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TEP 1. 체온 (1/9)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몸 전체가 조금씩 아픈 것이 낳겠니? 

아니면 몸의 어느 한 부위가 못쓰게 될 정도로 아픈 것이 낳겠니? 

너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꺼야?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이유? 썩은 부위는 미련 없이 잘라버릴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나를 둘로 나눈다. 

하나는 썩을 대로 썩은 채로 또 하나는 온전하고 정상적인 상태로. 정상적인 나는 꿈을 꿀 수 있다. 장래에 무엇이 될 것인지. 아니,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노말한 상태로 타인에게 보여질 수 있도록.

STEP 1. 체온 

"이제 그만 가야겠다."

남자의 말이 떨어지자 상윤은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1시 25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온 몸이 욱신거려 그는 얼굴을 잠시 찡그렸다. 

그러나 남자가 샤워를 끝내기 전에 신속하게 움직여야 했다. 무거운 몸을 추스려서 옷을 주워 입고 머리를 단정히 한 후 샤워실 밖에서 타월을 들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그것이 고객에 대한 예의다.

샤워실 문이 열리고 남자가 물기 젖은 몸으로 나왔다. 상윤은 들고 있던 타월로 남자의 머리와 몸에서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아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옷을 하나하나 챙겨주었다. 

남자가 거울 앞에 서서 와이셔츠 단추를 채운다. 그동안 상윤은 의자 위에 걸쳐놓았던 양복 상의를 집어들고 남자의 뒤에 섰다. 그의 행동은 마치 남자의 노예라도 된 것처럼 고분고분하고 헌신적이다. 

남자는 오른팔부터 집어넣어 옷을 입는다. 진한 잿빛 바탕에 엷게 줄무늬가 들어간 알마니 양복이 남자의 몸에 맞춘 듯 달라붙었다. 남자는 삼십대 중반을 넘은 나이었으나 이렇게 양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서면 마치 모델처럼 젊고 근사한 모습이었다. 

남자도 그것을 아는지 거울 속에서 자기 뒤에 서있는 상윤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석달째 헬스를 하니까 제법 노력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 같지 않나?"

상윤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도 선생님은 언제나 최고입니다."

남자는 싱긋 웃으며 상윤을 보고 돌아섰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의 뒷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들어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뺨을 가볍게 두드린다. 남자의 얼굴이 닿을 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

남자의 손은 상윤의 뺨에서 목을 타고 내려와 목덜미 주위를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느낌의 가늘고 흰 목. 세게 움켜쥐면 마치 터질 것만 같다. 남자는 상윤의 목을 조를 듯이 움켜잡으려다 멈추었다. 이내 그는 상윤의 머리채를 쥐었던 손을 힘껏 잡아챈 후 상윤을 밀어 던졌다. 

상윤은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쿠웅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곧 자세를 바로잡아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남자는 자기 발아래 단정한 자세로 앉아있는 상윤을 보며 가늘게 웃었다. 

"네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계약 때문인가? 아니면 나에 대한 존경의 표시인가?"

"선생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흠......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왠지 싫지는 않군. 앞으로 너와의 계약기간을 더 연장해 볼까 고려중이야. 결혼 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말이지."

"결혼...... 하십니까?"

상윤은 놀란 듯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마치 연인을 빼앗길까봐 불안해하는 것처럼.

"왜? 나를 빼앗길까봐 불안한가?"

"......."

남자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지갑을 열어 몇 장의 지폐를 꺼냈다. 흰색의 수표들이 새처럼 허공을 팔락거리며 상윤에게 날아왔다. 

"차비다. 다시 연락하지."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윤은 자리에서 재빨리 일어나 남자를 앞질러 걸어갔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다. 그리고 문을 나서는 남자의 등뒤에 대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문을 닫고 돌아선 상윤은 바닥에 떨어진 지폐들을 보았다. 

그는 허리를 굽혀 지폐를 줍는다. 그의 입매가 한쪽으로 치켜 올라가며 웃고 있다. 

