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 4. 노말.
"너 어제 명동에서 봤다."
태경은 상윤이 자리에 앉으려 하자 친한 척 말을 붙였다. 그러자 상윤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아무 것도 아닌 듯 대답했지만 상윤의 얼굴에는 약간 당황한 빛이 느껴졌다. 태경은 상윤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마치 계집애처럼 보일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어딘지 창백해 보였다.
"우리 누나 회사에서 기다리다가 우연히 봤어. 야, 처음엔 너 아닌 줄 알았어. 너 정말 대단한 양아치던데"
"그랬나?"
"그런데 명동에는 무슨 일이었어?"
"심부름."
"무슨 심부름?"
"설명하자면 복잡해. 아르바이트 같은 거라고 해두면 될거야."
"와, 너 아르바이트도 하는구나."
"하지만 오늘로 끝났어."
"그래?"
태경은 상윤에 대해 조금씩 많이 알아가고 있다는 것이 왠지 기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 왜 자기가 기뻐하고 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주위에 넘치는 것이 친구들이었는데, 오히려 친구가 없는 상윤이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것에 태경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사람은 원래 성취욕을 즐기는 동물로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야, 급장 담임이 실험노트 가져오래."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태경은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태경은 칠판 앞에 서서 교탁을 세게 두들겼다.
"야, 실험노트 다 냈지? 제출한다."
"아직, 잠깐 잠깐......"
그러자 몇 명이 재주도 좋게 노트를 쓰면서 달려나왔다.
태경은 담임의 책상 앞에 노트를 내려놓았다. 담임은 자리에 없었다. 책상 위에는 교무수첩이라고 적힌 남색표지의 수첩이 놓여있었다.
그것은 서로가 숨기려는 것 혹은 말하지 않은 학생들의 비밀 같은 것이 적혀있는 것이다. 가족관계나 그 밖의 특이한 사항을.
태경은 자기도 모르게 교무수첩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장을 넘겼다. 무엇이 궁금한지도 모른채 막연한 느낌으로.
상윤의 사진이 나타났다.
교복을 입고 단정한 얼굴의 사진이었다. 어딘지 차갑고 이지적인 마치 모범생의 표본 같은 얼굴이었다.
"......?"
가족사항 : 부모X, 형제X, 자취, 생활비 아르바이트로 충당,
장래 희망 : 외교관
기타 : 성적 양호, 내성적, 잦은 전학, 관심을 요함.
교무수첩을 보며 태경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
담임이 뒤에 서있었다. 태경은 살짝 수첩을 덮으며 가능한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험 노트 걷어 왔는데요."
"거기 놔두고, 가서 김상윤 지도실로 오라고 해"
"지도실에는 왜......"
담임은 안경너머 차가운 눈으로 태경을 노려보았다. 태경은 조금전 자신이 수첩을 훔쳐본 사실이 생각나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 * *
낡은 회색벽. 검붉은 색의 벨벳커튼. 지도실은 위압감을 줄 정도로 음침했다.
이런 곳에서 지도를 한다면 어떠한 지도도 먹힐 것 같았다. 사람에게 폭력만큼 지도효과가 있는 것은 없을테니.
상윤은 길다란 의자 앞에 앉아 창 밖을 응시했다. 검붉은 색 벨벳커튼 뒤로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에서 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드르르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선생이 들어왔다. 그가 이곳에 부른 이유는 뻔했다. 부모도 형제도 없으니 문제아 학생이 될 소지가 많아서 여러 가지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가끔 벌어지는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상윤은 선생과 눈이 마주치자 인사를 했다.
"앉아라."
이렇게 말한 선생은 상윤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옆구리에 끼었던 몇 가지 서류들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본격적인 선생의 얘기가 시작됐다. 사소한 몇 가지에 대해 질문을 하고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걱정하는 등 이제껏 많이 들어온 얘기였다.
"아르바이트하면서 이 정도 성적을 유지해오다니 대단하구나. 그래, 아르바이트는 힘들지 않나?"
"네."
선생의 자세가 가까워졌다.
"무슨 아르바이트지?"
"서비스업이요."
서비스업이라? 하긴 상윤이 하는 것은 철저하게 봉사하는 것을 모토로 하고 있으니 서비스업 중에서 단연 최고의 서비스업이었다.
