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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5/15)

5장

봄 학기 Ⅱ

봄 방학, 윤

먼저 집을 나가겠다고 말한 것은 나였다. 하지만 정작 집을 나간 것은 알렉스였다. 나 혼자 우리 둘이 살던 아파트에 살고 있고, 알렉스는 학교 근처 아파트에 단기 임대로 들어갔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 * *

우리가 헤어진 날. 나는 집을 나와 수빈의 집으로 갔다. 수빈은 집에 없었고, 나는 수빈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수빈은 밤 열 시에 실험실에서 귀가했다. 나를 발견한 수빈은 흠칫 몸을 떨었다. 3월 중순이라 밤 기온이 쌀쌀한데, 나는 반팔 티셔츠와 파자마 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그녀의 집 앞에서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빈은 백팩에서 열쇠를 꺼냈고, 현관문을 열면서 나에게 물었다.

[괜찮아?]

[도망가고 싶어.]

나는 울면서 말했다. 수빈이 현관문을 열고 나를 집 안으로 떠밀었다. 나는 계속 울었고, 수빈은 허둥지둥거리다가 나를 안아 주었다. 수빈이 내 등을 토닥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도망가고 싶다니.]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어.]

[아휴…….]

수빈은 나를 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수빈은 내가 얇은 옷을 입고 맨발이어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피투성이가 된 옷을 입고 펑펑 울고 있어서 놀랐다고 했다.

나는 울음을 조금 그쳤다. 수빈이 나에게 갑 티슈를 통째로 내밀었다. 휴지를 뽑아 코를 풀고 눈물을 닦고 있는데, 수빈이 갑 티슈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건 누구 피야?]

[알렉스.]

수빈이 갑 티슈를 제자리에 놓다 말고 나를 홱 돌아보았다. 수빈의 눈이 크게 일렁거리다가 가라앉았다. 수빈이 중얼거렸다.

[대체 얼마나 크게 싸운 거야…….]

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빈의 반응을 보고 깨달았다. 그녀는 우리의 관계가 파탄 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수빈은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수빈이 사정을 자세히 묻지 않아서 정말 고마웠다.

그녀는 나에게 소파와 담요, 세면도구, 새 칫솔을 내주었다. 씻고 나서 소파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이폰이라도 가지고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집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아 빈손이었다.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수빈의 깊게 잠든 숨소리만 계속 들었다.

* * *

수빈과 아침으로 크로아상과 과일, 우유를 먹었다. 그녀는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면서 말했다.

[나는 여덟 시 수업에 실험 조교 하러 가는 거니까, 너는 좀 더 있다 가도 돼.]

하지만 나는 이를 닦고, 샤워하고, 수빈에게 고맙다고 쪽지를 써서 남겨놓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도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열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지금은 알렉스가 학교에 갔을 시간이었다. 그러니 관리 사무소에 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해야겠다. 내가 관리 사무소에 가서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얼굴이 푸석푸석한 알렉스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알렉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걱정했어.”

나는 알렉스를 무시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백팩을 싸서 방에서 나오는데, 알렉스가 물었다.

“어디서 잤어?”

“수빈의 집.”

“그럴 것 같았어.”

알렉스를 무시하면서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하나 꺼냈고, 뚜껑을 따고 물을 마셨다. 알렉스는 내 곁을 자꾸 맴돌았다. 나는 그게 불편해서 알렉스와 거리를 두고 섰고,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말했다.

“집은 최대한 빨리 알아볼게.”

내 말을 듣고, 알렉스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시간을 두고 알렉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알렉스가 목이 메어 말했다.

“너는 정말 매정하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아.”

“…….”

“……너는 여기에 있어. 내가 나가는 게 맞아.”

“네가 왜?”

“너는 방학 동안에도 시그나기에 있겠지만, 나는 학기가 끝나면 오스틴에 가야 하니까.”

결국, 오스틴에 가서 인턴으로 일하기로 한 건가? 웬일로 생각을 고쳐먹었지? 하룻밤 사이에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여러 가지가 궁금해졌지만,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우리의 관계는 끝났으니까.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생수병 뚜껑을 닫고, 백팩을 열어 그 안에 생수병을 넣었다. 백팩 지퍼를 채우려고 하는데 알렉스가 불쑥 말했다.

“너는 끝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

“나는 아니라고.”

알렉스는 뜻 모를 소리를 했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알렉스를 두고 집을 나왔다. 학교까지 걸어가는 내내 속이 쓰렸다. 분명히 수빈의 집에서 아침을 먹었는데, 속이 쓰린 이유를 모르겠다. 잠시 이러다가 말겠지. 하지만 나는 그 이후에도 간헐적인 속 쓰림 증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 * *

알렉스는 1주일 만에 집을 나갔다. 학기가 끝날 때까지 단기로 임대할 수 있는 아파트는 흔치 않아서, 학교에서 꽤 먼 곳에 집을 구한 것 같았다. 통학하기 힘들겠지만, 차가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나는 이미 끝난 사이에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봄 방학, 알렉스

윤이 집을 나가고, 한숨도 자지 못했다. 윤은 어디로 갔을까. 돈도 아이폰도 열쇠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는데. 제발 수빈의 집에 간 거였으면 좋겠다.

우리가 헤어지다니. 말도 안 된다. 윤을 만난다면 다시 물을 것이다. 진심이냐고. 나는 아니라고.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니 헤어지지 말자고.

윤을 생각하다가, 법원 인턴 오퍼를 생각했다. 내 신념에 어긋나는 기회를 잡는 것이 맞나? 내 마음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오스틴 소재 대형 로펌에 인턴 자리를 구하는 일에 집중하고, 그 경력을 발판으로 2학년 여름 방학에 법원 인턴으로 일하는 게 나을 것이다. 나는 열심히 생각한 후에 마음을 정했고, 법원 인턴 오퍼를 거절하는 이메일을 써 보냈다.

나는 밤을 새웠고, 소파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눈을 붙이고 나서, 입맛이 없는데도 억지로 시리얼과 과일로 아침을 먹었다. 윤은 분명 집에 돌아올 것이다. 나와 헤어지든 아니든 한 번은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침 수업에 가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윤은 내 예상대로 집에 돌아왔다. 나는 현관문 밖에서 서성이는 윤의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문을 열었다. 창백한 얼굴의 윤을 보자마자 습관대로 말이 나왔다.

“……걱정했어.”

윤은 나를 흘낏 보기만 할 뿐,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학교 갈 준비를 마치고 나왔다. 나는 현관에서 컨버스 스니커즈를 신는 윤에게 물었다.

“어디서 잤어?”

“수빈의 집.”

“그럴 것 같았어.”

윤이 노숙을 한 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윤은 냉장고에서 새 생수병을 하나 꺼냈고, 뚜껑을 따고 물을 마셨다. 나는 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다시 잘해 보자고 말하려고 했지만, 윤이 더 빨랐다. 그가 물을 마시고 나서 단숨에 말했다.

“집은 최대한 빨리 알아볼게.”

윤의 차가운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결심은 너무나 확고했다. 윤은 나와 헤어지고 싶어 했다. 나는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며 그를 한껏 조롱하고, 그와 주먹다짐까지 했다. 그는 그런 나에게 실망한 것이다.

