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잉여생산물(1)
2화 잉여생산물(1)
이 나라가 고려이긴 한데, 우리는 고구려라고 불렀으니까 고려가 아니다······라고 백날 떠들어도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새끼가 ‘아? 선배. 내가 실수했어요! 다시 갑시다.’라고 할 리가 없다. 보나 마나 ‘거기가 원래 오리지널 고려에요.’라고 할 게 뻔했다. 왜? 그 새끼가 내가 말한 고려가 고구려라는 걸 모르고 보냈을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이게 오히려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농업을 진흥한다면 중세보다는 고대가 더 열악하니까 내가 할 게 많다.
내가 이렇게 낙천적이다.
물론, 고대이기에 인프라는 더 열악하겠지만 이건 이대로 해볼 만한 일이다.
그러니까 생산력 10에서 20으로 늘리는 건 쉽다.
그런데 20에서 25로 가는 건 또 어렵다.
한 마디로 ‘농업 혁명’이라는 말이 나오게 하려면 이 시절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새끼한테도 말했듯 이 시절 농업 전문가라는 건 과학자보다 백배는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다. 인프라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과학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농업은 세상을 바꿀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잘된 일이다.
정말이지 나는 너무 낙천적이다.
벌써 현실에 순응하니 말이다.
“어디 보자. 일단은······.”
내가 전근대 농서를 공부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고구려 농사를 공부한 건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기록이 거의 없는 나라였으니 뭘 어떻게 했는지 내가 잘 몰랐다.
더 공부했으면 접근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멀리 갈 필요는 없지.”
왕고덕은 고구려 최고의 귀족이었다.
그러니 여기에 있으면 고구려에 있고, 없으면 고구려에 없는 것이다.
물론, 대귀족이라는 걸 고려할 때 우리 집 부엌에 있다고 하여 고구려 백성들이 다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천천히 해결하면 될 일이다.
일단 집은 엄청 넓었다.
건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안뜰의 중심에는 본채(안채)가 있었고 왼쪽에는 사랑채가 있었다.
오른쪽에는 부엌과 부속 시설이 있었다.
시계방향으로 방앗간, 우물, 부엌, 고깃간, 창고, 외양간, 마구간이 배치되어 있었다.
천천히 확인해봤는데 상당히 풍요로웠다.
미, 기장, 피, 맥류, 콩을 구성된 오곡(五穀)이 잔뜩 비축되어 있었다.
아. 고구려는 쌀이 오곡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산나물, 버섯류, 상추를 비롯한 채소와 식초, 술, 초, 소금 따위도 잔뜩 있었다.
고깃간에는 노루, 개, 돼지 등의 동물도 통째로 매달려 있었다.
한 마디로 없는 것 빼고 다 있었다.
그런데 문뜩 의아한 게 있었다.
그러니까 왕고덕의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이었다.
아직은 불안정할 수도 있으니 대수롭지 않게 하인 한 명을 불렀다.
“돼지 목장을 가보고 싶네만.”
“돼지 목장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때였다.
“하하하. 돼지 목장이 어디 있습니까. 대인. 농이 과하십니다.”
갑자기 등장한 사람이 있었는데 한눈에 보더라도 다부지게 생겼다.
만부부당이라는 말은 딱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장담하는 데 만대에 남을 위명의 주인공이었다.
정말이지 누가 봐도
“하하하! 대인 밥 한 끼 얻어먹으러 왔습니다.”
을지문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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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이 사람에 대해서 설명하는 건 그냥 시간 낭비다.
그냥 을지문덕이라는 네 글자가 브랜드며, 브랜드가 을지문덕이다.
그러니까
“······.”
전설적인 명장, 을지문덕이 지금 내 앞에서 게걸스럽게 밥을 먹고 있었다.
빤히 쳐다봤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열심히 먹었다.
이렇게 뻔뻔하니까 우중문이 속았나 싶기도 했다.
“대인. 안 드십니까.”
“난 괜찮으니 자네나 많이 먹게.”
“하하하!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며칠 굶은 사람처럼 잘 먹었다.
남의 집에 대뜸 찾아와서 밥을 달라더니 엄청난 식욕을 자랑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을지문덕은 어릴 때부터 철판 깔고 남의 동네를 잘 다닌 게 분명했다.
그래.
이 정도는 되니까 잡히면 죽을지도 모르는 수나라 군영에 찾아가서 시 한 소절 던지고 왔겠지.
전설은 그냥 탄생한 게 아니라 어리고 젊을 때부터 학습된 것이 분명했다.
“언제 먹어도 사슴 육회는 맛이 기가 막힙니다.”
극찬받은 신선한 사슴 고기는 먹기 좋게 잘게 분절되어 있었다.
을지문덕은 두, 세 점을 동시에 집어서 장양에 곁들어서 잘 먹었다.
보기만 해도 배불렀다.
“장류가 없었다면 비린 맛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정말로 이건 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대에 남을 인물인데 기록도 없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지. 그러나 자네는 꼭 기록을 남기게. 아. 그리고 채소도 먹게.”
“하하하!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건 그만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장류를 만든 위인과 저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인. 송구하지만, 육회부터 먹겠습니다.”
“아니, 음······.”
내가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냥 피식 웃으면서 상추를 가리켰다.
“같이 먹으면 더 좋을 것이네.”
“우리 고구려의 상추가 천하에서 가장 유명하긴 합니다만 육회를 먼저 먹겠습니다.”
을지문덕의 말대로 고구려의 상추는 정말 유명했다.
천금채라고 불렸는데,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구해갈 정도였다.
우리 사신이 중국으로 갈 때도 모종 따위를 챙겨가서 나눠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한 마디로 특산품이었다.