"그래?"
선생의 손은 어느새 상윤의 귓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힘들면 선생님한테 도움을 청해라. 나도 아직 딸린 식구가 없으니 힘닿는데 까지 널 도와줄 수 있을거다."
상윤의 귓가에 선생의 후끈거리는 입김이 들어왔다. 상윤은 옆쪽으로 약간 피해 앉았다.
"......마세요. 선생님"
그러나 선생의 몸은 상윤 쪽으로 기울어졌다. 셔츠를 안으로 차가운 손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마세요. 선생님"
"녀석......, 나한테까지 뺄 필요 없어. 네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전에 학교 담임한테 다 들었다."
벌컥!
상윤은 선생을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바람에 선생의 몸이 의자 위에 쓰러졌다. 조금전까지 유순하기만 하던 상윤의 눈은 차갑게 웃고있었다.
"그렇다면 전에 추근대던 녀석은 갈비뼈가 부려졌다는 얘기는 못들으신 모양이군요. 제게 뭘 바라는거죠?"
선생은 다소 쑥스러운 듯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정색 할 필요없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녀석, 발끈하긴"
그는 상윤의 팔을 잡아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다리 안쪽을 쓰다듬었다.
"손 치워!"
상윤은 다리 사이에 있는 선생의 손을 노려보며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짝! 선생은 발끈하며 그의 뺨을 때렸다.
"이 자식이 지금 어디다 눈을 치켜뜨는 거야!"
그는 자신의 행위보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상윤을 더욱 비도덕하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손 대지 말라고 했잖아!"
상윤의 주먹이 선생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그의 팔을 붙잡는 통에 더 이상 앞으로 뻗을 수 없었다.
"너 미쳤어!"
태경이 뒤에서 그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다. 상윤은 발작적으로 태경의 팔도 거세게 뿌리쳤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태경의 몸이 중심을 잃고 벽에 부딪혔다.
"내 몸에 손대지마!"
상윤은 선생과 태경을 돌아보며 분노한 듯 소리쳤다.
"이 녀석이!"
"상윤아!"
그의 손에는 어느새 선생이 들고 들어온 만년필이 쥐어져 있었다. 만년필의 날카로운 끝은 선생에게 향해 있었다. 그것은 마치 흉기처럼 번쩍였다.
상윤은 학교에서만는 그냥 보통의 남학생이고 싶었다. 진학을 걱정하고 보다나은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이 알려지면 계속 새 학교를 찾아 전학을 해왔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며 묻어두고 싶은 일들을 자꾸 들춰내는 사람들에게 분노가 생겼다.
아니, 필사적으로 평범한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 마저 경계가 허물어지면 그의 모든 미래는 산산히 사라지고 말 것이기에...
그러면 부모에게 버림받고 양부에게 학대받던 더럽혀진 13살의 그때에서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다.
평범한 반쪽을 지키는 것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지나던 학생과 선생들이 복도 창문 사이로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다. 태경은 달려가 창문에 달려있는 커튼을 쳤다. 그리고 상윤을 향해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알았어. 미안해...... 이제 그거 내려놔 상윤아"
상윤은 여전히 선생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태경이 대신 말했다.
"지나가다 봤어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선생님께서 사과하세요."
선생은 태경의 말에 움찔 놀랐다. 그는 학교 재단 이사장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네가 귀여워서...... 어쨌든 오해했다면 사과한다."
오해? 태경은 그 말에 화가 났지만 어쨌든 이 정도로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 상윤아 들었지? 이제 그만 내려놔"
그러나 상윤은 여전히 노한 얼굴로 선생을 노려보았다.
"내가 오해한 건가요?"
"그...... 그래 미안하다."
선생은 마지못해 그렇게 대답했다. 선생의 가식적인 사과를 받은 후에야 상윤은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태경은 상윤과 함께 지도실을 나왔다.
상윤의 몸은 아직까지 가늘게 떨고 있었다. 태경에겐 그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그래서 상윤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려고 무심코 손을 올리다가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예전에 태경과 같이 체온이 높은 사람이 만지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 같은 날은 그랬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태경은 그저 안타깝게 창백한 상윤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
"야, 김상윤 너!"