한없는 자괴감이 들었다. 운동하던 시절에도 안 하던 짓을 애인에게 하다니. 나는 윤을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윤은 내 얼굴 대신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를 붙잡아야 하는데 섣불리 말했다가는 거절당할 것 같아서,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진심이 불쑥 나왔다.

“너는 정말 매정하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한 번을 돌아보지 않아.”

나는 그의 야속함에 슬퍼하며, 윤의 누나가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이가 이번 여름에 미국으로 출국할 때, 아빠, 나, 그리고 내 남편은 걔를 배웅하러 갔어요. 근데 출국장에 들어가기 전에 걔가, 저는 남자를 좋아하는 게 맞으니까 자기를 더는 찾지 말라고 하고 가버렸어요. 그 말에 우리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알아요? 근데……. 그게 정말 마지막이었어요. 그 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겼죠. 윤이는 핸드폰도, 모바일 메신저도, 이메일도, 은행 계좌도 완전히 닫고 한국을 떠난 거예요.’

환은 자신의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부드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단호하고 차갑고, 한번 마음이 떠나면 잡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나에게 두 번째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윤은 한국을 떠난 것처럼 내 곁을 완전히 떠나버릴지도 모른다. 이번 학기를 마치고 다른 주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버릴지도 모른다. 열일곱 살에 죽은 칼렙처럼 내 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내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끝이 아니라고. 윤이 집을 나가면 그를 잡을 길이 영영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윤을 집에 두어야 한다고, 그래야만 그를 붙잡을 기회가 생긴다고. 나는 직감을 따라, 새까맣게 그을린 피를 토할 것처럼 괴로운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너는 여기에 있어. 내가 나가는 게 맞아.”

“네가 왜?”

“너는 방학 동안에도 시그나기에 있겠지만, 나는 학기가 끝나면 오스틴에 가야 하니까.”

윤은 그제야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제도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를 찬 것은 그인데, 그는 나에게 차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윤의 얼굴을 보며, 나에게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조그마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윤에게 힘주어 말했다.

“너는 끝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야.”

“…….”

“나는 아니라고.”

내 기대와는 달리, 윤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그는 길에서 모르는 사람을 흘낏 보고 지나쳐 가는 것처럼 무심하게 나를 두고 가버렸다. 현관문이 닫혔다. 윤은 나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직감이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단기 임대 아파트를 구했다. 짐을 싸서 집을 나오던 날.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싶어서, 아니, 다시 잘해 보자고 말하고 싶어서 늦은 밤까지 윤을 기다렸다. 하지만 윤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허탈한 마음을 안고 집을 나왔다. 운전해서 단기 임대 아파트로 가는 동안,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윤이 집에 들어오지 않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윤에게 벌써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겼나? 새로운 남자 친구의 집에서 외박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쩌지?

* * *

봄 방학이 되었다. 나는 차를 운전해서 오스틴까지 갔다. 아침에 출발하여 종일 운전했는데, 저녁이 되어 본가에 도착했다.

엄마와 아빠는 나를 따스하게 반겨주었다. 특히, 엄마는 내 얼굴이 상했다며 안쓰러워했다. 그럴 만도 했다. 윤과 헤어진 후, 나는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밤마다 맥주를 마시고 잤고, 입맛이 없어서 식사량이 많이 줄었다. 엄마는 핼쑥해진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혼자 왔어? 남자 친구는?”

“헤어졌어요.”

“……저런.”

엄마는 나에게 한없이 다정하게 말했다. 엄마의 다정함에 눈물이 왈칵 나왔다. 엄마는 나와 윤을 받아들였지만 우리는 헤어졌다는 게 너무 슬펐다. 내가 울자, 엄마는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티슈 상자를 찾았다. 엄마가 티슈 상자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아빠가 나에게 티슈를 뽑아 내밀었다. 나는 아빠가 건넨 티슈를 받아 들고, 여섯 살 때 놀이 공원에서 엄마 아빠를 잃어버렸을 때보다 더 슬프게 울었다.

* * *

나는 부모님 앞에서 한참 울었다. 울고 나서 발렌티나 아줌마가 만든 저녁을 먹었다. 평소 같으면 입맛에 안 맞는다고 투덜거렸겠지만, 식욕을 잃으니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내 덩치에 맞는 맞춤 프레임과 최고급 매트리스 덕분에 잠자리가 편안한데도 잠이 오지 않아서 괴로웠다. 나는 윤의 체온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한참 뒤척이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들기 위해 맥주를 마시려고 부엌으로 내려가는데, 엄마와 아빠가 거실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두 분은 와인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알렉스 어떡해? 난 알렉스가 저렇게 서럽게 우는 건 처음 봤어. 애가 저녁도 거의 안 먹었잖아. 우리 애가 식사를 거르다니, 이게 보통 사건이야?”

“근데 그럴 만도 하잖아. 협박 사건도 있었고……. 남자 친구와 동거하다가 갈라섰고.”

“정말 속상하다.”

“나도.”

아빠가 말을 마치고, 부모님은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 사이에 얼마간 침묵이 흐르고, 엄마가 먼저 아빠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전에 알렉스 남자 친구를 만났다고 했지?”

“응.”

“어떤 애야?”

“키는 보통이고, 마른 체형이고. 아, 얼굴은 멀끔하게 잘생겼어.”

“아니, 생긴 거 말고. 나도 그 애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사진 봐서 알아.”

“음…… 그러면 뭘 말해야 하지? 서울이 고향인데, 어릴 때 노스웨스트 힐즈에 살았었대. 예의가 바른 것을 보니 가정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애 같았어. 사실 나는 그래서 안심했거든. 우리 아들이 이상한 놈한테 잘못 걸린 건 아니어서.”

“설마, 우리 옆 동네 노스웨스트 힐즈 말하는 거야?”

“응. 거기서 3년 살았대.”

“세상이 진짜 좁다. 지나가다가 한 번쯤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

“나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

“그 애, 너무 게이 같지는 않았어? 아니면 너무 요사스럽다거나…….”

“글쎄. 그냥……. 그 나이의 보통 남자애야. 게이인 것을 알고 봐서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모르고 봤으면 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그렇구나…… 나는…… 앞으로 알렉스가 외계인을 만나도 상관없는데…… 그래도 여자 외계인이었으면 좋겠어.”

엄마의 말을 듣고, 아빠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엄마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나.”

“알아. 근데 남자를 만나면…… 앞으로 알렉스가 얼마나 힘들지 아니까……. 이번 일도 그렇고…….”

“줄리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걱정하지 말자. 그리고 남자를 만난다 해도 어쩌겠어. 우리가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당신은 알렉스 일에는 마음이 너무 약해져.”

“그건 어쩔 수 없어. 내 눈에는 아직도 스물네 살이 아니라 네 살 같으니까.”

“그래, 그래.”

엄마와 아빠의 이야기를 듣다가,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한숨만 나왔다. 윤이 보고 싶었다. 윤에게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윤은 끝났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아니었다.

