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12/15)

Chapter 5:

The stranger

알렉스는 서재에 앉아 데스크탑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기지개를 켰다. 그는 오스틴 사교 클럽의 입회 신청서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그동안에는 바쁘기도 했고, 아직 사교 클럽에 가입할 만한 입지가 아니기도 해서 사교 클럽에 가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때가 되었다. 대형 로펌의 파트너가 되었으니 영업을 해야 하고, 향후 판사 임용을 노리려면 인맥을 쌓아야 했다. 물론 알렉스는 파트너로 일하면서 은퇴 자금을 벌고,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은퇴하여 윤과 함께 유유자적하게 살아가는 삶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오스틴 검찰청에서 기업 범죄 담당 검사로 3년 근무하고, 대형 로펌 M&A 팀의 시니어 어소시에이트로 이직하고 3년이 지났다. 알렉스는 로펌 파트너로 승진했고 자신의 성과에 자부심을 느꼈다. 저는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능력만으로 크게 성공했다. 윤과 결혼한 이후, 집안의 후광을 입는 일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때로 동양인처럼 악착같이 일한다는 뒷말을 듣기도 하지만, 알렉스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국에는 알렉스가 그딴 인종 차별 발언이나 일삼는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일을 잘한다는 이야기니까.

* * *

사교 모임은 보통 부부 동반으로 이루어진다. 알렉스가 가입하려고 하는 사교 클럽도 마찬가지였다. 알렉스는 신청서의 빈칸을 위에서부터 채워 나갔다. 이름은 알렉산더 줄리안 케인즈 테신 4세. 집 주소를 쓰고, 기혼이라 표기하고, 생년월일과 사회 보장 번호를 적고, 직장과 직위를 적고, 직장 주소를 적고, 아빠가 이 클럽 회원이었으니 그 사실을 표기하고, 추천인으로 아빠 이름을 적었다.

알렉스는 배우자 인적 사항도 적어 내려갔다. 주윤. 호칭은 박사7). 이제 주윤이라는 이름은 직장과 학계에서만 쓰는 이름이니 제 성을 따른 본명을 따로 적고(테신 의원이 세상을 떠나고, 마침내 윤은 알렉스가 바라던 대로 알렉스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 생년월일을 적고, 사회 보장 번호를 적고, 직장과 직위를 적었다. 이제 입회비를 내고, 작성한 신청서를 제출하면 심사를 거쳐 입회가 결정될 것이다.

* * *

알렉스가 파트너로 승진하고, 윤은 그의 연봉을 확인할 때마다 얼떨떨했다. 만 서른셋에 연봉 150만 달러.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는 액수였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글로벌 IT 기업의 오스틴 연구소에 취직한 윤도 미국 기준으로 고소득자였으나, 알렉스가 파트너로 승진하며 자신의 연봉을 아득히 추월해버렸다.

알렉스가 검사로 일하고, 로펌에서 어소시에이트로 일하는 동안에는 윤이 집안의 가장이었다. 윤은 제가 평생 알렉스를 먹여 살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알렉스의 연봉은 제 연봉의 네다섯 배나 된다. 윤은 현실감이 나지 않아서 알렉스의 연봉 계약서를 다시 읽었다. 알렉스는 윤을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무 좋아하지 마, 내가 판사로 임용되면 내 연봉은 도로 10만 달러야. 그러면 자기가 다시 가장이 되어야 해.”

[원래 로펌 파트너가 되면 돈을 이렇게 많이 버는 거야?]

“우리의 노후 자금을 번다고 생각하자.”

알렉스는 농담하면서, 윤의 목덜미에 입 맞추었다. 윤이 알렉스의 품 안에서 알렉스를 향해 돌아섰다. 알렉스가 윤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동양인들은 나이를 느리게 먹는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다. 윤은 처음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어려 보이는데 자신만 나이를 먹고 있었다. 심지어 윤이 네 살 연상인데.

윤은 가끔 저도 나이를 먹었고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며 툴툴거리지만, 이곳 사람들은 윤을 대학생으로 보고 알렉스는 제 나이로 보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동양인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도 했고, 제가 열 살 연하를 꼬실 수 있을 만큼 잘생기고 능력 있어 보인다는 사실에 우쭐하기도 했다.

