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월 18일 (외전)-Chapter 1 (8/15)

Chapter 1:

Summer of love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날이었다. 알렉스는 세발자전거를 타면서 엄마와 아빠가 차고와 마당에 물건들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물건 대부분은 알렉스가 유아기에 쓰던 것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요람과 유모차, 아기 옷, 장난감, 동화책 같은 유아용품 외에도 아름다운 도자기 그릇이나 주방용품, 가구를 진열하고, 몇 번 입지 않은 새 옷들을 행거에 걸어놓았다. 어린 알렉스는 몰랐지만, 두 사람이 내놓은 물건은 대부분이 명품이었다. 진열을 마치고, 엄마와 아빠는 차고 세일(Garage Sale)이라는 팻말을 잔디밭 위에 세워 두었다.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면 좋겠다.”

엄마가 물건들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적당한 가격을 써넣었다. 정가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지만, 나눔에 의미를 둔 일이기도 했고, 이웃들과 경쟁해야 하니 가격을 적당히 책정해야 했다.

오스틴 웨스트레이크 힐스에서 차고 세일이 열리면 먼 동네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웨스트레이크 힐스 차고 세일은 안목은 높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였다.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명품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엄마,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차고 세일 마치고 먹자.”

알렉스의 엄마, 줄리아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잡는 아들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녀와 남편 알렉산더 3세는 라이스 대학 동기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 줄리아는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전공했으며, 알렉산더 3세는 재무를 전공했다. 줄리아와 알렉산더 3세는 라이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란히 스탠포드 대학교 박사 과정과 로스쿨에 입학해 20대의 대부분을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다. 그들이 일반적인 텍사스 사람들보다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래서였다.

알렉산더 3세가 먼저 로스쿨을 졸업하고 로펌에 취직해서 일하는 동안, 줄리아는 열심히 논문을 썼다. 자녀 계획은 나중으로 미루었다. 임신은 줄리아가 박사 학위와 포닥을 마치고 테뉴어1)를 받은 이후에나 가능했다. 한창 실험하고 논문을 써야 할 시기에 아이를 가진다면, 화학 약품과 방사선, 시약들이 아이에게 악영향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줄리아가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3년간의 포닥 생활을 끝내고,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에 교수로 임용되면서, 부부는 텍사스로 돌아왔다. 알렉산더 3세는 텍사스주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고, 오스틴 소재 대형 로펌 파트너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줄리아는 연구에 매진하여 테뉴어 심사를 위한 실적을 쌓아나갔다. 그녀는 마음이 급했다. 그녀가 테뉴어를 최대한 빨리 받는다고 해도 30대 중반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아이를 세 명 낳고 싶었지만,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면 한 명을 낳는 것도 힘들 것 같았다.

마침내 줄리아는 서른여섯 살에 테뉴어를 받았다. 알렉산더 3세와 줄리아는 들뜬 마음으로 결혼한 지 14년 만에 임신을 시도했다. 줄리아는 아이를 몇 번이나 유산했고, 부부는 인공 수정까지 수차례 시도하여 임신에 성공했다. 하지만 임신에 성공하니 새로운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줄리아는 심한 입덧과 하혈을 겪었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임신 기간을 버텼다. 그렇게 나이 마흔에 난산으로 낳은 아이가 외동아들 알렉스였다. 사실 딸을 바랐지만, 아이가 무사하게 태어나고 나니 성별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만큼 알렉스는 부부에게 소중하고 귀한 아이였다. 게다가 이제 세 살. 한창 예쁠 나이였다.

요새 부부는 아들이 르네상스 시대 명화 속 아기 천사처럼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심 뿌듯했다. 엷은 금발에 커다란 파란색 눈, 또래보다 큰 키에 부부의 장점만을 닮은 얼굴. 부부가 하도 귀하게 길러 다소 까다로운 구석이 있지만, 알렉스는 똑똑하고 착한 아이였다.

“그래. 무슨 맛 먹을까?”

알렉산더 3세는 아들을 안아 올려 어깨 위로 목말을 태웠다. 알렉스는 까르르 웃었다. 아이는 시야가 불쑥 높아지자 재미있어했다. 줄리아는 남편과 아들을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그림 같은 가족이었다. 남편과 아내 둘 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했으며, 두 사람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건강하고 예쁜 아이까지 낳았다. 알렉산더 3세와 줄리아는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었다.

