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이데올로기(1)
11화 이데올로기(1)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평양도성이 시끄러웠는데 특히 국내계 귀족의 반응은 뜨겁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었다.
“대체 농자천하지대본이 무엇이기에 국시 남진을 대신한다는 것이오?”
“허. 어찌 이러십니까. 그러니까 ‘농사가 곧 국시다.’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몰라서 한 말이 아니지 않소이까. 농사가 중요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국시까지 될 일이오?”
“그러니 이야기를 해보자는 게 아니겠습니까.”
태왕과 막리지의 독대 직후 알려진 ‘농자천하지대본’은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다.
이 말이 생소한 게 아니라 농업이 동방의 패권을 상징했던 남진을 대신한다는 상황 자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정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였기에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건 너무나도 중요했고, 또 어려운 일이었다.
“음. 원론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농업을 진흥하면 군량을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건 너무 원론적이오. 그런 식이면 나라에서 하는 일은 모두 전쟁 준비가 되오. 심지어 이를 발의한 사람이 바로 왕 대인이오. 어떤 정략을 담고 추진했다고 볼 수는 없소.”
“그렇긴 하지요. 하면, 말 그대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제 전쟁은 그만하고 내실‘만’ 다지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말이외다. 내정을 좀 살피자고 국시를 치워버리다니요? 이보다 괴이한 일을 경험해보았소?”
“그럴 리가요. 이건 난생처음이 아니라 역사에서 처음입니다.”
아무리 보수적인 국내계 귀족이지만 국시의 전환을 도모한 적은 없었다. 아니, 꿈조차도 꾸지 않았다.
유화적인 대외 정책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도 남진이 없는 고구려는 고구려가 아니었다.
이건 이상함을 넘어서 어색할 지경이었다.
“음. 이걸 받으면 어찌 되겠소?”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농사나 짓겠지요?”
“······.”
“꼭 나쁜 건 아닌데 조금 이상하긴 하지요.”
“허. 조금이 아니라 너무 많이 이상하오. 우리가 유화적인 대외 정책을 주장하긴 했으나 어찌 전쟁을 아예 안 할 수가 있소? 참을 때는 참더라도 싸울 때는 과감하게 싸워줘야 하오. 특히, 남쪽에서 호시탐탐 북상을 꾀하는 신라는 때가 될 때 확실히 응징할 필요가 있소.”
그는 말이 길어지자 숨이 차는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우리가 참는다고 신라가 얌전히 있지도 않으니 말이오. 과거 그들이 북상하여 국내성 지척까지 이르렀던 걸 잊으셨소? 신라는 절대 그대로 두면 안 되는 무리란 말이오. 이를 담을 수 있는 국시가 남진이거늘 어찌 전면 폐지를 할 수 있소? 과하오.”
“하면, 반대 의사를 밝히자는 겁니까?”
“당연하오!”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처지가 어려워 전쟁을 피하고, 남진을 미룰 수는 있소. 하지만, 국시에서 끌어 내린다는 건 있을 수 없소. 이 나라의 국호가 고구려인데 어찌 농업 중심의 국가가 될 수 있소? 이건 어불성설이오!”
“그렇긴 합니다. 이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지요.”
“아니외다. 자부심이오!”
고구려의 역사는 곧 승전의 역사다.
그러한데 농사나 짓자는 건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자부심이 앞세워졌다.
작금의 고구려가 평양계 중심으로 운영되며, 국내계 귀족이 대외 정책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동방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가장 큰 지분을 가진 건 누가 뭐라고 해도 국내계였다.
지금의 상황이나 처지를 떠나서 이는 국내계의 압도적인 자부심이었다.
“적어도 우리가 선대의 위명에 누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요.”
“옳습니다. 막으시지요.”
“좋소! 우리 고구려는 누가 뭐라고 해도 말을 타고 천하를 호령하는 게 옳소. 소를 끄는 농자천하지대본이 국시라니. 만대에 남을 수치요!”
“맞소. 창칼을 내리고 땅이나 파자고요?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장 들떠 일어서지요!”
그랬다.
이들에게도 ‘전쟁’은 곧 자부심이며 국시였다.
