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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4/15)

4장

봄 학기 Ⅰ

봄 학기 0주차, 윤

1월 15일이 봄 학기 개강일이었다. 겨울 방학 기간은 한 달이라,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새 학기가 훌쩍 다가왔다.

우리가 여행을 다녀오는 사이, 새로운 이웃이 이사 왔다. 어째서인지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이상한 냄새가 났다. 풀을 태우는 것 같기도 하고, 구린 발 냄새 같기도 하고. 내가 그 냄새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알렉스는 그것이 대마초 냄새라고 알려 주었다.

대마초라니. 대마초가 합법인 주는 많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라 대마초를 마약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마약인 대마초를 처방전만 받으면 쉽게 구할 수 있다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가 미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대마초 냄새를 한번 인지하고 나니,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대마초 냄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냄새에 예민해졌다. 주말 저녁이면 새로운 이웃이 대마초를 태우는 연기와 냄새가 복도에 자욱해졌다. 나는 그 냄새가 몹시 불쾌해서 알렉스에게 경찰에 신고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알렉스는 신고해 봐야 소용없다고 했다. 신고해 봐야 몇 주 정도 감옥에 갔다 오거나 보석으로 금방 석방될 거라고, 이후에 보복을 당할 수도 있으니 무시하는 것이 낫다고 했다.

* * *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알렉스는 독감에 걸렸다. 알렉스는 열이 나고 오한에 시달리며 식은땀을 많이 흘렸다. 알렉스를 열심히 간호했지만, 열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알렉스의 옷을 전부 벗기고, 그의 몸을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겨울이 되니 근사하게 그을렸던 피부가 조금 밝아졌다. 알렉스의 젖꼭지와 포경하지 않은 크고 잘생긴 성기는 연한 분홍색이었다. 운동하던 시절, 알렉스는 어머니가 피부과에 끌고 가는 바람에 레이저 제모 시술을 받아서 온몸이 매끈하고 머리카락과 음모, 수염만 깔끔하게 나 있었다.

알렉스는 나보다 키가 한참 크고, 몸의 골격도 크고, 팔다리도 길었다. 손발 역시 정말 컸다. 손은 나보다 두 마디쯤 컸고, 발 크기는 300mm가 넘었다. 게다가 운동을 그만두었어도 근육량은 여전해서 보기보다 체중이 많이 나갔다. 얼마 전에 몸무게를 쟀을 때는 100kg 정도 되었다. 그나마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덩치가 작아 보이는데, 옷을 벗으면 겁이 날 정도로 덩치가 크고 온몸이 두툼했다.

알렉스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다 보니, 알렉스의 몸에 흉터가 많다는 사실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잠자리에서 낸 손톱자국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척추를 따라 한 뼘 넘게 나 있는 허리 수술 자국과 팔꿈치 수술 자국 외에도 자잘한 흉터가 많았다. 전부 운동하다가 다쳐서 난 상처였다. 흉터를 보니 마음이 아팠고, 알렉스가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던 오랜 시간의 무게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물수건으로 알렉스의 몸을 마저 닦고 이불을 덮어주고 실내 온도를 조금 낮추었다. 알렉스에게 흰 죽을 끓여 주려고 요리 블로그 레시피를 따라 했지만, 몽땅 태워 먹었다. 내 요리 실력으로 죽을 끓이는 것은 무리였다.

잠든 알렉스를 두고, 우버를 타고 월마트에 갔다. 미국에서는 아플 때 치킨 누들 수프를 먹는다고 들었기 때문에, 치킨 누들 수프를 사 주고 싶었다. 다행히 즉석식품 코너에 치킨 누들 수프가 있었다. 치킨 누들 수프를 열 캔 샀고, 약국에서 감기약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실에 가서 알렉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알렉스는 자고 있었다. 캔을 뜯고, 냄비에 치킨 누들 수프를 넣고 끓였다. 간을 보니 꽤 맛있었다. 직접 만들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이케아 베드 테이블에 치킨 누들 수프, 500mL 생수병, 빨대와 숟가락을 얹어 침대로 가져왔다. 바닥에 베드 테이블을 내려놓고 알렉스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약 먹고 자.”

“으응…….”

“알렉스, 뭘 먹어야 약도 먹지. 얼른.”

알렉스는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나는 침대 매트리스 위에 베드 테이블을 올려놓았다. 치킨 누들 수프를 보자마자, 알렉스는 아파서 힘이 없는데도 웃었다.

“네가 만든 거야?”

“그럴 리가. 월마트에서 샀어.”

“잘 먹을게.”

“물 먹고 먹어.”

나는 500mL 생수병 뚜껑을 따고 빨대를 꽂아 알렉스에게 내밀었다. 알렉스는 물을 마시고 나서, 힘없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 수프 맛을 보더니, 알렉스는 피식 웃었다.

“코가 막혀서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

숟가락을 쥔 알렉스의 커다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러다가 수프를 침대에 흘리겠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알렉스에게서 숟가락을 뺏었다. 수프를 한 숟가락 뜨고, 호호 불어 식힌 후에 알렉스에게 먹였다. 그러기를 몇 차례. 내가 알렉스에게 수프를 반쯤 먹였을 즈음, 그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다.”

“어?”

뭐가 좋다는 건지. 나는 빈 숟가락을 쥔 채 멍하게 되물었다. 알렉스는 나를 보고 기운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시잖아. 그래서 내가 아프면 발렌티나 아줌마가 돌봐주거나 나 혼자 견디거나 했어. 근데 그거, 생각보다 서럽거든.”

“…….”

“근데 오늘은 네가 곁에 있어서 아파도 괜찮아.”

알렉스의 뺨을 손으로 쓸어보니, 아파서 얼굴이 꺼끌꺼끌했다. 알렉스는 제 얼굴을 만지는 내 손을 붙잡아 손바닥과 손가락 끝에 키스했다. 다정한 키스를 받고, 내 마음은 온통 간질간질해졌다. 나는 알렉스의 뺨에 뽀뽀하고 말했다.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데, 나까지 독감에 걸리면 안 되니까 참는 거야.”

“아쉽다.”

“내일은 병원에 가.”

“……이 정도로 병원에 가지는 않아.”

“너는 의료보험이 있잖아. 그리고 조금이라도 아프면 병원에 가는 게 맞아.”

“알았어.”

알렉스는 치킨 누들 수프를 전부 먹고 약까지 먹었다. 나는 베드 테이블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설거지를 마치고 침실로 가니, 알렉스는 졸고 있었다. 알렉스의 곁에 누워 그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고, 그가 잠들 때까지 등을 쓸어 주었다.

“얼른 낫기를 바라.”

나는 알렉스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알렉스는 잠결에도 희미하게 웃었다.

* * *

알렉스가 잠들고 나서, 빨래를 마치고 건조기를 돌렸다. 집안일을 마치고 샤워하고 소파에 누워 알렉스의 아이패드로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았다. 한창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복도는 조용했다. 연기나 탄내가 나지도 않아서, 현관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알렉스는 실내복 위에 점퍼를 걸치고 비틀거리며 침실에서 나왔다. 열이 나는 얼굴이 시뻘겠다. 나는 알렉스를 도로 침실 안으로 들여보내며 말했다.

“누워 있어. 불이 난 건지 뭔지 아직 몰라.”

“윤. 콜록, 이럴 때는, 콜록, 일단 대피하는 거야.”

알렉스는 롱패딩을 가져와 나에게 입혔다. 나는 알렉스가 과민 반응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알렉스는 막무가내였다. 서랍장 안에 넣어 둔 신분증과 이민 서류를 챙기고 싶었지만, 알렉스는 내 팔목을 손에 쥐고 열쇠만 챙겨 집에서 나왔다.

알렉스는 찬 바람을 쐬자마자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머플러를 챙겨와 알렉스에게 둘러주고 싶었지만, 화재경보기가 계속 울리고 있어서 집에 갈 수 없었다.

15분이 지나도록 화재경보기만 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누가 장난으로 화재경보기를 울린 것이 아닐까? 나는 예전 일을 생각하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오작동인가 봐.”

“이번에는?”

알렉스가 내 말을 듣자마자 놀라면서 되물었다. 나는 알렉스의 말에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네가 오스틴에 갔을 때는 진짜였어. 그때는 누가 음식을 스토브에 올려놓은 것을 까먹고 잠드는 바람에 울렸거든. 소방차도 오고, 소방관들이 한참 작업하더라.”

내 말을 듣고, 알렉스는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콱 잡더니 나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왜 말 안 했어?”

“잊고 있었어.”

“세상에. 전혀 몰랐네.”

알렉스는 쉰 목소리로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알렉스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너는 가끔 너무 무신경해.”

“미안…….”

“나는 네가 스스로에 대해 무신경할 때마다 걱정돼.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무조건 대피하는 거야.”

알렉스는 눈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나는 아픈 사람을 걱정시킨 것이 미안해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이내 화재경보기가 꺼졌고, 우리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알렉스는 침대에 누웠고, 나는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방을 나가려고 하는데, 알렉스가 내 위팔을 잡았다.

“같이 있자.”

“너한테 독감 옮으면 어떡해?”

“그러면 내가 책임질게.”

알렉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가 나를 책임지겠다는 말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알렉스의 곁에 누웠다. 알렉스는 나를 품에 안고 잠을 청하더니 금방 잠들었다. 알렉스의 몸에서 열이 끓어서 너무 더웠지만, 나는 자리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봄 학기 0주차, 알렉스

한겨울이 되니 비가 자주 왔다. 일주일에 닷새 정도 맑고, 이틀 정도 비가 내리는 것이 텍사스의 일반적인 겨울 날씨였다. 내가 살았던 오스틴의 평년 겨울 기온은 화씨 40도와 50도 사이(섭씨 영상 5도에서 10도 정도)를 오가는 정도이지만, 이곳에서는 비가 내리면 기온이 뚝 떨어져서 추워졌다.

나는 비가 와도 강수량이 많지 않으면 우산을 쓰지 않는데, 윤은 내가 우산을 쓰지 않으면 화를 냈다. 독감에 걸렸다가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왜 객기를 부리느냐고 했다. 윤이 몇 번 화를 내고 나서, 나는 비가 내리면 우산을 꼬박꼬박 쓰게 되었다.

사실, 이 동네에서 비가 온다고 우산을 쓰는 사람은 동양인 유학생뿐이기 때문에, 내가 우산을 쓰고 다니면 무척 눈에 띄었다. 내가 가끔 우산을 귀찮아하면, 윤은 나에게 긴 우산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처럼 잘생긴 애들이 우산을 쓰면 멋있어 보여. 그러니까 나를 위해 우산을 써줘.”

윤이 웃으며 말하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연인이 다정하게 부탁하는데, 우산을 쓰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우산 쓰는 일이 뭐 대수라고.

* * *

윤은 이웃집에서 나는 냄새가 마리화나 냄새라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그 사실을 알려 주자, 그는 태어나서 마리화나 냄새를 처음 맡아 봤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흔하게 맡을 수 있는 냄새이지만, 한국에서는 마리화나가 불법이라니 그럴 수 있었다.

나는 이웃집에서 마리화나 냄새가 날 때마다 짜증이 났다. 의료용 마리화나가 합법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이웃들은 마리화나에 의존하기에는 매우 젊고 건강해 보였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아플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주말만 되면 파티를 열었다. 그들은 마리화나를 피우고 밤늦게까지 노래를 틀고 떠들고 싸우고 울고불고 놀았고, 새벽이 되어야 조용해졌다.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복도에서 마리화나 냄새가 났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비뚤어진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윤은 이웃들을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말렸다. 마리화나를 피우고 싸운다고 경찰에 신고해 봐야 벌금형이나 나올까? 고작 마리화나 때문에 싸움을 걸었다가 이웃들이 우리 집에 총을 들고 찾아오면 곤란하니 소극적인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위험해지는 일은 피하는 게 좋으니까.

* * *

개강하는 첫 주에 수빈을 초대해서 개강 파티를 하자고 윤에게 말했다. 윤은 내 말을 듣고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윤이 나에게 물었다.

“수빈이 불편한 것 아니었어?”

“이제는 아니야.”

윤에게 다 들었다. 수빈은 윤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추수 감사절에 우리가 키스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나는 수빈에게 승자의 위엄을 보여 주고 싶었고, 그녀가 윤의 유일한 친구이니 그녀에게 잘해 주고 싶었다.

“수빈에게 음식 알레르기 있는지 물어봐.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물어보고.”

“진짜 물어본다?”

“응.”

몇 분 뒤. 윤은 수빈에게 알레르기가 없고, 가리는 음식이 없다고 알려 주었다. 수빈과 우리는 일정을 조율했다. 우리는 개강하는 주 금요일 저녁에 개강 파티를 하기로 했다. 파티 음식으로는 라따뚜이와 소고기 쿠스쿠스, 염소 치즈와 무화과를 넣은 샐러드를 만들기로 했다.

나는 쿠스쿠스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 아마존으로 터머릭과 샤프란까지 샀다. 쿠스쿠스를 만들기 위해 양념한 고기를 프라이팬에 볶았고, 볶은 고기와 프라이팬에 묻은 양념과 육즙을 긁어 프레셔 쿠커에 넣고 끓였다. 윤은 나를 도와 라따뚜이에 쓰일 채소와 샐러드 채소, 무화과를 씻고 손질하고 썰었다. 솔직히 윤의 칼 솜씨는 형편없었지만, 내가 가르쳐준 것을 활용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특했다.

고기가 다 끓었을 즈음, 수빈이 와인 한 병을 들고 집을 방문했다. 나는 윤에게 수빈을 맡기고 요리에 집중했다. 등 뒤에서 두 사람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지만, 거슬리지 않았다.

[우와, 냄새 좋다. 뭐 만드는 거야?]

[라따뚜이랑 쿠스쿠스? 그리고 샐러드.]

[그게 뭐야? 처음 들어봐.]

[나도 몰라.]

[알렉스가 요리를 잘하나 봐.]

[응. 잘해.]

[기대되네.]

얼마 뒤, 윤은 수빈을 거실에 두고 주방에 왔다. 한창 쿠스쿠스에 버터를 넣어 볶고 있는데, 윤이 나에게 물었다.

“내가 도울 게 있을까?”

“식탁에 자리 세팅해 줄래?”

“응.”

나는 슬쩍 수빈이 있는 쪽을 보았다. 수빈은 아이폰을 보다가 가끔 주방 쪽을 보았다. 수빈이 주방을 보는 틈을 노려, 윤에게 무화과 샐러드 접시를 건네며 그의 뺨에 키스했다. 윤이 얼굴을 붉히며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부엌에 돌아오자 라따뚜이가 든 프라이팬을 그에게 건넸고, 이번에는 등허리를 만졌다. 윤이 식탁에 포크와 나이프, 앞접시를 세팅하는 모습을 보며, 쿠스쿠스를 접시 세 개에 나누어 담았다.

요리가 완성되었고, 우리 셋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나와 윤이 나란히 앉고, 수빈이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는 수빈이 가져온 와인을 나누어 마시며 저녁을 먹었다. 각자의 학교생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신년 계획에 관해 이야기했다.

윤은 나와 수빈과 이야기를 하고 놀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대화보다 수빈 앞에서 윤을 만지거나, 윤이 나를 만지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명색이 신사인 내가 숙녀인 수빈에게 유치하게 구는 꼴이 볼썽사납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수빈은 한때 나의 경쟁자였고, 나는 그녀와의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었다. 그러니 승자의 위엄을 그녀에게 과시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이 상황에 웃음이 났다. 반년 전에는 이런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한 남자의 마음을 두고 여자와 경쟁하다가, 그 경쟁에서 이겼다고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기뻐하게 되다니. 세상일은 도통 알 수가 없다.

봄 학기 0-1주차, 윤

식사는 정말 맛있었다. 알렉스는 오늘 만든 요리가 프랑스 가정식이고, 간단한 레시피에 비해 맛은 대단한 메뉴라고도 자평했다.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 알렉스가 자신의 요리 실력에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했다. 식사하고 대화를 하는 동안, 수빈이 우리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수빈이 코트를 입었고, 알렉스는 식탁 위에 있는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수빈을 그녀가 사는 아파트 입구까지 바래다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집을 나섰다. 집에 가면 산처럼 쌓여 있는 설거지는 내가 정리해서 식기 세척기에 넣어야 할 것이다.

[오늘 재미있었어. 음식도 맛있고. 알렉스가 평소에도 밥을 많이 하나 봐?]

[응. 거의 알렉스가 해.]

[오늘 보니까, 알렉스가 너를 많이 좋아하더라.]

수빈의 말은 놀라웠다. 내가 알렉스를 더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가끔 우리의 마음에 온도 차가 있다고 느끼기도 했는데, 수빈은 반대라고 말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좋겠네. 주윤.]

[……정말 그래 보여?]

[응. 내가 거짓말을 왜 하겠어?]

수빈은 킥킥 웃었고, 나는 수빈을 보았다. 그녀는 잦은 염색으로 상한 머리카락을 모두 자르고 검은색으로 염색했다. 수빈은 단발머리를 겨울바람에 흩날리며 웃고 있었지만, 나는 수빈 앞에서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면서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수빈에게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을 했다.

[얼마 전에 누나가 우리 집에 왔었어. 네가 아파트를 알려 줬다며.]

[그분, 정말 친누나 맞아?]

[응.]

[다행이다.]

[뭐가?]

[그분이 나한테 전화해서 네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는데 너에게 들은 것도 없고, 진짜 네 누나인지도 알 수가 없어서 안 알려 주려고 했거든. 그러다가 아파트 단지까지만 알려 줬는데 그게 너무 마음에 걸렸어. 진짜 누나가 아니면 어떡하나 싶고.]

[응. 네 덕분에 잘 만났어.]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미안해. 다음에는 그런 일 없도록 할게.]

수빈은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수빈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도 그랬다. 그 일은 우리 누나가 독한 사람이라 수빈에게 집요하게 군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아는 한, 어지간한 사람은 누나를 말릴 수 없었다.

* * *

수빈을 데려다주고 집에 들어갔다. 알렉스는 저녁 먹은 그릇들을 전부 개수대에 갖다 놓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내가 알렉스의 곁에 앉자, 알렉스는 나를 꽉 끌어안으며 물었다.

“수빈은 집에 갔어?”

“응.”

알렉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니, 가느다랗고 곱슬곱슬한 금발이 손에 감겼다.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날씨가 추워?”

“아니.”

“몸이 찬데.”

“괜찮아.”

나는 패딩 점퍼를 벗어 옆에 내려놓고, 알렉스에게 다시 안겼다. 알렉스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기대자, 그는 내 등을 가만가만 토닥였다. 나는 알렉스에게 속삭였다.

“오늘 정말 고마워. 음식도 맛있고, 내 친구도 잘 대해 줘서.”

“별말씀을.”

나는 얼굴을 들어 알렉스의 뺨에 키스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숙여 나를 빤히 보다가 내 입술에 키스했다. 누나가 다녀가면서 알렉스가 나를 애인이라 여기게 된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알렉스가 여자 친구를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며 부러워했던 나였는데, 이제는 내가 그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누군가에게 이만한 사랑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절절하게 사랑했던 남자 친구도 나를 이렇게 소중하게 대해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요즘 느끼는 행복이 가끔 낯설었다.

* * *

개강 첫 주, 학과장 교수님에게 가을 학기 조교 평가 보고서를 받았다. 밍 교수님은 나에게 최고 점수를 주셨다. 밍 교수님께서는 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주어진 조교 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연구 보조도 열심히 했다고 평가하셨다.

한국에서 똑똑하고 유능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에 온 이후, 내가 여기에서 정말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어 매일 걱정하고 긴장했다. 교수님들은 나에게 웃으면서 잘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웃음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인지 예의상 짓는 웃음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불안했다.

그래서 보고서를 받고 나니 뿌듯했고, 안심되었다. 다행히 나는 정말 잘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고, 알렉스가 나를 많이 도와준 덕분이었다.

아무튼, 오피스 아워에 학생들의 질문에 답해 주는 것은 조교 업무 중 하나였다. 나는 프로그래밍 과제 질의응답을 진행하기 위해 빈 강의실을 예약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왔다 가고, 다시 학생들이 몰려왔다. 오늘따라 많은 학생이 나에게 질문을 하러 왔다.

나는 학생들이 마구 던지는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고 맞는 답을 설명해 주려고 애썼다. 어려운 과제가 아니라서 구글에서 찾아보고 스스로 생각하면 대부분 답을 찾을 수 있는데, 학부생들은 조금이라도 모르겠다 싶으면 냅다 질문부터 했다. 그래서 학부생들이 하는 질문 중에는 너무 쉽고 간단한 질문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학생들은 끼리끼리 모여 질문하러 왔다. 백인은 백인끼리, 흑인은 흑인끼리, 히스패닉은 히스패닉끼리, 동양인은 동양인끼리. 대놓고 하는 인종 차별은 거의 없는데도, 서로 다른 인종끼리 섞여 친하게 지내는 일은 드물었다.

생각해 보니, 교우 관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월마트에서도 서로 인종이 다른 커플이나 부부는 보기 힘들었다. 동양인과 백인 커플은 정말 극소수였다. 그제야 나는 알렉스의 성향이 특이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얘는 무슨 기준으로 사람을 사귀는 거지? 진짜 특이하네. 그래서 나와 사귀나?

* * *

사막 한복판에 있는 시그나기의 날씨는 극단적이고 변덕스러웠다. 겨울인데도 영하 5도 밑으로 내려가는 날은 드물고, 낮이 되면 영상 15도까지 올라갈 때도 많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최고 기온이 영상 20도를 넘어가거나 최저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떨어지는 날이 오기도 했다. 여름에는 최저 기온이 20도 정도이지만 최고 기온은 40도가 넘어갔다. 가끔 비가 내리면, 최고 기온이 30도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추워졌다가 갑자기 더워지기도 하고, 더웠다가 갑자기 추워지기도 했다. 아침에 비가 아무리 세차게 내려도 점심때가 되면 비가 모두 말라버리기도 했다.

오늘은 보기 드물게 추운 날이었다. 요즘 우리는 등하교를 함께하고 있었다. 오늘처럼 추운 날에는 알렉스가 운전해서 나를 공학관 앞에 내려 주고, 저녁에 집에 갈 때는 데리러 왔다.

하교 시간이 되었다. 노트북과 짐을 싸서 백팩에 넣고 공학관 로비로 내려갔다. 알렉스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렉스는 랄프 로렌 깅엄 체크 셔츠 위에 풀오버 스웨터를 입고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 밑에는 슬림한 핏의 어두운색 바지를 입고 레이스업 워커를 신고 있었다. 추위를 많이 타서, 롱패딩에 기모 양말까지 신고 나온 나에 비하면 옷차림이 가벼웠다.

우리는 공학관을 나와 주차장까지 걸어갔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져서 저녁 여섯 시인데도 어두웠다. 게다가 한국보다 가로등이 적어서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우리는 날이 환하거나 사람들이 많을 때는 밖에서 스킨십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밤이나 사람이 없을 때는 달랐다.

나는 어둠을 틈타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알렉스는 내 손을 마주 잡아 깍지를 꼈고, 우리는 손을 맞잡고 차까지 걸어갔다. 알렉스의 차가 보이고, 그는 운전석 문을 열기 위해 내 손을 놓고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알렉스를 붙잡았다. 매우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있었다. 여주인공이 독서실 바닥에서 자다가 유명한 초콜릿 광고의 주인공이 되는 꿈을 꾸는 장면이었다. 그녀는 꿈속에서 광고의 주인공이 되어, 트렌치코트를 입은 남자의 품에 코트째로 안겨 있었다. 그 광고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를 보고 그 광고가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남자 친구를 다시 사귀게 된다면 똑같이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알렉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 이마에 알렉스의 입술이 스쳤다. 알렉스에게서 바람 냄새, 섬유 유연제와 스킨 냄새가 어우러진 좋은 냄새가 났다. 내가 좋아하는 냄새를 맡으면서 코트 안으로 파고들자, 알렉스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물었다.

“추워?”

“아니.”

알렉스는 코트 안에 들어 있는 나를 마주 안아 주었다. 누가 우리를 보고 더럽다고 손가락질할까 봐 잠시 걱정되었지만, 안겨 있는 기분이 좋아서 가만히 있었다.

“예전에 이런 장면을 드라마에서 봤거든. 그래서 나도 해 보고 싶었어.”

“어떤 장면이었는데?”

“어떤 남자가 애인을 코트로 싸서 안아 주는 거야.”

“그거 말고 나와 해 보고 싶은 건 없고?”

“어?”

알렉스를 올려다보니, 알렉스의 눈에 비친 나는 헤헤 웃고 있었다. 그리고 알렉스는 나를 보며 씩 웃고 있었다.

“해 보고 싶은 거라니?”

“말 그대로야.”

“이대로도 좋은데. 뭐가 더 있어야 해?”

알렉스는 내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더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하자 알렉스가 못내 섭섭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알렉스가 나에게 먼저 키스했다. 알렉스는 키스하면서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고, 나는 알렉스의 등허리를 꽉 안았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키스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 * *

한참 키스하는데 바람이 너무 차가웠다. 그래서 우리는 차에 탔고, 차 안에서 계속 키스했다. 입술이 부을 만큼 키스하고 나서, 집에 오는 길에 저녁으로 부리또를 사 먹었다.

우리는 집에 도착해서 추위에 식은 몸을 녹이기 위해 같이 샤워했다. 생각해 보니, 요새 거의 매일 함께 씻고 있었다. 샤워가 섹스로 이어지는 일도 흔했다. 우리는 젊고 겨울밤은 기니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샤워하는 동안 묘한 기류가 흘렀다. 샤워 후, 나는 목욕 가운만 걸치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드로즈만 입고 있던 알렉스가 수건을 빨래통에 휙 던지고, 나를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알렉스는 내 손에 들린 드라이기를 서랍장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목욕 가운을 벗기고 내 어깨와 목덜미에 키스했다.

가끔 본인이 급하면 거칠게 하지만, 알렉스는 대체로 침대에서 다정했다. 오늘은 다정한 날이었다. 알렉스는 내 몸이 충분히 녹아내릴 때까지 달콤한 키스와 애무를 퍼붓다가, 입구를 열고 들어와서 하나가 되고 몸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알렉스의 목에 매달린 채,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섹스에 무섭게 열중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아까 했던 생각이 내 머리를 잠식하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알렉스가 움직임을 늦추며 물었다.

“힘들어?”

“아니.”

내 반응을 살피던 알렉스는 내 이마에 쪽 입 맞추고, 내 입술을 빨면서 다시 움직였다. 나는 집중하려고 노력하며 알렉스의 허리를 감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흔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 날 듯 말 듯 하는데, 갑자기 알렉스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알렉스가 내벽의 느끼는 지점을 거푸 찍어 올렸고, 나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알렉스!”

“딴생각하지 말고.”

“그런 거 아니, 읍!”

알렉스가 내 입술에 키스했다. 내가 집중하지 못하자 심술이 났는지, 알렉스는 제멋대로 굴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키스를 멈추고, 커다란 두 손으로 내 아랫배를 누르며 끝의 끝까지 들어오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삽입이 너무 깊고, 알렉스가 배를 세게 누르는 바람에 배 속이 좁아져 입으로 알렉스의 성기를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가 정말로 헛구역질이 나왔다.

나는 괴로움과 쾌감을 동시에 느끼며 울었다. 알렉스는 땀에 젖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숨을 헐떡이며 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았다. 내가 몸부림을 치고 알렉스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그는 절대 멈추지 않았다. 알렉스는 내 울음 섞인 신음과 매트리스가 삐걱거리는 소리에 더욱 흥분했다. 알렉스가 내 배를 손으로 세게 압박하며 고환을 구멍에 욱여넣을 것처럼 빠르고 거칠게 박기 시작했고, 나는 침대 헤드에 머리를 쿵쿵 부딪쳤다.

“아파-”

“알았어.”

알렉스가 자세를 낮추고 제 양팔에 내 다리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두 손으로 내 정수리를 감싸 쥐었다. 그 바람에 내 무릎이 매트리스에 닿을 정도로 몸이 접히고 엉덩이가 더욱 위로 들렸다. 나보다 몸이 40kg이나 무거운 알렉스가 체중을 실어 짓누르면 숨이 막혔다. 알렉스가 정신없이 허리를 칠 때마다, 알렉스의 땀이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 내가 엉엉 우는데도, 알렉스는 씩 웃으며 내 뺨을 혀로 핥아 올릴 뿐이었다.

“더 울어봐.”

알렉스가 말했다. 나는 울먹이며 고개를 젓다가 알렉스의 목을 꽉 안고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러자 그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고, 곧 사정할 것 같았다. 코끝이 스칠 만큼 얼굴을 가깝게 마주 본 채, 나는 알렉스의 무섭도록 집중한 얼굴을 바라보았고 알렉스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의 입술을 물어뜯으며 난폭하게 키스하자 알렉스가 입 안에서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있는 힘껏 알렉스의 혀와 입 안을 빠는 동안, 피 맛이 도는 혀끝의 쾌감과 함께 사정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사정했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했다가 힘이 풀리니 전신이 찌릿찌릿했다. 내 배에 정액이 쏟아지고, 내 안에서 알렉스의 페니스가 꿈틀거렸다. 콘돔 때문에 정액을 느낄 수는 없었다. 알렉스의 페니스가 섹스를 마무리하려는 듯 내벽을 몇 번 더 긁어내렸고, 나는 사정의 여운으로 내벽이 예민해진 탓에 나도 모르게 간드러진 신음을 흘렸다.

우리는 숨을 헐떡이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알렉스의 거친 숨결과 무게가 나를 덮쳤다. 내 머릿속이 뿌옇고 몽롱해졌다. 알렉스가 내 귓가와 볼에 쪽쪽 입을 맞추는 소리도 멀게 들렸다. 알렉스가 나를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속삭였지만, 대답할 힘이 없어서 고개만 아주 작게 끄덕였다. 알렉스가 나에게 말했다.

“내 눈을 보고 사랑한다고 말해 줘.”

고개를 살짝 비틀어 알렉스의 얼굴을 바라보니, 알렉스는 상기된 얼굴로 씩 웃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알렉스의 땀에 젖은 뺨을 만지며 말했다.

[사랑해.]

언어는 다르지만, 내 감정은 분명히 전해졌다. 알렉스가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행복하게 웃으며 나에게 키스했다. 키스가 끝나고, 알렉스는 나를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며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알렉스를 보며 깨달았다. 내가 알렉스에게 원하는 것은 가족이었다.

처음부터 가족의 의미를 몰랐다면 가족을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엄마가 있었다. 가족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엄마가 있어서 견딜 만했다. 그러다가 나는 엄마를 잃고 혼자가 되었다. 엄마가 없으니 나를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예전에 돌아가셨고, 이모들은 일과 결혼 생활 때문에 정신없이 바빠서 나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정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누군가의 가족이 되고 싶었다. 나를 영원히 사랑하고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을 갖고 싶었고, 나 또한 그 사람에게 내 모든 것을 주고 싶고, 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가족들과는 같이 있어도 외로웠기에, 한국을 떠나면 덜 외로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도 외로웠다.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소외감이나, 영어로 의사소통하면서 내 생각과 마음을 100% 표현할 수 없어 느끼는 답답함은 차라리 견딜 만했다. 하지만 나에게 마음을 붙일 구석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계속 외롭게 했다.

