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월 18일 1권-1장 (1/15)

1장

여름 학기 Ⅰ

7월 17일, 윤

공항은 만남과 헤어짐이 함께하는 곳이다. 나는 오늘 인천공항에 가족들과 이별하기 위해 왔다. 미국 텍사스주, 대학 도시 시그나기(Signaghi)로 향하는 편도 항공권을 손에 들고서.

나는 최소 1년 동안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고, 운이 좋으면 앞으로 영영 그들을 만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기왕이면 영원히 가족들과 만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가족들을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니까.

나를 배웅하러 나온 아빠와 누나, 그리고 자형은 감정이 북받치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나는 속이 매우 후련하다. 이 나라를 떠나게 되어 행복하다. 이곳에서 행복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물론 새로운 나라로 떠난다고 해서, 내 인생에 뾰족한 수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미국에서는 소수 인종에 속하기 때문에 유리 천장을 겪게 될 것이다. 그래도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성숙한 시민 의식을 갖춘 사회이니까,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이니까,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정당한 기회와 보상을 주는 나라이니까. 나는 그 사실에 희망을 걸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이 나라를 떠난다.

출국장 입구 앞에서 아빠는 근엄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과연 우리나라 제일의 전자 제품 회사의 핵심 사업부 하나를 책임지는 부사장다운 근엄한 모습이다. 누나는 조금 울먹이고 있다. 예쁘고 똑똑한 우리 누나. 누나는 우리 집안의 자랑이다. 누나는 과학고, 서울대 공대와 사법 고시를 거쳐 국내 최고의 로펌의 지적 재산권 그룹에 입성했으니까. 같은 로펌의 변호사로서 누나와 사내에서 만나 결혼한 변호사인 자형. 그리고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떠나는 나.

우리 가족은 누가 보기에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가족이고, 남들이 보기에는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집안의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생각과 감정이 있다. 나는 북받치는 감정을 다스리려고 노력하는 그들 앞에서 웃음을 참으며 서 있다. 떠나기 전에 내 비밀스러운 폭탄을 투척할지 말지 고민하면서.

내가 그들을 속이며 감추어 왔던 핵폭탄. 가족들이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눈에 빤히 보이는 현실인데도 외면해 왔던 그 폭탄. 만약 폭탄을 투척한다면 공항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나에게 속아 안심하고 있던 아빠와 누나는 진실을 알고 나서 분노하고 길길이 날뛰며 나를 욕하고 하늘을 저주할지도 모른다. 여태 내 비밀을 몰랐던 자형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야 어떻든, 나야 이 땅을 떠나고 나면 그만 아닌가? 이 땅에서 평생 진정한 나를 숨기고 매일 거짓말하며 살아왔으니, 한 번만이라도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폭탄을 투척하여 가족을 절망하게 하고 공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다는 은밀한 유혹에 굴복했다.

“윤아. 도착하면 연락해.”

누나는 울음을 참다가 결국 어깨를 가늘게 떨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누나의 눈물 젖은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그래도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내 폭탄의 위력이 극대화되는 순간은 지금이 아니었다.

“그래, 처남. 혹시 어렵거나 힘든 일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연락해. 혹시 생활비 부족하면 연락하고.”

“아빠는 네가 자랑스럽다.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미국 박사가 나오게 될 거 아니냐.”

태어난 이래, 아빠가 나를 자랑스럽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빠는 근엄한 표정을 무너뜨리며 슬며시 웃고 있었다. 아빠가 웃는 것을 보며, 나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아빠, 누나. 그리고 자형.”

“그래.”

“저 그동안 세 분에게 거짓말했어요.”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누나는 울음을 조금 그쳤고 아빠의 표정은 어리둥절해졌다. 아빠와 누나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서 있던 자형은 표정을 굳혔다. 그들의 반응을 살피니, 온몸에 기분 좋은 소름이 쫙 돋았다. 나는 이 땅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야 애써 진실을 외면해 왔던 아빠와 누나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저, 남자 좋아해요.”

“윤아.”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거, 거짓말이에요. 저는 남자가 좋아요. 여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주윤.”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윤아.”

“안녕히 계세요.”

나는 세 사람에게 보란 듯이 입이 찢어져라 씩 웃었다. 태어나서 이보다 기분이 후련하고 좋았던 적이 없었다. 엄청난 해방감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아빠와 누나의 얼굴을 보니,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힐 만큼 머리가 좋은 그 사람들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사람보다 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형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고 있었지만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충격에 빠진 그들을 내버려 두고 돌아서며 더욱 환하게 웃었다. 저 세 사람에게 저들의 얼굴을 보라고 거울을 쥐여 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 * *

보안 검색대와 출국 심사대를 통과하고 나서 아빠와 누나, 자형의 번호를 차단했다. 그들의 메일 주소도 모두 차단했다. 나는 그들의 분노에 찬 메시지나 전화를 받고 이 나라를 떠나는 산뜻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두 달 전. 시그나기 행 비행기 표를 사자마자, 나는 내 신변을 정리하며 치밀하게 오늘을 준비했다. 이 번호는 3일 뒤에 정지되도록 해 두었다. 며칠 전에는 은행 계좌에서 돈을 전부 찾아 달러로 환전하고 계좌를 닫았다. SNS 서비스는 진작에 모두 탈퇴하고 계정을 없애버렸다.

나는 면세점을 구경하며 미국에 가서 쓸 스킨과 로션을 샀다. 명품 시계 매장에 들어가 구경만 하고 나오면서,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좋은 시계를 사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고, 남은 커피를 들고 게이트 앞으로 갔다.

내 이름이 적힌 비행기 표와 여권을 들고 게이트를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이 나라를 떠난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게이트를 통과하고 보딩 브릿지를 건너는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이 나라를 떠나는 건가? 어릴 때부터 늘 꿈꾸어 왔던 순간인데 막상 꿈이 현실이 되자 현실감이 없었다. 이러다 누군가가 이제 일어날 시간이라고, 나를 꿈에서 깨울 것만 같았다.

아메리칸 항공 AA 280편. 내 자리는 프리미엄 이코노미 좌석이었다. 모아 놓은 돈에 작은아빠가 준 돈을 보태 프리미엄 이코노미 좌석을 산 것이다. 일찌감치 자리에 앉고, 나는 아이폰을 비행기 모드로 돌려놓고 좌석벨트를 매고 담요를 뒤집어썼다.

얼른 잠들고 싶었다. 앞으로 열두 시간 넘게 닭장 같은 좌석에서 시달릴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환승지인 댈러스1)에 도착했기를 바라며 잠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더니 가슴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렸다. 커피를 마셔서 그런가? 평소에는 한밤중에 커피를 마셔도 잠을 잘 잤는데.

이러다가 비행기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질 것 같아서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그 위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왜 이러지. 주윤. 정신 차려. 이게 얼마나 힘들게 잡은 기회인데. 너는 이 기회를 즐겨야 해. 너는 너 자신을 속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땅에 가기를 늘 소망해 왔잖아. 너는 그곳에서 마음 편히 살고 싶어 했잖아. 그곳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자유를 누리고 사랑을 찾고 싶어 했잖아.

비행기가 활주로로 들어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하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윽고 멈추어 서 있던 비행기가 이륙하기 위해 힘껏 가속하여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는 순간, 울음이 와락 터졌다. 이유를 모르는 눈물이 자꾸만 흐르고, 나는 엄마의 죽음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처럼 엉엉 울었다.

7월 17일, 알렉스

나는 텍사스에서 나고 자랐다. 그런데도 나는 시그나기 공항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끝없는 붉은 황무지에 할 말을 잃었다. 더위에 누렇게 마른 덤불이 듬성듬성 나 있는 서쪽 지평선 너머로 여름 해가 지고 있었다. 마침 해가 기우는 시간이라 황무지는 더욱 붉게 보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원정 경기를 다니며, 텍사스의 주요 도시에는 전부 가 봤다. 이 도시에도 경기 때문에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그때도 풍경이 이랬던가? 내가 모르는 텍사스의 풍경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럴 만하기는 하다. 미국에서 알래스카 다음으로 넓고 프랑스보다도 넓은 주가 텍사스니까. 텍사스는 서쪽 끝에는 뉴멕시코주의 사막과 맞닿는 광활한 고원 지대가 존재하고, 동쪽 끝에는 대서양에 접해 있는 항구 도시 휴스턴이 있을 만큼 드넓은 주였다. 그러니 놀랄 만큼 다양한 풍경이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 고향은 오스틴이다. 텍사스의 주도이며 텍사스에서 가장 세련된 도시. 내가 오스틴에서 자란 것은 엄마가 텍사스 주립대 교수이고, 아빠가 파트너로 근무하고 있는 로펌이 오스틴에 있기 때문이었다.

오스틴은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다. 대도시이고 부촌이기에 근사하고 도회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화려한 쇼핑센터, 풍요로운 문화 자원, 깔끔한 도시 계획, 미식가의 천국이라 불릴 만큼 빼어난 레스토랑들. 차를 타고 15분만 나가면 문명과 부의 정점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지척에 있었다.

내 부모님은 백만장자는 아니지만, 좋은 학력과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도시의 세련되고 우아한 삶을 추구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현대적인 디자인의 저택은 오스틴에서 가장 학군이 좋은 웨스트레이크 힐즈에 있고, 부모님은 나에게 단정한 옷을 입히며 예의 있는 언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덕분에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미슐랭 가이드에 이름을 올린 오스틴의 유명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법을 배웠고, 음악회에 다니며 교향곡을 듣고 오페라를 관람하며 자랐다.

내 삶이 축복받았다는 사실은 안다. 내가 곱게 자란 것은 훌륭한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난 덕분이다. 운동에 들어간 돈을 비롯하여 대학 등록금, 로스쿨 등록금과 생활비까지 흔쾌히 대주실 수 있는 부모님은 흔치 않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한 달에 수천 달러짜리 쿼터백 과외를 받아가며 대학교 때까지 선수 생활을 했고, 학업에서도 아주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언뜻 보기에는 이 모든 일이 쉬워 보인다. 부모님의 경제력과 응원이 있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해 보면 절대 쉽지 않다.

나처럼 모든 것을 잘 해내고 싶다면 봉쇄 수도원에 사는 수도사처럼 자신을 절제하고, 시간을 쪼개 살아야 한다. 굳이 말하자면, 내 삶은 백조와 비슷하다. 백조는 연못을 우아하게 미끄러지듯 헤엄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물 밑에서 미친 듯이 다리를 젓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 * *

아파트 입주 일자까지는 3일이 남아 있었다. 공항에서 우버를 타고 예약해둔 호텔로 체크인했다. 호텔에 체크인하니 밤 10시였다. 나는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부모님과 통화했다. 부모님은 새집에 들어가게 되면 영상 통화를 하자고 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알려 달라고도 말씀하셨고,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부모님과 통화를 마치고 여자 친구와 통화했다. 사만다는 웃으며 그곳은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이곳, 대학 도시 시그나기(Signaghi)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고 나서 덧붙였다.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야. 정말 아무것도 없어. 허허벌판에 학교만 있다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 오스틴에 비하면-”

-알렉스, 오스틴과 비교해서 나은 도시가 전국에 몇 개나 될 거 같니?

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샘(사만다의 애칭)의 말이 맞았다. 그래도 나는 오스틴에 남아 있을 샘이 부러웠고, 9월부터 대학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될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 샘의 밝은 미소를 본 것이 고작 몇 시간 전이었는데, 이제는 그녀를 한 달에 한 번이나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 * *

이곳에서는 차 없이 살아 보려고 했다. 그래서 오스틴에서 끌던 내 BMW를 팔았고, 아파트는 학교 바로 앞에 있는 것으로 구했다. 그러나 우버를 타고 공항에서 호텔까지 오는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깨달았다. 차는 이곳에서도 필수다. 나는 열여섯 살 때부터 운전을 했기 때문에 차 없이 사는 것이 너무나 불편했다. 그렇다고 이곳의 대중교통이 오스틴만큼 발달한 것도 아니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몇몇 중고차 딜러와 컨택했고, 차 몇 대를 시승했다. 새 아파트에 입주하던 날, 나는 내 차를 팔고 남은 돈 중 5000달러를 털어 2003년식 중고 도요타 캠리를 샀다. 일본 차는 잔고장이 적고 연비가 좋다. 앞으로 이 촌구석에서 3년 동안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차종을 합리적으로 선택했다.

새집까지 차를 끌고 오는데, 차의 선팅 상태가 엉망이었다. 10년도 넘은 중고차가 어련할까. 이 차를 뽑고 10년 넘게 끌었던 전 주인은 새 차를 받자마자 선팅을 한 후, 새로 선팅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곧장 선팅 업자를 찾아갔다. 여름에는 화씨 100도(섭씨 37도)를 우습게 넘나드는 텍사스에서 선팅하지 않은 차를 끄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나는 신용 카드로 500달러를 망설임 없이 결제하며, 법에 걸리지 않는 수준에서 최고로 진한 선팅을 주문했다. 법에 따르면, 뒷좌석 유리와 후면 유리는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커멓게 선팅해도 되지만 전면 유리와 앞 좌석 유리는 옅게 선팅해야 한다. 업자가 작업하는 동안, 나는 사무실에 앉아 선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돈이 모자라면 부모님이 보태 주시기는 하겠지만, 가져온 돈이 점점 줄고 있어서 입맛이 썼다.

선팅을 마치고, 차에 너덜너덜하게 붙어 있던 스티커도 뗐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니. 나도 신앙심이 상당한 편이지만, 내 차의 전 주인만큼은 아니었다.

차에 시동을 켜고 아파트로 출발했다. 사거리에 멈추어 선 사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이름은 알렉산더 줄리안 케인즈 테신 4세. 텍사스주 연방 상원의원인 알렉산더 테신 주니어는 내 할아버지이다.

나는 대학 시절까지 미식축구를 했다. 포지션은 쿼터백. 나는 명문가 출신이고, 백인에 잘생기고 실력도 전국에서 손꼽혔기에 제2의 톰 브래디2)가 될 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드래프트에 나가면, 댈러스 카우보이스3)가 나를 지명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허리 부상이 내 발목을 잡았고, 뇌 손상4)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뇌동맥류까지 발병했다.

수술은 고등학교 때도 받았다. 처음 받은 수술은 토미 존 서저리5)였다. 쿼터백이라 경기에서 패스할 일이 많다 보니, 나는 어린 나이에 오른쪽 팔꿈치 인대를 잃게 되었다.