고구려는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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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귀족 연립 정권이다. 귀족의 힘이 강해서 왕이 정국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고양성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
태왕호로 상징되던 절정의 왕권이 추락하게 된 건 이미 언급했듯이 고구려의 왕권이 시스템으로 구축된 게 아니라 평양계를 육성하여 국내계를 견제하는 왕의 용인술이 큰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을 현미경으로 조금 더 세밀하게 보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내계와는 달리 평양계는 계파가 제법 많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평양계가 기본적으로 근왕파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왕이 통제할 수 없는 독립적인 세력이 되어버렸다.
그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마음대로 움직인 시기는 장수왕 치세 전후가 전부였다.
태왕이라고 불리던 고구려의 왕권이 크게 추락한 건 바로 이들의 정치적 독립이 원인이었다. 즉, 평양계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세력을 왕이 통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내가 속한 왕씨 가문이나 정통 왕족이 아닌 국성을 하사받은 고씨 가문이 이러했다. 주된 특징으로는 사찰 세력과 아주 밀접하다는 것이다.
한편, 전통적인 평양의 토호 세력으로 천도 이후 부각된 세력이 있는데 연자유의 연씨 가문이 이러했다.
이들은 토호 세력답게 늘 적절하게 처신하며 근왕파이기도 했으나 왕권에 종속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연자유에 이르러서 적극적으로 조정에 진출하고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왕의 호위무사를 자처했고, 대외 정책도 유독 호전적이었다.
끝으로 왕권에 종속된 평양계가 있다. 이들은 상업의 성장으로 새롭게 태동한 신흥 귀족 세력이었다.
그러니까
“대인. 남진의 폐기라니요? 이는 고구려의 국시를 뜯어내는 겁니다.”
나를 찾아와서 격하게 따지는 온달이 그들의 수장이라고 볼 수 있었다.
과거 왕권의 안정이 절실했던 고양성은 제법 뼈대 있는 가문과 사돈을 맺으려고 했다.
하지만, 평강공주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정치력이 어지간한 막리지를 씹어 먹는 여인이었다.
당시 그녀가 고양성에게 했던 말은 아직도 정계에서 회자하였다.
-왕권 강화는 타협이 아니라 육성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는 불후의 명언으로 유력 귀족과 적절하게 타협하려고 한 부친을 비웃으며 ‘결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아빠!’라고 하며 온달을 만났다.
고양성은 노발대발하며 ‘호적에서 파버리겠다!’ 엄포를 놓았으나 평강공주는 쿨하게 무시하고 온달과 결혼해버렸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되자 신흥 귀족의 대표로서 공주와 결혼하게 된 온달은 정치적 입지를 갖추게 되었고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이후 일군을 이끌고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자 고양성은 ‘역시 내 사위로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라며 외치는 엄청난 태세전환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했다.
직후 온달을 수장으로 한 소장파는 평양도성의 저변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심지어 수장이 부마였기에 이들은 ‘죽어도 태왕’이라는 문장을 심장에 새겼을 정도의 근왕파적 성향이었다. 물론, 시간이 더 흐르면 어찌 될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정책을 반대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왕이 아니라 내게 철회를 청한다는 건 작금의 고구려가 어찌 돌아가는지 확실하게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나는 온달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때가 되면 남진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부마께서 오해한 것이오.”
“오해라고요? 분명 대인께서 남진할 병력으로 농사는 짓는 게 좋다고 청했다고 들었습니다.”
“······.”
“농업이 중요한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 남진의 중요함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이는 고토 수복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전에 묻겠소. 남진이라는 국시는 고구려를 위한 것이오? 아니면, 부마를 위한 것이오?”
“허. 대인.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나는······.”
말이 너무 길다.
왕을 설득했는데도 이 사람, 저 사람 다 달려와서 따지고, 나는 다시 설득하고······.
이런 과정은 너무 소모적이다.
또, 한 명씩 설득하면서 가는 건 민주주의에서나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내가 한 명씩 설득하고 손을 잡고 환호할 이유가 뭐가 있나.
그래서 온달은 그냥 정리해버리기로 했다.
“부마께서 내게 이러는 걸 공주께서는 아시오?”
“······갑자기 공주는 왜 언급하십니까.”
“누구의 생각인지 궁금해서 묻는 것이오. 공주의 생각이면 직접 폐하를 찾아가셨을 것이오. 한데, 부마가 나를 찾아왔다는 건 어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소만.”
“그건······.”
애석하게도 온달은 백전백승의 장수였으나 정치 수완은 좋지 않았다.
소장파의 눈부신 성장은 온달의 승전과 평강공주의 정치력이 톱니바퀴처럼 만나서 이뤄진 것이었다.
