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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하소서(2) (17/17)

구원하소서(2)

식당에서 벌인 사고가 있어서 그런지 철문이 열리는 건 식사할 때밖에 없었다. 감시자가 식판에 밥을 받아서 주고 갔다. 온종일 갇혀 있는 실험체 384는 너무 심심했다. 하얀 벽과 커다란 유리만 쳐다보고 있으니 더 미칠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말동무가 되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거였다. 그 또한 자신이 자기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미래의 넌 아주 멋진 어른이 될 거야. 그렇다고 예쁜 얼굴만큼 성격이 좋은 건 아니야. 언제나 화난 사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고 주변에 사람을 두지 않기 위해 밀어내. 넌 아주 협소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어.”

“바로나, 배 안 고파요? 감시자가 내 식사만 가져와서 항상 당신은 굶잖아요.”

“그렇다고 네가 정말 몰인정한 어른이 되는 건 아니야. 넌 그냥 네가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 되었을 때, 네가 죽고 남겨진 그들이 슬퍼할까 봐 선을 긋는 것뿐이니까. 실제로는 아주 마음이 따뜻한 거지.”

“안 되겠어요. 나랑 같이 먹어요.”

실험체 384는 고기를 뭉쳐놓은 걸 포크로 찍어서 허공에 내밀었다.

“난 이걸 먹을 수 없어. 진짜 내 몸은 지금 죽어가고 있거든.”

“당신은 제가 봤던 사람 중에서 제일 아름다워요. 혹시 오메가인가요? 그렇다면 내가 당신만큼 키가 커지면 저랑 결혼해줄 수 있어요?”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지만 너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데도 이야기 나누는 이 시간이 난 너무 행복해.”

실험체 384는 자신의 말을 그가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아 일부러 이런 질문을 한 거였다.

“알았다고요?”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했다. 실험체 384는 재미있다고 웃었다. 그는 왜 어린 차기주가 웃는지도 모른 채 따라 웃었다.

“언제까지 내 팔을 들고 있게 할 거예요. 벌서게 하는 것도 아니고. 얼른 먹어요.”

그는 입에 들이밀어지는 포크를 피해 물러났다. 침대에서 무릎 위에 식판을 올려놓고 있던 실험체 384는 따라서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가 식판을 엎질러버렸다.

“아, 씨. 내 밥.”

바닥에 떨어진 빵과 고기, 토마토소스를 실험체 384가 손으로 긁어서 먹었다. 그는 더럽다며 말렸지만, 언어의 장벽이 너무 견고했다. 실험체 384는 왜 갑자기 그가 화내는지 몰라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왜 그래요, 도대체.”

이곳보다 더 더러운 장소에서 음식 쓰레기를 먹던 실험체 384에게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렇지 못한지 속상해하며 울었다. 다 큰 남자가 우니 당황스러웠다. 실험체 384는 남이 울 땐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몰라 어색해하며 지켜봤다.

힘으로 타인을 지배하고 힘이 없으면 복종하는 좁은 철창 안만이 실험체 384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이식 수술을 받으면서부터 이 세계에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좁은 철창 안의 세상은 그보다 더 넓은 연구소라는 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생존밖에 없던 실험체 384에게 다양한 감정과 상황들이 몰려들었다. 바로나가 우는 건 그동안 겪은 변화 중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가장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실험체 384는 오래되고 퇴색되어서 사라진 줄 알았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울면 엄마가 무릎에 앉혀놓고 등을 토닥여줬다. 실험체 384는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기에는 그가 너무 큰 것 같아서 그냥 그의 등만 손으로 쓸어내렸다.

“괜찮아. 괜찮아. 아가야, 괜찮아.”

실험체 384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엄마가 했던 대사를 내뱉었다가 깨달았다. 그 별거 아닌 말에는 그녀의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엄마는 자신을 버린 걸까.

텅 빈 눈으로 하반신 마취제에 취해 떠올릴 수 있었던 눈 내리는 기차역을 다시금 머릿속에서 그렸다. 엄마의 손을 잡은 자신은 키가 작고 왜소해 키가 큰 러시아인들이 지나갈 때면 한 번씩 툭툭 밀려났다.

엄마는 그런 자신에게 조심하라며 앞을 보고 걸었다. 추위에 빨갛게 언 코를 가진 그녀가 어디에 가는지 떠올려봤다.

블라디미르.

문득 발렌틴과 각인했다는 알파 연구원의 이름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잊고 살았던 단어가 새롭게 유입된 단어와 일치하면서 기억의 빈틈을 메웠다. 엄마와 자신은 블라디미르에 가기 위해 모스크바역에 갔었다.

엄마는 겨울에는 과일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한인 부부 집에 입주 가사 도우미로 취업했다며 기차역에 가기 전날 밤잠을 설쳤다. 자신과 같은 침대에 누워 내일 가는 곳이 자신이 태어난 도시라고 말해줬었다. 고용주가 같은 한국인이라 취업할 수 있었노라 기뻐했었지.

“아…….”

자신에게도 이름이 있었다. 엄마가 아가라고 불렀다고 이름이 없는 게 아니었다. 어린 자신은 엄마가 자꾸 아가라고 불러서 착각한 것뿐이었다.

실험체 384는 까마귀를 닮은 남자의 등을 두드려주던 손을 멈춘 채 굳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고 코트가 휘날리도록 달리는 신사가 자신 쪽으로 달려왔다. 그는 약속 시간에 늦었는지 다급해 보였다. 자신을 친 줄도 모른 채 1번 출구로 가버렸다.

기차에 오르던 작은 몸은 어이없게도 너무나 쉽게 떠밀려 뒤로 넘어갔다. 손끝을 빠져나가는 엄마의 손가락 감촉은 까슬하고 거칠었다. 영양 부족으로 깨진 그녀의 손톱이 뭐가 그리 특별나다고 자신은 그 손톱을 그리 보고 있던 건 걸까.

순식간에 기차가 출발해버렸다. 오래된 기차 바퀴가 철로를 지나면서 엄청난 굉음을 냈다. 겨울 찬바람이 맹렬하게 기차 창문을 흔들었다. 기차역에 홀로 남겨진 자신은 역사 안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때문에 어지러웠다.

의자에 앉아 편하게 쉬고 싶은데 역사에 마련된 의자는 철로 되어서 찬기를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시린 엉덩이 때문에 의자에 앉았다가 섰다가를 반복하고 있는데 기차역에서 일하는 역무원이 왔다. 그가 자신을 엄마에게 데려다줄 거라고 믿었는데 경찰서에 버리고 가버렸다.

역사에 홀로 남겨진 자신은 버림받은 게 아니었다. 그건 그냥 더럽게 재수 없었던 사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일이었다. 길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흔히 부모에게 버림받았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듯 실험체 384도 그러했던 거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정말 잔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들이 보육원에 그를 팔고, 보육원 원장은 연구소에 그를 팔았다. 돈에 눈이 먼 탐욕스럽고 타락한 어른들에 의해 자신의 인생은 송두리째 망가져버린 것이다.

엄마를 잃은 동양인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사고 팔리는 노예 같은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만일 그가 러시아인처럼 옅은 머리카락 색과 하얀 피부를 가졌어도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실험체 384는 이를 악물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엄마에게 버림받았다고 착각하고 살았는지 기억을 거슬러 올랐다. 그건 그 누구의 이간질로 이뤄진 게 아니었다. 그냥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대한 원망을 누군가에게는 쏟아내야 했기 때문에 가장 만만한 엄마를 악인으로 만들어낸 것일 뿐이었다.

그는 연구소 안에서 가장 약한 끝 번호였다. 그가 수술대에 올라가기 전까지 그의 뒤에는 385가 존재하지 않았다. 배고프고 춥고 외롭고 아팠다. 다섯 살 아이는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더러운 축사와 같은 장소에서 지내야 했다.

가끔 수술받고 회복 기간이 끝난 실험체들이 철창 안으로 돌아오면 그를 보살펴주곤 했다. 자신이 어눌하게 말하지 않게 대화 상대가 되어주고 이 연구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보를 알려줬다. 그러나 그건 그들 또한 외롭고 힘들었기 때문에 가장 만만한 자신을 붙잡고 속마음을 풀어낸 것뿐이었다.

자기를 팔아치웠다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자신도 그런 못된 엄마의 손에서 키워진 것 같았다. 부부 싸움을 하는 부모 아래에서 학대받으며 살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과일을 팔러 나간 엄마는 어린 자식을 무책임하게 내팽개친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비슷한 처지의 우리는 서로의 사연을 공유하며 거기에 동요해갔다. 실험체 384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때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엄마를 기다려야 했다. 그랬다면 엄마는 반드시 자신을 데리러 돌아왔을 것이다.

굵은 눈물이 실험체 384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기주? 왜 울어?”

자신이 땅에 떨어진 걸 주워 먹어서 속상해했던 이가 당황스러운 듯 물었다. 그는 실험체 384를 번쩍 들어서 자기 무릎에 앉히고 그 등을 손으로 쓸어냈다. 달래려고 한 짓인데 그의 손길을 받은 아이는 더 크게 울려버렸다.

“흐흐흑. 흐윽흑.”

숨을 크게 들이마셔도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실험체 384를 달래는 걸 포기한 그는 그냥 꼭 안아주며 말했다.

“그래, 울고 싶으면 울어. 그래야 슬픔도 씻겨 내려가지.”

실험체 384는 아늑한 품에서 울다가 곯아떨어졌다.

* * *

실험체 384를 지켜보던 정신과 의사가 이고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신 분열이 심각해요. 불안정 파동 에너지를 측정해야 합니다.”

“한 번만 더 이식 수술을 받고 해보지.”

“실험체 0이 어깨를 회복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동양인에게서 장기를 더 적출해내면 우린 귀중한 실험체 0을 잃게 될 거예요. 소장님, 실험체 384는 폐기해야 합니다.”

이고르는 팔짱을 끼고 유리 너머를 지켜봤다. 혼자서 떠들던 실험체 384가 갑자기 오열하다가 잠들었다. 제정신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각인한 오메가와 떨어져 있어서 부작용을 보인 건가 싶었다. 그렇지만 밥에 억제제를 넣어서 먹이고 있으니 페로몬 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각인 부작용도 없어야 맞았다.

“첼시, 더미와 실험체의 신체 교환 수술은 어떻게 됐지?”

이런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그들은 버려도 되는 실패작들을 이용해 베타 테스트를 진행했다. 첼시는 총 열 명의 더미와 실험체가 신체를 교환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이고르에게 전했다.

“더미 중 30%는 사망했고 나머지 70%는 제대로 신체를 회복했습니다. 회복 속도 또한 가만히 놔뒀을 때보다 2배 빨랐고요.”

