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Couple in the street
텍사스주가 어지간한 국가보다 면적이 넓어서 그럴까? 텍사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텍사스를 벗어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평생 텍사스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텍사스 출신의 또래 젊은이들과 비교하면, 알렉스는 국내 여행이든 해외여행이든 많이 다닌 편이었다. 그는 미식축구를 하던 시절, 다른 주까지 원정 경기를 다녔고, 부모님을 따라 유럽 여행도 많이 갔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전부 가 봤고, 심지어 예루살렘도 가 봤다. 경기 일정이 없었다면, 알렉스는 엄마를 따라 해외 학회에 참석하며 매우 다채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렉스는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아시아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제 남편인 윤의 조카, 산의 돌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봄 방학 동안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알렉스는 윤을 무릎 위에 앉히고 댈러스를 거쳐 한국으로 가는 왕복 항공권을 두 장 예매했다. 예매를 마치고, 그는 윤에게 한국어 연습을 하자고 말하려고 했다. 요새 알렉스는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었고, 장인어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간단한 인사를 준비하고 싶었다. 하지만 윤은 웃으면서 그를 말렸다.
“우리 아빠 영어 잘해.”
“그래도.”
“자기는 학교 공부하느라 바쁘잖아. 그리고 아빠는 네가 애쓴다고 우리를 인정할 사람이 아니니까 너무 애쓸 필요 없어.”
윤은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고 뺨에 키스했다. 알렉스는 윤의 말을 듣고 속이 상했다. 저도 자녀가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자녀와 연을 끊는 부모들이 있다는 것은 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남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구박하고 미워한다니. 알렉스는 윤의 아버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 * *
한국으로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텍사스 운전면허를 취득한 윤이 낡은 도요타 캠리 운전석에 앉고, 알렉스가 조수석에 앉았다. 처음 윤이 운전대를 잡았을 때, 알렉스는 윤이 운전을 잘하지만, 운전 습관은 다소 거칠다고 생각했다. 뉴욕 못지않은 대도시인 서울에서 운전 습관이 들었으니 당연하겠지만.
두 사람은 시그나기 공항에 가서 댈러스행 비행기를 탔고, 댈러스에서 인천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탔다. 두 사람의 자리는 일반석 비상구 자리였다. 알렉스의 키가 커서, 두 사람은 비상구 좌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을 건너는 비행시간은 아주 길었다. 갈 때는 열네 시간, 올 때는 열두 시간 오십 분. 알렉스는 윤이 혼자서 오랜 비행을 어떻게 견딘 것인지 궁금해졌고, 옆자리에 앉아 기내 영화를 보고 있던 윤에게 물었다.
“시그나기에 올 때, 자기는 혼자였지?”
“응.”
“그때 기분이 어땠어?”
“비행기가 이륙할 때, 나는 많이 울었어. 내 미래가 너무 막막했거든.”
알렉스는 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윤은 자신은 게이이고, 앞으로 자신을 찾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선언하며 한국을 떠났다. 모든 연락처를 없애고 은행 계좌를 닫고, 한국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안고 이곳에 왔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완전히 등지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알렉스는 윤의 각오가 마음 아파서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지금은?”
“기대돼.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곳을 자기에게 보여 줄 수 있어서 기쁘고.”
윤이 알렉스의 입술에 살짝 입 맞추고 대답했다. 윤은 진심이었다. 서울에서 사는 동안 힘든 기억이 많았지만, 그래도 고향은 고향이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고향을 남편과 함께 방문하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겠는가? 윤이 웃으면서 알렉스에게 물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가는데, 여러 가지 옵션이 있어. 공항버스, 공항 철도, 택시. 어떤 게 좋아?”
“나는 평생 한 번도 안 타본 교통수단을 택하겠어. 공항 철도를 이용하자.”
알렉스는 스물다섯 평생 기차를 타본 적이 없었다. 지하철도 타본 적이 없었다. 살면서 새로운 체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서 그는 공항 철도를 이용하자고 대답했다.
* * *
기내식은 그럭저럭 맛있었지만, 기내식과 같이 나온 와인은 별로였다. 윤은 와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기내식과 같이 나온 와인이 알렉스의 집에 처음 갔던 날 마셨던 와인보다 맛이 없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장인의 말에 의하면, 그 와인은 알렉스가 태어난 해에 담근 최고급 빈티지 와인이었다. 장인과 장모는 20년 전에 그 와인을 샀고, 아들이 결혼할 사람을 데려오면 같이 마시려고 소중하게 간직해 왔다.
장인과 장모는 윤을 보고 무척 반겨 주었다. 그들은 윤에게 방학 동안 푹 쉬고 건강을 회복하라고 덕담을 하면서 와인이 든 잔을 건넸고, 아들이 하나 더 생겨서 기쁘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윤은 그들을 보고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좋은 와인을 사서 간직하며, 알렉스가 데려올 아가씨를 기쁘게 기다렸을 것이었다. 그런데 알렉스는 남자를, 그것도 동양인 이민자를 결혼할 사람이라고 데려왔다. 남자끼리의 사랑은 죄가 아니고 동성 결혼도 가능하지만, 그들이 아들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사위 될 사람을 진심으로 반겨주었다. 그래서 윤은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보며 죄스러운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윤은 알렉스가 저를 선택함으로써 많은 약점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 * *
만약 한국에 혼자 왔다면, 매우 막막했을 것이다. 주변 어디를 보아도 노란 피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사람들만 보였다. 이곳에서 알렉스는 이방인이었고, 한국 사람들은 알렉스를 낯설어하고 있었다. 알렉스가 걸어갈 때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수많은 사람이 그를 힐끔거렸다. 스물다섯 평생 이렇게 겉도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윤은 미국에서 매일 이런 기분을 느끼겠지, 정말 무섭고 힘들겠다. 알렉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편을 쫓아갔다.
윤은 한 걸음 앞에서 길을 찾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길을 걸을 때 주변을 꼼꼼히 살피고 표지판을 보고 걸었는데, 한국에서는 거침없이 걸었다. 표지판은 힐끗 보는 것이 전부였다.
알렉스는 윤이 영어로 사고하고 말할 때도 그의 두뇌 회전이 빠르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데 윤이 한국어로 사고하기 시작하자, 그의 머리는 알렉스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윤의 뒤를 따라가면서 물었다.
“우리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아?”
“알렉스, 나는 한국 사람이야. 걱정하지 마.”
윤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역에 도착하고, 윤이 키오스크에서 표를 두 장 끊었다. 그가 열차에 탑승하고 나서 알렉스에게 말했다.
“내려서 심 카드를 사긴 하겠지만, 한국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도 무료 와이파이를 쓸 수 있어.”
“그래?”
“길에도 무료 와이파이가 있고.”
“지하철에서도 쓸 수 있어?”
“응.”
알렉스는 윤의 말을 듣고 아이폰으로 인터넷을 켰다. 정말로 기차 안에서 무료 와이파이가 잡혔다. 알렉스는 무료 와이파이를 보고 신기해했다. 미국은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가 없으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건물 지하에 들어가면 통신 신호가 잡히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런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무료 와이파이를 쓸 수 있다니. 알렉스로서는 매우 놀랄 일이었다.
* * *
윤은 알렉스를 데리고 서울역에 내렸다. 두 사람이 예약한 호텔은 서울역 앞에 있었다. 그들은 인천 공항과 용산역 근처에 있는 환의 집까지의 접근성을 고려하여 서울역 근처에 호텔을 잡았다. 알렉스는 윤을 놓칠까 봐 무서워서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미국에서는 윤이 알렉스에게 의존할 일이 많았지만, 이곳에서는 알렉스가 윤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두 사람은 호텔에 체크인하여 짐을 풀고 정리했다. 윤은 킹사이즈 침대에 앉아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창가에 서서, 해가 지고 네온사인이 켜지는 서울의 저녁 풍경을 보고 있었다. 그가 나고 자란 오스틴도 대도시이지만, 서울에 비할 바는 아니니 신기한가 보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뉴욕에 간 적이 있었거든. 서울은 뉴욕과 비슷한데, 사이버 펑크 버전이야.”
“그래?”
“응. 싸이 파이4) 영화 속 풍경 같아.”
“그러면 서울 여행은 어떤 스타일로 하고 싶어?”
“서울 시민의 일상을 체험하고 싶어.”
“알았어. 여행 계획을 짜야 하니까 여기 와서 앉아봐. 혹시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어?”
“북한산.”
“뭐?”
“아까 구글에서 찾아봤어.”
윤은 알렉스의 대답을 듣자마자 박장대소했다. 평범한 서울 시민들은 북한산 등반을 일상적으로 하지 않아. 그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윤은 웃음을 참으며 가만히 있었다.
“알았어. 지금은 저녁이라 북한산에 못 가니까, 오늘은 다른 것을 하자.”
윤이 오늘 저녁 일정을 짜기 위해 아이폰으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윤의 옆에 앉았다. 청계천이 무난하려나. 저녁은 뭘 먹여야 하지? 윤은 아이폰으로 청계천 근처 데이트 코스를 검색했다. 찾아보니 평양냉면이 무난하긴 한데, 색다른 것을 먹여보려면 육회가 좋을 것 같고. 윤은 알렉스에게 선택지를 내밀었다.
“저녁 메뉴는 두 가지가 있어. 평양냉면과 육회.”
“그게 뭐야?”
“평양냉면은 차가운 고기 육수에 면을 말아먹는 요리고, 육회는 날 소고기에 양념을 한 거야. 계란 노른자도 올라가 있고.”
“무슨 양념?”
“그건 나도 몰라.”
윤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윤은 요리에 관심이 없어서, 육회를 먹으면서 양념의 재료가 무엇일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알렉스는 윤에게 다시 물었다.
“너는 어떤 것을 좋아해?”
“나는 둘 다 좋아해. 그러니까 네가 먹고 싶은 거로 골라.”
“육회.”
윤은 의외라는 듯 알렉스를 보았다. 알렉스는 윤의 얼굴을 보면서 육회를 선택한 이유를 말했다.
“평양냉면은 맛을 예상할 수 있는데 육회는 맛을 예상할 수 없어.”
“그래, 그러면 출발하자.”
윤은 아이폰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알렉스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도톰한 패딩을 입고 호텔에서 나와 통신사 대리점에 들러 심 카드를 샀다. 그리고 둘은 1호선 라인을 따라 청계천까지 걷기 시작했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직장인들이 길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을 관찰하던 알렉스가 윤에게 말했다.
“다들 옷을 잘 입네.”
“한국 사람들은 패션에 관심이 많거든.”
“자기가 영어 말하기 시험 보던 날, 차이나 칼라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있던 것이 기억나. 그때 나는 자기가 옷을 잘 입는다고 생각했어.”
알렉스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알렉스의 말을 듣고, 윤은 깜짝 놀랐다. 윤은 알렉스가 별걸 다 기억한다고 생각했고, 그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그걸 기억해? 근데 한국에서 나 정도면 평균이야.”
“미국에서는 그 정도면 정말 잘 입는 거야.”
“자기도 잘 챙겨 입잖아.”
“나는 엄마 때문에 어릴 때부터 옷을 챙겨 입는 습관이 들었는데, 남자가 옷에 신경 쓴다고 뒷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
“옷을 깔끔하게 입는 게 남자인 것과 무슨 상관이야?”
“그러게 말야.”
“이상하네.”
윤이 알렉스의 말에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알렉스가 윤을 보고 슬며시 웃으며 말을 걸었다.
“손잡고 걷고 싶은데 안 되겠지?”
“나도 그러고 싶은데, 여기서는 안 돼.”
윤은 딱 잘라 말했다. 일반적인 게이와 레즈비언 부부들이 그러하듯, 둘은 평소에 손을 잡고 다니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이지만,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친구처럼 다녀야 할 것이었다.
