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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농사도 잘함-3화 (3/199)

3화 잉여생산물(2)

3화 잉여생산물(2)

평양계 귀족은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1. 가문의 시조를 무조건 고주몽과 연결한다.

2. 가문의 중시조는 무조건 연나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한다.

3. 시조는 고주몽을 모르고, 중시조는 연나라와 싸울 때 아무것도 안 했다.

1번은 고주몽이 고구려의 국조(國祖)가 되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2번은 연나라와의 전쟁이 고구려의 역사에서 분수령이라는 걸 상징했다. 고국원왕 시절 도성이 점령당할 정도로 치열하게 다퉜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즉, 1번과 2번은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위한 필수옵션이었다.

대부분 평양계 가문이 이랬다.

반면, 연씨 가문은 놀랍게도 3번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시조와 중시조의 일을 신화화하는 게 일상인 세상이다.

조선 시대의 족보 위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분 세탁이 비일비재하다는 의미였다.

다수 가문이 이렇게 신분 세탁하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평양계 가문이 대체 무슨 수로 알에서 태어난 뒤 북쪽에서 말타고 활을 쏘는 고주몽을 만나서 인맥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연나라와 치열하게 싸웠던 시기는 평양이 고구려의 세력권에 편입되었으니 가능성이라도 있다.

한 마디로 1번은 높은 확률로 투명한 사기였고, 2번은 정상참작이라도 된다.

그런데도 연씨 가문이 3번에 해당하는 이유는 양심적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국내도성 시절 정계에서 주목받지 못한 가문으로 평양을 벗어나지 않은 전통적인 토착 세력이었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즉, 국내도성에서 젓가락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는 세력이었기에 고구려를 빛낸 100명의 위인에 넣을 정도로 족보 위조를 하는 게 부담스러운 것이다.

물론, 연나라와 싸울 때 군량이라도 보탰다는 미담 한 줄 추가할 수도 있다.

혹은 중시조가 미천왕이 낙랑군과 싸울 때 북을 두들겼다거나, 고국원왕이 전사할 때 옆에서 쳐다보고 있었다는 식으로 뭐라도 할 수는 있다.

한데, 이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건 나름대로 세력이 보통 이상이라는 방증(傍證)이었다.

즉, ‘우리가 곧 역사다!’라는 엄청난 패기로 살아가는 가문이라는 의미다.

죽어도 군량 보급 따위나 했다는 식으로 족보 위조는 하기 싫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고.

여하튼 고구려의 역사가 더 길게 이어진다면 연자유가 중시조로 추존될 가능성이 컸다.

물론 거문고 왕산악 선생을 조상으로 두고 있는 우리 가문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한데,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급한 일이 아니면 밥 한 끼 내어주시지요.”

왕고덕, 당신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온 동네 사람들이 밥을 먹으러 오는 걸까?

정말로 후한 인심의 소유자였던 게 분명했다.

“당연히 대접하겠네. 한데, 그전에 나를 좀 도와주겠나?”

“무슨 일이 있나 보군요.”

“논밭에 가보려는데 자네가 앞장 좀 서게.”

“뭐. 좋습니다.”

의외로 흔쾌히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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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산비탈을 뛰어다녔다.

길이 험할 수밖에 없었기에 종종 휘청거렸다.

그 아슬아슬한 장면을 보다 못한 노인이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가만히 있지 못해?!”

그 말에 어린아이는 눈치를 살피며 슬쩍 발걸음을 옮겼다.

주눅이 든 꼴을 본 노인은 한숨을 쉬면서 손짓했다.

그러자 어린아이는 금방 웃음을 지으며 달려갔다.

“이놈아. 얌전히 놀지 않고 왜 그렇게 휘청거려?”

“일부러 어른들 따라 했어요.”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산비탈의 곳곳에 경작된 밭이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보면 수십 마리의 소와 백 명이 넘는 장정이 경작하는 광경이었으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밭마다 소 두 마리와 장정 여섯 명이 조를 맞춰서 일하고 있었다.

좌우로 배치된 소가 앞으로 걸었고, 이를 끌며 잡는 사람이 두 명, 쟁기를 잡는 사람은 한 명, 뒤따르며 파종과 정지 작업을 하는 이는 3명이었다.

