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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8화 (8/199)

8화 농업혁명의 시작(2)

8화 농업혁명의 시작(2)

고양성은 나를 신뢰했으니 흥분할 수 있다.

그런데 연자유는 아니었다.

“하하하. 형님.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나를 비웃던 자네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네만.”

“기억을 잘못하고 계신 거 같습니다. 제가 어찌 형님을 비웃겠습니까.”

그냥 무시했다. 연자유가 멋쩍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고양성은 중재할 생각이 전혀 없는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막리지. 인분 비료는 언제쯤 성과를 보이겠소?”

“비료가 성과를 보이는 건 수확을 해야 입증되는 것이옵니다. 그러니 몇 달은 걸릴 것이옵니다.”

“이런. 내가 성급했소. 살충의 위엄을 달성했더니 너무 기뻐서 이러한 것이니 이해하시오.”

그 뒤로 연이어 연자유와 혜자가 말했다.

“하하하. 폐하. 막리지가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그러하옵니다. 폐하. 부처님의 권능이 이 땅에 깃든 것이니 참으로 기쁜 일이옵니다. 이를 어찌 막리지가 모르겠사옵니까.”

아니, 이 사람들 머릿속에는 왕권 강화밖에 없나? 이 정도면 밥 먹고 소화가 잘되어도 태왕의 권능이라고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 역시 이 분위기를 밀어낼 생각은 없다. 기쁨은 나눌수록 큰 것이었고, 이들의 노선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참으로 잘됐습니다. 살충의 비법이 알려지면 국내계 귀족들이 참으로 탐낼 것이니 차후 정국을 편히 주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응?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국내계 귀족에게도 비법을 알려줘야지.”

“살충제를 나누는 게 아니라 제조법을 알려준다고 하셨습니까?”

“당연하지 않나?”

“형님. 그들은 여전히 통제의 대상입니다. 한데, 이토록 귀한 제조법을 전한다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자네는 왜 그렇게 옹졸한가.”

“거. 계속 멀쩡한 사람을 이상하게 부를 겁니까.”

“아니, 내 말을 좀 들어보게. 평양은 고구려고, 국내성은 다른 나라인가? 반목한 세월이 길지만, 그들 역시 국난이 발생하면 온몸으로 들떠 일어설 것이네. 또한, 변방이 튼튼해야 하거늘 어찌 정략을 준비하는가.”

“일단 내부가 튼튼해야지요. 반란까지 일으켰던 무리를 어찌 쉽사리 믿을 수 있습니까.”

연자유가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긴 했다.

국내성계 귀족은 선왕 시절 고양성이 태자로 책봉되자 ‘이번에는 우리가 지지하는 왕자를 책봉하라!’라면서 반란을 일으켰을 정도로 현 정권에 적대적이었다. 지금은 얌전히 있지만 언제라도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무리였다.

여기에 원래 호전적인 연자유의 성정과 살충제가 단지 농법으로 인지되는 게 아닌 시대적 상황과 결부한다면 무조건 이해할 수는 있다. 또, 연자유는 근왕파 최고의 정략가이자 내정가이기도 했으니 더 날이 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이를 동의할 수가 없었다. 수나라와 거하게 한판 붙을 운명이라는 걸 아는 나였기에 좋은 건 나눠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작 종기 때문에 한쪽 팔을 자를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가는 길은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논밭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는 농업혁명이 이뤄진 나라다. 그러자면 모든 영토에서 살충제를 살포하고, 인분을 비료로 사용해야 하는 법이다. 이게 옳았다.

“밤마다 옛날 일을 떠올리며 이불을 발로 차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걸 보니 역시 옹졸하군.”

“형님! 하. 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국내계 귀족만을 견제하는 게 아닙니다. 타국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어찌할 겁니까.”

영원히 숨길 수는 없겠지만, 중국에는 최대한 보안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농업혁명을 일으키려는 여러 이유 중 그놈들의 공격을 제대로 막아보려는 게 크다.

그런데 사이좋게 비법을 공유하면 쓸데없는 영역에서 평등해지는 꼴이다. 아니, 중국의 미친 생산력을 떠올리면 아주 끔찍한 결과가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을 조심한다고 이걸 봉인할 수는 없다. 살충제는 사용해야 살충제다. 그냥 모셔 놓으면 알아서 물먹는 하마가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고양성이 정리했다.