* * *
윤은 청계천에 자주 와 봤다. 혼자 온 적도 있고, 친구들과 온 적도 있었고, 누나와 온 적도 있고, 전 남자 친구와 온 적도 있었다. 이제는 남편과 왔다. 그래서 윤은 알렉스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감동적이었다.
오랜만에 보니 청계천 양쪽으로 도로가 있고, 도로를 따라 현대적인 빌딩이 늘어서 있는 야경이 아름다웠다. 야경이 마음에 들었는지, 알렉스는 야경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윤은 알렉스의 위팔을 잡으며 말했다.
“왜 풍경 사진만 찍어? 우리 둘이서도 같이 찍어.”
“그래.”
알렉스와 윤은 나란히 붙어 서서 셀카를 찍었다. 알렉스의 팔이 길어서 셀카봉이 필요 없었다. 셀카를 몇 장이나 찍고 나서, 윤이 말했다.
“네가 키가 크니까 좋은 점도 있네. 셀카를 찍기 편해.”
청계천에는 그들 말고도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많았고, 친구들끼리 온 사람들도 많았고, 혼자 걷는 사람들도 많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청계천을 따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인들이 많네.”
“맞아. 여기는 유명한 데이트 코스야.”
“우리처럼 부부도 있겠지.”
“응.”
윤의 대답을 듣고, 알렉스는 웃었다. 부부라니. 윤은 부부라는 단어가 정말 현실감 없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자다 깨서 옆자리에서 자는 알렉스를 보면, 새삼스레 저와 알렉스가 부부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면 기쁘기도 하고, 실감이 나지 않기도 해서, 잠든 알렉스의 얼굴과 결혼반지를 낀 손을 만져볼 때도 있었다. 결혼한 지 반년이 넘었으니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알렉스, 이리 와 봐.”
윤은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교각 밑의 그늘로 들어가며 알렉스를 불렀다. 알렉스는 그늘을 쓱 둘러보고, 윤의 의도를 눈치챘다. 알렉스가 윤에게 물었다.
“우리 키스할까?”
“응.”
윤은 웃으며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알렉스는 허리를 숙여 윤과 키스했다. 그들은 교각 사이의 그늘에 서서 짧지만 깊고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키스를 마치고, 윤은 알렉스의 뺨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사실 나는…. 한국을 떠나면서 여기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거든. 근데 너와 같이 올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앞으로 자주 오자.”
알렉스는 윤을 안아주면서 말했다. 윤은 대답 대신 알렉스를 꽉 끌어안았다. 알렉스가 윤의 등을 쓸어 주었다. 알렉스는 윤의 외로움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 알았다. 윤이 자신과 가족이 되면서 외로움을 많이 떨쳐 냈다는 것도 알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기쁨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알렉스는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결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 * *
두 사람은 청계천을 따라 걷다가 광장 시장까지 갔다. 둘은 광장 시장의 많은 육회 집 중에서 미슐랭 가이드에 올라있는 곳에 들어갔다. 유명한 집이라서 대기하고 있는 손님들이 많았다. 30분을 기다린 후, 그들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식당 아주머니가 윤에게 물었다.
[한국 사람이죠?]
[네. 영어 메뉴 있나요?]
아주머니는 윤에게는 한국어 메뉴판을, 알렉스에게는 영어 메뉴판을 건넸다. 알렉스는 영어 메뉴판을 판례처럼 진지하게 읽었다. 윤은 메뉴판을 읽고 나서 알렉스에게 말했다.
“육회에는 두 종류가 있어, 소고기만 있는 게 있고 낙지도 같이 있는 게 있어. 어떤 것을 먹을래?”
“낙지 있는 거.”
알렉스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윤은 알렉스의 대답을 듣고 놀라서 되물었다.
“괜찮겠어?”
“한국에서는 산 낙지가 유명하잖아. 영화에서 봤어.”
너도 <올드보이>를 봤구나. 윤은 알렉스의 취미가 영화 감상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렸지만, 선뜻 낙지 탕탕이를 시키라고 권할 수 없었다. 낙지가 입맛에 안 맞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선선하게 말했다.
“나는 여행을 가면,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꼭 먹어 봐야 한다고 생각해.”
“나중에 나를 원망하면 안 돼?”
“알았어.”
윤이 몇 번이나 경고했지만, 알렉스는 그때마다 낙지를 먹겠다고 말했다. 알렉스의 확답을 듣고 나서, 윤은 아주머니를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윤은 육회 탕탕이, 육회 2인분, 육회 비빔밥 2인분과 청주 한 병을 시켰다. 아주머니는 주문을 받고 나서 청주 한 병과 유리잔 두 개를 가져다주었다. 윤이 청주 뚜껑을 따고 있는데, 알렉스가 말했다.
“자기는 영어로 말할 때와 한국어로 말할 때, 느낌이 완전히 다르네.”
“그래?”
“영어로 말할 때는 섹시한데, 한국어로 말할 때는 귀여워.”
“고마워.”
윤은 청주가 든 잔을 알렉스에게 건네고, 저도 잔을 들었다. 둘은 가볍게 건배하고 술을 조금 마셨다. 알렉스는 청주가 입맛에 잘 맞았다. 맛은 달큼하지만, 도수가 상당한 술이었다. 얼마 뒤, 아주머니가 육회와 육회 탕탕이, 비빔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갔다. 윤은 젓가락으로 육회 비빔밥을 비비면서, 알렉스에게 말했다.
“노른자를 깨서 육회와 잘 섞고, 배와 같이 먹어.”
“뭘로 섞어?”
“숟가락으로 해.”
알렉스는 숟가락으로 노른자를 깨서 잘 섞었다. 윤은 비빔밥에 초고추장을 조금만 뿌렸다. 윤의 입맛에는 싱겁겠지만, 알렉스에게는 이 정도도 매울 수 있었다. 알렉스는 숟가락으로 낙지 탕탕이를 조금 떠서 입 안에 넣었다. 알렉스가 산낙지가 입 안 점막에 마구 달라붙는 느낌이 생경해서 인상을 썼다. 비빔밥을 비비면서 알렉스의 반응을 기민하게 살피고 있던 윤이 그에게 물었다.
“낙지?”
알렉스는 대답 대신 머리를 한 번 끄덕였다. 윤은 알렉스에게 재빨리 지시했다.
“빨리 씹어.”
알렉스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입 안에 든 것을 빠르게 씹어 삼키고 물을 마셨다. 윤은 불안한 눈길로 알렉스를 보았다. 못 먹겠다고 하면 어쩌나. 윤이 알렉스에게 물었다.
“어때?”
“느낌은 이상한데 맛있어.”
“다행이다. 계속 먹을 거야?”
“응.”
알렉스는 숟가락으로 낙지 탕탕이를 뜨면서 대답했다. 윤은 숟가락을 든 알렉스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으며 말했다.
“못 먹겠으면 먹지 마.”
“맛있어서 먹는 건데?”
알렉스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됐고, 윤은 잘 비벼진 비빔밥을 알렉스 쪽으로 밀어주었다.
* * *
청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면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두 사람은 광장 시장 근처에 있는 코인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열 곡 부르고 나왔다. 알렉스나 윤이나 노래 실력은 평범한 편이었지만,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즐거웠다. 알렉스가 짓궂게도 윤에게 핑크 레드 노래를 시켰고, 윤은 민망함을 참고 <아이스크림 팝>을 끝까지 불렀다.
두 사람은 코인 노래방에서 나와, 종로 5가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서울역까지 왔다. 서울역에 내려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는데, 알렉스가 편의점 간판을 가리키며 윤에게 물었다.
“저기, 편의점 맞지?”
“응.”
“편의점에 가자.”
윤은 마침 술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던 참이라, 기꺼이 알렉스를 따라 편의점에 들어갔다. 윤이 편의점에서 수입 맥주 네 캔과 감자 칩, 육포를 골랐다. 알렉스는 가판대를 보다가 콘돔을 집어 윤에게 건넸다. 윤이 콘돔을 받아 들고, 얼굴이 빨개진 채 알렉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알렉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편의점 알바생은 계산을 마치고 검은 비닐봉지에 물건들을 담아 주었고, 윤은 봉지를 받아 들었다. 봉지를 받아들고 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부부가 콘돔을 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윤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예전에도 이랬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윤은 한국에서 콘돔을 사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전 남친은 그냥 하는 것을 좋아했고, 몇 번 해 본 즉석만남에서는 상대방이 사 왔다. 알렉스는 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단둘이 호텔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윤에게 물었다.
“부끄러워?”
“어?”
“내가 콘돔을 집었을 때부터 부끄러워하던데.”
“……그냥.”
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일이었다. 알렉스와 몸을 섞은 횟수는 셀 수 없고, 이제는 결혼까지 했으면서 뭐가 부끄러운 걸까? 윤은 자신이 왜 이러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얼굴만 붉혔다.
* * *
둘은 호텔 방에 들어왔다. 윤은 맥주를 냉장고에 넣고, 육포와 감자 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콘돔 상자는 침대 위에 던졌다. 술기운이 약간 남은 상태고, 맥주를 더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알렉스가 윤을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물었다.
“같이 씻을까?”
알렉스는 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윤의 목덜미와 귀 뒤에 키스하기 시작했다. 장거리 비행기를 타고 왔으면서 피곤하지도 않나. 같이 샤워하면 절대 샤워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씻을 때부터 몸을 겹치고 침대에서 녹초가 되도록 섹스하게 될 것이다. 피곤해서 쉬고 싶지만, 윤은 알렉스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윤은 알렉스와 손끝이 슬쩍 닿기만 해도 좋으니까.
* * *
알렉스는 처음부터 둘의 섹스가 좋았다. 윤은 남자와 뒤로 하는 섹스에 완전히 길들어 있었고 체력도 좋았다. 그는 하기 전까지는 얌전하지만, 막상 시작하면 매우 적극적이었고 가리는 것도 없어서 제가 요구하는 것을 모두 받아 주었다. 게다가 얼굴이 잘생겼고 몸의 골격도 잘 빠졌다. 취향에 딱 맞는 상대를 만난 알렉스는 성에 갓 눈을 뜬 사춘기 소년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미쳐 날뛰며 행복해했다.
그러나 윤은 처음에는 알렉스와의 관계가 별로였다. 알렉스는 여성과의 섹스에 익숙해서 저를 곱게 다루기는 했지만, 남자는 처음이라 요령이 없어서 윤을 아프게 했다. 게다가 윤이 자봤던 사람 중에 알렉스가 제일 커서 버겁기도 했다. 하지만 윤은 알렉스를 사랑하기 때문에, 알렉스가 아프게 해도 참고 버티면서 잠자리를 가졌다.
상황은 몸을 섞기 시작하고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달라졌다. 알렉스는 남자와 하는 섹스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생각해 보면, 알렉스가 섹스를 못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는 남자와의 경험이 없을 뿐, 머리가 좋고 성실한 데다가 응용력이 좋았다. 게다가 담배는 안 피우고, 커피는 안 마시고, 술은 조금만 마시고, 운동선수 출신에 지금도 운동을 열심히 한다. 즉, 알렉스는 섹스를 잘할 수밖에 없는 남자였다.
결혼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윤은 평생 몸을 섞어 본 사람 중에 알렉스가 제일 좋았다. 몸의 상성도 좋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었다. 사람의 본성은 잠자리에서 나온다고 하던데, 윤은 알렉스와 매일같이 사랑을 나누면서 그의 본성을 더욱 정확히 보게 되었다. 알렉스는 잠자리에서 거칠 때도 있고 부드러울 때도 있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다정했다. 그리고 그 다정함이 알렉스의 본성이었다.