팔꿈치 부상은 시작에 불과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 잦은 편두통이 찾아왔다. 대학교 3학년 때에는 전국 대회 플레이오프 준결승에서 팀을 결승에 진출시키려고 애쓰다가 상대편 라인배커6)와 충돌하면서 허리가 망가졌다. 나는 3학년을 마치고 드래프트에 나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허리를 고치려고 저명한 스포츠 의학 전문의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나를 진단했던 의사 세 명 모두는 내 선수 생명을 연장하기는 힘들 것이라 진단했다. 내 상태를 어떻게 알았는지, NFL 구단 스카우터들 사이에는 내 선수 생명이 끝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들이 구단에 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잔뜩 담긴 보고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나는 섣불리 드래프트에 나갈 수도 없었다.

결국, 수술은 피할 수 없었다. 진통제를 먹지 않고는 잠들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허리 수술 직전, 수술 전 상태를 검사하기 위해 전신 MRI를 찍었는데 뇌동맥류가 발견되었다. 어쩐지,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운 증상이 잦아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뇌동맥류가 발병한 원인은 경기 중 상대 팀 선수와의 잦은 충돌로 인한 뇌 손상일 것이라 했다. 나에게도 다른 선수들처럼 미식축구 선수의 직업병이 찾아온 것이다.

의사는 당장 운동을 그만두라고 했다. 이대로 두면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엄마도 아빠도 운동을 그만하자고 나를 설득했다. 부모님은 당신들이 마흔 살에 어렵게 얻은 외동아들을 잃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운동을 그만두고 싶지 않아 한동안 고집을 피웠다. 나는 죽도록 노력한 만큼 운동을 정말 잘했고, 그 노력을 하루아침에 헛수고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끝까지 버텼다.

하지만 허리 수술을 앞둔 어느 날 아침. 나는 잠에서 깨어났고,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을 만큼 심각한 통증에 울부짖어야만 했다. 아빠가 911을 부르고, 나는 응급실에 실려 가면서 냉엄한 현실을 깨달았다. 이제 다시는 경기장에 설 수 없을 거라고.

허리 수술을 받고 뇌수술까지 연이어 받았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운동을 그만두었고, 재활 치료를 받느라 1년을 휴학했다.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우울증 치료도 병행했다. 엄마가 외할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의 많은 부분이 내 수술비와 재활에 들어갔다.

엄마는 내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만 말하고, 나에게 수술비와 재활비가 얼마나 나왔는지는 정확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글은 전지전능하다. 나는 구글로 내 수술비와 재활비를 찾아보고 나서 큰 충격을 받았다. 전신마취가 필요한 수술을 두 번이나 받고, 재활 치료를 받았으니 보험 처리를 했어도 비용이 많이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엄마가 그 돈을 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외할아버지가 평생 일군 재산의 많은 부분이 내 치료비로 날아갔기 때문에, 엄마에게 거듭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재활 치료를 마치고, 복학해서 재무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할아버지는 상원의원이 되기 전에는 연방 정부 법무부 장관으로 명망이 높았고,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로스쿨에 가서 변호사가 되는 것이 집안의 전통이었다. 운동을 그만두고 나니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막막했지만, 그나마 집안의 전통을 따르기가 쉬워 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동안 로스쿨 입시를 준비했지만, 내 LSAT7) 점수는 어느 정도 오르고 나니 더 오르지 않았다. 아주 좋은 점수이지만, 내 모교이자 티어 1 명문 로스쿨인 텍사스 주립대 오스틴 캠퍼스 로스쿨에 진학하기에는 부족한 점수였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아 우울증이 도질 지경이었다. 운동을 그만두었어도 운동하던 사람 특유의 경쟁심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회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학교를 졸업하면 실력만 보지만, 엘리트 코스는 분명히 존재했다. 나는 기왕 시작한 김에 최고가 되고 싶었다.

나는 일단 현재 점수로 갈 수 있는 학교에 가고, 학교가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입시를 다시 준비하겠다는 생각으로 이 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좋은 학교이지만 내 눈에는 차지 않는 학교였으니까. 그런데 이 조그마한 대학 도시에서 잘 살 수 있을까? 이 동네 쇼핑몰에는 랄프 로렌조차 없는데?

지금도 미식축구를 그만둔 것이 아쉽다. 미식축구를 잘하고 좋아하는 만큼 미식축구가 힘들고 싫은 이유도 많았지만, 나에게는 분명 위대한 선수의 자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겨우 만 스물한 살이었고, 남은 인생을 휠체어에 앉아 보내고 싶지는 않았기에 선수 생활을 포기했다.

나도 내 상황이 나쁘지 않다는 것은 안다. 나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이고, 운동을 그만두고 단기간 준비하여 텍사스에서 손꼽는 로스쿨에 진학했다. 벽돌만큼 두꺼운 플레이 북8)을 빠르게 이해하고 외우고 응용하고, 작전 타임 90초 안에 감독의 지시를 이해하고 의견을 낼 수 있는 머리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더 잘될 수 있었고, 그랬다면 정말 좋았을 거다.

* * *

대학교 시절, 원정 경기를 다니면서 이 도시에 몇 번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경기가 목적이라 도시와 학교를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었다. 내가 가 본 곳은 우리가 묵던 호텔과 학교의 스타디움이 전부였고, 나는 이 도시의 모든 것이 너무 낯설었다.

새 아파트는 학교에서 가까웠고, 룸메이트와 같이 살게 되었다. 두 명이 방 두 개짜리 집에서 같이 사는 것이다. 그나마 방마다 화장실이 딸려 있고 부엌과 거실만 공유하는 구조라 다행이었다.

내 룸메이트 아비는 인도에서 온 화학과 박사 학생이었다. 룸메이트와 성격이 안 맞을까 봐 걱정했는데, 아비는 매일 연구실에서 일하고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느라 아침 일찍 집을 나갔다가 자정이 다 되어 들어오기에 얼굴을 볼 일이 없었다. 어쩌다 마주쳐도 성격 좋고 유쾌한 친구라 같이 지내기 편했다.

* * *

오후에는 애슐리 홈스토어9)에 가서 필요한 것들을 샀다. 돈을 아끼려면 월마트에 가는 것이 맞지만, 나는 같잖은 자존심을 부리며 월마트에 가지 않았다. 삶의 질을 두고 더는 타협할 수 없었다. 내 형편이 허락하는 한, 괜찮은 것을 사서 쓰고 싶었다.

나는 아파트의 싸구려 가구 때문에 짜증이 치솟았다. 침대 매트리스가 내 키에 비해 짧아서 자려고 누우면 발끝이 허공에 떴고, 자다가 뒤척이면 매트리스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서랍장은 매끄럽게 여닫히지 않았다. 나는 본가에 있는 내 침대와 책상이 그리워졌다. 내 체구에 맞춰 맞춤으로 제작한 가구를 오스틴에서 실어오고, 싸구려 가구를 전부 내다 버리고 싶었다.

단, 주방 도구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독일제 냄비와 프라이팬을 샀고, 나무 칼꽂이까지 딸린 독일제 칼 세트와 숫돌까지 샀다. 나는 음식을 많이 먹고, 입맛도 까다로운 편이라 외식을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요리를 익혔고, 나만의 주방 도구를 사서 꼼꼼히 관리했다. 요리할 때는 칼이 특히 중요했다. 칼이 무디면 칼질이 힘들어지고, 칼질이 힘들면 요리할 맛이 나지 않기 때문에, 나는 마치 경기에 나서기 전에 헬멧과 장비를 닦고 점검하는 것처럼 칼을 자주, 정성껏 숫돌에 갈았다.

* * *

전국에 있는 로스쿨의 커리큘럼은 거의 유사하다. 집안에는 법조계에 있는 친척들이 많고, 아빠가 변호사라 커리큘럼에 대해 모르는 부분은 없었다. 1학년 때에는 전공 필수 과목을 듣고, 2학년 때부터 진출하고자 하는 분야에 맞는 심화 과목을 공부한다. 한 학년을 마치면 여름 방학마다 인턴으로 근무하고,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하는 해의 여름에 변호사 시험을 보고 취직을 준비한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진로였다. 집안에 변호사와 법관이 많다 보니 그들이 진출해있는 분야가 다양해서 진로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는 쉬웠다. 집안의 힘을 빌리고 싶지는 않지만, 집안의 후광을 누리고자 하면 좋은 기회를 잡는 것도 쉬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앞으로 어떤 분야에 진출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다른 학생들처럼 오랫동안 로스쿨 진학을 준비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선수 경력이 끝장나고 앞으로 어떤 진로를 택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익숙한 진로를 따라, 막연하게 진학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내 지능에는 문제가 없으니 학업은 잘 따라갈 수 있겠지만, 진로는 직접 경험해야 알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잘될 거라 확신하고, 나의 장래가 밝다고 생각하면서도 적잖이 불안했다.

여름 학기 3주차, 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기숙사로 갔다. 기숙사에 머물며 영어 수업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조교로 일하는 조건으로 등록금을 면제받고 1년 생활비를 받는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영어 수업을 듣고 시험을 통과하는 사람에게만 조교로 일할 자격을 주었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나라에서 학업을 마친 것이 아니라면, 조교로 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어 수업을 듣고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나는 한국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쳤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수업과 시험은 걱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통과할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3년 동안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살았기에 영어를 잘한다. 모국어인 한국어만큼은 아니어도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하고 살 수 있다. 그리고 언어의 장벽은 외국어를 쓸 때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모국어를 써도 소통의 단절을 느끼는 법이다. 마치 나와 우리 가족처럼.

* * *

기숙사를 배정받자마자 한국에서 가져온 짐을 풀었다. 짐을 정리하고, 서랍장 위에 아기 신발 다섯 켤레를 올려놓았다. 한국에 살 때도 연구실과 내 방의 책상 위에 아기 신발을 올려 두었다. 이 신발들도 거기서 가져온 것이다. 나는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빠가 될 일은 없겠지만, 아기를 좋아해서 아기 신발을 모았다. 누나가 자형과 아기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아기 신발을 더 열심히 모았다.

만약 누나가 조카를 낳는다면, 그 아이를 정말 예뻐할 것이다. 조카를 위해 내 통장을 다 바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미국으로 떠나면서 내 손으로 누나와 연락을 끊었다. 설령 내가 먼저 연락한다고 해도 누나는 나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이니까.

내가 스무 살 때 남자를 좋아한다고 누나와 아빠에게 밝힌 이후, 누나는 나를 사랑하면서도 미워해 왔다. 누나는 나를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누나는 나를 볼 때마다 남자를 좋아하는 성향을 고치려고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다그쳤다.

나는 누나에게 시달리기 싫어서 내 성향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누나는 크게 기뻐했다. 누나는 노력의 힘을 맹신하는 사람이지만, 세상에 노력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 성향을 바꾸는 것이 노력해서 가능한 일이었다면, 진작 내 성향을 고쳤을 것이다.

* * *

통신사 대리점을 방문하여 원래 쓰던 아이폰에 선불 유심을 꽂아 개통했다. 새 번호를 아는 사람은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 몇 명뿐이다. 아버지도 누나도 자형도 이 번호를 모른다. 이번에 영어 수업을 듣는 한국 사람은 나까지 두세 명 정도이고, 나는 일부러 한국 사람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한국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고 왔다. 한국과의 접점은 완전히 끊어버리고 이곳에 완벽히 스며들고 싶었다. 게다가 한국 유학생 사회가 너무 좁아서 온갖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 좋지 않다고 들었다. 유학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GRE10)를 준비하느라 대부분 같은 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였다. 그들이 내가 한국에서 알던 사람들과 친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끔찍했다.

* * *

설마 시험에 떨어지기야 하겠어? 나는 친구를 사귀기 위해 영어 수업은 기본만 따라가고 운동을 열심히 했다.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나마 캠퍼스 안에서는 흑인과 히스패닉을 볼 수 있었지만, 캠퍼스를 벗어나면 백인만 보였고 동양인은 흑인이나 히스패닉보다도 보기 힘들었다.

나는 학교 체육관을 둘러보았다. 생활 스포츠가 활성화되어 있다 보니 학교의 운동 시설은 아주 훌륭했다. 한국 학교의 체육관 시설도 좋았지만, 이곳의 규모와 질에 비할 수는 없었다. 나는 체육관 사무실에 가서 돈을 내고 등록하고, 야외 농구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농구 경기에 끼워 달라고 했다. 그러자 농구장에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백인 남자애들 일곱 명이 동시에 나를 보았다. 그중 한 명이 나를 보더니 말했다.

“야, 우리와 경기하면 힘에 부칠 텐데.”

얼굴이 뽀송뽀송한 것을 보니, 다들 학부 저학년 학생 같았다. 아무리 봐도 내가 형인데. 내 키는 한국 남자 평균 신장보다 조금 크고, 이곳에서도 평균은 되었다. 대체 뭘 보고 어린애 취급을 하는 거지?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거야 해 보면 알죠. 그리고 난 고등학생이 아니에요.”

“고등학생 같은데…… 요?”

“난 한국에서 석사 과정까지 마쳤고, 지금은 박사 학생이에요. 그리고 나는 의무 복무도 마쳤어요.”

나는 일부러 군대 이야기를 꺼냈다. 카투사로 복무한 대학 동기의 말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군인을 깍듯하게 예우하고, 특히 참전 용사에 대한 예우가 극진하다고 했다. 그 녀석은 미국 사람들은 한국 남자들이 의무 복무를 한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고, 한국은 엄연히 휴전 국가라서 의무 복무도 참전으로 본다고 말해 주었다.

대학 동기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녀석들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겠지. 내 예상대로 군대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백인 남자애들은 나를 우러러보기 시작했다. 어린애를 대하듯 장난스럽던 말투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그 녀석의 말이 맞았다. 나는 그 녀석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흐뭇해졌다.

“오오, 공군? 육군? 어디에서 복무했어요?”

“육군. 군사 분계선에서 복무했어요.”

“우와, 그래요. 같이 경기해요. 이름이 뭐예요?”

“윤.”

“좋아요. 윤. 포지션은 뭐예요?”

“포인트 가드.”

내가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했을 때, 여태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농구장 바닥에 공을 튕기던 녀석이 나에게 공을 휙 던졌다. 선명한 금발에 키와 체구가 매우 크고 잘생긴 녀석이었다. 나는 그 녀석이 던진 공을 가볍게 잡아챘다. 패스가 보기 드물게 정확해서 공을 받기 쉬웠다. 내가 공을 잡아채자, 그 녀석은 눈을 마주치며 씩 웃었다. 나 역시 그 녀석과 눈을 마주치고, 우레탄 바닥에 공을 튕기며 웃었다.

