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6 (13/15)

Chapter 6:

Décalcomanie

최성수

최성수는 이혼남이었다.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결혼은 장렬하게 실패했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와 혼전임신으로 결혼했다가 추하게 헤어졌다. 결혼이 실패한 원인은 최성수에게 있었다. 그는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아내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최성수는 집안의 희망이었다. 아버지는 암에 걸려 일찍 돌아가셨고, 경력이 단절된 어머니가 혼자서 고된 일을 하며 그와 남동생을 키웠다. 어머니의 유일한 희망은 똑똑한 형제였다. 어머니는 두 아들이 좋은 직장을 갖고, 예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여자와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최성수는 형제를 키우느라 고생한 어머니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그래서 전액 장학금으로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무난하게 취직했을 때, 어머니의 희망을 저버릴 수 없었다.

* * *

최성수가 평생 가장 사랑한 사람은 주윤이었다. 제대 후 2학년으로 복학하면서, 최성수는 오랜만에 학교 성 소수자 동아리 모임에 나갔다. 그는 거기서 스무 살 주윤을 만났다.

주윤은 스무 명 남짓한 신입생 중에서 가장 잘생긴 애였고, 최성수는 주윤에게 첫눈에 반했다. 최성수뿐만 아니라 다들 주윤과 잘해 보고 싶어 했지만, 그럴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좋은 학력, 반반한 얼굴과 큰 키 덕분에 훈련소 조교로 복무했던 최성수는 주윤에게 자신 있게 들이댔다. 과연 최성수의 예상대로, 순진한 주윤은 최성수에게 홀딱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최성수의 찌질함도, 유치함도 주윤은 그저 좋다고 할 뿐이었다.

최성수는 주윤이 애정 결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주윤이 자신에게 버림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을 이용하며 주윤을 휘둘렀다. 그는 아버지가 대기업 임원이라 부유하게 자란 주윤의 등골을 빼먹었던 적도 있었다. 주윤은 제 용돈과 과외비를 최성수의 토익 학원비, 생활비로 전부 주고, 저는 빈털터리가 되어 누나와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곤 했다.

최성수는 주윤을 구워삶으려고 제가 책임질 테니 집안에 커밍아웃하라고 부추겼다. 같이 외국에 나가 결혼하자는 말도 했다. 주윤은 커밍아웃 이후 가족들에게 학대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사랑으로 반짝이는 주윤의 눈을 보다가, 최성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윤과 외국에 나가 둘만의 삶을 시작하면 어떨지 생각해 봤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이룬 것을 전부 버리고 사랑을 좇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상은 조금씩, 느리게 변하고 있었다. 한국에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었고, 가끔 총선이나 대선을 앞두고 시민 결합 제도에 대한 논의가 화두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최성수는 어머니의 희망을 저버리지 못했고, 주윤과 사귀면서도 어머니가 물어다 준 여자들과 소개팅을 했다.

그는 주윤을 만나면서도 엄마가 마음에 들어 하던 여자를 계속 만났고, 엉겁결에 애가 생겨 결혼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윤과 지저분하게 헤어졌다. 최성수는 울면서 주윤에게 청첩장을 내밀었고, 화가 난 주윤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주윤과의 5년 3개월 연애를 정리하고 결혼하자마자, 최성수는 자신이 인생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성적 지향을 절대 바꾸지 못했다. 처음에는 임신한 아내를 두고 성욕을 해결한다는 핑계로 남자를 만나고 다녔고, 아내가 출산하고 나서는 도저히 아내와 잠자리를 할 수 없어 남자를 만나고 다녔다. 최성수는 제가 어떻게 아내를 임신시키고 결혼한 것인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때는 정말 자신에게 귀신이 씌었던 것이 분명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그는 이혼했다. 아내가 아들 준서의 양육권을 가져갔고, 최성수는 면접교섭권을 갖고 아이의 양육비를 댔다. 다행히 직장에서는 승진을 거듭하며 잘나갔다. 그래서 그는 이혼한 후, 주윤과 다시 잘해 보려고 했다. 이번에는 정말 같이 외국에 나가 사는 것은 어떨까? 잘하면 외국에 발령 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주윤의 소식을 수소문해 보니, 그는 모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떠났다고 했다. 미국에 가면서 핸드폰을 해지하고 SNS를 모두 탈퇴했기 때문에, 주윤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창구가 없었다. 얼마 뒤, 최성수는 주윤이 미국에서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성 소수자 모임 후배에게 듣게 되었다.

주윤이 제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하다니. 최성수는 주윤의 소식을 자세히 알고 싶어서 그의 누나 SNS 계정을 털었다. 주윤의 누나는 동생과 자주 연락하고 가깝게 지내는 티를 냈지만, 동생이나 동생의 남편 사진은 절대 업로드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성수는 주윤의 소식을 알아내는 것을 포기했다.

몇 년이 지나고, 최성수는 주윤이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기업 연구소에 취직하여 오스틴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주윤의 남편도 오스틴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최성수는 해외 주재원으로 발령이 났다. 발령지는 회사 연구소와 공장이 있는 오스틴이었다.

* * *

최성수는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일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육아는 열심히 했지만, 가사 노동은 아내에게 모두 떠넘겼다. 이혼한 후에는 엄마가 해 주는 밥을 먹고 살았기 때문에 마흔 살이 되도록 라면밖에 끓일 줄 몰랐다. 그래서 그는 오스틴에서도 라면과 즉석밥, 즉석식품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틴 에이치마트10)에서 라면을 고르고 있었다. 신라면을 집으려다가 마침 어떤 사람을 보았다. 처음에는 목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그가 아는 주윤의 목소리는 맑았는데, 주윤처럼 생긴 남자의 목소리는 다소 허스키했다. 그러나 단정하게 잘생긴 얼굴을 보니, 그는 주윤이 맞았다. 최성수가 주윤을 몰라볼 리 없었다.