샤워 부스에서 서로 머리를 감겨 주고, 서로의 몸을 바디클렌저를 묻힌 배스 릴리로 문지르다가 불이 붙었다. 알렉스는 윤을 안아 들고, 윤의 등을 샤워 부스 벽에 기대게 한 채로 한참 키스했다. 키스하다가 온몸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윤을 잠시 내려놓고, 알렉스는 바디 오일을 가져왔다.
뜨거운 물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윤은 벽을 보고, 손으로 짚고 섰다. 알렉스는 손에 바디 오일을 축이고, 오른손 검지와 중지 끝으로 윤의 입구를 동그랗게 만지기 시작했다. 왼손으로는 윤의 성기를 애무했다. 윤은 얼굴을 돌려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알렉스는 손가락을 구멍에 넣었다. 첫 손가락이 들어오자, 윤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윤이 아파하는 신음이 알렉스와 윤의 입 안에서 울렸다. 알렉스가 오일에 젖은 손가락을 한 마디 더 넣었다. 윤이 고통에 다리가 풀려 휘청거렸다. 알렉스는 윤의 페니스를 잡았던 손으로 윤의 마른 허리를 안고, 손가락을 계속 내벽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윤이 이물감이 버겁고 아파서 몸을 뒤틀면서 말했다.
“천천히.”
“못 참겠어.”
알렉스가 윤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알렉스의 손가락 두 개가 내벽 안에서 가위질을 하며 내벽을 벌렸다. 윤은 몸에 힘을 빼고, 얼굴을 돌려 알렉스에게 다시 키스했다. 알렉스는 키스하면서도 손가락을 놀렸고, 내벽이 어느 정도 넓어지자 안을 두 손가락으로 더듬어 윤이 느끼는 지점을 찾았다. 알렉스는 그 지점을 문지르면서 넷째 손가락을 입구에 댔다. 윤이 키스를 멈추고, 눈물이 고인 눈으로 알렉스를 보며 물었다.
“자기야, 응, 오늘 왜 이렇게, 흐응, 급해?”
“사실, 아까 다리 밑에서 키스할 때부터 하고 싶었어.”
윤에게 말을 걸어 그가 방심하게 해놓고, 알렉스는 넷째 손가락을 단번에 내벽 안으로 넣었다. 윤이 알렉스에게 안겨 신음했다.
“아, 흐으, 응!”
욕실 샤워 부스 안에 윤의 교성이 울렸다. 알렉스는 윤의 신음이 듣기 좋았다. 알렉스는 손을 돌리며 내벽을 공들여 만졌다. 피어싱이 박힌 젖꼭지를 꼬집으면서 내벽 안의 느끼는 곳을 만져주자, 오일에 젖은 내벽은 찌걱찌걱 젖은 소리를 내며 벌어지다가 알렉스의 손가락에 감겨들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촉을 느끼다가 손가락을 전부 뺐다. 알렉스가 손가락을 뺐는데도 구멍은 벌어져 빠끔거렸다. 윤은 몸을 돌려 알렉스의 목에 두 팔을 감고, 그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았다. 알렉스는 윤의 엉덩이를 받쳐 안고, 샤워 부스 벽에 그의 등을 기대게 했다. 윤은 알렉스에게 키스하면서 팔과 다리로 알렉스의 몸을 바짝 끌어당겼다. 윤이 키스하다 말고 알렉스의 귀에 속삭였다.
“얼른 들어와.”
윤이 알렉스의 귀와 뺨에 입 맞추며 알렉스를 졸랐다. 알렉스는 제 성기를 들어 윤의 입구에 가져다 댔다. 부드럽게 풀린 구멍은 알렉스가 힘을 주자 그의 성기를 매끄럽게 빨아 삼키기 시작했다. 윤이 알렉스의 목을 고쳐 안고 키스하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힘을 조금 주어 윤의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윤의 체중이 실리면서, 페니스의 머리가 내벽을 긁으며 묵직하게 들어가는 느낌이 너무나 선연했다. 알렉스는 안이 빠듯하게 느껴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윤의 입술을 애타게 찾았다.
마침내 내벽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갔을 때, 알렉스는 키스를 멈추었다. 윤은 제 체중 때문에 깊게 들어오는 알렉스가 버거워서 눈살을 찌푸리며 알렉스를 내려다보았다. 알렉스는 윤을 안고 그의 몸을 가볍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응, 흐으, 깊어-”
윤이 신음했다. 알렉스는 거친 숨을 내쉬며, 윤과 눈을 마주치며 허리를 잘게 치기 시작했다. 윤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내며 알렉스의 목을 꽉 안았다. 알렉스는 윤의 엉덩이를 바짝 받쳐 안았다. 윤은 알렉스에게 물었다.
“이럴 거면서, 흐으, 아, 콘돔은, 흐응, 왜, 샀어?”
“나가서 또 해야지.”
“나, 읏, 피곤해-”
“거짓말.”
“흐으, 진짜야…….”
알렉스는 대답 대신 웃으면서 윤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벌리고 들어왔다. 윤의 성기는 내벽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가 입구까지 빠져나가며 한 곳만 집중적으로 긁는 성기 때문에 정액을 줄줄 토하고 있었다. 윤이 알렉스의 어깨에 손톱을 세우고, 알렉스의 목과 뺨에 얼굴을 비비며 몸부림쳤다.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은데, 결합이 너무 깊어서 힘들기도 했다.
윤이 사정하면서 내벽이 바짝 좁아졌고, 알렉스는 내벽의 압력을 느끼며 기분 좋은 신음을 뱉었다. 윤의 체중이 실리면서 깊숙하게 감겨드는 속살의 감촉이 황홀했다. 이래서 알렉스는 입위를 좋아한다. 하지만 윤이 위로 가면 너무 느끼다가 평소보다 빠르게 사정해서 오래 즐기기는 힘들었다. 그러니 얼른 마무리하고 침대로 가는 게 낫겠다. 알렉스는 상황 판단을 마치고, 힘껏 강하게 안을 들이박기 시작했다.
“아…… 흐, 읏, 흐으, 흐응!”
윤이 흐느껴 울기 시작하고, 알렉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윤의 귓불을 빨았다. 귓바퀴를 핥고 귓구멍에 혀를 넣었다. 귓구멍을 혀로 헤집자 윤이 가여울 정도로 몸을 떨면서 안을 조였다. 알렉스는 두 손으로 윤의 엉덩이를 쥐어짜듯 잡고, 구멍을 좁히면서 내벽을 헤집었다. 이미 비좁았던 내벽이 알렉스 때문에 더욱 빠듯해졌다. 윤은 사정하지 않고도 절정을 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알렉스는 멈추지 않았다. 허벅지와 엉덩이가 부딪혀 난잡한 소리를 냈고, 윤은 엉엉 울었다. 알렉스는 윤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목을 세게 깨물면서 사정했다.
목을 물린 아픔에 안이 바싹 죄어들고, 빠르게 경련하는 내벽이 정액으로 온통 젖어 들었다. 마른 절정을 연달아 느끼는 윤의 발가락이 잔뜩 오그라들었다. 알렉스는 사정을 마치고 숨을 몰아쉬었고, 목 안을 울리면서 낮게 웃었다. 사정의 여운이 조금 가시고 나서, 알렉스는 손으로 윤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윤은 잇단 드라이 오르가즘의 여파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알렉스에게 안겨들었다. 알렉스는 수전을 끄고, 윤을 안고 샤워 부스에서 나왔다. 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에 비친 윤의 엉덩이와 허벅지에 손자국이 잔뜩 나 있었다.
알렉스는 윤을 안고 침대로 쓰러졌다. 여전히 알렉스는 윤의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알렉스가 윤의 몸에서 성기를 빼자, 구멍에서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알렉스는 흘러내린 정액을 손가락에 묻혀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윤은 숨을 헐떡이고 몸을 떨면서 알렉스를 올려다보다가 힘없이 늘어졌다.
알렉스는 다시 반쯤 일어선 제 성기를 손으로 몇 번 문질러서 완전히 세우고, 침대 위에 있던 콘돔 상자를 뜯어 콘돔을 꺼냈다. 비닐 포장을 뜯자 딸기향이 났다. 알렉스는 딸기 향을 맡고 피식 웃었다. 콘돔 상자에 그려진 분홍색 딸기 일러스트가 귀여워서 샀는데, 콘돔에서 정말 딸기향이 날 줄은 몰랐다. 끝을 비틀어 공기를 빼고 귀두에 콘돔을 얹고, 둘둘 말려 있던 것을 밀어 펼치며 성기에 씌우다 말고, 알렉스가 말했다.
“자기야.”
“응?”
윤은 알렉스를 향해 힘겹게 돌아누우며 대답했다. 알렉스가 콘돔을 도로 벗기고,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한데 오늘은 그냥 할게.”
“왜?”
“콘돔이 작아.”
“정말…….”
“한국 콘돔은 어떤지 궁금해서 사 봤는데 작네.”
콘돔이 작은 게 아니라 네가 큰 게 아닐까. 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는 평소 습관대로 콘돔을 묶어 침대 밖으로 휙 던지고, 윤의 몸 위에 올라탔다. 알렉스는 윤의 허벅지를 벌리고, 콘돔에서 윤활제가 옮겨 묻은 성기를 입구에 가져다 대고 꾹 눌렀다. 알렉스가 윤의 뺨에 입을 한 번 맞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윤은 손을 뻗어 알렉스의 두 뺨을 감쌌고, 양손 엄지로 알렉스의 뺨에 올라온 홍조를 간지럽혔다. 알렉스가 안으로 점점 들어왔다. 윤의 왼쪽 엄지손가락이 알렉스의 오른쪽 광대뼈 위에 있는 흉터를 쓰다듬었다. 윤은 알렉스의 얼굴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고, 알렉스는 두 손으로 매트리스 위를 짚으며 몸을 숙였다. 그러자 두 사람의 가슴이 맞닿았다. 윤이 알렉스의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고 말했다.
“나는 그냥 하는 것도 좋아.”
“그래? 좋다고?”
알렉스는 윤에게 질문하면서 단번에 페니스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윤은 아파서 비명을 질렀지만, 아픔이 가시자마자 희미하게 웃었다. 알렉스가 윤의 머리 양옆을 팔꿈치로 짚고, 윤을 내려다보았다. 윤이 두 팔로 알렉스의 목을 안으며 말했다.
“그냥 하면 네 핏줄까지 느껴지거든.”
“미치겠네.”
알렉스는 웃으면서 윤에게 키스했다. 윤은 두 다리로 알렉스의 허리를 감쌌다. 알렉스는 윤의 허리를 두 팔로 안아 올리며 허릿짓을 시작했다. 윤은 알렉스의 움직임에 맞추어 허리를 흔들어 제가 느끼는 부분으로 알렉스의 성기를 이끌었다. 흥분한 알렉스가 거칠고 빠르게 윤을 몰아쳤다. 윤은 정신없이 흔들리면서도 기꺼이 알렉스를 받아들였다. 조금 더 가까이, 그래도 아직 모자랐다. 윤은 알렉스와 섹스할 때면 그와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는 이미 제 것이지만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윤은 알렉스를 제 몸 가장 깊은 곳까지 끌어당기며, 알렉스의 목을 안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자기는 나를 사랑해?”
“사랑해.”
“나도 사랑해.”
“알아.”
알렉스는 윤에게 키스하며 움직였다. 알렉스의 대답을 듣고, 윤은 키스하면서도 웃었다. 언젠가 알렉스는 한창 사랑을 나누다 말고 저를 사랑하냐고 애타게 묻는 윤에게 비슷한 대답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냐고. 그래도 윤은 알렉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리 들어도 부족했다. 윤의 마음을 아는 알렉스는, 윤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되돌려 주었다.
