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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14/15)

Chapter 7:

The fulfillment

아이를 입양하면 어떨까? 입양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윤이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윤은 조카인 산이 태어났을 때 아기용품을 한 아름 사서 한국으로 부쳤으니까. 이후에도 그는 산뿐만 아니라 사라의 딸인 아일라 같은 아이를 만날 때면, 아이들이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얼마 전에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환과 남편, 그리고 초등학생이 된 산이 겨울 방학을 맞아 오스틴에 놀러 왔다. 그들이 한 달 동안 머물렀다가 떠나던 날, 윤의 표정은 공항에서 집에 돌아오는 내내 어두웠다. 윤은 조카를 보내기 힘들어했고, 헤어지기 전에 조카를 꽉 안고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그는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조금 울기까지 했다. 윤이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며,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우리에게 아이가 있다면 어떨까?

* * *

윤과 알렉스는 결혼의 완성이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한 이래, 둘이서 잘 살아왔다. 둘이 살면서 부족함을 느낀 적은 없었고, 함께 보내는 일상은 매우 행복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자리를 잡느라 바빠서 아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를 한번 생각하고 나니, 자꾸만 아이 생각이 났다.

알렉스는 자신의 까다로운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런 성격으로 애를 잘 키울 수 있을까? 아이를 기를 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사랑과 인내심 그리고 끝없는 포용인데. 윤은 분명 좋은 아빠가 되겠지만, 그와 아이를 같이 길러야 하는 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 * *

농구장에서 처음 만난 이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윤은 알렉스가 여전히 좋았다. 아니, 점점 더 좋아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냥 불우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우여곡절이 많고 힘들었던 제 삶은 알렉스를 만나는 것으로 보상받은 게 아닐까? 그래서 윤은 알렉스에게 늘 고마웠다. 하지만 가끔 알렉스가 죽이고 싶을 만큼 밉기도 했다.

지금처럼 저를 침대에서 몰아붙일 때는 특히 그랬다. 알렉스가 한 번만 빨아달라고 하는 말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윤은 침대에 엎드려 알렉스를 받아내고 있었고, 알렉스는 윤의 등에 딱 달라붙어 미친 사람처럼 허리를 쳐댔다. 알렉스가 윤의 배와 허리를 두 손으로 꽉 잡고 누르며 들어왔고, 윤은 내벽이 좁아지는 감각이 괴로우면서도 좋아서 고개를 내저으며 교성을 질렀다.

“거기! 아, 그만-”

“그만하라는 반응이 아닌데?”

“아니야, 아, 으응, 흐으.”

“알았어. 더 할게.”

“그만, 그마안-”

“우리, 오늘, 하아, 아기 만들까?”

“나는, 아, 임신, 읏, 못 해-”

“임신할 때까지, 하아, 하면 되지.”

내벽 안에 알렉스의 성기와 길고 마디진 손가락 하나가 같이 들어왔다. 윤은 흐느끼며 매트리스 위로 무너져 내렸다. 손가락과 성기가 함께 내벽을 휘젓자, 윤은 몸을 가늘게 떨고 울면서 애원했다.

“여보, 제발-”

“이름 불러줘.”

“알렉-”

알렉스는 윤이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그의 턱을 잡고 키스를 퍼부었다. 입에서도, 구멍에서도 액체가 난잡하게 질척이며 달라붙는 소리가 났다. 알렉스가 입구에 손가락을 하나 더 넣었고, 윤은 젖은 내벽 안에서 성기와 손가락이 함께 깔짝일 때마다 느껴지는 지나친 쾌감에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숨도 못 쉬고 알렉스를 힘겹게 받아내던 윤은 결국 먼저 사정했다. 윤이 사정하는 순간, 이미 비좁던 내벽은 알렉스를 짓이겨버릴 듯 조여들었고, 알렉스를 끝없이 쾌감에 떨게 했다.

알렉스는 명치부터 끓어오르는 깊은숨을 토하며 웃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둘의 섹스는 뜨거워졌다. 윤이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처럼 섹스할 때마다 온몸으로 사랑을 말하면 좋아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알렉스는 윤을 돌려 눕히고, 윤의 목덜미와 가슴팍, 피어싱이 박힌 젖꼭지를 빨면서 스퍼트를 올렸다. 성감이 오를 대로 오른 윤은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고 몸을 맡겼다. 사정하고 나니, 알렉스가 몸의 어디를 자극하든 괴로울 만큼 예민하게 느껴졌다. 알렉스의 절정이 가까워지는 만큼, 윤 역시 절정으로 한 번 더 밀려 올라갔다.