하지만 윤이 알렉스의 사내 부부 동반 모임에 참석했을 때, 알렉스는 로펌 사람들이 저를 두고 옐로 피버라고 뒷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이 어린 동양인 배우자와 결혼한 백인 남자를 징그러워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알렉스는 사람들의 오해가 불편했고, 제가 오해받는 일이 없도록 외모를 열심히 관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돈을 많이 버는 게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신기해서 그래.]

“알아. 농담이야.”

알렉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윤도 웃으면서 알렉스의 뺨에 키스했다.

* * *

윤의 인생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리서치 스태프 멤버8)로 입사했고, 얼마 전에 선임 스태프로 승진했다. 연구 실적이 좋고, 특허가 많고, 인사 평가도 좋아서 승진이 빠른 편이었다.

한국에서라면 사내 정치를 할 만한 주변머리가 없어서 사회생활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힘들었겠지만, 이곳에서는 파벌을 만들지 않고 모든 사람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이 미덕이라 사회생활을 잘한다는 평가를 들었다. 동양인에 대한 유리 천장 때문에 리서치 헤드9)가 되기는 힘들겠지만, 앞으로 수석 스태프까지는 무난하게 승진할 수 있을 것 같다.

재테크 역시 순조로웠다. 처음에 윤은 재테크를 취미로 시작했다. 회사에서 받은 스톡옵션을 조금 팔아 종잣돈을 만들고 투자를 시작하면서, 투자 수익으로 매달 주택담보대출이나 갚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소하게 시작한 투자는 대박이 났다. 부동산과 미국 국채, 지수연동형 펀드와 온갖 고위험 펀드를 적절한 비율로 섞은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은 대단했다.

알렉스는 윤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윤에게 자신의 급여 계좌를 통째로 맡겼다. 마침 알렉스의 할머니가 생전에 증여한 현금도 있었다. 윤은 그것들을 밑천 삼아, 두 사람이 당장 은퇴해도 될 만큼 돈을 불려보기로 했다.

사실, 윤이 재테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알렉스 때문이었다. 윤은 공직에 있는 사람이 끝까지 초심을 유지하려면 돈 욕심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공직에 나갈 알렉스가 돈을 걱정할 일은 없게 해 주고 싶었다.

여태까지는 새로 확장한 포트폴리오의 수익률이 훌륭했다. 이러다가 나중에 유리 천장 때문에 승진에서 밀리면 전업 투자자로 전향하는 것은 어떨까? 박사 학위가 아깝기는 하지만 승진을 못 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나. 근데 전업 투자자가 되면 살림은 어떻게 하지? 나는 살림에 재능이 없는데. 아니다, 살림은 돈으로도 할 수 있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 가사 도우미를 쓰고 있고, 정 힘들면 발렌티나 아줌마에게 물어봐서 적당한 사람을 풀타임으로 고용하면 되니까. 윤은 요새 매우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 * *

두 사람이 같이 산 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알렉스는 집안에서 겉도는 존재가 되었다. 게다가 알렉스의 남편인 윤은 알렉스의 집안에서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될 그 사람(You-know-who)’으로 통했다.

두 사람이 가족 행사에 참여하면, 친척들은 알렉스를 웃으면서 괴롭히고 윤을 소외시켰다. 미국 헌법에는 암묵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친척들은 알렉스가 결혼하면서 성공회 예배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이유로, 윤이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렉스는 타락했고, 윤은 무신론자라서 양심과 도덕관념이 없다고 쑤군거렸다.

알렉스는 제가 무시당하는 것은 상관없었으나, 윤이 저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게 싫었고, 자신의 친척들이 윤을 무시하는 것도 보기 싫었다. 친척들이 뒤에서 부모님을 업신여기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조셉의 결혼이 알렉스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결혼 사건을 겪고, 알렉스는 집안 행사에 거의 가지 않게 되었다.

알렉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친척들과 완전히 서먹해졌다. 알렉스와 윤은 알렉스의 부모와 자주 만나 식사하고 어울리며 여행도 같이 가지만, 사라를 제외한 친척들과는 연을 끊었다. 알렉스가 친척들을 보지 않게 되면서, 알렉스의 부모까지 덩달아 친척들과 어색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온갖 일을 겪으며, 윤은 알렉스의 눈치를 자주 봤고, 알렉스가 그와 결혼하면서 인생에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알렉스는 윤이 눈치를 보지 않았으면 했다. 결혼하면서 분명 어떤 부분에서는 손해를 보았지만, 그것은 윤의 잘못이 아니었다. 먼저 결혼하자고 한 사람은 알렉스였으니까. 그리고 알렉스가 결혼으로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알렉스는 결혼으로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훨씬 많아서 결혼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평생의 사랑. 집안으로부터의 자유. 훌륭한 배우자를 얻었다는 자부심. 누군가의 남편이라는 책임감. 가정에 소속되어 얻는 안정감. 배우자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며 넓어진 시야. 인생을 걸었던 길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하며 불안에 떠는 어린 청년이었던 알렉스는 결혼으로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많았다.

