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하소서(1) (16/17)

구원하소서(1)

번호가 붙은 레인은 방탄유리가 설치되어 있어 옆 칸과의 공간이 나뉘어 있었다. 귀에 귀마개를 눌러 덮고 보호경을 낀 차기주는 어깨보다 다리를 살짝 넓게 벌리고 팔꿈치와 무릎을 약간 접어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손에 쥔 총의 무게감이 제법 묵직했다. 플라스틱으로 된 권총의 손잡이는 격자무늬로 파여 손에 땀이 흘러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했다.

사격장 안은 탄약 찌꺼기를 빨아들여 냉각하는 공기 정화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서늘한 편이었다. 와이셔츠 안에서 추위로 솜털이 섰다.

손가락을 걸어놓은 권총 방아쇠를 눌렀다. 탕탕탕탕탕탕. 예리한 총성이 울린다. 총이 발사되는 반동으로 어깨가 밀려나고 반사적으로 눈꺼풀이 깜빡거리게 되었다.

흡음재로 된 벽이 그 소리를 잡고 있음에도 소음이 몹시 컸다. 그가 총을 쏘자 바닥에 금속 탄피가 짤그랑거리며 떨어졌다. 연속으로 여섯 발을 쏜 그는 적중률을 확인하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사람 모형으로 타깃을 그려놓은 종이가 레일을 타고 가까워졌다. 명중률을 확인한 그는 다시 권총을 장전해 사격 연습을 했다. 에스퍼의 능력이 사라진 그에게 총은 아주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센터 이사직에서 물러나 평범한 삶을 살게 된 그였지만 여전히 신변을 위협하는 정신병자들이 있었다. 바로 제네시스의 적이었던 차기주를 공적으로 삼은 신흥 종교 단체였다.

경찰에게 수사를 맡긴 결과, 집에 협박 편지를 보낸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13세 미만의 초등학생들이었다.

아이들은 단지 장난이었다고 말했고 아무런 처벌 없이 풀려났다. 그렇지만 차기주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즉시 아이들의 부모를 조사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같이 2차 대변혁 이후 직장에 사표를 쓰고 재산을 전부 현찰로 바꾼 뒤, 서울에 있는 집을 팔고 시골로 내려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수상한 움직임이었다.

좀 더 심층적인 조사 결과, 아이들의 부모가 산속에 들어가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여럿이 똑같은 단체복을 입고 정해진 시간에 노동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차기주를 협박한 배후에는 예상대로 정부가 허락하지 않은 종교 단체가 있었다.

그렇지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한민국에서 그들이 이상한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처벌할 수는 없었다. ‘요한의 아이들’은 메시아를 추앙했던 ‘제네시스’ 멤버들이 테러 행위로 감옥에 잡혀 들어가고 우후죽순 생겨난 단체 중 가장 큰 편이었다.

‘제네시스’ 원년 멤버 한 명이 교주가 되어 신도들에게 교리를 전파했다. 정보원에 따르면 메시아가 적으로 삼았던 차기주를 없애는 게 그들의 대업이라고 했다.

차기주는 이대로 이들이 세력을 불리는 것을 방치한다면, 자신의 신변이 위협받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이 일으킬 테러 행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빠질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지만 아직 아무런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그들을 미리 잡아갈 수는 없었다. 어린아이들을 이용해 차기주를 협박한 죄를 부모들에게 물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차기주는 결정적인 사고가 일어날 때까지 경찰을 통해 ‘요한의 아이들’을 예의주시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으로 ‘요한의 아이들’에 대응 중이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고 찾아가 모조리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사격 훈련을 끝낸 차기주는 무기와 보호 장비를 카운터에 반납했다. 사격 연습장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라타 시동을 켜고 히터를 틀었다. 차가워졌던 몸이 금세 따뜻해졌다. 그는 운전하면서 들을 라디오도 켰다.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인류 멸망 교리를 믿는 종교 단체 ‘요한의 아이들’이 그동안 일어난 영화관과 쇼핑센터를 테러한 배후로 밝혀졌습니다.

대통령은 나라를 빠르게 안정시키고 싶었는지 그동안 일어난 테러 행위를 전부 ‘요한의 아이들’에서 저지른 것처럼 발표해버렸다. 그들의 교리가 인류 멸망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행동을 보인 건 아닌데 말이다.