소의 무거운 걸음이 이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휘청거리며 겨우 몸을 힘겹게 지탱했다.

손이 파르르 떨리고 다리를 부들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땀을 흘리며 겨우 지탱하고 있는 건 한눈에 보였다.

소나 사람이나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어른들은 너처럼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잖느냐.”

“그러면 왜 휘청거려요?”

“힘이 센 소가 걸으니 쟁기를 지탱하는 사람의 몸이 휘청이는 건 당연하지.”

그 말과 함께 노인이 아이의 손을 쓱 잡았다.

살짝 당겼으나 아이는 크게 휘청이다가 넘어졌다.

“어떠냐? 너는 이 늙은이가 당겨도 넘어지지? 하물며 소가 당기는 걸 버텨야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에 부치겠느냐.”

“그러면 소를 한 마리만 사용하면 되잖아요. 일으켜 세워줘요.”

“알아서 좀 일어나지. 저기 저건 소 두 마리를 짝 지워 쟁기 갈이를 하는 겨리(結犁)라고 한다.”

“예?”

“잘 봐. 보습이 크지 않느냐. 소가 두 마리는 있어야만 쟁기를 끌어줄 수 있지.”

“그러면 보습을 작은 걸 사용하면 되잖아요.”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거라. 땅이 거칠어서 작은 보습으로는 갈이가 안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어. 또, 비탈이 많은데 자칫 잘못하다가는 소가 밑으로 구를 수도 있어. 그래서 두 마리가 서로 지탱해줘야 하는 것이지.”

노인의 말에 아이는 움찔하면서도 호기심을 숨길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얼굴을 긁으면서 이것저것 물었다.

그중 노인의 실소를 자아내는 말도 있었다.

“우경을 한다고?”

“예. 저도 크면 우리 식구끼리 우경을 해보려고요. 꼭 소 두 마리를 구할 거라고요.”

“하하하. 이 녀석아. 소 두 마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예? 소가 두 마리만 일하잖아요.”

“한 마리는 ‘안소’, 나머지 한 머리는 ‘마라소’라고 불러. 이놈들은 각각 쟁기의 좌우에서 밭을 갈도록 훈련하는데······.”

우경은 그냥 아무 소를 가져온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특히, 두 마리를 짝지어 경작하는 겨리는 더 그랬다.

아주 ‘철저한’ 훈련을 진행해야 했다.

“이 녀석아. 소가 왜 소겠느냐.”

“미련해서 소라고 부르잖아요.”

“암. 그렇지. 좌로 훈련받으면 좌로만 가고, 우로 훈련받으면 우로만 가는 게 바로 소라는 짐승이다. 좌우를 바꿔서는 절대 일하지 않아. 두 마리가 있다고 해도 다른 방향으로 가는 소가 아니라면 짝을 지어서 일을 시킬 수가 없지. 같은 방향으로 가다가 산비탈에 굴러서 떨어질 거니까.”

“그건 큰일이죠.”

“그렇지. 그런데 어디 이뿐이겠느냐? 덩치와 나이도 비슷해. 좌우의 힘이 비슷해야 하니까 말이야. 또, 암수까지 맞춰야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암수는 왜 맞춰야 하죠?”

“수소끼리는 싸우고, 암수로 두면 수소가 게을러지니까. 사람이나 소나 똑같지.”

“아.”

“그래서 겨리를 하려면 2마리가 아니라 더 많아야 해. 그런데 소만 있으면 뭐 하겠느냐? 일할 사람도 있어야 해.”

노인의 말이 길게 이어질수록 아이의 시야는 점차 흐려져 갔다.

그러나 화자가 이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우경이라는 걸 하려면 최소한 세 집이 힘을 보태고 있지. 재물이 많은 귀족이 아니면 엄두도 낼 수 없어.”

“······.”

“저기 저 보습만 해도 마찬가지다. 귀한 철제 농기구가 손상이라도 된다면 어디서 구하겠느냐. 귀족이 아니면 어림도 없지. 그러니까······.”

아이는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물론, 노인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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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냄새가 코를 통과하여 폐를 간지럽혔다.

온몸의 피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모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환하게 웃으며 자세를 낮춰 흙을 만졌다.

정말로 너무 좋았다.

역시 사람은 흙과 가까이 살아야 했다.