물론 알렉스는 모든 결혼 생활이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은 좋은 사람을 만났고, 서로를 끊임없이 사랑하고 아끼고 배려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 * *

그리고 오늘. 알렉스는 마침내 사교 모임에 입회 허가를 받았다.

* * *

윤은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검은색 맞춤 슈트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서른을 넘겼지만, 알렉스에게는 농구장에서 처음 만난 그날처럼 싱그러운 느낌이 남아 있었다. 키가 훤칠하고, 자세가 곧고, 골격이 크고 두툼하고, 어깨가 넓고, 골반은 좁고, 손발이 크고. 이제는 얼굴의 젖살이 완전히 빠져 높은 광대뼈와 근사한 턱선까지 우아하게 드러났다.

내가 광대뼈 위의 흉터조차 잘생긴 남자와 같이 산다니. 윤은 사람들이 알렉스를 보고 감탄할 때마다 우쭐해졌다. 알렉스와 같이 다니면, 사람들이 알렉스를 감탄하면서 바라보는 동시에 저를 부러워하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나 어때?”

[잘생겼어.]

“이리 와 봐.”

알렉스는 윤의 넥타이를 다시 매주었다. 윤은 직장에 출근할 때 슈트를 입지 않기 때문에, 넥타이 매는 것을 아직도 어려워했다.

[사교 모임이라니. 어색해.]

윤은 넥타이를 보고 투덜거렸다. 알렉스는 포마드를 발라 윤의 까만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냈다. 알렉스는 윤이 오늘만큼은 평소보다 성숙해 보였으면 했다.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첫날부터 한참 어린 동양인 남자애를 꼬셔 결혼한 파렴치한 남자라는 이야기를 듣기 싫었고, 윤이 어린 나이에 돈만 보고 한참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한 속물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하기 싫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윤이 알렉스보다 연상이고,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만, 기분이 상할 만한 일은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다.

윤은 검은색 맞춤 슈트를 입고, 새 구두를 신었다. 알렉스의 첫 사교 모임에 배우자로서 참석하는 윤은 결혼식 날 아침처럼 멀끔했다. 알렉스는 웃으면서 윤의 조그마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그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이제 익숙해져야지. 내가 매번 데리고 다닐 건데.”

[그동안 나를 데리고 다니고 싶은 것을 어떻게 참았대?]

“결혼 계약서를 생각하며 참았지.”

알렉스는 웃으며 제 옷매무새도 다듬었다.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알렉스는 윤의 손을 잡고 깍지를 끼며 장난하다가 윤에게 물었다.

“여기에 약혼반지도 끼고 갈래?”

[싫어.]

10캐럿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약혼반지를 떠올린 윤은 웃으면서, 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 * *

사교 클럽 건물은 오스틴 시내 중심부에 있었다. 알렉스가 사교 클럽까지 메르세데스 SUV를 운전하고, 윤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주차를 마치고,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건물 입구로 걸어갔다. 건물 입구에는 진행 요원이 서 있었다. 알렉스는 진행 요원에게 초대장을 건네면서 자신의 신상 정보를 말했다.

“알렉산더 테신 4세입니다. 이쪽은 제 남편, 주윤 박사예요.”

“네?”

진행 요원은 뜨악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와 윤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진행 요원은 명단을 확인했다. 명단에는 분명 알렉산더 테신 4세와 배우자 주윤 박사라는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명단에는 그들이 동성 부부라는 말은 없었다. 진행 요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부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서 있다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진행 요원도 난감했다. 동성 결혼이 합헌이 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동성 부부가 이 사교 클럽의 입회 허가를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뭐지? 사고인가? 회장단이 실수했나?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규정이 바뀌었나? 진행 요원은 식은땀을 흘리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텍사스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 오스틴의 가장 유서 깊은 사교 클럽에서 일대 파란이 불고 있었다.