윤이 엉망으로 박히다가 다시 한번 눈앞이 하얗게 머는 것 같은 오르가즘을 느낀 순간, 알렉스도 목을 긁는 소리를 내며 사정했다. 윤은 내벽 가장 깊은 곳에 닿는 체액의 온기에 몸을 떨었다. 오랜만에 콘돔 없이 관계를 갖다 보니 내벽에 정액이 흐르는 느낌이 낯설었다. 알렉스는 윤의 목덜미를 깨물면서 사정했고, 성기로는 몇 번이나 윤의 내벽을 들이박았다. 윤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알렉스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다가 정수리에 키스하고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알렉스.”

윤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다정하게 그를 불렀다. 알렉스는 가쁜 숨을 잠시 고르다가 머리를 들었다. 그는 웃으며 윤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로 몸을 굴려 매트리스 위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래서 윤은 알렉스의 몸 위에 엎드리게 되었다. 온몸과 몸속의 점막까지 맞닿은 채, 두 사람은 서로를 가만히 끌어안고 숨을 골랐다. 숨을 고르는 동안, 알렉스는 간간이 윤의 등을 쓰다듬고, 윤은 알렉스의 어깨와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윤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이러다가 정말 애가 들어서는 게 아닐까. 알렉스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윤을 안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키스를 졸랐다. 알렉스의 몸 위에서 윤의 몸이 미끄러지고, 성기가 입구에서 반쯤 빠져나왔다. 윤은 알렉스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그에게 키스했다. 한참 키스하다가 코끝을 비비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키스하고, 달콤한 후희를 즐기던 알렉스가 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우리, 아이 가질까?”

“갑자기 웬 아이?”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러고 싶어졌어.”

“아이…….”

“그래. 아이.”

“나는 임신 못 해…….”

윤은 말끝을 흐리면서 말했고, 몸을 일으켜 매트리스 위에 옮겨 앉았다. 그는 알렉스를 등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제가 남긴 흔적을 온몸에 달고 있는 윤을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대리모를 써도 되고, 입양해도 되고.”

“…….”

“어때?”

“……나는 자신 없어.”

“자기는 아이를 좋아하잖아.”

“남의 아이니까 그렇지, 나도 내 아이라고 생각하면 자신 없어. 자기는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지만, 난 아냐.”

윤의 대답을 듣고, 알렉스는 환하게 웃었다. 윤은 알렉스가 웃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서 알렉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팔을 뻗어 윤의 허리를 끌어안고 자신의 품 안으로 욱여넣었다. 윤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 그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며 알렉스는 속삭였다.

“나는 반대로 생각했거든.”

“아!”

알렉스가 단숨에 발기한 성기로 윤의 내벽을 파고들었다. 파고든 성기는 곧장 윤이 가장 느끼는 지점을 익숙하게 찍어 올렸다. 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알렉스가 허리를 쳐올렸고, 윤은 쾌락에 떨리는 턱과 얼굴을 간신히 뒤로 돌려 알렉스를 눈에 담았다. 알렉스는 윤의 아랫배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그러안으며 속삭였다.

“나는 네가 좋은 아빠가 될 거고, 나는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했는데.”

알렉스의 왼손이 아랫배, 윗배, 그리고 가슴까지 쓰다듬으며 올라왔다. 알렉스가 흥분해서 잔뜩 솟아오른 젖꼭지를 꼬집고 피어싱을 비틀면서 성기로 느끼는 지점을 찌른 순간, 윤은 울음을 터뜨렸다. 알렉스는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핥아 먹고 뺨을 혀로 덧그리다가 윤의 입술에 이르렀다. 알렉스는 윤과 입술이 맞닿은 채로 말했다.

“우리 둘 다 서로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알렉스의 혀가 윤의 입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윤은 홀린 듯이 알렉스의 혀와 입술을 빨았다. 열에 들뜬 알렉스의 입술과 혀가 무척 달았다. 내벽을 긁는 알렉스의 성기가 좋았다. 윤은 등 뒤로 손을 돌려 알렉스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짚고, 알렉스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면서 온몸을 뒤흔드는 쾌락에 몸을 맡겼다.

등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귓가에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알렉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윤은 알렉스의 어깨에 뒷머리를 기대고 허리를 계속 흔들고 안을 조였다. 알렉스가 들어와 안을 꽉 채우는 느낌이 좋았다. 알렉스는 윤의 양쪽 젖꼭지를 꼬집으며 아래를 쳐올렸다. 알렉스가 내벽을 정확하게 꿰뚫을 때마다 윤은 알렉스의 허벅지 대신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점점 절정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성기에서 쿠퍼액이 줄줄 흐르는 것을 보며, 윤이 알렉스의 팔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그, 그만, 응, 알렉스, 제발, 거기-”

“그만할까?”

알렉스가 윤의 귓가에 한 번 입 맞추고 윤의 성기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귀두 바로 밑을 손가락을 구부려 조이다가 손톱으로 요도구를 긁으며 성기로는 전립선을 후볐다. 앞뒤를 동시에 자극당하니 눈앞이 하얗게 멀었다. 잔뜩 달아오른 내벽이 불규칙적으로 경련하며 알렉스를 쥐어짰다. 이러다 좆이 끊어지는 게 아닐까. 알렉스가 사정을 간신히 참아내며 신음했다.