때론 간단한 거짓말과 연기를 할 줄 안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커다란 장점이 된다.

남자의 이름은 이영호. 분명 그 이름은 가짜일 것이다. 이쪽 계통에서 상윤이 들어본 이영호라는 이름만 해도 서너 명은 되는 것 같았으니. 

어쨌든 중요한 건 삼십대 중반으로 디자인 회사의 중역이라는 그가 현재 상윤의 고객이라는 점이다. 

이영호는 엘리트 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내다. 그리고 남을 무시하면서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부류였다. 

그런 고객을 상대하려면 철저하게 개처럼 봉사하는 것이 제격이다. 자존심? 이런 일을 하면서 그런 것은 버린지 오래다. 어차피 이것은 직업일 뿐이니까. 직업이란 궁극적으로 돈과 자존심을 교환하는 행위가 아닌가? 

상윤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있는 옷가지들을 걸치고 건물을 나섰다. 그의 뒤로 로얄호텔이라는 글자들이 화려한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밤이 다 가려면 너댓시간은 지나야 할 것이다. 

10월이 끝날 무렵. 한밤중의 날씨는 이미 겨울처럼 차가웠다. 상윤은 두 손이 갈 곳을 잃은 듯 흔들리는 것을 보자 얼굴을 찡그리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오른 손에 무언가 만져지는 것이 있었다. 슬쩍 들어보니 작은 갈색 상자였다. 

시계. 

이영호는 상윤의 팔에 차고있는 시계를 보고 "그따위 싸구려는 갖다버려."라고 말하면서 조금전에 이것을 주었다. 

상윤은 자기 팔에 차고 있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것은 전에 만났던 고객이 준 것으로 그런데로 유명 메이커였다. 그러나 상류의식으로 가득한 이영호에게 그것은 싸구려의 물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상윤은 상자가 주머니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불편해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아마도 이제껏 그가 받은 시계 숫자는 대여섯은 족히 넘을 듯 싶었다. 그렇다고 그가 시간 관념이 없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시계를 선물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왕 시간 얘기가 나왔으니 지금은 새벽 1시50분. 택시를 타고 가도 집에 도착하면 2시가 넘을 것이다.

* * *

상윤은 고장나서 잠기지 않는 연립주택 현관문을 열었다.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거실 겸 방으로 쓰는 공간을 능숙하게 가로질러 욕실 전등스위치를 켰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보일러가 고장났는지 계속 찬물만 흘러나온다. 상윤은 얼굴을 찡그렸다. 오는 길에 가장 간절하게 하고 싶었던 일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는 것이었는데. 

대충 샤워를 끝낸 그는 드라이기를 켰다. 턱에 닿을 정도로 길게 자란 갈색머리를 말리고, 아직까지 축축하게 젖어있는 온몸에 훈훈한 바람을 쏘였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순 없었지만 이것으로 어느 정도 만족하기로 했다. 

이것이 사람의 체온이었다면 좋았을텐데....... 

상윤은 어느새 오래된 기억 속을 헤메고 있었다.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체온. 그 사내는 넓은 가슴에 누구보다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있었다. 한 겨울에도 그의 손은 난로처럼 따뜻했고, 그 손을 만지기만하면 꽁꽁 얼은 두 손은 금방 녹았다. 아마도 그의 체온은 다른 사람과 달리 37도 아니 그 이상이었을지도... 

그의 이름은 토미. 어머니의 남자 중 한 명이었고 훗날 상윤의 양아버지가 되주었다. 그러나 한달여만에 어머니는 두 사람을 남겨두고 집을 떠나갔다. 다른 미군병사와 함께 본국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얼핏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토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버려졌다는 공포로 울고 있는 상윤을 안아주었다. 

걱정마 내가 있잖아.

한겨울 난방이 안되는 아파트에서도 토미는 상윤을 안아주었다. 

걱정마 내일이면 다 잘 될거야. 

그때 토미의 가슴은 어떠한 성벽보다 든든하고 이불보다 따뜻했다. 

