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여름 학기 Ⅱ
여름 학기 0주차, 윤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을 때, 담배를 금방 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골초가 되었다. 골초가 된 것도 문제고, 담뱃값이 많이 나가는 것도 문제였다. 그래서 담배를 끊으려고 전자 담배로 바꾸었다.
학기 말이 되니 정신없이 바빠졌다. 나는 학부생들의 시험지와 과제를 채점하고, 기말 과제를 마무리하여 제출하고, 시험을 보느라 바빴다. 여름에는 계절 학기를 듣고, 밍 교수님의 계절 학기 수업 조교로 일하고, 누나와 조카를 보러 한국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바쁜 일상을 사는 동안, 극심했던 실연의 고통은 차츰 희미해져 갔다.
* * *
여름 학기는 세 개로 나뉘어 있었다. 여름 학기 1, 여름 학기 2, 그리고 여름 방학. 봄 학기 종강은 5월 초. 여름 학기 1은 6월 초부터 7월 초까지, 여름 학기 2는 7월 초부터 8월 초까지. 그리고 여름 방학은 8월 말까지. 나는 여름 학기 1에는 밍 교수님과 연구를 하면서 3학점을 채우기로 했고, 여름 학기 2에는 밍 교수님의 학부 수업 조교로 일하기로 했다.
계획을 확정 짓고, 한국행 항공권을 샀다. 8월 초에 한국에 가고 개강 직전에 시그나기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누나 집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도저히 아빠 집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누나에게 부탁했더니, 누나는 흔쾌히 좋다고 말했다.
[좋아. 대신 너도 산이를 돌보는 거야.]
[내가?]
[나는 복직해야 하잖아. 근데 산이를 아줌마한테만 맡기고 출근하기 불안해.]
[으음…….]
[내가 용돈 줄게.]
누나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영상 통화를 하는 동안, 누나의 품에 안겨 있는 산이가 보였다. 그새 쑥쑥이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생겼다. 쑥쑥이의 정식 이름은 박산이었다.
엄마가 항렬을 무시하고 우리의 이름을 외자로 지었던 것처럼, 누나도 쑥쑥이의 이름을 외자로 지었다. 한자는 뫼 산(山). 우뚝 솟은 산처럼 굳세게 살라고 지은 이름이었다. 누나는 산이의 사주를 봤고, 작명 책에서 좌우 대칭 모양의 한자가 아이에게 좋다는 내용을 보고 글자를 골랐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 누나다운 작명이라고 생각했다.
[알았어.]
용돈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한국에 가는 일정이 확정되고, 정말로 금연을 결심했다. 산이를 돌보려면 지금부터 담배를 끊고 준비해야 했다. 3차 흡연은 아기에게 해로우니까.
하지만 금연은 쉽지 않았다. 나는 금단 증상에 시달렸다. 한차례 모래바람이 지나가고 난 후, 창밖에 내리는 우박을 보며 과거를 생각했다. 예전에는 담배를 어떻게 끊었던 거지? 나는 산이를 생각하면서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나를 보며 자괴감을 느꼈고, 내 나약함이 너무 싫었다. 산이를 만날 때까지는 담배를 끊어야 하는데. 산이에게 해로운 일은 하고 싶지 않은데.
* * *
봄 학기가 끝났다. 여름 학기까지는 3주간의 짧은 방학이 있었다. 바쁜 일정이 끝나고 나니, 외로움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알렉스와 헤어진 이후, 누군가와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가끔 수빈이나 밍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기는 하지만,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남자 친구였다.
앱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이폰에 데이팅 앱을 설치하고 새 계정을 만들었다. 외로움을 잊으려고 입력한 조건에 맞춰 앱에서 매칭해 주는 사람들과 온종일 시시덕거렸다.
여러 명의 대화 상대와 시시덕거리고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알렉스에 비할 수는 없었다. 알렉스는 내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내 기분을 쉽게 알아맞혔고, 나는 그가 입을 열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와 이야기하면 정말 재미있었으니까. 알렉스는 내 눈을 한껏 높여 놓았고, 나는 앱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절망했다.
앞으로 다시는 알렉스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알렉스 같은 사람은 없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닫고 나니 무척 우울해졌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 나는 자존심을 세우면 안 되는 거였다.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그를 붙잡았어야 했다. 못된 말을 해서 미안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알렉스에게 애원하고 매달렸어야 했다.
* * *
데이팅 앱으로 시시덕거리던 여러 남자 중, 한 명이 나에게 유난히 적극적이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호세였다.
호세는 멕시코계 히스패닉이고,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는 간호사였다. 알렉스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요새 시시덕거리는 사람 중에서는 그나마 말이 가장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몇 번이나 데이트를 신청했고, 나는 계속 대답을 피하며 고민하다가 그를 만나러 나갔다.
우리는 몰에 있는 영화관 앞에서 만났다. 호세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히스패닉계 야구 선수들을 연상시키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인상은 서글서글했다. 나보다 키가 조금 크고, 응급실 간호사로 일하기 위한 체력을 유지하느라고 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 온몸에 근육이 단단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나 역시 웃으면서 그에게 인사했다. 우리는 흔한 마블 영화표를 사고, 영화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가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나도 모르게 호세와 알렉스를 매 순간 비교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호세는 오른손으로 내 왼손을 감싸 쥐고 있었다. 가끔 내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기도 했고, 내 손가락에 깍지를 끼기도 했다. 그런데도 설레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알렉스와는 눈만 마주쳐도, 손끝만 스쳐도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을 생각하면 희한한 일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 호세는 태국 요리를 사 먹고 헤어졌다. 우버를 타고 집에 가는 동안, 호세와의 첫 데이트를 되짚어 보았다. 내 지난 연애에는 패턴이 있었다. 나는 애인들과 처음에는 친구로 지내다가 연애로 관계를 발전시키는 편이었다. 원래 친했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그들과 데이트를 하면서 불편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호세와의 데이트는 몹시 어색했다. 나는 앱이나 소개팅으로 사람을 만나면, 원래 처음에는 이런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한지 궁금했다. 메신저로만 이야기하던 사람과 갑자기 데이트하려니 어색해서 이러는 거겠지?
* * *
그다음 데이트에는 교외의 놀이 공원에 갔다. 놀이 공원에서 한참 놀고 나서, 그는 나를 차로 아파트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초여름의 길고 긴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침 석양은 구름이 약간 드리운 하늘을 예쁜 분홍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는 순간, 호세가 나에게 키스했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첫키스를 하는 사람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키스를 받아 냈다. 키스가 끝나고, 호세가 나에게 말했다.
“나, 크림 파스타를 꽤 잘 만들거든요. 와인과 같이 먹으면 맛있을 거예요.”
“…….”
“오는 금요일에는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고, 넷플릭스를 봐요.”
영어로 넷플릭스를 보러 오라는 말은 한국어의 라면 먹고 가라는 말과 의미가 똑같았다. 넷플릭스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와인을 같이 마시자는 말의 의미도, 크림이라는 단어가 은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호세는 나와 자고 싶다고 돌려 말한 것이다. 성적인 의미가 은근히 담긴 말을 듣고, 대답을 망설였다. 호세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진도가 너무 빨랐다. 호세는 웃으면서 내 뺨을 쓰다듬었다.
“어때요?”
나를 바라보는 호세의 눈빛이 델 듯이 뜨거웠다. 그는 내가 좋다고 말하기 전까지 나를 집으로 들여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호세의 질문에 쉽게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호세는 내가 좋다고 말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 * *
금요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나는 금요일에 호세와 섹스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와 자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진도가 너무 빨라서 그런 것 같다. 원래 다들 이렇게 연애하는 건가? 이런 연애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 * *
금요일이 되었다. 호세는 자신의 집 주소를 알려 주었고, 나는 그곳까지 우버를 타고 갔다. 그는 시그나기의 서쪽 교외에 있는 중산층 거주 지역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은 아니지만, 외관과 조경이 깔끔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내가 현관문을 두들겼고, 호세는 문을 열어주었다. 집 안에 들어가니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나는 현관에 서서 신발을 벗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발밑을 보았다. 호세는 집 안에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나는 그의 운동화를 보고, 알렉스가 맨발로 집 안을 돌아다니던 모습을 떠올렸다. 알렉스를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는데, 호세가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나서 말했다.
“거의 다 됐으니까, TV 보면서 앉아 있어요.”
호세는 내 손에 TV 리모컨을 쥐여 주고 부엌으로 갔다. 나는 TV를 켰고, 3인용 소파에 앉아 집 안을 둘러보았다. 따뜻한 색감의 인테리어는 아늑하고 정갈했다. 이번에는 요리하는 호세의 등을 바라보았다. 호세는 부엌일에 익숙해 보였고, 나는 그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며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 * *
크림 파스타는 맛있었고, 와인과 잘 어울렸다. 만든 정성을 생각해서 꾸역꾸역 한 그릇을 먹었지만, 파스타를 먹고 나니 속이 부대꼈다. 나와 호세는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며 남은 와인을 마셨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호세는 내 어깨를 끌어안아 자신에게 기대게 하고,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속이 불편해서 그런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어깨를 감쌌던 손이 내 등을 티셔츠 위로 쓰다듬다가 허리를 지나 엉덩이를 콱 쥐었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호세의 뺨에 박힌 주근깨가 보일 정도로 우리의 얼굴이 가까웠다.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호세는 나를 소파 위에 밀어 눕히고, 내 몸에 올라타며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키스하는 동안, 내 검은색 반팔 티셔츠 아래로 두 손이 들어왔다. 키스하는 스타일도, 내 몸을 만지는 방식도 알렉스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가 나를 다루는 방식이 낯설고 어색했다. 안 그래도 체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온몸의 피부에 소름이 돋으면서 거부감까지 들었다.
“피부가 정말 부드러워요. 어쩜 이렇지.”
호세는 취한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엄지손가락 두 개로 내 양쪽 젖꼭지를 꽉 누르고 긁어내리다가 피어싱을 비틀었다. 그가 자꾸 피어싱을 후비는 게 아파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내 민감한 반응이 마음에 든 호세는 내 목덜미에 이를 연신 세웠고, 나는 참다가 비명을 질렀다.
“그만. 아파요.”
“너무 좋아.”
“제발.”
내 애원을 듣고 흥분한 호세가 내 목덜미에 입술 자국을 남겼다. 한여름인데 목덜미에 입술 자국을 달고 다닐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내가 이리저리 몸부림을 치자, 그는 내 반바지 버클을 풀고 드로즈와 반바지를 한꺼번에 벗기려고 했다.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드로즈와 반바지가 단번에 벗겨지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호세는 제 티셔츠를 벗었다. 그는 내 허벅지를 벌리고 자리를 잡더니 내 티셔츠까지 마저 벗기려고 했다. 나는 티셔츠 자락을 붙잡고 울면서 애원했다.
“그만, 제발 그만해요.”
“이제 시작인데요.”
“제발요.”
나는 정말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잠자리에서 괜히 싫다고 튕겨 보는 말로 알아듣고 계속 움직였다. 내가 페니스를 세우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는 내 것을 입으로 빨면서 구멍을 젤에 적신 손가락으로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호세는 간호사라 그런지, 느끼는 곳을 단번에 찾아내고 그곳을 거침없이 자극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들이 알렉스가 해 주던 방식과 너무 달라서 견디기 괴로웠다. 앞뒤를 동시에 자극하는 노골적인 애무가 이어지는데도, 내가 울기만 하고 성기를 계속 세우지 못하자 호세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내가 별로예요?”
“……그만하고 싶어요.”
나는 울면서 말했다. 호세는 내가 우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가 나를 두고 몸을 일으켜 앉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좋아서 우는 줄 알았는데…….”
“…….”
“혹시 동정이에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내저으며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호세는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나 앉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너무 서러워져서 울음을 그치지 못했고, 호세는 나를 달래지도 밀어붙이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앉아 있었다.
* * *
울음을 그치고 나니,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고 속이 울렁거리면서 토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티셔츠만 입은 채, 눈을 감고 소파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내 얼굴을 보고 호세가 걱정하며 말했다.
“얼굴이 창백해요.”
“괜찮아요.”
“오늘은…… 이만 집에 가서 쉬어요. 오늘 하려던 것은 다음에 하죠.”
“네…….”
