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The promenade
알렉스의 첫 직장은 오스틴 검찰청이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오스틴 검찰청의 검사보로 임용되었을 때, 알렉스는 낡은 캠리를 윤에게 주고 시그나기를 떠나며 주말 부부 생활을 시작했다.
주말 부부 생활을 하는 동안, 알렉스는 부모님 집에 얹혀살았다. 독립해서 살기에는 공무원이라 연봉이 빠듯하기도 했고, 혼자 지내는 것이 싫기도 했다. 아무리 박봉이어도 출퇴근을 하려면 차가 필요했기 때문에, 알렉스는 연식이 오래된 중고 그랜드 체로키를 샀다.
알렉스는 검찰청에서 일 중독자로 통했다. 주중에는 야근을 불사하며 모든 일을 주중에 처리했고, 여가는 모두 운동에 썼다. 금요일 아침에는 슈트 케이스에 짐을 싸서 출근했고, 오후 다섯 시가 되자마자 공항으로 퇴근하여 시그나기로 갔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가 되면, 알렉스는 오스틴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알렉스의 배우자에 대해 궁금해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결혼했다는 사실만 밝히고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알렉스는 사람들에게 배우자의 사진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들은 결혼하면서 알렉스의 할아버지와 결혼 계약서를 썼기 때문이었다.
윤도 마찬가지였다. 윤이 결혼했다는 사실은 밝혔지만,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윤의 배우자가 누구인지 아는 주변 사람은 밍 교수와 수빈뿐이었다. 그리고 밍 교수와 수빈은 윤이 부탁했기 때문에 윤의 결혼 생활에 대해 비밀을 지켰다.
* * *
윤은 가끔 주말 부부 생활을 돌이켜보곤 했다. 그 시절은 애달프면서도 뜨거웠다. 3년 동안 같이 살다가 2년 동안 떨어져 지내려니 그리움이 더했다. 윤도 알렉스처럼 주중에는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붙어살았고, 여가는 운동에 썼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낡은 캠리를 운전해서 집에 돌아가는 길이 너무나 행복했다.
금요일 저녁. 집에 가면 알렉스가 저녁을 만들고 있었다. 같이 저녁을 먹고,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끝없이 사랑을 나누었다. 토요일에는 늦잠을 자고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또 사랑을 나누었다. 일요일이면 윤은 집에서 공부하고, 알렉스는 밀린 집안일을 해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점심을 같이 먹고, 윤이 알렉스를 공항까지 바래다주었다. 가끔 알렉스를 공항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감정이 북받치면, 윤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울었다. 알렉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빈집에서 혼자 지낼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그러다가 월요일이 오면, 윤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바쁘게 지냈다.
윤은 주말부부로 지내는 2년 동안, 그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그는 2년 동안 악착같이 학교생활을 했고, 탑 컨퍼런스에 연구를 여러 번 발표했으며, 박사 학위를 무사히 취득하고 오스틴에 있는 기업 연구소에 취직했다.
* * *
박사 마지막 연차, 윤은 논문 프로포절5)과 디펜스6)에 알렉스를 부르지 않았다. 윤은 너무 긴장해서, 알렉스를 보면 토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내용을 발표하는 자리라 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발표는 아는 사람 앞에서 하는 발표였다.
알렉스는 윤이 프로포절과 디펜스에 못 오게 해서 아쉬웠지만, 윤이 프로포절을 하고 디펜스를 하는 동안 사무실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대신, 졸업식에는 참석했다. 학사모를 쓰고 가운을 입고 있는 페이 밍 교수가, 학사모를 쓰고 가운을 입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윤의 어깨에 휘장을 걸어줄 때, 윤은 웃었고 알렉스는 울었다. 알렉스의 곁에 있던 환과 산, 자형, 알렉스의 부모는 울고 있는 알렉스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지만, 내심 알렉스를 귀여워했다.
* * *
윤이 학교를 졸업하고 오스틴에 있는 글로벌 IT 기업 연구소에 취직하면서, 둘은 다시 같이 살게 되었다. 알렉스와 윤은 시그나기 신혼집을 팔고, 주택담보대출을 끼고 오스틴 노스웨스트 힐즈에 있는 이층집을 샀다. 둘은 집을 리모델링하고, 보호소에서 고양이도 두 마리나 데려왔다.
리모델링을 마친 집에 고양이를 각각 한 마리씩 안고 들어섰을 때, 두 사람은 비로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정말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갔다.
* * *
알렉스는 자신이 서른한 살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끔 신기했다. 어릴 때부터 선수 생활을 하느라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일찍 결혼해서 그런지, 알렉스는 제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많은 것처럼 느껴졌다. 알렉스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윤은 알렉스를 놀려댔다.
[내가 보기에 자기는 철들려면 아직도 멀었어.]
두 사람은 이제 영어로만 대화하기도 하고, 윤은 한국어를 쓰고 알렉스는 영어를 쓰면서 대화하기도 했다. 윤은 그때그때 저에게 편한 언어를 쓰고, 알렉스는 한국어를 익힌 덕분이었다.
결혼 전. 윤과 코피가 터지도록 싸웠을 때, 알렉스는 윤이 한국어로 울면서 소리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이 정말 싫었던 알렉스는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알렉스는 한국어를 알아듣고 독해할 수 있지만, 쓰고 말하는 것은 아직 어려웠다. 한국어의 언어 체계가 영어와 완전히 달라서 쓰고 말하는 것까지 숙달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알렉스가 너무 바빠서 한국어 학습에 그만큼의 시간을 쓸 수는 없었던 탓이었다. 그래도 말과 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어디인가. 알렉스가 처음에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 했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아무튼. 알렉스는 윤의 평가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저는 10년 넘게 선수 생활을 했고, 기업 범죄 담당 검사로 3년 동안 일하다가, 1년 전에는 대형 로펌 M&A 팀의 시니어 어소시에이트로 이직했을 정도로 성숙한 남자였다.
* * *
알렉스의 새 직장은 오스틴에서 기업 자문으로 가장 유명하고, 텍사스에서도 기업 자문으로 손에 꼽히는 수준의 대형 로펌이었다. 이직 사유는 뻔했다. 검사 연봉이 너무 적기도 했고, 판사 임용을 노리려면 다양한 경력을 쌓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로펌으로 이직하며 연봉이 많이 오르기는 했지만, 갓 취직한 윤의 연봉이 알렉스의 연봉과 비슷했다. 알렉스는 두 사람의 연봉에는 큰 차이가 없을지 몰라도, 사회생활 경험은 제가 훨씬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알렉스는 제가 철이 없다고 말하는 남편의 평가를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 * *
어느 날, 알렉스의 사촌 조셉 주니어가 두 사람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7년간 복무하다가 얼마 전에 제대했다. 조셉은 테신 의원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제대한 것이었다.
조셉 주니어는 제대하면서 공화당에 입당했다. 젊고 잘생기고, 웨스트포인트 출신이고 이라크 전쟁 참전 용사이며 테신 의원의 손자인 조셉은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표를 끌기에 제격이었다.
당에서는 조셉에게 오스틴 부촌 지역구에 주 하원의원 후보로 공천을 내주었다. 공천을 받으면서, 조셉은 사귀던 여자 친구와 약혼했다. 조셉의 약혼녀는 텍사스 토박이 석유 재벌 가문의 손녀였다. 조셉은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며, 테신 의원이 알렉스에게 기대했던 것들을 하나씩 완수해 나가고 있었다.
* * *
조셉은 빈티지 와인 한 병을 들고 집을 찾아왔고, 알렉스와 윤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윤이 조셉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두 사람은 조셉의 쌍둥이 누나인 사라는 자주 만나 어울리지만, 조셉은 이라크에서 오랫동안 복무했기 때문에 몇 년 동안 만날 일이 없었다.
조셉은 키가 알렉스만큼 크고, 건장한 몸을 엄격하게 단련했다. 금발과 선명한 초록색 눈이 두드러져서 인상이 부드럽고, 서글서글한 미소를 자주 짓기 때문에 외탁한 알렉스보다도 알렉스의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한마디로 조셉은 테신 의원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잘생긴 청년이었다.
“오랜만이야.”
“형은 어떻게… 점점 더 잘생겨지네.”
조셉은 입 안에서 앓는 소리를 내면서 알렉스에게 와인을 건넸다. 알렉스는 웃으며 와인을 받아들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윤. 저는 조셉이에요. 알렉스의 사촌이죠. 말씀 많이 들었어요.”
조셉은 윤에게 악수를 청했고, 윤은 조셉과 반갑게 악수하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알렉스는 윤이 조셉과 악수하는 모습을 보다가, 조셉에게 대뜸 물었다.
“윤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한테 들었는데?”
“우리의 친애하는 이사벨라 여사님께 들었지. 할머니가 윤이 싹싹하다고 좋아해요.”
“다행이네요.”