“하아, 너, 정말, 하아.”

“알렉스, 으으…… 나아, 흐응, 힘들어-”

“나도 너 때문에, 읏, 돌아버리겠어.”

“자기야, 흐응, 제발!”

윤은 울면서 알렉스에게 그만하라고 빌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웃기만 하고 멈추지 않았다. 알렉스가 웃으면서 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발, 뭐?”

“빨리, 아흐, 싸! 흐읏, 나, 이러다, 하아.....죽을 것, 읏, 같아!”

“안 죽어.”

“아니야아-”

”그래서, 하아, 좋다는, 거지?“

알렉스가 집요하게 묻자, 윤이 알렉스의 어깨에 기댄 머리를 미친 듯이 끄덕이며 울먹였다.

“좋아, 흐응, 그러니까, 제발, 읏, 빨리!”

윤이 알렉스의 품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그의 팔을 두 손으로 애타게 붙들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봐주지 않았다. 알렉스가 이제 윤의 몸을 훤히 알기 때문에, 윤은 저항해도 소용없었다. 알렉스는 페니스로 윤이 내벽에서 가장 느끼는 곳을 자극하고 윤의 성기와 피어싱이 박힌 젖꼭지를 집요하게 만지며 그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한 번 사정했던 윤의 몸은 금방 두 번째 오르가즘을 향해 내달려 갔다. 사정이 임박한 윤이 얼굴을 돌려 알렉스의 입술을 찾았고, 알렉스는 윤에게 입술을 내주었다. 열이 잔뜩 오른 입술을 애타게 겹치고 머금는 키스가 너무나 달콤했다.

윤이 마른 절정을 느끼다가 사정한 순간, 알렉스도 사정했다. 윤은 사정하고도 마른 절정을 계속 느끼느라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숨이 막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었고, 알렉스는 그런 윤의 내벽이 급격히 좁아지는 깊은 곳에 정액을 토해 냈다. 알렉스는 윤을 끌어안고 숨을 고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윤과 동시에 절정을 맞는 순간은 언제나 좋았다. 그러니 윤도 저만큼 좋기를 바랐다.

알렉스가 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고 입을 맞추었다. 윤은 알렉스에게 뒤에서 끌어안긴 채, 숨을 골랐다. 윤의 내벽은 알렉스가 두 번이나 안에 사정해서 온통 미끌미끌했고, 알렉스의 성기는 아직도 윤의 몸 안에 가득 들어와 있었다. 윤이 좀처럼 숨을 고르지 못하고 힘들어하자, 알렉스는 윤에게 오른팔로 팔베개를 해 주고, 왼손으로 땀에 젖은 윤의 허벅지를 토닥토닥했다. 윤은 숨을 헐떡이며 알렉스에게 물었다.

“너는 안 힘들어?”

“나는 운동선수 출신이잖아.”

알렉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등 뒤에서 들려온 말을 듣고, 윤은 어이없어하며 중얼거렸다.

“너는 정말…….”

“내가 뭐?”

알렉스는 윤의 뺨과 귓가에 몇 번이나 입 맞추면서 물었다. 그러자 윤이 알렉스에게 투덜거렸다.

“너는 일흔 살이 되어도 이럴 것 같아.”

“그러면 좋은 거 아냐?”

“…….그건 그래.”

“근데 그렇게 말하는 너도 만만치 않아.”

알렉스는 윤의 엉덩이를 왼손으로 꽉 움켜쥐면서 웃었고, 그 바람에 윤도 웃음을 터뜨렸다. 알렉스는 윤이 숨을 마저 고를 때까지 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내 가쁘게 헐떡이던 숨이 가라앉자, 윤이 고개를 뒤로 돌려 알렉스에게 먼저 입을 맞추었다. 윤은 왼팔을 뒤로 뻗어 알렉스의 목을 안으며 그에게 질척하고 대담한 키스를 퍼부었다. 조금 전까지 알렉스와 두 번이나 붙어먹었지만, 오늘따라 부족하게 느껴졌다. 왠지 오늘은 알렉스와 함께 절정을 한 번 더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윤은 알렉스의 혀를 깨물고 빨다가 알렉스의 귓가에 뭐라고 나긋하게 속삭였다. 알렉스는 윤의 낯뜨거운 제안을 웃으면서 기꺼이 받아들였고, 침실의 공기는 둘의 달뜬 숨소리와 함께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도 두 사람의 잠자리는 변함없이 뜨거웠다. 둘은 처음 동거를 시작했을 때나 지금이나 아무리 바빠도 틈만 나면 몸을 열정적으로 섞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뜨거웠다. 윤은 알렉스와 수없이 사랑을 나누며 두 사람의 몸이 서로에게 꼭 맞게 다시 만들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몸을 섞을 때마다 성감이 좋아질 수가 없었다. 서로의 숨결과 체온을 나누는 일은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아무리 반복해도 질리지 않았다. 서로를 한없이 사랑하니 질릴 수가 없었다.