이건 ‘미래에 너희는 범죄자가 될 거야. 그러니까 미리 잡아버리겠어’라고 그들을 도발하는 짓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죽이겠다는 협박 편지를 받던 차기주는 ‘잘된 건가?’ 싶으면서도 찜찜한 기분을 거둘 수 없었다.

* * *

비상하는 독수리 마크가 그려진 버스들이 ‘요한의 아이들’ 부지를 에워쌌다. 총을 든 군인들을 본 신도들은 겁에 질려서 옷장과 창고 같은 공간으로 숨어들었다.

그런 신도들을 군인들이 찾으러 다니며 끄집어냈다. 차기주에게 협박 편지를 나르는 임무를 맡았던 아이들은 교주와 함께 신도들에게 보호받으며 비밀통로로 향했다.

아이들은 속세에 있을 땐 각자 이름이 있었지만 이제 그들의 이름은 단 하나뿐이었다. 요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차기주를 죽이는 숭고한 임무를 맡은 구원자들.

나이가 어린 요한들은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들은 촉법소년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임무를 실패한 아이가 법에서 정한 만 13세를 넘기면, 또 다른 적합한 아이가 새로운 요한이 되어 신성한 임무를 떠맡게 될 것이다.

아이들의 바람은 빨리 차기주를 죽이고 엄마, 아빠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군홧발 소리가 들릴 리 없는데 자꾸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것만 같았다.

공포에 질린 아이들의 발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교주님은 이때를 위해 신도들에게 비밀통로를 뚫게 곡괭이질을 시킨 게 분명했다.

탈출에 성공한 요한의 아이는 총 세 명이었다. 한 명은 총을 숨기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어른들이 등에 메준 돈 가방을 짊어졌다. 마지막은 아이들 사이에서 리더로 활동하는 대장이었다.

세 아이는 어두운 통로를 교주님과 걸었다. 그가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대장 요한이 물었다.

“교주님, 이제 우리 차기주를 죽이러 가는 건가요?”

그러나 천사에게 계시를 받았다던 교주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 미친 자를 우리가 어떻게 죽여! 난…… 난 테러 따위 할 생각 없었다고. 그냥 신도들 돈이나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이게 뭐야! 흐으윽, 흐욱. 고작 협박 편지를 보냈을 뿐인데, 이렇게 잡아들이다니. 우린 다 끝났어. 그 악마가 우릴 죽일 거야.”

제네시스의 원년 멤버였던 그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는데 단지 같은 소속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도망자가 되었다. 그 덕에 할 수 없이 도피 생활을 해야 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무일푼이었던 그는 돈을 벌고자 제네시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요한의 아이들’ 교주가 되었다.

신도들에게 전 재산을 가져다 바치라고 한 덕에 그는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의 잘못이라곤 아무것도 안 하는 교주에게 성과를 바라는 신도들의 재촉에 차기주에게 협박 편지를 보낸 것뿐이었다.

요한의 아이들은 깨달았다. 부모님이 모든 걸 버리고 숲에 들어오게 만든 종교가 그냥 사기였다는 것을. 교주가 한 모든 말이 거짓말이었고 차기주를 죽인다고 천사가 지상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아이들과 아이들의 부모님은 바보가 되는 거였다. 이 멍청한 사기꾼에게 속아서 전 재산을 탕진한 바보.

가방과 총을 가진 두 아이는 신실한 신자였기에 교주의 말에 충격을 받고 울음을 터트렸다. 대장은 친구가 잠바로 가리고 있던 총을 가져가 교주룰 쏴버렸다.

“교주님, 숭고한 임무는 제가 반드시 해낼게요. 그러니 교주님이 사기꾼인 건 저희만 알게요.”

피를 흘리며 쓰러진 교주는 총을 급소에 맞지 않았지만 계속 내버려두면 과다 출혈로 죽을 터였다. 두 아이는 대장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고 화냈다.

“그러면 교주님이 사기꾼이었다는 걸 인정할 거야? 우리와 우리 부모님은 이 사기꾼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교주의 말이 거짓이었으면 우리가 진실로 만들면 돼.”