얼마 전에 누나와 화해하기는 했지만, 누나가 엄마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누나에게는 누나만의 가족이 있었고, 우리는 1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이제 나만의 가족을 갖고 싶었다. 나는 그만 외로워하고 싶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겉도는 삶은 그만 살고 싶었다.

엄마를 잃은 후, 나에게 안정감을 준 사람은 알렉스가 처음이었다. 나는 알렉스에게 가족이 되어 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알렉스가 내 말을 거절할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내 첫사랑처럼, 알렉스도 나중에는 여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그림 같이 예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나는 알렉스의 뺨을 두 손으로 절박하게, 수도 없이 만졌다. 알렉스가 떠날까 봐 무서웠다. 알렉스의 얼굴을 만지는 내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내 두 손 위에 자신의 두 손을 겹쳤다. 알렉스의 온기에 닿자마자 눈물이 났다. 내가 울자, 알렉스는 내 젖은 눈가에 키스하고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알렉스에게 안겨 엉엉 울었다.

봄 학기 2주차, 알렉스

개강 후. 학생들은 모이기만 하면 여름 방학 인턴십에 대해 이야기했다. 1학년 여름 방학 인턴은 필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인턴을 하는 학생들도 있고, 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2학년 여름 방학 인턴은 필수이며, 매우 중요했다. 법원과 로펌들은 학점과 2학년 여름 방학 인턴 경험을 중점적으로 평가하여 예비 졸업생들을 채용하니까.

나는 1학년 여름 방학에 법원 인턴으로 일하고 싶어졌다. 어느 날부터 종종 공직에 몸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처럼 정치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가 바라는 진로는 검사로 일하며 경력을 쌓다가 판사로 지명되는 것이었다. 연봉은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 것에 비하면 한참 적겠지만, 명예를 얻을 수 있고, 내 능력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나는 칼렙을 생각했다. 공직에서 일하며 조금이라도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칼렙의 죽음에 대한 속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첫사랑의 죽음이 진로 선택에 영향을 미치다니, 어떤 사람들은 내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할아버지 인맥을 빌린다면 연방 법무부 인턴 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할아버지 인맥을 빌리고 싶지 않았고, 내 성적과 학벌로는 연방 지방 법원에 지원하는 것이 현실적이었다. 기왕이면 대도시 법원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고.

그런데 법원에 지원하려고 보니, 연방 지방 법원 인턴십 공고는 12월 말에 마감되었다. 게다가 텍사스주 지방 법원 인턴십 공고 마감 시기는 대체로 비슷했다. 법원 인턴 지원도 다른 로펌들처럼 1월 말까지 받는 줄 알았더니. 텍사스 내 연방 지방 법원 인턴 공고를 샅샅이 뒤져보니, 깡촌에 있는 연방 법원 한두 곳만 1주일 정도 모집 기한이 남아 있었다.

연말에 너무 놀았던 것이 실수였다. 나는 연말에 윤과 놀면서도 이력서와 커버 레터를 쓰고 인턴십 공고를 찾아봐야 했다. 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법원 인턴은 내년 여름에 하고, 올해는 쉴까? 아니면 올해는 로펌에서 인턴을 하고, 내년에 법원 인턴에 도전할까?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머리가 더 아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냉장고에서 진통제를 찾아 먹고 물을 마시고 있는데, 거실 소파에 누워 아이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윤이 나에게 물었다.

“뭐 먹어?”

“진통제.”

“어디 아파?”

“머리가 아파.”

내 말을 듣자마자 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고, 소파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이리 와.”

윤이 시키는 대로 그의 곁에 앉았다. 윤은 아이폰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내 관자놀이를 누르며 마사지했다. 내 목덜미와 뒷덜미도 마사지하며 풀어 주었다. 적당히 힘이 들어간 손길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 약효가 나려면 멀었는데도 두통이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

“여름 방학 인턴 공고를 봤는데,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마감되었더라.”

“벌써?”

“응. 내 잘못이야. 인턴을 하고 싶다면 좀 더 서둘렀어야 했어.”

“1학년인데 인턴을 해?”

“1학년이면 필수는 아닌데 하는 게 좋지.”

마사지에 열중한 윤의 얼굴을 바라보니, 윤은 성실하게 대화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윤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 관자놀이를 엄지로 힘주어 콱 눌렀다. 내가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자, 윤은 소리 내어 킥킥 웃었다. 나는 팔을 뻗어 윤의 허리를 안았고, 윤은 내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계속 꾹꾹 눌렀다.

“어디 지원하려고 했는데?”

“연방 지방 법원.”

“공직에 관심이 있어?”

“생겼어.”

“그건 몰랐네.”

“나도 얼마 전에 생긴 거야.”

“판사?”

“아니, 하려면 검사부터 시작해야지. 판사는 법조계에서 20년은 굴러야 할 수 있어.”

“한국과 법체계가 다르네.”

“그래?”

“응. 한국에서는 검사로 임용되면 쭉 검사만 하고, 판사로 임용되면 쭉 판사만 해. 그러다가 법관을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할 수도 있고. 변호사로 시작하면 쭉 변호사만 하는 거고.”

“그렇구나.”

“근데 뭐가 문제야?”

“남은 공고가 다 별로야. 법원 인턴이긴 한데, 너무 시골이라서 해도 경력에 도움이 안 될 거야. 그냥 로펌 인턴 지원하고 법원은 내년에 지원할까 싶고, 아니면 그냥 이번 방학은 쉬-”

“배가 불렀네. 알렉스.”

윤은 혀를 차며 마사지를 멈추었다. 그는 자신의 무릎 위에 두 손을 내려놓았다. 나는 윤의 허리를 당겨 내 무릎 위에 앉혔다. 우리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기회야 또 있겠지.”

윤은 오른손으로 내 아래턱과 볼을 힘주어 잡았다. 덕분에 윤의 손안에서 내 입술과 볼이 조금 구겨졌다. 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알렉스, 정신 차려. 기회는 놓치면 끝이야. 남들이 쉴 때 일해도 모자랄 판에 남들이 일할 때 놀면 어쩌려고?”

“……네가 보기에는 그래?”

윤이 턱을 잡고 있어서, 나는 어눌한 발음으로 말해야만 했다. 하지만 윤은 내 턱을 잡은 채, 나를 혼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아무리 구린 인턴이어도 집에서 노는 거보다는 나을걸? 이력서에 경력 한 줄이라도 더 쓸 수 있고, 게다가 월급도 줄 거고.”

“그러면 내가 방학 동안 그 동네에 가 있어야 하는데? 나와 자주 못 볼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윤은 내 턱을 놓고,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는 영문을 몰라 인상을 썼다. 윤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나와 이마를 맞댔다. 그리고 그는 나와 눈을 똑바로 맞추면서 말했다.

“알렉스, 잘 들어.”

“…….”

“너는 살면서 좋은 기회를 많이 누리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런 기회를 평생에 한 번도 잡기 힘들어. 남들은 너를 부러워한다고.”

“…….”

“그러니까 나는, 네가 네게 주어진 기회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았으면 해.”

윤은 말하는 동안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나에게는 윤의 말이 조금 충격적이었다. 내가 주어진 기회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니. 그건 정말 아닌데. 윤의 새까만 눈동자에 비친 나는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윤은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네가 먼 곳으로 일하러 간다면, 나는 네가 정말 많이 보고 싶을 거야.”

“나도.”

윤의 말을 듣고 마음이 벅차서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윤은 내 뺨에 키스하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가 우리의 눈이 다시 마주쳤고, 우리는 같은 생각을 했다. 윤이 웃으면서 내 목에 두 팔을 감았고, 나는 윤의 등과 엉덩이를 받쳐 안아 들고 침실로 갔다.

* * *

우리는 침대에서 연달아 사랑을 나누었다. 오늘따라 섹스하는 동안 청각이 예민했다. 침대가 삐걱거리고, 침대 시트가 바스락거리고, 입을 맞추고, 서로를 만지고, 숨을 몰아쉬다가 흐느끼고, 애타는 신음을 흘리고, 서로에게 사랑을 말하고, 젖은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마지막에는 우리가 함께 절정을 느끼고 숨을 고르는 소리까지도 생생하게 들렸다.

섹스가 끝나고, 우리는 침대에 마주 보고 옆으로 누웠다. 윤은 내 얼굴을 쓰다듬었고, 나는 윤을 품에 안고 있었다. 윤은 내 얼굴을 만지다 말고 나에게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공직에 관심이 생긴 거야?”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잖아. 나는 내 능력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

“그게 전부야? 혹시 다른 이유도 있어?”

“응.”

“다른 이유는 뭔데?”

윤은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내 얼굴을 만지던 윤의 손을 내 손에 쥐었고, 내 손보다 한참 가늘고 작은 손등에 입 맞추고 말했다.

“듣고 나서 웃지 마.”

“알았어.”

“내 첫사랑 이야기 기억해?”

“응. 죽었다며.”

“……그 애는 그냥 죽은 게 아니야. 살해당한 거지.”

“…….”

“증오 범죄라는 것은 확실해. 근데 범인을 잡지 못해서 미제 사건으로 종결되었고, 지금도 범인을 잡지 못했어. 그래서 그 애가 죽은 이후로…… 나는 그 사건이 늘 마음에 걸렸어.”

“뭐야, 네가 범인을 대신 잡기라도 할 생각이야?”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공직에서 일하다 보면 조금이라도 사회 정의에 기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라도 위안으로 삼고 싶어.”

윤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윤의 빤한 시선을 느끼고 불안해져서 그에게 물었다.

“웃겨?”

“하나도 안 웃기는데?”

“유치하지 않아?”

“유치하지 않아. 굉장히 진실한 동기라고 생각해.”

윤은 대답을 마치고, 내 이마에 키스했다. 나는 윤을 꽉 끌어안고 내가 무수히 잇자국을 남긴 그의 어깨와 목덜미에 내 얼굴을 묻고 비볐다. 윤이 유치하다고 말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윤은 나의 목표가 좋다고, 동기도 좋다고 말해 주었다. 그게 너무 다행이었다. 윤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도 그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해.”

“알았어.”

나는 대답하고 나서, 윤의 입술에 키스했다.

* * *

법학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다가 아빠의 전화를 받았다. 아빠가 나에게 먼저 연락한 것은 추수 감사절 이후 처음이었다. 아빠는 내가 아빠 회사에 지원서를 낸 것이 맞냐고 물으셨다. 나는 맞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빠는 오늘 시그나기에 출장을 오게 되었고 나와 저녁을 같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다가 아빠에게 만나자고 했다.

아빠에게 우리가 자주 가는 루이지애나 가정식 식당 주소를 이야기하고, 그곳으로 갔다. 아빠는 벌써 식당에 도착해있었다. 아빠는 슈트 차림이었고, 아빠가 앉아 있는 의자에는 코트가 걸려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가죽 장갑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테이블 곁에는 슈트 케이스와 브리프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아빠가 인사했다.

“오랜만이구나.”

“네.”

“잘 지냈지?”

“네.”

“공부는 잘하고 있고?”

“네.”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다. 우리 회사 말고 다른 데도 지원했어?”

“네. 지방 법원 한 군데에 지원했고, 아빠 회사를 포함해서 로펌 다섯 군데를 봐 놨어요.”

“공직으로 가려고?”

“그러고 싶긴 한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그래. 네가 가려는 길이 어떤 길이든, 아빠는 너를 응원한다.”

아빠는 기운차게 말했지만, 얼굴 살은 쪽 빠져 있었다. 얼굴을 보니, 아빠는 두 달 동안 잘 지내지 못한 것 같았다. 아빠는 레몬을 띄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차분하게 말했다.

“아빠는 지난번에 너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 마음이 계속 안 좋았어.”

“이해해요.”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아빠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지만, 당신의 아들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단번에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지금이라도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한 게 기뻤다.

“솔직히 그날……. 많이 놀랐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나 스스로는 편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네가 그렇다고 말하니까……. 앞으로 네 미래가 걱정되기도 하고……. 정말 미안하다. 너도 많이 고민하고 힘들게 말했을 텐데…… 아빠가 너를 지지하고 응원해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정말 미안하고 부끄럽다.”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아빠가 나를 응원한다고 말해 주어 다행이었다. 그동안 나도 내 상황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다. 동성 결혼이 합헌이고 사회 분위기가 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었으니까.

여자와 연애할 때에는 사랑을 스스럼없이 표현할 수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고, 손을 잡고 다닐 수도 있고, 남들에게 그녀를 내 여자 친구라고 소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 모든 것에 제약이 걸렸다. 우리는 남들 앞에서는 손을 잡을 수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남자 친구라고 서로를 소개할 수도 없었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법조계는 상당히 보수적이니까. 어쩌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우울하고 힘겨운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윤과 함께하는 지금이 좋았다.

“저는 윤과 함께라서 행복해요.”

나는 진심이었다. 윤과 함께하는 일상이 즐거웠다. 윤과 성격이 잘 맞고,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윤과 함께 있으면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의 차이를 파악하고, 그 차이에 대해 배워 나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물론 그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도 안다. 그는 요리를 끔찍할 정도로 못하고, 가끔 우유부단하며, 눈치가 빠르고 영리한 사람답지 않게 순진한 구석이 있어 사람을 덥석 믿기도 하지만, 내 눈에는 그의 단점도 귀여웠다.

“다행이네. 둘이 계속 같이 사는 거지?”

“네.”

“정말 다행이야.”

아빠는 진심을 담아,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힘주어 말했다. 아빠가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네 남자 친구를 만나볼 수 있을까?”

“지금요? 잠깐만요.”

나는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은 아마 학교 연구실에 있을 것이다. 매우 바쁘면 전화를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윤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는데, 그는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연구실. 무슨 일이야?

“혹시 지금 바빠?”

-아니.

“아빠가 출장 때문에 시그나기에 오셨는데, 너를 만나고 싶다고 하셔. 어때?”

-너희 아버지?

“바쁘면 안 와도 돼. 둘이서 저녁 먹으면 되니까.”

-……갈게. 어디로 가면 돼?

나는 윤이 오겠다고 해서 놀랐고 기뻤다. 그가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크게 덴 경험이 있어서 오지 않겠다고 할 줄 알았으니까.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지금 크레센트 문으로 와.”

-알았어.

전화가 끊어졌다. 아빠는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메뉴판을 보았다. 서버가 우리 테이블로 와서 주문하겠냐고 물었지만, 아빠는 웃으면서 거절했다.

“일행이 오면 주문하겠습니다.”

나와 아빠는 메뉴판을 보며 윤을 기다렸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저녁 시간답게 금방 빈 테이블이 없어졌다. 어느새 많은 사람이 가게 밖에서 대기 번호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윤이 도착했다. 그는 검은 코트를 입고 노트북이 든 백팩을 메고, 닥터 마틴 첼시 부츠를 신고 있었다. 나는 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윤은 나를 보고 웃다가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아빠를 발견하고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윤을 본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윤에게 악수를 청했다.

“알렉산더 테신 3세입니다. 알렉스 아빠죠.”

“주윤이에요.”

윤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고 아빠와 악수했다. 아빠는 윤을 보고 씩 웃었다. 아빠는 윤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지만, 윤은 아빠를 보고 바짝 긴장해있었다. 아빠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윤은 내 곁에 앉았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뭐 먹을 거야?”

“파스타.”

“맨날 똑같은 거 시키네.”

“너도 그렇잖아.”

“둘이 여기 자주 오나 보다.”

아빠가 메뉴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빠는 우리가 투닥거리는 모습을 귀여워하고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런 편이에요.”

* * *

아빠는 토마토 파스타와 코울슬로를 시켰고, 나는 소고기구이와 매시드 포테이토가 사이드로 나오는 원 플레이트 요리, 윤은 매운 크림 파스타를 시켰다.

요리를 기다리는 동안, 아빠는 윤에게 전공과 연구 분야, 군 복무 경력, 취미에 관해 물었다. 아빠는 다행히 무례한 질문은 하나도 하지 않았고, 윤은 아빠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는 윤이 편안해하는 모습을 보며 안심했다. 윤이 아빠에게 나쁜 인상을 받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아빠와 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윤이 오스틴 노스웨스트 힐즈에 3년 동안 살았다고 말했을 때, 아빠는 무척 놀라며 대답했다. 어쩌면 우리는 한 번쯤 마주쳤을지도 모르겠다고. 아빠는 내가 예전에 했던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동안, 요리가 나왔다. 아빠는 저녁을 먹으면서 윤에게 내 어린 시절과 흑역사에 관해 이야기했고, 나는 아빠가 내 흉을 볼 때마다 민망해졌다.

“이 녀석도 어릴 때는 정말 눈물이 많았어요. 어느 날, 줄리아는 학회에 가느라 집을 비우고, 나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알렉스가 나에게 전화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엉엉 우는 거예요. 나는 너무 놀라서 뭐가 아프다는 말만 겨우 알아듣고 집으로 갔어요. 집에 가 보니 알렉스가 도둑고양이 새끼를 안고 울고 있는 거예요. 고양이가 많이 다쳤길래 알렉스와 함께 새끼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갔죠. 그 고양이가 지금의 키키예요.”

“상상이 안 되는데요. 그게 몇 살 때예요?”

“열두 살 때요. 사진 볼래요?”

아빠는 아이폰으로 나의 어린 시절 사진과 고양이 사진을 윤에게 보여 주었다. 윤은 내 사진들을 보고 좋아했다. 아빠는 내친김에 내가 어렸을 때 양 갈래머리를 하고 여자 옷을 입고 찍은 사진들도 보여 주었다. 아빠가 낄낄 웃으며 농담했다.

“사실 나와 줄리아는 딸을 원했거든요. 그래서 알렉스의 머리를 기르고, 여자 아기 옷을 입힌 적이 많아요.”

윤은 아빠에게 내 사진들을 자신에게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아빠와 그는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고, 아빠는 윤에게 사진들을 보내주었다. 아빠가 계속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알렉스가 미식축구를 하겠다고 했을 때 많이 놀랐어요. 알렉스가 운동을 한다면 테니스를 하길 바랐는데, 제 아버님이 미식축구를 하라고 강력하게 거드시는 바람에 미식축구를 시작했죠. 처음에는 잘할지 걱정이 많았는데, 소질이 있어서 금방 두각을 나타냈어요. 미식축구를 하면서 성격도 많이 바뀌었죠.”

“유튜브에서 경기 하이라이트 영상을 봤어요. 경기할 때는 정말 거칠게 하던데요. 지금과는 다른 사람 같아요.”

“원래 미식축구가 그래요. 부모로서는 애가 다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보고 있기 힘든 스포츠죠.”

아빠와 윤은 이야기가 잘 통했다. 아빠가 윤에게 우리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물었고, 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학교에서 농구를 하면서 만났다고 대답했다. 윤은 내가 먼저 윤의 번호를 따고 시험 준비를 도와주겠다며 수작을 부렸다고 말했고, 아빠는 나를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 나에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나는 사실이라고 대답했다.

마침 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다. 아빠는 즐거워 보였다. 나는 웃으면서 아빠에게 말을 걸었다.

“아빠, 기분 좋아 보여요.”

“솔직히, 나는 네 남자 친구가 어떤 사람일지 걱정 많이 했다. 그런데 인제 보니 전부 기우였어. 나는 윤이 마음에 들어.”

“다행이네요.”

“네 엄마는……. 요새 상담 치료를 받고 있어. 줄리아도 무엇이 문제인지는 아는데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 줄리아에게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

“알겠어요.”

“아빠는 이번 봄 방학에 너희 둘이 집에 왔으면 좋겠구나.”

나는 아빠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빠가 이렇게까지 윤을 좋아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고, 엄마의 상태를 낙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놀라서 아빠의 얼굴만 빤히 보고 있는데, 윤이 와서 내 곁에 앉았다. 아빠가 윤에게 짓궂게 말했다.

“알렉스가 괴롭히면 나에게 말해요. 내 아들이지만 누굴 닮았는지 성격이 정말 지랄 같거든.”

아빠의 농담을 듣고, 윤은 살포시 웃기만 했다. 나는 인상을 쓰고 아빠를 노려보았고, 아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척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윤, 아빠는 우리가 사는 아파트로 갔다. 우리는 아빠에게 아파트를 보여 주었다. 나는 침실이 두 개이지만 우리가 같이 자기 때문에 침대 하나를 뺐고, 빈방에 책상 두 개를 놓아 공부방으로 만들었고, 화장실은 침실에 딸린 것만 쓴다고 설명했다.

“둘이 집을 아늑하게 꾸며 놓고 사는구나.”

우리 집에 대한 아빠의 총평은 그랬다. 집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차를 끓여 마셨다. 차를 마시고 나서, 나와 윤은 아빠를 학교 근처 메리어트 호텔까지 차로 바래다 드렸다. 호텔 예약을 취소하고 우리 집에서 주무실 수도 있지만, 내일 아침에 같은 호텔에서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이 있으니 객실에서 자고 나서 곧장 미팅 장소로 가는 게 편할 것 같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호텔 로비 앞에 차를 세우고, 나는 운전석에서 내렸고 아빠의 슈트 케이스를 트렁크에서 꺼냈다. 윤도 조수석에서 내렸다. 아빠는 나와 윤을 양팔로 꽉 안아 주었다.

“다음에 보자.”

“들어가세요, 아빠.”

“들어가세요.”

아빠는 우리를 두고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아빠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지만, 내 마음은 무거웠다. 아빠가 나를 받아들이고 윤을 만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아빠가 나를 받아들여 다행이었다. 설령 엄마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지금만으로도 감사한다.

봄학기 3주차, 윤

알렉스의 아버지를 호텔까지 모셔다드리고, 우리는 알렉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출발했다. 나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난 알렉스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알렉스의 부모님은 동갑이고, 알렉스를 마흔 살에 낳았다고 했다. 그러니 그의 나이는 60대 중반일 텐데, 나이에 비해 10년은 젊어 보였다.

두 사람은 많이 닮았다. 알렉스는 날카로운 인상이고 아버지는 온화한 인상이라 이목구비는 거의 닮지 않았지만, 둘의 표정과 말투가 똑같았다. 알렉스의 아버지는 자상한 성격이었고, 알렉스는 아버지를 닮아 다정한 사람으로 자란 것이 분명했다.

“우리 아빠 어때?”

“좋은 분인 것 같아.”

“우리 아빠가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어?”

“아빠는 네가 좋다고 했거든.”

알렉스가 운전하다 말고 말했다. 나는 알렉스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렉스가 전화로 그의 아버지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말했을 때, 내 귀를 의심했다. 대체 왜? 알렉스는 추수 감사절 아침에 울면서 돌아왔다. 그의 부모님은 알렉스의 커밍아웃을 듣고 거부 반응을 보였고, 알렉스는 부모님에게 상처받고 도망치듯 집을 떠나왔다.

아까 알렉스의 전화를 받고 별생각을 다 했다. 추수 감사절에 안 좋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알렉스의 아버지는 나를 좋게 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건지. 나를 만나면 멱살을 잡으려고 하나? 헤어지라고 말하려고 하나? 멱살을 잡아도 괜찮으니 때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온갖 무서운 생각을 할 만큼 알렉스의 아버지를 보는 것이 두려웠지만, 어른이 부르시는데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약속 장소까지 가는 동안, 지난날을 떠올렸다. 스무 살 때. 전 남자 친구는 나를 정말 사랑하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그러니 저와 같이 동성결혼이 합헌인 나라로 이민 가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가족들에게도 말하라고, 제가 전부 책임지겠다고 했다. 나는 그게 너무 기뻐서 1학년 1학기가 끝나자마자, 아빠와 누나에게 그와 외국에 가서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

나의 커밍아웃을 듣고, 누나는 나에게 제정신이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아빠는 화가 나서 나를 골프채로 두들겨 팼다. 나는 갑자기 시작된 폭력에 너무 놀라서 저항하지 못하고 맞기만 했다. 아빠가 나를 죽이려고 골프채를 치켜든 순간,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아빠의 아이언은 내 오른팔에 빗맞았다. 눈을 떠보니 누나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아빠는 누나를 때릴 수 없어서 폭력을 멈추었다. 누나는 울면서 아빠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빠!]

[…….]

[나도 얘가 미쳤다고 생각해. 그래도 이건 아니야!]

누나가 아빠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아빠의 인생에 처음이었다. 아빠의 보물 1호인 누나가 화를 내자, 그는 크게 당황했다. 누나가 아빠를 막아 주는 동안, 나는 집에서 도망쳐 택시를 타고 가까운 응급실로 갔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보니, 골프채에 빗맞은 오른팔에 금이 갔고 온몸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팔에 깁스를 하고 울었다. 너무 서러웠고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엄마는 나를 응원해 주었을 텐데. 엄마는 아빠와 누나를 막아 주었을 텐데. 너무 슬퍼서 엄마 생각만 났다.

만약 누나가 나를 감싸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날 죽었을 것이다. 누나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구해 주었다. 누나에게는 나에 대한 일말의 애정이 남아 있었던 거다. 그래서 나는 누나가 화해를 청했을 때, 누나가 나를 구해 주었던 날을 생각하며 화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알렉스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알렉스의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알렉스를 낳은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다정한 아들을 낳았을까. 하지만 한국에서는 상견례가 아니면 애인의 부모를 만날 일이 없는데.

나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어려운 자리에 나갔다. 다행히 알렉스의 아버지는 점잖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마음에 들어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시험했고, 내가 이상한 사람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나는 알렉스의 아버지가 나를 의심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운전석에 앉아 있는 알렉스에게 물었다.

“혹시…… 부모님께 전 여자 친구들도 보여드렸어?”

“어.”

부모님이 알렉스의 전 여자 친구들을 본 적이 있다니. 결혼할 사이도 아니면서. 나는 기가 막혀 알렉스에게 되물었다.

“원래 미국에서는 애인을 부모님에게 보여 주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응. 그렇지만 나도 동거는 네가 처음이야.”

“…….”

“아빠가 봄 방학에 너와 같이 집에 오래.”

알렉스는 제 아버지의 말을 전하며 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스무 살 때. 나는 사랑 앞에서 매우 용감했었지만, 대가를 크게 치렀다. 아빠에게 정말로 맞아 죽을 뻔했고, 오랫동안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결혼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말했던 남자 친구는 나를 배신했다.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거치고 나니, 나는 내 사랑에 자꾸 겁이 났다.

자꾸만 겁이 나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앞으로 알렉스의 어머니까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섭고 부담스러웠다. 나는 새로운 상황 때문에 심란한데 알렉스의 머릿속은 해맑았다. 그래, 미국에서는 애인을 부모에게 보여 주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니까 너에게는 별일이 아니겠지. 내가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알렉스가 제 오른손으로 내 왼손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우리 엄마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

“엄마는 걱정하지 마.”

“…….”

“우리 엄마는 분명 너를 좋아할 거야.”

나는 알렉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과연 그럴까. 마음이 자꾸 불안해졌다. 전에 분명히 제 입으로 말했는데. 알렉스의 어머니는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통곡하다가 기절했다고. 제가 했던 말은 전부 잊은 것인지, 알렉스는 나의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면서, 눈을 반짝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다정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서 간신히 대답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 * *

알렉스는 내가 시킨 대로 법원과 로펌에 인턴 지원서를 냈었다. 이력서와 커버 레터는 급하게 썼다. 나는 알렉스의 이력서와 커버 레터를 읽고 내용과 논리를 고쳐주었다. 문법이나 표현은 제가 알아서 고치겠지. 알렉스는 헌법 과목 교수님에게 추천서를 받아 해당 법원에 보냈고, 라이팅 샘플도 보냈다. 내가 라이팅 샘플도 검토했는데, 법률 용어에 익숙하지 않아 제대로 검토한 것인지 확신이 없었다.

요즘 알렉스는 학교 캠퍼스 안에서 진행되는 대형 로펌 1차 인터뷰 오퍼를 받고 있었다. 첫 번째 오퍼를 받고 나서, 알렉스는 내 말을 듣길 잘했다고 기뻐했고, 나에게 무척 고마워했다. 나는 알렉스가 내 말을 잘 듣는 것이 신기했지만, 알렉스가 내 말을 정말 이해하고 따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알렉스로서는 평생 이해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 * *

알렉스와 학생 회관 학식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리는 페퍼로니 피자 한 판과 토마토 파스타를 시켜 나누어 먹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 알렉스는 불법행위 법 시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교수님께서 학우들과 스터디를 하라고 말씀하셔서 근처에 앉아 있던 중국계 여학생과 흑인 남학생과 한 팀을 짰다고 했다.

알렉스는 중국계 여학생 시드니가 전체 수석이고 흑인 남학생인 조슈아도 아주 똑똑하다고 말하면서 팀 구성에 만족하고 있었다. 알렉스의 평가를 듣고, 그에게 로스쿨 학생이면 똑똑한 게 기본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기여 입학으로 들어오는 애들은 대체로 멍청하고 게으르다고 투덜거렸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갔다. 줄을 서서 주문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윤, 점심 먹었어요?”

나를 부른 것은 밍 교수님이었다. 나는 교수님께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식사하셨어요?”

“네. 샌드위치를 먹었어요. 옆에는 친구예요?”

알렉스는 밍 교수님을 빤히 바라보았다. 교수님의 질문에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알렉스가 먼저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알렉스라고 합니다. 윤과 같이 살고 있어요.”

나는 알렉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룸메이트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같이 산다고 말하다니. 알렉스가 먼저 교수님께 악수를 청했고, 교수님은 그와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교수님이 알렉스와 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둘이 룸메이트인 거죠? 알렉스도 대학원생이에요?”

“로스쿨 1학년입니다.”

“그렇구나. 둘이 엄청 친해 보이네요.”

“맞아요. 매우 친합니다.”

이번에도 알렉스가 나 대신 대답했다. 알렉스가 묘하게 당신을 경계하는데도, 밍 교수님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두 사람에게 커피 살 테니까 같이 주문해요.”

나는 한겨울에도 차가운 음료를 마시기 때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 사이즈를 주문했고, 알렉스는 따뜻한 페퍼민트 티를 주문했다. 교수님은 따뜻한 라떼를 주문하고 석 잔을 모두 당신의 카드로 계산하셨다.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교수님과 주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교수님은 학부 수업 첫 번째 과제 가이드라인을 메일로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지금 하고 계신 연구를 오는 4월 학회에 발표하실 생각인데 연구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박사 1년 차인 내가 감히 무엇을 도와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교수님은 무척 기뻐하셨고, 학회가 덴버에서 열리고 학교에서 출장비는 지원해 준다고 덧붙이셨다.

음료가 나오고, 교수님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교수님과 학교생활과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슬쩍 뒤를 보니, 알렉스가 나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내가 교수님과 이야기하면서 저를 소외시켜 섭섭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수님이 나에게 계속 질문하셨기 때문에 나는 알렉스를 내버려 두고 교수님과 이야기해야 했다.

우리는 학생 회관 앞에서 헤어졌다. 나는 교수님과 같이 공학관까지 걸어갔고, 알렉스는 혼자 법학관을 향해 걸어갔다. 교수님이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저 친구는 낯이 익어요. 퇴근 시간에 공학관 로비에 앉아 있는 것을 몇 번 본 것 같은데.”

“그래요? 그러면 맞게 보신 거예요.”

“그때도 윤을 만나러 온 거였나 봐요?”

“네. 집에 같이 가니까요.”