“70%의 성공 확률이라…….”

이고르는 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더미와 달리 지금 중태에 빠져 있는 실험체 0은 수술에 실패하면 큰일이었다. 그가 죽으면 아프로디테 프로젝트는 사실상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더미에게 얻었던 신체를 적출당한 실험체들은 80%의 확률로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골치 아프네. 양손에 토끼를 잡을 수 없다는 뜻이군.”

실험체 0의 회복을 위해서는 실험체 384가 희생당해야 했다. 그런데 실험체 384가 망가지면 그들의 연구 또한 망하는 거였다.

또한 그것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실험체 0이 회복하지 못하고 죽는 30%의 확률에 대해서도 염려해봐야 했다. 실험 규모가 작아서 30%이지 만약 100명의 더미와 실험체를 가지고 실험했다면 그 퍼센트가 달라질지도 몰랐다.

이 부정확한 수치를 맹신하고 큰 도박을 했다가는 양쪽 모두를 잃을 수 있었다. 이고르는 비밀의 방에 잠들어 있는 실험체 0을 잃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이론을 증명하고 국민 영웅으로 만들어줄 성과인 실험체 384도 쉽게 폐기하기에는 아까웠다.

실험체 0을 잃으면 아예 아프로디테 프로젝트를 종료해야 하고, 실험체 384를 잃으면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며 차르로부터 실험을 중단하라는 명령이 내려올 테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 상황은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 있는 듯했다.

다른 실험체들은 실험체 384만큼 빠르게 회복하지 못했다. 에스퍼 능력 또한 처음부터 A급 이상으로 나온 건 그놈이 처음이었다.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돌렸다. 이고르는 타인의 신체에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실험체 384라면 더미의 장기로 생명을 연장해나갈 수도 있지 않나 싶었다.

물론 더미에게서 이식받은 신체가 불량이라 잘못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면 실험체 384를 잃게 될 것이다.

“일단 새로운 에스퍼를 실험체 0이 죽을 경우에 대비해 준비해야겠지. 이미 어른인 A급 에스퍼들은 실험실에서 곱게 자란 실험체들이 잡을 수 없어. 등급만 높고 어린 에스퍼를 납치해야 해. 리스트 작성해봐. 납치해오게 시키게.”

“누굴 파견할까요?”

“똑같은 A급으로 보내야 그나마 승산이 있지. 먼저 실험체 384를 전쟁터에 보내서 훈련해. 임무 중 죽지 않으려면 그 정도는 굴러봐야지. 그다음엔 그놈 팔을 잘라서 실험체 0에게 돌려준다.”

이고르는 손으로 괴로운 얼굴을 가린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팔이 잘린 실험체 0은 전혀 아름답지 못했다. 그가 가진 아름다움은 얼굴뿐만 아니라 완벽한 신체 비율과 몸 선에서도 나왔다.

“실험체 384한테 더미의 신체를 주고 그가 회복하지 못해도, 이미 우린 에스퍼 실험체를 둘이나 가졌으니 손해 볼 건 없어. 더 빠르게 실험을 진행해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연구원이 연구소장실을 나섰다. 이고르는 푸른색 화면 보호기가 뜬 컴퓨터의 마우스를 흔들었다. 침대에 누워 산소호흡기를 낀 채 잠든 실험체 0의 모습이 나왔다.

“팔을 잃고도 실험체 384가 죽지 않을 가능성도 있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확신이 담기지 못한 목소리가 물었다.

“…….”

이고르가 생각하는 최고의 시나리오는 새로운 에스퍼 실험체를 획득해 실험을 계속해나가고, 회복한 실험체 0가 깨어나 그의 연인이 되며, 실험체 384는 더미의 신체를 받고도 무사한 거였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선 그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혼잣말을 중얼거린 것이다. 너무나 쉽게 죽어버리는 후천적 에스퍼들에 대한 골머리로 뒷골이 당겨왔다. 가이딩을 못 받는 에스퍼들은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시간 제약이 걸린 폭탄에 불과했다.

바닷가에서 파도 한 번에 무너져 내릴 모래성인데 절대 무너트리지 않겠다며 높게 모래를 쌓아 올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 * *

아침 일찍 철문이 열렸다. 군인이 기관총을 든 채 들이닥쳤다. 그는 연구원 한 명을 살해한 전적이 있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기상.”

졸린 눈을 베개에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바닥에서 자겠다는 바로나를 억지로 침대에 올라오라고 해서 같이 잤던 사실이 뒤늦게 떠올라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군인이 바로나를 잡아가면 어쩌나 싶었는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잘생긴 까마귀 청년에게 눈길조차 안 줬다.

이게 어떤 게 된 일인가 검은 머리 사내를 힐끔 쳐다봤다. 그가 입꼬리를 들어 올려서 웃었다.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검지만 편 채 입술을 가렸다. 처음 보는 수신호였지만 비밀이라는 뜻 같았다.

“실험체 384, 전쟁터에 파견하라는 임무가 내려왔다. 고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워라.”

“…….”

“대답.”

“네.”

“앞으로 모든 대답은 ‘Yes, sir’로 통일한다. 대답.”

“Yes, sir.”

군인은 그동안 그가 전쟁터로 데려간 실험체들처럼 실험체 384도 자살부대원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못 가서 죽을 놈이었다. 불량품 주제에 전쟁터에서 적군과 함께 죽을 테니 고국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광으로 알아야 했다.

“따라와.”

군인은 먼저 실험체를 가둔 독방을 나왔다. 어설프게 군인을 따르는 실험체 384의 옆에 바로나가 함께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바로나를 쳐다봤다. 전쟁터라는 소리에 무척 겁났지만, 그가 옆에 있어 줘서 안심되었다.

군인의 뒤꽁무니만 쫓으며 계속 이어지는 복도를 걸었다. 익숙한 식당에 도착했다.

“제대로 된 마지막 식사일 수 있다. 든든히 먹도록.”

먼저 식당에 와서 밥을 먹던 다른 실험체들이 자신을 보더니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군인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주목! 오늘부터 실험체 384도 전쟁터에 나가 고국을 위해 싸우기로 했다. 지금 피한다고 끝이 아니니 그냥 편하게 먹어라. 출발은 오전 9시이다. 식사 시작.”

군인이 멀뚱멀뚱 서 있는 실험체 384의 등을 들고 있는 기관총으로 툭툭 건드렸다. 얼른 정신 차리고 식판에 양파 수프와 계란프라이, 모닝빵을 잔뜩 담았다. 바로나는 안 먹나 쳐다봤다.

“난 괜찮아. 너 많이 먹어.”

여전히 그가 하는 한국어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같이 지내다 보니까 뭐라고 하는지 눈치껏 알 수 있었다. 빈 테이블에 식판을 가져가서 앉았다. 그가 그곳에 앉으니까 아무도 그 테이블에 다가오지 않았다.

실험체 384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실험 쥐로 연구소에 팔린 주제에 팔자 좋게 친구들과 하하 호호 노는 건 아니지 않는가. 더군다나 자신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다정한 바로나가 있었다. 그가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짓는 표정을 거울처럼 따라 해봤다. 그렇다고 자신이 검은 유리구슬처럼 맑은 눈동자나 입꼬리가 올라가면 봉긋하게 솟는 사랑스러운 뺨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에게 자신도 같은 마음이라는 걸 전하고 싶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첫 만남 때부터 자신을 무척 소중한 사람처럼 바라봤다. 또한 이식 수술을 받고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자신을 걱정하며 곁을 지켜줬다. 온종일 누군가가 관심을 쏟아준다는 사실은 굉장한 기쁨과 더불어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줬다.

어려서부터 철창 안에서 자랐던 자신의 좁은 세계에 이 이름도 모르는 존재가 더해졌다. 타인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로 인해 스스로를 하찮게 여겼었는데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는 그로 인해 그 생각이 점차 바뀌어갔다.

어쩌면 자신은 하찮게 여겨지며 학대받을 만큼 못난 존재가 아닐지 모른다는, 그런 변화가 내면에서 목소리를 키웠다. 그것만으로도 이 검은 머리의 남자를 자신의 짝으로 삼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 밑에서 신발을 벗었다. 바로나의 바짓단을 발끝으로 걷어 올리고 복숭아뼈를 문질렀다. 그가 놀랐는지 한층 커진 눈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우리의 관계를 뭐라고 규정지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실험체 384는 이자의 뺨에 입을 맞추고 싶었고 넓은 품에 안기고 싶었다.

엄마한테 느꼈던 포근함과는 그 결이 달랐다. 처음 느껴보고 알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발렌틴이 블라디미르의 아기를 가졌다고 했을 때처럼 반짝이는 미소와 기쁨이 자신에게도 꽃 피어났다.

자신도 발렌틴처럼 우리의 아이를 가지고 싶었고 이 연구소에서 떠나고 싶었다.

“차기주. 기주야.”

어째서 바로나는 계속 그 이질적이고 신기한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걸까. 그건 자신이 그의 이름을 발음하지도 외우지도 못해서 ‘까마귀’라고 부르는 것과 같을까?

자신이 그의 ‘차기주’가 되었다는 사실에 배 속에 홧홧한 열기가 돌았다. 부끄러운 마음에 수저로 달짝지근한 양파 수프를 떠서 먹고 말랑한 모닝빵도 통째로 입에 욱여넣었다.

배에 들어 있는 건 불꽃인데 겉보기에는 돼지가 들어앉아서 사는 것처럼 먹어대는 자신을 보고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괜찮아. 넌 무사할 거야.”

실험체 384는 눈을 끔뻑 감았다가 뜨며 그를 보고 웃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하는 건 상대방에 대해 더 알고 싶게 하는 것 같다.

‘그는 방금 뭐라고 말한 걸까? 어디서 온 것이고, 왜 나를 좋아해 주는 걸까? 어떻게 연구소 사람들은 그를 투명 인간 취급 하며 건드리지 않는 거지?’

바로나에 대한 수많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자신을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과 같은 고양된 기분으로 만든다. 그렇게 들떴던 자신은 금세 현실로 돌아온다. 모든 의문점이 향하는 방향이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애써 그 생각을 무시해본다. 어렸을 때 본 만화에서 유령은 하얀 식탁보를 뒤집어쓴 아이 같았다. 그런데 바로나는 유령이라고 하기에는 역시 잘생겼다. 그렇게 결론짓고 저 혼자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험체 384는 다 먹은 식판을 들고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나의 복숭아뼈를 희롱하기 위해 잠시 벗어둔 신발을 챙겨 신었다.

그가 테이블 사이를 걷고 있는데 실험체들이 모여앉은 테이블 아래에서 발이 튀어나왔다. 자신이 넘어지길 바라고 이러는 거였다.