여름 학기 3주차, 알렉스

운동선수로서의 경력은 끝났지만, 운동은 여전히 좋아한다. 재활하는 동안 운동을 하지 못해 근육이 빠지는 것도 싫었고 몸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수술과 재활 치료가 마무리된 후, 헬스장에 가거나 농구를 했다. 내가 미식축구 다음으로 좋아하는 스포츠는 농구였으니까.

며칠 동안 이사를 마무리하고 학교 체육관에 갔다. 집에 가만히 있어 봤자 쓸데없이 불안한 생각만 나는데, 불안함을 달래는 것에는 운동만 한 것이 없다. 몸을 움직이고 목표에 집중하다 보면 생각이 지워지기 때문이다.

돈을 내고 체육관에 등록하고 나서 시설을 둘러보는데 야외 농구장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학부생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바닥에 공을 두고 골대 앞에 모여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애들에게 말을 걸었다.

“경기할 거예요?”

“이러면 일곱 명이라 곤란한데요. 한 명 더 기다려도 되면 같이 해요.”

“괜찮아요.”

“그럼 한 명 더 기다렸다 하죠.”

“좋아요.”

우리는 한 명이 더 오기를 기다리며 잡담을 나누었다. 그들은 자신이 각각 와이엇, 콜튼, 카일, 라이언, 제임스, 조엘이라고 소개했다. 다들 이름이 예쁘고 현대적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빠의 뒤를 이어 증조할아버지의 고풍스러운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나와는 달랐다.

나는 알렉스이고, 로스쿨 신입생이라고 소개했다. 알렉산더는 엄마가 나를 혼낼 때나 부르는 이름이었다. 애들은 대부분 학부 2학년이었고 전공은 기계 공학, 재무, 교육학, 간호학 등 제각각이었다. 그러자 라이언이 나에게 되물었다.

“공부 잘했네요. 학부는 어디 나왔어요?”

“텍사스 주립대 오스틴.”

“으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성이 테신이에요?”

빨간 머리, 제임스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제임스는 고함을 빽 지르며 물었다.

“설마 했는데…… 드래프트는 어떻게 하고 여기 왔어요?”

텍사스에서는 대학 미식축구가 어지간한 프로 스포츠보다 인기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이곳에도 있을 줄은 몰랐다.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사실대로 말했다.

“부상 때문에 운동은 그만뒀어요.”

“난 당연히 알렉스가 프로로 갈 줄 알았어요. 아깝다.”

“왜? 무슨 일이야?”

“알렉스, 롱혼스11) 쿼터백이었어. 롱혼스에 상원의원 손자가 있다고 그랬잖아.”

애들이 나를 둘러싸고 감탄하는 시선을 보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하는 일은 흔한 일이지만 오늘따라 너무 민망했다. 왜 자꾸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대박. 쩐다!”

“여기에는 왜 왔어요?”

“로스쿨에 왔다 그랬잖아.”

“아, 우리 학교는 로스쿨이 괜찮지.”

애들은 어느새 미식축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제는 이번 프로 드래프트에 대한 것이었고, 나는 슬그머니 그들과의 대화에서 물러났다. 미식축구를 열심히 하고 좋아했던 만큼, 내가 더는 그 세계에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미식축구에 대해 떠드는 애들을 내버려 두고, 나는 혼자 드리블을 하고 자유투를 했다. 패스는 미식축구를 그만두었어도 여전히 레이저처럼 정확했고, 슛은 골대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내 실력이 아깝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농구장으로 걸어왔다.

“농구 할 거예요?”

그는 맑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수다를 떨고 있던 여섯 명의 애들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모국어 억양이 아주 미세하게 느껴지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동양인이었다.

오스틴에 살다 보면 동양인들을 자주 보게 된다. 오스틴에는 스마트폰과 반도체로 유명한 한국 대기업의 반도체 공장과 연구소가 있기 때문이다. 오스틴에는 한국인이 아닌 동양인도 자주 보이지만, 나는 그들의 국적을 구분하지 못했다. 운동을 하느라 동양인과 어울릴 기회가 거의 없어서 그들을 눈여겨볼 일이 없었으니까. 미식축구부에는 백인과 흑인뿐, 히스패닉과 동양인은 발을 디딜 곳이 없었다.

내가 동양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은 고정 관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양인들은 대개 명문대를 졸업해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고, 내성적이고 겸손하고 성실한 편이다. 주변에 보이는 동양인들은 대부분 공무원, 변호사, 회계사, 대기업 직원 또는 컴퓨터 엔지니어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키가 훤칠하고 존재감이 뚜렷한 동양인 배우들을 볼 수 있지만, 길에서 마주치는 동양인들은 대부분 체구가 작고 동안이며, 얼굴에 표정이 없고 희미하게 생겼다.

하지만 그는 눈에 확 띄는 사람이었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본 동양 백자처럼 깨끗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였다. 조그마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반듯했고, 환한 상아색 피부는 모공과 잡티 하나 없이 고왔다. 키는 평균 정도이지만 팔다리가 길고 마른 체격이었고,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새까맣고 결이 좋아 보였다. 이 사람은 어쩌다가 이 촌구석까지 오게 되었을까. 나는 그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야, 우리와 경기하면 힘에 부칠 텐데.”

카일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동양인들은 실제 나이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외양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처럼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일 것이다. 이 동네 애들은 평소에 동양인을 마주친 적이 거의 없어서 나보다도 동양인에 대해 무지했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그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거야 해 보면 알죠. 그리고 난 고등학생이 아니에요.”

“고등학생 같은데…… 요?”

“난 한국에서 석사 과정까지 마쳤고, 지금은 박사 학생이에요. 그리고 나는 의무 복무도 마쳤어요.”

군 복무라는 단어를 듣고 다들 반응이 달라졌다. 다들 그에게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의 외양만 보면, 그가 군 복무를 마쳤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에게는 극한 상황을 몇 번이나 견뎌냈던 사람 특유의 초연함이 있었고, 그 초연함이 그의 군 복무 경력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던 와이엇이 그에게 물었다.

“오오, 공군? 육군? 어디에서 복무했어요?”

“육군. 군사 분계선에서 복무했어요.”

군사 분계선은 우리가 모두 상식으로 아는 지명이었다. 군사 분계선은 한국과 북한의 경계에 있는 대치 지역이었다. 대단한데? 나는 감탄했다. 녀석들 역시 나 못지않게 감탄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눈매였다. 햇빛이 환한데도 동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홍채가 검었다. 눈썹뼈가 평평하고 쌍꺼풀이 없는 것이 신기해서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있는데, 일행 중 한 명이 말했다.

“우와, 그래요. 같이 경기해요. 이름이 뭐예요?”

“윤.”

“좋아요. 윤. 포지션은 뭐예요?”

“포인트 가드.”

농구에서는 포인트 가드가 게임을 주도한다. 그래서 나는 쥐고 있던 공을 그에게 던졌다. 그는 내가 던진 공을 날렵하게 잡아챘다. 그는 운동 신경이 좋았고,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공으로 드리블을 하면서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어버렸다.

* * *

그는 농구를 잘했다. 키가 큰 편은 아니지만 몸이 날래고 판단력이 좋았다. 또한 훌륭한 전략가였으며 공 간수도 잘했다.

그와 나는 다른 팀이었고 그의 활약으로 그가 속한 팀이 이겼다. 농구 경기를 마치고, 우리는 자판기에서 콜라를 한 병씩 뽑아 마시며 대화했다. 다들 돌아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나는 내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시 했다. 오스틴 출신이고, 미식축구를 오래 하다가 부상으로 그만두고 가업을 이으려 로스쿨에 왔다고. 내가 상원의원의 손자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가 밝혔듯, 그의 이름은 윤이었다. 그는 컴퓨터 공학 박사 과정 신입생이고, 학교 기숙사에 묵고 있고, 학교에서 주최하는 영어 워크샵을 듣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일 때문에 오스틴에 3년 동안 살았다고도 말했다. 오스틴에 살았다니. 우리는 어쩌면 예전에 마주친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고, 그에게 물었다.

“어느 동네에 살았어요?”

“노스웨스트 힐즈요.”

나는 윤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노스웨스트 힐즈는 우리 동네, 웨스트레이크 힐즈의 바로 옆 동네였다. 우리는 정말 예전에 마주친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 * *

사막에서 불어오는 여름 밤바람은 서늘하고 건조했다. 땀이 순식간에 식으며 몸이 으슬으슬해졌다. 추위가 느껴지고, 우리는 콜라를 반쯤 마시고 나서 흩어졌다. 반쯤 빈 콜라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마침 차를 그의 기숙사 근처에 세웠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나는 먼저 걸어가고 있는 윤을 쫓아가며 말을 걸었다.

“같이 걸어가죠. 제 차가 30번 주차장에 있어서.”

내 말을 듣고, 그는 자리에 멈추어 서면서 나에게 물었다.

“그게 어디예요?”

“그쪽 묵는 기숙사 옆에 있는 주차장이요.”

“아.”

우리는 나란히 걸었다. 여럿이서 함께 있다 둘만 남게 되니,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내 말을 듣기만 했다. 나는 그와 걷는 내내 잡담을 했다. 다음 주에 교수를 만나 상담하고 수강 신청을 하게 될 것 같고, 새롭게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니 기대된다고, 하지만 이 동네는 조용한 대학 도시라 지루하고, 난 지루한 건 질색이라고. 윤은 내 말을 가만히 듣다가 나에게 물었다.

“……진짜 이곳이 별로예요?”

“네. 그쪽도 오스틴에서 살아봤으니 알 거 아니에요? 오스틴에 비하면 여기는 촌구석이죠.”

“그게 너무 오래전이라 오스틴이 어땠는지 기억이 안 나요. 그리고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어요.”

“예, 뭐 그럴 수 있겠죠.”

“이곳은 한국보다 훨씬 자유롭거든요.”

그의 순진한 말을 들으니 코웃음이 나왔다. 자유? 이 나라에 텍사스보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주는 없었다. 이 사람이 아직 뭘 모르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에게 면박을 주었다.

“저기요, 여긴 텍사스예요. 그렇게 리버럴한 동네가 아니-”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뭘 하든 비난하거나 간섭하지 않고 존중한다는 뜻에서요.”

윤은 내 말을 가로막고 차분하게 말했다. 자유와 존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그의 말이 맞았다. 자유와 존중은 미 대륙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핵심 가치 중 하나니까.

나는 윤을 바라보았다.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키가 작은 그의 머리꼭지가 내려다보였다. 가마가 정수리에 있고, 까맣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촘촘하게 나 있었다. 나는 여름 밤바람에 흔들리는 그의 머리카락을 보며 물었다.

“다음에는 언제 농구 경기를 하러 올 거예요?”

“생각 안 해봤는데…. 아마 1차 시험 끝나고 나서요.”

“그게 언제예요?”

“이번 화요일에 끝나요.”

“그러면 목요일 날 농구 경기 한 번 더 하죠. 저녁 여덟 시 어때요? 그때는 같은 팀 해요.”

“네.”

윤은 나를 한참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내 키가 지나치게 커서, 그가 나를 한참 올려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 밤바람은 시원하게 살랑거리고 검푸른 밤하늘에는 달과 별이 빛난다. 나를 말갛게 올려다보는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고 얼굴을 붉혔다. 나는 이 분위기가 어떤 분위기인지 안다. 사만다에게는 미안하지만, 만약 윤이 여자였다면 낭만적인 분위기에 취해 그에게 키스했을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내 생각이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같은 것이 달린 남자에게 키스라니. 말이 안 되는데.

여름 학기 4주차, 윤

연습 시험의 첫 번째 과목은 강의 시연이었다. 나는 강의 시연을 적당히 준비했다. 15분짜리 강의 시연을 앞두고, 학생들은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대기실에는 다양한 국적의 유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학생들은 인도나 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계 사람들이었다.

영어 워크숍 디렉터가 시험을 앞둔 학생들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이곳의 문화에 대한 질의응답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곳에 잘 적응하는 것은 나에게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 질의응답 내용을 열심히 들었다.

“여기는 연휴에는 상점이 모두 문을 닫나요?”

“네. 추수 감사절이나 성탄절 같은 연휴에는 대부분 문을 닫아요. 그러니까 달력을 체크하고 식료품이나 생필품은 미리 사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연휴 내내 굶어야 해요. 연휴 기간 내내 세븐 일레븐에서 끼니를 때워야 한다면 매우 서글프겠죠?”

디렉터는 친절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녀가 말을 마치자 인도네시아에서 왔다는 학생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디렉터는 학생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다.

“총기 문화에 대해서 걱정돼요. 법이 바뀌어서 이제 강의실에도 총기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잖아요.”

“그렇죠. 여러분이 많이 걱정하리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텍사스에서 총기 면허가 있는 사람의 수는 운전면허를 가진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아요. 총기 면허의 수를 생각하면 총기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게 아닌 거죠. 그리고 총기 사고는 대부분 원한 관계 때문에 발생하는데 여러분은 갓 미국에 온 학생들이잖아요. 여러분들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일이 없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다음 질문?”

디렉터의 말은 합리적이지만 다소 무책임했다. 맞는 말이기는 하다. 갓 미국에 온 내가 누구에게, 무슨 원한을 샀겠는가? 하지만 그녀가 학생을 안심시켜 주거나, 총기 사고를 피하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손을 들고 디렉터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는 한국에서 왔는데, 한국에서는 요새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편입니다. 여기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가요?”

한국에서 왔다니.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대기실 저쪽에서 들려왔다. 얼굴이 희고, 긴 머리카락을 청록색으로 염색한 여학생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역시 세상은 좁았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한국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이유 없이 식은땀을 흘렸다.

“여기는 대학이죠. 텍사스는 기독교 교세가 강한 지역이라 전체적으로 보면 매우 보수적이지만 우리 대학은 진보적이에요. 캠퍼스 안에서는 관련 논의가 활발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캠퍼스 밖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할 거예요. 페미니즘은 그나마 괜찮은데, 밖에 나가서는 될 수 있으면 동성애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디렉터의 말에 한국인 여학생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한국인 여학생의 옆얼굴을 보다가 얼른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감추었다. 동양인끼리는 얼굴 생김새만 봐도 국적을 구분할 수 있으니 이제 와서 얼굴을 감춰 봐야 소용없지만, 나는 내 존재를 최대한 감추고 싶었다.