* * *

슬슬 손님들이 동네에 찾아들었다. 부부는 찾아온 이웃 및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물건을 팔고 계산했다. 알렉스가 쓰던 유아용품은 대부분 금방 팔려 나갔고, 가구와 그릇, 주방용품과 부부의 옷이 주로 남았다. 줄리아는 어질러진 물건들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알렉산더 3세와 알렉스 역시 팻말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정리하고 주웠다.

그때, 연식이 오래된 검은색 도요타 캠리가 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운전석에서 젊은 동양인 남자가 내렸다. 조수석에서는 젊은 동양인 여자가 내렸고, 뒷좌석에서 어린 남매가 내렸다. 아이들은 둘 다 초등학생으로 보였다. 여자아이가 큰 애였고 남자아이가 작은 애였다.

줄리아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낯선 언어를 쓰고 있었다. 어느 나라 말일까? 중국어는 아닌 것 같고, 일본어도 아닌 것 같은데. 마침 누나가 부모의 눈을 피해 남동생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고, 남자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남자아이가 울면서 누나에게 뭐라고 말하자 여자아이는 주먹을 쳐들며 동생을 다시 때리려고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줄리아는 여자아이의 폭력을 보고 혀를 찼다. 아무리 아이들이라지만 너무하는 것 아닌가. 여자아이가 동생을 또 때리려고 하는 순간, 아이들의 엄마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아이 엄마는 누나를 혼내고 남자아이를 감쌌다. 여자아이가 엄마에게 뭐라고 말했지만, 아이 엄마는 단호하게 여자아이를 혼냈다. 아이 엄마는 울고 있는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와 그릇을 둘러보다가 줄리아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릇이 예쁘네요.”

“예뻐서 샀는데 쓸 일이 별로 없어서 새 주인을 찾아주려고 내놨어요. 그건 로얄 코펜하겐이에요.”

“예쁘다.”

아이 엄마는 그릇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집어 들고 요모조모 살폈다. 줄리아는 아이 엄마를 바라보았다. 길고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여름 바람에 찰랑거리고, 뽀얗고 깨끗한 피부와 가녀린 체구를 가진 여자였다. 그녀의 곁에 서 있는 남자아이는 엄마를 많이 닮아서 예쁘게 생겼다. 아이 엄마는 아들에게 말을 걸었다.

[윤아, 접시가 예쁘네. 여기에다가 밥을 먹으면, 밥이 더 맛있을 것 같지?]

[응.]

[이거 살까? 윤이는 이거 마음에 들어?]

[나는 좋아.]

아들의 대답을 듣고, 아이 엄마는 환하게 웃었다. 줄리아는 그들의 대화가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모자의 정다운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아이 엄마가 줄리아에게 말했다.

“여기에서 오래 살 게 아니라서 적당한 것을 사서 쓰려고 했는데, 이 접시들은 욕심이 나네요.”

“곧 이사 가시나요?”

“이사 온 지는 얼마 안 되었는데, 남편 일 때문에 3년 정도만 있을 것 같아요. 이곳이 익숙해질 때쯤 되면 한국으로 돌아가겠죠? 저도 복직해야 하고요.”

“한국에서 오셨어요?”

“네.”

한국이라. 한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나라였다.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휴전 상태인 동아시아의 소국. 몇 안 되는 그녀의 동료 한국계 교수나 학생들은 대단히 부지런하고 총명했다. 그게 내전이 끝난 지 50년도 되기 전에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루어 낸 비결이라고 하던가. 줄리아가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은 그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한국 대기업이 오스틴에 반도체 공장과 연구 센터를 세웠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가족들은 그 연구 센터와 관련된 사람들이겠다. 줄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 엄마에게 물었다.

“어느 동네에 사세요?”

“노스웨스트 힐즈요.”

“여기서 가깝네요.”

“네. 남편 회사에서 가까워서 거기로 정했어요.”

줄리아는 대화하다 말고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알렉스가 줄리아의 곁에 와서 그녀의 원피스 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알렉스는 동양인 가족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 동네에 사는 동양인 가족은 딱 한 가구뿐이었다. 중국계 의사 부부와 그들의 자녀 두 명. 부부는 일하느라 바쁘고 아이들은 고등학생이라서 알렉스와 마주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알렉스가 동양인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알렉스는 저보다 몇 살 많은 동양인 남자아이를 빤히 보았다. 동양인 소년은 손에 찻잔을 쥐고, 찻잔에 새겨진 무늬를 관찰하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접시를 구경하다가 알렉스를 발견했고, 웃으면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아이 엄마는 알렉스를 보고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아드님이 잘생겼네요.”