대장의 말에 두 아이는 눈을 빛냈다. 셋은 교주를 버리고 비밀통로를 빠져나왔다. 차도를 지나가던 자동차가 아이 셋을 보고 멈춰 섰다. 어른 없이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만 있는 게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어디 가고 너희 혼자 있어?”

“어디까지 가세요? 저희는 서울 가야 하는데 태워주실 수 있으세요?”

대장이 나서서 물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냐니까.”

“집에 계세요. 그리고 저희는 친구들끼리 놀러 온 거예요.”

두 명은 대장의 말에 쭈뼛거리며 ‘놀러 왔어요’ 하고 말해서 도왔다. 여대생 운전자는 어린아이들을 외딴곳에 두고 떠날 수 없어 일단 태우기로 했다. 아이들은 뒷좌석에 올라탔다.

“집 주소 불러줄래? 누나가 데려다줄게.”

요한의 아이들은 수없이 신도들의 차를 타고 차기주의 저택을 방문했었다. 그 주소를 불렀다. 최유정이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다가 멈칫했다. ‘수현이 집’이라고 저장해놓은 주소가 내비게이션에 검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멈칫하며 뒷좌석에 앉은 아이들을 돌아봤다. 겁에 질린 눈동자를 본 대장이 숨기고 있던 총을 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눈에 익네. 누나, 김수현이랑 친하죠.”

최유정은 이질적이게도 학교 내 카페에 혼자 있었던 초등학생의 얼굴을 기억해냈다. 이 세 아이 중 한 명이었다.

“차기주가 우리 성지를 약탈하고 우리 부모님을 잡아가게 했어요. 누나 생각은 어때요? 우리가 복수할 만하겠죠.”

“살, 살려줘.”

“전화하세요. 김수현이든, 차기주든. 나 좀 구해달라고.”

최유정은 핸드폰을 꺼내 김수현에게 전화했다. 김수현의 공모전과 관련하여 연락한 적은 있지만 그녀가 차기주의 직통 핸드폰 번호를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수현아, 나 유정인데. 흐읍, 흐윽.”

그녀는 갑자기 터져 나온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김수현이 무슨 일이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총…… 어린아이들이 총을 가지고 날 협박하고 있어. 나 좀 구하러 와줘. 너무 무서워.”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왔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괜한 오지랖을 부려 이 사달이 벌어졌다. 그녀는 아침부터 배가 터지게 상을 차려준 엄마의 얼굴과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동네를 다니며 딸 자랑을 지겹게 하던 아빠 얼굴을 떠올렸다.

어쩌면 부모님 얼굴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누나, 거기가 어디예요. 제가 구하러 갈게요.

그녀는 내비게이션에 뜬 현재 위치를 말했다. 통화를 끝낸 최유정에게 대장이 지시를 내렸다.

“자동차 트렁크 열고 시동 끄세요.”

최유정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녀는 총으로 위협받으며 운전석에서 내렸다. 아이들은 그녀를 따라서 자동차 뒤편으로 움직였다. 어설프게나마 훈련받은 아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짓이 얼마나 큰 죄인 줄도 모른 채 그녀를 트렁크에 가뒀다.

아이들은 이제 진실을 알았다. 차기주를 죽인다고 변하는 건 없었다. 천사는 돌아오지 않을 거고 부모님들은 감옥에 갈 것이며, 자신들은 무슨 짓을 저지르든 촉법소년 법으로 보호받을 테다.

최유정과 전화 통화를 끊은 김수현은 바로 경찰에 지금 상황을 전달했다.

“안녕하세요. 방금 친한 대학교 선배한테서 납치범한테 총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차기주를 데려오라면서요.”

―차기주라면 센터 이사였던 에스퍼 말씀이십니까. 두 분이 무슨 관계이시죠?

“가이드 김수현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신고 전화를 받던 경찰이 조용해졌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그는 상관에게 어떻게 하냐고 채팅을 보냈다. 상관은 일단 신고 접수를 받아두라고 했다. 김수현이 알려준 장소는 ‘요한의 아이들’ 신도들이 모여 사는 숲과 가까운 차도였다.

김수현은 경찰 신고를 하고도 최유정에 대한 걱정으로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형, 어떡해요. 선배 큰일 나는 건 아니겠죠?”

차기주는 김수현의 손목을 잡고 소파로 끌어당겨 앉혔다.