주윤은 키가 큰 남자와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최상수는 게이의 직감으로 키가 큰 남자가 주윤의 남편임을 알아보았다. 자세히 보니, 둘은 왼손 넷째 손가락에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둘은 부부가 맞았다.

최성수는 그들의 뒤를 몰래 따라가며 주윤의 남편을 관찰했다. 그는 훤칠하고 잘생긴 백인 남자였다. 금발과 새파란 눈을 갖고 있었고, 좋은 집안에서 귀하게 잘 자란 티가 나면서도 은근히 야성적인 구석을 갖고 있었다.

남편이 카트를 끌고, 주윤은 한국 봉지 과자를 차례차례 카트에 넣었다. 남편은 주윤에게 과자를 너무 많이 사면 안 된다고 타일렀지만, 주윤은 남편의 말을 웃으면서 무시했다. 주윤이 앞장서서 걸어가면 남편이 카트를 끌고 따라갔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사람들이 없는 통로에서 가볍게 키스했다. 남편이 허리를 숙이고, 주윤은 까치발을 들었다. 짧은 키스를 마치고,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남편이 카트를 계속 끌었고, 주윤은 남편을 두고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남편이 없는 사이, 주윤에게 인사할까 망설이던 찰나, 주윤은 최성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최성수는 주윤을 놓쳐버렸다.

* * *

그날 밤, 꿈에 주윤이 나왔다. 최성수는 주윤에게 청첩장을 건넸다. 주윤은 청첩장을 받아 들고 울기 시작했다. 최성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주윤에게 내밀었던 청첩장을 뺏어 갈기갈기 찢었다. 주윤은 울면서 그에게 안기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최성수는 주윤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가서 결혼을 취소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주윤이라고도 말했다.

최성수는 주윤에게 영원을 약속하며 반지를 끼워 주었다. 주윤도 환하게 웃으며 최성수에게 반지를 끼워주었다. 최성수는 꿈을 꾸면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주윤은 예전에 제 곁에서 그렇게 환하게 웃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최성수는 꿈속에서 많이 울었다.

* * *

다음 날. 최성수는 회사에 출근해서 필사적으로 주윤의 링크드인 페이지를 찾았다. 주윤의 링크드인 페이지를 찾고,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기 위해 프리미엄 멤버십에 가입했다. 멤버십에 가입하고 나서, 최성수는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구구절절한 장문의 이메일을 썼지만, 보내기 직전에 모두 지우고 비교적 간결한 이메일을 써서 보냈다. 그의 안부를 묻고, 자신이 오스틴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밥이나 한번 먹자고 말했다.

얼마 뒤, 회신이 왔다. 최성수는 이메일을 한국어로 써서 보냈지만, 주윤의 회신은 영어로 돌아왔다. 최성수는 주윤의 이메일을 찬찬히 읽었다.

최성수 씨에게.

안녕하세요, 주윤입니다. 저는 그동안 잘 지냈습니다.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연구소에 취직했습니다. 저는 제 남편을 사랑하고, 제 직장 생활은 만족스럽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회신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저는 이 이메일을 마지막으로 당신을 차단합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연락해봐야 헛수고입니다. 그러면 이만 줄이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주윤 드림.

최성수는 영어를 잘했지만, 그는 주윤이 굳이 영어로 회신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마음의 장벽을 느꼈다. 게다가 주윤은 아주 단호했다. 주윤은 예전의 주윤이 아니었다. 주윤은 그에게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세월이 주윤을 단단하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 * *

최성수는 에이치마트에서 주윤을 몇 번 보았다. 어느 날, 주윤과 최성수는 먼 거리에서 눈을 마주쳤다. 주윤은 미국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 것처럼 무심하게 눈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눈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주윤의 남편이 최성수 쪽을 보면서 주윤에게 뭐라고 물었다. 그러자 주윤은 잔뜩 굳은 표정을 지으며 남편에게 뭐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주윤의 남편이 최성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주윤의 남편은 눈도 한번 깜박거리지 않고 최성수를 응시했다. 최성수가 피하지 않자, 주윤의 남편은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주윤의 남편의 눈빛을 보고 알았다. 주윤의 남편은 최성수가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감히 네가 무슨 자격으로? 주윤의 남편은 강렬한 눈빛으로 최성수를 몰아세우며 따져 묻고 있었다.

최성수는 주윤의 남편과 얼마간 눈싸움을 하다가 그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해버렸다. 최성수는 한국인이라 누군가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것에 면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 최성수는 주윤을 볼 수 없었다. 그러자 후회가 몰려왔다. 왜 주윤을 만나서 밥을 먹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성수는 주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무슨 말이든 좋으니 한 마디만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최성수는 주윤을 다시 만나기를 소망하는 동시에, 얼마 전에 꾸었던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선택을 바꾸고 싶었다. 주윤이 남편을 버리고 자신에게 돌아와 사랑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도 했다. 그만큼 최성수는 비겁했던 자신의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주윤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비겁한 자의 말로는 그만큼 비참했다.