상윤이 책을 보고 있을 때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쳤다. 돌아보니 태경이 책 모서리로 그를 톡톡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 이후 태경은 줄곧 그를 부를 때면 이런 방법을 사용하곤 하는 것이다. 어딘지 고의적이고 장난기가 섞인 그런 행동이었지만 귀엽기도 해서 상윤은 피식 웃었다.
"왜 불러?"
"도대체 비결이 뭐야?"
잠시후 태경의 뒤로 혁수와 몇몇 친구들이 둘러서며 음흉한 웃음을 웃었다. 혁수가 상윤의 머리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
"네 녀석이 우리반 톱을 했단 말이다."
상윤도 약간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태경은 혁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 시늉을 했다.
"히히잉~ 저 녀석 때문에 나는 2등으로 밀려났어."
그러다가 문득 상윤을 섬뜩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김상윤, 1등과 2등은 영원한 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후후후......, 이젠 네가 죽어줘야겠어."
태경이 상윤의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다가가자 옆에 서있던 친구들이 그를 구타하기 시작했다.
"니가 죽어라, 죽어! 졸라 재수없는 놈."
"만년 30등 밖인 우리들 앞에서 뭐가 어쩌고 저째?"
"너 같은 놈 30명만 죽이면 우리도 일등 할 수 있어!"
"캑캑......, 살려줘 잘못했어!"
태경은 친구들 앞에 두 손을 모으며 용서를 빌었다. 상윤은 무리 속에 섞여 웃고 있었다.
불안할 정도로 평화스러운 날들이었다.
그 사건 이후 이 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상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클럽 일도 그만두었고, 영호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대신 그에겐 태경을 비롯한 점심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리고 남는 시간은 참고서를 뒤적이거나 도서실에 다녔다.
작은 사건이라면 담임선생이 대학원을 간다는 명목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것 정도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경에게 들켰으니 더 이상 있다가는 학교 안에 진상이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판단 한 모양이었다.
상윤은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오늘은 내가 쏠게."
그러자 태경을 구타하고 있던 녀석들의 눈이 일시에 반짝였다. 그리고 동시에 외쳤다.
"우와, 빨러(=마시러) 가는 거야?"
상윤은 태경과 그의 친구들과 함께 지하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일행들 친구가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이었다.
영호와 헤어진지 보름. 원래대로라면 오늘로서 그와의 계약이 끝났을 것이다.
영호,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를 생각하자 상윤은 일말의 연민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딘가 불안정하고 잃는 것과 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다른 무언가가 결핍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지금쯤 그는 또 다른 누군가를 지배하고 군림하고 있을테니.
카페 안은 두어 개의 테이블에 손님이 앉아있을 뿐 한가했다. 녀석들의 친구라는 아르바이트생이 앞치마를 두르고 나왔다.
"오늘도 외상이냐?"
"야, 오늘은 얘가 물주니까 걱정말고 내와."
녀석들은 오랜만에 확실한 물주가 생기자 어깨에 힘을 주고 주문을 했다. 잠시후 주문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술과 안주가 날라져왔다. 아르바이트생 친구를 두면 이런 점이 좋았다.
곧이어 녀석들의 술판이 벌어졌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녀석들은 상윤과 대작을 한다며 한 명씩 돌아가며 술 마시기 내기를 했다. 세 녀석이 차례로 지고 나자 이번엔 혁수가 나섰다.
"이번에 내 잔 받아."
혁수는 상윤의 빈 잔을 채웠다. 상윤의 얼굴은 이미 붉게 홍조를 띄우고 있어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어 보였다.
"그만해. 죽이려고 작정했냐?"
태경이 말리자 혁수는 태경의 손을 뿌리치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사내 자식이 이 정도 먹고 죽으면 더 살아서 뭐하냐?"
"많이 마셨잖아."
혁수는 촛점이 풀려가는 눈으로 상윤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흥, 그런데 너 정말 사내자식 맞냐? 술에 취해서 보니까 엄청 예쁘네."
"왜 아닌 것 같냐?"
상윤도 지지 않고 히죽 웃어주었다. 그러자 태경이 다시 뛰어들어 중재에 나섰다.