“같이 귀가할 만큼 룸메이트와 친하다니 신기하네요. 나는 남편과 처음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 정말 많이 싸웠어요. 하물며 박사 시절 룸메이트는 말해 뭐 해, 생각도 하기 싫어요.”

“교수님도 룸메이트와 같이 사셨어요?”

“박사 1년 차 때는 그랬죠. 처음에는 룸메이트와 살았는데, 둘이 사소한 것으로 싸우다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고, 결국에는 혼자 살았어요. 혼자 살다 보니 집세는 많이 나갔지만 정신 건강은 좋아졌지요.”

“다행히 저희는 잘 안 싸워요.”

“사실, 마음만 잘 맞으면 둘이 사는 게 낫죠. 돈도 아끼고, 덜 외롭고. 물론 그게 애인이면 더 좋고.”

교수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시면서도, 나를 은근히 놀렸다. 애인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 유난히 강세를 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밍 교수님이 우리의 관계를 눈치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다행히 교수님이 나를 보는 눈빛은 따뜻했다. 게다가 교수님은 이 상황을 아주 재미있어하고 계셨다. 편견이 없으신 것 같으니 다행인가……?

봄 학기 3주차, 알렉스

모의 법정 수업 조 편성은 교수님 재량이었지만, 마음에 들었다. 모의 법정 수업의 정원은 여덟 명. 나와 같은 팀이 된 것은 불법행위 법 스터디를 같이 하는 조슈아였다. 안타깝게도 시드니는 다른 반이었다.

친해지고 나서, 조슈아는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조슈아는 휴스턴 출신이고, 흑인 미혼모 가정의 장남이며 집안 최초의 대졸자였다. 어머니 카산드라는 낮에는 학교 청소부로, 저녁에는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조슈아와 아버지가 다른 동생들 – 가브리엘과 미카엘라를 키우고 있었다.

“내가 잘돼서 엄마가 요새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셔. 동생들도 마음을 잘 잡고 있고.”

조슈아는 유쾌하게 말했다. 모의 법정 수업이 끝나고, 우리는 카페에서 프라푸치노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조슈아의 웃음소리는 정말 큰 편이어서 그가 수업 시간에 웃으면 다들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도 조슈아는 엄마와 동생들에 대해 말하며 크게 웃고 있었는데, 조슈아의 웃음소리는 듣기 좋았다. 조슈아가 나에게 말했다.

“이대로 무사히 졸업해서 변호사 시험 붙고 대형 로펌에 취직하면 정말 좋겠지? 그래서 여름 방학 인턴도 대형 로펌에 지원했어.”

“로펌에 취직하려고?”

“그게 제일 무난하기도 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잖아. 나는 엄마를 도와드리고 싶고 동생들이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싶거든.”

“그래?”

“나는 성적이 되는데도 주립대에 갔어. 텍사스를 벗어나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거든. 근데 졸업할 때 즈음 되니까 아이비리그에 가지 못한 것이 아쉽더라고. 어차피 나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어느 대학에 가든 학비 면제에 생활비까지 받았을 텐데, 주변에 대졸자가 아무도 없어서 나에게 그런 것에 대해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나는 동생들에게 그 애들이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고, 세상을 넓고 멀리 보라고 말해 주고 싶어. 나처럼 아쉬움을 느끼지 않게 말이야.”

나는 조슈아의 이야기를 듣고 무척 놀랐다. 세상에 미혼모가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미혼모의 자녀를 실제로 만난 것은 조슈아가 처음이었다. 당연히 대학 등록금을 내지 못할 만큼 가난한 사람을 본 적도, 알고 지낸 적도 없었다. 조슈아가 집안 최초의 대졸자라니. 우리 집은 어떻던가? 친척들의 직업 중 가장 흔한 것이 변호사였다.

조슈아에 비하면, 나는 정말 곱게 자랐다. 윤이 왜 나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귀하게 여기라고 말했는지 알겠다. 그가 옳았다. 내가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축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여태껏 경험한 세상은 아주 좁고, 아름답기만 한 곳이었다. 어째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은 것일까?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어서일까?

나는 오스틴 웨스트레이크 힐즈에서 자랐고, 동네 친구들의 부모는 전부 사업을 하거나,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기업 임원이었다. 운동하면서 만난 애들도 다들 부유했다. 운동하는 놈들이라 촌스럽고 수수해 보여도, 미식축구 장비는 비싸고, 레슨비는 더욱 비쌌다. 운동에 드는 비용을 충당할 만한 가정환경을 갖추려면 최소한 중산층은 되어야 했다.

나는 견문이 너무 좁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휴스턴 빈민가에서 마약상과 갱들의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밝은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노력한 조슈아가 존경스럽기도 했다. 조슈아는 맨주먹으로 경쟁에 뛰어들었는데도, 모든 것을 가진 나와 똑같은 성과를 냈다. 만약 조슈아가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그는 지구를 정복했을지도 모른다.

“근데 인턴에 합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곳은 인맥이 있어야 합격할 수 있다던데.”

조슈아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말하면서도 껄껄 웃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조슈아같이 똑똑하고 성실한 애가 인맥이 없어 기회를 잡지 못한다니.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나는 조슈아에게 캐물었다.

“어느 로펌에 지원했어?”

“음, 전부 휴스턴 쪽이야. 나는 휴스턴 사람이니까.”

만약 조슈아가 2학년 여름 방학에도 로펌에 인턴 자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주저 없이 아빠에게 부탁해야겠다. 이렇게 훌륭한 친구에게 좋은 기회가 가지 않는다니 말도 안 된다. 내가 조슈아를 도와줘야겠다고 마음을 굳혔을 때, 조슈아는 아이스 카라멜 마키아토에 빨대를 꽂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너는 졸업하고 뭐 할 거야?”

나는 뜻밖의 질문을 듣고 당황했다. 사실 법원에 지원하기는 했지만, 지원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공직에 나가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어떤 진로를 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

“시드니는 공직을 지망하나 봐. 동양인들은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더니.”

조슈아는 커피를 한 입 마시고 말했다. 동양인들이 명예를 좋아한다는 것은 고정 관념이기 때문에,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시드니는 유리 천장을 피하려고 공직을 지망하는 것이겠지. 공직에서는 다양성 지향 정책 때문에 동양인 여성에게도 기회가 비교적 공평하게 갈 테니까. 나는 시드니의 입장에 대해 생각하며, 벤티 사이즈 아이스 피치 그린티 레모네이드에 긴 빨대를 꽂으며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 그런 건 아니야.”

나는 윤과 살면서 동양인에 대한 많은 편견을 버렸다. 예를 들면 한국인은 개고기를 좋아한다, 같은 것. 윤은 그것이 고정 관념이라고 말하고 나서, 저는 태어나서 개고기를 먹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맛있는데 굳이 개고기까지 먹을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아무튼, 나는 조슈아의 편견을 굳이 이르집고 싶지 않아서 거기까지만 말했다. 그러자 조슈아가 태평하게 대꾸했다.

“그렇구나. 이따 시드니 오면 스터디 시작하자.”

* * *

나와 시드니, 조슈아는 스터디를 마치고 학교 앞에 있는 펍으로 갔다. 나는 윤에게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들어간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윤은 알았다고, 혼자 저녁을 먹겠다고 하면서 하트 모양 이모지를 한꺼번에 여러 개 보냈다. 나는 윤이 보낸 이모지들을 보며, 그가 귀여워서 웃었다.

우리는 버팔로윙과 감자튀김을 시키고, 버드 라이트를 각각 한 병씩 주문했다. 우리는 주로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와 조슈아만 있다면 스포츠 이야기도 하겠지만, 시드니가 있으니 화제는 자연스럽게 학교생활에 대한 것으로 한정되었다. 버드 라이트를 반 정도 마셨을 때, 시드니가 조슈아에게 말했다.

“알렉스 말이야, 엄청 깍쟁이야.”

“아무래도 그렇지? 누구에게나 친절하긴 한데 은근히 선을 긋잖아.”

“내가 그래?”

“어.”

“어.”

조슈아와 시드니가 동시에 대답했다. 나는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랬나? 하긴, 나는 마음에 드는 소수의 사람에게는 친절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는 무관심한 편이다. 내가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자, 시드니는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애들이 번호를 달라고 하면 번호는 주는데, 파티에 초대하면 안 간다고 하고. 비싼 남자야.”

“그건 파티를 안 좋아해서 그래.”

나는 솔직하게 말했지만, 시드니는 깔깔 웃으며 내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시드니는 내가 파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있었다. 조슈아가 나에게 물었다.

“그러면 주말에는 뭐 해?”

“운동하고 집에 있어.”

“여자 친구는 있어?”

“조슈아, 쟤 얼굴을 봐. 저 얼굴에 여자 친구가 없으면 이상하지.”

나 대신 시드니가 대답했다. 여자 친구는 아니고, 동거하는 남자 친구가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입안에 넣는데, 조슈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긴, 없는 게 이상하지. 시드니, 너는 남친 있냐?”

“없어. 그러는 너도 여친 없잖아.”

“와, 너 진짜 너무한다.”

시드니와 조슈아가 아웅다웅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나는 친구들과 펍에서 놀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는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힐 필요가 있으니, 이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내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기를 바란다. 이들은 똑똑하고 착하고 재미있는 친구들이었다.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이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 * *

맥주를 두 병 마셨을 즈음, 윤이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들이 웃고 떠드는 동안, 나는 아이폰을 켜고 그의 메시지에 회신했다.

-연구실에서 지금 출발하는데 집이야?

- 아니, 아직 펍이야.

- 나도 맥주 마시고 싶어.

윤이 보낸 답장을 보고, 친구들에게 그가 합석해도 되냐고 물어보려고 하는데, 조슈아가 나에게 웃으면서 물었다.

“여친이야?”

“어?”

“메신저 보면서 실실 웃는 거 보니 맞나 보네.”

조슈아가 나를 놀렸다. 나는 조슈아의 말을 무시하고 내가 할 말만 했다.

“친구가 맥주 마시고 싶다는데 합석해도 돼?”

“나는 상관없어. 시드니 너는?”

“나도 상관없어.”

“알았어. 그러면 오라고 할게.”

나는 윤에게 얼른 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윤에게 펍의 주소를 보냈더니 윤은 나에게 윙크하는 이모티콘을 보내며 회신했다. 내 얼굴을 보고, 조슈아가 또 캐물었다.

“근데 진짜 여친 아니야? 메시지 보내면서 너무 행복해하는데?”

“……친구라니까.”

정확히 말하면 그냥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지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이들과 사생활을 이야기할 만큼 친하지는 않았다. 지금보다 더욱 친해지고 신뢰가 쌓이면 모를까. 물론 나는 그들이 호모포빅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한참 웃고 떠드는데 가게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윤이 가게에 들어왔다. 나는 윤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고, 윤은 나를 향해 웃으며 걸어왔다. 나 역시 윤을 보고 웃었다. 조슈아와 시드니도 윤을 발견했다. 윤은 우리 테이블까지 걸어와 빈 의자 위에 백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윤은 시드니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윤이에요.”

“시드니예요.”

“조슈아예요.”

윤은 시드니, 조슈아와 차례로 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자리에 앉은 윤에게 물었다.

“저녁 먹었어?”

“아니, 먹어야 해. 음식 주문하고 올게.”

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걸어갔다. 윤을 보고 있으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시드니는 나에게 뭐라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고, 조슈아는 벽에 걸려 있는 TV로 농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맥주병을 손에 들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감자튀김 하나를 입 안에 넣고 씹고 있는데, 윤이 주문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자리에 앉는 윤에게 물었다.

“뭐 시켰어?”

“코로나와 해시 브라운.”

“맛있겠다. 나한테 한 입 줄 거야?”

“아니. 나 배고파. 혼자 다 먹을 거야.”

“알았어.”

나는 윤의 볼을 쓰다듬으려고 손을 올렸다가 황급히 내렸다. 여기는 집이 아니었다. 서버가 레몬을 띄운 얼음물을 윤에게 가져다주었고, 윤은 빨대로 찬물을 마셨다. 시드니가 눈을 반짝거리며 윤에게 물었다.

“알렉스와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룸메이트예요.”

“로스쿨 학생은 아니죠? 학교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네. 대학원생이에요.”

“석사? 아니면 박사?”

“박사요.”

“전공이 뭐예요?”

“컴퓨터 공학이요.”

시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윤과 친해지고 싶은 눈치였다. 갑자기 조슈아가 윤과 시드니의 대화에 끼어들더니, 윤에게 물었다.

“연구 분야가 뭐예요?”

“아직 정해진 것은 없어요. 석사 시절에는 인공 지능을 연구했고 지금 조교로 배정된 교수님도 인공 지능을 연구하시는 분이기는 해요.”

“그렇구나. 나중에 새 랩탑 살 때 윤에게 물어보면 되겠다. 그치, 시드니?”

“좋다! 컴퓨터 공학이면 컴퓨터에 대해 잘 아시겠어요.”

시드니가 조슈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조슈아와 시드니는 윤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고, 윤은 웃으면서 그들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요.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서버가 윤이 주문한 맥주와 해시 브라운을 들고 왔다. 윤은 포크로 해시 브라운을 쪼개 먹으며 맥주를 마셨다. 윤이 저녁을 먹는 동안, 우리는 다음 스터디 범위에 관해 이야기했다. 교수님이 과제를 너무 많이 내준다고 투덜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는 무심결에 윤이 마시던 얼음물 컵을 집고, 윤이 쓰던 빨대로 물을 빨아 마셨다. 물을 마시고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데, 조슈아가 웃으며 말했다.

“알렉스, 목이 많이 말랐구나. 친구가 마시던 물을 마시고 있네.”

“어? 어어. 급해서 그랬어.”

나는 어색하게 말을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이래서 습관이 무서운 것이다. 자리가 편해서 자꾸 집에서 하던 버릇이 나왔다.

우리 문화권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나는 다른 사람과는 음식을 나누어 먹지 않는다. 하지만 윤은 예외다. 한국인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친근함을 표시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우리는 연인이니까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제는 윤과 음식을 나눠 먹지 않으면 허전했다. 하지만 시드니와 조슈아는 우리의 사정을 모르니,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음식을 나누어 먹는 모습이 이상해 보일 것이다. 다행히 조슈아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쾌활하게 서버를 불렀다.

“여기요.”

서버가 우리 테이블로 걸어왔다. 조슈아가 서버에게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얼음물 한 잔, 레몬 띄워서 저 친구에게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

서버가 주방을 향해 걸어갔고, 나는 친구들의 반응을 살폈다. 조슈아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시드니는 나를 의심하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다짐했다. 앞으로 다른 사람과 합석했을 때에는 조심해야겠다.

봄 학기 4주차, 윤

밍 교수님이 주신 논문을 읽고, 구글 스칼라에서 관련 논문을 찾아 읽었다. 교수님께서 학회에서 발표할 프로시딩3)에 들어갈 문헌 연구를 정리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열심히 논문을 읽고 정리하는 것이 조금 버거웠다. 한국에서 석사를 마쳤기 때문에 논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구 주제가 약간 달라지다 보니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아직은 논문을 읽고 새로운 주제를 이해하기만도 바빴다.

공용 연구실에 앉아 페이퍼를 읽고 있는데, 교수님이 스카이프 채팅으로 나를 소환하셨다.

- 윤. 잠시 연구실로 와요.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아래층에 있는 교수님 연구실로 갔다. 교수님의 연구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지만, 일부러 문에 노크했다.

“들어와요.”

교수님이 말씀하셨고, 나는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갔다.

“앉아요. 요새 매우 바쁘죠?”

“네. 수업도 있고, 조교로 일하고, 연구도 해야 하니까요.”

나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교수님은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고, 나와 마주 앉았다. 교수님의 옷차림은 편안했고, 윤기가 흐르는 까만 머리카락은 고무줄로 질끈 묶여 있었다. 교수님은 나를 보고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제 한 학기가 지났죠? 그러니 적응 기간은 끝났다고 생각해요.”

“…….”

“나도 윤이 열심히 하는 건 알아요. 근데 더 잘해야 해요.”

나는 교수님의 말씀을 경청했다.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 중에 틀린 말씀은 하나도 없었다. 교수님께서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씀이라 기분이 상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엄청난 압박감과 불편함, 스트레스를 느낄 뿐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지 머리가 띵해졌다. 그런 나를 보며, 교수님이 계속 말씀하셨다.

“우리가 연구하는 것은 인공 지능이라 앞으로도 수요가 계속 늘겠지만, 유난히 마켓이 좋은 지금의 흐름을 타야 해요. 그러려면 최대한 빠르게 실력을 쌓아서 졸업해야죠.”

“…….”

“우리는 동양인이에요. 여기 사람들은 동양인들이 똑똑하고 부지런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우리가 훌륭한 결과물을 내는 것을 너무 당연한 일로 여겨요.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열심히, 더 잘해야 해요. 퀄(논문 자격 시험) 통과하면 조금 나아질 테니까, 그때까지는 일주일에 7일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고 버텨요.”

교수님은 안경을 벗었고, 안경 닦이로 안경알을 깨끗하게 닦으면서 말씀을 이어 나갔다.

“세상에 천재도 있지만, 천재성이 다는 아니에요. 결국에는 열심히, 꾸준하게 하는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요. 다시 말하자면, 잘하는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입니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죠?”

“……네.”

교수님은 안경을 다시 썼다.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외꺼풀 눈매가 날카로웠다. 교수님은 책상 위에서 두 손을 모아쥐었고,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더 열심히, 더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그렇다고 잠을 자지 말라거나, 밥을 먹지 말라거나, 연애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박사는 장거리 경주라 페이스 조절을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그리고 수도승처럼 절제하고, 깨어 있는 시간을 공부에 효율적으로 쓰라는 이야기입니다.”

“…….”

“윤은 똑똑한 학생이니까 내 이야기를 잘 알아들었을 거라 믿어요. 윤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면, 나는 방금처럼 윤에게 잔소리하는 데에 시간을 쓰지도 않았을 거예요.”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코를 훌쩍이면서 참는데, 교수님이 나에게 안경 닦이를 내밀었다. 안경을 벗고 살펴보니 안경알이 더러웠다. 나는 안경알에 입김을 불고, 헝겊으로 살살 닦았다. 안경알을 닦고 나서, 안경을 쓰고 안경 닦이를 교수님에게 돌려드렸다.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교수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스트레스를 주는 것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윤을 지도하는 것이 내 일이니까.”

“…….”

“너무 의기소침해하지는 말고.”

나는 울음을 참으려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열 개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내가 주먹을 꽉 쥐는 모습을 보고, 교수님이 나에게 힘주어 말했다.

“윤은 잘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어요.”

“네.”

“그러니까 힘내요.”

* * *

우리는 월마트에 자주 갔다. 이 동네에는 알렉스가 애용하던 센트럴 마켓이나 홀푸드 마켓이 없기도 했고, 월마트가 집에서 가까워서 자주 가게 되었다. 알렉스가 카트를 끌고, 나는 그 곁에서 쇼핑 목록을 보면서 물건을 카트에 담았다.

오늘따라 월마트에 사람이 많아서 카트를 끌고 다니기 어려웠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알렉스가 끄는 카트가 다른 사람이 끄는 카트와 자꾸 부딪혔다. 카트가 네 번째로 부딪혔을 때, 나는 짜증을 내면서 알렉스에게 물었다.

“사람이 왜 이렇게 많지?”

“내일이 슈퍼볼이니까.”

“그래? 몰랐네.”

사실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들었지만 기억하지 못했다. 동기 중 한 명이 다음 주말이 슈퍼볼이라 기대된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미식축구 경기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이야기를 흘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결승에는 누가 올라와?”

“패트리어츠4)와 패커스5).”

“그렇구나. 네가 보기에는 누가 이길 것 같아?”

“패트리어츠가 이기겠지. 우리, 내일 게임 같이 볼까?”

“보고 싶어?”

“슈퍼볼을 보지 않으면 사람들과 할 말이 없어.”

“그럼 보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알렉스가 그렇다고 하니, 나 역시 슈퍼볼을 안 보면 사람들과 대화가 안 될 것이다.

* * *

역시. 미식축구는 한국 사람 정서에 맞지 않았다. 샤키라와 제니퍼 로페즈가 출연한 슈퍼볼 하프타임 쇼는 재미있었지만, 경기는 재미가 없었다. 나는 슈퍼볼 경기를 보다가 아이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맥주를 마시며 군것질만 했다.

알렉스는 경기를 무척 재미있어했다. 그는 맥북 화면 속 경기장으로 뛰어들 기세로 경기를 보았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나 몸담았던 팀의 경기도 아닌데 경기에 열광하고 있어서 신기했다.

슈퍼볼의 승자는 패트리어츠였다. 경기가 끝나고, 슈퍼볼의 여파로 흥분한 알렉스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우리는 슈퍼볼 재방송을 틀어 놓은 채, 소파에서 섹스했다. 알렉스는 나에게 기승위를 부탁했지만, 나는 거부했다. 알렉스에게 내가 위로 가는 것이 싫은 이유를 정확히 말한 적은 없었다. 위로 가면 너무 느끼느라 힘들어서 싫은데, 이유를 말하면 알렉스가 더욱 집요하게 부탁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세 번 사정하고 나를 놔주었다. 섹스가 끝나고, 우리는 소파에 누워 서로를 끌어안고 소곤거리다가 잠들었다.

알렉스는 깊은 잠이 들었지만, 나는 잠깐 눈만 붙였다가 일어났다.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오늘은 너무 놀았다.

나는 거실 바닥에서 옷가지를 집어 빨래통에 넣고, 사용한 콘돔들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리고 화장실로 갔다. 샤워를 마치고 목욕 가운을 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알렉스는 알몸으로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알렉스를 위해 히터를 세게 틀고, 침실에서 이불을 가져다가 덮어 주고 나서 공부방으로 갔다.

안경을 쓰고, 컴퓨터 앞에 앉아 논문을 읽었다. 읽은 논문을 엑셀에 정리하고, 구글 스칼라를 뒤적였다. 한참 집중해서 공부하다가 체력의 한계가 느껴져서 이만 자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공부방 문간에서 인기척이 났다.

“지금 몇 시야?”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알렉스가 드로즈만 입고 문간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졸린 눈을 반쯤 뜨고 하품을 크게 하고 있었다. 나는 컴퓨터 시계를 흘낏 보고 대답했다.

“새벽 네 시.”

“언제 일어났어?”

“……이제 나도 잘 거야.”

알렉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엑셀 파일을 저장하고 컴퓨터를 껐다. 알렉스는 공부방 문간에 선 채, 입 안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렉스에게 걸어갔고 알렉스는 내 머리 위에 제 오른손을 올려놓았다. 내가 말없이 알렉스의 허리를 안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알렉스는 웃으며 나를 마주 안았다.

“그만 자자.”

알렉스가 나에게 속삭였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푹 자고 싶었다.

* * *

오늘은 알렉스가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우리는 수업을 마치고 집까지 같이 걸어가면서 저녁으로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 이야기했다.

나와 알렉스는 요새 너무 바빴고, 알렉스는 예전처럼 요리를 열심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저녁을 자주 사 먹었다. 우리는 온갖 배달 음식을 섭렵하거나 집에 가는 길에 적당한 음식을 사서 들어갔다.

오늘은 판다 익스프레스6)에 가기로 했다. 그 가게는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고, 우리는 거기서 저녁을 먹을 것이다. 가게를 향해 걸어가다 말고, 알렉스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가 봄 방학에 집에 오게 되면, 너를 데리고 오래.”

“설마.”

“진짜인데?”

내가 제 말을 믿지 않자, 알렉스는 아이폰 잠금 화면을 해제하고 그의 엄마가 보낸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나는 메시지를 찬찬히 읽었다.

-봄 방학 때 집에 올 거야?

-바쁘지 않으면 갈게요.

-오게 되면 네 남자 친구도 데리고 와.

알렉스는 엄마의 메시지에 아직 답하지 않았다. 혹시 조작이 아닐까 싶어 화면을 유심히 보고 있는데, 알렉스가 말했다.

“네가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 나만 가도 되고, 나도 바쁘다고 하고 안 가면 되니까.”

“으응…… 그렇구나.”

가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도저히 가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알렉스의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들의 커밍아웃을 듣고 절망했다는 사람이 왜? 알렉스의 아버지가 나에 대해 뭐라고 말했길래 나를 보자고 하는 거지? 알렉스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알렉스의 어머니는 나를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할 것 같은데. 알렉스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란히 앉아 나를 시험할 것을 생각하니, 무서워서 가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알렉스는 웃으면서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봄 방학 기간이 마침 음악 페스티벌 기간이거든. 거기에 같이 가자. 내가 예약할게.”

알렉스는 웃으면서 제 손으로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알렉스는 내가 가겠다고 말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으나, 나는 끝내 가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알렉스의 부모님을 마주하는 상황을 견딜 자신이 없었으니까.

봄 학기 5주차, 알렉스

불법행위 법 시간이 끝났다. 나와 친구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남자 기숙사에 있는 칙필레7)에 갔다. 매장에 아기자기한 핑크색과 빨간색 하트 장식이 달려 있었다. 생각해 보니 곧 발렌타인 데이였다.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일기 예보 이야기를 했다. 일기 예보에 따르면, 발렌타인 데이에 20년 만의 폭설이 5인치(약 13센티미터)나 온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텍사스 출신이라 평생 큰 눈을 본 적이 없었고, 폭설 소식에 들떠 있었다.

“발렌타인 데이에 눈이 온다니, 정말 낭만적이야.”

조슈아가 신이 나서 말했다. 시드니가 기대감에 젖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그날은 휴강하겠지?”

“여기가 오대호 연안은 아니니까8), 눈이 많이 오면 휴강하겠지.”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밸런타인데이에 눈이 내려 휴강한다면, 윤과 집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에게 오랜만에 맛있는 요리를 해 주고, 그를 푹 쉬게 해 줄 것이다.

요새 윤은 학회를 준비하느라 밤을 자주 새웠고, 가끔 코피를 흘렸다. 윤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가 오스틴에 같이 가자고 말했지만, 그는 자리를 비우는 동안 일이 밀리는 것이 걱정되는지 선뜻 같이 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윤은 학회에 원고를 제출하지 못할까 봐 불안해했고, 심지어는 우리 엄마가 아파트로 찾아와 그의 뺨을 때릴지도 모른다고 허무맹랑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윤은 약한 신경 쇠약 증세를 보였고, 나는 그런 그가 걱정되었다.

“근데 그날 화씨 10도(영하 12도)래. 휴강해도 집에만 있어야 할 날씨야.”

조슈아가 풀이 죽어서 말했다. 조슈아의 말을 들은 시드니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우리는 모두 싱글이잖아. 휴강하면 뭐 해? 집에서 혼자 넷플릭스나 봐야 하는 운명인 것을.”

“나는 아닌데?”

나는 웃으며 시드니를 놀렸다. 내가 애인이 있다고 자랑하자, 시드니가 놀랐다는 듯 나에게 물었다.

“정말 여자 친구 있어?”

나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그러자 시드니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시드니가 우리의 관계를 눈치챈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번에는 조슈아가 시드니에게 웃으며 면박을 주었다.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않냐?”

“하긴 그래.”

조슈아와 시드니는 훌륭한 만담 콤비처럼 맞장구를 쳤다. 나는 그들을 향해 웃으면서, 뻐기듯이 말했다.

“나는 애인과 발렌타인 데이에 즐겁게 지낼 거야. 너희도 즐거운 발렌타인 데이 보내.”

* * *

나는 윤이 폭설 주의보 소식을 듣고 놀랄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윤은 발렌타인 데이에 폭설이 내릴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응, 그렇구나.”

윤은 폭설이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나는 그의 반응에 놀라서 운전하다 말고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윤을 보았다. 윤이 나에게 차분히 되물었다.

“발렌타인 데이에 눈이 온다고?”

“응. 5인치나 온대. 그날은 분명히 휴강할 거야.”

“5인치에 휴강을 한다고?”

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윤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윤이 보기에 5인치는 폭설이 아닌 건가. 하긴, 서울에는 눈이 자주 그리고 많이 내린다고 했지.

“그 정도면 폭설이지 않아?”

“그 정도면 한국 사람들은 출근하고 학교에 가.”

“그럼 네 기준에서는 눈이 얼마나 와야 폭설인 건데?”

“내 기준은 일반적이지 않아서, 이런 상황에 적용할 수 없어.”

“네 기준은 뭔데?”

“난 인제에 있는 12사단에서 복무했어. 겨울에는 기온이 섭씨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데, 눈이 이틀에 한 번, 3피트씩 오니까 매일 제설 작업을 해야 해. 눈이 내려도 매일 군장 메고 휴전선 초소에 가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산길을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심지어는 5월에도 눈이 1피트나 내려. 미친 동네야.”

윤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동안 잊고 있었다. 내 남자 친구는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는 매일 휴전선에서 북한군을 마주하며 복무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윤을 처음 만났을 때 호감을 느낀 것도 군 복무 경력 때문이었다.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이라면 무인도에 떨어져도 굶어 죽지는 않을 테니 친하게 지내면 든든할 것 같았으니까. 한참 우리의 첫 만남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윤이 나에게 물었다.

“눈이 오면 신날 것 같아?”

“응.”

“그러면 나도 눈이 오면 좋겠다.”

윤이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 웃음에 사르르 녹아내리고 말았다.

* * *

윤은 시험 감독을 하느라 집에 늦게 왔다. 그는 붉은 장미 꽃다발과 기라델리 다크 민트 스퀘어 초콜릿 한 봉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게 뭐야?”

나는 저녁으로 먹을 간단한 파스타를 만들다 말고 윤에게 물었다. 윤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서 말했다.

“내일이 발렌타인 데이라서 사왔어.”

“그거, 나에게 주는 거야?”

“맞아. 한국에서는 발렌타인 데이에 좋아하는 사람과 초콜릿을 먹어.”

윤은 꽃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아빠는 애처가답게 발렌타인 데이마다 엄마에게 보석을 선물했지만, 나는 여자 친구들을 사귀면서 발렌타인 데이를 크게 기념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윤이 방금 했던 말이 신기했다.

우리는 초콜릿을 하나씩 먹었다. 초콜릿을 한 입 깨물어 먹으니, 치약 맛이 나는 시럽이 혀끝에 감겼다. 나는 치약 맛을 참을 수가 없어 초콜릿을 반만 먹고 그만 먹었다. 하지만 윤은 제 몫의 초콜릿을 먹고 나서, 내 몫까지 맛있게 먹었다.

나는 민트 초콜릿을 좋아하는 윤이 신기했다. 어떻게 치약 맛을 참고 먹을 수가 있지? 그러고 보니, 윤은 프로그램을 짜면서 컴퓨터 앞에 단것과 과자를 쌓아 두고 수시로 먹었다. 특히 디버깅할 때 단것을 많이 먹었다. 단것을 좋아하다 보니 치약 맛이 나도 괜찮은가 보다.

갓 삶은 파스타를 볶기 위해 버터를 녹이고 있는데, 윤이 빈 초콜릿 봉지를 모아, 딱지 모양으로 접으면서 말했다.

“한국에는 발렌타인 데이를 기념하는 것이 제과 회사의 상술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발렌타인 데이를 좋아해.”

“그래?”

“응. 연인들의 날이라니, 낭만적이잖아?”

