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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5. 선물 (5/9)

STEP 5. 선물

"갖고 왔겠지?"

아침에 등교한 태경은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으며 나직하고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그러자 상윤도 가방을 들어보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치 무슨 첩보 영화라도 찍는 듯 오버하는 두사람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줄 알았던 태경의 짝 혁수가 "얼씨구?"하며 고개를 들었다. 

히익! 태경과 상윤은 찔끔 놀랐다.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혁수의 시선은 그들의 가방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달려들어 태경의 가방을 빼앗았다.

"야, 임마 내놔!"

태경이 혁수에게 가방을 탈환하려 했지만 혁수가 지퍼를 연 것이 조금 더 빨랐다. 가방 속에 들어있던 사복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어, 뭐야?"

혁수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상윤의 가방도 노려보았다. 상윤은 찔끔하며 얼른 가방을 밑으로 내려놓았다. 

"늬들 지금 이게 무슨 짓들이야? 학생이 사복을 가지고 다니다니!"

화난 듯 크게 소리치던 혁수는 궁금한 표정으로 태경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런데 나 빼놓고 어디 가려는 거야?"

"가긴 어딜가...... 이게 왜 가방 속에 들어있는지 나도 모르겠네"

그러자 혁수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상윤을 노려보았다. 상윤은 도리도리를 해댔다. 

"쳇, 늬들하고 안놀아 임마"

혁수는 삐졌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녀석들에게 가버렸다. 

"야, 삐진거냐? 이혁수. 이리와 놀아줄께"

태경이 소리쳤지만 그는 험악하게 얼굴을 찌그러트리며 대답했다.

"관둬. 늬들이 나 왕따시켰잖아"

태경과 상윤은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오후가 되어 수업이 끝나자 두 사람은 백화점 드레스 룸으로 갔다. 

잠시 한눈을 팔고 있던 매장주인은 고개를 갸웃했고,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교복에서 사복으로 바꿔 입고 나갔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무스로 앞머리를 정리하고 책가방은 사물함 속에 집어넣었다. 

"어때? 이러니까 고삐리 티가 안나지?"

거울 앞에선 태경은 한마디로 근사했다. 

무스로 발라 세운 스포츠 머리는 운동선수처럼 활력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와 움푹 들어가 깊이를 더하는 눈. 큰 눈은 아니었지만 겉쌍꺼풀이 얇게 생겨난 길고 서글서글한 눈이었다. 한가운데를 양분하는 콧날 선은 조각해 놓은 듯 날렵했고 다물고 있는 도톰하고 믿음직스러운 입술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 상윤이 본 어떤 남성보다 강인하고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응, 고삐리 흉내낸 대학생 같애."

"이 자식이......"

태경은 가벼운 펀치로 상윤의 가슴을 쳤다. 그러자 상윤도 지지 않고 태경의 배를 툭툭쳤고 잠시동안 장난스러운 폭력이 오고갔다. 

그날 이후로 상윤은 태경에 한해서 접근하는 것을 완화시켰던 것이고 그 결과 사소한 일에도 이렇게 몸싸움이 잦았다. 

거울 앞에 서있는 태경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거울 앞에 비치는 상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가발은 벗어버리는 게 어때?"

"싫은데"

"벗어봐, 그게 훨씬 더 섹시하다고"

상윤은 태경을 잠시 노려보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싫어"

"쳇, '추억의 책가방'에나 나올법한 가발이 뭐가 좋다고 쓰고 다니는지 모르겠네"

"추억의 책가방?"

"이거 기억 안나?"

태경은 오래 전 임하룡이 추었던 다이아몬드 스텝을 흉내냈다. 얼굴표정까지. 

퍽! 상윤의 가발이 태경의 얼굴로 날아왔다.

"뭔지 모르지만 굉장히 흉한 거 같군"

이렇게 해서 학생에서 민간인으로 변신한 두 사람이 간 곳은 홍대 앞의 지하 라이브 카페였다. 이곳에 태경이 좋아하는 인디밴드가 공연을 한다고 상윤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잠시 후 공연이 시작되자 여자처럼 얼굴에 짙게 화장을 한 보컬이 무대위로 나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음악소리. 

귀를 찢을 듯한 전자 기타, 그리고 이어지는 드럼. 그 소리들이 어찌나 큰지 비트를 칠때마다 온몸이 쩌렁쩌렁 울려대는 듯 했다. 

보컬은 무대에서 뛰어내려 홀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러댔고 카페 안에 모인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자기가 좋을 대로 몸을 흔들었다. 

자유로왔다. 어떤 것도 방해하는 것이 없었다. 