* * *

사실 1차 시험은 연습 시험이고 2차 시험이 본 시험이었다. 나는 1차 시험 결과를 받아 들고 망연자실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놀았나 보다. 1차 시험에서 세 과목을 쳤는데, 두 과목에서 낙제했다. 특히 강의 시연 시험 낙제가 치명적이었다.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주제를 골라 15분 정도 강의 시연을 하면 되는데, 세 과목 중에서 그 과목 성적이 제일 엉망이었다.

시험에서 떨어지면 조교를 할 수 없고, 조교를 할 수 없으면 장학금이 나오지 않고, 장학금이 나오지 않으면 학교에 다닐 수 없다. 학교에서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면 다행이지만, 재시험에서도 떨어진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지. 그러나 나는 공항에서 그 난리를 쳐놓고 한국에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문득 알렉스와 약속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시험이 끝나면 같이 농구를 하자고 했다. 하지만 이 상태로는 안 되었다. 공부를 해야겠다. 알렉스에게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나는 그의 연락처를 몰랐다. 우리는 목요일 여덟 시에 농구장에서 보자고, 구두로 약속했을 뿐이었다.

나는 뒤늦게 절박해졌다. 학교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기숙사에 들어와 샤워하고, 책을 폈다. 낙제하지 않은 애들은 시험이 끝났으니 마음 편히 놀겠지만, 나는 도저히 놀 수 없었다. 공부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문득 알렉스 생각이 났다. 지금쯤이면 다른 애들과 농구를 하고 있겠지.

기숙사 앞에서 헤어지며, 알렉스는 나와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 말했다. 알렉스는 내가 오스틴에 살았던 사람이라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사귄 동양인 친구를 신기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굳이 나와 친하게 지낼 이유가 없는 사람인데도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이 신기했다. 알렉스는 백인이고, 쿼터백이었으며, 좋은 대학에서 학부를 마쳤고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딸 것이다. 그는 이미 주류 사회의 일원이고 앞으로도 쭉 주류 사회에서 살아갈 것이다. 내가 게이인 것을 알고도 나와 친하게 지낼 수 있으려나?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이 열자 뜻밖의 인물이 서 있었다. 알렉스였다. 내 방은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왜 안 왔어요?”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지난번에 윤이 들어가고 나서, 이 방에 불이 켜지는 것을 봤어요.”

“…….”

“왜 오지 않았어요?”

알렉스는 고개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낮에는 연한 하늘색이었던 눈동자가 밤에는 엷은 베이지색이 되어 빛났고, 눈동자 속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나는 눈썹뼈가 움푹 들어가 그늘지는 눈매가 낯설어서 눈을 피했다.

“미안해요, 못 간다고 말해 주려고 했는데 연락처를 몰라서…… 시험에서 낙제해서 위기감이 들어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무슨 시험인데요?”

“강의 시연도 있고, 말하기 시험도 있고.”

내 말을 듣고, 알렉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강의 시연? 그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고, 나는 그의 말에 대답했다.

“자기 전공 분야의 기초 개념을 설명해야 해요.”

“강의는 몇 분이나 해야 하는데요? 그리고 시험은 언제예요?”

“15분. 시험은 다음 주 수요일이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알렉스가 차분하게 물었다.

“내가 도와줄까요?”

“뭘요?”

“시험 준비요. 나는 컴퓨터 공학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 나한테 설명해서, 내가 내용을 잘 알아들으면 성공한 거 아니에요?”

“내용을 채점하는 건 아니에요. 억양이나 발음의 명료함 같이 강의의-”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윤이 하는 말 중에,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은 하나도 없는데.”

나는 시험에서 강의 전달력을 채점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우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와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알렉스는 내가 집중력과 노력을 기울여야 해낼 수 있는 일을 손바닥을 뒤집는 일처럼 간단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 알렉스에게는 왜 이렇게 쉬운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 아, 설명을 못 하겠네.”

“뭐가 되든 시험 준비는 도와줄게요.”

미국인들이 이렇게까지 친절했던가? 이곳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눈이 마주치면 방긋 웃어 주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근하게 안부를 묻기는 했다. 내가 무거운 짐을 들고 쩔쩔매고 있으면 흔쾌히 들어주기도 했다.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커서 미국에 다시 와보니 이곳 사람들이 한국 사람 못지않게 정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고려해도 알렉스의 친절은 유별났다.

“그래요…… 고마워요.”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알렉스는 별안간 언더아머 반바지 운동복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더니 잠금을 해제하고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알렉스가 내민 아이폰과 알렉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번호 알려 줄래요?”

알렉스의 말이 황당했다. 내 번호는 왜 궁금한 건데? 얘가 무슨 용도로 쓰려고 내 번호를 따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그의 아이폰을 받지 않자,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알렉스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서 결국 아이폰을 받아 들었다. 그러나 막상 번호를 찍으려고 하니, 새 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10년 넘게 쓴 한국 번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무래도 내 아이폰을 켜서 번호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가서 핸드폰 가져올게요. 새 번호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다녀와요.”

그에게 아이폰을 돌려주고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내 아이폰을 들고 오는데, 현관 문틀에 기대어 서 있는 알렉스가 보였다. 현관에 서 있는 알렉스의 모습이 화보 같았다. 아이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눈매가 깊고, 속눈썹은 길고 숱이 많았다. 코와 이마의 선이 날렵하고 모양 좋은 입술과 턱선은 우아해서, 그는 얼굴만 보면 운동선수 출신이 아니라 배우 출신 같았다.

얼굴만 잘생긴 것은 아니었다. 키가 훤칠하고 어깨가 넓고, 몸에 근육이 많이 붙어 있으면서도 날렵했고, 팔다리가 길어서 시원시원했다. 팔뚝과 허벅지의 굵기가 내 것의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야외에서 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을린 피부도 참 근사했다. 남녀노소 인종 불문 모든 사람의 호감을 끌 수 있는 외모를 갖고 사는 기분은 어떨까? 저런 외모로 살면 분명 인생이 즐겁겠지. 나는 알렉스를 보며 그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현관에 돌아온 나를 발견하고, 나에게 아이폰을 다시 내밀었다. 나는 내 번호를 확인하고, 그의 아이폰에 내 번호를 찍어 주었다. 알렉스는 내 번호를 저장하면서 질문했다.

“이름이 윤이죠, 스펠링이 어떻게 돼요?”

“Y-O-O-N.”

“성은?”

“주. J-O-O.”

“이름에 모음이라고는 O만 있네요?”

알렉스는 내 이름과 번호를 저장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인상을 쓰고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알렉스가 덧붙였다.

“중국 사람 이름 같아요.”

“그런 말, 굉장히 무례한 거 알죠?”

내 말을 듣자마자 알렉스는 바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에요. 알렉스는 진심이었다. 나는 오른쪽 볼을 오른손 검지 끝으로 몇 번 긁었다. 그렇겠지. 악의가 있어 한 말은 아니겠지. 미국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무식한 소리를 잘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직접 겪게 될 줄이야.

“내 성은 테신이에요. T-E-S-S-I-N.”

“알아요.”

알렉스에게 대답하는 내 말투가 까칠했다. 악의적인 인종 차별은 아니지만 미묘하게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알렉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연습할 때 연락 줘요.”

“……네.”

무식한 근육 바보. 내가 연락하나 봐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축객령을 내렸다.

“저는 이제 씻고 잘 거예요.”

“네. 잘 자요.”

알렉스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나는 인사를 받고 현관문을 닫았다. 집 안으로 들어가다가 창밖을 힐끗 보니 알렉스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알렉스는 차를 향해 걸어가다가 기숙사 건물을 한 번 돌아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짓던 알렉스는 다시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여름 학기 4주차, 알렉스

오늘 농구장에는 처음 보는 애들만 있었다. 지난주에 같이 농구를 했던 애들은 아무도 농구장에 오지 않았다. 윤도 오지 않았다. 다들 짜고 오지 않은 건가? 처음 보는 애들과 농구를 하고 주차장까지 걸어가는데, 그가 생각났다. 주차장 옆에 있는 기숙사에 사는 한국 남자. 마침 윤이 사는 기숙사를 보니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기숙사에 있었다.

그냥 집에 갈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나는 기숙사 계단을 올랐다. 현관 앞에 서서 초인종을 찾았는데 초인종이 없어서 현관문을 두드렸다. 얼마 후, 발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린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동양인의 피부가 노랗고 까무잡잡하다는 말은 편견이었다. 어릴 때부터 햇빛 아래에서 운동하느라 많이 탔지만, 엄연히 백인인 나보다 윤의 얼굴이 더 뽀얗고 맑았다. 윤은 처음 보는 동그란 금속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금방 샤워했는지 머리가 젖어 있고 상큼한 바디 워시 향이 나고, 볼은 발그레했다. 나는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물었다.

“왜 안 왔어요?”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지난번에 윤이 들어가고 나서, 이 방에 불이 켜지는 것을 봤어요.”

그 말을 하고 나서, 내가 스토커같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지난번. 윤이 기숙사에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그에게 키스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답을 찾지 못했다.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름밤의 공기가 낭만적이라서 잠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몰랐는데, 그와 가까이 마주 서보니 이유를 알겠다. 윤에게는 그 애를 떠올리게 하는 위태로운 구석이 있어서 신경이 쓰였다. 영원히 열일곱 살에 머물러 있는 그 애를.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던 그 애를. 내가 잠깐 망설이는 사이에 내 곁을 영영 떠나버리고 만 그 애를. 윤은 마르고 연약했던 그 애와는 인종도 외모도 성격도 완전히 다른데, 분명 그 애를 닮았다.

“왜 오지 않았어요?”

나는 고개를 숙여 그와 눈을 맞추었다. 윤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반응을 보니, 나와의 약속을 실수로 잊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약속을 어긴 것이었다. 윤이 내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 말했다.

“미안해요, 못 간다고 말해 주려고 했는데 연락처를 몰라서…… 시험에서 낙제해서 위기감이 들어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무슨 시험인데요?”

“강의 시연도 있고, 말하기 시험도 있고.”

박사 학생이라 영어 시험을 봐야 하나? 아니면 외국인이라서 그런 건가? 똑똑한 학생들에게 성가신 일을 시킨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덧붙였다.

“자기 전공 분야의 기초 개념을 설명해야 해요.”

“강의는 몇 분이나 해야 하는데요? 그리고 시험은 언제예요?”

“15분. 시험은 다음 주 수요일이요.”

그는 영어 시험을 대단히 진지하게 여기고 있었다. 시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면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의 풀죽은 표정을 보고 측은한 기분이 들었고, 그를 도와주고 싶어졌다.

“내가 도와줄까요?”

“뭘요?”

“시험 준비요. 나는 컴퓨터 공학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 나한테 설명해서, 내가 내용을 잘 알아들으면 성공한 거 아니에요?”

“내용을 채점하는 건 아니에요. 억양이나 발음의 명료함 같이 강의의-”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윤이 하는 말 중에,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은 하나도 없는데.”

“그게 아니라, 설명을 못 하겠네.”

윤은 얼굴을 찌푸리며, 자기 자신에게 짜증을 냈다. 그는 언어의 장벽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 생각을 영어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답답했나 보다. 평소에 언어의 장벽을 크게 느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고, 나는 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말했다.

“뭐가 되든 시험 준비 도와줄게요.”

“그래요…… 고마워요.”

그는 말끝을 흐리면서 대답했다. 윤은 내가 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내가 그냥 가면 우리는 다시 볼 일 없는 사이가 될 것이다. 나는 그와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운동복 반바지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번호 알려 줄래요?”

윤은 내 아이폰을 받아들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게 아이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가서 핸드폰 가져올게요. 새 번호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다녀와요.”

윤은 방에 들어갔다가 아이폰을 들고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내 아이폰을 내밀었다. 윤은 아이폰을 켜서 제 번호를 확인하고 내 아이폰에 그의 번호를 찍었다. 나 역시 그에게 내 번호를 불러주었다. 나는 그의 번호를 저장하다 말고 그에게 물었다.

“이름이 윤이죠, 스펠링이 어떻게 돼요?”

“Y-O-O-N.”

“성은?”

“주. J-O-O.”

“이름에 모음이라고는 O만 있네요? 중국 사람 이름 같아요.”

나는 별생각 없이 말했지만, 날 선 대꾸가 돌아왔다.

“그런 말, 굉장히 무례한 거 알죠?”

그의 반응은 대단히 날카로웠다. 무례하다니. 맹세코 그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내 말이 인종 차별처럼 들렸나 보다. 나는 그에게 바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에요.”

윤은 안경 너머로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윤이 나를 멍청한 운동부 나부랭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건 아닌데, 나는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 황급히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내 성은 테신이에요. T-E-S-S-I-N.”

“알아요.”

윤은 차갑게 말했다. 나는 윤이 더욱 차갑게 말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다급하게 말했다.

“연습할 때 연락 줘요.”

“……네. 저는 이제 씻고 잘 거예요.”

윤은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씻고 나온 티가 나는데 또 씻겠다고? 그는 나를 꺼리는 것이 분명했지만, 대체 왜 나를 꺼리냐고 따져 묻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걸음 물러서며 인사했다.

“네. 잘 자요.”

윤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지만, 그는 현관문을 쾅 닫았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다 말고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연습할 때 꼭 불러요. 잘 자요. 문자를 보내고, 아이폰을 조수석 위에 올려놓고 턱을 쓸었다. 수염이 올라오는 턱을 오른손으로 문지르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되돌아보았다. 나는 그와 마주하고 있으면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을 느꼈고, 그런 스스로가 몹시 낯설었다.

* * *

-새 친구를 사귀었어?

전화기 너머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샘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오기 직전, 사만다는 나에게 은근히 눈치를 주었다. 어서 제게 청혼하라고, 제 친구는 남자 친구에게 반지를 받고 약혼했다고. 하지만 나는 샘에게 반지를 주지 않고 이곳으로 왔다.

나는 우리가 데이트한 지 반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를 애인이라 부를 수 있는 사이가 된 것만으로 큰 진전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당연히 오스틴 로스쿨에 합격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첫 학기를 마치고 청혼해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합격자 발표가 나고, 나는 계획과는 달리 오스틴을 떠나게 되었다. 그래서 샘에게 반지를 건넬 수가 없었다. 그녀를 두고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 미안했으니까. 그때 일을 생각하다가, 나는 수염이 약간 돋은 턱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응. 박사 학생 한 명을 사귀었어.”

-전공이 뭔데?

“컴퓨터 공학.”

-인도 사람이야?

“아니, 한국 사람. 인도 사람은 룸메이트.”

내가 정정하자 샘은 쾌활하게 말했다.