“걱정하지 마. 유정 씨는 경찰들이 무사히 구해낼 거야.”

“나랑 친해서 선배가 위험해진 건 아니겠죠?”

범인들은 차기주를 불러내고자 하고 있었다. 김수현의 걱정이 거기로 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차기주는 자신에게 협박 편지를 보냈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최유정이 붙잡힌 건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 입술을 짓씹었다.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차기주는 소파에서 일어나 차 키를 챙겼다. 김수현이 자신도 따라가겠다며 뒤쫓았다.

“수현아, 집에서 기다려줘. 금방 다녀올게.”

단호한 차기주의 말에 김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 유정 선배 구하러 가는 거 아니죠? 가지 마요. 그런 건 경찰한테 맡겨야지 위험하게 형이 왜 가요.”

“나 때문 맞아.”

“아니에요. 총 가지고 협박하는 놈들이 잘못이지, 왜 이 일이 형 잘못이에요.”

“나한테 협박 편지가 계속 왔었어. 그리고 최유정 씨 붙잡은 납치범이 그걸 보낸 아이들 같아.”

김수현은 차기주에게 최유정을 아이들이 납치했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가 정말 납치범들에 관해 알고 있었다. 인제 와서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한테 걱정 끼치지 않기 위해 그랬노라는 대답이나 듣겠지.

“그래도 안 돼요. 형 때문에 유정 선배가 납치된 거여도 안 된다고요. 형 잘못되면 난 어떡하라고요.”

김수현은 차기주의 허리를 끌어안아서 못 가게 막았다. 차기주는 그런 김수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괜찮아. 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인걸.”

“이제 에스퍼 능력 사용 못하잖아요. 그냥 형도 나도 똑같은 일반인이라고요.”

“아무 일 없을 거야. 약속해.”

“……씨. 가요.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쳐서 와봐요. 용서 안 할 거니까.”

“응.”

차기주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김수현의 이마에 입맞춤하고 차에 올라탔다. 김수현은 자동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걸 지켜봤다.

* * *

경찰로부터 연락받은 군인들은 도망친 신도를 잡으러 신고 장소로 이동했다.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아이들은 멀리서 보이는 군인들을 보고 안절부절못했다.

“어떡해! 우릴 잡으러 왔나 봐.”

“대장, 그 누나 트렁크에서 다시 꺼내서 운전하게 하자. 도망쳐야지.”

그렇지만 아이들은 자동차 트렁크를 여는 법을 몰랐다.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눌러보니 와이퍼가 좌우로 차창을 닦아내고, 헤드라이트가 빛을 뿜고, 자동차 주유구가 열릴 뿐이었다.

“이제 우린 끝이야. 그러게 뭐 하러 차기주를 불러내려고 한 거야. 그냥 차 얻어 타서 도망쳤으면 좋았잖아.”

원래 총을 가지고 있던 아이는 자신의 총을 빼앗아 간 대장을 째려봤다. 누군가가 자신들을 추격해온다는 데에서 오는 공포가 대장에게 모든 원망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잊었어? 우리는 촉법소년이라 요한의 아이로 뽑혔어. 뭘 무서워하는 거야.”

대장의 말에 아이들이 “맞아. 그랬지” 하며 웃었다.

“저 군인들은 우리를 죽일 수 없어. 우리는 어리니까. 군인이 어린아이를 죽이면 국민이 들고일어날 거야.”

가방을 멘 아이가 창밖을 미어캣처럼 내다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그들의 나이가 그들을 보호해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라이브 방송을 켜서 목격자를 만들면 돼.”

대장의 말에 가방을 멘 아이는 핸드폰을 찾았다.

“없어. 어른들한테 떠밀려서 도망치느라 못 챙긴 것 같아.”

“괜찮아. 나 폰 있어.”

잠바를 입은 아이가 자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아내 대장에게 건넸다. 대장은 핸드폰으로 라이브 방송을 켰다. 제목은 ‘종교 탄압하러 총 들고 아이들 죽이러 오는 군인 아저씨들 무서워요. 살려주세요ㅜㅠ’였다.

자극적인 제목을 보고 들어온 게스트들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걸 보고 채팅 글을 적었다. 사기냐, 장난이냐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대장은 자동차 차창을 내려 핸드폰으로 대치 중인 군인들을 보여줬다.

