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8. 각인(刻印)
태경이 공원벤치에 앉아있자 저쪽 끝에서 빨간색 터틀 코트를 입은 소녀 한 명이 나풀나풀 뛰어왔다. 그리고 그가 앉아있는 벤치 앞에 깡충 멈춰서며 말했다.
"태경아, 손 내밀어봐"
소녀의 말에 태경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태경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더니 베시시 웃었다. 태경은 자신의 손안에 쥐어있는 포장지를 들여다보며 의아한 얼굴을 했다.
"풀러봐. 지나다가 마음에 들어서 샀어."
포장지 안에는 작은 팬던트가 들어있었다.
오백원짜리 동전만한 크기에 보라색의 투명하고 납짝한 돌이었다. 돌안에는 야광으로 만든 사수자리의 별들이 밖혀 있었다.
"네 별자리 목걸이야. 그걸 걸고 다니면 행운이 온데"
사수자리는 12월 20일이 생일인 태경이의 별자리였다. 그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미혜에게는 한번도 말해준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내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
"좋아하면 뭐든지 알게 되는 거야. 관심이 계속 그 사람에게 쏠려있으니까."
"고마워, 난 뭘 해주면돼지?"
"오늘부터 방학이니까 겨울 내내 나랑 같이 있어 줘. 그거면 돼"
"겨울 내내?"
"같이 도서관 다니자는 말이야. 아침에 도서관에서 만나고 식당에서 함께 밥 먹고 차 마시고 어두워지면 같이 집에 돌아가고. 좀 따분한 생활이겠지만 너랑 같이 다니면 그런데로 행복한 시간이 될 거 같애."
소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긴 생머리가 어깨까지 찰랑이고 까만 눈동자와 갸름하고 새하얀 얼굴은 누가 보아도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상윤과의 일로 우울해하는 태경을 위해 혁수가 소개시켜준 수많은 여자아이들 중 한 명인 미혜라는 이름의 여자아이. 만난 지는 이주정도 지났는데 꽤나 살갑고 친근한 느낌 때문에 태경도 그다지 거부감 없이 친해질 수 있었다.
아니, 그가 무엇보다 그녀를 만나고 있는 이유는 상윤과 약간 닮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이쁜 얼굴이었지만 상윤처럼 긴 눈썹도 날렵한 콧날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갸름하고 새하얀 얼굴이 닮아있었다. 다른 이유가 없더라도 그것만으로도 태경이 그녀를 만나기에는 충분했다.
미혜는 태경의 팔을 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참, 오늘은 그거 사느라고 돈을 다 써버렸거든. 그러니까 네가 밥 사는거다."
"저, 미안해 미혜야. 오늘 저녁엔 약속이 있는데......"
"아, 그래. 그럼 할 수 없겠네."
태경의 말에 미혜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어 보였다. 굉장히 실망 한 모양이었지만 애써 어른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미혜를 보자 태경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괜찮다면 우리 누나랑 매형 될 사람이랑 같이 식사하는데 오지 않을래?"
"정말? 내가 가도 괜찮아?"
"만나서 가볍게 식사하는 자리야. 누나도 널 보면 좋아할꺼야."
"아이, 그럴 줄 알았으면 좀더 예쁘게 하고 나오는 건데."
미혜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지금도 예뻐"
태경이 싱굿 웃자 미혜는 함빡 웃으며 폴짝 뛰었다.
"와, 미혜한테는 정말 태경이 밖에 없어."
미혜의 웃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그 얼굴을 보며 태경은 문득 상윤의 웃는 모습을 떠 올려 보았다.
'상윤은 몇 번이나 웃었지? 왜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
그가 웃는 모습보다 마지막 원망하며 돌아서던 때의 표정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 밖의 모든 기억들을 뒤덮어 버렸다. 그 얼굴은 마치 '너는 나를 생각할 자격도 없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경은 몇 번이고 그 얼굴을 기억해 냈다. 상처 받으면서도 자신이 상처 준 그 얼굴을.
'상윤아 나 너를 잊을 수 있을까?'
* * *
호텔에 예약해 놓은 자리에 앉자 미혜는 다소 주눅 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경은은 미혜에게 긴장 풀라는 듯 몇 가지 유머러스한 말을 했다.
그 말에 미혜는 재미있다고 까르르 웃었지만 태경은 누나를 핀잔주듯 말했다.
"너무 썰렁해."
"태경이 너...... 나중에 두고보자...... 그런데 석원씬 왜 이렇게 늦지?"
경은이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누를 때 뒤에서 다정스러운 손이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경은이 반가운 눈으로 석원을 바라보았을 때 그는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예물 시계 선전에나 나올법한 낯간지러운 광경이었다.