상윤은 이제껏 자기가 살던 곳이 아닌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한번도 이렇게 열광해 본 일이 없었다. 이렇게 살아서 꿈틀대는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음악소리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온몸에 얽어매고 있던 사슬들이 가닥가닥 풀어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싶었다구!"

태경의 목소리는 음악에 묻혀 반밖에 들리지 않았다.

"뭐라구?"

상윤이 소리치자 태경은 그의 귀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내가 느끼는 걸 너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구!"

"......"

상윤은 태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태경은 그가 아직도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더 큰소리로 외쳤다. 

"내가......!"

상윤은 손을 들어 태경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의 귀에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고마워"

"......"

음악에 파묻혀 있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어떤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 채. 

사람들이 두 사람 주위를 흐르고 있었다. 

빠른 비트의 리듬이 심장소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 밖에 나온 그들은 후련하게 심호흡을 했다.

"음악이 이렇게 좋은건지 몰랐는 걸"

"이게 바로 라이브의 참 맛이지, 다음에 우리 집에 놀러올래? 듣고 싶은 CD 있으면 빌려 줄께"

그때였다.

"저기요...?"

문득 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두 명의 여자가 서있었다. 

'이런 걸 킹카라고 하나?'

그녀들은 늘신한 키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드러난 쭉빠진 다리에는 부츠를 신고 있었고,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했지만 원판이 바쳐주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미녀들이였다. 

"우리 2차가려고 하는데 같이 안 갈래요?"

태경은 상윤의 귀에 대고 말했다.

"야, 지금 우리 헌팅 당한거지?"

"가고 싶어?"

"글쎄......" 

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또 다른 여자가 지루하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둘둘 짝이 맞으니까 원한다면 여기서 갈라져도 상관없고요."

"지금 아예 짝을 정할까요?"

그녀들이 서로 상윤과 태경에 대해 마음에 든다 어쩐다 하고 있을 때 태경은 넉살좋게 웃으며 말했다.

"저 그런데 우린 학생인데요"

"우리도 학생이예요. 어느 대학 다녀요?"

태경은 약간 짖궂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가락으로 H대가 있는 쪽 길을 가리켰다.

"요 앞에 있는 학교요."

"어머, 우리도 거기 다니는데 왜 한번도 못 봤지?"

"무슨 과예요?"

"문관데요."

"문과대 말이에요?"

태경은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그러자 상윤이 씨익 웃으며 대신 대답했다.

"아뇨, **고등학교 문관데요."

여자들은 황당한 듯 할말을 잃고 쳐다보다가 잠시 후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알아서 포기하고 돌아설 줄 알았던 태경과 상윤은 다소 차질이 생기자 오히려 긴장했다.

"어머, 영계다. 어쩐지...... 솜털이 뽀송뽀송한게 예쁘더라했어"

"재 얼굴 하얀 애 탈랜트 *** 닮지 않았니?"

"난, 키 큰 애가 더 좋은데" 

"윽......"

태경과 상윤은 서로 얼굴을 찡그리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태경의 대사. 

"아줌마들하고 원조교제 할 생각 없는데요."

이렇게 말한 태경은 상윤을 붙잡고 뛰었다. 

하하하하!

지하철까지 단숨에 뛰어온 두 사람은 배를 쥐고 웃어댔다. 

"봤어? 그 누나들 얼굴 일그러진 거?"

"당근봤지. 예쁜 얼굴이 일그러지니까 무섭던데~"

상윤은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태경의 가슴은 또다시 철렁 내려앉은 듯 했다.

"고마워 좋은 공연 보여줘서. 답례로 이제 내가 저녁 살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응."

태경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라면. 너희 집에서 끓여먹는 라면. 거기다가 맥주 한 잔은 옵션이고"

"우리 집?"

상윤은 약간 곤란한 듯 생각에 잠겼지만 어쩐 일인지 태경의 싱글거리는 얼굴을 보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하는 말에는 마치 조건반사처럼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

* * *

"와~ 이거 네가 다 그린 거야?"

상윤이 라면을 끓이는 동안 태경은 그의 집안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는 창문이 있는 한쪽 벽을 온통 채우고 있는 담쟁이 넝쿨을 보며 감탄했다. 

아이보리색 벽에 무성하게 그려져 있는 초록색 담쟁이 넝쿨들. 물론 상윤이 그려 넣은 것이었다. 

그리고 창가에는 녹색의 커튼이 쳐져있었고 그 앞에 넓은 더블 침대가 놓여있었다. 침대는 세피아 빛과 흰색이 조화된 시트로 덮여있고 맞은편에 놓인 쇼파 역시 같은 계통의 천으로 쌓여 있었다. 

"너 초록색을 좋아하는구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전에 담쟁이 넝쿨이 있는 집에 살지 않았어?"

"아니, 왜?"