“여러분, 도와주세요. 군인들이 저희 교주님을 죽이고 부모님들을 잡아갔어요. 곧 저희도 총에 맞아 죽을 것 같아요.”

대장은 억울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채팅방에 많은 사람이 몰려와 글을 적었다. 순식간에 접속자 수가 1만이 넘었다. 대장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울었다.

“저희는 테러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어요. 천사님을 믿으며 숲속에 모여 살았을 뿐인데 억울한 누명을 썼어요. 그런데 군인들이 저희를 죽이려고 총 들고 와요.”

인질이 잡혀 있는 자동차로 다가가던 군인들을 중령이 멈춰 세웠다.

“잠깐 대기한다.”

“무슨 일이십니까. 여긴 아무 이상 없습니다.”

“아이들이 인터넷 방송 중이다.”

군용 버스에서 군인이 내려 중령에게 소식을 전했다.

“차기주 명예 장군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센터가 해체되면서 차기주의 직급이 붕 떠버렸지만, 아직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차기주는 명예 3성 장군이었고 비상시에는 육군·해군·공군의 통수권을 가지게 되었다. 괴수가 게이트를 탈출했을 시를 대비한 군 계급이었다.

중령은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부하들에게 망원경으로 납치 차량 내부만 살피게 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인터넷 방송을 하니까 군인들이 꼼짝을 못하는구나 싶어 의기양양해졌다. 인터넷 방송을 보러 온 사람들은 후원금을 보내다가 한참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지루해했다.

2만 명을 넘어섰던 방문객들이 한꺼번에 5천 명씩 빠져나갔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터넷 방송을 켰으면서도 시청자 수가 줄자 초조해졌다. 어떻게든 흥미를 끌기 위해 자기네 종교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ㅋㅋㅋㅋ’와 같이 자신들을 비웃는 조롱만 받을 뿐이었다.

트렁크에 갇힌 최유정은 점점 희박해지는 공기 때문에 숨쉬기 힘들었다. 이대로 가면 위험하겠다 싶어 트렁크 내부에 있는 ‘full’이라고 적힌 노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트렁크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트렁크를 살짝 열어서 밖을 살폈다. 혹시라도 그냥 뛰어나갔다가 당황한 아이가 총을 쏠 수 있어서 숨구멍만 내놓고 자신을 구해줄 사람을 기다렸다.

차도에는 멈춘 자동차 한 대와 군용 버스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평화롭고 조용했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터져버릴 폭발물같이 아슬아슬한 위기 상황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 정적을 깨는 자동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새로운 차량은 군용 버스를 세워둔 곳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차에서 내린 이는 바로 부대의 지휘관을 찾았다. 중령이 달려와 차기주에게 경례를 올렸다.

“충성. 특수부 이서준 중령입니다.”

“충성. 현 상황 보고 바랍니다.”

“인질은 트렁크에 갇힌 것으로 보입니다. 납치범들은 자동차 뒷좌석에서 인터넷 방송으로 현재 상황을 송출하고 있습니다.”

중령은 인터넷에서 벌어진 사실 왜곡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차기주가 방탄조끼와 철모를 받아 착용하고 제리코 941을 챙겼다. 성경에 나오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나오는 도시 여리고(Jericho)에서 이름을 딴 권총이었다.

군인들은 십수 년 동안 위기 상황 때마다 차기주가 독단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굳이 시키지 않아도 뒤로 물러났다. 차기주는 탄약이 채워졌는지 확인하고 마이크로 납치범들에게 통보했다. 다들 관습을 따르느라 미처 그가 예전과 같은 에스퍼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납치범들은 들어라. 인질을 무사히 보내주면 요구대로 차기주를 넘기겠다.”

차기주가 하는 말이 방송을 그대로 탔다. 아이들은 채팅창에 자신들을 향한 비난이 우후죽순 올라오자 놀라서 방송을 꺼버렸다.

“대장, 어떡해. 우리 정말 큰일 난 거 아니겠지?”

“뭘 쫄고 그래. 우린 절대 처벌 안 받아.”

대장은 꿀꺽 침을 삼키며 차창을 내리고 뒤를 살폈다. 차기주는 트렁크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확인했다.

“셋에 뛰는 겁니다, 최유정 씨.”