"석원씨? 마침 전화하던 중이었어. 왜 이렇게 늦은거야?"
"미안, 급한 일이 생겨서. 오래 기다렸지 처남."
"별로요."
태경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그만 보면 좋은 감정이 들지 않았다. 너무 말쑥하고 예의바르고 그래서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을까?
"옆에 예쁜 아가씨는 누구야?"
"아, 인사들 해. 이 사람은 내 약혼자고 애는 미혜라고 태경이 여자친구."
순간, 석원이기도한 영호의 눈이 묘하게 반짝였다. 너무 짧은 순간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인사를 맞친 영호는 능숙하게 주문을 했고 먹음직스럽고 화려하게 장식된 요리들이 나왔다.
태경은 맞은편에 앉은 영호를 계속 바라보았다. 영호의 적절한 멘트와 재치있는 유머에 두 여자들은 재미있는 듯 웃었지만 남자에게는 남자들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었다. 그는 친근한 인상을 주기위해 상당히 사무적으로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태경은 무료한 기분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닿는 한곳을 응시했다. 영호의 넥타이. 왠지 눈에 익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흔한 디자인인가?
"넥타이 참 멋지네요."
태경의 말에 영호는 경은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자 경은이 입을 열었다.
"점점 안목이 좋아진다 너. 이거 내가 디자인하고 염색해서 선물한 거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넥타이지."
영호는 경은의 어깨를 감싸며 웃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넥타이고."
"참, 석원씨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넥타이? 하지만 태경은 그것을 어디선가 본적이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잠시후 웨이터가 생일 케익을 들고 나왔다. 태경 일행이 앉은자리의 조명이 꺼지고 웨이터는 생일촛불을 켰다. 바이올린을 든 연주가 한 명이 다가와 축하연주를 했다.
열 여덟개의 노란 불빛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들과 함께 영호의 넥타이에 새겨진 S.W 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
순간, 태경의 머리 속에 각인 된 기억이 떠올랐다.
어스름한 불빛 속에 길게 늘어져 있던 것. 침대 위에...... 그것이 넥타이였다.
넥타이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형광섬유로 새겨진 로고가 선명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흐트러진 옷가지....
태경은 떨리는 마음으로 영호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체격도 그때 보았던 남자와 비슷했다.
그래, 왜 진작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까?
석원을 처음 보았을 때 태경은 누나의 회사에서 보았던 남자와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각자 다른 차를 타고 상윤을 데리고 가던 남자. 태경은 상윤에게 그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그대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래?"
태경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미혜가 그의 옷을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잠깐 먼저 실례 할 께요."
태경은 촛불을 끌 생각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뛰어나갔다. 그가 자리를 떠나는 모습을 보는 영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욱......!"
태경은 왠지 모르게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우욱......!"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하자 밖에서 미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니. 태경아? 누나가 걱정하잖아."
"음...... 음식이 언쳤나봐."
태경은 머리를 감싸안으며 거울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은 어느새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 * *
"오늘 녀석을 봤어."
영호의 말을 못 들었는지 상윤은 아무런 반응 없이 침대로 다가왔다.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영호는 상윤이 입은 목욕가운의 허리끈을 풀렀다.
양쪽 옷자락이 벌어지며 희고 잘 다듬어진 몸이 드러났다. 그의 몸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와 촉촉히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름다운 육체를 쓸어보던 영호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혀를 내밀어 입술을 적셨다.
"흐음. 언제나 봐도 질리지 않는 몸이야. 최상급의 물건이란 그런거지."
영호는 손으로 상윤의 가슴을 더듬으며 그 길을 따라 혀를 핥아갔다. 축축한 점액질이 불빛에 흘러내릴 듯 반짝였다.
분홍빛으로 젖은 돌기에 이르렀을 때 그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이 육체를 깨물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해 앞니로 잘근 씹었다.
"아윽......."
허스키하고도 낮게 읊조리는 신음소리와 함께 상윤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상윤이 영호의 어깨에 팔을 올려놓자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 더 밀착되었다.
영호는 앞니로 그의 돌기를 잘근잘근 깨물며 손은 이번엔 그의 가슴 사이의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왔다. 살짝 진 골을 따라 배꼽을 지나고 계속해서 다리 아래로 내려오다가 그의 오른 손이 상윤의 페니스를 살짝 움켜쥐었다.
"여자 친구와 함께 나왔더군. 아주 사랑스럽고 귀여운 애던데."
"관심 없어요."
"그래, 네가 관심 있는 것은 언제나 너 자신뿐이지. 난 그런 네가 좋아. 나를 좋아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도 좋아하지 않으니까."