윤은 웃으면서 말했다. 윤의 대답을 듣고 조셉은 씩 웃었다. 조셉과 알렉스는 사촌이지만, 체격을 제외하면 하나도 닮지 않았다. 윤은 조셉이 상냥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테신 의원을 떠올렸다. 그러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혈연이라 해도 손자와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닮을 수가 있나?
* * *
저녁은 알렉스가 만들었다. 조셉이 파스타를 좋아해서 이탈리아식 정찬을 차렸다. 조셉이 가져온 와인으로 식전주를 내고, 지중해식 참치 요리를 전채로 내고, 해산물 오일 파스타를 내고, 연어 요리와 무화과 샐러드를 내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세 사람은 저녁을 먹고 거실로 나왔다. 그들은 보드카로 주종을 바꾸고, 술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보드카에 토닉 워터나 오렌지 주스, 크랜베리 주스를 타서 마셨고, 술이 오르자 다들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알렉스의 인기는 정말 대단했거든요. 근데 형은 정말 얌전했어요. 파티도 안 가고,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케이틀린 누나하고만 쭉 사귀고. 형은 그 누나가 학부를 졸업하고 댈러스에 갔는데도 열렬하게 장거리 연애를 했어요. 순애보가 따로 없었죠.”
“야.”
“나 같으면 그 얼굴로 그렇게 안 산다.”
조셉이 짓궂게 말했다. 조셉은 윤에게 질투를 느끼라고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녀와 오래 사귀었으면 뭐 하나. 어차피 알렉스는 저와 결혼했는데. 게다가 윤은 케이틀린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알렉스의 아버지가 윤에게 이야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스는 조셉의 말을 듣고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그만하고 네 약혼녀 이야기나 해.”
“음, 캐롤라인은 예뻐.”
조셉은 약혼녀 이야기를 하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약혼녀를 생각하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라니. 알렉스가 스크류 드라이버를 쭉 들이키면서 조셉에게 물었다.
“그게 다야?”
“예쁘고 똑똑하고 돈이 많지. 그리고 나를 많이 좋아해. 나도 캐롤라인을 좋아하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데?”
“상속녀.”
“조셉, 상속녀는 직업이 아니야.”
“형, 우리 할머니를 봐. 할머니는 평생 돈으로 돈을 벌었잖아. 그러니까 상속녀는 직업이 맞아.”
조셉은 웃으면서 알렉스에게 살짝 면박을 주었다. 알렉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윤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조셉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둘이 어떻게 만났어요?”
“할아버지가 만나 보래서 만나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서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조셉은 웃으면서 말했다. 한껏 웃고 나서, 조셉은 토닉 워터를 섞은 보드카가 들어 있는 크리스탈 컵을 손에 쥐고 차분하게 말했다.
“식은 오는 5월에 올리기로 했어요.”
지금은 1월이니 결혼식까지는 넉 달 정도 남았다. 윤은 조셉에게 어떤 결혼 선물을 주면 좋을지 생각했다. 상원의원의 손자와 상속녀의 결합이니 돈이 아쉽지는 않을 텐데. 대체 무엇을 선물로 주면 좋아하려나? 윤이 결혼 선물을 생각하고 있는데, 알렉스가 조셉에게 물었다.
“어디서?”
“결혼 예배는 교회에서 올리고, 피로연은 할아버지 저택 뒷마당에 케이터링 불러서 열 것 같아.”
“화려하겠네.”
“그치?”
“할아버지가 좋아하시겠어.”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에게 부탁할 게 있어.”
“뭔데?”
“알렉스와 윤은 내 결혼식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
“나는 두 사람을 좋아해.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니잖아. 그리고 캐롤라인과 그 집안도…… 아니거든.”
“…….”
“어차피 할아버지와 결혼 계약도 했다며. 만약 두 사람에 대해 소문이 나면, 내 선거 후원금도 잘 안 들어오겠지. 그러니까 두 사람에게는 축하하는 마음만 받을게.”
“…….”
“부탁해.”
윤은 조셉의 뻔뻔한 말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알렉스가 걱정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알렉스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알렉스는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커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알렉스는 조셉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기만 하고, 말은 하지 못했다. 윤은 오른손을 뻗어 알렉스의 왼손을 잡았지만, 알렉스는 평소처럼 윤의 손을 마주 잡지 않았다. 조셉은 아무런 표정 없이 알렉스를 바라보았고, 알렉스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 말했다.
“……알았어.”
“…….”
“결혼 축하해.”
“…….”
“오늘은 늦었으니까 손님방에서 자고 가라.”
자고 가라는 말만 남기고, 알렉스가 윤의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렉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술자리가 엉망으로 파하고, 윤은 조셉을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조셉은 손님용 침대 매트리스 위에 걸터앉았다. 윤은 손님방에 딸린 욕실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욕실은 저기 있어요.”
“고마워요.”
윤이 손님용 잠옷과 세면도구를 꺼내와 조셉에게 챙겨주는데, 조셉이 윤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괴로워요. 두 사람에게 미안하고.”
“……알겠어요.”
“상황을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형에게도 내가 많이 미안해한다고 전해 줘요.”
“내 말을 제대로 안 들었죠? 나는 사과를 받아 준 게 아니에요. 조셉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아들었다고만 말한 거예요. 그리고 조셉이 알렉스에게 사과하고 싶다면, 직접 하세요.”
“…….”
“잘 자요.”
윤은 조셉에게 인사하고 나서 손님방을 나왔다. 거실은 조용했다. 윤은 거실에 혼자 앉아 남은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는데 눈물이 났다. 결혼한 이후, 언제나 마음 한구석을 괴롭히던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윤은 제가 알렉스의 찬란한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윤은 사랑이 죄는 아니지만, 사랑을 좇는 대가는 참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 남자 친구와의 호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윤은 알렉스의 곁에 있고 싶어서 사랑을 좇았다.
만약 알렉스가 현실적인 문제로 괴로워하면, 그때는 미련 없이 보내 줘야겠다. 알렉산더 테신 5세를 갖고 싶다고 말하면 이혼해 줘야겠다. 윤은 예전에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순간이 실제로 닥쳐 오니 너무나 괴로웠다. 윤은 알렉스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윤은 술을 마시며 혼자 많이 울었다.
* * *
알렉스는 알렉스대로 괴로웠다. 조셉의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고 처음 부모님에게 거부당하던 순간도 떠올랐다. 부모님은 평소 동성애자들에게 관대하게 행동했지만, 아들이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는 현실을 부정했다. 그리고 알렉스는 부모님의 모순적인 행동에 화가 났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이제 그들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 아무리 인격이 성숙한 사람들이라 해도, 아들의 커밍아웃을 한 번에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서 현실을 부정했던 부모님은 알렉스와 윤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고, 이제는 정말 한 가족이 되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부모님이 한때 거부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알렉스는 환도 생각했다. 환은 오랫동안 윤이 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가지면서 동생을 진심으로 동정하고 이해하게 되었고, 동생과 화해하고 싶어서 임신한 몸을 이끌고 미국까지 찾아왔다. 남매는 화해했고, 그녀는 윤과 알렉스를 아이의 첫 생일 파티에 초대할 정도로 소중하게 대접했다. 환과 그녀의 가족들은 한국에 살고 있어서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알렉스는 그들과 자주 연락하고 산의 생일을 챙길 정도로 친해졌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조셉은 알렉스가 남자와 결혼하거나 말거나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냈고, 알렉스의 남편인 윤에게도 친절했다. 조셉은 처음에는 사근사근하게 굴었지만, 눈앞의 커다란 이익에 눈이 멀자 두 사람을 가차 없이 밀어냈다. 믿었던 사촌이 속물근성을 드러내고, 그에게 존재를 부정당하고 거부당하는 느낌은 지독했다.
조셉은 결국 알렉스가 너무 부끄럽고, 제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알렉스를 모른 척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이제 조셉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고, 남자와 결혼한 남자니까 조셉의 인생에서 그만 꺼져 줬으면 좋겠다고도 말하고 있었다.
큰 충격을 받고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니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막막하고 괴로웠다. 발에 납덩이를 매달고 심해로 가라앉으며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인데, 알렉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을 쥐어뜯기는 고통을 느끼다가, 그는 머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눈물 없이 통곡했다. 눈물 없이 한참 통곡하다가 결국 눈물이 흘렀고, 알렉스는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한참 울고 나서, 알렉스는 욕실에서 찬물에 세수하고 거울을 보았다. 어른이 애처럼 울다니.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그는 자조하며 침실 문을 열었다. 울고만 있을 게 아니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결론을 내린 알렉스는 조셉과 제대로 이야기하기 위해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
거실에는 윤만 있었다. 윤은 소파에 앉아 럼을 홀짝이고 있었고, 보드카 병은 텅 비어 있었다. 알렉스는 윤의 곁에 앉아 그의 옆얼굴을 보았다. 술기운이 오른 발그레한 뺨 위에 눈물 자국이 나 있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윤도 울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셉은?”
“자겠지.”
“……그래.”