-아, 맞다. 룸메이트는 화학과라 그랬지? 한국 사람이면 엄청나게 똑똑하겠네.

“그런 것 같아.”

-다른 친구는 없고?

“아직은 없어.”

대답과 함께 희미한 웃음이 나왔다. 샘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학교 앞 카페에서 로스쿨 원서를 쓰고 있는 나에게 번호를 먼저 물은 것은 샘이었다. 내가 재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샘은 나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그녀는 매일 나를 챙겨주었다. 내가 재활과 입시를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샘 덕분이었다.

샘과 통화하며,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샘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학기가 시작하고 바빠지면 그녀를 만나기 힘들어질 테니까.

* * *

룸메이트 아비가 곤경에 빠졌다. 그는 가을 학기부터 여자 친구 집에서 동거하려고 아파트 계약을 파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는 한번 계약을 맺으면 계약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사를 하고 싶다면 이사를 할 수는 있지만, 계약 기간 동안의 월세는 계속 내야 한다. 아파트 매니저는 월세를 내기 싫으면 새 룸메이트를 구해놓고 나가면 된다고 말했다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알렉스, 너 로스쿨 학생이잖아.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

“미안. 나는 신입생이라 아직 아는 게 없어.”

“젠장, 이런 게 어디 있어.”

아비는 화를 내며 얼마 남지 않은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나는 아비의 머리숱이 걱정되었지만, 그가 머리숱에 예민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여기 살고 싶다는 애가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솔직히 월세로 보나 위치로 보나 나쁠 게 없는 조건이니 방이 금방 나가겠지?”

“그래.”

“알렉스, 너도 주변에 방 필요한 사람 있나 알아봐 줘.”

나도 이 동네는 처음이라 친구가 없는데? 그렇게 얄밉게 말하려다가 말았다. 안 그래도 열 받은 아비를 약 올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여름 학기 5주차, 윤

15분짜리 시연 강의를 짰다. 연습 시험에서 너무 어려운 내용을 다뤘던 것이 패착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두 번째 강의는 쉽게 짰다. 쉬운 주제를 준비해야 억양이나 발음의 명료함, 전달력에 더욱 신경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제를 고민하다가, 나는 컴퓨터 메모리 구조에 관해 설명하기로 했다. 용어도 쉽고 비전공자들도 상식으로 알 만한 내용이니까.

시연 강의를 짠 후, 알렉스에게 연락할지 말지 고민했다. 알렉스는 재수 없는 녀석이지만, 내 사정이 아쉬우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학교 근처 맛집을 검색하고, 알렉스에게 저녁을 사줄 테니 연습하는 것을 봐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알렉스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저녁은 안 사줘도 돼요. 알렉스는 웃으면서 내 제안을 거절했지만, 나는 꿋꿋이 학교 근처에 있는 루이지애나 스타일 가정식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사주겠다고 우겼다. 도움을 받고 답례로 밥을 사는 것이 이곳에서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를 오해하거나 기분이 나쁘다고 말하면, 무슨 뜻으로 밥을 사는 건지 잘 설명해야겠다.

* * *

약속 시각은 여섯 시였다. 내가 먼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알렉스는 차를 끌고 왔다. 지배인이 자리를 정해 주고,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파스타를 시켰고, 알렉스는 원 플레이트 요리를 시켰다. 소고기 구운 것과 볶음밥, 감자튀김과 으깬 완두콩이 같이 나오는 메뉴였다. 나는 맥주 한 잔을 시켜 마셨고, 알렉스는 차를 가져왔기 때문에 사이다를 마셨다.

같이 저녁을 먹는 동안, 알렉스는 미국 사람답게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는 비껴가면서도 스몰 토크를 잘했다. 알렉스는 날씨 이야기,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이야기, 어머니의 지도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룸메이트가 곤경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룸메이트가 여자 친구와 살림을 합치려고 하는데 계약을 깰 방법이 없으니, 나도 집을 구할 때 계약서를 잘 봐야 한다고 말했다. 알렉스의 말을 듣고,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음식은 맛있었다. 조그마한 대학 도시의 소문난 맛집다웠다. 음식을 다 먹었을 무렵, 알렉스가 서버를 불렀다. 서버는 환하게 웃으며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고 물었다. 그때, 알렉스가 말했다.

“제가 먹은 음식 영수증-”

“아뇨, 제가 다 낼게요. 이 친구 음식값까지 한꺼번에 끊어서 저에게 주세요.”

알렉스는 퍽 놀란 눈치였다. 서버가 나와 알렉스를 번갈아 보았고,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서버는 나를 보며 대답했다.

“두 분 것을 같이 계산해서 가져다드릴게요.”

서버는 카운터를 향해 총총 걸어갔다. 얼마 후, 서버가 빌 프레젠터에 영수증 두 장을 끼워 가져왔다. 내가 빌 프레젠터를 펼치는데 서버가 말했다.

“하나는 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손님 것이에요. 제 것에다가 팁을 써서 카드나 현금과 함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빌 프레젠터에 현금으로 음식값과 팁 22%를 함께 끼워놓았다. 알렉스는 팁을 보고 깜짝 놀랐다.

“뭘 그렇게 많이 줘요?”

알렉스가 묻자, 나는 부끄러워졌다. 서버와 알렉스가 동양인이라고 무시할까 봐 허세를 부리고 싶었던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저녁 일곱 시 반이었다. 서머타임 때문에 해가 환하게 떠 있었다. 알렉스는 차를 향해 걸어갔다. 알렉스가 운전석에 타고, 나는 조수석에 탔다. 운전대를 잡은 알렉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이제 연습하러 갈까요?”

“학교에 연습할 곳이…. 빈 강의실에 갈까요?”

내 질문을 듣고, 알렉스는 시동을 걸다 말고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가 시동을 걸고 나서 말했다.

“보통, 학교에서는 저녁 여덟 시가 지나면 건물 전체를 잠가요. 학생증이 있으면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우리 둘 다 아직 학생증이 없잖아요. 혹시 프로젝터 필요해요?”

“아뇨. 강의 자료 없이 말로만 설명해야 해요. 말로만 설명해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강의 스킬이 좋아야 하니까.”

“그거 말 되네요.”

알렉스는 내 말에 맞장구를 치며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기어를 후진에 놓았다. 그는 오른손으로 조수석 머리 받침을 짚고, 고개를 뒤로 돌려 후방을 확인하며 왼손으로 핸들을 돌렸다. 알렉스가 차를 한 번에 빼고 나서, 기어를 D에 놓으며 물었다.

“운전면허 있어요?”

“네.”

“한국에서 운전했어요?”

“네. 누나 차는 몰아봤어요.”

“누나가 있구나. 나는 외동아들이에요.”

알렉스가 모는 차는 레스토랑 주차장을 빠져나와 큰길에 접어들었다. 큰길로 나오자마자 고속도로 교각이 보였다. 나는 알렉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근데, 우리 어디 가서 연습해요?”

“우리 집에 가죠. 카페에서 강의 시연하기는 어렵잖아요.”

룸메이트가 있는데 집에 가도 되나. 나는 걱정이 되어서 그에게 되물었다.

“룸메이트 있다면서요?”

“오늘은 금요일이라 여자 친구네 집에 갔을 거예요.”

알렉스는 나를 안심시키며 대답했다. 룸메이트가 집에 없다면 괜찮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스에게 질문했다.

“…… 집은 어디예요?”

“가까워요. 엑설런트 플레이스 알죠?”

“네.”

이름이 귀에 익었다. 워크숍이 끝나면 집을 보러 다니려고 했는데, 엑설런트 플레이스는 내가 미리 봐둔 후보지 중 하나였다. 귀에 익은 이름이 반가워서 웃는데,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근데 한국에서는 친구들에게 식사를 자주 사 준다면서요?”

“맞아요. 한국에서는 도움을 받는 대신 식사를 사 주는 경우가 많거든요. 알렉스가 내 시험 준비를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저녁을 산 거예요.”

“나는 한국 문화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윤이 저녁을 사준다고 해서 많이 놀랐어요. 그래서 쿼라12)에서 한국 문화에 대해 검색해 봤어요.”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나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줄 알고 설렜는데 아쉽다.”

나는 알렉스가 하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알렉스는 씩 웃고 있었다. 알렉스의 말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 그의 옆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표정을 보니 100% 농담이었다. 그럼 그렇지. 알렉스가 웃으며 덧붙였다.

“농담이에요, 나, 여자 친구 있어요.”

알렉스는 짓궂은 농담을 했고, 나는 태연한 척 웃었다. 그렇겠지. 누가 봐도 헤테로처럼 생겼는데. 왠지 학교 제일의 여신들만 골라 사귀었을 것 같고. 나와는 다르겠지.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알렉스는 느긋하게 차를 운전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곡조의 노래였다.

* * *

알렉스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한국의 아파트 단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아파트 단지는 내가 지금 사는 기숙사와 비슷하게 생겼다. 똑같이 생긴 3층 건물 수십 동이 부지 안에 가득했다. 건물의 한 층에 두 집이 있으니, 한 동에는 여섯 집만 있는 셈이었다.

알렉스는 제가 사는 건물에서 가장 가까운 주차장 빈자리에 차를 세웠다. 알렉스가 먼저 계단을 올라갔고,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알렉스는 차 키 옆에 달린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21세기에 열쇠라니. 도어락에 익숙하다 보니, 열쇠를 보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학교 기숙사가 낡아서 열쇠를 쓰는 게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다들 열쇠를 쓰는 거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현관과 거실, 부엌의 경계가 없었고, 바닥은 온통 타일로 마감되어 있었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현관에 멈추어 섰다. 신발을 벗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알렉스가 어떻게 하는지 봤다. 알렉스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맨발로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알렉스에게 물었다.

“신발을 벗을까요?”

“마음대로 해요.”

나는 신고 있던 플립플랍을 벗어 현관문 옆에 곱게 내려놓았다. 알렉스는 내가 신발을 벗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맞다. 한국에서는 집 안에서 신발 안 신죠?”

“네.”

“나도 집에서는 신발 안 신어요. 물론 우리 집이 특이한 거지만. 집 안을 구경시켜 줄까요?”

“그래요.”

알렉스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가 집에서 신발을 신지 않아서 좋았다. 알렉스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집 안을 구경시켜 주었다. 현관을 열자마자 부엌과 거실이 보이고, 안쪽에는 침실이 두 개 있었다. 왼쪽이 룸메이트의 방, 오른쪽이 알렉스의 방이었다. 그리고 침실마다 바닥에 하수구가 없는 건식 욕실이 딸려 있었다. 건식 욕실은 불편한데.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하수구가 없네요.”

“맞아요. 그래서 아파트에 입주하면 샤워 커튼이랑 봉부터 사야 해요. 이사할 집은 정했어요?”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욕조 옆 선반에 샴푸, 보디클렌저, 배스 릴리가 질서 정연하게 놓여있는 것을 멍하게 보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빨리 정해야 하지 않나? 이제 곧 신학기잖아요.”

“그러게요.”

“이 아파트로 할 거면 우리 집으로 와요. 제발 불쌍한 아비를 구제해 줘요.”

얘는 무신경한 것인지 빈말을 잘하는 것인지. 아무리 친한 사이여도, 누군가에게 선뜻 같이 살자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나? 게다가 생판 모르는 남이고, 이제 세 번 본 사이인데.

“생각해 볼게요.”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방 구경을 마치고, 나와 알렉스는 거실로 나왔다. 알렉스는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며 나에게 물었다.

“맥주 먹을래요?”

“냉장고는 하나인가 봐요?”

“네, 안타깝게도 하나예요. 그래도 서로가 뭘 샀는지 아니까 싸울 일은 없어요. 윤, 맥주 먹을 거예요?”

“주세요.”

알렉스는 냉장고에서 500mL 맥주캔 두 개를 꺼냈고, 나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맥주캔을 땄다. 기분 좋게 시원한 맥주캔을 두 손으로 쥐고 맥주를 홀짝였다. 알렉스는 냉장고에서 병에 든 랜치 소스를 꺼냈고, 감자 칩 한 봉지를 가져와서 커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나와 간격을 조금 두고 소파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감자 칩 봉지를 뜯으며 말했다.

“감자 칩에 랜치 소스를 찍어 먹으면 맛있어요.”

나는 알렉스가 시키는 대로 감자 칩에 랜치 소스를 찍어 먹었다. 감자 칩에 고소한 랜치 소스를 찍으니 정말 맛있었다.

“맛있어요.”

내가 감탄하자 알렉스는 웃었다. 알렉스의 잘생긴 옆얼굴을 보면서 감자 칩을 먹고 맥주를 마시다가, 나는 이곳에 발표 연습을 하러 왔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입술에 묻은 맥주 거품을 오른손으로 훔치며 물었다.

“그래서 연습은 언제 해요?”

여름 학기 5주차, 알렉스

윤은 연습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맥주캔을 커피 테이블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시험에 집착하고 있었고, 나는 윤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연습에 목숨을 걸어요?”

“시험에 붙어야 하니까요.”

“당연히 붙지 않을까요?”

정말로 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연습을 열심히 할 거면서 왜 시험을 보기도 전에 떨어지는 것부터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윤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무릎 위에 놓인 두 주먹을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릴 만큼 꽉 쥐고 있었다. 윤은 분명 무엇인가를 겁내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그에게 물었다.

“윤, 이번에 떨어지면 재시험 기회가 있나요?”

“네.”

“언제요?”

“내년이요. 내년에 이 워크숍을 다시 듣고 재시험을 쳐야 해요.”

“이번에 붙을 거니까 재시험은 걱정하지 마요. 윤이 재시험을 보게 된다고 해도 시험 준비는 도와줄게요.”

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윤은 아무 표정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이 안 먹히다니. 윤은 참 어려운 사람이었다. 내가 웃으면, 보통 상대방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나는 윤의 차가운 반응에 당황해서 변명처럼 덧붙였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연습했죠?”

“네.”

윤은 무릎 위에서 꽉 쥐었던 두 주먹을 폈다. 하얗게 질렸던 두 주먹에 붉은 피가 도는 것이 보였다. 나는 긴장을 풀어주려고, 그의 어깨를 친근하게 손으로 한 번 툭 쳤다.

“한번 해 봐요.”

“종이와 펜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왜요.”

“실전에서는 화이트보드를 쓸 수 있으니까.”

“기다려 봐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에 들어갔다. 방에서 레터 사이즈13) 연습장과 펜 한 자루를 가지고 나와 그에게 건넸다. 윤은 결연하게 연습장을 펼치고 펜 뚜껑을 열었다. 윤이 너무 비장하게 행동해서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며 말했다.