“이는 막리지의 말이 옳소. 만일, 경계하여 비법을 나누지 않으면 반목만 커질 뿐이외다. 타국을 우려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내부 보안을 더 철통같이 해야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오. 게다가 우리 고구려는 외침이 있을 때는 내부 분란을 멈추는 전통이 있소. 천하의 정세가 어지러우니 지금은 내실을 다지고 힘을 비축하는 게 옳소. 그러니 위두대형이 양보하시오.”

고양성이 내 편을 들었는데 연자유가 좀 꿍했다. 나는 괜히 달래고자 가벼운 말을 하나 꺼냈다.

“한데, 을지문덕은 왜 맨날 남의 집에 와서 밥 먹고 서찰 한 장 남기고 가는지 아나? 그 사람은 꼭 그러던데?”

“아까우십니까?”

“이 사람이 정말. 자네 저번 일로 아직도 꽁해 있나?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먹고 가도 되는데 서찰을 꼭 남기니 물어본 것일세.”

“제가 꽁한 게 아니라······하. 됐습니다. 어쨌든 을지문덕은 원래 그렇습니다.”

듣고 있던 고양성과 혜자도 한 마디씩 보탰다.

“막리지. 그건 을지문덕의 천성이오. 날 때부터 그랬소.”

“소승이 장담하는 데 전쟁이 발생하면 적진에 서찰 한 통 두고 올 겁니다.”

“허. 대사. 그건 너무 과하오.”

“이런. 신이 과했사옵니다. 폐하.”

연자유도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대사. 을지문덕이 아무렴 그런 행동까지 하겠소?”

“하하하. 연 대인. 소승이 농을 한 것이었습니다.”

세 사람의 만담을 들으면서 무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영웅은 어느 날, 우연히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철저한 조기 교육과 선행 학습이 탄생시킨다는 것이었다.

을지문덕이 영웅은 확실하니 말이다.

대충 분위기가 풀어지는지라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하온데, 폐하. 신이 긴히 청할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이든 말해보시오.”

“신이 이참에 농업을 크게 일으켜볼까 하옵니다.”

“이미 큰 성과를 내고 있소. 한데, 더 나아갈 수 있소?”

“물론이옵니다. 바로 농지를 확대하는 것이옵니다.”

“농지라. 생각해둔 곳이 있소?”

“패서(浿西, 대동강)의 평야이옵니다.”

“패서······?”

놀랍게도 평양도성의 젖줄인 대동강의 외곽지역도 농지 개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대성산성과 구 왕성 그리고 안학궁을 중심으로 한 중심부와 과거 낙랑군 일대를 제외하면 허허벌판이었으니 농부인 내가 볼 때는 참으로 땅을 낭비하는 꼴이나 다름이 없었다.

살충제 효과를 기다리며 다녀온 곳이 있었는데 흙을 만져보고 냄새를 맡다가 헛웃음만 100번 터트렸다.

“신이 보았사온데 패서 외곽의 땅에는 파종만 해도 쌀 240섬을 확보할 수 있는 농지가 있사옵니다.”

이 시절 장정의 1년 식량이 3섬 정도라는 걸 고려할 때 내일이라도 당장 80명의 장정을 1년 간 먹여 살릴 수 있는 땅이 평화롭게 쉬고 있다는 말이다. 겨우 80명이 아니다. 이런 땅이 얼마나 많겠는가.

정말 놀라운 일이었는데 이게 또 원인이 있다. 내가 왕고덕의 기억을 흡수한 뒤 곱씹을수록 흥미로운 건 고구려의 지방 통치 방법이었다.

이 나라는 ‘고구려 = 내평 5부 + 외평 5부 = 176개의 성’이라는 근삿값을 도출하는 공식을 수립할 수 있다.

즉, 고구려는 태왕이 모든 영토를 다스리는데 세밀하게 표현하자면 176개의 성(城)을 통치하는 것이다. 모든 통치 역량이 ‘성’에 집중된 나라였는데 이건 워낙 외침이 많았기에 전국토를 대상으로 방어체계를 구축한 결과였다.