* * *

사교 클럽 회장인 존 우드워드 3세는 돌발 사태를 전해 듣고 충격에 빠졌다. 그는 급하게 그 자리에 참석한 간부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대부분 포춘 500 리스트에 드는 기업의 임원, 석유 재벌, 목화 재벌, 텍사스로 이주해 온 올드 머니의 후손, 또는 고위 공직자들이었다.

새 회원의 아버지, 알렉산더 테신 3세는 클럽의 오래된 회원이었다. 그는 작고한 테신 상원의원의 장자이며(테신 의원도 이 클럽의 오랜 회원이었다), 클럽의 회장이었던 밀튼 네이아드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테신 3세는 오스틴에서 가장 큰 로펌인 티시, 맥켄지, 엘드릿지 앤 프루잇 로펌의 수석 파트너이기도 했다. 그가 얼마 전에 은퇴하면서 늦둥이 외동아들이 클럽에 입회해도 되겠냐고 묻길래, 회장단은 당연히 그러라고 했다.

그들도 예전부터 테신 4세가 누구인지 알았다. 그가 입회 신청서를 냈을 때, 간부들은 그의 이력을 조회해 보며 뿌듯해했다. 이 정도면 클럽 신규 회원으로서 모자라는 곳이 없었다. 대학 미식축구 스타 출신이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이후에는 검사와 변호사로 훌륭한 경력을 쌓아왔으며, 얼마 전에는 대형 로펌의 파트너로 승진했다. 그가 일찌감치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혼 적령기의 딸을 둔 회원들이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남몰래 결혼한 것을 보면, 배우자에게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테신 4세의 배우자의 링크드인 페이지를 확인했다. 배우자의 링크드인 페이지에 사진은 없었다. 이름을 보니 동양인이기는 하지만, 컴퓨터 공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연구원이었다. 직장도 아주 좋았다. 그래서 그들은 합격이라고 판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실수를 범했다. 그들은 배우자의 성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당연히 배우자가 여자라고 생각했다. 이는 박사라는 호칭과 그들로서는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동양식 이름 때문에 벌어진 사고였고, 테신 4세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감 때문에 검증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서 생긴 실수이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배우자의 성별을 확실하게 확인했어야 하는 건데. 회장단은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클럽 규정에는 동성 부부 회원에 관한 조항이 없었다. 왜냐하면, 여태까지 동성 결혼을 한 사람들이 입회 신청서를 내도 허가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련 규정이 아예 없으니 무효로 하기도 어렵고.”

“그래도 클럽의 전통이 있잖아요.”

“하지만 이미 통과시켰잖아요. 그 친구에게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배우자를 트집 잡기는 더 어려워요. 어차피 배우자는 회원을 따라오는 거니까.”

“근데, 세상이 변하는데 우리도 변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회장단이 혼란에 빠졌다. 회장단은 30분간 논의를 마쳤고 젊은 부부를 만나 보기로 했다. 그들을 내실로 불러보니 혼란은 가중되었다.

비슷한 스타일의 검은색 슈트를 입고 서 있는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보기 좋은 한 쌍이었다. 그들에게서는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람 특유의 자신감과 혈기가 느껴졌다. 테신 4세는 거만해 보일 정도로 당당했고, 그와 손을 잡고 서 있는 동양인 남편은 긴장한 티를 내면서도 당당했다. 회장단은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후, 더욱 당혹스러워졌다. 두 사람에게 트집을 잡으려고 해도 트집 잡을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에 몰린 회장단은 일단 부부를 내실에서 내쫓고 논의를 계속했다.

* * *

내실에서 내쫓긴 알렉스와 윤은 조그만 대기실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윤은 잔뜩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영감들이 제정신이면, 없는 규정을 만들어서라도 통과시키겠지. 여기는 클럽 관련 정보를 되도록 기밀에 부치려고 하는 곳이니까, 만약 우리를 내쫓으면 언론에 전부 불어버린다고 말할 거야. 이건 성 소수자 차별이라고.”

알렉스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웃으며 말했지만, 윤은 알렉스를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알렉스가 나와 결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지난 몇 년 동안 곱게 달래 왔던 자격지심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윤. 또 이상한 생각 하지? 이게 다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얼굴에 티가 나는데.”

“…….”

“결혼은 자기 혼자 했나. 나도 같이했는데.”

“…….”

“여보. 나는 당신과 결혼해서 정말 행복해. 그러니까 앞으로도 내 마음은 의심하지 마.”

알렉스는 윤의 두 손을 잡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윤은 알렉스의 눈을 보지 못하고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그는 울지는 않았지만,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윤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아팠지만, 일부러 밝게 말했다.

