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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2/15)

2장

가을 학기 Ⅰ

가을 학기 0주차, 알렉스

윤이 욕실에 들어가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워 방금 본 광경의 잔상을 지우려고 명상 앱을 켜고, 숙면을 위한 명상 음악을 재생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의 여성이 나에게 몸의 근육을 이완하고 호흡을 가다듬고 잡념을 잊으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명상은 효과가 없었다. 나는 잠들지 못했다. 발기한 성기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침대에서 한참 뒤척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어기적어기적 걸어 욕실로 갔다. 페니스가 발기한 지 너무 오래되어 아파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욕실 문을 닫고 드로즈 안에 손을 넣어 성기를 쥐었다. 발기한 지 오래된 성기는 쿠퍼액에 젖어 꺼떡거렸다. 나는 드로즈를 내려 성기를 완전히 꺼내고, 그것을 문지르고 흔들고 주물렀다.

윤의 몸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땀과 체액에 흠뻑 젖은 예쁜 상아색 몸을 생각하자 입에 침이 고였다. 운동하면서 남자들과 지겹도록 부대껴 봤지만, 여태까지 남자에게 발정한 적은 없었는데.

“윽… 으…….”

나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벽에 기대섰다. 성기를 잡아 쥐고 흔드는 속도가 빨라졌다. 온몸에 땀이 솟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눈앞에 퉁퉁 부은 선홍색 유두가 아른거렸다. 유두에는 피어싱이 매달려 있었다. 입에 머금으면 단맛이 날 것 같은 빛깔과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목에 난 손자국은 싫었다. 나라면 그를 곱게 다루었을 텐데. 절정으로 치달아 갈수록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빠르게 반복했다. 나는 손이 아프도록 내 물건을 쥐어 잡고 거칠게 흔들고 비벼대다가 사정했다.

절정이 찾아왔다. 오른손이 정액으로 흠뻑 젖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떴다. 손으로 고여있던 정액을 끝까지 훑어내고, 욕실 바닥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정액이 묻은 손이 타일 바닥에 문질러졌다. 나는 밀려오는 허무함에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미쳤지.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남자에게 꼴려서 딸을 치다니.

나는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미식축구를 오래 했다. 게다가 내 고향은 텍사스이다. 외국인들은 미디어를 통해 미국을 접하며 이 나라가 개방적인 국가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텍사스보다 미국의 기독교 정신과 개척 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곳에는 총칼로 인디언을 살육하고 드넓은 신대륙을 개척한 개신교도들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공화당의 성지, 텍사스에서 총기 소지 자격증은 운전 면허증만큼이나 흔하고, 전체 인구 중 기독교 신자 비율은 95%를 넘는다.

고향 오스틴은 텍사스에서는 그나마 개방적인 곳이다. 학교에서는 성 소수자들을 존중하라 가르치지만, 내가 속한 세계는 주류 사회의 정점이라 매우 보수적이고 배타적이었다. 나는 남자에게 끌리는 남자나 여자에게 끌리는 여자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고 그들을 경멸하며 살았다. 그 후, 나는 중대한 사건을 겪고 마음을 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남자에게 발정하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는 정말 남자에게 발정하고 말았다.

아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도 윤을 본다면 저절로 드는 음탕한 생각에 장미 덩굴 위에 몸을 굴렸을 것이다16). 나는 두서없는 생각을 하며, 욕실 바닥에 앉아 내 행동을 합리화하려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인가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는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그 울음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깨달았다. 세상을 떠난 그 애가 나에게 울면서 묻고 있었다. 알렉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만약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슬퍼. 죽어서도 너무 슬퍼.

* * *

결국, 잠을 설쳤다. 얕은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하다가 잠들기를 포기했다. 선잠이 들면, 그 애가 꿈에 나타나서 울었기 때문이다. 잔 것도 아니고 자지 않은 것도 아니라 밤을 꼬박 새운 것보다도 피곤했다. 몇 년 동안 잊고 살았던 그 애를 떠올리고 나니, 그 애 생각이 도통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새벽 공기와 에어컨 바람에 차갑게 식은 침대에 누워, 나는 그 애의 이름을 입 안에서 읊어 보았다.

그 애의 이름은 칼렙 라이트였다. 칼렙. 민수기의 성자,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하나님의 종. 그 애의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이 당신처럼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며 지극히 복된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이다.

칼렙의 아버지는 지역 언론에 오스틴은 타락했으며, 진정한 침례교도라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낙태하는 여자들과 동성애자들을 용서하고 회개시켜야 한다고 사설을 발표하는 유명한 목사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아들은 나를 좋아했다.

그 애는 연약한 구석이 있는 애였다. 마음이 여리고 착한 애라 그럴까, 마르고 체구가 작아서일까. 그도 아니면 창백하고 흐릿한 인상 탓일까. 나는 그 애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애가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촛불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초가 제 몸을 불살라 세상을 밝힌다는 사실도 죽은 그 애를 떠올리게 했다.

* * *

웨스트레이크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그 애를 처음 만났다. 고등학교 1학년, 첫 과학 수업 직전. 나는 화장실에 들렀다. 화장실에 사람이 많아서 교실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교실에 도착했을 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빈자리 중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았다. 그 자리가 칼렙의 옆자리였다.

그다음 날. 수학 시간에도 그 애가 있었다. 나는 전날 만난 그 애가 낯이 익고 반가워서, 그 애의 옆자리에 또 앉았고 통성명을 했다. 그 애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나는 칼렙이야.”

변성기가 한창이라 그 애의 목소리는 새되었다. 나는 변성기가 끝나서, 지금처럼 낮고 울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말하고 그 애와 악수했다.

“나는 알렉스야.”

“알아.”

“어떻게 알아?”

“너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애는 말을 마치고, 얼굴을 붉히며 살포시 웃었다. 그 애는 빨간 머리에 초록색 눈, 키가 작고 마른 체구에 여리고 앳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너드였고 실제로도 너드였다. 그 애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그 애가 학군 좋기로 유명한 우리 동네에서도 손꼽히는 수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도 공부를 잘했지만, 그 애는 머리가 정말 좋아서 그 애와 수업을 같이 들으면 편했다. 공부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 애에게 물으면 되었다.

우리는 대화가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우리는 영화를 좋아했고 입맛도 비슷했다. 특히 우리는 왕가위 영화를 좋아했고, 비포 시리즈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친하게 지냈다. 학교에서 같은 메뉴를 골라 점심을 먹고, 주말에는 영화관에 가기도 했다. 그 애를 우리 집에 초대해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고양이들과 논 적도 많았다.

사람들은 내가 그 애와 친하다고 하면 의외라고 했다. 그 말은, 내가 소위 ‘잘나가는 애들’과 노는 것이 어울린다는 이야기였다. 백인, 앵글로-색슨 혈통의 개신교도에, 석유 사업이나 목화 사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의 녀석들 말이다.

나는 ‘잘나가는 녀석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 녀석들의 속셈이 눈에 빤히 보여 신물이 날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녀석들은 나와 친하게 지내면서 이득을 보려고 했고, 특히 내 곁에 있으면 예쁜 여자애들이 붙는 것을 노렸다. 나는 그들의 속셈을 알면서도 눈감아 주었다. 그런 녀석들에게는 적당히 친한 척을 하면서 거리를 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애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제일 편했다. 그 애는 나에게 어떤 속셈도 비춘 적이 없었으니까.

* * *

나에게 첫 여자 친구가 생겼다. 나와 케이틀린은 7년을 사귀었고, 나는 첫 키스와 동정을 케이틀린에게 주었다. 케이틀린도 마찬가지였다.

케이틀린은 예쁘고 똑똑하고 완벽한 애였다. 케이틀린의 아버지는 AT&T17)의 임원이었고 어머니는 회계사였으며,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나 때문에 케이틀린과 칼렙은 안면을 텄고, 그들은 서로에게 친절했다. 나는 여자 친구가 생긴 후에도 그 애를 똑같이 대했지만, 그 애는 나에게 은근히 거리를 두었다.

어느 날, 나는 그 애에 대한 질 나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 애가 게이이고, 학교에 그 애와 잤다는 애가 수두룩하다는 것이었다. 그 애가 섹스를 끝내주게 잘한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어느 날부터 학교 사람들은 나와 그 애를 수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은 내가 케이틀린과 사귀는 것을 알면서도, 나와 칼렙이 사귄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공부만 잘하는 찐따를 거들떠볼 이유가 없다고 했다.

나는 소문을 전부 무시했다. 그 애가 게이이건 말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데. 내가 케이틀린과 사귀는 것을 알면서도, 케이틀린에게 실례가 될 만한 더러운 말을 하고 다니는 놈들이 나빴다. 헛소문에 시달리다가, 나는 케이틀린에게 안 좋은 소문에 휘말리게 되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케이틀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아. 나는 진실을 아니까. 그리고 나보다는 칼렙이 걱정이지.”

“칼렙이 왜?”

내 질문을 듣고, 케이틀린은 입을 다물었다. 케이틀린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틀린은 나의 방학 계획을 물으며 화제를 돌려버렸고, 나는 학회에 참석하는 엄마를 따라 파리에 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케이틀린은 칼렙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틀린이 칼렙의 동의 없이 그 애의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아웃팅이 되기 때문에, 그녀는 내가 몇 번이나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는 동갑이었지만, 케이틀린은 생각이 깊었고 나는 너무 미숙했다. 내가 얼마나 미숙했냐면, 나는 그 애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그 애가 내 친구라고만 생각했다.

* * *

소문은 점점 이상하게 퍼져 나갔다. 학교에는 나와 칼렙이 키스하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 이야기와 함께, 케이틀린이 나와 그 애의 관계를 감추기 위한 연막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헛소문을 듣고, 미식축구부 사람들은 나를 은근히 따돌리기 시작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마초 기질이 강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는 소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미식축구부 사람들이 나를 따돌리기 시작하자,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급기야 헛소문은 내 부모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어느 날, 부모님은 나에게 남자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부모님마저 헛소문을 알았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내가 헛소문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화가 나고, 헛소문에 시달리는 것이 억울하기도 했다. 게다가 부모님이 그 소문을 알 정도면 할아버지가 아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할아버지는 동성애자를 경멸하는 사람이고, 당신의 정치 경력에 흠이 될 만한 일은 참지 못하는데.

“알렉스, 우리는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괜찮아.”

“그런 거 아니에요.”

“엄마 아빠는 다 이해해.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나의 부모님은 뼛속까지 공화당 지지자인 우리 집안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텍사스에서 나고 자랐지만, 20대의 대부분을 캘리포니아주에서 보내서 그런지 중도 보수였다. 두 분은 동성 결혼이나 낙태, 총기 규제에 찬성하고, 대선에서는 가끔 민주당 후보를 지지할 때도 있었다. 게다가 엄마가 가장 아끼는 학생은 레즈비언이고, 아빠는 동료 게이 변호사에게 좋은 인사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에게 말도 안 되는 의심을 산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빠져서 벌컥 화를 냈다.

“대체 어디서 그런 개소리를 듣고 오신 거예요?”

“얘, 알렉스.”

“저 캣과 사귀는 거 아시잖아요. 어떻게 제 말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더 믿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엄마 아빠는 제가 호모 새끼였으면 좋겠어요?”

나는 부모님 앞에서 험한 단어를 쓰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부모님은 내 격한 반응에 놀라면서도 나를 타일렀다. 아무리 화가 나도 다른 사람을 모욕하거나 비하하는 말은 쓰는 것이 아니라고, 동성애자들은 가엾은 사람들이라고.

그때는 화가 나서 부모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자라면서 철이 들었고, 지금은 모욕적인 말을 했던 것을 너무나 후회한다. 이제 와서 뭐라고 말해도 변명이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여전히 내 경솔한 언행을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다.

* * *

그날 저녁. 나는 내 BMW를 몰고 그 애의 집 앞에 찾아갔다. 그 애를 불러내서 드라이브하자고 말하니, 그 애는 좋다고 했다. 나는 일부러 그 애가 좋아하는 음악만을 선곡했다. 얼마쯤 달렸을 때, 차 안에 아델의 가 흘렀고, 그 애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얼굴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온 세상이 당신의 일에 간섭하려 들 때면, 당신이 내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내 따뜻한 품을 내어줄 수 있어요. 해가 저물고 별이 뜰 때, 당신의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당신이 내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당신을 백만 년이고 안아줄 수 있어요.’

변성기가 끝난 그 애의 목소리는 깨끗한 미성이었다. 나는 그 애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노래가 끝날 때까지 말을 걸지 않고 운전만 했다. 그 애는 아버지의 교회에서 주말마다 찬양 솔로를 부르는데, 하나님은 분명 주말마다 그 애의 목소리를 듣고 기뻐할 것이었다.

노래의 여운을 느끼다가,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 그 애에게 말했다. 우리는 계속 친구이지만, 당분간 사람들 앞에서는 친한 티를 내지 말자고. 우리가 사귄다는 소문이 나서 곤란하다고. 미식축구부 사람들도 그렇고 우리 부모님까지 너에 대해 물어본다고. 내 말을 듣고, 그 애는 알겠다고 말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마치고, 우리는 잡담을 하면서 드라이브했다. 나는 차가 빨간불에 걸려 잠시 멈추어 섰을 때, 손을 뻗어 그 애의 빨간 머리를 처음으로 쓰다듬었다. 칼렙의 부드러운 곱슬머리는 솜사탕처럼 포근했고, 그 애는 내 손이 닿자 몸을 웅크리며 수줍게 웃었다.

나와 칼렙은 약속한 대로 학교에서는 서먹하게 지냈다. 같은 수업을 들어도 붙어 앉지 않았고 말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학교 밖에서는 영화를 보러 다녔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녔다. 재미있는 동영상을 발견하면 주소를 공유했고 내 고양이들과 함께 놀았다.

* * *

한 달이 지났다. 소문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우리 학교 미식축구팀 러닝백 선배가 세 다리를 걸치다가 걸렸고, 세 여자가 한 남자를 공유하기로 합의했다는 충격적인 소문으로 옮겨갔다. 나는 사람들의 관심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안심했고,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시합을 위해 샌 안토니오로 떠났다.

시합에서 이기고 돌아왔을 때, 여느 때처럼 엄마와 아빠가 나를 데리러 왔다. 집에 가는 길, 나는 아빠의 벤츠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아빠가 차를 운전했고, 엄마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아빠는 운전하다 말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있잖니, 알렉스.”

“네?”

“너에게 전해 줄 소식이 있는데.”

“무슨 일인데요?”

“심호흡하고 들어.”

아빠는 웬일인지 말을 유려하게 하지 못했다. 그는 변호사이고 엄청난 달변가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인데도 말을 더듬었다. 그래서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 있어요?”

아빠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침통하게 말했다.

“……칼렙이 지금 혼수상태로 병원에 있어.”

“네?”

“여보, 나는 말 못 하겠어. 당신이 말해.”

아빠는 목이 메어 말했다. 아빠의 말을 듣고 엄마가 한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아빠 대신 소식을 전하는 엄마의 목소리도 꽉 잠겨 있었다.

“네가 시합에 가고 나서…… 칼렙이 집에 안 들어와서 경찰에 신고했는데, 애가 글쎄…. 안 좋은 일을 당하고 쓰러져 있는 것을 경찰이 발견해서…… 병원에 옮겼는데…….”

“…….”

“……오늘이 고비래.”

엄마는 훌쩍훌쩍 울다가, 프라다 사피아노 백에서 티슈를 꺼내 코를 풀었다. 엄마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는 너를 대학 병원에 데려다주는 게 어떨까 하거든.”

“…….”

“힘들면-”

“아니에요. 가요.”

내 대답은 아주 단호했다. 부모님은 동요했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 애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같이 연약한 그 애가 언젠가 거센 바람을 만나면, 그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지고 말리라는 것을.

* * *

나는 의식이 없는 그 애의 곁에 한참 앉아 있었다. 그 애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아델 노래를 들려주기도 하고, 처음으로 그 애의 손을 잡고 쓰다듬었다.

칼렙의 병실을 지키고 있던 경찰관이 나에게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그 애가 실종된 지 하루 만에 발견되었을 때, 그 애는 많이 두들겨 맞아서 의식이 없었다. 경찰관은 그 애가 즉석 만남 앱으로 남자를 만나러 다니다가 변을 당한 것이고, 정황상 증오 범죄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하여 수사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경찰관의 설명을 듣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멍하니 서 있었다. 경찰관은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잠긴 목소리로 그에게 부탁했다. 수사에 내 도움이 필요하면 꼭 불러 달라고.

* * *

내가 다녀간 그 날 밤, 그 애는 제 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그 애는 생전에 바라고 서약한 대로 제 장기를 기증하여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다. 그 애는 마지막 순간까지 제 영혼의 위대함을 증명한 것이다.

* * *

그 애의 사건은 결국 미제로 남았다. 경찰은 증오 범죄를 의심한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범인을 찾지 못했다. 열심히 수사했지만,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궁금하다. 경찰은 정말 아무런 증거를 찾지 못한 것일까? 게이 소년이 희생자라 소홀히 수사한 것은 아닐까? 그 애의 죽음은 언론에서 아주 짤막하게 다루어졌고, 나는 여전히 누가 그 애를 죽인 것인지, 왜 그 애를 죽인 것인지 알지 못한다.

* * *

그 애를 파괴한 사람은 그 애뿐만 아니라 그 애의 가족까지 파괴했다. 그 애의 어머니는 몇 년 뒤, 우울증에 걸려 자살했다. 그 애의 아버지도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 애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나는 그 애의 심장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나는 칼렙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 새로운 삶을 충만하게 꾸려나가기를 바란다. 만약 칼렙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면, 나는 그 새끼를 죽여버릴 수도 있다. 감히 칼렙의 심장을 갖고도 자신이 얼마나 큰 행운을 누리는지 모르다니. 아니다. 그 새끼는 죽이면 안 된다. 그 새끼를 죽이면 칼렙이 죽기 때문이다. 세상에 죽어야 마땅한 사람은 없지만, 칼렙은 정말로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될 애였다.

* * *

그 애의 마음은 케이틀린과 헤어지고 나서 알았다. 나는 재활을 마치고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로스쿨 입시를 준비하면서 힘들어하고 있었고, 케이틀린은 댈러스에 있는 투자 은행에서 일하느라 바빴다. 나는 LSAT 점수가 생각만큼 나오지 않아서 열패감이 심했고,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몸이 좋지 않아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케이틀린은 직장에 적응하느라 힘든 것 같았다. 우리는 사회초년생이었고, 장거리 연애를 하다가 서로를 만날 힘도 없을 만큼 지쳤고, 서먹해지다가 마침내 이별했다.

케이틀린과 헤어진 날. 내 페이스북 포스팅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읽었다. 사진을 차례대로 보다가 그 애와 찍은 사진을 보게 되었다. 사진 속에서, 그 애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애의 시선에서 나를 향한 티 없이 순수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 나서, 그 애와 찍은 사진들을 전부 살펴보았다. 그 애가 나를 보고 웃고 있는 사진은 한둘이 아니었다. 우리가 함께 찍은 사진마다 그랬다. 그 애는 나를 향해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죽은 그 애가 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사진 속 칼렙이 짓고 있는 환한 미소에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결국 울어버렸다. 그 애는 언제나 나를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있었는데, 왜 그 애의 사랑을 몰랐을까? 만약 그 애의 사랑을 알고 고맙다고 말했다면, 그 애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기도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았다. 나는 울면서 차를 몰고 나갔고 아무 곳에나 들어갔다. 내가 들어간 곳은 개신교 교회가 아니라 천주교 성당이었다. 어차피 천주교 성당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니 상관없었다.

성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초 봉헌 스탠드가 있었다. 성당에서는 남다르게 소중한 기도를 할 때 초를 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나도 그렇게 했다. 1달러 지폐 두 장을 바구니 안에 넣고, 초를 하나 꺼냈다. 새 초에 다른 사람이 자신들의 소망을 담아 켠 초의 불꽃을 옮겨 붙이고,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나를 제발 용서해달라고, 너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지금이라도 너를 위해 기도한다고, 네가 천국에서 잘 지내고 있기를 바란다고,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 * *

나는 지금도 가끔 칼렙을 위해 기도하고, 칼렙을 생각하면 큰 죄책감을 느낀다. 칼렙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게 된다. 내가 너 같이 숭고한 사람의 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 * *

나는 칼렙의 죽음을 겪었다. 미식축구도 그만두었다. 나는 몇 년 동안 서서히 그리고 많이 변했다. 더 이상 그 애와 같은 사람들을 비웃거나 경멸하지 않게 되었다. 부상을 겪으며 내 의지와 노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상황들에 좌절하며 내 무력함을 깨달았으니까. 그러면서 칼렙과 같은 사람들을 존중하게 되었다. 그들 또한 그들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좌절하고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마침내 오늘이 되었다. 나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자와 붙어먹으며 자신을 위험에 내돌리는 윤을 보며 칼렙을 떠올렸다. 윤을 내버려 두면, 언젠가 칼렙처럼 윤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윤을 내 곁에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 마음으로도 윤에게 끌리는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 윤과 친하게 지내고 싶고, 윤을 도와주고 싶고, 윤에게 키스하고 싶은 마음을 설명할 수는 없다. 나도 내 마음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겠다. 아우성치는 내 마음이 너무 시끄러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 * *

나도 모르는 새에 잠깐 잠들었다가 깼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윤은 거실 소파에 길게 누워 유튜브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고양이 동영상을 보던 윤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일어났어요?”

냉장고에서 500mL 생수병을 하나 꺼내 물을 마셨다. 병에 든 물을 반쯤 마시고 나서, 나는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윤에게 물었다.

“지금 몇 시예요?”

“아침 열한 시요.”

“오래 자진 않았네…. 아침 먹었어요?”

윤에게 질문하면서 싱크대 안을 얼핏 보았다. 빈 그릇이 싱크대 안에 들어 있었다. 윤에게서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대충요.”

“아직 살림살이 살 거 많지 않아요? 이따 월마트에 갈 거면 태워 줄게요.”

나는 말을 마치고 윤을 관찰했다. 목에 난 손자국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잇자국이나 키스 마크는 아직 선명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윤은 고양이 동영상을 보며 킥킥 웃다가 대답했다.

“살 거 생각해 볼게요.”

“그래요.”

커다란 파스타 그릇 가득 시리얼을 붓고 우유를 부었다. 기계적으로 시리얼을 퍼먹는데, 윤이 유튜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도 칼렙과 닮았네. 나는 멍하게 시리얼을 씹다가, 내가 한 생각에 너무 놀라 숟가락을 놓쳤다. 숟가락이 타일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가 요란했다.

가을 학기 0주차, 윤

도저히 알렉스의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헤테로라 가망은 없지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다니. 그래서 유튜브로 고양이를 보는 척하면서, 아침을 먹는 알렉스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방으로 들어가는 알렉스의 얼굴이 평소보다 꺼칠했다.

알렉스는 아침을 먹고 욕실로 들어갔다. 알렉스가 욕실로 들어가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어젯밤 내 꼴을 보고, 알렉스는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어쩌면 알렉스는 나와 같이 살기로 한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룸메이트를 고를 때에는 그 사람이 게이인지 아닌지를 꼭 체크하게 될지도 모른다. 알렉스의 룸메이트가 여자 친구와 동거하기 위해 나를 입주시키고 아파트를 떠난 것처럼, 내가 게이라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는 룸메이트를 구해놓고 집을 떠나버릴지도 모르고.

나는 알렉스의 방으로 가서, 거울 앞에서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는 알렉스에게 말을 걸었다.

“들어가도 되나요?”

“네.”

알렉스는 드라이기를 껐다. 알렉스에게 다가가니 남자 스킨 냄새가 났다. 나는 남자 스킨 냄새를 좋아해서 그 냄새에 가슴이 설렜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알렉스에게 말을 걸었다.

“진짜 월마트까지 태워 줄 수 있어요?”

“그럼요.”

“가요, 월마트.”

가지고 있는 돈이 많지 않아 필요한 것을 모두 살 수는 없겠지만 조리 기구, 식기와 컵은 사야 했다. 기본적인 양념도 사야 했다. 나는 알렉스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마저 말리고 있는 알렉스의 시선은 거울 속을 향하고 있었다. 알렉스가 드라이기를 끄고 보송하게 마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면서 물었다.

“뭐 살 건데요?”

“식기와 조리 기구요.”

“그래요. 가요.”

알렉스가 차 키를 집어 들면서 대답했다.

* * *

식기 세트, 냄비와 칼 세트는 있었다. 하지만 쇠젓가락이나 참기름 같은 것은 월마트에서 찾을 수 없었고, 삼겹살도 없었다. 나는 직원을 붙잡고 내가 필요한 것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휴대용 단말기로 내가 요청한 것들을 검색하던 월마트 직원은 난감해하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시안 제품은 많이 들여놓지 않아요.”

“네.”

“말씀하신 소스들은 아시안 마트나 아마존에서 사야 할 거예요.”

음식을 자주 해 먹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것들이 없으면 아쉬울 것 같아서 최대한 사려고 했다. 한국에서라면 집 앞 편의점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여기서는 대형 마트에서도 구하지 못한다. 내가 필요한 것을 제대로 구하기 어려운 곳에서 5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새삼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고, 내 미래에 대해 자신이 없어졌다.

* * *

우리는 계산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나와 차까지 걸었다. 한낮이 되자 낮 기온이 매우 뜨거워졌다. 푸르게 갠 8월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눈이 부셔서 선글라스 없이는 눈을 뜨고 걸어갈 수가 없을 정도여서 선글라스를 꼈다.

차까지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햇빛이 너무 따가웠다.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 역시 한국보다 지독했다. 트렁크에 산 것을 싣고, 알렉스가 차에 시동을 걸자 에어컨에서 사우나의 뜨거운 공기를 방불케 하는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차에 내장된 온도계를 보니 화씨 110도가 찍혀 있었다. 그 온도를 섭씨로 환산해 보니 43도 정도였다. 나는 실내 온도를 보고 기겁하며 재빨리 조수석 창문을 열었다.

“날씨가 어떻게 이럴 수 있죠? 화씨 110도? 한국의 여름도 덥지만 이 정도는 아니에요.”

“텍사스에서는 흔한 여름 날씨예요. 곧 익숙해질 거예요.”

알렉스는 웃으며 차를 운전했다. 알렉스의 말투가 어색해서, 나는 알렉스가 나를 껄끄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에게 미안해졌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알렉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따 저녁 먹고 펍에 갈래요?”

“펍이요?”

“이사 기념으로 한잔합시다. 내가 쏠게요.”

같이 맥주를 마시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내 말을 듣고, 운전하던 알렉스가 대꾸했다.

“그래요.”

* * *

집에 돌아와서 장 본 것을 정리하고, 더위에 지친 몸을 회복하기 위해 낮잠을 잠깐 잤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중국집에 가서 저녁을 사 먹고 가게를 나섰다.

우리는 펍을 향해 걸어갔다. 아파트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스포츠 펍이 있었다. 나와 알렉스는 입구에서 신분증을 보여 주고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텔레비전이 일곱 대나 달려 있었는데 텔레비전마다 중계하고 있는 종목이 달랐다. 야구, 미식축구, 영국 축구 프리미어 리그, 농구, 종합 격투기, 골프, 아이스하키. 나와 알렉스는 미식축구 경기가 나오는 텔레비전 근처에 앉았다. 내가 무엇을 마실 거냐고 묻자, 알렉스는 버드 라이트 한 병을 부탁했다.

나는 바텐더에게 버드 라이트 두 병과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바텐더가 카드를 보관하겠냐고 묻길래 카드를 돌려달라고 했다. 카드를 받고, 바텐더가 내미는 차가운 버드 라이트 두 병을 양손에 받아들고 자리에 가서 앉았다.

“바텐더가 카드를 보관하겠냐고 물어보던데요?”

내가 질문을 하면서 맥주를 내밀자, 알렉스는 맥주를 받아들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그래서 맡기고 왔어요?”

“아뇨. 근데 그런 건 왜 물어봤을까요?”

“펍에서는 카드를 맡겨 놓고 술을 마실 때도 있거든요. 그러다가 마지막에 한꺼번에 결제하는 거죠. 술을 시킬 때마다 여러 번 결제하려면 귀찮으니까요.”

“그렇구나. 감자튀김도 시켰는데 자리로 가져다준대요.”

“잘됐네요.”

알렉스는 맥주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의 키와 덩치가 크다 보니 그의 손에 들린 맥주병이 박카스 병처럼 작아 보였다. 나는 알렉스의 손과 맥주병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었다.

“뭐 재미있는 거 있어요?”

“아뇨.”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자, 알렉스는 더는 묻지 않았다. 알렉스는 텔레비전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침 댈러스 카우보이스와 뉴욕 자이언츠의 미식축구 경기 재방송이 한창이었다. 텔레비전을 보던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한국에서는 무슨 스포츠가 인기 있어요?”

“야구와 축구요.”

“텍사스 레인저스에 한국 선수가 있잖아요. 그 사람은 한국에서 인기 많아요?”

“그런 편이에요.”

“윤도 야구 좋아해요?”

“네. 집 앞에 야구장이 있어서 가끔 갔어요.”

“그렇구나.”

알렉스는 계속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알렉스의 표정이 아련했다. 문득 알렉스가 대학 시절까지 미식축구를 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랐다. 부상 때문에 운동을 그만두었다고 들었는데, 표정을 보니 미련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좋아하고 잘하던 것을 부상 때문에 그만두는 기분은 정말 더러울 것이다.

한참 맥주를 홀짝이며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고 있는데, 알렉스가 텔레비전 대신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한동안 미식축구 경기를 안 봤었거든요. 보면 마음이 안 좋아서.”

“네에.”

“경기를 보면서, 나라면 저 상황에 어떻게 했을까,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을 자꾸 하게 되니까 안 보게 되었어요. 경기가 답답할수록 더 그래요. 농담으로 내가 뛰어도 저거보다는 낫겠다는 말을 하잖아요? 저는 정말 그렇거든요. 실제로 저보다 못하던 애들이 NFL에서 잘하고 있기도 하고.”

알렉스는 낮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알렉스와 눈을 마주치며, 미국 사람들에게는 눈 맞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내 눈을 보다가, 알렉스는 맥주병을 손에 쥐며 말했다.

“근데 오늘은 덜하네요. 게임을 봐도 마음이 아프지 않아.”

알렉스가 피식 웃으며 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어느새 서버가 와서 우리 테이블에 갓 튀긴 감자튀김과 딥 소스를 놓고 갔다.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먹어보니, 갓 튀긴 감자튀김은 정말 맛있었다. 나는 감자튀김을 삼키고 대답했다.