상윤의 세포 하나하나는 아직도 그의 체온을 아프도록 기억하고 있었다.

상윤은 옷걸이에 걸린 남색 바지와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조끼와 넥타이를 걸친다. 그후 거울 앞에 놓아둔 새까맣고 짧은 가발을 쓴다. 마지막으로 남색 재킷을 걸치고 가방을 들었다. 

어느새 그는 순진하고 풋풋해 보이는 고등학교 2학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 * *

텅빈 교실은 아이들이 하나 둘 들어오면서 점점 어수선해졌다. 

아침부터 우당탕 뛰는 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산발적으로 떠들어대는 지역방송이 훌륭한 성량을 자랑했지만 그것도 대단하지 못한 듯했다. 일분단 뒤에서 두 번째 자리에 엎드려 있는 학생은 아침부터 꿋꿋하게 단잠을 고수하고 있었으니까. 

탕탕탕!

교탁을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은 여전히 떠들고 있었다. 

"이... 인..."

교탁 앞에 서있던 깡마른 남학생은 할말이 있는 듯 입술을 쭈볏거리다가 난처한 얼굴로 교실을 둘러보았다. 순간,

"좀 조용히 못해!"

이윽고 교탁이 탕하고 크게 소리를 내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깡마른 남학생 뒤로 키가 큰 남학생이 나와 소리친 것이었다. 

소음들이 일순 멈추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키 큰 남학생은 크고 또렷한 성량과 발음으로 말했다.

"인플렌자 접종 할 사람은 보건부장한테 신청해. 알았어?"

"우~"

학생들 틈에서 야유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충 내용은 우리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주사를 맞냐는 것이었다. 18살이면 어른이 분명한데 아직도 아이 취급받는 것이 왠지 불만인 듯한 표정들이었다.

교탁에 서있던 키가 큰 남학생은 비쩍 마른 보건부장이라는 학생에게 잘해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일 분단 제일 뒷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그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보기로 하자. 이름 한태경. 이 학급의 급장이고 반에서 키가 세 번째로 크며, 성적은 학급에서 평균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암묵적으로 정해진 주먹 순위는 성적보다 높다고 한다. 

거기다 공포스럽게도 그 남성적이고 우왁스러운 손으로 피아노 클래식을 연주할 줄도 알았으며 일년정도 무면허 운전경력을 갖고 있다고도 한다. 

대개 이 정도로 잘난 녀석들은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듣기 마련이지만 그는 성격도 원만한 편이어서 학우들과 골고루 친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를 더욱 인기 있게 만드는 것은 아버지의 직업도 한몫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제법 커다란 기획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가끔은 연애인들의 콘서트 티켓을 대량으로 살포하기 때문이었다.

일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식 밤에 잠 안자고 뭘 한거야?' 

태경은 앞에 앉은 녀석의 등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그 녀석은 등교하자마자 아직까지 고개를 파묻고 자는 중이었다.

부시시 고개를 든 것은 상윤이었다. 그는 잠깐동안 태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로 깨웠냐듯 양미간을 모으면서. 

태경은 눈을 크게 뜨며 상윤을 마주보았다. 

'이렇게 예쁘장한 녀석이었나?' 

흰 피부와 깨끗한 이마와 콧날선, 붙인 것처럼 긴 속눈썹이나 붉은 입술이 퍽이나 섬세하고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상윤이 전학온지 보름이 되어가지만 그 얼굴을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었다. 

"수업 시작했어. 김상윤"

태경의 말에 상윤은 그제서야 상황을 알아채고 앞을 보았다. 앞문이 열리고 영어선생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 고마워."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메마른 목소리가 태경의 귓가에 분위기 있게 울렸다. 태경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상윤은 수업 준비를 위해 가방을 열고 책을 꺼냈다. 그때 책과 함께 무언가가 딸려 나오더니 작은 소리를 내며 교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갈색 상자가 열리며 그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이 튀어나왔다. 

백금색 시계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존재를 드러냈다. 

