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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12화 (12/199)

12화 이데올로기(2)

12화 이데올로기(2)

연자유를 물리쳤으니 이제 편안한 휴식이 시작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방문객이 있었다.

아니, 방문객‘들’이라고 해야겠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으니까.

그런데 ‘의외’는 맞았다.

바로

“왕 대인.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오늘은 밥을 얻어먹으러 온 게 아닙니다.”

국내성계 귀족들이었다.

별로 긴장할 필요는 없다.

우리 가문의 위세는 평양계만이 아니라 국내계까지 아우르는 위력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들은 보수파에 속하니 오늘 찾아온 건 나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주 편했다.

그런데

“대인. 남진을 포기하면 고구려는 고구려가 아닙니다.”

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번에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눈을 부라리는 건 옵션이었다.

“어찌 우리 고구려가 활을 내리고 쟁기나 들고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말을 타야지, 소를 탈 수 없습니다.”

“고구려는 경작이 아니라 전쟁이 어울립니다.”

아니, 이 인간들까지 왜 이러는 걸까?

어느 나라에서 보수파가 전쟁을 부르짖어?

진짜 전생에 전쟁하다가 끝을 못 보고 죽은 귀신이 고구려에 붙어먹었나?

아니면, 고구려의 어디에 마법진이 있어서 사람들의 영혼을 조정하나?

그게 아니라면 이 상황은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는 흐린 눈을 하며 귀족들을 쳐다봤다.

“분명 오늘 아침에도 해가 동쪽에서 올라왔는데 자네들이 주전론을 부르짖으니 참으로 당황스럽군.”

진심이었다.

그리고 국내계 귀족들도 진심으로 답변했다.

“대인. 이건 주전과 주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고구려가 말이 아닌 소를 타고, 활을 내리고 쟁기를 들고 다니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말과 활은 고구려 그 자체입니다.”

“이는 곧 국시, 남진과 이어지는 것이니 우리의 자부심이지요.”

“한데, 대인의 정책은 동방의 패권을 향해서 말을 타고 달리는 우리 고구려를 소나 타게 한 겁니다.”

“고구려의 국시가 농사라니요?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철회해주십시오.”

이런 걸 보고 개가 짖는다고 하는구나.

한마디를 하면 열 마디가 터져 나왔다.

그냥 다 귀찮다.

“뜻대로 하게.”

“정말입니까? 과연 대인께서는······.”

“대신 경작에 동참하지 않는 귀족에게는 살충제를 ‘배급’하지 않을 것이네.”

“당연히 경작에 동참······대인. 배급이라고 하셨습니까? 제조법을 알려주신다고 들었습니다.”

“하도 말이 많아서 생각이 바뀌었네.”

“그,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가 만들어서 내 마음대로 하는데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입을 대나? 내키지 않으면 받아 가지 말게.”

“경작이야말로 고구려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빠른 태세 전환,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더 보태주기로 했다.

“고구려의 국시가 뭔가?”

“남······.”

“이 사람 치우게.”

“대, 대인.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빨리 치우게.”

옆 사람을 바라봤다.

“그래. 이번에는 자네가 말해보게. 고구려의 국시가 뭔가?”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날 때부터 생각했습니다. 아니, 아버님의 가르침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배급할 때 가장 앞줄에 서게.”

“응당 그리하겠습니다.”

왜 사극에서 주인공과 정적들이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힘이 있으니까 매사 이렇게 편하다.

이건 단지 살충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 내가 왕씨 가문의 왕고덕이 아니었다면 살충제로 갑질하는 건 시도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평소 왕고덕이 유화적인 태도로 국내성계 귀족과도 폭넓게 친분을 쌓은 이유도 있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평소 밥도 먹으러 온 것이다.

즉, 모든 게 톱니바퀴처럼 잘 맞아 돌아간 결과였다. 이래서 사람이 평소에 잘 살아야 하는가 보다.

“보게나. 자네들도 지금 전쟁보다 수확량을 확충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행동으로 보였네. 그러니 돌아가서 잘 되새겨보게.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또 전쟁을 언급해보게나. 그 즉시 살충제 배급을 멈춰버릴 것이네. 내 말을 흘려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모두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러났다.