* * *
신혼답게 뜨거운 밤을 보내고, 두 사람은 새벽에 잠들었다. 둘은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서 조식을 먹고 호텔을 나섰다. 그들은 아침을 먹으면서 즉흥적으로 오늘의 계획을 세웠다. 경복궁을 보고, 윤이 다녔던 대학교에 갔다가 윤의 어머니 묘소에 가고, 저녁은 윤의 누나 부부와 먹는다. 돌잔치는 토요일, 내일모레였다.
윤은 서울역에서 교통 카드를 두 개 사서 충전했다. 서울역 환승센터에서 1711번 시내버스를 타고 15분 만에 경복궁 앞에 내렸다. 그들은 입장권을 사서 근정전으로 갔다. 건물 밖을 한 바퀴 돌면서 구경하고, 단에 올라가서 근정전 안을 구경했다. 알렉스는 건물을 구경하면서 도록을 열심히 읽었다. 근정전 안을 보던 알렉스가 윤에게 물었다.
“왕이 여기서 국무를 봤다는 거지? 저기가 옥좌고.”
“응. 아래에 신하들이 직위대로 서고.”
그들 곁으로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이 스쳐 지나갔다. 알렉스는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윤에게 말했다.
“한복은 확실히 기모노나 치파오와는 다르구나.”
“아무래도 그렇지? 근데 나, 자기를 데리고 다니니까 관광 가이드가 된 느낌이야.”
윤의 말을 듣고, 알렉스는 웃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정말 관광객이 된 것처럼 행동하며, 윤에게 물었다.
“이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가이드님?”
“이쪽으로 오시죠.”
윤은 블로거들이 추천하는 관람 코스대로 알렉스를 데리고 갔다. 수정전을 지나 경회루에 갔다. 봄이라 경회루 연못에 연꽃이 피지 않아 아쉬웠다. 윤이 연못을 보고 있는데, 알렉스는 도록에 나와 있는 짧은 설명을 진지하게 읽고 있었다.
“이 건물은 만원 지폐에도 그려져 있었던 유명한 건물이야.”
“건물의 용도는 뭔데? 왕실 파티?”
“맞아.”
“파티라니.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아.”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경회루에 들어갈 수 있나 확인해 보니, 팻말에는 하루 전에 예약해야만 경회루에 들어갈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경회루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윤과 알렉스는 강녕전과 교태전을 보았다. 이과라 역사 지식이 부족하지만, 윤은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왕과 왕비가 따로 자다가 정해진 날짜에만 같이 잔다는 윤의 설명을 듣고, 알렉스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윤은 민망함을 참고 왜 그런지 설명해 주었다.
“왕이 왕비나 후궁들과 돌아가면서 섹스하니까 그렇지.”
“조선은 일부일처제 아니었어?”
“아니야. 자식이 많아야 좋다고 생각해서 후궁도 많았어.”
“……조선의 왕들은 체력이 좋아야겠네.”
알렉스가 혀를 내둘렀다. 윤은 알렉스의 소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사극에 궁중 암투가 많이 나오는 게 아니다, 장자 우선 계승 원칙이 있기는 하지만, 자녀가 많아서 옥좌를 두고 경쟁이 치열하고, 후궁의 자녀, 왕비의 자녀가 권력을 두고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은 알렉스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윤과 알렉스는 향원정에 도착하여 향원정 연못을 한 바퀴 돌았다. 2층짜리 누각은 보수를 마쳤기 때문에 무척 튼튼해 보였다. 안타깝게도 향원정의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연못 안을 헤엄치는 잉어들을 보다가, 두 사람은 경복궁을 나섰고 점심을 먹기 위해 서촌으로 갔다.
두 사람은 한옥을 개조한 가정식 백반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쌈 정식과 오징어 정식을 시키고, 알렉스를 위해 보쌈 고기를 추가했다. 윤은 알렉스를 생각해서 식당 주인에게 오징어 정식을 덜 맵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알렉스는 식당 건물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한옥을 좋아할 줄 알았으면 한옥 게스트하우스에 묵을 걸 그랬나. 윤은 알렉스를 보며 말했다.
“다음에는 한옥 게스트하우스에 묵자.”
“한옥 게스트하우스도 있어?”
알렉스는 윤에게 되물었다. 윤은 알렉스에게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자기가 바닥에서 자는 것을 불편해할까 봐 예약하지 않았어.”
“바닥에서 자면 많이 불편해?”
“응. 나도 바닥에서 자면 힘들어.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침대에서 잤거든.”
“난 자기가 미국에 오기 전에는 바닥에서 잔 줄 알았어.”
“한국 사람이라고 모두 바닥에서 자는 건 아니야.”
“그렇구나.”
알렉스는 순순히 대답했다. 윤은 알렉스가 착해서 좋았다. 윤은 미국에 살면서 인종 차별인지도 모르고 인종 차별을 가하는 사람들을 많이 겪었다. 윤이 그들에게 그게 인종 차별이라고 알려주면, 그들은 그게 왜 인종 차별인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식으로 대응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윤 때문에 언제나 말을 조심했고, 지금처럼 모르고 실수할 때가 가끔 있어도 윤이 알려주는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윤은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는 알렉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착하네.”
“나를 착하다고 하는 건 이 세상에 너밖에 없어.”
알렉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윤은 알렉스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면서 대꾸했다.
“내가 보기에는 착한데?”
“부모님도 내 성격이 까다롭다고 해.”
“까다로운 것은 맞지만, 그래도 착해.”
“고마워.”
알렉스는 피식 웃었다. 저는 어느 순간부터 부모도 친근하게 대하기 어려운 아들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대학 미식축구 스타가 되었을 즈음부터였다. 알렉스가 부모님을 대하는 태도는 그대로였는데도, 그들은 아들을 자랑스러워하는 동시에 어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알렉스의 부모는 아들이 애인들에게는 다정하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겼다. 특히, 부모님은 알렉스가 윤을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도 믿기 어려워했다. 알렉스는 부모님이 저를 어색해할 때마다 의아했다. 자신은 아빠가 엄마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이 좋아 보여서 아빠를 그대로 따라 할 뿐이었다. 만약 제가 착해 보인다면, 그건 아빠를 따라 하고 있어서일 거다. 알렉스는 제 성격에 대해 생각하다가 윤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 * *
두 사람은 점심을 먹고 나서 시청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탔고, 윤의 모교 안에 있는 역에 내렸다. 알렉스는 캠퍼스 안에 지하철역 입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다. 윤은 IT관을 향해 걸어가면서 학교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는 공대가 유명해. 컴공은 제5 공과대학 소속이고.”
“나도 네가 똑똑한 거 알아.”
“근데 우리 집에서는 내가 제일 멍청해. 우리 집에서 나만 서울대를 못 갔고, 친척들도 거의 다 서울대 출신이야.”
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알렉스는 윤의 말을 들으며, 한국인들의 학벌과 지능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저는 윤이 매우 똑똑하다고 생각하는데, 윤은 자신의 학벌과 지능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알렉스는 윤의 전 남자 친구가 같은 학교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문득 떠올렸다. 그는 얼굴도 모르는 윤의 첫사랑을 질투하며, 윤을 따라 노천극장과 대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자신보다 열 살 가까이 많은 그 남자가 뭐라고. 윤은 제 남편이고, 그 남자는 이제 영원히 윤을 넘볼 수 없는데. 그런데도 알렉스는 앳된 윤과 풋풋한 연애를 했을 그 남자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알렉스는 첫사랑에 빠져 반짝이는 눈으로 전 남자 친구를 바라보았을 윤을 떠올리다가 실소했다. 제 정체성을 속이며 윤을 버린 놈에게는 윤을 가질 자격이 없었다. 알렉스는 호쾌하게 결론을 내리고, 그 남자를 한껏 비웃었다.
윤은 IT관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샀고, 알렉스는 그린티 라떼를 사서 마셨다. 두 사람은 함께 복사실을 지나고, 강의실을 지나고, 로커들이 서 있는 복도를 지나고, 휴게실을 지나고, 실습실을 지났다. 알렉스는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했을 윤을 상상하다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렇게 먼 곳에서 살았던 우리가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이곳과 시그나기는 너무나 먼데. 알렉스는 옆에 서 있는 윤을 보며 얼떨떨한 기분을 느꼈다.
정작 윤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학과 공부와 과제에 찌들어 있는 후배들을 보며 역시 공대 생활은 빡세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지금도 바쁘게 살지만, 윤은 학부나 석사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윤은 그 시절에 바쁘게 살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며 불안해했다. 제 성적 지향 때문에 여차하면 평생 프리랜서 개발자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성적 지향이 밝혀져서 갑자기 실직하게 되는 상황에 대비하여 재산을 쌓기 위해 재테크 공부를 열심히 했고,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절망했고, 한국을 떠나야 할지 고민했다. 윤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 이 건물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 윤은 모교를 좋아하지만, 모교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윤이 옆에 서 있는 알렉스를 보면서 말했다.
“이제 가자.”
* * *
알렉스와 윤은 지하철을 타고 호텔 근처로 돌아왔다. 호텔 근처의 자동차 공유 서비스 존에서 차를 빌렸고, 윤이 운전대를 잡고 알렉스가 조수석에 앉았다. 윤은 내비게이션 어플을 돌려보았다.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 그리고 국도까지 달려 총 한 시간 소요. 출발하기 전, 두 사람은 호텔 근처에 있는 꽃집에서 흰 장미꽃을 사고, 편의점에서 물과 과자, 군것질거리를 샀다. 한창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알렉스가 윤에게 대뜸 물었다.
“자기도 이름에 뜻이 있어?”
“한자를 썼으니까 있지.”
“무슨 뜻이야?”
“햇살(Sunshine).”
“누나는?”
“기쁨(Joy).”
“다들 이름이 예쁘네.”
“나와 누나 이름은 엄마가 지었어. 원래는 규칙에 따라 지어야 하는데, 그 규칙에 들어가는 글자가 정말 이상하거든. 그래서 엄마가 규칙을 무시하고 엄마 마음대로 지었어.”
윤은 엄마를 생각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알렉스는 윤의 어머니를 상상해 보았다. 사진을 본 적이 있어서, 그녀가 윤과 많이 닮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목소리나 말투는 어땠을까? 알렉스가 윤의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는데, 윤이 말했다.
“엄마는 자기를 좋아할 거야.”
“그래? 어머님이 보시기에 괜찮은 사위여야 할 텐데.”
알렉스는 도시 고속도로의 풍경을 관찰하면서 대답했다. 빌딩 숲과 아파트 단지를 지나 한강 다리를 건너고, 강남을 관통한 고속도로는 산속으로 이어졌다. 길가에 보이는 산과 들판이 온통 초록색이었다. 사막과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진 텍사스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라 신기했다. 그러다가 다시 도시가 나오고, 고속도로는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고속도로에서 내려, 도시와 시골이 뒤섞인 지역을 지났다. 산속을 향해 뻗어 있는 도로를 타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묘지가 나왔다.
윤은 주차장에 차를 세웠고, 알렉스는 꽃다발을 들고 조수석에서 내렸다. 윤은 묘소로 가는 길을 전부 외우고 있어서 망설임 없이 언덕길을 올라갔다. 언덕을 한참 올라가고 나서, 윤은 수많은 묘 사이에 있는 엄마의 묘를 향해 달려갔다.
윤은 엄마의 묘 앞에 이르러 묘비와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가 꾸준히 살피고 있는 듯, 묘에는 잡초 하나 없었다. 윤은 묘비를 물티슈로 깨끗이 닦고, 묘비 앞에 놓여 있는 꽃을 보았다. 약간 시든 하얀 장미 꽃다발이 하나 있고, 꽃다발 안에는 지퍼백에 들어 있는 편지 봉투가 있었다. 윤은 편지 봉투의 글씨체를 금방 알아보았다. 혜리에게. 아빠의 편지였다.