“괜찮아?”
“괜찮지는 않아.”
“내가 괜한 것을 물었네.”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래?”
“하지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
“내가 말했잖아. 힘들 거라고.”
“……그러게.”
알렉스는 윤이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은 알렉스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저를 계속 만난다면, 앞으로 힘든 일이 많이 생길 거라고. 그게 얼마나 괴로운지 겪어보지 않아 모른다고. 그때는 윤이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가 저를 밀어내기 위해 괜히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이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되고 나니 너무 괴로웠다.
가족에게 배신당하고 거부당하는 고통은 참혹했다. 온몸에 불이 붙은 것 같은데, 몸에 붙은 불은 무슨 짓을 해도 꺼지지 않았다. 온몸이 불타는 고통이 너무 괴로운데 함부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혼자 안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고통을 느끼며, 알렉스는 혼란스럽기도 했다. 내가 지금 내 선택을 후회하고 있는 건가? 윤을 원망하고 있는 건가? 이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은 건가?
[네가 결혼하자고 말했을 때, 싫다고 말할 걸 그랬어.]
윤이 술잔을 커피 테이블 위에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은 취했지만, 눈빛이나 몸짓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알렉스는 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랬으면 네가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겠지.]
“…….”
[너는 그 사람처럼 예쁜 여자와 결혼하고, 귀여운 아이도 낳고…….]
“…….”
[내가 이기적이었어.]
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윤이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떠올라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윤을 품에 안으려고 했지만, 윤은 알렉스를 밀어냈다.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나는 괜찮으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무엇을?”
[이혼.]
“이혼? 그게 나한테 할 말이야?”
알렉스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그러자 윤은 울면서 크게 소리쳤다.
[나는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기 힘들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가 우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
“알렉스, 제발!”
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그는 알렉스를 피했지만, 알렉스는 윤을 끌어안았다. 윤은 알렉스에게 안겨 울었다. 알렉스는 눈물을 참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윤의 등을 다독이며, 알렉스는 윤의 귓가에 말했다.
“울지 마.”
윤이 알렉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알렉스는 제가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덕분에 윤을 품어 안아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렉스는 윤을 다독이다가 뜻밖의 사실을 알아차렸다.
조셉이 어느새 손님방 문간에 서 있었다. 사촌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손으로 문고리를 꽉 붙잡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조셉을 바라보았다. 조셉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조용히 손님방의 문을 닫고 들어갔다. 알렉스는 손님방의 문을 물끄러미 보다가, 윤의 정수리에 입 맞추고 말했다.
“나는 자기와 이혼하지 않아. 그럴 거면 결혼하지도 않았어.”
“…….”
“그러니까 울지 마.”
윤의 경고가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알렉스는 그를 달랬다. 윤이 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제가 우는 것보다도 괴로웠고, 어떻게든 그를 웃게 해 주고 싶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알렉스에게 윤과 헤어진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저와 헤어진다는 생각만 해도 이렇게 괴로워하는 사람을 두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 * *
조셉은 아침이 되자마자 허둥지둥 가버렸다. 알렉스는 아이폰으로 조셉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결혼 선물을 사 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하지만 조셉은 답을 보내지 않았다.
* * *
윤은 자신이 짐승 같다고 생각했다. 헤어질 자신도 없으면서 알렉스를 붙잡고 울부짖으며 패악을 부리는 주윤. 패악을 부리고 나니, 몸이 힘들어서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배가 고파서 뭔가를 주섬주섬 찾아 먹는 주윤. 출근해서 박사님 소리를 들으며 멀쩡한 사람인 척하며 일하고 회의하러 가는 주윤. 각기 다른 세 명의 주윤이 사실은 동일 인물이었다. 사랑 때문에 괴롭고 슬픈데도 기본적인 욕구는 버릴 수 없고, 살기 위해 돈은 꼭 벌어야 한다니. 모든 것이 정말 모순적이었다.
* * *
퇴근길에는 알렉스가 데리러 왔다. 알렉스는 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분명 어젯밤 일을 마음에 걸려 하고 있었다. 결혼한 이후, 두 사람 사이에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언급된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알렉스는 윤의 눈치를 보고, 더욱 다정하게 대했다.
윤은 알렉스의 옆얼굴을 보았다. 운전하고 있는 알렉스의 옆얼굴이 꺼칠했다. 알렉스도 종일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사촌에게 배신당한 충격이 큰 상황에서 남편이 위로하기는커녕, 이혼하자고 울며불며 지랄을 떨었으니. 알렉스가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며, 윤은 자신이 더욱 미워졌다. 그가 이런 저를 지겨워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 * *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아 어색하게 저녁을 먹었다. 저녁 먹은 것을 치우고 거실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조셉의 쌍둥이 누나인 사라가 집에 찾아왔다. 사라는 퇴근길에 한식당에 들러 분식을 사 왔다. 사라는 원래 알렉스와 친하기도 하고,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고 한국 문화에도 관심이 많다 보니 윤에게 호의적이었다.
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맵지 않은 떡볶이와 김밥, 튀김, 오뎅을 먹었다. 순한 맛 떡볶이인데도 사라와 알렉스에게는 너무 매워서, 두 사람은 우유를 마시면서 떡볶이를 먹었다. 한참 분식을 먹다 말고, 사라는 제 쌍둥이 동생인 조셉이 좆같은 놈이라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알렉스, 내가 그 새끼 대신 사과할게. 그 새끼가 갑자기 할아버지한테 이쁨받으면서 정치 뽕을 맞더니 정신이 완전히 나갔어. 우리 엄마 아빠도 그 새끼가 미쳤다고 생각해. 나는 저딴 새끼도 좋다고 결혼한다는 여자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
사라가 조셉을 대신해서 사과했다. 윤은 알렉스의 눈치를 보았고, 알렉스는 말없이 튀김만 집어 먹었다. 사라는 기다란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정말이야. 그 여자애가 예쁘고 얌전하고, 좋은 학교를 졸업하기는 했는데, 나는 별로더라고. 나와 성격이 너무 안 맞아.”
사라는 평소답지 않게 일부러 험한 말을 골라 쓰면서 화를 냈다. 알렉스는 사라가 왜 이러는지 알아차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사라. 이렇게 와준 것은 정말 고마워. 하지만 네가 아무리 부탁해도 결혼식에는 가지 않을 거야.”
“알렉스.”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알렉스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라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오빠와 윤이 뭘 잘못했다고? 그냥 무시하고-”
“나도 어제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휴…….”
사라는 한숨을 쉬며 알렉스를 보았다. 윤은 자존감이 없어 보이는 말을 하는 알렉스가 낯설었다. 알렉스가 이만큼 풀 죽은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알렉스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고, 사라는 윤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윤, 정말 미안해요. 내가 이런다고 윤의 마음이 풀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사과하고 싶어요. 나도 내 동생이 너무 부끄러워요.”
“…….”
“조셉이 와서 직접 사과해야 하는데, 그놈은 지금 권력에 취해서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사라는 조금 전까지 험한 말을 쏟아내던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예의 바르고 우아한 말투로 말했다. 윤은 사라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사과를 받아주었다.
“……괜찮아요. 사라.”
윤은 사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라의 커다란 눈동자는 연녹색이었다. 사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괜찮지 않은 거 알아요. 내 눈에는 우리 집안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알렉스와 윤을 말려 죽이려고 하는 게 보여요.”
사라는 화를 냈지만, 윤은 정말 괜찮았다. 욕먹는 일은 익숙하니까. 게다가 사라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제 처지를 이해해 주어 큰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윤은 알렉스가 걱정이었다. 현실에 참혹하게 내던져진 알렉스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저는 힘들어하는 알렉스를 어떻게 보듬어 주어야 할지, 그게 윤에게 앞으로 주어진 과제였다.
* * *
알렉스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참 뒤척였다. 윤도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알렉스보다는 먼저 잠들었다. 알렉스는 잠든 윤을 보며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생각에 잠겼다. 조셉의 일은 결혼 계약의 연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할머니는 아흔이 넘으며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데, 할아버지는 정정하게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할아버지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만약 조셉의 결혼을 통해 마지막 발악을 하는 할아버지의 신경을 긁었다가는 역효과만 날 것이다.
어떻게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도, 알렉스는 가족에게 존재를 부당하게 거부당하는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잊으려고 노력해도 거부당하는 순간에 느꼈던 분노와 무력함, 배신감과 슬픔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직접 겪어보니 알겠다. 윤이 경고하고 엄마가 애원해도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알렉스는 이제 그들이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 *
한 달이 흘렀다. 알렉스는 잘 지내고 있었다. 일은 잘 풀리고 있었고 가정은 화목했다. 파트너는 큰 케이스들을 연이어 따왔고, 알렉스는 좋은 경력을 쌓으면서 열심히 일했다. 윤의 일도 잘 풀리고 있었고, 그는 알렉스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인생의 고난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 * *
어느 날. 파트너인 데보라가 알렉스를 따로 불렀다. 데보라는 40대 중반이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백인 여성이고, 텍사스주에서 M&A를 제일 잘한다고 정평이 나 있는 파트너였다.