* * *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아이 없이 잘 지내 왔는데, 알렉스가 한창 사랑을 나누다 말고 아이를 갖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은 이후, 아이 생각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윤은 회사에서 일하다 말고 입양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대리모는 왠지 꺼림칙했다. 대리모를 쓸 돈은 충분했지만, 한 명을 낳는다면 누구의 정자로 아이를 낳을지 결정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설령 각자의 정자를 써서 쌍둥이를 낳는다고 해도, 두 아이의 연결고리가 얼굴 모르는 여성의 유전자라는 것이 싫었다. 이름 모를 여성의 유전자로 두 아이를 혈연으로 묶을 거면 차라리 입양이 나았다.

윤은 아이폰으로 텍사스주 성 소수자 부부 입양 안내서를 다운받았고, 컴퓨터로 파일을 옮겨 인쇄했다. 윤은 인쇄한 책자를 백팩에 넣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윤은 일하다 말고 자꾸 딴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아이라니. 한창 젊을 때도 아니고, 슬슬 30대가 끝나가는 시점에 아이를 갖는 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

* * *

[아이를 가진다고?]

[확실하게 결정한 건 아니야. 알렉스가 이야기만 꺼냈어.]

[나는 너희가 애 없이 살 줄 알았는데.]

퇴근하고 나서, 윤은 고민 상담을 하기 위해 수빈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윤은 식탁 앞에 앉아 있었고, 수빈은 연구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수빈은 이제 시애틀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윤과 같은 시기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칼텍에서 포닥 생활을 3년 정도 하다가 워싱턴 주립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갓 테뉴어를 받은 수빈은 아직 독신이었고, 고양이를 다섯 마리나 기르며 살고 있었다.

[나도 아이 생각은 없었어. 근데 알렉스가 이야기를 하고 나니까 자꾸 생각이 나네.]

[음…… 방금 생각해 봤는데, 너희가 애를 키우면 잘 키울 거 같아.]

[그래?]

[응.]

[나는 자신 없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나 알렉스나 괜찮은 아빠가 될 것 같은데? 그러니까 너무 겁내지 말고 둘이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

수빈은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부부 중, 아이를 잘 키울 것 같지만 딩크족으로 사는 부부가 몇 있는데, 그중 한 쌍이 윤과 알렉스였다. 그래서 수빈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아이를 가지라고 권했다.

[근데 아이를 키우는 건 고양이를 키우는 것과는 다르잖아.]

[물론 아주, 아주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 막상 부딪혀 보면 생각보다 괜찮을 수도 있어. 혹시 너희 누나에게는 물어봤어?]

[예전에 누나가 그랬는데, 만약 애를 가질 거면 하나만 가지래. 맞벌이하면서 산이 하나 키우는데도 힘들어 죽겠다고 하더라.]

[육아가 쉽지 않지. 암튼, 이야기가 나왔으니 둘이 고민해봐. 나는 너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응원할 거야.]

[그래…….]

[나는 이만 미팅 가볼게.]

[응. 나도 저녁 해야 해.]

윤은 영상 통화를 끊고 전기밥솥에 밥을 안쳤다. 오늘은 윤이 저녁 당번이었다. 그래서 앞치마를 매고, 밥을 안치고, 한인 마트에서 사 온 즉석 부대찌개 포장을 뜯어 냄비에 붓고 전기 인덕션 위에 올려놓았다. 윤은 작업을 마치고, 회사에서 뽑아온 책자를 펼치고, 안경을 쓰고 형광펜으로 줄을 치면서 책자를 읽어 내려갔다.

* * *

밥이 완성되었을 무렵, 알렉스가 퇴근했다. 알렉스는 차고에 차를 세웠다. 차고에는 윤의 메르세데스 세단이 곱게 주차되어 있었다. 주차를 마치고 현관문을 여니, 밥과 찌개 냄새가 났다. 알렉스는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풀면서 식탁 앞으로 걸어갔다. 윤은 동그란 금속 테 안경을 쓰고, 자리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건 뭐야?”

알렉스가 물었다. 윤은 형광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알렉스에게 키스했다. 윤은 짧게 키스하고 나서 약간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입양 안내서.”

“그래?”

“한번 읽어 보려고.”

“윤, 내가 했던 말에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물론 자기가 말을 꺼내서 관심이 생긴 것은 맞지만, 그래서만은 아니야. 나도 모르게 자꾸 아이를 생각하게 돼. 근데 한편으로는 여태 아이 없이 잘 살았는데, 이제 와서 아이를 갖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지도 모르겠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냥 욕심부리지 말까?”