“우경(牛耕)이 활발하군.”

산비탈에 있는 밭이었는데 겨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눈에 띄는 건 보습과 볏이었는데 길이와 너비가 족히 40cm는 되는 대형 농기구였다.

땅이 척박하기에 대형 농기구를 사용한 것이다.

“그렇지요. 우경이 아니면 경작하기 어려운 땅이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유심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어릴 적부터 농사를 직접 짓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기계화가 잘 도입되었던 시대에 살았고, 부모님도 엄청난 부농이었다.

그래서 소를 끌고 다니지는 않았다.

또, 사실 코 흘리고 다닐 때 해본 농사가 얼마나 전문적이겠는가.

직업 농부들이 보면 정말 애들 장난에 불과하긴 할 것이다.

대학 진학 이후에도 내가 농업을 공부한 건 맞다.

그런데 농업과 관련한 모든 걸 공부한 건 아니었다.

이것저것 맛보기를 한 학사 과정은 큰 의미가 없다.

대학원 시절에 내가 가장 주력한 건 전통 농법이었다.

옛날에 살았던 할아버지들이 작성한 농서의 현실 대입이 주된 일이었다.

교수가 이렇게 하라고 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이것만 해도 머리를 꽉 차고 시간은 부족하다.

그래서 농업의 역사는 기본만 알 뿐 세세하게 알지 못하였다.

사료가 전혀 없는 고구려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현장에서 직접 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보다 좋은 건 없다.

경작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게 한 뒤 한 명을 불러서 물었다.

“소인이 알기로는······.”

길게 이어진 그의 말을 요약해봤다.

단독으로 우경을 하려면 3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1. 소가 2마리를 넘어야 한다.

2. 6인 이상의 노동력을 언제든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3. 철제 농기구의 손상에 울지 않아야 한다.

4. 결론 : 이 시절 우경은 귀족 of 귀족의 전유물이다.

백성은 우경을 꿈꿀 수도 없는 세상이었다.

“고민은 함께 나누는 게 좋지요. 왜 그렇게 심각하십니까.”

“우경을 더 확대하면 좋을 것 같아서 그런다네.”

“그러면 좋긴 하지만, 소가 너무 귀합니다. 이를 백성들이 가지는 건 어렵습니다.”

생산력을 올려보려면 우경이 필수적이긴 한데, 상황이 너무 빡빡했다.

다른 건 어떻게든 하려고 해도 소가 필요한데,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소는 정말 사육하기 어려웠다.

귀한 몸이라서 그런지 정말 까다로웠다.

1. 다른 짐승과는 달리 번식할 때 얻는 새끼가 소수였다.

2. 겨울이 길고 추우면 소의 생존과 번식에 안 좋다. 그런데 고구려는 겨울이 춥고 길다.

3. 겨울이 길어서 사료가 엄청나게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하다.

사실 여기 와서 보니 고구려의 집마다 창고가 있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먹을 게 하도 부족하니 아껴서 먹으려고 쟁여두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동네 사람들이 검소한 것이다.

“소를 구할지라도 먹일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군.”

이게 맞는 말이었다.

어떻게든 소를 구해올지라도 제대로 감당을 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소를 키우기 적합하지 않은 기후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과장 좀 보태서 소 사료를 구하기도 어려운데 백성들에게 소를 무상으로 준다고 한들 빠른 속도로 죽고 말 것이다.

을지문덕과 혜자가 미친놈처럼 웃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농사에 가장 필요한 소를 사육하기도 어려운데, 돼지 사육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또, 고구려는 말 타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나라다.

사료 있으면 말한테 더 먹이지 않을까?

놀라운 현실을 깨닫자 대체 고구려가 수나라를 어찌 이겼는지 의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낙후한 농업 환경과 형편없는 생산력인데 통일 중국과 싸워서 이겼다는 게 진짜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역사를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절대 안 믿었을 것 같다.

수나라 놈들이 고구려를 만만하게 보고 들이박았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애초에 판돈이 비교도 안 되는데 싸움이 성립되는 것부터가 놀라웠다.

그래도 고구려는 이겼다.

고구려, 정말 대단한 나라다.

그나저나 이곳의 고구려도 아슬아슬하게 수나라와 싸울 필요는 없다.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판돈을 비슷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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