윤은 딱지 모양으로 접은 초콜릿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리고 그는 식탁 위에 내려놓았던 장미 꽃다발을 나에게 건넸다. 꽃다발과 함께 윤의 입술이 다가왔다. 나는 웃으며 눈을 감고 허리를 숙여, 윤에게 내 입술을 내주었다. 내가 최초로 기념하는 발렌타인 데이의 맛은 달콤하고 청량했다.

* * *

아침 알람이 울렸다. 베드 테이블에 둔 아이폰을 집어 시간을 확인했다. 2월 14일 목요일. 아침 일곱 시. 몇 통이나 와 있는 긴급 문자를 확인했다. 폭설로 인해 오늘은 휴강한다는 문자가 잔뜩 와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버티컬 블라인드를 조금 걷고 창밖을 보았다. 창밖에는 거센 눈보라가 치고 있었고, 눈이 내리고 있어서 세상은 무척 조용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윤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윤과 나는 밤늦게까지 공부했고, 그는 나보다 늦게 잤다. 게다가 윤은 아침잠이 많아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했다.

나는 아이폰을 베드 테이블에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윤을 내 품에 당겨 안고, 귓가와 뺨에 뽀뽀하고 귓불을 빨고 깨물면서 장난을 쳤다. 나 때문에 윤은 잠에서 깨어났고, 잠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몇 시야?”

“일곱 시.”

윤이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학교 가야 하는데. 나는 윤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휴강이야. 학교에서 문자 왔어.”

“거짓말.”

“진짠데.”

“나는 학교에 가야 해. 할 일이 많아.”

윤이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나는 윤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를 꽉 안았다. 그러자 윤은 인상을 썼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내일이 마감인 거야?”

“……그건 아니야.”

“언제 마감인데?”

“2월 28일…….”

“아직 한참 남았네. 오늘은 쉬자.”

“음…….”

윤이 대답을 망설였다. 나는 내 팔 안에 윤의 몸을 가두고 그에게 키스했다. 잠에서 덜 깨어 둔하게 움직이는 혀와 입술을 어루만지고 빨고 핥았다.

한참 키스하다가 윤이 고개를 돌려 입술을 잠깐 뗐다. 나는 윤의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고, 그의 코끝과 내 코끝이 닿도록 얼굴을 마주하고 말했다.

“오늘은 나와 있자.”

“알았어…….”

윤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윤에게 다시 키스했다. 키스하면서, 윤의 뺨, 목덜미, 어깨를 쓰다듬다가 티셔츠 위로 가슴팍, 배를 더듬었다. 그러다가 내 손은 자연스럽게 반팔 티셔츠 아래로 들어갔고, 티셔츠 자락 아래로 소름이 오소소 돋은 부드러운 살결을 만졌다. 이번에는 배에서 가슴팍으로 몸을 쓰다듬어 올라갔다.

내가 그의 바짝 솟은 젖꼭지와 가슴을 두 손에 쥐고 굴리는 동안, 윤은 내 목덜미, 어깨와 등, 허리와 엉덩이를 옷 위로 만졌다. 나는 아침이라서, 그리고 성적인 기류에 일어선 내 성기를 윤의 것과 마주 비볐다. 윤도 나와 같은 이유로 흥분해 있었다.

티셔츠 위로 윤의 왼쪽 젖꼭지를 깨물고 핥으며, 왼손으로 그의 오른쪽 젖꼭지를 만졌다. 오른손은 윤의 드로즈 안에 넣었다. 드로즈가 벌써 촉촉이 젖어 있었다. 윤의 페니스는 바짝 서서 드로즈 안에서 답답해하고 있었다. 나는 내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서 윤의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질척하게 키스하던 입 안에서 윤의 신음이 부서졌다.

나는 윤의 티셔츠를 걷어 올렸다. 겨드랑이까지 걷었다가, 그냥 윤의 티셔츠를 전부 벗겼다. 입술과 혀로 윤의 입술과 턱 끝, 목젖과 가슴, 날렵하게 근육이 잡힌 배를 애무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내 혀가 윤의 배꼽에 이르렀을 때, 내 손가락 네 개를 윤의 입 안에 욱여넣고 손가락으로 윤의 입천장을 긁었다. 그러자 윤은 손가락을 물고 숨이 막힌 신음을 흘렸다.

“으흐으…….”

나는 윤이 손가락을 핥고 쪽쪽 빨도록 내버려 두었다. 대신 윤의 가슴을 깨물고 빨면서 잇자국과 피멍을 잔뜩 남겼다. 그동안 내 오른손은 쉬지 않고 윤의 성기를 주무르고 빠르게 흔들었다. 내 손가락을 빠느라 깔딱깔딱 숨이 넘어가는 소리에 울음기가 섞이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피멍이 든 윤의 가슴팍과 어깨를 내버려 두고 고개를 들어보니, 윤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윤의 입에서 손가락 두 개를 뺐다. 윤은 입안에 들어 있는 손가락 두 개를 혀로 감싸 끈적하게 핥아 올린 후, 손가락 끝에 입 맞추었다. 그리고 그는 나와 눈을 맞추며 희미하게 웃었다. 윤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정수리 끝까지 짜릿한 감각이 치솟았다. 나는 윤의 입 안에서 손가락을 빼고, 내 등 뒤로 손을 돌려 티셔츠를 벗어 침대 밖으로 내던졌다.

내가 윤의 파자마 바지와 드로즈를 한꺼번에 벗기려고 하자, 윤은 허리와 엉덩이를 들어 나를 도왔다. 별것 아닌 행동인데 오늘따라 야하게 느껴졌다. 윤의 파자마와 속옷을 벗겨 침대 밖으로 던지고, 나 역시 드로즈와 파자마 바지를 벗어 던졌다.

눈이 오고 흐린 날이지만, 어슴푸레한 빛이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와 윤의 하얀 몸 위에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윤의 납작한 아랫배 위에 두 손을 얹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윤은 부끄러운지 두 팔을 접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흥분해서 꼿꼿이 일어선 복숭아색 젖꼭지와 성기, 납작한 배를 감상했다. 몸이 뽀얘서 내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도드라졌다. 분명 근육이 붙어 있는 남자 몸인데 더없이 섹시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윤은 내 시선을 피해 엎드리며 중얼거렸다.

“부끄러워…….”

“부끄러워?”

부끄럽다는 말을 듣고, 나는 그를 놀리려고 일부러 되물었다. 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밝아…….”

나는 윤의 반듯하고 넓은 어깨와 등, 좁은 허리와 골반, 마른 몸에 비해 봉긋한 엉덩이를 눈에 담았다. 그러다가 윤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쥐었다. 엉덩이가 작아서 한 손에 엉덩이 한쪽이 다 잡혔다. 엉덩이를 손으로 세게 쥐었다가 놓으니 선명하게 손자국이 남았다. 손자국이 벌겋게 난 엉덩이를 가만히 보고 있는데, 윤이 나에게 조르기 시작했다.

“차라리 빨리……. 해…….”

윤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지 말지 고민하다가, 상체를 숙여 윤의 귀 뒤와 목덜미를 따라 키스했다. 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베개에 얼굴을 묻어 감추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매트리스를 짚고 왼손을 뻗어 베드 테이블 위에 있는 콘돔과 젤을 집었다. 콘돔은 매트리스 위에 두고 젤 뚜껑을 열었다.

나는 윤의 엉덩이 위에 키스하고, 그 사이로 젤에 젖은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윤은 입구에 손가락이 닿자 몸을 떨었다. 젖은 손가락 하나를 조심스럽게 입구에 넣고 엉덩이골에 젤을 부었다. 입구 위로 젤이 흐르자, 윤은 몸을 심하게 떨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젤 뚜껑을 닫고 매트리스 위에 놓았다. 그리고 윤의 엉덩이를 가볍게 한 대 때렸다.

“처음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떨어.”

내가 놀리듯이 말하자, 윤은 나를 홱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윤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서도 윤은 등과 허리를 낮추고 엉덩이만 예쁘게 들었다. 나는 한 손으로 윤의 턱을 잡고 키스하면서 손가락을 내벽에 넣었다. 발그레한 복숭아색 입구가 벌어지고, 두 번째 손가락을 내벽에 밀어 넣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안을 넓히면서 내벽을 만졌다. 몸을 하도 섞었더니, 이제는 윤이 어디를 좋아하는지 전부 안다. 입구의 얕은 곳, 전립선, 그리고 내벽이 갑자기 좁아지는 가장 깊은 곳. 손가락으로는 얕은 곳과 전립선만 건드릴 수 있어서 아쉽지만, 곧 페니스로 안을 긁어 주면 그만이다.

엉덩이만 들고 얼굴을 돌려 키스하는 것이 힘든지, 윤은 키스를 멈추고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는 어느새 부끄러움을 잊었다. 윤이 스스로 다리를 접고, 무릎 뒤를 쥐고 자리를 잡았다.

나는 윤에게 다시 키스했다. 키스하면서 내벽에 손가락을 하나 더 넣고 느끼는 곳을 만졌다. 젤에 젖은 내벽은 내 손가락을 꽉꽉 조였다. 나는 윤의 내벽이 나를 조이는 감촉을 정말 좋아한다. 질척한 키스를 나누는 입술과 혀도 좋지만, 구멍 안이 더 좋다. 빠듯하면서도 따뜻하고, 나를 물고 놔주지 않아서 영원히 그 안에 있고 싶다.

안이 충분히 벌어진 것을 느끼고, 손가락을 빼냈다. 내가 오른손을 뻗어 콘돔을 집으려고 하는데, 윤이 내 손목을 잡았다. 윤은 내 오른손에 제 왼손으로 깍지를 꼈다. 윤은 오른팔로 내 목을 끌어안았고, 나의 왼쪽 귓가에 속삭였다.

“그냥 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뒤처리를 생각하면 콘돔을 쓰는 게 맞지만, 그냥 하는 게 느낌이 좋기는 하다. 나는 웃으며 윤에게 가볍게 키스했다. 키스가 끝나고, 윤은 킥킥 웃으며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나는 윤의 허리를 안아 몸을 조금 들어 올리고, 윤의 허벅지 안쪽에 입 맞추고 피멍이 들도록 잇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입구에 젤로 적신 페니스를 가져다 대고 힘을 주었다.

“아!”

윤의 허리가 휘어지고, 목과 얼굴은 뒤로 젖혀졌다. 나는 상체를 더욱 깊이 숙였고, 안으로 들어가면서 윤의 목덜미를 빨았다. 내 목을 안고 있던 윤이 내 어깨를 깨물었다. 윤의 손톱이 내 어깻죽지를 긁었다. 나는 그 자극을 느끼며 더욱 안으로 짓쳐 들어갔다. 윤이 내 귓가에서 비명 같은 신음을 냈다.

“아…. 아파…… 알렉스….”

“쉬이…. 괜찮아.”

“흐으…. 응…… 흣…… 깊어….”

“아직 아니야.”

안이 축축이 젖어 있는데도 빠듯했다. 윤이 아픔을 참으려고 내 어깨를 또 깨물었다. 나는 허리에 힘을 주고, 나를 계속 밀어 넣었다.

뜨겁고 좁은 곳에 끝까지 들어가고 나니 온몸에 땀이 흘렀다. 나는 시험 삼아 허리를 한 번 움직여 윤의 내벽을 자극했다. 윤의 내벽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조였다. 안이 너무 조였고,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빡빡해서 윤의 몸이 완전히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윤은 내 목을 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윤의 두 다리는 내 허리를 감쌌고, 내 두 팔은 윤의 허리를 감쌌다.

내벽이 부드러워진 것을 느끼고, 조금씩 허리를 잘게 움직였다. 내 움직임이 빨라지자 윤이 내 어깨를 다시 손톱으로 긁었다. 윤이 먼저 내 입술을 찾아 키스했다. 나는 윤과 키스하면서 가장 깊은 곳, 내벽이 확 좁아지는 지점까지 들어갔다. 그곳에 몇 번이나 닿으니, 윤은 벅찬 쾌감에 키스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윤의 뺨에 입 맞추면서 그곳을 몇 번이나 찍어 올렸고, 윤은 비명을 지르며 도리질을 쳤다. 그는 완전히 흥분했다. 그의 새빨개진 뺨과 목덜미가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엄청난 만족감을 느끼며, 한 손으로 윤의 턱을 잡아 나를 보게 했다.

“나를 봐.”

윤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윤의 까만 눈을 들여다보며 몸을 움직였다. 윤은 나를 보고 있었다. 내벽 가장 깊은 곳을 긁히고 찔릴 때마다, 윤은 입을 벌리고 단숨을 뱉으며 헐떡거렸다. 윤의 흰 뺨이 눈물에 흠뻑 젖어 들었다. 내가 깊은 속살을 찧자 윤의 속살은 바르르 떨면서 나를 더욱 안쪽으로 빨아 삼켰다. 나는 윤에게 물었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흐흑…. 읏…. 응!”

“사랑한다고 말해.”

“응. 나는 너를 사랑…… 앗!”

나는 윤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전에 그의 턱을 잡고 그 입술에 내 입술을 부볐다. 한참 입술을 부비다가 충동적으로 윤의 몸을 안고 몸을 뒤집어 굴렸다. 윤이 위로 가는 체위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머리에 스쳤지만 잠시뿐이었다.

윤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터뜨릴 것처럼 꽉 쥐었다. 내가 두 손으로 엉덩이를 꽉 움켜쥐자, 통통한 엉덩이가 움푹 파였다. 윤은 내 목을 끌어안고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고 했다. 나는 윤이 얼굴을 가리지 못하게 하려고 침대 헤드에 느슨하게 기대어 앉아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윤은 내 목을 더욱 꽉 안고 매달렸다.

나는 윤의 어깨너머로 그의 엉덩이를 꿰뚫고 있는 내 성기를 볼 수 있었다.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윤의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며 나를 물어뜯는 것이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페니스가 윤의 몸속 깊이 박혔고, 윤은 내가 그의 몸을 파고들 때마다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 내 귀두가 가장 깊은 성감대를 파고들자 윤이 괴로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싫어-”

“왜?”

윤은 어느새 흐느껴 울고 있었고, 나는 그의 피어싱을 박은 젖꼭지를 만지다가 아랫배를 만졌다. 느낌대로라면 내 페니스가 여기까지 들어간 것 같은데. 내가 두 손으로 아랫배를 노골적으로 만지자 윤은 몸을 뒤척였다. 나는 윤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꽉 잡고 그를 쳐올리면서 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발렌타인 데이인데 안 돼?”

“흡…. 아…. 으…. 으응….”

윤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나를 본 윤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는 그의 뺨을 핥고 눈물을 빨아 마셨다. 윤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윤은 내 목을 놓고, 두 손으로 침대 헤드를 다부지게 잡더니 허리와 골반을 살살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헤드에 바짝 기대앉았다. 윤이 헤드를 두 손으로 짚고 허리를 움직이고, 나는 그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윤의 허리가 위아래로 물결칠 때마다 윤의 성기가 내 아랫배를 때렸다. 이제 보니 윤이 기승위를 못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기승위를 너무 잘해서, 오늘을 위해 아껴 두고 있었나 보다.

윤의 내벽은 내가 들어갈 때는 나를 가장 깊은 곳까지 받아들였고, 나갈 때는 나를 조이며 붙잡았다. 허릿짓에 집중한 윤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졌다. 윤의 턱 끝에 고인 땀이 내 몸 위로 떨어지고, 윤의 골반이 음란하게 흔들렸다.

윤은 눈을 반쯤 감고, 본능적으로 자신이 가장 느끼는 곳에 내 성기가 닿도록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윤의 벌어진 입술에서 달콤한 교성이 흘렀다. 나는 숨 쉬는 것도 잊고 윤을 바라보았다. 이 광경에는 절경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렸다. 나는 아마 이 절경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두 손으로 윤의 허리를 안고, 그를 도와 내 허리를 쳐올렸다. 그러자 윤의 교성이 비명처럼 바뀌었다. 나와 윤이 함께 움직이자 윤의 내벽은 불규칙하게 나를 쥐어짜며 비틀었다. 윤의 내벽이 경련하는 것을 느끼며, 윤의 사정이 임박했음을 깨달았다. 과연 내가 키스하려고 하자 윤은 내 입술을 피했다. 그리고 윤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절정을 맞았다.

“아, 아, 앗, 흐으…. 아!”

윤의 성기는 아무것도 토하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온몸을 뒤흔드는 절정을 느꼈다. 나는 방금 본 것이 믿기지 않아 눈을 크게 떴다. 사정이 없는 절정이라니. 숨을 헐떡이는 윤의 상체가 내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침대 헤드를 잡았던 윤의 두 손이 베게 위로 내려앉았다.

힘이 빠진 윤은 흐느껴 울면서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나는 윤의 몸을 안고 그의 귓가에 키스를 퍼부으며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몸을 뒤집어 윤을 내 몸 아래에 눕혔다. 한 차례 절정이 지나가고, 감각이 예민해진 윤은 몸이 돌아가면서 내 페니스가 내벽 안에서 꿈틀거린 것만으로도 흐느끼며 괴로워했다. 나는 윤을 끌어안고 웃으면서 허리를 쳐올렸다.

“자기야.”

“윽…. 흑…. 흐윽….”

“진짜 예쁘다.”

“흡…. 흑…. 흐으…. 하지 마…….”

“나를 사랑해?”

나는 내 성기로 윤이 느끼는 지점을 찌르며 윤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윤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가락으로 윤의 회음부를 훑고 간지럽히며 내벽을 성기로 때렸다. 그러자 내벽이 미친 듯이 오므라들었다. 여태껏 윤과 숱한 정사를 가졌지만, 윤이 이렇게까지 느끼는 날은 처음이라 무척 즐거웠다.

나는 윤의 회음부를 간지럽히며 거세게 경련하는 내벽을 만끽했다. 어느새 바짝 올라선 윤의 성기에서 정액이 질질 새고 있었다. 역시, 오르가즘을 느껴도 정액을 토하지 못하면 뭔가 부족한가 보다. 나는 윤을 위해 그의 가엾은 성기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윤이 깜짝 놀라며 내 목을 꽉 안길래 몸을 숙여 윤에게 내 목을 내주었다. 허리를 치면서 윤의 귀두를 엄지로 긁어 주니 내벽이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덕분에 나 역시 사정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윤을 사정시켰다. 윤은 사정하면서 몸에 힘이 풀렸고, 내 목을 놓쳤다. 사정한 윤의 요도구를 손가락으로 후비다가, 나 역시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기로 했다. 윤의 두 다리를 내 어깨 위에 올리고 과격하게 윤의 내벽 가장 깊은 곳을 후볐다. 내 배와 윤의 배 사이에서 윤의 성기가 마구 비벼졌다. 윤이 한국어로 뭐라고 애원했지만 듣지 않았다. 윤은 내게 안겨 애처럼 엉엉 울었고, 나는 거침없이 내달렸다. 내 배와 윤의 배 사이가 축축해지는 순간, 윤이 교성과 비명을 동시에 질렀다.

“으! 응, 아, 하아, 아, 아아!”

“흐으……. 하아……!”

윤이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지르고, 나는 윤의 내벽 가장 안쪽에 사정했다. 몸을 떨면서 몇 번에 걸쳐 사정하니 엄청난 쾌감이 온몸에 짜릿하게 퍼져 나갔다. 여전히 윤의 내벽은 바르르 경련하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느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윤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도 듣기 좋았다. 윤과의 섹스는 매번 즐거웠지만, 오늘은 유난히 좋았다. 평생 해 본 섹스 중의 최고였다.

나는 윤의 귓가와 뺨에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몸을 조금 일으켜 윤의 얼굴을 보니, 그는 힘없이 흐느껴 울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를 살펴보니, 뭔가 이상했다. 윤은 온몸에 경련이 나서 괴로워하고 있었고, 내 배와 윤의 배 사이는 유난히 축축했다. 이번에는 윤의 배를 유심히 보았다. 우리의 배를 적신 것은 희뿌옇게 덩어리진 윤의 정액과 이상한 액체였다. 게다가 침대 시트까지 그 말간 액체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윤의 배꼽에 고인 정체불명의 액체를 내 손가락에 조금 묻혔다. 손가락으로 비벼보니 약간 미끄덩했고, 냄새를 맡아보니 오줌처럼 역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혀를 내어 살짝 맛을 보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맛이 났다.

“이게 뭐지……?”

내가 혼자 중얼거렸다. 내 혼잣말을 듣고, 윤이 서럽게 울면서 말했다.

“내가 싫다고 했잖아……!”

윤은 울면서 내 가슴팍을 두 주먹으로 때렸다. 주먹에 힘이 하나도 없어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웃으면서 맞아 주었다. 윤은 나를 등지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윤은 귓바퀴와 목덜미가 새빨개질 만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펑펑 우는 윤을 등 뒤에서 안고 말을 걸었다.

“윤은 나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흡…. 흐으…… 흡…. 조용히 해…….”

“오줌 쌀 만큼 나를 좋아해서 어떡해?”

“흐읍……. 조용히 하라고…….”

윤이 우는 소리만 침실에 가득했다. 윤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으면 오줌을 쌀 수도 있지. 나만 좋았던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윤의 귓가와 목덜미에 다시 뽀뽀했다.

“……너 때문이야.”

윤은 비명을 지르다가 쉬어버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윤에게 다시 물었다.

“뭐라고?”

“몰라!”

윤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리고 그는 나를 밀치고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도망갔다. 나는 윤의 뒤를 쫓았다. 윤은 욕실 문을 잠그려고 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 윤을 힘으로 막았고, 문을 열고 욕실로 들어갔다. 윤은 문고리를 붙잡은 채,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이리 와.”

“싫어.”

“얼른.”

나는 팔을 벌렸다. 윤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윤에게 다가가 그를 와락 안았다. 섹스의 열기로 따끈해진 몸이 품에 닿자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괜찮아.”

나는 윤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윤은 내 품에 안긴 채, 내 허리를 안고 얼굴을 감추며 한참 부비적거렸다.

“부끄러워.”

윤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잔뜩 부끄러워하는 윤이 귀여워서 웃었다.

* * *

윤은 나에게 이제 그만하자고 했다. 윤은 자신이 위로 올라가면 방금처럼 지나치게 느끼다가 사정하지 않고도 절정을 느낄 때가 있고, 그게 너무 힘들어서 기승위가 싫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면서도, 그가 기분이 좋을 때 기승위를 요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샤워하고 쉬기로 했지만, 결국에는 쉬지 못했다. 내가 샤워하면서 안에 사정한 것을 씻어준다는 핑계로 손가락을 넣어 그의 내벽을 만졌고, 우리는 다시 불이 붙어 욕실에서 뜨거운 물을 맞으며 섹스했다.

뜨거운 물에 살이 퉁퉁 불도록 섹스하고 씻은 후, 함께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서 이른 저녁으로 파스타와 와인을 먹었고 소파 베드에 나란히 누워 영화를 봤다. 윤이 틸다 스윈튼을 좋아해서, 그녀가 나오는 예술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상류층 여성인 엠마. 그녀는 러시아의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레키가(家)에 시집와서 삼 남매를 낳았다. 하지만 큰아들의 친구이자 셰프인 안토니오를 만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인형의 집 안에 갇힌 삶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인생을 바꿀 어떤 선택을 한다.

플롯은 평이하지만,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방식이 아주 우아한 영화였다. 무엇보다 화면이 아주 아름다웠다. 폭설이 내린 겨울날, 밀라노 저택의 대문을 보여 주며 시작한 영화는 여름날 동굴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연인들을 보여 주며 끝났다. 어찌 보면 슬픈 결말이었고 어찌 보면 행복한 결말이기도 했다. 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이 이루어졌으니 행복한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우리는 소파 베드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쩌다 보니, 윤이 나에게 펠라치오를 해 주었다. 나는 이제 펠라치오에 익숙해져서 내 성기를 빠는 윤의 귓불을 만져 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겼다. 펠라치오는 그에게 받아본 것이 전부이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윤은 펠라치오를 정말 잘했다.

그가 내 성기를 혀와 입술과 목구멍으로 어르고 달래고, 내 덩치만큼 커다란 페니스를 목구멍 안쪽까지 삼키고 조이며 빨아 주다가 내가 사정하고, 그가 내 눈을 도발적으로 올려다보며 정액을 꼴깍 삼킬 때면 윤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윤이 내 성기를 빨아 주면 온몸이 오싹해질 만큼 기분이 좋았다.

부끄럽지만, 나는 여태껏 여자 친구들에게 오럴 섹스를 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럴 섹스를 부탁하기에는 내 것이 너무 컸다. 그래서 윤에게도 펠라치오를 먼저 부탁한 적이 없었다. 윤이 해 줘서 받아 보니 정말 좋았지만, 그가 내 것을 빨아 주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죄책감도 느꼈다.

윤이 내 것을 능숙하게 빨아 줄 때마다, 나는 윤의 전 남자 친구에게 화가 났다. 윤은 그 새끼와 5년이나 만났다. 5년 동안, 윤은 펠라치오를 잘하게 될 때까지 그놈에게 이것을 대체 몇 번이나 해 줬을까? 그놈도 나처럼 윤의 목구멍 안에 사정하고 좋아서 웃었겠지. 정액을 먹는 윤이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겠지. 나는 제 입맛대로 윤에게 온갖 것을 가르치고, 젖꼭지에 피어스를 박고,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결국에는 여자와 바람이 나서 윤을 처참하게 버린 그놈이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윤을 버렸기에 윤이 나에게 왔겠지만, 제가 뭔데 감히 그를 버려?

나는 윤의 목구멍 안에 사정했고, 윤은 습관처럼 내 정액을 삼켰다. 나는 정액을 삼킨 윤이 너무 예뻐서 그에게 키스했다. 키스로 끝내려고 했지만, 정액 맛이 나는 키스를 나누다 보니 몸이 또 달아올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윤을 내 몸 아래에 눕혔고, 그의 파자마 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다리를 벌렸다. 윤은 인상을 쓰며 나에게 말했다.

“너는 정말…… 짐승이야.”

나는 나를 욕하는 말을 듣고도, 잇단 정사의 여파로 여전히 부드럽게 열려 있는 내벽 안으로 들어갔다. 말은 심술 맞게 했지만, 윤은 기다렸다는 듯 두 팔과 다리로 나를 끌어안고 허리를 놀리면서 나를 부추겼다. 내가 장난을 치느라 끝까지 들어간 채 가만히 있자, 윤은 내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면서 나를 도발했다.

“알렉스, 우리 오늘 아기 만들까?”

나는 그 말을 듣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윤을 임신시키면 어떨지 궁금했던 적이 있지만, 그가 먼저 아이를 갖자는 말을 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남자가 아이를 가진다는, 말도 안 되는 그 말이 너무 저속한데, 너무 흥분되기도 해서 혼란스러웠다. 이런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몰라서 멍하게 그를 바라보는데, 윤은 내 엉덩이를 두 손으로 은근히 만지면서 나에게 다시 속삭였다.

“여자애가 좋아, 남자애가 좋아?”

“…….”

윤이 내 귓불을 깨물고 핥다가, 귓가에 몇 번이나 키스했다. 키스를 받는 내내 기분이 너무 좋아서 온몸이 덜덜 떨렸다. 키스가 끝나고, 윤이 내 귓가에 웃음기 섞인 속삭임을 남겼다.

“나는 너를 닮은 남자애를 갖고 싶은데, 너는 어때?”

“…….”

“얼른.”

윤은 내 눈을 올려다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나는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조금씩 허리를 움직이며 말했다.

“나는 너를 닮은 여자애였으면 좋겠어.”

윤이 나를 닮은 남자애를 갖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에 반대로 대답했다. 내가 성기로 그가 느끼는 곳을 찌르자, 윤이 신음을 흘리면서 나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흐으, 그래?”

“응.”

“응, 으……. 그러면, 아! 남녀 이란성 쌍둥이가, 흐으, 응, 좋겠어…….”

내가 그의 내벽 한곳을 계속 쳐올리자 안이 좁아지며 나를 놔주지 않았다. 나는 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그의 허리를 들어 올려 그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고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윤이 내 어깨를 손톱으로 할퀴었고, 나는 그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그가 내 목을 끌어안고 보채며, 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안에 해 줘. 임신하게.”

그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는 쌍둥이를 가져 배가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윤을 상상하다가 나도 모르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 아이를 배고 싶다는, 허무맹랑하고 지저분한 그 말이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생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가 정말 배 속에 내 아이를 품을 수 있다면 좋겠다.

“좋아.”

그래서 나는 그가 바라는 대로 했다. 그의 몸을 뒤집어 엎드리게 하고, 발정 난 개들이 교미하는 것처럼 그를 뒤에서 안고 구멍을 쑤셨다. 내 몸과 그의 등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나는 그가 미친 듯이 느끼느라 힘들어하며 우는 소리가 좋아서 계속 거칠게 박았다. 좆으로 안을 들이받으며, 윤의 젖꼭지를 꼬집고 허리와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윤의 성기를 오른손에 쥐고 거칠게 흔들고 요도구를 손톱으로 집요하게 긁어댔다. 내가 그의 몸을 거칠게 만질 때마다, 안이 조이는 느낌이 더욱 좋아졌다. 어느새 소파 베드 위에 정액과 말간 물을 질질 싸다가 엉덩이만 쳐들고 엎드린 채로 나를 받아내던 윤이 울면서 애원했다.

“그만, 알렉스, 흡, 으흑…….”

“임신시켜 달라며?”

“아, 아, 으, 흐으!”

“임신, 흐으, 시켜 줄게.”

“제발, 빨리, 으응, 나, 아, 힘들어.”

윤은 정신없이 흔들리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나는 그의 턱을 한 손으로 붙잡았고, 그의 얼굴을 돌려 나를 보게 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윤의 입술을 난잡하게 빨았다. 우리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랫도리를 부딪치고 숨을 헐떡거리며 입을 맞추고 혀를 얽는 소리가 지독하게 외설스러웠다. 내가 윤의 목구멍까지 혀와 엄지손가락을 쑤셔 넣고 마구 휘젓자, 윤은 구역질을 하면서 내 입술을 밀어냈다. 나는 눈물에 젖은 그의 뺨을 혀로 핥아 올리며 말했다.

“아직 멀었어.”

나는 임신해서 배가 불러오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부른 배를 안고 뒤뚱거리면서 걸어 다닐 그를 상상하니 더없이 흥분되었다. 나를 한껏 도발해 놓고 나서 내가 멈추기를 바라다니, 그가 실수한 것이다. 나는 내 몸과 그의 등이 딱 붙어 있도록 그를 꽉 끌어안고, 그의 골반을 두 손으로 쥐고 엉덩이를 벌리며 거칠게 치달아 들어갔다. 내가 목덜미와 어깨를 마구 깨물면서 안을 쑤시자, 그는 흐느끼고, 힘없이 흔들리며 소파 베드 위를 손톱으로 긁고 쥐어뜯었다. 나 때문에 그의 뽀얀 목덜미와 어깨에는 내 잇자국대로 피멍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의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며, 나는 내 좆을 부풀려 그의 몸 안 가장 깊은 곳에 씨를 뿌렸다.