아이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곳으로 몰렸다. 상자 위에 써있는 은색의 글자들이 도드라져 보인다. 

"로렉스?"

"저거...... 진짜야?"

학생들의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윤은 태연하게 시계를 주워 교복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뭐야? 거기 왜 떠들어?"

판서를 하던 선생이 수런거림을 정리하기 위해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학생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얼른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선생이 다시 판서를 하기 위해 돌아서자 자기들끼리 정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맞지? 진짜지?"

"그런 거 같은데. 저 자식 알고보니 갑붓집 아들이라는 건가?"

"애들이 말을 안 걸어주니까 일부러 자랑하려고 갖고 온 거 아니야?"

"쳇, 졸라 재수없는 새끼!"

"왕 재수 없는 놈."

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는 동안 4분단 뒷줄에 앉은 한 학생이 심상치 않은 눈으로 상윤의 주머니를 노려보았다. 수업시간에 일어난 이 작은 소동이 결국 파리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야, 너!"

상윤이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호명하는 목소리와 어깨를 잡은 손에서 위협의 낌새를 풍기고 있었다. 

상윤이 뒤를 돌아다 보자 덩치 좋은 남학생 셋이 서있었다. 한 명은 같은 반 학생이었으나 상윤은 물론 그들의 얼굴을 알 리 없었다. 

그들은 옷차림에서부터 '나 불량.'이라고 써 붙이고 있었다. 느슨하게 맨 넥타이며 풀어헤친 앞단추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와이셔츠를 팔뚝 위까지 걷어붙이고 팔뚝에는 꽤나 정교하게 흉내낸 문신까지 새겨져 있었다.

'저능아 같은 자식들.'

상윤이 다소 경멸에 찬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녀석들은 잔뜩 위협적인 표정과 어투로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한 녀석이 상윤을 앞서가고 둘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후방 도주로를 막으며 따라왔다. 아무래도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상윤이 그들을 따라 간 곳은 공사중으로 사용금지 된 수돗가였다. 자연히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곳에서 세 명의 학생들은 상윤을 포위하고 섰다. 

"어디 그 비싼 시계 좀 보자."

상윤은 그들을 돌아보더니 하는 수 없이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냈다.

"이 자식 정말 갑부집 아들인가 보네!"

학생 중 한 녀석이 상윤의 손에 든 시계를 집으려 달려들었다. 상윤은 시계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빼앗기기 싫다기 보다는 고객이 준 선물은 빼앗겨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녀석들은 열이 받은 듯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존말 할 때 내놔."

상윤은 댓구도 하지 않고 그들이 가로막은 사이를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윤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이게...... 정말 죽고 싶어?"

"너희들에게 볼일 없어."

낮은 톤의 작은 소리였지만 또박또박하고 분명한 어조였다. 아니, 어쩌면 명령하는 듯 간단하고 위압적이기까지 했다. 그것이 녀석들을 더욱 자극한 것 같았다. 

"이 새끼가!"

그들 중 한 녀석의 주먹이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상윤의 얼굴로 날아왔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목표물을 정확하게 가격하지 못했다. 상윤이 팔뚝을 들어올려 막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패거리의 주먹이 막힌 것을 보며 또 한 명이 지원 사격을 해왔다. 

퍽!

그의 발차기는 상윤의 복부를 강타했다. 

상윤은 그 충격으로 허리를 구부렸지만 두 팔은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이쯤 되면 린치하기 좋은 상태가 된다. 녀석들은 미친 듯 주먹을 휘둘러댔다.

상윤의 자세는 점점 낮아지고 급기야 주저앉았다. 그런 상태에서도 그는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고 두 팔은 머리를 감싼 자세였다. 마치 온몸으로 얼굴을 보호하려는 듯이. 

싸움은 싱거웠다. 한쪽은 일방적으로 때리기였고 한쪽은 일방적으로 맞기였으니. 그러나 패거리들은 상윤의 시계를 빼앗지는 않았다. 