나는 윤과 함께 오스틴에 오고 싶었다. 그에게 우리 집 고양이들을 안겨 주고, 내 방을 보여 주고, 내 침대에 나란히 누워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엄마 아빠와 식사하고 즐겁게 지내고 싶었다. 윤과 음악 축제에 가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내 미련만이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 * *

엄마 아빠는 낡은 캠리를 보고 마음 아파하셨다. 나도 동감한다. 시그나기에서도 차를 열심히 타고 다닐 줄 알았다면 내 BMW를 팔지 않았을 것이다. 열여섯 살 생일에 아빠가 생일 선물로 사준 내 첫차. 딜러에게 공장에서 갓 출고된 차를 인도받고 비닐을 뜯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엄마와 아빠가 출근하고,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3월인데도 화씨 100도(35도)가 넘는 낮 기온 때문에 밖에 나다니기 힘들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고양이들을 끼고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를 보았다. 자막을 읽는 일에 익숙하지 않지만,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서 영어 자막을 켜고 봤다. 그럴 리 없겠지만, 한국 드라마를 계속 보다 보면 윤이 울면서 무슨 말을 했던 것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 * *

나는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가끔 이메일을 확인했다. 봄 방학 동안, 오스틴에 있는 로펌 두 군데와 면접이 잡혀 있었다. 아빠 회사와 다른 한 곳. 아빠 후광이라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빠 회사 면접은 내키지 않았다. 다른 곳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곳에 붙었으면 좋겠다.

* * *

오후에는 발렌티나 아줌마가 집으로 출근했다. 나는 아줌마에게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아줌마는 두 손 가득 홀푸드 마켓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고, 나를 보자마자 매우 반가워했다. 그녀는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나를 꽉 끌어안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렉스. 오랜만에 보니 좋네요.”

“저도 아줌마를 봐서 정말 좋아요. 팔로마 할머니는 어때요?”

“우리 엄마는 잘 지내요. 눈이 갑자기 침침해졌는데, 여사님이 병원비를 대주신다고 해서 다음다음 주에 델 새턴 병원11) 안과에 예약을 잡았어요.”

“그렇구나.”

나는 아줌마를 놓았다. 발렌티나 아줌마는 내 뺨을 두 손으로 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이구, 얼굴이 왜 이렇게 말랐어요? 학교생활이 힘든가?”

“학교생활은 할 만해요.”

“다행이네. 그나저나 알렉스 남자 친구는 어디 갔어요? 같이 온다더니? 나도 만나 보고 싶은데.”

“네?”

“의원님이 그러시던데요. 알렉스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아줌마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줌마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이 좆같은 집구석에는 비밀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난 거였다. 내 사생활이 알려져도 되는지 아닌지, 내 의사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나는 화를 억누르며 발렌티나 아줌마에게 물었다.

“……할아버지가 그랬어요?”

“네. 지난달 가족 식사 자리에서 의원님이 여사님과 싸우다가 실언을 하셨어요. 그래서 여사님은 어떻게 손자를 두고 그런 모욕적인 말을 할 수가 있냐고 노발대발하시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시고, 의원님과 이혼하신다고 지금 난리예요.”

그건 전혀 몰랐다. 친척들이 내 사생활을 알게 되었고, 할머니는 이혼을 선언하셨다니.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나서 아줌마에게 물었다.

“농담이죠?”

“아뇨. 진담이에요. 여사님이 오스틴에서 제일 비싼 이혼 변호사를 선임하셨고, 의원님은 여사님께 싹싹 빌고 계세요. 근데 알렉스도 알잖아요, 의원님은 여사님 없으면 안 되는 거. 아무튼, 알렉스 남자 친구는 어디 갔어요?”

“……안 왔어요.”

“아쉽다. 다음에는 데려와요.”

아줌마는 쾌활하게 말하며 장바구니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줌마와 함께 식료품을 정리했다. 냉장고를 열고 요거트를 차곡차곡 넣고 있는데, 아줌마가 과일을 정리하며 말했다.

“근데, 남자 친구와 연애는 해도 결혼은 하지 말아요. 결혼은 저주받은 제도야. 내가 전남편을 보면서 뼈저리게 느꼈어요. 결혼 제도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요. 인간은 평생 연애만 하면서 살아야 해.”

아줌마는 진심으로 투덜거렸다. 아줌마의 말을 듣고 폭소가 나왔다. 얼마 만에 이렇게 크게 웃는 것인지. 나는 눈물이 나도록 웃다가 아줌마에게 물었다.

“아줌마는 제가 남자를 만나도 괜찮아요?”

“네.”

“정말요?”

“나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 애……. 있잖아요. 알렉스 친구 중에…… 죽은 아이, 라이트 목사님 아들. 그 애 이름이 뭐더라?”

“칼렙.”

“그래요, 칼렙.”

아줌마는 큼직한 사과를 물에 씻으며 조심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알렉스의 마음이 다 보였어요.”

아줌마는 말을 마치고 슬프게 웃고 있었다. 나는 아줌마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나를 낳은 부모님도 몰랐던 것을, 심지어는 나 자신도 몰랐던 것을 아줌마가 알고 있었다니.

“어떻게 알았어요?”

내 질문을 듣고 아줌마는 나에게 사과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아줌마가 나를 올려다보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그걸 어떻게 몰라요, 내가 알렉스를 키웠는데.”

* * *

첫 번째 면접은 아빠 회사 면접이었다. 나는 엄마가 새로 사준 슈트를 입고 구두를 신었다. 엄마는 시간이 충분하면 맞춤 슈트를 해 줬을 거라고 말했다. 말을 마치고, 엄마는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뿌듯해했다.

심지어 엄마는 나를 회사까지 차로 태워다 주었다. 엄마의 렉서스는 조용하고 부드럽게 도로를 달렸고, 나는 비좁은 조수석에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래요.”

“우리 아들 잘생겼네.”

“엄마 닮아서 그래요.”

나는 심드렁하게 말하면서 창밖을 보았다. 내가 엄마를 많이 닮았으니 사실대로 말한 건데, 엄마가 내 말을 듣고 유난히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콜로라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며, 강을 따라 늘어선 저택들과 저택에 딸린 선착장들을 보았다. 그중에는 할아버지의 저택도 있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언제까지 할아버지의 자랑거리로 살아야 하나.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할아버지의 정치 행보에 끌려다니는 일은 그만하고 싶었다.

* * *

콜백 인터뷰는 내가 인턴으로 일할 팀의 파트너 변호사들과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인터뷰에 참석한 이들은 남자 파트너 한 명, 여자 파트너 한 명, 어소시에이트 변호사가 셋. 어소시에이트 변호사들은 전부 남자였다. 인터뷰 예상 질문과 답변을 준비해서 연습해 갔지만, 정작 그들은 나에게 엉뚱한 것만 물었다.

“이번 우승은 패트리어츠였잖아요. 사실 패트리어츠와 패커스 둘이 올라왔을 때부터 승부는 뻔했어요. 쿼터백인 에이든 라일리가 힘을 못 쓰니까요.”

“시즌 초기에는 라일리도 괜찮았어요. 근데 뒷심이 약하더라고요.”

“알렉스가 보기에는 왜 에이든 라일리의 뒷심이 약한 것 같아요?”

로펌 사람들은 나에게 미식축구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나는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라일리가 현재 겪고 있을 상황을 분석했고, 내 견해를 말했다.