“영감들이 퇴짜를 놓으면, 다른 사교 클럽을 알아보면 그만이야. 사실, 여기 말고 와인 클럽이 더 재미있어 보이더라. 거기에는 우리 또래인 회원도 많아.”

[그래도 여기 가입하는 게 인맥을 만들기에는 좋잖아.]

“그건 부인하지 못하겠네.”

알렉스는 윤의 어깨를 안고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윤은 알렉스에게 안겨 대리석 바닥을 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전 남자 친구에게 호되게 데고 나서 알렉스를 만났다. 윤은 현실 앞에서 저를 비참하게 버리고 가버린 남자 친구처럼, 알렉스도 현실적인 문제가 닥치면 저를 버리고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스는 윤의 곁에 남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현실적인 문제를 겪는 것이 벌써 여러 번째인데도 알렉스는 괜찮다고 했다. 알렉스가 언제까지 이런 불이익을 참을 수 있을까? 이러다가 갑자기 어느 날, 알렉스가 저는 이제 지쳤으니 이혼하고 싶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알렉스가 이혼하자고 하면, 나는 어쩌지? 불안한 생각이 들자 윤은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윤은 제 어깨를 감싸 안은 알렉스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쥐면서 물었다.

[자기는 내가 좋아?]

“응.”

[자기는 내가 왜 좋아?]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에 이유가 필요해?”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라 이유가 필요해.]

“자기는 나보다 훨씬 강하고 담대한 사람이야. 군대도 갔다 왔고, 자기 인생을 잘살아 보겠다고 맨주먹으로 태평양을 건너왔잖아. 그래서 나는 자기 옆에 붙어 있으면 무인도에 떨어져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랬어?]

“게다가 섹시하기까지 하고.”

알렉스는 윤의 가슴팍을 옷 위로 은근히 쓰다듬으면서 피어싱을 만졌다. 윤은 알렉스의 손길이 간지러워서 킥킥 웃었고, 알렉스는 윤의 귓불 위로 숨을 불어넣었다. 알렉스의 숨결이 닿자, 윤은 몸을 가느다랗게 떨었다. 알렉스가 윤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면 자기는 내가 왜 좋아?”

[다정해서.]

“그게 다야?”

알렉스는 윤에게 간지럼을 태우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윤을 소파 위로 와락 넘어뜨리고 위에 올라탔다. 윤은 웃으면서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알렉스가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안다. 윤이 손을 뻗어 알렉스의 뺨을 만지면서 웃었다. 알렉스가 제 뺨을 만지던 윤의 손을 가져다가 엄지손가락부터 새끼손가락까지 손가락 끝에 차례대로 키스했고, 혀를 조금 내어 엄지손가락을 핥았다. 윤은 젖은 엄지손가락으로 알렉스의 입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자기가 이럴 때조차도 다정해서 좋아.]

윤의 대답을 듣고, 알렉스는 웃으면서 윤의 곁에 누웠다. 둘은 소파 위에 누워 키스했다. 서로의 목을 안고 키스하다가, 윤이 손으로 알렉스의 바지 위로 성기를 장난스럽게 쥐었다. 알렉스가 키스하다 말고 윤의 엉덩이를 살짝 때리면서 웃었다.

“여기서는 안 돼. 이러다가는 입회 되었다가도 풍기 문란으로 쫓겨나겠다.”

[알았어.]

윤이 웃으면서 알렉스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알렉스는 윤에게 제 팔을 내주고 천장을 보고 누웠다. 윤은 알렉스의 팔을 베고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다른 자리도 많은데, 두 사람은 굳이 좁은 소파에 나란히 누운 채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 * *

알렉스와 윤은 사교 클럽의 회원이 되었다. 회장단은 관련 규정이 없고, 시대 변화를 고려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이번만 예외 사례로 처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입회가 결정되고 나서, 윤과 알렉스는 만찬에 참석해서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사교 클럽에는 거의 백인만 있었고, 흑인과 히스패닉, 동양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알렉스는 당연히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특히 남자들은 다들 알렉스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 알렉스는 알파 메일 중의 알파 메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윤은 금방 겉돌게 되었다. 윤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것이 아니라서 백인 상류층 사람들과 공통 화제를 찾는 데 한계가 있었다. 사립 학교는 어떻고, 대학은 어떻고, 어린 시절에 사격을 했고, 승마를 했고, 요트를 탔고, 사냥을 했고, 프롬이 어쩌고저쩌고, 데뷔탕트가 어쩌고저쩌고, 드레스와 슈트는 어디서 맞춰 입었고, 파트너가 어느 집 따님이었고, 어느 집 아드님이었고.