"야 쌈나겠다 그만해"
"한태경 넌 상관말고 비켜봐!"
"그래 태경아. 이건 내 게임이야."
"오, 제법인데."
혁수가 씨익 웃자 주위에 있던 녀석들도 와아~하고 소리를 쳤다. 가게 손님들이 모두 나가자 아르바이트를 하던 녀석까지 합세해서 놀고 있는 중이었다.
혁수와 상윤은 머그컵에 담긴 소주를 원샷 했다. 상윤이 잔을 내려놓는 속도가 좀 더 빨랐다.
"이번에도 상윤이가 이겼어. 이제 됐지?"
태경이 나서서 심판하자 혁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한 사람 더 남았어."
"누구 말야?"
"너!"
모두들 약간 맛이 간 눈으로 태경을 바라보았다.
"내가 일부러 지면 어쩔껀데?"
"그러니까 벌칙이 필요한 거지."
혁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벌칙을 뭘로 정할까?"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흔들며 장난스럽게 외쳤다.
"스트립쇼!"
또다시 주위에 있던 녀석들이 와아~ 하고 소리쳤다. 정말 대단한 군중 심리였다.
그러자 상윤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앉아있는 녀석들의 빈 잔에 술을 부었다.
"그럼 너희들부터 이 잔 다 비워. 시합을 구경하려면 입장료를 내야지"
우~, 녀석들은 야유를 부리면서도 잔을 집어들고 비웠다. 혁수는 조금전 보다 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상윤과 태경의 잔에 술을 부었다.
"좋아...... 시...... 끄윽!"
혁수의 딱꾹질을 시작으로 상윤과 태경은 잔을 들었다. 잠시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잔을 내려놓았다.
"야, 심판 누가 이겼어?"
태경이 손등으로 입에 묻은 술을 닦아내며 돌아보자 모두들 전멸이었다. 심지어 혁수까지 의자에 엎드려 쓰러져 있었다.
"자식들 모두 맛이 갔구만"
태경이 상윤을 돌아보며 말하자 상윤도 다리가 풀어지며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태경은 달려가 상윤을 잡아주었다. 아니 잡아주려다 또다시 무슨 일이 생길까봐 옆에 있던 의자를 히프 아래에 가져다 대주었다.
"야, 정신차려!"
상윤은 의자에 주저앉으며 금방이라도 오버이트를 할 듯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우...... 욱 토 할꺼 같애"
"야아~ 여기선 곤란해"
태경은 울쌍이 되었다.
"조금만 참아. 팔 좀 만질게 괜찮지?"
그는 상윤의 겨드랑이를 부축해서 날다싶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변기뚜껑을 열고 얼굴을 대주었다. 세입! 상윤은 변기에 얼굴을 쳐박자마자 오버이트를 해대기 시작했다.
"우우욱!"
'휴우 정말 아슬아슬했어.'
태경은 한숨을 내쉬며 진땀을 닦았다. 그리고 상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우....... 욱......"
"너 보기보다 괴물이다. 그 녀석들을 다 머그컵으로 상대하다니."
"......."
"......?"
더 이상 반응이 없었다. 태경이 내려다보니 상윤은 변기에 얼굴을 파묻고 잠들어 있었다.
"여기서 자면 어떡해? 일어나?"
태경은 잠들어있는 상윤을 흔들었으나 이미 깊이 잠들어 버린 상태였다.
"쳇 어쩔 수 없군."
태경은 상윤을 들춰 업고 화장실을 나와 비어있는 쇼파에 눕혔다. 그리고 수건을 적셔서 입가와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때까지도 상윤은 잠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자식 순전히 깡으로 버텼구만"
태경은 피식 웃으며 상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감은 눈 아래로 눈썹 그늘이 졌다. 매끄럽고 아름다운 얼굴 곡선. 그리고 흰 얼굴에 꼭 다문 입술은 화장을 한 듯 붉었다. 마치 그려놓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태경은 상윤의 얼굴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눈썹을 만지고 뺨을 만져보고 그리고 그의 붉은 입술을 만졌다.
촉촉하고 보드라웠다. 따뜻한 숨결이 그의 손을 간지럽혔다.