어른스럽고 시원한 글씨체를 보며, 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윤이 지퍼백을 열고 편지 봉투를 꺼냈다. 편지를 읽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편지 봉투를 열었다. 편지 봉투 안에는 누나가 산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에 누나와 산이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가득 묻어 있는 것을 보니, 아빠가 직접 찍은 사진이었다.
알렉스는 윤의 뒤를 따라와서 묘비 앞에 섰다. 묘비가 한자로 되어 있어, 알렉스가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숫자뿐이었다. 알렉스는 윤의 어머니 나이를 계산해 보고 마음이 아팠다. 그녀는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마흔넷이었다. 알렉스는 머릿속으로 제 부모님을 떠올렸다. 제 부모님이 마흔네 살일 때, 알렉스는 겨우 네 살이었다. 알렉스는 편지를 살피고 있는 윤에게 물었다.
“어머니 성함이 뭐야?”
“박혜리.”
“그건 뭐야?”
“아빠가 엄마에게 편지를 썼어.”
편지를 굳이 두고 간 것을 보면, 누구든 편지를 봐도 상관없다는 이야기겠지. 윤은 편지를 펼치면서 편지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으리라 예상했다.
윤은 편지를 펼쳐 빠르게 훑어보았다. 아빠가 손글씨로 써 내려간 편지에는 아빠의 은퇴 계획, 누나와 산이 이야기,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지만, 윤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다. 예상했던 상황이지만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윤은 편지를 도로 접어 편지 봉투 안에 넣고, 지퍼백을 봉해 자리에 두었다.
“예상대로야. 내 이야기는 없어.”
“…….”
“알렉스. 내일모레 우리 아빠를 보더라도 큰 기대는 하지 마. 나는 없는 자식이니까. 우리는 누나가 초대해서 가는 거야.”
“……울지 마.”
알렉스는 울먹이는 윤을 끌어안았다. 윤은 알렉스에게 안겨 울었고, 알렉스는 윤을 안고 도닥이며 윤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이제 걱정하지 마시라고. 윤에게는 자신이 있다고. 윤을 낳아주어 감사하다고. 알렉스는 세상을 떠난 윤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만 들었다.
윤은 눈물을 손으로 문질러 닦고, 엄마의 묘비 앞에 무릎을 모으고 쪼그려 앉았다. 엄마가 나 때문에 행복한 순간이 있기는 했을까? 저는 태어나서 엄마에게 걱정만 끼친 것 같은데. 윤은 엄마의 묘비를 바라보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고, 알렉스는 엄마의 묘비 앞에 앉아 우는 윤의 곁을 지켰다.
* * *
서울로 돌아와 차를 반납했다. 두 사람은 약속 장소인 이촌역 근처의 고깃집으로 갔다. 누나와 자형의 단골집이고, 갈비와 차돌 된장찌개가 유명하다는 곳이었다. 누나와 자형, 산이는 벌써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환의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너는 얼굴이 좋아졌다? 결혼이 체질에 맞나 봐.]
환은 윤을 놀리기 시작했고, 윤은 수줍게 웃으며 물을 마셨다. 환의 남편은 매우 숙련된 솜씨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소고기 등심이 숯불 위에 올라가고, 자형은 반쯤 익은 고기를 가위로 잘라 윤과 알렉스의 앞접시에 놔주면서 말했다.
“둘이 많이 먹어요.”
알렉스는 윤의 자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예전에 시그나기에 왔을 때나 결혼식 때는 조용히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영어를 못 하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하긴, 한국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 영어를 못 할 수는 없었다.
[엄마.]
[응?]
[쩌거.]
산이는 남자아이인데도 말이 빠른 편이었다. 환은 아이를 안고, 숟가락으로 동치미 국물을 떠먹였다. 윤은 누나가 아이를 돌보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 누나가 누군가를 돌보고 보듬을 사람이 아닌데. 아이는 확실히 그녀의 성격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윤은 환의 새로운 모습이 낯설면서도 좋았다. 누나가 생각을 고쳐먹고 윤과 화해한 것은 산이 덕분이기에, 윤은 산이에게 정말 고마웠다.
알렉스도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윤은 누나와 조카를 보면서 속도 없이 웃고 있었다. 환이 윤과 화해한 것은 윤에게 좋은 일이기는 했다. 윤은 누나를 사랑하고, 그녀는 윤의 혈육이니까. 그러나 알렉스는 그녀가 꺼림칙했다. 그녀가 마음을 고쳐먹었어도, 한때 윤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윤이 누나와 조카를 보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윤의 자형은 삼겹살을 구우며 알렉스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형은 집게와 가위를 들고 현란하게 고기를 굽다 말고, 알렉스에게 말했다.
“나는 처남이 요새 행복해 보여서 좋아요.”
“전에는 불행해 보였어요?”
“불행해 보였다기보다는…… 상견례 날, 처남을 처음 봤는데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어요. 장인어른이 한마디 하시면 눈치 보기 바쁘고, 환이 뭐라고 해도 죄인같이 굴고. 저는 처남이 왜 저럴까 궁금하고 안쓰러웠지만, 사연이 있는 것 같아 묻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공항 사건 때문에 이유를 알게 되었죠.”
“…….”
“저는 상관없거든요. 저에게는 게이, 레즈비언 친구가 있고, 그 애들과 잘 지내요. 근데 알렉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저는 지금이 처남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처남과 조금 더 친하게 지냈다면, 처남과 환이 사이를 중재해 줬을 텐데, 처남이 한국을 떠나지는 않았을 텐데.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지난겨울에 시그나기에 오신 거예요?”
“네. 환이 임신하면서 생각을 고쳐먹은 게 가장 크지만, 저도 환을 설득했어요. 고기 식겠어요. 많이 먹어요.”
윤의 자형은 웃으면서 알렉스에게 고기를 권했고, 새 고기를 불판에 올려 굽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윤의 자형을 보았다. 키는 보통에 결코 잘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착하고 부드러운 심성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외모의 단점을 모두 덮고도 남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산은 제 아빠를 많이 닮았으니, 착하고 바른 아이로 자랄 것이다. 알렉스는 내일모레 돌잔치의 주인공이 될 아이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 * *
식사를 마치고, 윤의 자형이 차를 운전하여 윤과 알렉스를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윤과 알렉스는 호텔 방에 들어왔다. 그들은 씻고 나서 테이블 앞에 마주 앉아 육포를 뜯으며 맥주와 와인을 마셨다. 알렉스는 저녁 식사 시간에 윤의 자형과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폴은 정말 좋은 분이시더라.”
“폴이 누구야?”
“환의 남편. 세례명이 폴이래. 한국 이름은 들었는데 잊어버렸어.”
윤은 알렉스의 대답을 듣고 웃었다. 광범이라는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기는 하다. 윤이 맥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착하지. 그러니까 우리 누나와 결혼할 수 있었던 거야.”
“자기는 누나가 좋아?”
“응.”
“정말?”
“그렇다니까.”
윤은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알렉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알렉스가 잠시 생각하다가 제 생각을 가감 없이 말했다.
“나는 네가 조금이라도 불편하다 느끼면 언제든 환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지금은 너에게 잘해 주지만, 예전에 너를 학대한 적이 있는 사람이니까.”
내가 환 몫까지 잘해 줄게, 알렉스는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윤은 알렉스의 단호한 말을 듣고,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대답했다.
“고마워. 네 눈에는 내가 바보같이 보이겠지. 그래도 나는 누나를 믿을 거야. 나는 사람이 변할 수 있다고 믿어.”
환은 윤이 한국을 등졌던 여러 이유 중 하나일 텐데, 윤은 환이 잘해 주니 좋아서 착한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었다. 윤에게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미래를 고려하여 실용적인 전공을 정하고, 주식 투자를 공부하고, 자신의 자유를 찾아 미래를 개척한 사람답지 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누가 보면 멍청하다고 할 수도 있고, 답답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렉스는 윤의 순진함이 좋았으니까.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근데 만약 누나가 또다시 나를 괴롭힌다면 그때는 누나를 보지 않겠어. 나도 바보는 아니고, 자기를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윤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다시는 알렉스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윤은 두 사람이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윤의 슬픔이 알렉스의 슬픔이고, 알렉스의 슬픔이 윤의 슬픔이었다. 알렉스가 윤에게 저를 소중히 여겨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윤은 저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윤의 대답을 듣고, 알렉스는 비로소 만족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나와 약속한 거야?”
“응.”
윤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 * *
두 사람은 맥주를 마시면서 북한산 등산 코스를 논의하고 잠들었다. 둘은 아침에 일어나서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택시를 타고 북한산성 입구에 내렸다. 등산로 입구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물을 사고 김밥도 다섯 줄 사고, 장갑도 사서 꼈다. 어젯밤에 북한산 등반 코스를 찾으려고 블로그를 보니, 다들 장갑을 챙겨가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평상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지만, 중년 등산객들은 등산복과 등산화, 등산 장비를 전부 갖추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들을 보며 윤에게 물었다.
“북한산이 험해?”
“여기는 비교적 쉬운 코스라서 괜찮을 거야.”
“근데 다들 등산 장비를 갖췄네.”
“저건 그냥…. 유행이야. 우리처럼 입어도 충분해.”
백운대까지는 4.3km. 일부러 쉬운 코스를 골랐다. 윤은 등산을 좋아하지 않았고, 일부러 등산해 본 적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윤은 인생 최초의 등산을 앞둔 알렉스를 고려해야 했다. 아무리 운동선수 출신이어도 북한산 등반은 힘들 수 있었다.
윤과 알렉스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갔다. 부처님 오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등산로를 따라 연등이 늘어서 있었다. 계곡에 물이 흐르고, 연두색 새순이 돋고 있고, 날씨는 선선하고. 봄은 등산하기에 좋은 계절이었다. 윤은 제 옆에 있는 알렉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등산을 하고 싶다고 한 거야?”
“나는 텍사스 출신이라 산을 아스펜에 스키 타러 가서 처음 봤어. 그래서인지 한 나라의 수도 안에 높은 산이 있다는 게 신기해.”
“나는 살면서 그게 신기한 풍경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너무 당연해서.”
“한강도 그래. 자기도 콜로라도강에 가 봐서 알겠지만, 한강에 비하면 한참 작잖아? 대도시에 엄청나게 큰 강이 흐르는 게 신기해.”
“그러면 이따 한강에 가 볼래?”
“좋아.”
쉬운 코스로 하는 등산이지만, 등산은 정말 힘들었다. 돌산이고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틈틈이 등산로 중간에 있는 널찍한 바위나 벤치에 앉아 쉬었다. 둘은 이번에는 벤치에 앉아 쉬었다. 윤은 물을 마시면서 초콜릿을 먹다 말고, 등산객을 따라온 강아지를 보면서 말했다.
“강아지가 우리보다 등산을 잘하는 것 같아.”
“그러게.”
“그나마 이게 쉬운 코스라는데.”
“나 배고파. 간식 산 거 먹자.”
“안 돼. 김밥은 이따 정상에 올라가서 점심으로 먹자.”
두 사람은 물을 마시고 조금 더 쉬었다. 휴식을 마치고, 두 사람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로 중간에 있는 조그만 절에 들어가니, 입구에는 미륵불상이 서 있었다. 조그마한 불상들도 많이 있었다. 알렉스는 아이폰으로 풍경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바위에 새겨진 불상과 대웅전 사진도 찍었다. 심지어 알렉스는 신발을 벗고 대웅전 안에 들어가서 벽화를 관찰하기도 했다. 윤은 알렉스를 내버려 두고, 대웅전 툇마루에 앉아 풍경을 보았다. 등산은 힘들지만, 대웅전에서 내려다보이는 북한산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들은 절을 구경한 후, 산을 계속 올랐다. 올라가다 보니 정상이 가까워졌다. 정상이 가까워지며 바위산 구간이 나왔고, 옆에 있는 로프를 잡고 올라가야 할 정도로 경사가 가팔라졌다. 두 사람은 거의 네발로 기어서 산을 올랐다. 윤은 실수로 발을 헛디딜 뻔하고 나서, 북한산에 온 것을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북한산 둘레길이나 가자고 하는 건데. 내가 어쩌다가 이런 고생을 사서 하고 있나.