데보라와 알렉스는 작은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데보라의 비서인 질리언이 회의실에 에스프레소와 벤티 사이즈 아이스 피치 그린티 레모네이드를 두고 갔다. 데보라는 알렉스에게 아이스 피치 그린티 레모네이드를 건네면서 물었다.
“알렉산더, 요새 잘 지내죠?”
“네.”
알렉스는 빨대로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데보라를 바라보았다. 데보라는 베이지색 립스틱을 칠한 섬세한 입술로 똑 부러지게 말하기 시작했다.
“좋아요. 나도 잘 지내고 있어요.”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알렉산더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불렀어요.”
“네.”
“우선, 내가 알렉산더에게 어떤 편견이나 사심도 없다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그리고 이번 대화는 우리 둘만 아는 비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알렉산더가 사실대로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알렉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저를 따로 불렀을 때부터, 그녀가 심상치 않은 용건을 갖고 저를 호출했다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데보라는 에스프레소를 단숨에 마시고 빈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고, 알렉스는 그녀의 베이지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과 결혼반지를 바라보았다.
“내가 스카일라의 텍사스 지사 설립 케이스를 진행하게 될 것 같아요. 알렉산더도 스카일라는 알죠?”
알렉스는 머리를 한 번 끄덕였다. 스카일라는 20년 전,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설립되었고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사세를 확장하고 있는 홈퍼니싱 기업이었다. 스카일라는 예쁘고 세련된 제품 디자인과 훌륭한 품질뿐만 아니라, 창립자가 독실한 남침례교 신자이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매장을 운영하지 않는 엄격한 기업 운영 정책으로도 유명했다.
“네. 그 회사 제품들이 예쁘죠.”
“나도 스카일라 제품을 좋아해요. 내 책상 위에 있는 탁상시계도 스카일라 거예요. 아무튼, 이번 케이스를 우리 팀이 맡게 될 것 같은데, 스카일라에서는 이번 케이스를 맡을 변호사가 모두 이성애자였으면 한다고 하더군요. 창립자가 남침례교 신자라서 그게 아주 중요한 문제고, 그게 보장되지 않으면 다른 로펌을 알아보겠다고 하네요.”
“…….”
“그러니 묻겠어요. 알렉산더는 게이죠?”
그 말을 듣고, 알렉스는 머리가 멍해졌다. 그녀가 어떻게 알았을까? 데보라가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도 기가 막혔지만, 제가 게이라는 사실이 업무 능력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더욱 기가 막혔다. 알렉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데보라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알렉스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발뺌할 생각은 말아요. 나도 짐작이 가는 게 있어서 묻는 거니까.”
“…….”
“알렉산더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알아요.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고, 배우자와 통화하는 모습을 자주 보기도 했고, 통화하는 내용을 들은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배우자의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알렉산더가 회사 부부 동반 송년회에 배우자와 같이 올 법도 하고, 배우자 사진을 책상 위에 놓아둘 법도 한데 말이에요. 게다가 알렉산더는 배우자 이야기가 나오면 말을 돌려버리기 바쁘죠.”
데보라는 뚜렷한 심증을 확보한 상태에서 알렉스를 취조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눈앞이 캄캄했다. 지사 설립 같은 좋은 케이스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다니. 업무 능력 부족으로 제외되었으면 억울하지 않은데, 이토록 부당한 이유로 제외되다니.
“알렉산더, 내 질문에 대답해요.”
데보라는 알렉스를 압박했다. 알렉스는 입안에서 말을 잠시 고르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파트너님께서 짐작하신 것이 맞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이제 하나만 더 묻겠어요. 왜 숨겼어요?”
“…….”
“알렉산더가 숨겼던 이유는 짐작이 가요.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법조계는 여전히 보수적이죠.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알렉산더는 적어도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어요.”
데보라는 냉정하게 말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목이 타서 음료를 마셨다. 달달한 음료를 마셨는데도 입 안이 온통 썼다. 알렉스는 두 손으로 벤티 사이즈 플라스틱 컵을 쥐고 이리저리 굴렸다. 컵에 묻어 있던 물기가 손에 옮겨붙었다. 알렉스는 물기 어린 두 손을 기도하는 것처럼 마주 잡고 대답했다.
“제가 결혼할 때, 집안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특히 할아버지의 반대가 심해서…… 돌아가실 때까지는…… 결혼 생활에 대해 함구하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받고 결혼 계약서를 썼습니다. 제 결혼이 알려지면 할아버지의 의석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알렉스의 설명을 듣고, 데보라의 얼굴에 동정심이 잠깐 어렸다가 사라졌다. 예전부터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조심하는 모습이 수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사정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공인의 가족으로 사는 삶은 굉장히 고달프다고 생각하며, 데보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사정이 안타깝네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일은 일입니다. 알렉산더는 스카일라 케이스에서는 빠지세요. 대신 다른 케이스가 생기는 대로 그 케이스에 배정하겠습니다.”
“…….”
“무례한 질문을 한 것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나에게는 편견이 없고, 나도 알렉산더를 제외하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요.”
“……이해합니다.”
“고마워요.”
데보라의 답례를 듣고, 알렉스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알렉스는 데보라에게 인사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다리가 후들거렸다. 조셉의 일이 견딜 만해지니 또 다른 일이 생겼다. 조셉의 일은 결혼 계약과 관련된 일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었지만, 이번 일은 달랐다.
알렉스는 사랑이 자신의 인생과 커리어에 제약을 가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제가 사랑을 택하며 잃은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이기 때문에 화가 났다. 사생활을 이유로 저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는데,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함부로 화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다.
알렉스는 윤이 제가 바닥을 모른다고 한 이유를 새삼 알게 되었다. 엄마가 저에게 흠집이 나는 게 싫다고 했던 이유를 다시금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이제는 윤의 전 남자 친구가 윤을 왜 버렸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그 새끼는 사생활이 정당하지 못한 차별의 근거가 되는 상황이 두려워 윤을 버렸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미국 사회보다 더욱 보수적이니, 그놈은 사생활을 이유로 부당한 압박을 받는 일은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알렉스는 그 인간말종이 비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이해해버린 제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 * *
알렉스는 퇴근하지 않았다. 스카일라 케이스에서 제외되었고, 데보라가 다음 케이스를 배정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으니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알렉스는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알렉스는 윤을 보면 그에게 화풀이하게 될 것 같았다.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싶은데, 화를 낼 수가 없으니 애꿎은 윤에게 저열하게 굴게 될 것 같았다. 너는 정말 이기적이라고, 대체 왜 제 청혼을 받아들였냐고.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저를 왜 붙잡은 거냐고 화를 내거나, 윤과의 대화를 피하며 속으로 분노를 쌓다가 폭발하거나. 어느 쪽을 택하든 최악이었다.
알렉스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 쪽을 택했다. 보통 때는 퇴근 시간이 되면 윤에게 꼬박꼬박 연락하는데, 오늘은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윤이 메시지를 계속 보내고 전화를 거는데도 무시했다.
사무실에 앉아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밤 열 시가 되었다. 알렉스는 퇴근해서 회사 근처의 비즈니스호텔에 묵게 되었다. 그는 객실에 들어간 후, 갈아입을 셔츠와 속옷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룸서비스를 요청하여 긴급 셔츠 세탁을 맡겼다. 속옷은 내일 아침에 편의점에서 사야 하겠지.
알렉스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샤워 가운을 입고 침대에 앉아 아이폰을 확인했다. 샤워하는 잠깐 사이에도 윤에게 전화와 메시지가 와있었다. 알렉스는 밀린 메시지를 읽었다.
-오늘 야근이야?
-알렉스?
-오늘 자기가 데리러 오기로 했잖아. 자기가 바쁘면 우버 타고 집에 갈게.
-자기를 기다렸는데 답이 없어서 우버 탔어. 집에 가는 중이야.
-저녁은 집에 와서 먹을 거야?
-알렉스, 전화 안 받네.
-언제 와?
-일이 많아? 바쁜 거야?
-여보. 무슨 일이야?
-나 걱정돼.
-이거 보면 연락해.
알렉스는 한국어와 영어가 뒤섞인 메시지를 읽고, 아이폰을 침대 매트리스 위에 내려놓았다. 집에 전화해야 하나. 알렉스가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알렉스는 눈을 질끈 감고, 화면을 스와이프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다행이다…. 걱정했어. 자기야, 왜 전화 안 받았어? 메시지도 안 보고.]
“바빴어.”
[지금은 어디야?]
“회사 근처 비즈니스호텔이야. 오늘은 일이 너무 많아서 집에 못 갈 것 같아.”