“공격진이 약하니까 그렇죠. 패커스는 소도시 팀이고, 연고지 특성상 선수 수급이 어려우니까 좋은 공격진을 구축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라일리가 공격을 전부 책임지게 되고, 시즌 후반부로 가면 체력이 떨어지는 거죠.”

“그렇구나.”

“공격진들이 잘해 주면 쿼터백은 덜 힘들어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미식축구에 대해 한참 이야기했으니 이제는 일에 대해 질문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미식축구에 관해 물어보았다. 이번에는 내 학부 시절에 대해 물었다. 그들은 나에게 작년 슈퍼볼 MVP인 쿼터백 패트릭 맥마너스와 붙어본 적이 있냐고 질문했다. 그래서 우리는 동갑이고, 그가 다녔던 학교와 우리 학교가 같은 리그에 속해 있어서 몇 번 경기를 해봤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남자 파트너는 학부 시절에는 누가 더 잘했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웃으면서 사실을 말했다.

“경기 보셨으면 아실 텐데요. 대학 시절에는 제가 더 잘했죠.”

남자 변호사들과 세 시간쯤 미식축구에 대해 떠들고 나니 급격히 피곤해졌다. 이번에는 여성 파트너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성분이니 신선한 질문을 하겠지. 하지만 그녀의 질문은 내 기대를 산산조각냈다.

“롱혼스 출신이면 매튜 매커니히를 만난 적이 있겠네요?12)”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를 만난 적이 있던가? 생각해 보니, 그가 경기 후에 라커룸을 방문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네. 라커룸에서 몇 번 인사한 적이 있어요.”

“그분은 어때요? 저, 매커니히의 엄청난 팬이거든요.”

매튜 매커니히가 나온 영화를 많이 봤기 때문에 그가 누군지는 안다. 하지만 내가 그와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라커룸에서 만나 악수하고 인사 몇 마디를 나누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무난한 대답을 했다.

“좋은 분이세요. 매우 열정적인 팬이시고.”

“실제로 봐도 잘생겼어요?”

“네. 배우이시잖아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섯 명 중 유일한 여자분마저 나에게 미식축구에 대한 질문을 하다니. 덕분에 완전히 기가 질려버렸다.

* * *

면접이 끝나고 나니 긴장이 풀려 피곤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아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면접 끝났어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아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아빠의 전화를 받았다.

“아빠.”

-고생했다. 면접 힘들지? 아빠, 지금 나갈게. 저녁 같이 먹고 들어가자.

“그래요.”

회사 1층 로비에 앉아 아빠를 기다렸다. 10분 뒤. 아빠는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로비에 나타났다. 나와 아빠는 시내버스 803번을 타고 정류장 네 개를 지났고, 모교 정문 정류장에 내렸다. 아빠는 웃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학교 앞이니 맛집이 많겠지?”

“뭐 드시고 싶으세요?”

“글쎄, 뭐가 맛있어?”

아빠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시그나기에서는 먹기 힘든 음식들을 생각하다가 아빠에게 되물었다.

“일본 라멘 좋아하세요?”

“몇 번 먹어봤어.”

“퓨전 말고 정통 라멘이요. 돼지 등뼈 육수로 만든 거요.”

“그건 안 먹어 봤어.”

“거기 가요.”

나와 아빠는 일본 라멘집에 들어갔다. 서버가 우리에게 차가운 녹차를 가져다주었다. 녹차로 입을 축이고 메뉴판을 보았다. 서버가 우리 테이블로 왔고, 나는 돈코츠 라멘에 계란과 차슈, 숙주나물, 면을 잔뜩 추가했다. 아빠는 기본 돈코츠 라멘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계산대로 걸어갔고, 아빠는 나에게 면접에 대해 물었다.

“면접은 어땠어?”

“세 시간 내내 미식축구에 대해서만 물어보던데요.”

아빠는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박장대소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빠는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채, 나에게 물었다.

“넬도 미식축구에 대해서만 물어봤어?”

넬이 누구더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여성 파트너 변호사의 이름이 넬이었다. 나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아빠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빠는 씩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러면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그래요? 업무에 대한 질문은 하나도 하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1차 인터뷰에서 물어봤으니까 또 물어볼 필요 없지. 그리고 사회생활을 해 보면 가장 선호하는 인재상에 두 가지가 있어. 농장 출신과 운동선수 출신. 그중 하나면 무조건 선발하는데, 너는 운동선수 출신이잖아. 게다가 내 아들이고.”

내 아들. 아빠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나 같은 놈은 평생 할아버지와 아빠의 후광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윤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여전히 할아버지와 아빠의 후광을 입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기 싫은데, 아빠는 대놓고 후광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쯤 되면 후광을 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나는 잘 모르겠다.

* * *

아빠와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서 두 번째 면접을 준비했다. 이번 면접은 오전에 잡혀 있어서 일찍 일어나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우버를 타고 면접에 참석했다. 이번 면접은 어제 면접과 비교하면 분위기가 딱딱했고, 나는 그들의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하려고 애썼다. 다행히 이번 회사 사람들은 나를 아빠의 아들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봐주었다.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해 면접을 볼 수 있었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넷플릭스를 켰다.

* * *

한국 영화를 보다가 한국 드라마도 섞어 봤다. 한국 드라마는 대체로 재미있었다. 시대극과 수사물이 재미있었고, 잔잔한 로맨스 드라마도 좋았다. 출생의 비밀이 나오는 드라마는 작위적으로 느껴져서 피했다.

드라마 대사 중에 이런 대사가 있었다. 일이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계속 꼬인다고. 그 대사는 내 상황과 딱 맞아떨어졌다. 나는 요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웃팅 협박 사건을 겪었고, 내 잘못으로 인해 남자 친구에게 처참하게 차였다. 과연 내 상황은 그 잔인한 대사보다 더욱 잔인하게 흘러갔다. 나는 이메일을 확인하고 절망했다. 로펌 두 곳 중, 아빠 회사에만 합격한 것이다.

* * *

아빠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저녁 메뉴는 쿠스쿠스와 라따뚜이였다. 엄마가 나 때문에 발렌티나 아줌마에게 특별히 부탁한 프랑스 가정식 메뉴였다. 저녁을 먹다 말고, 아빠가 나에게 물었다.

“인턴은 어떻게 됐니?”

“아빠 회사에만 합격했어요.”

내가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자, 아빠는 피식 웃었다. 아빠는 현재 상황을 예상하였나 보다. 엄마는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이번 일로 배우는 게 있겠지.”

엄마의 말을 듣고, 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차피 나는 집안의 후광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사실을 인정하고 정면 돌파하라고.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나면 사람들이 조용해질 거라고.

나는 윤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기분이 나빠져서 포크로 닭고기 살을 쿡쿡 찔렀다. 상황이 이렇게 될 것을 내다보고 있었다니, 윤은 얄밉도록 영리한 사람이었다.

윤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너무 나빠서 주먹이 나갔다. 감히 내 신념을 모욕하는 말을 하다니. 아무리 애인이어도 할 말이 있고, 하지 못할 말이 있는데. 나는 그래서 화가 났고, 그와 주먹다짐을 하다가 그에게 얻어맞았고, 쌍코피를 흘리며 추하게 차였다. 지난 일을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포크와 칼로 닭고기 살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아빠가 내 등을 가볍게 때리며 말했다.

