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6. 상처
상윤의 집을 나온 태경은 정신없이 달렸다.
가로수와 버스들이 모두 빠른 속도로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간혹 사람들과 부딪쳤지만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달리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조금전 보았던 그 장면 때문에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집까지는 버스로 서너 정거장 되는 거리였지만 그는 어느새 집 앞에 와있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미친 듯이 뛰어들어갔다.
"상윤이는 괜찮니? 석원씨도 걱정 많이 하던데. 얘 태경아!"
경은은 쏜살같이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태경을 보자 의아한 얼굴을 했다.
태경은 자기방 문을 열고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그는 베개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머릿속에는 각인된 장면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가로등 불빛에 은밀해진 실내 분위기.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두 사람의 옷가지 그리고 침대에 길게 가로지른 넥타이와 벨트. 헝클어진 머리에 다소 피곤한 듯한 상윤의 얼굴. 조금전 일들로 실내에 퍼져있는 비릿한 냄새와 야릇한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 불빛 속에 드러나 있는 상윤의 아름다운 나체. 그의 몸에 새겨진 키스마크.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시트. 벽에 그려진 덩굴 때문인지 상윤의 나체는 마치 그것들과 함께 엉켜있는 것만 같았다.
태경은 그의 시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트가 되어 그의 몸을 감싸고...... 아니다. 그곳에 있던 남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술이 되어 상윤의 몸에 입맞추고 그를 범하고.......
바닥에 떨어진 양복으로 보아 학생은 아닌 듯 했고 욕실유리문을 향해 보인 알몸은 분명 가슴이 없는 남자였다.
상윤이 몸을 만지지 못하게 한 것은 내가 싫어서였을까? 내가 그 남자와 달라서였을까?
태경은 엎드린 채 자기도 모르게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무엇이 부족해서, 그 남자와 무엇이 달라서 난 될 수 없는 거지?'
태경은 자기의 페니스를 만졌다. 상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발기되어 있었다.
아...... 상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너를 안고 싶다. 아니 네가 나를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영원히 너의 것이 되고 싶다.
태경의 손은 점점 빨라졌다.
"하악...... 학......"
몸에 한 가닥 꿰뚫는 흥분이 지나더니 태경은 그대로 손위에 뿜어냈다. 그리고 똑바로 누워 손발을 늘어뜨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혐오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제길, 왜 난 안된다는 거야.
그 녀석 죽여버리고 싶다'
* * *
이틀만에 학교에 등교한 상윤의 얼굴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기 전 뒤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태경을 흘끗 보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태경은 상윤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
상윤이 인사하자 태경은 그제서야 상윤의 존재를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어, 안녕?"
관습적이고 성의없는 목소리. 그것뿐이었다. 태경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상윤은 절망스러운 얼굴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에게 한가지 꼭 해줄 말이 남아있었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젠장, 너무 시끄러워서 공부를 할 수가 없군!"
태경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교탁 앞으로 나갔다.
쾅쾅쾅!
"야, 조용히 못해!"
그의 목소리가 교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교실 안은 조금전보다 볼륨이 작아진 듯 했지만 그렇다고 소음들이 전멸한 것은 아니었다.
4분단 구석에 모여 짤짤이를 하던 녀석들은 여전히 두 손바닥을 모아 흔들고 있었다.
와아! 베팅이 맞았는지 한 녀석이 기쁨으로 소리를 쳤다. 태경의 인상이 험악해지더니 교탁을 내려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금전 소리친 녀석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얼마전 상윤에게 시계를 빼앗으려는 녀석들로 두 명은 옆 반 학생이었다. 물론 태경의 간섭으로 상윤을 교육시키려던 일이 중단되었으니 그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일리 없었다.
"너, 임마 남의 반에 와서 물 흐리지마!"
태경의 말투는 몹시 거칠었다. 평소 사교적이고 상냥하던 그가 아니었다. 그러자 상대편 녀석들도 기분이 상해 얼굴을 구겼다.
"쳇, 재수없는 새끼, 더럽게 잘난 척은."
"뭐야!"
태경은 어슬렁거리며 교실 밖으로 나가는 그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그는 태경의 손을 사납게 치웠다.
"새끼, 이거 안놔?"
곧 주먹이 오갈 것 같은 살벌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보는 시선이 많다는 것을 알자 녀석들은 싸울 장소를 바꾸기로 했다. 그들은 태경의 멱살을 움켜쥐고 계단을 올라갔다. 옥상이었다.