호세는 다정하게 내 뺨을 쓰다듬었다. 우리에게 다음이 있다니. 다음을 기약하는 말을 들으니 다시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나는 울음을 참으며 간신히 소파 위에서 일어났다. 호세는 옷을 입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나는 옷을 입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렸다.
호세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싶어 했지만, 와인을 마셔 운전을 할 수 없었다. 나는 호세의 집에서 나와 우버를 탔다. 나이가 지긋한 흑인 남성 우버 기사가 내 목덜미에 난 자국들을 흘낏거리며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러지 말라고 대꾸할 기운이 없었다.
집까지 가는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멀미가 났다. 아까 먹었던 파스타와 와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차에 토했다가는 돈을 물어줘야 해서 죽을힘을 다해 참았다.
결국, 나는 아파트 입구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토했다.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내고 누런 위액까지 토하고 있는데, 어느새 우버 기사가 내 등을 두들겨 주고 있었다.
“괜찮아요?”
“네…….”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혹시……. 몹쓸 일을 당한 거면 내가 경찰에 신고해 줄게요.”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네…….”
“걱정되는데…….”
우버 기사는 내가 진정할 때까지 나를 지켜보고 나서야 떠났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 집에 돌아왔고, 침대 위에 바로 누웠다. 몸이 식은땀과 젤에 젖었다가 식었고, 먹은 것을 게워 내느라 엉망인데도 씻을 힘이 없었다. 잠기운이 몰려오고, 이 침대에서 알렉스와 뜨겁게 몸을 섞고 사랑을 말하며 행복해했던 기억들이 떠올랐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 * *
새벽녘에 목이 말라 잠이 깼다. 물을 충분히 마시고 나서 습관처럼 아이폰을 켰다. 우버 앱을 켜고, 나를 돌보아준 상냥한 우버 기사에게 최고 평점을 주고 팁을 듬뿍 건넸다. 운전기사가 정말 좋은 분이라고 리뷰도 자세하게 남겼다.
리뷰를 제출하고 나서 밀린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부분이 광고 메시지였지만, 호세에게서도 메시지가 몇 통 와 있었다. 내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읽고 나니 입맛이 썼다. 어젯밤에 민망한 상황을 겪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그는 좋은 사람이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만,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호세에게 답장을 보냈다. 미안해요.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 말뿐이었다. 내 머릿속이 복잡해서 무엇이 어떻게 미안한지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호세에게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데이팅 앱을 모두 삭제했다. 관계를 제대로 매듭짓지 않고 도망가는 내가 무책임하고 한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 *
그 이후, 데이팅 앱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원래도 앱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한 번 크게 데고 나니 그런 것들로 사람을 사귀고 만나는 것이 너무 무서워졌다. 나는 외로움이 스며들 때마다 알렉스와의 추억을 곱씹으며 나를 달랬다. 이러다가 독거노인이 되어 생을 마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학기 1주차, 알렉스
봄 학기가 끝났다. 학기가 끝난 기념으로 시드니, 조슈아와 함께 라운지 바에서 칵테일과 맥주를 마셨다. 높은 주차장 빌딩의 옥상에 있는 야외 라운지 바는 시그나기에서 가장 세련된 바였다. 오늘 이곳은 종강 때문에 신나서 술을 마시는 학생들로 붐비었다.
나는 밤하늘을 보았다. 별이 드문드문 떠 있는 하늘에 보름달이 빛나고 있었다. 이번 방학, 조슈아는 휴스턴의 대형 로펌에서 일하게 되었고, 시드니는 워싱턴의 연방 대법원에서 로클럭으로 일하게 되었다. 둘은 자신의 길을 잘 찾고 있었고, 셋 중에서는 내가 제일 문제였다. 쓴웃음을 지으며 맥주를 마시는데, 조슈아가 말했다.
“한동안 한 놈만 걸려라, 누구든지 한 놈만 걸리면 완전히 조져버리겠다는 표정을 짓고 다니더니, 학기 말에는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야.”
“누구?”
나는 조슈아에게 물었다. 조슈아는 시드니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드니도 조슈아에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슈아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너, 알렉스.”
“내가 그랬어?”
“어.”
“응.”
조슈아와 시드니는 동시에 대답했다. 조슈아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내가 모의 법정 시간에 네놈이 정신 놓고 있는 거 막아 준 게 여러 번이야. 네가 학기 말이 되면서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지.”
“……미안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조슈아가 나에게 캐물었다. 나는 조슈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시드니가 나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내가 맞혀 볼까? 연애 사업이 안 풀려서 그런 거 아냐?”
“시드, 사춘기도 아니고 연애 사업 때문에 정신이 나가는 게 말이 되냐?”
“아주 진지하게 사귀었으면 가능하지.”
조슈아와 시드니는 늘 그렇듯 저들끼리 투닥거렸다. 나는 그들이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시드니가 모든 것을 눈치챈 이상, 비밀을 숨기는 것에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맞아. 애인과 헤어졌어.”
“거봐. 내 말이 맞지.”
시드니가 내 말을 듣자마자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조슈아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도 알아, 내가 한동안 정신없이 지낸 거.”
“그런 뜻은 아니었어.”
조슈아가 황급히 말했다. 조슈아는 나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병맥주를 한입 마시고, 맥주병을 손에 쥔 채 말했다.
“애인과 동거하다가 헤어지고, 내가 집을 나왔어. 그래서 학기 중에 이사도 했고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았어.”
“세상에.”
“너희에게 일부러 말하지 않은 건 아니야. 나도 머리가 복잡해서 말할 겨를이 없었어.”
“전혀 몰랐어.”
시드니가 조심스럽게 말했고, 나는 숨김 없이 대답했다.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술기운이 오르니 대책 없이 솔직해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맥주병 표면에 맺힌 물기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대답했다.
“학기 초에 펍에서 합석했던 사람 기억해?”
“응. 이름이 윤이었지?”
시드니가 나에게 말했다. 기억력도 좋다. 조슈아가 시드니의 기억력에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힘 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사실 내 애인이야. 아니, 애인이었어.”
시드니는 내 고백을 듣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조슈아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친구의 커밍아웃을 듣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둘 다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고, 나는 힘주어 말했다.
“정말이야.”
내 말을 듣고 나서, 둘은 한참 침묵을 지켰다. 침묵이 흐르고, 조슈아가 먼저 어색하게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나는 편견 없어. 사랑이 사랑이지 별거야?”
“나도, 알렉스. 괜찮아.”
시드니도 황급히 말했다. 그들은 편견이 없지만, 많이 놀랐는지 자꾸 나를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나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커밍아웃은 후련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지켜왔던 비밀을 드러냈는데도, 내 마음은 오늘이 보름이라는 사실을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담담하기만 했다.
* * *
술자리가 파했다. 조슈아는 혼자 우버를 타고 집까지 갔다. 나는 시드니를 집까지 바래다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밤거리를 걸었다. 시드니는 계속 내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나를 걱정하는 게 고맙기도 하고,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겸연쩍기도 했다. 실연이 별거라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괜찮아.”
“네가 한동안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우리끼리 너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냐고 이야기했었거든.”
“궁금했을 텐데 용케 안 물어봤네?”
“많이 걱정했지만…… 네가 먼저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묻지 않았어.”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이제 괜찮다니 다행이야.”
시드니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시드니와 조슈아에게 정말 고마웠다. 친구들이 내 비밀을 알고도 나를 전과 똑같이 대해 주어서 기쁘기도 했다. 이곳은 텍사스인데. 바이블 벨트의 한복판. 전국에서 보수적인 것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 젊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달라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주에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다. 그런데도 내 친구들은 나를 확실히 받아 주었다.
우리는 어느새 시드니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나는 이번 여름 워싱턴 DC에서 일하게 된 시드니에게 응원의 말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헤어지기 전에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DC에 가서도 잘할 거야.”
“그러게, 그래도 걱정이다. 전국에서 날고 기는 애들이 올 텐데.”
“너도 만만치 않잖아.”
내 말을 듣고, 시드니는 술기운에 붉어진 볼을 손가락 끝으로 긁으며 대답했다.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정말로.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
“그래. 알았어. 알렉스 너도 잘할 거야.”
시드니는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응원을 받고 웃었다. 이제 나에게는 마음이 통하는 소중한 친구가 두 명이나 있었다.
* * *
단기 임대 아파트에서 짐을 전부 빼서 차에 실었다. 짐을 실었더니 차가 꽉 찼다. 짐을 싣고 오스틴에 갔다가, 개강을 앞두고 시그나기에 돌아와서 새 아파트를 구해야 하겠지.
돈이 궁해도 엑설런트 플레이스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1인용 스튜디오를 구하고 혼자 살 것이다. 당분간 누군가를 만나지도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첫 여자 친구를 사귄 이래, 지금까지 애인이 없었던 기간은 두 달뿐이었다. 그러니 잠시 연애를 쉴 때도 되었다.
* * *
종일 운전해서 오스틴 본가에 도착했다. 내 방에 짐을 풀고 방을 정리하고, 고양이 밥을 주고, 거실에 앉아 간식을 먹고 있는데, 엄마가 일찍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거실에 앉아 있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말했다.
“알렉스, 백화점에 가자.”
“네?”
“너 다음 주부터 출근하잖아. 슈트 사야지.”
“내일 가면 안 돼요?”
엄마는 나를 막무가내로 렉서스 조수석에 태웠고, 나는 백화점에 끌려갔다. 엄마는 백화점에서 휴고 보스 슈트를 일곱 벌이나 사 주었고, 슈트에 어울리는 셔츠와 구두, 넥타이와 벨트, 커프스와 넥타이핀을 몇 세트나 사 주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인형 놀이를 하면서 즐거워했고, 페라가모 매장 매니저에게 아들이 로스쿨 학생이고 이번 여름 동안 오스틴에서 로펌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자랑하기까지 했다. 나는 엄마가 즐거워하는 게 좋아서, 엄마가 나를 한껏 자랑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수선을 맡긴 슈트 몇 벌은 3일 뒤에 찾기로 했다. 그런데도 들어야 할 쇼핑백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나는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들고 엄마의 뒤를 따라다녔다. 이번에는 어디로 가려나. 엄마는 나를 백화점에 있는 단골 미용실로 데려갔고, 친한 수석 디자이너를 지명하며 말했다.
“로넌. 로펌에 인턴으로 처음 출근하는 애니까 깔끔하고, 세련되게 잘라 주세요.”
“알겠습니다, 줄리아.”
수석 디자이너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디자이너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수석 디자이너는 내 머리를 한 시간 동안 정성스럽게 다듬어 주었다. 엄마는 완성된 머리를 보고 활짝 웃었고, 그에게 팁을 22%나 건넸다.
나와 엄마는 미용실에서 나왔고, 미용실 근처에 있는 스테이크 하우스로 들어갔다.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레몬을 띄운 물을 마셨다. 엄마는 나를 보며 뿌듯해하면서 말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출근을 하지.”
“고마워요.”
나는 쇼핑을 하고 나니 피곤해졌지만, 엄마는 여전히 활기차 보였다. 역시 여자들은 쇼핑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아닌데. 배고프고 기운이 없으니 얼른 식사해서 에너지를 보충해야겠다. 나는 얼음물을 마시면서 얼른 스테이크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려고 하는데,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너, 근무 언제 끝난다고 했지?”
“8월 13일이요.”
“개강은 언제야? 거기도 우리 학교와 똑같나?”
“8월 26일이니까 그럴걸요.”
“그렇네. 2주 정도 시간이 있구나. 근무 마치고 뭐 할 거야?”
“시그나기에 가야죠. 이사도 해야 하고, 개강할 때까지 준비할 게 많아요.”
“아……. 그러면 여행은 못 가겠구나.”
엄마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엄마의 반응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엄마가 들떠 있었는데, 평소보다 너무 들떠 있어서 불안해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갑자기 여행이라니?
“여행이요?”
“우리는 6월에 하와이에 가기로 했거든. 6월 5일이 우리 결혼기념일이잖니. 근데 생각해 보니까, 너는 이번 여름에 일하느라 아무 데도 못 가잖아. 그래서 우리는 네 근무가 끝나면 여행을 보내줄까 했거든. 그러면 겨울 방학에는 여행 갈 수 있어?”