“아픔을 잊는 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렇게 말해 주어 고마워요.”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알아요.”

나는 감자튀김을 쥔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알렉스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왠지 알렉스가 내 사연을 물어볼 것 같아서, 나는 말을 황급히 돌렸다.

“어젯밤에는 미안했어요.”

“뭐가요?”

“나 때문에 불쾌했죠? 미안해요.”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어요.”

알렉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가 정말 괜찮은 것인지, 빈말을 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 눈치를 살폈다. 알렉스가 감자튀김 하나를 케첩에 푹 찍어 먹으면서 말했다.

“윤.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미안할 일이 없는데 나에게 지레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정말 잘못을 했다면 사과하는 게 맞고, 오해가 있었다면 이야기해서 풀면 돼요. 근데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윤이 나에게 폐를 끼친 것도 아니고,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요. 나는 자다가 윤이 들어오는 소리에 깨서 거실에 나와 봤을 뿐이에요. 옷을 야하게 입고 나가서 걱정했거든요.”

알렉스는 조용히 말했다. 예상 밖의 단어가 들려와서 귀를 의심했다. 걱정? 내 귀가 이상한가? 말도 안 되는 단어가 들리네. 나는 그에게 웃으면서 되물었다.

“나를 걱정했어요?”

“여기는 텍사스예요. 그러고 다니다가 총 맞아요. 농담 아니에요.”

농담이 아니라고 말하는 알렉스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금방 사라졌다. 알렉스는 평소의 오만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가 맥주를 마시고 감자튀김을 먹었다. 알렉스가 한없이 연약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려운데, 방금 보았던 그 표정은 무엇이었을까?

알렉스의 얼굴을 살폈지만, 방금 보았던 섬약한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대신, 나는 알렉스의 오른쪽 광대뼈 위에 있는 흉터를 발견했다. 대여섯 바늘 정도 꿰맸을까? 찢어진 살을 봉합하여 아물린 흉터는 알렉스의 반듯한 얼굴에 야성을 불어넣고 있어서, 나는 그의 흉터 위에 키스하고 싶어졌다. 알렉스는 내가 그의 흉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경기하다가 다쳐서 생긴 거예요.”

* * *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렉스는 대형 로펌 파트너 변호사인 아버지와 교수 어머니가 있고, 고양이 세 마리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유명한 한국 대기업의 부사장인 아빠가 있고, 한국에서 가장 큰 로펌의 변호사인 누나와 자형이 있고, 엄마는 중학교 3학년 때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우리는 술에 약간 취한 채, 가게 한쪽에 놓여있는 탁구대를 발견하고 탁구를 쳤다. 15점 내기를 했는데, 내가 이겼다. 군 복무 시절 내기 탁구를 많이 친 덕분에 탁구는 자신 있었다. 15점 내기를 한 판 더 했는데 이번에도 내가 이겼다. 알렉스는 나에게 연달아 두 번이나 졌는데도 뭐가 그리 좋은지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리는 펍에서 나와 밤거리를 걸었다. 아파트에 가까워질수록 밤공기가 서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플립플랍을 벗어 신발장 위에 놓고 재빨리 부엌으로 갔고, 어둠 속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병을 꺼냈다. 술을 마셨더니 목이 많이 말랐다.

알렉스는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현관에 선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반바지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냈다. 그런데 그는 어째서인지 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내 사진은 왜 찍어요?”

내가 웃으면서 묻자, 알렉스는 나에게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사진을 보니, 노란 냉장고 불빛 속에 서서 물병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어둠과 인물의 대비를 두드러지게 표현한 렘브란트의 초상화처럼 찍혀 있었다.

* * *

알렉스는 개강을 열흘 앞두고 오스틴으로 떠났다. 그는 부모님과 여자 친구를 보러 가는 것이고, 일주일 뒤에 돌아오겠다고 했다. 알렉스가 가족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오랜만에 아버지와 누나, 자형을 떠올렸다. 그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를 걱정하고 있으려나? 그들이 걱정하든 말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다.

알렉스가 없는 동안, 나는 내 마음대로 남자들을 집으로 끌어들여서 놀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원나잇을 하니 너무 허무했고,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원나잇은 역시 내 성격에 안 맞았다.

게다가 내가 남자와 자고 들어온 날, 알렉스는 많이 놀랐으면서도 매우 어른스럽게 대응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여유 있고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니.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 유치한 인간이라 부끄러웠고, 당분간 몸을 사리기로 마음먹었다.

* * *

공대 대학원 오리엔테이션에 가니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정수빈 씨였다. 정수빈 씨는 그새 머리를 파란색으로 염색했다. 나를 발견한 정수빈 씨는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수료식 날 보고 처음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잘 지냈어요.]

오랜만에 한국어를 쓰는데도 말이 엉키지 않았다. 나는 수빈 씨와 친하지 않고, 할 말이 없어 인사만 하고 돌아섰다. 그때, 수빈 씨가 말을 걸었다.

[이사는 잘 하셨어요?]

[네.]

[저는 요새 집안 살림살이 사느라고 정신이 없어요. 살 게 너무 많은 거 있죠. 혹시 차 사셨어요?]

[아뇨. 아직.]

[저도 아직 안 샀는데 사야 할 거 같아요. 장 보러 다니기가 너무 불편해요. 우버를 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여태껏 장을 보러 다니는 게 불편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깨달았다. 내가 불편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월마트에 갈 때마다 알렉스가 태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알렉스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저는 룸메이트가 차를 태워줘서 다행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키 큰 남자분이요?]

[네.]

[부럽다. 제 친구 중에는 미국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이 없네요. 룸메랑 지낼 만하세요?]

[네.]

수빈 씨는 다행이에요, 라고 말을 덧붙이며 깔깔 웃었다. 나는 수빈 씨를 보며 웃었다. 붙임성이 좋기도 하고, 인상이 좋아서 한국 사람을 피하기로 했던 다짐이 자꾸 허물어지고 있었다. 수빈 씨가 웃으면서 물었다.

[이따가 오리엔테이션 끝나고 커피 한잔하실래요?]

[그러죠.]

나의 대답을 듣고, 수빈 씨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 * *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 우리는 스타벅스에 갔다. 스타벅스에서 한국 사람과 한국어로 이야기하다 보니, 이곳이 한국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동양인은 우리뿐이어서, 나는 이곳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수빈 씨는 자바 칩 프라푸치노를 시켰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잡담을 했다. 수빈 씨와는 이야기가 잘 통했다. 우리는 동갑이고 같은 야구팀을 응원했으며 공통의 친구가 있었다. 나는 목동 출신이고 왕십리에서 대학을 다녔고, 수빈 씨는 경기도 안산 출신이고 신촌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나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김동훈이 수빈 씨와 같은 과 동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놓고 친구가 되기로 했다.

[동훈이는 취직했나?]

[응. 경기가 안 좋아도 화공과라 취직이 잘 되더라. 동기 중에 대학원에 간 애들 빼고는 다들 취직한 거 같아.]

[너는 어쩌다가 대학원에 갔어?]

[학부 때, 방학 알바로 연구실 인턴을 하다가 눌러앉아서 석사를 하게 됐어. 박사면 몰라도 석사는 2년이니까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거든. 너는?]

수빈의 이야기는 흔한 대학원 진학 사례 중 하나였다. 내 친구 중에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대학원에 진학한 애들이 많았다. 나는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했다.

[나는 미국에 유학하러 가고 싶었거든. 근데 학부 마치고 바로 유학을 하려고 하니 자신이 없어서 석사를 한 거야.]

[처음부터 박사 생각이 있었구나? 난 석사 졸업하고 연구소에 취직했어. 근데 연구 책임자가 진짜 거지 같은 새끼였어. 맨날 여자는 이래서 안 된다는 소리나 하고, 회식하면 술이나 따르라고 하고. 내가 연구를 하려고 취직했지, 술을 따르려고 취직했나? 그 새끼가 연구를 잘했으면 참았을지도 모르는데 연구도 쥐뿔 못하잖아. 그래서 연구소를 때려치우고 유학을 나왔어. 그딴 새끼도 미국 박사를 따는데 내가 못 할 건 뭐야?]

수빈은 그때 생각을 하니 목이 타는 듯,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들어 있는 얼음을 꺼내 먹었다. 나는 수빈에게 내 아메리카노를 통째로 건넸다. 한국보다 커피값이 싸서 벤티 사이즈를 시켰더니 양이 너무 많았다. 나는 수빈을 위로하면서 말했다.

[가끔 성차별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 사람들이 나쁜 거야.]

[가끔이 아니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런다니까.]

수빈은 얼음을 와작와작 깨물어 먹었다. 저러다가는 이가 상할 텐데. 이가 상하면 학교에서 제공하는 보험으로 치과에 갈 수는 있겠지만, 다음 해에 보험료가 크게 오를 것이다. 나는 치과 보험료가 걱정되어 수빈을 말렸다.

[그러다가 이 상할라.]

[너 엄청 세심하다. 나도 이 상하는 거 알긴 아는데 버릇을 고치기가 쉽지 않네.]

[……나 별로 안 세심한데.]

[아니야, 너 세심해. 나보다 더 세심한 것 같아.]

수빈은 나를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수빈이 나를 칭찬하니 부끄러워졌고, 나는 말을 돌리기 위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혹시, 근처에 한인 마트 어디 있는지 알아?]

[응. 한인 교회 집사님이 하시는 슈퍼가 하나 있어. 근데 한국 거만 파는 건 아니고 중국, 일본 거도 다 팔아.]

[그래? 여기 한인 교회도 있어?]

[응, 나 거기 나가거든.]

[슈퍼 주소 좀 알려주라.]

수빈은 아이폰을 켜고 구글 맵을 켜서 상호를 확인했고, 나에게 상호를 불러주었다. 나는 가게 상호를 앱에 저장했다. 쉬는 날에 우버를 타고 가서 라면이나 한국 과자를 사야겠다. 머릿속으로 쇼핑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빈이 물었다.

[너도 교회 갈래?]

[나는 무신론자인데.]

[종교 없어도 교회 나오는 사람은 많아. 나도 종교는 없는데 심심해서 가는 거야.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수빈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에서 외로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여기 오게 되어 기쁘고 만족스럽고, 가족들에게서 해방되어 후련했으며,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종교가 없는데도 외롭다는 이유로 종교 생활을 한다는 것이 꺼림칙하기도 했고.

[고맙지만 괜찮아.]

[그래? 마음이 바뀌면 이야기해.]

수빈은 쾌활하게 말했다. 만약 수빈이 한국에서 인싸였다면 여기에서는 외로울 것이다. 여기에는 변변한 번화가도 근사한 맛집도 없다. 내가 아는 한, 이 근방에서 한국과 비슷한 대도시 풍경과 번화가를 보고 싶다면 댈러스-포트워스에 나가야 한다. 그러나 텍사스는 너무 넓고, 댈러스는 정말 멀다.

* * *

우버를 타고 한인 마트에 갔다. 먹을 것을 잔뜩 사고, 집에 가기 위해 다시 우버를 잡아탔다. 우버 기사는 날씨가 정말 더운데도 주황색 미식축구 유니폼을 껴입고 있었다. 그의 차에는 핸드폰 거치대가 없었고, 그는 한 손에 아이폰을 쥐고 아슬아슬하게 운전했다. 네비게이션을 보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고가 날 것만 같아서 너무 무서웠다.

라디오에서는 스포츠 뉴스가 흘러나왔다. 캐스터의 말이 너무 빠르고 텍사스 사투리도 섞여 있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뉴스를 듣고 흥분한 우버 기사가 도시 순환 고속도로 한복판을 달리다가 외쳤다.

“이제 개강하면 대학 미식축구 리그도 시작되죠! 나는 그것만 기다리고 있어요.”

“네.”

“나는 라운드 록18) 출신이라 롱혼스를 응원해요. 학생은 여기 학생이니까 호크스를 응원하죠?”

“저는 미식축구를 잘 몰라요. 롱혼스가 어느 팀이에요?”

“텍사스 주립대 오스틴 캠퍼스.”

“그 팀이 잘하나요?”

“‘도련님’이 있을 때는 내셔널 챔피언십에도 나갔었는데, ‘도련님’이 졸업한 이후로는 엉망이에요. 미식축구는 쿼터백 놀음인데 그런 돌머리들이 쿼터백이라니 망조가 들 수밖에요.”

운전기사는 흥분해서 침까지 튀겨가며 말했다. 침 몇 방울이 조수석에 앉아 있는 나에게 튀었다. 나는 인상을 쓰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도련님이요?”

“아, 예전 쿼터백이 상원의원 손주라 별명이 ‘도련님(master)’이거든요. 그리고 작전 수행이나 패스도 기가 막히게 잘한다는 뜻에서 ‘마스터’라고 부르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렇구나.”

“근데 ‘도련님’ 후임은 돌대가리예요. 그래서 경기 보고 있으면 속 터져요.”

“네에.”

미식축구 열혈 팬은 여전히 한 손으로 아이폰과 핸들을 동시에 잡고, 아이폰 화면을 곁눈질하며 운전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두 손으로 꽉 잡았다. 그가 깜빡이를 켜지 않고 차선을 바꿀 때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찌나 차선을 급하게 바꾸는지,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데도 몸이 옆으로 휙 쏠렸다.

“그러니 작년에는 롱혼스에서 아무도 프로 드래프트에 못 나갔어요. 한마디로 망한 거죠. 그래도 어쩌겠어요. 내 팀인데.”

“저도 야구를 봐서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역시 그렇죠?”

기사가 신이 나서 장광설을 쏟아냈다. 나는 우버 기사가 나를 내려 줄 때까지 안전벨트를 부여잡고, 그의 일방적인 수다에 드문드문 맞장구를 쳤다. 마침내 우버 기사가 아파트 입구에 내려 주었고, 나는 그제야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우버 기사는 나에게 별점 1점을 받았다. 저런 인간은 면허를 뺏고 앞으로 영원히 운전을 못 하게 해야 한다.

가을 학기 0주차, 알렉스

사만다가 오스틴 버그스트톰 공항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트렁크에 슈트 케이스를 싣고, 사만다의 벤츠 미니 안에 몸을 구겨 넣었다. 사만다는 천장 때문에 내가 몸을 숙이는 모습을 보고 깔깔 웃었다. 나는 피식 웃고, 사만다와 가볍게 키스하고 안전벨트를 맸다.

“점심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사만다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센터패시아의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낮 두 시를 조금 지났고,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밖을 나다닐 수 없는 시간대가 되었다.

우리는 점심으로 파스타와 샌드위치를 먹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후식을 먹었다. 사만다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말했다.

“내일 시간 비워 놨어.”

“그래.”

“우리 어디 갈까?”

“근교에 자전거 타러 갈래?”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그냥 집에서 놀까.”

사만다는 킥킥 웃었다. 사만다의 본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집에서 노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사만다를 따라 웃다가 물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아무 데도 안 가도 되겠어?”

“그러니까 너와 있는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야지.”

사만다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키가 조그마한 사만다가 내 머리를 만지기 쉽게 머리를 숙였다. 사만다가 나에게 물었다.

“오늘은 본가에 갈 거지?”

“응.”

사만다는 내 대답을 듣고,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나는 머리카락을 만지던 사만다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을 관찰했다. 그녀의 손등에는 주근깨가 가득 돋아 있었고, 손가락은 작고 통통했다. 그녀의 손을 보니 윤의 손이 떠올랐다. 여자인 사만다보다 남자인 윤의 손이 훨씬 고왔다. 그의 손가락은 길고 가느다랗고, 짧게 깎은 손톱이 예쁘게 생겼다.

“왜?”

“아니, 그냥.”

커다란 미식축구공을 한 손에 잡을 수 있는 내 손에 비하면 사만다의 손은 아기처럼 작았다. 그녀의 손은 작고 아담하고, 사람을 살리는 손답게 부드러운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데도 어째서인지 자꾸 윤 생각이 났지만, 나는 윤 대신 사만다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 * *

사만다는 나를 부모님과의 약속 장소까지 태워다 주었다. 나는 사만다와 작별 인사를 하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미슐랭 가이드에서 높은 별점을 받은 고급 레스토랑이고, 부모님이 가장 즐겨 찾는 레스토랑이었다. 당연히 지배인인 댄은 내 얼굴을 알고 있었고, 나를 보자마자 아는 체했다.

“알렉스, 오랜만이에요.”

“반가워요, 댄. 엄마는요?”

“줄리아는 벌써 도착했죠. 자리까지 데려다줄게요.”

댄은 앞장서서 안쪽에 있는 좌석까지 걸어갔다. 발코니가 열려 있어 콜로라도강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이고, 이 레스토랑에서 가장 좋은 자리였다. 엄마는 자리에 앉아 안경을 쓰고 아이패드로 뭔가를 읽고 있었다. 엄마가 읽고 있는 것은 이번에 투고하는 논문이겠지. 나는 자리에 앉으며 엄마를 불렀다.

“엄마!”

“알렉스, 우리 아들.”

내 체구는 아빠를 닮았지만, 얼굴은 엄마를 빼닮았다. 곱슬곱슬한 금발과 푸른 눈을 물려준 것도 엄마였다. 엄마는 아이패드를 내려놓고 내 손을 잡았다.

“얼굴이 좋아졌네. 혼자 살게 돼서 걱정했는데.”

“엄마, 내가 살림 잘하는 거 알잖아요.”

“알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지. 아빠도 거의 다 왔대.”

“좋네요. 아빠 오면 주문할 거예요?”

“주문은 벌써 했어. 그 동네는 어떠니?”

“괜찮아요. 조용하고 한적해요.”

“네가 사는 아파트는 어때?”

“학생들이 사는 전형적인 아파트예요. 지은 지 얼마 안 돼서 깨끗해요.”

“룸메이트는 어때? 인도 애라고 하지 않았나?”

“그 친구는 이사 나가고 한국 친구가 들어왔어요. 컴공 박사 과정 학생이에요.”

“그래? 그 친구는 어때?”

엄마는 아무 생각 없이 질문했지만, 나는 엄마의 질문에 대답하기 난감했다.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나는 대답 대신 엄마에게 사진을 보여 주기로 했다.

“사진 보실래요?”

나는 아이폰을 켜고 윤의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 주었다. 어둠 속에서 찍은 인물과 사물의 윤곽선은 흐릿했지만, 윤의 인상과 이목구비를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사진을 본 엄마가 감탄하며 말했다.

“잘생겼다! 박사 학생이라더니 고등학생처럼 보이네. 역시 동양인들은 동안이야.”

엄마는 아빠가 좋은 사람이기도 하지만, 잘생겨서 결혼했다고 말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약했다. 엄마는 윤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는지 사진을 확대해서 살펴보기까지 했다.

“누가 동안인데?”

“여보!”

“아빠.”

아빠는 웃으면서 엄마의 옆자리에 앉았다. 엄마가 내 아이폰을 아빠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알렉스 룸메이트래. 잘생겼지?”

“잘생겼네.”

아빠는 엄마의 반응이 익숙한 듯 건성으로 대응했다. 나는 아빠를 보았다. 아빠는 포마드를 발라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고 스리피스 슈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아빠가 자리에 앉자마자 댄이 우리 테이블 곁에 와서 말했다.

“알렉산더, 오랜만입니다.”

“댄. 늘 그렇듯 멋지시네요. 잘 지내시죠?”

“덕분에요. 알렉산더도 잘 지내셨죠?”

“저도 잘 지냈습니다. 저희가 요새 바빠서 한동안 못 왔네요. 한참 벼르다가 왔으니 디저트까지 완벽하게 즐겨보겠습니다.”

“하하. 오랜만에 오셨으니 맛있게 들고 가세요. 바로 전채 요리부터 올려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아빠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댄이 가고 나서, 아빠는 나에게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잘 지냈다고 대답했다. 아빠는 내 어깨를 큰 손으로 툭툭 치면서 중얼거렸다.

“네가 갓난아기였던 게 어제 같은데 독립을 하다니, 우리 아들이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아빠는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아빠의 목소리가 괜히 슬프게 들렸다.

* * *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와인 가게에 들러 와인을 한 병 사고 치즈도 샀다. 오스틴 시내에서 교외에 있는 우리 집까지 가려면 차로 15분 정도 걸렸다. 나는 아빠의 은색 메르세데스 조수석에 앉았고 엄마는 뒷좌석에 앉았다. 아빠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선곡했고, 우리는 음악이 흐르는 차 안에서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빠가 운전하다 말고 나에게 불쑥 물었다.

“알렉스, 정말 재수할 생각이니?”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 학교는 좋은 학교야. 거기서 열심히 해서 성적을 잘 받으면 좋은 로펌에 가는 건 어렵지 않지. 물론 네가 뜻이 있다면 검찰청에 들어가도 괜찮고.”

나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스탠포드 로스쿨 출신이었고, 스탠포드에 비하면 내가 다닐 학교는 한참 격이 떨어지는 학교였다. 나는 아빠의 학력을 의식하다가 말끝을 흐리면서 대답했다.

“……아직 졸업 후의 진로까지는 생각 안 해봤어요.”

“그래, 천천히 생각해 봐. 모르는 거 있으면 아빠한테 물어보고.”

내 진로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아직도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나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빠처럼 로펌에 가야 할지, 아니면 공직에 나가야 할지. 내가 정치에는 뜻이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평생 운동만 하다가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촌들이나 삼촌, 고모들만큼 법조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공부하다 보면 분명 내 진로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3년 동안 내 진로를 진지하게 탐색해 볼 생각이었다.

* * *

엄마 아빠와 와인을 나눠 마시고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두 분은 출근 준비를 한다고 부산했다. 아빠가 현관에서 베스트 위에 재킷을 입고 구둣주걱으로 구두를 펴 신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아침 있으니까 먹어.”

“혹시 발렌티나 아줌마가 만든 거예요?”

발렌티나 아줌마가 만든 아침이라니.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발렌티나 아줌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집 살림을 도맡아온 히스패닉계 가정부였다.

아줌마는 원래 그녀의 어머니인 팔로마 할머니와 함께 할아버지의 저택에서 일했다. 부모님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오스틴에 정착하면서, 아줌마와 할머니는 부모님의 살림까지 맡아 주었고, 내가 태어나자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 대신 아줌마가 나를 돌보았다.

아줌마의 살림 솜씨는 굉장하다. 엄마와 아빠는 아줌마의 요리를 좋아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나에게 아줌마의 요리는 너무 짜고 자극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요리책을 사서 요리를 공부하고 나만의 주방 기구를 사서 요리를 연습했다. 내 까다로운 입맛을 떠올린 엄마가 말했다.

“여보, 알렉스는 발렌티나 씨 요리 안 좋아하잖아.”

“맞다. 깜빡했네.”

“아침은 제가 알아서 해 먹을게요. 그리고 저는 오늘 사만다 집에 가서 안 들어올 거예요.”

“그래. 잘 놀고 와.”

“시간 있으면 할아버지 댁도 들르고.”

“생각해 볼게요.”

엄마와 아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부모님이 출근하고, 고양이 밥을 챙겼다. 고양이들은 나를 오랜만에 보고 반가워했다. 내가 오믈렛을 만들고 빵과 소시지를 굽는 동안에도 고양이들은 내 발치를 오갔다. 소시지를 굽고 있는데, 노르웨이 숲 고양이 안나가 전기 인덕션 위로 뛰어올랐다. 나는 기겁하며 고양이를 안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안 돼. 내려가.”

안나는 저를 쓰다듬으라고 냥냥 울어댔지만, 나는 안나를 외면했다. 아는 체하면 안나가 좋아서 날뛰다가 큰 사고를 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요리를 마치고 안나를 안고 아침을 먹었다. 내 품에서 안나가 고롱거렸다. 고양이와 함께 하는 맛있는 아침 식사. 참으로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 * *

나와 사만다는 그녀의 아파트에 앉아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었다. 교외로 놀러 나가기에는 날씨가 너무 더워서 집에 있기로 했는데, 막상 집에 앉아 있으니 할 일이 없었다. 어제 카페에서 모든 것을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사만다는 나를 두고 아이폰만 만졌다. 사만다가 메신저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메신저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댈러스나 휴스턴에 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낮이고 그들 모두는 회사에 있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윤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오리엔테이션 갔다 왔어요?

윤은 아이폰을 보고 있었는지 금방 답을 보냈다.

-오리엔테이션은 어제였어요. 지금은 한국 친구와 한인 마트에 왔어요.

-한국 친구?

-네. 전에 봤던 파란 머리 여자애요.

-나는 가만히 있어요. 심심해요. 여자 친구가 안 놀아줘요.

-여자 친구에게 놀아달라고 해요.

윤의 메시지는 거기서 뚝 끊겼다. 나는 사만다를 힐끗 보고 생각에 잠겼다. 사만다는 여전히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다. 우리가 원래 이렇게 서먹했었나. 반년 정도 만났고 데이트도 자주 했던 것 같은데, 아직 서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섹스했다. 사만다는 좋아했지만 나는 별로였다. 하는 내내 윤의 목덜미와 맨 등, 가슴팍과 피어싱이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나는 윤과 어떤 남자의 섹스를 상상하다가, 내가 그 남자가 되었다고 상상하며 사만다와 섹스했다. 그러나 내 몸에 닿는 통통한 몸은 너무 폭신폭신했고, 말캉한 감촉이 집중력을 자꾸 흩뜨려서 곤란했다.

괴리감을 견디며 간신히 두 번째로 사정했을 때, 사만다가 더우니 그만하자고 했다. 섹스하는 내내 딴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얼마 뒤, 사만다는 나를 내버려 두고 잠들었다. 사만다가 잠들자 숨소리가 달라졌고, 나는 잠든 그녀를 옆에 두고 몰려오는 자괴감에 천장만 보았다.

* * *

어젯밤 일 때문에 사만다를 보기 민망해서 날이 밝자마자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다. 빈집에서 늦잠을 조금 자고,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한 동네 친구인 제이슨을 찾아가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 제이슨이 회사로 들어가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우버를 타고 집에 돌아왔고, 윤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뭐 해요?

-친구와 점심 먹으러 나왔어요.

-한국 여자분?

-네.

여자라는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윤은 남자에게만 끌리는 거 아니었나? 여자에게도 끌리는지는 몰랐는데. 나는 기분이 나빠졌고, 윤에게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친구는 이름이 뭐예요?

-수빈.

-그 친구는 전공이 뭐예요?

-화학 공학이요.

나는 불편한 기분을 느끼며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윤은 금방 답을 보내 왔다.

-점심은 뭐 먹을 거예요?

-치킨버거요. 근데 학생 회관 앞에 이상한 사람이 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창조론자인 것 같은데, 진화론이 거짓이고 신이 지구와 인간을 7일 만에 창조한 것이 진실이라고 하네요.

-윤도 창조론을 믿어요?

-아뇨. 나는 무신론자이고 과학을 믿어요. 알렉스는 창조론을 믿어요?

-나는 침례교19) 신자이기는 한데, 창조론은 믿지 않아요. 무시해요. 어지간한 대학생들은 창조론을 믿지 않을 텐데 왜 학교에 와서 설교하는지 모르겠네요.

-서울에서도 지하철 1호선을 타면 창조론자들을 가끔 볼 수 있어요. 대부분은 개신교 광신도들이에요.

윤의 답장을 읽고 웃음이 났다. 별것 아닌 말인데, 그 말이 참 재미있었다. 개신교 광신도. 나는 신의 존재를 믿고 진화론도 믿는다. 하지만 텍사스에는 광신도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많았다. 종교가 삶을 지배하는 사람들. 그들은 과학을 사탄이라 규정하고 배척한다. 독실한 침례교도인 동시에 뛰어난 생명과학자인 어머니를 둔 나로서는 종교와 과학을 양립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을 학기 0주차, 윤

학교에서 메일이 왔다. 내가 어느 교수님의 조교로 배정되었다는 메일이었다. 메일에 첨부되어 있는 그 교수님의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사진을 보니, 밍 교수는 40대 초반의 중국계 여자 부교수였다. 나는 그분에게 내가 조교로 배정된 학생이고, 교수님을 찾아뵙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냈다. 그러자 그분은 아무 때나 연구실로 오면 된다고 간략하게 회신했다.

그날 오후, 밍 교수님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날렵한 단발머리에 각진 안경을 쓴 밍 교수님은 모니터를 보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들어와 앉아요.”

“처음 뵙겠습니다. 주윤입니다.”

밍 교수님은 햇빛을 거의 보지 않고 지내시는지 얼굴이 창백했다. 중국어 억양이 강하게 남아 있는 영어를 쓰셨지만, 교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데에 지장은 없었다. 교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바닥에 있는 미니 냉장고에서 코카콜라 캔 하나를 꺼냈다.

“덥죠? 이거 마셔요. 그리고 먼저 연락해 줘서 고마워요. 저도 어제 학장님께 메일을 받고 윤이 제 조교로 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윤은 조교 일을 해 봤나요?”

교수님은 나에게 콜라 캔을 건넸다. 나는 캔을 따고,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네, 석사 때 해 봤습니다.”

“그러면 금방 잘할 수 있겠네요. 자세한 것은 개강하면 이야기하겠지만, 윤이 저를 위해 해 줄 일은 과제 채점, 시험 채점, 오피스 아워 때 학부 학생들의 질의응답을 받아 주는 것이에요. 제 연구를 도울 수도 있고요.”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아요. 윤은 한국 사람인가요?”

“네.”

“나는 중국 사람이에요.”

교수님이 굳이 중국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아도, 성함과 영어 억양에서 중국 출신이라는 티가 났다. 교수님은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고, 나는 두 손으로 차가운 콜라 캔을 살며시 쥐고 굴리면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교수님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혹시 어려운 일이 있거나, 궁금한 게 생기면 편하게 물어봐요. 여기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우리가 대체 왜 그런 것을 어려워하는지, 뭘 궁금해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게 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같은 유교 문화권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죠.”

교수님은 웃지 않을 때는 무뚝뚝해 보였지만, 웃을 때는 인상이 매우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교수님이 우리 엄마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고, 책상 위에 있는 액자를 슬쩍 보았다. 교수님이 남편과 아이 한 명을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교수님이 사진과 나를 번갈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이에요. 이제 세 살.”

교수님은 자세한 것은 앞으로 논의하자고 말씀하시고 나를 배웅했다. 나는 밍 교수님과 면담을 끝내고 섭씨 43도의 더위를 견디며 집까지 걸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땀을 줄줄 흘렸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물을 마시고 씻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알렉스가 보였다. 쟤가 왜 벌써 왔지? 개강하기 전에 온다더니? 알렉스는 소파 위에 길게 누워 아이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고, 나는 알렉스에게 말을 걸었다.