"야, 안 올라가 볼꺼야?"
혁수였다. 그는 상윤의 앞에 서있었다. 상윤이 무심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혁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태경이 녀석 싸움 말려야 할 꺼 아니야?"
"내가 왜?"
"정말...... 임마, 저 녀석 한번 싸우면 일 낸단 말이야!"
"네가 말리면 되잖아"
"모르겠냐? 태경이 녀석이 제일 말 잘 듣는 게 너란 거"
"처음 듣는 얘긴데?"
상윤은 무심한 척 책을 읽었다. 보다 못한 혁수가 상윤의 책을 빼앗으며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따라 와!"
상윤이 노여움을 담은 얼굴로 혁수를 노려봤지만 그는 다짜고짜 상윤의 팔을 끌어당겼다.
옥상에는 삼대 일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짤짤이를 하던 녀석들 대 한태경.
태경은 여기저기 얻어맞았는지 교복 상의가 반쯤 벗겨져 있었고 단추가 떨어져 나간 와이셔츠는 풀어헤쳐져 있었다. 그리고 넥타이와 옷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그는 흐르는 코피를 손등으로 스윽 닦아내며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있는 세 녀석들의 몰골은 더 더욱 심했다. 녀석들 중 한 명은 이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얼굴이 찢기고 입술이 터진 두 녀석이 태경에게 한참 얻어맞고 있는 중이었다.
태경은 난폭하게 주먹질을 해댔다. 녀석들도 이리저리 피하며 공격을 했지만 태경의 주먹에 얻어맞아 한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덤벼들었다. 정말 눈뜨고는 볼 수 없을 만한 난투극이었다.
"그만해! 한태경"
혁수와 다른 친구들이 태경을 뒤에서 붙잡았다. 그러나 그는 맹수처럼 난폭하게 저항했다.
"야, 김상윤 너 뭐해!"
친구들은 구원을 요청하듯 뒤에 서있는 상윤을 돌아보았다. 그제서야 상윤은 못이기는 몸짓으로 태경의 팔을 붙잡았다.
"손 치워!"
태경은 상윤의 팔을 뿌리쳤다. 그 바람에 태경의 팔꿈치가 상윤의 입술을 후려쳤다.
"윽!"
태경은 순간 팔을 멈칫했다.
싸움을 말리러 온 또 한 무리가 악착같이 덤벼드는 짤짤이 이인조를 붙잡았다. 싸움은 그렇게 간신히 멈추었다.
짤짤이 이인조는 씩씩대며 태경을 노려보았다.
그들로서는 약간 억울한 상황이었다. 아니 뜻밖의 상황이었다. 태경의 주먹이 장난 아니라는 말은 들었지만 언제나 순해보이던 녀석에게 별일 아닌 일로 이렇게 얻어터지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학생들은 짤짤이 하던 녀석들을 부축해서 옥상을 내려갔다. 혁수도 태경에게 내려가자고 했으나 그는 먼저 내려가 있으라고 했다.
태경이 화난 모습을 본 친구들은 더 이상 군말없이 교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를잘 좀 달래라며 상윤을 남겨두었다.
태경은 뒤에 서있는 상윤을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핏방울이 떨어지며 상윤의 하얀 와이셔츠 칼라를 적시고 가슴으로 번져갔다.
"후... 피가 또 멈추지 않는군"
태경은 상윤에게 다가오며 그를 옥탑 벽으로 몰아부쳤다.
"그럼 어쩔 수 없네"
태경은 왼 팔꿈치로 벽을 집고 오른 손으로 상윤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했다. 상윤은 눈을 깜밖이지도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태경은 상윤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틀동안 고열에 시달렸던 상윤의 입술은 무척이나 메마르고 뜨거웠다.
그리고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는 숨쉬는 것도 잊은 채 격렬하게 입술을 부비며 혀를 집어넣으려 했다.
"저리 치워!"
순간 번쩍하는 느낌과 함께 상윤의 주먹이 얼굴에 날아왔다.
태경은 맞은 부위를 쓰다듬으며 싸늘한 눈으로 상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냉소했다.
"칫, 그 녀석은 되고 난 안 된다는 거야?"
태경은 손가락으로 상윤의 입술을 훑으며 비웃었다.
"왜그래? 너라면 입술정도 주는 건 일도 아니잖아."