알렉스는 윤에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로펌에서 집까지는 차로 15분 거리이고, 가장 가까운 호텔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집에 들어가나 호텔에 묵으러 가나 걸리는 시간은 비슷했다. 그래서 알렉스는 평소에는 일이 아무리 늦게 끝나도 꼬박꼬박 집에 들어갔다. 그랬던 제가 이제 와서 호텔에 묵는다니. 윤이 허술한 변명을 믿을 리가 없었다.
[운전도 못 할 만큼 피곤해? 아직 체크인 안 했으면 내가 데리러 갈게.]
“괜찮아. 벌써 체크인했어. 내일 들어갈게.”
[하지만…….]
“여보, 나 피곤해. 이만 자고 싶어.”
[……알았어. 잘 자.]
알렉스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으니 정말 수마가 몰려들었다. 온종일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그로 인해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은 탓이었다. 알렉스는 졸면서 아이폰 충전기를 콘센트에 꽂았다. 아이폰이 충전되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베개에 머리를 뉘었다. 그리고 꿈이 없는 잠을 잤다.
* * *
깊은 잠을 자고 나니 머리가 맑아졌다. 호텔에서 조식을 먹으며, 알렉스는 윤에게 화풀이하면 안 되고, 윤과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상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섣불리 대화를 시작했다가는 감정만 상할 것 같아서 괴로웠다. 윤은 공감 능력이 뛰어난 편이라, 알렉스가 왜 괴로운지 이야기하면 그가 더 고통스러워할 것 같았다. 조셉 사건을 돌이켜 보면 윤은 그러고도 남았고, 알렉스는 윤이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윤이 울면, 알렉스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알렉스는 회사에서 일하는 내내 윤 생각만 했다. 당연히 일의 능률은 엉망이었다. 느지막이 퇴근하여 집으로 갔다. 저녁 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이라 길은 한산했다. 차고에 차를 세우고 집에 들어가니, 윤은 서재에서 안경을 쓰고 일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서재 문간에 서서 윤을 바라보았고, 윤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알렉스를 보았다.
“왔네.”
“응.”
“저녁은?”
“먹었어.”
“피곤해 보여.”
“일이 많아서 그래.”
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저를 향해 걸어오는데, 알렉스는 그를 마주 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몸을 돌려 드레스룸으로 갔고, 윤은 알렉스를 따라 드레스룸으로 들어왔다. 알렉스는 옷을 갈아입다 말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 내일부터 출장 가.”
“어디로?”
“애틀랜타. 이번에 새로운 케이스를 맡았거든.”
“어떤 회사인데?”
“스카일라가 텍사스에 들어온다는데, 우리 팀에서 지사 설립 자문을 맡게 됐어.”
“우와 잘됐다! 출장은 얼마나 가는데?”
“3박 4일.”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알렉스는 윤에게 거짓말을 하는 제가 싫었지만, 여전히 윤과 사실대로 이야기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얼마나 솔직하게 말해야 할까? 솔직하게 말하면 윤이 괴로워하지는 않을까? 온갖 생각을 하느라, 알렉스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윤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 * *
알렉스는 제가 며칠 동안 얼마나 이상하게 행동했는지 알고 있었다. 출장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짐을 싸서 나왔고, 회사 앞 호텔에 묵으며 회사에 출근하다니. 게다가 윤이 출장은 어떠냐고 메시지를 보내면 간략하게 대답하는 게 고작이었다.
호텔에서 출근하다 보니 평소보다 출근 시간이 당겨졌다. 오늘도 제일 먼저 출근해서 자리에 앉아 있는데, 막 출근하는 데보라가 알렉스에게 말을 걸었다. 데보라는 검은색 원피스와 코트를 입고 카멜색 버킨백을 들고 있었다.
“알렉산더. 요새 출근 시간이 빨라졌네요.”
“요 앞 호텔에 묵었거든요.”
“어제 집에 안 들어갔어요?”
“네.”
“요새 바쁜 일은 없잖아요?”
“네.”
데보라는 입 안에서 혀를 찼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알렉산더가 지금처럼 이른 시간에 출근하기 시작한 것이 4일 정도 되었다. 그러면 지난 나흘 동안 호텔에 묵었다는 건데.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알렉산더는 이틀 연속 똑같은 슈트와 셔츠를 입고 똑같은 넥타이를 맸다. 알렉산더는 깔끔한 성격이고 패션에 신경을 쓰는 편이어서, 연속으로 똑같은 슈트와 셔츠를 입는 법이 없었고, 연속으로 똑같은 넥타이를 매는 일은 더욱 없었다. 두 번 연속 똑같은 옷을 입은 시점은 마침 알렉산더의 업무 효율이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과 정확히 일치했다. 업무 효율이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은 저와 면담했던 시점과도 일치했다. 그렇다면 알렉산더는 저와 면담했던 즈음부터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업무 효율이 하락하기 시작한 시점이 너무 공교로운데. 그날, 집에 가서 남편과 싸우기라도 했나? 설마 회사일 때문에?
데보라는 가끔 자신의 머리가 좋다는 사실이 싫었다. 지금처럼 작은 단서만 가지고도 너무 많은 정보를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리고 읽어 낸 정보가 남의 내밀한 사생활에 대한 것일 때, 그녀는 무척 괴로워졌다. 보통 때라면 남의 사생활을 짚어 냈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자신은 사생활을 짚어낸 것일 뿐, 그들의 사생활에 직접 관여한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데보라는 이번 상황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제가 부당한 이유로 알렉산더를 압박했고, 그래서 그는 직장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문제를 겪을 만큼 힘들어하고 있었으니까.
이번 문제의 원인 제공자인 그녀에게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데보라는 핸드백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알렉산더. 잠깐 봅시다.”
* * *
데보라와 알렉스는 지난번에 면담했던 회의실에 다시 마주 앉았다. 그때처럼 질리언이 에스프레소 한 잔과 벤티 사이즈 아이스 피치 그린티 레모네이드 한 잔을 회의실에 가져다 놓고 나갔다. 데보라는 에스프레소에는 손도 대지 않고, 알렉스에게 차분하게 물었다.
“알렉산더, 집에 안 들어간 지 며칠이나 됐어요?”
데보라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듣고, 알렉스는 깜짝 놀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괜히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게 아니죠. 내가 보기에는 일주일은 된 것 같은데, 맞아요?”
“맞아요. 그쯤 되었습니다.”
알렉스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알렉스의 대답을 듣고, 데보라는 에스프레소 잔을 집어 커피를 단숨에 마셨다. 그녀는 빈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알렉산더는 일이 아무리 늦게 끝나도 집에는 꼭 들어갔었잖아요.”
“…….”
“무엇이 문제예요? 남편과 싸웠어요? 아니면 바람을 피우다가 걸렸어요?”
알렉스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제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데보라는 베이지색 젤 네일을 칠한 손톱 끝으로 책상 위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나도 내 부하 직원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취미는 없어요. 하지만 내가 알렉산더를 면담하고 나서 나와의 면담이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는 불미스러운 집안일이 생겼고, 집안일이 알렉산더의 직장 생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이번 일에는 내 책임도 있다고 생각해서 부른 겁니다.”
“…….”
“남편과 이혼할 거예요? 이혼할 거면 내가 잘 아는 이혼 변호사를 소개해 줄게요.”
데보라는 일부러 이혼이라는 단어를 던졌다. 알렉스를 세게 압박하면, 그가 솔직하게 반응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이혼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알렉스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예요?”
알렉스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며칠 동안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던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서, 그는 잠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결혼하기 전에 저에게 말했었습니다. 자신을 택하면 힘든 일이 많아질 테니까 우리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제 어머니도 제가 사랑을 좇으면 불이익을 많이 당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지난번 일을 겪고 나니 분명히 알겠습니다. 이게 남편이 말하던, 어머니가 말하던 힘든 일이었어요.”
“그래서요?”
“남편이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닫고 나니, 남편을 볼 자신이 없어요. 남편을 만나면 화를 낼 것 같은데…… 저에게는 화를 낼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니까요. 그의 경고를 듣고도, 괜찮으니까 결혼하자고 말한 사람은 저였어요. 그리고 제가 남편을 왜 피했던 것인지 이야기하면, 남편이 저보다 훨씬 속상해할 것 같아서 걱정되기도 합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알렉스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했고, 속이 후련해졌다. 알렉스의 고백을 듣고 나서, 데보라는 알렉스에게 조곤조곤 묻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는 얼마나 됐어요?”
“이제 결혼 7년 차입니다.”
“그러면 스물 네다섯 살쯤 결혼한 건가요? 무척 일찍 결혼했네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했으면 아무것도 모를 만도 하다. 남자들이 보통 서른 즈음에 결혼하고, 학력이 높을수록 늦게 결혼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알렉스는 결혼을 대단히 일찍 한 편이었다.
“그 나이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만하죠. 근데 그냥 그때 남편과 어머니 말을 듣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게이라고 케이스에서 열외가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파트너님.”
알렉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는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데보라가 결혼 생활에 대해 계속 함부로 말한다면, 알렉스는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여성이고 상사라 해도 상관없었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알렉스의 흉흉한 기세를 보고, 데보라는 태도를 굽혔다.