주윤

신혼 시절. 자다 깨서 옆을 보았을 때, 윤은 잠든 알렉스를 보며 신기해했던 적이 많았다. 결혼하기 전에 1년 넘게 동거를 했는데도 그랬다. 내가 얘와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다니. 윤은 자신에게 찾아온 행복이 믿기지 않아서 알렉스를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잠들고는 했다.

지금은 알렉스가 침대 옆자리에서 자는 것이 익숙했다. 자다 깼을 때. 알렉스의 발이 이불 밖으로 삐져나와 있으면, 이불을 고쳐 덮어주고 알렉스의 뺨이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잠을 청했다. 가끔 알렉스가 잠결에 윤의 손길을 느끼고 희미하게 웃거나 윤을 안아 줄 때면, 마음이 포근해졌다.

알렉스를 만나고 그와 살아가면서, 과거의 상처들은 차츰 희미해졌고 그리 아프지 않게 되었다. 윤은 그와 함께하는 나날이 매일 기대되었다. 설혹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와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만큼 알렉스에 대한 윤의 사랑과 믿음은 굳건했다.

* * *

최성수를 한인 마트에서 보았을 때, 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지.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은 그대로였다. 대학생 시절.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웠는데도 부유한 집에서 자란 것처럼 잘생기고 귀티가 나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외모 관리를 잘했는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이를 먹은 만큼 성숙해져야 할 텐데. 찌질하던 알맹이가 수려한 외양을 따라잡았어야 할 텐데. 주윤은 그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에 대한 감상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를 봐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가 커서, 그를 다시 만나면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되었다. 그를 죽이든가 아니면 울면서 뒷걸음질 치거나. 제 반응은 둘 중 하나일 거라 예상했지만, 막상 상황을 겪어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윤은 그야말로 멀쩡했다.

그가 왜 여기에 있을까? 그것이 윤의 유일한 의문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의문은 금방 풀렸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윤의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였다. 그는 오스틴에 주재원으로 발령받아 온 것이리라. 윤의 아버지가 그랬듯, 그도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트 어딘가에 그의 아내와 아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는 이제 저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윤은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힐끗 보고, 곁에 있는 알렉스에게 말했다.

“알렉스.”

“응?”

“과자 사러 가자.”

“그래.”

윤은 앞장서서 과자 코너로 걸어갔고, 알렉스는 카트를 끌고 윤을 따라 걸었다. 좋아하는 과자를 카트에 쓸어 담고, 과자를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다고 잔소리를 하는 알렉스를 키스로 잠재우고. 키스가 좋아서 웃는 알렉스가 귀여워서 웃고. 윤은 최성수를 금방 잊어버렸다. 윤에게는 최성수를 그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 * *

윤은 연구소에 출근하자마자 이메일을 확인했다. 대부분이 업무 메일이었지만, 이상한 메일도 한 통 와 있었다. 최성수가 링크드인 계정을 통해 윤에게 이메일을 보내왔다. 밥이나 먹자니? 제정신인가? 윤은 메일을 삭제하려다가 답장을 대충 휘갈겨 썼다. 영어 자판을 한글 자판으로 바꾸는 것도 귀찮아서 영어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고, 5분 만에 메일을 완성해서 보냈다. 윤은 회신을 보내고 나서 최성수를 차단했고, 그를 잊어버렸다.

* * *

저 인간이 또 왔네. 윤은 그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한인 마트에서 마주친 것이 벌써 몇 번째였고, 그는 마주칠 때마다 윤을 애절하게 바라보았다. 윤은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그를 볼 때마다 황당했다. 가정이 있는 사람이 왜 저러지? 차단을 누른 것으로 제 뜻은 충분히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만약 그에게 가정이 없었다 해도, 윤은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윤은 결혼했고, 알렉스를 사랑하니까.

“저 사람, 자주 마주치네.”

알렉스는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알렉스의 말을 듣고, 윤은 입 안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적당히 하지. 그는 알렉스의 이목을 끌 정도로 티를 냈다. 알렉스가 윤에게 물었다.

“회사 사람이야?”

“아니.”

“어떻게 아는 사람이야?”

“예전에 알았던 사람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윤이 알렉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알렉스는 윤을 진지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윤은 알렉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사실대로 말했다.

“전 남자 친구야.”

“설마.”

“맞아. 자기가 아는 그 사람이야.”

결혼을 이야기했을 만큼 열렬하게 사랑했던 첫사랑. 윤을 두고 여자와 양다리를 걸치다가 애가 생기면서 윤을 버린 사람. 어떻게 두 가지 상반된 사실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저를 처참하게 버려 놓고 이제 와서 왜? 가정도 있는 사람이? 윤은 그를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윤은 알렉스에게 더 이상 살 게 없으면 계산을 마치고 집에 가자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알렉스의 표정이 너무 사나워서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그를 빤히 보고 있었고, 그도 알렉스를 빤히 보고 있었다.

윤은 그들의 눈싸움을 보다가 웃었다. 어차피 알렉스의 압승인데, 어째서 알렉스가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 결국, 그가 꼬리를 내렸고, 알렉스는 제 눈을 피하는 그를 계속 쏘아보았다. 윤이 알렉스의 위팔을 손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적당히 해.”

“저 사람,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어? 애도 있다며.”

“그러게.”

“그런데 왜 저래?”

“나도 몰라. 그때 이후로 처음 보는 거야. 소식을 들은 적도 없고.”

“내가 여기에 없었으면 자기한테 껄떡거렸을 것 같은데.”

알렉스는 생각만 해도 불쾌하다는 듯 짜증을 냈다. 윤은 알렉스가 질투하는 모습이 웃기고 귀여웠다. 얘가 평소답지 않게 왜 이러지. 그래도 윤은 알렉스를 안심시켜 주기로 했다.