“……생각해 볼게요.”
“그래. 가고 싶은 데 있으면 생각해 둬.”
엄마는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의 들뜬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엄마를 유심히 관찰했지만 별다른 점은 없었다. 부디 별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 * *
첫 출근을 했다. 내 자리는 사무실 맨 끝 자리였다. 내가 출근하자마자 회사 전산팀 직원이 와서 컴퓨터를 세팅해 주었다. 나는 오전 내내 메일 계정을 만들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설치했다.
새 컴퓨터는 여러모로 불편했다. 나는 여태까지 맥과 IOS만 썼는데, 회사 컴퓨터는 델 제품이고 윈도우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우스로 아이콘을 이것저것 눌러보며 새로운 인터페이스에 익숙해지려고 애썼다.
슈트를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자리에 앉아 일하려니까 너무 불편했다. 이곳 사람들은 대단했다. 슈트를 차려입고 하루에 열네 시간씩 일하다니. 심지어 여성 변호사들은 치마 슈트를 입고 하이힐까지 신고 있는데.
점심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나는 팀원들과 함께 회사 근처에 있는 샌드위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어소시에이트 변호사인 필립이 나에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드디어 첫 업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알렉스가 문서 리뷰를 해 줬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문서 리뷰가 뭔지 알아요?”
“네.”
어릴 때부터 아빠에게 들은 게 있다 보니 안다.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모든 문서를 읽고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한 것을 문서 리뷰라고 부른다. 토마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요. 엑셀에 정리할 때, 우리에게 유리한 사실과 불리한 사실을 서로 다른 시트에 분리해서 정리해 줬으면 좋겠어요.”
“언제까지 해드리면 되나요?”
“무조건 최대한 빨리요.”
나는 서버에 있는 폴더를 열었다. 폴더를 열자마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폴더 안에 들어 있는 폴더가 수십 개였고, 폴더를 열 때마다 pdf 파일이 쏟아져 나왔다. 내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모니터 속 폴더들을 노려보고 있는데, 필립이 말했다.
“다 하면 스카이프 메신저로 알려 줘요.”
필립은 말을 마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엑셀을 켜고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았다. 처음 일을 시작하면 허드렛일부터 하는 게 당연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단순한 일을 시킬 줄은 몰랐다. 한숨이 나오려고 했지만, 꾹 참고 마우스를 잡았다.
* * *
1학년 여름 인턴은 대부분 무보수라서 직장 체험에 가깝다고들 한다. 하지만 내 업무는 직장 체험치고는 빡빡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시키는 일은 대부분 문서 리뷰였다. 내가 맡은 첫 번째 일은 의료 기기 회사의 문서 리뷰였고, 그다음에 맡은 일은 리튬 이온 배터리 제조사의 문서 리뷰였다. 나는 문서를 읽고 묵묵히 사실관계를 정리해 나갔다.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왜 로펌에서 운동선수 출신들을 선호하는지 알게 되었다. 운동선수 출신들은 체력이 강하고, 코치 밑에서 훈련하던 버릇이 있어서 윗사람이 시키는 일을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한다. 한마디로 운동선수 출신들은 로펌의 엄청난 업무 강도를 버티기에 제격이었다.
로펌 변호사들은 하루에 열네 시간씩 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들은 한창 바쁠 때는 아침 여덟 시에 출근해서 자정에 퇴근했다. 일주일에 80시간 일하는 사람들은 흔했고, 일주일에 100시간 가깝게 일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었다. 나는 인턴이라 그렇게까지 열심히 일할 필요는 없었지만, 변호사들이 급하게 문서 리뷰를 요청하면 야근을 해야 했다.
미식축구 선수 출신인 나에게도 대형 로펌의 업무 강도는 만만치 않았다. 나는 모든 과정을 거치고 로펌의 지분 파트너가 된 아빠가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아빠가 거친 과정을 직접 겪어보고 나니, 아빠가 새삼 다시 보였다. 아빠는 이렇게 고된 과정을 어떻게 견뎠을까?
* * *
팀원들과 점심을 먹고 오는 길이었다. 나는 아빠와 빌딩 로비에서 마주쳤다. 아빠와 회사에서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서로를 알아본 우리는 눈인사만 했다. 평소와 달리, 아빠와 눈인사만 하고 헤어지려니 무척 어색했다.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사무실에 돌아와 컴퓨터를 켰는데, 아빠에게 스카이프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존에게 들었다. 우리 아들이 일을 잘한다고 하던데?
존은 우리 팀 파트너의 이름이었다. 내가 콜백 면접을 볼 때, 그는 나에게 미식축구에 대한 질문만 집중적으로 한 사람이었다. 나는 키보드를 잡고, 아빠에게 회신했다.
-그래요?
-응. 리뷰를 빠르고 정확하게 한다고 하더라. 존이 빈말을 할 사람은 아니야.
-다행이네요.
-너도 운동을 오래 해서 알겠지만, 이 일도 똑같아. 남들 눈에는 화려해 보여도 사실은 전혀 화려하지 않아. 죽도록 열심히 일해야 성과를 낼 수 있지.
-알고 있어요.
-문서 리뷰가 지겹겠지만, 기본기를 다진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 기본기를 다지고 일을 하나씩 배워 나가다 보면 승진도 하고 큰일도 맡게 되는 거야.
-네.
-힘내, 우리 아들.
아빠는 메시지와 함께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모양의 이모지를 보냈다. 아빠의 메시지를 읽고 마음이 벅찼다. 나는 답장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아빠에게 하트 모양 이모지를 한꺼번에 여러 개 보냈다.
-우리 아들이 애교가 늘었네. 고맙다.
아빠가 답을 보냈다. 아빠는 내가 한 것처럼 나에게 하트 모양 이모지를 여러 개 보냈다. 나는 아빠의 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하트 모양 이모지를 한꺼번에 여러 개 보내는 것은 윤의 버릇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의 버릇이 나에게 옮아 있었다.
* * *
바쁘게 지내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아빠의 후광을 입은 것은 인정하지만, 아빠의 후광만으로 이 자리를 얻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일하다 보니, 같은 팀의 주니어 변호사들과 금방 친해졌다. 주니어 변호사인 필립, 블레이크, 조나단, 로렌은 모두 20대이고 미혼이었다. 내가 출근한 지 3주가 되었을 때, 우리 다섯은 회식을 하게 되었다.
로펌이 위치한 다운타운의 유명한 맛집인 스테이크 하우스는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예약해둔 테이블에 둘러앉아 메뉴판을 하나씩 잡고 읽었다.
“여기는 저녁만 영업해요.”
“저녁 장사만 해도 매출이 나온다 이거죠.”
“맛집이니까요.”
“오늘 존이 법인 카드를 줬으니까, 신나게 먹어 봅시다.”
네 명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메뉴판을 읽으면서, 양이 많고 가격이 무난한 메뉴를 찾았다. 조건에 맞는 메뉴 중에서는 뉴욕 스트립 스테이크가 최선이었다. 나는 메뉴를 결정하자마자 메뉴판을 덮었다. 로렌이 나에게 물었다.
“알렉스는 벌써 골랐어요?”
“네.”
“결정이 빠르네요.”
“먹고 싶은 게 확실해서요.”
“뭐 먹을 건데요?”
“뉴욕 스트립이요.”
나는 짧게 대답하고, 레몬을 띄운 얼음물을 마셨다. 레몬을 띄웠는데도 수돗물의 염소 맛이 가시지 않아서 불쾌했다.
* * *
스테이크를 먹으며 맥주를 여러 잔 마셨다. 고기로 배를 채우고 술을 마셨는데도 평소보다 취기가 올랐다. 집에 가려고 스테이크 하우스를 나섰을 때, 로렌도 집에 가려고 가게를 나왔다. 나는 그녀의 하이힐을 신은 발을 보았다. 맥주를 마시고 취한 로렌의 걸음걸이가 불안했지만, 나에게 질문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발음은 아주 또렷했다.
“집에 어떻게 가실 거예요? 저는 전차 타고 가요.”
“저는 우버 타고 갈 거예요. 우리 동네는 대중교통이 없거든요.”
“어디 사시는데요?”
“웨스트레이크 힐즈요.”
“그렇구나.”
로렌은 부드럽게 웃었다. 이상하게 그 웃음에서 윤이 보였다. 생각해 보니, 로렌은 한국계 이민 1.5세였다. 서울이 고향이고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이민 와서 알링턴14)에 정착했다고 하던가.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총기가 흐르는 새까만 눈동자가 윤과 많이 닮았다. 윤을 생각한 순간, 무척 슬퍼졌다. 지금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을까. 나와 함께 살던 그 집에 살면서 잠시라도 나를 생각하기는 할까. 너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너를 자주 생각하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끝났고, 우리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왜 그래요?”
로렌이 나에게 물었다. 그녀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나는 영문을 몰라 로렌에게 되물었다.
“제가 실수했나요?”
“알렉스가 갑자기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서요.”
“……그랬구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아니에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감정이 뒤숭숭해졌을 뿐이었다. 여름밤. 서늘하게 식은 사막의 공기 속으로 가느다란 한숨이 흩어졌다. 울고 싶은 기분이 도무지 가시지 않았다.
* * *
우버를 타지 않고 콜로라도강을 따라 집까지 걸어갔다. 밤이 되고 기온이 내려가며 공기가 차가워졌지만, 걷다 보니 더워져서 슈트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 걸었다. 헤어진 게 석 달 전인데, 나는 아직도 실연의 순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윤을 잊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울고 싶어졌다.
한 시간 넘게 걸어 집에 도착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나를 보고 웃으면서 인사했다.
“알렉스 왔구나.”
“팀원들과 같이 저녁 먹느라 늦었어요.”
“그래. 씻고 자라. 아빠는 먼저 잠들었어. 엄마도 이제 자야지.”
“알았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엄마에게 인사하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드레스룸에 옷을 걸고, 내 방에 딸린 욕실에서 씻고 나왔다. 씻고 나니 목이 말랐다. 부엌에 내려가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엄마가 식탁 앞에 혼자 앉아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나는 정수기에서 물을 뽑아 마시며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무슨 일 있어 보이는데.”
나는 다정하게 말하며, 엄마의 옆자리에 앉았다. 엄마는 내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우리 아들이 다 컸네.”
“다 큰 지는 오래됐죠.”
“남자가 다 됐어. 엄마 마음을 헤아릴 줄도 알게 되고.”
엄마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웃었다. 나는 엄마가 내 머리를 만지기 쉽도록 머리를 숙였다. 엄마가 술기운에 나른해진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요새는 만나는 사람 없어?”
“갑자기 왜요?”
“궁금하잖아.”
“……없어요.”
“회사에 너 좋다는 사람은 없고?”
“없다니까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아직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내가 아는 한은 없었다. 엄마는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안았다. 내 어깨를 안은 엄마의 손가락에 힘이 꽉 들어갔다.
“요새는 앱으로도 많이 만난다며.”
“당분간은 연애 안 할 거예요.”
“왜?”
“그냥. 안 하고 싶어요.”
“엄마는 너 좋다는 사람이면 돼.”
“…….”
“그렇지만…… 기왕이면 여자였으면 좋겠어.”
“……엄마.”
“나는 내 아들에게 흠집이 나는 게 싫어.”
“…….”
“이기적인 바람인 건 알지만 내 마음은 그래.”
“…….”
엄마는 나를 안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엄마의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엄마에게 엄마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가 나에게 당신의 뜻을 강요할 수는 없다. 나를 낳은 것은 엄마이지만, 내 마음은 엄마의 것이 아니니까. 나는 엄마가 예상하지 못했던 길에 들어선 지 오래였고, 앞으로 내 마음이 어디로 흘러갈지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엄마가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애원하며 우는데도 윤을 떠올리고 있으니까. 저를 버리고 부정해도 좋다고 말했던 윤이 생각났으니까. 그래서 나는 엄마를 안고, 엄마의 등을 토닥이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여름 학기 2주차, 윤
6월이 되자, 기온은 40도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해가 기운 저녁 일곱 시인데도 햇살이 뜨거웠다. 뙤약볕 아래 걸어 다니다가 더위를 먹은 이후, 낮에 돌아다닐 때는 반드시 검은 우산을 쓰고 다녔다. 햇살이 내리쬐는 날씨에 우산을 쓰고 다니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살기 위해 우산을 썼다.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우산을 쓰고 집까지 걸어갔다. 아파트 현관에 도착해 우산을 접었다. 더운데 땀을 많이 흘려서 목이 말라 부리나케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 앞에 섰다. 오늘도 복도에서는 마리화나 냄새가 자욱했다. 옆집 사람들이 또 마리화나를 피웠나 보다. 나는 마리화나 냄새를 맡고 인상을 쓰면서, 현관문에 꽂혀 있는 광고지를 뽑아 들었다. 아파트 계약을 갱신하라는 광고였다.