영호의 손을 따라 그의 얼굴이 아래로 내려오더니 잠깐 고개를 들어 상윤을 바라보았다. 장난스럽고도 어딘가 가학적인 느낌이 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구속하지도 않고, 타인에게 질투를 느낄 필요도 없지."
영호는 상윤의 페니스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그의 혀가 뜨거운 느낌으로 상윤을 감싸더니 엄청난 힘으로 조여오고 있었다.
"하악...!"
상윤이 숨을 몰아쉬며 그의 어깨를 움켜쥐자 영호는 왼 손으로 상윤의 가슴을 침대 쪽으로 밀었다. 그에게 다리사이를 결박당한 상윤은 뒤로 몸이 꺽이며 힘없이 침대로 넘어갔다. 두 사람의 몸이 가볍게 튀어 올랐다. 상윤은 예전과 달리 아무런 저항 따위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동의하에 행위를 하고 있으므로.
대신 가운이 벗겨져 나가 알몸이 된 상윤도 영호의 가슴을 쓸어가며 가운의 허리띠를 풀렀다. 영호는 입으로 상윤의 것을 계속 펠라치오 하는 가운데 스스로 가운을 벗어버렸다.
"후우 후우...."
상윤을 감싸고 있는 혀의 움직임이 점점 빠르고 거칠어져 갔다. 씨근대는 숨소리와 함께 점액질의 소리가 방안 가득 울렸다. 그는 이제 상윤의 몸의 반응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상윤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윽!"
짧은 소리와 함께 상윤은 영호의 입안 가득 정액을 뿜어냈다. 비릿하고도 감미로운 냄새가 코 끗에 와 닿았다. 영호는 입술 근처에 묻은 액체를 핥으며 비로서 고개를 들어 상윤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지금쯤 너를 잊었겠지?"
"괜찮아요. 나도 그를 잊었으니까."
상윤은 혀를 내밀어 고양이처럼 영호의 가슴을 할짝 핥았다. 영호는 거칠게 상윤의 두 다리를 들어올려 그의 가슴에 붙였다. 그리고 반응하고 있는 페니스를 애널 사이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파고 들어간 영호의 페니스는 입구에서 멈칫거렸지만 곧 애널 사이를 찢으며 깊숙이 들어갔다. 시트 아래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아아...... 좋아요."
상윤은 피를 흘리면서도 흥분된 소리를 냈다. 영호는 붉은 피 때문인지 상윤의 신음 소리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욱 흥분되어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이 점차 격렬해지고 상윤은 영호의 어깨를 껴안은 채 그와 하나가 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후우...... 후우......."
"아아아윽...... 아......."
침실에는 신음소리로 가득했다. 상윤의 고개는 침대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영호는 그의 표정 따위는 볼 수 없었다. 단지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흥분하고 있을 뿐.
"아...... 윽......."
그러나 신음을 토해내는 상윤의 눈은 무심하게 창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창 옆에 자라고 있는 화분.
러브 체인.
태경이 선물했을 때보다 훨씬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작은 하트모양의 잎사귀들은 서로의 몸에 엉겨 길게 늘어져 있었다.
상윤은 영호가 사준 아파트로 들어올 때 작은 트렁크 하나와 유일하게 이것을 들고 왔었다. 모든 짐들은 미련없이 두고왔으면서 왜 이것만은 버리지 못했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태경과 맺어진 한 가닥의 끈이라도 간절히 부여잡고 싶은 기분 때문이었는지도.
창 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눈송이가 하나 둘 창 밖을 두드리며 떨어졌다. 그리고 끊어질듯 나직하게 들리는 신음소리. 마치 흐느낌처럼 방안을 울렸다.
상윤이 담배를 물자 영호가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영호가 담배를 입에 물자 상윤은 자신의 담배 불을 영호의 담배 끝에 가져다 댔다. 둘은 말없이 창문을 응시하며 담배를 피웠다. 부연 무늬를 그리며 날아 올라가는 담배연기.
이제 상윤과 영호는 전과 같이 일방적인 관계만은 아니었다. 둘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섹스를 끝내고 함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그것은 영호가 더 이상 상윤의 지배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점점 상윤에게 지배받고 있었다.
"후우......, 언제부터 눈이 내렸지."
"아까 한시간 전부터요."
영호는 창가로 다가서는 상윤을 흘끔 쳐다보았다. 영호와 달리 상윤이 계속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널 가까이 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거 같은 느낌이 들어"
"내 마음 따윈 계약조건에 없었으니까요."
"그런건 계약으로 살수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어."
"후후, 당신은 조금씩 현명해지는군요."
상윤은 침대에 걸터앉아 영호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영호는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좋아. 네 애무를 받을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그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거예요. 어머니 같은 따뜻한 사람......."