“스톱워치 켤게요.”

“좋을 대로 해요.”

그러자 윤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나는 그의 곁에 다시 앉았다. 그는 스톱워치를 켜고 시작 버튼을 누르면서 말했다.

“강의는 12분만 할 거고, 남은 3분 동안은 질의응답을 할 거예요. 강의 듣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3분 동안 물어봐요.”

“알겠어요.”

윤은 컴퓨터의 자료 구조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선형구조를 가진 자료 구조인 스택, 큐, 덱에 대해 설명하고, 비선형 구조를 가진 자료 구조인 그래프와 트리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형태에 대한 분류 외에도 구현 방식에 따른 자료형 분류 방법이 존재했다. 배열, 튜플, 연결 리스트. 윤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개념을 설명했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연습장에 도표를 그리며 개념을 설명해나갔고, 중간중간 내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 묻기도 했다.

“이해 안 되는 부분 있어요?”

“해시 테이블에 대해 다시 설명해 주세요.”

“해시 테이블에서는 개체가 해시값에 따라 배열돼요. 보통 아주 빠르게 데이터를 검색해야 하는 기능이 들어 있는 소프트웨어에 쓰여요.”

윤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진지하게 대답하는 그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잘할 거면서. 윤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똑똑한 사람이었다. 나는 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계속 질문했다.

“해시가 뭐예요?”

“간략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함수를 이용해서 만들어낸 값을 데이터를 저장할 때 같이 기록하는 거예요. 우편 번호를 생각해 봐요. 우편 번호처럼 고유 번호가 있다면 데이터를 어디에 저장했는지 찾기 쉽겠죠?”

“아, 우편 번호. 이해했어요.”

“또 다른 질문이 있나요?”

그는 긴장이 풀렸는지 한결 편안해 보였다. 나는 웃으면서 그에게 질문했다.

“왜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기로 했어요?”

그는 내 질문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윤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처음으로 내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 질문을 듣고 몇 초 정도 지난 후, 그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이건 강의 내용에 대한 질문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궁금한데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좋아하기도 했고, 먹고 살기 좋은 전공이기도 하고. 기술이 있으면 어디에 가서도 먹고 살지 않겠어요?”

“매우 실용적인 이유네요.”

“네.”

“알겠어요. 강의 잘했어요. 강의를 이렇게 잘하는데 왜 불안해해요?”

“답을 모르겠는 질문이 들어오면, 잘 모르겠으니까 다음번에 알려 주겠다고 말할 거예요.”

내 질문에 윤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지?

“좋은 전략이네요.”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돌렸다.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 싫은 이유가 있겠지. 이렇게 잘하는데 긴장할 이유가 없다. 긴장을 풀고 앞으로 쭉 놀아도 될 것이다. 나는 맥주캔을 집어 들며 윤에게 물었다.

“연습 다 했으니까 영화 볼래요?”

“연습 한 번만 더 해 보면 안 돼요?”

이런 연습 벌레를 다 보았나. 나는 기가 질려 맥주 캔을 도로 커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면 한 번만 더 하는 거예요.”

나는 초시계를 들고 시간을 쟀다. 그의 강의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고, 나는 그가 말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내용은 흘려들었다. 윤은 조곤조곤 설명을 잘했고, 설명에 집중한 표정이 보기 좋았다. 윤이 자료 구조에 대해 설명하다 말고 나에게 대뜸 물었다.

“지금 제대로 안 듣고 있죠?”

“아니에요, 열심히 듣고 있어요.”

그는 나를 한번 노려보고 나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그에게 새치름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설명을 마치고 나니 질의응답 시간이 남았다. 그는 나를 보며 말했다.

“질문해 주세요.”

“무슨 영화 볼까요?”

“그건 강의와 관련된 질문이 아니잖아요.”

“어떤 영화 좋아해요?”

“…….”

윤은 나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쏘아보다가 어린애를 타이르는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나는 진지해요. 이 시험에 꼭 붙어야 한단 말이에요.”

“알아요. 근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 시험 봐도 붙을 것 같으니까 긴장 풀어요. 앞으로 연습할 시간도 충분하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네.”

윤은 나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듣고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그는 아랫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난 영화에 대해 잘 몰라요. 그래서 선호하는 영화가 없어요.”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봐도 돼요?”

“네.”

나는 방에서 맥북을 들고 나와 소파에 앉았다. 윤은 영화를 다운받아서 볼 거냐고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여기에서 영화를 다운받았다가는 경찰에 잡혀가요. 영화 파일 다운로드로 하는 경찰 함정 수사가 많거든요. 한국에서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러지 말아요.”

윤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평소에 애용하는 영화 스트리밍 사이트를 찾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비포 선라이즈>였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남녀가 진지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가 영혼이 통하는 사랑을 느끼게 된다니. 젊은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화면 가득 나올 때마다 숨을 죽이고 화면을 바라보게 되었고, 영화의 배경인 비엔나의 고적하고 그림 같은 풍경을 담은 장면은 정말 아름다웠다.

<비포 선라이즈>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명작 영화였고,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영화를 찾고 나서, 나는 맥북을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윤은 내 옆자리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영화가 시작하고 3분 정도 지났을 때, 윤이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자막 없어요?”

“한번 볼게요.”

“자막이 있으면 자막을 켜 줘요.”

살면서 자막이 필요한 적이 거의 없다 보니, 화면 아랫부분이 자막으로 가려지는 것이 낯설었다. 하지만 윤은 자막을 읽는 것이 익숙한 듯 편안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반듯한 옆얼굴을 보고 이상하게 목이 탔고,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 * *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맥주 세 캔을 마셨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그러자 윤은 기숙사에 돌아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가려고요?”

“걸어갈 거예요.”

“이 밤중에요? 위험해요. 안 돼요. 자고 가요.”

“룸메이트도 있는데 신세를 질 수 없어요.”

“제 룸메이트는 오늘 여자 친구네 집에 가고 없어요.”

“…….”

“내가 술을 안 마셨으면 차로 태워다 주겠지만.”

“…….”

“그러니까 자고 가요.”

윤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고, 나는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를 위해 소파 베드를 펼쳐 잠자리를 만들고, 내 침대에서 베게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여벌로 가지고 있는 무릎 담요를 가져와 그에게 건네고, 욕실에 들어가 새 칫솔 하나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윤은 칫솔을 손에 쥐고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윤이 왜 웃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웃음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윤이 웃는 것을 보며, 나는 그에게 욕실을 양보했다.

“먼저 씻어요.”

“그래요. 고마워요.”

윤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 * *

윤이 씻은 후, 나도 샤워했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유튜브로 비디오를 보다가 잠들었고, 자다가 목이 말라서 깼다. 맥주를 많이 마셔서 갈증이 났다. 물을 마시려고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 안에 넣어둔 생수병을 하나 꺼내 마시려는데 소파에 누운 윤이 보였다. 아까는 머리끝까지 담요를 덮고 있었는데, 이제는 담요를 걷어차고 자고 있었다.

저러다가 감기에 걸리지. 물을 마시고 나서,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집어 그에게 덮어주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의 하얀 얼굴선이 유려했다. 이마 위에 늘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들추고 이마를 손으로 한 번 쓸어보았다. 볼도 한 번 쓸어보았다. 여태까지 얼굴을 만져 본 사람 중에서 윤의 피부가 가장 보드랍고 고왔다.

나는 혀를 차며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무엇에 그리 쫓기는 것인지. 그럴 필요 없는데. 나는 윤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윤이 무엇을 그리 두려워하는지 알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내가 그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가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여름 학기 5주차, 윤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알렉스는 나에게 토너와 로션을 권하더니 저도 샤워를 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나는 소파베드에 누워 베개를 베고 담요를 덮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얀 페인트를 칠한 천장을 보는데, 아까 본 영화의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기차에서 만난 하룻밤 인연이라니. 정해진 일정을 무시하고 같이 비엔나를 거닐고, 대화하고, 가슴 떨리는 감정을 느끼고 아침이 되어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헤어지고. 사랑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해 본 낭만적이고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나는 언제쯤 운명적인 사랑을 해 볼 수 있을까? 어릴 때부터 지독한 사랑을 꿈꾸었고,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게이라서 그런 사랑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나는 5년 넘게 사귄 첫 번째 남자 친구와 비참하게 헤어지면서 그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희망이 없었다. 한국에서 계속 산다면, 앱으로 사람을 만나 연애를 시작하거나 게이바에 가서 누군가를 골라잡고 하룻밤을 불사르는 만남에 만족해야 할 가능성이 컸다.

지금이야 젊으니 괜찮지만, 나이가 들고 외모가 시들면 누군가를 만나기도 쉽지 않겠지. 나이가 들면 눈물을 삼키며 혼자 외로운 시간을 견뎌야 할 것이다. 나이가 들고 외모가 시드는 것은 이성애자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나보다 사랑을 찾기에는 여러모로 유리했다.

컴퓨터 공학의 메카가 미국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성 결혼이 합헌이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곳에 왔다. 큰 결심을 하고 이곳에 왔더니, 시작부터 영어 시험이라는 큰 난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어 시험을 생각하자마자 온갖 일이 서글퍼졌다. 나는 몸을 웅크리고, 무릎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써서 온몸을 담요 안에 감추었다. 어쩌다가 게이로 태어나서 맨날 고생해야 하는지. 누나 말대로 노력해서 고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 순간, 욕실 문이 열렸다. 나는 숨을 삼키며 자는 척을 했다. 욕실의 붉은 백열등 빛이 거실에 스며들었다. 타일 바닥을 딛는 알렉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알렉스는 소파 곁에 멈추어 섰고, 오랫동안 소파 곁에 머물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스가 방에 들어가고 한참이 지난 후, 나는 눌렀던 숨을 토해내며 안도했다.

* * *

자다가 깬 것은 누군가의 손길 때문이었다. 내 얼굴을 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나는 잠결에 이곳이 알렉스의 아파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내 얼굴을 만지는 사람은 알렉스일 것이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인 것처럼 쓰다듬는 손길이 기분 좋았고, 그의 손길을 계속 느끼고 싶어서 자는 척을 했다.

알렉스는 정말 상냥한 애다. 얘 여자 친구는 정말 좋겠다. 여자 친구와 있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여자 친구에게는 나에게 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상냥하겠지. 얘라면 하늘의 별도 따줄 것 같다. 알렉스가 따준 별을 받으면, 그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부럽다. 그 여자가 부러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나는 도로 잠들었다.

* * *

아침에 깬 것은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눈을 떠보니 알렉스가 주방에서 뭔가를 씻고 있었다. 나는 힘겹게 소파에서 일어났다. 싱크대를 향해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던 알렉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깼어요?”

“네.”

“아침 먹어요.”

알렉스는 뮤즐리와 요거트, 과일을 식탁 위에 차려놓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알렉스는 유리컵과 오렌지 주스 병까지 가져왔다. 나는 멍하게 아침상을 바라보았다. 얘는 어쩜 이렇게 상냥하고 세심하지? 운동부 출신이라 막연히 무뚝뚝하고 둔감한 성격일 거라 예상했는데, 그는 나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침을 한참 먹다가, 문득 결심했다. 알렉스와 같이 살아야겠다. 원래는 원룸을 구해 혼자 살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사려 깊은 룸메이트라면 같이 살아도 괜찮겠다. 방세도 아낄 수 있고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내가 요거트에 비빈 뮤즐리 반 그릇을 먹는 동안, 알렉스는 뮤즐리를 두 그릇이나 먹고 사과를 껍질째 깨물어 먹기 시작했다. 아삭아삭. 나는 알렉스가 사과를 씹어 먹는 경쾌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듣다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았다.

“입맛이 없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룸메이트가 이사 나가고 싶어 한다고 그랬죠?”

“네.”

알렉스는 내 말에 짤막하게 대답하더니, 사과를 내려놓고 생수병 안에 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알렉스에게 물었다.

“내가 이 집에 들어와 살면 어떨까요?”

알렉스는 내 질문을 듣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아비가 정말 기뻐할 거예요. 잘됐다! 아비한테 당장 말해 줄게요. 말해도 괜찮죠?”

“네? 네.”

“이렇게 빨리 룸메이트를 구할 줄은 몰랐네요!”

알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룸메이트에게 연락하기 위해 아이폰을 찾으러 들어간 것이겠지. 나는 알렉스의 넓은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룸메이트. 그 단어가 묘하게 섭섭한데, 왜 섭섭한 기분이 드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다가 탄식이 나왔다. 나는 그의 룸메이트가 기뻐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알렉스가 나와 같이 살게 되어 기쁘다고 말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었다.

* * *

시험 전날, 나는 내내 기숙사에 틀어박혔다. 목이 상하지 않도록 물을 마시고, 연습 과정을 녹음해서 듣고, 고칠 점을 찾아가며 시험을 준비했다. 간식으로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으며 알렉스가 보낸 문자를 읽었다. 내가 샤워하는 동안 온 문자였다.

-오늘 시험 몇 시예요?

열 시라고 답을 보내자마자, 알렉스가 답을 보내 왔다.

-잘할 거예요. 시험은 언제 끝나요?

- 열한 시 반이요.

-알았어요. 데리러 갈게요. 점심 같이 먹어요.

그의 회신을 보자 마음이 설렜다. 알렉스는 다정한 사람이라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하지만 나는 상황을 다시금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헛된 기대를 품으면 안 된다. 그는 헤테로고, 나는 게이다. 나는 알렉스에게 보답받을 수 없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이렇게 알렉스를 짝사랑하다가 혼자 실연하게 될 것이다.

시험 날 아침, 가방을 챙겨 시험장까지 걸어갔다. 시험장까지 가는 내내, 알렉스가 나를 응원한다는 사실만 기억하려고 했다. 시험장에 가니 시험 순서가 붙어 있었다. 내 순서는 이번 세션의 3번이었다. 연습했으니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나는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여름 학기 6주차, 알렉스

열한 시 십오 분쯤 시험장 앞으로 갔다. 열한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인데, 햇볕이 뜨거워서 나무 그늘 밑에 있는 벤치에 앉아 선글라스를 꼈다. 윤은 시험을 잘 보았을 것이다. 나는 운동을 오래 했기 때문에 잘 안다. 연습을 열심히 하면, 망치려고 노력해도 연습한 것이 몸에 배어 있어 망칠 수가 없다. 특히 윤처럼 혹독하게 연습하는 사람이라면 망쳐 봤자 남들보다는 훨씬 잘하는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열한 시 반이 되었다. 학생들이 건물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윤도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강의 시연 시험이라고 옷을 차려입었다. 윤은 얇은 차이나 칼라 마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머리 모양은 평소보다 단정했다. 그를 보고,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험 끝났네요.”