광고지를 손에 든 채, 생각에 잠겼다. 어느새 내가 미국에 온 지 1년이 다 되었다. 그러니 아파트 계약도 끝날 때가 다 되었다. 나는 계약이 끝나면 수빈이 사는 아파트 단지의 1인용 스튜디오로 이사할 생각이었다. 나와 알렉스의 유일한 접점이 이 아파트인데, 이제 나까지 이 집을 떠나고 나면, 우리의 접점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새집으로 이사하면 다시 원점에 서는 것이다. 나는 다가올 변화를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는 헤어졌고,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은 없다. 알렉스는 로스쿨을 졸업하고 나보다 먼저 시그나기를 떠날 것이고, 나 역시 박사 학위를 받고 이곳을 떠날 것이다. 마음이 아프지만, 한때 그를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여겨지는 날이 오겠지.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 * *
자다가 깼다. 옆집에서 싸우는 소리 때문이었다. 잠결에 현관문을 조금 열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옆집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물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저 인간들은 대체 언제까지 싸울 생각인지. 나는 도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싸우는 소리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옆집의 싸우는 소리는 멎지 않았다.
이웃 중 누군가가 옆집 문에 대고 스페인어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스페인어는 한마디도 모르지만,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잠 좀 자자, 언제까지 싸울 거냐, 경찰에 신고할 거다, 대충 그런 말이겠지.
옆집 여자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싸우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잠이 깬 지 한 시간 만의 일이었다. 나는 짜증을 내면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내일 관리 사무소에 가서 말할 거다. 어떻게든 해달라고.
* *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관리 사무소에 갔다. 한 달 전에 새로 온 직원은 젊은 백인 남자였다. 그는 제 업무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들이닥친 나를 보고 성가셔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직원의 책상 앞 의자에 앉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2031호 때문에 왔어요.”
“네.”
“그 집 사람들이 전에도 가끔 싸웠는데, 요새 들어 싸우는 게 너무 심해졌어요. 어젯밤에도 그 사람들 때문에 잠을 설쳤어요. 가정 폭력도 일어나고 있고요.”
“네에.”
직원은 나를 보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나는 화를 참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뭔가 조처를 해 주실 수 없나요?”
“그게 싫으시면 경찰에 신고하세요. 근데 저라면 신고하지 않겠어요.”
“예?”
“그 사람들 이야기는 유명해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마약 딜러들인데, 섣불리 경찰에 신고했다가는 선생님이 총 맞아 죽을 수도 있어요. 아시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오늘만 산다는 거.”
“그러면 저대로 둬야 해요?”
“그 사람들 때문에 불편한 게 선생님뿐이겠어요? 다들 신고를 안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계약 끝나고 이사하기를 바라야죠.”
“그 사람들의 계약 기간은 얼마나 남았는데요?”
“앞으로 반년은 남았을 거예요.”
“…….”
직원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한 달 뒤면 계약이 끝나고, 계약이 끝나면 다른 아파트로 이사할 거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야지. 나는 생각을 고쳐먹으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원은 나에게 인사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매니저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매니저에게 겉치레 인사를 하고, 사무실에서 나와서 아파트까지 걸었다.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 앞에 서니, 옆집에서 새어 나온 마리화나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 * *
밍 교수님이 여름 휴가를 가셨기 때문에 나에게도 휴가가 주어졌다. 그래서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았다. 한국 거장 감독의 영화였는데 내용이 너무 어려웠다. 영화가 대단히 시적이고 모호했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젊은 남녀와 젊고 부유하고 신비로운 남자. <버닝(Burning)>이라는 제목대로 비닐하우스가 불타오르고 사람들이 실종되었다.
매일 영어만 쓰는 것이 지겨워서 한국 영화를 봤는데, 이렇게 어려운 영화인 줄 알았다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맥주를 마셨고, 전자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기를 반복했다. 집안에 체리 향이 나는 뿌연 담배 연기가 가득 찼다. 거기에 술기운까지 오르자, 온 세상이 몽환적으로 보였다. 혼자 사니 좋은 점도 있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워도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나는 담배를 피우다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헤헤 웃었다.
* * *
영화를 보다가 소파에 누워 잠들었다. 분명히 에어컨을 켜고 잤는데, 더워서 잠에서 깼다. 게다가 화재경보기가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일어나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 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몸이 무거워서 소파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가슴도 답답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내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당장 여기서 도망가야 한다고, 이건 진짜 위험한 상황이라고.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손가락을 아주 조금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다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타일 바닥에 온몸이 부딪히니 너무 아팠다. 고통 때문에 잠에서 완전히 깼다. 잠이 깨고 나니 집에서 온통 탄내가 나고 연기가 자욱한 게 보였다. 현관을 향해 기어가려고 했지만, 몸이 무거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현관을 바라본 순간, 모든 것이 글렀음을 깨달았다. 현관문이 활활 타고 있었다. 현관문과 바닥 사이. 그 틈으로 시커먼 연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점점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흐려지는 의식을 다잡다가 이게 누구 짓인지 깨달았다. 옆집 개새끼들. 약쟁이들이 결국 사고를 쳤구나.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머리가 멍하고 무거워졌다.
결국 이렇게 죽는구나. 외국에서 서른도 되기 전에 객사하다니 존나 개죽음이네. 여태까지 이룬 것이 없으니, 나의 죽음은 요절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알렉스가 오스틴에 간 게 다행이다. 알렉스까지 개죽음을 당할 필요는 없지. 알렉스를 생각한 순간, 웃음이 나왔다. 알렉스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내가 없어도 잘 지내고 있겠지. 지금쯤이면 예쁜 여자 친구를 새로 사귀었을지도 몰라. 그러다가 생각이 점점 끊어지고, 나는 덮쳐오는 열기에 정신을 잃었다.
여름 학기 2주차, 알렉스
엄마와 아빠는 하와이로 여름 휴가를 떠났다. 그래서 혼자 아침을 먹고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고 회사로 출근했다.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자꾸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지역 번호를 보니, 시그나기 지역 번호였다. 나는 그 번호를 스팸으로 등록하고 맡은 일에 집중했다.
한창 일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내 책상 위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받았다.
“알렉산더 테신입니다.”
“안녕하세요, 시그나기 경찰서의 디아즈 경사입니다. 알렉산더 테신 4세 맞으십니까?”
경찰서라니. 나는 내 행적을 머릿속에서 되짚어보았다. 시그나기를 떠난 것이 한 달 전이었다. 오스틴에 오기 전에 과속으로 딱지라도 뗐나.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교통 법규를 위반한 적이 없는데.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서 난감해하고 있는데, 디아즈 경사가 울림이 깊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현재 엑설런트 플레이스에 거주하고 계시지요?”
“주소지는 그렇게 되어 있지만, 저는 인턴십 때문에 오스틴에 한 달째 나와 있습니다. 무슨 일로 연락을 주신 거죠?”
“그저께 새벽에 테신 씨가 거주하시던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참고인 조사를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전화기 코드를 손가락에 감아 배배 꼬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오스틴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아서 시그나기를 오갈 시간이 없었다.
“제가 바빠서 가기 곤란한데…….”
나는 말끝을 흐렸다. 내 대답을 듣고, 디아즈 경사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목소리를 고르더니 말했다.
“저도 오스틴에 계시는 분에게 출석해달라고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상황이 심각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디아즈 경사의 말을 듣고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상황이 심각하다니. 그제야 윤이 떠올랐다. 설마, 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수화기를 꽉 쥐었다.
“지금 같은 동에 살던 주민들이 전부 사망했거나 의식 불명 상태라, 증언해 주실 분이 테신 씨뿐이에요.”
디아즈 경사의 말을 듣고 아무런 대답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수화기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두 손으로 수화기를 고쳐 쥐었지만, 손의 떨림은 가시지 않았다. 디아즈 경사에게 묻고 싶은 것은 많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테신 씨?”
“경사님.”
“네.”
“제 룸메이트…… 는 괜찮나요?”
“그분은 의식 불명 상태입니다.”
윤이 의식 불명이라는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럴 리가 없다. 윤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데, 고작 화재 따위에 스러질 리가 없는데. 그러나 디아즈 경사의 말은 내 믿음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위독한 상태예요.”
* * *
존에게 내가 아파트 화재 사고의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반차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큰 화재이고, 목격자들이 전부 사망하거나 의식 불명 상태라서 증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존은 보기보다 깐깐한 사람이었고, 내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디아즈 경사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상사에게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존은 디아즈 경사에게 자초지종을 듣자마자 바로 반차를 내주었다.
회사에서 곧장 공항으로 갔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오스틴에서 시그나기로 가는 직항은 저녁 다섯 시 40분에나 있었기 때문에, 댈러스를 거쳐 시그나기로 가는 가장 빠른 항공권을 샀다. 40분 뒤에 출발하는 항공권이었다.
공항까지 가는 동안 윤을 생각했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길래 의식 불명인지, 그의 누나는 이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인지. 상황이 급박해서, 디아즈 경사는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고, 나는 윤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출발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파트에 불을 질러 열한 명을 죽이고, 다섯 명을 의식 불명에 빠뜨린 범인은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 새끼는 불을 지르자마자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텍사스에 사형제가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새끼는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새끼의 죄가 너무 커서, 그 새끼의 목숨으로도 죗값을 모두 갚을 수는 없을 것이다.
* * *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우버를 타고 경찰서로 갔다. 디아즈 경사는 40대 중반의 멕시코계 히스패닉 아저씨였다. 그는 나를 앉혀놓고, 옆집 부부가 마약에 취한 모습이나 그들이 부부싸움을 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아는 것을 모두 말했다. 그들의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마리화나 냄새가 났고, 크게 싸우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고. 디아즈 경사는 1주일에 몇 번이나 마리화나 냄새가 났는지, 싸우는 소리를 들었던 게 여태까지 몇 번이나 되는지 물었고, 나는 최대한 정확히 대답했다. 내 진술이 끝나고, 디아즈 경사는 단정하게 다듬은 새까만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 집 아내 증언도 있으니까요.”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불행히도 아주 멀쩡합니다.”
나는 디아즈 경사의 설명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죄 없는 사람들은 죽고 다쳤는데, 죄인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아직 늦은 오후였다. 생각보다 조사가 금방 끝났고, 병원 면회 시간은 남아 있었다. 나는 윤을 면회하고 오스틴에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다가 경사에게 말했다.
“경사님.”
“네.”
“제 룸메이트가 어디 입원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 * *
윤은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얼굴이나 몸은 멀쩡했지만, 목을 절개해서 인공호흡기를 꽂고 있는 모습이 처참했다. 나는 담당 간호사 선생님을 붙잡고 물었다.
“왜 목에 인공호흡기를 낀 거예요?”
“뜨거운 연기를 많이 마시고 기도에 화상을 입어서 그래요. 화상을 입으면 기도가 부어올라서 입으로 삽관이 안 되거든요.”
기도에 화상이라니. 나는 끔찍한 말을 듣고 얼굴을 찌푸렸다. 간호사 선생님은 윤의 손목에 달린 정맥 주사 라인을 살피고, 수액이 내려오는 속도를 조절했다. 그녀는 윤의 이마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학생이 이제라도 면회를 와서 다행이네요.”
“네?”
“다른 환자들은 입원하자마자 가족이나 친구들이 달려왔는데, 이 학생에게는 아무도 오지 않았거든요.”
“……그랬나요?”
“네. 30분 드릴 테니까 그 안에 나오세요. 안 나오면 찾으러 올 거예요.”
