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3. 기억
백화점 세일로 명동거리는 혼잡했다.
태경은 어제 상윤이 약속을 취소하는 바람에 한사코 옷을 사주겠다는 누나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마 누나가 알았다면 금방 "그럼 관둬"하고 말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는 세일 때마다 들끓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는 누나와 쇼핑할 기회도 별로 없겠다 싶어 나온 것이다.
차가 막힐까봐 너무 일찍 나왔는지 아직까지 약속 시간이 되기에는 십여분이 남아있었다. 태경은 어디 있을 곳도 마땅하지 않아 누나의 회사 로비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곳은 복잡한 명동거리에 있다는 것을 잊을 만큼 한적하고 여유로웠다. 그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어하는 것은 빌딩의 한 가운데에 네모꼴 형태로 지어진 화원이었다.
네 벽이 모두 유리로 된 그곳에는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고 주위는 사오 층까지 쭉쭉 뻗은 워싱톤 야자수와 열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곳을 보고 있으면 마치 이국에 온 느낌이었다.
태경은 화원 주변에 있는 의자에 앉아 누나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누나는 밀린 일이 있어서 퇴근시간보다 이십여분정도 늦을 거라고 대답했다.
"응, 천천히 끝내고 나와. 그래 알았어."
전화를 끊던 태경은 언뜻 아는 얼굴이 본 것 같았다.
'어, 저건 상윤이잖아?'
그는 유리창을 통해 빌딩 앞에 정차해 있는 택시 안에서 상윤을 본 것이었다.
그러나 진한 다크블루의 슈트를 입고 갈색으로 염색한 긴 앞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그 모습은 교복을 입은 상윤과는 너무나 달랐다. 세련되고 말쑥한 모델 같았다.
태경은 잘못 본 것이 아닐까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그렇지만 그는 계속해서 택시 안에 앉아있는 상윤을 주시했다.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어른스러운 분위기는 상윤이 아닌 것 같았지만 섬세하고 날렵한 얼굴 선은 역시 상윤이었다.
띵!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30대 중반정도의 스타일리스트가 나왔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러 회전문을 열고 상윤이 타고 있는 택시로 갔다. 두 사람은 잠시 눈짓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그들을 바라보던 태경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상윤과 그 스타일리스트는 어쩌면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렇지 않으면 각자 다른 차에 타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잠시후 스타일리스트가 주차해 놓은 차를 몰고 정문을 나가자 상윤이 타고 있던 택시도 따라가듯 정문을 나갔다.
그동안 태경은 상윤을 불러 볼까도 생각했지만 관두기로 했다. 이런 장소에서 저렇게까지 멋지게 차리고 나온 녀석과 아는 척을 한다는 것이 어딘지 멋적었고 왠지 부르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태경은 유리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낡은 청바지에 후드티셔츠 위에 아무렇게나 껴입은 패딩 조끼와 L.A 다저스의 야구모자를 쓴 모습이 어딘지 어린애 같이 느껴졌다. 그는 모자를 똑바로 쓰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체, 이왕 시내에 나오는 김에 옷 좀 신경 쓸 걸 그랬나?'
상윤이 사라지고 5분 정도가 지나서 태경의 누나 경은이 나왔다.
"미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오래 기다렸지?"
"어쭈, 시집갈 때 되니까 철드나보네. 누나가 미안하다는 말도 다하고"
"넌 정말 안 때릴래야 안 때릴 수가 없다니까"
경은은 늘 하던데로 태경의 머리를 쥐어 밖은 후 동생의 팔짱을 끼었다. 태경의 말대로 때리고 쓰다듬는 신체접촉이 많은 남매였다.
"그런데 원래는 그 사람 소개 시켜 주려고 부른 거였는데."
명동 쇼핑가를 걸으며 경은이 말했다.
"누구? 아, 매형 될 아저씨?"
"매형이면 매형이지 아저씨는 또 뭐니?"
"누나랑 일곱 살이나 차이 난다며. 그러니까 아저씨지. 그럼 나랑은 도대체 몇 살 차이야? 아저씨가 아니라 완전 할아버지뻘이네."
콩! 또 다시 경은의 주먹이 태경의 머리를 쥐어 밖았다.
"실제로 보면 아저씨 안 같애. 참 너 로비에 계속 있었으면 그 사람 나가는 거 봤겠다."