알렉스도 처음 해 보는 등산이 어렵고 고된 듯했다. 알렉스가 땀을 흘리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윤은 안심했다. 앞으로 얘가 등산을 또 하자고 하지는 않겠어!
* * *
두 사람은 북한산을 오르고 올랐고, 마침내 백운대에 도착했다. 출발한 지 세 시간 반만이었다. 그들은 백팩에서 돗자리를 꺼내고 물과 김밥을 꺼냈고, 넓고 평평한 바위 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김밥 은박지를 벗기다 말고, 알렉스는 반갑다는 듯 말했다.
“이거 수빈이 만들었던 음식이네?”
“맞아.”
두 사람은 경치를 보며 김밥을 먹었다. 다행히 날씨가 맑고 미세먼지가 별로 없는 날이라, 남산 타워가 보이고 제2롯데월드도 보였다. 알렉스는 김밥을 먹으며 경치를 보다 말고, 윤에게 물었다.
“서울의 인구가 얼마지?”
“천만.”
“뉴욕보다 많네.”
“근데 한국 국가 총생산이 뉴욕주 총생산과 비슷할걸.”
“네가 살던 동네는 어디야?”
알렉스의 질문을 듣고, 윤은 방향을 가늠하다가 목동이 있는 서쪽을 가리켰다. 알렉스는 서쪽을 바라보았다. 서쪽을 보니, 정상에 있는 암벽을 등반하고 있는 사람들 너머로 아파트 숲이 보였다. 윤은 먹을 것을 얻어먹으려고 사람들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를 보면서 말했다.
“나는 여기에 온 게 신기해.”
“그래?”
“나는 등산을 좋아하지 않거든. 서울에 살면서도 등산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런데 자기와 함께 등산을 했네.”
“등산해 보니 어때?”
“좋아. 근데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아. 너무 힘들어.”
알렉스는 윤의 대답을 듣고 웃었다. 운동선수 출신에게도 북한산 등반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알렉스는 정상에서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어서 등산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북한산 말고도 다른 산이 많다는 것도 신기했고, 빌딩과 아파트가 빽빽한 것도 신기했다. 윤이 아니었다면 세상에 이런 풍경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알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멋진 풍경을 보며, 알렉스는 산꼭대기에 부는 봄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 * *
내려오는 길은 훨씬 짧았다. 두 사람은 중간에 있는 산장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먹으면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동안, 알렉스는 둘이 백운대 정상에서 같이 찍은 사진과 서울 풍경 사진을 제 부모님에게 보냈다.
둘은 산에서 내려와서 삼겹살 구이와 된장찌개 백반을 사 먹고, 택시를 타고 한강으로 갔다. 일부러 호텔에서 가까운 여의도 한강 공원에 갔다. 등산 때문에 피곤해서 한강을 따라 걷기에는 무리였다.
두 사람은 잔디밭 위에 돗자리를 깔고, 돗자리 위에 나란히 누웠다. 오늘은 하늘이 맑고 구름이 조금 떠가는 날이었다. 알렉스는 윤에게 팔을 내주었고, 윤은 알렉스의 팔을 베고 누웠다. 이윽고 둘은 얼굴 위에 각각 서울시 영문 지도와 지하철 노선도를 덮고 낮잠을 잤다.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출출해졌다. 분명히 점심으로 삼겹살과 밥을 많이 먹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일까. 윤은 아이폰으로 음식 배달 앱을 켜고 뒤적거리다가, 옆에 누워 있는 알렉스에게 물었다.
“자기야, 치킨 시켜 줄까?”
“여기로 치킨 배달이 된다고?”
“응. 어지간한 음식은 다 배달되는데. 뭐 먹고 싶어?”
“자기가 먹고 싶은 거 시켜.”
윤은 배달 앱을 보다가 양념 반 후라이드 반과 맥주를 주문했고, 알렉스의 옆에 다시 누웠다. 평일 낮이라 한강 공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윤은 알렉스의 옆얼굴을 보면서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알렉스도 같은 생각인지 윤을 향해 돌아누웠다. 윤은 아까 알렉스가 얼굴에 덮고 잤던 서울시 지도를 얼굴 위에 덮고 그에게 키스했다. 입맞춤을 나누는 입술 사이로, 알렉스가 피식피식 웃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 *
둘은 치킨이 배달될 때까지 돗자리 위에 누워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 사람은 얼굴 위에 서울시 지도를 덮고 다시 키스하기 시작했다. 한창 진하게 입을 맞추고 있는데, 윤의 아이폰 진동이 울렸다. 윤은 입술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전화를 받았다.
[배달 왔습니다. 배달 존 2로 오세요.]
[네, 갈게요.]
윤은 전화를 끊었다. 알렉스는 아쉬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윤을 바라보았다. 윤이 운동화를 신고 입술에 묻은 침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배달 존을 향해 걸어갔다. 알렉스는 멀찍이서 윤을 바라보았다. 윤은 배달 존에서 배달부를 만났고, 치킨 상자와 맥주를 받아 왔다.
두 사람은 돗자리 위에 앉아 치킨과 맥주를 먹었다. 알렉스는 야외에서 음식을 시켜 먹는 상황이 생소하고 신기했다. 미국에서도 우버이츠를 이용하여 집으로 음식을 시켜 먹지만, 한국에서는 야외 배달도 가능하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해 준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게다가 야외에서 대놓고 술을 마시다니,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일상적인 일이야?”
“응. 한강에 나오면, 다들 이렇게 배달시켜 먹어. 4월 초에는 여기서 벚꽃 축제가 열리거든. 그때는 난리 난다.”
“여기서 벚꽃 축제를 한다고?”
“응. 여기 심겨 있는 가로수가 전부 벚나무야.”
“아쉽다.”
“나도 아쉬워. 벚꽃이 피면 정말 예쁘거든.”
윤이 치킨을 뜯으며 말했다. 윤은 제 생일 즈음에 늘 벚꽃이 피어 있었기 때문에 벚꽃을 좋아했다. 알렉스와 함께 벚꽃을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봄 방학은 짧고, 아직 학기 중이라 시간이 없어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 * *
등산 때문에 피곤하지만, 두 사람은 피곤함을 참고 종로에 가서 한 돈짜리 돌 반지와 팔찌를 샀다. 그리고 호텔에 들어와 씻고 바로 잠들었다. 섹스하기에는 너무 피곤했고, 다음 날이 돌잔치라 정결한 마음을 유지하며 금욕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 *
둘은 아침에 일어나서 슈트를 차려입고 머리를 만지고 부산하게 준비했다. 알렉스는 조식을 맛있게 먹었지만, 윤은 조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아빠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식욕이 돌지 않았다.
돌잔치 장소는 여의도 전경련 회관 꼭대기 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장소를 듣자마자, 윤은 누나와 자형, 아빠, 산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잔치에 돈을 많이 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스토랑은 사방이 유리로 되어 있어 채광이 좋았다. 게다가 홀이 아주 컸고, 돌상도 매우 화려했다. 돌잔치에 많이 가 본 것은 아니었지만, 돌잔치를 이렇게 크게 하는 경우는 처음 보았다. 양가 모두 첫 손자라서 의미가 특별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윤은 조금 안심했다. 손님들이 많이 오다 보면 자신과 알렉스가 섞여 있어도 티가 나지 않을 것이다.
세 식구는 청회색 계열의 한복을 맞춰 입고 홀 입구에 서 있었다. 윤과 알렉스는 그들과 인사했다. 누나는 가족석을 빼면 지정석이 없으니 알아서 앉으라고 했다. 알렉스가 먼저 홀에 들어가고, 윤은 알렉스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윤이 가족석과 멀리 떨어진 곳에 앉자, 알렉스도 윤의 곁에 와서 앉았다. 알렉스가 윤에게 물었다.
“빈자리가 많은데 왜 여기 앉았어?”
“괜히 나 때문에 이야기 나올까 봐.”
윤은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윤이 의기소침해하는 것이 속상했지만, 윤의 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윤은 결혼반지를 손에서 뺄까 고민하다가, 설마 누가 알아보겠나 싶어 그만두었다.
윤은 자리에 앉아 아이폰만 들여다보았고, 알렉스는 돌잔치 장소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은 유리 온실 같은 느낌의 하얀색 인테리어로 꾸며진 굉장히 호화로운 장소였다. 오스틴에서도 이만큼 화려한 홀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들어와 앉고, 알렉스는 어떤 나이든 남자가 이쪽을 빤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가 아주 크고, 마른 체격에 창백하고 날카로운 인상이 두드러지는 남자는 윤과 닮은 곳이 한 군데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윤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그가 자신의 장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야.”
“나도 알아.”
윤은 고개를 들지 않았고, 아이폰만 보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 아빠야.”
알렉스에게 대답하는 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윤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알렉스는 테이블 밑에서 윤의 오른손을 자신의 왼손으로 꽉 잡았다.
* * *
환은 아들을 안고 손님들에게 열심히 인사하고 있었다. 한참 인사를 하다가, 환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아빠를 발견했다. 그는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환은 아이를 안고, 아빠와 마주 보았다. 그가 딸을 불렀다.
[환아.]
[아빠.]
[하부지.]
환의 품에 안겨 있던 산은 그를 보고 까르르 웃었다. 평소에 그가 손자를 많이 돌보기 때문에 아이는 그를 매우 가깝게 여겼다. 그는 저에게 안아달라고 팔을 벌리는 손자를 무시하고, 환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네 동생, 네가 불렀어?]
[윤이는 산이 삼촌이니까 당연히 불렀죠. 일부러 돌잔치 날짜도 윤이랑 윤이 신랑 봄 방학 기간으로 맞춘 거예요.]
환은 산이 쓰고 있는 복건을 고쳐 씌우면서 대답했다. 아빠가 환의 대답을 듣고, 더욱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옆에 웬 백인 남자애가 하나 앉아 있던데?]
[네. 그 애가 윤이 신랑이에요.]
[거짓말하지 마라.]
아빠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환은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딱 부러지는 말투를 쓰며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내가 작년 여름에 윤이 결혼식에 간다고 이야기했잖아.]
아빠는 환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환은 아빠에게 한 번 더,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렉스, 진짜 잘생겼죠? 윤이랑 결혼하면서 호적을 파이기는 했지만, 집안도 굉장히 좋고 똑똑한 애예요. 무엇보다 윤이를 많이 좋아하고.]
[…….]
[좋은 날에 큰 소리 내지 말아요. 아빠.]
환은 머리를 단호하게 내저으며 산이를 아빠에게 넘겨주었다. 산이는 웃으면서 제 할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환은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고, 그는 손자를 품에 안고 멀뚱히 서 있었다.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고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 * *
[주윤.]
윤은 아이폰만 보고 있다가, 누나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얼굴을 들었다. 알렉스도 환을 바라보았다. 환은 윤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윤아.]
[누나.]
[윤이, 너 이따 앞에 나와서 산이에게 짧게 덕담 한마디 해. 시댁에서는 아버님, 어머님이 하시는데, 우리 집은 엄마가 없으니까 너와 아빠가 해야 해.]
갑자기 덕담이라니. 덕담을 준비하는 것도 어려운데, 아빠와 같이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윤은 불안해하며 누나에게 말했다.