"난 어머니 얼굴을 몰라. 그래서 그리워 할 수도 없지."
"나도 그래요. 처음엔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흐릿해지더니 이젠 기억도 안나요. 어떤 느낌이었는지 조차. 그래서 제겐 어머니라는 이미지가 없어요. 낳아준 생모만 있을 뿐이죠."
"토미는 어땠어? 그의 얘기를 해봐."
"나의 어머니에 대해 얘기했으니 당신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먼저 들려주세요."
영호는 담배를 깊숙이 빨더니 스탠드 아래 놓인 재떨이에 떨었다.
"할아버지뻘 되는 아버지와 서른 살 가까이 차이가 났다더군. 나를 낳고는 바로 집을 나갔지. 평생 쓸 만큼의 돈을 받은 뒤에. 결국 난 돈과 거래된 존재야."
"그렇게 억울해 할 것 없어요. 나도 돈에 팔려 여기에 와있으니까."
영호는 상윤을 쳐다보더니 가늘게 웃었다.
"훗, 그래 돈만 있으면 모든 게 가능해. 난 사랑보다 돈의 위력을 믿거든"
"...당신은 돈으로 사는 법밖에 몰라요. 그래서 결국 내 마음은 살 수 없잖아요."
영호는 상윤에게 입을 맞췄다.
"오늘따라 너는 계집애처럼 잘도 재잘거리는구나."
"눈이 오는 밤이기 때문이겠죠."
상윤의 시선은 창밖을 응시했다. 먼 하늘을 응시하는 상윤을 보는 영호는 불안감을 느꼈다.
상윤의 육체는 이곳에 있었지만 마음은 결코 그에게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애가 탔다.
유리창에 초점 없는 상윤의 눈이 비췄다.
눈.
눈은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내릴 때는 순결한 처녀처럼 순백색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땅에 닿으면 그것은 금방 더럽혀지고 짓이겨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오물이 된다.
나의 거짓된 순백색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회색으로 질척거리는 오물뿐.
나는 더 이상 내가 되기를 거부한다.
* * *
"수고했어. 나가서 같이 식사라도 할까?"
"그러죠"
영호가 활기찬 얼굴로 상윤에게 악수를 권하자 상윤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양복을 갖춰입은 상윤은 어른스러웠다. 그가 서있는 장소가 회사의 회의실이라서인지 마치 말끔한 샐러리맨처럼 보였다.
이곳은 영호의 회사였다. 지금 두 사람의 모습에서 비밀스러운 관계를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상윤은 그저 영호의 사업을 도와주는 통역관 정도로 보였을 뿐이다.
조금전 바이어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상윤이 통역을 맡았던 것이다. 그의 통역솜씨는 썩 훌륭했다. 어렵고 까다로운 대화를 적절하게 요약해서 말해주었으며 발음도 훌륭했기 때문에 바이어들도 썩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상윤과 영호가 식사를 하러 문을 나서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네-"
영호는 스피커 폰을 눌렀다. 비서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사님, 이사실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이 시간에 약속한 손님이 없는 걸로 아는데."
"저...... 그게. 한태경이라는 학생......."
영호는 흠칫하며 스피커 폰을 크고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상윤을 바라보았다. 그에겐 다행히도 상윤은 바이어들과 함께 문밖에 서있었다.
"알았어. 곧 갈테니 손님이 이사실에서 나가지 않게 해"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드디어 예상했던 일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뭐 그다지 큰 일은 아니었지만. 태경과 상윤을 그것도 이 자리에서 만나게 하는 것은 좀 골치 아픈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호는 문 앞에 서있는 상윤에게 갔다.
"미안하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식사를 같이 못할 것 같은데 혼자라도......."
그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자 상윤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집에 가서 먹겠어요. 그럼."
상윤은 그에게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17층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영호는 엘리베이터 맞은 편에 있는 이사실 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그 안에는 태경이 있을 것이다. 그는 왠지 불안해져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고 있는 램프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자신이 왜 이렇게 초조해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만나봤자 약간 귀찮은 일이 생기는 정도일 뿐인데.'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래, 나중에 보자구."
영호는 엘리베이터 안에 서있는 상윤을 향해 손을 들어주었다. 문이 다시 스르륵닫히고, 동시에 또 하나의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 있었군요."
태경의 목소리.
영호는 아주 빠른 동작으로 태경과 엘리베이터를 번갈아 보았다.
운명은 그의 편이었다. 상윤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이미 15층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래, 어쩐 일이지?"
"새로온 통역관이 아주 젊다고요?"
영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편이지."
"그리고 이렇게 생겼다던데. 맞나요?"