태경은 상윤의 얼굴에 자기도 모르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눈을 감자 상윤의 숨결이 자신의 입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태경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반응을 나타내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
태경은 흠칫 놀라 상윤에게서 몸을 떼었다. 다행히 상윤은 여전히 태평스럽고 천사같은 얼굴로 잠들어있었다.
만일 상윤이 깨었더라면 자기를 선생보다 더한 놈으로 보았을 것이었다. 아니 이미 자신은 그것보다 더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술 취한 상대를 범하는 비열한 짓을 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남자를.
태경은 술기운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그리고 그 아래 머리를 쳐밖았다. 수돗물이 시리도록 차갑게 느껴졌다.
"미쳤다. 미쳤어 한태경!"
태경이 젖은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가게로 들어오자 상윤은 비틀거리며 쇼파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어지러운지 또 다시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그는 누워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야겠어."
상윤이 다시 한번 일어나려 시도를 하고 겨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그 모습이 불안해서 태경은 붙잡아주려고 달려가다가 제자리에서 멈춰섰다. 조금전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너 머리는 왜 그래?"
상윤의 시선은 태경의 젖은 머리 위에 가 있었다.
"어, 이거? 그냥...... 정신 좀 들라고."
태경은 어색함을 감추기위해 웃었다.
"괜찮은 걸."
"뭐가?"
태경이 상윤을 쳐다보자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TOILET이라는 영어가 씌여있는 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도 정신 좀 차려야겠어"
잠시후 쏴아하는 물소리가 들리더니 똑같이 젖은 머리의 상윤이 나왔다.
"어, 너머리......"
상윤의 젖은 머리를 본 태경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상윤의 머리가 들어갈 때에 비해서 길고 흐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길게 자란 갈색 앞머리는 젖어서 턱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한 손에는 가발이 들려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젖은 그의 입술은 더욱 붉게 보였다. 아찔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미치겠군.'
태경은 차라리 그의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버렸다.
* * *
"명동에서 봤을 때 이런 모습이었겠지?"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린다 너."
"너도 마찬가지일텐데."
"흥, 나는 워낙 튼튼해서 겨울에 발가벗고 돌아다녀도 끄덕없어."
태경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체격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보디빌더처럼 양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음...... 그럼, 누가 먼저 감기에 걸리는지 내기해볼까?"
상윤은 약간 심술궂은 얼굴로 의자에 앉아있는 태경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러나 다리가 꼬여 역시 비틀거리고 있었다.
상윤은 태경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손은 태경이 앉아있는 의자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상윤의 입술이...... 또다시 닿을 듯 가까워졌다.
태경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뒤로 뺐다. 혹시라도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까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상윤은 고개를 들어 한 뼘 정도 위에 있는 태경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상윤의 눈을 마주 한 태경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상윤의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가며 씨익 웃고 있었다.
"야, 왜......"
불안한 마음에 태경이 말을 꺼내려할 때였다. 상윤은 갑자기 물이 떨어지고 있는 머리를 태경에게 들이밀고 흔들어댔다. 마치 강아지가 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듯이.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으악, 차가워! 너 임마! 에잇, 좋아 그러면......"
태경도 질세라 상윤에게 머리를 들이밀고 물기를 털어냈다. 여기저기 물이 튀고 급기야 잠들어 있던 녀석들에게까지 튀었는지 그들은 몸을 움찔했다. 그러면서도 꿋꿋하게 잠을 잤다.
상윤은 드디어 더 이상 중심을 잡지 못하고 태경의 종아리를 붙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알콜의 힘이란 정말 대단한데?"
태경은 자기의 무릎사이에 머리를 파묻은 상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젖은 목덜미가 드러나자 만지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안돼 한태경'
태경은 의자 손잡이를 힘껏 쥐었다.
상윤의 입김이 바지 안으로 후끈하게 스며들어왔다. 조금 전 그의 입술에 닿았던 촉감이 다시 살아나면서 온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여자아이들 상대할 때보다 더욱 자극적인 느낌. 이 아이는 너무 위험하다.
"좀 일으켜줄래?"
"응?"
태경은 상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기대고 있는 상윤을 내려다보았다.
"다리에 힘이 없어."