“그런다고 내가 넘어갔을 것 같아?”

윤은 알렉스의 뺨을 만지면서 되물었다. 알렉스는 윤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너는 나를 잘 알잖아.”

윤이 알렉스에게 속삭였고, 알렉스는 피식 웃었다. 윤은 알렉스의 왼손을 두 손으로 감싸면서 말했다.

“우리는 예전에 끝났어. 저 인간이 나에게 청첩장을 내민 순간, 우리의 관계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된 거야.”

“그건 알지만-”

“자신감을 가져, 여보. 내가 결혼한 사람은 당신이야.”

윤의 말을 듣고, 알렉스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윤은 알렉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았고, 알렉스는 금세 평소의 여유를 되찾았다. 윤이 알렉스를 보며 웃었다.

“내가 너를 두고 한눈을 팔 리가 없잖아.”

윤은 힘주어 말했다. 윤이 확신에 차서 말하자 알렉스는 씩 웃었다. 환하게 웃는 알렉스를 보며, 윤은 더욱 환하게 웃었다.

* * *

윤은 알렉스가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는 것이 싫었다. 윤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한인 마트에 가는 요일과 시간대를 바꿔버렸다. 내심 최성수를 마음에 걸려 했던 알렉스는 윤의 결정에 매우 만족했다. 요일을 바꾼 이후, 윤이 그와 마트에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윤은 그를 영영 잊어버렸다.

케이틀린 스완

케이틀린 스완은 성공한 여성의 표본이었다. 그녀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AT&T11) 임원인 아버지와 대형 회계 법인 파트너인 어머니의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케이틀린은 텍사스 주립대 오스틴 캠퍼스 경제학과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댈러스에 본사를 둔 투자 은행에 입사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사람 중에서 단연 최고의 실적과 고과를 거두었다. 그녀는 댈러스가 좁다고 느꼈고, 큰물에 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케이틀린은 투자 은행에서 일한 지 5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컬럼비아 대학교 MBA 과정에 진학했다. 그녀는 당연히 MBA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입사했다.

케이틀린은 큰물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다가 사내 연애를 해서 결혼했고 3년 만에 이혼했다. 케이틀린은 자신의 커리어에 집중하고 싶어 했지만, 남편은 아이를 원했다. 그녀는 남편이 하도 졸라서 아이를 두 번 가졌다가 모두 유산했고, 그 과정에서 남편과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이혼 소송을 마무리하고, 케이틀린은 홧김에 이직했다. 연봉을 200% 받는 조건으로 규모는 약간 작지만, 내실이 탄탄한 자산 운용사로 직장을 옮겼고 승승장구했다. 그전에도 열심히 일했지만, 이혼한 이후에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녀는 연애나 재혼에 관심이 없었다. 인생을 살 만큼 살아보니 알겠다. 케이틀린은 연애와 결혼 생활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경쟁심이 강하고, 목표의식이 뚜렷하고, 야심만만했다. 그녀는 무한 경쟁을 즐기며 승리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녀는 열심히 돈을 벌고 재테크도 잘해서 당장 은퇴해도 될 만큼 돈을 모았다. 하지만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맨해튼의 왕이 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나중에 뉴욕 현대 미술관에 기부금을 내서 ‘케이틀린 마리 스완 전시실’을 갖게 되는 그날까지 말이다.

* * *

케이틀린은 가끔 자신이 연애하고 결혼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장 진지하게 사귄 남자 친구는 알렉산더 테신 4세였다. 그는 케이틀린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었으며, 케이틀린은 그와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같이 보냈다.

그는 작고한 텍사스주 상원의원 알렉산더 테신 주니어의 손자이고, 대학교 때까지는 미식축구 스타였다. 하지만 그는 부상 때문에 운동을 그만두었다. 그가 부상으로 마음고생을 하고, 수술과 재활을 거치던 시기는 마침 그녀가 처음 취직해 울면서 사회생활을 버텨 나갈 즈음이었다. 케이틀린도 그도 연애를 할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은 7년 연애를 끝냈다.

케이틀린은 바쁘게 살면서 그를 완전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그녀는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서 합격 통보를 받을 즈음, 대학 동기로부터 희한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녀의 첫 남자 친구가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녀는 그게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알렉산더 테신이?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이성애자 같은 남자를 꼽으라면 그를 꼽을 것이다. 그는 전형적인 WASP12) 도련님이니까 말이다.

동창들은 모이기만 하면 알렉산더 테신의 결혼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케이틀린뿐만 아니라 많은 고등학교 동창, 대학 동창들이 그 소문을 믿지 않았고, 특히나 같이 운동했던 녀석들은 그 소문을 대단히 역겨워했다.

케이틀린은 알렉산더 테신이 어떤 남자인지 잘 안다. 그녀는 칼렙 라이트 사건을 똑똑히 기억한다. 칼렙 라이트는 웨스트레이크 힐즈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혐오 범죄의 피해자였다. 그는 알렉산더 테신을 짝사랑했던 동창이었고, 케이틀린과도 종종 어울린 적이 있었다.