“일주일 뒤에 온다면서요?”

“지루해서 그냥 왔어요. 엄마 아빠는 출근하고, 친구들도 출근하고.”

“여자 친구 있잖아요.”

“그러게요.”

알렉스는 게임을 하다 말고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나는 그게 의아해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소파에서 일어나 앉더니 변명하는 것처럼 덧붙였다.

“월요일에 개강인데, 일요일에 와서 다음 날에 바로 학교 가면 힘들 것 같아서요.”

가을 학기 0주차, 알렉스

“월요일에 개강인데, 일요일에 와서 다음 날에 바로 학교 가면 힘들 것 같아서요.”

윤은 오늘도 동그란 금속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윤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나는 물을 마시고 땀을 닦는 윤의 옆얼굴을 보다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오스틴에 있어 봤자 할 일이 없었다. 사만다는 병원에 출근했고 부모님도 출근했다. 친구들은 취업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부모님은 시간이 있으면 할아버지 댁에 가 보라고 했지만, 할아버지 댁에는 가기 싫었다. 여기에 와도 심심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윤을 보니 반가웠다.

윤을 보니 반가워서 내가 저녁을 하기로 했다. 반갑지 않았더라도 저녁은 내가 했을 것이었다. 찬장을 열어보니 인스턴트 라면이 그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윤을 관찰해 보니, 윤은 요리를 정말 못했다. 그는 내가 내버려 두면 매일 라면만 먹을 것이다. 인스턴트 라면이 느끼하고 칼로리만 높은 미국 요리만큼 건강에 나쁘지는 않겠지. 하지만 아무리 위장이 튼튼하고 입맛이 둔감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매일 인스턴트 라면만 먹고 살 수는 없었다.

프리타타를 만들려고 냉장고에서 채소들을 꺼내고 있는데, 윤이 부엌으로 왔다. 그가 재료를 보다가 나에게 물었다.

“뭐 만들 거예요?”

“프리타타요.”

“내가 도울 만한 일이 있을까요? 맨날 얻어먹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요.”

“그러면 채소를 씻고 같이 손질할까요?”

내가 필러로 감자 껍질을 깎는 동안, 윤은 양송이버섯을 씻어 껍질을 벗겼다. 요리해 본 적이 없는지 손놀림이 심각할 정도로 서툴렀다. 버섯은 총 다섯 개였는데, 내가 감자 껍질을 다 깎을 동안 윤은 버섯 하나를 겨우 깠다. 윤의 속도가 너무 느려서 나도 양송이버섯을 까기 시작했다. 윤이 반 개를 까는 동안, 나는 남은 버섯을 다 깠다. 윤은 나를 보고 감탄하며 말했다.

“손이 엄청 빠르네요. 손이 커서 그런가.”

“칼질은 할 줄 알아요?”

“아뇨.”

윤은 부끄러운지 볼을 붉혔다. 칼질을 못 하는 사람에게 칼질을 시켰다가 손을 베이면 큰일이었다. 그러면 쉬운 일을 시켜야겠다. 나는 필요한 재료와 손질 과정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생각해 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달걀은 깰 줄 알아요?”

“네.”

“그럼 달걀 깨서 풀어 줘요.”

“가르쳐주면 나도 잘할 수 있어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윤을 가르쳐주면서 하다가는 오늘 안에 저녁 못 먹어요.”

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고, 나는 윤의 반응에 당황했다. 이게 시무룩할 일인가? 윤을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윤이 요리를 배우고 싶다면 가르쳐 줄 마음이 있지만 오늘은 그날이 아닐 뿐이었다. 내가 난감해서 윤을 보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그건 그렇네요.”

“오늘은 달걀을 풀어주세요. 칼질은 다음에 시간 많을 때 알려줄게요.”

내 부탁을 듣고, 윤은 달걀 네 개를 까서 풀었다. 내가 양파 껍질을 까고 양파를 썰고 있는데, 윤은 계속 내 곁에서 얼쩡거렸다. 양파 때문에 눈이 매워서 눈물이 나는데, 윤이 나에게 물었다.

“눈물 닦아 줘도 돼요?”

“네, 부탁합니다.”

그러자 윤은 티슈를 하나 뽑아와서 눈물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고마워요.”

“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윤은 티슈를 휴지통에 버리고 내 곁으로 왔다. 그는 내가 채소를 써는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곁에 서 있는 윤을 의식하면서 감자, 브로콜리, 베이컨을 썰다가 칼에 손을 베일 뻔했다.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야.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야채를 마저 썰었다.

* * *

완성한 프리타타는 정말 맛있었고, 우리는 냉장고에서 맥주까지 꺼냈다. 프리타타를 먹으면서 윤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맨날 이렇게 얻어먹기만 해서 미안한데요.”

윤이 프리타타를 먹다 말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면 다음에는 윤이 한국 요리를 해 주세요. 라면 말고 맛있는 거로.”

“노력해 볼게요.”

“좋아요. 기대하죠.”

내 말을 듣고, 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거 위험하다. 윤이 웃으면 나도 웃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 네 혈관 속에서 호르몬이 날뛰고 있어. 화학작용은 이미 시작되었지. 사이렌의 의미는 분명했다. 시간이 지나면 혼란이 가라앉을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나의 혼란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 * *

그래서 나는 학교 상담 센터에 갔다. 내 상태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했다. 일시적인 상태인지, 아니면 이런 상태가 계속될 것인지. 상담 센터 접수창구에 서니, 창구에는 여성 리셉셔니스트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보았다. 그녀의 이름은 노미였다. 그녀는 비숍이라는 영국계 성씨를 갖고 있지만, 외모만 보면 히스패닉 계인 것 같았다.

상담 리셉셔니스트는 나를 보고, 여기에 왜 왔냐고 물었다. 나는 심리 상태가 불안하다고만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듣고, 노미는 차트를 만들기 위해 이름과 학번을 물었다. 내가 이름을 말하자마자,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질문했다.

“성이 테신이에요?”

나는 그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텍사스에 테신이라는 성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 이런 일에는 익숙하다. 알렉산더 테신 주니어와 알렉산더 테신 4세. 전자가 할아버지고 후자가 나였다. 간단한 산수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4 빼기 2도 계산할 수 있고, 우리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의 손자임을 알아차린 리셉셔니스트가 반색하며 나에게 물었다.

“오늘 어디가 불편해서-”

“프라이버시예요.”

나는 작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다가 천천히, 다시 한번 물었다.

“어디가 불편하거나 힘든가요? 분노라든가, 우울이라든가, 불안함이라든가.”

“그런 종류는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요? 나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상담 선생님을 배정해 주려고 물어보는 거예요. 선생님들의 전문 분야에 맞춰서 배정을 해 주려고요.”

“굳이 말하자면……. 연애요.”

대답을 하는데 한숨이 자꾸만 나왔다. 내 대답을 듣고, 리셉셔니스트는 말문이 막힌 채, 속눈썹을 길게 연장한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리다가 말했다.

“……네, 선생님을 배정해 드릴게요.”

* * *

상담 선생님은 젊은 남자분이었고, 성함은 잭이었다. 잭 선생님은 내 이름을 알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상담 선생님은 상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의 경력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임상 심리 박사 학위가 있고, 상담 경력은 5년.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당신은 비밀을 지킬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잭 선생님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알렉산더.”

“알렉스라고 불러 주세요.”

잭 선생님의 말에 대답하고 나서, 나는 눈동자를 불안하게 이리저리 굴렸다. 내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주시하던 상담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다.

“그래요. 알렉스, 오늘은 무엇 때문에 왔나요? 차트에는 연애 문제 때문에 왔다고 되어 있네요.”

내 증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선생님에게 가장 중요한 사항부터 물었다.

“선생님, 비밀 지키시는 거죠?”

내 말을 듣자마자 잭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죠. 내담자에 대한 기밀 엄수는 우리의 직업윤리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알렉스가 중범죄에 연루되고, 제가 경찰 수사에 협조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발설하지 않아요. 그것도 영장 없이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비밀을 꼭 지켜 주셔야 해요.”

“네. 그럼요. 그러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가, 저에게 여자 친구가 있는데요.”

“네.”

“저는 여자 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여자 친구를 봐도 별로 설레지 않았어요. 전에는 여자 친구와 결혼 이야기도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는데…. 근데 요새 그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자꾸 그 사람이 생각나요. 하지만 그 사람은…. 여자가 아니거든요. 저는 여태 여자 친구만 사귀었어요. 그래서 저도 저를 모르겠어요. 제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고, 나는 횡설수설 말하고 있었다. 잭 선생님은 내 말을 용케 알아듣고 나에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남자라는 거죠?”

이 질문은 형식적인 질문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선생님의 질문은 추궁처럼 느껴졌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라는 거지? 너는 남자를 좋아한다는 거지? 상담 선생님의 의도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답으로 내몰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과연 나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눈을 여러 번 감았다 떴다. 눈앞이 흔들리고 있었다. 세계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세계는 그대로이고, 흔들리고 있는 것은 나다.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다가, 나는 머리에 떠오른 말을 바로 내뱉었다.

“네. 저는 남자에게 끌리고 있어요.”

가을 학기 1주차, 윤

고급 운영 체제 수업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일상적인 대화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지만, 수업에서 고차원적인 개념을 조리 있게 영어로 설명하는 것은 어려웠다. 교수님께 쉘 프로그래밍에 대해 모르는 개념이 있어 질문하려고 했지만, 말이 엉망으로 꼬이기 시작했고, 나는 말을 더듬는 스스로가 너무 바보 같아서 화가 났다.

교수님은 다행히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원하는 바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부족해도, 교수님의 말을 100%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의기소침해하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중국인 남학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수업 시작 전, 자신이 2년 차 박사 학생이라고 소개했던 사람이었다. 괜찮아요. 그 학생이 웃으면서 나를 위로했다.

“영어를 아무리 잘한다 해도 일상 회화와 학술용 영어는 다르죠. 한 학기에서 1년 정도는 적응 기간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물론 외국인 여자 친구를 사귀면 적응 기간이 상당히 단축되겠지만.”

“……바보처럼 보일까 봐 짜증 나요.”

“그렇지 않아요. 금방 나아질 거예요.”

하하하. 그 학생은 신나게 웃어댔고, 나는 짜증이 치솟았다. 한국어로는 빠르게 말할 수 있는데 영어로 말하는 것은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빨리 영어로 수업하고 토론하는 것에 적응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 생각을 조리 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나는 이를 앙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 * *

수업이 끝나고 공용 연구실에 앉아 배운 것을 복습하고 다른 수업 교수님이 예습으로 내준 논문을 읽었다. 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알렉스가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집에서 음식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저녁도 먹지 않은 것 같았다. 미식가이며 대식가인 알렉스가 저녁을 먹지 않다니. 알렉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매고 있던 백팩을 벗어 식탁 의자 위에 내려놓았고, 그에게 물었다.

“어디 아파요?”

“아뇨.”

알렉스는 평소에 나와 눈을 잘 마주치는 편이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자신감이 없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고 알려 준 것이 알렉스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영어를 배웠으면서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나는 알렉스의 그 말을 귀담아들었는데, 정작 그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이 내 시선을 피했다.

“무슨 일 있어요?”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요.”

알렉스는 여전히 나를 보지 않았고, 제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그래서 알렉스에게 말을 걸려다가 그만두었다. 오늘은 기분이 나쁜 것 같으니 내버려 둬야겠다.

나는 라면을 끓이기 위해 물을 안쳤다. 라면에 계란을 풀고, 한인 마트에서 사 온 만두를 넣고 끓여 김치와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가을 학기 1주차, 알렉스

윤은 거실에서 유튜브 비디오를 보면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냄새를 맡아 보니 오늘의 저녁 메뉴는 인스턴트 라면이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윤이 저녁을 어떻게 먹고 있을지 눈앞에 그려졌다. 라면을 한 젓가락 먹고 비디오를 보고, 한 젓가락을 먹고. 그 과정을 반복하며 내가 한 끼에 먹는 양의 반 정도를 아주 느리게 먹을 것이다.

책상 앞에 앉아, 아까 상담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남자에게 끌리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에요. 상담 선생님은 자상하게 말했고, 나는 그에게 따지듯이 되물었다.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나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그러니까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시간을 두고 지켜보도록 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요?’

‘…….’

‘이 자리가 불편해요?’

‘아뇨.’

‘혹시 남자를 좋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

‘알렉스가 남자를 좋아해도 괜찮아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아주 아름다운 일이에요. 게다가 우리나라는 동성 결혼이 합법이에요. 그 말은, 사회 구성원들이 동성애가 아주 정상적이고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합의했다는 이야기에요.’

‘……그건 저도 알아요.’

‘그런데 왜 안 된다고 생각하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너무 갑작스럽고…… 제 마음을 모르겠어요.’

‘그러면 우선 알렉스가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그 사람에 대해 편하게 말해봐요. 그 사람을 생각하거나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이야기할 수 있으면 더 좋고요.’

‘……그 친구는 제 룸메이트예요. 한국에서 온 공학도고, 운동을 잘하고, 성실하고 선량해요. 잘생겼고 군 복무도 잘 마쳤고…. 여러모로 장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알렉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알렉스의 룸메이트는 정말 멋진 사람이네요. 알렉스가 룸메이트에게 호감을 느낄 만해요.’

‘……만약에 제가 그를 좋아하는 것이 맞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알렉스가 무엇을 겁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아요. 아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

‘일단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편한 마음으로 지켜봅시다.’

‘……네.’

* * *

민사법 첫 시간에 교수님이 출석을 불렀다. 민사법 교수님은 나이가 지긋한 흑인 남자분이고, 멋진 콧수염과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교수님은 A로 시작하는 성을 가진 학생의 이름부터 차례대로 불렀다. 내 앞에 이름이 불린 사람은 시드니 탠이라는 이름의 중국계 여학생이었고, 나는 내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

“알렉산더 테신 4세.”

“네. 알렉스라고 불러 주세요.”

“혹시 테신 상원의원과 무슨 사이입니까?”

“저희 친할아버지세요.”

나는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러자 계단형 교실 안에 앉아 있던 모든 학생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헌법 시간에 나를 본 적이 있어서, 내가 이 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여기서 받는 주목은 여태까지 받아 왔던 주목과는 느낌이 약간 달랐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에는 할아버지의 손자라서 받는 시선과 내가 미식축구 스타라서 받는 시선이 공존했다. 하지만 이곳의 학생들과 교수들은 나를 ‘상원의원의 손자’로만 보고 있었다.

앞날이 대충 예상되었다. 집안 내력이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는 삶은 편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 피곤했다. 이제 나와 친하게 지내면서 할아버지나 아빠와 연줄을 만들고 싶어 하는 기회주의자들이 무수히 달라붙겠지. 나는 사람들이 나를 아빠나 할아버지와 엮는 것이 싫었다. 아빠와 엮는 것은 그나마 괜찮은데, 할아버지와 엮는 것은 부담스럽고 싫었다. 나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민사법 수업 역시 헌법 수업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답식으로 이루어졌다. 헌법 수업이 그랬듯 판례를 꼼꼼히 읽어가지 않으면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 뻔했다. 판례의 핵심 쟁점과 관련 법, 결론, 그리고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분석 단계까지 미리 생각해가지 않으면 수업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교수님이 무작위로 학생을 지정해서 질문을 던지고 수업을 주도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나마 우리 집안의 많은 사람이 이 길을 무사히 완주했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들이 해냈으니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 *

수업이 끝나고 짐을 싸서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나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려고 했다. 나는 웃으며 차례차례 그들의 이름과 번호를 저장했다. 열다섯 명 중 열 번째 학생의 번호를 저장했을 때, 누군가가 물었다.

“이번 주말에 개강 파티 할 건데, 올래?”

“미안. 나는 파티를 좋아하지 않아.”

정말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나는 파티를 좋아하지 않았고 친구가 많지도 않았다. 평생 파티에 가 본 횟수를 손에 꼽을 정도였다. 술을 마시고 노는 분위기는 좋아하지만, 파티에 가면 사람이 너무 많이 붙어서 피곤했고,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하려면 파티에 쓸 시간이 없기도 했다.

“오면 재미있을 텐데.”

“고마워. 그런데 나는 정말 파티를 좋아하지 않아.”

나는 예의 바르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몇 번이나 거절하자, 애들은 나에게 파티에 오라고 더는 권하지 않았다. 내가 재미없는 사람인 것을 비로소 인지하게 되었겠지. 그런 나에게 실망한 애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가을 학기 3주차, 윤

이 동네의 날씨는 정말 신기했다. 6일 동안 맑은 날씨가 지속되고, 하루는 하늘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구름이 자욱하게 끼는 오버캐스트 날씨가 반복되었다. 한국에 비하면 강수량이 현저히 적은데도 도로에 배수구가 없어서 비가 내리는 날이면 도로가 완전히 침수되었다.

이곳에 오고 처음으로 비가 내렸던 날, 나는 바지와 신발을 몽땅 버렸다. 그래서 쫄딱 젖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마존에서 장화를 주문했다. 차가 있으면 모를까, 빗속을 걸어 다니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했다.

장화가 아직 배송되지 않았는데, 비가 또 왔다. 비가 오면 매일 섭씨 40도 가까이 오르던 기온이 뚝 떨어져서 긴소매를 입어야 했다. 날씨가 추워지니 집에 가서 우동을 끓여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가 많이 와서 집까지 걸어갈 수가 없었다.

공학관 지하 자판기에서 에너지 바와 체리 콜라를 뽑았고, 공용 연구실에 돌아와 그것들을 먹으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일기예보를 보니 밤 아홉 시가 지나야 비가 그친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비가 그쳤으면 좋겠다.

연구실에서 다음 주 세미나 시간에 읽을 논문을 인쇄하고, 연습 문제를 미리 풀고, 일정표를 정리하는 등 잡일을 했다. 내가 잡일을 하는 동안 다른 학생들은 모두 퇴근했다. 창가에 서서 밖을 보니,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저녁 하늘을 보고 있는데 아이폰 진동이 울렸다. 나는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왜 안 와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못 가고 있어요.”

-우산 없어요?

“있는데, 우산을 써도 집까지 걸어가다가 옷을 다 버릴 것 같아요.”

-그럼 내가 차로 데리러 갈게요. 공학관으로 가면 되죠?

“네?”

-10분 뒤에 내려와요.

내려오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약간 섞여 있었다. 나는 짐을 싸고 맥북을 가방 안에 넣고 연구실을 나섰다. 알렉스가 데리러 온다고 하니 기분이 좋아졌고, 공학관 현관 처마 밑에 서서 알렉스를 기다렸다.

5분 정도 기다렸을 때, 멀리서 알렉스의 차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는 여전히 굵었다. 알렉스의 차가 인도에 바짝 붙어 섰고, 나는 후드티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차까지 달려갔다.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재빨리 올라타니, 알렉스는 운전석에 앉은 채 웃고 있었다.

“그냥 데리러 와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공부하느라 바쁜 거 아니었어요?”

“바쁘기는 하지만 룸메이트를 데리러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알렉스는 중립에 놓았던 기어를 D에 넣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려고 노력했다. 일부러 빗속을 뚫고 데리러 와 주다니. 알렉스는 몸에 밴 친절을 베푸는 것뿐이지만, 나는 그 친절을 받을 때마다 기뻤다.

* * *

개강하니까 정신이 없었다. 과제 해야지, 수업 조교로 일해야지, 논문을 읽어가야지, 기말 페이퍼 주제를 생각해야지, 밍 교수님 연구를 도와드려야 하지. 집에 와서도 밤을 새워서 과제를 하는 일이 많아서 영어 회화를 따로 연습할 시간이 나지 않았다.

나는 여름 워크숍 디렉터에게 메일을 보내면서 영어 말하기 연습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에게 문화 토론 모임을 추천해 주었다. 주로 유학생들이 모여서 문화 차이를 주제로 토론하는 세션이었고, 그 모임은 목요일 저녁마다 있었다.

수빈과 나는 함께 그 세션에 참가하기로 했다. 첫 모임에 가 보니 미국 학생들도 많았다. 이번 기회를 통해 영어 말하기를 연습하고 미국 문화를 자세히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기뻤다.

모임이 끝나고, 우리는 내 아파트로 왔다. 함께 코스트코에서 산 삼겹살을 굽고, 즉석밥을 데우고, 밥과 김치와 샐러드를 같이 먹기 시작했다. 한참 저녁을 먹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안녕.”

나는 알렉스에게 인사했다. 알렉스는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고, 나를 보고 인사하려다가 수빈을 보고 멈칫했다. 수빈은 알렉스에게 붙임성 좋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수빈이에요. 우리, 이사하던 날에 봤었죠?”

“네. 반가워요. 알렉스예요.”

알렉스가 그녀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알렉스가 인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수빈이 나에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네 룸메 진짜 잘생겼다. 모델 같아. 쟤 인기 많지?]

[알렉스, 여친 있어.]

[크으, 역시 잘생긴 애들은 전부 짝이 있다니까.]

수빈은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알렉스는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우리가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다가 물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수빈이 알렉스가 잘생겼대요. 그래서 내가 알렉스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말해 줬어요.”

“고마워요.”

알렉스는 약간 빈정거리며 말했다. 평소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수빈은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해 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알렉스는 샤워하고 이를 닦고 나왔다. 나는 알렉스의 눈치를 살폈다. 알렉스는 냉장고에서 물 한 병을 꺼내 마시며,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나에게 말했다.

“둘이 데이트하는 거면 앞으로는 나한테 이야기하고 집으로 불러요. 자리 피해 줄 테니까.”

“우리는 친구예요.”

“그리고 인덕션에 돼지기름 튀었으니까 그것도 닦아요.”

알렉스를 한 달 넘게 지켜보았지만, 오늘만큼 알렉스가 기분 나빠하는 날이 없었다.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알렉스가 말한 거, 앞으로 전부 유의할게요.”

“네.”

알렉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내 사과를 받아 주었다. 알렉스가 성을 내는 바람에 나도 기분이 안 좋아졌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섰고, 키친 타월을 뜯어 인덕션에 묻은 기름을 빡빡 닦았다. 내가 잘못한 게 맞기는 하지만, 이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알렉스는 화가 덜 풀린 채로 여자 친구와 통화하고 있었다. 예전에 비하면 여자 친구와 통화하는 시간이 짧아졌다. 장거리 연애고 서로 바쁘다 보니 공통된 화제가 적어져서 그런 것 같았다. 알렉스는 화가 덜 풀렸는데도 여자 친구에게는 다정했다. 그들의 통화를 엿들으며, 내가 알렉스의 애인이 되면 어떨지 상상해 봤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했지만,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미쳤지. 쟤는 헤테로인데. 바랄 걸 바라야지.

가을 학기 4주차, 알렉스

사만다와 오랜만에 통화했다. 사만다와 통화하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그녀와의 연락은 뜸해지고 있었고, 나는 윤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만다에게 충실하기로 한 약속을 어긴 것인가? 윤이 여자애와 있는 모습을 보고 유치하게 행동하기는 했지만, 내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이래도 내가 흔들렸다고 할 수 있나?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워서 사만다의 말을 들으며 영혼 없는 대꾸만 계속했다. 마침 사만다는 바쁘다는 이유로 전화를 끊자고 했다. 사만다에게 잘 자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째서인지 전화를 끊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아,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 * *

법학 작문 시간 과제로 가상의 기업 상담 결과 보고서를 써야 했다. 새로운 사업 모델을 구상하고 있는 IT 기업을 위해 사업 적법성을 검토한 결과를 서면으로 작성하는 과제였다. 법학 도서관에 앉아 보고서를 썼지만, 다시 읽어 보니 어딘가 엉성했다. 몇 번이나 읽으면서 고쳤는데도 나아지지 않았다. 나 혼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아빠의 힘을 빌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성적을 잘 받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아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과제 하다가 모르는 게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사업 적법성 검토 보고서 견본 하나만 보내주실 수 있어요?

아빠가 내 메시지를 바로 읽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빠는 바쁘니까. 메시지를 보내고 휴식을 취할 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판기 쪽으로 걸어갔다. 자판기 앞에서 민법 수업을 같이 듣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만났다. 자판기에 1달러 지폐 두 개를 넣고 있는데, 학생 중 한 명이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알렉스네.”

“안녕.”

나는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들 중, 여자애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알렉스, 여기서 뭐 해?”

“법학 작문 과제.”

“다 했어?”

“초안은 다 썼어.”

“우와, 우리는 아직인데. 너 보기보다 엄청 성실하구나.”

내가 겉보기에는 불성실해 보인다는 이야기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에 오해를 많이 받았다. 내가 영화에 나오는 멍청하고 거만한 쿼터백의 전형처럼 생긴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다른 원인이 더 컸다.

운동부 활동을 하다 보면, 가끔 감독이 선생이나 교수에게 선수의 성적이 잘 나오게 ‘도와주라고’ 압력을 가하는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운동부 학생이 성적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나오지 않으면 운동부 활동을 할 수 없게 제재하는 법이 있기 때문이었다. 뛰어난 선수가 학교 성적 때문에 경기에 나가지 못하면, 좋은 성적을 내야 하는 감독에게는 엄청난 손해였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감독이 그런 짓을 해도 묵인했다. 운동부의 대회 성적이 좋을수록 학교에 엄청난 돈과 후원을 벌어다 주기 때문에, 감독과 학교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지니까.

나는 운동을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기 때문에, 감독님은 나 때문에 선생과 교수에게 싫은 소리를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감독님들은 나를 좋아했다. 그러나 소문은 실제보다 나쁘게 나는 법이었다.

예전부터 할아버지가 나를 교묘하게 당신의 정치 선전에 써먹었다는 사실과 감독님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어우러져, 사람들은 내가 실력도 없으면서 주전을 꿰찼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아버지 후광으로 좋은 성적을 받았다거나, 코치가 신경 써준 덕분에 운동을 하는 거라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때로는 사람들이 내 앞에서 할아버지 후광이 있어서 좋겠다고 대놓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이 상황도 내가 과거에 겪었던 몇몇 상황과 유사했다. 어릴 때부터 비슷한 일을 자주 겪어서 익숙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황이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친구를 많이 만들지 않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나와 친해지고 싶어 달라붙는 사람들은 나를 이용하거나, 내 뒤통수를 치거나, 배경만 보고 나를 판단하며,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의 인간 불신은 점점 심해졌다. 그래서 나는 소수의 믿음직한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왔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보기보다 싸가지가 없고.”

내가 경멸을 감추지 않고 차갑게 말하자, 그 여자애가 발끈하며 나에게 되물었다.

“뭐?”

“나는 간다.”

나는 콜라를 쥐고 도서관의 내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아 아이폰을 확인하니, 아빠가 답을 보냈다.

-그럼, 있지. 메일로 하나 보내 줄까?

-고마워요, 아빠.

-다 쓰고 아빠한테 보여 줘.

-그럴게요.

아이폰으로 아빠에게 마지막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아이폰을 내려놓고, 콜라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방금처럼 내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사람들이 차라리 나았다. 감히 대놓고 말할 용기가 없는 찌질이들은 등 뒤에서 비아냥거리고, 나는 그런 찌질한 인간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찌질이들은 무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 * *

상담실 소파는 정말 푹신푹신했다. 2주 만에 만나는 잭 선생님은 나에게 학교생활은 어떠냐고 물었고, 나는 열심히 적응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듣고, 잭 선생님은 그동안 윤과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내 곁에 놓여 있는 크로셰 담요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얼마 전에 같이 저녁을 먹으려고 장을 봐왔는데, 그 친구가 여자애와 먼저 저녁을 먹고 있었어요. 그걸 보고 화가 나서 그 친구에게 성질을 냈어요.”

“왜 화가 났어요?”

“그 여자애는 한국 사람이거든요. 둘이 매우 친해 보이기도 했고, 둘이서 한국어로 이야기를 하니까 저를 소외시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나중에 물어봤더니 둘이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고 하는데, 그래도 기분은 좋지 않았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차트에 내가 말한 내용을 짧게 메모하고 나서, 나에게 물었다.

“실례지만, 혹시 그 친구의 성적 지향이 어떤지 알고 있나요?”

“스트레이트는 아니에요. 그 친구가 클럽에 갔다가 새벽에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남자와 밤을 보낸 것 같았어요.”

“그때도 화가 났나요?”

“걱정이 되기는 했는데, 네, 화도 났어요.”

잭 선생님은 내 말을 차분하게 들어주었다. 선생님은 차트에 뭔가를 휘갈겨 쓰고 나서, 나에게 질문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요?”

“그 친구가 나쁜 일을 당할까 봐요.”

“그건 걱정한 이유잖아요. 알렉스는 왜 화가 났을까요?”

“……그러게요, 제가 왜 화를 냈을까요?”

나는 선생님에게 멍하게 되물었다. 질문을 듣고, 선생님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질투예요. 알렉스.”

“……질투요?”

“알렉스는 그 친구가 다른 사람을 좋아할까 봐 겁내고 있잖아요. 그런 마음이 질투가 아니면 뭐겠어요? 다음 상담까지는 이렇게 해 봅시다. 공책을 사고, 거기에 그 친구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기록하는 거예요. 화가 날 때든 기분이 좋을 때든, 뭐든 좋아요.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일기장에 어떤 내용을 썼는지 이야기해 보도록 해요. 그러면 알렉스가 본인의 마음을 되짚어보기 좋겠지요.”

잭 선생님의 말씀이 모두 맞지만, 내 감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두려웠다. 일기를 쓰면 내 감정에 대해 확실한 증거가 남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두렵지만, 이 문제를 순조롭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생님의 처방을 잘 따라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잭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 학기 5주차, 윤

10월 1일에 첫 월급이 들어온다. 첫 월급 안내 메일을 받고, 외국인이라 세금을 낼 필요가 없으니 나중에 연말 정산 서류를 작성해서 환급을 받으라는 메일도 받았다. 나는 공용 연구실에 있는 프린터로 서류를 모두 인쇄해서 작성했고, 그것을 들고 관련 부서까지 걸어갔다.

9월 말인데도 한낮의 태양은 아직 뜨거웠다. 나는 학교 지리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 구글 맵을 켜고 걸어갔고, 내 목적지가 법학관 근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법학관 근처에 이르렀을 때, 충동적으로 알렉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간이 맞으면 같이 점심을 먹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바빠요?”

-과제 하고 있었어요.

“점심 먹었어요?”

-아직이요. 이제 먹어야죠.