태경은 다이어리를 펴서 영호의 앞에 내밀었다. 언젠가 영호도 본적이 있는 사진이었다. 교복을 입고 활짝 웃고 있는 두 명의 고등학생. 태경은 지금도 그 교복을 입고 있었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군.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지"
영호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 얼굴로 태경을 데리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차 마시겠어?"
태경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영호는 그동안에 커피 메이커에 물을 올려놓는 등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흠, 차 마실 기분은 아닌 것 같군. 그래 하고싶은 말이 뭐지?"
"상윤이랑은 어떤 관계죠?"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커피가 든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가죽 쇼파에 느긋하게 앉았다. 그에 비해 태경은 흥분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흥분하고 있는 고등학생. 아무리 생각해봐도 볼썽사나운 꼬마 녀석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오히려 영호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다고 느낀 태경은 가까스로 흥분을 멈추고 냉정한 얼굴을 되찾았다.
"그 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하하하! 부정이라고? 왜? 지금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영호의 자신만만한 웃음소리에 태경의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해 졌다. 그는 애써 되찾은 냉정을 잃었다. 그리고 급기야 주먹을 휘둘렀다.
"이 개자식!"
태경의 주먹이 영호에게 날아들었다. 영호는 재빨리 피했으나 태경의 날쌘 주먹에 얼굴을 맞고 바닥에 넘어졌다. 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옷을 털며 경고하듯 말했다.
"너만 조용하면 모든 건 예전과 다름없어."
"어떻게 다름없을 수가 있어!"
"난 네 누나를 사랑하진 않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꺼야. 경은은 아내로서도 디자이너로서도 탐나는 여자거든."
"너 같은 자식이 누나랑 결혼하게 놔둘 거 같애!"
영호는 싸늘하게 웃었다.
"훗,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네 친구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얘기 할 텐가? 아니, 이제까지 네 누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고 단지 결혼 상대자로만 고려하고 있었다고. 응? 그도 아니면 어린애처럼 누나의 애인이 그냥 마음에 안 든다고 할건가? 말해보게 태경군."
"더러운 자식!"
태경은 이를 갈며 영호를 노려보았다.
"상윤이를 만나게 해줘! 자초지종은 그에게 듣겠어."
"넌 양심도 없나?"
"왜 내가 당신 같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해!"
영호는 다시 쇼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난 최소한 내가 하는 일이 옳고 그른 것은 판단하지. 하지만 애송이 너는 아직 그것조차 판단하지 못하고 있어."
"무슨 말이야?"
"넌 상윤에게 상처를 주고, 제멋대로 떠나놓고 아직도 네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친구라는 이유로 그를 만날 권리를 내세우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이기적이라고 생각지 않아?"
"......그 말 상윤이가 한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거짓말! 모든 건 상윤이의 입으로 직접 듣겠어!"
영호는 흥분해서 소리치는 태경을 무시한 채 인터폰을 눌렀다.
"김 실장, 손님께서 나가 신다니 길을 안내해 드려. 그리고 기획 자료는 회의실로 가져오도록 하고."
영호는 싸늘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갔다.
잠시후 비서가 들어와 태경이 나가도록 문을 안내했다.
"누나도 상윤이도 전부 안돼!"
태경의 고함은 의미없는 메아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 * *
그날 이후 태경은 다시 누나의 회사 앞에 와있었다. 그러나 누나를 만나기 위해서도 영호를 만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영호를 미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회사로비를 지난 영호는 빌딩 앞에 주차해 놓은 차에 올라탔다.
"아저씨 저 차 따라가 주세요."
택시기사는 태경을 흘끔 쳐다보았다. 태경은 가능하면 어려 보이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롱코트를 입고 나왔다. 그리고 목소리와 표정도 무게를 잡고 있었다. 그 작전이 성공했는지 기사는 아무 말 없이 영호가 몰고있는 벤츠의 뒤를 따라갔다.
영호의 차는 반포의 아파트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강이 마주 보이는 아파트 건물 앞에 주차되었다. 태경은 택시비를 지불하고 재빨리 내렸다.
그를 미행한지 3일째, 첫날은 10시 넘어서까지 야근하는 그를 기다리다가 포기했고 둘째 날은 지방으로 출장을 갔기 때문에 포기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를 따라온 것이었다.
영호가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뒤따라 들어온 태경은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수를 확인했다. 6층과 17층. 둘 중 한 곳일 것이다. 태경은 먼저 6층으로 갔다. 복도에 문은 네 개나 되었다. 태경은 마치 형사라도 된 듯 한 집 한 집을 조사했다.
교회에 다닌다는 명패가 붙은 집은 뺐다. 그리고 밖에 내놓은 쓰레기를 보아 아기 귀저기나 잡다한 생활 쓰레기가 많은 집도 삭제했다. 17층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태경의 물망에 오른 집은 세 집이었다.