간호사 선생님은 엄격한 말투로 말하고 나서 윤의 곁을 떠났다. 의식이 없는 윤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괴로웠다. 우리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나는 윤의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윤을 두고 갈 수가 없었고, 그의 머리맡에 의자를 놓고 침대에 바싹 붙어 앉게 되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런 일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시 만난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대로 윤이 숨을 거둔다면, 나는 두 번 다시 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건 싫었다. 나를 욕하고 밀어내는 말이라도 좋으니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죽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윤보다, 살아서 나를 욕하는 윤을 보고 싶었다.
매트리스 위에 힘없이 놓여 있는 윤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예전보다 마른 손목에 굵은 카테터가 꽂혀 있었다. 윤의 손이 너무 차가워서 무서웠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고 윤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야.”
“…….”
“나야. 알렉스.”
“…….”
“나는 그동안 잘 지냈어. 근데 너는 잘 못 지낸 것 같네.”
“…….”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냥……. 네가 일어났으면 좋겠어.”
“…….”
“일어나서 나를 욕하고 때리고 밀어내도 좋으니까, 네가 일어났으면 좋겠어…….”
윤의 오른손을 잡아 그의 손등에 입 맞추는 순간, 나는 울고 말았다. 내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져 윤이 덮고 있는 담요에 얼룩을 만들었다. 나는 그의 오른손을 내 뺨에 문질렀다. 윤의 손이 내 눈물로 젖어 들었다. 눈물에 손이 온통 젖었는데도, 윤은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 슬퍼서, 윤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 * *
“면회 시간 끝났어요.”
등 뒤에서 간호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간호사 선생님은 수액의 양을 살피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면회 시간 끝났다니까요.”
“네…….”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나는 윤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몇 번 토닥였다.
“나도 시간을 더 주고 싶은데 어쩔 수가 없어요.”
나는 윤의 손등에 키스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내 어깨에 얹은 손에 지긋이 힘을 주었다. 선생님은 내가 쥐고 있는 윤의 손을 잡아서 침대 위에 곱게 내려놓았다. 간호사 선생님은 눈물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고, 갑 티슈를 두 장 뽑아 건넸다. 선생님이 윤의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저는 늘 제 환자들을 위해 기도해요. 이 학생을 위해서도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어요.”
“…….”
“학생도 이 학생을 위해서 기도할 거라는 것을 알아요.”
“…….”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랍시다.”
선생님의 말씀이 모두 맞았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내가 지금 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 * *
짐을 챙기며, 윤의 침대 곁을 서성였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보니 알겠다. 나는 윤이 아니면 안 되었다. 할아버지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나는 윤을 내 곁에 두어야겠다. 그를 더는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윤이 깨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당연히 윤을 만나러 올 것이다. 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제일 먼저, 내가 많이 걱정했다고 말하고,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도 말할 것이다. 너와 일상을 함께하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너에게 반지를 주고, 내 생이 다할 때까지 네 곁에 있겠다고 말할 것이다. 윤이 내 말을 거절할까 봐 두렵지만, 나는 인생을 건 도박을 해볼 생각이었다.
병실에 누워 죽음과 싸우고 있는 윤을 보며, 나는 윤의 고독을 보았다. 고국을 등지고 새로운 땅에 와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당찬 모습 뒤에 숨어 있던 외로움을 보았다. 그동안 너는 얼마나 고독했을까. 나는 너를 홀로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외롭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네 곁에는 내가 있을 것이다. 내가 너와 언제나 함께할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 * *
담당 간호사 선생님에게 내 연락처를 남기면서 선생님에게 혹시 윤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해달라고 부탁했다. 간호사 선생님은 그러겠다고 말하며, 나에게 윤과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애인이에요.”
* * *
시그나기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오스틴 버그스트롬 공항에 착륙했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밤 열 시였다. 우버 승강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스마트폰 뱅킹으로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약혼반지는 청혼하는 사람이 월급의 세 배 정도 되는 가격을 주고 맞춘다고 들었는데, 내가 가진 돈으로는 가장 싼 약혼반지도 살 수 없었다.
나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엄마와 아빠는 집에 없으니 할머니를 만나야 했다. 할머니를 만나면 돈을 빌려달라고 하고 나중에 취직하면 갚는다고 해야지. 어디서 그런 무모한 용기가 솟아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버에 올라타자마자 할아버지 댁에 전화했다. 할아버지가 전화를 받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발렌티나 아줌마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줌마, 저예요.”
-알렉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할머니는 주무시나요?”
-아뇨. 여사님은 서재에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고 계세요.
“저는 지금 할머니 댁으로 가는 길이에요.”
-그래요? 혹시 의원님도 뵐 거예요? 의원님은 워싱턴 DC에 가 계시는데.
“아뇨. 오늘은 할머니만 뵈러 온 거예요. 10분 안에 도착해요.”
-알았어요. 알렉스가 온다고 말씀드릴게요.
내가 전화를 끊자, 우버 기사가 깜짝 놀라면서 나에게 물었다.
“이 시간에 할머니를 뵈러 가는 거예요?”
“네. 늦은 시간에 실례인 건 알지만, 급한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까 서둘러 주세요.”
“많이 급한 일이에요?”
“네. 인생이 걸린 일이에요.”
“그러면 빨리 가야죠. 꽉 잡아요.”
내 말을 듣고, 우버 기사는 차를 빠르게 몰아 밤거리를 달려 나갔다.
* * *
우버가 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발렌티나 아줌마가 저택 대문 앞으로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우버 조수석에서 내리자마자 아줌마에게 뛰어갔다. 아줌마는 나를 보고 황급히 물었다.
“밤중에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나는 발렌티나 아줌마를 앞질러 빠르게 걸어갔다. 할머니가 드라마를 보고 계신다면 계실 곳은 뻔했다. 1층의 서재였다.
현관문을 열고 서재로 갔다. 할머니는 소파에 앉아 TV로 <더 크라운>을 보고 있었다. 나는 TV 화면을 힐끗 보았다. 젊은 엘리자베스 2세와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가 산후 우울증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셉 삼촌을 낳고 산후 우울증을 심하게 앓았던 경험이 있으셔서 그런지, 할머니는 드라마를 집중해서 보느라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크게 헛기침을 하자, 할머니가 비로소 나를 돌아보았다.
“알렉스, 이 시간에 무슨 일이니?”
“할머니.”
나는 할머니의 곁에 앉았다. 할머니는 내 오른손을 당신의 주름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할머니의 두 손은 따뜻했다. 나는 할머니의 두 손 위에 내 왼손을 얹었다.
“할머니.”
“그래.”
“할머니.”
“무슨 일인데 그래.”
할머니가 나를 안쓰러워하며 말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몇 번이나 말을 더듬고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윤이 위독해요.”
“…….”
“윤이 아프기 전에는 몰랐어요. 그런데 아파서 의식 없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알았어요. 저는 윤의 가족이 되고 싶어요. 가족이 되어 그를 지켜주고 싶어요.”
“…….”
“윤에게 청혼하고 싶은데 반지를 살 돈이 없어요.”
“…….”
“죄송해요, 나중에 취직하면 꼭 갚을게요.”
“…….”
할머니는 맑은 하늘색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시선에는 나를 꿰뚫어 볼 것 같은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할머니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다부지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와라.”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우리는 할머니의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화장대 앞에 앉아 가장 큰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벨벳 보석 케이스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서랍 안에 들어 있는 벨벳 반지 케이스들을 전부 꺼내 화장대 위에 늘어놓았다. 할머니가 반지 케이스를 열고, 안에 든 것들을 차례대로 확인하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말이다. 우리 집안에 흐르는 기질을 내 아이들이나 손주들이 물려받을까 봐, 정말 많이 걱정했다. 나는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거나,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기질이 그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나는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유 없이 그 기질을 주시지는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다만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여 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기 때문에, 그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 내 동생처럼 슬픈 인생을 살게 될 것을 아니까…….”
“…….”
“네 아빠와 그 동생들에게서는 그 기질이 나타나지 않았어.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
“그런데 네가 그 기질을 드러낸 순간, 나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졌다. 내가 너에게 그 기질을 물려 준 것 같아서.”
“…….”
할머니의 화장대 위에 반지 케이스가 수북하게 쌓였다. 마침내 할머니는 상자 하나를 골라냈다. 나는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상자 안에 든 것을 확인한 할머니는 나에게 그것을 건넸다. 나는 반지 케이스를 받아들고 눈을 크게 떴다. 할머니가 더없이 침착하게 말했다.
“부쉐론 1879년 빈티지다.”
“…….”
“내가 네 아빠를 낳고, 네 할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은 거야.”
“…….”
“청혼을 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할머니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머니는 나보다 키가 작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할머니의 체구가 크고 위풍당당해 보였다. 나는 반지 케이스를 닫고, 그것을 손에 쥐었다. 반지를 손에 쥔 순간, 갑자기 용기가 샘솟고 웃음이 났다. 할머니가 준 반지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던 할머니는 호탕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소리 내어 웃고 나서, 할머니는 나에게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행운을 빈다.”
* * *
할머니에게 반지를 받고 나서, 매일 반지 케이스를 브리프 케이스에 넣고 출근했다. 간호사 선생님에게 연락이 오면 바로 시그나기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연락이 오지 않았고, 나는 초조하게 간호사 선생님의 연락을 기다렸다.
오후 두 시 13분. 문서 리뷰를 초안을 완성하고 나서 퇴고하고 있는데 아이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할머니에게 반지를 받은 지 4일 만이었다. 나는 아이폰을 확인했다. 간호사 선생님에게서 내가 기다리고 있던 연락이 왔다. 윤이 깨어났고, 그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고 했다. 나는 간호사 선생님에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업무를 마치자마자 공항으로 출발했다. 아슬아슬하게 시그나기 직항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자꾸 시계를 확인했다. 시그나기 공항에 내려 바로 병원으로 가면 윤을 30분이나 볼 수 있을까? 그래도 나는 가야 했다. 그토록 간절히 바래왔던 기적이 일어났으니까.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버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갔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윤이 나를 보자마자 화를 내면 어떡하지? 나는 초조해서 브리프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반지 케이스를 손에 쥐었다. 그러자 걱정이 사라졌다. 왠지 예감이 좋았다. 할머니의 말대로 될 것 같았다. 반지 케이스를 손에 쥐고 있으니 설레는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대학병원에 도착해서 일반 병실 층으로 갔다. 스테이션에 앉아 있는 간호사 선생님에게 윤의 이름을 말하고, 내가 그와 어떤 관계인지 설명했다. 문병 시간이 끝나는 여덟 시까지 20분 문병 허가를 받고, 나는 뛰듯이 걸어 병실 앞에 섰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서 병실 문을 열었다.
윤은 1인용 병실에 혼자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누워 있어서 잠든 것인지 의식을 잃은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문간에 서서 윤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던 윤이 눈을 뜨고 눈꺼풀을 몇 번 깜빡거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순간, 초점이 맞지 않는 윤의 두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윤이 나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여름 학기 3주차, 윤
정신이 들었을 때, 낯선 얼굴의 흑인 여성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색 스크럽을 입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명찰에 달린 이름과 직책을 눈으로 읽었다. 매리앤은 간호사고, 이곳은 대학병원이었다. 그 덕분에 깨달았다. 나는 죽지 않았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히고 불편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간호사 선생님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기도가 부어서 삽관이 안 되는 바람에 목에 구멍을 뚫어서 인공호흡기를 꽂았어요. 말은 할 수 있지만 불편할 거예요.”
“제가……. 얼마나……?”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이 너무 아파서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쉬어 있었다. 내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도, 선생님은 내 말을 용케 알아들었다. 선생님이 내 이마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일주일 정도 의식이 없었어요.”
“아…….”
“조금 더 자요, 자는 동안 일반 병실로 옮길 거예요.”
선생님은 말을 마치고 정맥 주사에 수면제를 놓았다. 주사를 놓고 몇 초가 지났다. 정신이 점점 가물가물해졌다.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 * *
정신이 다시 들었다. 나는 이제 1인용 일반 병실에 누워 있었다. 고개를 아주 약간 돌려 창밖을 보니, 하지가 임박한 날이라 늦은 저녁인데도 세상이 한낮처럼 밝았다. 나는 목에 인공호흡기를 꽂고, 침대에 누워 자다 깨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깨어 있으면 머리가 멍하고 시야가 뿌예서 불편했기 때문에 차라리 내쳐 자고 싶었다.