"누나도...... 얼굴도 모르는데 내가 본다고 알아?"
"맞아, 그렇지. 빨리 보여주고 싶었는데. 약속 해놓구서 바쁜 일 생겼다고 펑크 낼게 뭐야. 얼마나 바쁜지 출장에서 오늘 돌아오고서 또 약속 있다고 나가지 뭐니."
태경은 경은의 말에 문득 바쁜 걸음으로 뛰어나가던 스타일리스트를 떠올렸다.
* * *
상윤은 택시에서 내려 영호가 먼저 예약해둔 방으로 들어갔다.
영호는 어느새 쇼파 위에 기대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술잔이 두개 놓여있었다.
"앉아"
명령이 떨어지자 상윤은 정중한 자세로 영호의 앞에 마주 앉았다. 영호는 술이 담긴 잔을 상윤의 앞쪽으로 놓았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아둔 자주빛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은은한 백색의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영호는 반지를 꺼내 상윤의 앞에 놓인 술잔에 집어넣었다. 퐁...... 반지는 작은 소리를 내며 밑으로 가라앉았다.
"네 꺼니까 가져가라"
"이건......?"
상윤은 의아한 얼굴로 영호를 바라보았다.
"패션쇼에 사용했던 거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거니 부담 갖지마."
상윤은 술 잔 속에 들어있는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가운 백금과 다이아몬드가 네게 가장 잘 어울려."
영호는 자신의 잔을 마셨다. 상윤도 술잔을 들었다. 순간 영호의 눈에 가는 미소가 스쳤다.
"푸읍!"
술을 한모금 마시던 상윤은 다시 내뱉았다. 그리고 영호를 바라본다. 그의 눈에는 지금까지 순종적이던 것과 달리 노여움이 서려있었다.
"약을 타셨군요."
"이런, 이렇게 쉽게 알면 곤란한데"
영호는 테이블을 타넘어 상윤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를 걷어 올렸다.
"꿇어라"
그러나 상윤은 평소처럼 영호의 발아래 무릎을 꿇지 않고 질문을 했다.
"왜 약을 타신 겁니까? 뭘 원하시는 거죠?"
"너를 원해"
"저는 선생님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상윤의 눈은 공손한 표정이었으나 감정이 전혀 없었다. 영호의 얼굴은 상윤의 얼굴에 닿을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 오는 동안 내내 뭘 생각한 줄 알아?"
"모르겠습니다."
"네 녀석을 흥분시키는 생각을 했지."
"저는 항상 선생님과의 섹스에 흥분하고 있습니다."
"닥쳐! 언제나 너는 거짓으로 소리를 내고 있었어. 그리고 속으론 나를 비웃었겠지. 이 차가운 눈으로."
영호는 상윤의 눈을 찌를 듯이 가리켰다.
"아닙니다. 제가 감히 선생님을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입 다물어! 이제는 매 순간마다 네가 나를 떠올리며 떨어질 수 없게 만들어 주겠어. 너를 만신창이가 되도록 망가뜨려 놓겠다. 그 다음에는......"
어느 순간부턴가 영호는 자신이 상윤에게 매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져야 겠다고 생각하며 상윤을 떠올리는 순간 또다시 그가 안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월함으로 가득했던 그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우월감을 되찾기 위해선 반대의 경우. 상윤이 자신을 필요로 하며 매달릴 때 잔인하게 차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계산 속 일면엔 자신도 모르는 다른 감정이 있다는 것은 간과하고 있었다.
바로 질투라는 감정.
영호는 상윤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언제나 그렇듯 촉촉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전달 되어왔다.
그는 두 팔로 상윤의 팔을 들어올려 쇼파 등받이에 붙였다. 그리고 상윤의 양손을 한 손에 모아 쥐었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목에 걸려있는 넥타이를 풀렀다.
영호와 키스를 하던 상윤은 눈을 떴다. 그러자 키스를 하는 내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영호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흥분을 제어할 차갑고 냉철한 이성이 없었다. 광기에 젖어있는 눈.
영호는 손에 들려있는 넥타이로 상윤의 손목을 묶으려 하고 있었다.
"!"
상윤은 영호의 가슴을 세차게 밀쳐냈다. 그러자 영호는 당혹스런 눈으로 상윤을 바라보았다.