칼렙 라이트는 똑똑하지만 소심하고 얌전한 소년이었고, 알렉산더 테신과는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애였다. 웨스트레이크 힐즈 제일의 알파 메일 알렉산더 테신과 칼렙 라이트가 의외로 친한 사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알렉산더는 칼렙 라이트와 추문이 돌자마자 바로 절교할 만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확실히 선을 그었다. 그랬던 알렉산더 테신이 남자와 결혼했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 * *

사람들은 소문을 잊고 지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소문은 사실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것은 알렉산더 테신이 로스쿨을 졸업하고, 검사로 일하다가 오스틴 소재 대형 로펌의 시니어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로 자리를 옮기고 파트너로 승진한 이후의 일이었으며, 테신 상원의원이 세상을 떠나고 1년 후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 * *

케이틀린은 오스틴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창에게 가끔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처음 검사로 임용되었을 때부터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이 결혼 생활에 대해 묻자, 그는 로스쿨에 다닐 때 일찌감치 결혼했다고 말했다. 덕분에 그를 노리고 있었던 여성들과 게이들은 아쉬워했다.

그는 주중에는 일벌레처럼 일만 했다. 그는 금요일이 되면, 슈트 케이스에 짐을 싸서 출근했고 오스틴 버그스트롬 공항으로 퇴근하여 시그나기로 갔고, 일요일 오후에 오스틴에 돌아왔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아내를 만나 보고 싶어 했지만, 그는 배우자에 대해 말을 아꼈다. 알렉산더는 직장 동료들에게 자신의 배우자가 공대 박사 과정 학생이라고만 말했고, 그들에게 배우자의 사진을 보여 주거나 자랑하는 일도 없었다.

주말 부부 생활을 2년 정도 했을 무렵, 알렉산더는 배우자가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오스틴에 있는 기업 연구소에 취직했다고 크게 자랑했다. 그는 신이 나서 새집을 보러 다녔다고 했다. 드디어 배우자와 다시 같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하기도 했고, 고양이를 입양하려고 동물 보호소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배우자와 다시 같이 살게 된 이후. 그가 회사에서 배우자와 통화하거나 주말에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은 확실한데 그의 배우자를 실제로 만난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케이틀린은 그 이야기를 듣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족 자랑은 필수이고, 부부 동반 모임에도 자주 참석해야 한다. 사교 클럽에 가입하려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케이틀린이 이혼하고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교 모임이나 부부 동반 모임에 배우자를 대동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알렉산더의 배우자에 대해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 * *

몇 년 뒤, 테신 의원이 사망했다. 알렉산더는 로펌 파트너로 승진하고, 처음으로 배우자와 함께 오스틴 사교 클럽 자선 파티에 모습을 드러냈다. 소문은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알렉산더의 배우자는 남자였다.

소문이 사실로 판명되고 나서, 케이틀린은 솔직히, 아주, 매우, 많이,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전남친이 게이라니.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그 알렉산더 테신이 오스틴 사교 클럽의 부부 동반 파티에 남편을 데리고 오다니. 얼마 뒤, 케이틀린은 대학 동창에게 우연히 콜로라도강이 내려다보이는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알렉산더와 그 남편과 마주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알렉산더의 남편은 잘생긴 동양인 남자였다. 까탈스러운 테신 도련님을 데리고 사는 사람치고는 수수하고 얌전해 보인다고 했다.

알렉산더와 배우자가 오스틴 사교 클럽 자선 파티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후, 어떤 여자가 타블로이드 언론에 작고한 테신 의원의 장손이 게이이며, 테신 의원이 그 사실을 알게 된 자신에게 돈을 주며 입막음을 했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기사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묻혔다. 외려 대학 상담 센터에서 리셉셔니스트로 일한다는 사람의 직업윤리가 엉망이라고 대차게 까였고, 그 사람은 상담 센터에서 해고되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알렉산더와 배우자를 상대로 민사 및 형사 소송에 휘말렸으며, 벌금을 내고 부부에게 위자료를 물어내다가 파산하고 말았다.

* * *

인터넷으로 구남친의 아웃팅과 후속 기사를 읽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케이틀린은 알렉산더를 잊고 지냈다. 그녀는 유능한 사람이고, 구남친의 사생활과 가정사까지 신경 쓰고 살기에는 너무 바빴다.

* * *

케이틀린은 맨해튼 한복판에서 첫사랑을 마주치게 될 줄 몰랐다. 그녀가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자산 운용사는 덩치를 불리기 위해 오스틴에 본사를 둔 중형 자산 운용사를 인수 합병하려고 했다. 그런데 인수 합병 자문을 알렉산더 테신이 맡고 있었다.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를 데리고 온 알렉산더 테신은 근사했다. 운동하던 시절의 앳되고 풋풋한 모습은 사라졌지만, 잘생긴 외모에 아르마니 캠페인에서 방금 걸어 나온 듯한 우아한 분위기가 더해졌다. 예전에는 머리를 짧게 깎고 운동복과 캐주얼을 입고 다녔는데, 지금은 맞춤 스리피스 슈트와 구두를 걸치고, 파텍 필립 시계를 차고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넘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물론 알렉산더 테신이 변한 만큼 케이틀린 스완도 변했다. 한 달에 한 번, 유명 미용실의 수석 헤어 디자이너에게 커트를 맡겨 유지하는 세련된 단발머리나, 휴고 보스 치마 슈트, 까르띠에 시계, 지미 추 하이힐을 선호하는 그녀에게서 후드티에 레깅스나 청바지를 입고 화장기 없이 후줄근하게 다니던 대학생 시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미팅하는 동안, 케이틀린은 알렉산더가 배우자의 지원 없이 파트너가 된 비결을 알게 되었다. 알렉산더는 일을 끝내주게 잘했다. 그녀도 일을 잘하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논의한 사항 중 불분명한 사항이나 불필요한 사항은 하나도 없었고, 만난 지 5분 만에 서로의 의도를 다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유능한 사람끼리 일하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기분이 좋아진 케이틀린은 미팅이 끝나고 알렉산더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근데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 알렉스.”