176개의 성은 욕살이 파견되는 요동성, 오골성, 국내성 등 10개의 대성, 처려근지가 파견되는 안시성, 개모성, 백암성 등 50여 개의 제성과 110여 개의 소성으로 구성됐다. 소성 중 군사적 요충지는 가라달이 파견되고 평화로운 곳은 루초가 다스렸다. 가령 요서 지역의 무려성은 가라달이 있었다.

즉, 1개 대성 > 5개 제성 > 10개 소성이 기본 편제였다.

여담이지만 흥미로운 건 당 태종을 물리친 안시성의 성주도 2급 지방관이라는 건데······됐다.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지금의 시스템이 철저한 군사 전략을 중심으로 수립된 것으로 어쩌면 원 역사에서 수나라와 당나라를 상대로 요동 전선을 첨예하게 구축할 수 있는 위력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눈에는 고구려는 땅을 통치하는 게 아니라 176개의 성을 다스리는 나라였다. 어쩔 수 없는 시스템이긴 했지만, 농업혁명을 일으키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이걸 어찌할 수는 없기에 하나씩 내 손이 닿는 부분부터 시작해보려는 것이었다. 때가 되면 확장될 것이라고 믿을 뿐이었다.

그리고 방금 내가 언급한 땅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는 없었다. 명백하게 임자 없는 땅이었고, 임자가 없다는 건 왕의 땅이라는 의미로 직결되었다. 그래서 허락받아야 한다.

“그러하여 신이 패서의 평야를 개간해볼까 하옵니다. 또한, 우경도 크게 도입할 것이옵니다. 부디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여러 번 생각하고 머리를 박아봐도 소를 대규모로 사육해야 했다. 이미 살충제와 인분 비료가 집행되었기에 가축의 사육을 걱정할 이유는 없다. 사료는 무조건 나올 것이니까.

그런데 고양성이 아무런 말이 없다.

나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폐하?”

“아.”

“혹시 내키지 않으시는 부분이 있사옵니까?”

“아. 아니외다. 그리하시오. 내가 일러 소를 구할 방편을 마련해보리다.”

“황공하옵니다.”

그러면 이제 제대로 농사를 지어보자고.

자고로 경작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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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고덕과 혜자가 퇴궐한 뒤에도 연자유는 궐에 남았는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양성도 입을 열지 않았다.

“······.”

“······.”

의자에 앉아서 서로를 마주 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을 뿐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침묵이라는 존재에게 할애한 시간은 상당히 길었다. 먼저 침묵을 밀어낸 건 고양성이었다.

“우리 고구려의 산성 방어체계는 100만 대군이 몰려와도 감히 요동을 넘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오.”

“그러하옵니다. 외적의 침입을 겪으면서 변화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가장 완벽한 구조가 되었사옵니다.”

고양성은 턱을 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하온데, 막리지의 말이 조금 묘하였소. 어찌 생각하시오?”

“패서 전역을 대상으로 농지를 개간한다고 했사옵니다. 이를 가볍게 생각하면 패서에 국한되겠으나 전례가 남는다는 건 176개 성이 아닌 곳곳을 개간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하옵니다. 즉, 통치의 범위가 무한하게 확장되는 것이옵니다.”

왕고덕이 제안한 패서 농지 개간은 상당히 함축하는 바가 많은 정치적 사안이었다. 아니, 고양성과 연자유는 이를 정치적 사안으로 만들 의지와 능력이 있었다.

“하온데 이리하려면 백성이나 하호를 보내야 하옵니다.”

“또, 백성을 이주하자면 민심이 흔들릴 것이고, 예속민인 하호를 보내려면 귀족의 동의가 필요할 것이오.”

“게다가 이 넓은 영토 중 어디를 먼저 보낼 것이며,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지도 정해야 하옵니다.”

“그리고 늘 외적의 침략을 고민해야 할 우리 고구려로서는 허허벌판에 수백 명, 수천 명의 인력을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오. 게다가 한 톨의 군량이라도 아껴야 하는데 그리하면 소요되는······허.”

“폐하. 혹시 신과 같은 생각을 하셨사옵니까?”

“그렇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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