당해주면 그대로 자신은 무리에서 약자가 될 것이다. 철창 안에서는 최약체였던 주제에 파동 에너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다시는 그런 먹이사슬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 식판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약육강식 세계에는 엄연히 규칙이 있었다. 늑대는 토끼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자신은 발을 걸기 위해 테이블 밖으로 나온 발을 걷어찼다.

“악!”

실험체가 의자에서 쓰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발목을 붙잡고 질질 짜기에 그놈의 등짝을 짓밟고 건넜다. 어울려 다니는 무리가 테이블에서 일어나 자신의 환자복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게 죽으려고.”

“내가 죽는 게 아니라 너희가 죽을 텐데.”

토끼들이 코를 움찔거린다고 늑대가 무서워할쏘냐. 코웃음을 치며 멱살을 잡은 손을 쳐냈다.

“너희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강한 에스퍼로 각성했는지.”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실험체 384는 파동 에너지가 없었을 때는 부당한 일을 당해도 억울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자신만 더 상처받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힘이 생기니까 자신을 향한 가시에 조금도 상처 입고 싶지 않았다.

바로나가 팔짱을 끼고 이 상황을 지켜봤다. 자신은 그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허세를 부렸다.

“난 마음만 먹으면 너희를 다 죽일 수 있어. 어때, 싸워볼래? 어차피 우린 가이딩을 못 받아. 전부 시한부 인생이야.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죽을 건데 누가 이기는지 알아보든가.”

바로나가 한국말로 중얼거렸다.

“역시 어려서부터 성격이 나빴어.”

자신은 그를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강인한 알파의 모습에 반해버렸지 싶다.

“그 목숨 어차피 얼마 안 가는 거 알고 있으면 잘 들어라. 정원 2열로 정렬.”

군인이 식당으로 돌아왔다. 실험체들은 형광등을 켜면 도망치는 바퀴벌레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차기주도 덩달아 그 행동을 따라 했는데 ‘2열’이 뭔가 싶어 멍청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옆에 서 있던 실험체가 줄을 이탈한 그에게 “두 줄로 서는 거야” 하고 알려줬다.

철창 안에서도 실험체 174가 식사를 배분할 때 실험체들에게 시켜서 익숙한 일이었다. 언제 당황했냐는 듯 앞사람의 머리를 보고 줄을 맞췄다.

실험체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가는지도 모른 채 군인을 따라 이동했다. 연구소를 나온 실험체 384와 몇몇 실험체들은 연신 하늘과 땅을 보며 신기해했다.

그들을 태우러 군용 트럭이 왔다. 수송 칸에 11자로 의자가 놓여 있어서 실험체들은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군인은 그들에게 군복을 주지 않았다. 러시아군이 전쟁 중에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군인’이라는 신분과 소속조차 갖지 못하고 죽어갈 것이다.

머리를 보호할 헬멧도, 총알을 막아줄 방탄복도 없이 실험체들은 2차 대전 때 쓰다가 남은 오래된 기관총을 받았다. M1919 브라우닝 기관총이었다. 살고 싶으면 알아서 적군을 죽여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자신이 죽을 테니 말이다.

실험체 384는 우리가 가는 곳이 그리 멀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기차가 아닌 트럭을 타고 가는 거라고, 배움이 없음에도 똑똑한 머리로 짐작했다.

이미 대규모로 전투가 치러진 탓에 무너진 건물들이 보였다. 실험체 384는 옆자리에 앉은 바로나의 손을 꼭 잡았다. 과연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부서진 콘크리트 파편과 건물의 뼈대가 되었던 철심, 부패해 파리가 끓는 시체들이 굴러다녔다.

트럭 밖으로 구토하는 실험체들이 생겼다. 군인은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며 수통을 건넸다.

“마셔.”

그의 명령은 우리 같은 실험 쥐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불길한 낌새를 느꼈다. 실험체 384는 아침에 먹은 급식에 못된 약이 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약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감시자들은 양철통에 음식물 쓰레기를 담아올 때 그걸 먹고 설사하지 말라며 지사제를 뿌려놓곤 했다. 깨끗한 음식을 줄 생각은 안 하고 전염병이 돌지 않게끔 자기네 편해지자고 우리를 똥도 제대로 못 싸게 만드는 거다.

다른 실험체들처럼 자신도 구역감을 느낀 척 트럭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우욱, 하고 헛구역질 소리를 내며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다른 손가락으로 목젖을 찔렀다. 양파 수프와 모닝빵이 묽은 반죽으로 쏟아져 나왔다.

몇 번이고 억지로 구역감을 끌어 올리며 먹은 것들을 토하기 위해 애썼다. 군인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수통을 건네며 마시게 했다. 실험체 384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수통 입구에 입술을 대고 마시는 척했다.

이미 음식을 먹어버려 흡수된 약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토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봤다. 도대체 군에서는 실험체들에게 무슨 약을 먹인 걸까. 적어도 지사제처럼 귀여운 수준은 아닐 테다. 우린 지금 사람을 죽이러 가는 길이니 말이다.

전쟁 중이라고 해서 그 국경에 철조망을 세워두거나 벽이라도 놓은 줄 알았는데 그런 국경선 따위는 없었다. 그냥 옆집 아이가 이웃집에 놀러 가듯 러시아를 벗어날 수 있었다.

대신 확연한 차이라면 러시아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검문소를 지나쳐 다른 나라에 들어서자마자 풍경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길을 가는 곳곳 폭발의 흔적으로 폐허가 된 도시가 나왔다.

군용 트럭은 검게 탄 흔적이 남은 흉벽을 따라 도시를 지나쳤다. 전봇대가 부러지면서 함께 끊어진 전선이 머리채처럼 늘어져 있었고, 비릿한 혈 향과 썩은 내가 바람에 실려왔다.

유령의 도시처럼 살아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실험체들은 모두 입에 접착제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진짜 아기처럼 생긴 플라스틱 인형이 길바닥에 놓여 있었다. 저것을 가지고 놀았을 아이는 어디로 사라져버린 걸까.

실험체 384는 무거운 마음으로 인형을 시야에서 놓지 않았다. 트럭이 계속 바퀴를 굴리면서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정면을 향하게 되었다.

이동하는 동안 해가 저물어서 야영하게 되었다. 실험체들을 인솔하던 군인이 트럭을 멈춰 세웠다. 2열로 줄을 선 실험체들은 오랫동안 딱딱하고 돌부리 하나에도 크게 출렁이는 트럭을 타고 와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다.

“이곳에 텐트를 칠 거다.”

그는 실험체들의 머리통을 툭툭 치면서 골랐다.

“너, 너, 너. 1조. 너희는 2조. 3조, 4조는 너희다.”

군인은 사람이 아닌 감자라도 고르는 듯한 손짓으로 조 편성을 마쳤다. 1조는 땅에 못질해서 텐트 기둥을 세웠다. 그런데 텐트는 단 하나였다.

완성된 텐트에 군인이 들어갔다. 실험체 384는 그가 언제 나올까 싶었는데 트럭에서 쉬고 있던 운전병이 철 양동이를 대롱대롱 흔들면서 걸어오더니 실험체 몇 명에게 명령했다.

“2조!”

“Yes, sir”

실험체 384는 2조였다. 군인에게 배운 대로 네 명의 실험체들이 대답했다.

“저기 가면 강 있으니까 물 떠와. 한 시간 정도 걸으면 나올 거야. 야, 넌 쟤네 제대로 일하는지 감사하고 와.”

운전병이 2조 중 한 명을 골라 감시자로 삼았다. 갑자기 다 같은 처지인 주제에 감시자가 된 놈이 나뭇가지를 주워서 우리의 등을 찔렀다.

“빨리빨리 움직여.”

실험체들은 투덜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발걸음을 뗐다. 한 시간을 걸어서 강에 가니 강물이 얼어 있었다. 물을 뜨기 위해 실험체 356은 불덩이를 허공에 만들어서 강에 던졌다. 빙판이 녹아내렸다.

능력을 사용한 탓에 그 부작용으로 그가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굴렀다.

“아아아. 아파. 아파. 타들어가! 내 몸이 녹아내리고 있어.”

환상통에 시달리는 실험체 356은 자기 몸이 탄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얼음물로 뛰어들었다. 그는 다시 물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 실험체들은 그가 죽어버린 탓에 한 명이 양동이를 두 개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며 죽은 그를 욕했다.

실험체 중 가장 막내인 실험체 384가 356의 몫까지 떠맡게 되었다. 물이 든 무거운 양동이를 양손으로 쥔 채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걸을 때마다 물이 흘러서 처소로 돌아왔을 땐, 처음 물을 떴을 때보다 3분의 2로 줄어들어 있었다.

손바닥에 양동이 손잡이를 잡느라 빨간 줄이 남았다. 빨갛게 변한 손바닥을 주무르며 모닥불 근처에 앉아 쉬었다. 운전병은 가져온 물을 모닥불에 올려서 끓였다.

요리할 때 사용할 물을 가져오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힘들게 가져온 물을 어느새 생긴 휴대용 욕통에 부어버렸다. 고작 세 명이 갔다 온 터라 큰 욕통을 채우기에 물은 턱 없이 부족했다.

운전병은 3조를 불렀다. 빈 양동이를 다시 실험체들에게 주며 강에 물을 뜨러 다녀오라고 했다. 비생산적이고 아무런 의미 없는 학대일 뿐이었다. 그러나 운전병의 명령에 실험체들은 토를 달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왕복 두 시간에 걸쳐 물을 떠왔다.

5조까지 모두 그 짓을 해 욕통에 물을 채우니까 텐트 안에 들어가 있던 군인이 나왔다. 그가 욕통에 손을 담가서 온도를 재더니 혀를 찼다.

“차갑잖아!”

“죄송합니다, 병장님.”

병장은 군인 계급 중 아주 높은 게 틀림없었다. 실험체 384는 운전병이 쩔쩔매는 군인이 아주 대단한 인물이어서 우리를 통솔하고 전쟁하러 온 것이구나 싶었다. 욕통에 담아둔 물을 다시 양동이로 떠서 모닥불에 데웠다.

몇 번이나 그 짓을 한 실험체 326은 얼굴에 숯검정이 잔뜩 묻었다. 병장은 옷을 벗고 뜨거운 욕통 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실험체들이 모닥불 주위에서 몸을 녹이는 걸 본 그가 혀를 찼다.

“야, 이 새끼들아, 너희가 한 게 뭐 있다고 쉬어. 일어서.”

양동이를 나르느라 지친 실험체들이 지척거리며 일어났다.

“등 돌리고 서. 팔을 뒷짐 진다. 실시.”