케이틀린은 예전처럼 애칭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케이틀린이 내민 손을 보고 뜨악해하며 질문했다.

“실례지만 저를 아십니까?”

“나, 캣이야. 케이틀린 스완.”

알렉산더는 케이틀린의 얼굴을 한참 관찰했다. 그는 그제야 케이틀린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동명이인인 줄 알았어, 캣.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네.”

케이틀린을 알아본 알렉산더는 비로소 그녀와 악수했다. 케이틀린은 알렉산더가 왼손 넷째 손가락에 끼고 있는 결혼반지를 발견했다. 아무 장식 없이 표면을 무광으로 처리한 플래티넘 반지였다. 알렉산더가 먼저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응. 보다시피 나는 꽤 성공했어.”

“보기 좋다.”

“파트너님, 부사장님과 어떻게 아는 사이세요?”

알렉산더의 곁에 서 있던 젊은 남자 어소시에이트 변호사가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알렉산더는 웃으며 대답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에요.”

케이틀린은 선을 긋는 듯한 알렉산더의 대답이 재미있었다. 저는 결혼했다 이거지. 그녀는 오랜만에 본 알렉산더가 반가워서 충동적으로 말했다.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신기하다. 오늘 저녁에 약속이 없으면 같이 저녁 먹을래? 마크 씨도 선약 없으시면 저와 같이 식사하시겠어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 뉴욕 필하모닉 콘서트를 예약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부사장님과의 식사는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케이틀린은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알렉산더는 어소시에이트 변호사의 대답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저녁 같이 먹자.”

“숙소는 멀리 잡았어?”

“아니, 요 앞 매리어트야.”

“여기서 두 블록 가면 괜찮은 일식집이 있어. 네가 묵는 호텔에서도 가까워. 이름은 하루.”

“좋아.”

“이따 다섯 시 반에 보자. 내 이름으로 자리 예약해 놓을게.”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알렉산더와 케이틀린은 한 번 더 악수하고 헤어졌다. 케이틀린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비서에게 오늘 다섯 시 반, 하루에 두 자리 예약 부탁한다고 말했다. 몇 분 뒤, 비서가 그녀에게 와서 말했다.

“부사장님. 지금 하루 지배인과 통화 중인데, 빈자리가 바밖에 없다고 하네요. 괜찮으시겠어요?”

“네.”

케이틀린은 비서의 말에 쾌활하게 대답했다.

* * *

퇴근 시간이 되었다. 케이틀린은 슈트 위에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켈리백을 들고 두 블록을 걸어갔다. 그녀가 레스토랑에 들어가자마자 지배인이 웃으며 인사했다.

“케이틀린. 어서 오세요. 일행분은 먼저 와 계세요.”

“감사해요, 유우키.”

케이틀린은 자리로 걸어갔고, 지배인은 그녀의 코트와 백을 받아갔다. 알렉산더는 벌써 바에 앉아 있었다. 케이틀린이 앉으면 다리가 한참 뜨는 높은 의자인데 알렉산더가 앉으니 딱 맞았다. 케이틀린은 재킷 지퍼를 열면서 자리에 앉았다.

“안타깝게도 오늘 급하게 예약할 수 있는 자리는 여기밖에 없었어. 불편해도 참아.”

“괜찮아.”

“여기는 셰프 특선 스시가 유명해. 그날그날 좋은 횟감으로 엄선해서 즉석에서 만들어 주시거든. 오랜만이에요, 하루토.”

케이틀린은 익숙하게 오너 셰프와 인사했다. 셰프도 그녀에게 인사했다.

“케이틀린도 오랜만이에요. 옆에 신사분은 처음 뵙네요.”

“이번에 엘리스 앤 바클리 인수 합병 건 맡아 주신 로펌 파트너인데, 제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기도 해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십여 년 만에 처음 보는 거예요.”

“알렉산더입니다.”

알렉산더와 주방장은 웃으며 서로 인사했다. 주방장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하루토입니다. 케이틀린은 저희 레스토랑 최고의 단골손님 중 한 분이시죠.”

“그야 당연하죠. 하루는 맨해튼 최고의 일식집이니까요.”

“칭찬 감사합니다. 스완 부사장님이 오셨으니 가장 좋은 재료로 준비하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케이틀린은 따뜻한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사키츠게와 젠사이가 나오자, 알렉산더는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그는 튜토리얼 비디오에 나올 법한 정갈한 젓가락질을 했다. 젓가락질을 정말 잘하네. 동양 요리를 자주 먹나? 케이틀린의 기억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요리를 좋아했고, 동양 요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케이틀린은 알렉산더의 남편이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집에서 남편과 젓가락으로 식사하는 일이 많아 젓가락질에 능숙해졌나 보다. 사키츠케를 한 입 먹고 나서, 케이틀린이 먼저 알렉산더에게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어. 너는 정말 성공했네.”

“너도 성공했잖아.”

“나도 나쁘지 않지만, 너에 비할 바는 아닌 것 같다.”

“칭찬 고마워.”

“어쩌다가 뉴욕으로 오게 된 거야?”

“로드 앤 허스트를 그만두고 콜롬비아 MBA에 진학했거든. MBA 마치고 뉴욕에서 취직했어.”

“그렇구나. 나는 좋은 제의가 와도 너처럼 지역을 통째로 옮기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남편 직장도 있고.”