나는 성에 담백한 사람이었다. 운동부 동료들이 좆의 숙주처럼 틈만 나면 음담패설을 해대고 하룻밤 붙어먹을 여자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히 내가 여자 친구들과 했던 섹스는 아주 점잖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내가 어떤 놈인지 안다. 나도 결국 다른 놈들과 다를 바 없는 사내새끼였다. 윤은 내가 가진 추잡한 욕구를 일깨우고, 내 바닥을 드러나게 했다. 그 덕분에 나는 내가 몰랐던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요새 그의 다리를 벌리고 구멍에 좆을 처박고 흔들고 싸는 게 너무 좋아서 틈만 나면 그의 드로즈를 벗길 궁리만 했고, 그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매일 붙어먹고 있었다.

윤을 만나고, 나는 사람들이 왜 섹스를 정사(情事)라고 부르는지 알게 되었다. 윤과 하는 섹스는 더럽고 질척하고 야만스럽지만, 그래서 아주 후련하고 만족스러웠다. 물론 윤과의 섹스만 좋은 것은 아니었다. 섹스가 끝나고, 그를 껴안고 후희와 정담을 나누다가 스르르 잠드는 시간이 좋았다. 아니다. 나는 윤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 부은 얼굴로 인사하는 것도,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하고,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기뻐하고, 힘든 순간에 서로를 위로하고, 장을 보고, 사랑을 말하고, 같이 한 침대에서 잠들고. 어느새 나에게는 그 모든 순간이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것처럼 익숙해졌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것처럼, 달이 지구를 공전하는 것처럼, 나는 자연의 법칙처럼 당연하게 윤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발렌타인 데이, 윤

나는 어릴 때부터 성적인 호기심이 많았다. 그렇다고 아무나와 자지는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만난 남자 친구가 첫 남자였고, 그와 사귀는 5년 넘는 시간 동안 그 인간하고만 잤다. 그 인간과 헤어지고, 몇 차례 원나잇을 해 보고 알았다. 내 성격에는 아무나 가볍게 만나는 일회성 관계가 맞지 않았다. 하룻밤 만남을 즐기기에는 내가 너무 소심했다.

역시 애인과의 잠자리가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기는 것이 좋았고, 그 사람이 나를 간절히 원하는 느낌을 좋아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의 가장 연약한 곳을 내주고 짜릿한 쾌감과 일체감을 얻는 것도 좋았고, 그 사람이 내 몸을 마음에 들어 하며 흥분하고, 내가 잘 느끼면 뿌듯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섹스할 때 최선을 다했다.

나와 알렉스는 거의 매일 뜨거운 잠자리를 가졌지만, 우리의 잠자리가 오늘처럼 뜨거웠던 적은 없었다. 알렉스와 사랑을 나누다 보면 사정하지 않고 오르가즘을 느끼는 일이 제법 있었지만, 너무 느끼다가 실금까지 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러다가 내가 정말 임신하게 될까 봐 겁이 날 정도였으니, 그만큼 우리의 몸이 서로 잘 맞는다는 거겠지. 인터넷 커뮤니티 글에서나 봤던 일이 나에게 일어날 줄은 몰랐다.

나는 아침에 했던 섹스가 오줌을 쌀 정도로 좋았고, 알렉스도 나만큼 즐겼으면 해서 일부러 알렉스를 부추겼다. 알렉스는 순진한 애라 그런지, 내가 공들여 펠라치오를 해 주고, 임신을 이야기하며 자극하자 쉽게 달아올랐다. 그의 우아한 얼굴이 잔뜩 땀에 젖어 송곳니를 드러냈고, 그는 미친 듯이 흥분하여 내 목덜미를 물어뜯었고, 맹수처럼 흉포하게 목을 긁는 소리를 내며 내 몸 안에 사정했다.

착하고 잘생기고 몸도 좋은 남자 친구와 잠자리까지 잘 맞다니, 알렉스에게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나는 꿈 같은 연애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알렉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알렉스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고, 알렉스가 나와의 미래를 이야기하면 회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분명 변화는 있었다. 나는 이제 여자와 위장 결혼을 한 그놈을 생각해도 화가 나지 않았다. 전 남친이 준 트라우마가 알렉스와의 연애 덕분에 낫고 있었다. 언제 낫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낫고 있다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알렉스가 나에게 잘할 때마다, 그 새끼가 나에게 얼마나 못했는지 알게 되었고, 그 새끼가 좆같은 새끼라고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가 했던 것이 정말 연애였다면 그가 나를 그토록 처참하게 기만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서로를 위하고 거짓 없이 마음과 생각을 전해야 하는 거였다.

내가 알렉스와 언제까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알렉스와 가족이 되고 싶지만, 내 마음을 말할 용기가 없다. 설령 이러다가 가족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우리가 헤어져도 연애의 기억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테니까. 우리의 연애는 내 평생의 추억이 되어, 내가 외롭고 고단할 때마다 나를 지켜주고 위로해 줄 것이다.

봄 학기 6주차, 알렉스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배게 밑에 둔 아이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하니 일요일 아침 여섯 시였다. 대체 이 시간에 누군지. 옆집 약쟁이들이 주말을 맞아 마약 파티를 열고, 취해서 집을 헷갈린 게 아닐까.

옆자리에 누워 있는 윤을 보았다. 윤은 내 팔을 베고, 맨몸에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즐겨 입던 헐렁한 반팔 티셔츠만 입은 채 잠들어 있었다. 우리는 새벽까지 섹스하고 잠들었고, 그래서 그가 피곤해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윤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 벗은 몸에 드로즈만 입고 현관으로 갔다.

“누구세요?”

나는 잠이 덜 깬 상태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의 두 눈에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할아버지의 뒤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보좌관 조지가 보였다. 할아버지는 다짜고짜 나를 밀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할아버지의 뒤를 쫓았지만, 할아버지는 멈추지 않았다.

“여보, 제발!”

할머니가 소리쳤고 할아버지는 듣지 않았다. 연로하신 분인데 동작이 매우 기민했다. 할아버지는 곧장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할아버지가 침실로 들어가는 순간, 잠이 번쩍 깼다. 침실에는 윤이 있었다. 나는 달려가 할아버지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더 빨랐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베드 테이블 위를 보고 있었다. 베드 테이블 위에는 우리가 어젯밤에 쓴 콘돔 몇 개와 휴지가 뭉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우리의 옷과 콘돔 껍질, 젤 통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떨리는 두 손으로 겨울 이불을 홱 들추었다. 이불 속에는 윤이 잠들어 있었다.

윤이 갑자기 서늘해진 공기에 몸을 움찔거리다가 눈을 떴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냉엄한 눈빛으로 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헐렁한 티셔츠 목둘레선 사이로 보이는 윤의 목덜미와 어깨에 내가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윤의 팔뚝과 허벅지, 사타구니까지 내 입술 자국과 잇자국이 적나라하게 나 있었다.

잠기운이 조금 가시고, 할아버지를 알아본 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티셔츠 자락을 아래로 끌어내리면서 허둥지둥 몸을 가리려고 했다. 할아버지는 당황한 윤을 노려보면서 두 주먹을 쥐었다. 할아버지가 주먹을 치켜드는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달려가 윤을 감싸 안았다.

“이런 고얀…….”

나는 할아버지에게 얼굴을 맞았다. 내가 할아버지에게 맞은 순간, 윤이 내 품에서 조그맣게 비명을 질렀다. 할아버지에게 세게 맞은 왼뺨이 얼얼했다. 윤이 나를 끌어안았고, 나는 윤을 끌어안았다. 할아버지가 다시 손을 치켜들었고, 나는 눈을 감았다.

“알렉산더!”

할머니가 뒤늦게 나와 윤 앞으로 뛰어들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할머니는 화장을 곱게 하고 짙은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진주 귀걸이와 세 줄짜리 진주 목걸이까지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는 키가 6피트(약 183cm)나 되는, 기골이 장대한 여장부였다. 할머니는 체구만큼이나 배포도 큰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프롬에서 만난 동갑내기 알렉산더 테신 주니어가 거물 정치인이 될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석유 재벌가의 상속녀이자 할아버지의 유일무이한 도반(道伴). 그게 나의 할머니였다.

지금, 이 순간 할아버지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할머니뿐이었다. 할머니가 두 팔을 벌리며 우리와 할아버지 사이를 가로막았다. 나는 할머니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할머니의 등 너머에서, 할아버지가 눈에 핏발이 잔뜩 선 채, 나와 윤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할머니가 차갑게 말했다.

“내 손자에게 손대지 마.”

“…….”

“……내가 이러지 말자고 했잖아, 우리가 이러면 안 된다고.”

“……그건 당신 생각이고!”

할아버지가 이를 악문 채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할머니는 등을 똑바로 펴고 할아버지를 마주 보았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를 마주 보았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거실에 나가 있어요, 알렉산더.”

“이사벨라.”

“나가 있으라고 했어요.”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뭐라고 대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조지가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데리고 나갔다. 할아버지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할머니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이불을 집어 나와 윤을 감싸 주었다.

“……미안하다.”

할머니가 다시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나는 할머니를 올려다보았다. 할머니가 주름진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할머니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울지 말고.”

나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머니는 윤을 보았다가 나를 보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되면 둘이 거실로 나오거라.”

말을 마치고, 할머니는 침실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윤을 보았다. 윤은 잔뜩 떨리는 손길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윤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우리의 관계를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들켜서 화가 났다. 내가 이런 상황을 막을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라서 슬펐다. 내가 무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윤이 알게 되어 수치스럽기도 했고, 윤에게 끔찍한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기도 했다.

“미안해.”

나는 윤에게 사과했다. 윤이 울음을 참으려고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한 번 저었다.

“괜찮아.”

윤이 내 목을 끌어안고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윤의 품에 안기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울자 윤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나는 울면서 윤에게 계속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해.”

윤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 주었다. 미안하다고, 지금 내가 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 * *

우리는 서로를 안고 한참 울었다. 침실을 나서기 전. 내가 윤의 손을 잡았지만, 윤은 내 손을 마주 잡지 않았다. 윤의 낯선 반응에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의 손가락을 벌려 깍지를 꼈다. 그러자 윤은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윤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우리가 손을 잡고 방에서 나오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호통을 쳤다.

“방금 주니어9)와 통화했다. 주니어는 다 알고 있었다며? 감히 네놈들이 짜고 나를 속여?”

“…….”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아빠가 이 상황에 대해 알았으니, 엄마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엄마 생각을 하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간신히 마음을 고쳐먹은 엄마가 이 상황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이려나. 어쩌면 엄마의 마음이 다시 돌아설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할아버지의 분노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할아버지가 헛웃음을 지으며 윤에게 물었다.

“그리고 너, 윤이라고 했지? 시민권이 그렇게나 갖고 싶었나? 남자의 자존심도 버리고 같은 남자에게 다리를 벌릴 만큼?”

“…….”

“할아버지.”

“여보.”

“내가 동성 결혼법이 통과될 때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어. 그래서 반대표를 던진 거라고. 저런 영악한 놈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너 같이 순진한 녀석들에게 달려들 것 같았단 말이다!”

할아버지가 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윤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버티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내가 할아버지의 말을 단호하게 반박했다.

“틀렸어요. 할아버지, 제가 첫눈에 반해서 윤을 따라다녔어요.”

“너는 가만히 있어.”

할아버지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내가 할아버지의 말을 다시 반박하려고 했지만, 윤이 나보다 빨랐다. 윤은 이를 악물고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저는 컴퓨터 공학 전공이에요.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에서 취직하면 바로 영주권이 나오죠.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한국에서 명문대를 졸업했어요.”

“…….”

“그런 제가, 뭐가 아쉬워서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겠어요?”

“…….”

“저는 알렉스를 사랑해요.”

윤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할아버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윤을 보다가 입술을 비틀면서 기묘하게 웃었다.

“고얀 놈.”

할아버지가 중얼거렸고, 할아버지의 곁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윤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윤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할아버지가 코웃음을 치면서 윤에게 되물었다.

“그래, 똑똑한 친구. 네가 보기에는 우리가 아침 여섯 시부터 왜 여기에 온 것 같으냐?”

“……저는 모르죠.”

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의 반응을 보고 불쾌해하던 할아버지는 한껏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렉스, 내가 왜 이 추잡한 꼴을 보러 온 것 같으냐?”

“…….”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마. 이번 목요일에 아주 이상한 제보를 받았다. 아니지, 그런 건 제보라고 할 수도 없어. 정체를 숨긴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연락해서는, 내 장손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그자는 네 핸드폰 번호와 차 번호, 메일 주소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더구나. 그러면서 자신의 조건을 맞춰 주지 않으면 타블로이드지에 모든 것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어.”

할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일과 맞닥뜨린 사람처럼 뒤틀린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두 분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내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조지, 사진을.”

조지는 브리프케이스에서 사진들을 꺼내 커피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늦은 밤, 가로등 불빛 아래 키스하고 있는 연인들을 멀찍이서 찍은 사진이었다. 윤은 카메라를 등지고 있었고, 윤을 안고 있는 내 얼굴은 작지만 분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코트로 윤을 감싸서 안고 있고, 윤은 시꺼먼 롱패딩을 입고 있고.

우리를 찍은 사진을 보고 나니,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강경하기로 이름난 텍사스주 연방 상원의원의 손자가 동성애자라니. 호사가들이 환장할 만한 소재였다. 내 비밀을 알고 있다는 그 사람은 타블로이드지와 벌써 접촉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거보다 더욱 확실한 사진이 있을지도 모르고.

만약 이 사실이 밝혀지면, 할아버지의 정치 경력에 엄청난 타격이 갈 것이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화를 낼 만도 하다. 할아버지는 분노를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게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이게 사실이라면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온 거다.”

“…….”

“그러니까 알렉산더 테신 4세. 사실대로 말해.”

“……진실을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내 목소리는 엉망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 대답을 듣고, 할아버지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손을 꽉 잡았다. 할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이 시뻘게진 채 고개를 돌렸고, 할머니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그만.”

할머니의 두 눈은 눈물을 참느라 새빨갰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눈가를 손으로 닦았다. 할머니가 목이 멘 채 말했다.

“처음에는 헛소리라고 생각해서 무시했어. 그랬더니 그 여자가 보좌관실로 사진 파일을 보내 왔다.”

“…….”

“그러니까 말해 주렴. 우리가 너를 지켜야 할지, 그 사람을 신고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니까. 아니, 그게 아니어도 나는 네 마음을 확실히 알고 싶어.”

할머니는 한 손으로는 굳게 주먹을 쥐었고, 다른 손으로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등과 다이아몬드 반지, 엷은 핑크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 보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실을 말했다.

“이미 전부 보셨잖아요. 뭐가 더 필요해요?”

“알렉스.”

“저는 윤을 사랑해요.”

* * *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침묵했다. 조지도 침묵했다. 나는 진실을 말하고 고통과 후련함을 동시에 느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느낄 충격과 상실감에 괴로움을 느꼈지만, 진실을 말했기에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흐느껴 우셨고, 할머니도 우셨다. 조지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하는 동안, 1초가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두 분 중, 먼저 울음을 그친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일이야.”

“…….”

“……최대한 조용히 처리해야 할 거고.”

“…….”

“척 제리가 존경스러운 것은 내 인생에 처음이야.”

할아버지는 나를 보며 치가 떨린다는 듯 말했다. 할아버지의 핏발 선 눈에 이글이글 푸른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방금 한 말이 믿기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척 제리 전 부통령을 경멸한다는 사실은 굉장히 유명한데, 할아버지는 분명 그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제리 전 부통령을 경멸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와 같았다. 그는 돈만 내면 갈 수 있는 대학교를 졸업했고, 사무용 가구 세일즈맨으로 일하다가 우연히 주지사의 보좌관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하여 부통령까지 되었으나 여전히 경박하고 멍청하고, 입만 열면 모순투성이인 사람이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사립 학교를 졸업하고 엘리트 코스를 밟은 할아버지는 척 제리 전 부통령의 닳아 빠진 천박함을 도저히 견디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공식 석상에서 제리 전 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발언을 한 것도 수 차례였다.

할아버지가 그를 존경한다고 한다면,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나였다. 할아버지는 제리 전 부통령의 아들을 통해 나를 보고 있었다. 제리 전 부통령과 아들의 이야기는 전국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제리 전 부통령은 아들과 사위를 아끼고 아들 부부의 사생활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민주당의 정치 공작 때문에 아웃팅을 당하고 말았다. 결국, 제리 전 부통령은 아들의 사생활 때문에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가지 못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나는 침묵을 지켰다. 할아버지가 다시 한번 치를 떨면서 말했다.

“하나님의 자녀가 계간이라니! 지옥에 떨어지는 게 무섭지도 않아? 이러다가 너는 지옥 불에 몸을 태우게 될 거야!”

“여보.”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어! 여태까지 잘해 왔으면서, 인제 와서 이 할애비를 배신해? 너는 네 희망이었다. 나는 네가 내 후계자가 되리라 믿었다고! 내 자식과 손주를 통틀어 가장 싹수가 보이는 놈은 너였단 말이다!”

할아버지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고함을 치고 역정을 냈다. 할아버지가 후계자라는 단어를 말하자, 내 손을 잡고 있던 윤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나는 불안한 눈길로 윤의 옆얼굴을 보았다. 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윤의 옆얼굴을 보면서, 할아버지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정치를 할 만한 그릇이 못 돼요.”

할아버지는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고, 할머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아버지는 이마를 감싸 쥔 채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걸어와 우리의 앞에 섰다.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았다.

“할머니.”

“잠깐 나와 이야기하자.”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앞장서서 침실로 들어갔다. 할머니에게 끌려가는 바람에, 나는 윤의 손을 놓쳤다. 윤을 돌아보니, 그는 고개를 숙이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우리는 침실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정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어수선한 침대 가에 앉았고, 나는 할머니의 곁에 앉았다.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쥐고서 말했다.

“이리 온. 우리 아기.”

할머니는 팔을 벌려 나를 안아 주었다. 나는 할머니를 마주 안았다. 할머니의 품은 따뜻했다.

“우리 손주가 언제 이렇게 컸지.”

할머니가 내 등을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나는 눈을 감고 할머니를 꽉 안았다. 할머니는 나에게 다정하게 속삭였다.

“네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든, 나는 네 편이야.”

“…….”

“알렉스, 나는 네가 저 애를 사랑하고, 저 애가 너를 사랑하면 그걸로 됐어.”

할머니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할머니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괴로워졌다. 할머니가 흐느끼면서 말했다.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어.”

“…….”

“알렉스. 내 막내 여동생 조세핀 말이다.”

“…….”

“너는 그 애가 사고로 죽었다고 알고 있겠지.”

“…….”

“사실 조세핀은 여자 친구와 동반 자살했다.”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할머니에게 요절한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성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유난스러운 일로 여겨지던 시절, 텍사스를 떠나 코넬 대학교에 진학하여 건축가가 된 수재였다. 그녀는 할머니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여동생이라서, 할머니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작은 아빠의 이름을 조셉이라고 지었다. 그러나 그녀가 왜 죽었는지는 여태 몰랐다. 다들 그분의 이야기가 나오면 말을 돌리기 바빠서 아무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요.”

“그렇겠지. 그 시절에는 동생이 부끄럽다고 다들 말을 아꼈으니까. 부모님도, 내 자매들도, 그 애의 친구들도 그 애를 이해하지 못했어. 나는 그 애가 안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애의 편을 드는 것이 무서워서 침묵했다. 하지만 그 애가 세상을 떠나고, 나는 정말 많이 후회했어. 나라도 그 애의 편이 되어 주었다면 그 애는 괜찮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자꾸 들었어.”

“…….”

“그래서 나는 내 손주를 외면할 수가 없다.”

할머니가 목이 멘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예전에 비하면 마르고 쇠잔해지셨다. 나는 할머니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할머니는 나를 이해한다고 말씀하시지만, 할머니의 마음은 분명 아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좋지 않았다.

“…….”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잖니. 서로 사랑하라고, 가장 으뜸가는 계명은 사랑이라고.”

할머니는 힘주어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할머니가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옳으시다. 사랑은 가장 큰 계명이야.”

“…….”

“하나님이, 예수님이 너와 함께하신다.”

“…….”

“그러니까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알렉스.”

* * *

할머니는 나에게 몇 번이나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나와 할머니가 침실에서 나왔을 때, 윤은 거실에 없었다. 조지와 할아버지만 거실에 앉아 분노에 찬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두고 공부방으로 갔다. 윤은 캄캄한 방, 책상 앞에 혼자 쓸쓸하게 앉아 있었다.

“왜 혼자 이러고 있어.”

“…….”

나는 윤에게 다가가 그를 안으려고 했지만, 윤은 나를 밀어내면서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할아버지가 그러시더라. 이건 전부…… 착한 너를 타락시킨 내 잘못이라고. 그러니까 헤어지라고.”

할아버지의 모진 말을 옮기면서, 윤은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할아버지의 말을 전해 듣는 내가 심한 모욕감과 분노를 느끼는데, 윤은 가만히 있었다. 나에게는 심한 말을 못 하면서 윤에게는 모욕을 가하다니. 할아버지가 미웠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인데. 윤이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남자와 만났으면 이런 수모는 겪지 않았어도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윤의 말을 부정했다.

“지옥에는 네가 아니라 내가 떨어지겠지. 너는 무신론자이고, 먼저 사귀자고 한 건 나였는데.”

“…….”

“만약에 할아버지 말대로 헤어지면 어떻게 할 건데? 이번에도 도망갈 거야?”

나는 농담 반 진담 반 그에게 물었다. 내 질문을 받고, 윤은 입술만 조금 달싹거릴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이번에도 뜻하지 않게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윤이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또다시 도망치고 싶어 했다는 게 마음이 아팠다. 윤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자신의 고향을 버렸다. 그런 처절한 도망은 일생에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윤이 더는 도망가지 않았으면 했다. 힘들고 슬픈 일이 있더라도 내 옆에서 힘들고 슬퍼했으면 했다. 그 마음을 담아, 나는 윤의 두 손을 나의 두 손으로 감싸 쥐면서 말했다.

“부탁이야. 내 곁에 있어.”

“알았어.”

윤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 * *

우리는 손을 잡고 공부방에서 나왔다. 윤은 손을 빼려고 했지만, 나는 일부러 윤의 손을 굳게 잡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조지는 집에서 나설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나와 윤이 손을 잡은 것을 보자마자, 나를 똑바로 쏘아보며 분노에 차서 말씀하셨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내 의석이 날아가면 전부 네 잘못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경고에 침묵으로 동의를 표했다. 할아버지는 드디어 내가 이번 문제의 당사자라는 것을 인지하셨나 보다. 할아버지는 진작 그러셔야 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셔야 했다는 거다. 윤이 나를 타락시킨 게 아니었다. 만약 나의 진심을 따르는 행동을 타락이라 부른다면, 나는 타락한 게 맞았다. 나는 스스로 타락해서 윤에게 구애했고, 그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고 내가 타락했다는 사실이 조금도 부끄럽거나 죄스럽지도 않았다.

“협상이 시작되면 너도 참석하거라. 너는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똑똑히 알아야 해. 그리고 너.”

할아버지가 윤을 지목했다. 윤은 벌벌 떨면서도 할아버지를 똑바로 보았다. 할아버지는 윤에게 차갑게 말했다.

“나는 너에게 충분히 설명했다.”

“여보.”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불렀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윤에게 경고를 던졌다.

“현명하게 결정하기를 바란다.”

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현관을 나가버렸다. 할머니는 현관을 나서기 직전,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또 보자.”

조지는 나와 윤을 힐끔거리다가 할머니를 쫓아 집을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나니, 집이 몹시 적막했다. 윤과 단둘이 남겨지고, 나는 막막한 기분을 느끼며 윤을 끌어안았다. 윤은 내 허리를 마주 안았다. 윤 역시 나처럼 막막한 기분일 것이었다.

사생활이 동의 없이 까발려지는 기분은 처참했다. 내 사생활을 파헤친 이름 모를 그 인간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 인간이 법의 심판을 받았으면 하지만, 경찰에 신고하면 모든 사람이 내 사생활에 대해 알게 된다. 동성 결혼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강경 보수 상원의원의 손자가 게이라니. 이 사실이 밝혀지면 할아버지의 의석이 날아갈 수도 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나에게 다시 한번 분노를 쏟아 낼 것이다.

현재 상황은 무시무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운동을 오래 하면서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에는 익숙해졌지만 이런 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아본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은 너무나 불안하고 괴로운데도, 내 품에 안긴 윤은 사랑스러웠다. 나는 이미 그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고, 앞으로도 그에게 큰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 최악의 경우, 그는 나 때문에 언론의 집중포화 앞에 끌려나갈지도 모른다.

윤은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 언론의 공격에 버티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윤에게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말라고, 제발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말했지만,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윤을 놔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그가 나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그를 붙잡지 않는 것이 맞으니까.

나는 손끝으로 윤의 뺨과 입술을 만지다가 그의 이마에 키스하고,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윤이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윤의 몸은 내 품 안에 있지만, 어쩐지 윤의 마음은 나를 떠나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쓰렸다.

* * *

스터디를 마치고 시드니와 조슈아를 관찰했다. 저 녀석들이 범인일까? 하지만 조슈아와 시드니는 나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알고 있으니, 얘들은 범인이 아닐 것이다. 시드니는 자신과 조슈아를 관찰하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나에게 몇 번이나 눈치를 주며 내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시드니가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라니까.”

“없으면 됐어.”

시드니는 웃으며 쿨하게 말했다. 그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쪽으로 심증이 굳어졌는데도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겨우 용의자가 두 명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윤에게 내 곁에 있으라고 말했으니, 내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다.

* * *

수빈 정. 한국식으로는 정수빈. 나의 가족들과 윤의 가족들을 제외하면, 우리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수빈뿐이었다. 그래서 수빈에게 의심이 가는 것이 타당했다.

나는 처음으로 수빈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바쁘지 않으면 잠깐 만나자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한 시간이 지나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세상이 멸망하려나?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수빈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야.”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잖아?

수빈은 웃으며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나는 한때의 연적에게 유치하게 굴었고, 그녀와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사실을 꼴사납게 과시했으니까. 하지만 아쉬운 사람이 먼저 숙이는 수밖에. 나는 자존심을 억누르며 그녀에게 말했다.

“……너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야.”

-그러면 왜 만나자는 건데?

“너에게 물어볼 게 있어.”

-나는 고급 인력이야. 네가 시간을 내달라고 말한다고 해도, 말하자마자 바로 시간을 낼 수는 없어.

“그래도 부디 시간을 내주겠어?”

나는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자 수빈은 전화기 너머에서 어린 말괄량이처럼 킥킥 웃다가 말했다.

-네가 간절하게 부탁하니 어쩔 수 없네. 어디 보자, 내일 점심시간 어때? 열두 시?

“좋아.”

-그러면 학식 카페에서 보자. 내일 봐.

* * *

내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 수빈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수빈은 나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녀는 아이폰으로 퍼즐 게임을 하다 말고 말했다.

“네가 내 거까지 사와.”

“뭐 마시고 싶은데?”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윤도 수빈도 한겨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한겨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니, 춥지 않나? 한겨울에도 차가운 커피를 찾는 그들의 습관을 걱정하면서, 따뜻한 그린티 라떼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조금 기다리니 음료가 나왔다. 나는 음료 두 잔을 들고 테이블로 갔고, 수빈과 마주 앉았다.

“나에게 뭘 물어보고 싶은데? 주윤에 대한 거겠지?”

“맞아.”

“네가 나를 만나려고 하는 이유야 뻔하지.”

수빈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녀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수빈이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빨아 마시고 나서 말했다.

“둘이 잘 지내는 것 아니었어?”

“잘 지내.”

“네가 대체 뭐가 궁금해서 이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에 대해 윤에게 따로 들은 거 없어.”

“알고 있어.”

나는 쌀쌀맞게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듣고, 수빈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나에게 되물었다.

“그럼 뭐가 궁금한데?”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야.”

“그러면?”

“차로 가자.”

* * *

안전벨트를 매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수빈은 조수석에 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나는 캠퍼스를 벗어나서 달리다가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신호등이나 다른 차를 신경 쓰지 않고 대화하기 위해서였다. 수빈이 빨대 끝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차에 태운 건지.”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우선 그녀를 떠보고, 그녀의 말에서 모순을 발견하게 되면 차를 바로 갓길에 세우고 그녀를 추궁해야 겠다. 그녀가 쌍꺼풀진 눈을 가늘게 뜨며 나에게 물었다.

“너는 이 상황이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친구의 남자 친구가 나를 보자고 할 일이 뭐 있겠어? 바람을 피울 것도 아닌데 단둘이 드라이브를 하자고 하고.”

그녀는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했다. 그 말을 들으니 속이 뜨끔했다. 역시 머리가 좋고 감도 좋은 사람들은 대하기 어려웠다. 상황을 읽고 기민하게 대응하니까. 이래서야 그녀에게서 유용한 정보를 캐내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그래도 그녀를 떠보기로 했다.

“며칠 전에 할아버지가 오셨어.”

“근데?”

“할아버지 사무실로 이상한 신고가 들어왔거든.”

“사무실? 너희 할아버지 아직 은퇴 안 하셨구나. 무슨 사업을 하시는데?”

“어?”

나는 운전을 하다 말고 수빈을 빤히 바라보았다. 수빈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분명히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는데 왜 엉뚱한 말을 하지?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왔을 때, 이렇게 황당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수빈이 처음이었다. 수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에게 물었다.

“사무실이라며. 할아버지가 화학 사업하시는 거야? 그러면 네가 나를 부른 게 그나마 말이 되는데. 나를 연구소로 스카우트한다던가, 뭐 그런 거 있잖아.”

“아니. 우리 할아버지는 사업가가 아니야.”

“근데 네 할아버지 일을 왜 나한테 물어봐? 이유를 모르겠네.”

“너, 텍사스 주 연방 상원의원이 누구인지는 알아?”

“히스패닉계 아저씨잖아. 그 사람 이름이 뭐더라?”

히스패닉계 연방 상원의원. 수빈이 말하는 사람은 에드워드 마르티네즈 상원의원이었다. 나는 그녀를 다시 추궁했다.

“다른 한 명은?”

“뭐야, 텍사스에 연방 상원의원이 한 명 더 있어?”

“원래 연방 상원의원은 한 주에 두 명이야.”

“그래? 몰랐어.”

수빈은 정말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텍사스에 할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신선한 반응은 처음이었다. 수빈의 엉뚱한 반응을 보니, 그녀는 나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확실했다.

어떻게 할아버지를 모를 수가 있지? 원인이 무엇일지 잠시 생각하다가, 수빈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수빈이 영어를 잘하다 보니, 그녀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하긴. 윤도 처음에는 내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고, 나는 지금도 서울시장이 누구인지 모른다.

연방 상원의원이 두 명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나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상원의원실에 협박 전화를 할 리가 없다. 나는 괜한 짓을 했다. 어째서 수빈을 의심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행동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사람을 만만하게 보고 의심하다니.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이런 짓은 하면 안 되었다. 혹시 그녀가 동양인이라서, 여성이라서 쉽게 의심한 것은 아닐까. 만약 수빈이 내가 그녀를 의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엄청난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인종 차별을 하는 거냐고 따진다면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를 의심했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기만 했다. 난감함에 얼굴을 찌푸리는데, 수빈이 제 머리 위 어시스트 그립을 움켜쥐며 나에게 소리쳤다.

“정신 차리고 운전 똑바로 해. 앞을 봐!”

“알았어, 알았다고!”