“미안해요. 내가 실수했네요. 방금 그 말은 취소할게요.”
데보라는 제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다가, 저도 모르게 생각을 말로 모두 뱉어버렸다. 데보라의 사과를 듣고, 알렉스가 이를 악문 채로 말했다.
“사랑하는데, 죽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포기해요?”
“그래서 할아버님이 반대하는데도 결혼한 거예요?”
“네.”
알렉스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데보라는 알렉스의 대답을 듣고 상황을 짐작해 보았다. 아무래도 이 친구는 어린 나이에 남편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감행했나 보다. 여태까지 사랑을 잘 지켜 왔으면 앞으로도 잘 지켜 나가야지. 그편이 이 친구에게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데보라는 자신의 부모를 비롯하여 평생의 사랑을 잃은 사람들이 무너지고 회복하지 못하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아 왔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렉스에게 심술을 부리며 일부러 얄밉게 되물었다.
“죽을 만큼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이제 와서 상황과 조건이 변하니까 다른 마음이 드는 거예요?”
“…….”
“세상 사람들이 상황과 조건에 따라 마음이 변하는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기회주의자, 또는 속물이라고 해요.”
데보라는 비꼬듯이 말했다. 데보라의 말을 듣자마자, 알렉스는 발끈하며 말했다.
“저는 제 남편을 사랑하고, 데보라가 말씀하신 것 같은 그런…. 비겁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하마터면 알렉산더에게 크게 실망할 뻔했어요.”
데보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듣지 않았을까? 알렉스가 말하는 태도를 보니, 그는 남편을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과 어떻게든 화해할 것 같았고, 화해하고 나면 업무 능률이 회복될 것 같았다.
데보라는 알렉스에게 이만 나가 보라고 말하려다가 잔소리를 조금 더 해 보기로 했다. 알렉스는 변호사로서 자질이 뛰어난 편이고, 장차 크게 될 것 같은 싹수가 보이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내가 살면서 데보라는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어 봤을 것 같아요? 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나의 능력을 깎아내리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화가 났지만,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기 때문에 묵묵히 견디면서 할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내가 되었네요. 알렉산더도 마찬가지예요. 예전에 윈스턴 처칠이 한 말이 있어요. 처칠 수상은 짖는 개를 볼 때마다 멈추면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한다고 했어요.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알렉산더는 게이라서 안 된다, 그런 개소리는 무시하고 본인이 지금 하는 일과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하세요. 개소리를 흘려듣는 것이 힘들다면 이혼하고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은둔하며 사세요. 그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겁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알렉산더가 봉쇄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해도, 남자와 결혼했던 남자라는 사실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데보라는 신랄하게 말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조금 후회했다. 그녀의 말을 듣던 알렉스의 표정이 지나치게 어두워졌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했던 봉쇄 수도원 이야기가 너무 심했나? 데보라가 난감해하면서 알렉스를 보는데, 알렉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파트너님. 파트너님의 말씀을 기억하겠습니다.”
데보라는 알렉스가 싹싹하게 구는 모습을 보며,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녀는 주니어 변호사들에게 잔소리를 거의 하지 않는 편이지만,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는 잔소리를 했다. 그런데 그녀가 잔소리할 때면, 맞장구를 치거나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하는 수준을 넘어, 감히 역으로 그녀를 가르치려 드는 주니어 변호사들이 있었다. 특히 젊은 남자 변호사 중에 건방진 부류들은 까마득한 상사인 그녀를 감히 가르치려 들었고, 데보라는 하극상을 겪을 때마다 불쾌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운동선수 출신답게 감독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그녀의 충고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알렉스의 공손한 태도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고,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부하 직원들의 사생활에는 관심이 없지만, 사생활이 회사 일에 지장을 주는 것은 참을 수 없어요. 그래서 알렉산더가 집안일을 빨리 해결하고 왔으면 좋겠어요. 집안일도 해결하지 못하는 변호사가 바깥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요. 가서 집안일을 해결하고 와요.”
“네.”
알렉스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에게 인사했고 회의실을 먼저 나갔다. 데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알렉스가 두고 간 아이스 피치 그린티 레모네이드를 발견했다. 그녀는 음료를 집어 들고, 알렉스의 자리로 가서 그에게 무심하게 음료를 건넸다.
“이거 두고 갔어요.”
“감사합니다.”
알렉스는 그녀에게 인사했다.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를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녀가 했던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데보라는 길게 말했지만, 알렉스는 그녀의 잔소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흔들리지 말고, 가정불화를 해결하여 일에 지장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알렉스는 그녀가 저를 생각해서 잔소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도 알렉스의 마음은 무거웠다.
* * *
데보라는 알렉스에게 반차를 내주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일찍 퇴근하여 집으로 갔다. 거의 일주일 만에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알렉스는 운전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알렉스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는 남편이 있는 남자이고, 남편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다. 데보라가 말한 대로, 알렉스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말의 무게를 견디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윤이 예전에 부탁한 게 있었다. 제발 고민을 혼자 짊어지지 말라고. 저에게도 알렉스의 고민이 뭔지 알려달라고. 알렉스는 고민이 있으면 윤과 같이 의논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결국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윤은 알렉스가 부탁한 대로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이래서야 남편 실격이네. 알렉스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집으로 갔다.
* * *
윤이 퇴근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그러나 차고에는 윤의 차가 있었다. 알렉스는 현관문을 열고 슈트 케이스를 끌고 들어갔고, 구두를 슬리퍼로 갈아 신고 집 안을 둘러보며 윤을 찾았다. 윤은 실내복 차림으로 식탁에 앉아 사과를 깎아 먹고 있었다. 그는 알렉스를 힐끗 보고 억양 없는 말투로 말했다.
“퇴근하는 거야?”
“응.”
“이리 와서 앉아.”
알렉스는 슈트 케이스를 현관에 두고 식당으로 걸어와 윤의 맞은편에 앉았다. 알렉스는 윤에게 말을 걸었다.
“일찍 퇴근했네?”
“오늘은 연차 냈어.”
윤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알렉스는 아무 말 없이 윤의 처분을 기다렸다. 윤이 사과 껍질을 깎던 칼을 쟁반 위에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너, 나에게 할 말 없어?”
“안 그래도 자기에게 할 말이 있어서 일찍 퇴근했어.”
알렉스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윤은 대꾸하지 않고 사과를 깨물어 먹었다. 윤이 아삭아삭 사과를 씹어 먹는 소리가 들렸다. 윤은 사과 한 조각을 먹고 나서 알렉스에게 물었다.
“잘됐네. 그 전에 하나만 묻자. 너는 내가 바보로 보여?”
“아니.”
알렉스의 대답을 듣자마자, 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렉스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비쳤다. 윤은 싱크대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네가 내 전화를 받지 않고 메시지에도 답이 없길래, 너무 걱정돼서 어제 질리언에게 전화해 봤거든. 출장이 얼마나 빡세면 메시지에 답을 하지 못할 정도로 바쁜가 싶어서 말이야. 근데 질리언이 너는 스카일라 케이스에서 빠졌다고 하더라? 그러면 네가 대체 출장을 어디로 간 거냐고 물어보니까, 너는 사무실로 출근해서 네 자리에 잘 있다고 하던데? 알렉스,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여보, 내가 설명할게.”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다닌 거야?”
“진정해, 자기야. 설명할 테니까 진정-”
“너, 바람피웠지?”
“윤.”
“에스코트야, 즉석 만남이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왜 집에 안 들어 온 건데?”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고, 그 일 때문에 너를 보면 너에게 화풀이를 할 것 같아서 그랬어.”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해!”
윤은 소리를 지르면서, 조리대 위에 있던 캡슐 커피 머신을 알렉스에게 집어 던졌다. 알렉스는 캡슐 커피 머신을 가까스로 피했지만, 커피 머신은 벽과 바닥에 차례로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알렉스는 기가 막혀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 말은 들어주지도 않고 애꿎은 커피 머신을 집어 던지는 것이 정말 싫다고 고함을 치려고 하는데, 윤이 먼저 작정하고 소리를 질렀다.
“알렉스, 내가 네 남편이 맞기는 하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왜 매번 네 일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알아야 해? 너는 결혼하기 전에도 그랬어. 네 할아버지가 미담 기사를 낼 때도, 너는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 했어. 나는 학교 메일을 보고 그런 좆같은 기사가 나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지!”
“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잖아. 네가 나한테 숨길 만한 일이 바람피운 거 말고 뭐가 있어? 그게 아니면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해?”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내가 말했잖아,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고 너한테 그걸로 화풀이하기 싫었다고!”
“그럼 안 좋은 일이 뭐였는지 사실대로 말하라고!”
“지금 네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있잖아!”
알렉스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서로 한 번씩 고함을 주고받고 나니, 비로소 집 안이 조용해졌다. 윤은 식식거리다가 알렉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면 설명해 봐. 네가 왜 집에 안 들어왔는지.”