“닭고기가 너를 탈락시킨 건 아니잖아? 엄한 데 화풀이하지 말고 얼른 먹어.”

“……네.”

아빠조차 후광을 입는 일이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다. 엄마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의 생각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두 분이 보기에는 내가 별난 놈이겠지.

내 성격대로라면 아빠 회사 인턴도 하지 않는 것이 맞았지만, 이번 자리만큼은 도저히 걷어찰 수가 없었다. 올해 인턴 모집 기간은 끝났다. 만약 아빠 회사 인턴십마저 걷어차 버린다면, 다음 여름에 인턴십을 구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내년 여름에 인턴으로 일하지 못한다면, 취직이 힘들어질 것이고.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할아버지가 나를 돕겠다는 같잖은 이유로 오스틴에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면, 나는 이번 여름에 명망 높은 판사 밑에서 내가 원하는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 * *

봄 방학이 끝났다. 종일 운전해서 시그나기로 돌아왔다. 낯선 단기 임대 아파트에 혼자 들어갔다. 윤과 함께 살았던 아파트는 규정상 중도 계약 파기가 불가능해서 1년 계약이 끝날 때까지 월세를 꼬박꼬박 내야 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법적으로는 그 아파트의 주민이었다. 나 대신 아파트에 살 사람을 새로 구하면 돈을 아낄 수 있겠지만, 다른 놈이 윤과 같이 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소파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협박 사건을 겪으며 내가 한 일들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는 윤에게 협상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았고, 기사가 나갈 거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때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고 생각했고, 기사 이야기는 나도 입에 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오스틴 법원 인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윤에게 주먹을 쓰고 주제 파악이나 하라고 말한 것은 분명 내 잘못이었다. 윤이 내 속을 긁기는 했지만, 사실 그가 했던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윤이 맞는 말만 하니까 내가 속이 뜨끔해서 혼자 날뛰었을 뿐이다. 나는 차일 만한 짓만 골라서 한 게 맞았다.

나는 정말로 그와 다시 잘해 보고 싶었다. 집에 찾아가는 것은 이상하니까 그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은 어떨까? 그가 갈 법한 곳에 가서 그를 기다리는 것이다. 장을 보러 간다거나, 학교 체육관에 간다거나, 학식에 간다거나. 만약 그를 마주친다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나에게 기회를 달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윤은 나를 받아 주고, 우리는 다시 같이 사는 것이다.

나는 온갖 허황한 상상을 하다가 실소했다. 윤이 퍽이나 그러겠다. 윤은 무신론자인데. 그는 우연과 운명, 신의 뜻 따위는 믿지 않았다. 그는 필연과 인간의 의지, 이성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고향을 등졌고, 자신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는 강인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라서, 만약 내가 우연을 가장하여 그의 앞에 나타난다면, 나를 경찰에 스토킹으로 신고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한마디로, 나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봄 학기 11주차, 윤

둘이 살던 집에 혼자 돌아올 때마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어디로인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나에게는 돌아갈 곳도, 도망갈 곳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뿐만 아니라 밑도 끝도 없는 고독에 시달렸다. 알렉스와 함께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외로움이 나를 덮쳤다.

이제 나에게 남은 친구는 수빈 한 명뿐이었다. 3월 말이 되며, 낮 기온이 30도까지 오르는 화창한 날씨가 찾아왔다. 학교 잔디밭에 누워 노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나도 학부생들처럼 수빈과 신나게 놀고 싶었다. 그러나 수빈은 바빠서 나를 위해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나도 바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바쁘다고 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염없이 늘어놓고 싶었지만, 일상은 그럴 틈도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나는 아침에 등교해 밤 열 시에 하교할 때까지 내내 바빴다. 과제와 수업, 연구, 시험이 줄지어 있었다.

바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나를 반겨 주지 않았다. 알렉스가 있을 때는 집에 돌아가는 것이 기다려졌는데, 이제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집에 가면 알렉스의 빈자리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헤어진 이후, 가끔 집에 가기 싫은 날이면 공대 수면실에서 자고 바로 연구실로 출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다. 요새 하루에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도 많다는 것을. 지난 주말 내내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내 목소리를 들으면 어색하다는 것을. 이런 생활 방식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누나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누나가 보낸 것은 갓난아기 사진이었다. 아기의 발목에 누나의 이름이 적힌 하늘색 띠가 감겨 있었다. 아기 사진을 보자마자 크게 웃음이 나왔다. 누나가 아기를 낳았다. 나에게 조카가 생긴 것이다. 나는 누나가 보낸 메시지를 마저 읽었다.

-회사에서 야근하다가 갑자기 양수가 터지는 바람에 예정일보다 빨리 나오게 되었어.

-인사해, 쑥쑥이야.

쑥쑥이는 누나를 많이 닮았다. 갓난아기인데도 피부가 뽀얗고 누나처럼 속눈썹이 길었다. 쑥쑥이 사진을 보다가, 아기가 예정일보다 일찍 나왔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예정일은 4월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3월 말이었다. 아기는 괜찮은 걸까? 누나는 괜찮겠지?

누나가 걱정되어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한국 시각을 확인했다. 이곳이 아침이니 한국은 밤이었다. 누나는 아직 깨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누나가 자고 있다면 내일 아침에 답을 보내겠지. 나는 메시지를 보내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

-자?

내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1자가 사라졌다. 누나는 깨어 있었고, 바로 답을 보냈다.

-안 자.

-영상 통화 할 수 있어?

-내가 걸게.

누나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니 환자복을 입고 있는 누나의 얼굴이 보였다. 누나의 성격은 괄괄하지만, 얼굴은 하얗고 예쁘다. 그런데 누나의 예쁜 얼굴이 퉁퉁 부어 엉망이었다. 얼굴에 실핏줄이 군데군데 터졌고 눈의 흰자위도 실핏줄이 터져 빨갰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굴에 실핏줄이 터진 거지? 나는 누나의 얼굴을 보고 속상해서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누나 축하해.]

[그래. 고마워.]

누나의 목소리는 완전히 잠겨 있었다. 나는 누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아팠지?]

누나는 대답하는 대신, 웃기만 했다. 누나의 가느다란 팔목에 꽂힌 정맥 주사 바늘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누나가 웃으면서 말했다.

[콧구멍으로 수박이 나오는 기분이었어.]

[그게 가능해?]

[어. 가능하더라. 진통 다 하고 제왕절개를 하려니 너무 끔찍했어. 낳는 거보다 기르는 게 더 힘들다던데, 나는 벌써 죽을 맛이야. 그래서 둘째는 안 낳으려고.]

[고생했어.]

[그래…….]

누나가 조금씩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누나가 우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누나가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보고 싶어.]

누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옆에서 자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아, 울지 마. 힘든데 울면 어떡해. 그러나 누나는 계속 울었다.