윤이 불안해하면서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도 뭐가 맞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대답을 망설였다. 윤은 알렉스의 셔츠 깃을 두 손으로 잡고 생각에 잠겼다.

윤은 지금의 생활이 정말 좋았다. 하지만 아이를 가지면 삶이 지금과는 달라질 것이다. 생활의 중심이 아이로 옮겨 가기 때문에 분명 삶의 방향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그 변화가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보장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아이가 생긴다면, 윤은 알렉스의 마음을 아이와 나눠 가져야 할 것이다. 저에 대한 사랑과 아이에 대한 사랑은 분명 다르겠지만, 그래도 알렉스의 관심이 분산되는 것은 싫었다. 이 세상에 알렉스가 사랑하는 사람은 제가 유일하기를 바랐다.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를 질투하는 마음은 유치하지만, 그게 진심이었다. 그래서 윤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말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

* * *

알렉스는 한참 로스쿨에 다니던 시절, 아이 생각을 많이 했다. 그때는 얼른 학교를 졸업하고 윤과 아이를 키우며 오순도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조슈아와 시드니가 결혼해서 낳은 아들과 사라의 딸을 보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알렉스가 전화로 아이를 기르는 일에 대해 상담했을 때, 조슈아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하기는 한데 그만큼 힘들어! 애 하나를 나와 시드 둘이서 키우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나는 우리 엄마가 어떻게 혼자 투잡을 뛰면서 애 셋을 키웠는지 모르겠어.

“그 정도야?”

조슈아는 알렉스의 질문에 허허 웃기만 했다. 그는 워싱턴 DC의 대형 로펌에서 일하다가 소형 부티크 로펌으로 자리를 옮겼고, 시드니는 연방 검사로 일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

-어. 그 정도로 힘들어. 지금은 우리 엄마가 애를 봐주는데, 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나도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엄마랑 같이 애를 봐야 할 것 같아. 다니엘이 학교에 들어가면 손이 지금보다 더욱 많이 갈 것 같은데, 시드가 잘나가니까 내가 애를 봐야지.

“그렇구나.”

-굳이 이 행복한 지옥으로 들어오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너희가 평생 연애하는 기분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조슈아의 솔직한 소감을 들으며, 알렉스는 생각에 잠겼다. 산과 작별하고 우는 윤을 보면서 아이를 가지면 어떨까 생각해봤지만, 선뜻 아이를 갖자고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웠다. 이제 와서 아이가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굳이 아이를 가진다면, 알렉스는 그와 윤의 유전자를 반반 가진 아이를 갖고 싶었다. 혈통에 집착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알렉스가 적장자를 생산하여 후계자로 삼아야 하는 의무를 지닌 절대왕정 시기의 군주도 아니고, 혈통에 집착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알렉스는 이 세상에 두 사람이 결합해서 행복하게 살아갔다는 영원불멸한 증거를 두 사람의 아이라는 존재로서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과학 기술로는 불가능했다.

* * *

알렉스는 반차를 내고 엄마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아빠는 은퇴했지만, 엄마는 여전히 현역이었다. 엄마는 일흔을 넘기면서 운전을 그만두었는데, 매일 우버를 타고 출퇴근하며 연구를 계속하고 학생을 지도할 만큼 자기 일에 열정적이었다.

엄마의 연구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엄마는 연구실에 앉아 학생의 논문을 지도하고 있었다. 알렉스가 문간에 서서 인기척을 내자, 엄마의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어린 여학생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학생은 알렉스를 발견하고 얼굴을 붉히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엄마는 돋보기를 쓰고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마우스 휠을 굴리고, 학생이 써온 연구 계획서만 이리저리 읽고 있었다. 그래서 여학생이 엄마를 불렀다.

“케인즈 교수님.”

“왜 그러니, 릴리?”

“손님 오셨어요.”

제자의 말을 듣고, 엄마는 비로소 문간에 서 있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아들이야. 알렉스, 인사해. 내 학생 릴리야.”

“엄마. 바쁘시면 미팅 끝나고 올게요.”

“아냐. 거의 다 됐어. 밖에 앉아서 잠시 기다려.”

알렉스는 엄마의 연구실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미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엄마는 학생에게 문헌 연구와 실험 설계를 보완해야 할 부분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15분 뒤, 미팅이 끝났다. 여학생이 연구실을 나갔다. 알렉스는 비로소 연구실에 들어갔고 여학생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엄마는 주름진 손으로 머그잔을 집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알렉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니?”

“그냥 왔어요.”

“거짓말하지 마라, 알렉스. 너는 무슨 일이 있어야만 나를 보러 오잖아.”

엄마가 반쯤 농담으로 말했다. 엄마의 농담을 들으며, 알렉스는 새삼 자신이 엄마에게 어려운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다가 엄마에게 이렇게 어려운 아들이 되었나. 알렉스는 잠시 자신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그녀에게 용건을 말했다.