“회사에서 일이 있었어.”
“무슨 일?”
“데보라가 스카일라 케이스를 따왔어. 근데 스카일라에서는 동성애자 변호사와 일하기 싫다고 했고, 데보라는 내가 게이라는 이유로 케이스에서 제외시켰어. 그녀가 다른 좋은 케이스를 주겠다고는 하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니 네가 예전에 했던 말과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났어.”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그리고 어머님은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너는 내가 너와 결혼하면 많은 것을 잃을 거라고 했잖아. 엄마는 내가 너와 결혼하면 나에게 흠집이 날 거라고 했어.”
“…….”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 그런데 조셉 일을 겪고, 이번 일을 겪으니 자기가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엄마가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알겠더라.”
알렉스는 말을 마치고,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힘겹게 말을 하고 나니, 참담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윤의 전 남자 친구 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은데 그놈과 똑같은 놈이 된 것 같았다. 데보라의 말처럼, 저에게는 속물이나 기회주의자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그러나 윤은 알렉스의 말을 듣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알렉스가 기어코 현실의 벽을 느끼고 말았으니까. 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너는…. 나와 결혼한 것을 후회해?”
알렉스는 얼굴을 가렸던 두 손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알렉스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윤에게 힘없이 되물었다.
“내가 후회하면, 너와 이렇게 싸우고 있겠어?”
윤은 알렉스의 대답을 듣자마자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알렉스는 윤에게 끌어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 윤이 알렉스의 등을 토닥였다. 저는 어릴 때부터 가족들에게 사내놈인데도 성격이 계집애 같다는 이유로 구박을 받았다. 제가 성적 지향을 밝히자, 가족들은 윤을 더욱 멸시했다. 게다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자각했을 때부터, 윤은 한국 사회에서 억울한 일을 수도 없이 겪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아니었다. 알렉스는 평생을 주류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이니까. 윤은 알렉스가 평생 소수자의 설움을 몰랐으면 했지만, 결국 그는 윤과 똑같은 일을 겪고 말았다. 알렉스는 윤의 목덜미를 두 팔로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나는 자기와 결혼한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나를 억울하게 차별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에게 화가 나는데, 내가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겠어? 이러다가 자기를 보면, 죄 없는 너에게 화풀이하게 될 것 같아서 너를 피한 거야.”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나에게 말했어야지.”
“자기가 조셉 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봤는데, 내가 어떻게 이야기해?”
윤은 알렉스가 울먹이는 것이 마음 아파서, 알렉스의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그래도 이야기하지. 윤은 알렉스가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는 알렉스의 고민을 기꺼이 같이 나누고 짊어지고 싶었고, 그래서 알렉스와 결혼한 것이었으니까.
알렉스는 윤의 몸을 안고 따스한 체온을 느꼈다. 윤을 안고 있으니 화가 많이 가라앉았다. 알렉스가 윤의 몸을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윤은 알렉스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얼굴을 들어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윤은 알렉스에게 최대한 다정하게 물었다.
“그래서 여보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니야. 그냥 혼란스럽고…. 짜증이 나.”
알렉스는 눈물이 고인 채, 맥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윤이 알렉스의 두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의 두 뺨에 눈물이 흘렀다. 윤은 알렉스의 눈물을 닦아 주었고, 울음 때문에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자기는 내가 느끼는 열패감을 영영 몰랐으면 했어. 나와 결혼했어도 자기만은 무사하기를 바랐어. 그런데…. 결국…… 자기도 나처럼…… 소수자로 사는 서러움을 알아버렸잖아. 나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파.”
윤은 울먹이면서 말했다. 알렉스는 윤이 울먹이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윤을 웃기려고 농담을 했다.
“그게 마음이 아프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 엄마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기절할지도 몰라.”
알렉스의 농담을 듣고, 윤은 질색하면서 알렉스의 가슴팍을 한 대 때렸다. 얼마 전에 심장 스텐트 시술을 받으신 분을 두고 농담을 하다니. 윤은 알렉스의 농담이 별로라고 생각하면서 알렉스를 혼냈다.
“자기는 이런 상황에 농담이 나와?”
“자기가 울 것 같아서 한 거야.”
알렉스는 윤을 달래면서 말했다. 웃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윤이 울음을 그친 것이 다행이라서 웃음이 나왔다. 윤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알렉스가 윤의 얼굴을 보고, 그의 이마에 키스하고 나서 말했다.
“이제 화 풀렸네.”
알렉스는 웃으며 말했다. 윤은 알렉스의 넥타이 매듭을 만지작거리면서 그에게 물었다.
“여보, 앞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두고 가출할 거야?”
“아니.”
알렉스는 선선하게 대답했다. 윤은 알렉스의 넥타이를 풀면서 그에게 되물었다.
“그러면?”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자기에게 전부 이야기할게. 그러니까 내가 힘들어하면 지금처럼 안아줘.”
알렉스는 고개를 숙여 윤과 이마를 맞댔다. 서로의 코끝이 스치고, 입술 위로 서로의 숨결이 스쳤다. 윤은 두 손으로 넥타이를 붙잡으면서 물었다.
“정말?”
“응. 자기가 안아 주니까 괜찮아졌어. 이럴 줄 알았으면 가출하지 말고 진작에 안아달라고 할 걸 그랬어.”
알렉스가 애교를 섞어 말하자, 윤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알렉스는 웃고 있는 윤의 뺨 위에 키스했다. 윤은 웃다 말고 알렉스의 목에 팔을 감았다. 둘은 쪽쪽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서로의 입술 위에 쉴 새 없이 키스하다가 입술을 붙인 채 웃었다. 윤은 웃으면서 알렉스에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자기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증거를 확인해야겠어.”
“정말 너무하네.”
알렉스는 너무한다고 말했지만, 기분 나빠하는 말투로 말한 것은 아니었다. 알렉스가 슈트 재킷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 잠금을 해제하고, 윤에게 아이폰을 건넸다. 윤은 워킹 앱을 켜고 알렉스의 지난 동선들을 확인했다. 확인해 보니 알렉스는 지난 며칠 동안 회사와 호텔만 오갔다. 윤은 알렉스에게 아이폰을 돌려주면서 말했다.
“근데 자기야, 이건 동선뿐이잖아. 내가 이걸 보고, 자기가 호텔 방에서 누구와 무슨 짓을 했는지 어떻게 알아?”
윤은 계속 의심하면서 알렉스를 다그쳤다. 윤의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보며, 알렉스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내가 확인시켜 줄까?”
“어떻게?”
윤의 질문에 알렉스는 진한 키스로 답했다. 그리고 키스의 의미는 매우 확실했다.
* * *
윤은 섹스할 때 가리는 것이 별로 없지만, 장소는 가리는 편이었다. 윤은 침실, 거실 소파, 욕실 이외의 장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알렉스는 섹스하는 공간의 청결도를 엄격하게 따졌다. 그래서 둘이 식탁에서 붙어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식탁 유리가 등에 닿자, 윤은 식탁 유리가 너무 차가워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알렉스는 슈트 재킷을 벗어 식탁 위에 깔고, 윤이 재킷 위로 눕게 했다. 알렉스가 윤의 티셔츠 자락 안으로 머리를 넣었다. 배꼽부터 배, 갈비뼈, 가슴과 젖꼭지를 혀와 입술로 더듬고 깨물면서 간지럽히자, 윤은 킥킥 웃으면서 알렉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간지러워.”
“간지러워지라고 하는 건데?”
알렉스는 윤의 실내복 바지와 드로즈를 벗겼다. 자신의 넥타이도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윤은 알렉스가 제 발목과 종아리, 무릎 오금, 허벅지 안쪽을 손으로 쓰다듬고 입으로 애무할 때마다 몸을 떨었다.
알렉스가 바짝 발기한 제 성기를 입으로 빨면서 양쪽 젖꼭지를 만지기 시작하자, 윤은 애무가 너무 좋아서 알렉스의 목구멍 안쪽까지 성기를 처박기 위해 허릿짓을 했다. 한참 펠라치오를 하던 알렉스가 부엌으로 올리브유를 가지러 가는 동안, 윤은 제 발목에 걸려 있던 드로즈를 바닥으로 내던졌다.
윤은 어느새 반팔 티셔츠만 입고 알렉스에게 안겨 있었고, 반팔 티셔츠는 가슴 위까지 끌려 올라갔다. 윤의 온몸은 잇자국과 입술 자국으로 얼룩덜룩해졌고, 입구는 올리브유에 젖어 잔뜩 풀려 있었다. 알렉스는 바지 지퍼만 열어 페니스를 꺼냈다. 지갑에서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콘돔을 꺼내 포장을 앞니로 잡아 뜯고, 끝을 비틀어 공기를 빼고 페니스 위에 씌웠다.