[쑥쑥이를 보자마자 건강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엄마 생각이 났어. 엄마도 나랑 윤이를 이만큼 힘들게 낳았겠구나, 세상 모든 사람이 이렇게 힘들고 귀하게 태어난 거구나. 그래서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은데, 엄마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나는 엄마가 없잖아…… 다른 애기 엄마들은 엄마가 와서 챙겨 주는데…… 손주 보고 좋아하는데…… 엄마도 쑥쑥이 보면 좋아했을 텐데…….]

[누나, 울지 마.]

나는 누나를 다독이다가 울었다. 나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에게 전화해서 너무 힘들고 외롭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엄마가 없다. 누나에게라도 괴로운 마음을 말하고 싶었지만, 아이를 힘들게 낳고 입원해 있는 누나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혼자 외국에서 사는 것이 외롭고,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학생들과 경쟁하느라 힘들고, 아무도 없는 빈집에 돌아가는 것이 싫고, 아무도 나를 챙기고 보살펴 주지 않는 것이 지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엄마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다. 엄마가 보고 싶은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우리 둘 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폰을 붙잡고 한참 울었다.

* * *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일을 기념할 생각이 없었고, 평소와 똑같은 날로 여겼다. 나는 밍 교수님께 학회 참석을 위한 항공권 및 호텔 숙박비 영수증과 예약 내역을 가져다드렸다. 학교에서 학회 관련 경비를 지원해 주기 때문에, 내 돈은 얼마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교수님은 내가 드린 영수증과 예약 내역 서류에 클립을 꽂았다. 서류만 드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되는데, 홀린 듯이 교수님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밍 교수님.”

“네?”

“교수님도 박사 시절에 많이 외로우셨나요?”

밍 교수님은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나를 마주 보았다. 밍 교수님은 쌍꺼풀이 없는 눈을 깜빡였다.

“어떤 의미에서요?”

“주말에 집에 혼자 있거나, 저녁에 집에 돌아갈 때면 너무 외로워요. 하루에 한마디도 안 할 때도 있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문득 외로움이 사무칠 때가 있어요.”

“알렉스는 어디 갔어요?”

“……헤어졌어요.”

“아, 미안해요.”

교수님이 나에게 사과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교수님은 나를 보고 측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이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단순히 애인과 헤어져서 외로운 건 아닌 것 같고.”

“…….”

“맞죠?”

“네.”

“무슨 말을 해 줘야 하나.”

“…….”

교수님은 잠시 생각에 잠긴 채, 턱과 볼을 오른손으로 쓸었다. 교수님은 당신의 과거를 되짚어 보시는 것 같았다. 나는 교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얌전하게 기다렸다. 얼마 후, 교수님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잠시 내 박사 시절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맞아요, 나도 외로웠던 것 같아요. 중국어로 해도 어려운 공부를 영어로 하고 있고, 할 일은 매일 쏟아지고, 친구들과 가족들은 중국에 있고, 여기 사람들과는 문화가 달라서 공감대를 찾기 어렵고, 너무 바빠서 여가 없는 생활을 하는 데도 외로움은 끊임없이 스며들고. 그래서 나는 일찍 결혼했어요. 그런데 남편과 결혼하고, 졸업해서 포닥을 하고 교수가 되고, 아이를 가졌는데도 허한 기분이 가시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이 외로움의 원인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봤죠. 그러다가 답을 찾았어요. 우리는 이곳에서 이민자로 살고 있어서 외로운 거예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들만큼 이곳을 편하게 느낄 수는 없어요. 우리는 이곳에서 매일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죠. 여기 사람들에게는 일상인 것이 이민자인 우리에게는 투쟁이에요. 그러니 고독할 수밖에 없죠. 우리는 아마 이곳에 사는 내내 외로울 거예요.”

“…….”

“위로되는 말을 해 주지 못해 미안해요. 하지만 그게 사실이에요.”

교수님은 무척 미안해하며 말했다. 나는 교수님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멍하게 앉아 있었다. 기분이 나빠서는 아니었다. 교수님의 말씀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스와 헤어져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니. 이곳에서 사는 내내 한없는 외로움을 느껴야 하고, 외로움에는 약이 없다니. 그 말은 내가 기대했던 답이 아니었다.

* * *

그래도 생일이니까. 나는 생크림 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일찍 퇴근했다. 한국에서 내 돈을 주고 사 먹은 적은 없는 케이크인데도, 오늘은 그 케이크가 먹고 싶었다.

구글 맵으로 학교 근처에 있는 베이커리를 검색했다. 캠퍼스 근처에는 베이커리가 없었고, 걸어서는 한 시간, 차로는 10분이 걸리는 거리에 있는 부촌에 베이커리가 있었다.

우버를 타고 베이커리까지 갔다. 베이커리에 들어가니 고소하고 달콤한 빵 냄새가 났다. 쇼케이스 안에 진열된 케이크들을 살펴봤지만, 생크림 케이크는 없었다. 내가 애타게 쇼케이스 안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떤 케이크를 찾으세요?”

직원이 웃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생크림 케이크가 있나요?”

“생크림 케이크? 그런 케이크는 처음 들어보는데요. 혹시 사진이 있나요?”

“이렇게 생겼어요.”

나는 구글에서 생크림 케이크 사진을 찾아서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직원은 사진을 보자마자 내가 찾는 케이크를 알아보았다. 그녀가 웃으며 대답했다.

“와, 아시안 과일 케이크네요. 안타깝지만 우리 가게에 이건 없어요.”

“시그나기에 이것을 파는 데가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이런 케이크를 사고 싶으면 댈러스나 오스틴까지 가셔야 해요. 차이나타운 베이커리에 가면 판다고 들었어요.”

“그렇구나…….”

나는 케이크가 없다는 말을 듣고 실망했다. 케이크 한 조각을 사자고 댈러스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럴 시간도 돈도 없다. 그래서 울고 싶어졌다.

“과일 케이크가 먹고 싶은 거라면 체리 무스 케이크는 어때요? 우리 가게에서는 체리 무스 케이크가 유명해요.”

“그래요?”

직원은 웃으면서 케이크를 보여 주었다. 체리가 올라가 있는 새빨간 케이크가 무척 예뻤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체리 무스 케이크 두 조각을 사서 가게를 나왔다. 케이크 하나를 나 혼자 다 먹을 수는 없으니까.

* * *

집에 왔다.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 먹고, 체리 무스 케이크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남은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누나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생일 축하해.

-네 미국 계좌로 돈 부쳤으니까 그걸로 생일 선물 사.

-남자 친구랑 한인 식당 가서 미역국도 사 먹고.

누나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남자 친구라니. 우리는 헤어진 지 꽤 됐는데. 바빠서 정신이 없다 보니 누나에게 그와 헤어졌다고 말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를 그만 생각하고 누나를 생각했다. 누나가 내 생일을 챙겨 주어 정말 기뻤다.

나는 누나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누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환자복을 입은 누나의 얼굴이 화면 가득히 보였다. 얼굴의 부기가 많이 빠졌고, 실핏줄이 터졌던 것도 희미해졌다. 누나는 웃으며 물었다.

[일어났어?]

[누나, 여기는 저녁이야.]

[맞다. 시차가 있지. 내가 요새 이런다. 생일 축하해. 저녁은 먹었어?]

[라면 끓여 먹었어.]