달나라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윤은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알렉스의 곁에 있는 윤을 봐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들은 윤을 투명인간처럼 대했다. 차라리 손으로 눈을 찢고 동양인이라고 대놓고 욕하는 게 낫지, 지금처럼 은근하게 느껴지는 차별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윤은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알렉스의 사회생활을 돕고 싶어 같이 사교 모임에 나왔지만, 동양계 남자 이민자라 한계가 뚜렷했다. 남자들도 저를 대화에 끼워 주지 않는데, 남자인 제가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된 회원 배우자들의 소모임에 나갈 수 있겠나, 설령 거기에 나간다고 해도 여성들과 공통 화제를 찾을 수 있겠나. 차라리 알렉스가 말했던 와인 클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저도 술은 좋아하고 잘 마시니까.

윤이 알렉스의 곁에 서서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는데, 알렉스 또래의 여성이 윤에게 말을 걸었다.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을 가진, 차분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에밀리예요.”

“안녕하세요. 윤이에요.”

“어떻게 오셨어요?”

“남편을 따라 왔어요.”

윤은 알렉스를 턱짓으로 살쩍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에밀리는 알렉스를 잠시 바라보았다가 윤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남자분이 배우자로 오신 건 보기 힘든데. 이 클럽에 여성 회원들이 거의 없기도 하고, 여성 회원들은 대부분 독신이시거든요. 모임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에밀리도 남편분을 따라오신 건가요?”

“네.”

“이 모임에 나오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한 3년 되었나? 저도 처음에 왔을 때는 정신이 없었어요. 여기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그렇구나…….”

“이곳에는 남편 때문에 오는 거지, 저 혼자라면 올 일이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와 똑같네. 윤은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윤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저는 연구원이에요.”

“무엇을 연구하시나요?”

“인공 지능이요.”

윤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알렉스를 흘낏 보니, 그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윤은 알렉스를 내버려 두고 에밀리와 본격적으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 * *

에밀리는 텍사스 서부 출신이고 목화 농부의 딸이었다. 그녀는 주립대를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다가 변호사인 남편을 만나 결혼해서 일을 그만두었고, 지금은 전업주부였다.

에밀리는 클럽 남자 회원들의 아내들과 대화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에밀리는 라이스 대학교, 텍사스 크리스찬 대학교나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교 등 유명한 사립대를 졸업한 명문가의 여성들 사이에서 많이 치인 듯했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텍사스를 벗어나 본 적도 없는 사람이라, 여름마다 프랑스 파리에 가는 여자들 사이에서 소외감을 느낀 것 같았다.

윤은 그녀의 아이들 이야기, 교육 이야기, 집안일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산이 이야기를 하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산이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윤의 결혼 생활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윤이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저희의 일과는 늘 비슷해요.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 먹고, 고양이 화장실 치우고, 출근하고, 퇴근하면 같이 저녁을 먹고. 운동하고, 일하고, 넷플릭스 보다가 자요.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에 집안일을 봐주시는 분이 오시기는 하는데, 주말에는 저희가 집안일을 하고 장을 봐요. 그러다가 둘이 같이 놀고, 일이 많으면 주말에도 일하고. 그게 다예요.”

“두 분이 뭐 하고 노세요?”

“맛있는 거 먹고, 운동하고, 드라이브하고, 영화 보고, 쇼핑하고, 투자할 땅을 보러 다닐 때도 있어요.”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네?”

“아뇨. 아니에요.”

에밀리가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윤은 그녀의 숨은 의도를 알아차렸다. 게이 부부라 일상생활이 남들과 다르고, 괴상한 구석이 있으리라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것이겠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은 아는 것 같았다.

윤은 예전에는 차별 발언을 들으면 그 말을 바로잡고, 때로는 격렬하게 싸웠다. 하지만 이곳에 오랫동안 살다 보니,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를 바로잡으며 사는 것이 지겨워졌다. 이곳에 다양한 사람이 사는 만큼, 사람들이 저와 알렉스에게 가지는 편견과 오해는 끝이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그래서 윤은 악의 없는 차별 발언에 대해서는 정정하기를 그만두었다.