“불쑥 찾아온 건 미안해요. 하지만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이런 것을 묻기에 엄마보다 적절한 사람이 없기도 하고.”

“뭔데?”

“요새 저와 윤이 아이를 가지는 게 어떨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고민이 되네요.”

“네 생각은 어떤데?”

“처음 아이를 가지는 게 어떻겠냐고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무척 갖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잘 모르겠네요. 굳이 아이를 가진다면, 저는 윤과 제 유전자를 반반 가진 아이를 갖고 싶은데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윤은?”

“윤은 아이를 갖고 싶은 것 같긴 한데, 자신 없어 하기도 해요.”

“나는 어지간한 일은 해 보고 후회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아이는 예외야. 아이를 가지는 것은 보통 책임감으로는 안 되는 일이거든. 아이가 주는 행복이 정말 크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힘들기도 해. 아이를 갖고 싶어 죽을 것 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가져도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후회될 때가 있어. 그러니 아이를 갖고 싶은지 아닌지도 모르겠는 상태에서 덜컥 아이를 가지는 건 위험해. 나중에 아이를 가진 것을 후회해도 무를 수가 없거든. 그럴 거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낫지.”

“경험담이에요?”

“응.”

“그렇구나.”

“우리는 오랫동안 충분히 준비했고, 너처럼 뛰어난 아이를 낳았는데도 정말 힘들었어.”

엄마는 진솔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직설적으로 말했지만, 알렉스는 어째서인지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녀의 대답이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뭐가 행복하고, 뭐가 힘들다는 건지. 그래서 아이를 가지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렉스는 엄마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생명과학자로서의 견해는 어때요?”

이래서 나를 찾아온 거네, 줄리아는 알렉스의 의도를 파악하고 피식 웃었다. 그녀는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정말 어렵게 가진 아이였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도 아들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러나 아들은 아주 어린 나이부터 엄마의 아들로 남기를 거부했다. 줄리아의 아들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한참 어린 나이에 그녀와 남편에게서 정서적으로 독립해버렸으니까.

그녀의 아들은 결코 편하게 대할 수 없는 아이였다. 알렉스는 어릴 때부터 가혹한 승부의 세계에 살면서 일찍 어른이 되었다. 그나마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부모의 손길이 필요한 아들이었지만, 그녀의 아들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텍사스의 자랑이 되었고, 만인의 아들이 되었다.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힘들어하던 알렉스는 그녀와 남편의 품 안으로 잠시 돌아왔다. 하지만 아들은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그녀와 남편에게서 영원히 독립해버렸다. 이제는 사위의 남편이자 성공한 사회인이며 품 안에 가두려고 해도 가둘 수 없는 아들을 보면서, 그녀는 아들이 요구한 대로 생명과학자로서의 견해를 말했다.

“생명체의 본질은 유전자야. 우리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해 번식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매개체에 불과하지. 그런 유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너와 윤은 이단아야. 너희는 유전자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이성을 가지고 있어서 유전자의 명령에 반항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허공의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알렉스는 침묵을 지켰다. 엄마는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만약 윤이 먼저 죽고, 너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렵다거나 하는 이유로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 거라면 다시 생각해 봐라. 아이는 고독의 해답이 될 수 없어. 남편이 있어도 아이가 있어도, 고독은 평생 함께하는 거야.”

“저희가 외로움 때문에 아이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에요.”

“그건 다행이네. 아무튼, 내 의견이 너희가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구나.”

엄마의 말을 듣고, 알렉스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줄리아는 웃는 알렉스를 보면서 뾰로통한 말투로 말했다.

“나도 예전에는 아이를 갖는 것에 이렇게까지 회의적이지는 않았어. 그런데 너를 보며 내가 오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알렉스는 엄마가 자신의 단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슬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내가 엄마에게 너무 어려운 아들이죠.”

“아냐. 진정한 부모라면 아이가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게 맞지. 자, 다음 학생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엄마는 알렉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알렉스는 엄마에게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연구실 앞 벤치에 앉아 있던 히스패닉계 여학생이 쑥스러움을 타면서 알렉스를 힐끔거렸다. 알렉스는 연구실을 나와 걸어갔고, 공학관 앞 주차장에 세워 놓은 자신의 메르세데스 SUV에 올라탔다.

알렉스는 엄마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알렉스와 엄마의 대화는 늘 그렇듯 선문답에 가까웠다. 엄마는 알렉스가 어릴 때부터 선문답을 자주 시도했는데, 알렉스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 돌이켜 보니, 엄마는 알렉스가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려고 일부러 선문답을 했던 것 같다.

