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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9화 (9/199)

9화 설계(設計)(1)

9화 설계(設計)(1)

같은 생각을 해서 그런지 눈이 마주친 고양성과 연자유의 입꼬리가 동시에 씰룩거렸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는지 씰룩거림은 커져만 갔다. 물론, 두 사람이 한 생각이 ‘지금부터 사이좋게 웃자!’라는 식의 쓸데없는 부류일 수는 없다.

“막리지는 단지 대국적인 시야가 부족한 사람이긴 하지만 가문의 위세만으로 지금의 위치에 이른 게 아니라는 걸 이번에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사옵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외다. 작금의 정국이 유지되는 여러 요소 중 막리지의 유화적인 성품에 국내계 귀족이 감화된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소. 살얼음판 같은 작금의 고구려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이외다.”

“마치 신은 아니라는······.”

“됐소.”

막리지 왕고덕은 치밀한 정략을 입안하여 상대를 압살하는 유형의 정치인이 아니었다. 늘 양측의 대립을 중재했고, 국내계 귀족을 달래는 일에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으로 지금의 위치에 있는 건 아니었다.

늘 그렇듯 치열한 정쟁이 발생할 때 온건파는 내부의 비판을 받기 마련인데 유독 왕고덕만큼은 평양계에서도 전혀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역시 막리지는 고구려 최고의 정책 입안자가 분명하옵니다.”

왕고덕은 상당히 뛰어난 정책을 제시한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내정일 때도 있고, 외교의 일일 때도 있었다. 평양계 최고의 내정가로 꼽히는 연자유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고양성 역시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또, 왕고덕이 제시한 방향은 늘 고구려 전체를 고려한 것이었기에 탈이 생기지도 않았다. 즉, 왕고덕의 행보를 의심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고구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이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다듬는 사람들의 생각은 ‘늘’ 달랐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오. 어찌 이토록 매번 정치적인 수로 잘 키울 수 있는 정책이나 방안을 찾아오는지 모르겠소.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소. 물론, 이 모든 걸 결합하여 큰 그림을 그리는 건 바로 우리의 일이 아니겠소? 막리지가 여기까지 생각하기에는 너무 고단할 것이니 말이외다.”

이미 얼굴이 미소로 가득한 연자유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살충제를 국내계 귀족에게 알려주는 건 막리지의 평소 성정이옵니다. 하오나, 살충제를 국내계 귀족을 달래는 방책으로 사용하는 건 우리의 일이옵니다.”

“그렇소. 또한, 평야를 개간하여 경작지를 늘리는 건 막리지의 올곧은 정책이오. 그러나 경작지를 늘린다는 건 막대한 인력이 필요한 일, 종래 고구려의 성을 중심으로 한 통치가 아니라 오직 경작만을 감독하는 관리가 필요할 것이니 이를 충당하는 정치적 결단 역시 우리의 일이오.”

왕고덕이 쏘아 올린 농업 개혁이 고양성과 연자유를 만나면서 완벽한 정치적 사안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아예 다른 모습이었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폐하. 경작을 감독할 새로운 관리는 수확물로 대가를 제공할 수 있사옵니다.”

“그들이야말로 땅을 내어주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세력, 즉 근왕파의 육성이오.”

“그러하옵니다. 어디 소속, 출신이 아니라 오직 폐하만의 신하가 대거 탄생할 수도 있사옵니다.”

비옥한 농지를 관리하는 이들이 모두 근왕파라면 왕권은 비약적으로 강해질 수밖에 없다. 자고로 강력한 왕권도 사람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참으로 좋은 일이옵니다. 폐하. 상업의 발전이 작금의 부마라는 걸출한 무장의 탄생을 추동했듯이 막리지가 주도할 농업의 발전도 엄청난 지각 변동을 가져올 것이옵니다.”

“하하하. 뒤늦게 하는 말인데 내 딸이 사람 보는 눈이 훌륭하긴 하오.”