* * *

윤은 샴페인을 홀짝이며 에밀리와 즐겁게 대화하다가 난데없이 주먹으로 얼굴을 맞았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샴페인 잔이 부서져 깨지고, 윤은 얼굴을 맞고 휘청거리다가 입안에 피가 고이는 것을 느꼈다. 맞은 곳이 너무 아파서 저를 때린 놈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머리를 들 수도 없었다.

“내 아내에게서 떨어져!”

“여보, 아니야. 이분은 테신 씨의 남편이야.”

에밀리가 비명을 지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남편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말투에서 술에 취한 티가 미세하게 났다. 아픔이 조금 가시고, 윤은 다짜고짜 저를 때린 놈에게 따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와 비슷한 체구의 40대 초반 백인 남자. 그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술에 취한 티가 거의 나지 않았다. 어디서 술버릇이 잘못 든 놈이 와서 행패인지. 윤은 인상을 쓰면서 터진 입 안을 혀로 더듬었다. 이가 빠진 것은 아닌데, 맞으면서 입 안을 잘못 씹었는지 피가 줄줄 났다. 에밀리는 남편의 팔에 매달려 그를 말리고 있었다.

“여보! 데이비드!”

“이 눈 째진 새끼가 어디 감히-”

에밀리의 남편이 모욕적인 말을 하자마자 주변이 온통 조용해졌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라서, 인종 차별을 대놓고 하면 큰일이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 사람도 평소에는 조심하느라 절대 하지 않을 말을 술에 취해서 하는 중이었다. 윤은 입 안이 아프고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주변을 살폈다. 저놈이 술에 취해 하도 크게 떠드는 바람에 증인이 될 만한 사람은 많았다. 누군가 동영상을 촬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고.

“다시 말해 봐, 내 눈이 어떻다고?”

윤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그 사람을 주먹으로 한 대 치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윤을 끌어안았다. 알렉스였다. 윤은 자신을 가로막은 알렉스에게 화가 나서 알렉스의 등을 퍽퍽 때렸다. 알렉스가 윤을 끌어안고 말했다.

“하지 마.”

[이거 놔. 알렉스! 저 새끼 내가 가만 안 둬!]

“여보, 너 지금 취했어.”

[아니야. 아니라고!]

“여기서 자기까지 주먹을 쓰면 안 돼. 자기에게 불리해져. 이건 남편이 아니라 변호사로서 하는 말이야.”

그제야 윤이 잠잠해졌다. 알렉스는 한숨을 쉬었다. 윤은 싸움을 잘한다. 예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먹다짐을 했을 때, 알렉스는 윤이 던진 접시에 맞아 쌍코피가 터졌다. 알렉스는 운동선수 출신이라 힘이 세고, 윤과 체급 차이도 한참 난다. 하지만 알렉스는 방심했고 윤은 작정하고 덤볐기 때문에 오히려 알렉스가 된통 얻어터졌다. 그러니, 윤에게 자신과 키와 체구가 비슷한 사람을 때려눕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미안해. 내가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알렉스가 사과했고, 윤은 알렉스의 품 안에서 씩씩거렸다. 알렉스는 윤이 진정할 때까지 부드럽게 윤의 등을 두 손으로 쓸어 주었다. 윤이 진정하고 나서, 알렉스는 천으로 만든 냅킨을 물에 적셔 피투성이가 된 남편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제가 인맥을 만들며 네트워킹을 하다가 정신이 팔린 사이, 윤은 안 좋은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 윤을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알렉스는 윤을 깜빡하고 사교 활동만 열심히 하였던 저를 반성했다.

마침내 피가 멎었다. 피가 멎고, 윤은 알렉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 에밀리는 울상이었고, 에밀리의 남편은 아직도 식식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에밀리와 에밀리의 남편을 둘러싸고 서서 싸늘한 시선을 보냈고, 윤과 알렉스에게는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혼란한 사이,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했고 경관들이 사교 클럽에 들이닥쳤다. 그래서 윤과 알렉스, 에밀리, 에밀리의 남편은 경찰차를 타고 경찰서로 가야 했다.

* * *

에밀리의 남편이 윤을 먼저 때리고 그에게 인종 차별 발언을 했다고 증언해 줄 사람은 매우 많았다. 심지어 현장을 찍은 감시 카메라도 있었고, 회원 중 한 사람이 찍은 동영상도 있었다. 싸움은 윤에게 대단히 유리했다. 윤은 경찰에게 절대 합의하지 않을 것이며, 자세한 논의는 자신의 남편이자 변호사인 알렉스와 하라고 말한 뒤, 경찰서를 나섰다.