“하긴, 지역을 옮기려면 변호사 자격시험을 새로 봐야 하잖아13).”

“맞아, 그게 아무래도 번거롭지.”

“제시카에게 네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응.”

알렉산더는 결혼했다고 대답하며 살포시 웃었다. 그는 남편 이야기가 나오자 놀랄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배우자는 무슨 일을 해?”

“컴퓨터 공학 박사고, IBM 연구소에서 인공 지능을 개발하고 있어. 아마 너희 회사 금융 규제 대응 시스템에도 윤이 만든 게 들어가 있을걸? 근데 너는 안 놀라네?”

“뭐가?”

“내가 남편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라더라고. 남편과 부부 동반 모임에 나가면 시선이 곱지 않고. 아무리 오스틴이어도 법조계는 법조계야.”

알렉스는 결혼 생활 이야기를 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케이틀린은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텍사스의 보수성에 진저리를 치면서 말했다.

“거긴 텍사스잖아. 사람들이 아직 촌스러워서 그래.”

케이틀린의 대답을 듣고, 알렉스는 소리 내어 하하 웃기 시작했다. 아까 미팅 자리에서 짓던 사회생활용 미소가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 경기에서 승리했을 때나 짓던 환하고 싱그러운 웃음이었다. 케이틀린은 그의 미소를 보다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회사에도 성 소수자가 많아. 근데 너도 알다시피 그런 것과 업무 능력은 상관관계가 없잖니. 그래서 나는 개의치 않아. 물론, 원래 편견이 없기도 해.”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다.”

“별말씀을.”

“잠시만, 전화 받을게.”

알렉산더는 케이틀린에게 양해를 구했다. 바 위에 올려 두었던 알렉산더의 아이폰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케이틀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더는 아이폰을 집어 화면을 스와이프했다. 케이틀린은 사키츠게와 젠사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알렉산더의 전화통화를 들었다.

[여보, 나야. 일은 끝났어?]

“응, 자기야. 일은 끝났고, 식사하러 나왔어.”

[식사? 혼자 밥 먹어?]

“아니. 미팅 왔는데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 여기 부사장이더라. 그래서 같이 저녁 먹어.”

[동창은 남자야, 여자야?]

“여자야. 그리고 사실 그 부사장은 내 전 여친이거든.”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닌데.”

[거짓말을 하려면 말이 되는 거짓말을 해. 뉴욕 한복판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 겸 전 여친을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윤, 나에게 질투 좀 해 봐. 남편이 전 여친과 밥을 먹는다는데 어떻게 태연할 수가 있어? 너무한다.”

알렉산더는 영어로 말하고 있었지만, 전화기 너머에 있는 알렉산더의 남편은 외국어를 쓰고 있었다. 케이틀린은 알렉산더의 남편이 뭐라고 하는 건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알렉산더가 하는 말을 듣고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들의 다정한 대화를 들으며, 케이틀린은 피식 웃었다.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어.”

[내일 몇 시에 와? 공항으로 데리러 갈게.]

“내일 오후 비행기야. 오스틴에 내리면 여섯 시.”

[직항이지?]

“직항.”

[얼마나 걸려?]

“세 시간 반.”

[자기야. 전 여친에게 한눈팔면 가만 안 둬.]

“알았어. 저녁만 먹고 들어갈게.”

[정말?]

“당연하지. 나는 너밖에 없어.”

[알겠어. 전화 그만하고 얼른 밥 먹어. 친구 혼자 뻘쭘하겠다.]

“얼른 저녁이나 먹으라니? 그리고 전혀 실례가 아니야. 얘도 이해할걸?”

[하하. 알았어. 근데, 내일 면세점 들러?]

“아마도?”

[그러면 향초 사와. 늘 쓰던 것으로 두 개.]

“어떤 거? 시솔트?”

[응.]

“다른 건 필요 없고?”

[생각나면 말할게.]

“알았어.”

[내일 봐.]

“내일 봐.”

[사랑해.]

“나도 사랑해, 여보.”

알렉산더는 입술을 모아 허공에서 쪽 소리를 내고 전화를 끊었다. 케이틀린은 이 상황이 어이없어서 허허 웃었다. 남편과 대화하는 알렉산더의 목소리는 공식 석상에서 업무 관련 대화를 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고, 조금 전까지 케이틀린과 사적인 대화를 할 때와도 사뭇 달랐다. 그녀와 사귈 때, 알렉산더는 방금처럼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남편과 사랑이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고, 이야기하는 내내 웃고 있었다. 케이틀린은 피식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남편인가 봐?”

“응.”

“사이가 좋네. 나는 전남편과 사이가 좋았던 적이 별로 없어서 너를 보니 신기하다.”

“좋아. 그러니까 일찍 결혼했지.”

“몇 살에 결혼했는데?”

“스물다섯.”

“……정말 일찍 했네. 얼마나 만나고 결혼했어?”

“1년.”

알렉산더는 대답하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는 심지어 볼을 조금 붉히기까지 했다. 케이틀린의 눈에는 그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동안 힘든 일이 많았지만…… 바깥에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거지, 우리끼리 힘든 건 하나도 없었어. 지금도 얼굴 보고 있으면 좋고,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말도 잘 통하고, 서로 의지도 많이 되고…. 그래서 나는 윤과 결혼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해.”

“남편 이름이 윤이야?”

“응. 사진 볼래?”