나는 그녀의 말대로 운전에 집중했다. 수빈은 머리 위 어시스트 그립을 붙잡은 채,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할아버지 이야기는 뭔데?”

“말이 잘못 나왔어. 내가 진짜 물어보려던 건 말이야.”

“응.”

“윤 이야기야.”

나는 재빨리 그녀가 관심을 가질 만한 화제를 꺼냈다. 그러면서도 내 저열함에 입맛이 썼다. 제발 그녀를 부당하게 의심한 티가 나지 말아야 할 텐데. 대학교 시절, 디비전 결승 경기에서 수세에 몰린 상태에서 패스로 활로를 찾으려다가 방어가 촘촘해서 빈틈을 찾을 수 없었을 때보다도 이 순간이 무섭고 겁났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네가 나를 보자고 할 일이라는 게 뻔하지.”

그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녀는 나를 곯려대는 표정을 지었다. 수빈은 나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수빈의 반응을 보니 다행히 위기는 넘긴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질문하기를 기다렸고, 나는 적당한 질문을 찾다가 제일 먼저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4월 3일이 윤의 생일인데, 어떤 선물을 사주면 좋을까?”

“엥?”

수빈은 내 질문을 듣고 박장대소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황당한 질문이었다. 비장하게 불러내서 차에 태우고 이상한 질문을 하다가 갑자기 남자 친구 생일 선물에 대해 묻다니. 내가 수빈이라면, 이 상황이 아주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나를 역으로 공격하고도 남았다.

“그거야 네가 더 잘 알겠지.”

“……모르겠으니까 물어보는 거야.”

“그걸 모르면 남자 친구로서 자격 미달이지. 네 마음대로 이상한 거 선물하지 말고, 뭐 갖고 싶냐고 대놓고 물어봐. 정 모르겠으면 돈이 최고야.”

“알았어.”

“대체 뭘 물어보려나 했더니.”

수빈은 나 때문에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와 이야기한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그녀의 시간을 뺏은 게 맞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속도로에서 내렸고, 차를 돌렸다. 수빈을 공학관까지 데려다주고 법학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운전만 했고 수빈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우리 사이에 맴돌았다. 과거의 연적끼리 만나면 이런 분위기인 게 정상이지.

우리는 학교 캠퍼스에 진입할 때까지도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나만 이 상황이 불편한 게 아니다. 그녀도 이 상황이 거북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를 내려 주고 얼른 가야겠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공학관 앞에 차를 세웠다. 수빈은 차에서 내리기 전에 나에게 인사했다.

“커피 잘 마셨어.”

“그래.”

“다음에 보자.”

수빈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차에서 내렸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멀어지는 수빈을 보며 오른손으로 입을 막았다. 입 안이 여전히 매우 썼다.

* * *

결국 범인은 찾지 못했다. 내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단서 하나조차 찾을 수 없는 막막한 상황일 줄은 몰랐다. 나의 무력함이 너무 싫었다. 나는 이제 할아버지와 보좌관들, 협상 전문가들에게 상황을 내맡기고 기다려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경찰에 신고하고 싶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 그 사람과 합의하여 조용히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게다가 나에게는 윤이 있었다. 나 때문에 이번 일에 억울하게 휘말린 윤. 협박범이 송곳니를 드러냈으니 이제 협상이 시작될 것이다. 도저히 윤을 볼 면목이 서지 않았다. 그에게 위험에 빠뜨려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는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면목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지만, 너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윤을 안심시켜 주고 싶었지만, 나에게는 소득이 없었다.

봄 학기 6주차, 윤

밍 교수님은 당신이 맡은 부분을 완성한 후, 내가 써야 할 부분이 비어 있는 워드 파일을 주셨다. 나는 문헌 연구와 시뮬레이션 결과 서술 파트를 쓰다가 생각에 잠겼다. 주말 이후, 내내 좆같았던 기분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알렉스의 할아버지가 일요일 새벽 여섯 시부터 막무가내로 쳐들어와 집 안을 뒤집어엎은 것은 참을 만했다. 내가 알렉스에게 밤새 안기느라 흐트러진 꼴을 보인 것도 괜찮았다. 그는 일부러 우리가 무방비한 시간을 고른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알렉스가 할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의 할아버지에게 시민권을 노리는 꽃뱀 취급을 당했다. 꽃뱀이 아니라고 열심히 항변했지만, 알렉스의 할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알렉스가 할머니와 이야기하는 동안, 상원의원은 잔인한 말을 해대며 내 신경을 긁었다.

‘나는 자네 같은 것들을 숱하게 봐왔어.’

‘…….’

‘내 손자를 타락시키려고 하는 호모놈들 말이다.’

‘…….’

‘내 손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저놈은 정말 잘났거든.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에게도 인기가 많지. 고등학교 시절, 온 동네에 소문이 날 만큼 저놈을 열렬하게 좋아하다가 상사병에 걸린 녀석이 있었을 정도야. 그 녀석은 제 아버지가 목사인데도, 사내로 태어나 같은 사내를 좋아하는 제가 부끄러웠을 텐데도 정신을 못 차렸지.’

‘…….’

‘다시 한번 묻지. 자네, 정말 남자를 좋아하나?’

‘…….’

‘좆을 원래 용도대로 써 본 적은 있어?’

‘…….’

‘그래, 당연히 없겠지.’

‘…….’

‘계속 그따위로 살 거면 차라리 여자가 되는 게 낫지 않겠나? 나는 자네가 여자가 된다면 손자며느리로 인정할 생각이 있는데.’

‘…….’

‘내가 농담하는 것으로 보이나?’

‘…….’

‘저놈이 앞으로 정치를 하려면 내조를 잘 받아야 해. 그리고 나는 동양인 여성들의 영리함과 가정에 대한 헌신을 높이 사거든.’

‘…….’

‘잘 생각해 봐. 자신 없으면 헤어지고.’

알렉스의 할아버지가 하는 말을 듣고, 황당해서 웃음만 나왔다. 나는 남자에게 끌리는 남자이지,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가 아니므로 그에게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알렉스의 할아버지가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교양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열 받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랬던 것이리라.

그의 할아버지에게 모욕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참담한 기분이 들어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닌데 알렉스는 자꾸 내 반응을 살피며 말을 걸었다. 그래도 나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제 잘못이 아닌데도 마음을 졸이는 알렉스가 불쌍했다. 알렉스에게 무슨 죄가 있나. 굳이 잘잘못을 따지자면 밖에서 스킨십을 하다가 사진 찍힐 거리를 만든 내 잘못이 큰데.

할아버지 앞에서는 알렉스도 어린애였다. 알렉스는 똑똑하고 야무지지만, 덩치만 크고 순진해 빠진 애였다. 스캔들이 터지면 사람들의 관심은 내가 아니라 알렉스에게 쏠릴 것이다. 공화당 매파 상원의원의 장손. 대학 미식축구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며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전도유망한 청년. 만약 이 스캔들이 터진다면, 알렉스는 정말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가십과 스캔들의 중심에 설 일은 평생 없으리라 생각했다. 평범한 월급쟁이가 되어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고, 세금을 열심히 내고 법을 지키며 살다가 죽을 팔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에서 정치 스캔들에 휘말릴지도 모른다니.

알렉스가 사랑에 취해 해롱해롱하는 동안, 나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했다. 상원의원의 손자와 연애를 시작한 순간, 내 손에는 시한폭탄이 쥐어졌으니. 테신 의원은 나를 꼴 보기도 싫어하지만, 나는 그의 힘을 믿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원의원이 데리고 있는 전문가들이 유능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 *

그나마 기쁜 일이 하나 있었다. 누나는 쑥쑥이가 매우 건강한 남자아이라고 알려 주었고, 메신저로 쑥쑥이의 초음파 사진도 보내 주었다. 초음파 사진 속 쑥쑥이의 얼굴은 누나와 판박이였다. 쑥쑥이가 누나를 많이 닮았으니, 나와도 많이 닮았을 것이다. 나는 누나와 영상 통화로 이야기하다가 물었다.

[내가 아기용품 사 줄까?]

-됐어. 너 돈 없잖아.

[그래도.]

-저축이나 열심히 해.

누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하루 뒤, 누나는 메신저로 미국 아기용품 리스트를 보내 왔다. 그리고 누나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최대 100달러야. 그 이상은 안 돼.

누나가 보내준 리스트를 보고 아기 체육관과 쪽쪽이, 수유 쿠션, 침독 크림을 골랐다. 그러나 나는 쑥쑥이에게 가능한 많은 것을 사주고 싶었고, 치발기와 슬링, 아기 내복까지 사느라 총 300달러를 썼다.

아기용품들은 전부 아파트로 배송시켰다. 내가 누나에게 직접 부쳐 주는 것이 배송대행지를 쓰는 것보다 싸기도 했고, 불량품은 없는지 확인도 해야 했다.

며칠 뒤, 집에 도착한 택배를 뜯었다. 내가 물건을 먼저 뜯어 봐서 미안하지만, 물건을 검수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마룻바닥에 앉아 물건들을 꼼꼼히 살피고 있는데, 아기용품들을 구경하던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조카 선물이야?”

“응.”

알렉스는 원래 책상다리를 못 했지만, 연습을 몇 번 하더니 책상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알렉스는 내 곁에 앉았고, 아기 내복을 손에 들고 구경하면서 말했다.

“진짜 작다. 나도 갓 태어났을 때는 이런 것을 입었겠지?”

“네가? 너는 훨씬 큰 걸 입었겠지.”

“아니야. 나는 작게 태어났어.”

“상상이 안 되는데?”

“나는 태어났을 때 6파운드(2.7kg)였어.”

지금의 덩치에 비하면, 알렉스는 정말 작은 아기였다. 조그마한 갓난아기가 이만큼 자란 모습을 볼 때마다 부모님이 뿌듯하시겠어. 나는 알렉스를 보면서 알렉스의 부모님을 생각했다. 치발기를 살펴보고 있는데,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 나중에 아기 입양할까?”

그 말을 들으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알렉스는 참으로 속 편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에서도 속 편한 소리가 나오다니, 아마 운동을 그만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었을 만큼 구김살 없이 자란 덕분일 것이다. 미래를 절실하게 계획하고,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삶. 나는 말문이 막힌 채 알렉스를 보다가, 농담처럼 대꾸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

“대학 동기 중에 벌써 결혼해서 아기를 낳은 애들도 있어.”

“너는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나는 알렉스에게 되물으며 그의 이마를 오른손 검지로 꾹 밀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나를 빤히 보면서 말했다.

“이런 상황이 무슨 상황인데?”

“몰라서 물어?”

나도 모르게 냉정한 말투가 나왔다. 내 말을 듣고, 알렉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알렉스의 멍한 얼굴을 보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알렉스가 내 얼굴을 보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내가 너를 좋아하는 만큼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너무 슬퍼.”

알렉스가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간절하게 말하는 알렉스를 보고 내 마음은 덜컥 내려앉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절절한 고백을 듣다니. 게다가 잘생긴 얼굴로 우수에 찬 표정을 지으며 고백하다니.

저 녀석이 얼빠진 소리를 해도, 나만은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지만, 심장은 제멋대로 두근거렸다. 고개를 돌려 알렉스의 시선을 피했지만, 알렉스의 시선은 나를 따라왔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대답했다.

“……너는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를걸.”

“그런데 왜 그래?”

“나는 세상이 어떤지 아니까.”

나의 비겁한 대답을 듣고, 알렉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사건이 터진 이후, 나와 알렉스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아직 안 늦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알렉스가 그림 같은 삶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로 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나를 만나기 전에는 여자 친구가 두 명이나 있었으니 나처럼 여자에게 아예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학교를 졸업하고 법관이 되어 경력을 쌓다가 착한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주류 사회의 삶. 알렉스에게는 그런 삶이 잘 어울렸다. 알렉스가 나를 택한다면 언젠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잃은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후회할 것이 뻔했고, 나는 알렉스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면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내 마음이 더욱 깊어지기 전에, 여기서 정리하는 게 맞지 않나. 하지만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내가 알렉스를 너무 좋아하는데.

“잘 들어, 알렉스. 두 번 이야기 안 해.”

나는 치발기를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렉스는 바닥에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를 만난 이래, 알렉스가 이렇게 연약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알렉스의 눈시울이 발개지는 것을 보다가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이 아니어도 언젠가 한 번은 이야기해야 할 일이었고, 때가 온 것뿐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도 알아. 네가 나와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알고, 그래서 정말 고마워. 하지만 너는 네 상황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해. 너는 지금 너무 태평해. 할아버지께서 잘 막아 주시면 다행이겠지만, 못 막아 주신다면 너는 정말 많은 것을 잃게 될 거야.”

“…….”

“그러니까 문제가 생기기 전에……. 너를 위해서 나와 헤어지는 것도……. 생각해 봐. 문제가 생겼을 때 나와 있었던 일은…… 해프닝이라고 말해도 괜찮아.”

“……너는?”

“나는 걱정할 필요 없어. 문제가 생겨도 잃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을 하면서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테신 의원과 싸우다가 깨달았다. 한국을 등지고 이곳에 오는 순간,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휴짓조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고 학벌도 좋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테신 의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주류 사회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고, 내가 가진 것들은 미국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서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테신 의원의 눈에 비친 주윤은 당신의 손자를 유혹하여 시민권을 따고 싶어 하는 빈털터리 호모 새끼에 불과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알렉스를 보고 있으려니 전 남자 친구가 떠올랐다. 나를 버리고 여자와 결혼한 그가 너무 미웠고, 그 새끼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를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어렵게 손에 쥔 것들은 사랑을 좇기 위해 포기하기에는 너무 값진 것들이었다. 기득권, 출세, 정상적인 삶,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 성공…… 나는 과거를 생각하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섭섭해하지 마. 너를 정말 사랑하니까 하는 말이야.”

“진심이야?”

“응.”

“너는 나를 떠날 거야?”

“……네가 나를 떠나도 이해한다는 거야.”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건데?”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까 생각해 봐.”

내 대답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말을 마치고, 바닥에 늘어져 있던 아기용품들을 집어 비닐봉지에 넣었고, 그 비닐봉지들을 아마존 상자에 넣고 박스 테이프로 봉했다. 알렉스는 열심히 작업하는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알렉스를 무시하고 깔끔하게 봉한 상자를 현관에 가져다 놓았다.

상자를 두고 돌아서는데, 알렉스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알렉스는 나에게 뭐라 말하고 싶어 했지만 입을 열지는 못했다. 나는 알렉스를 두고 비켜 지나갔다. 그러자 알렉스가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주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세 걸음 정도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알렉스는 두 주먹을 굳게 쥔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알렉스를 삐딱하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말해.”

“내가 떠나면, 너는?”

알렉스를 두고 돌아서려고 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알렉스가 떠난다면, 나는 괜찮지 않을 것이다. 괜찮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살면서 만날 사람 중에 알렉스만큼 나를 좋아한 사람도, 내가 알렉스만큼 좋아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미래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라지만, 그 사실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등 뒤에서 알렉스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소리를 듣다가 눈을 감았다. 알렉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울 거잖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알렉스의 목소리가 엉망으로 떨리고 있었다.

* * *

누나에게 보낼 소포 상자를 들고 우버를 탔다. 알렉스가 차로 우체국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싸우고 나서, 좁은 공간에 그와 단둘이 앉아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갈 때는 우버를 타고, 올 때는 걸어올 생각이었다. 집에서 우체국까지는 걸어서 20분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였고, 나는 걷는 것에 익숙했다.

우체국 직원은 인심 좋아 보이는 히스패닉계 아주머니였다. 내가 해외로 소포를 부칠 거라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나에게 빈 송장을 건넸다. 나는 누나가 사는 아파트의 영어 주소를 송장에 썼다. 송장을 상자에 붙이고, 마커를 빌려 상자에 한글 주소도 커다랗게 썼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어쩌고저쩌고. 아주머니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디로 보내는 거예요?”

“한국이요.”

“고향이 한국이에요?”

“네. 누나가 곧 아기를 낳을 거라 아기용품을 샀어요.”

“누나가 좋아하겠어요. 지금 임신 몇 개월이에요?”

“7, 8개월 정도 됐어요.”

“얼마 안 남았네요. 어디 보자. 소포 무게가 20파운드 정도니까…… 일반 우편으로 보내도 요금이 많이 나오겠어요.”

“일반으로 해 주세요.”

“그러면 2주에서 3주 정도 걸려요. 괜찮겠어요?”

“네.”

직원은 나에게 요금을 보여 주었다. 모니터 화면에 뜬 요금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비싸지만, 예상했던 대로 배송대행지를 쓰는 것보다는 저렴했다. 나는 요금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체크카드로 결제했다. 영수증 프린터에서 영수증이 출력되었고, 직원은 나에게 영수증을 건넸다. 나는 영수증을 받으며 직원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네. 손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영수증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우체국을 나섰다. 구글 맵으로 집까지 가는 길을 검색하고 걷기 시작했다. 지도를 확인하니 우체국은 관공서와 낡은 아파트들이 몰려 있는 구시가지 한가운데에 있고, 내가 사는 아파트는 신시가지에 있었다. 신시가지가 개발되며 예전에 살던 사람들은 대부분 구시가지를 떠나 신시가지로 이주했다. 구시가지는 슬럼이 되었고, 건물과 길이 낡고 지저분해서 낮인데도 무척 음산했다.

길에는 행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아주 가끔 자동차가 지나다녔다. 어찌나 인적이 드문지, 이대로 내가 납치되어 끌려간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길에 감시 카메라가 없고,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니 증거가 남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납치범이 나를 사막 한복판의 황무지에 파묻어버린다면, 나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잊힐 것이다.

내가 실종되면 경찰이 수사해 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우범 지대에서 동양인 남자 유학생이 실종되는 사건은 힘들여 수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건이 아니니까. 그러니 내가 알아서 몸을 사려야 한다. 그런 불길한 생각만 계속 들 만큼 동네가 험했다.

가끔 보이는 사람은 마약 중독자나 노숙자였다. 눈이 개개 풀린 마약 중독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무서워서 아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이제라도 우버를 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마약 중독자가 낡고 냄새나는 점퍼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며, 우버 앱을 켰다.

오늘따라 우버가 다니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우버도 여기까지 오는 데에 15분이나 걸린다고 나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정도면 우버를 기다리는 것보다 집까지 걸어가는 것이 빠를 수도 있어서 우버 앱을 끄고 걷기 시작했다.

“안녕, 이쁜아.”

“…….”

술에 취한 것처럼 혀가 잔뜩 꼬이고 몽롱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쁜이라니. 마약에 취해서,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할 수 없나 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마약 중독자를 응시했다.

“내가 몸이 아픈데 집에 아이 셋이 굶고 있어.”

“…….”

“나를 도와주면 좋겠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변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 해도, 이 사람은 나를 골랐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어리고 만만해 보이는 동양인이니까. 남자를 두고 도망갈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점퍼 주머니 속에 총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고, 내가 돈을 주지 않고 도망가면 나를 쏠지도 모른다.

잠시 망설이다가 백팩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 든 돈은 70달러 남짓했다. 나는 지폐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돈을 보자마자 점퍼 주머니에서 두 손을 뽑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걸어오는 남자에게서는 지린내가 났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는 치아를 거의 다 잃었다. 잇몸 사이로 백태가 낀 더러운 혓바닥이 보였다.

남자는 누런 손톱이 길게 자란 지저분한 손을 뻗어 내 손에서 돈을 휙 가져갔다. 남자는 내가 건넨 돈의 액수를 확인했다. 금액을 확인하고, 남자는 씩 웃었다. 남자가 웃으니, 입안에 이가 없어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합장하면서 말했다.

“선생님께 부처님의 자비가 함께하시기를.”

남자의 말투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나는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나를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만만하게 보다가, 내가 큰돈을 건네자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

남자는 지폐를 점퍼 주머니에 넣고 비틀비틀 걸어갔다. 남자가 멀어지고,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달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곳이 싫었다. 내가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동양인이라 얕보이는 일은 그만 겪고 싶었다. 그래서 달리고, 또 달렸다.

집까지 계속 달렸다. 아파트가 보이고, 숨이 차고 목이 말라서 단골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물 한 병을 집어 계산대에 올려놓으려고 하는데 점원의 등 뒤로 담배 가판대가 보였다. 카멜, 말보로, 럭키 스트라이크. 내가 예전에 피웠던 팔리아멘트는 보이지 않았다. 담배 가판대를 보다가, 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말보로 라이트 주세요.”

점원은 깜짝 놀라며 내 얼굴을 보았다. 내가 이 가게에서 담배를 산 것이 처음이라 그럴 것이다. 나는 일회용 라이터도 하나 집어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점원은 가판대에서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이제는 말보로 골드예요.”

“네, 뭐든.”

미국 담뱃값은 한국 담뱃값의 두 배 정도 되었다. 담뱃값만 7달러이고 소비세가 따로 붙었기 때문이다. 나는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 앞에 서서 물을 마셨고, 담뱃갑을 뜯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빨아들이자,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몽롱해졌다.

스무 살,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직전. 나는 남자 친구의 자취방에서 그에게 동정을 주었다. 첫 섹스는 끔찍했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섹스는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섹스가 끝나고 지쳐 누워 있는데, 그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말보로 라이트를 피우고 있었다. 내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그는 나에게 담배를 물려 주었다. 그는 나에게 담배 피우는 법을 알려 주었고, 연기를 삼키지 못하고 기침하는 나를 놀려댔다.

처음 담배를 피웠을 때는 머리가 너무 아팠다. 이런 것을 왜 피우는지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남자 친구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 같이 하고 싶어서 남자 친구를 따라 가끔 담배를 피웠다.

군대에서는 담배를 자주 피웠다. 군 생활은 잘했지만, 상명하복 문화 때문에 답답할 때가 많아서 담배를 피우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하지만 군대에 다녀온 사이 담뱃값이 너무 올랐기 때문에 제대하고 나서는 담배를 완전히 끊었다.

다른 사람들은 담배를 끊기 어렵다는데, 나는 금단 증상도 없이 담배를 한 번에 끊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담배가 말리다니. 이게 뭐라고. 이게 이렇게까지 심란할 일이냐고. 나는 담배 한 대로는 부족해서 한 대를 더 피워 물었다. 그러다가 편의점 앞에 서서 연거푸 세 개비를 더 피우고 집으로 들어갔다.

* * *

저녁을 먹고 나서 발코니 샤시를 열었고, 찬장에서 이빨 빠진 수프 보울을 찾았다. 애벌 설거지를 하려고 손에 고무장갑을 끼던 알렉스는 나의 낯선 행동을 지켜보았다. 나는 한 손에 수프 보울을 들고 발코니로 걸어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푸른 저녁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찬바람을 느끼다가 눈을 감고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숨을 내쉬자, 폐를 돌아 나온 연기와 가슴에 꽉 맺혀 있던 것이 같이 흘러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늦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내 입김과 담배 연기가 뒤섞인 하얀 것이 흩어졌다. 나는 담뱃재를 수프 보울에 털었다. 담배를 다시 입술로 가져가는데, 알렉스가 곁에 서 있었다. 알렉스는 내 손에 들린 담배를 보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담배 안 피웠잖아?”

“끊었다가 다시 피우는 거야.”

“언제부터?”

“오늘부터.”

나는 알렉스의 얼굴을 보며 쌀쌀맞게 말했다. 알렉스가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알렉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말을 섞으면 또 싸우게 될 것 같아서였다.

나는 말을 하는 대신 담배만 피웠고, 알렉스는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 정말 싫다. 나는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알렉스가 내 눈치를 보는 것이 싫었다. 네가 그럴 필요는 없는데.

* * *

잠들 시간이 되었다. 나는 방에서 담요와 베개를 가지고 나왔고, 소파 베드를 펼치고 거기에 누웠다. 하지만 알렉스는 내 팔을 잡고, 나를 소파 베드에서 일으키려고 했다. 누워서 버텼지만 힘이 모자랐다. 알렉스는 나를 일으켜 세워 짐짝처럼 어깨에 들어 안았고, 나는 알렉스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이거 놔!”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오늘은 너와 같이 자고 싶지 않아.”

“아무리 화가 나도 그건 안 돼.”

알렉스는 나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알렉스는 나를 침대에 밀어 눕혔다.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대체 왜!”

“부탁이야.”

알렉스는 매트리스를 손으로 짚고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었다. 눈이 마주치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렉스의 눈빛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동공이 커다랗게 벌어진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속이 몹시 불편해졌다.

나는 눈을 감고 알렉스의 눈길을 피했다. 상황이 심각한 것을 알고 이렇게 싸우고 있으면서도, 헤어지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헤어지기는 싫어서 괴로워하는 스스로가 싫었다.

봄 학기 7주차, 알렉스

우리가 싸운 이후, 우리는 한 침대에서 같이 잤다. 글자 그대로 한 침대에서 같이 자기만 했다. 윤이 거부했기 때문에 스킨십은 일절 하지 않았다.

윤은 내 차를 타지 않고 등교했고, 늦은 저녁에 혼자 하교했다. 며칠째 그런 패턴이 반복되었다. 나는 화가 났고, 등교하려는 윤을 붙잡고 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물었다. 내 질문에 윤은 딱 한 마디로 대답했다.

“나는 벌써 말했어.”

“헤어지자고?”

“그래.”

“내가 싫어진 것도 아닌데, 헤어지는 게 말이 돼!”

나는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윤은 고함을 듣고 눈썹을 한쪽만 조금 들어 올렸고, 우리는 신경질적인 눈싸움을 했다. 나와 한참 눈싸움을 하던 그가 독기 어린 말을 내뱉었다.

“그러면 너는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뭘 할 수 있는데?”

“…….”

“너도 알다시피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거든.”

윤은 현관문을 열면서 차갑게 말했다.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윤에게서 담배 냄새가 났다. 담배 냄새가 낯설고 싫었지만, 싫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윤의 말이 내 마음을 죄다 찢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윤은 내가 못나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탓하고 있는 것만 같았고,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슬펐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무력했다.

* * *

윤과의 냉전은 며칠째 계속 이어졌다. 냉전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골치 아픈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할아버지의 보좌관 중 한 명이자 변호사인 마이클이었다. 마이클은 할아버지와 나를 협박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 주었다.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말문이 막혔다. 협박범이 변호사를 선임해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서 그 정체가 밝혀졌다. 범인은 학교 상담 센터 리셉셔니스트였다.

그녀는 원래 타블로이드 잡지에 내 이야기를 팔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영부인을 두고 속옷 모델과 혼외정사를 몇 번이나 가졌고, 타블로이드지에 모든 것을 폭로하려고 하는 속옷 모델에게 돈을 주고 입을 막았던 스캔들이 재선을 앞두고 터졌다. 덕분에 타블로이드 잡지에 기삿거리가 차고 넘치게 되어 어떤 잡지사도 내 이야기를 사지 않았고, 그녀는 나와 할아버지와 협상을 시도하게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기가 찼다. 요약하자면, 그 여자는 돈 때문에 저열한 일을 벌인 것이다. 협박범의 목적이 뚜렷하니 협상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돈을 주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가장 간단하고 쉬운 일이니까. 전해 들은 상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마이클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원님께서 첫 교섭에 알렉스 씨도 오신다고 하셨어요. 우리 측에서는 저와 의원님, 그리고 조지가 시그나기로 갈 겁니다.

“그게 언제인데요?”

-정확히 1주일 뒤, 오후 두 시입니다.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그렇다면 협상은 다음 주 수요일 두 시가 될 것이다. 이번 학기 시간표를 머릿속에서 되짚어 보니, 그 시간에는 마침 수업이 있었다. 나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시간에 수업이 있는데요…….”

-인생을 길게 보자면, 이 일이 수업보다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건 맞아요.”

-장소는 정해지면 다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우리도 골치가 아파요. 알렉스 씨. 한창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은 시기인데, 신경 쓸 일이 또 생겨서 말이지요.

마이클은 바쁜 시기에 자신의 일거리를 늘린 내가 싫다고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혐오스럽다는 어감이 추가로 담겨 있었다. 마이클의 말에 담긴 복잡한 뉘앙스를 알아차리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장소 정해지면 알려 주세요.”

봄 학기 7주차, 윤

지난 학기에는 영어 문장의 교정과 윤문을 알렉스에게 부탁했다. 알렉스는 내가 쓴 문장들을 읽고, 나와 대화하며 의도를 완벽하게 전달할 수 있는 문장들을 찾아주었다.

나는 학회에 제출할 원고 중 내가 맡은 부분을 완성했다. 이제 교정과 윤문이 필요했다. 알렉스에게 문장을 고쳐달라고 부탁하기 민망해서 학교 라이팅 센터를 예약하려고 했다. 그러나 빈 자리가 거의 없었고, 간신히 두 세션만 예약할 수 있었다.

라이팅 센서의 레이첼 선생님은 훌륭했다. 선생님은 유학생들이 자주 하는 문법 실수를 꿰고 계셨고, 실수를 금방 고쳐 주셨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네 장 중 한 장은 끝내 고치지 못했다. 라이팅 센터 조교에게 부탁해 웨이팅 리스트에 내 이름을 올렸지만, 빈자리가 날지는 알 수 없었다.

이대로 불완전한 글을 제출하기는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상황이 급해서, 민망함을 참고 알렉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나는 공부하고 있는 알렉스에게 갔다. 내가 다가서자, 알렉스는 책상 앞에 앉아 판례를 읽다 말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에게 말을 걸었다.

“알렉스. 학교 라이팅 센터에서 학회에 제출할 원고 교정을 받았는데, 시간이 모자라서 마지막 한 장은 교정을 받지 못했어.”

“그래서?”

“네가 고쳐 줬으면 좋겠어.”

“…….”

“부탁할게.”

나는 절박하게 말했다. 알렉스는 나를 빤히 보다가 한숨을 한 번 쉬었다. 알렉스의 반응이 낯설어서 그를 멍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알렉스가 지친 얼굴로 말했다.

“너, 정말 너무한다.”

“어?”

“네가 나에게 너무한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내 배경 때문에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 할아버지가 너에게 아주 무례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나는 네가 나에게 화를 낼 만하다고 생각해. 내가 미안해해도 네가 들은 척도 안 하는 것도 괜찮고, 참을 수 있어. 근데 너는 나를 무시하다가 네가 필요하니까 화해를 청하고……. 나는 그런 너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어서…… 기분이 더러워.”

알렉스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면서 말했다. 나는 알렉스의 말을 듣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비로소 내가 그에게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렉스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이거 다 읽고 나서 보자.”

“알렉스.”

알렉스는 나에게서 얼굴을 돌리며 손을 내저었다. 판례를 읽는 알렉스는 울적해 보였다. 나는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헤어지는 게 맞는데 이래도 되는 걸까. 알렉스를 놔주는 게 맞지 않을까. 머리는 헤어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마음은 알렉스와 함께하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마음이 앞서버렸다.

알렉스의 옆얼굴을 보다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등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나도 힘들지만, 얘도 나만큼 힘들 텐데. 아니지. 얘가 훨씬 힘들 텐데. 나는 문제가 터져도 잃을 게 없지만, 얘는 잃을 것이 많았다.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남자 친구까지 속을 썩이고 있었다. 알렉스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내가 힘든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게 미안해서 알렉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네가 더 힘들 텐데…….”

알렉스는 눈을 감은 채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알렉스를 안고 다시 한번 사과했다.

“내 생각만 해서 미안해.”

“…….”