“신이 너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는 분명히 반대하셨사옵니다. 심지어 아주 격렬하게 말이옵니다. 신들이 만류하였으나 요지부동이셨사옵니다. 만일, 부마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지 않았다면 아직도 인정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사옵니다.”

“······시끄럽소.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소. 한데, 위두대형은 왜 기억하시오?”

“음. 신이 황공하겠사옵니다.”

연자유가 익살스럽게 말하며 움츠리는 시늉을 하자 고양성은 피식 웃었다.

“어쨌든 우리는 국내계 귀족에게 살충제의 비법을 제공할 때 확실하게 상황을 정리하면 되는 것이외다. 막리지는 정책을 수립할 뿐 집행은 바로 우리의 일이니까.”

“음. 폐하. 정확하게는 신의 일이옵니다.”

“허. 무슨 의미요?”

“아. 어찌 폐하께서 하나씩 집행하실 수 있겠사옵니까. 신은 그저 이런 뜻에 불과하였사옵니다.”

“하하하. 그렇지요. 나도 모르게 오해할 뻔했소.”

고양성은 방긋 웃었고, 연자유는 멋쩍게 웃었다.

“하온데 폐하.”

“왜 그러시오?”

“혹시 막리지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 건 아닐지 잠시 생각했사온데 아닌 것 같사옵니다.”

“하하하. 막리지는 오늘을 사는 사람이오. 또한, 정략을 누구보다도 싫어하는데 어찌 이를 고려하겠소. 그는 그냥 그대로 다 말하는 성정이오. 그러니 국내계 귀족도 막리지를 찾아가서 하소연하지 않소이까.”

“하하하. 황공하옵니다. 이거 아무래도 신이 살충제를 맞아야 할 것 같사옵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나 했으니 말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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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평양에 있는 저택에는 국내계 귀족이 여러 명 모여 있었다. 평소에도 회합은 자주 이뤄졌으나 주로 수세에 몰리는 정국에 한탄이나 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모처럼 다들 밝은 표정이었다.

“모두 소식 들었을 것이오. 살충의 비법을 우리에게도 알려준다고 하오.”

병충해는 정말 지긋지긋한 것이지만 사람이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이를 해결할 살충제의 등장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만일, 만들어진 살충제를 조금씩 나누는 방식이었다면 가뜩이나 수세인 정국에서 매번 평양계 귀족의 눈치나 살펴야 한다.

한데, 제조 방법까지 아예 알려준다고 하니 어깨춤이라도 출 정도였다.

“매번 느끼지만 왕 대인이 아니었다면 벌써 사달이 나도 났을 것이외다. 이번만 해도 그렇소. 만일, 살충제가 왕 대인의 방책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제조법을 이렇게 쉽게 알려줄 수는 없었을 것이오. 참으로 고마운 일이오”

“그렇습니다. 만일, 위두태형 연자유의 방책이었으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우리 앞에서 혼자 살충제를 뿌려대며 마음껏 약을 올렸을 겁니다.”

“당연하오. 무조건 당연하오. 그는 그러고도 남는 사람이오. 아니, 어디 그 정도겠소? ‘한 방울 주면 뭐 해 줄래?’라면서 우리를 괴롭혔을 것이외다.”

연자유를 떠올리자 한숨만 푹푹 나왔다.

“정국의 주도권이 평양계로 넘어간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도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하니 참으로 답답한 인사입니다. 화합이 안 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외부의 공세에 공고하게 단합하는 고구려의 전통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먼저 일어나든, 연자유가 칼을 휘두르든 사달이 났을 것이오.”

“그 전에 왕 대인이 만류했겠지요.”

“그건 그렇긴 하오.”