이대로 마무리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물리치긴 했다.

아니, 정말로 전쟁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연자유와 온달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내성계까지 반대한다고 집단 행동한 게 충격적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게다가 싸우다가 죽는 건 결국 백성들인데 말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위정자들은 다 이런가 보다.

답답해서 잠시 바람이나 산책이나 하러 나갔다.

그런데

“전쟁이 싫지만 이기는 전쟁은 해볼 만합니다.”

개간 사업에 차출된 백성 한 명을 잡고 물었는데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기나 지나 전쟁은 두려운 것이 아닌가?”

“물론입니다. 두렵지요. 팔다리가 상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한데, 대인. 이긴 전쟁에서 멀쩡하게 돌아오기면 하면 참으로 좋은 게 아닙니까.”

내가 원하는 답변은 이게 아니었다.

아니, 전쟁이라고 하면 당연히 두려워해야 하는 게 아닌가.

대체 왜 좋다고 하는 것이란 말인가.

“이겨서 돌아오면 포상이 제법 괜찮습니다. 물론, 우리 땅에서 싸우는 건 싫습니다. 이겨도 손에 잡히는 게 없으니 말입니다.”

미치겠다.

이놈의 나라는 아예 백성까지 전쟁광이다.

이 정도면 이 땅 어딘가에 있을 고구려의 혈에다가 전쟁 부적을 붙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1년 내내 거기서 굿을 하고 있다거나.

정말이지 너무 황당해서 빤히 쳐다보다가 혹시나 하고 물었다.

“······경작하느라 이주하게 될 것인데 이는 어찌 생각하나?”

“가라고 해서 가는 건데 1년 내내 농사한들 얼마나 남기겠습니까. 그런데 전쟁 한 번이면 1년을 버틸 재물을 얻게 됩니다. 이기는 전쟁이 좋습니다.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침착하게 이 상황을 정리했다.

한 마디로 엄청난 농도의 전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나라였다. 현대인인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아예 결이 다른 강도로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구축되어 있었다.

전쟁이 국시로 될 수 있었던 건 지배계급만의 리그가 아니었다. 그냥 나라 전체가 창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고 싶어 한다.

그나저나 백성들도 이렇게 호전적이니 고구려가 싸움을 잘할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며칠째 인분이나 옮기고 있습니다. 냄새가 아주 그냥 미칠 것 같군요. 전쟁의 혈향은 참으로 좋은데 말입니다.”

“크. 혈향이야말로 고구려의 냄새지. 그나저나 대인. 경작하러 가면 부지런히 땅을 파야 하는데 소인의 손은 딱 창칼 맞춤형인데 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네보다 내 손이 더 창칼과 잘 어울리지. 한데, 대인. 사실 뭐 하러 고생해서 땅이나 파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간과 노력이면 한수로 갈 수 있을 건데 말입니다.”

“자네가 농사하게. 대인. 농사는 소인의 취향이 아닙니다.”

“원래 인생은 한 방이니 말입니다.”

난세로다.

그렇다고 내가 이 사람들을 데리고 백분 토론을 할 수는 없다.

그냥 먼 산이나 쳐다보다가 서둘러 귀가하기로 했다.

연자유가 그랬다. ‘당신 혼자 고구려 전체와 싸울 수는 없어!’ 그 말이 이런 의미일 줄은 아예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그래도 백성들은 내 편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호전적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울적한 마음에 산책을 멈추고 그냥 집으로 회군했다.

홀로 술이나 먹을까 했는데 ‘또’ 방문객이 있었다.

지쳐서 그냥 돌려보낼까 싶었는데

“대인.”

을지문덕이었다.

그래도 내가 을지문덕을 문전 박대할 수는 없다.

사랑채의 의자에 털썩 앉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밥 먹으러 왔나?”

“밥은 대인께서 출타하셨을 때 이미 챙겨 먹었습니다.”

“······잘했네.”

“그나저나 가볍게 담소나 나눌까 하는데 소인에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습니까.”