“그럼 나와 함께 점심 먹을래요?”

-네.

“세금 정산 서류 내려고 법대 근처에 왔거든요. 서류 내고 올 테니까 15분 뒤에 봐요.”

-좋아요. 내려갈게요.

서류를 내고 법학관 앞으로 갔다. 알렉스는 벌써 내려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햇빛 때문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나는 알렉스를 보고 반가워서 손을 흔들었다.

“왔어요?”

“많이 기다렸어요?”

“방금 내려왔어요.”

우리는 학생 회관에 딸린 학생 식당까지 걸어갔다. 나는 학생 식당에서 립과 감자튀김을 샀고, 알렉스는 중국풍 덮밥을 샀다.

나는 자리에 앉아 물티슈로 손을 닦고 포크와 칼로 립을 발라 먹었다. 알렉스는 숟가락으로 덮밥을 떠먹고 있었다. 알렉스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알렉스가 먹고 있는 덮밥이 무슨 맛인지 궁금해졌다.

“그거 한 입 먹어 봐도 돼요?”

“진심이에요?”

알렉스는 정색하며 싫다는 티를 냈다. 나는 몸을 움츠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싫으면 말고.”

“……아뇨.”

알렉스는 잔뜩 인상을 쓰면서 대답했다.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알렉스가 다시 말했다.

“먹어도 돼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일회용 숟가락을 하나 더 가져왔고, 덮밥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간장을 넣었는데도 단맛이나 고소한 맛은 나지 않고 짠맛만 나는 소고기덮밥이었다. 자세히 보니 덮밥에 들어 있는 채소도 내가 아는 채소들과 생김새가 달랐다. 깍지 콩은 알겠는데 다른 채소들은 이름이 뭔지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사이비 소고기덮밥을 한 입 먹은 소감을 말했다.

“내가 아는 맛이 아닌데.”

“그래요? 맛없어요?”

“맛이 없다기보다는…… 저는 평소에 중식이나 일식을 많이 먹었는데, 이건…. 제가 아는 맛과 너무 달라요. 알렉스는 이게 맛있어요?”

“네.”

“희한하네.”

나는 음식에 대한 감상을 마치고, 립과 감자튀김을 마저 먹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내 음식을 물끄러미 보더니 말했다.

“다음에는 멋진 한식당이나 일식집에 가 봤으면 좋겠네요. 그 맛이 이 맛과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요.”

“그래요. 댈러스나 큰 도시에 같이 가게 되면, 한식당에 가요.”

“좋아요.”

점심을 먹고 나서, 우리는 카페에 갔다. 알렉스는 아이스 피치 그린티 레모네이드를 시켰고,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커피를 들고 그와 함께 걸어가는 길이 정말 즐거웠다. 햇빛이 맑게 내리비치는 날, 좋아하는 사람과 산책을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집에서만 보던 사람을 학교에서도 보니까 더욱 반가웠다. 물론 알렉스는 아무 생각이 없고, 나만 알렉스가 반갑고 좋은 거겠지만.

* * *

나는 밍 교수님과 학부 수업 시험 감독을 함께 했다. 한국에서는 시험 시간 분위기가 매우 살벌한데, 여기는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시험지를 팔과 몸으로 가리고 문제를 필사적으로 풀었지만, 여기 학생들은 느슨한 자세로 앉아 시험을 보았고, 문제를 풀다 말고 여기저기 곁눈질을 하기도 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교수님은 출석부의 이름과 시험지에 적혀 있는 이름을 맞춰 보셨고, 나를 연구실로 데리고 가셨다. 밍 교수님은 모범 답안을 프린터로 인쇄했고, 답안지와 함께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한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기에서는 부분 점수를 꼭 줘야 해요. 답은 틀렸어도 논리가 맞으면 부분 점수를 꼭 줘야 합니다. 내가 그런 문제들은 따로 표시해 놨어요. 처음 채점해 보면 분명히 모르는 거나 잘못하는 게 있을 거예요. 내가 다시 살펴볼 테니까 실수하는 것은 걱정하지 말고,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바로 물어보면 됩니다.”

“네.”

시험지 봉투를 손에 고쳐 쥐었다. 책상 너머에 앉아 있는 밍 교수님이 안경을 벗고, 안경 수건으로 안경알을 닦으며 말했다.

“윤은 잘하고 있어요. 윤이 질의응답 시간에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설명도 잘해 준다고 들었어요.”

나는 교수님의 칭찬을 듣고 살짝 민망해졌다. 칭찬을 기대하고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고 월급을 받는 일이니까 열심히 한 거지. 그래도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럼요. 첫 학기인데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요. 아무튼, 내일모레 이 시간에 1차 채점 마치고 봅시다.”

“네.”

“점심 맛있게 먹어요.”

밍 교수님이 안경을 끼고, 나에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나는 시험지 봉투를 들고 연구실을 나섰다.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칭찬을 들어서 그런지 걸어가는 내내 발걸음이 가벼웠다.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 순간은 기뻤지만, 그 기분은 잠시뿐이었다. 잘 적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내가 이곳에서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느끼자마자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그런 기분을 느끼는지 정확하게 대답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런 순간은 예고 없이 천재지변처럼 찾아오고, 너무 미묘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오스틴에 살 때는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때는 엄마가 살아 있었고, 내가 어리고, 영어를 잘하지 못해서 소외감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던 덕분이었다. 그러나 머리가 굵은 지금, 나는 때때로 못 견디게 외로웠다.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집이 아니라 호텔에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면 나와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 벽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짓을 해도 혼자라는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알렉스가 집에 있을 때였다. 집에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고, 그 사람이 나를 반겨준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가을 학기 5주차, 알렉스

틈만 나면 자꾸만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나와 윤은 학식에서 점심을 먹었고, 윤은 내가 시킨 음식을 먹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음식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는다니. 나는 그 말을 듣고 기겁했지만, 결국 그에게 내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말하고 말았다.

내가 다른 사람과 음식을 나눠 먹다니, 부모님이 보면 기함할 일이었다. 나는 가벼운 결벽증을 앓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위생에 철저했다. 집 청소도 자주 하고, 샤워도 자주 하고, 손도 자주 씻는 편이었다. 집을 청소할 때, 방, 부엌과 화장실에 각기 다른 세제를 쓸 정도로 신경을 썼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보며, 내가 너무 까탈스럽다고 한탄했다.

이런 성향은 타고난 것도 있지만, 운동하면서 더 심해졌다. 운동선수라면 이상한 집착, 루틴이나 징크스 정도는 다들 하나씩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은 서브를 넣기 전에 바지를 잡아당기고 머리카락을 넘기는 루틴을 끝없이 반복한다. 운동선수들은 승리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통제해서 조금이라도 승률을 높이고자 한다. 특유의 경쟁심과 예민함이 결벽증, 루틴과 징크스로 표출되는 것이다.

음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다? 생각만 해도 싫다. 남과 음식을 나눠 먹으면 침이 섞이니까 더러워서 싫다. 균이 옮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윤은 나에게 덮밥을 한 입 달라고 했다. 나 같으면 상상도 못 할 말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가 윤에게 내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말했다는 거다.

남과 음식을 공유하다니. 나는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윤에게 호감을 느끼며, 평생 하지 않았던 행동을 자꾸 하고 있었다. 그래서 윤으로 인한 내 변화가 무섭고 두려웠다. 윤은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내 습관과 성향을 간단히 무너뜨려 버리는지. 원래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면 다들 이러는 것인지. 윤은 점심을 배불리 먹고 커피를 마시는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나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 * *

처음 만났을 때, 윤의 머리카락은 아주 짧았다. 윤은 여기에서 미용실에 가기 어려울 것 같아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왔다고 했다. 그러나 윤의 머리카락은 몇 달 만에 많이 자랐다. 나는 윤의 이마를 가리는 앞머리가 답답하다고 생각했지만, 윤에게 사실대로 말하지는 않았다. 앞머리가 자라서 눈썹을 덮게 되었을 무렵, 윤이 나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괜찮은 미용실이 있나요?”

“내가 다니는 데 가 볼래요?”

“거기 괜찮아요?”

“나는 마음에 들어요. 잠시만요.”

나는 방에 가서 지갑을 가져왔고, 지갑에서 헤어 디자이너의 명함을 찾아 윤에게 건넸다. 이 미용실과 헤어 디자이너는 학교 카페 직원인 달튼을 통해 알게 되었다. 달튼의 머리 스타일이 하도 근사해서, 나는 달튼에게 그가 다니는 미용실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제가 다니는 미용실과 담당 디자이너를 소개해 주었다.

다음 날. 하교해서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나는 현관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윤은 머쓱해하며 자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가리려고 했다. 머리가 많이 짧아진 것을 보니 하굣길에 머리를 자르고 왔나 보다.

“머리 잘랐어요?”

“네.”

“어디 봐요.”

“이상한데.”

“그거는 봐야 알죠. 손 내려 봐요.”

윤은 머리에서 손을 내렸다. 새로운 헤어스타일은 그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내 또래 애들이 많이 하는 언더컷 스타일이었다. 옆머리는 짧게 자르고 윗머리는 길게 남겨 두고, 제품을 발라 이마가 보이도록 자연스럽게 넘겼다. 어찌 보면 내 머리 스타일과도 비슷했다. 윤이 두 손으로 이마를 가리면서 나에게 물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데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이마가 너무 드러나서…. 옆머리도 짧고…. 이런 머리는 처음 해봐요.”

“아니에요. 보기 좋아요. 이런 머리를 어떻게 손질하는지는 알아요?”

“디자이너가 설명해 주기는 했는데, 못 알아들었어요.”

“이리 와봐요.”

나는 윤을 내 방으로 데려왔고, 그를 거울 앞에 세웠다. 그리고 클레이 왁스를 손에 덜어, 내 머리로 손질 시범을 보였다. 이 머리를 멋지게 손질하려면 왁스를 손에 골고루 묻히고 손가락 빗질을 해서, 머리카락이 뒤로 자연스럽게 흐트러지도록 넘기는 것이 중요했다. 윤은 내 시범을 유심히 보다가 질문했다.

“무슨 제품을 쓰는 거예요?”

“클레이 왁스예요.”

“사진 찍어 가도 돼요?”

“네.”

윤은 클레이 왁스를 손에 쥐고 아이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윤의 새로운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들었다. 하나님이 공들여 만들어 주신 얼굴을 갖고 있으면 자랑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윤은 거울 속에 비친 제 머리 스타일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고, 나는 거울에 비친 윤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 * *

집안에 법조인이 많다 보니, 법대의 커리큘럼이나 수업 방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교수님은 매일 무작위로 학생을 지정한다. 그러면 그 학생은 그날의 주인공이 된다. 즉, 그 학생은 교수님과의 토론을 이끄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공부하지 못했거나, 모르는 내용을 질문하면 한 학기에 두 번까지 교수님의 지목을 패스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수업 준비를 철저히 했고, 대답을 제대로 못 하더라도 패스는 하지 않았다. 복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헌법 수업이든, 민사법 수업이든, 계약법 수업이든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윤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나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릴 때부터 학원 생활과 입시로 단련된 한국인 앞에서는 가벼운 수준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노력하게 되었다.

* * *

윤이 클럽에서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이래, 그를 집요하게 관찰해 왔다. 클럽에 가는지, 남자 또는 여자를 만나러 다니는지. 그러나 윤은 수업을 들으면서 조교로 일하고 과제를 하느라 바빴고, 놀러 다닐 시간이 없었다. 나는 내심 윤이 바빠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바빴다. 아침 아홉 시에 학교에 가서 저녁 다섯 시쯤 집에 왔고, 저녁을 먹고도 과제를 했고, 판례를 읽고 분석하고 생각하느라 바빴다. 여러 과목을 듣지만, 나에게는 법률 문서 작성법 수업이 가장 어려웠다. 학점은 1학점인데 체감상으로는 10학점이었다.

우리는 바쁜 와중에도 일주일에 두 번에서 세 번 정도 운동을 하러 갔다. 농구를 할 때도 있고, 학교 체육관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거나 러닝 머신을 달릴 때도 있었다. 나에게도, 윤에게도 운동 시간이 거의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체육관까지 걸어갔다. 차를 타고 가면 학교 체육관까지 10분이면 갈 수 있지만, 체육관까지 걸어가면 왕복 한 시간은 걸렸다. 윤에게 운동 삼아 체육관까지 걸어가자고 한 것은 핑계였다. 체육관까지 걸어가는 동안, 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 핑계를 댔다.

“어제 조교 첫 월급이 나왔어요. 주말에 시간 돼요? 시간 되면 지난번에 갔던 루이지애나 가정식 식당에 가요. 내가 쏠게요.”

“좋아요.”

“오늘도 농구 할까요?”

“네. 농구 하는 애들이 있으면 끼워 달라고 하죠.”

윤은 내 대답을 듣고 기분 좋게 웃었다. 그가 웃어서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한편으로는 사만다가 마음에 걸렸다. 윤에 대한 내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매일 마음이 흔들리고 있어서 양심에 찔렸다. 이런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샘은 벌써 3일째 연락이 없었다.

“알렉스. 내가 세미나 시간에 발표해야 하는데, 발표 연습 봐 줄래요?”

“이제 내가 안 봐줘도 잘하지 않나요?”

“이거 중간고사 대체라 중요하단 말이에요.”

“알았어요.”

윤이 활짝 웃었고, 나는 그를 따라 웃었다. 그때, 내 운동복 반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아이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가을 학기 6주차, 윤

“전화 받아도 되죠?”

“네.”

알렉스는 나에게 전화를 받아도 되냐고 물은 후, 전화를 받았다. 나는 걸어가면서 알렉스가 말하는 내용을 들었다. 네.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잘 지내죠. 학교생활은 재미있어요. 집에서 나와 사는 것도 괜찮아요. 네? 그런 일정이 있었으면 미리 알려 주시지. 일정이 바뀌었다뇨? 네. 저는 왜요? 학교에도 벌써 이야기하셨어요? 그래도 저와 상의는 하셨어야죠, 그때 저도 수업이 있을 수 있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할아버지께 가겠다고 전해 주세요.”

할아버지? 나는 알렉스의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알렉스가 대가족 출신이라는 사실은 알았다. 아버지의 형제자매는 열 명이 넘고 사촌들은 30명이 넘는데, 알렉스만 유일하게 외동아들이라서 사촌들과 친하게 지낸다고 했다.

알렉스와 제일 친한 사촌은 사라와 조셉 주니어. 둘은 이란성 쌍둥이고 알렉스 아버지의 막내 남동생인 조셉 시니어의 자녀들이었다. 사라는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에서 간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며 한국 아이돌을 좋아하고, 조셉 주니어는 육군사관학교 학생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에요?”

“할아버지가 다다음 주에 학교에 오신다고 하네요.”

그는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알렉스는 할아버지가 학교에 오는 게 싫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학교에 오는 것이 왜 싫을까? 나처럼 가족들과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아니면서. 나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 * *

농구를 한 시간 넘게 하고, 우리는 집 근처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운동하기 전에 저녁을 먹었지만, 운동하고 나니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고, 씻고 나서 침대에 누워 아이폰으로 사파리 창을 켰다. 월급이 들어왔으니 겨울옷을 봐야겠다. 한국에서도 애용하던 글로벌 SPA 브랜드 웹페이지 몇 개를 차례대로 열어 겨울옷을 보았다. 디자인은 나쁘지 않지만 패스트 패션 브랜드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가격이 너무 비쌌다. 그래도 한국에서보다는 쌀 줄 알았는데. 나는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쇼핑몰 웹페이지를 꺼버렸다.

갑자기 알렉스가 운동하던 시절의 모습이 궁금해져서 유튜브를 켰다. 알렉산더 테신 4세, 미식축구. 영어로 키워드를 입력했더니 하이라이트 영상이 제일 위에 떴다. 나는 동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선수들이 모두 헬멧을 쓰고 있어서, 처음에는 누가 알렉스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알렉스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보호 장비 때문에 잔뜩 솟구친 어깨에 알렉스의 성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등 번호는 3번. 얼굴은 헬멧 때문에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다.

알렉스는 경기의 흐름을 전부 예측하는 것 같았다. 그는 빈 곳을 찾아 침투하는 선수가 보일 때마다 절묘한 패스를 꽂아 넣어 경기의 흐름을 바꾸었다. 축구로 치면 플레이메이커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간간이 헬멧을 쓴 알렉스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깜짝 놀랐다. 입에 마우스피스를 물고, 새파란 눈을 번득이며 동료들에게 고함을 치고 전술을 지휘하는 알렉스는 무리를 노리는 침입자를 무찌르고 포효하는 우두머리 수사자처럼 보였다. 옆방에 사는 다정한 남자와 하이라이트 영상 속 에이스 쿼터백이 동일인물이라니,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

경기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고 나서, 기자 회견 영상도 보았다. 알렉스는 언더 셔츠 위에 롱혼스20) 후드티를 입고 단상 앞에 서서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고 있었다. 그는 기자들의 질문에 진지하고 능숙하게 대답했고, 가끔 사회생활용 미소를 지었다. 알렉스의 사회생활용 미소는 보기 좋았다. 하지만 알렉스가 평소에 어떻게 웃는지 알고 있다 보니, 내 눈에는 그의 사회생활용 미소가 다소 딱딱해 보였다.

나는 동영상 속 알렉스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기자는 알렉스에게 오늘 할아버지께서 경기를 보러 오신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기자의 질문을 듣고, 알렉스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알렉스의 대답을 듣고, 아까 알렉스의 할아버지가 학교에 오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할아버지가 유명인이신가? 알렉스의 정식 이름이 알렉산더 테신 4세이니까, 할아버지는 알렉산더 테신 주니어겠지. 나는 구글 검색창에 알렉산더 테신 주니어와 테신 4세를 같이 입력했다. 결과는 예상했던 것, 아니 그 이상이었다. 나는 검색 결과에 너무 놀랐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 * *

학교 메일 계정으로 학교 행사 안내 메일을 받았다. 텍사스 주 연방 상원의원인 알렉산더 테신 주니어 의원이 학교에 방문하여 강연한다고 했다. 레딧21) 반응을 보니, 테신 의원은 상원의원 중간 선거를 앞두고 후배 상원의원의 선거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학생들을 만나는 것 같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테신 주니어 상원의원은 7선 의원이며 공화당의 매파 거물이었다. 그는 공화당 상원의원 중에서도 가장 강경한 견해를 고수했다. 동성 결혼 반대, 낙태 반대, 총기 허용, 부자 감세 찬성. 그는 연방 판사를 거쳐 연방 법무부 장관을 지내고 연방 상원의원이 되었다. 테신 주니어 상원의원의 아내이자 알렉스의 할머니인 이사벨라는 석유 재벌 가문인 네이아드가의 상속녀이고, 남편의 정치 커리어를 지원했다. 테신 주니어의 아버지인 테신 시니어는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이며, 나중에는 육군 대장으로 전역해 주영 대사를 지냈다. 알렉스의 아버지, 테신 3세는 대형 로펌의 파트너였다.

테신 주니어 상원의원의 위키피디아 페이지에는 알렉스의 페이지가 링크되어 있었다. 나는 알렉스의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읽었다. 알렉산더 줄리안 케인즈 테신 4세, 일명 ‘마스터’. 그 페이지에는 알렉스의 생애와 경기 기록이 서술되어 있었다. 상원의원의 장손이자 교수 어머니와 로펌 파트너 아버지의 늦둥이 외동아들. 화려한 전적과 개인 기록을 가진, 지능적인 플레이가 일품인 선수. 하지만 그는 부상으로 은퇴한 비운의 유망주이기도 했다.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읽으니, 한여름에 롱혼스 유니폼을 껴입고 있던 이상한 우버 기사가 생각났다. 알렉스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그 사람. 그 사람은 알렉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알렉스를 좋아할 것이다. 알렉스는 상원의원의 장손이고 미식축구 스타 출신이자 로스쿨 학생인 엄청난 금수저였다. 할아버지의 선거 유세를 지원하러 나선 적도 있는 것을 보면, 정치에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금수저에 대해 편견을 가진 것일 수도 있지만, 금수저들은 다들 티가 났다. 금수저들은 자신이 타고 태어난 것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은 노력이 부족해서 무능하게 사는 것이라 여겼다. 그에 비하면 알렉스는 아주 겸손한 편이었다.

알렉스는 유복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티를 내기는 했지만, 금수저 특유의 오만함은 갖고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지도, 인기 관리를 하지도 않았다. 파티에 가지 않고 클럽에도 가지 않았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알렉스는 그저 내가 부탁한 대로 발표용 ppt를 고쳐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영어 문법과 어색한 표현부터 고쳐 볼게요.”

“네.”

알렉스의 메일 계정으로 ppt 파일을 보냈다. 알렉스는 파일을 내려받아 제 맥북에서 열었고, 나는 알렉스의 책상 옆에 식탁 의자를 놓고 앉았다. 알렉스는 논문 요약 ppt를 검토하며 영어 문법과 어색한 표현들을 고쳐 주었다. 내가 슬라이드 밑에 써 놓은 슬라이드 노트도 읽고 표현을 일일이 고쳤다. 알렉스가 ppt를 고치다 말고, 나에게 물었다.

“이것도 지난번처럼 죽으라고 연습할 거예요?”

“아뇨.”

“좋은 생각이에요. 기준점만 넘으면 되는데 그 이상으로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예요. 전혀 효율적이지 않아.”

알렉스는 웃으면서 ppt의 영어 문장들을 꼼꼼하게 고쳐 나갔다. 미국에서는 운동부도 공부를 잘해야 할 수 있다고 하더니, 알렉스는 정말 똑똑했다.

“이건 무슨 뜻이에요? 최근의 연구 흐름이 실용성을 중요하니 업계의 요구를 만나? 이 문장에 동사가 안 보여요.”

“업계에서 실용성을 요구하고 연구 동향도 똑같이 간다는 뜻인데…….”

“업계에서 실용성을 강조하는 흐름에 부응한다, 정도로 고칩시다.”

“네.”

“윤은 대단해요. 나는 한국어로 ppt를 만들고 발표할 엄두를 못 내는데, 윤은 영어로 ppt를 만들고 발표를 하잖아요.”

나는 알렉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고, 안경을 고쳐 쓰고 알렉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파워포인트 화면을 바라보았다. 내가 몸을 기울이자 알렉스는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미국 사람들이 퍼스널 스페이스를 갑자기 좁히면 불쾌해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뒤로 조금 물러섰다. 알렉스가 화면에 시선을 둔 채, ppt를 고치며 말했다.

“괜찮아요.”

“미안해요. 너무 바짝 붙었죠? 뒤로 갈게요.”

“정말 괜찮은데.”

알렉스가 나를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알렉스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한 이래, 우리의 얼굴이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없었다. 서로의 숨결이 피부에 스칠 정도로 얼굴이 가까웠다.

알렉스는 ppt를 내버려 두고, 아예 몸을 돌려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몸을 돌리니 광원의 방향이 바뀌었고, 시리도록 새파랗던 눈동자가 따스한 회색으로 변했다. 방이 그리 어둡지 않은데도 알렉스의 동공은 크게 벌어져 있었다. 알렉스의 눈을 들여다보는 동안, 내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 심장 소리가 알렉스에게 들릴까 봐 의자를 뒤로 물렸다.

“나는 괜찮은데 윤이 불편한 것 같네요.”

알렉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알렉스의 목소리가 아쉬워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내 착각일까? 나는 영문을 몰라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알렉스는 ppt를 고치는 작업에 다시 몰두하고 있었다.

가을 학기 6-8주차, 알렉스

ppt를 고치고 나서, 수정한 파일을 윤의 이메일로 보냈다. 윤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월급을 탄 기념으로 외식하자고 말하고 방을 나갔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일기장을 펼쳤다. 오늘은 정말 위험했다. ppt 수정 작업에 집중한 윤이 저도 모르게 몸을 기울였고, 덕분에 입 안의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상대방이 갑자기 퍼스널 스페이스를 좁히면 불편해야 정상인데, 윤이 다가오는 것은 불편하지 않았다.

나는 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을 보면서, 예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동공을 보라고. 상대방이 나에게 호감을 느끼면 동공이 확장된다고. 그러나 윤의 홍채는 잉크처럼 새까매서 동공과 구분이 되지 않았고, 나는 동공의 크기를 알 수 없었다.

윤은 내가 너무 빤히 바라보아서 부담스러웠나 보다. 윤이 미안하다고 말하며 뒤로 물러났을 때, 무척 아쉬웠다. 그가 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윤의 숨결이 목덜미에 스칠 때마다, 나는 ppt 수정을 잠시 미루고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뺨을 만지고 싶었다.

* * *

로스쿨에 입학하고 일상은 급격히 단조로워졌다. 수업, 과제, 공부, 가끔 운동, 그리고 다시 수업, 과제, 공부, 운동. 생활이 단조로우니 시간도 느리게 흐를 것 같지만, 의외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하루가 흐르고, 그것이 모여 일주일이 흐르고, 한 달이 흘렀다.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는 동안, 나의 일기장은 빼곡해졌다. 나는 윤이 나에게 발표 자료를 봐달라고 해서 기뻤고, 윤에게 저녁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았고, 그가 내가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기뻤으며, 윤이 밤늦게까지 과제를 하거나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대단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만큼 사만다와 나의 연락은 뜸해졌다. 우리는 전화를 거의 하지 않고, 하루에 한두 번 메시지만 주고받고 있었다. 이런 변화들을 메모하며, 나는 내 마음의 변화를 시시각각 느낄 수 있었다.

* * *

할아버지의 캠퍼스 방문을 앞두고, 할아버지의 보좌관인 리사는 나에게 자주 연락했다. 나에게 멀끔한 슈트를 갖춰 입고 오라고 부탁할 때도 있었고, 할아버지의 강연 원고를 미리 보고 오라고 말할 때도 있었다.

당일 아침, 나는 아르마니 네이비 슈트에 잘 다린 하늘색 셔츠를 받쳐 입고 타이를 맸다. 어제 미용실에 들러 깔끔하게 다듬은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가르마를 타서 빗어 넘겼다. 옷을 말끔히 차려입은 내 모습을 보고, 윤은 우유에 말은 시리얼을 먹다 말고 말을 걸었다.

“어디 가요?”

“오늘 할아버지가 오신다고 해서요.”

“아, 테신 상원의원.”

윤은 짧게 말하고, 다시 시리얼을 먹기 시작했다.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다가 거울에 비친 윤을 보니, 아침이라 부은 그의 얼굴에 졸음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윤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를 알아요?”

“구글에서 검색해봤어요. 근데 할아버지가 오시는데 왜 알렉스가 옷을 차려입어야 해요?”

“할아버지가 저를 대동해서 강연하시겠대요.”

“미국에서도 정치인의 가족으로 사는 건 피곤하네요.”

“한국도 그래요?”

“네. 정치인의 가족으로 살면 피곤할 거예요. 비리 때문에 가끔 구속되어야 하니까요.”

윤은 아주 독한 농담을 했다. 한국의 정치인과 그 측근들은 비리를 자주 저지르나? 여기도 비리는 만만치 않게 많은데. 나는 윤의 농담에 수긍하며 말했다.

“맞아요. 정치인의 가족으로 살면 불편한 점이 많아요. 나를 지켜보는 눈이 어디에나 있고, 표심을 잡으려면 나 같은 손자가 있는 게 좋으니까, 내 뜻과 상관없이 오늘처럼 끌려 나가기도 하죠.”

윤의 얼굴에는 내가 딱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딱할 것까지야. 이런 일은 신물이 날 만큼 익숙한데. 하지만 그가 맞다. 나는 할아버지 때문에 때때로 무척 피곤하고,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이 달갑지 않다. 그를 거스르는 것이 두려워 그의 기대에 착실하게 부응해 왔는데, 그는 나를 손자가 아니라 체스판 위의 말로 보는 것이 느껴지니까.

“잘하고 와요.”

“고마워요.”

윤이 나를 응원했다. 나는 윤의 말에 웃으며 대답하고, 차 키를 챙겨 집을 나섰다.

가을 학기 8주차, 윤

학교에 가자마자 빈 세미나실에 들어가 발표 연습을 했다. 오늘 발표는 괜찮았다. 알렉스가 검토해 준 덕분에 ppt에는 결점이 없었다. 나는 논문 내용을 요약해서 차근차근 설명했고, 준비한 주제로 토론도 무사히 이끌었다.

발표를 마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마셨다. 나는 사실 아침에 알렉스를 만났을 때, 오늘이 발표날이니까 응원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알렉스의 기분이 나빠 보여서 말하지 않았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밍 교수님의 학부 수업 과제를 채점했고, 논문 세 편을 읽고 공용 연구실을 나섰다.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없어서 점심을 걸렀더니 배가 너무 고팠다. 논문을 읽을 때도 에너지가 부족해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지만, 굳은 머리를 부여잡고 열심히 읽었다. 논문을 읽으면서 다짐했다. 오늘은 고생했으니 집에 가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쉬어야겠다고.

아파트 현관에 도착했을 때, 낯선 사람들을 발견했다. 검은 슈트에 흰 셔츠, 검은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몇 명 서 있었다. 내가 계단을 올라가려고 하자, 그들 중 한 명이 길을 가로막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몇 호에 사십니까?”

“2032호요.”

“잠시만요. 들립니까, 톰? 동양인 남학생이 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전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나는 이어폰을 보고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전문 경호원이었다. 전문 경호원들이 무슨 일로 왔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나는 경호원 중 리더로 보이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네, 물어보겠습니다. 학생, 이름과 국적, 출신지가 어디죠?”

“주윤이요. 한국 서울 출신입니다.”

“주윤, 한국 서울 출신입니다. 인상착의요? 키는 5피트 9인치 정도. 흑발에 검은 눈, 검은 항공 점퍼에 티셔츠, 청바지,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있습니다. 학생, 룸메이트의 차종과 색이 뭐죠?”

“도요타 캠리, 은색이요.”

“캠리, 은색이랍니다. 룸메이트 어머니의 혼전 성이 뭐죠?”

“케인즈요.”

“네. 들어가세요.”

“이게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묻자, 경호원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테신 의원님이 와 계세요. 나는 놀라서 경호원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는 들어가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의원님이 알렉스 씨의 룸메이트를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경호원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상원의원이 왜 손자의 룸메이트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걸까? 나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아파트 현관문 앞에도 경호원이 한 명 서 있었고, 그는 열쇠로 현관문을 열려는 나를 제지했다. 경호원이 나 대신 말했다.

“룸메이트 학생 왔습니다.”