태경은 이번엔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를 슬쩍 떠보기로 했다.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자 그 앞에 한 학생이 서있었다.
갈색머리는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 색 목도리를 하고 후드가 달린 점퍼에 블랙진을 입은 남학생. 그는 태경보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가 작았다.
"상윤?"
태경은 얼떨결에 그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상대는 고개를 들어 태경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태경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태경은 너무 뜻밖이라 어떻게 해야 될지 망설이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할 때서야 재빨리 올라탔다.
"나에게 할 말이 있어?"
차가운 목소리. 검은 목도리 안에서는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널 만나러왔어."
"난 너를 만날 이유가 없는데."
상윤이 내린 곳은 17층이었다.
상윤은 열쇠로 현관을 열다가 문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다시 열쇠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태경은 상윤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와 있어."
"그런 거 같네."
문이 열렸다. 태경은 영호와 눈을 마주쳤다. 아주 잠깐 동안 영호의 눈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결국 알아냈군."
"......!"
"추우니까 할 말 있으면 나가서 하세요."
상윤은 영호의 가슴을 밀어내며 문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할 말은 이미 다했어."
영호는 현관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자 태경의 손이 불쑥 안으로 들어와 문을 붙잡챘다.
"김상윤, 난 아직 용건이 끝나지 않았어."
태경은 안간힘을 써서 문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벌려진 틈 사이로 보이는 영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영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뭐지, 용건이란 건?"
태경은 영호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보리색 쇼파와 유리 테이블, 스텐드 램프등이 가구의 거의 전부인 깔끔했지만 삭막한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상윤은 마악 욕실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상윤아, 할 말이 있어!"
상윤이 멈춰 서며 돌아보았다. 태경은 그에게 다가갔다.
"그때의 일 사과하고 싶어. 너에게 사과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어."
"......."
"네가 저 남자와 있는 걸 봤기 때문에...... 질투심 때문이었어. 난...... 너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상윤은 차가운 눈으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태경은 상윤이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본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다 끝났어?"
"?"
"용건 끝났으면 가봐."
"......제발, 그렇게 말하지마 상윤아. 그동안 난 정말... 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어. 너도 나를 조금쯤은 좋아했잖아. 나를 좋아했다면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 네 눈빛을 마주하기가 힘들어."
"미안하지만, 네가 알았던 과거의 녀석은 여기 없어."
"너......."
상윤은 냉랭하게 웃었다.
"네가 죽여버렸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넌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김상윤 그대로야!"
"이건 내 사생활이야. 더 이상 구차하게 굴지 말고 돌아가."
"네 사생활이라고? 넌 내 친구고 저 남자는 우리 누나의 약혼자야."
"누나 일은 안됐어.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해서 그렇게된 게 아니니까 사과할 필요는 없겠지."
"상윤아 너 정말 저 남자를 좋아하는 거야?"
"흥, 유아 같은 질문을 하는 구나."
태경은 멍한 얼굴로 서있었다. 그런 태경을 바라보며 상윤은 눈썹 사이를 모으고 짜증스럽게 물었다.
"뭘 확인하고 싶은 거지? 뭘 확인하고 싶어서 온거야?"
"너 어째서......."
상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갑게 웃었다.
"그래, 이제보니 내가 하는 일을 눈으로 확인하러 온 거였나? 그렇다면 잘 보고 배우라고."
상윤은 영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윤의 두 손은 영호의 가슴에서 복부로 그리고 허리 아래로 요염하게 쓸어 내려갔다. 마치 난 이런 녀석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듯.
상윤은 입으로 영호의 바지지퍼를 물었다. 그의 턱이 아래로 내려가고 지퍼가 열리며 영호의 속옷이 드러났다.
상윤의 손은 속옷 사이 틈을 헤치고 영호의 페니스를 꺼내 쥐었다. 그리고 아무 거리낌없이 그것을 입에 넣었다.
영호는 두 손으로 상윤의 머리를 힘껏 움켜쥐고는 자신의 다리사이로 더 가까이 밀어 넣었다. 상윤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하악... 하악..."
단지 상윤의 고개가 움직일 때마다 가쁜 숨소리만 들렸다.
"아아......."
끈적끈적한 소리와 함께 영호는 황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젖혔다.
태경은 굴욕감과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왜 이런 자식과!"
태경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끝나지 않았다. 영호는 상윤의 허리를 안아 그를 바닥에 눕히고 있었다. 상윤의 상체가 유연하게 바닥에 닿았다.
"......계집애가 선물한 목걸이나 걸고 온 주제에......."