“고기를 먹는데 상추에 싸서 먹으면 더 맛있다는 말일세.”
“네. 알겠습니다.”
“······.”
내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사슴 고기만 먹었다.
무시한다기보다는 고기에 대한 집념이 대단한 것 같았다.
“자네의 고집을 보니 하늘의 이치를 알 거 같군.”
“무슨 말씀입니까.”
“농이었네. 그나저나 자네 집에서는 먹을 게 없나? 정말 며칠 굶은 사람처럼 보이는군.”
“하하하. 평양 귀족 중에서 대인의 저택보다 먹을 게 풍족한 곳은 없지요. 같은 사슴 고기도 맛이 다르지 않습니까.”
고구려 귀족은 국내계와 평양계로 양분되어 있는데, 왕고덕은 평양계 귀족의 수장이었다. 더불어 이 집안이 그냥 고구려 최고의 가문이기도 했다.
내가 직접 보기도 했듯 을지문덕의 말대로 정말 풍요로웠다.
전기만 들어오면 현대의 부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을지문덕은 유독 육회류를 좋아했다.
오자마자 내게 인사를 한 뒤 하인들에게 했던 말이 아직도 귀를 간지럽혔다.
-다른 건 됐네. 육회만 잘 챙겨오게.
이렇게 단호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대인. 안 드시면 제가 다 먹겠습니다.”
“다 먹게. 나는 입맛이 없네.”
“허. 입맛이 없다니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먹게.”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 말에 을지문덕은 잠시 멈칫했다.
표정이 조금 애매해졌는데 마치 울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상해서 물어보려고 했으나 을지문덕이 조금 더 빨랐다.
“송구합니다. 한데, 대인. 아까는 대뜸 무슨 말씀이셨습니까. 갑자기 돼지 목장이라니요?”
“안 그래도 자네가 다 먹으면 물어보려고 했네. 그래. 돼지 목장이 왜 없나?”
을지문덕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있긴 하지요. 그런데 대부분 나라에서 제사용 돼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민간에서는 돼지를 거의 사육하지 않습니다.”
돼지를 사육하긴 하는데 대부분 제사용이라는 말이었다.
“왜?”
“예? 왜 사육해야 합니까?”
“응?”
딱 그때였다.
“하하하. 두 분이 무슨 대화를 이렇게 정겹게 하십니까.”
대뜸 사랑채의 문이 열리더니 승려 한 명이 들어왔다.
당대 최고의 고승 중 한 명으로, 법명(法名)은 혜자.
현대 한국에서는 왜국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 중 한 명으로 평양계였다.
그가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모처럼 밥이나 한 끼 하러 왔는데 선객이 있었군요.”
여기가 맛집인가 보다.
“하하하. 대사.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왕 대인께서 농을 하셨습니다.”
“이런. 무슨 내용인지 내가 늦게나마 들어도 되겠나?”
“돼지를 어디서 사육하냐고 이르지 않으셨겠습니까.”
“이런! 돼지를 사육한다고요? 하하하! 왕 대인. 올해 가장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돼지를 사육하는 게 이렇게 재밌는 일일까?
이해할 수 없어서 물었다.
“사육하면 좋은 일이 아니겠소?”
“하하하. 대인. 사냥해서 잡는 게 가장 손쉬운데 돼지를 왜 사육해야 합니까?”
이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사냥이 목축보다 발달한 사회였다니.
“그냥 두면 알아서 먹고 살을 찌우는 게 돼지입니다. 즉, 사육하면 엄청난 사료가 필요합니다. 돼지가 왜 돼지겠습니까. 돼지라서 돼지입니다. 하하하! 그런데 돼지를 사육한다고요? 돼지고기 먹으려다가 가문이 망할 겁니다.”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가 됐다.
돼지 사육을 감당할 정도로 잉여생산물이 넉넉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사냥이 더 효과적이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왕고덕의 기억이 내게 전하지 않은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최고 귀족인 이 사람의 신분을 고려할 때 아예 신경도 쓸 필요가 없는 하찮은 일이었다.
“하하하. 대인. 덕분에 너무 웃었습니다.”
그나저나 을지문덕도 그렇긴 한데 특히 혜자 이 사람, 엄청나게 잘 웃는다.
“하하하! 이런. 대인께서 농을 하신 것이었군요! 소인이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대인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 뭡니까?”
“이런. 자네가 큰 실수를 했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물론, 돼지를 사육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목장이라니요! 하하하!”
“이런. 사육이 아니라 목장이라고 하셨나? 부처님께서 깜짝 놀라셨겠군.”
만담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러니 밥 한 끼 거하게 내주시지요.”
이건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다.
“소승은 고려두(고구려 특산콩)와 상추를 좀 내어주십시오.”
“알아서 먹고 가시오.”
“늘 이토록 넉넉하게 내어주시니 부처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무시하고 일어났다.
잉여생산물이 부족하면 확보하면 된다.
내가 그러자고 여기 왔으니까.
우선 논밭을 직접 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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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렇다.
왕고덕이 아는 길이라고 해서 내가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지도와 나침반이 있다고 해서 길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복잡한 평양도성의 구조를 고려할 때 섣불리 움직이면 미아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차분하게 행동했다.
우선 나침반을 제대로 잡아야 하기에 풍수지리부터 시작했다.
“끙. 동쪽은······.”
“형님.”
누가 나를 불렀다.
심지어 형님이라고 했다.
너무나도 정겨운 표현이기에 냉큼 고개를 돌렸다.
“음?”
그런데 누가 봐도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아무리 좋게 봐도 동년배였다.
그런데 형님이라고 해서 어이가 없지만 반갑게 웃었다.
평양계 귀족이자 연씨 가문의 수장, 연자유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내 밑이었다.
이게 제일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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