로 왕성을 하사받은 고식 가문이 온건하다고 보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폐하. 적의 빈틈이란 결국 외통수가 아니겠사옵니까?”
“참으로 옳은 말을 하였소. 만일, 양견이 남정에 성공한다면 우리가 또 다른 진을 세상에 꺼내면 될 일이오. 즉, 돌궐이 수를 견제하기 시작하면 이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외다.”
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바를 말했다.
“폐하. 양견과 돌궐이 모종의 관계가 있사옵니다.”
“자네가 서토에서 경험한 사례를 중심으로 돌궐의 일을 더 세밀하게 파악하게. 지금껏 쌓은 정보도 충분하지만 이를 더 면밀하게 살펴야 할 것이네. 내가 직접 챙길 것이니 빈틈은 없어야 할 것일세.”
사실상 대 중국 외교를 맡기겠다는 말이었다.
의연이 자신감 있게 답하려고 할 때였다.
“폐하. 돌궐의 일은 신이 정통하옵니다. 하오니 신에게 맡겨주시옵소서.”
고식이 다시 끼어들었다.
말투는 여전히 느렸으나 다급함이 느껴지긴 했다.
그러자 고양성과 의연 아니 모두 어색하게 웃었다.
“어찌하여 그러시옵니까. 신을 믿지 못하시옵니까.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사옵니다.”
“대인. 소승이 해보겠습니다.”
“허. 돌궐은 내가 잘 안다고 했네. 어찌 섣불리 나서는가.”
“하지만······.”
의연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인께서는 너무 오래 걸리지 않으십니까.”
“······.”
의연이 돌직구를 날렸다.
고식은 완벽하고 꼼꼼하게 매사 임하지만 일하는 속도가 극악할 정도로 느렸다. 빠르게 새로운 대외 정책을 수립해야 할 고구려로서는 썩 내키지 않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일 욕심이 많은 고식이었기에 쉽사리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칭 돌궐 전문가의 고집이 느껴졌다.
결국, 고양성이 중재하듯 말했다.
“하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신은 돌궐에 정통하온데, 폐하께서 신뢰하지 못하시는 듯하여 너무나도 속이 상하옵니다. 평생 폐하께 충성을 바쳤사온데 어찌 이리도 홀대하시는 것이옵니까.”
“들어보시오. 승려 의연이 초안을 작성하고 태대사자가 마무리하는 게 좋지 않겠소?”
“폐하. 신이 다 할 수 있사옵니다.”
“내가 어찌 태대사자를 믿지 못하겠소. 한데, 의연이 양견에 대해 아는 것이 많소. 그러니 이 내용만 의연이 정리한 뒤 양도하면 될 것 같소만.”
“돌궐은 신이 하옵니까?”
“물론이오. 의연은 일단 양견과 돌궐에 대해서만 정리할 것이오.”
“신이 어찌 폐하의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하하하······.”
이쯤 되고 보면 여기까지 왕권을 확립한 고양성이 대단한 사람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막리지는 어찌하여 말이 없소?”
“아.”
처음부터 가졌던 의문은 논의를 들으면서 더 커졌다.
특히, 고양성은 수나라의 위험성을 감지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이 너무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사옵니다.”
“무엇이오?”
“왜 수나라가 남정에 성공한다는 가정부터 하시는 것이옵니까?”
“하면, 막리지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시오?”
“성공할 가능성이 크옵니다. 한데, 왜 이런 가정부터 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사옵니다. 아니,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는 건 당연하오나 이 자체도 무위로 돌리는 게 더 좋은 게 아니옵니까.”
“뭐요······?”
양견은 중국을 통일하지만 이건 원 역사의 일에 불과하다.
이곳에서는 아직 발생조차 하지 않은 일이었다.
만일, 수나라가 통일 중국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감히 고구려를 범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너무 의아했다.
왜 이런 발상을 누구도 하지 않는 것인가.
그리고
“최선은 역시 수나라가 진을 도모할 수 없도록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다시 떠올렸다.
아니, 정확하게 규정했다.
수나라는 ‘재앙’이 아니다.
통일 중국이 재앙이었다.
“폐하. 우리가 수나라를 견제하고자 돌궐과 동맹을 체결하는 건 좋은 일이옵니다.”
싸우지 않아도 된다면 건드릴 필요가 없다.
그런데 어차피 싸워야 한다.
단지 외교로 해결할 수 없다는 건 이미 고양성과 을지문덕에게 들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통일을 방해하면 되는 거 아닐까?
“하온데, 고구려가 양견의 행보를 지켜만 봐야 할 필요도 없사옵니다.”
설령 실패하여 양견이 중국을 통일하면 어찌하게 되겠는가?
원 역사대로 한판 붙으면 된다.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평소 내가 너무 생각이 많았다.
이대로 있어도 고구려는 이겼다.
승전을 이끌었던 과정이 치열하였으나 우리는 이겼다.
이러한데 역사를 아는 내가 어찌 하는 게 옳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료했다.
더 당당하게 나아가면 될 일이다.
우리는 원 역사보다 더 강해질 것이며, 을지문덕도 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금껏 저들이 감히 우리를 범하지 못한 건 다 이유가 있었사옵니다.”
우리는 지금도 강하다.
지금껏 북중국이 아니 꼬아도 고구려를 그냥 둔 건 남중국과 군사 동맹이라도 체결할까 우려한 것이었다.
“고구려가 위력을 과시한다면 수나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저들은 절대 남쪽의 적을 두고 우리를 공격할 수 없사옵니다.”
“모처럼 막리지가 속이 시원한 말을 하였소! 좋소. 내가 선봉에 서겠소!”
모두 심각한 표정을 지을 때 고흘만이 호탕하게 웃으며 외쳤다.
나 역시 대꾸하지 않고 내 말을 이어갔다.
“폐하. 수를 정벌하자는 의미가 아니옵니다. 신은 헛된 말로 국정을 어지럽힐 생각이 없사옵니다. 하오나 양견이 경거망동할 수 없게는 해야 하옵니다. 우리가 저들을 그저 지켜만 볼 이유는 어디에도 없사옵니다.”
“······.”
“신은 진실로 이렇게 생각하옵니다.”
“막리지. 서진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오? 고구려가 국력을 기울여 저들의 땅을 도모하고 단기간에 황제의 목을 취하지 못하는 순간 영원한 전쟁이 시작되는 걸 의미하오. 그간 고구려가 서진하지 않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오.”
이유는 궁금하지 않다.
어차피 내가 개입하면서 고구려의 역사는 궤를 달리하기 시작했으니까.
“아무래도 신이 서두를 잘못 잡은 것 같사옵니다.”
“무슨 말이오?”
“신은 그저 외곽을 흔들고자 할 뿐이옵니다. 후일 어찌 될지 장담할 수는 없으나 지금은 이리만 해도 충분할 것이옵니다.”
고양성의 표정에 묘한 변화가 생겼다.
“묘안이 있소?”
“농자천하지대본이옵니다.”
“내실을 다지자는 말이오? 하여, 때가 되면 병력을 일으키자는 뜻이오?”
농자천하지대본.
고구려의 국시로 사용하려니 그저 농업 진흥을 담은 의미로는 턱없이 그릇이 작다.
그러면 항아리 하나 가져오면 된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마당에 대충할 생각은 없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것이다.
“농업으로 천하를 제어할 수 있사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국시로 거듭날 고구려식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하늘 아래 아로새길 것이다.
“신이 병충해로 수를 견제하겠사옵니다.”
내가 중국에 기근을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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