작은 목소리였다. 상윤은 고개를 젖힌 채 아주 잠시동안 태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목에 걸고 있는 팬던트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영호는 보란 듯이 태경을 향해 웃더니 상윤의 버클을 풀렀다. 찰칵. 차가운 금속성의 소리가 나고 벨트가 열렸다.
상윤은 두 손목을 모아 머리위로 올렸다.
"묶어줘요."
영호는 태경을 힐끔 바라보더니 상윤의 벨트를 허리에서 뽑았다. 그리고 그의 손목 위에 벨트를 묶었다. 그리고 상윤의 바지를 하체 아래로 끌어내린 후 손가락으로 속옷 위를 가볍게 애무했다.
"아... 아..."
상윤이 요염한 신음소리를 내며 허리를 틀었다.
콰장창! 태경은 테이블 상판 유리를 힘껏 내리쳤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면서 그 위에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태경의 손은 어느새 피로 젖어있었다.
"더러운 자식들! 지옥에나 가라!"
쿵! 태경은 문을 세차게 밀어젖히고 그대로 뛰어나갔다.
영호는 태경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쓰러져있는 상윤의 위로 올라왔다.
"풀어줘요."
"?"
"집이 엉망이예요. 치워야 겠어요."
"나중에 치워."
"아니, 지금 해야겠어요."
영호가 그의 손목에 묶은 벨트를 푸르자 상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깨어진 유리조각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은 파편들을 그대로 밟고 있었다. 그리고 태경의 피가 떨어진 유리조각들을 만졌다. 소중한 것을 만지듯이 조심스럽게.
"그 녀석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나?"
상윤은 영호를 돌아보더니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영호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시린 미소였다. 상윤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멍하게 중얼거렸다.
"아파......."
"발이 베었으니 아픈 게 당연하지. 이리와. 치료 해 줄께."
영호는 상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태경이 나간 문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프지 않아요. 하나도 안 아파요...... 하나도......."
그의 목소리는 높낮이와 고저가 전혀 없었다. 마치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 같았다.
상윤은 방을 향해 걸어갔다. 발을 디딜 때마다 핏자국이 찍혀졌다.
'그래 이미 너는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이야. 설마 나를 좋아했다는 이유로 네가 이 세계까지 넘어올 필요는 없는 거야. 너는 그냥 부잣집 도련님으로 행복하게 사는 게 좋겠지. 그리고 나는 내 미래를 꿈꾸며 살꺼고. 사랑 때문에 전망 없는 삶을 살고 싶진 않아. 그게 나란 녀석이야. 그게 나란 녀석.......'
방으로 들어간 상윤은 자기도 모르게 창가에 서있었다. 창문이 조금 열려져 있었다. 창가에 걸어둔 러브체인이 팔락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돌아가는 태경의 모습을 찾고있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태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너무 늦은 걸까? 벌써 가버린 걸까? 태경이 돌아가는 뒷모습이라도 눈에 담아두고 싶었는데....... 후후 멍청하게, 미련따위 가져서 어쩌겠다는 거야......? 상윤은 자신을 향해 조소했다.
"김상윤 러브체인 기억나?"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 그 순간 상윤은 온몸에 전율이 스치는 것 같았다. 환청? 아니 이건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한 태경의 목소리.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돌아가다가 네가 있는 창문을 올려다봤어. 그때 내가 사준 거 맞지? 창가에 걸려있는 러브체인... 그때보다 훨씬 더 예쁘고 길게 자랐더라. 분명 네가 열심히 물을 주고 길렀겠지?"
상윤은 거실로 뛰어나갔다. 태경의 목소리는 거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여전히 유리파편과 영호만 있을 뿐이었다.
영호는 멍하니 할로겐 벽램프 위의 스피커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경이 거기 있었다. 아니, 태경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야, 임마 뭐하는 거야!"
"저 녀석 빨리 끌어내! 세상에 피 좀 봐!"
"잠깐만 봐달라니까요......."
태경의 목소리 사이로 화가 난 남자들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리고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들. 그도 그럴 것이 스피커는 관리실에서 공개 방송을 할 때에만 사용되는 것이었으니까. 지금 태경의 목소리는 이곳 뿐만 아니라 아파트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방송국 이벤트라는 태경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관리실 직원들은 순순히 자리를 내주기로 한 것 같았다.
"흠흠... 상윤아. 사실 사과보다 너에게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그날 이후 줄곧 너만 생각했어.
잠을 자도 밥을 먹어도... 네 얼굴이 늘 따라다녔지.
사실 난 처음부터 네가 어떤 녀석이든 그런 건 상관없었어.
널 좋아하니까. 나보다 더 널 사랑하니까.......
제발... 제발 날 살려줘.
김상윤 네가 아니면 난...... 안돼......."