경호원의 말을 듣고, 집 안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어 주었다. 문을 연 사람도 경호원이었다. 경호원 한 명은 내 백팩을 열어 짐을 전부 검사했고, 다른 한 명은 내 몸을 수색했다. 나는 기가 질리고 말았다. 거실에는 경호원이 한 명 더 있었고, 보좌관도 두 명이나 있었다. 알렉스가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윤, 미안해요.”

몸수색이 끝나고 나서야 거실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거실 소파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소파는 창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여있었고, 슈트를 입은 노신사 한 명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노신사는 나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위키피디아에서 보았던 얼굴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알렉산더 테신 주니어 상원의원. 백발이 성성하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지만, 체격이 크고 자세가 곧아서 나이가 많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테신 의원이 나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알렉산더입니다. 알렉스는 내 손자죠.”

“주윤이라고 합니다. 알렉스의 룸메이트예요.”

그는 나에게 오른손을 내밀었고, 나는 힘있게 그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테신 의원은 나에게 소파 한쪽 자리를 권했다.

“이리 와서 앉아요. 학생은 한국에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내 아버님은 한국 전쟁에도 참전하셨는데, 전쟁으로 파괴된 한국을 많이 걱정하셨죠. 나는 한국의 경제가 놀랄 만큼 발전해서 정말 다행이고 경이롭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테신 의원은 매너가 좋았지만, 눈빛은 아주 날카로웠다. 테신 의원이 나에게 물었다.

“출신지가 어디지요?”

“서울입니다.”

“전공은?”

“컴퓨터 공학입니다.”

“대학원생이에요?”

“네. 박사 과정입니다.”

“한국에서 학사를 마쳤어요?”

“네. 석사도 한국에서 했습니다.”

“한국 출신이면 군 복무를 마쳤겠어요?”

“네. 군사 분계선에서 복무했습니다.”

“훌륭하네요. 경기도 북부?”

“아니요. 강원도 인제였습니다.”

“미국에는 처음 와 보는 건가요?”

“아니요. 어릴 때 오스틴에서 3년 살았습니다. 아빠 일 때문에요.”

“오스틴?”

내 대답을 듣고, 테신 의원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내가 대답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알렉스가 테신 의원의 심문에 끼어들었다.

“윤의 아버님은 이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의 부사장이에요. 누나가 한 명 있는데 한국에서 가장 큰 로펌의 어소시에이트 변호사예요.”

“가족들이 다들 똑똑하시구먼. 우리 손자놈, 같이 살기 어때요?”

미국 사람들은 초면에 가족의 직업이나 배경을 묻지 않는데, 테신 의원은 초면부터 내 배경을 궁금해했다. 나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좋은 룸메이트라고 생각합니다. 생활 습관도 잘 맞고 친절합니다.”

“다행이네요. 박사 과정을 마치는 데 몇 년이나 걸립니까?”

“5년으로 예상합니다.”

“그러면 알렉스가 먼저 졸업하겠네. 그때 가서 룸메이트와 헤어지려면 섭섭하겠어.”

“아무래도 그렇겠죠. 저는 3년이면 졸업하니까요.”

알렉스가 웃으면서 테신 의원의 말에 대답했다. 테신 의원이 나에게 다시 물었다.

“졸업하고 나서 한국에 돌아갈 건가요?”

“……여기서 취직하려고 합니다.”

“그래요? 훌륭한 인재라 한국에도 좋은 기회가 많을 텐데?”

“한국에도 좋은 기회가 많겠지만, 저는 미국에 남고 싶습니다.”

“……그래요. 이곳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며 많은 것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테신 의원은 나를 계속 심문하려고 했다. 그때, 두 명의 보좌관 중 여자 보좌관이 테신 의원에게 말했다.

“의원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비행기 시간이 한 시간 반 남았습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리사. 이제 이 늙은이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알렉스와 잘 지내요.”

테신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다시 한번 악수를 청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테신 의원과 악수했다. 테신 의원은 아파트를 나서다 말고, 손짓으로 알렉스를 불렀다.

“나와 잠깐 이야기하자.”

의원의 말을 듣고, 알렉스는 테신 의원과 함께 현관을 나섰다.

가을 학기 8주차, 알렉스

할아버지가 아파트 계단 앞에서 말했다. 너, 룸메이트와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할아버지는 신기한 일을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좋은 친구니까요.”

“그래 보이기는 한다만, 혹시 모르니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말고.”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나중에 네가 출마하게 될지도 모르니, 흠 잡힐 거리를 만들지 않도록 신경 써서 나쁠 건 없단 이야기다. 네가 출마하면 사람들이 너를 낱낱이 검증하려 들 테니까.”

“…….”

“잘 있거라. 추수 감사절에 보자.”

출마라니. 정치에 뛰어들 생각은 없는데.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출마라니? 할아버지가 너무 앞서가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말끝을 흐리면서 대답했다.

“……네.”

할아버지는 보좌관과 함께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할아버지가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보다가 입안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할아버지의 반응을 보니, 짐작했던 것이 맞았다. 노회한 정객은 의심이 많고 매사에 정치적인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윤을 시험하고, 그가 나에게 위험한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했다. 윤이 당신의 경주마에게 흠집을 낼까 봐 걱정한 것이다.

할아버지를 마주할 때마다 느낀다. 나는 할아버지의 손자가 아니라 정치 선전 도구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 미식축구 교실에서 재능을 보인 순간부터, 할아버지가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저 녀석을 잘 키워서 써먹어야겠다고. 할아버지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놈이 상류층의 스포츠인 승마나 폴로, 테니스를 잘하는 것보다, 미식축구를 잘하는 것이 유용할 거다. 미식축구는 텍사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니까, 저 녀석이 잘하면 유권자들의 호감을 끌 수 있다. 할아버지는 초등학교 1학년인 나를 두고 음흉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과연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할아버지는 나를 정말로 공화당 전당 대회나 당신의 선거 유세에 끌고 다니면서 유용하게 써먹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내 의사는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손자를 도구로 보는 할아버지라니. 할아버지가 나를 철저히 도구로 취급할 때마다 숨이 막혔다. 이제 도구 노릇은 그만하고 싶었다.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나에게는 더 이상 선전 도구로서의 가치가 없으니 할아버지가 나를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를 여전히 당신을 위한 도구로 보고 있었고, 나는 할아버지에게 반항하지 못했다. 우리 집안에서 할아버지의 말은 곧 법이니까. 우리 집안에서 할아버지의 말을 거스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할머니뿐인데, 할머니는 거의 할아버지의 편을 들었다.

씁쓸한 생각을 하면서 현관문 앞에 섰다. 문은 잠겨 있었고, 열쇠를 가지고 나가지 않아서 현관문을 열 수 없었다. 내가 현관문을 두들기자 윤이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가셨어요?”

“네, 보좌관들이 모시고 내려갔어요.”

나는 윤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현관문을 닫았다. 윤이 팔짱을 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말했다.

“미리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할아버지가 갑자기 집에 와보고 싶다고 하셔서 말릴 수가 없었어요.”

“괜찮아요. 근데 의원님이 저에게 궁금하신 게 많나 봐요?”

윤은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룸메이트의 할아버지가 초면에 무례한 질문을 해댔는데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을 거예요.”

“네? 그럼 질문은 왜 해요?”

“할아버지는 윤을 조사하시고 나서, 확인 차원에서 윤에게 이거저거 물어보셨을 거예요. 윤이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 본 거죠.”

“…….”

“정말 미안해요.”

“시험당하는 줄도 모르고 시험을 당하다니……. 기분이 정말 더럽네요.”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할아버님께서는 내가 불법 체류를 할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

“그건 아닐 거예요. 그냥-”

“알았어요.”

윤은 단호하게 말하면서, 내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나는 윤의 매서워진 눈매를 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할아버지가 윤을 잠재적 거짓말쟁이로 취급했으니 굉장히 기분 나쁠 것이다. 동양 문화권도 정직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이곳에서는 정직이 정말 중요한 덕목이었다. 욕 중에서 거짓말쟁이라는 욕보다 심한 욕이 거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윤의 반응을 이해한다. 할아버지가 윤에게 정말 큰 결례를 저질렀다.

가을 학기 9주차, 윤

알렉스가 코스트코에 장을 보러 간다고 해서 따라나섰다. 전에 사다 놓은 삼겹살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따라갔다.

수빈의 말에 의하면, 한국 학생들은 돈을 아끼기 위해 두 명이 연회비를 나눠 내고, 회원증을 가진 사람이 코스트코에 갈 때마다 회원증이 없는 사람들이 여럿 따라간다고 했다. 하지만 부잣집 도련님인 알렉스는 연회비를 혼자 냈다.

나에게 코스트코는 정말 소중한 곳이었다. 한국에서도 자주 이용했고, 여기에서는 코스트코에 가면 한국에서 먹던 것과 똑같은 삼겹살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회원증이 없고, 나는 한국 학생들과 친하지 않기 때문에 혼자서는 코스트코에 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알렉스가 코스트코에 갈 때마다 따라 다녔다.

코스트코는 차로 15분이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나는 알렉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가 창밖을 보았다. 이곳의 가을은 한국보다는 따뜻하지만, 풍경은 훨씬 황량하고 삭막했다. 시가지를 조금 벗어나자 풍력 발전용 풍차가 끝없이 보이고, 황무지에 석유 시추기가 늘어서 있고, 지평선에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학교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다 보면, 이곳이 한국인지 미국인지 구별이 안 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오늘처럼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볼 때면, 내가 미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생각 해요?”

알렉스가 운전하다 말고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조수석 창밖을 보며 대답했다.

“가을이 왔다는 생각이요.”

“한국의 가을은 어때요?”

“날씨가 맑고 서늘하고, 하늘은 엄청나게 파래요. 나는 1년 중에 가을이 제일 좋은데, 가을이 사계절 중에 제일 짧아요. 알렉스는 어떤 계절을 좋아해요?”

“나는 봄을 좋아해요. 꽃이 피고 따뜻하잖아요.”

알렉스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는 봄을 좋아하고, 봄이 되면 다른 사람들처럼 봄노래를 듣고 벚꽃 놀이를 즐겼다. 내 생일이 마침 벚꽃이 피는 즈음이기도 했다. 나는 벚꽃을 생각하다가 알렉스에게 물었다.

“여기도 벚꽃이 피나요?”

“오스틴에는 4월 초에 벚꽃이 피는데, 여기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오스틴의 벚꽃은 어떨까? 여기도 벚꽃놀이 문화가 있나? 벚꽃이 핀다면 혼자서라도 벚꽃을 보러 갈 것이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계속 내다보았다.

* * *

코스트코에 가니 한국식 소불고기를 팔고 있었다. 전에 왔을 때는 소불고기가 없었는데. 소불고기 한 팩을 집어 카트에 넣는데 엄마 생각이 났다. 소불고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반찬이었고, 엄마는 나에게 소불고기를 자주 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곧 엄마의 기일이었다. 이제 가족들을 볼 일이 없으니, 엄마의 기일은 나 혼자 작게 지켜야 한다. 엄마의 기일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꽃을 사고, 엄마를 위해 기도해야지. 엄마 생각을 하느라 정육 코너에 멍하게 서 있는데, 알렉스가 내 곁으로 오면서 물었다.

“이건 뭐예요?”

“소불고기요.”

“먹어본 적은 없지만, 뭔지는 알아요. 이거 맛있어요?”

“네. 집에 가서 저녁으로 먹어볼래요?”

“좋아요.”

집에는 아마존에서 산 즉석밥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즉석밥을 데우고 불고기를 끓이고 김치와 샐러드와 같이 먹으면 그럴싸한 저녁이 될 것이다. 저녁을 맛있게 먹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래서 나는 엄마 생각을 그만두고 장보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 * *

집에 도착해서 장 봐온 것을 정리했다. 삼겹살과 소불고기를 지퍼백에 소분하고, 냉동실에 정리해서 넣었다. 그리고 한인 마트에서 산 뚝배기에 불고기를 끓이고 샐러드 채소를 씻어 랜치 소스와 같이 냈다. 김치를 꺼내 식탁 위에 놓고 앞접시도 놓는데, 알렉스가 부엌으로 오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윤이 해 주는 저녁은 처음 먹어 보네요. 기대된다.”

“한 입 먹어 볼래요?”

“그래요.”

나는 불고기를 가위로 잘게 자르고, 한 조각을 요리용 젓가락으로 집어 알렉스에게 건넸다. 알렉스는 내가 건넨 소고기를 씹어 삼키고 나서 소감을 말했다.

“맛있네요. 간장 맛이 많이 나요. 단맛도 나고.”

나도 맛을 보았다.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고, 심지어 엄마가 만든 것과 맛이 거의 비슷해서 신기했다. 나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트에서 파는 것치고는 괜찮은데요? 엄마가 해 줬던 것과 맛이 비슷해요. 버섯을 넣으면 더 맛있을 거 같아요.”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셨다고 했죠?”

갑자기 알렉스가 엄마에 대해 물었다. 나는 알렉스에게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고만 말했고, 엄마가 언제, 왜 세상을 떠났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알렉스가 갑자기 왜 우리 엄마에 대해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엄마가 죽은 이유와 시점을 굳이 숨길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중학교 3학년 때요.”

“실례가 안 된다면 어쩌다 그랬는지 물어봐도 돼요? 대답하기 힘들면 안 해도 되고.”

알렉스를 올려다보니, 전등을 등진 알렉스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다. 나는 알렉스의 그늘진 눈썹뼈와 콧날을 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나는 과학고 입시 때문에 학원에 다니고 있었어요. 엄마가 학원으로 나를 데리러 와서 집에 가는 길이었는데, 고속도로에서 빗길 10중 추돌 사고에 휘말렸어요. 나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엄마는…… 즉사했어요. 마지막 순간에 엄마가 엄마 쪽으로 핸들을 꺾었거든요.”

나는 담담하게 말하며 손에 오븐 장갑을 꼈다. 식탁 위에 냄비 받침을 놓고, 소불고기가 든 뚝배기를 내려놓고, 오븐 장갑을 벗고, 즉석밥 뚜껑을 조금 뜯어 전자레인지에 넣고 1분 30초로 조리 시간을 설정하는데,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전자레인지 문에 내 얼굴이 비쳤다. 가면처럼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엄마가 죽고, 나는 한동안 엄마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울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울지 않게 되었고, 지금도 울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전자레인지에 비친 알렉스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알렉스가 나 대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두 번째 즉석밥 뚜껑을 뜯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근데 그때는 괜찮지 않았어요. 나도 뼈가 부러져서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었거든요. 그래서 과학고 시험을 보러 가지 못했고, 엄마가 죽은 것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웠어요. 내가 그날 기분이 안 좋다고, 엄마한테 데리러 와달라고 떼를 쓰는 바람에 사고가 난 거니까.”

“…….”

“병실에 누워 있는데, 아빠가 나에게…… 엄마 대신 내가 죽었어야 했다고 말했어요. 엄마가 죽고 혼자 살아 있으니까 좋냐고도 물었어요. 그 말을 듣고 내가 우니까, 사내새끼가 나약해 빠졌다고 화내고. 그 이후로도 내가 뭘 잘못하기만 하면 엄마 대신 내가 죽었어야 했다고 혼내고. 아빠는 지금도 나를 원망하고 있어요.”

전자레인지가 조리를 마쳤고, 벨이 울렸다. 전자레인지에서 덥힌 즉석밥을 꺼내고 두 번째 즉석밥을 넣었다. 조리 시간을 다시 1분 30초에 맞추고 시작 버튼을 누르는데, 등 뒤에서 알렉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머니는 천국에 가셨을 거예요.”

“그렇겠죠. 엄마는 선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일부러 전자레인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전자레인지 안에서 즉석밥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내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굉장히 드문데, 오늘따라 말이 술술 나왔다.

“어릴 때부터 나에게는 이상한 구석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족 중에서 엄마만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누나가 나를 구박할 때마다 막아 주고…… 아빠가 나를 못마땅해해도 막아주고…. 그래서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가족 중에는 내 편이 아무도 없어요. 엄마 사진이 있으니까…… 지금도 엄마 얼굴은 볼 수 있는데 목소리는 들을 수 없어서…… 이제 엄마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아서…. 나는 그게 너무 슬퍼요.”

말하고 나니 조금 울고 싶어졌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남자를 좋아했고, 손뜨개와 십자수를 좋아했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쉽게 감동하고 울었다. 아빠와 누나는 남자애가 별나고 눈물이 많다면서 질색했다. 그나마 아빠보다는 누나가 나았다. 아빠는 언제나 나를 미워했지만, 누나는 가끔 나를 불쌍해하기도 했으니까. 엄마는 아빠와 누나가 나를 못마땅해할 때마다 그들을 말리고 나를 격려했다.

‘윤아, 엄마는 네가 착하고 감수성이 풍부해서 좋아. 아빠와 환이는 뭘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알겠지? 나중에는 다들 네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알게 될 거야.’

전자레인지가 조리를 마치고 삑삑 소리를 냈다. 전자레인지 문을 열고 즉석밥을 꺼냈다. 용기가 뜨거워서 손끝을 델 것 같아 즉석밥을 식탁 위에 후다닥 내려놓는데, 알렉스의 표정이 묘했다.

“왜 그래요?”

“그건 사고였어요. 그러니까 윤의 잘못이 아니에요.”

“뭐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사고의 발단은 내가 제공한 거니까 내 잘못이 맞아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이제는 괜찮아요. 얼른 저녁 먹어요. 이러다가 식겠어요.”

“이제는?”

“네.”

“……알겠어요.”

알렉스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식탁에 앉았고, 내가 내미는 포크와 숟가락을 받아 들었다. 나는 알렉스의 건너편 자리에 앉으며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정말 괜찮아요.”

“상담이나 정신과 치료는 받았어요?”

“아뇨.”

“그러면 어떻게 이겨냈어요?”

“시간이 약이에요.”

내 대답을 듣고, 알렉스는 얼굴을 더욱 굳혔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었지만, 알렉스는 평소답지 않게 밥을 깨작거리며 먹었다. 그래서 알렉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저 대식가가 밥을 안 먹을 만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소불고기가 입에 안 맞는 것이다. 나는 알렉스에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소불고기가 별로예요?”

“아뇨. 맛있어요.”

“근데 왜 그래요?”

나는 알렉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나에게 물었다.

“어머니 기일이 언제예요?”

“11월 5일이요.”

“그날, 우리 같이 기도하죠.”

“기도요?”

“네.”

“그래요.”

내 말을 듣고 나서, 알렉스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을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하자, 그는 대식가답게 즉석밥 하나를 금방 다 먹었다. 나는 알렉스에게 즉석밥 하나를 추가로 데워줬고, 알렉스는 밥을 먹는 내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하고 민망했다.

가을 학기 10주차, 알렉스

법학 도서관에 앉아 비행기 표를 확인했다. 추수 감사절 연휴 동안 오스틴에 다녀오기 위해 비행기 표를 끊었다. 예매를 마치고, 오늘의 일정을 확인했다. 상담이 있는 날이었다. 점심을 베이글과 딸기 스무디로 때우고 학교 상담 센터로 갔다. 잭 선생님은 나를 보고 싱긋 웃어 보였다.

“요새 학교생활은 어때요?”

“정신없어요. 이번 학기는 종강할 때까지 계속 이럴 것 같아요.”

잭 선생님은 학기 달력을 한 번 힐끗 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종강이 12월 7일이죠?”

“네.”

“종강이 한 달 조금 넘게 남았네요.”

“시간이 정말 빨리 가네요.”

“나도 박사 시절에는 그랬어요. 바쁘게 지내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한 학기가 지나 있고. 그 과정을 열 번 반복하다 보니 5년이 흘렀고 박사 학위를 땄네요. 아무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거든요. 그 친구와 저희 할아버지가 만났는데, 할아버지가 그 친구에게 결례를 저질렀어요.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은 그 친구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거예요.”

“자세히 말해 보세요.”

“그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은 건 처음이에요. 그 친구와 어머니가 같이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는데, 그 친구는 살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대요. 그 친구는 평소에 어머니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고,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매우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가족들은 모두 그 친구를 원망했다고 하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어땠어요?”

“저는 정말 슬펐어요. 불행한 사고인 것은 맞지만, 말 그대로 사고잖아요. 그 친구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런데도 가족들은 그 친구를 원망했다고 했어요. 가족들이 너무한 거예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친구와 같이 슬픔을 나누고 싶어서…. 어머니 기일에 같이 기도하자고 했어요. 근데 그 순간, 저는 그 친구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봤어요. 그런데도 그 친구는 끝까지 울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은 척을 했어요.”

“원래 동양 문화권에서는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와는 다르죠. 우리는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죠? 제 상식으로도 그렇기는 한데….”

“네.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봤다면서요. 알렉스가 본 것이 맞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슬프지 않겠어요?”

나는 상담 선생님의 말씀에 수긍했다. 내가 크로셰 담요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잭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다.

“알렉스, 일기는 열심히 썼나요?”

“네.”

“일기를 읽어 봤어요?”

“네.”

“읽어보니 흐름이 어떻던가요?”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그동안 느낀 것을 그대로 말했다.

“제가 쓴 일기를 쭉 봤는데, 저는 그 친구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여자 친구보다 더요.”

“여자 친구와는 장거리 연애라고 했죠?”

“네.”

“여전히 룸메이트를 좋아하는 게 불편해요? 남자를 좋아하면 안 될 것 같고?”

“전만큼 불편하지는 않아요.”

“변화가 있었네요.”

“네.”

잭 선생님이 질문의 수위를 점점 올리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질문의 수위가 높아져도 문제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설마 더 센 질문을 하려나? 선생님은 미동도 없이 다음 질문을 던졌고, 나는 잭 선생님이 던진 질문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그 친구와 데이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달콤하고 로맨틱한 데이트를 말하는 거예요.”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윤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고, 지금도 자주 그렇다. 하지만 데이트라는 말은 아직 낯간지러웠다. 남자와 남자가 데이트를 한다니. 데이트는 교제의 첫 단계이지 않나? 내가 남자와 교제를 한다니.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막연히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내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매우 혼란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그건 아직 자신이 없어요.”

* * *

상담이 끝나고, 잭 선생님은 이번 학기에 두 번의 상담이 남았다고 말씀하셨고, 상담이 더 필요하면 기한을 연장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나는 상담이 추가로 필요하면 선생님께 말씀드리겠다고 대답하고 상담실을 나왔다. 상담실을 나오는데, 낯익은 리셉셔니스트가 오늘따라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를 힐끗 보고 상담실을 나왔다.

가을 학기 10주차, 윤

오늘은 할로윈이었다. 동네 꼬마들이 아침부터 할로윈 분장을 하고 뛰어다녔다. 나도 오스틴에 살던 시절, 할로윈이 되면 귀신 분장을 하고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사탕을 받으러 다녔다. 하지만 학교는 잠잠했다. 아파트 근처 가게와 학교 강의실에 할로윈 호박 장식이 달려 있지만, 학교에 코스프레를 하고 온 사람은 없었다.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사탕을 하나씩 나눠줄 뿐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수빈이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잠깐 시간 돼?

공용 연구실에 있는 내 자리에 앉아 메시지를 확인했고, 벽에 붙여놓은 일정표를 보았다. 오늘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비는 시간이 없었다. 나는 수빈의 메시지에 회신했다.

- 오늘 보려면 수업 끝나고 보자.

- 좋아, 그럼 그때 학교 카페에서 보자.

수빈은 학교 안에 있는 카페에서 보자고 했다. 약속 시각에 맞춰 카페로 갔더니, 수빈은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볼살이 조금 빠져 있었다. 나는 수빈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여기 한국 사람 없지? 확인하기는 했는데.]

수빈의 말을 듣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근처에 우리 외에 다른 동양인들은 없었다. 나는 수빈의 질문에 대답했다.

[없는 것 같아.]

[진짜 없는 거 맞지?]

[응. 근데 무슨 일이야?]

[그동안 어이없는 일이 있었어. 진짜 기가 막히는 일이야.]

[뭔데.]

[한인 교회 사람들 진짜 이상해.]

[왜? 무슨 일 있었어?]

[나, 한인 교회 다녔던 거 알지? 그 교회 사람들 사이에, 내가 완전 걸레라고 소문났어. 내가 진짜 무슨 일이 있었기라도 하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 한인 청년부 안에서 지들끼리 돌려 사귀는데, 나는 그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어서, 몇 번 고백을 받았지만 전부 거절했단 말이야. 그걸 가지고 그 새끼들이 앙심을 품고 나쁜 소문을 낸 거 같아. 어느 날부터 교회 어른들이 이유 없이 나를 쎄하게 대하길래 기분이 나빴는데, 그게 그 소문 때문이었어. 어떤 새끼가 두 번째로 고백하길래 내가 거절했더니, 어차피 걸레면서 왜 이렇게 비싸게 구냐고 그러더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치졸하지?]

[진정해.]

[해외 나가면, 한국 사람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진짜 많이 들었는데 내가 당할 줄은 몰랐다. 아, 열 받아.]

수빈은 긴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흥분한 수빈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다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까지 우리를 흘낏거렸다. 나는 수빈을 말리며, 주변에 한국 사람이 없는지 다시 살펴보았다. 이번에도 한국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화가 난 수빈은 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뚜껑을 따고 남은 것을 단번에 마셔버렸다.

[앞으로 그 교회에 절대 가지 마.]

[응.]

[네가 현명했어. 나도 이제 그 교회 안 갈 거야. 나한테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빈이 콧김을 뿜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직원에게 가서 물을 달라고 했다. 직원은 톨 사이즈 컵에 물과 얼음을 담아 주었다. 나는 자리에 다시 앉으며 수빈에게 물을 건넸다. 수빈은 뚜껑을 열고 물을 통째로 마셨고, 얼음을 몇 개 씹으면서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시간 뺏어서 미안. 너도 할 일 많은데.]

[괜찮아.]

나는 정말 괜찮았다. 할 일을 전부 마치고 나왔고, 수빈이 진정하고 기분이 나아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수빈이 콧김을 한 번 더 뿜고 말했다.

[사실 나는 할 일이 많아서, 연구실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해.]

수빈은 남은 물을 모두 마시고, 손으로 플라스틱 컵을 와작 구겼다. 나는 수빈의 백팩을 집었고, 그녀가 백팩을 등에 메기 편하도록 어깨끈을 벌려주었다. 수빈이 등에 백팩을 메며 나에게 물었다.

[맞다, 요새도 그 문화 토론 세션에 가?]

[아니. 바빠서 계속 못 갔어. 너는?]

[나도 한동안 못 갔어. 다음 학기에는 꼭 가자. 그거도 안 하니까 영어가 제자리야.]

[그래.]

나와 수빈은 카페에서 나와 공학관까지 같이 걸어갔다. 내 연구실은 서관에 있었고, 수빈의 연구실은 북관에 있었다. 우리는 건물 앞에서 헤어졌고, 나는 집을 향해 걸었다.

수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참으로 오싹하고 기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을 떠나 만리타향에서 사는 삶은 외롭고 고되다. 서로 돕고 살기만도 바쁠 텐데 왜 그러지? 신을 믿는 사람들이 왜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헛소문을 내고 괴롭히지? 그것도 여자애를 세상에서 가장 치졸한 방식으로 괴롭히다니.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할까?

* * *

학교에서 재미있는 메일을 받았다. 대학원생은 무료로 대학 미식축구 경기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유튜브에서 슈퍼볼 하프타임 쇼는 본 적이 있지만, 미식축구 경기는 본 적이 없었다. 수빈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그녀에게 미식축구 경기를 보러 가자고 했더니, 그녀는 고맙지만 과제가 많아 바쁘다고 거절했다.

혼자서라도 갈까? 혼자 가면 심심할 것 같은데. 나는 미식축구 경기가 궁금해서 꼭 보러 가고 싶었기 때문에, 판례를 열심히 읽고 있는 알렉스에게 물었다.

“다음 미식축구 경기가 무료라고 하는데, 보러 갈래요?”

“언제요?”

“다음 주 토요일에요.”

“좋아요.”

알렉스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알렉스가 좋다고 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그를 두고 내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던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내일모레가 11월 5일이죠? 어머니가 어떤 꽃을 좋아하셨어요?”

“장미?”

엄마는 사실 벚꽃을 제일 좋아했다. 엄마가 나를 낳고 퇴원하는 길에 벚꽃이 만발했는데, 벚꽃이 내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피어난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초겨울이라 벚꽃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반면 장미는 무난한 꽃이었다. 아빠가 엄마에게 결혼기념일마다 장미와 선물을 같이 건네기도 해서, 장미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듣고, 알렉스가 말했다.

“그래요, 그러면 어머니를 위해 장미를 살게요.”

* * *

11월 5일은 엄마의 기일이었다. 알렉스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흰 장미 한 다발을 사 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얘는 나를 정말, 그리고 자주 놀라게 한다.

알렉스는 꽃과 어울리는 꽃병까지 사 왔다. 그는 장미를 손질하더니, 꽃병에 꽃을 꽂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알렉스는 방에서 기도서를 가지고 왔고, 우리는 식탁 앞에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윤의 어머니를 뵌 적은 없지만, 흰색이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흰색으로 샀어요.”

“고마워요.”

“이제, 어머니를 위해 기도합시다.”

알렉스는 기도서를 펼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기도문을 읽었다. 종교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기도문은 영어 고어체로 되어 있어서, 나는 알렉스가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기도문을 읽는 알렉스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듣기 좋았다. 알렉스가 진실한 마음을 담아 엄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기도를 마치고 알렉스를 보았다. 알렉스는 기도문을 읽고 나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묵상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좋아하지만, 알렉스가 아파트를 떠나는 날까지 내 마음을 고백할 수 없을 것이다. 알렉스는 헤테로이고 나는 게이다. 우리는 잘될 수가 없다. 게다가 알렉스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기 이전에 좋은 친구라서, 내 감정을 앞세웠다가 소중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서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될 줄은 몰랐다. 문화 차이가 있고 생활이 바빠 친구를 사귀기 어려우리라 생각했는데, 알렉스를 만났다. 알렉스가 내 룸메이트라 정말 다행이었다. 알렉스는 3년 뒤면 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을 떠날 것이다. 알렉스가 학교를 졸업하면, 우리는 가끔 안부나 묻는 사이가 되겠지. 나는 우리가 그 정도의 친분이라도 유지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가을 학기 11주차, 알렉스

윤이 미식축구 경기장에 음식을 가져가려고 해서 말렸다. 911 테러 이후, 모든 스포츠 경기장에는 가방을 들고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소지품과 지갑을 넣는 투명하고 조그만 비닐 가방만 허용되었고, 음식도 음료도 모두 경기장 안에서 사 먹어야 했다. 나는 그 사실을 윤에게 알려 주었다.