상윤은 태경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길고 섬세한 손었다. 태경은 그 손목을 잡고 상윤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상윤의 얼굴이 또다시 가까워졌다. 태경은 또다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기위해 생각나는데로 화제를 둘러댔다.
"그, 그때 다친 팔은 흉터 안 생겼어?"
"그때?"
"저번에 우석이 패거리들."
"아아~"
상윤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도 물어본다. 응, 흉터는 없어"
상윤은 소매를 걷어올린 팔목을 태경의 눈앞에 갖다댔다.
"아...... 알았으니까 저리치워, 집에 갈 수 있겠어?"
"당근이지."
상윤은 씨익 웃어 보이고는 비틀거리며 카페 문을 열었다. 태경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 놓인 상윤과 자신의 가방을 보았다. 그는 가방을 양쪽 어깨에 메고 뛰어나갔다.
계단 앞에 상윤이 서있었다. 그는 벽에 기대 힘겨운 눈으로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쳐다보고 있었다.
"앞에 계단이 너무 많아. 하지만 혼자 올라가야겠지? 알고 있는데도 가끔 잊고 싶을 때가 있어."
"부축해 줄께."
태경이 상윤의 팔을 잡으려했다. 그러나 상윤은 고개를 내저으며 태경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손으로 막았다.
"싫어."
"왜?"
한번 네게 의지하게되면 매일매일 너를 기다리게 될지도 몰라.
네 손을 잡는 순간 나는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게 될꺼야.
"어차피 혼자 가야 할 길이니까"
그리고 상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윤의 얼굴을 바라보던 태경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가기 힘든 길이라면 조금쯤은 옆 사람에게 기대는 것도 괜찮을거야. 그게 영리한 방법이지. 사람이란 도움을 청할 줄 아는 놈들에게 더 정이 가는 법이거든."
태경은 상윤이 내뻗은 손을 다정하게 잡았다.
"우린 친구가 맞지? 그렇다면 마음을 열어줘. 그래야 어려운 일이 있다면 도와줄 수 있을거 아니야? 그리고 내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는 도움을 청하기도 훨씬 쉽고."
"내 마음을 열면 도와 줄 수 있다고?"
"그래."
상윤은 차갑게 웃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말한 녀석들은 꽤 많았지."
"난 빈말을 하는 게 아니야! 정말 너에 대해 알고 싶어. 껍데기뿐인 친구는 되고 싶지 않다고."
"내가 이상한 녀석이라도? 가령 남들이 가까이 오기 꺼려하는 몹쓸 병에 걸렸더라도?"
"물론이야."
"아니면, 남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는 그런 이상한 녀석이라도? ......그래도 넌 내 친구로 남아줄까?"
"물론이야. 친구...... 니까"
상윤은 몸을 뒤로 빼며 쓰러질 듯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후후...... 지킬 수 없는 말 따윈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지킬 수 없는 말을 하진 않아! 너라면...... 너라면......"
태경은 자신의 속마음을 모두 열어서 보여주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런 감정은 친구라는 언어 속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오히려 친구라는 단어가 그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장벽이 되고 있을지도. 그러나 상윤에게 조금 더 가까와지기 위해서는 친구라는 단어밖에 구실이 없었다.
태경은 상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얼굴에 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난 네게 특별한 친구가 되고 싶은거야."
상윤은 고개를 들어 말없이 태경을 바라보았다.
"좋아, 그러면 네 말에 끝까지 책임지기 바래. 만일 나에게 상처를 준다면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을거야."
"몰론 그런 일은 없을거다."
태경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입고있던 후드 점퍼를 벗어 상윤에게 던져주었다.
"받아! 이게 그 징표다. 아무래도 네가 감기로 학교에 못나오면 죄책감 느낄 것 같거든."
상윤은 태경의 점퍼를 입었다. 시큼한 땀내와 함께 그의 체취가 묻어 나왔다.
상윤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좋아, 그 징표 접수하지"
"하하...... 고맙다"
상윤은 태경의 팔에 의지해 지상의 계단을 올라왔다. 태경의 팔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뜻하고 든든했다.