얼마나 깨어 있었을까. 나는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보았다. 여전히 시야가 좁았다. 그런데 시야의 끄트머리에 시꺼먼 것이 앉아 있었다.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서, 머리맡에 앉아 있는 시꺼먼 것이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시꺼먼 것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내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익숙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알렉스와 헤어졌는데. 알렉스는 오스틴에 있을 텐데. 나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알렉스?”
“맞아. 나야.”
알렉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안 그래도 희미했던 시야가 눈물로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나는 울면서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보여.”
“나는 여기 있어.”
알렉스가 내 오른손을 제 왼손으로 감싸 쥐었다. 나는 눈물을 닦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알렉스가 내 손등에 키스하고 나서 말했다.
“울지 마.”
알렉스가 오른손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내가 아는 알렉스가 맞았다.
“오스틴에…….”
“회사 끝나고 왔어. 말은 될 수 있으면 하지 마. 간호사 선생님이 인공호흡기 때문에 말하기 불편할 거래.”
알렉스는 슈트를 입고 타이를 매고 있었다. 머리는 단정하게 가르마를 타서 포마드로 정리했다. 나는 알렉스가 옷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낯설어서 알렉스를 자꾸 바라보게 되었다. 알렉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니까 좋네.”
“…….”
“나는 네가 많이 보고 싶었어. 너는 어땠어?”
나는 말을 하려다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알렉스는 웃으면서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헤어져도 혼자 잘 지내야지. 왜 이렇게 못 지냈어?”
“…….”
“이렇게 못 지낼 거면서 왜 헤어지자고 한 건데?”
“…….”
“네 마음대로 하니까 좋아? 나는 네 마음대로 하니까 안 좋아.”
“…….”
“여태까지 네 마음대로 했으니까, 앞으로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앞으로 나는 네 곁에 계속 있을 거야. 네가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
“그래도 네 의견을 물어보기는 해야겠지. 싫어?”
알렉스는 내가 대답을 하거나 말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했다. 알렉스의 말에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싫을 수가 있겠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알렉스가 나에게 잘못했던 것도, 내가 알렉스에게 잘못했던 것도, 내가 섭섭했던 것도 전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알렉스를 다시 볼 수 있어서 한없이 기쁘기만 했다. 나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고 싶었고, 목을 쥐어짜서 말했다.
“아니…….”
알렉스는 주변을 살피다가 침대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침대 매트리스 상체 부분이 자동으로 접히더니, 내가 일어나 앉을 수 있도록 등을 받쳐 주었다.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각도 괜찮아?”
나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알렉스는 웃으면서 제 오른손으로 내 오른손을 쥐고,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떨어져 있는 동안 많이 생각해봤어.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였어.”
“…….”
“나는 네 곁에 있고 싶어.”
나는 알렉스의 말을 듣고 나서 고개를 한 번 저었다. 알렉스는 말을 멈추고, 내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나는 한참 헛기침을 하고 나서 간신히 목을 틔울 수 있었다.
“……근데 나는 너에게 줄 수 있는 게 없어.”
내 목소리는 엉망진창으로 갈라져서 나왔다.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내 말을 반박하기 시작했다.
“너 진짜 웃기는 거 알아?”
“…….”
“너는 나에게 내 마음 말고는 바라는 게 없으면서, 나는 너에게 네 마음 말고도 바라는 게 많을 거라 생각해.”
“…….”
“근데 나도 네 마음이면 충분해.”
알렉스는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알렉스의 상냥한 말을 듣는 순간, 내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의식 불명일 때 너를 보러 왔었어.”
“…….”
“내가 너를 보러 왔을 때, 너와 같이 입원한 사람들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어. 그런데 네 곁에는 아무도 없었어. 간호사 선생님에게 물어봤더니 아무도 너를 문병하러 오지 않았대. 나는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어.”
“…….”
“그래서 나는……. 내가 너의 가족이 되어, 네 곁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마구 갈라지는 목소리로 꺽꺽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알렉스가 한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평생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알렉스에게 듣게 되다니.
엄마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나는 언제나 누군가와 가족이 되기를 마음 깊이 바라왔다. 누군가의 평생의 사랑이 되어 그 사람에게 나를 전부 주고 싶었는데. 누군가의 가족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간절히 꾸면서도 나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그토록 바라던 말을 들었는데, 너무 행복하고 기쁘기만 하고 실감은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한바탕 꿈 같기만 했다.
알렉스는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다가, 브리프 케이스에서 뭔가를 꺼냈다. 알렉스가 들고 있는 것은 검은색 벨벳 반지 케이스였다. 반지 케이스를 쥔 알렉스의 두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알렉스가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엄지손톱보다 크고 둥근 다이아몬드가 가운데에 박혀 있고,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둥근 다이아몬드를 햇살처럼 감싸고 있는 반지가 새까만 벨벳 케이스에 꽂혀 있었다. 현실감이 없는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알렉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평생 내 곁에 있어 줘.”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꿈에서 깨어날 것 같았다. 그러나 알렉스는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도 사라지지 않았다. 반지에 박혀 있는 거대한 다이아몬드가 저녁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리고 알렉스는 반지 케이스를 나에게 내밀고, 잔뜩 긴장한 채 나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응. 그럴게.”
나는 멋지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내 목소리는 이번에도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알렉스는 나에게 대답을 듣자마자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와 알렉스는 마주 보고 웃었다.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병원 침대 매트리스 위에 앉았다. 그는 반지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내 손에 들고, 내 왼손을 제 왼손으로 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알렉스에게 내 왼손을 얌전히 내주었다. 알렉스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반지를 들고, 약간 민망해하며 말했다.
“사실 이거, 우리 할머니 반지야.”
“…….”
“반지가 너에게 맞을지 모르겠네.”
알렉스는 부끄러워하면서 내 왼손 넷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반지가 손가락에 닿는 순간, 나도 긴장했다. 이러다가 반지가 손가락 마디에 걸리면 어떡하나 걱정되었다. 다행히 반지는 내 손가락에 딱 맞았다. 나는 알렉스의 할머니에게 감사하면서도, 그분의 장난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멀쩡한 사내놈에게 여자 반지를 끼울 생각을 하시다니.
“우와…….”
알렉스가 내 왼손을 두 손으로 쥐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알렉스는 내 왼손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배시시 웃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좋다…….”
“…….”
“어떡하지…….”
알렉스는 내 손을 쥐고, 내 어깨에 제 이마를 기댔다. 나는 그를 안아 주고 싶었지만, 몸이 아파 그를 안아 줄 수 없어서 속상했다. 이윽고, 알렉스는 머리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알렉스의 두 눈에 나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알렉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한국어로도 말하고, 영어로도 말했다. 사랑을 말하는 내 목소리는 바람 소리를 내며 갈라졌지만, 알렉스는 내 말을 듣자마자 나를 꽉 끌어안고 내 등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랑해. 알렉스도 내 귓가에 속삭였다. 평생 들은 말 중에 그 말이 가장 달콤했다.
여름 학기 3주차, 알렉스
나는 약혼반지를 낀 윤의 왼손을 내 오른손으로 쥐고, 윤의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스피커폰 모드로 바꾸어 윤이 통화를 들을 수 있게 했다. 신호가 가다가, 윤의 누나가 전화를 받았다. 환은 나에게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네가 웬일이니? 둘이 헤어졌다고 들었는데.
“안녕하세요. 윤은 병원에 입원해있고, 목을 다쳐서 말을 못 해요. 그래서 제가 대신 전화했어요.”
내 말을 듣자마자 환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입원? 윤이 어디 아파? 대체 무슨 일인데?
“아파트에 불이 났는데, 연기를 마셔서 목을 다쳤어요.”
-안 그래도 애한테 메시지를 보냈는데, 1주일 넘게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다고! 윤이 옆에 있어?
“네, 윤은 옆에 있고, 이 통화를 듣고 있어요.”
-근데 뭐야, 너희 둘이 다시 사귀기로 했어?
“네. 저희 결혼해요.”
-뭐어!
환이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하기 전, 윤과 합의한 내용을 그녀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가을 학기 개강하기 전에 식을 올릴 거예요.”
-세상에…….
“신혼여행은 겨울에 갈 거예요.”
-식은 언제 올릴 건데? 날짜 나왔어?
“8월 말이고 날짜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아, 그리고 윤은 몸이 안 좋아서 이번 여름에는 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아요.”
-알았어. 근데 애 낳고 복직한 지 얼마 안 돼서 당분간 휴가 내기 어려운데. 하필이면 날짜를 8월 말로 잡았네.
“그러면 겨울에-”
-아니야. 동생이 결혼하는데 어떻게든 휴가를 내야지. 아무튼, 알았어. 나는 회의 들어가 봐야 하니까 나중에 자세히 통화하자. 날짜 잡히는 대로 알려 줘. 그래야 휴가를 내달라고 하지.
“네.”
-이제는 너를 제부라고 불러야 하나?
“그렇겠네요.”
[주윤, 옆에 있다고 했지? 장가가는 거 축하한다. 무슨 일 있으면 알렉스에게 연락할게. 밥 잘 먹고 잘 쉬고 얼른 나아.]
환은 인사를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환이 전화를 끊자, 윤은 멋쩍게 웃었다. 나는 윤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윤이 바람 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안 씻어서 냄새나.”
나는 윤에게서 냄새가 나도 괜찮았다. 그래서 괜히 윤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헝클어뜨리고 그를 놔주었다. 윤이 냄새를 신경 쓰는 것 같으니, 다음에 올 때는 드라이 샴푸와 수건을 가져와서 씻겨 줘야겠다.
시계를 보니, 면회 마감 시간이 한참 지났다.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은 침대에 앉은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일반 병실로 옮겨졌으니 곧 퇴원하겠지? 간호사 선생님께 언제 퇴원하는지 물어보고, 그날 올게.”
윤은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머리를 한 번 끄덕였다. 나는 윤에게 웃으며 말했다.
“수빈에게 전화해서, 내가 없는 동안 너를 돌봐달라고 할게.”
“교수님에게도…….”
“누구?”
“밍 교수님.”
“전에 만난 여자 교수님? 공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메일 주소 나와 있지?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드리고 이제 한고비 넘겼다고 할게.”
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이제 내 배우자가 될 사람이었다. 나와 평생 같이 살아갈 사람. 죽어서도 나와 하나의 묘비 아래에 같이 묻힐 사람.
내가 누군가의 남편이 된다는 느낌은 신기할 정도로 좋았다. 누군가에게 내 남은 생을 다 준다는 사실에 마음이 벅찼다. 윤도 같은 마음인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는 벅찬 마음을 안고, 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곧 보자.”
내가 병실에서 나왔을 때, 윤을 담당하는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향해 찡긋 윙크했다. 그녀는 우리를 위해 일부러 면회 마감 시간을 모른 척 했나 보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하다고, 눈인사를 했다. 그러자 간호사 선생님은 웃으면서 얼른 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 * *
공항으로 가는 우버 안에서 수빈에게 전화를 걸었고,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수빈은 알겠다고, 주중에 시간이 날 때마다 윤을 봐주겠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수빈이 껄끄러웠지만, 이제는 그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수빈이 내 이야기를 듣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너희 아파트에 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윤과 연락이 안 돼서 설마 했는데……. 설마가 맞았네. 정말 유감이야.
“그러게.”
-윤은 걱정하지 마. 내가 자주 들를게. 나는 요새 방학이라서 시간 괜찮거든.
“고마워. 우리 곧 결혼하는데, 결혼식에 올래?”
-그래? 언제인데?
“개강하기 전에 할 건데, 아직 날짜는 정하지 않았어.”
-좋아. 갈게. 날짜 정해지면 알려 줘.
수빈은 웃으며 대답했다. 수빈과 통화를 끝내고, 공과대학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전에 만났던 여자 교수의 프로필을 찾았다. 윤은 그녀를 매번 밍 교수라는 직함으로 불렀는데, 그녀의 풀네임은 페이 밍이었다. 나는 그녀의 메일 주소를 복사하고, 아웃룩 앱을 켰다. 그리고 아이폰으로 이메일을 써 내려갔다.
밍 교수님께.