그들은 맞으면서도 아무 반응도 신음소리도 없는 상윤에게 왠지 오싹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쩌면 때리던 중간에 웃고 있는 상윤의 얼굴을 본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마치 일부러 맞아주고 있다는 듯이. 

맞으면서 웃는 얼굴은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그것은 때리는 것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폭력을 무기로 삼는 녀석들에게 그 보다 무서운 상대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녀석들은 어느 정도 실력행사를 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선에서 주먹을 멈추고 으르렁거렸다. 

"살고 싶으면 알아서 기어라."

학생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상윤은 얼굴을 감쌌던 팔을 치웠다. 온몸이 흙투성이와 상처가 난 것에 비해 가발도 벗겨지지 않았고 얼굴은 말짱했다. 얼굴을 만져본 후 안심한 그는 얻어맞은 몸 여기저기 상태를 살펴보았다. 어쨌든 그에게는 몸이 재산이고 얼굴은 간판이었으니까. 

"무슨 일이야?"

"?"

상윤은 목소리가 들린 곳을 올려다보았다. 건물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 창문에서 고개 하나가 삐죽 내밀어져 있었다. 태양 빛 아래로 내민 그의 얼굴이 순간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았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호의적인 얼굴의 태경. 

"흔히 있는 일."

상윤은 주저앉은 자세에서 엷게 웃어주었다. 

상윤의 상태를 살펴보던 태경은 창틀을 훌쩍 뛰어 넘어 밖으로 나왔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봐도 뻔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아침에 떨어뜨린 시계 때문이었을 것이고 훔치지 않고 저렇게 대담하게 뺏을 수 있는 짓을 할 수 있는 인물은 학년에서 그리 많지 않았다.

태경이 손을 내밀었다. 상윤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일어나, 양호실 가서 땜질 좀 해야겠다."

상윤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37도? 아니 그 이상? 

"저..., 양호실은 어디에 있지?"

태경은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툭툭치며 싱겁게 웃었다. 

"아 참, 너 전학온지 보름밖에 안됐지. 데려다 줄게 같이 가자"

앞장서서 걸어가던 태경은 문득 돌아보며 말했다. 

"대신 담탱이한테는 계단에서 구른거다. 그리고 가능하면 비싼 물건은 학교에 가지고 오지마. 취미삼아 삥 뜯는 애들이 좀 있거든."

"알았어. 원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앞으로 주의할게"

"어, 너 의외로 싹싹한 성격이구나."

"무슨 소리야?"

"전학온지 보름이 되도록 애들이랑 어울리지 않길래 사귀기 힘든 성격인 줄 알았거든."

"그건 나를 계속 보고 있었다는 뜻?"

상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태경은 피식 웃었다. 

"니가 내 앞이니까 자주 눈에 띈거야."

"아, 아까 아침에 깨워준 것도 너였어?"

태경은 팅팅 부은 얼굴로 째려보았다.

"그럼 아직까지 뒤에 누가 앉았는지도 몰랐단 말이야? 음...... 내가 존재감이 그렇게 없는 인물이었던가?......"

"아, 미안."

상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문득 태경의 걸음이 멈추었다. 

"어, 잠깐만."

"왜?"

상윤도 따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계속 피가 나네?"

태경은 상윤의 오른팔을 가리켰다. 

찢어진 새하얀 교복 와이셔츠 위로 붉은 피가 계속 번져가고 있었다. 캔 뚜껑을 반지처럼 끼고 있던 저능아 같은 녀석의 주먹에 맞은 자리였다.

"신경쓰지마. 병은 아니지만, 피가 잘 안 멈추는 체질이야."

상윤이 별일 아니라는 듯 얘기했지만 태경은 막무가내로 상윤의 오른 팔을 잡았다. 

"뭐......!"

상윤은 반사적으로 태경의 손에 잡힌 팔을 빼내려했다. 그러나 태경의 악력은 의외로 강했다. 

"가만있어봐 피가 계속 흐르잖아"

태경은 막무가내로 상윤의 교복 소매를 걷어올렸다. 