상윤이 의지를 가지고 그를 거부하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 그를 거부한 것은 상윤이 처음이라고 해야 정확했다.
"네가 감히......"
"분명히 밝혀두지만 저와 선생님은 고객관계로서...... 저는 고객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선생님께 봉사하고 있을 뿐 비정상적인 행위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가 때리면 이제까지 바닥으로 쓰러지던 상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런 건방진!"
화가 난 영호는 상윤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나 상윤은 평소처럼 쓰러지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쇼파 위에 꼿꼿이 앉은 채 또렷한 눈으로 영호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것이 영호를 더욱 자극시켰다.
"비정상적인 행위는 하지 않겠다고?"
영호는 킥킥거리며 낮게 웃었다.
"날 속일 생각은 하지마. 난 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거든."
영호의 말을 듣는 동안 상윤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아까 삼킨 술에 들어있던 약이 반응을 하는 것 같았다.
상윤이 양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자 영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납게 덤벼들었다.
쿠당탕탕!
상윤은 테이블을 엎어뜨리며 영호에게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영호에게 다리를 붙잡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얌전히 있어!"
영호는 상윤의 겉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상윤은 영호의 가슴을 밀며 완강하게 저항을 했다. 상윤과 밀고 밀치며 몸싸움을 하던 영호는 문득 바닥에 떨어져 펼쳐진 다이어리의 한 면을 보았다. 조금전 테이블이 넘어지면서 그 위에 올려놨던 것이 떨어진 것이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의 사진. 태경과 상윤.
"이 녀석인가 너의 새로운 파트너가?"
영호는 상윤의 코앞에 태경과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였다.
"그는 아닙니다."
영호는 상윤의 앞에서 거칠게 다이어리를 넘겨 보였다. 팔락거리며 다이어리 속지들이 찢어지며 떨어져 나왔다.
"유일하게 이 사진만 붙어있는데도?"
"친구일 뿐입니다."
"흥. 그 녀석과는 온갖 음란한 짓을 다 하겠지? 넌 원래 변태적 섹스에 더 능숙 할테니까. 아까도 말했듯 난 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물론 토미 노먼 이라는 양키 새끼와의 일도!"
토미 노먼.
상윤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그 이름을 듣자 가슴 한 곳이 아려왔다.
"후후... 넌 원래 그런 녀석이었잖아. 상대가 원하기만 하면 무슨 짓이든 하는. 처음부터 그렇게 길들여져 왔으니 별것도 아닐텐데."
영호는 상윤의 목을 천천히 쓰다듬더니 와이셔츠 솔기 안으로 드러난 상윤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말랐지만 단단하고 날렵한 근육이 붙은 몸이었다. 그리고 그 복판에 분홍빛으로 솟아오른 돌기를 손톱으로 건드렸다. 상윤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영호는 씨익 웃으며 상윤의 와이셔츠를 양옆으로 잡아챘다. 단추가 튿어지며 와이셔츠 양옆이 벌어졌다. 그리고 상윤의 팔을 위로 올렸다.
"저항을 못하는 것을 보니 슬슬 약기운이 나타나는 건가? 아니면 더이상 감출 것이 없으니 포기한 거냐?"
토미.......
상윤과 둘만 남게 되자 토미는 아버지처럼 보살펴 주었다. 그들이 살던 아파트가 유난히 추웠던 것은 토미가 도박으로 월급을 날려버리고 관리비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상윤은 추운 아파트에서 토미를 기다렸다. 그리고 토미가 돌아오면 그에게 뛰어갔다.
토미는 상윤의 몸을 번쩍 들어올리며 정말 광고에 나오는 아버지들처럼 그를 안아주었다. 상윤의 작은 몸은 그의 넓은 가슴에 파묻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상윤은 그래서 토미가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아파트 계단에 나와있었다. 술을 마시고 혹은 도박을 하느라 아주 늦게 들어오는 날 말고 토미는 한 달에 반정도는 제 시간에 맞춰 들어왔다.
그리고 늦게 들어오는 날은 그날대로 상윤을 위해 아이스크림이나 케익등을 들고 왔다. 그러면 상윤은 또 다시 토미에게 뛰어가 안겼다.