알렉산더는 아이폰 잠금을 해제했다. 잠금 화면은 아이폰 기본 배경화면이었지만, 홈 화면은 스튜디오에서 찍은 두 사람의 흑백 사진이었다.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알렉산더가 역시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남편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턱을 괴고 있었다. 알렉산더의 남편은 눈을 곱게 접고 웃으면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케이틀린은 사진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연애에 관심 없는 이혼녀가 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 겸 전 남친의 결혼 생활 이야기와 남편 자랑을 들어주고 있다니. 정말 웃기는 상황이었다. 케이틀린은 일부러 알렉산더를 놀리며 물었다.

“평소에도 남편 자랑을 많이 하나 봐?”

“아니.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조심하고 지냈어.”

“그런 거치고는 남편 자랑하는 게 몹시 익숙한데? 설마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알렉산더는 정색했다. 케이틀린은 짓궂게 농담을 하다가 테신 의원을 떠올렸다. 테신 의원을 생각하면 두 사람이 관계를 숨기고 지냈을 만하다. 생전의 테신 의원은 강경한 스탠스로 유명했다. 공화당 소속의 원로 상원의원이 손자의 동성 결혼을 묵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의 정치 커리어에 타격이 갈 테니, 손자 부부에게 입단속을 시켰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사진 관리 앱을 켜서 남편 사진을 화면 가득 띄웠다. 알렉산더의 남편은 피부가 뽀얗고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알렉산더보다 한참 어려 보이지만 박사 학위가 있으니 또래이거나 연상일 것이다. 근육이 불거진 체형과 가는 눈매, 각진 얼굴을 갖춘 일반적인 동양인 미남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와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생긴 얼굴이 잘 어울려서 눈이 즐거웠다.

알렉산더는 화면을 스와이프하며 남편 사진을 보여 주었다. 알렉산더가 찍은 일상 사진마다 피사체에 대한 사랑이 묻어났다. 사진 속의 남편은 안경을 쓰고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고, 고양이를 안고 있고, 식탁에서 요리를 앞에 두고 웃고 있고,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둘이 알콩달콩 예쁘게 사는구나. 케이틀린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알렉산더의 남편 사진을 계속 보았다. 그는 꽃이 만발한 벚나무 아래에서 알렉산더의 부모님과 함께 웃고 있거나, 디즈니랜드에서 미키 마우스 머리띠를 쓰고 있거나, 카페에서 생크림을 산처럼 올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사진을 넘기던 알렉산더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알렉산더가 사진을 보자마자 종료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분명 침대에서 찍은 높은 수위의 라이브 포토였다. 이런 사진은 비밀 앨범을 만들어 따로 모아 놓을 텐데, 실수로 빠뜨렸나 보다. 케이틀린은 멋쩍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둘이 행복해 보이네.”

“……고마워.”

알렉산더는 아이폰을 바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귓바퀴와 목덜미는 온통 빨개졌다. 케이틀린은 알렉산더의 반응을 모른척했다. 셰프가 마침 초밥을 완성해서 그릇에 담아 건넸다. 알렉산더는 말없이 초밥을 먹기 시작했고 케이틀린도 초밥을 먹기 시작했다. 간장이 이미 초밥에 발라져 있어서 젓가락으로 집어 먹기만 하면 되었다. 케이틀린은 어색한 분위기를 떨치려고 맥주를 주문했다.

“너도 마시고 싶으면 시켜.”

케이틀린은 일부러 밝게 말했지만, 알렉산더는 맥주를 주문하지 않았다. 지배인이 그녀에게 직접 아사히 맥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알렉산더는 맥주를 물처럼 벌컥벌컥 마시는 케이틀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혼자 푸스스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를 듣고, 케이틀린은 맥주를 마시다 말고 알렉산더를 보았다. 알렉산더는 초밥을 먹다 말고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다음 휴가에 뉴욕에 올까 했는데, 그때 남편과 여기에 다시 와야겠다.”

“그래?”

“응. 초밥이 정말 맛있네. 윤과 같이 먹고 싶은 맛이야. 여기 소개해 줘서 고마워.”

알렉산더는 진지하게 말했다. 알렉산더의 말을 듣고 케이틀린은 박장대소했다. 아, 못 살겠네. 완전히 둘만의 세계에 살고 있잖아? 케이틀린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는 알렉산더는 상냥한 애가 아니었다. 다정하기는 하지만, 엘리트 운동선수 특유의 예민한 기질이 있어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애였는데, 얘가 어쩌다가 이렇게 변했나? 생각할수록 웃기는 일이었다.

* * *

식사를 마치고, 케이틀린이 저녁 값을 계산하며 서버에게 팁을 22% 주었다. 그리고 알렉산더와 케이틀린은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케이틀린은 코트의 깃을 여미며 우버를 불렀다.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알렉산더가 물었다.

“너는 어디 살아?”

“나는 이스트 빌리지에 살아.”

“조심해서 가.”

“응. 너도 내일 조심해서 가. 앞으로 몇 번은 더 보겠네.”

“그렇겠지. 다음에 봐.”

알렉산더는 케이틀린에게 인사하고 호텔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큰 키에 잘 어울리는 롱코트 자락이 겨울바람에 휘날렸다. 알렉산더의 가죽 장갑을 낀 손, 브리프케이스와 맞춤 슈트, 스트레이트 팁 구두 같은 것을 보며 케이틀린은 그들이 이제 완연한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때의 남자 친구이며, 고등학교 동창이고 대학교 동창인 그가 남편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를 바라며, 케이틀린은 그녀 앞에 멈추어 선 캐딜락 CT6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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