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설계(設計)(2)
10화 설계(設計)(2)
대뜸 ‘고구려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라고 도발적인 말을 던졌다.
그리고 절반의 승낙을 얻었기에 시작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리지의 방향대로 농업을 크게 일으키면 당장 한수를 도모할 수 있다는 말, 진심이오?”
이어진 말은 대단한 헛소리였다.
나는 ‘고구려가 이러니까 한수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취지였으나 고양성은 ‘네 말대로 하면 한수를 다시 점령할 수 있다는 거지?’로 알아들은 것이다.
짧게 고민했다.
그냥 ‘맞아. 내 말대로 하면 한강 유역을 다시 고구려가 차지할 수 있어. 아니, 삼국 통일도 가능해! 그러니까 하자.’라고 말한 뒤 부지런히 농사나 지어도 되긴 했다. 힘이 넘치면 전쟁도 하고 싸움도 하는 게 이 시대의 법칙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고작 군량이나 넉넉하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100만 대군을 보급할 수 있는 군량의 확보는 내가 가는 길에서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는 농업의 본질로 보는 나와 수단으로 보는 고양성의 인식 차이를 다시 확인시켜주는 순간에 불과했다.
적어도 지금은 내가 맞고, 고양성이 틀렸다.
무조건이다.
그리고 조금은 차분해지기로 했다.
지금은 머릿속이 너무 뜨거웠다.
숨을 잘게 내 쉬며 말했다.
“한수를 도모하고자 농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옵니다.”
“막리지. 농업을 단지 군량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건 아니오. 그러나 당면한 제일 과제가 고토의 수복이니 어찌 고려하지 않을 수 있겠소?”
“신이 농업을 진흥하고자 하는 건 고작 한수를 탐하는 게 아니옵니다.”
“고작이라고 하셨소?”
“그러하옵니다.”
“하면, 막리지가 품은 농업 진흥의 뜻이 무엇인지 말해보겠소?”
“통치이옵니다. 넓은 고구려 땅을 제대로 통치하기 위함이옵니다. 그래야만 고구려는 가진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사옵니다. 작금의 고구려는 힘의 5할도 사용하지 못하니 말이옵니다.”
용안은 다소 심각해졌다.
내 말을 곱씹는 듯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조금은 날카로워지기로 했다.
“폐하께서는 고토의 수복을 갈망하셨사옵니다. 하오나 신은 이해할 수 없사옵니다. 남진 정책의 목적이 백제와 신라의 기세를 꺾는 것이옵니까. 아니면 고구려의 국세를 더 팽창하기 위함이옵니까.”
“막리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고양성은 정말로 황당하다는 듯 눈을 몇 번이나 껌뻑였다.
되새겨보면 누구보다도 남진 정책에 적극적이었던 건 왕고덕의 선조 즉, 왕씨 가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러고 있으니 당혹스러울 수도 있었다.
“백제와 신라를 평정하는 것이 곧 고구려의 국세를 팽창하는 것이외다.”
“그들과 싸워 이기면 고구려의 국세가 팽창하는 것이옵니까?”
“고구려의 국세란 동방의 패권을 가지느냐로 좌우되기에 그러하오.”
장수왕 이래 고구려의 국시는 오직 동방의 패권 즉 남진이었다.
그러나 이건 내가 볼 때 지독할 정도의 허상이었고 신기루였다.
일국의 목표가 전쟁일 수는 없다.
전쟁이라는 건 국세가 강성할 때 펼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국시가 전쟁이 된다면 내실을 다지며 허물어지는 걸 부여잡을 시기에도 전쟁을 부르짖게 된다. 이러면 나라가 거덜 난다.
농업을 진흥하면 고양성이 그토록 원하는 한강도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1년, 2년 농사지어 군량을 잔뜩 확보하여 한강을 점령한들 그 어떤 의미도 없을 것이다.
고양성과 나는 여기서부터 생각이 다른 것이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내가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바라보는 방향이 다른데 어찌 성과가 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제대로 말해주기로 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고구려의 패권은 이미 무너졌사옵니다.”
고구려가 수세적인 상황에서 겨우 벗어났을 뿐, 백제와 신라를 압도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한반도는 특정 국가가 역사를 주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모두 존재할 뿐이다.
고양성은 손을 내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힘을 모아서 다시 남진해야 한다는 것이오. 막리지의 말대로 백제와 신라의 공세로 우리의 패권이 흔들렸으나 다시 올곧게 세워야 하오. 이것이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고구려의 태왕으로서 존재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소.”
또 다른 진단을 내릴 수 있었다.
과거의 영광은 오늘을 살아가는 고구려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아니, 이건 영광이 아니라 망령에 불과했다.
지금 고구려는 천만 석의 군량이 있어도 한강을 ‘영토’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폐하. 우리 고구려가 대체 언제 한수를 도모했사옵니까.”
“뭐요······?”
“한수 근처에 있는 성을 몇 개 차지한 게 전부였사옵니다. 하여,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하였사옵니까. 그 성들을 차지하여 국세를 일으켰사옵니까. 엄청난 변화가 시작되었사옵니까. 그토록 비옥한 땅에서 대체 우리 고구려는 무엇을 했사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사옵니다.”
한강 이남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는 실제 점령한 게 아니라 군사적 거점을 확보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군사 활동이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여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런 파급 효과를 배제한다면 고구려는 한강과 한강 이남의 ‘성’을 확보하여 실질적으로 국세의 팽창을 이루지도 못했다.
성만 가지고 있는데 무슨 국력의 신장이 이뤄지겠는가. 오히려 지키느라 힘만 들 뿐이다.
결국, 전략과 전술을 위한 군사 거점이 확보된 게 전부였다.