오늘도 엄마는 아무것도 단정 지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렉스가 스스로 생각해서 깨달음을 얻어야 했다. 그래도 오늘은 평소에 비하면 엄마의 이야기가 구체적이었다. 알렉스는 엄마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주차 브레이크 버튼을 누르고, 기어를 넣고 후진하려는 순간, 알렉스는 엄마의 말뜻을 깨달았다. 이런 뜻이었구나. 그는 엄마의 말뜻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엄마도 너무하지. 말을 쉽게 하면 어디가 덧나나?

* * *

윤은 일하다 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이를 갖자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아이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제 아이를 갖는 것은 자신 없었다. 지금 이대로의 삶이 정말 행복하기도 했다. 굳이 아이를 가져야 할 이유보다, 갖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더 많았다. 제 생각을 알면,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알렉스가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윤은 제 의견을 분명히 말하기로 했다.

* * *

윤은 퇴근해서 자신을 데리러 온 알렉스의 차에 탔다. 그리고 윤은 조수석에 앉아 알렉스와 가볍게 키스하고 안전벨트를 맸다. 알렉스는 차의 기어를 중립에서 D로 놓으며 물었다.

“오늘 외식할까?”

“그래. 뭐 먹을까?”

“나는 멕시코 음식 먹고 싶어.”

“그러면 훌라 헛 갈까?”

“좋아.”

알렉스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윤은 머릿속으로 레스토랑까지의 거리를 계산해 보았다. 여기서 콜로라도강 강가에 있는 레스토랑까지는 차로 20분 정도 걸릴 것이다. 그 정도 시간이면 이야기를 하기에는 충분하다.

알렉스는 운전하고, 윤은 자신의 아이폰을 차에 연결해 잔잔한 음악을 틀었다. 알렉스가 아이 이야기를 할 만한 시점을 노리고 있는데 윤이 먼저 말했다.

“나, 여보에게 할 말 있어.”

“무슨 말?”

“자기가 체할지도 모르는 말.”

“갑자기 긴장되는데?”

“나는 아이를 가지지 않아도 괜찮아.”

“음?”

알렉스는 비상등을 켜고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카 오디오도 껐다. 윤은 알렉스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긴장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윤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사실, 나도 오늘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

“정말?”

“응.”

“나는 자기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내가 아이를 갖지 말자고 말하면 자기가 화를 낼 줄 알았어.”

윤은 안심하면서 말했다. 윤의 말을 듣고, 알렉스는 피식 웃었다. 하여간 귀엽기는. 윤은 겁이 없는 것 같다가도 은근히 겁이 많았다. 알렉스는 웃으면서 손을 뻗었고, 윤의 뺨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설령 내가 아이를 갖고 싶다 해도, 그게 왜 화를 낼 일이야?”

“생각해 보니 그렇네?”

“가끔 자기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가 그렇게 성격 파탄이야?”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맞잖아.”

알렉스는 웃으며 윤을 놀렸다. 윤은 알렉스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유를 논리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첫째, 나는 지금 이대로도 정말 행복해. 둘째, 나는 애를 잘 키울 자신이 없어. 셋째, 나는 자기의 사랑을 아이와 나누고 싶지 않아. 세 번째 이유는 조금 유치하지만 진심이야.”

“세 가지 이유가 모두 타당하네. 마음에 들어.”

알렉스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윤의 논증을 들으니 엄마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내 사랑을 아이와 나눈다니, 가만 보면 윤도 가끔 엄마처럼 추상적인 화법을 썼다. 박사 화법인가? 알렉스는 윤의 논증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 뜻은 불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알렉스가 윤에게 다시 질문했다.

“근데 자기야, 세 번째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여보, 어떻게 이거보다 자세히 설명해?”

“해 봐.”

“……세상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으면 좋겠어.”

윤이 수줍게 말했다. 알렉스는 피식 웃으면서 예전 일을 떠올렸다. 어릴 때는 제가 윤을 좋아하는 만큼 윤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서 슬퍼했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제가 윤을 좋아하는 만큼 윤도 저를 좋아한다. 알렉스는 뿌듯해하면서 웃었고 윤은 알렉스의 오른손을 제 왼손으로 감싸 쥐면서 물었다.

“자기가 아이를 갖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뭔데?”

“나는 지금 이대로 정말 행복해. 그래서 만약 아이를 갖는다면, 자기와 나를 반반 닮은 아이가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세상 사람들이 우리 사랑의 증거를 확실히 볼 수 있게 말이야. 그게 아니면 애를 굳이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까…. 자기가 말한 첫 번째 이유와 비슷하겠네.”

알렉스는 확신에 차서 말했지만, 윤은 단번에 수긍하지 않았다. 알렉스가 집안과 거의 연을 끊기는 했지만, 여전히 장손이기는 하니까. 그래서 윤은 눈살을 찌푸리고 알렉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자기가 대를 이어야 하지 않아? 알렉산더 테신 5세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대를 잇다니.”

알렉스는 그 말을 되풀이하며 박장대소했다. 윤은 알렉스가 웃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어서 당황했다. 대체 왜 웃는 거지? 한참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 윤이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에게 되물었다.