병장의 명령에 우리는 나무밖에 없는 곳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병장이 다 씻고 욕통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욕통에 있는 물을 양동이로 퍼서 다시 모닥불에 데웠다. 이번에는 운전병이 욕통에 들어갔다.

“크흑. 죽입니다, 병장님. 설마 전쟁터에서 뜨끈한 목욕을 할 수 있을 줄이야.”

“그래, 새끼야. 나 믿고 따라오길 잘했지? 이게 완전 꿀 보직이야. 실험체들 대충 던져놓고 우린 복귀하면 돼.”

실험체 384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웠다. 바로나는 모닥불에 앉아서 불을 쐤다. 군인들은 바로나가 신경도 안 쓰이는지 욕통에서 와인 병을 땄다. 술에 취한 군인들은 러시아 민요 「코로비니키(방물장수)」를 불렀다.

“아, 내 짐은 가득 차 있네. 무명천과 양단으로. 사랑하는 이여, 이 남자의 어깨에 있는 가엾음을 덜어주시게.”

캄캄한 밤하늘에 곤드레만드레 취한 군인들의 노랫소리만이 흥겨웠다. 왜 전쟁하는지도 모른 채 끌려온 실험체들은 뒤돌아서서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서글픈 콧물을 들이켰다. 목욕을 끝낸 군인들은 욕통을 덩그러니 버려두고 텐트 안으로 자러 들어갔다.

실험체들은 새까맣게 탄 양동이에 물을 떠서 다시 끓였다. 군인들처럼 팔자 좋게 씻으려는 게 아니라 마시기 위해서였다. 아침밥을 먹고 저녁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물 뜨러 걸어 다녔다. 그들은 뜨거운 물을 호호 불어가며 추위를 달래고 물배를 채웠다.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던져 불을 키웠다. 실험체 384를 제외하고는 다들 다닥다닥 달라붙어서 서로 체온을 나눴다. 집단에서 따돌림을 받는 그를 조용히 따라다니던 바로나가 끌어안아 줬다.

그의 넓은 품 안에 안겨 있는데도 온몸이 떨리는 걸 보면 오늘 날씨가 무척 추운 것 같았다.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그가 나지막하게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어쩌면 이대로 얼어 죽지 않을까 생각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푸른색 안개가 낀 새벽에 텐트 안에서 군인들이 나왔다. 병장은 꺼질락 말락 한 모닥불을 나뭇가지로 뒤적거리며 불을 살려냈다. 바닥에서 뒹굴던 양동이를 챙긴 그가 욕통에서 살짝 언 물을 떠서 끓였다.

거기에 인스턴트 수프 가루를 한 포대 풀어 넣었다. 포크로 휘휘 젓는 병장을 보며 운전병이 물었다.

“어차피 죽으라고 데려온 놈들인데 뭐 하러 돌봐줍니까.”

“누가 돌본대? 어차피 뒈지라고 데려온 건데.”

그들은 텐트 안에서 간단하게 전투식량 먹었지만, 실험체들은 계속 굶은 상태였다. 몹시 지치고 춥고 배고플 거다.

병장은 수프 안에 헤로인과 가솔린을 섞어 넣었다. 굶주린 실험체들은 이걸 먹을 수밖에 없었다. 정부에서는 실험체를 위해 식량을 조달해주는 인력과 돈을 쓸 수 없다며 마약에 가솔린을 타서 먹이게 했다.

이 합성 마약을 먹은 실험체들은 배고파하지 않았고, 별 볼 일 없는 후천적 에스퍼의 능력조차 한 단계 등급이 높아졌다. 대신 피부가 녹빛으로 썩어 들어갔고 심각한 마약 중독자가 되었다.

합성 마약에 취한 실험체들은 마약을 얻기 위해 군에 복종하게 됐다. 그리고 스스로를 전지전능하다 믿으며 능력을 난발하다가 폭주해 죽어갔다. 병장은 양동이 속 수프를 포크로 휘저으며 죽어가는 벌레를 보고 짓궂게 웃는 아이처럼 크크크 웃었다.

* * *

잠에서 깬 실험체들은 모닥불 위에 한 솥 끓인 수프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땡큐, 썰’을 외치며 수저를 떴다. 출출한 실험체 384도 다른 실험체들 틈바구니에서 끼어서 먹으려고 했는데 바로나가 그를 잡아당겼다.

“왜 그래요?”

허공에 대고 말하는 실험체 384를 보고 다른 실험체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로나가 뭐라고 떠들었지만, 그가 아는 한국말은 ‘엄마, 안녕하세요, 김치, 불고기, 감사합니다, 맛있어요’ 정도밖에 없었다.

“이따가 이야기 들어줄게요.”

바로나는 화가 난 듯 두 팔을 허리춤에 걸쳤다. 그가 그러다가 숲속으로 뛰어들어 가버렸다. 실험체 384는 수프와 바로나를 번갈아 보다가 손에서 수저를 놓았다. 바로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리를 떠나려고 하니까 운전병이 어디 가냐고 물었다.

“화장실 다녀올게요.”

“개수작 부리지 말고 여기서 싸.”

“똥이에요.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쌀게요.”

그는 당장이라도 바지를 내릴 것처럼 잡아당겼다. 운전병이 혀를 차며 빨리 다녀오라고 했다.

“도망가기만 해. 총살해버릴 거니까.”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숲으로 들어서자 따라잡기 바란다는 듯 멈춰 서서 기다리던 바로나가 다시 움직였다.

“도대체 어디에 가는 거예요.”

둘은 숲 안에서 뱅글뱅글 돌며 술래잡기했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아서 걱정되었다.

“늦으면 저 큰일 나요. 어서 돌아가요.”

바로나는 술래잡기하고 싶었는지 재미있게 놀다가 순순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왔을 때는 이미 양철통이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바로나를 째려봤다. 그가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팔과 어깨를 들썩였다.

떠날 시간인지 텐트가 걷히고 욕통을 굴려서 군용 트럭에 실었다. 병장이 군화로 흙을 모아서 모닥불을 덮었다.

“다 먹었으니 이동한다. 2열 종대로 서!”

병장이 실험체들을 줄 세우고 인원수를 확인했다.

“트럭에 올라탄다. 실시.”

실험체들은 줄 맞춰서 군용 트럭에 올라탔다. 눈이 시뻘겋게 된 실험체들이 입에서 침을 질질 흘렸다. 굶주린 짐승처럼 잔뜩 화가 난 그들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바로나가 왜 수프를 못 먹게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실험체 384는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그에게 누가 들을세라 ‘감사합니다’ 하고 한국말로 인사했다. 그러자 바로나가 흥분해서 빠르게 한국어를 늘어놓았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거렸다.

“미안해요. 나 한국말 잘 몰라요. 그래도 나중에 연구소에 돌아가면 바로나가 나 한국어 가르쳐줘요.”

러시아어를 모르는 바로나였지만 자신이 한 말을 알아들었길 바랐다. 언젠가 우리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를 실은 트럭은 살육으로 더럽혀진 지평선을 따라 나아갔다. 그리고 자신의 배에서는 계속 고동 소리가 났다. 하지만 다른 실험체들처럼 이상해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주린 배를 손으로 감쌌다.

실험체들과 달리 자신은 멀쩡하다는 의심을 피하고자 그들을 따라 하는 연기를 했다.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초점을 흐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바로나는 자신이 연기 중이라는 걸 알고 말 걸지 않은 채 곁을 지켰다.

병장은 트럭 안에 탄 실험체들을 둘러보고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본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게 그가 꾸민 짓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민간 지역에 도착할 거다. 배고프면 죽이고 빼앗아라. 보급은 없다.”

그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우리가 제대로 식사를 못하는 건 적국이 우리의 보급선을 차단해서이다. 싸워라, 영광스러운 러시아를 위하여. 죽여라, 살아남는 자가 영웅이 될 것이다.”

실험체 중에서 오직 384만이 병장의 거짓말을 알았다. 군에서는 애초에 우리가 먹을 식량을 챙기지 않았다. 그러니 묽은 수프에 이상한 약을 타서 멍청이로 만들어버린 거다. 우린 여기에 버려지러 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다가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총알 세례를 받게 되었다. 트럭이 멈춰 섰다. 트럭에서 실험체들이 비틀거리며 내렸다.

그들은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총에 맞아도 고통을 못 느낀 채 적군에게 달려들었다. 기관총을 든 자신도 싸워야 했지만, 사람을 죽이기 무섭고 싫었다. 벌벌 떨며 군용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전투가 일어난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창문이 깨진 집 중 멀쩡해 보이는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미 누군가가 약탈해 간 것처럼 서랍들이 뒤집혀 있었고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곳을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군복을 입지 않은 사내와 마주쳤다.

러시아인처럼 생긴 그가 러시아어로 외쳤다.

“움직이지 마.”

실험체 384는 왜 적이 자신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적군은 자신에게 총을 겨눈 채 위협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시간에 차라리 총을 쏘는 게 낫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자신의 앳된 얼굴을 보고 죽이지 못하는 거였다. 참 웃긴 일이었다. 자국 군인보다 적군의 사내가 더 우리를 사람 취급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능력을 사용하지 마. 부탁할게.”

그는 실험체들이 왜 자기네 나라에 방문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실험체들은 군복도, 헬멧도 쓰지 않은 채 연구소에서 입었던 환자복만 걸치고 있었다. 제정신이라면 이런 복장으로 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거다.

실험체 384는 두 손을 위로 든 채 얼어붙었다. 그러다가 허벅지에 총알을 맞았다. 코앞에서 위협하는 남자의 짓은 아니었다. 그가 허벅지에 맞은 총알이 통과해 자신 또한 그 총알에 맞은 것이니 말이다.

터질 것처럼 아픈 다리를 손으로 붙잡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피를 흘리며 집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병장이 저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는 현관에 쓰러진 적군의 손을 발로 차서 총을 빼앗았다.

누군가 살았을 집 안은 다친 두 사람 때문에 피 웅덩이가 생겼다. 실험체 384는 허벅지에 박힌 총알을 빼내기 위해 상처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으으.”

추위 속에서도 땀으로 전신이 흠뻑 젖었다. 그는 총알을 빼는 것만으로도 전력 질주로 달린 사람처럼 지쳐버렸다. 서서히 총을 맞은 상처가 아물어갔다. 고통이 사라지는 걸 느끼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방금 총을 쏴 뜨거운 총구가 자신의 이마에 닿았다. 살 타는 냄새가 자신의 코끝을 간질였다.

“뭐 하나, 실험체. 적을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는 거다. 죽여라.”

병장의 군화가 다 아문 허벅지를 지르밟았다.

“죽여. 죽이라고!”