희고 가는 팔이 드러났다. 팔목 위에 이 센티정도 길이로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가늘게 번져나와 주위에 새빨간 선을 그리고 있었다. 

태양아래 빛나는 흰 팔목과 선명한 붉은 피가 대조를 이루었다. 태경은 문득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뭐야, 지금 무슨 생각을......'

그는 곧 현실로 돌아와서 자신의 교복 주머니를 뒤지며 상윤에게 물었다. 

"휴지 없어?"

"없어."

태경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갑작스럽게 상윤의 상처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혀로 핥기 시작했다.

"뭐, 뭐하는 짓이야!"

상윤은 흠칫 놀라 거칠게 팔을 잡아 뺐다. 그제서야 태경은 상윤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미...... 미안, 피가 계속 안 멈출까봐."

"......."

태경은 자신을 계속 노려보는 상윤의 눈을 마주하고 있자 왠지 머슥해져서 얼굴이 붉어졌다. 

"니들, 거기서 뭐해?"

때마침 들려온 목소리는 이 난처한 분위기를 깨뜨려주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태경과 비슷한 체격의 남학생 한 명이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 혁수야...... 얘 좀 양호실에 데려다 줄래? 전학온지 얼마 안돼서 어딨는지 모른데. 난...... 선생님이 불러서 교무실 가던 중이거든."

태경이 약간은 어눌한 목소리로 말하자 혁수는 여기저기 타박상을 입은 상윤의 상태를 살펴보다가 알겠다는 듯 씨익 웃었다.

"시계 때문에 벌써 한차례 맞았냐?"

"그럼 부탁해"

태경은 상윤과 혁수를 남겨두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서있던 혁수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근데 교무실 가다가 여긴 왜 와 있는거래?"

상윤은 셔츠가 걷어올려진 자신의 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 위에는 태경이 상처를 빨았을 때 생긴 붉은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한태경...... 

상윤은 왼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아직까지 그의 체온이 남아있었다. 

 * * *

다음날. 

학교에 등교한 상윤은 4분단 끝에 모여있던 세 녀석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녀석들은 상윤을 노려보기만 할 뿐 어제 위협했던데로 실력행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상윤은 녀석들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아 참고서를 펴들었다.

"저 자식 어제 맞으면서도 웃고 있지 않았냐"

"기분 나쁜 녀석이야."

"우석이에게 맡겨서 아예 걸어다니지도 못하게 만들라고 하자!"

상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패거리들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수업이 끝나자 상윤은 꺼놨던 핸드폰을 켰다. 두 통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하나는 예전에 그의 고객이었던 비즈니스 클럽(정확한 의미는 룸쌀롱) 주인 여자에게서였다. 그녀는 이번 주 내로 한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광주에 출장중인 영호에게서였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핸드폰 번호만 찍어 놓았다. 

상윤은 교문을 걸어가며 영호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삐리릭 연결신호음이 들리고 영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상윤입니다."

턱! 무언가 그의 목덜이를 잡는 느낌에 상윤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제의 그 세 녀석들이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통화감이 좋지 않군요. 5분 후에 다시 걸겠습니다."

상윤은 핸드폰을 끊고 그들과 마주섰다. 오늘은 세 녀석 뒤로 머리숫자가 하나 늘어있었다. 

학생이라기엔 안 어울릴 정도로 험상궂은 얼굴이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삐딱하게 서있는 것으로 보아 이 녀석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아 보였다. 

"어쭈 누구 맘대로 5분 후에 다시 걸어?"

"5분 후엔 저승 가서 다시 걸겠다고 해야할껄?"

녀석들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상윤은 녀석들을 둘러보았다. 특별히 노려본다거나 인상을 쓰지 않았다. 그냥 무감정한 얼굴이었다. 

'제발 다시 전학 갈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상윤 네 녀석들을 따라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위에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뭐야, 오늘은 좀 해보겠다는 거야?"

한 녀석이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며 비웃자 나머지 녀석들도 키득거렸다.