그런데 어느날인가 토미에게 안겨 자던 상윤은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술에 취한 토미가 상윤의 몸을 만지고 있었다. 놀라서 저항을 하려하자 그는 상윤을 침대 위에 엎어놓고 한 팔로 등을 내리눌렀다. 그리고 요동치는 손을 뒤로 붙잡고는 흥분한 몸을 상윤에게 가져다 대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으로 상윤은 악을 써댔다. 그러나 토미가 고개를 짓눌러버리자 이불에 묻혀 그의 비명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날 이후로 토미가 마시는 알콜의 양에 의해 행위의 강도는 점점 더 짙어갔다.
그러나 행위가 끝나면 토미는 따뜻한 이불처럼 상윤을 품어주었다. 그의 품안에서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깊은 잠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고통스러운 행위에 대한 일말의 보상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맨 정신이 된 토미는 상윤에게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덧붙여 사랑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상윤도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가족으로서도 연인으로서도.
상윤에겐 매일이 고통스러웠으나 토미를 위해서 참았다. 아니, 토미와 함께 있기 위해 참았다. 거부한다면 토미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버림받는 것은 세상 전부에게서 버림받는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상윤이 13살이 되던 어느 날 토미는 죽었다. 부대 내에서 오발 사고가 있었다고 하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살해당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토미와 살던 아파트는 도박장에서 진 빗으로 넘어가고 상윤은 집도 아무 것도 없이 혼자 남겨졌다. 상윤의 인내는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후, 상윤은 앞으로 버림받지 않기 위해 고통과 공포를 참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시는.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상윤의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토미......"
상윤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신음소리처럼 들렸다. 영호는 상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차갑기만 하던 상윤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다. 긴 눈썹 사이에 맺혀있는 눈물은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웠다.
영호는 자기도 모르게 상윤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을 만졌다. 그제서야 상윤은 정신을 차린 듯 영호를 바라보았다. 원래의 정중하고 차가운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상윤은 넥타이로 묶인 손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풀어주십시오"
"잊었나? 계약 기간동안 나는 너의 주인이라는 걸?"
영호는 상윤의 손을 잡으며 노려보았다. 상윤의 태도가 바뀐 것과 자신의 유희가 중단된 것에 대한 노여움을 담고 있었다.
"계약에는 원래 섹스를 한다는 항목은 없었습니다. 단지 선생님께 봉사한다고만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나에 대한 봉사라면?"
상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동안 안간힘을 써서 넥타이에 묶인 손목을 비틀어보았다. 상윤이 약에 취했다고 생각하고 느슨하게 묶어놓았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쉽게 빠져 나왔다.
"예전과 나의 취향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럼 이제 된건가?"
영호가 다그치며 다가들자 상윤은 그의 손을 뿌리치며 일어섰다.
"할 수 없습니다!"
"왜? 내가 양키가 아니라서?"
영호는 싸늘하게 웃으며 상윤을 따라 일어섰다.
"넌 거칠고 난폭한 양키정도가 아니면 만족을 못......"
퍽! 상윤의 주먹이 영호의 얼굴에 작렬했다. 이번엔 영호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느닷없는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상윤의 주먹은 생각보다 강했다.
영호는 이에 부딪쳐 피가 흐르는 입술을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이제까지는 나에게 당한 건 모두 연극이었군. 주먹이 상당히 센데."
그러자 상윤은 영호를 향해 언제나처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과한다고 끝날 것 같은가?"
상윤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계약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습니다. 이 순간부터 당신과 저는 아무런 의무도 권리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영호는 왠지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듯한 상실감을 느꼈다. 그로서는 이런 종류의 상실감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상실감인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이 분노가 치밀 뿐이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고 무사하진 못할텐데."
"먼저 받은 선금은 차후에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치료비로 쓰십시오."
상윤은 탁자 위에 지폐 몇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손목에 차고 있던 로렉스 시계도 풀러놓았다.
다소 위압적이고 명령조로 얘기를 끝낸 상윤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문밖을 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차가운 소리를 들으며 영호는 탁자 위에 놓인 지폐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큭...... 큭......"
그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치받쳐 올라왔다.
"큭큭...... 네 녀석이 날? 감히 나를? 크하하하......"
영호는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어쩌면 이것은 영호라는 사람에게는 가장 효과적인 각성제의 작용을 했는지도 몰랐다. 불길한 그의 웃음은 오래도록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