병장은 큰소리로 윽박질렀다. 실험체 384는 기관총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눌렀다. 총알이 사방으로 휘갈겨졌다. 총알이 발사될 때마다 섬광이 번쩍번쩍 터지는 듯한 엄청난 자극이 자신의 머릿속을 마비시켰다.

자신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외쳤던 병장도, 제발 능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부탁했던 적도 겨우 손가락 하나 까딱했을 뿐인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바닥에 널브러졌다. 자신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울었다.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죽였다. 사람을 죽이는 게 나쁘다는 것쯤은 알았다. 만약 엄마와 함께 산 기억이 없었다면 몰랐겠지만, 인간이라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은 연구소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배웠다.

“엄마, 무서워요. 엄마, 너무 추워요. 엄마……, 나 살고 싶어요.”

시체 두 구와 함께 실험체 384는 구슬피 통곡했다. 기차역에서 엄마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면 그는 이런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자신이 진짜 러시아인이기만 했어도 경찰은 부모님을 찾아줬 거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상아색 피부를 가진 동양인. 자신과 바로나는 같은 한국이었다.

“차기주, 네 과거가 너무 아파.”

그는 두 팔로 자신을 안아주는, 어쩌면 유령일지도 모르는 사내에게 큰 위로를 받았다. 실험체 384는 바로나의 등 뒤로 손을 뻗어 감쌌다.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미래에서 온 내 연인이었으면 좋겠어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지만, 상대를 원하는 애틋한 눈은 같았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눈물이 맺힌 검은 눈동자 속 자신의 모습을 봤다.

“그럼 당신이 날 구해주러 온 거란 뜻이니까 조금 괜찮을 것 같아요. 이 삶도 포기하지 않고 당신을 만나러 한국으로 갈 희망이 생기니까 그래 줄래요?”

실험체 384는 자신의 이야기가 뭔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우는 바로나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 바로나가 사람이 아닌 실체가 없는 영혼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당신을 만나서 위로받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어요. 고마워요, 나의 하얀 까마귀.”

바로나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봤다.

“이제 괜찮아?”

한국어였지만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았다. 실험체 384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모스크바 기차역으로 갈 거예요. 어쩌면 엄마가 계속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병장이 들고 있던 기관총을 빼앗아 자신의 빈 기관총과 바꿨다. 버려진 집을 나와 무작정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걸었다. 전쟁이고 뭐고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자신은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

약에 취한 실험체들은 능력을 난발하며 적군을 죽이고 있었다. 그 잔인한 짓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벽 뒤에 숨어서 움직이다 보니까 이동 속도가 오래 걸렸다. 이대로 잘만 하면 도망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한 명을 다섯 명이서 일방적으로 구타하고 있던 실험체들이 발길질을 멈췄다. 그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왔다. 전기를 화살처럼 쏜 실험체가 자기 능력을 사용하고 불안정 파동 에너지를 다스리지 못해 몸이 터져 죽었다. 손에 얼음송곳을 만들어낸 실험체도 자기 능력을 사용하다가 폭주했다.

자신에게 한꺼번에 몰아치는 실험체들의 공격을 막아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공격 능력으로는 그럴 수 없었다.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주저앉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자신의 앞을 바로나가 가로막았다. 그가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전기 화살도 얼음송곳도, 그 밖에 다른 실험체들이 한 공격 능력도 전부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능력을 사용한 실험체들은 공격에 성공하지 못한 채 알아서 자멸했다. 차기주는 신처럼 보이는 바로나를 올려다봤다.

“당신은 날 구원하기 위해 온 신인가요?”

유령도, 미래에서 온 영혼도 아니라면 이 완벽한 자는 신일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린 그는 바로나에게 얼른 도망치자며 발길을 돌렸다. 실험체들을 인솔했던 또 다른 러시아 군인 운전병이 그런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어딜 가려는 거지.”

“전 싸우고 싶지 않아요.”

“우리 모두 싸우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차르가 하는 명령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내 가족들이 전부 총살당할 거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그게 무슨. 난 가족 없어요.”

엄마가 있긴 했지만, 보육원에서 자신을 산 연구소가 거기까지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네 아이를 임신한 오메가. 죽어도 되겠어?”

“네? 제 아이라고요?”

운전병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운전병은 자신이 시치미를 뗀다고 생각했는지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실험체 중 우성 오메가가 있었다던데. 너랑 각인하고 임신했다지.”

‘아…….’

실험체 384는 발렌틴과 연인이었던 연구원 이름이 블라디미르라는 걸 떠올렸다. 그와 자신의 이름이 같아서 연구소에서 오해한 거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의 본명을 알고 있는 거면 엄마의 행적도 연구소에서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발렌틴을 풀어주겠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자신의 약점으로 잡아둔 걸 보면, 자신이 말을 듣지 않을 시에는 엄마가 위험해질 거다.

이미 연구소 인간들이 어떤 악마들인지 아는 자신은 억울한 척하며 운전병을 속였다.

“연구소에서 발렌틴을 풀어줄 거라고 약속했잖아요.”

“순진하게 그 약속을 진짜 지킬 거라고 믿은 거야?”

자신이 아무 말 않고 걱정되는 표정을 짓자 운전병이 의기양양해졌다.

“네가 도망치면 그놈을 죽일 거다.”

“발렌틴은 여전히 연구소에 있나요?”

“그래. 그놈 목숨이 아깝거든 날 따라. 우린 드니프로강으로 가야 한다.”

군인에게도 지켜야 하는 가족이 있고, 자신에게도 지켜야 하는 엄마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드니프로강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착해야 했다. 이상한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실험체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육을 벌였다.

아군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을 피해 숨어야 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군용 트럭을 주차해둔 장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한참 시간이 흘러 하늘이 주홍빛으로 익어갔다.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면 누구든 트럭을 훔쳐 갔을 텐데 우리 빼고는 다 죽어서 도난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왜 그동안 트럭을 타고 지나오는 내내 아무도 없는 폐허만 계속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이미 수많은 실험체가 이렇게 적국에 버려진 거였다. 운전병은 혹시라도 자신이 수송 칸에 혼자 탔다가 뛰어내려서 도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조수석에 앉혔다.

그는 정면을 주시하며 운전했다. 노을은 순식간에 지고 컴컴한 밤이 되었다. 건물은 다 무너지고 인공적인 조명이 없는 컴컴한 도시의 거리에 이리들이 내려와 눈을 빛내며 어슬렁거렸다. 하우우우.

동료를 부르는 하울링이 보름달 그림자가 걸린 군용 트럭까지 들려왔다. 자신은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바로나가 제대로 자신을 따라오고 있을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딸이 있어. 올해 다섯 살이 되었는데 올 때 카르토슈카(감자 빵)를 사 오라고 했어. 그 말을 들은 지 벌써 1년이나 지났어.”

그가 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대꾸하지 않고 턱을 괸 채 창문 너머 어둠 속을 배회하는 야생동물의 눈을 마주했다. 그는 딱히 자신과 대화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다시 조용히 운전했다.

이틀 동안 굶은 탓에 위장이 쥐어짤 듯 아팠다. 배를 손으로 움켜잡으며 꼬르륵 소리를 숨겼다. 운전석에 앉은 운전병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군복 주머니에 있던 초코바를 꺼내서 건넸다.

“아침에 왜 수프를 안 먹었지. 넌 알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포장지를 어떻게 뜯어야 하는지 몰라 헤매는 자신에게서 운전병이 초코바를 가져가서 까줬다. 입 안에 달콤한 초코바가 들어오자 침이 가득 고였다. 오래전 슈퍼 가게를 했던 표도르 아저씨가 줬던 그 맛이 떠올라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흐흡, 흑. 흐끅. 흑.”

실험체 384는 ‘아가’라고 불렸던 시절이 너무나 오래 지나버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자신이 아가가 아니어서 엄마가 알아보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자신은 혹시라도 그녀가 위험해질까 봐 드니프로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며칠 노숙을 하며 도착한 목적지에는 러시아군들이 전선에 참호를 파고 눌러앉아 있었다. 실험체 384는 연구소에서 실험체들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부대를 통솔하고 있던 장군이 피를 뒤집어쓴 채 씻지 못해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자신에게 말했다.

“저 반대편에 가서 적장의 목을 가져오는 거다.”

“장병들은 뭘 하고 저 같은 실험체에게 그런 중요한 임무를 시키시는 건가요.”

당돌한 실험체 384의 질문에 운전병은 화냈다.

“입 닥쳐. 장군님께 무슨 무례한 짓이냐. 죽고 싶은 거냐, 실험체!”

“됐다, 일병 보리스. 왜냐고 물었나.”

장군은 돌멩이를 주워서 구덩이 밖으로 던졌다. 반대편에 있는 적군의 참호에서 총알 세례가 쏟아졌다. 땅에 떨어진 돌멩이는 지뢰를 건드리고 터졌다. 참호 안으로 돌 부스러기가 쏟아졌다. 지친 러시아군은 얼굴에 떨어진 흙가루를 손으로 훑어 내렸다.

“지뢰밭이라 도저히 이곳을 건널 수 없어. 이 너머에 적의 수도가 있는데 벌써 3달째 드니프로강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수도를 함락하지 못하고 있지.”

장군은 그동안 실험체들을 벌레보다 하찮게 여기던 사람들과 달리 자신이 궁금한 걸 알려줬다.

“실험체, 네가 만약 이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면, 차르께서 널 황실 에스퍼로 임명해줄 거다.”

1차 대변혁 이후 러시아는 절대군주제로 체제를 바꿨다. 어차피 그전까지도 독재자가 나라를 다스렸다는데 차르가 에스퍼로 각성하면서 아예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은 차르에게 충성을 바치지 못해 안달 난 사람 중 한 명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곳에 온 건 연구소에서 엄마를 건드리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장군은 자신이 죽을 거라는 걸 알아서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준 거였다. 자비로운 사형집행관이었다. 말은 그럴싸하게 했지만 무방비하게 참호를 나서면 결국 자신은 개죽임당하게 될 것이다.

“저에게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압승할 방법이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어요?”

실험체 384가 하는 말에 장군은 잠시 고심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실험체 384는 영민하게도 트럭을 타고 오면서 늑대를 봤다며 그들을 이용해 지뢰를 제거하자고 했다. 그 방법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는지 장군이 명령을 내리자 군인들이 전투식량에 있는 육포들을 꺼내서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뭇가지와 고무줄로 새총을 만들어서 육포를 지뢰밭에 투척했다. 늑대든, 새든 날아와서 지뢰를 건드리면 됐다. 하늘을 날던 새들이 육포를 집어 먹기 위해 지뢰밭으로 내려왔다. 지뢰가 사방에서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폭발해서 살점이 조각조각 난 새들의 사체가 메마른 땅을 적셨다. 밤에 야생동물이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해가 저물고 어슬렁거리며 늑대들이 고기 냄새를 쫓아서 왔다. 오랫동안 굶은 늑대들은 새들의 피와 살, 육포의 기름진 냄새에 군침을 흘리며 지뢰밭에 뛰어들었다. 밤하늘에 폭죽놀이를 하듯 지뢰가 터져나갔다.