“경기장에 가방은 못 갖고 들어가요. 아이폰, 지갑, 신분증만 챙겨요.”

“네.”

우리는 경기장까지 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다. 경기는 여섯 시 시작이었고, 경기 시작이 임박한 시간이라 경기장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경기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으니, 일몰 시각이 지났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 마칭 밴드가 신나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곡 연주가 끝나고 관중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지휘자가 단상에 서고 마칭 밴드가 기다렸다는 듯 국가를 연주했다. 모든 사람이 심장 위에 오른손을 얹고 큰 목소리로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 역시 심장 위에 오른손을 얹고 국가를 불렀다. 국가를 부르니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고 흥분되었다. 운동하던 시절에도, 경기 시작 전에 국가를 부르면 피가 끓었다. 그러니 다른 관중들도 국가를 부르면서 피가 끓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국가 제창이 끝났다. 엄청난 불꽃놀이가 쏘아 올려지며, 짙푸른 저녁 하늘을 아름답게 빛냈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을 보며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환호했다. 마칭 밴드가 학교 팀 응원가를 연주하고 사람들이 팀 응원가를 불렀다. 이 응원가를 경기장에서 몇 번 들어봐서 익숙했지만, 따라 부르지는 않았다. 내가 몸담았던 팀이 아닌 팀의 응원가는 부르고 싶지 않았다.

경기가 시작하기 직전, 다른 학교들의 경기 실황이 전광판에 짧게 나왔다. 익숙한 흰색과 오렌지색 유니폼을 보자마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는 저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직접 나갔는데, 이제는 모교의 경기를 다른 학교 스타디움에서 전광판으로 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나마 내 팀이 이기고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저기가 모교죠?”

“네.”

“유니폼이 예쁘네요.”

윤이 나더러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윤의 평가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학교 유니폼이 예쁜가? 나는 잘 모르겠다. 그 유니폼에 너무 익숙해서 미추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윤이 나에게 말했다.

“알렉스가 저거 입고 경기할 때 정말 멋있던데요.”

“경기 영상을 찾아봤어요?

“네.”

사람들이 환호하며 공중으로 동그란 원반을 던지고, 선수들이 순서대로 입장했다. 선수들이 한 명씩 입장할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장내 아나운서가 선수의 이름을 부르고 부모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장내 아나운서가 내 이름을 부르던 순간을 떠올렸다.

‘알렉산더 테신 4세, 줄리아 케인즈 박사와 알렉산더 테신 3세의 외동아들! 오늘 경기에는 줄리아 케인즈 박사와 알렉산더 테신 3세 모두 참석했습니다!’

내 이름이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다. 그러면 관중석에 앉아 있던 부모님이 사람들의 커다란 함성에 뿌듯해하는 모습이 전광판 가득 비치곤 했다.

나의 마지막 경기는 3년 전의 지역 리그 결승전이었고, 그날 우리 팀은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3년 전이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데, 그날은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그날을 생각하다가, 나는 경기장에 서 있는 선수들을 보았다. 지금 경기장에서 뛰라고 하면, 뛸 수 있을까? 작전은 금방 이해하겠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을 것이다. 내 몸은 너무 많이 상해서 경기장에서의 격한 충돌을 버티지 못한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두 팀 모두 경기력이 좋지 않아서 경기가 지루했다. 나는 스탠드 옆자리에 서 있는 윤을 보았다. 윤은 추위에 몸을 떨고 있었고, 나는 패딩 점퍼를 벗어 윤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내 패딩 점퍼를 걸친 윤은 나를 한참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알렉스는 춥지 않아요?”

“나는 괜찮아요. 따뜻한 거 마실래요?”

“네.”

“자리 뺏기면 안 되니까 윤은 여기 있어요. 내가 사 올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선공하는 상대편이 10야드 전진했다고 외치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점에 가서 핫초콜릿 두 잔을 샀다. 마실 것을 사서 자리로 돌아가는데, 갑자기 웃음이 났다. 나는 뜻밖의 사실을 깨닫고 말았으니까.

이게 데이트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데이트라고 할 수 있나? 상담 선생님이 말하던 로맨틱한 데이트. 호감이 가는 사람과 세상에서 가장 내밀한 사이가 되고자 하는 바람을 품고 단둘이 만나는 관계. 옷을 벗어 주고, 추울까 봐 따뜻한 것을 사주고, 관심사를 공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윤은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 기준에서 보면 이것은 데이트가 맞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나는 왜 상담 선생님에게 자신이 없다고 말했던 것일까? 결국 이렇게 될 거였으면서. 내 상황이 하도 우스워서 하하 웃으며 자리로 돌아가는데, 윤이 나를 보고 물었다.

“금방 왔네요?”

“여기요.”

나는 윤에게 핫초콜릿을 내밀었다. 윤은 나에게 핫초콜릿을 받았고, 그것을 마시며 경기의 흐름을 지켜보았다. 나는 윤의 옆얼굴을 보다가 물었다.

“규칙을 설명해 줄까요?”

“아뇨. 보니까 대충 알겠어요. 공을 들고 상대편 진영으로 전진하면 점수를 내는 것 아닌가요? 터치다운을 하면 점수가 많이 나고.”

윤은 큰 흐름을 금방 파악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윤의 머리가 좋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추가로 설명할 것이 없어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맞아요. 상세한 경기 규칙이 있긴 한데, 보다가 모르겠으면 물어봐요.”

“네.”

* * *

결국, 윤에게 경기 규칙에 대해 설명할 기회는 없었다. 윤이 두 번째 쿼터가 끝날 무렵부터 추위에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기장을 나섰고, 빠르게 주차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주차장 구석에 은색 캠리가 서 있었다. 윤은 내 점퍼를 걸친 채로 조수석에 앉았고, 나는 운전석에 앉았다. 차에 시동을 거는데, 윤이 말했다.

“나 때문에 경기 못 보게 되어 미안해요.”

“괜찮아요.”

나는 윤을 힐끗 보았다. 상아색 피부가 하얗게 질려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윤을 위해 히터를 가장 높은 온도로 틀었지만, 엔진이 식어 있어서 찬 바람만 나왔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가 윤을 끌어안고 손으로 몸을 문질러 주었다. 엔진이 예열될 때까지는 이게 최선이었다.

윤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윤의 몸을 안고 나니, 다른 것을 하고 싶어졌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싶었고, 나의 감정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있죠, 윤.”

“……네.”

“지금부터 윤에게 키스할 건데, 싫으면…. 밀어내요.”

나는 윤에게 키스했다. 윤은 내 행동에 놀라서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나는 혀로 윤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입술에서 달콤한 핫초콜릿 맛이 났다. 윤의 몸을 안았던 한쪽 팔을 풀고, 그 손으로 윤의 아래턱을 부드럽게 감싸 그의 입술을 살짝 벌렸다. 입술이 벌어지고, 나는 윤의 입 안으로 밀고 들어가 윤과 혀를 섞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혀가 내 혀를 타고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턱을 감쌌던 손으로 뺨을 만졌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곤두서는 기분을 느끼며, 그와 온몸에 땀이 나고 더워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까지 키스했다.

입술이 떨어지고, 윤은 나를 마주 보지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잭 선생님의 말씀대로였다. 남자와 키스한다고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첫 섹스를 하고 동정을 뗐을 때처럼, 방금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어떤 선을 넘어갔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차 안에 오랜 침묵이 흘렀다. 어느새 히터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윤의 뺨을 감쌌던 손을 뻗어 히터 온도를 낮추고 말했다.

“이제 따뜻한 바람이 나오네요.”

“……왜 그랬어요?”

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차 안은 더운데, 내게 안겨 있는 윤은 여전히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는 윤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다가 천천히 말했다.

“내가 지난 몇 달 동안 윤 때문에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아요?”

“……나 때문에 고민했어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으니까. 근데 이제는 어느 정도 알겠어요.”

“네?”

“나는 윤을 좋아해요. 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고…….”

“…….”

“……윤은 어때요?”

“……나도 알렉스를 좋아해요. 절대 티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윤의 말은 예상 밖이었다. 아무래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아서, 윤에게 다시 말해 보라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윤은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나는 알렉스에게 여자 친구가 있어서…… 내 마음을 끝까지 숨기려고 했어요. 내가 알렉스를 좋아하는 티를 내면 싫어할 것 같아서…… 근데 이거 꿈이죠?”

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윤은 웃고 있었지만, 눈꼬리에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울지 말아요.”

아무리 달래도 윤은 계속 울었다. 나는 윤에게 다시 키스했다. 윤은 두 팔로 내 목을 안았고, 나는 그의 목덜미와 등허리를 안았다. 윤은 키스하면서 울음을 그쳐갔다. 길었던 키스가 끝나고, 나는 윤의 왼손을 내 오른손으로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추우니까 우리 집에 가요.”

가을 학기 11주차, 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알렉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에게 보여 주었던 모든 친절은 알렉스의 진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나를 다정하게 대했던 것이었다. 나는 정말 행복했다. 차에서 내려 아파트까지 걸어가는 동안, 딱딱한 땅을 딛고 있는데도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알렉스가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알렉스는 나에게 키스했다. 키 차이가 크게 나서, 나는 까치발을 들어야 했고 알렉스는 허리를 숙여야 했다. 가슴팍과 가슴팍이 맞닿고 숨이 마구 엉켰다. 나도 알렉스도 서두르다 보니 금방 숨이 찼다. 우리는 입술을 떼고 호흡을 골랐다. 알렉스는 나를 꽉 끌어안았고, 나도 알렉스의 몸을 마주 안았다. 그러자 내 이마가 알렉스의 턱 끝에 닿았다.

“어떡하지, 진정이 안 되는데.”

늘 격식을 차리던 알렉스의 말투가 편안해졌다. 나 역시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응.”

나는 알렉스의 등을 토닥이다가 까치발을 들고 그에게 키스했다. 까치발을 들고 키스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다리가 휘청거렸다. 알렉스는 잠시 입술을 떼고, 나를 안아 들어 주방 조리대 위에 앉혔다. 그러자 내 눈높이가 알렉스보다 살짝 높아졌다. 나는 알렉스의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내 입술로 조금씩 머금으며 빨아당겼다. 새가 부리로 쪼는 것처럼 알렉스에게 짧게 키스하다가 알렉스의 금발을 손으로 만졌다. 그의 머리카락은 가늘고 색이 엷었다. 알렉스의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그의 긴 속눈썹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때, 알렉스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나에게 시간을 조금 주면 안 될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무슨 시간?”

“주변을 정리해야지. 내 상황에 대해 사만다와도 이야기를 마쳐야 하고 가족들에게도 이야기해야 해.”

알렉스의 차분한 대답을 들으니, 테신 의원이 떠올랐다. 테신 의원이라면 손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식에 어떻게 반응할까? 그분이 나를 대하던 모습을 보면, 이 소식을 반가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테신 의원을 생각하며, 알렉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에게도 말할 거야?”

“……언젠가는 말하겠지.”

“괜찮겠어……?”

“괜찮지 않다고 해도 어쩌겠어. 할아버지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실 것은 아니잖아.”

“…….”

“우리 엄마 아빠는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알렉스가 내가 그의 남자 친구라고 말해 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내 질문에 알렉스는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데이트하는 거지.”

미국 드라마를 많이 봤기 때문에, 데이트하자는 말이 사귀자는 말과 다른 의미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데이트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애인이라 부르지 않는다.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데이트하는 것도 간섭할 수 없다. 데이트하다가 사이가 진지해지면 비로소 서로를 애인이라 부르고, 서로에게 충실해지기를 요구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알렉스의 말이 너무 섭섭했다.

“싫어?”

“……아니.”

나에게는 싫다고 말할 힘이 없었다. 상대방과 내 마음의 온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비참했다. 나는 알렉스와 키스한 순간부터 그를 내 애인이라 부르고 싶었지만, 알렉스의 마음은 나와 달랐다. 게다가 알렉스는 평생 이성애자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 대한 마음이 식으면 다시 여자를 만날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나는 알렉스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앞으로 얘보다 근사한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만약 알렉스와 헤어진다면, 평생 알렉스와 데이트했던 추억을 곱씹으며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좋다. 이 상황을 즐겨야겠다. 그래서 나는 알렉스의 흥미가 다할 때까지, 알렉스와 연애 비슷한 것을 하는 동안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을 학기 12주차, 알렉스

윤은 기말 과제를 준비하고 있고, 나는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다. 따로 잘 때는 몰랐다. 그런데 한 침대에서 같이 자다 보니, 나는 윤이 잠을 조금 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윤은 하루에 다섯 시간에서 여섯 시간 정도만 잤고, 나보다 한참 늦게 잠들었다.

오늘도 그랬다. 자려고 씻고 나왔는데, 윤이 나를 불렀다.

“알렉스. 이리 와 봐.”

윤은 안경을 쓰고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랩탑 화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윤을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윤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알렉스. 내 기말 과제 문법 좀 봐주면 안 돼?”

“윤, 내가 문법 고치는 기계야?”

나는 장난스레 말했다. 문법을 봐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그래서 윤이 입고 있는 티셔츠 위로 윤의 가슴팍을 만지다가 피어싱이 박혀 있는 오른쪽 젖꼭지를 엄지와 검지로 꽉 쥐었다.

“읏…. 아파…….”

윤의 입술 사이로 젖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몸은 매우 예민해서 내가 만지는 즉시 반응이 돌아왔다. 말캉하고 손에 꽉 차는 여자 가슴을 만지다가 판판한 남자 가슴을 만지려니 조금 어색했지만, 상대의 반응은 비슷했다. 윤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으응…… 그렇지만 학교 라이팅 센터를 두 번만 예약할 수 있었단 말이야.”

이번에는 윤의 티셔츠 아래로 두 손을 넣어 윤의 몸을 만졌다. 눈으로 보기에도 피부가 깨끗하지만, 손으로 만지니 살결이 정말 부드러웠다. 근육이 늘씬하게 붙은 배와 마른 허리, 갈비뼈의 요철을 지나 가슴을 두 손으로 쥐자, 윤이 내 목덜미에 대고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윤의 젖꼭지를 만지면서 물었다.

“내가 문법을 고쳐 주면,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 줄 거야?”

“키스?”

“알았어.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 봐.”

내가 말하자 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윤이 멀어지자마자 손에 감기던 맨살의 보드라운 감촉이 아쉬워졌다. 윤이 문 쪽으로 걸어가며 나에게 물었다.

“의자 갖고 올까?”

“아니, 여기 앉아.”

나는 내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윤은 망설이지 않고 내 무릎에 앉았다. 나는 윤을 품에 안고, 왼손을 그의 티셔츠 안에 넣어 가슴과 젖꼭지를 만지고, 오른손으로는 마우스 휠을 굴리며 문장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문단을 읽자마자 눈앞이 아연해졌다.

논리적인 구조가 잘 짜여 있는 글이라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문단 구조와 윤이 쓴 문단 구조가 완전히 달랐다. 우리는 문단 제일 첫 번째 문장에 핵심 문장을 쓰고 그 문장에 대해 부연하는데, 윤이 쓴 문단의 서두에는 핵심 문장이 보이지 않았다.

핵심 문장을 찾으려고 한 문단을 여러 번 읽었는데, 핵심 문장은 맨 끝에 있었다. 설마 다음 문단도 이러나? 다음 문단을 빠르게 읽어 보았다. 다음 문단 역시 핵심 문장이 맨 끝에 있었다. 그다음 문단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윤의 뺨에 한 번 뽀뽀하고, 그에게 물었다.

“윤.”

“왜?”

“한국에서는 문단의 핵심 문장을 문단의 어느 지점에 써?”

“글쎄……?”

“그러면 여기서 윤이 생각하는 핵심 문장을 찍어 봐.”

나는 한 문단을 커서로 잡고 통째로 드래그했다. 그러자 한 문단이 회색으로 하이라이트 되었다. 윤은 내 예상대로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찍었다. 나는 회색으로 하이라이트 한 문단을 다시 읽었다.

그 문단을 읽다 보니 서글퍼졌다. 우리는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며,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쓰며 사고해 왔다. 우리 사이에는 한국과 미 대륙 사이에 있는 태평양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아무리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한국어로 쓰는 글의 구조와 영어로 쓰는 글의 구조가 완전히 반대인 것처럼, 우리 사이에 끝내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 우리를 종종 슬프게 할 것이다.

“이대로도 좋은 글이지만……. 이 글의 독자는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일 확률이 높잖아? 내가 보기에는 이 글의 구조가 어색해. 내 생각에는…… 문단 구조를 바꿔야 할 것 같아. 문단을 전부 두괄식으로 써. 문법을 고치는 것은 그다음에 해도 돼.”

“전부 다?”

“뒤에도 그렇게 썼을 거 아냐?”

“……맞아.”

“네가 구조를 고치고 나면, 내가 문법과 표현을 고쳐 줄게. 이거 마감 언제까지야?”

“다음 주 금요일.”

“다 고치고 말해 줘.”

“알았어.”

윤은 내 볼에 입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윤을 올려다보다가, 그의 허리를 안았다. 윤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안 일어나?”

“지금 고칠 거야?”

“응.”

“정말?”

“네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거면, 내가 나갈게.”

윤은 랩탑 충전 코드를 뽑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나는 윤의 허리를 만지면서 물었다.

“윤, 너무 잠을 안 자는 거 아니야? 그냥 자자.”

“이게 신경 쓰여서 못 자겠어. 거실 가서 고치고 올 테니까 먼저 자고 있어.”

“알았어.”

윤이 고집을 피우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이지만, 좋은 고집이라고 생각한다. 저 고집이 지금의 윤을 만들었을 테니까.

* * *

이번 추수 감사절의 가장 큰 목표는 사만다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다. 나는 추수 감사절을 앞두고 사만다와 통화했다. 사만다에게 연휴 기간에 고향에 가느냐고 물었더니 오스틴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즐거운 명절에 이별을 고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명절이 아니고서야 사만다를 만나러 갈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전화나 메시지로 이별을 고하는 것보다는 얼굴을 보고 말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만다에게 연휴 첫날에 만나자고 말했다. 우리의 관계에 대해 할 말이 있고, 문자나 전화로 할 말은 아니라고 했다. 사만다는 내 말을 듣고 한참 침묵했다. 그녀는 내 의도를 추측해 보는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고, 마침내 사만다가 말했다.

-그 말,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들리네. 알았어. 시간 비워 둘게.

사만다의 대답을 듣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도 그랬다. 어쩌면 사만다는 내가 이별을 예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막상 만나서 할 이야기는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다.

전화를 끊고, 이번에는 가족들을 생각했다. 가족들에게도 말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 엄마 아빠에게는 말해야 한다. 엄마와 아빠는 호의적일 것이다. 내가 아는 엄마와 아빠라면 나를 존중하고 이해하리라 믿는다. 언젠가 우리 엄마 아빠에게 윤을 소개할 수 있다면 좋겠고, 그날까지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

* * *

잭 선생님은 상담을 시작하기에 앞서 학교생활과 수업에 대해 물었다. 나는 헌법, 민사법, 계약법 수업의 기말고사를 쳐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추수 감사절 기간에 오스틴에 다녀올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다.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다.

“요새 좋은 일이 있나 봐요?”

“네. 진전이 있었어요.”

“어떤 진전이요? 그 친구와?”

“네.”

“지난번에 그 친구가 좋지만, 데이트는 자신 없다고 했잖아요.”

“그랬죠. 하지만 그 친구와 데이트를 했어요.”

데이트했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내 마음을 확인하고 난 후, 계속 기분이 좋았다. 덕분에 기말에 세 과목이나 시험을 봐야 한다는 사실도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웃으며 물었다.

“데이트는 어땠어요?”

“처음부터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데이트를 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 데이트가 되었어요. 그 친구와 함께 학교 미식축구 경기를 보러 갔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키스했어요. 그 친구와의 키스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고…. 키스하고 나서 저는 그 친구가 좋다고 말했고, 그 친구도 저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정말요?”

“네. 그 친구도 저를 좋아한다고 했어요.”

“다행이네요.”

상담 선생님은 여느 때처럼 내가 말한 내용을 차트에 휘갈겨 썼다. 선생님이 차트를 티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이제는 마음이 편한가요?”

“네.”

“다행이네요.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그 친구와 계속 데이트할 거고, 여자 친구와는 헤어질 거예요. 지금은 이 친구와 잘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추수 감사절에 부모님을 만나면 사실대로 이야기할 거예요. 그런 생각은 하기 싫지만…… 앞으로 이 친구와 잘되지 못한다 해도……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부모님의 반응은 어떨 것 같아요?”

“부모님은 괜찮을 것 같아요. 많이 놀라시기는 하겠지만, 동성 결혼을 지지하시는 분들이시니까요.”

“잘되기를 빌어요.”

선생님은 나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선생님을 보며, 윤을 생각했다. 공용 연구실에서 열심히 과제를 하고, 기말 과제 주제에 대한 ppt를 만들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를 만나기 위해 얼른 일과를 마치고 집에 가고 싶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집에 가는 것이 기다려졌고, 집에 같이 있으면 행복했다.

* * *

오늘의 상담은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잭 선생님은 나에게 큰 진전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하셨다. 나는 웃으며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지막 상담 일정을 잡기 위해 일정 관리 프로그램을 켜고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제가 이런 결정을 내리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아뇨. 그건 예상하지 못했어요. 같은 고민을 안고 상담실에 오는 학생 중에 결국 아니라고 말하거나, 상담을 중도에 포기하는 학생이 더 많거든요.”

“그래요?”

“자신의 성적 지향을 직시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성적 지향을 직시하려면 자신의 마음을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들여다봐야 하니까요. 다다음 주 오늘과 같은 시간, 괜찮나요?”

“네.”

잭 선생님이 내 이름을 프로그램에 입력하는 모습을 보다가,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내 마음의 시작은 윤이 아니었다. 시작은 칼렙이었다. 칼렙이 떠나고, 나는 오랫동안 고통을 느끼며 자책했다. 칼렙을 잃고, 그를 자주 생각하고 아쉬워하고 후회했다. 칼렙과 시간을 보낼 수 없어 슬프고 외로웠다.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사랑인가? 그때는 내 마음을 몰랐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분명 칼렙을 사랑하고 있었다.

가을 학기 13-14주차, 윤

알렉스가 지적한 글의 구조를 금방 고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구조를 고치는 데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두괄식으로 글의 구조를 전부 고치고 나니, 문법과 표현을 고칠 차례였다.

나와 알렉스는 식탁에 맥북을 놓고, 식탁 의자에 나란히 앉아 글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내가 고친 글을 보더니 문법에는 문제가 없지만, 문맥상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 이따금 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나는 한국어의 ‘~하려 노력하다’에 대응하는 영어 숙어를 ‘try to’로 알고 있는데 알렉스의 말에 의하면 ‘try to’는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라는 뜻이 강한 숙어라고 했다.

“음, 그래서 윤이 말한 뜻대로 문장을 쓰고 싶으면 ‘start to’를 써야 해.”

이런 식으로. 내가 뜻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면, 알렉스는 그 표현을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쓰는 표현으로 일일이 고쳐 주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우리가 정말 다르다는 것을 느껴.”

알렉스가 문장을 고치다 말고 말했다. 나는 알렉스의 발화 의도를 알 수 없어서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싫어?”

“아니. 재미있어.”

“그럼 다행이고.”

내 말을 듣고, 알렉스는 씩 웃었다. 한참 마우스 휠을 굴리며 글을 읽던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근데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물어봐도 돼?”

“뭔데?”

“윤은 남자만 좋아해?”

“응.”

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알렉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수빈과는 아무 사이도 아닌 거지?”

“우리는 친구야. 그리고 방금 말했잖아, 난 남자만 좋아한다니까.”

얘가 이런 것을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다. 맹세코 수빈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이 든 적은 한 번도 없는데. 그러나 알렉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알았어. 그렇지만 수빈은 윤을 좋아하는 것 같아. 아마 내 말이 맞을 거야.”

“말도 안 돼.”

“여자를 안 좋아하는 게 맞네. 여자에게 진짜 무심해.”

알렉스가 웃으면서 내 뺨에 뽀뽀했지만, 내 얼굴은 저절로 찌푸려졌다. 뭐야, 이건 무슨 뜻인데.

“그래서 안심된다.”

알렉스가 나에게 키스하며, 내 허리를 안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식탁 의자를 나란히 놓고 앉아 있다 보니, 자세가 몹시 불편해졌다. 나는 용기를 내서 알렉스의 무릎 위에 마주 앉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고, 알렉스는 내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키스해왔다. 한참 키스하다가,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 채 킥킥 웃었다.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우리, 글을 마저 고쳐야 하는 거 아니야?”

“맞아. 그렇지만 조금만 놀자.”

“나야 좋지.”

나는 활짝 웃었다. 하지만 더는 웃을 수 없었다. 알렉스의 입술 새로 내 웃음소리가 먹혀들어 갔기 때문이었다.

* * *

추수 감사절 주, 화요일 저녁. 알렉스는 오스틴에 가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침 열한 시 비행기이고 국내선이라 공항에는 열 시까지 가면 된다고 했다. 나는 샤워를 하고 나와서 침대 매트리스 위에 앉아 알렉스가 짐을 꾸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알렉스는 짐을 차곡차곡 깔끔하게 잘 쌌다.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짐을 정말 잘 싸네.”

“운동할 때, 원정 경기를 자주 가니까 짐을 쌀 일이 많았어.”

“보고 싶을 거야.”

“내가 없는 동안, 집에 남자 불러서 파티하는 건 아니고?”

알렉스가 슈트 케이스에 세면도구를 던져 넣으며 농담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서 알렉스의 앞에 섰다.

“아니, 정말 보고 싶을 거야.”

나는 까치발을 들고 알렉스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내가 쪽 소리를 내고 떨어지자, 알렉스가 웃으며 말했다.

“집 잘 보고 있어.”

“응.”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알렉스는 내 뺨을 두 손으로 쥐었다가 놓았다. 내심 그다음을 기대했지만, 알렉스는 나를 꽉 끌어안고 가만히 있었다. 알렉스가 내 머리 위에서 다정하게 말했다.

“나도 보고 싶을 거야.”

가을 학기 14주차, 알렉스

오스틴에 도착하자마자, 샘이 일하는 대학 병원 근처 카페로 갔다. 약속한 시각이 임박했을 때, 샘은 전화를 걸어 응급 환자 때문에 30분 정도 늦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샘은 그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았다.

약속 시각이 한참 지나고, 샘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아직 카페에 있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다. 내 말을 듣고, 샘은 알겠다고, 바로 내려간다고 말했다. 5분 뒤. 샘이 가게에 나타났다. 샘은 스크럽 위에 흰 가운을 입고, 목에 청진기와 명찰을 걸고 있었다. 그녀의 조그맣고 앳된 얼굴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나를 발견한 샘은 재빠르게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늦어서 미안해. 근데 정말 바빴어. 지금도 간신히 나온 거야.”

“시간 내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그래서 우리의 관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샘은 만나자마자 본론부터 물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아이폰으로 호출 메시지를 빠르게 확인했다.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는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는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나는 잠시 고민하며 침묵했다가, 샘의 질문에 대답했다.

“말 그대로야. 문자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문자로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어.”

“헤어지자고?”

“응.”

“……그럴 것 같았어.”

사만다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상황을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사만다에게 뭐라 말하려고 했지만, 사만다가 더 빨랐다.

“내 잘못이 크지. 일이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연애에 신경 쓸 겨를이 없기는 했어. 그건 인정하고 미안하게 생각해. 헤어지자는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런 이유는 아니야. 그리고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내가 다른 사람이 좋아져서 헤어지자고 하는 거니까.”

“내 마음이 편해지라고 그러는 거야?”

“아니, 나는 네가 소홀해지기 전부터 그 사람이 좋았어. 내가 내 마음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그러면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

사만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고, 나는 부인하지 않았다. 사만다가 차갑게,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미안해.”

“……어떤 여자야?”

사만다는 상처받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남자야.”

사만다가 내 말에 놀라며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녀의 갈색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나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

사만다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사만다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을 막았던 두 손이 스르르 풀렸다. 사만다는 몇 번이나 두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놓으며 심호흡을 했다. 그녀가 목이 멘 채 말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사만다.”

“네가 왜 내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어 했는지도 알겠고.”

사만다는 두 손으로 얼굴에 묻은 눈물을 문질러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매우 괴로워하며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샘.”

사만다는 나에게서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녀는 문을 향해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물이 일렁이는 갈색 눈동자 한 쌍이 나를 향했다. 나 역시 샘을 바라보았다. 사만다가 울음을 한 번 삼키고 나에게 말했다.

“알렉스.”

“…….”

“……행운을 빌어. 그리고 우리 다시 보지 말자.”

사만다는 빠르고 격한 걸음으로 카페를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사만다의 발소리를 듣고 나와 사만다를 힐끔거렸다. 사만다와의 이별은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힘들어서, 나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두 눈을 감았다. 심장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가슴이 쓰려서, 나는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 * *

수요일인 오늘은 부모님과 시간을 보낼 것이다. 추수 감사절 당일에는 할아버지 댁에 모든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에 학교로 돌아갈 것이다.

체력이 고갈된 상태로 엄마 아빠를 만났고, 두 분은 나를 매우 반겨 주었다. 엄마는 나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지만,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 세 식구는 저녁으로 발렌티나 아줌마가 만든 칠면조 요리를 먹었다. 아빠는 기분이 좋은지 지하실에 있는 와인 냉장고에서 와인을 꺼내 왔다. 아빠는 디캔터에 와인을 옮겨 담고, 엄마에게 제일 먼저 잔을 건넸다. 엄마가 와인을 한 모금 시음하더니 감탄하며 말했다.

“정말 맛있다. 여보, 이거 샤토 마고 빈티지는 아니지?”

“아니야, 여보. 우리 그건 알렉스가 결혼할 여자 친구를 데려오면 따기로 했잖아.”

“맞아. 그랬지.”

부모님은 그들끼리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 말고, 아빠가 나에게 물었다.

“알렉스, 사만다는 어쩌고 혼자 왔어?”

“헤어졌어요.”

집에 오기 몇 시간 전에 헤어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엄마는 와인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러면 당분간 샤토 마고 빈티지는 딸 일이 없겠네.”

“그날을 위해 잘 보관해 둘게, 아들.”

“사만다는 정말 괜찮은 아가씨인데 아쉽다. 장거리 연애가 힘들기는 하지.”