차기주가 하는 말을 들은 아이들은 트렁크에 갇혀 있는 걸 모르나 고개를 갸웃했다. 요한의 아이들은 뒷좌석 시트에 무릎을 꿇고 뒤창으로 밖을 내다봤다.

“하나, 둘, 셋.”

그런데 닫힌 줄 알았던 트렁크가 열리고 가둬놨던 인질이 튀어나왔다. 군용 버스가 있는 쪽으로 달리는 그녀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차기주는 권총을 들고 자동차 뒷바퀴에 권총을 발사했다.

아이들이 겁에 질려서 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대장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눈치가 좋았다. 자동차에는 총알이 박히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대장은 뒷좌석 차 문을 열고 나왔다.

“대장, 어디 가. 위험해.”

다른 아이들이 말려도 대장은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어린 자신이 총을 맞을 리 없다는 것에 대한 믿음 말이다. 대장은 이 모든 게 차기주로 인해 일어난 것이기에 그를 죽여버려서 복수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차기주를 죽여서 천사가 돌아오지 않으면 엄마, 아빠도 교주의 거짓말을 알아차릴 테다. 그럼 다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요한의 아이들은 진짜 이름을 되찾을 것이다.

“꼼짝 마! 움직이면 쏠 거야.”

대장은 도망치는 누나의 등에 대고 외쳤다. 이러니까 만화 영화에 등장하는 못된 악당이 된 것 같아서 조금 멋져진 기분이었다. 차기주는 군인들이 세워둔 바리케이드를 넘어서 오다가 얼어붙은 최유정에게 다가갔다.

그녀를 자신의 등 뒤에 숨기고 권총을 아이에게 겨눴다.

“누가 시켰어.”

“아무도 안 시켰는데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아이는 키득키득 비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게 장난감인 것처럼 총을 흔들었다. 차기주는 총구를 아이에게 겨눴다.

“어차피 못 쏘는 거 알거든요.”

바리케이드를 넘은 최유정이 바닥에 엎드려 오열했다. 군인들은 담요를 가져와 그녀의 어깨에 덮어줬다. 차기주는 총을 아이에게 조준한 채 말했다.

“이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알아? 아무리 네가 어리다고 해도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어.”

“그래서 어쩔 건데요.”

가는 손가락에 걸린 방아쇠가 당겨졌다. 탕. 큰 총성에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가 놀라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방탄조끼는 심장과 장기 같은 곳의 치명상을 피하기 위한 철판을 넣어둔 것이었다.

당연히 옆구리와 같은 부분은 취약점이었다. 아이는 조준 실력이 없는 탓에 도리어 차기주에게 총을 맞힐 수 있었다. 겁 없이 총을 쏜 대장의 얼굴은 막상 피를 보자 하얗게 질렸다. 총을 바닥에 버리고 대장은 뒤돌아 뛰었다.

바닥에 던져진 총에서 발사된 오발탄으로 군인 중 한 명이 부상을 입었다. 바리케이드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군인들은 뛰쳐나와 아이를 붙잡았다. 다친 차기주에게 군인이 다가와 출혈 부위를 압박했다.

“더럽게 아프네.”

차기주는 “이거 놔. 놓으라고. 우리는 무죄야!”라며 몸부림치는 어린놈들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아이에게 총을 쏴야 했다. 그랬으면 그가 총을 안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게 차기주의 실책이었다.

김수현이 우는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괜찮아, 수현아. 치명상은 아니야.’

그는 그것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 * *

차기주는 아주 어릴 때부터 철창 안에 갇혀서 지냈다. 포대 자루를 씌워놓은 듯한 옷을 입은 실험체들은 닭처럼 철창에 갇혀 자신의 때를 기다렸다. 추운 러시아 날씨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온수관이 흐르는 파이프에 바짝 붙어서 잠을 자야 했다. 그 자리는 실험체 147과 그의 부하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차기주는 언제나 온수관과 가장 먼 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체온을 보존해야 했다. 딱딱하고 꺼끌꺼끌한 시멘트 바닥에 누워 있다 보면 그 얼음장 같은 찬기에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연구소는 후천적 에스퍼를 만들기 위한 실험에 쓰이는 아이들을 실험용 쥐와 똑같이 취급했다. 평상시 실험체를 관리하는 감시자들은 바닥에 양철 통을 놓아주곤 했는데 그 안에는 급식소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들이 담겨 있었다. 그마저도 양이 모자라 실험체들은 식사 시간 때가 되면 예민해졌다.