화약 냄새와 고기 타는 냄새가 뒤섞여 서늘한 밤바람에 실려 왔다. 군인들은 참호에 웅크리고 자고 있다가 코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러다가 오랫동안 씻지 못한 탓에 자기들한테서 나는 땀내와 썩은 체취에 힘들어 코에서 손바닥을 떼어냈다.

이제 동물들도 눈치가 있어서 지뢰밭으로 뛰어드는 짓을 하지 않을 거다. 그렇지만 이미 동물 사체가 있는 장소는 지뢰가 터져서 안전한 구역이 되었다. 그곳만 골라서 걸으면 충분히 적진으로 돌진할 수 있었다.

장군은 아침이 밝자 실험체 384를 불렀다.

“준비되었나.”

“네, 뒤에서 지원 사격 부탁드립니다.”

어디서 배웠을 리가 없는데, 실험체 384는 타고나길 뛰어난 지략가였다. 그의 전술은 훌륭했다. 장군은 피를 뒤집어써서 제대로 얼굴조차 볼 수 없는 이 존재가 언젠가 세상을 뒤흔들 지배자가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미리부터 이런 자와 척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실험체 384가 기관총을 챙겨서 참호를 기어 올라갔다. 상대편 전선에서 총알이 비처럼 쏟아졌다. 바닥에 빠짝 엎드린 그는 팔꿈치로 땅을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안전 구역끼리의 거리가 멀어서 기어갈 수 없게 되었다. 실험체 384는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동물 사체가 있는 장소만 쏙쏙 골라서 징검다리를 건너듯 뛰었다. 에스퍼의 신체 능력은 아주 특별했다. 어느새 적군의 참호에 도착한 실험체 384는 기관총을 난사했다. 상대방도 총을 쏘는 바람에 그는 팔다리와 복부, 허벅지 등 온몸에 총알 세례를 맞았다.

그렇지만 러시아에서 개발한 인간 병기는 참호에 있는 모든 군인을 죽였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이대로 죽는 건가, 새롭게 뜨거운 피를 뒤집어쓴 그는 생각했다. 바로나는 역시 신인가 보다. 그에게는 그 어떠한 지뢰도, 총도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바로나가 실험체 384의 몸에 박힌 총알을 손으로 빼냈다. 그러자 빠르게 새살이 차올랐다. 그는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상처가 회복된 부위와 같은 부위에 바로나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해. 그만해, 바로나!”

바로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환자에게서 빠르게 총알을 빼내 상처를 회복시켰다.

“안 돼. 이러다가 네가 죽을 거야.”

바로나는 자신의 걱정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아요? 안 죽어요?”

바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자신의 말을 알아들은 건가 싶어 의아해져서 쳐다봤다.

“내 말 알아들어요?”

바로나는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기만 했다.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냥 눈치껏 대화 내용을 맞힌 것뿐이었지만. 그가 총알을 다 빼내자 몸이 전보다 가뿐해졌다.

반면 바로나는 자신의 상처를 가져간 듯 피를 줄줄 흘렸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꼭 잡았다. 실험체 384는 바로나의 손을 잡고 지뢰밭으로 올라섰다. 러시아군 참호에서 환호성이 우렁차게 흘러나왔다.

피를 뒤집어쓴 영웅이 지뢰밭에서 무사히 돌아왔다. 이번 실험체는 그동안 봐온 에스퍼들과 달리 엄청난 존재였다. 군인들은 러시아 과학 수준은 세계 최고라며 국가 우월주의로 가득한 말을 했다.

장군은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승리를 끌어낸 실험체 384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가 그냥 실험실의 쥐로 살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모스크바 연구소장 이고르의 예상과 달리 실험체 384는 엄청난 업적을 세우고 복귀하였다. 그렇지만 밖에서만 영웅이었지 그는 여전히 실험 쥐와 같은 신세였다. 피가 딱딱하게 굳은 실험체 384를 씻기기 위해 감시자들이 공용 샤워실로 데려갔다.

알몸으로 벽을 짚고 선 실험체 384에게 호스로 강한 물줄기를 뿜어내며 물건처럼 씻겼다. 몸이 차게 식은 그는 불안정 파동 에너지를 측정하기 위해 이동했다. 커다란 돔처럼 생긴 자기장 기계에 들어갔다.

45%. 폭주하기에는 아직 이른 수치다. 그는 폐기 보류 처분을 받았다. 그렇다고 방에서 편하게 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바로 아프로디테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는 실험체 0에게 이상 반응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실험체 0의 온몸에 구멍이 뚫리더니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상처를 봉합하고 수혈용 혈액 팩을 열 개씩 달아놓아서 간신히 살렸다. 실험체 0을 대체할 에스퍼 실험체를 빨리 데려와야 했다. 그래야 실험체 384의 팔과 다리를 잘라서 실험체 0에게 돌려줬을 때, 둘을 다 잃게 되어도 그들을 대체할 보험이 생기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연구소 사정을 까맣게 모르는 실험체 384는 어떻게 하면 연구소의 감시망에서 엄마를 구해낼 수 있을지만 골몰했다.

임신한 발렌틴도 연구소 어딘가에 갇혀 있다니 구해줘야겠지만, 그를 구해내기 위해 희생해야 할 것을 계산해보면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연구원 블라디미르가 진짜 각인한 알파이니 그가 어련히 발렌틴을 구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참에 그는 실험체로 사용할 에스퍼를 납치해오라는 임무를 받았다. 연구소 밖으로 나가 도심에 들어가면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모스크바 연구소가 노리는 A급 에스퍼는 지적장애를 앓고 있었다. 아무리 에스퍼 능력이 있어도 반격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거다. 나름 자신에게 성공 확률이 높은 상대를 골라준 거였다. 아마 납치당하면 자신과 똑같은 처지가 될 테다.

그래서 실험체 384는 그 아이를 납치하지 않기로 했다. 자신은 임무를 핑계로 연구소에 나가 엄마만 찾으면 됐다. 그녀를 찾으면 함께 도망칠 생각이었다. 아주 멀리.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눈을 감고 오래전 기차역에서 헤어진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흐릿해서 알 수 없었다. 과연 자신은 그녀를 보고도 알아볼 수 있을까? 어쩌면 자신이 그녀를 몰라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잠시 엄습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 * *

납치할 에스퍼에 대한 자료가 종이에 적혀 있었지만, 글을 배우지 못한 실험체 384는 읽지 못했다. 이고르는 당연히 그럴 거라는 걸 알고서 서류를 건넨 것이다. 실험체 384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이바노프였다.

누가 봐도 동양인인 얼굴과 퍽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친아버지가 러시아인인 탓이었다. 그래서 먹은 것도 없으면서 덩치가 크고 선이 굵게 자란 듯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힘들게 이국에서 살아가는 그의 어머니는 동네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러시아인과 재혼해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가 이번에 납치할 지적장애가 있는 에스퍼 이반이었다.

이반은 국가에서 에스퍼 검사를 통해 A등급이라는 게 밝혀졌지만, 전혀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라 버림받았다. 이고르에게는 천운이었다. 등급이 높은 만큼 생체 회복 능력도 좋아서 아프로디테 프로젝트에서 써먹기에 좋았다.

특별한 실험체 384와 더불어 그의 이복동생까지 높은 등급의 에스퍼인 걸 보면 어머니의 유전자에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새로운 에스퍼 실험체를 납치해오면 그놈을 잠재우고 어머니도 납치해와야겠다. 에스퍼가 아닌 일반인 한 명을 납치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가둬놓고 계속 아이를 낳게 하다 보면 샘플을 획득할 수 있을 테다. 만일 그녀가 낳은 아이들이 전부 에스퍼로 각성하면 난자를 채취해 대리모 여러 명에게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게 해 에스퍼를 대량 생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고르는 그렇게 생각하자 한계에 부딪힌 프로젝트에 한 줄기 빛이 내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서류에 있는 사진을 뚫어지게 보는 실험체 384 때문에 약간 불안했다. 설마 자기 동생이라는 걸 알아본 건가?

“왜? 뭐 문제 있나?”

“아니요.”

“이반은 모스크바역에서 장미를 파는 어머니와 함께 출퇴근한다더군. 지적장애가 있어서 납치하기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야.”

“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가고 싶어 한 모스크바역이 지적장애를 앓는 어린 에스퍼를 납치해야 하는 임무 지역이었다. 실험체 384는 어쩌면 엄마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설마 자신을 계속 찾을까 하는 걱정, 어린 에스퍼를 납치해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감시 겸 이동 역을 맡은 에스퍼 군인과 함께 연구소를 나왔다. 지프 트럭을 타고 모스크바역으로 가는 내내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군인은 굳은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는 실험체 384에게 말했다.

“블라디미르가 전해달라고 하더군. 발렌틴이 비밀 장소에 감금되어 있다고. 오늘 에스퍼 납치에 성공하면 연구소 사람들의 관심이 죄다 거기에 쏠릴 테니 그 틈에 도와달라더군.”

블라디미르가 자기 오메가를 찾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사람을 통해 도움을 청할 줄은 몰랐다. 식당에서 자신이 목숨을 걸고 친구를 구해줘서 그런 것이리라. 자신의 나약함이 부메랑처럼 위험한 일을 몰고 왔다.

“죄송해요. 그런 위험한 일에 끼고 싶지 않아요.”

“그래, 네 선택을 존중해.”

에스퍼 군인이 지프 트럭을 몰면서 개인 핸드폰을 사용해 블라디미르에게 전화했다.

“이봐, 친구. 아무래도 힘들겠대. 너도 알다시피 실험체 384가 무슨 힘이 있어. 그 녀석이 불쌍하지도 않아?”

―지금 실험체 384 옆에 있어?

“응. 스피커폰으로 바꿔줄게. 얘기해보라고.”

에스퍼 군인은 둘이서 이야기해보라며 빠졌다. 핸드폰에서 흥분한 블라디미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수백 명을 한꺼번에 죽일 만큼 강하다며.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며! 그런데 임신한 자기 친구를 구하지 않는 건 뭐야. 그렇게 너 혼자 살고 싶냐!

발렌틴은 그의 오메가였다. 실험체 384의 오메가가 아니라. 왜 그가 자기 몫을 자신에게 떠미는지 실험체 384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식당에서도 연구원들이 발렌틴을 괴롭힐 때 한마디도 안 했었지. 그는 비겁한 자이고 발렌틴의 알파로 살아갈 자격이 없는 자였다.