“감사해요.”

“형아 안녕.”

알렉스가 혀 짧은 소리로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소년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다. 소년은 알렉스가 저를 불렀다는 사실도 모른 채, 찻잔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아이 엄마가 아들에게 모국어로 말했다.

[윤아, 애기가 너와 인사하고 싶나 봐.]

남자아이는 찻잔을 놓고 후다닥 도망갔다. 멀찍이서 아이 아빠와 누나가 흔들의자와 티 테이블을 보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아빠와 누나의 곁에 가서 쭈뼛거렸다. 그들을 바라보던 아이 엄마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 큰애는 활달한 성격이라 괜찮을 것 같은데, 작은애가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해요. 수줍음도 많은 편이라 걱정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영어를 금방 배워요. 우리 학교에도 포닥이나 교환 교수로 오시는 분들이 아이를 데려오곤 하는데, 아이들은 보통 반년이면 말문이 트여요.”

“우리 윤이도 그러면 좋겠네요!”

아이 엄마는 웃으면서 접시와 찻잔의 개수를 셌다. 아이 엄마는 그릇 가격을 치르고, 줄리아와 함께 신문지로 접시들을 쌌다. 엄마가 접시를 구매하는 동안, 소년은 엄마에게 되돌아왔다. 아이 엄마는 소년에게 신문지에 싼 접시를 건넸고, 소년은 엄마에게 그릇을 받아 들었다.

줄리아는 소년이 그릇을 조심스럽게 들고 가는 모습을 보고 웃었다. 무슨 남자애가 이렇게 고운지. 남자아이의 외모는 엄마를 닮아 예쁜 편이지만, 그래서 고운 것만은 아니었다. 남자애인데도 행동거지가 얌전해서 곱다는 느낌을 주었다. 곧, 아이 아빠가 와서 딸과 함께 흔들의자 값을 치렀고, 그들은 구매한 물건들을 차에 싣고 돌아갔다.

그들을 배웅하고 나서, 줄리아는 아들과 남편을 발견했다. 남편과 아들은 나란히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고 있었다. 알렉스는 흰 얼굴에 초콜릿 크림을 잔뜩 문대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못 살아. 줄리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줄리아가 물티슈를 꺼내 아이의 얼굴을 닦는데, 알렉스가 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응?”

“예쁜 형아 갔어?”

“응, 갔어.”

“인사 못 했는데.”

알렉스가 시무룩해했다. 그러자 알렉산더 3세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근처에 산다고 하니까, 다음에 만나면 인사해.”

“응!”

알렉스는 얼굴에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묻힌 채,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줄리아는 아이의 얼굴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마저 닦았다. 천사 같은 늦둥이 아들이 멋진 남자로 성장하는 모습을 얼른 보고 싶으면서도,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다. 예쁜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 줄리아는 깨끗이 닦은 아이의 통통한 볼에 키스하며 미소 지었다.

* * *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1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윤은 미국 연구 센터에 주재원으로 발령 난 아빠를 따라 오스틴 근교의 공립 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아빠는 혼자 갈 수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인 엄마가 휴직계를 내고 남매를 데리고 미국으로 같이 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번 기회가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두 살 위인 누나 환은 미국 생활에 금방 적응했다. 똑똑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환은 영어를 금방 익히더니, 한국에서처럼 동네를 휘어잡고 다녔다. 그러나 윤은 오스틴 생활을 힘들어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영어는 한마디도 모르고. 얌전한 윤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소수의 친구와 어울려 지냈다. 주로 점잖은 집안에서 자란, 착하고 다정한 여자아이들이 윤을 좋아했다.

윤의 아빠, 주정호는 자신을 빼닮은 딸인 환을 편애하고, 윤을 차별했다. 그는 여느 남자애들처럼 운동, 로봇, 공룡과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면서도 섬세한 기질을 가진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정호는 환이 백인 아이들까지 몰고 다니며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며 만족스러워했으며, 환이 윤을 갈구도록 은근히 조장했다.