“뭐라도 내오라고 하겠네.”

“하하하. 이미 차도 맛을 봤습니다.”

“내가 헷갈려서 그러는데 혹시 자네 집인가?”

“당연히 대인의 집이지요.”

“당당하군.”

“하하하!”

을지문덕의 호탕한 웃음을 들으니 나 역시 절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대화가 계속 이렇게 헛도는 건 무의미하기에 먼저 운을 던졌다.

“혹시 자네도 반대하나?”

“고토를 갈망하는 건 고구려인이라면 다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소인은 특별히 전쟁을 선호하지도 않습니다.”

“자네가 을지문덕인데 전쟁을 싫어한다고? 안 믿네.”

“소인이 을지문덕인 것과 전쟁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하하. 그런 게 있네.”

을지문덕은 온달과 같은 소장파였다.

여기에 빛나는 살수대첩의 영웅이라는 이미지까지 보태지니 당연히 호전적일 줄 알았는데 이런 답변은 다소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까 살수대첩은 방어전이긴 했다. 전쟁 싫어해도 공격해오는 적과는 싸워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왜 선호하지 않나? 다들 난리가 났던데.”

“하하하. 당연히 출정한다면 능히 적을 물리치고 고토를 도모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인이 무장으로서 가장 중시하는 건 이 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저 이런 뜻이니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가.”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긴 한데, 물어보기가 좀 어려웠다.

“음. 이번에 패서 일대에 경작을 크게 한다네. 살충제를 배급도 할 것이니 자네도 힘을 보태게.”

“하하하.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 나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을지문덕의 가문은 정말 빈한(貧寒)했다.

선대는 이름을 제대로 남긴 이가 없었다.

아마 을지문덕이 가장 출세한 게 아닐까 싶다.

이조차도 사냥 대회에서 크게 활약해서 겨우 자리 잡은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나는 역사를 알기에 을지문덕의 위명을 피부로 느끼고 있지만, 적어도 아직은 을지문덕이 고구려를 대표하는 무장은 아니었다. 지금은 온달의 그늘에 가려진 많은 소장파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왜?

아직 을지문덕은 전쟁에서 공을 세울 기회가 없었다.

온달도 이제 막 정계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수준이었으니 을지문덕은 오죽하겠는가.

이렇게 보니 대체 수나라와 싸울 때는 대체 무슨 수로 고구려군의 총사령관까지 올라갔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어쨌거나 이를 되새기니 을지문덕의 말이 이해가 갔다. 가문이 뒤를 봐주지 않을 때 무리한 욕심을 내는 건 명을 단축하는 게 이 시절 정치였다.

이제 생각해보니 왕고덕 같은 거물을 을지문덕이 편히 대하는 건 정말 은인이라고 여겨서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만일, 매번 끼니를 얻어먹으러 오는 게 정말 밥 한 끼가 소중해서 오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러니 오히려 더 궁금했다.

을지문덕의 상황이라면 더 전쟁을 갈망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일까?

왜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을지문덕이 알고 싶었는데 내 입에서 나온 건

“만일 서토(西土, 중국)가 통일되었을 때 우리에게 번국을 요구하면 어찌해야 하나?”

가정과 전쟁이었다.

“종래 우리와 북위의 관계가 아니라 아예 머리를 조아려야 할 때 말일세.”

을지문덕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재촉하지 않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역사에서 배운 을지문덕이 아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을지문덕은 어떤 답변을 할지 궁금했다.

“국운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어째서인가?”

“고구려는 단지 고구려가 아니라 동방, 그 자체입니다. 이는 우리의 국세가 곧 패권이라는 걸 말합니다. 하여, 고구려는 번국이 되는 순간 강제로 해체되는 위치에 이르렀습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호한 말이 이어졌다.

“번국이 된다는 건 오랜 세월 고구려가 구축한 질서의 붕괴를 의미합니다. 고구려의 천하를 뒷받침했던 모든 무리가 서토로 투항할 것입니다. 결국, 고구려는 패권은커녕 국성을 유지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고구려의 힘은 고구려만이 아니라 고구려의 질서에서 나오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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