상윤도 태경을 노려보았다. 알지 못하는 곳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물론 어렵지 않아. 하지만 너 같은 풋내기랑은 안해. 넌 키스하는 것도 형편없어."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열 때문이야. 그래, 지금 난 열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닌 거야.
"흥, 그랬군. 네가 말한 선생들이라는 작자들은 모두 섹스에 능숙한 작자들을 말하는 거였군. 더러운 호모새끼들!"
태경은 상윤의 두 팔을 붙잡아 벽에 붙였다. 시리도록 흰 상윤의 팔목에는 넥타이와 벨트에 묶였던 자국이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지독할 정도로 강렬한 보라빛으로.
태경은 얼굴을 닿을 듯이 가까이 들이대며 물었다.
"호, 너 상당히 메저키스틱한 섹스를 즐기는 군. 후후... 그러니 나는 감당할 수 없겠지. 이렇게까지 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배워야 되는거지? 응? 합숙훈련이라도 해야하는 건가? 우린 친구사이니까 조금만 가르쳐달라고. 응?"
그러나 그것은 태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과는 달리 이상한 말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태경은 상윤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읍......!"
태경의 입술이 상윤의 입술을 거칠게 부비며 뜨거운 혀가 밀려들어왔다. 난폭하고 성난 키스. 상윤은 무릎으로 태경의 복부를 걷어찼다.
"비열하고 형편없는 새끼! 너 역시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야! 말 뿐이었어!"
상윤은 분노한 얼굴로 태경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한동안 몸을 경련하며 노려보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떨어져 흐를 것만 같았다. 상윤은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몸을 돌려 건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후 상윤의 분노를 드러내듯 쾅! 하며 거친 문소리가 들려왔다.
태경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바닥에 팔꿈치를 대고 그 사이로 머리를 쳐밖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난 형편없어, 질투 때문에 형편없게 돼버렸어...... 하루에도 몇 번씩 너와 입맞추고 너를 안는 생각을 했는지 알아? 하지만 네가 날 이상하게 볼까봐 아무 말도 못했어. 그런데...... 넌 이미 다른 사람이 있었어.
난...... 네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라 네가 어떤 사람과 함께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나!
나에겐 허락하지 않는 것들을 그 녀석에게 허락한다는 것에 미치도록 화가 나!!"
태경은 상윤이 사라진 문을 향해 소리쳤으나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태경이 옥상에서 내려오자 상윤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그리고 가방도 없었다. 창밖에 보이는 운동장 한 가운데에 상윤이 걸어가고 있었다. 넓은 운동장 한가운데 보이는 그의 뒷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몸이 안 좋아서 조퇴한데."
그의 짝인 혁수가 말해주었다.
"아침부터 얼굴색이 안 좋다며 담임이 보냈어. 야, 너 듣고 있는거야?"
혁수는 멍하니 앉아있는 태경을 쿡쿡 찔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니들 옥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 * *
다음날 상윤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비어있는 상윤의 자리에는 점점 먼지만 쌓여갔다.
태경은 비어있는 자리를 확인할 때마다 마음 한 곳도 점점 비어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빈곳에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태경은 상윤의 집을 찾아갔다.
만나면 뭐라고 말을 해야하나? 처음에는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웃는 게 낳겠지? 아니면 미안하다고 먼저 사과를 하는 것이 낳을까? 그때 일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치졸하기 그지없는 짓이었다.
태경은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아무래도 화해하는데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윤의 연립이 마주 보이는 곳에 있는 슈퍼에 들려 캔맥주와 안주가 될만한 것을 골라 봉지에 담았다.
비닐봉지를 흔들며 걸어가다가 그는 다시 한번 걸음을 멈추고 생각했다.
'만일 저번에 봤던 그 남자와 함께 있는 걸 보게되면 어쩌지? 그러면 또 다시 흥분해서 싸우게 되지 않을까? 아니면 상윤은 이미 나 따위는 깨끗이 잊은 상태인데 혼자서 이렇게 안절부절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발걸음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라도 아파서 학교에 못나온 것이라면? 간호해 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혼자 앓고 있다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걸음을 빨리 했다.
문 앞에서 벨을 눌렀다. 딩동, 경쾌한 벨소리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또 다시 벨을 눌렀다. 몇 번을 계속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안에 없는 모양이었다.
태경은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이왕 칼을 뽑은 김에 끝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는 비닐봉지를 옆에 내려놓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기엔 추운 날씨였다.