실험체 384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블라디미르가 정신병자처럼 괴성을 지르며 화냈다.

“어휴. 이 친구가.”

에스퍼 군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통화를 끊어버렸다. 또다시 전화를 걸어왔지만, 그는 아예 핸드폰 전원을 껐다.

“미안하다. 이러려고 둘이 통화하라고 한 건 아닌데.”

에스퍼 군인이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하며 웃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에스퍼 군인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험체 384는 연구소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악인이라고 여겼는데, 어쩌면 그들이 자신을 하찮은 존재라고 확신하듯 자신 또한 연구소 사람들을 악인이라고 일반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면 이 세상도 그리 나쁜 곳만은 아닌가 보다.

자신이 계속 창밖만 보고 있어서 그런지 그가 창문을 내려줬다. 쌀알 같은 눈이 느릿느릿 춤을 추듯 내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눈을 만져봤지만, 체온에 닿자마자 녹아서 사라졌다.

복잡한 모스크바 기차역 앞에 지프 트럭이 멈춰 섰다.

“이제 내리자.”

에스퍼 군인이 말했다. 실험체 384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어느새 왔는지 바로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자신도 어설프게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는 모스크바역 안으로 들어갔다. 에스퍼 군인은 역무실에 들러 역무원과 대화를 나눴다. 역무원은 개찰구 옆에 있는 문을 열어서 우리를 들여보내줬다.

역사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는 외국인 여행객과 친구들끼리 수다를 떠는 10대 무리, 무거운 짐을 나르는 중년의 사내,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다양한 성별과 나이의 사람들이 기차를 기다렸다. 어린 시절과 와닿는 느낌이 달라서 신기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는데 에스퍼 군인이 팔꿈치로 자신을 쳤다.

“저길 봐. 저기 장미를 파는 중년의 여자와 같이 있는 게 네 목표야.”

중년의 여자가 장미를 팔고 있었다. 아이의 허리에 줄을 매달아 자기 허리에 묶어둔 모습에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갔다. 그러면 중년의 여자가 미아 찾기 전단으로 보이는 종이를 내밀면서 장미꽃을 팔았다.

젊은 여자가 미아 찾기 전단을 보더니 중년의 여자에게서 장미꽃을 샀다. 실험체 384는 시끄러울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엄마가 일하는 동안 심심한지 의자에 앉아 다리를 바동거리던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외쳤다.

“형아!”

실험체 384는 자신의 얼굴에 아직 어린 시절의 모습이 남아 있구나 안도했다. 중년의 여자는 엄마였다. 그녀는 역시 자신을 버린 게 아니라 잃어버린 거였다. 그리고 10년도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을 찾기 위해 기차역에서 장미꽃을 팔면서 찾았던 거다.

모든 게 우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신이 납치해야 하는 대상은 자신의 이복동생이었다. 엄마는 표도르 아저씨와 재혼한 것 같았다. 그가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로해줬을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이고르는 쓰레기 새끼였다. 어떻게 자신의 손으로 동생을 납치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그를 만나면 그의 몸을 갈가리 찢어버릴 거다.

엄마가 미아 찾기 전단을 내팽개치고 자신에게 달려왔다. 어린 시절 자신의 얼굴이 박힌 종이가 하늘하늘 날아서 자신의 발등에 떨어졌다. 실험체 384는 그것을 주웠다.

“날 버리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엄마.”

“아가! 아가! 도대체 어디 갔었던 거니. 엄마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그동안 잘 지냈어? 밥은 먹었고? 어디서 지냈어? 응?”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으며 울었다. 엄마의 손에 묻어난 물기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군인 에스퍼는 머리를 헝클이며 욕을 중얼거렸다.

“씨발. 이게 뭐야.”

엄마가 어서 집에 가자며 자신을 끌어당겼다. 이복동생은 자신의 다리에 매달렸다. 정신없는 와중에 자신을 감시하러 온 군인 에스퍼가 서글픈 눈으로 세 사람을 쳐다봤다.

“그래, 나도 알아. 네 가족인 거지?”

그는 가족들 앞에서 자신을 실험체 384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군인이 자신의 어깨를 손으로 짚자 놀란 엄마가 무슨 일이냐며 경계했다.

“어머님, 지금부터 최대한 빨리 러시아를 떠나세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묻지 마시고 오늘 안에 반드시 러시아 국경을 넘어서 도망쳐야 합니다. 핸드폰도 버리시고 아예 이 나라에 다시 돌아올 생각 마세요.”

엄마가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오열했다. 정말 그가 우리를 놓아주는 건지 믿기지 않아서 올려다봤다. 자신을 놓쳤다는 걸 알면 그가 위험해질 것이다. 에스퍼 군인은 자신의 등을 손으로 가볍게 밀었다.

“얼른 가. 지금 막 후회하려고 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그런 인사 따위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 내가 무슨 감사할 일을 했다고. 넌 원래 네 가족과 함께 살았어야 했어. 난 널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뿐이야. 나도 이제 도망이나 쳐야겠다. 잘 살아라, 꼬맹이.”

엄마는 지금 상황을 알지도 못하면서 얼른 도망쳐야 한다면서 자신의 손을 잡아당겼다. 허리에 끈을 동여맨 모자와 함께 자신은 정신없이 모스크바역에서 나왔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장미꽃 바구니를 내던진 채 택시를 불렀다.

세 사람은 택시를 탔다. 택시가 지나는 길이 어쩐지 눈에 익어서 꼭 과거로 달려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손을 꼭 잡은 엄마의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동생도 에스퍼로 각성했다면 군에서 동생을 데려가려고 했을 것이다. 아들을 빼앗길 뻔한 어머니는 군인과 함께 온 자신이 평범하게 살아오지 못했다는 걸 짐작했을지도 모르겠다.

택시가 도착한 장소는 역시나 오래전에 살았던 동네였다. 그녀는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었다. 혹시 자신이 집을 찾아 돌아올까 이사하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목구멍에 뻑뻑한 빵을 밀어 넣은 듯 목이 메었다.

우리는 골목을 달려서 허름한 벽돌집에 들어갔다. 그녀가 가방을 꺼내 집에 있는 현찰과 옷을 마구잡이로 챙기고, 핸드폰을 꺼서 식탁에 올려뒀다.

짐을 챙긴 그녀는 아들 둘을 데리고 남편이 일하고 있는 슈퍼로 달려갔다. 역시 엄마는 표도르와 재혼해 동생을 낳은 거였다. 그동안 그녀를 위로해준 든든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다행이다 싶었다.

“해인, 무슨 일이야. 그 짐은 다 뭐야.”

“표도르, 지금 당장 현찰 챙겨요. 우리 도망쳐야 해요. 안 그러면 군대가 내 아들들을 다 데려가버릴 거예요.”

“알았어. 지금 돈 챙길게.”

표도르가 낡은 돈통을 열어서 지폐와 동전을 쓸어 담았다. 그는 슈퍼 문을 닫고 철문을 내려서 단단히 잠갔다. 쫓기는 그들의 숨이 거칠어졌다. 쌀알 같던 눈살이 갑자기 굵어지고 바람이 거세졌다.

살이 에일 듯한 돌풍이 골목을 통과하며 늑대 울음 같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동생은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고 하더니만 영민하게도 떼 쓰지 않고 조용히 우리를 쫓았다. 실험체 384는 동생의 총명한 눈을 보며 그가 군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바보 연기를 했던 거라는 걸 깨달았다.

엄마와 표도르는 차도를 나와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왔다. 엄마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해인!”

표도르가 쓰러진 엄마를 추스르려고 했으나 안타깝게도 저격수의 사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표도르 또한 총에 맞아서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자신이 그들과 도망치려고 해서 죽임당한 거다. 엄청난 충격에 눈앞이 뿌예졌다.

그사이 엄마의 허리에 줄이 묶인 동생은 그 줄을 풀기 위해 조그마한 손을 꼬물거리고 있었다. 과자 포장지조차 혼자서 뜯지 못하는 여섯 살 아이는 울면서 외쳤다.

“형아, 나 묶였어요! 이거 안 풀려요!”

아이는 손톱이 아파서 끈을 푸는 걸 쉬었다가 다시 끈의 매듭을 잡아당겼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실험체 384는 단단히 묶어둔 끈을 푸는 일에 동참했다. 연구소에서 보낸 에스퍼들이 줄 하나에 쩔쩔매는 그들을 데리러 다가왔다.

실험체 384는 바람을 칼날처럼 휘둘러 에스퍼들을 공격했다. 몇몇이 신체가 절단되어서 날아갔다. 그는 풀리지 않는 매듭을 풀기 위해 이로 물고 잡아당겼다. 간신히 매듭을 풀고 동생을 등에 둘러업었다.

“형아, 미안해요. 나 바보 아닌 거 들켜서 데리러 왔나 봐요.”

등에 업힌 동생이 속삭였다.

“아니야.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그는 울면서 부정했다. 반대편으로 건너려고 차도에 뛰어들었다. 도움을 청하는 다급한 외침에도 아무도 자동차 문을 열어서 그들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실험체 384는 그들을 쫓는 에스퍼들에게 다시 바람의 칼날을 날렸다.

그들은 도로 위에 있는 자동차 뒤에 숨어서 몸을 지켰다. 에스퍼 한 명이 찌그러진 자동차 천장에 올라타서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순순히 따라와. 그렇지 않으면 너희 둘 다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았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아주 귀중한 실험체들이었다. 겁을 주기 위한 용도로 한 말일 뿐 에스퍼들은 그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전투 불능 상태로는 만들어도 된다고 들었다. 화염 능력 에스퍼는 불덩이를 실험체 형제에게 던졌다. 실험체 384는 손을 휘둘러 바람으로 불길을 날려 보냈다. 동생을 업은 형은 멈췄던 다리를 다시 놀렸다.

추운 날인데도 엄청난 공포와 상실의 슬픔, 과도하게 능력을 사용한 탓에 오는 부작용으로 땀과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온몸에 미세한 바늘을 쑤셔 박은 것처럼 아파서 죽을 것 같았다. 파동 에너지가 급격하게 불안해져서 날뛰며 장기를 건드렸다.

그는 쿨럭, 피를 토했다. 등에 업힌 동생이 “형” 하고 외쳤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자신을 형이라고 불러줘서 정말 고마웠다.

“너 먼저 도망쳐. 곧 뒤따라갈게.”

동생을 등에서 내린 실험체 384는 그대로 차도 위에 쓰러졌다. 동생은 어느새 그들을 향해 다가온 에스퍼 군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반의 능력은 물을 다루는 힘이었다. 그리고 인체는 약 70%가 물로 이뤄져 있었다.