지금도 머뭇거리는 걸 보니 평강공주의 ‘결재’를 받지 않고 나를 찾아온 것 같다. 아니, 애초에 평강공주가 이런 사안을 온달에게 맡길 리가 없다.
즉, 평강공주가 알면 온달은 ‘상당히’ 혼난다.
“내가 공주께 독대를 청하는 게 좋겠소? 아니면, 부마가 이대로 물러나는 게 좋겠소?”
“하하하! 대인. 실은 밥 한 끼 하러 온 것이었습니다.”
“먹고 가시오.”
“하하하! 늘 감사합니다.”
그런데 소장파가 정치적 사안에서 왕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가 있나?
본질적인 의문이 생겼는데, 오래 걸리지 않아서 알 수 있었다.
“형님.”
온달을 배불리 먹인 다음에 보냈더니 연자유가 찾아왔다.
그의 표정은 상당히 안 좋았는데 ‘반대’하러 온 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온달을 뒤에서 꼬셔서 먼저 상황 파악하게 한 것 같았다.
사실 경작지의 확장이라는 건 단지 농업을 진흥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구려의 전반을 아예 흔들었다.
엄청난 인력이 외곽으로 이동하여 농사하게 생겼으니 고구려 정계의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혹시 자네도 남진을 부르짖으러 왔나?”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꼭 폐기까지 해야겠습니까?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반발도 심하고요.”
꼭 폐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숨을 쉬면 언제라도 벌떡 일어설 수 있기 마련이다.
전쟁이 국시인 나라가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눈만 뜨면 전쟁, 자기 전에도 전쟁, 꿈에서도 전쟁을 외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러니 애석하게도 지금 고구려에서 남진은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야 한다.
적어도 지금은 이게 옳았다.
“형님. 이걸 찬성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건 누가 와도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수백 년 간 이어진 국시를 농사로 대체하겠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타협점을 찾으시지요.”
“타협점이라. 그래. 내가 생각을 바꾸겠네.”
“참으로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면, 농업 중심의······.”
“아니, 경작지 확대에 동참하지 않는 귀족의 가문에는 살충제 제조법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오.”
“예······?”
내가 다시 생각해봤는데 살충제를 그냥 보급하면 안 될 것 같다.
고구려는 순수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순수한 농부의 마음을 짓밟는 이들을 통제하려면 확실한 도구가 있어야 한다.
또한, 백 보 양보하여 이들의 말처럼 대충 타협하면 어찌 되겠는가?
쌀 한 톨 들고 전쟁을 부르짖으며 총돌격을 감행할 게 뻔하다. 이건 곤란한 일이다.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말했다.
“가보게. 시간이 괜찮으면 이 사실을 널리 전해도 될 것이네.”
“형님!”
“만일, 억지로 제조법을 알아내려는 이가 있으면 내가 왜 막리지이며, 왜 왕씨가문이 고구려 제일 귀족인지 알려줄 것이네. 아. 자네는 어찌할 건가? 동참할 건가?”
“저, 저도 포함됩니까? 당연히 알려주는 게 아니고요?”
“자네가 나와 생각이 다르니 당연히 포함해야지. 안 내키면 가게.”
“아니, 우선 300명 정도 동원할 수 있습니다. 차차 더 늘려나가면 될 겁니다. 그런데 정말 이러실 겁니까.”
“아. 생각이 또 바뀌었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누구에게도 제조법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네. 나만 살충제 만들어서 ‘배급’하겠네.”
무기는 이렇게 사용하는 좋을 것 같다.
그냥 내가 움켜쥐고 있기로 했다.
“혀, 형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응? 자네는 원래 이렇게 하자고 했네. 그렇게 한다는 걸세. 다만, 대상을 국내계가 아니라 평양계도 포함한다는 것이지.”
“형님. 막리지의 권한을 이렇게 남용하실 수 없습니다.”
“아니, 농사하나 하는 걸로 부마도 오고, 자네까지 와서 이러는데 내가 어쩌겠나? 그리고 이건 막리지의 권한이 아니라 제조자가 알아서 하겠다는 걸세. 내 말이 틀렸나?”
“아니, 뭘 그렇게까지 합니까?”
“내키지 않으면 자네는 살충제 받아 가지 말게.”
“400명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좋은 자세일세.”
이러니까 참 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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