[아빠가-]
[아빠는 걱정하지 마. 아빠가 혹시 뭐라고 하면 내가 막아 줄게.]
환이 웃으면서 말했기 때문에 윤은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누나가 나보고 앞에 나와서 산이한테 축복의 말을 하래.”
“좋네. 무슨 말을 해 줄 거야?”
“그러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하지?”
“구글에서 찾아봐.”
알렉스는 돌잔치 풍습을 흥미로워하고 있었고, 윤은 죽을 맛이었다. 예정에 없던 일을 시키다니. 구글에 돌잔치 덕담을 검색해 보니, 다행히 덕담은 한두 마디 정도만 하면 된다고 했다. 이 정도면 그리 나쁘지는 않네. 윤은 조카에게 어떤 말을 해 줘야 할지 생각했고, 금방 결정을 내렸다.
* * *
돌잔치가 시작되었다. 알렉스는 이국의 돌잔치 풍습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먼저 산이가 태어나고, 한 살이 되는 지금까지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비디오를 편집하여 만든 동영상이 상영되었다. 동영상 상영을 마치고, 사회자는 산이의 엄마 아빠에게 마이크를 건네면서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라고 권했다. 그러자 산이의 엄마 아빠가 번갈아 마이크를 잡고 뭐라고 감사의 말을 했고, 사회자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이제 산이의 외할아버지와 삼촌이 덕담 한마디씩 해 주시겠습니다. 모두 박수로 맞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윤은 자신의 아버지와 거리를 한참 두고 돌상 앞에 서 있었다. 먼저 윤의 아버지가 사회자가 건네는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중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우리 산이가 벌써 돌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우리 산이가 앞으로 엄마 아빠를 닮아 건강하고 슬기로운 아이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윤의 아버지는 마이크의 끝을 아주 조금만 잡고 윤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그는 아들을 불결한 곰팡이처럼 여기고 있었고, 아들과 손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부정을 탄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장인이 윤을 꺼리는 모습을 보며 알렉스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윤은 무심하게 아버지에게서 마이크를 받아 들고 말했다.
[저는 산이가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산이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든, 저는 산이를 응원할 거예요.]
윤은 차분하게 말하고 나서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는 돌상 앞에서 걸어 나왔고, 알렉스의 곁에 와서 앉았다. 알렉스는 윤에게 물었다.
“뭐라고 말한 거야?”
“산이가 어떤 아이이든, 나는 산이를 응원할 거라고 했어.”
“잘했네.”
“내가 자라면서 가족들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한 것뿐이야.”
윤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무대를 보니 산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덕담하고 있었다. 그들이 덕담을 마치고, 윤이 알렉스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돌잡이니까.”
“그게 뭐야?”
“아기가 잡는 물건을 통해 아기의 미래를 점치는 거야.”
자형이 아이를 안고 있고, 환이 쟁반에 돌잡이 물건들을 올려 아이에게 가져다주었다. 아이는 물건들을 보다가 실타래를 집었다. 알렉스는 실을 보면서 물었다.
“실은 무슨 뜻이야?”
“장수.”
알렉스는 산이가 집은 물건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래 살면 좋지. 사람들은 돌잡이를 한 번 더 하라고 외쳤다. 하지만 환과 자형은 더 이상 돌잡이를 진행하지 않았다. 사회자가 환에게 마이크를 가져다주었고, 환은 웃으면서 소감을 말했다.
[우리 산이가 실을 집었네요. 오래 산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이야기니까 기쁘네요. 저는 산이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 * *
돌잡이가 끝나고 나서, 알렉스와 윤은 밥을 먹었다. 미슐랭 가이드에 올라있는 유명한 레스토랑과 같은 회사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그런지, 음식이 아주 맛있었다. 한창 밥을 먹고 있는데,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감사 인사를 하던 누나와 자형이 왔다. 그새 피곤해진 산이는 자형의 품에 안겨 졸고 있었다. 누나는 일부러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덕담 고마워. 내용이 매우 마음에 들어. 산이도 나중에 삼촌이 그런 말을 해 줬다는 사실을 알면 기뻐할 거야.”
“고마워.”
“알렉스, 음식은 괜찮아?”
“네. 맛있어요.”
“산이, 삼촌한테 갈래?”
자형이 윤을 보며 산이에게 물었다. 산이는 조느라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고, 제 손가락을 빨다가 잠이 들었다. 알렉스는 준비해 왔던 돌 반지와 팔찌가 든 쇼핑백을 환에게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이런 건 언제 샀어?”
“어제 샀어요.”
“고마워.”
환은 웃으면서 쇼핑백을 받아 들었고, 알렉스를 꽉 안아 주었다. 그리고 환은 윤의 눈치를 살피면서 물었다.
“아빠가 뭐라고 하지 않았지?”
“응.”
“거봐.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내일 몇 시 비행기야?”
“저녁 여섯 시 오십 분.”
“그럼 내일 점심 같이 먹자. 그리고 우리가 공항까지 태워다 줄게.”
환이 이미 남편과 이야기를 마쳤다는 투로 말했다. 윤은 알렉스를 보았다. 알렉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좋아, 너는?”
“나도.”
“그러면 내일 체크아웃하는 시간에 맞춰서, 우리가 호텔로 차 가지고 갈게.”
“알았어. 근데 누나, 얼른 가 봐. 다른 테이블에도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알았어. 간다, 가.”
환은 웃으면서 다른 테이블로 걸어갔다. 자형이 아이를 안고 뒤를 따라갔다. 정신없이 바빠 보이는 그들을 두고, 알렉스와 윤은 다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 * *
식사를 마치고, 환과 남편, 산은 홀 입구에 섰다. 떠나는 손님들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자형의 품에 안겨 있는 산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윤과 알렉스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윤은 누나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누나, 고생했어.]
[이제 돌잔치에서 해방이다.]
누나는 윤을 안아 주었다. 어릴 때부터 환은 윤보다 항상 키가 컸고, 어른이 되어서야 윤과 키가 같아졌다. 환은 아빠를 닮아 키가 아주 크고, 윤은 엄마를 닮아 키가 평균이기 때문이었다. 환은 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내일 보자.”
“그래.”
“알렉스도 내일 보자.”
“네.”
“둘 다 내일 봐요.”
자형도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들과 인사하고 나서 레스토랑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둘은 윤의 아버지와 정면에서 마주쳤다. 윤의 아버지는 윤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고, 말은 하지 않았다. 윤은 아버지를 마주 보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할까? 그러나 윤은 아빠와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싫고 두렵고, 왜 굳이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윤은 아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알렉스에게 말했다.
“가자.”
“그래.”
윤과 알렉스는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아빠가 윤에게 말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
[…….]
윤은 결국 아빠를 돌아보았다. 알렉스도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차가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노려보며 말했다.
[환이가 괜찮다고 했어도, 양심이 있으면 오지 말았어야지.]
아빠의 말을 들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역시 아빠에게 의미 있는 자식은 누나뿐이었다. 윤은 냉혹한 사실을 완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아빠에게 확인 사살을 당하고 나니, 아빠에 대한 모든 미련이 사라졌다. 미련이 사라지고 나니, 그는 남만도 못한 존재였다. 윤은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방금 처음 만난 사람을 보는 것처럼 아빠를 낯설게 바라보았고, 평생의 용기를 쥐어짜서 아빠에게 말했다.
“저를 아세요?”
윤이 영어로 묻자, 아빠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윤은 아빠를 두고 돌아서서 알렉스의 위팔을 잡았다. 알렉스는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장인이 아들에게 모진 말을 했고, 윤은 크게 상처받았다는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윤의 어깨를 안아 자신에게 기대게 하고 걸어갔다. 윤은 울지도 웃지도 않았고, 무서운 표정을 짓고 바닥만 보면서 걸어갔다.
알렉스는 몸에 힘이 풀린 윤을 굳건히 부축하며 걸었다. 알렉스와 함께 걸어가는 동안, 윤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식은땀을 흘렸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이었으면서, 나는 왜 오랫동안 아빠의 마음에 들어보려고 애썼던 것일까? 지난 세월이 헛되고 헛되었다. 모든 것이 허무했다. 그러다가 윤은 생각을 다시금 고쳐먹었다. 어차피 아버지는 예전부터 아들이 없느니만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식인 저라고 아버지를 부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 * *
호텔 방에 돌아와서, 윤은 많이 울었다. 얼굴이 퉁퉁 붓도록 울던 윤은 갑자기 맥도날드 맥스파이시 치킨버거 세트와 밀크셰이크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알렉스는 그런 메뉴는 처음 들어봤다. 한국어 메뉴라 이름을 섣불리 받아 적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윤에게 펜과 호텔 메모지를 내밀었다. 윤이 호텔 메모지에 메뉴 이름을 한글로 휘갈겨 썼고, 알렉스는 쪽지를 들고 서울역에 있는 맥도날드에 갔고, 세트 메뉴를 두 개 사서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서 햄버거를 먹었다. 윤은 버거만 반쯤 먹었고, 밀크셰이크는 반 넘게 남기고 침대에 누웠다. 알렉스는 버거와 감자튀김을 모두 먹고, 윤의 곁에 누웠다. 알렉스는 윤에게 팔을 내주었고, 윤은 알렉스의 팔을 베고 누웠다. 윤이 우울해하며 말했다.
“피곤해.”
“자면 되지.”
“내가 자면, 너는?”
“심심해도 어쩔 수 없지.”
알렉스는 커다란 손으로 윤의 두 눈을 덮어 빛을 가려 주었다. 윤은 눈이 가려진 채, 우느라 잔뜩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기는 착해.”
“고마워.”
“나는 자기 없으면 어떻게 살지?”
“나도 너 없으면 못 살아.”
“정말?”
“응. 그러니까 내가 가진 것을 전부 걷어차고 자기와 결혼했지.”
“너도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긴 아는구나.”
“알지. 그렇지만 후회하지 않아.”
윤의 두 눈을 가린 알렉스의 오른손이 눈물에 젖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우는 윤을 보며 속이 상했다. 아버지가 뭐라고. 그런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고 보는 게 나았다. 그리고 너에게는 이제 내가 있는데, 나는 네 남편인데. 알렉스는 우는 윤을 안고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앞으로 네 아버지 몫까지 더 잘할게.”
“…….”
“그러니까 울지 마…….”
알렉스는 윤을 꽉 끌어안고 속삭였다. 알렉스의 말을 듣고, 윤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윤은 알렉스에게 매달려 한참 울었고, 알렉스는 윤을 안고 달래 주었다.
* * *
알렉스는 울음을 그친 윤과 부드럽게 키스했다. 알렉스는 머리가 아플 때까지 펑펑 울던 윤의 입 안이 너무 뜨거워서 놀랐다. 키스하다가 자연스럽게 서로의 넥타이를 풀고, 재킷을 벗기고, 셔츠를 벗겼다. 어느새 두 사람은 완전한 알몸이 되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한참 울다가 탈진한 사람과 섹스를 하는 것이 맞나? 알렉스는 잠시 고민했지만, 직감은 그게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아직 한낮의 태양이 떠 있고, 커튼은 활짝 열려 있었다. 알렉스는 슈트 케이스 안에서 젤을 집어 들고 침대로 올라왔다. 윤의 성기를 한 번 빨아 주어 사정시키고, 탈진해서 눈만 간신히 뜨고 있는 윤의 온몸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자국을 남기고, 몸을 정성스럽게 만지고 안아 주었다. 알렉스는 손가락에 젤을 묻혀 입구를 열기 시작했다. 윤이 기진맥진한 상태라 입구는 평소보다 쉽게 열렸다.