“네.”

“고생했어요. 점심 먹으러 가요.”

“그래요.”

“아침은 먹었어요?”

“시리얼 먹었어요.”

“시험 보는데 굶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주차장으로 가죠. 차를 가져왔어요.”

내 말을 듣고, 윤은 쌍꺼풀이 없는 검은 눈을 깜빡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점심 먹으러 멀리 갈 거예요?”

“아뇨. 오늘 기온이 화씨 100도(섭씨 37도)를 넘어요. 이 날씨에 걸어 다니다가는 더위 먹을 것 같아서 차를 가져왔어요.”

나는 앞장서서 주차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윤은 내 곁에서 나란히 걸었다. 윤은 원래 말이 많은 편이 아니지만, 오늘따라 말수가 적었고 표정도 어두웠다. 나는 그가 걱정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시험 보고 나니까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피곤해요.”

“오늘은 푹 쉬어요. 시험 결과는 언제 나와요?”

“내일모레요. 그날 아침에 수료식이고, 그날 밤까지 방 빼야 해요.”

“그럼 그날 이사를 해야겠네요.”

“네. 잠깐만요.”

윤은 자리에 멈추어 섰다. 나도 그의 곁에 멈추어 섰다. 그는 눈을 비비려다가 등에 멘 백팩을 벗었다. 그의 눈을 보니 양쪽 눈의 흰자가 모두 시뻘겠다.

“잠시 이거 좀 들어줘요.”

그는 나에게 백팩을 건넸고, 나는 윤에게 백팩을 받아 들었다. 윤은 거울을 보지 않고 왼손과 오른손으로 눈꺼풀을 고정하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익숙하게 콘택트렌즈를 빼냈다. 윤은 렌즈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에게서 백팩을 도로 가져갔다. 그는 양쪽 눈이 실험용 토끼처럼 시뻘건데도 자신의 상태에 무심했다. 나는 그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괜찮아요?”

“네. 잘 보이니까 걱정 마요. 시력이 엄청 나쁜 건 아니어서 안경은 공부할 때만 써요. 오늘은 수업 시연이니까 단정해 보이려고 렌즈를 낀 거예요.”

“그게 아니라, 눈이 충혈되었어요.”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겠죠.”

“…….”

“보통은 일회용 렌즈를 끼면 괜찮은데, 오늘은 이물감이 심하네요.”

윤은 백팩을 메면서 말했다. 그의 무덤덤한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위태로울까? 왜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할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은 침착하게 내 곁에서 걸어갈 뿐이었다.

여름 학기 6주차, 윤

알렉스와 부리또를 먹고 기숙사에 돌아왔다. 내일은 말하기 시험이 있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나는 이삿짐을 미리 쌌다. 이삿짐이라고 해 봐야 백팩 하나와 가져온 28인치 트렁크 두 개가 전부였다. 트렁크에 든 것은 여름옷, 봄가을 옷과 생필품이었다. 지금이 여름이기도 하고, 비행기 수화물 무게와 개수에 제한이 있어서 겨울옷은 챙길 수 없었다.

한참 짐을 정리하다가 깨달았다. 나는 누나와 아빠에게 연락할 생각이 없으니 집에서 겨울옷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계좌에 들어 있는 돈이 겨울옷을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는 않았다.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년 동안 과외와 학원 알바를 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GRE 시험을 보고, 학교에 지원하느라 돈을 많이 까먹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는 두 달 동안 월세와 생활비를 겨우 충당할 수 있을 정도의 돈만 남아 있었다. 학교에서 조교 월급이 나오려면 앞으로 두 달에서 석 달은 버텨야 할 텐데. 나는 내 상황에 한숨이 나왔다.

* * *

목요일. 오늘 본 말하기 시험은 쉬웠다. 시험을 잘 본 것 같았다. 기숙사에 들어와 짐을 마저 쌌다. 짐이 늘어난 것도 아닌데, 풀었던 짐이 트렁크에 전부 들어가지 않아서 한참 고생했다. 짐을 싸고 나서, 은행에 가서 새 계좌와 체크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돈을 모두 계좌에 넣었다.

* * *

금요일. 수료식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알렉스에게 전화해서 지금 방을 뺄 건데 와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20분 안에 오겠다고 했다. 나는 기숙사 안을 둘러보며 두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짐을 다시 확인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간에 서 있는 것은 알렉스였다. 나는 알렉스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며 속으로 꿍얼거렸다. 얘는 오늘도 잘생겼어. 내가 혼잣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알렉스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 오늘 기분은 어때요?”

“좋아요. 알렉스는 기분 어때요?”

“나도 좋아요. 짐은 다 쌌어요?”

“네. 짐은 한 번에 빼고, 내가 열쇠 반납하는 동안 알렉스가 차에 짐을 실으면 될 것 같아요.”

“그래요.”

나는 랩탑이 든 백팩을 등에 멨다. 우리는 트렁크를 하나씩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알렉스가 기숙사 바로 앞에 차를 세워 놓았기 때문에 짐을 끌고 멀리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다. 짐을 트렁크에 싣고 나서, 우리는 열쇠를 반납하러 기숙사 사무실로 갔다. 마침 초록 머리 한국인 여학생이 열쇠를 반납하고 있었다. 여학생을 보고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는데, 그녀가 나를 알아보고 먼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한국 분이시죠? 워크숍에서 몇 번 봤어요.]

나는 한 달 만에 한국어를 듣고 아연실색했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에 서 있던 알렉스의 몸에 부딪혔다.

[아, 네. 안녕하세요.]

나는 아주 약간 어눌해진 한국어로 인사했다. 그러자 초록 머리 여학생이 나에게 질문했다.

[오늘 이사하시는 거세요? 어디로 가세요?]

[저는 엑설런트 플레이스로 가요.]

[저는 메이 빌리지로 가요.]

메이 빌리지도 학교에서 가까운 아파트 단지 중 하나이고, 1인 가구 전용 아파트 단지였다. 여학생은 웃으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정수빈이라고 해요. 화학 공학과 박사 과정이고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주윤이고 컴공 박사 과정이에요.]

[이름이 외자예요? 윤?]

[네.]

[이름이 이쁘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핸드폰 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이번에 한국인 박사 과정 신입생은 저와 주윤 씨밖에 없는 것 같거든요.]

나는 알렉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나와 정수빈 씨가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한국어를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으니 당연하겠지만.

[네. 그러죠.]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정수빈 씨에게 내 미국 번호를 알려 주었다. 정수빈 씨도 나에게 자신의 미국 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너무 잘생기셔서 말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정수빈 씨는 나에게 친하게 지내자고 말하며 씩 웃었다. 잘생겼다는 말이 부끄러워서 하하 웃기만 했다. 잘생겼다니, 예의상 하는 말이겠지. 나는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았는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정수빈 씨는 질문을 이어 나갔다.

[이사는 어떻게 하세요?]

[이 친구가 룸메이트라서… 도와주러 왔어요. 정수빈 씨는요?]

[저는 워크숍에서 만난 친구들과 같은 아파트 단지로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들과 함께 우버를 불렀어요.]

[네.]

[친구들이 기다려서 먼저 가 볼게요. 나중에 카페에서 커피 한 잔 같이해요.]

정수빈 씨는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가버렸다. 정수빈 씨가 가고 나서, 나는 직원에게 열쇠를 반납했다. 열쇠를 반납하고 나서, 우리는 주차장까지 같이 걸어갔다. 그때까지 조용하던 알렉스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윤이 한국어로 말하는 것은 처음 봐요. 말하는 속도가 매우 빠르네요.”

“그래요?”

“그리고 무척 다정하네요. 전화번호도 잘 알려 주고.”

“네?”

“가요.”

알렉스는 웃으며 먼저 걸어갔다. 내가 알렉스의 차에 타는데, 알렉스가 안전벨트를 매면서 물었다.

“짐은 저 두 개가 전부예요?”

“네.”

“짐이 너무 적네요. 겨울옷은 하나도 안 가져왔죠?”

“네.”

“나중에 부모님이 부쳐 주셔야겠네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웃었다. 나에게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새집으로 가는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알렉스는 운전만 하고 말이 없었다. 평소에는 알렉스가 이런저런 잡담을 하고 내가 그의 말을 듣는 편이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파트 단지에 도착할 즈음, 알렉스가 나에게 물었다.

“혹시 개강할 때까지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어요? 여행이라든가.”

“아뇨.”

“저는 오스틴에 갈 거예요. 가서 부모님도 만나고, 사만다도 만나고.”

“사만다요?”

“여자 친구요. 개강하면 오스틴에 자주 못 갈 것 같아서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나와 알렉스는 트렁크에서 짐을 하나씩 꺼내 들고 아파트로 갔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고 나서 현관문 앞에 섰다. 집의 호수를 한국어로 소리 내어 읽었다. 2032호. 내가 앞으로 살 집은 2032호였다. 알렉스가 열쇠로 문을 열다 말고 나에게 물었다.

“그 말은 무슨 뜻이에요?”

“한국어로 숫자를 읽었어요. 2032호.”

“그렇구나. 들어가죠. 아비가 어제 방을 비우고 청소했어요.”

내가 쓸 방은 깨끗했다. 방 안에 붙박이장 하나와 침대 프레임, 헐벗은 매트리스, 베드 테이블, 서랍장,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나는 전신 거울이 달린 붙박이장의 미닫이문을 열어보았다. 당연하지만 옷걸이가 하나도 없었다. 옷걸이 말고도 방 안에 채워야 할 것이 많았다. 스탠드라든가, 침대 커버라든가, 이불이라든가.

방을 둘러보다가, 나는 방세와 식비뿐만 아니라 세간살이를 사는 데에도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머릿속으로 필요한 물품들의 목록을 작성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침구였다. 침구가 없으면 오늘 밤에 잠을 잘 수 없으니까.

“침구 사야 하죠?”

내 생각을 다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알렉스가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가 차 키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쇼핑하러 가요.”

여름 학기 6주차, 알렉스

윤은 월마트까지 가는 동안, 아이폰 메모장에 쇼핑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월마트라니. 나라면 침구나 홈퍼니싱을 사러 가지 않을 곳이었다. 내가 애슐리 홈스토어 이야기를 꺼내자, 윤은 잘라 말했다.

“그럴 돈 없어요. 월마트에 가죠.”

나는 윤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윤과 같이 월마트에 가는 김에 나도 식료품을 살 생각이었다. 신선 식품을 빼면, 어지간한 식료품의 질은 센트럴 마켓14)이나 홀푸드마켓15)이나 월마트나 비슷하니까. 나는 윤에게 중요한 사항을 새삼스레 강조하며 말했다.

“오늘 꼭 사야 하는 것은 침구, 샤워 커튼, 봉이에요.”

“네. 알았어요.”

윤은 한국어로 쇼핑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그가 한국어를 쓸 때면 벽이 느껴졌다. 그래서 아까 윤이 초록 머리 여학생과 이야기했을 때 조금 섭섭했다. 이런 벽은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벽이었다. 내가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윤이 이방인이지만, 서울에서는 내가 이방인일 것이다. 이방인이 되는 기분은 매우 막막한 것이었다. 윤뿐만 아니라 이 땅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온 수많은 이민자는 매일 외로움을 느끼며 사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윤을 위해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깨고 싶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벽이 얼마나 높고 견고한지 아는 바가 없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윤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한국어는 어렵나요?”

“저는 모국어라 잘 모르겠어요.”

“영어는 어때요?”

“저는 오스틴에서 3년 살았잖아요. 그래서 영어를 자연스럽게 배운 편이라 잘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고등학교 때 스페인어를 배웠지만,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어로 숫자만 겨우 세고 안부만 겨우 물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전문 지식 강의를 할 수 있을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윤이 신기했다.

* * *

월마트에는 맥도날드가 있었다. 쇼핑을 시작하기 전, 우리는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윤의 말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식사를 배불리 하는 것으로 준비를 마친다고 했다. 한국 사람에게 식사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라서, 우리가 안부를 묻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식사했냐는 말로 안부를 묻는다고도 설명해 주었다.

윤은 점심을 먹는 내내, 5분마다 한 번씩 아이폰으로 메일함을 확인했다. 나는 그의 행동이 조금 거슬렸고,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왜 그래요?”

“오후에 시험 결과를 보내 준다고 했거든요.”

“당연히 합격이겠죠.”

나는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윤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알렉스. 인생 쉽게 산다는 말, 자주 듣죠?”

그의 대꾸를 들으니 기분이 언짢아졌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내가 24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아느냐고 쏘아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하면 싸우게 될 텐데, 어째서인지 그와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표현을 써서 말했다.

“아뇨. 스무 살 이후로는 그리 쉽지 않았어요.”

내 대답을 듣고, 윤은 입술을 또 삐죽거렸다. 나는 윤의 얼굴을 보다가 웃어버렸다. 나와 비슷한 나이일 텐데 얼굴이 한참 어려 보여서, 아이처럼 입술을 삐죽거려도 어색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나서, 우리는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제일 중요한 물품인 샤워 커튼과 봉, 이불을 고르고 있는데, 윤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폰만 보고 있었다.

“윤, 이거는 윤이 골라야죠. 윤이 쓸 건데 왜 내가 고르고 있-”

“알렉스.”

“네?”

“나, 시험 붙었어요.”

시험에 붙었다고 말하며, 윤은 활짝 웃었다. 윤이 활짝 웃자, 입꼬리가 시원하게 당겨지고 눈은 반달 모양이 되었다. 웃지 않았을 때는 단정하고 침착한 인상인데 웃으니까 상큼하고 생기발랄한 얼굴이 되었다. 윤은 웃으면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남자와 스킨십은 셀 수 없이 많이 해 보았다. 훈련하다 보면, 경기를 뛰다 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도 하게 되었다. 우리는 훈련이 잘될 때마다, 터치다운을 할 때마다, 작전에 성공할 때마다 허그하고 서로의 몸을 두들겼다. 그러나 윤과의 허그는 달랐다. 윤이 나를 안자 마음이 벅찼다. 천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날개를 접으며 내 품으로 날아든 것만 같아서 그를 기쁘게 마주 안았다.

“나도 윤이 붙어서 기뻐요. 나는 윤이 열심히 노력한 거 아니까 당연히 붙을 줄 알았어요.”

“정말 고마워요.”