우두머리인 147은 자기 마음대로 음식물 쓰레기를 배분했다. 가장 형체가 멀쩡한, 누가 먹다 만 사과는 그의 것이고 그다음으로 좋은 것은 부하들의 몫이었다. 왜냐하면 실험체 147이 우리 중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이었다.

1부터 146번까지는 다 죽어나갔다고 보면 됐다. 그러므로 실험체들은 우리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147을 믿고 따르는 게 그나마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차기주는 그 당시 실험체 ‘384’라고 불렸다. 그가 차기주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건 자신과 같은 동양인을 만나고 나서의 일이다. 그자는 모든 게 미스터리했다.

그는 러시아어를 하지 못했고 자신은 편의상 까마귀같이 검은 머리칼을 가진 그자를 ‘바로나(Ворона)’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그는 검은 까마귀가 아닌 하얀 까마귀였다.

러시아에서는 매우 특이한 사람을 ‘하얀 까마귀’라고 부르곤 했으므로.

* * *

그날은 감시자가 아침 일찍 자신을 샤워실에 데려갔다. 그는 자신에게 옷을 벗으라고 하고 벽을 두 손으로 짚게 했다.

호스에서 나오는 강한 물줄기가 더러운 몸을 때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찬물이 아니었다. 따뜻한 물이 끼얹어진 자신은 이 호사가 마지막 가는 길에 베푸는 자비라고 생각했다. 감시자는 샴푸로 머리를 감게 했다. 몸에 향긋한 비누를 문질러 닦으라고도 했다.

다 씻고 난 자신을 보고 감시자는 놀란 눈치였다.

“좀 생겼는걸.”

감시자는 자신을 식당에 데려갔다. 그곳에는 수술 후 몸을 회복하기 위해 식사를 받는 실험체들이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두리번거렸다.

후천적인 에스퍼를 만드는 실험은 아주 위험했다. 에스퍼의 신체를 도려내 일반인에게 이식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부적합자가 죽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운이 좋은 축에 속했다.

다리에 깁스를 한 실험체는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다리뼈를 잘라내고 에스퍼의 뼈를 이식받은 것이다. 그러나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서 일어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만일 이식 수술 결과가 좋았다면 실험체는 에스퍼의 신체를 받자마자 뛰어다닐 수 있었을 테니까.

물론 망가진 실험체라고 바로 폐기되는 건 아니었다. 실험체는 계속 에스퍼의 신체를 이식받으며 에스퍼화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진짜 에스퍼가 되거나 신체 회복 능력만 가지고 능력은 사용하지 못하는 더미(dummy)가 될 수 있었다.

더미는 말 그대로 인체모형, 모조품 취급을 받았다. 또 다른 실험체를 위한 신체 제공자로서 실험실에서 이용당했다. 진짜 에스퍼가 된다고 그 사정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더미보다 더 많이 수술대에 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험체 384는 겁에 질려서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식당 안에 있는 실험체들을 살폈다. 피부를 이식받아 붕대를 칭칭 감아놓은 실험체에게서는 말도 못할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살이 괴사해 썩어 들어가는 거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쪽은 장기를 받은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속까지 멀쩡한 건 아닐 터였다. 실험체 384는 망가진 실험체들을 보며 꼭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감시자가 멀뚱하게 서 있는 그에게 식판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식판에 먹고 싶은 만큼 음식을 받아서 테이블에 가져가면 됐다. 그 누구도 그가 먹는 것을 빼앗기 위해 덤벼들지 않는 천국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 대단한 만찬을 보고도 그는 입맛이 없었다. 그래도 먹어보자는 생각에 곰팡이가 피지 않은 흰 빵을 수프에 찢어서 넣었다.

수프와 함께 입에 넣자마자 빵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달고 고소한 맛이 느껴졌다. 이렇게나 맛있는 걸 그동안 못 먹고 살았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그는 식판에 코를 박고 수프에 적신 빵을 정신없이 먹었다.

추잡스럽게 먹는 실험체 384를 보고도 다른 실험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도 처음 식당에 왔을 때 굶주린 짐승처럼 식판에 달라붙어 먹었기 때문이었다.