세 명의 패거리들은 상윤의 뒤에 늘어서고 우두머리로 되어 보이는 녀석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손마디를 꺽을 때마다 우두두둑 소리가 났다. 상윤은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저 손가락을 못쓰게 하면 그 다음엔 뭘 무기로 삼을까?'

그때였다.

"야, 니들 여기서 뭐하냐?" 

골목길 입구에 태경이 들어오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있던 우두머리 녀석은 태경을 보자 험상궂은 표정을 다소 풀었다.

"전학생 교육중이시다."

"야, 야, 좀 봐줘라. 우리반 애란 말야."

태경은 우두머리 녀석의 팔을 툭툭치며 친근하게 웃었다. 하는 폼으로 보아 꽤나 친한 듯했다.

"흥, 니네 반만 봐주면 불공평하지."

"어제도 한차례 교육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걸로 안된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이 자식이!"

그는 태경을 치려고 손을 뻗었지만 가볍게 머리를 툭 칠뿐 그다지 살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러자 태경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참, S.E.S가 언제 콘서트 한다고 하더라......" 

그러자 우두머리 녀석의 험상궂은 얼굴이 단숨에 환하게 밝아지며 눈동자가 반짝였다. 음, 하지만 괴기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인지....... 그리고 그를 따라서 세 녀석의 귀도 쫑끗 솟아올랐다.

"티켓......, 이번에도 주는거야?"

"글세, 아버지한테 부탁은 해놨거든. 그런데 어떻게 될지......."

"알았어 보내줄게 보내주면 돼잖아."

우두머리 녀석은 패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세 녀석들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우두머리 녀석이 다시 한번 인상을 쓰자 하는 수 없이 상윤에게 가라는 눈짓을 했다. 

상윤은 다소 안심을 하며 벗어놓은 재킷과 가방을 집어들었다.

태경이 상윤과 함께 골목을 나갈 때 그 뒤로 세 녀석들의 목소리가 따라나왔다.

"야, 베이비복스 싸인은 언제 받아다 줄거야?"

"집에 있어. 내일 가져다 줄게"

골목길을 나온 태경은 상윤을 보며 쑥쓰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우리 아버지가 기획사에 계시거든. 자랑하고 다닌 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소문이 퍼졌어. 너도 좋아하는 가수 있으면 얘기해. 혹시 연결되면 티켓 같은 거 얻어다 줄게."

상윤은 태경의 말에 좋아하는 가수를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보니 그에게는 좋아하는 가수가 없었다. 고객의 취향에 맞게 여러 가지 음악과 노래를 익혔을 뿐이었다. 그러니 대부분은 올드 팝이나 클래식등을 들었다. 지금은 영호가 좋아하는 '야니'나 '유키구라모토'를 듣는 중이었다. 

상윤이 좋아하는 가수를 생각하고 있을 때 태경은 어제 일을 사과했다. 그는 아직도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어제일 사과하려고 찾아다녔어. 피가 자꾸 흐르길래 당황해서...... 정말이야. 피를 멈추게 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급한 김에 단순한 머리와 발상에서 나온 행동이었어."

태경은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문득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혹시 그것 때문에 날 드라큐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

"휴, 다행이다"

태경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변태라고 생각했어."

상윤은 씨익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태경은 과장된 제스처로 오른팔을 들어 상윤의 목을 감쌌다. 

"뭐? 너 오늘 변태한테 좀 당해볼래?"

역시나 따뜻한 체온. 토미와 같은.

상윤은 그런 체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상윤을 두고 떠나갔다. 그래서 그의 곁에 현재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을 멍들게 하기에 알맞은 체온. 

상윤은 태경의 손을 풀어내며 정색을 했다.

"미안하지만 난 신체접촉을 별로 안 좋아해. 특히 손에 열이 많은 사람들과는. 이해해 줘."

그 표정에 태경은 또다시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아, 불쾌했다면 미안. 난 이런 게 버릇이 돼서." 