썩을 대로 썩은 반쪽 짜리의 나를 미련없이 잘라버린다. 그리고 반쪽만 남은 정상적인 나로 돌아간다. 조심만 한다면 이 나이의 아주 보통의 고등학생과 다르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미래가 있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걸 일탈로 생각하는 그런 삶...
정말 네가 나를 버리지 않기를 바래. 만일 그 따뜻한 눈으로 나를 격멸하듯 쳐다본다면 나는 나머지 반쪽마저 잃어버리게 될거야.
* * *
태경은 술에 취한 상윤이 못미더운지 결국 그의 집 앞까지 따라왔다.
"너 집에 가는 차 있어?"
"이미, 끊긴지 오래지. 하지만 뛰어가면 30분 정도 거리니까 괜찮아"
"그래......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쳇, 겨우 그것 뿐이야?"
"그럼 뭐......?"
"보통 친구라면 늦었으니까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던가 뭐 그러는 게 정상 아닌가?"
"자고 갈래?"
"됐어, 옆구리 찔러 절 받기는."
태경은 아까의 일이 떠올라 상윤과 함께 자는 것은 사양하기로 했다. 그렇게 된다면 겨우 만들어놓은 신뢰 관계가 모두 무너지게 될지도 모르니.
"여기가 너희 집?"
"응, 여기 2층"
태경은 제법 넓은 주택가 끝에 지어진 4층짜리 연립주택을 바라보았다. 교무수첩에 자취한다고 적혀있을 때는 무지 궁색한 자취방을 떠올렸는데 생각보다 형편이 좋은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그래, 그럼 모레, 학교에서 보자"
상윤은 태경이 골목을 돌아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서있었다. 그가 벗어준 후드 점퍼는 무척이나 따뜻했다. 점퍼로 한층 몸을 감싸고 잠시동안 그의 체취를 음미해보았다. 아직도 태경의 훈훈한 냄새가 베어있었다. 가슴속까지 따듯해졌다.
대문 안으로 발을 디딪려던 상윤은 문득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옆의 그림자 속에 검은색 벤츠가 주차해 있었다.
"!"
언제부터 여기 있었을까? 차 문이 열렸다. 영호가 그림자 속에서 걸어나왔다.
"저 자식인가? 마치 여자 친구를 바래다 주고 가는 얼치기 남학생 같은 얼굴을 하고 있군"
"당신과는 끝났다고 말했을 텐데요."
"아니, 원래는 오늘까지였지."
"돌아가세요."
상윤이 돌아서자 영호는 그의 팔을 거칠게 잡아 돌려세웠다.
"네가 언제부터 나에게 명령했지?"
상윤은 영호의 손을 뿌리쳤다.
"거래가 끝나는 순간부터 나는 당신과 대등한 관계입니다!"
짝! 영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상윤을 뺨을 때렸다. 그러나 상윤은 살기어린 눈으로 영호를 노려보았다.
"여기까지 찾아온 대가로 참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상윤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의 태도가 너무나 싸늘하고 정중해서 영호는 더 이상 제스츄어를 취하지 못하고 몸을 떨고만 서있었다.
"이런...... 건방진......"
영호의 두 주먹이 떨리는 것과 상관없이 상윤은 연립의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 후 적막한 밤 공기를 가르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거절당하는 것은 그의 성공적인 인생에서 기필코 처음이었다. 분노로 온몸이 떨려왔지만 어쩐지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왜지? 이런 수치감을 느끼며 왜 이곳에 서있는 거냐?'
영호는 계속해서 의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상윤의 창문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혹시라도 상윤이 창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불러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이런 말도 안돼는 일이......'
영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부인했다. 그러나 조금전 싸늘했던 상윤의 모습이 떠오르자 왠지 가슴이 떨려왔다. 이제까지 그에게 철저하게 봉사하던 그녀석이 아니었다.
차갑고도 아름다운 지배자. 그 모습이 더 더욱 상윤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상윤은 어느새 그의 가슴과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동안 이렇게 굉장한 녀석과 함께 있다는 것을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 너를 다시 안고 싶다. 으스러질정도 너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애무를 하고...... 신음하는 네 모습을 보고, 쾌락과 환희로 내게 매달리는 너를 보고...... 그럴수만 있다면.
그것을 상상하는 동안에 영호의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반드시 너를 내 손에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