알렉스는 윤의 몸에 젤을 충분히 축이고, 자신의 페니스에도 젤을 흥건하게 펴 발랐다. 오늘은 윤을 조금이라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알렉스는 침대에 똑바로 누워 있는 윤의 다리를 벌리고, 입구에 성기의 머리를 대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스가 들어가는 동안, 윤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마침내 알렉스의 허벅지가 제 엉덩이에 닿았을 때, 윤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안이 한껏 벌어지고, 알렉스가 들어와 자신을 가득 채운 감각이 괴로우면서도 더없이 행복했다. 알렉스는 윤의 몸 위로 엎드리며 몸을 완전히 포갰다. 윤은 알렉스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알렉스도 윤의 몸을 두 팔로 안으며 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은 서두르지 않을 거야.”
“으응…….”
“사랑해.”
“나도 사랑해.”
“너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알렉스는 속삭이면서 윤의 귓불을 입술로 살며시 물었다. 윤은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알렉스가 윤의 안에 들어가 있어서, 윤의 울음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알렉스는 윤의 슬픔을 온전히 느끼며, 윤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를 안고 기다렸다. 윤의 울음이 잦아들고, 알렉스는 그를 안고 아주 느리고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은 알렉스의 체온과 움직임에 온몸이 완전히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윤이 알렉스를 끌어안고 그의 목덜미와 어깨에 줄곧 입 맞추었다. 이내 알렉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두 손으로 그의 날개뼈, 등, 허리 수술 흉터와 엉덩이를 만지다가, 그의 목을 두 팔로 안고 허리에 두 다리를 감았다. 제 부드러운 손길에 흥분한 알렉스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윤이 알렉스의 귓가에 아주 가냘프게 속삭였다.
“사랑해.”
“…….”
“네가 죽으면, 나는 너를 따라 죽을 거야.”
“…….”
“그러니까 나를 두고 가지 마.”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우리는 죽어서도 함께할 거야. 알렉스는 윤의 내벽을 제 성기로 간지럽히며 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윤은 알렉스의 귓속말을 듣고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윤이 벅찬 마음을 담아, 알렉스에게 먼저 키스했고, 알렉스와 혀를 섞으면서 눈을 감았다. 죽어서도 함께라니. 그거면 됐다.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 * *
한낮의 정사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정사는 한 번뿐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정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고 밤이 되도록 그들은 같은 꿈을 꾸며 깊은 잠을 잤다.
* * *
두 사람은 낮에 잠들었다가 새벽에 일찍 일어났다. 둘은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일어나서 짐을 싸고 시간을 확인했다. 조식 시간까지 시간이 한참 남아 있어서, 그들은 욕조에 입욕제를 풀고 함께 목욕을 즐겼다. 둘은 따뜻한 물에 잠겨 서로를 끌어안고 기대있었고, 씻고 나와서 다시 잤다. 일어나보니 조식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어서, 두 사람은 얼른 조식을 먹으러 갔다.
둘은 조식을 먹고 방에 돌아와서 TV를 보며 빈둥거렸다. 그리고 그들은 두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고 체크아웃했다. 호텔 로비에는 환과 폴, 산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산은 어제와 달리 생기발랄해 보였다. 환은 윤에게 산을 안겨 주면서 말했다.
[삼촌이야.]
[삼쫀?]
[맞아. 삼촌이야.]
윤은 아이를 안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아이는 윤을 보고 좋아했다. 삼촌을 처음 보았지만, 환과 얼굴이 닮아서 본능적으로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알렉스는 산이를 안고 좋아하는 윤을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점심은 뭐 먹고 싶어?”
환은 알렉스에게 물었다. 알렉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삼계탕이요.”
알렉스는 언젠가 구글링하며 보았던 한국 음식을 떠올렸다. 뚝배기 안에 닭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가 있는 음식이었다. 환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비싼 메뉴를 골라도 되는데.”
“맛있는 것은 어제 많이 먹었잖아요. 그러니까 삼계탕도 좋아요.”
“윤이 너는?”
“알렉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비행기 타니까 소화 잘되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 건 아는데, 그래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자형이 끼어들면서 말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정말 삼계탕이 먹고 싶었기 때문에 삼계탕을 먹고 싶다고 다시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삼계탕집에 가기로 했다.
자형이 두 사람의 슈트 케이스를 끌고 가고, 누나는 자형과 나란히 걸었다. 윤은 산이를 안고 있다가 알렉스에게 물었다.
“너도 산이 안아 볼래?”
“그래.”
[박산, 알렉스 삼촌이 안아 준대. 괜찮아?]
[우웅.]
아이는 눈만 깜빡였다. 윤은 알렉스에게 산이를 넘겨주었고, 알렉스는 산이를 안았다. 눈높이가 불쑥 높아지자, 아이가 놀라면서 알렉스의 목에 와락 매달렸다.
“괜찮아.”
알렉스는 안정감 있게 아이의 엉덩이를 받쳐 안았다. 그러자 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긋 웃었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한 자형은 자동차 트렁크에 슈트 케이스 두 개를 실었다. 아이를 뒷좌석 카시트에 태우고, 알렉스와 윤이 아이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환은 네비게이션 앱에 근처에 있는 삼계탕집 중 가장 유명하고 평이 좋은 곳의 주소를 입력했고, 자형이 운전하는 차는 그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윤은 삼계탕 한 그릇을 시켰고, 알렉스를 위해 두 그릇을 시켰다. 알렉스가 평소에 먹는 양을 생각하면 두 그릇은 시켜야 했다. 음식이 나오고, 환과 자형은 알렉스가 먹는 모습을 보고 새삼스레 깜짝 놀랐다. 윤은 그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하긴, 윤도 처음에는 알렉스의 식사량을 보고 매우 놀랐었다.
“입맛에 맞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는 것 같네.”
환은 알렉스가 삼계탕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윤은 누나의 말을 듣고 킥킥 웃다가 누나 가족을 보았다. 자형이 밥을 먹고, 누나가 산이에게 밥을 먹인다. 자형이 서둘러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보니, 자형이 밥을 먹는 동안 누나가 산이에게 밥을 먹이고, 누나가 밥을 먹는 동안 자형이 산이에게 밥을 먹이는 것이 규칙인 것 같았다. 누나가 아들에게 밥을 먹이다가 말고 말했다.
“산이가 너희 둘을 좋아해서 다행이야.”
“그래?”
“응. 산이가 순한데 은근히 낯을 가리거든. 그래서 낯선 사람을 보면 안 좋아해. 너야 나와 닮았으니까 그렇다 쳐도, 알렉스도 좋아하는 건 신기하네. 태어나서 외국 사람은 처음 본 건데.”
“알렉스가 잘생겼으니까.”
“남편 자랑은 그만해라.”
누나가 윤에게 핀잔을 주었다. 윤은 웃으며 삼계탕을 마저 먹었다. 그러고 보니 삼계탕이 한국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될 것이다. 아니다. 이번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아니었다. 이제 윤은 시간이 있으면 언제든 한국에 올 수 있으니까.
식사를 마치고, 그들은 누나 집에 들러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윤은 예쁜 신혼집 인테리어가 완전히 엉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애를 키우면 인테리어를 포기해야 한다더니 사실이었다. 거실 바닥에는 고무 매트가 깔려 있고, 벽지는 낙서투성이고, 집 안은 온통 장난감과 아기용품으로 어수선했다.
환이 두 사람의 장래 계획을 궁금해해서, 그들은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다. 알렉스는 이번 여름에 오스틴 법원에서 인턴으로 일할 예정이었고, 로스쿨을 마치면 검사로 일을 시작했다가 로펌으로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고, 윤은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연구소에 취직할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계획을 듣고 나서, 자형이 알렉스에게 말했다.
“우리 둘 다 같은 분야에 있으니까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물론 미국과 한국은 법 제도가 매우 달라서, 참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도와줄게요.”
“그럴게요.”
알렉스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법체계는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법조인이니 그들의 의견을 어느 정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스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사실이 좋아서 웃었다.
커피를 마시고 나서, 윤과 알렉스는 자형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체크인하면서 수화물을 부치고, 댈러스 행과 시그나기 행 항공권 두 장을 받아 여권에 끼우고 출국장으로 걸어가는데, 환이 울기 시작했다. 윤은 환을 마주 안고 달랬다.
[누나, 울지 마. 다음에 다시 올게.]
[그래.]
[도착하면 메시지 보낼게.]
[알았어.]
윤은 누나를 놓았다. 누나는 알렉스를 안아 주었다. 알렉스는 자신을 안아 주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윤과 많이 닮았으면서도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 윤에게는 매우 소중한 혈육. 알렉스에게는 약간 껄끄러운 존재. 그녀는 알렉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윤이를 잘 부탁해.”
“네.”
“어려운 거 있으면 말하고.”
환과 알렉스가 대화하는 동안, 자형이 산이를 윤에게 넘겨주었다. 윤은 아이를 안고 말을 건넸다.
[산아, 삼촌 이제 가는데. 다음에 보자. 그때는 선물 많이 사 올게.]
[웅!]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고 대답하는 건지. 윤은 조카를 보며 웃다가, 아이가 신은 신발을 보았다. 이제 보니 산이가 신고 있는 신발은 제가 누나에게 선물로 주었던 신발이었다. 윤은 산이가 신고 있는 신발을 보며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윤이 산이를 안고 있는 동안, 자형과 알렉스가 인사하고 포옹했다. 윤은 알렉스에게 산이를 넘겨주고 자형과 인사했다.
[감사해요.]
[내가 뭘. 처남도 알렉스랑 건강하게 잘 지내.]
[그럴게요.]
[도착하면 연락하고.]
[네.]
알렉스는 산이를 안고 어르다가 자형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정말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윤과 알렉스는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출국장 보안 요원에게 여권을 건네다 말고, 윤은 뒤를 돌아보았다. 환은 울고 있고, 산이를 안고 있는 자형이 그녀를 달래고 있었다. 알렉스가 윤이 보고 있는 쪽을 힐끗 보고, 윤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환은 괜찮을 거야.”
“알아.”
“가자.”
윤은 알렉스를 따라 웃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두 사람은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출국 심사를 마치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면세점에 들렀다. 윤은 향초 두 개를 샀고, 알렉스는 부모님께 드릴 한국 술을 장만하고, 핑크 복숭아와 갈기 없는 사자 이모티콘이 그려진 사무용품을 샀다. 그리고 둘은 똑같은 디자인이지만 다미에 모노그램 패턴의 색깔만 다른 커플 키링을 샀다. 각자의 열쇠 꾸러미에 똑같은 키링을 달고 나니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윤은 알렉스와 게이트 앞에 나란히 앉아, 열쇠 꾸러미 두 개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우리 진짜 부부 같아.”
“우리 진짜 부부 맞는데?”
“내 말은, 자기와 가족 행사에 같이 가니까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기분이라고.”
“나도 자기가 자란 곳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자기를 더욱 잘 알게 되어 기뻐. 가족 행사에 참여한 것도 좋고.”
알렉스는 기쁘게 말했다. 윤은 주변을 살피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알렉스의 뺨에 키스했다. 알렉스는 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네가 아버지와 영영 갈라선 것은 아쉽지만, 알렉스는 그 말은 윤에게 하지 않았다. 이제 윤의 인생에 아버지는 없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가족은 누나와 자형, 조카뿐이고 친구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알렉스는 앞으로 윤을 더 많이 사랑하고 아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저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윤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랑해.”
윤이 알렉스에게 말했다. 알렉스는 웃으며 윤의 어깨를 꽉 안아 주었다. 그러자 윤의 팔이 알렉스의 등허리에 감겼다. 윤은 눈을 감고 알렉스의 체온을 느꼈다. 같이 있기만 해도 마음이 따스해지는 사람. 윤에게 알렉스는 삶의 의미를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저도 알렉스에게 행복만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자신의 바람을 담아, 윤은 알렉스의 등을 부드럽게 도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