윤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약간 어려 있었다. 그동안 윤은 시험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고, 시험에 반드시 붙고 싶어서 절박하게 공부하고 마음을 졸였다. 그를 곁에서 지켜보았기에 그 마음을 잘 안다. 그래서 나는 윤의 등을 가만히 토닥이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여름 학기 6주차, 윤

내가 아기 신발을 베드 테이블 위에 장식하는 동안, 알렉스는 내 욕실에 샤워 커튼 봉과 샤워 커튼을 달아 주었다. 새 옷걸이에 여름옷과 봄가을 옷을 걸어 붙박이장에 넣고 있는데, 알렉스가 부엌에서 식료품을 정리하다 말고 물었다.

“주말에는 뭐 할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 클럽에 가 볼까요? 이 동네 클럽 가 봤어요?”

“저는 클럽 안 좋아해요.”

“그렇구나.”

나는 붙박이장에 옷을 걸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이 도시에는 게이 클럽이 딱 하나 있는데, 오늘 저녁에는 그곳에 가 볼 생각이었다. 미국 게이 클럽은 어떤지, 클럽 물이 어떤지도 궁금했다. 운이 좋으면 운명의 남자를 만날 수도 있겠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 * *

저녁으로 알렉스가 만든 파스타를 먹었다. 알렉스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알렉스는 제가 요리를 잘하게 된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알렉스의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시기 때문에 가사 도우미 아줌마가 집안일을 맡아 주셨다. 알렉스의 부모님은 그분이 만든 요리를 좋아하시지만, 알렉스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린 알렉스는 혼자서 요리를 해 먹기로 했다. 나는 알렉스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스스로 요리책과 주방 기구를 사서 요리를 연습했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는 말에 적잖게 놀랐다.

저녁을 먹고, 구글 맵을 켜고 게이클럽까지 가는 길을 검색해 보았다. 그곳은 집에서 차로 5분,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가기로 했다. 혹시 모르니 샤워하면서 안을 비우고 뒤를 풀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 머리를 왁스로 만지고 블로우 드라이를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옷 중에 가장 과감한 옷을 골랐다. 평소에 쓰던 상큼한 오렌지 향이 나는 향수 대신 서늘하고 성숙한 향이 나는 향수를 뿌리고, 헐렁하고 암홀이 넓은 검은색 민소매 티셔츠에 슬림한 검은 슬랙스를 입고 닥터 마틴 로퍼를 챙겨 방을 나섰다. 그런데 앞치마를 매고 고무장갑을 끼고 인덕션 스토브의 기름기를 닦고 있던 알렉스의 얼굴이 나를 보자마자 단숨에 구겨졌다.

“……어디 가요?”

“클럽 가요.”

내 대답을 듣고, 알렉스는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내 옷차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나는 텍사스가 보수적인 동네라는 사실을 안다. 내 옷은 텍사스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입지 않을 법한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이러고 다니면 게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여기 사람이 보기에도 비슷하겠지.

“이따 밤에 추울 텐데.”

“어쩔 수 없죠.”

나는 헤테로인 알렉스와 잘될 수가 없으니 내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텍사스 사람답게 보수적일 알렉스에게 미움받기 싫다는 양가감정이 공존했다. 이것은 처음에 알렉스와 같이 살기로 했을 때는 예상치 못했던 변수였다. 그때는 다정한 룸메이트와 같이 살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충동적으로 함께 살자고 했다. 하지만 막상 경험해 보니, 자꾸만 호감이 가는 이성애자와 같이 사는 것은 나에게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 * *

천천히 걸어서 클럽까지 갔다. 걸어가는 동안, 해가 지고 금방 어둠이 몰려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클럽 입구에서 신분증 검사를 당했다. 클럽 기도는 나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 입장시켰다.

입장료를 내고 팔찌를 팔에 감고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바에 앉아 병맥주를 하나 시키고 주위를 살펴보니, 세계 어디를 가든 클럽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둡고 네온사인 조명이 빛나고,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상대를 물색하고. 물은 한국보다 좋았다. 키 크고 몸 좋은 사람이 한국보다 많았다.

홀을 찬찬히 둘러보니,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맥주 한 병을 다 마셨을 즈음,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나에게 다가온 사람은 젊고 키 크고 잘생긴 백인 남자였다. 다 좋은데 텍사스 사람답게 코가 뾰족한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있었다. 카우보이 부츠가 싫지만,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해서 만든 몸이 좋아서 봐주기로 했다.

남자의 이름은 크리스토퍼이고, 자신을 킷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는 우리 학교 의대생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정말 의대생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이름을 물어서 우리 누나 이름을 댔다. 하지만 그는 발음을 어려워했고, 나는 머릿속으로 떠오른 이름을 아무거나 말했다.

“그냥 알렉스라고 불러요.”

“그래요, 알렉스.”

남자는 내 곁에 앉더니 똑같은 병맥주를 주문했다. 남자가 민소매를 입어서 드러난 내 위팔을 만지작거렸다. 나를 은근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나쁘지 않아서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그는 손으로 내 어깨를 쓰다듬다가 암홀 안에 손을 넣어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어디서 왔어요?”

“중국이요.”

기왕 거짓말을 시작했으니 계속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여기 사람들은 내가 한국 사람인지 중국 사람인지 구분하지 못하니까.

“학생이에요?”

“네.”

“몇 학년이에요?”

“이제 1학년이에요.”

남자는 내 오른쪽 가슴을 움켜쥐고 왼손으로 내 허리를 안았다. 나는 그를 향해 나른하게 웃었다. 그는 내 젖꼭지를 손에 쥐고 굴리다가, 뭔가를 발견한 듯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학부?”

“네.”

“전공은?”

“화학 공학.”

나는 내 개인정보를 모두 가짜로 꾸며냈다. 내가 전공까지 거짓으로 말했을 때, 남자의 입술이 나에게 다가왔다. 내 젖꼭지를 만지는 남자의 손길이 더욱 대담해졌다. 남자의 다른 손이 내 턱을 거칠게 쥐었고, 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벌려 남자의 키스에 응했다.

* * *

우리는 커다란 GMC 픽업트럭 뒷좌석을 체액으로 흥건히 적시면서 섹스했다. 나는 세 번째로 사정한 이후, 내가 몇 번이나 갔는지 세지 않았다. 섹스는 거칠었지만 할 만했다. 남자가 콘돔도 잘 썼고.

한국에서는 원나잇을 거의 하지 않았다. 첫사랑이었던 남자 친구와 꼴사납게 갈라서고 홧김에 원나잇을 시작했지만,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봐 무섭기도 했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자는 것에 거부감이 느껴져서 몇 번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원나잇을 비교적 쉽게 하게 되었다.

섹스하고 나니, 오랜만에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하지만 편의점은 보이지 않았다. 남자에게 담배를 빌리려고 했지만, 그는 비흡연자였다. 섹스가 끝나고 여운이 가라앉자 남자는 가지고 있던 물티슈를 나에게 건넸다. 나는 몸을 물티슈로 대충 닦았다. 옷을 입다가 바지에 흰 얼룩이 조금 묻은 것을 발견했지만, 세탁하면 없어질 정도라 괜찮았다.

“집이 어디예요?”

“여기서 가까워요. 걸어가도 되고.”

“태워다 줄게요. 걸어가면 위험해요.”

남자가 옷을 입는 동안,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조수석으로 옮겨 탔다. 조수석 선바이저를 내리고, 거울로 내 몰골을 살피니 가관이었다. 누가 봐도 남자와 붙어먹은 티가 나는 난잡한 모양새가 너무 웃겼다.

남자는 아파트 단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나는 조수석 옆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랜만에 섹스해서 기분은 좋았지만, 몸이 힘들었다. 얼른 자고 싶었고, 땀을 많이 흘려서 물이 마시고 싶었다. 남자가 생수를 건넸지만 마시지 않았다. 클럽에서 만난 사람이 주는 것을 마셨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나는 소리를 지르느라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단지 정문에 내려 주세요.”

“알았어요.”

남자는 내 부탁대로 아파트 정문에 차를 세웠다. 안전벨트를 풀려고 하는데, 남자가 갑자기 물었다.

“이름, 알렉스 아니죠?”

“네?”

“불러도 한 번을 대답하지 않아. 섭섭하게.”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차에서 내렸다. 남자는 나에게 뭐라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가버렸다. 나는 남자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집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 낮에는 기온이 섭씨 40도를 넘었는데, 밤공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땀에 젖었던 몸이 언제 더웠냐는 듯 차가워진 새벽 공기에 가늘게 떨렸다.

알렉스가 깰까 봐 열쇠로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답답해서 민소매 티셔츠를 벗어 던지고, 냉장고 문을 활짝 열고, 500mL 생수를 하나 꺼내 뚜껑을 따고 벌컥벌컥 마셨다. 아무리 물을 들이부어도 갈증이 가시지 않아서 계속 물을 들이켜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요?”

여름 학기 6주차, 알렉스

저녁 먹은 것을 치우고 있는데, 윤이 외출 준비를 하고 방에서 나왔다. 윤의 차림새가 놀라웠다. 암홀이 허리에 조금 못 미칠 정도로 넓고 헐렁한 민소매 보트넥 티셔츠에 슬림한 슬랙스라니. 몸이 늘씬하고 예쁘니까 옷 태가 좋기는 했다. 하지만 이곳, 딥 사우스(deep south)에서는 남자가 야한 옷을 입고 다니면 위험하다. 지나가던 멍청한 레드넥들은 그게 남자답지 못하며, 꼴 보기 싫다고 욕하면서 총을 쏠 수도 있다. 진심이다. 나는 윤이 걱정되었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그에게 물었다.

“어디 가요?”

“클럽 가요.”

당연히 그렇겠지. 야한 옷을 입은 모습을 보니,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설마 게이 클럽에 가는 건가? 윤이 게이였나?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게이의 스테레오 타입과는 거리가 먼데. 성격이나 말투는 담백하고, 구기 종목을 잘하고,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고, 군 복무도 잘 마쳤고….

“이따 밤에 추울 텐데.”

“어쩔 수 없죠.”

윤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꾸했고,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윤에게서 평소에 나던 섬유 유연제 향이 아니라 시원한 남자 향수 냄새가 났다. 나는 서늘하고 관능적인 향을 맡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옷차림은 게이 같지만, 윤에게서 그 어느 때보다 수컷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윤은 마치 사냥에 나서는 늘씬한 고양잇과 맹수 같았다.

윤이 나가고 나서, 맥주를 하나 따서 마셨다. 목이 타고 기분이 착잡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목이 타고 기분이 착잡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윤이 무슨 짓을 하든 내가 상관할 이유는 없었다.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게 오히려 우스운 일이었다. 내가 뭐라고. 나는 그의 룸메이트일 뿐이고, 윤이 내 허락 없이 집에 남자를 끌어들이는 일만 없으면 된다.

하지만 맥주를 마시면 마실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다. 1년 동안 같이 살게 된 룸메이트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이고, 밤새 소음 공해로 나를 괴롭힐 것이 걱정되어서? 아니면 나를 혹시 좋아하게 될까 봐? 사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여자 친구가 있고, 설령 윤이 나와 데이트하고 싶다 해도 내가 싫다고 하면 그만인데.

* * *

샤워하고 나서 컴퓨터를 켜고 온라인 슈팅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게임을 두 시간 정도 하고 퀸사이즈 침대에 불편하게 누우니 음험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윤은 남자와 뒹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윤은 어떤 타입이려나? 나는 당연히 윤이 남자에게 안기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윤을 안는 남자가 나라고 상상해 보았더니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반쯤 일어선 내 물건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었다. 남자에게 꼴리다니. 훈련할 때마다 사내놈들과 부대끼고, 샤워하면서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사만다가 알면 경을 칠 일이니 얼른 잠이나 자자.

얼른 잠들고 싶어서 아이폰으로 명상 앱을 켜고 머리맡에 두었다. 동양적인 나무 피리 소리가 흐르고, 차분하고 몽환적인 목소리의 여성이 나에게 숙면을 위한 명상을 지도했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호흡을 고르고 잠을 청했다.

* * *

자다가 눈이 번쩍 떠졌다. 문소리가 난 것 같았다. 마침 목이 마르기도 했다. 나는 물기가 말라 뻑뻑한 눈을 깜빡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집 안이 온통 어두컴컴한데 부엌만 밝았다. 노란 냉장고 불빛이 부엌을 밝히고, 누군가가 냉장고 앞에 서 있었다. 그 사람은 당연히 윤이었다. 윤이 윗옷을 벗은 채, 냉장고 앞에 서서 생수병에 든 물을 목구멍에 들이붓고 있었다. 나는 윤이 물을 지나치게 급하게 마시는 것이 걱정되어 말을 걸었다.

“이제 와요?”

윤은 물을 마시다 말고 기침을 터뜨렸다. 물을 마시다가 나 때문에 놀라서 사레가 들린 것 같았다. 윤이 기침하다가 손에서 놓친 생수병이 바닥에 떨어지고, 물이 줄줄 쏟아졌다. 물을 양껏 마신 상태라 바닥에 쏟아진 물은 많지 않았다. 윤은 계속 기침했고, 나는 생수병을 집어 싱크대 위에 올려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요.”

윤이 쉰 목소리로 말하며 나에게 손을 내저었다. 나는 기침하는 윤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가까이서 본 윤의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곱게 세팅하고 나갔던 머리는 잔뜩 헝클어졌고,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나 있고, 눈은 붓고 짓물렀고, 입술은 퉁퉁 부었다. 목에는 양손으로 목을 세게 졸린 자국이 있었다. 손자국의 크기를 보니, 윤의 목을 졸랐던 사람은 여자가 아니었다. 군살 없이 늘씬한 근육이 나붙은 상아색 몸이 키스 마크와 잇자국, 손자국으로 온통 얼룩덜룩한데, 선홍색으로 부어오른 오른쪽 유두에 힘겹게 매달려 있는 피어싱이 케이크 위의 체리처럼 완벽한 방점을 찍었다.

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윤을 계속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윤을 보고 있으니 죄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러다가 나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윤의 어깨를 놓고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물러서고, 윤은 기침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윗옷을 집어 들고 황급히 욕실로 걸어갔다. 윤은 어딘가 불편한지 절뚝거리며 걸었다. 나는 그의 어디가 불편한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상상하고 말았다. 그러자 내 좆이 빳빳하게 서더니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아, 시발.”

평소에 욕을 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나는 내 상상력을 저주하며 마른세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윤 덕분에 나도 몰랐던 나를 마주하고 말았다. 내 드로즈 속의 발기한 좆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남자에게도 꼴리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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