“그러게. 아빠도 아쉽다.”

엄마도 아빠도 아쉬워하는 티가 역력했다. 부모님은 나와 사만다가 헤어진 지 오래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부모님의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 않고, 준비했던 말을 했다.

“저,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그래서 학교도 계속 다니기로 했어요.”

“그래? 그 정도로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야? 그랬으면 오늘 데리고 오지.”

“만난 지 얼마 안 됐어요.”

“어떤 아가씨야?”

“나도 궁금하다, 사진 있어?”

엄마와 아빠가 차례대로 물었다. 나는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사만다와의 이별로 지친 상태인데, 또다시 비슷한 상황에 놓이니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자, 엄마와 아빠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분, 사진 본 적 있어요.”

“언제?”

기다려 왔던 순간이 왔다. 나는 모든 감정을 담아, 매우 진지하고 진실되게 말했다.

“지난번에 제가 제 룸메이트 사진 보여 드렸잖아요.”

엄마가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쨍그랑, 크리스탈 잔이 깨져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아빠는 떨리는 손으로 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갑자기 엄마가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태어난 이래, 엄마가 이렇게 비통하게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나 엄마를 감싸 안았다. 줄리아, 울지 마. 아빠가 엄마에게 속삭였다. 아빠는 엄마를 달래다가 나를 보았다. 아빠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웠다. 아빠가 나를 내려다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알렉스. 네 방에 올라가 있어.”

“어떻게 네가 그래!”

엄마가 나를 향해 울부짖었다. 나는 아빠가 시키는 대로 내 방으로 올라갔다. 거실 캣타워 위에 앉아 있던 안나가 내 뒤를 따라왔다. 계단을 오르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2층까지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몇 번이나 쉬어야 했다.

안나와 함께 내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한숨을 쉬다가, 벽시계를 보았다. 1초가 한 시간처럼 흘렀고, 나는 고양이를 안고 침대에 누워 부모님의 처분을 기다렸다.

20시간 같던 40분이 지나고, 누군가가 내 방문을 노크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아빠가 서 있었다. 아빠가 방에 들어오고, 나는 문을 닫고 침대 위에 앉았다. 아빠는 내 책상 의자를 가져와서 나와 마주 보고 앉았다. 아빠는 내 얼굴을 빤히 보면서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나와 이상한 신경전을 한참 하던 아빠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진심이야?”

“네. 죄송해요.”

평소 같았으면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부모님에게 죄송해야 할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지친 몸뚱이에서는 죄송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아빠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몇 번이나 하고 나서,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죄송할 일은 아니야. 그게 왜 죄송할 일이야. 괜찮아, 엄마도…… 놀라서 감정이 격해져서 그럴 거야.”

“…….”

“너도 나름대로 많이 고민하고 이야기한 것일 텐데.”

“…….”

“하나만 묻자, 언제부터였어?”

“……칼렙 기억하세요? 돌아가신 라이트 목사님 아들이요. 제 죽은 친구요.”

“그래. 기억해. 너와 무척 친했잖니,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왔고.”

“그때, 저는 제 감정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사랑이었어요.”

내 말을 듣자마자 아빠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 뺨 위로 흐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고이기는 했다. 아빠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렸다. 아빠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알았다. 쉬어라. 내일…… 마저 이야기하자.”

아빠는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나는 침대 위에 길게 드러누웠다. 나에게는 너무 힘든 하루였다. 사만다와 부모님의 반응이 힘겨웠다. 모든 것이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 상황이 너무 괴로워서 머리 위로 이불을 덮어썼다. 그리고, 나는 이불에 얼굴을 묻고 많이 울었다.

* * *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가슴이 답답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나를 이해하고 지지해줄 것이라 믿었다. 부모님은 동성 결혼 법안이 통과되었을 때, 정의가 이루어졌다며 기뻐했으니까. 그러나 엄마와 아빠는 막상 아들이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하자 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엄마와 아빠가 이 정도인데, 할아버지와 다른 친척들의 반응은 뻔했다. 그들은 사실을 알면, 나를 총으로 쏘아 죽이려고 할 것이다.

도저히 할아버지와 다른 친척들을 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거부당한 것이 너무 괴롭고, 그들의 모순적인 반응이 너무 실망스러워서 연휴 동안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가져온 짐을 고스란히 다시 싸서 1층으로 내려갔다.

항공사 앱을 확인하니 연휴라 비행기 표는 매진되고 없었다. 그레이하운드 버스22)에는 자리가 있을지도 모르니, 터미널로 가야겠다.

내 예상과 달리 거실에는 불이 환했다. 마침 내가 딛고 있는 나무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빠가 계단에서 난 소리를 듣고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여전히 어제저녁에 입고 있었던 셔츠와 치노 팬츠, 풀오버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알렉스, 가려고?”

“…….”

“앉아라.”

아빠는 앉으라고 말했지만, 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러자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빠는 나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줄리아는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어.”

“…….”

“……네 엄마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가 봐.”

“……이해해요.”

“아빠는 괜찮아. 그렇지만-”

“……저 가 볼게요.”

“……정말 갈 거야?”

“네.”

“미안하다.”

아빠는 결국 눈물을 흘렸고, 나는 아빠를 안아드렸다. 아빠도 키가 크지만, 이제는 내가 아빠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건장했다. 아빠가 나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거니?”

“버스 터미널로 갈 거예요.”

“아빠가 데려다줄게.”

아빠는 차 키를 챙겼다. 터미널까지 가는 내내, 나는 아빠의 벤츠 조수석에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아빠가 운전을 너무 불안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핸들을 잡은 아빠의 두 손이 술에 취한 사람처럼 덜덜 떨렸고, 아빠는 차선을 바꾸다가 몇 번이나 사고를 낼 뻔했다. 연휴 새벽이라 길에 차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우리는 그레이하운드 터미널에 도착했다. 아빠는 터미널 갓길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켰다. 나는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고마워요. 아빠.”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슈트 케이스를 꺼냈다. 슈트 케이스를 끌고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빠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빠는 울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빠는 나에게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나는 울고 있는 아빠를 보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나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었다.

추수 감사절, 윤

새벽 네 시. 아파트에 화재 경보가 울렸다. 한번 켜진 알람은 꺼질 줄을 모르고 계속 울렸다. 밖에서 사람들이 쑤군거리며 걸어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도 들렸다. 나는 파자마 위에 후드 집업을 입고, 서랍장 깊숙이 숨겨두었던 내 여권과 이민 서류을 챙겨 집 밖으로 나갔다. 잠이 덜 깨서 시야가 좁고 머리가 멍한 와중에도 복도에 시꺼먼 연기가 자욱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주민들과 함께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 모여 앉았다. 소방차가 도착하고 소방관들이 내렸다. 소방관들은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 갔지만, 화재 알람은 꺼지지 않았다. 불길이 잡히기 전까지는 알람이 꺼지지 않을 기세였다. 나와 주민들은 졸음을 참으며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알람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꺼졌다. 알람이 꺼지고, 소방관 한 명이 우리에게 넉살 좋게 말했다. 이제 아파트로 돌아가도 좋다고. 어떤 사람이 스튜를 스토브에 올려놓고 잠이 드는 바람에 음식이 타서 연기가 난 거라고. 별일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고. 원래 추수 감사절에는 불이 자주 나는데, 사람들이 명절이라고 평소에 안 하던 요리를 하다가 그러는 거라고.

나는 욕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어떤 미친놈이 추수 감사절 새벽부터 이딴 소란을 피우는 건지. 집에 돌아와, 넓은 침대에 혼자 누우니 알렉스가 보고 싶어졌다. 같이 자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혼자 자려니 허전했다.

잠들었다가 아이폰 진동이 울리는 바람에 깼다. 전화를 건 사람은 수빈이었다. 간신히 전화를 받았는데, 수빈의 목소리는 쌩쌩했다.

-아직도 자?

[몇 시인데?]

-열 한 시 넘었어.

[아…… 새벽에 화재 알람이 울려서 잠을 설쳤어.]

-불이 난 거야?

[불은 아니고…. 어떤 사람이 음식을 불에 올려놓고 잠들어서 그래. 연기가 많이 났어.]

-연휴 아침부터 고생했다.

[근데 무슨 일이야?]

-내가 김밥을 쌌는데, 너무 많이 쌌거든. 그래서 너도 나눠 줄까 싶어서.

[좋아.]

-그러면 지금 바로 너희 집으로 갈게.

나는 통화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물을 마시고 영양제를 챙겨 먹고 소파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현관문을 여니 수빈이 서 있었다.

[짜잔!]

수빈은 은박지로 덮은 동그란 접시를 하나 들고 왔다. 나는 식탁을 가리키며 손짓했고, 수빈은 식탁 의자에 앉으며 은박지를 벗겼다. 오랜만에 김밥을 보니 나도 모르게 신이 났다.

[김밥도 쌀 줄 알아?]

[그럼. 먹어봐, 내가 쌌지만 정말 맛있다니까.]

수빈이 싼 김밥은 아주 맛있었다. 나는 수빈의 솜씨에 감탄하며 김밥을 연달아 세 개 집어먹었고, 목이 메서 물도 마셨다. 내가 잘게 기침하는 모습을 보며, 수빈이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먹어. 이거 다섯 줄이나 된다구! 우리 둘이 먹고도 남아.]

[알았어.]

* * *

우리는 대낮부터 김밥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셨다. 둘이서 김밥을 배부르게 먹고 한 줄 넘게 남겼을 즈음, 수빈이 나에게 물었다.

[알렉스는 어디 갔어?]

[오스틴.]

[놀러?]

[아니. 고향이 오스틴이야.]

[언제 온대?]

[내일.]

[너는 부모님이랑 통화했어?]

[아니.]

[나는 어제 했어. 엄마 아빠가 울더라. 밥은 잘 먹고 다니냐고, 아픈 데는 없냐고 물어보고.]

[정수빈, 너 사랑받는 딸이구나.]

[당연하지. 너도 그렇잖아.]

나는 수빈이 조금 부러웠고, 수빈에게 집안 사정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아서 뭐라고 대답하는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갑자기 열쇠로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파트 매니저인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누구세요?”

문이 벌컥 열렸다. 현관에 서 있는 것은 알렉스였다. 나는 너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의 얼굴이 무척 까칠했다. 수염이 약간 돋아 있었고 눈 밑의 그늘이 짙었다. 눈은 잔뜩 충혈되고 부어 있었다. 아무래도 알렉스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알렉스는 슈트 케이스를 거칠게 끌고 들어오더니, 현관문을 쾅 닫았다. 알렉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서, 나와 수빈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알렉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일 온다며?”

“그렇게 됐어.”

알렉스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수빈이 있는데. 내가 곁눈질로 수빈을 보면서 중얼거리는데도, 알렉스는 나를 꽉 안고 놔주지 않았다. 수빈이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 왜 이렇게 애틋하니?”

“무슨 일 있어?”

알렉스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수빈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리가 났고, 우리에게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크게 말했다.

“그릇은 나중에 돌려줘. 나는 갈게.”

수빈이 우리를 지나쳐 가는 순간, 알렉스는 나에게 키스했다. 그를 말릴 틈이 없었다. 수빈이 현관문을 열고, 알렉스는 나를 냉장고 문짝에 밀어붙이고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 나는 알렉스를 밀어냈지만 내 힘으로는 턱도 없었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 알렉스가 나를 놓았다. 그제야 나는 알렉스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네가 예상할 수 있는 모든 안 좋은 일.”

“……이리 와.”

나는 알렉스를 안아 주었다. 알렉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알렉스가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데,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것처럼 연약하게 느껴졌다. 알렉스가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니, 알렉스에게 일어났던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비슷한 과정을 겪어서 잘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를 안고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추수 감사절, 알렉스

키스가 시작되었고, 나는 윤을 침대로 던져 넣고 윤에게 거칠게 키스했다. 내 드로즈 안에서 성기는 고개를 들고 꺼떡거렸다. 나는 윤의 파자마 바지 고무줄에 손을 대면서 말했다.

“엉덩이 들어 봐.”

윤은 내가 파자마를 벗기기 좋게 엉덩이를 들었다. 파자마 바지를 허벅지 중간까지 끌어내리자 축축이 젖은 드로즈가 보였다. 드로즈 고무줄에 손을 대니 윤은 알아서 엉덩이를 들었다. 나는 드로즈와 무릎에 걸린 파자마 바지를 한꺼번에 벗겨버렸다.

윤의 다리에는 솜털만 조금 있었고, 음모는 숱이 적고 짧았다. 발기한 성기는 실하고 빛깔이 연했다. 나는 윤의 복숭앗빛 성기를 잡아 매끈한 머리와 요도구를 엄지손가락으로 굴리며 중얼거렸다.

“포경했네.”

“……엄마가 어릴 때 시켰어.”

시켰어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작았다. 내가 엄지손가락으로 수술 자국을 만지자 윤은 부끄러워했다. 나는 윤의 허리를 꽉 안고 그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예쁘다.”

운동하면서 남자 좆은 라커룸과 샤워실에서 질리도록 봤지만, 남자 좆이 예뻐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윤의 좆은 정말 예뻤다. 의학 서적에 포경 수술의 모범 사례로 나올 법한 좆이었다. 윤의 두 손이 내 청바지 버클을 열고 속옷을 조금 끌어 내리고 성기를 끄집어냈다. 밖으로 튀어나온 내 것은 배꼽까지 올라붙어 꺼떡거렸다. 윤이 내 것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진짜 크다.”

“나는 키가 크니까 좆도 크지.”

“키가 얼마인데?”

“6피트 4인치(약 193cm) 조금 안 돼.”

내 대답을 듣고, 윤은 내 성기를 두 손에 쥐고 조몰락거리다가 중얼거렸다.

“그러면 190이 넘는 건가…… 엄청 크네.”

“쿼터백치고는 작은 거야.”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윤이 손으로 내 성기와 제 것을 맞잡았다. 윤의 손은 작지 않았다. 윤이 두 손을 쓰면 내 성기와 제 성기를 모두 잡을 수 있었지만, 나도 손을 보탰다. 네 개의 손이 두 개의 성기를 감싸고 흔들고 주물렀다. 잔뜩 배어 나온 쿠퍼액이 우리의 손장난을 도왔다.

우리의 손은 끈적한 액체로 질척거리고 숨은 점점 가빠졌다. 윤은 다리를 한껏 벌려 내 허리에 감았다. 우리의 몸은 더욱 빈틈없이 맞닿았다. 나는 윤과 키스하며 손을 거칠게 흔들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면 윤과 내 입술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실눈을 뜨고 가까이서 본 윤의 얼굴은 정말 야했다. 윤의 볼과 귀가 붉었다. 목덜미도 새빨갛고 눈가도 붉었다. 나는 이 상황이 신기했다. 남자와도 한껏 야한 짓을 할 수 있다니, 나도 모르는 나를 알게 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갑자기 윤이 입술을 떼고 고개를 홱 젖혔다. 윤의 긴 목덜미에 목빗근이 바짝 섰다.

“아, 아!”

윤은 거친 숨소리와 비음 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사정했다. 온몸에 힘이 풀린 윤은 몸을 늘어뜨리고 헐떡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으로 젖은 윤의 두 손이 시트 위에 늘어져 흰 얼룩을 길게 만들었다. 나 역시도 사정이 가까워졌다. 나는 체액에 푹 젖은 왼손으로 윤의 어깨 위 매트리스를 짚고, 오른손으로는 내 성기를 잡아 끝까지 흔들었다.

나는 윤의 흰 허벅지 위에 사정했다. 허벅지 위에 흐르는 정액을 내려다보다가, 숨을 몰아쉬며 오른손으로 윤의 허벅지에 정액을 문질렀다. 내 손이 닿자, 윤이 몸을 움찔거렸다. 윤의 허벅지는 근육 때문에 탄탄했고 근육을 덮고 있는 피부는 부드럽고 결이 고왔다. 윤의 양쪽 허벅지를 두 손으로 문지르다가, 윤에게 키스했다.

한참 키스하다가 윤이 내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한국어라서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느낌은 분명히 전해졌다. 수십 야드를 달려 터치다운을 했을 때처럼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윤이 내 목에 두 팔을 감고, 나를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윤의 젖은 손이 내 티셔츠에 문질러졌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다음 단계는 뻔했다. 남자와 섹스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안다. 오스틴에서 시그나기까지 오는 그레이하운드 버스 안에서 게이 커뮤니티에 가입해서 공부했다. 뒤를 윤활제를 묻혀 풀어주고, 여자와 할 때처럼 박으면 된다. 남자에게는 전립선이 있어서 인터코스를 할 때 전립선을 자극해 주면 많이 느낄 수 있다. 정말 잘 느끼는 사람은 뒤만 자극해 주어도 사정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미지의 세계였다.

나는 윤의 파자마 상의 단추를 풀고, 옷을 벗겨 바닥에 내려놓았다. 벌거벗은 윤은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티셔츠, 청바지와 드로즈도 벗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윤에게 키스하면서 혀로 고른 치열을 만지고 입천장을 긁었다. 윤은 혀로 입천장을 긁어 주자 느꼈다. 목구멍 근처까지 혀를 밀어 넣었다가 물러나서 뺨과 턱에 키스했다. 키스하면서 피어싱이 박혀 있는 오른쪽 젖꼭지를 손에 넣고 굴렸다.

내가 젖꼭지를 꼬집자 윤은 끙끙 앓으며 몸서리를 쳤다. 윤은 내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윤의 목덜미와 어깨에 키스하면서 손을 점점 아래로 가져갔다. 두 손으로 가슴팍을 만지고 배를 쓸다가 성기를 오른손에 쥐었다. 내 것을 수음할 때처럼 윤의 것을 훑으며 왼손으로는 윤의 다리를 벌렸다. 오른손으로 윤의 성기를 만지며 왼손을 뒤로 가져가니, 메마른 입구가 느껴졌다. 윤이 나에게 속삭였다.

“……그냥 하면 안 돼.”

“알아. 적셔 줘야 하지.”

마음이 급했지만 서두를 수는 없었다. 나는 윤을 침대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셀린을 가져왔다. 바셀린 뚜껑을 열고, 그것을 떠서 윤의 뒤에 바르고, 내 손가락을 적셔 뒤를 다시 만졌다. 입구를 손가락 끝으로 만지다가, 손가락 하나를 조금 넣었다. 윤이 내 목을 바짝 끌어안으면서 키스를 졸랐고, 나는 윤과 가볍게 키스하며 부드럽게 입구를 열었다.

“괜찮아?”

“으응… 응.”

섹스를 위한 기관이 아니라 조심해야 하는데도 마음이 급했다. 손가락 하나가 빠듯하게 들어가던 것이 점차 수월해졌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 더 넣었다. 손가락을 넣자마자 내벽이 바로 조여 무는 감촉이 낯설고 황홀했다.

“잘하고 있…… 어.”

윤이 나를 칭찬했다. 나는 자신 있게 손가락을 움직여 안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전립선 때문에 분명히 잘 느끼는 데가 있을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안을 문지르자 윤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아차린 윤이 말했다.

“거기, 아니, 응- 좀 더 안에, 아- 아니 약간 위야- 앗!”

나는 윤의 반응이 완전히 달라지는 지점을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확인했다. 손끝으로 만져보니, 그 지점만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그곳을 손끝으로 누르자, 윤의 몸이 사냥용 산탄총에 맞은 사슴처럼 파드득 튀어 올랐다. 윤은 눈물이 고인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윤에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나서 물었다.

“여기 맞아?”

“으응.”

“알았어.”

윤의 가슴팍을 입술로 더듬으면서, 나는 손가락을 한꺼번에 두 개 더 넣었다. 윤은 내 손가락을 네 개나 삼켰다. 벌어진 구멍으로 쾌감을 느끼는 윤의 등허리가 뒤로 홱 젖혀졌다.

“아, 흐으-”

윤의 숨소리가 울음기에 젖어 들었다. 나는 안을 계속 만졌다. 손목을 움직여 안을 만질 때마다 윤이 허리를 젖히고 몸을 떨었다. 어느새 윤의 성기가 곤두서서 쿠퍼액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나는 윤이 뒤로 잘 느끼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게이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읽은 게시글에 의하면, 뒤로 느끼려면 어느 정도 타고나야 하고 연습해도 느끼기 힘들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뒤로 잘 느끼는 사람이 지금 눈앞에 누워 있었다. 안을 꾹꾹 누르고 만지다가, 나는 손가락을 빼고 내 성기를 부드럽게 풀린 구멍에 가져다 댔다. 페니스의 머리를 구멍에 문지르다가 아주 조금 밀어 넣었다. 성기를 얕게 넣었는데, 안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좁고 빠듯했다. 하지만 나는 윤의 의견을 묻지 않고 바로 진입했다.

“아파, 응, 으앗, 알렉스. 살살- 윽!”

나는 한 손으로 내 성기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윤의 귀 옆을 짚고 힘을 주어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애널로 하는 인터코스는 여자와 할 때보다 훨씬 빡빡했다. 내벽을 벌리며 들어가는데, 긴장을 풀면 바로 사정할 것처럼 세게 조여왔다. 이러다 내 페니스가 끊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데, 윤이 몸을 뒤틀면서 울먹였다.

“아파-”

아래를 보니 이제 겨우 반이 들어갔다. 안이 너무 좁아서 들어가기도 물러나기도 쉽지 않았지만 전진을 선택했다. 나는 몸에 힘을 실어 윤의 몸을 내리누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윤이 배에 두 손을 얹은 채, 머리를 좌우로 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 아, 아파! 아앗!”

“다…. 들어갔어.”

“너무…. 커…. 흐으….”

윤의 내벽이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윤은 많이 아파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왕복운동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윤이 내 성기에 익숙해지고, 몸을 완전히 열 때까지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윤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한참 혀를 섞고 숨을 나누는 동안 내벽이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잘게 몸을 뒤로 물렸다가 안으로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아까 찾았던 지점을 최대한 누르도록 노력하면서.

“흐응, 으, 응……!”

윤은 내 목덜미와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윤의 얼굴을 보고 싶어 어깨로 살짝 윤의 얼굴을 밀어 올렸다. 눈물범벅인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보기 좋았다. 나는 허리를 뭉근하게 쳐올렸다. 최대한 윤이 좋아하는 곳에 내 성기를 연신 들이박았다. 윤은 그때마다 내 움직임에 맞추어 허리를 돌렸다. 그러면 쫀쫀한 내벽이 나를 기분 좋게 감싸고 조였다.

싸구려 침대 매트리스의 스프링이 우리의 움직임에 맞추어 삐걱거렸다. 윤이 내 어깨에 손톱을 세우고 긁었다. 윤의 손이 땀에 미끄러지며 어깨에 상처를 냈지만 아프지 않았다. 나는 힘을 실어 빠르고 강하게 내벽을 파고들었다. 윤이 한국어로 뭐라고 말하며 비명을 지르고 내 등을 주먹으로 때렸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아파?”

윤은 대답 대신 입을 크게 벌리고 정액을 토해냈다. 윤의 배뿐만 아니라 내 배와 가슴팍까지 정액이 튀었다. 윤이 조금 전에 한 말은 갈 것 같다는 뜻이었겠지. 나는 윤이 잘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워 씩 웃었다.

사정한 윤의 몸이 노곤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윤이 나를 애타게 올려다보았다. 그만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윤에게 키스했다. 윤은 사정의 쾌감 때문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이었다.

나는 윤의 두 다리를 내 팔에 걸고 그의 몸을 내 쪽으로 들어 올리며 박았다. 최대한 내 성기를 윤의 몸 깊은 곳까지 묻은 채로 머무르며 안에서 원을 그리기도 했다. 내가 안을 긁을 때마다 윤이 몸을 비틀었다. 윤은 울먹이며 나에게 한국어로 뭐라고 말했다. 대충 좋다는 이야기 같았다.

“나도 좋아.”

왕복운동을 할 때마다 바셀린에 젖은 구멍 안으로 내 성기가 빨려 들어갔다. 나는 마찰에 부어오른 입구를 보며 성기를 끝까지 뽑았다가 수직으로 박았다. 가만 보니 윤은 들어갈 때보다 뺄 때 더 느꼈다. 윤은 한국어로 뭐라고 말하다가 나중에는 단어조차 말하지 못하고 흐느껴 울기만 했다. 힘이 풀린 두 손은 시트를 간절하게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윤의 두 팔을 들어 내 목을 감으라고 했지만, 힘이 풀린 손은 자꾸 나를 놓쳤다. 사실 나도 이제 한계였다. 섹스를 제대로 하는 것이 몇 달 만이었고, 윤과의 첫 섹스는 오랜만에 느끼는 너무 큰 자극이었다.

나는 목을 긁어 끓는 소리를 내며 사정했다. 내가 사정하고, 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호흡을 고르다가 목에 입을 맞추었다. 한 손으로는 윤의 허리를, 다른 손으로는 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 몸으로 윤의 몸을 완전히 덮으며 끌어안았다. 그러자 윤의 가슴이 헐떡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는 울고 있는 윤의 콧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입술을 포개고 비볐다. 달콤하고 간질간질한 키스를 나누다 보니, 윤의 안에 들어 있는 내 성기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인터코스를 시작하기 위해 자세를 잡으려고 하는데,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윤이 떨림이 잦아든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싸며 나에게 물었다.

“아침 안 먹었어?”

“어제 저녁 먹고 아무것도 안 먹었어.”

내 말을 듣고, 윤은 두 손등으로 눈물로 얼룩진 제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윤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나는 윤을 침대에 밀어 눕혔다. 윤이 침대에 누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수빈이 가져온 거 있어. 김밥이라고 한국 음식인데 급하면 그거라도-.”

“수빈이 준 건 안 먹어.”

“왜.”

“알면서.”

내 배에서 다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에너지가 어지간히 달렸는지 발기가 조금 죽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무언가 먹기는 해야겠다. 힘이 나야 또 하지.”

나는 몸을 일으키면서 중얼거렸다. 그러자 내 성기가 윤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윤의 구멍에서 내 정액이 흘렀다. 나는 구멍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섹스를 위한 기관이 아닌데, 더럽다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인데, 그런데도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윤이 임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의 안에 들어가 그가 내 아이를 가질 때까지 정액을 뿌리고 싶었다. 윤이 내 가슴팍을 이마로 콩 찧으며 물었다.

“또 할 거야?”

“싫어?”

윤은 내 허리에 두 다리를 감고,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좋다는 뜻이었다. 나는 윤의 축축한 아랫배를 두 손으로 문지르며 윤을 내려다보았다. 배고픈 것을 참고 한 번만 더 할까? 몸을 숙이고 자세를 잡으려고 하는데, 배에서 또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와 윤의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동시에 웃어버렸다. 윤이 말했다.

“점심 먹고 와. 기다리고 있을게.”

윤은 시트로 제 몸을 덮으며 웃었다. 나는 윤에게 가볍게 키스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이제 연휴는 이틀째였고, 우리에게는 아직 사흘하고도 반이 남아 있었다.

* * *

드로즈만 입고, 그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했다. 내가 점심을 먹는 것과 경기 중 바나나와 에너지 바를 먹는 것의 원리는 똑같다. 섹스도 경기처럼 배를 채우고 에너지를 얻어야 잘할 수 있다. 요리하는 동안, 허기를 달래기 위해 윤과 수빈이 먹다 남긴 한국 음식을 전부 먹었다. 캘리포니안 롤과 비슷하게 생긴 그 음식은 담백했고 채소 맛이 많이 났다. 그것들을 먹으며, 스튜용 소고기와 마늘 두 알을 썰고, 오일 파스타를 만들어 먹는 데까지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파스타를 먹고 나서, 이를 닦고 침실로 갔다. 윤은 그새 잠들어 있었다. 나는 매트리스 위에 걸터앉아 윤을 바라보았다. 윤은 알몸 위에 젖은 침대 시트를 덮고 자고 있었다. 지쳐 잠든 그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찡했다. 어떤 사람들은 좋아하는 사람과 잠자리를 갖고 나면 마음이 식기도 한다는데, 나는 아니었다. 그가 더욱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졌고, 그와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고 나서 이토록 애틋한 기분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나는 아주 큰 만족감과 정복감도 느꼈다. 그는 누가 봐도 근사한 남자였으니까. 그는 공학을 공부하는 과묵한 사람이다. 외모도 그렇다. 마른 체형에 다리가 곧고 예쁘지만, 얼굴이 반듯하게 생겼고 어깨가 넓고 목은 길고 두껍다. 허리와 골반은 좁고 운동을 즐기는 몸은 탄탄하다. 군 복무까지 마친 신체 건강한 남자가 침대에서 펑펑 울고 허덕이고 조르고 애원하게 만든 것이 나였다. 그가 절정을 느끼고 교성을 뱉으며 치태를 보이게 한 것이 바로 나, 알렉산더 테신 4세란 말이다.

나는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윤을 내 다리 사이에 가두고 그의 몸 위에 내 몸을 겹쳤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는데도, 그에게서는 땀 냄새가 나지 않았다. 나와 전 여자 친구들이 매일 데오드란트를 챙겨 바르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윤의 팔을 들어 겨드랑이를 드러냈다. 솜털만 나 있는 보송보송한 겨드랑이에서는 바디 클렌저 향, 바디 로션 향, 살 냄새가 어우러진 좋은 냄새가 났다. 남자가 이럴 수 있나? 나는 윤의 팔을 내려놓고 그의 갈비뼈를 따라 입 맞추다가 그의 왼쪽 젖꼭지를 입에 머금고 굴렸다. 내 혀와 입술 사이에서 그의 젖꼭지가 바짝 섰다.

윤의 입술 사이에서 작은 한숨이 샜다. 그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나는 드로즈를 벗고, 그의 왼쪽 무릎 뒤를 잡아 그의 허벅지와 무릎이 어깨에 닿도록 밀어 눌렀다. 나는 그의 무릎 뒤부터 허벅지 안쪽까지 차례대로 깨물었고, 왼손으로 그의 성기를 쥐었다. 반쯤 서 있는 윤의 성기를 왼손으로 문지르며, 오른손으로 그의 왼쪽 발목을 잡았다. 한 손으로 발목을 둘 다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발목이 가늘고, 발은 조그마했다. 신발은 남자 사이즈 7(한국 사이즈 250)이나 신을까? 7보다 작은 사이즈는 찾기 힘들 텐데. 나는 그의 귀여운 발등에 키스하고 그의 발가락 끝을 차례차례 깨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왼손은 윤의 성기를 쉼 없이 애무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잔뜩 잠기고 가라앉은 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어라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의 발목에 입 맞추고 윤의 왼쪽 다리를 내 어깨 위에 걸쳤다. 왼손에 쥐었던 그의 성기를 놓고 오른쪽 다리를 내 허리에 감았다. 손가락으로 윤의 엉덩이 사이를 더듬어 보니 아직 젖어 있었다.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보니 부드러웠다. 나는 나를 빨아당기던 속살의 감촉을 떠올렸다. 윤의 안은 무척 좁고 뜨겁고 기분 좋았다. 내가 사정하기 직전, 한껏 부풀어 오른 내 성기를 욕심 사납게 조이고 삼키던 내벽을 생각하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성기를 입구에 대고 밀어 넣었다.