안녕하세요, 저는 윤의 약혼자인 알렉산더 테신입니다. 그동안 윤과 연락이 되지 않아 많이 걱정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윤의 상황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메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저희 아파트에 화재가 발생했고, 윤은 화재 때문에 다쳐서 대학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혹시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저에게 메일 주세요. 제가 윤을 대신하여 처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알렉산더 테신 드림.
공항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나서 메일을 확인하니, 회신이 와 있었다. 나는 회신을 눈으로 읽었다.
안녕하세요, 알렉스.
이메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윤과 연락이 되지 않아서 많이 걱정했습니다. 윤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무척 기쁘네요. 혹시 윤의 병원과 병실 번호를 알려주실 수 있다면 감사하겠어요. 그를 문병하고 싶습니다.
페이 밍 드림.
나는 그녀에게 회신하며 윤의 병실 번호를 알려 주었다. 윤을 대신해서 그의 일을 공식적으로 처리하고 있으니, 내가 정말 그의 가족이 되기로 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 * *
다음 날. 퇴근길에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들고 계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는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일부러 인기척을 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할머니는 나를 웃으면서 맞았다. 할머니가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니?”
“저, 결혼해요.”
나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웃으면서 말했다.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 나는 기쁘게 할머니를 마주 안고 웃었다. 할머니가 나를 놓아주었고,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할머니를 노려보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향해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알렉산더. 나와 이혼하고 싶으면 계속 떠들고.”
할머니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억지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가 화를 참는 모습을 보며, 할머니가 왜 이혼 이야기를 꺼냈는지 깨달았다. 할머니는 이혼을 할아버지와의 협상 카드로 쓰기 위해 승부수를 띄웠던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치밀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 * *
엄마와 아빠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두 분을 거실에 모시고 분명하게 말씀드렸다. 나는 윤에게 청혼했고 윤은 승낙했다고 전했다. 나의 결혼 선언을 듣고, 두 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빠는 괜찮아 보였지만, 엄마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 역시 엄마가 걱정되었다. 나는 엄마가 울거나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는 아무 표정 없이 한숨만 쉬다가,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식은 언제 올릴 거니?”
“개강하기 전에 올릴 거예요.”
“그래. 날짜 정해지면 알려 줘. 그래야 일정을 조정하지.”
“줄리아.”
아빠가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두 손으로 당신의 얼굴을 감쌌다. 아빠가 엄마의 어깨를 안았다. 엄마가 아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기분 진짜 이상해, 여보.”
엄마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춘 채 말했다. 엄마는 울지는 않았지만, 무척 상심한 것 같았다. 상심한 엄마를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자꾸만 목이 멨다. 아빠가 엄마를 다정하게 불렀다.
“줄리아.”
“고마워요, 엄마, 아빠.”
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내가 쉽지 않은 이야기를 했는데도, 나의 훌륭한 부모님은 내 마음을 존중해 주었다. 이렇게 훌륭한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것이 나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부축해 일으켰고 침실에 데려다주었다. 얼마 후, 침실에서 나온 아빠는 부엌에서 와인 한 병을 들고 왔고, 디캔터와 와인오프너, 와인 글라스 두 개도 들고 왔다. 아빠는 와인을 따서 디캔터에 붓고, 와인 글라스 두 개에 똑같은 양의 와인을 따르고, 나에게 와인 한 잔을 건넸다. 아빠가 웃으면서 말했다.
“샤토 마고 빈티지는 아니야. 그건 윤이 집에 오면 마셔야지.”
“…….”
“우리, 아빠와 아들이 아니라 남자 대 남자로 이야기를 해 보자.”
“네.”
“나와 줄리아는 너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했는데 벌써 43년이 지났어. 우리가 캠퍼스에서 데이트하던 시절이 어제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장성한 네가 우리 곁에 있네. 우리는 경력을 쌓느라, 특히 네 엄마가 경력을 쌓느라 너를 늦게 낳았어. 네가 태어나기 전에도 우리는 행복했지만, 네가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다. 아빠는 우리에게 큰 행복을 선사해 준 네가 건강하게 자라서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뻐. 진심으로 축하한다.”
“…….”
“내가 결혼해 보니, 결혼은 좋은 것이야. 나는 나보다 훌륭한 배우자를 만난 덕분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었어. 그리고 주변의 많은 사람이 사랑하고 헤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믿기 힘든 행운을 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나는 너도 나와 같은 행운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
“사람들이 가끔 나에게 결혼 생활의 비결을 묻는데, 내 비결은 딱 하나야. 배우자의 장점을 좋아하고, 그 사람과 기쁨을 같이 나누기는 쉽지만, 그 사람의 사소한 단점이나 힘들고 슬픈 일을 같이 견디는 게 훨씬 어려워. 그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결혼 생활을 잘할 수 있어.”
“…….”
“다시 한번 축하한다.”
아빠는 다정하게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아빠의 눈물을 보며 나도 목이 멨다. 나는 잠긴 목소리로 아빠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아빠.”
아빠는 결국 눈물을 찔끔 흘렸다. 나는 아빠에게 티슈를 뽑아 내밀었다. 아빠는 눈물을 티슈로 닦으며 나에게 물었다.
“윤은 시그나기에 있어?”
“지금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같이 살던 아파트에 불이 나서 다쳤거든요.”
“저런. 윤은 괜찮아?”
“많이 나았어요. 곧 퇴원할 거예요.”
“집은 무사하고?”
“아뇨. 아파트가 전부 타서 새집을 찾아야 해요. 사실 집이 무사하다 해도, 윤이 죽을 뻔했는데 거기서는 살기 싫어요.”
“그러면 윤이 당장 갈 데가 없는 거네.”
“네.”
“퇴원하면 우리 집에 데려와. 한동안 우리 집에서 쉬다가, 개강할 때 같이 시그나기로 가면 되겠다.”
아빠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빠의 말을 듣고 정말 기뻤다. 내가 태어나 자란 집을 윤에게 보여 주고, 이곳에서 같이 지낼 수 있다니. 나는 윤에게 우리 집을 보여 주고 그가 어릴 때 살았던 옆 동네에 같이 가 볼 것이다. 그곳에 가서 우리의 접점을 다시 한번 찾아볼 것이다. 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씩 웃었다.
* * *
오랜만에 사촌 동생 조셉에게 전화가 왔다. 근무 중이었지만 전화를 받았다. 사촌 중에서 조셉과 가장 친한데, 조셉이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한 이후에는 연락이 뜸해졌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이라고 하지만, 간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웠다. 그런데 조셉은 전화기 너머에서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알렉스. 할아버지가 내일 우리 학교를 방문하신대. 그 꼰대, 생전 우리 학교에 온 적이 없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그래?”
-형, 영감이 왜 이러지?
조셉의 이야기를 들으니 한숨이 나왔다. 할아버지가 내일 웨스트포인트를 방문하면, 학교가 발칵 뒤집힐 것이다. 조셉은 할아버지가 갑자기 저를 감싸고 도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했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당신의 후계자를 교체한 것이다. 나는 남자와 결혼하기 때문에 당신의 후계자가 되기에는 결격 사유가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조셉의 질문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 때문이겠지. 나는 버리는 패니까.”
-왜?
“내가 결혼하는 거, 거기까지 소문나지 않았어?”
-응, 알아. 할머니한테 들었어. 형, 남자 친구에게 프로포즈 했다며?
“맞아. 근데 할아버지는 그걸 매우 못마땅해하시거든.”
-하여간 꼰대. 요새 그게 무슨 흠이라고.
“할아버지는 옛날 사람이잖아. 아무튼, 좋게 생각해. 너는 계속 군에 있을 거잖아. 할아버지가 너를 밀어주기 시작하면 나쁠 건 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조셉이 말끝을 흐렸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조셉이 할아버지의 관심을 즐길 만한 성격인가? 그 녀석이 할아버지의 관심을 즐긴다면, 그 녀석에게 이보다 좋은 상황은 없었다. 조셉은 할아버지가 밀어주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 녀석은 군에서 승승장구할 것이다.
나는 사랑을 좇아 청혼한 것이지, 인생의 자유를 바라고 청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결혼은 나에게 자유를 선사했다. 자유는 정말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행운이었다. 게다가 조셉이 있으니, 할아버지는 이제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간섭하지 않으시겠지. 할아버지의 후광을 거부해 왔던 나에게는 대단히 좋은 일이었다.
* * *
-퇴근길에 우리 집에 잠시 오거라.
할아버지의 메시지는 딱딱했다. 메시지에는 오타가 없었고, 맞춤법 역시 완벽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보낸 메시지가 신기했다. 할아버지는 87세인데 아이폰을 완벽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렇게 정신이 맑으시니, 후년이면 90이 되는 연세에도 현역으로 팔팔하게 활동할 수 있는 거겠지.
내가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는 응접실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 곁에 앉아 계셨다. 할머니는 나를 보고 반가워하셨지만, 할아버지는 불독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소파에 앉자, 할아버지는 나를 삐딱하게 보면서 말했다.
“좋으냐?”
“네.”
나는 요새 느끼는 기분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할아버지는 욕설을 퍼부었다.
“사서 약점을 만드는 꼴통 새끼.”
“…….”
“하나만 부탁하자.”
할아버지는 매우 떨떠름한 말투로 나에게 부탁했다. 이건 부탁하는 말투가 아니라 협박하는 말투인데. 나는 언짢은 티를 내면서 말했다.
“이건 부탁하시는 태도가 아닌 거 같은데요.”
“고얀 놈.”
“그래서 부탁이 뭔데요?”
“……결혼하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네 결혼 생활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고 다니지 마라. 그놈도 마찬가지야. 그놈이 결혼 생활에 대해 말하고 다니지 못하게 해라. 그 외에도 여러 상황에 대비하여 결혼 계약서를 써라. 그게 너에게도 좋아.”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지지하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나도 네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한다. 결혼해서 행복한 마음은 알겠지만, 이제 사회초년생인데 괜히 불이익을 당할 만한 일은 피하는 게 좋지.”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당신을 응원하자 놀란 눈치였다. 할머니의 지원에 기세를 얻은 할아버지가 더욱 불퉁하게 말했다.
“며칠 전에 조안 그레이 판사를 만났는데, 그녀가 넌지시 너를 조심시키는 게 좋겠다고 말하더구나. 네가 면접 보면서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며? 그녀가 예의 있고 신중한 사람이라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네 사생활에 대해 소문이 나는 건 한순간이었을 거다. 그러다가 내 의석이 날아가면 네가 책임질 거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의석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으니 할아버지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내 사생활은 할아버지의 의석을 날려버릴 만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내 인생이 즐거워지자고 할아버지의 정치 인생을 망칠 수는 없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서, 할아버지 의석이 날아가면 뒷감당을 누가 하라고. 안 그래도 요새 텍사스에서 민주당 세가 확장되고 있어서 심기가 불편하신데.
“결혼 선물로 집은 사 주마.”
“…….”
“그걸로 내가 정계 은퇴할 때까지만 참아.”
“무슨 말씀인지는 알았어요. 집을 사 주시는 것도 감사하고요. 근데 결혼 계약서 이야기는 윤도 같이 있을 때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내 말을 듣고 할아버지는 끄응, 하고 입 안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할아버지가 나에게 많이 양보하셨다는 사실은 안다. 할아버지가 먼저 결혼 계약서를 이야기하셨으니 말이다. 하지만 계약 당사자도 없이 계약을 논의하는 게 말이 되나. 할아버지는 결국 윤이 손자사위라는 사실은 인정하기 싫으신 거다. 그래도 이만하기가 다행인 건가. 나는 한숨을 쉴 뿐, 더는 말하지 않았다.
* * *
묘지 근처에는 꽃집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벌써 손에 하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회사 근처의 유명한 꽃집에서 산 예쁘고 세련된 꽃다발이었다. 나는 칼렙의 묘비를 향해 걸었다. 이곳에 오는 것은 거의 10년 만이었다. 그런데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나는 칼렙의 장례식에서 멍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길고 좁은 구덩이에 관이 내려앉을 때, 내 마음도 같이 내려앉았다. 다시는 칼렙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많이 후회하고 괴로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욱 다정하게 대해 주었을 텐데. 그때는 그 마음을 뭐라고 부르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안다. 첫사랑. 칼렙은 나의 첫사랑이었다.