왕고덕과 연자유의 평판은 정말 극과 극이었다. 이 정도면 왕고덕의 품이 넓은 건지, 연자유가 강경하기만 한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나저나 이 일이 다른 방향으로 번지지는 않겠지요? 그간의 사례를 되돌아보면 왕 대인이 정책을 입안하면 연자유는 늘 정치적 사안으로 획책했습니다. 이번에도 마냥 안심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지금 우리 고구려에 특별한 쟁점은 없소. 연자유가 수작을 부리자고 해도 뭐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하긴. 기껏 해야 남진을 부르짖는 정도겠지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더 고민하지 맙시다.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다가 살충제를 받지 못하면 어찌 되겠소? 저쪽은 오곡이 풍성하게 자라는데 우리는 흉년이면 속이 상해서 밤에 잠도 못할 것이외다.”

“그 말을 들으니 무조건 받아야겠소. 다리 뻗고 자려면 말이외다.”

“좋소. 오늘 회합은 이 정도로 하지요. 추가로 일이 전해지면 다시 소집하겠소.”

“그러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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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농업 혁명 제대로 일으켜볼 생각이었다.

태왕의 동의까지 얻었으니 시원하게 개간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개발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는 대동강 하류의 광활한 평지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곡에 쌀을 포함하지 않는 나라, 고구려.

이 나라는 쌀을 구할 수 있는 옥토를 그냥 방치하고 있었다.

이대로 지나가는 건 정말 미친 짓이다.

경작해야 한다.

국운을 걸어서라도.

그런데 이곳만 이러하겠는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아니, 도성의 지척이 이러한데 다른 곳은 볼 필요도 없다.

그냥 상상할 수 있었다.

나라에서 농업을 등한시한 건 아니겠으나 그냥 방향 자체가 틀려먹었다.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고구려는 성을 쌓고, 지키고, 뺏는 게 전부인 나라였으니까.

땅이 아니라 성을 통치하는 성주의 나라에 불과했으니까.

이거 다시 리모델링해야 했다.

결심을 세우고 바로 행동에 나섰다.

목에 땀이 찼다. 아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땀이었다. 찬물을 뒤집어쓰고 싶어질 정도로 뜨겁고 찝찝했다. 그러나 내 발걸음이 향한 곳은 샤워를 할 수 있는 집이 아니라 안학궁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는 의아함이 가득한 고양성이 앉아 있었다.

“막리지? 농지를 개간하겠다고 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급히 달려온 이유가 있소?”

물론이다.

나는 오늘 나의 고민을 고양성에게 전하여 고구려의 틀을 아예 바꿔 버릴 것이다.

“음. 혹시 아직 소를 마련하지 못하여 그렇소? 그렇다면 조금 더 기다려주시겠소?”

“그 일을 고하러 온 것이 아니옵니다.”

“하면, 무엇이오?

말했다.

본론을.

“폐하. 아직 늦지 않았사옵니다.”

“무엇이 늦지 않았다는 것이오?”

“고구려의 환골탈태가 아직 늦지 않았사옵니다.”

또 말했다.

결론을.

“고구려를 다시 설계해야 하옵니다.”

한국사를 빛낸 강국, 고구려.

말도 안 될 정도로 엉망인 농업의 현실을 보고, 실체를 알았다.

그래서 나는 환호했다.

고구려의 농업 혁명은 동아시아의 지각 변동을 가져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제라도 농업이 고구려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시대를 개막해야 하옵니다.”

이는 역사의 반성에서 시작해야 한다.

“고구려가 한수(漢水, 한강)를 빼앗긴 건 이를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아니, 이게 아니다.

정확하게 팩트를 말해줄 필요가 있다.

고양성도 알고 있는 역사의 팩트 말이다.

“이는 우리 고구려가 한수 지역을 제대로 점령하지 못한 이유이옵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 전역을 완전한 ‘고구려의 땅’으로 확보한 역사가 없다.

그리고

“새로이 설계하면 가능하다는 것이오?”

고양성의 반문(反問)은 절반의 승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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