“왜 웃어?”

“네가 오래간만에 굉장히 동양적인 표현을 쓴 게 재미있어서 그래. 이럴 때면 네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거든. 암튼, 여보. 내가 왕도 아닌데 굳이 대를 이을 필요는 없어. 가문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해. 그리고 우리 엄마가 그러더라.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라 종족 보존이 아니라 다른 것을 쫓으며 살 수도 있다고.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

알렉스가 윤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가문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것은 저 하나로 충분하다니. 알렉스는 윤이 예상하지 못했던 씁쓸하고 마음 아픈 말을 했다. 윤은 마른 침을 삼키다가 분위기를 좋게 바꿔보려고 알렉스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너는 무엇을 위해 사는 거야?”

“그러는 너는 무엇을 위해 사는데?”

알렉스가 웃으면서 되물었다. 그는 킥킥 웃으면서 윤의 볼을 장난스럽게 꼬집었다가 놓았다. 그러자 윤은 꼬집혔던 곳이 아파서 인상을 썼고, 알렉스는 황급히 제가 꼬집었던 곳을 커다란 손으로 문질러주었다. 아픔이 가시고, 윤이 제 얼굴에 얹힌 알렉스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면서 말했다.

“나는 나를 위해 살고, 너와 사는 게 행복해서 살아.”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나를 위해 살고, 네가 웃는 모습을 보는 재미로 살아.”

윤의 대답을 듣고, 알렉스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윤이 저와 살아서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알렉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알렉스의 대답을 듣고, 윤도 활짝 웃었다. 내가 웃는 것이 너의 가장 큰 기쁨이라니. 기분이 좋아진 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물었다.

“정말?”

“응.”

알렉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을 들은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해야겠다. 그래서 윤은 알렉스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물을게. 나는 지금 이대로도 너무 행복해서 아이를 굳이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자기는 어때?”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너만 있으면 돼.”

알렉스는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윤은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두 사람 사이에 큰 갈등이 생길 거라 예상하고 마음을 끓였다. 먼저 아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알렉스이고, 그가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합의는 생각보다 쉽고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이제 보니 알렉스는 아이를 별로 갖고 싶지 않지만, 오롯이 윤을 배려해서 아이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았다. 그래서 윤은 편안한 마음으로 웃다가 알렉스를 놀리듯이 물었다.

“여보, 내가 얼마나 좋아?”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알렉스는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윤은 알렉스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알렉스를 또 놀렸다.

“자기야, 나를 이렇게 좋아해서 어떡할래?”

“그래서 평생 같이 살려고.”

알렉스는 윤의 장난에 발을 맞춰 주었다. 사실, 그게 알렉스의 진심이기도 했다. 알렉스의 대답에 만족한 윤은 웃으면서 알렉스의 입술에 키스했다. 알렉스는 왼팔로 윤의 어깨를 끌어안았고, 왼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살살 쓸었다. 윤은 알렉스의 손길에 몸을 가느다랗게 떨었다. 윤의 떨림을 느끼며, 알렉스는 조금 더 깊게, 각도를 바꾸어 윤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오른손과 왼손을 꽉 맞잡은 채 그들은 서로를 끝없이 바라보았다. 서로의 눈동자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보며, 두 사람은 끝없는 사랑과 믿음을 느꼈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둘은 서로에게 말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의 여운에 젖어 다시 입을 맞추려고 하는 순간, 둘의 배에서 동시에 꼬르륵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윤이 알렉스의 위팔을 손등으로 가볍게 한 대 때렸다. 알렉스는 웃으면서 제 입을 왼 손등으로 가렸다가 놓고 운전대를 잡았다. 알렉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겠다. 얼른 저녁 먹으러 가자.”

“빨리 가자. 나 배고파.”

윤이 재촉하자, 알렉스는 비상등을 끄고 기어를 바꿔 넣고 깜빡이를 켰다. 윤은 제 왼손으로 알렉스의 오른손에 깍지를 끼고 엄지로 알렉스의 손등을 문질렀다. 윤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알렉스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윤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알렉스를 힐끗 보았다. 차 안에는 편안한 음악이 흐르고, 알렉스는 목적지를 향해 운전하고 있다. 윤은 알렉스를 보면서 그들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윤은 아주 먼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이곳에 왔고, 자신처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알렉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사랑과 믿음을 담아 평생을 약속했고 10년째 인생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중이었다. 미래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윤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이라 확신했다. 왜냐하면, 윤은 알렉스를 사랑하고, 알렉스는 윤을 사랑하니까.

알렉스는 운전하면서 윤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느꼈다. 윤은 알렉스를 보면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윤의 웃음을 보며, 알렉스는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느님, 아무도 모르는 황무지를 개척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고 길을 찾아낼 것입니다. 우리는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윤의 사랑이 있다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계속 우리와 함께해 주세요.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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