나는 칼렙의 묘비 앞에 섰다. 칼렙은 자신의 부모님과 함께 묻혀 있었다. 묘지 관리인이 묘지를 관리하기는 하지만, 나 말고 들르는 사람은 없는지 묘비 앞이 썰렁했다. 나는 세 가족의 묘비 앞에 가져온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오랜만이야. 칼렙. 그동안 찾아오지 못해 미안해.”
“…….”
“나는 곧 결혼해.”
“…….”
“내가 결혼하는 사람은 너와 닮았는데, 닮지 않은 사람이야.”
“…….”
“네 마음을 몰라주어 미안해. 내가 내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았어.”
“…….”
“나는 네가 천국에 있다는 것을 알아. 나중에 혹시 다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자.”
“…….”
“잘 있어.”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허리를 숙였다. 내 손가락 끝에 키스하고 손가락을 묘비에 댔다. 칼렙에게 키스를 전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깊은 한숨이 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지(夏至)의 낮은 끝없이 길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칼렙이 우리의 미래를 축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여름 학기 5주차, 윤
[그래서, 유부남이 되는 소감은?]
[얼떨떨해.]
인공호흡기를 빼고 상처를 봉합하고 나니 말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다. 수빈은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고, 문병을 올 때마다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를 사 왔다.
나는 빨대로 아메리카노를 조금씩 마시면서 담배 생각을 지워 냈다. 담배를 피우고 싶지만 입원한 동안 금연한 것이 아까워 계속 참기로 했다. 게다가 내가 흡연자라는 사실을 알고, 담당 의사는 화재로 인한 폐 손상이 심하니 담배를 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평생 금연해야겠지.
[그러고 보니, 전에 알렉스가 갑자기 찾아와서 나한테 이상한 소리를 했었어. 제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미국 정치가 어쩌고저쩌고 네 생일이 어쩌고저쩌고. 그날은 애가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여서, 나는 걔가 헛소리하게 내버려 뒀거든. 근데 생각하면 할수록 걔 행동이 이상한 거야. 대체 무슨 일이야?]
[별일이라고 하면 별일이고, 아니라고 하면 아니고.]
[뭔 일이 있었던 건 맞구나? 근데 너희 헤어졌었잖아. 어쩌다가 결혼하기로 한 건데?]
[내가 의식을 차렸을 때, 알렉스가 옆에 있었어. 걔는 내가 의식이 없을 때도 나를 보러 왔었대. 근데 나보고 앞으로는 허튼 생각하지 말고 제 곁에 딱 붙어 있으라고 하더라. 그래서 좋다고 했어.]
내 말을 듣고, 수빈은 오글거려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빈의 시선이 내가 끼고 있는 반지에 머물렀다. 나는 수빈이 약혼반지를 바라보자 민망해졌다. 이런 반지는 수빈이나 우리 누나 같은 사람이 껴야 예쁠 텐데.
알렉스가 반지 케이스를 가져갔고, 반지를 그냥 보관했다가는 도둑맞을 것 같아서 반지를 온종일 끼고 있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너무 커서 반지가 자꾸 돌아가는 데다가 보석의 무게 때문에 손가락이 아파서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알렉스에게 결혼반지는 간결한 디자인으로 하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너, 사실 반지에 홀딱 넘어간 거 아니야? 그거 팔면 한남동에 아파트도 사겠다.]
[……그런 거 아니야.]
[뭐가 아니야? 그거 몇 캐럿이야?]
[나도 몰라.]
[오오, 주윤. 부잣집에 장가가서 팔자 고치는구나?]
수빈이 나를 마구 놀려댔다. 나도 수빈이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내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다. 나는 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쓱쓱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면 뭐 해. 내가 앞으로 알렉스를 먹여 살려야 하는데.]
[그래?]
[여기는 검사가 돈을 조금 번대. 그러니 내가 열심히 벌어야지.]
나는 머쓱해서 웃었다. 우리가 결혼한다니. 내가 알렉스의 생계를 책임진다니. 우리가 운명 공동체가 된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더욱 쑥스러워졌다. 내 이야기를 듣고, 수빈은 웃으며 나를 또 놀렸다.
[벌써 거기까지 생각했어? 그러면 가족계획은 어떻게 되세요? 아이는 몇 명이나 가질 생각이시죠?]
수빈의 말을 듣고,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만 붉혔다. 아이라니. 아이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다.
* * *
저녁 무렵에는 밍 교수님이 오셨다. 밍 교수님은 내 몰골을 보고 안쓰러워하셨다. 나는 목에 붕대를 감고 있고, 인공호흡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못해 몸이 많이 마르기도 했다. 잔뜩 갈라졌던 목소리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인공호흡기를 뽑고 나서 목 상태를 살폈고, 내가 뜨거운 공기에 성대를 데어서 전과 같은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울 거라고 진단했다. 나는 새로운 목소리가 어색했지만, 살았으니 괜찮다고 애써 위안했다. 밍 교수님도 목소리가 조금 상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살아남은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언제 퇴원해요?”
“내일모레요.”
“퇴원하면 어디에 가 있을 거예요?”
“알렉스의 본가에 있을 거예요.”
“알렉스의 본가는 어디예요?”
“오스틴이요.”
“그래요. 퇴원하면 남은 방학 동안은 쉬세요. 윤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보여요.”
“아…… 감사합니다.”
“예전 목소리도 좋지만, 지금 목소리도 좋네요. 허스키해지니까 근사해.”
나는 교수님의 농담을 듣고 웃었다. 내가 듣기에는 내 목소리가 괴상했다. 남이 듣는 목소리와 내가 듣는 목소리는 다르다더니, 교수님이 들으시기에는 괜찮으신 건가? 아니면 교수님이 빈말하시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물었다.
“이제 여기 온 지 1년이 되었네요. 소감이 어때요?”
“벌써 1년이나 지났다니, 시간이 너무 빠른 것 같아요.”
“나도 그래요. 시간이 참 빠르죠?”
“네.”
나는 교수님의 질문에 대답하고 웃었다. 교수님이 나를 보고 씩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온 건 말이에요. 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예요.”
“네.”
“지난 한 학기 동안 고민해 봤는데, 저는 윤이 졸업할 때까지 윤을 계속 지도하고 싶어요.”
“…….”
“나는 아직 한참 부족한 선생이지만, 윤이 제 학생이 되어 준다면 좋겠어요. 어때요? 괜찮아요?”
“……좋아요.”
나는 밍 교수님이 좋아서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교수님이 지난 1년 동안 나를 얼마나 열심히 지도하셨는지 알기에 망설일 것이 없었다.
“윤이 이렇게 쉽게 대답하면 안 되는데. 고민하는 척이라도 했어야죠. 아무리 미국이라도 지도 교수를 바꾸는 건 꽤 힘들단 말이에요.”
교수님이 농담하며 웃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교수님은 내 어깨를 손으로 토닥였다. 엄마가 예전에 나를 이렇게 도닥여주었는데. 나는 교수님의 손길에서 엄마를 떠올렸다. 나를 도닥이는 손의 감촉이 엄마 손의 감촉과 비슷했다. 게다가 교수님의 손의 모양과 크기, 체온이 모두 엄마의 것과 비슷했다. 나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교수님을 보았다. 교수님이 다정하게 말했다.
“잘 쉬고, 나아서 와요.”
“네.”
나는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 * *
퇴원하는 날이 되었다. 퇴원 절차를 밟기 전, 알렉스가 경찰서에 가서 내 이민 서류와 여권을 받아 왔다. 내 옷과 소지품, 아이폰까지 전부 불에 타서 사라졌지만, 용케 내 이민 서류와 여권은 무사했다. 내가 서랍장 안에 고이 감추어 둔 덕분이었다.
환자복을 벗고 알렉스가 오스틴에서 사 온 옷을 입고 신발을 신었다. 옷도 신발도 내 몸에 딱 맞았다. 나는 알렉스가 내 사이즈를 정확하게 맞췄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그에게 물었다.
“내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알렉스는 내 뺨을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되물었다. 그런가? 나는 알렉스의 신체 사이즈를 잘 모르는데. 키와 발 크기, 몸무게만 아는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알렉스가 내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너와 존나게 붙어먹은 게 몇 번인데.”
알렉스의 상스러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빨개졌다. 알렉스는 부끄러워하는 나를 보며 재미있어했다. 내가 짜증을 내면서 투덜거리는데도, 알렉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짜증이 잔뜩 난 채로 퇴원 수속을 마쳤다.
우리는 병원을 나섰다. 알렉스가 병원 앞에서 공항으로 가는 우버를 잡았다. 우버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약혼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서 알렉스에게 건넸다.
“이거, 네 가방에 넣어줘.”
“반지가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들어. 근데 다이아몬드가 너무 커서 평소에 끼기는 힘들 것 같아.”
“음…….”
“그러니까 우리, 결혼반지는 단순한 디자인으로 하자.”
나는 웃으면서 알렉스에게 말했다. 알렉스가 결혼반지라는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다. 알렉스는 얼굴이 빨개진 채,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여름 학기 5주차, 알렉스
공항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나와 윤은 오스틴으로 가는 비행기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한 열에 좌석이 세 개뿐인 초소형 제트기였다. 내 자리는 복도 쪽이고 윤의 자리는 창가 쪽이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기다리니, 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집을 생각했다. 오늘 윤을 데리고 집에 가면, 아빠가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샤토 마고를 꺼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와인과 함께 근사한 저녁을 먹게 될 것이다. 내가 저녁 식사를 생각하고 있는데, 윤이 중얼거렸다.
“어지러워.”
그는 몇 주 동안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걸어 다니니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윤을 내 어깨에 기대게 하고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깨를 손으로 만져 보니, 그가 예전보다 많이 마른 것이 느껴졌다. 한참 그를 안고 어깨를 토닥이고 있는데, 윤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너, 나한테 잘못한 거 있는데.”
“뭔데?”
나는 윤에게 물었다. 윤은 내 눈을 보면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너는 나한테 협상 이야기도 안 해주고, 기사 이야기도 안 해주고.”
“그게 섭섭했어?”
“응.”
나는 윤을 보며 웃었다. 그게 매우 섭섭했구나.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나는 웃음을 거두고, 윤의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겨 주며 말했다.
“섭섭하게 한 건 미안해. 근데 나는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할 거야. 그게 너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그게 나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해 줬으면 좋겠어. 나는 모르는 거보다 아는 게 좋아.”
윤은 내 볼에 키스하고 나서 부드럽게 말했다. 이 키스는 그가 나에게 건네는 뇌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꾸 웃음이 났다. 이렇게 달콤한 뇌물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나는 웃으면서 윤을 달랬다.
“근데 너는 협상 내용을 알고 나서 잠을 제대로 못 잤잖아.”
“그래도 나는 내용을 알고 너와 같이 고민하고 싶었어.”
윤은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나는 윤이 나와 같이 고민하고 싶었다는 말을 한 게 좋아서 윤에게 져주기로 했다.
“알겠어. 그러면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으면 너에게 전부 이야기할게.”
“응. 나에게 다 말해 줘.”
윤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흘낏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비행기가 활주로에 완전히 접어들었다. 비행기가 제자리에 멈춰 섰고, 이륙을 준비하면서 엔진 소리가 달라졌다. 나는 윤의 어깨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그에게 물었다.
“네가 내 잘못을 말했으니까 나도 네 잘못을 말해도 되지?”
“응.”
“전에도 말했지만, 제발 너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 이번 화재도 그래. 이제 너는 내 것이야. 나는 내 것이 다치고 아픈 게 싫어. 앞으로 내가 너에게 신경을 많이 쓰겠지만, 너도 너에게 신경을 많이 썼으면 좋겠어.”
“알았어.”
윤은 웃으며 대답했고, 내 어깨와 목덜미에 볼을 비볐다. 나는 윤의 볼에 키스하고 창밖을 보았다. 멈추어 서 있던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힘껏 가속하며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하늘로 떠오르는 순간,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몸이 뜨는 느낌이 무서워서 윤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러자 윤은 내 손을 굳게 마주 잡아 주었다.
나는 이제 무섭지 않았다. 윤이 내 손을 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의 체온을 느꼈다. 이제 우리는 함께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함께 도로를 달릴 것이다. 우리는 함께 바다를 헤엄칠 것이다. 우리는 함께 하늘을 날아갈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어디에 가건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우리의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