"이런 거란...... 아무하고나 스킨 쉽하는 거?"

상윤이 다소 짖궂게 묻자 태경은 우물쭈물하더니 대답했다.

"음...... 너 정말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는데 천부적인 걸. 이건 아마 생활환경 탓이라고 해야할까? 우리 집에서는 신체접촉을 많이 하거든. 가령 늦게 일어난다고 두들겨 패거나 편식한다고 때리는 그런 거. 흠...... 그래서 나도 친구들을 만나면 그런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 같애. 조건 반사 같은 거지. 자, 이젠 해명이 됐냐?" 

생활환경 탓...... 상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생각 해보면 그는 직업적인 것이 아니면 사람들과 몸이 닿는 것을 싫어했다. 아니, 간절히 원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반사적으로 피하는 행동이었다. 

직업적인 스킨쉽에는 능숙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하고는 어떻게 스킨쉽을 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말좋아 하는 사람이라면. 스킨쉽을 하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혹시라도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혹시라도 그가 싫어하는 행동 같은 것을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고민하다보면 모든 행동들이 어색하기만 했던 것이다. 태경의 말대로 정말 환경 탓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

태경의 목소리에 상윤은 정신을 차렸다.

"아니야, 아무 것도"

"CD사러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상윤은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무의식중인 버릇이었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시간을 보며 약속시간을 체크하는. 그러고보니 영호가 출장중이고 예약된 약속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은 시간이 한결 여유로왔다. 

그때였다. 상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 순간 상윤은 영호에게 약속한 5분이 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보세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뭐였지?"

전화기 저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윤은 태경에게서 멀리 떨어지며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급작스러운 일이 있어서 늦었습니다."

"앗, 새로 나온 스티커 자판기다. 상윤아 우리 저거 찍을래?"

그때 목소리가 큰 태경이 길가에 있는 스티커 자판기를 가리키며 가까이 다가왔다. 핸드폰의 성능은 의외로 좋아서 그 소리는 광주에 있다는 영호의 귀에도 또렷이 들렸을 것이다.

"애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게 급작스러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그게 아니라 잠시 문제가 생겨서......"

"친군가?"

"네."

"의외군. 네가 친구를 다 사귀다니."

상윤이 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하는 것을 본 태경은 입모양으로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나 상윤은 대답대신 다시 고개를 돌리며 통화했다. 그러자 태경은 조심스러운 눈으로 상윤이 통화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집에 가는 방향이 같을 뿐입니다."

"......강한 부정은 더 긍정같이 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가신 일은 잘 되셨습니까?"

"제법이구나. 말도 돌릴 줄 알고. 내 앞에서는 매일 벌벌기더니 친구 앞이라고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는 건가?"

"아닙니다."

"젖비린내 나는 녀석은 아직도 옆에 있나? 친구라는 녀석과 한번 통화해보고 싶은데 바꿔봐"

"옆에 없습니다."

"흥, 그래? 그럼 잘됐군. 난 지금 호텔에 들어와 있다. 네게 왜 전화를 했는지는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시작해봐."

"......."

"어서, 나는 지금 너와 섹스를 몹시 하고 싶다. 늘 하던데로 해봐."

"......."

"자, 넌 지금 내 다리 사이에 꿇어 앉아있다."

수화기를 통해 영호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윤은 앞에서 궁금한 듯 쳐다보고 있는 태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흔들어 잠깐 비켜 달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아까부터 상윤의 표정에 심각한 일이라고 판단한 태경은 편의점 앞에 있겠다며 손가락으로 편의점 앞의 계단을 가리켰다. 

"제 손은 다리 안쪽을 가볍게 쓰다듬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위로 올라갑니다...... 오래하고 싶으시다면 벌써부터 흥분하면 안됩니다. 자, 이제 지퍼를 열겠습니다."

상윤의 얼굴은 또다시 무표정해지고 있었다.

"아니, 밸트를 풀겠다."

"좋습니다. 제가 풀러드리지요. 괜찮겠지요?"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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