알렉스가 콘돔을 끼자마자, 윤은 다리로 알렉스의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알렉스는 성기를 입구에 맞추고 조금씩 밀어 넣으면서 윤의 귀 뒤와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알렉스는 끝까지 들어가자마자 일부러 윤의 귓가에 끈적한 신음을 내뱉었다. 윤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알렉스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알렉스가 윤의 피어싱 박힌 젖꼭지를 빨면서 허리를 쳐올렸다. 윤은 알렉스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었다. 알렉스는 제가 말한 대로 윤에게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그는 평소보다 집요하게 윤이 좋아하는 곳만 골라서 공략하며 온몸에 키스를 퍼부었고, 윤은 알렉스의 목덜미를 깨물고 손톱을 세웠다.
알렉스는 윤이 제 어깨를 물어뜯거나 긁을 때마다 더욱 집요해졌다. 윤은 어느 순간부터 그만하라고 알렉스의 등을 때리며 펑펑 울었지만, 알렉스는 멈추지 않았다. 윤의 무릎을 모으고, 두 다리를 제 왼쪽 어깨에 올리고 내벽을 들이박았다. 윤이 다리를 모으니 구멍 안이 잔뜩 좁아졌고, 알렉스는 비좁은 구멍을 성기로 파헤치며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윤이 멀미를 느낄 정도로 세게 내벽을 들이박았다. 멀미를 느끼기 시작한 순간부터, 윤은 알렉스에게 끌려가느라 집중해서 허리를 흔들고 힘을 줄 여유가 없었고, 너무 어지럽다 보니 몸에 힘이 풀렸다. 그래서 윤의 두 다리가 알렉스의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윤은 알렉스의 허리에 두 다리를 다시 감았고, 그의 목을 두 팔로 안았다.
알렉스의 목을 안으니 여태까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식탁은 식당에 놓여 있었다. 식당의 두 면은 모두 샤시로 되어 있는데, 버티컬 블라인드가 완전히 열려 있었다. 이웃들이 집 안을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윤은 알렉스의 목에 매달리고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여보, 흐응, 블라인드가, 아, 흐응, 열려, 있어.”
“괜찮아.”
알렉스가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어서 정신이 없는데, 윤은 이웃들이 볼까 봐 두려워서 저도 모르게 안을 조이고 있었다. 윤이 내벽을 조이자 알렉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윤은 알렉스에게 물었다.
“밖에서, 앗, 사람들이, 보면, 응, 어떡해?”
“참으로 화목한 가정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근데 자기는 지금 그게 눈에 들어와?”
알렉스는 윤의 페니스를 손에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린 윤은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니야, 아!”
“안 되겠네.”
“아, 으, 하아, 그만, 알렉스, 앗!”
알렉스는 윤을 무시했다. 결혼 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들며, 알렉스는 윤이 섹스하다가 좋아서 오줌을 싸게 만드는 방법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알렉스는 윤의 요도구를 손톱으로 긁으면서 몸을 움직였다. 윤은 몰려오는 사정감과 배뇨감에 몸을 비틀었다. 알렉스의 허릿짓이 점점 빨라지고, 윤의 요도구를 긁는 손길이 거칠어졌다. 윤은 절정으로 올라가며 알렉스의 어깨와 등을 손톱으로 할퀴었다.
“그거 싫어!”
“나는 좋은데?”
“흐으, 여보, 제발…!”
“제발, 뭐?”
“아, 흐응, 안 돼, 그만, 아, 아, 아!”
윤은 비명 같은 신음을 지르고 안을 바짝 조이며 사정했다. 안이 너무 조여서 알렉스도 하마터면 사정할 뻔했지만, 겨우 참았다. 알렉스가 윤의 성기를 놓자, 윤의 판판한 배 위로 정액이 튀었다. 윤의 성기는 정액을 토하고 나서 투명한 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윤은 오줌을 지리고 너무 수치스러워서 울음을 터뜨렸다. 여태까지 윤이 알렉스와 사랑을 나누다가 오줌을 싼 횟수는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윤은 오르가즘을 느끼다가 말간 물까지 싸는 일에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고, 물을 쌀 때마다 펑펑 울었다.
윤이 엉엉 울면서 오줌을 지리는 모습을 보며, 알렉스는 강렬한 사정감을 느꼈다. 하지만 알렉스에게는 윤이 요구한 증거를 제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알렉스는 당장 사정하고 싶은 것을 참고, 페니스를 윤에게서 꺼냈다. 윤은 성기가 빠져나가면서 내벽이 긁히는 것을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는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흐응, 흐, 흑, 왜?”
“잘 봐.”
알렉스는 윤이 보는 앞에서 콘돔을 벗겼다. 여러 가지 액체에 푹 젖은 콘돔이 식탁 유리 위에 던져졌다. 알렉스가 윤의 어깨 위 식탁 유리에 왼손을 짚고 몸을 숙였다. 그러자 알렉스의 파란 눈동자가 윤의 눈앞에 바로 보이고, 탁한 신음은 윤의 귓가로 쏟아졌다. 알렉스는 윤의 왼쪽 뺨에 가볍게 키스하고, 바짝 올라선 성기를 오른손으로 잡고 흔들어 사정했다. 숨을 고르느라 급하게 오르내리는 윤의 가슴팍과 얼굴에 알렉스의 정액이 끼얹어졌다.
알렉스가 세 번에 걸쳐 토해 낸 정액은 양이 아주 많고 농도가 진했다. 정액의 양과 농도를 보니, 그동안 자위조차 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알렉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 윤은 울다 말고 알렉스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알렉스가 제시한 증거가 너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얼굴까지 정액을 뒤집어쓴 윤을 내려다보다가, 윤의 가슴팍에 묻어 있던 정액을 손가락에 묻혀 윤의 뺨과 입술에 치덕치덕 발랐다. 윤은 한참 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혀를 내어 입술에 묻은 정액을 핥아 먹으면서 중얼거렸다.
“자기는 정말…… 나만 사랑하나 봐.”
윤이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알렉스는 피식 웃었다. 윤은 제가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자 크게 만족한 것 같았다. 알렉스는 윤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나서 말했다.
“맞아. 나는 자기만 사랑해.”
“나도 자기만 사랑해.”
윤의 사랑 고백을 듣고, 알렉스는 웃으면서 그의 엉덩이를 받쳐 안아 들고 침실로 갔다. 알렉스는 침대 위에 윤을 내려놓고 옆자리에 누웠다. 이대로 잠시 필로우 토크를 하다가 두 번째로 섹스하면 되겠지. 알렉스와 윤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옆으로 누워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얼굴만 봐도 좋아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윤은 귀를 발갛게 붉힌 채 속삭였다.
“나는 이제 식탁에서는 아무것도 못 먹을 것 같아.”
“나는 뭐든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알렉스는 윤의 콧등 위에 키스하고 나서 말했다. 윤은 알렉스의 짓궂은 말이 민망해서 그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알렉스는 왼손을 뻗어 윤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윤은 알렉스의 왼손 위에 제 오른손을 얹고, 젖살이 빠지며 성숙해지는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하느님이 정성 들여 섬세하게 빚어 놓은 윤의 얼굴을 보다가, 그와 이마를 맞대고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사랑하니까…… 나는 네가 내 곁에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을 거야.”
윤은 대답 대신, 제 뺨을 만지던 알렉스의 왼손을 제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그의 손바닥과 결혼반지에 가볍게 키스했다. 알렉스는 입맞춤을 받고 나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알렉스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윤에게 물었다.
“너는 어때?”
“나는 네가 없으면 살기 싫어. 나는 네가 없으면 외로움에 말라 죽을 테니까.”
“내가 오래 살아야겠네.”
“그래. 그러니까 이리 와.”
윤은 알렉스를 품에 끌어안았다. 알렉스는 윤에게 안겨, 눈을 감고 희미하게 웃었다. 윤이 알렉스의 등을 토닥였고, 알렉스는 팔을 뻗어 윤의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할머니를 생각했다.
할머니는 알렉스가 남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 서로 사랑하라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그때는 몰랐지만, 할머니의 말은 유신론자인 알렉스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할머니의 말은 알렉스의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나무로 자라나 열매를 맺었고, 알렉스는 제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사랑을 좇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할머니와 달랐다. 그들은 알렉스의 할머니처럼 사랑이 하느님의 가장 으뜸가는 계명이라 가르치면서도, 정작 사랑을 좇은 사람은 박해하여 내쫓아버렸다. 그래서 방인으로 태어난 알렉스는 사랑을 좇으며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 하느님이 과거로 돌아가 제 선택을 바꿀 기회를 준다고 해도, 알렉스는 똑같은 선택을 할 테니까.
온 세상을 은쟁반 위에 담아 건넨다고 해도, 제게 사랑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 알렉스는 고향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혼자 사느니, 변방을 떠돈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처럼 제 곁에 있다면, 이방인으로 사는 고독도 결국에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 테니까. 그래서 알렉스는 사랑을 택했고 이방인의 삶을 헤쳐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