“아…… 아, 윽!”

윤의 허리가 튀어 오르고, 목과 얼굴이 뒤로 홱 젖혀졌다. 윤이 신음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몹시 즐거워졌다. 내 안에서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어느새 눈물로 젖은 윤의 두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두 팔로 내 목을 끌어안고 보챘다. 다리를 활짝 벌리고 나를 제게로 끌어당겼다. 나는 윤이 바라는 대로 나를 깊이 박았다. 나를 박고 윤의 전립선을 긁고 짓이기고 내벽 가장 깊은 곳을 쑤셨다. 그러자 윤이 자지러지며 내 어깨에 제 이마를 비볐다.

“너무, 응, 깊어!”

“나도 알아.”

“아니이, 넌, 아윽, 몰라, 흐응!”

바짝 선 윤의 성기가 내 배와 윤의 배 사이에서 흔들렸다. 나는 윤에게 키스하며 더욱 거칠게 움직였다. 윤이 내 왼손을 잡아다가 제 가슴을 만지게 했다. 나는 윤의 오른쪽 가슴을 움켜쥐고 젖꼭지를 꼬집었다. 그러자 윤은 나와 입술을 붙인 채, 한국어로 뭐라고 속삭였다. 나는 대답 대신, 다시 입을 맞추며 허리를 쳐올렸다.

윤은 흐느껴 울면서도 허리를 제대로 흔들고 안을 조일 줄 알았다. 나는 윤이 섹스에 적극적이라서 좋았다. 내가 거세게 박을 때마다,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키스할 때마다, 윤이 내 등과 목을 끌어안고 손톱으로 긁었다. 윤이 아까 손톱에 긁혀 상처가 난 곳을 다시 긁는 것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그럴수록 기쁘고 뿌듯했다. 잠자리에서 난 상처는 남자의 훈장이니까.

* * *

나와 윤은 이틀 넘게 침대에만 있었다. 아주 음탕하고 야만적인 연휴였다. 우리 둘 다 짐승이 따로 없었다. 섹스하다가 지치면 자고, 잠에서 깨면 배를 채우고 실컷 붙어먹었다. 얼마나 해댔는지, 나중에는 우리 둘 다 희뿌옇고 묽은 액체만 찔끔찔끔 사정했다. 우리의 힘을 버티지 못한 싸구려 침대 매트리스가 결국 주저앉았고, 나는 관리 사무소에 매트리스 교체 요청 메일을 보내야 했다. 메일을 보내고 나서, 우리는 무너진 매트리스 위에서도 섹스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날에는 너무 지쳐서 온종일 먹고 자기만을 반복했다.

* * *

마지막 상담은 짧았다. 오스틴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더니, 잭 선생님은 슬퍼하셨다. 선생님이 윤과의 관계를 물어보셔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우리의 관계는 매우 안정적이고, 그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누었다고 말씀드렸다. 한창 절정을 느끼는 중인데도 몸이 자꾸 달아서 돌아버릴 것 같은 섹스는 생전 처음 해봤다고 말하자, 잭 선생님은 웃었다.

“부모님은 부모님이고, 저는 제 인생을 살아야죠. 저는 그 친구가 좋은데 어떡하겠어요.”

나는 말을 마치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자 잭 선생님은 나에게 행운을 빌어 주었다. 그는 나에게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 역시 내게 좋은 일만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가을 학기 15주차, 윤

연휴가 끝나자마자 기말고사 시간이었다. 연휴 내내 알렉스와 온갖 체위로 신나게 붙어먹느라 바빴기 때문에, 나는 벼락치기로 기말 발표를 준비해야 했다. 기말 발표를 마치고 나서, 밍 교수님 학부 수업 학생들의 기말고사 시험지를 채점했다. 그러면서 다른 수업 과제도 충실하게 해서 냈다.

알렉스도 벼락치기를 해야 했다. 그는 기말고사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엄격하게 금욕했다. 알렉스는 나를 내버려 두고 공부만 했다. 그게 조금 아쉬웠지만, 알렉스가 저녁 식사는 꼬박꼬박 챙겨 줘서 정말 고마웠다.

* * *

기말고사가 끝나고 수빈을 만났다. 수빈이 나를 먼저 보자고 했다. 나와 수빈은 학교 근처 쿠키 가게에서 만났다. 수빈이 쿠키를 먹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쿠키 가게 안에는 가게 주인인 흑인 아줌마만 있었다. 수빈이 쿠키를 고르다가 나에게 말했다.

[나 실연당했어.]

나는 수빈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수빈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다니. 전혀 몰랐다.

[언제? 너, 남자 친구 사귄다는 말 없었잖아.]

수빈은 내 말을 듣더니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나, 너한테 실연당했다.]

[어?]

[나는 너를 좋아했어. 근데 추수 감사절 날…… 너랑 알렉스랑 내가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키스하고, 어? 말을 말자. 둘이 언제부터 사귀었어?]

역시. 내가 걱정했던 대로 수빈은 모든 것을 봐버렸다. 수빈의 말을 들으니, 알렉스를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경솔한 알렉스. 나는 애써 웃으며 수빈에게 말했다.

[우리 안 사귀어.]

[그럼 뭐야?]

[……데이트해.]

수빈은 내 대답을 듣고 기막혀했고, 나에게 다시 물었다.

[……둘이 잤어?]

나는 대답을 피했지만, 내 얼굴은 새빨개졌다. 수빈은 나를 흘낏 보았고, 발개진 내 얼굴을 보고 모든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집게로 초코칩 쿠키를 집어 쟁반 위에 올려놓고, 나에게 물었다.

[그거, 알렉스 생각이지? 데이트한다는 거?]

[응.]

[걔 바보 아냐? 지금 너희 둘이 같은 집에 살면서 물고 빨고 좋아 죽고 있는데, 그걸 법률 용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 사실혼 관계라고 해.]

[어……?]

[데이트 좋아하시네, 그 녀석 로스쿨 학생 맞아?]

수빈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쟁반에 쿠키를 마구 쓸어 담았다. 그리고 그녀는 초콜릿 칩 쿠키 다섯 개를 새 쟁반에 따로 담아 사장님에게 들고 갔다. 수빈이 사장님에게 계산을 요청하며 말했다.

“열 개는 저한테 주시고, 다섯 개는 쟤한테 주세요.”

[야, 안 사줘도 돼.]

[사 줄 때 받아.]

수빈이 나를 보며 씩 웃으니 너무 민망해서 헛웃음만 나왔다. 우리는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 수빈이 나에게 쿠키 상자를 내밀었다. 나는 수빈이 건넨 쿠키 상자를 받아 들면서 물었다.

[너는…. 내가 게이여도 괜찮아?]

[나, 실연해서 마음 아프다니까. 상처 그만 후벼 파라.]

수빈이 진심으로 짜증을 내며 말했다. 수빈의 야구 모자 아래, 핑크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카락이 겨울바람에 흩날렸다. 수빈이 피식 웃으면서 덧붙였다.

[나는 그런 것에 편견 없어.]

[…….]

[그리고…… 여기에서 살다 보니 깨달았어. 이 텍사스 촌구석에서,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멀쩡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래서 나는 너와 친구로라도 잘 지내고 싶거든.]

수빈은 양쪽 볼에 보조개가 들어가도록 웃었다. 수빈의 웃는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이 경쾌해졌다. 그때, 수빈의 코트 주머니에서 아이폰 진동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너한테 전화 오는 거 같아.]

내 말을 듣고, 수빈은 아이폰을 꺼내 보더니 전화를 끊어버리면서 말했다.

“모르는 번호야.”

아이폰 진동이 다시 울렸지만, 수빈은 개의치 않았다. 나와 수빈은 잡담하며 집 방향이 갈리는 길목까지 걸어갔다. 갈림길에 서서, 나는 수빈에게 우물쭈물 물었다.

[정말 나랑 친구 해 줄 거지?]

내 질문에 수빈은 그런 것을 왜 묻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수빈의 대답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수빈이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12월 18일, 알렉스

법학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데, 관리 사무소에서 택배가 왔다고 메일을 보냈다. 아마 아마존에서 산 샴푸 택배일 것이다.

기말고사 마지막 과목 시험을 마치고 가벼운 기분으로 귀가했다. 귀가하는 길에 택배를 찾으려고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 들렀다. 관리 사무소 안에서는 동양인 남녀가 매니저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남자는 서 있었고 여자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발치에는 커다란 슈트 케이스와 박스가 몇 개나 놓여 있었다.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인가?

나는 자리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나를 알아본 매니저는 동양인 남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에게 눈인사를 했다.

“확인해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입주자 동의 없이는 입주자가 어디에 사는지 알려 드릴 수 없어요. 그게 여기 법입니다. 인제 그만 가세요. 자꾸 이러시면 경찰 부를 거예요.”

“제발요.”

“알렉스. 택배 있어요.”

“안 그래도 그거 찾으러 왔어요.”

매니저가 손짓했고, 나는 매니저를 따라 사무실에 딸린 택배 보관소로 갔다. 매니저는 택배를 찾으며 투덜거렸다.

“저 여자가 자신은 윤의 누나라고 하는데, 나는 윤에게 가족들이 올 거라고 들은 적이 없거든요. 근데 벌써 몇 시간째 여기서 막무가내예요. 마음 같아서는 규정대로 경찰을 불러서 내쫓았겠지만, 임신한 여자라 거칠게 다루면 안 될 거 같아서 이러고 있어요.”

“네?”

“알렉스, 윤에게 뭐 들은 거 없어요?”

임신한 여자, 그리고 누나. 그때, 윤이 머리맡에 두고 자는 아기 신발들이 떠올랐다. 설마. 매니저에게 택배를 받자마자, 매니저를 앞지르며 사무실로 걸어갔다. 내가 낸 인기척에 동양인 남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남자와 먼저 눈이 마주쳤고, 그다음에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여자는 윤과 똑 닮았지만, 이목구비의 선은 훨씬 가느다랬다. 여자의 희고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나는 그녀가 윤의 누나라고 확신했다.

“윤의 누나가 맞아요. 이제 기억나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알렉스라고 합니다. 윤과 같이 살고 있어요.”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길고 결이 고운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자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자리에서 힘들게 일어나면서 말했다.

“주윤의 누나 주환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환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와 악수했다. 그녀는 키가 아주 컸다. 운동화를 신고 있는데도 윤과 눈높이가 비슷했다. 악수를 마치고, 내가 먼저 환의 손을 놓았다. 남매는 얼굴과 체구만 비슷한 게 아니었다. 손의 크기는 다르지만, 손의 감촉이 소름 끼치도록 똑같았다.

“얘는 어디 갔어요? 수업 갔나요?”

남매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닮을 수가 있나. 나는 유전자의 신비를 느끼며 환을 바라보았다. 게다가 환은 윤처럼 한국어 억양이 약간 묻어 있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네. 곧 돌아올 시간이에요. 집에 들어가서 기다리시겠어요?”

“좋아요. 저기요, 카트를 빌릴 수 있을까요?”

환은 매니저에게 당당하게 물었다. 매니저는 그녀의 기세에 눌려 사무실 구석에서 카트를 가져왔고, 환의 남편은 슈트 케이스와 박스를 카트에 차곡차곡 실었다. 내가 카트를 끌었고, 환의 남편은 걸음이 느린 환을 부축하며 걸었다.

집에 도착하자, 환은 입고 있던 패딩 점퍼를 벗었다. 낙낙한 니트 원피스 아래로 부풀어 오른 둥근 배가 보였다. 환의 배 속에서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녀의 배를 보고, 나는 환에게 식탁 의자를 권했다.

“고마워요.”

환은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나는 그녀의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윤이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자는 아기 신발은 이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윤은 조카에게 줄 신발을 모으다가 결국 환에게 건네지 못하고 이곳에 온 것이리라.

손님이 왔으니 차를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차 드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남편 것까지 두 잔 부탁드려요.”

환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윤과 환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를 계속 보고 있으니, 그녀와 윤은 별로 닮지 않았다. 환은 말투와 표정이 자신만만하고 행동도 시원시원했지만, 윤은 웃고 있어도 약간 처연한 느낌을 주었고, 언행에 조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때, 환이 나에게 불쑥 물었다.

“알렉스는 윤이 남자 친구죠?”

“네?”

“둘이 결혼 생각 있어서 같이 사는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굉장히 당황했다. 사생활을 직설적으로 묻는 환의 말투가 너무 무례했다. 내가 환의 무례함에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있는데, 환이 나에게 공격적으로 말했다.

“대답해 봐요.”

“저기요.”

“둘이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동거하는 거예요? 만난 지 오래되어 봤자 반년 아닌가?”

“……윤에게도 이러셨어요?”

“내가 뭘요?”

“윤도 이렇게 매번 몰아세우고 윽박지르셨어요?”

“걔가 그래요? 윤이 편드는 거 보니까 남자 친구 맞네.”

환이 나에게 빈정거렸다. 환이 말을 할 때마다, 그녀가 윤을 한참 얕잡아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윤이 성장 과정에서 느꼈을 어려움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차렸다. 윤에게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대충 들은 것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윤은 자신을 이해하고 아껴 주던 어머니를 잃고, 이런 누나와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윤이 더욱 안쓰러워졌다. 환을 집에 들인 것은 내 실수였다. 환이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그녀에게 짐만 받고 집에 들이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환을 집에 들여놓은 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맞아요.”

“네?”

환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환이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아서,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이것은 명백한 경고였다.

“저는 윤의 남자 친구예요. 그러니까 제 앞에서 윤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나는 그녀가 내 경고를 듣고 입을 다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거침없이 되물었다.

“보아하니 내 동생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쪽은 걔가 어떤 애인지 알아요?”

환이 코웃음을 치며 나에게 물었다. 내 경고를 무시하고 달려들다니 정말 지독한 여자였다. 나는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만하시죠.”

“우리는 반년 동안 걔를 찾아다녔어요.”

“…….”

“윤이가 이번 여름에 미국으로 출국할 때, 아빠, 나, 그리고 내 남편은 걔를 배웅하러 갔어요. 근데 출국장에 들어가기 전에 걔가, 저는 남자를 좋아하는 게 맞으니까 자기를 더는 찾지 말라고 하고 가버렸어요. 그 말에 우리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알아요? 근데…… 그게 정말 마지막이었어요. 그 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겼죠. 윤이는 핸드폰도, 모바일 메신저도, 이메일도, 은행 계좌도 완전히 닫고 한국을 떠난 거예요.”

나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윤이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을 완전히 등지고 이곳에 왔다니. 이제는 알겠다. 윤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왜 위태롭고 절박해 보였는지. 그에게는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어서 그랬던 거다. 내가 뭐라 답하려는 순간, 환이 두 눈을 무시무시하게 빛내며 말했다.

“윤이는 그런 애예요.”

12월 18일, 윤

밍 교수님께 채점한 답안지를 드리고 집까지 걸어왔다. 겨울옷이 없어서 후드 집업만 입고 다니다 보니 너무 추웠다. 돈을 모아서 겨울옷을 사야 하는데……. 염치없지만 알렉스와 옷을 같이 입어도 되려나, 나에게 너무 커서 별로이려나.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가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문고리를 잡고 문을 돌리는데 느낌이 뭔가 이상했다.

문을 여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알렉스였다. 알렉스가 식탁 옆에 서서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주윤, 너 이리 와.]

누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귀를 의심했지만, 누나의 목소리는 음색이 독특해서 잘못 알아들으려고 해도 잘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한국을 떠나고 가족들과 연락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때, 알렉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알렉스와 눈이 마주치는데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남. 오랜만이-]

자형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대로 집에서 달려 나와 도망쳤다. 말도 안 돼. 누나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와. 나는 앞만 보고 달렸다.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르고 계속 달리기만 했다. 한참 달리다가 겨울바람에 숨이 차고 힘이 들어 발이 느려지는데, 누군가가 나를 뒤에서 붙잡았다. 알렉스였다. 나는 도망가려고 버둥거렸고, 알렉스는 나를 안고 놔주지 않았다.

“이거 놔!”

“윤.”

“이거 놓으라고!”

“내가 잘못했어.”

“누나가, 누나가, 어떻게 여기에-”

“내가 환을 집에 들여놨어. 미안해.”

“누나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알렉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며 절규했다. 알렉스가 내 몸을 돌려 저를 보게 하고, 내 얼굴을 두 손으로 닦아주었다. 나는 알렉스가 내 얼굴을 닦기 전까지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알렉스가 내 눈물을 마저 닦으면서 말을 걸었다.

“윤.”

“누나가 왜 여기 있냐고 묻잖아!!”

알렉스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알렉스의 가슴팍을 밀치며 도망가려고 했지만, 알렉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계속 저항했다. 알렉스가 나를 안고 토닥이며 말했다.

“나도 몰라. 그렇지만 네가 원한다면, 내가 너 대신 환과 환의 남편에게 가서 꺼지라고 할게.”

“…….”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가족으로부터, 한국으로부터 완전히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가족에게서 도망치면서, 내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디로 도망치든 나의 과거는 나를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과거를 완전히 지우려면, 나뿐만 아니라 나와 연관된 모든 사람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누나와 자형을 지울 수 있지만, 누나는, 자형은 나를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얽혀 있어야 했다. 그것은 내가 외면하고 싶었고, 믿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미래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과거를 매듭짓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만의 미래와 행복을 찾아 나가고 싶단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과거를 마주 보는 것을 선택했다.

알렉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두 손으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다부지게 문질러 닦으며 말했다.

“누나 만날래.”

* * *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 누나는 배가 많이 불러 있었다. 누나의 곁에 앉아 있는 자형은 나를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누나와 드잡이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나는 임산부와 드잡이를 할 정도로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었다. 누나는 자리에 서 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앉아, 주윤.]

[서서 들을게.]

[이게 진짜! 몰라, 네 마음대로 해.]

누나가 거기까지 말한 순간, 자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형은 알렉스를 보더니 나와 누나에게 말했다.

[나는 나가 있을 테니까 이야기 끝나면 불러.]

자형은 알렉스와 눈이 마주치자 알렉스에게 눈짓했다. 같이 나가자는 뜻이었지만 알렉스는 자형을 무시하고 내 곁에 남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누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알렉스도 내 옆자리에 앉았다. 자형은 결국 포기하고 혼자 집 밖으로 나갔다.

[네 남자 친구는 한국말 못 하지?]

[못 하는- 잠깐만, 남자 친구라니, 누가 그래?]

[쟤가 아까 지 입으로 그러던데, 네 남자 친구라고.]

[…….]

나는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알렉스는 식탁 밑에서 내 손을 잡았다. 남자 친구라니. 알렉스가 누나에게 제가 내 남자 친구라고 말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누나가 말했다.

[쟤는 한국말도 못 하면서 왜 여기 있는 건지. 아무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너, 어떻게 공항에서 그런 말을 하고 그냥 가버릴 수가 있어? 가서 연락도 안 하고. 우리가 너를 얼마나 걱정했는데.]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물어물어 왔어.]

[어떻게?]

[학교에 물어봤더니, 학교에서는 학생 허락 없이 학생 정보를 못 알려 준다고 하더라? 그래서 한인 학생회에 수소문했더니 너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허탕 쳤어. 한인 교회에 물어봤더니 거기 사람들도 너를 모른대. 한인 교회와 학생회에 사정해서 건너 건너라도 아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다가 겨우 정수빈 학생과 연락이 닿았어. 근데 정수빈 학생이 나에 대해 들은 게 없다고, 네 주소를 못 알려 준다고 하길래 제발 아파트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사정해서 휴가 내고 무작정 여기에 왔어. 그러다가 다행히 관리 사무소에서 네 남자 친구를 만나서 여기 있는 거고. 됐어? 이제 속 시원하니? 몇 달 동안 우리를 걱정하게 만들고 나니까 좋아?]

[……걱정이라니. 누나는 나를 싫어하잖아.]

[내가 널 왜 싫어해. 물론 너에게 사람 속 터지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동생인데.]

[…….]

[쑥쑥이가 생기고 많이 생각해 봤어. 아직도 너를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네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우리에게 말도 안 하고 우리를 죄다 버리고 갈 생각을 했을까, 만약 쑥쑥이가 부모인 우리가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너무 미워서 우리를 버리고 안 보겠다고 하면, 우리가 저를 안 찾았으면 해서, 그래서 돈도 뭐도 없이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외국까지 가서 힘들게 타지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생각하면 내 마음이 찢어져!]

누나가 있는 힘껏 고함쳤다. 그 바람에 온 집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나뿐만 아니라 알렉스까지 놀라서 누나를 바라보았다. 집이 떠나가라 고함을 치고 나서, 누나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티슈를 찾았다. 알렉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티슈를 뽑아 누나에게 건넸다. 누나는 티슈로 눈물을 계속 닦았고, 나는 울지 않으려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누나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올 줄 몰랐다. 누나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맨날 나를 한심하게 여기고, 나를 나약하다 비웃는 사람이었는데. 우리 누나가 내가 가엾다고 울다니.

[아빠 마음은 나도 모르겠어. 아빠는 그날 이후로 네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하지만 나나 오빠는 아니야. 앞으로 힘든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누나 돈 많아.]

누나는 울음을 조금 그치고 코를 풀면서 말했다. 나는 누나가 이런 상황에서도 돈 자랑을 하는 것이 웃겼지만, 동시에 너무나 누나답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나의 돈 자랑을 듣고 피식 웃자, 누나는 코 푼 휴지를 손으로 구기면서 호통을 쳤다.

[주윤, 너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누나는 왜 갑자기 돈 자랑을 해?]

[너는 그래서 매를 버는 거야. 주면 감사하게 받을 생각은 안 하고.]

[누나가 너무한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너는 네가 너무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니? 어휴, 말을 말자. 암튼, 나랑 오빠랑 아빠 집에서 네 물건 다 가져왔어. 여름, 봄가을 옷, 겨울옷, 네 겨울 이불, 네 책, 네가 쓰던 거 전부 다 가져왔으니까 앞으로는 춥게 다니지 마. 구질구질하게 다니지도 말고.]

누나는 거실 구석에 쌓여 있는 상자들과 30인치 슈트 케이스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 짐들을 보다가 가슴이 뭉클해졌고,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 회사는 어쩌고 왔어?]

[연차 쓰고 왔어.]

[한국 언제 가?]

[내일.]

[……언제 왔는데?]

[그저께 저녁. 휴, 쑥쑥이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움직이네. 주윤, 너도 만져 볼래?]

[그래도 돼?]

[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누나의 곁에 가서 섰다. 누나가 내 손을 잡아서 누나의 배에 올려주었다. 누나의 배 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처럼 아기가 꾸르륵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이 안에 아기가 있구나.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우와.]

[우리 쑥쑥이, 4월 초에 나와.]

[그럼 내가 가고 나서 쑥쑥이 생긴 거 안 거야?]

나는 누나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누나는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고,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맞아. 네 덕분에 마음고생 하느라 쑥쑥이 태교는 끝내주게 잘했다.]

누나가 나더러 들으라는 듯이 신랄하게 말했다. 누나의 말을 들으니 누나에게 미안해졌다. 누나는 의자에 걸쳐 놓은 패딩 점퍼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냈고, 화면 잠금을 해제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주윤. 너, 여기 핸드폰 번호 뭐야?]

[메신저 차단 풀면 되잖아.]

[차단 푸는 건 당연한 거고 빨리 번호도 내놔. 내가 불시에 전화해서 네가 뭐 하고 있나 감시할 거야.]

누나는 아이폰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내 번호를 정직하게 찍었다. 누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고, 식탁 위에 있는 내 아이폰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나는 내 아이폰을 집어 들어 잠금을 해제했고, 누나의 전화번호를 다시 저장하며 오늘의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12월 18일. 오후 6시 3분. 그때, 누나가 알렉스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 번호 알려 줘요.”

“네. 아이폰 주세요.”

누나는 알렉스에게 아이폰을 건넸다. 알렉스는 누나에게 제 번호를 불러주었다. 누나는 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누르고, 알렉스의 아이폰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누나가 알렉스의 번호를 저장하며, 알렉스에게 물었다.

“알렉스는 이름이죠? 성은 뭐예요?”

“테신이요.”

“스펠링이?”

알렉스는 제 아이폰에 누나의 번호와 이름을 저장하며 대답했다.

“T-E-S-S-I-N. 환은 스펠링이 어떻게 되나요?”

“H-W-A-N. 고마워요. 저장했어요. 알렉스 테신, 윤이 남자 친구.”

누나는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자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얘기 끝났어, 이제 숙소 가자. 응, 올라와. 누나는 짧게 통화를 끝냈다. 나는 누나를 힐끔거렸다. 누나가 의자에서 일어났고, 패딩 점퍼를 걸치다 말고 나에게 물었다.

[여름 방학 때, 한국 들어올 거야?]

[아직 몰라.]

[비행기 표 사줄 테니까 쑥쑥이 보러 들어와.]

누나가 웃으며 말했고,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밖에서 자형이 현관문을 두들겼고 알렉스가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자형이 집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얼른 방 안에 들어갔다. 나는 한국에서 가지고 왔던 아기 신발 다섯 켤레를 학교에서 받은 에코백에 모두 집어넣었고, 누나에게 에코백을 건네주었다.

[누나, 이거 받아.]

[이거 뭔데.]

[아기 신발. 쑥쑥이 줘.]

누나가 에코백을 열어 신발을 꺼냈다. 조그마한 아기 신발을 보고, 누나가 목이 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신으려면 한참 멀었는데…… 암튼 고맙다.]

에코백을 든 누나와 자형은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알렉스는 현관에 서 있었고, 나는 누나와 자형의 뒤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누나는 차에 타기 전에 팔을 벌려 나를 안았다. 나는 누나의 등을 토닥였고, 누나는 나에게 말했다.

[내년에 보자, 주윤.]

나는 누나와 마주 안고 그대로 잠시 있었다. 누나와 배가 맞닿자 쑥쑥이가 움직이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자형이 차에 시동을 걸었고, 누나는 나를 놓고 조수석에 탔다. 자형이 운전석 창문을 열고,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처남, 잘 지내. 내년에 봐!]

자형이 운전하는 렌터카가 후진으로 주차장을 빠져나가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렌터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느새, 알렉스가 내 곁에 와 있었다. 알렉스가 말했다.

“추우니까 들어가자.”

알렉스는 내 손을 잡으면서 집에 들어가자고 말했다. 나는 알렉스와 손을 마주 잡았다. 내 손도 작은 편은 아닌데, 미식축구공을 한 손으로도 잡고 던질 수 있는 손은 내 손을 완전히 감싸 쥐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나는 알렉스를 올려다보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정말 누나한테 네가 내 남자 친구라고 했어?”

“응.”

“내가 네 남자 친구야?”

“응.”

“너도 내 남자 친구야.”

“알아.”

“들어가자.”

나는 웃으면서 알렉스의 손을 잡았고 앞장서서 집까지 걸어갔다. 날씨가 춥고 옷은 얇지만, 내 마음은 더는 춥지 않았다.

#주석

1) 댈러스: 미국 텍사스주 최대 도시권역인 포트워스-알링턴-댈러스 도시권의 일부이며 텍사스 최대의 공항 허브이다

2) 톰 브래디: 미국 미식축구 리그 역사상 최고의 쿼터백. 슈퍼 모델 지젤 번천의 남편으로도 유명하다

3) 댈러스 카우보이스: NFL 최고 인기 팀이자 텍사스 댈러스-포트워스 연고 팀

4) 뇌 손상: 미식축구 선수들은 경기 중 잦은 충돌로 인한 뇌 손상을 겪다가 은퇴하는 일이 잦다

5) 토미 존 서저리: 팔꿈치 내측 인대 재건 수술, 공을 강한 힘으로 던지는 일이 많은 야구 투수나 미식축구 쿼터백이 많이 받는 수술이다

6) 라인배커: 미식축구의 수비수

7) LSAT: 미국 법학 적성 시험

8) 플레이 북: 선수 조합, 선수 정렬, 공격 전개, 라인 유지, 블로킹 등 경기 운영에 필요한 모든 전술을 총망라하여 그림과 설명으로 정리한 책. 쿼터백은 그 책을 전부 외워서 경기를 운영하며, 책은 보통 벽돌 두께이다. 그래서 쿼터백은 머리가 멘사에 가입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야 잘할 수 있는 포지션이다.

9) 애슐리 홈스토어: 미국의 무난한 홈퍼니싱 체인

10) GRE: 미국 대학원 수학 능력 시험

11) 롱혼스: 텍사스 주립대 미식축구팀의 별칭

12) 쿼라: 미국의 질문 답변 사이트. 네이버 지식인과 거의 같은 원리로 운영된다.

13) 레터 사이즈: 8.5 x 11인치. 약 216 x 279mm이며 미국에서 흔하게 쓰이는 종이 규격

14) 센트럴 마켓: 텍사스 샌 안토니오에서 창립한 고급 슈퍼마켓 체인

15) 홀푸드마켓: 텍사스 오스틴에서 창립된 대형 유기농 슈퍼마켓 체인

16) 장미 덩굴 위에 몸을 굴렸을 것이다: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음심이 들 때마다 장미 덩굴 위에 몸을 굴렸고, 성인의 몸이 닿은 장미에서는 가시가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도 그 자리에서는 가시 없는 장미가 자란다고 한다

17) AT&T: 미국 최대 통신사, 텍사스 주 댈러스에 본사가 있다

18) 라운드 록: 오스틴 근교 도시

19) 침례교: 개신교 교파 중 하나. 미국에서 가장 신자가 많고, 보수적인 교파이다.

20) 롱혼스: 텍사스 주립대 미식축구팀의 별칭이자 마스코트 이름

21) 레딧: 미국에서 가장 큰 커뮤니티 사이트

22) 그레이하운드 버스: 미국의 고속버스, 시외버스 회사. 고속버스와 시외버스의 대명사로 통한다. 그레이하운드 버스는 시설이 열악해서 미국 사람들은 장거리 이동에 어지간하면 비행기를 이용한다.

12월 18일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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