고구려는 고구려의 축조 방식을 이용한 성을 한강 이남에 남긴 게 전부였다.
땅은 주인이 없었고, 성만 고구려의 것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리고 고구려인들은 이 짓을 또 하려고 하는 것이다.
더 강성해져서 한강을 영구히 고구려의 영토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성’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고구려가 남진하여 백제와 신라를 군사적으로 이긴 건 사실이옵니다. 하오나, 이는 전략과 전술을 통한 일시적인 군사상의 승리에 불과한 것이옵니다.”
“뭐요······?”
“왜 우리의 패권이 흔들렸사옵니까. 우리의 역량은 그대로인데 그저 몇 번 싸워 이겼기에 잠시 가져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옵니다. 아니, 우리가 정녕 패권을 가진 적은 있었사옵니까?”
“막리지.”
고양성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담겼으나 내 말을 자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오늘 고양성을 설득하지 않으면 농업 혁명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결국, 수확량 조금 증가시키며 마무리될 게 분명했다.
“허상이었사옵니다. 진정 우리 고구려가 동방을 움켜쥘 수 있는 국세를 가졌다면 패권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하오나 아니지 않사옵니까. 몇 번의 패전이 곧 패권의 붕괴로 이어졌거늘 대체 우리 고구려의 힘이라는 건 무엇이란 말이옵니까.”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 시절, 고구려는 동방의 패권을 공인받았다. 그런데 현실에서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의 공세를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패권’이라는 게 오롯이 국가의 역량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막리지가 생각하는 패권이란 대체 무엇이오? 아니, 그 역량이라는 건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의 역사를 이토록 비웃는 것이오?”
“적이 3만의 병력으로 국경을 어지럽힐 때 30만의 대군으로 화답하는 게 역량이라고 생각하옵니다.”
“······.”
압도적인 국력을 예시로 답하자 고양성은 말문이 막혔다.
고구려는 늘 적과 비슷한 군사를 동원했고,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며, 힘겹게 칼을 휘둘렀을 뿐이다. 대체 무슨 패권을 가진 나라가 매번 이렇게 열심히 산단 말인가.
“막리지. 애초 불가능한 경우를 꺼내어 나를 희롱하는 것이오?”
“왜 불가능하옵니까? 신라가 3만의 병력으로 도발할 때 30만 대군으로 화답할 수 있사옵니다. 할 수 없는 길로만 걸었기에 불가능하다고 여길 뿐이옵니다.”
“대체 막리지가 말하는 고구려가 걸어온 길이 무엇이오?”
“성주의 역사이옵니다.”
“성주의 역사라고 하였소?”
“176개의 성을 가진 나라, 고구려. 이 나라에서 태왕은 군주가 아니라 성을 다스리는 성주를 총괄하는 대표에 불과하옵니다. 가장 큰 성을 통치하는 성주라는 것이옵니다. 고구려는 이런 길을 걸어온 것이옵니다.”
전쟁이 잦았던 고구려였기에 성을 중심으로 역사가 발전되었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토의 잠재력을 방치한 건 사실이다. 애석하게도 이는 맹렬하게 패배로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의 길에 불과하다.
“고구려의 전쟁은 대체 무엇이었사옵니까? 땅을 확보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게 아니라 성을 차지한 것에 불과하였사옵니다. 또한, 재물을 가져오는 것이었사옵니다. 이는 대체 무엇이옵니까? 역사가 그러하였다고 한들 내일도 같을 수는 없사옵니다.”
“······.”
“폐하. 있는 땅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는 고구려이옵니다.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들 그 땅을 소화할 역량이 없사옵니다.”
“······.”
“신이 실언했사옵니다. 고구려는 전쟁을 일으켜 땅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 성을 차지하는 것에 불과하니 말이옵니다. 폐하. 작금의 시대에 성을 더 가지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사옵니까. 성이란 비옥한 영토를 지키는 수단이 되어야 하거늘 오직 성을 위한 성이 되었사옵니다. 내일의 고구려는 이를 던져야 하옵니다.”
고양성은 침묵했다.
이제 내가 그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야 할 때였다.
“신이 패서를 돌아보았사옵니다.”
“······.”
“넓고 비옥한 땅이 가득했사옵니다. 한데, 고구려는 이를 방치했사옵니다. 어째서 그러하옵니까.”
“······.”
“고구려의 통치는 영토의 통치가 아니라 성을 뺏고 지키는 것이기에 그러하였사옵니다.”
“······.”
“신은 장담하옵니다. 성 밖의 넓을 땅을 우리가 품어낼 수 있다면 그 힘은 절로 동방의 패권을 폐하께 안겨드릴 것이옵니다. 작금의 고구려가 취해야 하는 건 고작 한수 따위가 아니라 176개 성이 지키는 광활한 땅이옵니다.”
69만 7천 호.
인구 300만여 명의 나라다.
북부 지역이 아무리 척박하다고 할지라도 먹여 살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농업 혁명은 이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해서, 막리지가 내게 청하는 것이 무엇이오······?”
“남진할 병력이 있다면 모두 동원하여 경작하는 게 옳사옵니다.”
“······.”
“신이 장담하겠사옵니다.”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남진 정책보다 더 확실하고 완벽하게 패권을 가지게 될 것이옵니다.”
쐐기를 박았다.
“폐하. 과거의 영광은 이미 망령이옵니다. 폐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내셔야 하옵니다. 고구려의 국시를 동방의 패권 즉 남진이 아니라 농업의 진흥, 농자천하지대본으로 선언하셔야 하옵니다.”
애초 전쟁이 국시인 나라는 뒤를 돌아볼 수 없다.
이를 뜯어버려야 한다.
“농업의 비약적인 성장은 태왕을 진정한 고구려의 군주로 만들어 낼 수 있사옵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농학자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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