“그리고 나도 너와 헤어지는 건 싫어.”

나는 진심을 말했다. 알렉스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는 알렉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알렉스는 내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고, 나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알렉스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려 내 입술에 키스했다. 조심스럽고 다정한 키스였다. 길고 숱 많은 속눈썹이 드리워진 알렉스의 새파란 눈동자가 짙은 회색으로 변했다. 알렉스의 혀가 내 입술을 조심스럽게 핥고 쪼았다. 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열어 알렉스를 받아들였고, 우리는 한참 동안 부드럽고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 * *

원고를 고치고 나서, 우리는 섹스했다. 오랜만에 하다 보니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났다. 손가락 두 개도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알렉스는 내가 너무 좁은 게 문제라고 나를 놀렸다. 그러나 나에게는 음담을 받아칠 여유가 없었다.

여태껏 이렇게 아픈 적이 거의 없었다. 알렉스는 내가 자꾸 울자 미안해했고, 눈물로 젖은 내 뺨에 키스하고 말했다.

“아프면 그만해도 돼.”

대답 대신 내 몸 위에 엎드린 알렉스의 엉덩이와 등허리를 안았다. 나는 알렉스의 귓가에 입 맞추고,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고 싶어.”

나는 정말 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픈 것을 참고 알렉스에게 몸을 맡겼다. 입술, 귓불, 목덜미, 젖꼭지, 옆구리, 허벅지 안쪽, 회음부, 그리고 뒷구멍. 알렉스는 내 성감대들을 차례대로 빨고 만지고 입술에 키스하면서 구멍을 한참 풀어 주었다. 입구가 부드러워지고, 나는 손가락 두 개를 삼키면서 젖은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의 반응이 달라진 것을 확인하고, 알렉스는 내 입술에 키스하면서 웃었다.

젤에 젖은 손가락 세 개가 구멍을 매끄럽게 드나들 수 있게 되자, 알렉스는 콘돔을 씌운 제 성기를 구멍에 가져다 댔다. 귀두만 들어왔는데도, 너무 아파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알렉스의 성기가 거대하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내가 계속 울자, 알렉스는 시간을 들여 조심스럽게 제 것을 밀어 넣었다. 나는 아픔을 참으며 알렉스를 받아들였다. 마침내 알렉스가 끝까지 들어왔고,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오랫동안 부드럽게 키스했다.

키스하다가 알렉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아픔이 견딜 만해지더니, 드디어 기분이 좋아졌다. 한번 기분이 좋아지고 나니 몸이 달아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알렉스가 나보다 내 몸을 더욱 잘 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내내 죽어 있던 내 성기가 일어서고, 쿠퍼액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알렉스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고 안을 조였다. 알렉스는 나의 달뜬 반응을 보고 기뻐하며 속도를 조금 올렸지만, 평소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느긋하게 움직였다. 성감이 충분히 오르고, 흥분해서 바짝 곤두선 내 젖꼭지가 알렉스의 가슴팍에 스치자 몸이 떨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기도 했다. 이 순간이 너무 달콤해서, 온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아서 이대로 시간이 멈추기를 바라게 되었다. 정사의 열기에 사로잡힌 알렉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웃으니까 예쁘네.”

“나는 네가 좋아.”

“그래?”

알렉스는 나에게 되물으며 씩 웃었다. 성숙한 느낌이 드는 잘생긴 얼굴에 소년처럼 청량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그 반전이 신기하고 좋아서 알렉스의 두 뺨을 손으로 감싸 쥐고, 입술에 가볍게 쪽쪽 키스했다. 그러자 알렉스가 내 입술 사이로 혀를 넣으면서 허리를 깊게 쳐올렸다. 나는 알렉스의 목을 두 팔로 안고 알렉스의 허리를 두 다리로 감고 발목을 서로 걸어 고정했다. 내 신음이 알렉스의 입안으로 먹혀들었고, 키스하는 동안에도 알렉스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키스가 끝나고, 그의 넓은 어깨를 당겨 안았다. 운동하던 시절에 자잘한 상처가 났다가 아물기를 반복하며 흉터가 남은 어깨였다. 나는 손끝으로 흉터들을 더듬다가 혀를 내어 핥았고, 알렉스는 내 장난이 간지러워서 킥킥 웃다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부볐다. 나는 알렉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를 두 팔과 두 다리로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알렉스는 두 팔로 내 몸을 꽉 끌어안았고, 내 귓가와 뺨에 쉴 새 없이 키스하며 속삭였다.

“나를 정말 좋아해?”

“응, 사랑해.”

“나도 너를 사랑해.”

알렉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 * *

완성된 논문 파일을 밍 교수님에게 보냈다. 밍 교수님은 내 메일을 받고 회신하지 않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아침 일찍 교수님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교수님의 연구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지만, 굳이 연구실 문에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교수님은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대꾸하셨고,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교수님은 나를 흘낏 보고,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윤이구나. 무슨 일이에요?”

“제가 보낸 초안 파일 보셨나 해서요.”

“봤죠.”

교수님은 밀크 셰이크를 한 입 마시고 눈살을 찌푸리며 이메일 본문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교수님에게 말씀드렸다.

“고칠 게 많을 것 같은데…… 교수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요.”

“고칠 거야 당연히 많죠. 근데 지금 고칠 건 없어요.”

“……그렇게나 엉망인가요?”

“아뇨. 잘했다는 뜻이에요.”

교수님은 나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리고 씩 웃으셨다. 그리고 교수님은 다시 모니터를 보며 이메일을 작성해 나갔다.

“마무리는 내가 해서 낼게요. 리뷰 끝나고, 수정 사항 알려 주면 그때 고칩시다.”

“네. 알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교수님이 마우스로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를 향해 돌아앉으셨다. 교수님이 나에게 물으셨다.

“그나저나 윤은 덴버에 가 봤나요?”

“덴버요?”

“이번 학회, 덴버에서 하거든요.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나?”

교수님이 벌써 말씀하셨나? 학회가 덴버에서 열린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은 것 같은데. 논문을 쓰느라 바빠서 이번 학회가 어디에서 열리는지 알아보지 않았다. 어쩌면 교수님께 들었는데 잊어버렸을 수도 있고. 나는 교수님의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교수님께 들었는데 잊어버렸나 봐요. 그리고 덴버에 가 봤어요.”

“나도 덴버에 두 번 가 봤어요. 거기 진짜 좋지 않아요? 학교에서 교통비와 호텔비 지원 나올 테니까, 가서 발표 잘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하다 옵시다.”

“네.”

교수님은 나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나는 교수님을 보고 웃었다. 교수님은 웃으며 자상하게 말씀하셨다.

“제출 확인 메일 오면 전달해 줄게요.”

“알겠습니다.”

“그래요. 좋은 하루 보내요.”

교수님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에게 연구실 문을 활짝 열어 주셨다. 나는 연구실을 나가면서 교수님께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교수님은 나에게 손을 들어 흔들어 주셨고, 나는 천천히 걸어갔다.

* * *

2월 말인데 벌써 꽃이 피었다. 일교차가 커서 밤에는 춥지만, 낮에는 기온이 20도가 넘는 날도 있어서 그런가 보다.

가로수에는 벚꽃과 비슷하게 생긴 새하얀 꽃이 피었다. 무슨 꽃인지 궁금해서, 나는 꽃 사진을 찍어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에 따르면 하얀 꽃은 배꽃이었다.

캠퍼스 곳곳에도 배꽃이 피어 있었고, 공학관 앞에도 아주 커다란 배나무가 있었다. 배꽃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지만, 배나무의 키가 커서 손이 닿지 않았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학부 학생들의 중간고사 시험지를 채점했다. 알렉스는 책상 앞에 앉아 판례 해석을 쓰고 있었다. 내가 세 시간 만에 70명의 시험지를 채점하고 검토까지 마쳤을 때, 알렉스는 아직 과제를 하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방울토마토를 꺼내 먹고 있는데, 알렉스가 과제를 하다 말고 나에게 물었다.

“배고파?”

“배고픈 건 아니고 출출해.”

“나는 배고파.”

“너도 방울토마토 먹을래?”

“……햄버거 먹고 싶어.”

“이 시간에?”

“어차피 밤새워야 할 거 같은데.”

알렉스가 차 키를 집어 드는 것을 보며, 방울토마토를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알렉스가 현관문을 열었다. 나는 실내복 위에 후드 집업을 입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근데 이 시간에 문을 연 곳이 있어?”

“왓어버거10)는 24시간 영업이야.”

나와 알렉스는 집을 나섰다. 밤늦은 시간이라 아파트 단지는 조용했다. 알렉스가 운전석에 앉아 차에 시동을 걸었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안전 벨트를 맸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캠퍼스 남쪽에 있지만, 가장 가까운 왓어버거 지점은 캠퍼스 북쪽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차로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창밖을 보았다. 도로를 따라 심어진 새하얀 배꽃이 밤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배꽃을 보니, 그야말로 봄이었다. 나는 배꽃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배꽃이 정말 예뻐.”

“배꽃을 처음 보는 거야?”

“응. 한국에서는 가로수로 주로 벚꽃을 심어. 벚꽃은 4월 초에 피고.”

나는 창문을 열고 창밖으로 얼굴을 조금 내밀었다.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그러면 햄버거 먹고 나서 배꽃 볼래?”

“과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정도 시간은 낼 수 있어.”

내가 걱정하며 물었지만, 알렉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 역시 웃으며 알렉스에게 대꾸했다.

“좋아.”

* * *

밤 열한 시인데 가게 안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손님들이 있었다. 시험 기간인데도 술에 취해 햄버거를 먹는 학생들이 있었고, 온종일 구걸해서 모은 돈으로 너겟을 먹는 노숙자들도 있었다.

나와 알렉스는 버거 세트 두 개를 시켰고, 마주 앉아 햄버거를 먹었다. 나는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아서 햄버거를 3분의 2 정도 먹고 남겼다. 프렌치프라이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알렉스는 햄버거를 다 먹고, 내가 먹다 남긴 프렌치프라이까지 먹었다.

“여기는 매운 케첩이 유명해.”

알렉스가 말했다. 알렉스는 웃으면서 매운 케첩을 찍은 프렌치프라이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한 입 베어 먹었다. 내 입맛에는 매운 케첩이 맞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맛있게 먹었다.

음식을 모두 먹고 나서, 알렉스는 반쯤 남은 콜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렸고, 알렉스를 따라서 가게를 나섰다.

알렉스가 자동차 운전석에 앉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매번 알렉스가 운전하는 것이 미안해서 얼른 텍사스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알렉스가 학생 회관 앞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곳에는 커다란 배나무가 여러 그루 심겨 있었다.

“내리자.”

“진짜?”

“응.”

알렉스는 웃으며 시동을 끄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나 역시 차에서 내렸다. 우리의 머리 위가 새하얀 배꽃으로 가득했다. 나는 배꽃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안타깝게도 손이 닿지 않았다. 그러자 알렉스가 꽃송이가 동그랗게 뭉쳐 달린 작은 가지 하나를 꺾어서 나에게 건넸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이러면 안 되는 거지만.”

“고마워.”

코를 꽃가지에 묻고 향을 맡으니 희미한 꽃향기가 났다. 알렉스는 향기를 맡는 나를 웃으면서 보고 있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꽃송이 하나를 따서 알렉스의 왼쪽 귓바퀴 위에 꽂았다. 알렉스가 귓바퀴 위에 꽂힌 꽃을 만지작거리다가 싱긋 웃으면서 물었다.

“잘 어울려?”

“응. 근데 네가 꽃보다 예뻐.”

“6피트가 한참 넘는 남자에게 예쁘다고 하다니.”

“너도 나한테 예쁘다고 하잖아.”

“너는 정말 예쁘니까.”

“그래, 그럼 네가 꽃보다 잘생겼어. 됐지?”

알렉스는 잘생겼다는 칭찬을 듣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알렉스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떠오른 시의 한 구절을 입 안에서 읊조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교과서에 실려 있고, 수능에도 나왔기 때문에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시였다. 꽃이 있는 상황에서 떠올리기에 뻔한 시이기도 했다. 이게 이과생의 한계였다. 나는 나의 메마른 감수성이 우스워서 혼자 웃었다. 그러자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유명한 한국 시의 한 구절이야.”

“무슨 내용인지 알고 싶어.”

나는 시를 외우고 있었지만, 번역은 어려웠다. 그래서 아이폰을 켜고 구글에서 영어로 번역된 시를 찾았다. 다행히 많은 사람이 시를 영어로 번역해 놓았다. 여러 버전을 읽어보고 가장 괜찮은 버전을 골라 알렉스에게 보여 주었다. 알렉스는 아이폰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시를 읽었다.

“네가 읊은 부분은 어디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너의 꽃이야?”

알렉스는 나에게 아이폰을 다시 건네면서 물었다. 나에게 질문하는 알렉스는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얼굴을 붉히며 얼굴을 돌렸다. 사실 이런 달콤한 말은 누구에게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때로는 사랑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보다 간질간질하고 은근한 말을 건네는 것이 훨씬 부끄러우니까.

알렉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웃으면서 두 손으로 내 볼을 만지다가 내 입술에 키스하고, 혀로 내 입 안을 두드렸다. 나는 키스가 좋아서, 그만 다른 사람들이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저 눈을 감고 알렉스의 입술에 나를 맡길 뿐이었다.

봄 학기 7-8주차, 알렉스

자다 깼는데 옆자리에 윤이 없었다. 화장실에 갔나? 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고, 윤을 찾으려고 거실로 나갔다. 요새 윤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내 예상대로 윤은 거실에 있었다. 윤은 발코니 샤시를 열고,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뭐 해?”

“잠이 안 와서.”

“한숨도 못 잔 거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담배를 피우는 윤의 곁에 서니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비흡연자인 나를 위해 윤이 담배를 끄려고 했지만, 나는 그를 말렸다.

“계속 피워도 돼.”

“……너는 담배 냄새 싫어하잖아.”

“네가 좋으면 피워야지.”

“말은 고마운데 저리 가, 간접흡연이 더 위험해.”

“너만 할까. 너 요새 담배가 너무 늘었어.”

그가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한 후, 자꾸만 잔소리를 하게 되었다. 내 잔소리를 듣던 윤은 웃으면서 담배를 수프 보울 재떨이에 눌러 껐다. 이참에 담배를 끊으면 좋을 텐데. 나는 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를 걱정했다. 윤은 발코니 샤시를 닫고 내 품에 안겼다. 나는 윤의 등을 두 손으로 도닥이며 말했다.

“계속 잠을 못 자면 학교 병원에 가 보는 게 어때?”

“……알았어.”

윤은 순순히 대답했다. 나는 그의 대답을 들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사실 윤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이유는 뻔했다. 우리는 화해했지만,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상황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윤을 안고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이번 사건이 빨리 끝나게 해달라고. 윤이 불안해하지 않게 해달라고. 우리가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 * *

나와 시드니는 계약법 수업이 끝나고 학교 라운지에 앉아 수업 내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교수님은 똑똑한 분이었지만,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설명할 수 있을 만큼 화술이 좋지는 못했다. 그래서 학생들은 혼란스러워했고, 나와 시드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오늘 배운 일방 계약의 개념과 논리가 어려워서 판례를 다시 읽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시드니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같은 수업을 듣는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백인이었지만, 나는 그들과는 성격이 맞지 않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지냈다. 그래서 우리의 친분은 얼굴을 보면 인사하는 정도에 그쳤다.

“알렉산더 테신 4세. 2학기 되더니 더 열심히 한다?”

“안녕.”

나는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들 중 한 명이 시드니의 소지품을 살피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건 누구 자리야? 시드니 자리네.”

그들은 그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내 일에 집중했다. 좋아하지 않는 인간들과 있으려니 짜증이 났다. 시드니가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오지 않아서 조바심이 났다. 마침 그들 중 한 명이 물었다.

“너도 우리 클럽 들어올래? 너라면 환영인데.”

저 새끼 이름이 찰스던가? 내가 알기로 저 새끼는 기여 입학으로 들어와서 수업 시간에 빌빌 싸는 놈인데. 나는 기여 입학으로 들어오는 학생 대부분을 경멸했다. 기여 입학으로 들어오는 학생 중에는 제대로 공부하는 놈이 거의 없었다. 멍청한 자녀를 기여 입학으로 명문 대학에 입학시키는 부모들도 문제다. 좋은 일에 쓰라고 거액을 기부하고 명예와 세금 정산을 얻었으면 됐지, 멍청하고 게으른 애새끼들의 학벌까지 챙기려 들다니.

저 새끼가 가입한 클럽 이름이 뭐더라? 기독교 예비 법조인 클럽이었던 것 같은데. 동아리의 이름부터 재수가 없었다. 이름에서부터 백인 우월주의자 냄새가 났다. 꼴에 인맥을 쌓겠다고 동아리에 가입한 게 웃겼다. 인맥을 쌓을 시간이 있으면, 졸업과 변호사 자격시험이나 걱정할 것이지.

“나는 사람을 볼 때, 인간성과 능력을 가장 중요하게 보거든.”

나는 경멸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협상이 다가오고 있고, 요새 신경 쓰이는 일이 많다 보니 말이 굉장히 날카롭게 나갔다. 그래서 내 대답을 들은 찰스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찰스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아하. 그러셔.”

“응. 나는 그래.”

“혼자 고고하시네요.”

찰스가 비아냥거렸지만, 나는 그들을 단체로 무시했다. 마침 시드니가 자리로 돌아왔다. 시드니는 재수 없는 놈들을 힐끗 보고, 제자리에 앉았다. 시드니가 자리에 앉자마자 찰스가 시드니에게 빈정거리면서 물었다.

“너도 얘 할아버지 덕 본 거 있냐?”

“아니.”

“의외네.”

“나는 알렉스 할아버지 덕을 볼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나는 수석이니까.”

시드니는 턱을 치켜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가 하도 당당하게 말해서 그들은 꼬리를 내리고 가버렸다. 그들이 가고 나서, 시드니는 새빨개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내 얼굴, 빨개졌지?”

“응.”

“저 녀석들을 쫓아버리려고 잘난 척을 하려니까 너무 부끄러운 거 있지.”

“너는 사실만 말했잖아.”

“그래도.”

시드니는 프린트물을 손에 쥐고,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나는 멀어지는 그놈들을 바라보았다. 기여 입학 자체는 나쁜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기여 입학으로 들어와도 남들과 똑같이 열심히 해야 좋은 기회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 저런 놈들은 싫다. 돈만 믿고 노력을 게을리하는 녀석들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알렉스.”

시드니가 나를 불렀다. 나는 시드니를 마주 보았다. 시드니가 주변을 쓱 훑어보고 나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네가 저 애들을 싫어하는 건 알지만, 너무 티는 내지 마. 감정 조절을 해야지. 사회생활을 하면 둥글게 둥글게 지내면서 파벌이나 적을 만들지 않는 게 좋은데, 너는 가끔 너무 아슬아슬해.”

시드니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에 얼른 대답하라는 뜻이었다. 그녀에게는 차분한 말투로도 사람을 끄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빛을 슬쩍 피하며 대답했다.

“……알았어.”

* * *

인턴 원서를 제출했던 산 안젤로 지방 법원에서 1차 합격 통보를 받았다. 나를 지명한 조안 그레이 판사는 경력이 길고 덕망 높은 수석 부장 판사였다. 그녀의 밑에서 일하는 것은 좋은 경력이 될 것이다.

좋은 소식을 들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1차 협상에 참석해야 하니까. 나는 등교하는 윤에게 오늘 협상이 시작된다고 말해 주었다. 내 말을 듣고, 윤은 나를 안고 키스해 주었다. 윤이 학교에 가고, 조슈아에게 사정이 있어서 수업에 가지 못한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슈트를 입고 약속 장소인 호텔 비즈니스 센터에 있는 회의실로 갔다. 마이클과 조지는 나를 보자마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심지어 할아버지는 나를 보려고 하지도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와 보좌관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아직 약속 시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회의실 안에는 어색한 침묵만 감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이클이 말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알렉스 씨는 가만히 계세요. 우리가 알아서 할 겁니다.”

“어떻게 할 건데요?”

“현실을 일깨워 주고 협상 조건을 받아들이게 해야죠. 두고 보세요.”

마이클은 자신 있게 말했지만,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커다란 돌덩이가 식도에 낀 것처럼 속이 답답했다.

이윽고 회의실 문이 열렸고, 두꺼비 같은 인상의 남자와 조그만 여자가 들어왔다. 나는 여자를 바로 알아보았다. 히스패닉이지만, 피부색 때문에 흑인처럼 보일 때도 있고, 광대뼈가 높고 눈동자가 검어 동양인처럼 보이기도 했던 학교 상담 센터의 리셉셔니스트. 이름이 노미던가? 저 여자는 내가 상담 센터에 갈 때마다 나를 유심히 관찰해 왔다. 나는 분노를 감추지 않고, 직업윤리를 저버린 비양심적인 인간을 쏘아보았다.

“안녕하세요. 노미 비숍 씨 대리인인 넬슨 워커 변호사입니다.”

두꺼비 같은 남자는 할아버지에게 악수를 청했지만, 할아버지는 악수를 거부했다. 두꺼비 같은 남자는 마이클과 조지와 차례대로 악수했고, 나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마이클과 조지는 악수를 했지만, 마이클은 악수가 불쾌했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테이블 밑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을 문질러 닦았다. 내 차례가 왔고, 나는 할아버지처럼 악수를 거부했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죠. 협상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현명한 결정을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두꺼비는 느물느물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는 두꺼비 변호사를 향해 경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감정 조절에 능한 할아버지가 대놓고 혐오를 드러내다니. 할아버지는 저 인간들이 어지간히 싫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노골적인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클은 사무적으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우리의 대화는 전부 녹음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네.”

“우리 측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금액은 맞춰 드리지요. 대신 이번 사건의 모든 사항에 대해 평생 비밀을 유지하시겠다고 각서를 써 주셔야겠습니다. 그쪽도 밑지는 장사는 아닐 거예요. 그쪽에서 각서의 내용을 위반하시면, 의원님과 손자분은 비숍 씨를 바로 의료 기록 누설과 성적 착취로 신고하실 거예요. 방금 말씀드린 두 가지 사항으로 기소되면 다시는 의료계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요?”

“하하. 사실 적시로 인한 명예 훼손은 형사에 해당하지 않아요. 알렉스 씨가 게이라서 게이라는 사실을 밝혔을 뿐인데요.”

두꺼비 변호사가 의뭉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두꺼비 변호사를 쏘아보고 있던 할아버지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내 손자는 게이가 아니야!”

“의원님!”

“의원님, 진정하세요.”

마이클은 할아버지의 돌발 행동에 크게 당황했고, 조지는 할아버지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할아버지가 뭐라고 고함을 치려고 하는데, 그 여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믿기 어려우신 것은 이해해요. 하지만, 의원님. 손자분이 상담 센터에 왜 왔는지 알아요?”

“노미, 가만히 있어요. 이러면 도움이 안 돼-”

두꺼비 변호사가 여자를 말리려고 했지만, 여자가 두꺼비 변호사의 말을 가로챘다. 여자는 준비라도 한 것처럼 단숨에 말을 쏟아냈다.

“손자분은 룸메이트를 사랑해서 온 거예요. 두 사람은 결국 연인이 되었고 지금도 동거하고 있다니까요.”

여자의 말을 듣고, 할아버지가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사생활이 까발려지는 상황이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이대로 먼지가 되어 이 자리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

1차 교섭이니 난장판이 될 것을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나와 할아버지는 진흙탕 개싸움에서 잔뜩 얻어터졌고, 완전히 너덜너덜해졌다. 화가 난 할아버지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여자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상담 내용을 떠벌리는 것은 불법이오!”

“의원님, 진정하세요.”

“그간 판례를 보면 상담 내용을 누설하는 것은 의료법을 위반하는 일이고, 아무리 사실 적시라고는 해도 성적 지향과 관련된 사항을 본인의 동의 없이 밝히겠다고 협박하는 일은 성적 착취에 해당한다고 판결한 판례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텐데요.”

마이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투극이 벌어지는 난장판에서 마이클만 홀로 침착했다. 두꺼비 변호사도 자신의 의뢰인이 제멋대로 행동해버린 상황에 질렸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따지고 보면 상황을 참지 못한 할아버지의 돌발 행동 때문에 시작된 일이기는 하지만, 나도 여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번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마이클이 두꺼비 변호사에게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원님 측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는 것이 최선이겠습니다. 녹취록도 있는-”

두꺼비 변호사가 난감해하면서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쾅 소리가 났다. 우리 모두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두 주먹으로 테이블을 거세게 내려쳤다. 하지만 여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연세가 믿기지 않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여자에게 소리쳤다.

“이보시오, 비숍 씨, 돈이 그리 중요하오? 그래서 내 손자를 괴롭히는 거요?”

“의원님께서 손자분이 소중한 만큼, 저도 제 딸이 소중하니까요.”

“뭐요!”

“제 딸을 위해 돈이 필요해서 그랬어요.”

할아버지는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모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할아버지의 파란 눈이 살기로 번득이고 있었다. 할아버지만 기가 막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 기가 막혀서 그 여자를 보았다. 자기 자식 귀한 줄은 알아도 남의 자식 귀한 줄은 모르는 건가. 그러나 그 여자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의원님께서는 정치 자금을 많이 받으시잖아요. 게다가 사모님께서는 석유 재벌 상속녀이시고요. 제가 돈을 조금 뜯어낸다 해도 아무렇지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제 딸은 미숙아로 태어났고, 심장이 좋지 않아서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받았어요. 의사 선생님은 대여섯 살쯤 되면 재교정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고요. 그 애는 올해 심장 재교정 수술을 받아야 해요. 그 어린 것이 벌써 심장을 두 번째로 열어야 한다고요. 보세요, 의원님의 훤칠한 손자, 그리고 제 어린 딸, 둘 중에 누가 더 불쌍하죠?”

여자의 뻔뻔한 말을 듣고, 할아버지의 몸이 휘청거렸다. 조지가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언제나 냉정한 마이클조차 말문이 막혔다. 두꺼비 변호사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할 말을 잃었다. 할아버지가 자리에 주저앉았고, 조지는 할아버지에게 물을 건넸다. 나는 이러다가 할아버지가 쓰러질 것 같아서 조마조마했다.

할아버지는 물로 입을 축이고 나서, 분노로 떨리는 두 손을 다잡았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를 악물고 말씀하셨다.

“마이클.”

“네, 의원님.”

“……저년에게 각서 꼭 받아내고 나머지는 이사벨라가 말한 대로 해 주게.”

“의원님.”

조지가 할아버지의 곁에 가까이 다가섰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에게 갔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를 보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진절머리를 냈다.

“세상에, 척 제리와 맞먹는 년 같으니라고.”

“의원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네.”

“그렇다면 객실에 올라가서 쉬시는 게 어떨까요?”

“……알겠네.”

“제가 모시겠습니다.”

조지는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회의실을 나갔다. 회의실에는 나와 마이클, 그 여자와 두꺼비만 남았다. 회의실은 한참 동안 조용했다. 이내 마이클과 두꺼비 변호사가 1차 협상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에 말이 오갔지만,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협상이 진행되는 내내, 분노에 차서 그 여자를 쏘아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원하는 바를 얻었는데도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의 얼굴을 보며, 나는 더욱 괴로워졌다.

* * *

협상이 끝났다. 두꺼비 변호사와 여자가 회의실을 나갔다. 그들이 눈앞에서 사라진 후, 마이클은 비로소 피곤한 기색을 비치었다. 나는 구석에 앉아 바닥의 카펫 무늬만 보고 있었다.

“고생했습니다, 알렉스.”

마이클이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어 마이클을 보았다. 마이클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마이클이 고생하셨죠.”

“원래는 몹시 지저분한 장기 협상과 법정 공방까지 예상하고 전략을 짰습니다. 근데 오늘 와보니, 앞으로 서면이나 컨퍼런스 콜로 두세 번 정도 교섭하면 끝날 것 같아요.”

“…….”

“피곤하네요.”

마이클은 미간과 눈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나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근데 할머니가 뭐라고 하셨어요?”

“여사님은 그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돈은 당신께서 낼 테니, 얼마가 되든 각서를 받아내라고 하셨어요. 물론 의원님은 여사님 말씀을 듣고 펄펄 뛰셨죠.”

“…….”

“하지만 보세요, 결국에는 여사님이 바라시던 대로 되었습니다. 이럴 때 보면, 의원님보다 여사님이 진정한 정치 고수 같아요.”

“…….”

“할아버님께 올라가 보세요.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라가겠습니다.”

마이클은 희미하게 웃으며 나에게 객실 카드 키를 건넸다.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클에게 카드 키를 받아 들고, 테이블 위에 있는 새 생수통을 집어 뚜껑을 땄다. 뚜껑을 따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 뚜껑을 따고, 물을 마셔 목을 축이고 회의실을 나섰다.

일어나서 걸어가는 내내 다리가 후들거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에도 머리가 멍했다. 우리는 분명히 이겼지만, 상처만 남은 영광을 얻었다. 난장판의 한복판에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이긴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 * *

카드키를 쓸 일은 없었다. 조지는 내가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객실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객실에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그새 평정을 많이 되찾으셨다. 소파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지만, 두 손의 떨림은 멎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단숨에 구기면서 질문했다.

“헤어졌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도, 그도 헤어질 생각 없어요.”

“……내가 여러 번 말했건만.”

“…….”

“나가.”

할아버지가 나에게 차갑게 말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나가라고!”

할아버지의 손이 또다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손이 떨리는 모습을 보자마자, 조지는 나를 객실 밖으로 내보냈다. 조지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조지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조지.”

“아니에요. 알렉스. 의원님이 괜찮아지시면 연락할게요.”

조지는 나를 어떻게든 내쫓으려고 했다. 할아버지의 상태가 매우 걱정되나 보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조지가 황급히 덧붙였다.

“상황 진전되는 것 있으면 알려줄게요.”

나는 조지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 *

할아버지는 괜찮지 못하신 듯하다. 조지에게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내내 마음이 안 좋았고, 때로 불안했다.

만약 윤이 이번 협상에 관해 물으면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윤에게는 자세한 사항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나았다. 협상 과정과 내용이 너무 지저분했고, 내 배경 때문에 생긴 문제로 억울하게 고생하고 있는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협상에 대해 최대한 말을 아끼기로 했다.

봄 학기 8주차, 윤

나는 알렉스에게 가끔 협상 진행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언젠가부터 내가 협상에 대해 자세히 물으면 말을 돌리거나 피했다. 오늘도 그랬다. 알렉스는 두 문장으로 1차 협상 내용을 요약했다. 협상팀이 각서를 받아내고 돈을 주기로 했다. 여자의 협박 동기는 돈이다.

“그게 다야?”

“중요한 내용은 그게 다야. 내가 괜히 자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는 게 아니야. 협상이 너무 개판이라 네가 알 만한 가치가 없어.”

알렉스는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고집을 피우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그래도 나는 알고 싶어. 이 문제는 내 문제이기도 하다고.”

“내 말 들어.”

“나는 너무 답답하다고.”