[알렉스도 너무한다. 남자 친구가 생일을 맞았는데 라면을 먹게 한단 말이야?]

내가 라면을 먹었다고 말하자, 누나는 인상을 쓰며 화를 냈다. 나는 누나를 향해 씁쓸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리 헤어졌어.]

[언제?]

누나의 말을 듣고, 머릿속에서 날짜를 세어 보았다. 봄 방학 전에 헤어졌으니 헤어진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갔다. 시간이 참 빠르다고 생각하며, 나는 누나에게 말했다.

[한 달 조금 안 됐어.]

[저런. 둘이 죽고 못 살길래 결혼할 줄 알았더니. 그러면 지금은 솔로야?]

[응.]

[생일인데 외로워서 어떡하니.]

[근데 누나,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야?]

나는 누나가 내 정체성을 완전히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기뻐서 누나에게 괜히 투정을 부렸다. 그러자 누나가 웃으면서 나를 놀렸다.

[그래서 싫어?]

[싫은 건 아니고.]

[너는 모르겠지만, 너는 어릴 때부터 남자를 좋아하는 티가 났어. 나는 그런 너를 이해하지 못했고, 너를 감싸는 엄마도 이해할 수 없었어. 엄마는 어떻게 너를 감쌀 수 있을까? 그게 내 인생의 미스터리였지. 근데 쑥쑥이를 가지고 나서, 나는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어.]

[…….]

[애를 가지면 별의별 걱정을 다 하게 돼. 매일 배는 불러오는데, 얘가 손가락 발가락은 다 있을지, 어디 아픈 곳은 없을지, 쑥쑥이가 만약 나중에 공부를 못하면 어떡하지, 남자가 좋다고 하면 어떡하지? 온갖 걱정을 하다 보면 내 아이는 몸과 마음이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

[쑥쑥이를 품에 안자마자 알게 되었어.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말이구나. 나는 쑥쑥이의 엄마고, 쑥쑥이가 어떤 아이이든 쑥쑥이를 맹목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구나. 그러다가 깨달았지. 우리 엄마도 윤이에게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윤이가 어떤 아이이든 무조건 사랑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누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마음이 뭉클해져서 얼굴을 돌렸다. 울지 않으려고 눈물을 꾹 참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아. 아침 먹어야지. 오늘은 바지락 미역국이네. 아빠가 밥 말아 줄게. 먹기 싫어도 조금이라도 먹어야 해.]

멀리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누나에게 말을 거는 아빠의 목소리는 내가 아는 아빠의 목소리와 달랐다. 아빠는 누나에게 다정하고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누나에게 물었다.

[아빠 출근 안 했어?]

[산후조리 도와준다고 휴직했어. 아빠, 윤이랑 영상 통화하는 중인데, 오늘 윤이 생일이에요. 아빠도-]

[일 없다.]

아빠는 내 이름을 듣자마자 냉정하게 대꾸했다. 누나가 아빠를 다시 한번 불렀다. 이번에는 아빠가 역정을 내며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 없다고 했다.]

병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났다. 누나는 아빠의 반응에 민망해하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아빠의 냉담한 반응이 익숙했다. 나는 누나를 위로하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 누나.]

[이 멍청아, 이게 어떻게 괜찮아!]

누나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누나에게 익숙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완전히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익숙하다고 해서 아예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나 정말 괜찮아.]

나는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아빠의 생각이 바뀌기를 감히 바란 적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빠가 언젠가는 내 편이 될 거라고 자꾸 기대하게 되었다. 그는 나를 죽일 뻔한 사람인데도, 그가 나를 외면할 때마다 실망하면서도, 기대를 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낳아 준 사람이니까. 나는 그 사실에 매번 헛된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음울하고 씁쓸한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누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줘서 고마워, 누나.]

* * *

봄의 덴버는 겨울의 덴버와는 사뭇 달랐다. 가로수에 연두색 새순이 돋아 있었고, 꽃이 피고 있었다. 나는 밍 교수님과 함께 우버를 타고 학회에서 제휴한 호텔까지 갔다. 내가 조수석에 타고, 교수님이 뒷좌석에 앉으셨다.

우버 기사는 풍채 좋은 흑인 아저씨였다. 기사 아저씨는 우리에게 어디서 왔는지, 덴버에는 무슨 용건으로 왔는지 물으셨다. 교수님께서 우리는 학회에 참석하러 왔다고 대답한 후, 나에게 물으셨다.

“저녁은 내가 사 주고 싶은데, 맛집 아는 데 있어요? 나도 오랜만에 오는 거라서 어디가 괜찮은지 모르겠네.”

“리오하 가 보셨어요? 지중해 스타일 레스토랑인데 음식이 맛있어요.”

“거기 가 볼래요?”

“네.”

“호텔에 체크인하면 세 시 정도 될 테니까, 같이 덴버 시내 구경하고 저녁 먹읍시다. 괜찮죠?”

“네.”

우버가 호텔 앞에 멈추었다. 나와 교수님은 호텔에 체크인했다. 나는 배정된 방에 들어가 짐 정리를 마치고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교수님도 바로 호텔 로비로 내려오셨고, 우리는 호텔 밖으로 나왔다.

호텔 밖 풍경이 낯익었다.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은 16번가와 가까웠다. 호텔 앞에서 다니엘스 앤 피셔 타워가 바로 보이고, 포시즌스 호텔도 가깝게 보였다. 나는 낯익은 풍경을 보며 인상을 썼다.

“덴버에는 언제 왔었어요?”

“지난 크리스마스에요.”

내 대답을 듣고, 교수님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밍 교수님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교수님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리오하도 알렉스와 갔던 곳이에요?”

“네.”

“윤이 불편하면 거기에 안 가도 돼요. 나 혼자 식사하고, 구경도 혼자 할게요.”

“괜찮아요. 교수님.”

“정말?”

“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에요?”

교수님이 나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나는 교수님을 향해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과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교수님이 나보다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정도 나이가 많으실 텐데, 교수님은 뭐랄까…… 굉장히 엄마 같았다. 나를 세심하게 챙겨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엄격하게 가르쳐주시기도 하고. 그래서 교수님과 기꺼이 같이 다니고 싶었다. 나는 아이폰으로 구글 맵을 켜면서 교수님에게 질문했다.

“어디부터 갈까요?”

* * *

밍 교수님과 함께 다니엘스 앤 피셔 타워를 구경하고, 16번가를 같이 걸었다. 교수님은 거리를 걸으면서 나에게 이것저것을 물으셨다. 가족 관계는 어떤지, 고향은 어디인지, 취미는 무엇인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교수님을 처음 만난 게 1년 전인데, 나와 교수님은 이제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 역시 밍 교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밍 교수님은 베이징 출신이었고, 교수 부부의 외동딸이며, 취미는 넷플릭스 시청이었다. 남편은 홍콩 사람이고, 아들의 이름은 토마스였다.

나와 교수님은 리오하에 들어갔다. 나는 메뉴판을 보다가 알렉스가 시켰던 양고기 버거를 주문했고, 교수님은 내가 먹었던 파스타를 주문했다. 서버는 주문을 받고 나서, 메뉴판을 들고 걸어갔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지난번에 앉았던 자리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난번에는 저 자리에 앉았어요.”