이반은 군인들의 몸속에 있는 물이 피부 밖으로 분출되게 했다. 몸이 폭탄처럼 폭발하며 사방으로 피와 살점과 뼈가 날아갔다. 에스퍼들의 전투로 인해 차도에 정차되어버린 자동차 보닛 위로 그것들이 쏟아졌다.

운전석에 앉은 운전자가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실험체 생포만이 목적인 에스퍼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어린 실험체라고 봐줬다가는 다 죽을 판이었다. 겁에 질린 에스퍼들은 이반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이반은 그가 화염 능력 에스퍼를 죽였던 것만큼이나 잔인하게 찢겨서 죽었다. 실험체 384는 망연자실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피를 토했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느꼈다.

“저건 어떡하지?”

“어떡하긴. 저거라도 회수해서 가져가야지.”

에스퍼들은 실험체 384를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졌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연구소 수술방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의 위를 강렬한 조명이 비치고 있어서 눈꺼풀을 감아도 빛이 들어왔다.

자신은 마취가 항상 덜 되곤 해서 다른 실험체들은 경험하지 못한 수술 중 고통까지도 느끼곤 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같은 경우였다. 이제 도망치려고 한 자신의 신체를 조각조각 내서 다른 실험체들을 에스퍼로 만드는 용도로 쓸 테다.

연구원들이 미쳤다고 문제 있는 실험체에게 이식 수술을 해줘서 에스퍼 등급을 높여줄 리 없으니 말이다.

“실험체 0은 어디래.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안 와.”

이고르가 수술방 밖으로 상황을 알아보라며 연구원 한 명을 내보냈다. 그렇게 나간 연구원은 사색이 되어 수술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장님, 큰일 났습니다. 블라디미르가 실험체 0을 데리고 협박 중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고르는 메스를 손에서 놓고 수술방을 나갔다. 자신을 수술대에 내팽개치고 연구원들이 다 나가버렸다. 마취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깨어나기 위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처음에는 검지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는데 서서히 손에 힘이 돌아왔다.

손을 움직이고 나서는 발가락을 움직였다.

‘일어나! 일어나!’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 존재의 부름이 마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왔다. 수술대에서 내려와 수술방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에서 블라디미르가 바퀴 달린 침대를 붙잡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는 산소호흡기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잠들어 있었다.

실험체 384는 맨발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산소호흡기를 쓴 옆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고개를 갸웃했다가 팔이 잘린 어깨와 사라진 다리를 보고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에게 신체를 이식해준 에스퍼 실험체였다.

연구원들은 물론, 연구소장 이고르까지 블라디미르를 달랬다.

“어서 그 메스 내려놔. 지금 자네 무슨 짓인가. 원하는 걸 말해. 다 들어줄게.”

“발렌틴 어디 있어. 당장 데려와!”

“발렌틴이 누구인데 우리한테서 찾아.”

이고르의 말에 블라디미르가 울부짖었다.

“임신한 내 오메가 말이야! 실험체 174!”

이고르가 당장 실험체 174를 데리러 가라며 연구원을 보냈다. 블라디미르는 메스를 쥔 채 울었다.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몰래 연인을 구하려고 했던 그의 부탁을 자신이 거절해서 지금과 같은 소란이 일어난 거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억지로 코마 상태를 만들어놓은 실험체 0에게 씌어놓은 산소호흡기가 저절로 벗겨졌다. 실험체 384는 산소호흡기에 가려져 볼 수 없었던 그의 얼굴을 보고 비명처럼 ‘바로나’라고 외쳤다.

계속 자신과 함께 다녔던 정체 모를 남자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것도 팔다리를 잃고. 실험체 384는 놀란 연구원들을 밀치고 침대에 다가갔다. 눈을 뜬 남자가 자신을 보고 웃었다.

“드디어 만났네. 보고 싶었어.”

“바로나,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왜 그런 모습으로 누워 있어요.”

“난 이제 죽을 거야. 널 만나 내 능력을 전해주기 위해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여전히 바로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실험체 384는 울면서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가 자신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게 분명하니까 그건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별의 순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울음을 멈추고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로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우린 다시 만날 거야.”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을 언젠가라도 알아내기 위해 입 모양을 외웠다. 바로나가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자 마법처럼 자신의 안에 엄청난 힘이 넘어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가 된 실험체 384는 연구소 사람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갓 태어난 신처럼 자신의 안에 내재된 힘을 그대로 방출했다. 하얀 섬광이 손끝에서 뻗어나갔다. 폭죽처럼 빛이 터지며 연구소 안에 있는 생명을 앗아갔다.

실험체 384는 연구소에 있는 자들을 단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았다. 눈이 붉게 물든 그에게는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나가 자신에게 준 모든 힘을 거덜 낼 것처럼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이며 연구소 건물을 무너트렸다.

한풀이하듯 살육한 실험체 384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공터에 멍하니 앉아 태양을 바라봤다.

“으아아아. 으아아.”

실험체 384는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이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태양 빛이 눈을 인두로 지지듯 뜨거웠다. 그는 이대로 죽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다 바로나가 마지막에 한 말의 의미를 알고 싶어졌다.

그것만 무슨 뜻인지 알아내고 죽기로 했다. 그런 다음 죽어도 늦지 않았다. 실험체 384는 자신의 발을 땅속으로 잡아당기는 듯한 절망에도 굴하지 않고 일어섰다. 이제 더 이상 연구소는 존재하지 않았고 자신 또한 실험체가 아니다.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을 불러줄 가족들 또한 죽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불러줄 가족들과 함께 블라디미르도 죽었다. 더 이상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은 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차기주. 이제 자신은 그가 불렀던 그 이름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가서 바로나의 유언을 알아낼 것이다.

그렇게 차기주는 한국에 왔다. 에스퍼 검사를 하고 이능력자들이 모여서 만든 SP 센터에서 한국어 교육을 받았다. 그때 느낀 당혹감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시 만날 거라고? 죽었으면서?’

그렇지만 바로나가 우리의 만남을 예언했기에 죽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버둥거리며 자신을 가이딩해줄 가이드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만난 이의 이름은…… 김수현.

* * *

총상을 입고 수술을 한 차기주는 이틀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그가 누운 침대에서 단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간호하던 김수현은 눈을 뜬 그를 보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요?”

“김수현.”

“왜요?”

“김수현이었어.”

“네?”

바로나가 말해도 알아듣지 못했던 한국어 이름, 그 이름은 김수현이었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전시회를 위해 그린 그림 두 점을 떠올렸다. 「DIVE」와 「시작과 끝」. 그 두 작품은 김수현이 상상해서 그린 게 아니었다. 그건 우리가 지나온 과거, 그 어느 날의 한 장면이었다.

수족관에 갇힌 남자는 실험체 384였던 차기주였고, 그런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 바로나. 아니, 김수현의 시선에서는 자신이 그토록 아름다운 인어처럼 보였던 거였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라니. 그 제목을 듣고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림 속 자신이 보고 있는 인물은 바로나라고 불렸던 과거의 김수현 모습이고, 그림을 보는 자신을 지켜보는 김수현은 현재, 제 곁에 존재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삶을 열망하게 만든 것도, 결국 그 삶의 끝을 함께하고자 한 것도. 결국 자신의 시작과 끝은 모두 김수현이었다. 그는 정말 자기 말대로 자신을 만나러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 거다.

“언제부터 기억한 거야? 바로나?”

김수현이 눈이 커지더니 부드럽게 휘었다.

“좀 됐어요. 언제쯤 날 알아볼까 싶었죠.”

세월이 많이 흘러서 옅어진 기억들은 잠들어 있는 사이, 선명해졌다.

“그야 20년이나 흘렀는걸. 네 얼굴도, 이름도 몰라볼 수밖에 없었어.”

12살의 실험체 384는 이제 32살의 차기주가 되었다. 그가 자신을 구원해줬기에 그럴 수 있었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손을 단단히 감싸 잡았다.

“사랑해, 수현아.”

여전히 하얀 얼굴을 가진 그가 차기주의 손을 자기 입 쪽으로 끌고 가 손등에 키스했다.

“나도 사랑해요, 형.”

차기주의 입매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힌 이별에 대한 불안감이 김수현에 대한 믿음으로 씻은 듯 사라졌다.

김수현이 의사한테 깨어났다는 걸 알려야 한다면서 병실을 나섰다. 차기주는 그사이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요한의 아이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뉴스 채널을 켠 그는 촉법소년 법으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요한의 아이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렇듯 이 세상은 불공평하며 완벽한 정의는 없었다. 그렇기에 신은 인간에게 실망했고 자기 실수를 만회하고자 천사를 지상에 내려보냈다.

그렇지만 차기주도, 메시아도 알아버렸다. 우리 인간은 그래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걸. 잘못을 저지른 친구를 용서해준 김수현이라든가, 어린 실험체를 불쌍히 여겨 놓아준 착한 사마리안 또한 존재한다는 걸 말이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선(善) 도 악(惡) 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심판의 날에 악(惡) 이 이 세상의 모든 걸 대변하지 못했다. 인간을 해할 수 있는 것도, 구원할 수 있는 것도 그것이 모두 인간의 일면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인간은 얼마든지 누군가에게 악마가 될 수도, 누군가를 구원하는 신이 될 수도 있었다.

그는 김수현이 의사와 함께 온 걸 보고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껐다. 김수현은 모든 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해내지 못한 과거까지, 그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두 번째 생을 기억해내면 그가 자신을 증오할까 봐 두려워했던 건 바보짓이었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고 모든 걸 알면서도 자신을 포용해줬다. 설마 환생하기 전을 기억하게 되었는데 두 번째 생에서 자신한테 강간당한 기억만 쏙 빼고 기억하고 있겠는가. 그가 자신에게 내민 손을 잡고 이제는 차기주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동안 자신은 넘어져서 무릎에 상처가 생길 때 느낀 아픔에 매몰되어 여전히 스스로를 다쳤다고 생각하는 나약한 아이 같았다. 그렇지만 이미 자신의 상처도, 김수현의 상처도 딱지가 생기고 새살이 돋아나 오랜 흉터로 바뀌었다.

이제 그 일들은 흔적일 뿐 아픔이 아니었다. 차기주는 김수현과 행복해지고 싶었다. 이 놀라운 기적은 신이 자신들에게 쥐여준 게 아니었다. 우리가 딛고 일어서서 얻어낸 것이었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그린 그림들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지옥으로부터 살려달라고 외친 불쌍한 실험체 384에게 응답해준 한 유일한 신이 있었다. 그 에스퍼의 이름은 김수현이었다.

<외전 완결>

에스퍼×에스퍼 5권(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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