상윤은 두 뺨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 눈물이 따뜻하다는 것을 이제서야 깨닫게 되다니.... 마치 눈 속에 밖힌 얼음 조각이 녹아내리 듯 따뜻한 액체들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상윤은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이미 아파트 복도와 베란다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파트 공터에도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경비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태경과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
태경의 거짓말이 탄로 난 모양이었다. 하긴... 남자가 남자에게 구애를 하는 방송국 이벤트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싸우는 와중에서도 태경은 고개를 들어 상윤을 보았다. 상윤도 그를 보았다. 태경은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어버린 듯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의 웃음이 어느때보다 해맑게 보였다. 이윽고 태경은 옷을 잡고 늘어지는 경비원들을 단숨에 뿌리치고 달려왔다.
태경이 다시 오고 있었다. 정말...... 다시. 내게로.......
꿈이라면 제발 깨지 않기를...
나는 태어나서 두 번째 기도를 한다.
"왜... 가지 않았지?"
"허억... 허억... 가다 다시 돌아왔어. 중요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17층까지 단숨에 달려오기라도 한 듯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너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거."
"......."
"내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질투하고 있었잖아."
태경은 목에 걸린 팬던트를 흔들어 보였다.
"여자친구가 준거란 건 어떻게 알았지? 넌 분명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내 별자리도. 그건 관심이 있다는 증거고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증거지."
"......."
"그리고 러브체인."
"......."
"사랑해. 김상윤."
상윤은 고개를 들어 키가 큰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리 뒤로 우유빛 하늘이 보였다. 하늘이 너무나 흐리게 보였다. 아니, 물에 젖은 듯 일렁이고 있었다.
상윤의 뺨에 또다시 뜨거운 것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네 손에서 피가 나."
상윤은 피가 흐르고 있는 태경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입에다 가져다 대며 핥았다.
"괜찮아. 금방 멈출거야"
태경은 상윤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상윤은 태경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옛날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어떤 성벽보다 든든했던 가슴. 그리고 체온.......
"따뜻해......."
훈훈한 입김이 태경의 가슴으로 새어들어 왔다.
"나도 좋아."
태경이 상윤의 얼굴을 어루만지자 그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래도 그들의 얼굴은 행복한 듯이 웃고 있었다.
영호는 어느새 문 앞에 나와 서있었다. 그는 눈앞에 행복하게 웃고 있는 상윤을 보자 견딜 수 없는 패배감과 상실감이 들었다. 그의 앞에서는 한번도 저런 웃음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이것이었을까? 며칠 전 회사에서 두 사람이 만날까봐 전전긍긍했던 것은? 그의 무의식은 태경을 선택하리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일까?
"상윤, 이리로 돌아와라."
영호는 가능한 명령적이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그가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상윤은 태경에게서 얼굴을 들어 영호를 바라보았다. 영호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져 있었다.
"잊었어? 네 주인은 나야"
영호는 앞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어쩐지 그의 손이 안쓰러울 정도로 가녀려 보였다. 돈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자의 손.
상윤은 두 사람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태경은 상윤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가지 마."
"선택해라. 나냐? 저 녀석이냐?"
그러나 영호는 잠시 후 말을 수정했다.
"그래 인정하긴 싫지만 정확하게는 너의 미래와 나, 그리고 한태경이라고 해야겠지. 선택해라. 저 녀석을 따라가면 네가 생각했던 미래 따위는 없을거야. 넌 현명한 녀석이니 잘 알겠지? 누구를 선택할 꺼냐? 상윤."
상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행복하고 싶어요. 아주 잠깐동안만이라도."
분노로 영호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상윤은 태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깐 너 발......."
태경은 그제서야 상윤이 걸은 발자국마다 피가 찍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맨발은 형편없이 피에 젖어 있었다. 태경은 신발과 코트를 벗어 상윤에게 입혀주고는 그를 들춰 업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렇게 영호에게서 등을 돌리고 멀어져 갔다.
이 소동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지만 그들의 이상한 시선이나 수근거림 따위는 이미 상관없었다. 이미 그들은 서로만이 중요했을 뿐이었다.
영호는 구경꾼 틈 사이를 뚫고 걸어가는 상윤과 태경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있었다. 그러나 상윤을 다시 붙잡을 수는 없었다. 완력으로라도 그를 잡을 방법은 있었지만 상윤의 말 한마디가 뇌리에 남아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상윤을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호는 낮게 중얼거렸다.
"멍청한......."
그 것은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원하는 것은 뭐든 손에 넣을 수 있고. 지금도 상윤을 원하기만 하면 빼앗아 올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 많았다. 그런데도 그저 바람맞은 남자처럼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다.
아마 그도 사랑을 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