“그때는 뭘 먹었어요?”

“교수님이 주문하신 파스타요. 그거 맛있어요.”

“다행이다.”

교수님이 살포시 웃으셔서 나도 따라 웃었다. 교수님은 나를 빤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돼요?”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아주 크게 싸웠어요. 걔는 아마 저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을걸요.”

“그랬구나. 화해할 생각은 없어요?”

“걔가 제정신이면 그럴 리 없어요.”

말을 하면서도 씁쓸한 웃음만 나왔다. 내가 아는 알렉스라면 그럴 것이다. 나는 먼저 야비하게 행동한 주제에, 울면서 패악을 부렸다. 알렉스는 그 꼴을 보고 정이 뚝 떨어졌을 것이다. 사랑의 콩깍지가 벗겨진 알렉스는 원래 성격대로 현실을 냉정하게 따져 봤겠지. 그는 아마 나와 헤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 그는 나에게 주제 파악이나 하라고 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주제 파악을 해야 했다. 나는 나를 잘 알았고, 알렉스를 잘 알았다. 그래서 나에게 기회가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 * *

발표는 오전에 잡혀 있었다. 나는 교수님과 함께 학회장에 가서 발표 자료를 세팅했고, 교수님의 곁에 앉아 있었다. 두 팀이 발표하고 나서 우리 차례가 되었다. 밍 교수님은 발표 자료를 켰다. 발표 자료 첫 장에 박혀 있는 내 이름이 새삼스레 신기했다.

교수님은 중국어 억양이 강한 영어로 유창하게 발표를 이어 나갔다. 교수님의 카리스마와 자신감이 보기 좋았다. 앞 발표자가 시간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에, 사회자가 교수님께 5분 안에 발표를 마무리해달라고 부탁했는데도, 교수님은 발표를 순조롭게 마쳤다.

다음 발표자가 기다리고 있어서 질의응답 시간은 짧게 진행되었다.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사회자가 다음 발표를 진행하라고 눈치를 주는 바람에 교수님은 연단에서 내려오셔야 했다. 교수님이 연단에서 내려오자마자,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다음 발표자가 나와 발표를 시작했다. 교수님은 내 곁에 앉으셨고, 생수병을 따서 물을 마셨다.

“윤이 대답할 기회가 없어서 아쉽네요.”

“괜찮아요. 언젠가 기회가 있겠죠.”

“그래요, 그때는 윤이 발표도 하는 거예요.”

나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서 교수님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시기상조이지 않나. 교수님이 너무 서두르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교수님은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셨다.

“윤은 할 수 있어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대답 대신 어색하게 하하하 웃었다.

* * *

교수님이 다른 교수님들과 점심을 드시는 동안, 나는 컨퍼런스 센터 카페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사 먹고, 구석에서 담배를 피웠다. 학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한국 사람이 꽤 있었고, 그 사람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한국 사람을 피해 다니던 버릇이 여기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끝없이 외로움을 타면서도 한국 사람은 피하려고 하다니. 내 꼴이 정말 우스웠다.

* * *

학기 중이라 학회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교수님은 내일 학부 수업이 있으시고, 나도 수업이 있었다. 우리는 학회 발표를 마치고 학회장에 머무르다가 저녁 비행기를 타고 시그나기에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짐을 찾고 우버를 부르려고 하는데, 교수님이 나를 붙잡았다.

“남편이 데리러 왔거든요. 윤도 태워 줄 테니까 같이 타고 가요.”

“정말 그래도 돼요?”

“그럼요.”

나는 교수님을 따라 걸어갔다. 교수님은 공항 입국장 앞에 서 있는 은색 인피니티를 향해 걸어갔다. 인피니티 운전석에서 교수님의 남편이 내렸다. 교수님과 남편은 중국어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교수님의 남편분이 나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우리는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남편분이 교수님의 짐과 내 짐을 트렁크에 실었고, 교수님은 조수석에 올라탔다. 나는 뒷좌석 문을 열려다가 조수석을 힐끔거렸다. 제자가 뒷좌석에 앉다니,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망설이다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뒷좌석 카시트에는 어린 남자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아이의 곁에 앉으니 누나와 쑥쑥이가 생각났다. 아이의 뽀얗고 포동포동한 뺨을 보며 웃는데, 교수님의 남편이 나에게 물었다.

“집이 어디예요?”

“엑설런트 플레이스요.”

“알았어요.”

교수님의 남편은 구글 맵에 내 주소를 입력하고 운전하기 시작했다. 집까지 가는 동안, 나는 잠든 아이를 관찰하다가 창밖을 보았다. 늦은 저녁인데도 서머타임 기간이라 해가 환하게 떠 있었다. 저녁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붉은 황무지에는 모래바람이 휘날렸다. 교수님의 남편이 모래바람을 보며 말했다.

“이제 곧 하부브13)가 오겠네요.”

“하부브가 뭐예요?”

“모래 폭풍이요. 황사보다 심하죠. 하부브가 발생하면, 그게 지나갈 때까지는 실내에 있어야 해요. 밖에 있으면 큰일 나요.”

“아…. 몰랐어요.”

“우리도 하부브는 텍사스에 와서 처음 봤어요.”

교수님의 남편은 친절하게 말했다. 교수님과 남편은 처음 하부브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야기했다. 최고 기온이 섭씨 40도를 넘는 여름 날씨도 놀랍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건성으로 대꾸하고 맞장구를 쳤다. 피곤해서 제대로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교수님의 남편은 운전석에서 내려서 내 짐을 트렁크에서 꺼내 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슈트 케이스를 들고 계단을 올라갔다.

* * *

슈트 케이스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옆집 여자가 계단참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여자에게서 마리화나 냄새가 났다. 나는 마리화나 냄새가 싫어서 얼굴을 찡그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옆집 현관문 앞에 깨진 스탠드와 부서진 탁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부부싸움을 얼마나 심하게 했길래.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간 집은 적막했다. 불을 켜지 않아 온통 깜깜했다. 깜깜한 게 싫어서 현관 등을 켰다. 등을 켠 순간, 집 안이 밝아졌다. 당연히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집 안에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울렸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순간,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오롯이 혼자였다. 이제 나에게는 화를 내고 싸울 사람조차 없었다. 나는 알렉스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처음부터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혼자 시작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고독에 차츰 익숙해지며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워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새로운 시작에는 처음부터 알렉스가 함께했다. 알렉스는 내가 고독해질 틈을 주지 않았고, 나는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무방비하게 이별했다.

나는 현관에 서서 심장께를 쥐어뜯으며 울었다. 첫 번째 실연이 워낙 지독해서, 앞으로 내 인생에 그보다 심한 고통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 실연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알렉스를 잃고도 괜찮을 거라 믿었던 내가 바보였다.

아예 처음부터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시험에 붙든 말든 관심을 두지 말지. 내가 외로워하든 말든 내버려 두고 가지. 룸메이트가 되자고 말하지 말지. 다정하게 대해 주지 말지.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말지. 그랬다면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텐데. 이렇게 슬퍼하지 않아도 될 텐데. 이렇게 아파하지 않아도 될 텐데. 너는 대체 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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