대신 윤의 엄마, 박혜리가 윤을 감쌌다. 그녀는 매우 공평한 사람이지만, 윤이 그녀와 많이 닮은 아이고 둘째라 마음이 쓰였다. 그녀는 아들이 얌전한 아이라는 사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윤이 유치원 시절, 그녀에게 한 살 많은 달님반 형아를 좋아한다고 귓속말로 말했을 때는 깜짝 놀랐고, 슬프면서도 걱정되었다. 그래도 어떡하겠나. 그녀는 아들이 나중에 남자 친구를 집에 데려와도 놀라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녀는 제 남편과 딸이 머리는 비상하지만, 공감 능력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지금도, 나중에도 집안에서 윤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 * *

미국 지사에서 일하기는 하지만, 어차피 한국 회사였다. 미국에서도 한국처럼 주 6일 근무를 하고 야근까지 시켰다. 게다가 정시 근무가 끝나도 한국 본사에 보고하기 위해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해서, 주정호는 24시간 대기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거의 없었고, 일요일이면 쉬거나 밀린 잠을 자기 바빴다. 일주일 내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전부 박혜리의 몫이었다. 주정호가 애들과 시간을 보내는 날은 계절에 한 번 정도, 네 식구가 같이 놀러 가는 날뿐이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환은 오스틴 교외에 있는 어린이 놀이 공원의 놀이 기구들을 따분해했다. 그래서 환은 아빠와 함께 실내 야구장에서 배트를 휘두르거나 아케이드 게임을 했다. 윤은 엄마와 함께 놀이 기구를 탔다. 윤과 엄마가 회전목마를 타고 나오는데, 어떤 아이가 울고 있었다.

“엄마아-”

엄마는 아이를 발견하고 지나치지 못했다. 대여섯 살 정도인 백인 아이가 혼자 엉엉 울고 있었다. 분홍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곱슬곱슬한 금발을 양 갈래로 묶고 있어서 여자애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예쁜 남자아이였다. 그녀는 윤을 데리고 아이의 곁으로 갔다.

“길을 잃어버렸구나.”

아이는 너무 놀라서 울기만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박혜리는 아이를 보고 혀를 찼다. 그녀는 매고 있던 조그마한 가죽 크로스백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녀는 10달러 지폐를 윤에게 건네며 한국어로 말했다.

[윤아, 가서 물이랑 아이스크림 세 개 사와. 윤이 거, 엄마 거, 그리고 애기 거.]

[알았어.]

윤은 10달러를 들고 아이스크림 가판대를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린아이를 회전목마 근처, 나무 그늘에 있는 벤치에 데려가 앉혔다. 아이가 탈수 증세를 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뭐야? 아줌마가 엄마 찾을 때까지 같이 있어 줄게.”

“알렉스예요.”

“그래, 알렉스. 괜찮아. 알렉스네 엄마 아빠도 알렉스를 찾고 있을 거야.”

그녀는 아이를 능숙하게 달랬다.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윤은 아이스크림 가판대에 가서 포도 맛, 오렌지 맛, 블루베리 맛 아이스바와 물 한 병을 사서 엄마의 곁으로 왔다. 그녀는 윤에게 물병을 받았고, 빨대를 꽂아 알렉스가 체하지 않도록 쉬엄쉬엄 물을 마시게 했다. 아이가 물을 마시고 나서, 윤은 비닐봉지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며 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맛 먹을래? 포도 맛, 오렌지 맛, 블루베리 맛 세 가지야.”

윤은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보여 주었다. 아이는 포도 맛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윤은 아이스크림 봉지를 까서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윤은 오렌지 맛을 고르고, 박혜리는 블루베리 맛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세 사람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아이스크림을 반쯤 먹었을 때, 멀리서 키가 훤칠한 40대 백인 남자가 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는데, 아이를 발견한 순간 화색이 돌았다.

“알렉스!”

“아빠!”

아이는 아빠에게 달려가 안겼다. 아이를 안아 올리는 아빠는 거의 울고 있었다. 아이 아빠는 아이를 안고 윤과 박혜리에게 걸어왔다. 그는 윤의 엄마에게 아주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알렉스를 잃어버린 걸 알고 저와 줄리아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아니에요. 저도 애 엄마잖아요. 당연히 할 일을 한 거예요.”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괜찮습니다. 아이가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잘 보살펴 주세요.”