"그냥 너랑 그런 집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상상해봐. 담쟁 넝쿨이 우거진 집에는 창이 하나 있는데 그 창이 열리면 네 얼굴이 나타나는 거야. 햇볕도 못 받아서 얼굴이 허여멀건......"

그 순간 위기를 감지하고 고개를 돌린 태경은 냄비를 집어던질 듯 포즈를 취하고 있는 상윤과 눈이 마주쳤다.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어쨌든 이 벽화 마음에 든다.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거 같잖아"

태경은 침대 위에 벌렁 누워 버렸다. 시트가 풀썩거렸다. 달콤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상윤에게서 늘 맡아지던 샴푸와 비누냄새였다. 태경은 침대시트에 코를 묻고 눈을 감아보았다. 

'너를 안으면 이런 느낌일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태경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어느새 상윤이 그의 옆에 다가와 앉아있었다. 

"예전에 내가 알던 어떤 사람도 그렇게 말했었는데."

상윤의 뇌리에 잠시동안 토미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가 부서져 버렸다.

"그 사람 고향은 플로리다였어. 그는 항상 그렇게 말했지."

내가 살던 집은 말이야 담쟁이 넝쿨이 온통 뒤덮고 있었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집처럼 말이야.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밖을 내다 보는거야. 

밖에는 포플러나무가 우거져 있었지. 그리고 뒷뜰에는 꽃들이랑 잡초가 한데 어우러져 피어있었어. 이 지독한 도시랑은 달리 공기가 무척이나 맛있는 동네지. 

빌어먹을, 파파만 없었다면 말이야. 

내가 그렇게 단꿈을 꾸고 있을 때면 여지없이 파파가 뛰어들어와 내 꿈을 산산조각 냈지. 난 그때 열 살이 갓 넘은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이었는데 말이야. 

파파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맞으면서 보아도 창문 안으로 타고 들어온 그 담쟁이 넝쿨 색깔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지. 눈물이 나도록 말이야.

빌어먹을, 파파만 없었다면 나는 문학가가 됐을지도 몰랐는데.

헤, 문학가 토미는 상상할 수 없는걸.

그래 만일 그랬다면 너 같은 녀석을 만나지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리워. 담쟁이 넝쿨이 가득한 집이. 그리고...... 파파의 매질까지. 

아마 죽을 때가 된 걸까?

그런말 하지마....

네게 꼭 보여주고 싶어. 그 집을 말이야. 그런 동화에나 나올법한 집은 너처럼 예쁘장한 녀석에게 잘 어울릴텐데. 

상윤의 눈에는 순간 물기가 고이는 듯 했다. 안아주고 싶었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손을 뻗던 태경은 상윤의 까만 눈동자와 마주치자 흠칫 놀라 손을 걷어들였다. 

'위험해'

태경의 머릿속 경보장치가 그렇게 울리고 있었다. 더이상 상윤을 보고 있으면 무슨 짓을 저지르게 될 것 같아 그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을 향해 뛰어나갔다.

"라면 다 끓었는데 어디가?"

태경은 빙그레 웃으며 상윤을 돌아보았다.

"진짜 담쟁이 넝쿨을 사러"

잠시 후에 태경이 들고 온 것은 작은 바구니에 담긴 화분이었다. 

"러브 체인이래"

그가 들고 있는 화초의 이름이었다. 

화분 안에 들어있는 화초는 밑으로 길게 늘어져 바닥까지 닿고 있었다. 유연하고 가느다란 줄기에는 손톱 만한 잎사귀들이 붙어있었는데 마치 하트모양 같았다. 그리고 그 잎사귀들은 다른 줄기와 쉽게 엉켜서 떼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담쟁이 넝쿨은 안 판다길래 대신 사왔어."

"난 화분 잘 키울 자신 없는데"

"어쨌든. 이거 말라 죽이는 날엔 너도 죽는 날이 될테니 애지중지 길러라"

태경이 위협적인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자 상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경은 피식 웃더니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럼 잘자."

"라면은?"

"생각해보니 너무 늦었어. 오늘 못 먹었으니 다음에 오면 끓여 줘"

상윤은 그제서야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0시 반. 시간이 이렇게 흘러갔는지 몰랐다. 언제부턴가 상윤은 장소를 옮길때면 시계를 보던 버릇이 없어졌다. 그래, 생각해보니 태경과 있으면서부터였다. 그와 있는 한시간은 마치 일분처럼 달콤하고 짧았으니.

태경이 나가고 나자 상윤은 그가 선물한 화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서로 잎사귀들끼리 엉켜있어서 지저분해 보였지만 상윤은 그것을 풀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담쟁이 넝쿨이 그려진 벽 위에 걸었다. 

"러브 체인이라...... 멋진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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