“알아봤자 뭐 하려고? 상원의원의 손자인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네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

알렉스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내 말을 잘랐다. 나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나에게 이렇게 잔인한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나는 네 애인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내 생각을 궁금해하고, 나에게 사실을 모두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협상이 최선임을 알고 있지만, 사실은 처벌받게 하고 싶다고 알렉스에게 말하고, 협상팀에게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내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렸고, 나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 *

알렉스에게는 숨기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사실 내 일상은 아웃팅 사건 이후 엉망이 되었다. 나는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고, 바쁜 일상 중에도 틈만 나면 걱정이 샘솟았다. 자연스럽게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 상태로 일상을 피곤하게 보내다 보니, 집에 오면 침대에 쓰러져 자기 바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날은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아서 밤을 새워야 했다. 바이오리듬이 엉망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성욕이 사라져버렸다. 알렉스도 스트레스가 심해서 섹스 생각이 없는지, 우리는 요새 손만 잡고 잤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알렉스의 말을 자주 생각했다. 알렉스가 나에게 또다시 도망갈 거냐고 물었을 때, 그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알렉스가 맞았다. 나는 도망가고 싶었다. 한국을 떠나 이곳으로 온 것처럼, 이곳을 떠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다시금 떠나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다. 한국에 있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국에 있었으면 알렉스의 부모님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고, 아웃팅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을 거라고. 그러니 게이로 살기 힘들다 하더라도 한국에 있어야 했다고. 한국에서 조용히 직장 생활을 하고, 아빠의 경멸 어린 시선을 견디고, 남몰래 남자 친구를 사귀고, 열심히 재테크에 힘쓰고. 차라리 그게 속 편할 뻔했다.

나는 일생을 건 사랑을 하고 싶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이곳에 왔다. 나는 이곳에 내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 자유롭게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온 것이지, 이렇게 거창한 남자를 만나고 마음고생을 하고 싶어 온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알렉스가 나를 일부러 이번 상황에서 소외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열등감 어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너도 내가 동양인이라서, 이민자라서, 게이라서 내 생각은 묻지 않는 것은 아닐까. 알렉스의 할아버지가 심어 놓은 나의 자격지심은 끝을 모르고 부풀어 갔다.

* * *

알렉스는 스카이프로 면접을 보고 있었다. 내가 원서를 내라고 우겨서 지원한 산 안젤로 법원의 서류 전형을 통과했고, 면접을 보게 된 것이다. 알렉스는 면접 소식을 전하면서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좋은 기회를 날렸을 거라고 했다.

나는 문간에 서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내 컴퓨터의 웹캠 성능이 알렉스 컴퓨터의 웹캠 성능보다 좋아서, 알렉스는 내 컴퓨터로 면접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 얼핏 보이는 그레이 판사는 백발이 성성한 흑인 노년 여성이었다. 그녀는 검은 법복을 입고 있었다. 알렉스는 셔츠와 넥타이, 재킷을 입고, 밑에는 체크 무늬 파자마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꼴을 하고 면접을 보다니, 면접관에게 바지가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다. 나는 알렉스의 옷차림이 너무 웃겨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판사가 알렉스에게 웃으며 물었다.

“옆에 누가 있어요?”

“네?”

“웃음소리가 나는데.”

나는 깜짝 놀라서 몸이 굳어버렸다. 내 웃음소리가 저기까지 다 들렸나 보다.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고,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귀에 들려온 알렉스의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남자 친구예요. 공부방 문간에 서서 저를 보고 있어요.”

“둘이 사이가 좋나 봐요?”

그레이 판사의 질문을 받고, 알렉스는 대답 대신 하하 웃기만 했다. 나는 알렉스가 우리의 관계를 대놓고 말한 것에 놀라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쟤가 미쳤나 봐. 나는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알렉스는 앞으로 공직에 나가고 싶은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공직에서 일하며 사회를 위해 이바지하고 싶어요. 그 첫걸음을 공명정대하신 그레이 판사님의 곁에서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네요.”

나는 슬그머니 방에서 나왔고, 거실 소파 위에 앉았다. 내가 면접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앞이 깜깜했다. 쟤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남자 친구라고 대놓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처음 보는 판사 앞에서. 심지어 그레이 판사는 여름 인턴십을 좌우할 사람인데.

알렉스가 면접을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 알렉스는 셔츠와 넥타이를 벗고, 반팔 티셔츠를 입으면서 내 곁에 앉았다. 나는 옆에 앉은 알렉스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서로를 끌어안고 자연스럽게 키스했다. 서로의 입술과 혀를 한참 물고 빨았다. 그러다가 내가 숨이 차서 입술을 뗐고,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네 입술에서 담배 맛이 나.”

담배 맛이 난다는 말을 듣고 너무 당황해서 두 손으로 내 입을 막았다. 알렉스는 민망해하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는 입에서 손을 떼고 나서 알렉스에게 물었다.

“면접은 잘 본 것 같아?”

“무난하게 봤어.”

“근데…… 무슨 생각으로 판사님께 내가 남자 친구라고 한 거야?”

질문을 받고, 알렉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던 건가. 알렉스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알렉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했을 뿐이야.”

“판사님이 편견을 갖고 있으면 어떡해?”

“글쎄.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편견을 가지는 판사라면 판사로서 자격 미달 아닐까? 나는 그런 사람에게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뭐?”

나는 알렉스의 말을 듣고 놀라서 그를 보았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알렉스는 나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물론 면접이니까 그 사람이 나를 시험하는 상황이기는 해. 하지만 나 역시 그 사람을 시험하는 상황이잖아? 그 사람과 내가 잘 맞는지, 내가 그 사람에게 배울 점이 많은지 봐야지.”

그는 나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건방진 건지, 합리적인 건지. 하지만 분명 맞는 말이기는 했다. 알렉스는 가끔 특유의 비범함으로 나를 놀라게 한다. 나는 멍하게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나에게 다시 키스했다. 나는 알렉스의 목을 끌어안고, 그와 한참 키스했다. 끝을 모르고 질척해지던 키스가 서서히 끝나갔다. 우리는 입술을 맞대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키스의 여운이 달콤한 만큼 마음은 울적해졌다. 내가 알렉스의 앞날을 망치고 있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알렉스가 내 뺨을 소중하게 두 손으로 감쌌다. 내 얼굴이 붉어지며 열이 올랐다. 알렉스는 양손 엄지손가락으로 붉어진 내 뺨을 쓰다듬었고, 나는 목이 메어 갈라지는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다 망쳤어.”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넌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어.”

“……너는 일이 이렇게 되고도…… 나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아?”

“후회했으면 좋겠어?”

알렉스는 나와 이마를 맞대고, 내 눈을 들여다보며 싱그럽게 웃었다. 알렉스의 웃음에 커다란 자격지심에 사로잡혔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지만, 그만큼 슬퍼졌다. 처음부터 그에게 그가 나를 떠나고 부인해도 괜찮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만약 그가 떠난다면, 나는 그의 말대로 많이 울 테니까.

봄 학기 9주차, 알렉스

그 여자에게 아픈 딸이 있고 의료보험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마이클이 여자가 건넨 의료 기록을 확인했고 전문의의 소견까지 들었으니까.

그 여자는 30만 달러를 불렀다. 대통령이 바람을 피웠던 속옷 모델에게 입막음으로 건넨 돈이 15만 달러였다. 그 협상에 한 달이 걸렸고, 15만 달러가 들었는데, 성적 착취에 의료 기록 누설까지 저지른 사람이 30만 달러를 부르다니.

하지만 마이클은 할머니가 30만 달러도 괜찮다고 해서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춘 티가 나는 마이클의 건조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무리 여사님께서 괜찮다고 하셔도 30만 달러는 말이 안 되죠.

“마이클은 얼마나 생각하고 계시는데요?”

-여사님께서 갖고 계신 지분이 막대하기는 하지만, 금액은 적으면 적을수록 좋죠.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잘 부탁드려요.”

나는 할머니가 나를 도와주셔서 감사했고, 너무 죄송하기도 했다. 30만 달러는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 사원 평균 연봉의 다섯 배쯤 되는 금액이었고, 증조할아버지에게 어마어마한 지분을 상속받은 할머니에게도 적은 돈은 아니었다.

* * *

협상이 끝났다. 할머니가 수술 비용 전액을 지원하고, 재수술이나 재활이 필요하면 그 비용까지 청구할 수 있으며, 현금 10만 달러를 추가로 지급하는 것으로 협상을 마무리했다. 마이클은 지급 조건이 복잡해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여자 측에서 요구한 30만 달러보다는 한참 적은 금액이 지급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우리 측에서는 그녀에게 평생 비밀을 유지하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각서 외에 추가로 제안한 조건이 있었는데, 그 여자 측에서는 조건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제안한 조건을 들으니 할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상담 센터에 다니면서 그 여자와 딸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되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이의 치료비를 내주었다는 훈훈한 미담 기사를 내어 당신을 위한 언론플레이를 하고자 했다. 마이클은 우리 측에서 추가 조건을 얻어냈으니 잘된 일이라고 했지만, 나는 눈앞이 깜깜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언론플레이가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언론플레이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자주 겪었다. 내가 운동을 하던 시절, 할아버지는 나와 자신을 엮는 기사를 자주 냈다. 그러면 나에게는 한동안 괴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할아버지가 언론플레이를 하면, 사람들이 내 실력을 부당하게 깎아내리고 뒷말을 해댔기 때문이었다. 언론플레이가 너무 싫어서 할아버지에게 제발 그만하라고 여러 번 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할아버지 마음대로 일을 처리했고, 나는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할아버지의 손자이기 이전에 가장 훌륭한 정치 선전 도구였다.

할아버지는 나를 돕지 않는 것이 나를 진정으로 돕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해야겠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다. 나는 현실을 부정하며, 기사 이야기를 내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 * *

그 아이는 할머니 덕분에 휴스턴에 있는 어린이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받게 되었다. 휴스턴 어린이 병원의 소아 흉부외과는 전국에 있는 소아 흉부외과 중 가장 이름난 곳이었다. 수술은 잘 되었다. 아이가 깨어나고 나서, 그 여자에게 할머니의 이름으로 현금 10만 달러가 지급되었다. 나는 그 여자가 죽을 때까지 이번 일에 대해 입을 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내가 직접 말하고 싶으니까.

* * *

조지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예후가 좋다고 알려 주었다. 조지에게 이야기를 듣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에게는 잘못이 있지만,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나와 윤은 이번 사건 때문에 한 달 동안 천국과 지옥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다. 문제가 무사히 해결되었으니 윤도 안심하지 않을까? 나는 윤을 생각하며, 아이가 3일 뒤에 퇴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이라 회복이 빠른 걸까? 아이의 상태를 궁금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지, 잠시 나에게 수화기를 주지 않겠나.

-네, 의원님.

-알렉스.

할아버지는 평소처럼 나를 불렀다. 나 역시 평소처럼 할아버지의 말에 공손하게 대꾸했다.

“할아버지.”

-네가 산 안젤로 법원에 지원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조안 그레이 판사는 나도 잘 아는 사람이지. 아주 훌륭한 판사야. 공명정대하고 너그럽다.

“네. 일주일 전에 면접 봤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래, 합격했더구나. 하지만 거기로 출근할 필요 없다.

“네?”

-안타깝게도 그레이 판사가 갑자기 중요한 케이스를 맡게 되어서 이번에는 인턴을 데리고 일할 겨를이 없다는구나. 그러니 이번 방학에는 오스틴 지방 법원의 구티에레즈 판사 밑에서 일하면 된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일주일 만에 큰 케이스가 생긴다? 산 안젤로는 조그마한 카운티였다. 대기업 본사가 있는 카운티도 아니고, 뉴스에 나올 법한 살인 사건이 난 것도 아니고. 정말 큰 사건이 발생했다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다. 나는 매일 뉴스를 챙겨 보니까.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것은 아니겠지. 할아버지가 설마. 아니어야 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아니죠?”

-네가 생각하는 게 맞다.

할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손을 썼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할아버지에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고얀 놈. 신경을 써 줘도 불만이야?

“할아버지는 왜 제 노력을 허사로 만드세요?”

-주니어가 그러더구나. 네가 산 안젤로 법원에 인턴으로 지원했다고. 기왕에 공직에 나갈 거면 큰물에 나가야지.

“저는 평생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살았어요. 그게 제 자랑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도와주지 않아도 잘할 수 있어요.”

-정신 차려라, 알렉스! 네가 아직도 미식축구장에 있는 줄 알아? 반칙은 미식축구장에서도 심판이 보지 않으면 한다. 사회에서도 페어플레이가 미덕인 줄 알아? 내가 해 줄 만하니까 해 주는 거고, 이 정도는 페어플레이 룰에도 어긋나지 않아. 그러니 너도 네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누리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하란 말이다!

내 평생의 자부심이 무너졌다. 나는 할아버지의 이름에 짓눌리면서도 정정당당하게 살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많은 것들을 성취해 왔다. 그래서 화가 났다. 억울하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나를 생각해서 한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특권 같은 것은 정말 바란 적이 없었다. 내가 바라면 쉽게 얻을 수는 있겠지만, 노력해서 얻는 것이 훨씬 값지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내 신념을 무시했다. 나는 신념을 무시당하는 것이 너무 싫어서, 난생처음으로 할아버지에게 대들었다.

“할아버지는 왜 저를 부끄럽게 하세요?”

-시끄럽다, 알렉스. 나를 화나게 하지 말아라. 너야말로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됐어요. 그딴 법원 인턴, 안 하는 게 낫겠어요.”

-나를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말라고 했다!

“저만 할아버지를 화나게 하는 줄 아세요? 할아버지도 저를 화나게 하고 계세요.”

내가 무심결에 성적 지향을 드러냈는데도 그레이 판사는 나를 좋게 보고 기회를 줬다. 사람을 실력으로만 판단하는 공명정대한 판사에게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할아버지 마음대로 박탈하다니. 내가 그 기회를 어떻게 잡았는데. 나는 정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놈! 이미 오스틴 법원과 이야기 끝났다!

“할아버지!”

-이 멍청한 놈, 공직을 생각한다는 놈이 머리가 없어. 오로지 눈앞의 것만 보고! 언제 철들 거냐, 알렉산더 줄리안 케인즈 테신 4세!

할아버지가 전화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할아버지에게 다시 대들려고 하는데, 할아버지는 내가 대들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너, 말 잘했다. 공직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놈이 비역질? 정신 차려. 그 한국놈은 네 발목을 잡을 거다. 공직자가 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야. 공직자는 결점이 없어야 해. 트집 잡힐 것이 없어야 한단 말이다. 당연히 최고의 여자를 만나 최고의 내조를 받아야-

할아버지의 말을 거기까지 듣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할아버지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지만, 아예 아이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할아버지의 말은 들을 가치가 없었고, 할아버지와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공직에 나가고 싶은 거지, 정치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자꾸 두 개의 길을 혼동하고 있었다. 누구 마음대로 내가 당신의 후계자라는 건가? 할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내 입으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아이폰 전원을 끄고 숨을 거세게 헐떡였다. 미친 듯이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숨이 가빴다. 숨을 고르고 나니, 비로소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내가 저지른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전화나 말을 내가 먼저 끊어버린 것은 24년 인생에 처음이었다.

* * *

할아버지가 말한 대로, 산 안젤로 법원 인턴에 합격했으나 오스틴 연방 지방 법원으로 ‘전출’ 발령 났다는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 메일을 읽고 나니 자괴감이 들었다. 정말 오스틴에서 일해도 괜찮은 건가? 오스틴 법원 경력이 좋은 경력인 것은 맞다. 하지만 정정당당하지 못한 수단으로 얻은 기회를 누리는 것이 맞나? 내가 오스틴에 가면 분명히 뒷말이 나올 텐데, 뒷말은 정말 듣고 싶지 않았다. 뒷말을 듣는 것은 고등학교 시절, 대학교 시절로 족했다.

봄 학기 9주차, 윤

밍 교수님에게 내가 만든 학회 발표 자료를 보내드렸다. 나는 파워포인트를 잘하는 편이라 금방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 교수님은 내 메일에 회신하시며 발표 자료 수정 사항을 말씀해 주셨고, 나는 그것들을 고쳐 메일로 보냈다. 교수님이 나에게 다시 답장을 보냈다. 교수님은 수정 사항을 확인하셨다며, 덴버행 항공권도 빨리 예약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교수님의 메일을 읽고 나서 항공권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학회가 열리는 4월 초는 비수기였다. 그래서 항공권 가격은 전부 엇비슷했고, 나는 교수님과 같은 비행기를 예약했다. 한국에서도 학회에 몇 번 가 본 적이 있지만, 국제 학회는 처음이라 기대되었다. 가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 * *

알렉스에게 협상 완료 소식을 들었다. 협상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끝났다. 조건을 잘 맞춰 주었으니 협상이 빨리 끝난 것이겠지. 알렉스는 정확한 금액은 말하지 않았지만, 석유 재벌 상속녀인 알렉스 할머니가 이십몇만 달러나 되는 합의금을 전액 현금으로 지급했다.

합의금의 액수를 들으니 현실감이 없었다. 이십몇만 달러. 한국 돈으로는 약 3억. 나 같은 사람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만한 돈을 모으려면 몇 년이 걸릴까? 나는 엄청난 액수의 돈이 할머니의 호주머니에서 현금으로 나온다는 것이 신기했다. 미국 부자의 씀씀이는 한국 부자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아무리 부자라 해도,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할머니가 쌈짓돈을 털어 줄 수는 없으니.

* * *

아침에 연구실로 출근해서 간밤에 온 메일들을 읽었다. 학교 홍보 메일을 흘려 읽고 삭제 버튼을 누르려다가 낯익은 이름을 보았다.

어째서인지 테신 주니어 의원의 사진이 학교 홍보 메일에 실려 있었다. 헤드라인을 읽어보니 기가 찼다. 테신 주니어 상원의원이 로스쿨에 재학 중인 손자 알렉산더 테신 4세를 통해 학교 상담 센터 직원의 딸 빅토리아의 ‘딱한 사정’을 알고 ‘수술비’를 ‘지원’해 주었다고.

하이퍼링크를 클릭하니 워싱턴 포스트 기사가 나왔다. 기사에 의하면, 알렉산더 테신 4세는 학교 상담 센터에 다니면서 직원과 친해졌으며, 그녀의 딸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안타까운 소식을 테신 주니어 의원에게 이야기했으며, 상원의원과 아내 이사벨라는 손자의 착한 마음씨에 감동하여 그 아이를 돕게 되었다고 했다.

구글에서 기사를 검색했다. 그러자 이번 일을 다룬 폭스 뉴스의 비디오 클립까지 나왔다. 나는 비디오 클립을 재생했다. 비디오 클립에서는 워싱턴 포스트에 실린 기사와 똑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디오 클립을 보고 나니,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기사와 뉴스가 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마 알았을 것이다. 알렉스는 테신 의원 측과 정기적으로 연락하고 있으니까. 나는 나에게 기사와 뉴스를 숨긴 알렉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얘가 나를 무시하는 건가? 알렉스는 이런 뉴스가 나갈 거라고 나에게 말했어야 했다. 나도 엄연히 이번 사건의 당사자이고, 나에게는 알 권리가 있으니까. 사진에 찍힌 알렉스의 연인은 알렉스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나였다.

심호흡을 하고, 기사를 다시 읽었다. 내 이야기는 기사에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지만, 알렉스가 나에게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여전히 화가 났다. 내가 정말 그의 애인이 맞기는 하나? 기사에 우리의 관계가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으니 그만이라 이건가?

나는 테신 의원과 보좌관들도 꼴 보기 싫었다. 정교하게 포장된 기사에서 진실을 읽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들이 나의 동의 없이 기사를 내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다. 협상하는 동안, 아무도 내 의견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그건 이해한다. 상원의원의 손자를 꾀어낸 요망한 동양인 호모 새끼는 그들에게 의견을 낼 자격이 없었다. 그들에게 내 존재는 지워버리고 싶은 악몽 같은 것이니까.

그들이 여태까지 내 존재를 무시했지만, 나는 그들이 나를 무시할 만하다고 생각해서 참았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이번 일은 내가 참을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남의 사생활을 가공해서 공개하는 건데, 이런 기사를 낼 생각이었다면 당연히 내 의사를 물어봤어야 했다. 그게 예의였다. 나는 내가 연루된 이야기가 동의 없이 미국 전역에 퍼져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방금 본 것이 너무 무서웠고 구역질이 났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3억 3천만 명을 호도하는 거대한 거짓말에 휘말려 있었다.

* * *

알렉스는 제가 산 안젤로 법원 인턴에 합격했으나 오스틴 연방 지방 법원으로 전출 발령 났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나는 저녁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면서 별생각 없이 잘됐네, 라고 말했다. 내가 면접을 망쳤는데도 합격했고, 게다가 오스틴에서 일하게 되었다니. 아무래도 산 안젤로 법원보다는 대도시인 오스틴의 법원이 낫겠지. 하지만 알렉스는 내 어깨를 양손으로 꽉 잡으며, 나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이게 잘된 거야?”

“……잘된 거 아니야?”

“할아버지가 손을 쓴 거라고.”

“……그래서 안 갈 거야?”

과연 할아버지 솜씨였군. 알렉스의 격한 반응을 보니 알겠다. 이번 일은 알렉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일이었고, 알렉스는 할아버지의 개입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알렉스를 잘 안다. 알렉스는 운동을 그만두었지만, 뼛속까지 배어 있는 운동선수 기질 때문에 규칙에 어긋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뒤가 구린 일을 참지 못했다.

한편으로 궁금했다. 알렉스는 좋은 기회를 정말 포기할 생각인지. 앞으로도 정정당당한 길이 아니면 가지 않을 생각인지. 여태까지 한 번도 잘난 할아버지 덕을 보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할아버지 찬스를 써도 괜찮지 않을까? 나 같으면 쓰겠다. 나는 기사가 나갈 거라는 사실을 숨긴 알렉스에게 심사가 뒤틀려 있었고, 잔뜩 비꼬듯이 말했다.

“나는 네가 오스틴에 가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하는데.”

“나는 내 신념과 타협하고 싶지 않아.”

인간은 신념과 타협한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나는 내 인생의 많은 순간을 타협과 함께했기 때문에 잘 안다. 심지어 전공을 선택할 때에도 현실과 타협했다. 한국에서 게이라는 것이 밝혀져서 직장 생활을 못 하게 된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먹고살기 위해 프리랜서로 뛰기 좋은 전공을 택했다. 프리랜서로 먹고살 것을 대비하여 재테크 공부도 열심히 했다.

나는 그래서 꼿꼿하게 버티는 알렉스가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했다. 나도 너처럼 정도(正道)만 걸으면서 내 멋대로 살고 싶은데. 너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만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알렉스의 속을 긁으려고 일부러 얄밉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너는 법원이 아니라 너희 아버지 로펌에 가도, 다른 대형 로펌에 가도 아버지 후광, 할아버지 후광이라는 말을 듣게 되어 있어. 그냥……. 네 환경이 그래. 너는 여태까지 정정당당하게 살았는데도 맨날 후광을 누렸다는 말을 들었잖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할아버지 후광을 누려봐. 네가 할아버지 후광을 한번 누리고 나면, 앞으로는 덜 억울할 거 아냐?”

내 말을 듣고, 알렉스는 허를 찔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발로 알렉스를 당황하게 만드는 날이 오다니. 나는 그게 통쾌해서 더욱 가차 없이 말했다.

“가서 실력으로 너를 증명해. 네가 할아버지 덕에 그 자리에 간 건 맞지만 실력이 좋은 것도 맞다는 것을 보여 줘. 그러면 앞으로는 후광 이야기가 안 나오지 않겠어?”

“…….”

“자신 없으면 말고.”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비아냥거리자, 알렉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알렉스가 나를 향해 눈을 사납게 뜬 것은 처음이었다. 여태까지는 나를 남자 친구로 대했는데, 지금은 불구대천의 원수로 대하고 있었다.

경기에 나간 알렉스는 헬멧 안에서 지금처럼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상대 팀을 쏘아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쩌라고? 내가 틀린 말을 했나? 사귀는 사이에 이 정도 말도 못 하나? 나는 설거지를 마저 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알렉스가 두 손으로 내 멱살을 잡고 나에게 거칠게 키스했기 때문이었다.

키스하는 내내 이가 부딪혔고, 물어뜯긴 내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다. 피를 보고 흥분한 알렉스가 키스하면서 내 몸을 마구 더듬고 만졌지만 불쾌했다. 이것은 섹스가 아니라 마운팅이었다. 들짐승들이 상대를 제압하고, 영역 싸움을 하거나 서열을 확인하려고 하는 짓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알렉스가 나를 제 팔에 가두면서 부엌 벽에 밀치려고 했지만, 나는 알렉스의 팔을 피가 나도록 깨물어 벗어났다. 이번에는 그의 왼쪽 정강이를 죽을힘을 다해 힘껏 걷어찼다. 알렉스가 아파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사이, 나는 개수대에서 그릇을 집어 알렉스의 얼굴에 세게 집어 던졌다.

그릇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타일 바닥에 나뒹굴었다. 강화 유리 그릇이라 깨지지는 않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그릇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알렉스의 코에서 피가 후드득 터져 타일 바닥에 떨어졌다. 알렉스는 손등으로 코피를 문질러 닦았다. 제 손에 묻은 피를 보고 이성을 되찾은 알렉스는 두툼한 가슴을 들썩이며 식식거렸다.

알렉스를 바라보며 그의 거친 숨결이 가라앉고 코피가 멎기를 기다렸다. 알렉스는 내가 폭력적인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똘끼는 있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내 야비함과 열등감, 배신감을 알렉스에게 퍼부었다. 알렉스는 나에게 크게 실망했겠지. 나는 헛웃음을 짓다가 진짜로 웃기 시작했다. 내가 내 손으로 관계를 망쳤다. 누가 이렇게 끔찍한 사람과 가족이 되고 싶겠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전의를 상실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죽고 싶어…….]

“윤.”

[나는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너에게 폭력을-”

“네가 왜 미안해해야 하지?”

나는 얼굴에서 두 손을 내리며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렉스는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말들이 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네가 미안할 필요는 없어.”

“…….”

“따지고 보면 이 문제의 원인은 나잖아?”

“…….”

“네가 나와 사귀고 나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다고.”

“…….”

“네가 초조한 것도 이해해. 네가 살면서 겪었던 바닥은 진짜 바닥이 아니었을 테니까. 근데 진짜 바닥을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무섭지?”

“…….”

“그만 말할게. 내가 열심히 말해 봐야 너는 무슨 뜻일지 모를 텐데.”

“…….”

“말할수록 나만 비참해지고. 그러니까 그만하자, 그만하고 싶어.”

알렉스는 내 말을 듣자마자, 피투성이가 된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꽉 잡았다. 그가 내 어깨를 잡고 흔들면서 다그치듯 물었다.

“뭘?”

“전부.”

내 대답을 듣고, 알렉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나는 알렉스의 두 눈을 보며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 헤어지자.”

봄 학기 9주차, 알렉스

나는 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헤어지자니, 분명히 무슨 말을 들었는데 의미를 해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윤에게 멍청하게 되물었다.

“헤어져?”

“…….”

“……왜?”

“집이 구해지면 나갈게.”

나간다니. 집을 나간다는 건가? 왜? 헤어지자고? 갑자기 왜? 나는 방금 들은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윤에게 다시 물었다.

“누구 마음대로? 우리가 왜 헤어져?”

“…….”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어?”

“너는 너의 삶을 살아. 나는 나의 삶을 살게.”

윤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나를 내버려 두고 담뱃갑과 라이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멍하게 서 있다가 윤을 쫓아 나갔다. 윤은 아파트 화단 곁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 발소리를 듣고, 윤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차인 것은 분명히 나인데, 윤은 제가 차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윤을 정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고, 나는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이 몹시 낯설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자, 윤은 장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밟아 불을 껐다.

“하고 싶은 말이 남았어?”

“너에게 폭력을 가하려던 것은 아니었어. 나는 산 안젤로 법원에 가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멋대로 손을 쓴 게 너무 싫었어. 근데 너까지 할아버지 편을 들어서, 나는 그게 너무 섭섭했어. 미안해. 전부 내 잘못이야.”

“괜찮다고 했잖아. 네가 사과할 거 없어.”

윤은 내가 그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려고 해서 실망했다. 나도 스스로가 실망스러웠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무리 화가 나도 사람을 상대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내가 저지른 짓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윤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삐딱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비뚤어진 웃음을 지은 채, 나에게 물었다.

“하나만 묻자. 너는 그 기사에 대해 알고 있었어?”

“무슨 기사?”

“워싱턴 포스트에 아주 훈훈한 미담 기사가 났던데.”

“……할아버지가 보도 자료를 넘기고 나서 알려 줬어.”

굳이 변명하고 싶지 않아서 사실만 말했다. 내 대답을 듣고, 윤의 얼굴에서 비틀린 웃음이 사라졌다. 나는 윤의 반응을 보고 놀랐다. 윤이 그 기사를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몰랐다. 윤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은 기사인데, 어째서?

윤은 눈을 감고 한참 웃었다. 한참 웃던 윤은 눈을 떴다. 평소에는 나를 볼 때면 새까만 눈이 사랑스럽게 반짝였는데, 나에 대한 모든 감정이 사라진 검은 눈은 차갑기만 했다. 윤은 피식 웃고 나서 또박또박 말했다.

“나보다는 먼저 알았다는 거네.”

“…….”

“근데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

나는 윤을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지켜봤으니,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윤은 나와 할아버지 사이의 앙금을 보고도 모른 척한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할아버지의 손에서 평생 놀아나는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그런데도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기분이 얼마나 개 같은지. 내가 할아버지 앞에서 뺨을 맞고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고도, 윤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아니, 윤은 내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고통만 중요하게 생각했고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나는 그가 너무 미워서,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흔들면서 화를 내고 소리쳤다.

“너는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데? 그 여자를 경찰에 신고할까? 아니면 할아버지에게 빌어서 기사를 내려달라고 할까? 할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너한테 사과하라고 할까? 말해 봐. 네가 원하는 게 뭐야?”

“…….”

“원하는 게 뭔지 말도 제대로 못 하면서 자존심만 더럽게 세지.”

“…….”

“나도 못 하는 것을 네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

“주제 파악이나 해.”

나는 마지막 말을 하자마자 후회했다. 나의 마지막 말을 듣고, 윤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 말만은 하면 안 되는 거였다. 내가 너무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렀다. 윤의 두 어깨를 잡았던 내 손에서 힘이 풀렸다. 윤은 나를 두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했고, 나는 윤의 팔목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윤은 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거 놔.]

“윤.”

[이거 놓으라고!]

윤이 뭐라고 고함을 쳤지만, 한국어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가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똑같은 부위를 두 번째로 걷어차이니 죽을 만큼 아팠지만, 나는 윤을 놓지 않았다. 윤은 몇 번이나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나는 그의 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그러자 윤이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며 한국어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뭘 모르는데? 그러는 너는 뭘 알아! 니가 뭘 아냐고! 시발, 니가 뭘 아는데! 너는 아무것도 몰라! 근데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윤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윤이 우는 것을 보자마자, 내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윤은 나를 향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씨발,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언어의 장벽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대답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울고 있는 윤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고, 윤은 비통하게 울면서 나에게서 돌아섰다.

윤은 나를 등지고 어디로인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를 붙잡아야 하는데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무슨 말로 사과하고 사랑을 말해야 그를 붙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점점 멀어지는 윤을 보며 깨달았다. 나는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를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가 울면서 진심을 말해도, 나는 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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