윤의 엄마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겠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는 아이 아빠의 목소리는 엉망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울먹이고 있었다. 인파에 휩쓸렸고, 잠깐 사이에 아이의 손을 놓쳤다. 혹시 유괴라도 당한 게 아닐까 걱정했고, 아이의 손을 놓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다행히 친절한 사람이 아이를 돌보아 주었고, 아이는 품 안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알렉산더 3세는 방금 보았던 동양인 모자(母子)를 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연락처라도 물어봤어야 했는데, 나중에 가족들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서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내가 바보야. 알렉산더 3세는 속으로 자책했다.

“아까 형아가 아이스크림 사 줬어. 포도 맛이야. 아빠도 먹어 봐. 맛있어.”

“그래?”

“응.”

알렉스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아빠에게 포도 맛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알렉산더 3세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알렉스는 아빠에게 물었다.

“맛있지?”

“응.”

아빠는 아이를 안고 웃으며 말했다.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싫증을 냈고, 결국 남은 아이스크림은 아빠가 다 먹었다. 더위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때문에 끈적해진 손을 화장실에서 씻기고, 아이를 안고 걸어가는데 아내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줄리아는 남편과 아이를 발견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울지 마.”

“여보, 알렉스는 괜찮아. 어떤 여자분이 알렉스를 돌봐주셨더라고.”

“나는 큰일 나는 줄 알고…. 다행이야.”

줄리아는 다리가 풀렸고, 자리에 주저앉으며 엉엉 울었다. 그는 우는 아내를 다정하게 일으켜 세우고, 아내와 아이를 한꺼번에 품에 안았다. 세 식구는 서로를 끌어안은 상태로 한참이나 가만히 그대로 서 있었다.

* * *

한바탕 소동을 겪고 나니, 세 식구는 너무 지쳤고 온몸에 힘이 풀렸다. 그래서 그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알렉스는 뒷좌석 카시트 안에서 잠들었고, 줄리아와 알렉산더 3세는 각각 조수석과 운전석에 앉았다. 줄리아는 운전하는 남편에게 물었다.

“근데 여보, 아까 알렉스를 찾아주신 분에게 감사 인사는 했지?”

“당연하지. 근데 연락처를 물어보고 집으로 초대하고 싶었는데, 연락처를 묻는 것을 깜빡했어.”

“저런.”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가버리셨더라고.”

“아쉽다.”

“나도 아쉬워. 젊은 애 엄마였는데, 어찌나 친절하고 다정한지. 아들도 아주 착했어. 그 가족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길 바랄 뿐이지.”

“그러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줄리아는 뒷좌석을 흘낏 보았다. 잠든 알렉스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명화 속 천사처럼 예뻤다. 아이를 어렵게 가지고 낳아서 기르다 보니 알겠다. 아이를 잃는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진정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착하고 건강하고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부모가 아이에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큰 잘못이었다.

* * *

윤은 누나와 아빠가 야구 배팅 게임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누나는 호쾌하게 야구 배트를 휘둘렀고, 야구공은 멀찍이 날아갔다. 어린 소녀가 멋지게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환호했다. 누나는 머리 위로 손을 흔들어 사람들의 환호에 답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고 있었다.

누나는 씩 웃으며 야구 배트를 다시 휘둘렀다. 그 덕분에 두 번째 볼도 멋진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환의 스윙에 사람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윤은 제 누나를 보면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엄마에게 말했다.

[아까 그 애 있잖아, 어디서 본 것 같아.]

[그래? 엄마는 처음 보는 애였는데?]

[분명히 본 적이 있는데,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어.]

[그러게. 인연이 닿는다면 어디선가 다시 만나겠지.]

엄마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엄마는 윤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토닥였다. 너도 가서 쳐보라는 뜻이었다. 윤은 의기양양한 누나에게 야구 배트를 받아들었다. 환은 윤의 등을 무심하게 툭 쳤다. 잘 치라는 뜻이었다. 윤은 저보다 키가 한참 큰 누나를 올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팅 머신이 공을 쏘아내고, 윤은 날아오는 야구공을 향해 배트를 힘껏 휘둘렀다. 윤이 친 공은 대포알처럼 공중으로 날아갔다. 환이 친 공과는 궤적이 달랐지만, 윤이 친 공은 아주 멀리 날아갔다. 파란 여름 하늘로 빠르게 날아가 점이 되어 사라지는 야구공을 올려다보며, 윤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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