알렉스와 윤은 대학 병원 응급실에 들러 진료를 받고 진단서를 끊었다. 두 사람은 병원에서 나왔고, 알렉스는 윤을 조수석에 태웠다. 집에 가는 동안, 윤은 부은 볼을 얼음팩으로 문지르며 창밖만 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윤의 눈치를 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 와인 클럽은 어떨 거 같아?”

윤은 그 질문을 듣고 깜짝 놀라더니, 운전하는 알렉스를 돌아보면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사교 모임이 여기만 있는 건 아니잖아.”

여기 말고도 사교 클럽은 많다. 그러니 윤이 얻어터지고 모욕을 당한 곳을 굳이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영업과 인맥 만들기는 다른 클럽에 가서 열심히 해도 충분하다. 하지만 윤의 생각은 알렉스의 생각과 달랐다.

[정신 차려, 알렉스. 우리가 여기서 물러서면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다음 기회는 없어.]

윤은 냉정하게 말했다. 윤의 대답을 듣고, 알렉스는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갑자기 예전 일이 생각났다. 동거하던 시절. 알렉스가 산 안젤로 법원 인턴 모집 공고에 지원하지 않겠다고 하자, 윤은 배부른 소리 하지 말고 기회를 잡으라고 알렉스를 호되게 혼냈다. 그때도 지금처럼 엄격한 말투로 말하고 있었는데. 알렉스는 운전하다 말고 추억을 떠올렸고, 왼손등으로 입을 막고 웃었다.

[왜 웃어?]

“역시 내 예상대로라서.”

[그게 무슨 말이야?]

“와인 클럽 이야기는 나도 그냥 해 본 말이야. 내가 아는 주윤은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니까. 내가 그래서 자기를 사랑해.”

윤은 알렉스의 말을 듣고 얼굴을 약간 붉혔고 얼음주머니로 볼을 세게 문질렀다. 그러다가 윤이 입안에 난 상처를 잘못 건드렸고, 상처가 아파서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여보, 맞은 데가 아파.]

윤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알렉스는 운전하다 말고 얼굴이 창백해진 채, 윤에게 물었다.

“이가 흔들리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닌데, 입안에 살이 파인 것 같아.]

“아파도 조금만 참아. 집에 가서 연고 다시 발라 줄게.”

[그 새끼는 유죄 나오겠지?]

“그럼. 증거가 널렸는데.”

알렉스는 윤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윤은 얼음팩을 고쳐 쥐고 볼을 문지르며 알렉스에게 물었다.

[그 새끼는 클럽에서 제명이겠지?]

“그렇겠지. 인종 차별도 있고 폭행에 완전 명정 죄로 기소될 테니 로펌에서도 잘릴 거고.”

[에밀리만 불쌍하게 됐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번 사건에서 자기가 제일 불쌍해. 그 새끼한테 억울하게 맞은 건 자기라고.”

이번에는 알렉스가 투덜거렸다. 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창밖을 보았다. 입 안이 쓰려서 말을 하기 힘들었다.

윤은 부은 볼을 부여잡고 다음 행사 일정을 생각했다. 다음 모임은 자선 모금 행사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고 만다. 부부 동반 모임이니, 어떻게든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고 노력해서 알렉스의 사회생활을 도와야 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오기가 끓어오르고, 윤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 * *

다음 모임에도, 그다음 모임에도 두 사람은 계속 참여했다. 알렉스는 자신의 전략을 유지했고, 윤은 화려한 수익률을 기록하는 자신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공유해서 남성 회원들을 공략하며 알렉스를 외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윤을 얕봤던 사람들도 윤의 투자 포트폴리오에 감탄했다. 그들은 가끔 윤에게 자신이 운영하는 자산 운용사로 이직하라고, 지금 연봉의 두 배를 주겠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때로는 사내놈들끼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댄다고, 제 남편 하나 지키지 못하는 부실한 놈이 야망만 크다고, 역시 동양인이라 돈을 밝힌다고 뒷말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꿋꿋이 버텼다.

* * *

알렉스와 윤의 가입으로 논의가 시작된 지 2년 만에 회원 규정이 개정되었다. 클럽은 공식으로 동성 부부에게 문호를 열었고, 두 번째 동성 부부가 클럽에 가입했다. 그들은 대형 로펌의 여성 대표 변호사와 소아과 의사 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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