맞은편 연립의 문에서 나온 30대중반의 여자가 앙고라 카디건을 휩싸며 계단을 총총히 내려갔다.
태경은 봉지에 들어있던 캔 맥주 뚜껑을 땄다. 알콜의 힘으로 추위를 이겨보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차가운 맥주가 속으로 들어가자 온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 졌다. 카디건을 걸친 여자는 양손에 찬거리를 사들고 나타나더니 태경을 이상한 듯 쳐다보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여행이라도 간 걸까?"
태경은 상윤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할까하다가 한 시간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잠시후 양복을 입은 남자가 1층 현관에 나타났다. 태경은 상윤의 집에서 보았던 남자일까 생각하며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의 앞에 나타난 남자는 중간 키에 통통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또다시 앙고라 카디건의 여자가 살고 있는 맞은편 문으로 들어갔다. 역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태경을 이상한 듯 쳐다보며.
잠시후 맞은편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여자가 문틈으로 얼굴을 빼꼼이 내밀었다.
"저, 앞집에 살던 학생 친구예요?"
태경은 잠시 졸던 눈을 뜨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네."
"그 학생 이사간 거 갔던데......."
"이사요?"
태경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워낙 조용히 떠나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부동산에서 여러 번 보러오는 걸 보니 아마도......"
"확실해요?"
"글세, 확실한 건 요 앞 부동산에서 확인해봐요."
여자는 말을 마치고 다시 문 사이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태경은 다리에 힘이 빠져 더 이상 서있을 수가 없었다. 좀 전에 마셨던 알콜의 효능이 지금에서야 반응하는지 몸에서 후끈후끈 열이 올라왔다.
태경은 손잡이를 돌려보았다. 문은 처음부터 잠겨있지 않았던 것이다. 상윤이 문이 고장나서 잠기기 않는 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문에 영호와의 일도 본의 아니게 보게 된 것이었다.
빈집. 가구는 그대로 있었지만 스산한 텅빈 집안에는 상윤이 그려놓은 담쟁이 넝쿨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창가에 흔들리고 있는 것. 무척이나 눈에 익은. 태경의 후드 점퍼였다. 언젠가 술에 취한 밤 그를 위해 벗어주었던 것이다.
그때 그들은 뭐라고 했었던가?
"내가 이상한 녀석이라도? 가령 남들이 가까이 오기 꺼려하는 몹쓸 병에 걸렸더라도? 그래도 넌 내 친구로 남아줄까?"
"물론이야."
"아니면, 남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는 그런 이상한 녀석이라도? 그래도 넌 내 친구로 남아줄까?"
"물론이야. 친구...... 니까"
이것은 그 징표로 태경이 상윤에게 벗어주었던 것이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니 그징표도 더 이상 소용없는 것이었다.
"상윤아......."
태경은 그 점퍼를 마치 상윤이라도 되는 듯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상윤의 연립을 나온 태경은 마지막 끈이라도 잡으려는 듯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상윤의 번호를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국번이니......."
핸드폰을 껐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왜 녀석이 떠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빨리 떠날 수 있는거지?
* * *
"어디로 갔는지는 우리가 모르지. 하여튼 그 학생 삼촌인가 하는 사람이 임자가 나타나면 연락하라고 연락처만 적어주던데."
"그 연락처 저 좀 가르쳐주세요."
부동산 주인은 태경을 살펴보며 약간 망설였다.
"친군데 갑자기 이사를 가서 그런단 말이예요."
태경이 애원 반 억지 반으로 조르자 그는 탐탁치않은 얼굴로 수첩을 들여다보았다.
"이것도 그 사람번호가 아니라 비선가하는 여자 번호래. 아주 멋쟁이에다가 부잣집인 것 같더구만. 차도 생전 처음 보는 외제차 같은걸 탔지 아마."
태경은 상윤에게서 멀고 먼 전화번호를 받아들고 부동산을 나왔다. 이것은 아마도 그 남자의 비서전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상윤에 대해 알 수도 없을 것이다.
결국 넌 이렇게 떠나버렸구나. 하지만 넌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을 따라 갔으니 행복하겠지. 그리고 나를 잊겠지. 또 그리고 나는 언젠가 너를 잊겠지. 훗날 거리에서 스치더라도 모른 채 지날 수도 있겠지.
그런 게 인생이니까.
"젠장!"
태경은 주먹으로 담벼락을 후려쳤다.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가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