식사가 끝난 그는 아주 깨끗한 밀실에 갇혔다.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놓고 수술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깨끗한 환경은 수술 후 합병증 또한 막아줄 것이다.

그는 다음 날 아침, 감시자에게 끌려갔다. 수술방에는 연구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의자에 앉은 실험체 384의 사지를 벨트로 결박했다. 눈꺼풀을 억지로 벌려내는 기구 탓에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안약을 넣어서 그의 눈을 마취했다. 멀쩡한 각막이 잘려 나가고 에스퍼의 각막을 이식받았다. 연구원은 수술이 끝난 실험체 384의 눈을 붕대로 감고 어제 있었던 깨끗한 밀실에 가뒀다. 그는 자신이 이대로 시력을 잃게 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붕대를 풀었을 때 멀쩡하게 주변이 보였다. 그는 기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웃었다. 연구원이 물었다.

“실험체 384, 잘 보여?”

“네.”

연구원은 서류판으로 고정한 보고서에 ‘각막 이식 성공’이라고 적었다. ‘에스퍼화가 가능하면 간편하고 안정적인 방법’이라 휘갈겨 쓰기도 했다.

“이제 너한테 에스퍼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러 갈 거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원이 하는 말에 자신은 벌벌 떨기만 했다. 또 어떤 끔찍한 실험이 있나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따라간 장소는 뜻밖에도 수족관이었다. 조명으로 수족관을 비춰 물속을 밝히고 있었지만, 수심이 깊은 탓에 검게 보였다.

연구원들을 돕는 보조자가 자신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옷을 벗었다.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는 것조차 몰랐던 때다. 그곳에서 실험체 384는 사람이 아닌 실험체였으니 말이다.

보조자는 자신의 등에 무거운 공기통을 짊어지게 했다. 수영모가 귀를 가리게 쓰고 수경을 착용해 눈을 보호했다. 마지막으로 입에 산소 호스를 물었다.

보조자는 그 어떠한 설명도 없이 자신을 수족관 꼭대기에 데려갔다. 바닥에 앉으라고 해서 앉았건만 뒤로 밀쳐져서 머리부터 물에 처박혔다. 물에 빠진 자신이 살려고 버둥거리며 물에 뜨니 무서운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나왔다.

―실험체 384, 잠수해라.

수면을 내리치는 팔의 허우적거림이 커졌다. 물보라가 일어나며 허공으로 물방울이 튀었다.

―잠수. 잠수하지 않으면 총살이다. 잠수.

단호한 연구소장의 호통에 실험체 384는 살겠다며 숨을 꾹 참고 버둥거림을 멈췄다. 힘 빠진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커다란 수족관에 가득 찬 물이 자신을 압살할 것만 같았다. 숨을 쉬는 법을 몰라 참고만 있던 그는 입에 물고 있는 산소 호스로 어느새 공기를 들이마셨다.

자신이 숨 쉬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물속 어둠에 겁을 먹었다. 방향감각이 사라지고 우주에 떠 있는 것 같은 부유감이 느껴졌다.

―파동 에너지로 물에 파장을 일으켜. 성공하면 물에서 꺼내주마.

연구소장이 지시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빠르게 식어가는 체온과 어둠의 공포로 인해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기만 했다. 손으로 앞을 더듬거렸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무작정 발을 디딜 수 있고 손으로 짚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수경 안에 눈물이 차올랐다.

쓰읍. 후우. 쓰읍. 후우. 자신이 들이켜고 내쉬는 숨소리조차 낯설게 느껴질 만큼 처음으로 하는 다이빙은 실험체 384를 패닉에 빠트렸다. 그는 끊임없이 헤맸다. 그러다가 콰당, 하며 투명한 유리 벽에 부딪혔다.

손으로 유리 벽을 짚었다. 스피커를 통해 떠드는 연구소장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아래로 깊이 내려온 듯했다. 어둠 속에서 겨우 눈을 뜬 실험체 384는 이내 자신을 쳐다보는 하얀 얼굴을 가진 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유리 벽을 짚은 자신의 손에 손을 겹쳤다.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칼을 가진 그자는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하는 듯했다.

놀랍도록 혼란스러운 마음이 안정되어갔다. 자신의 존재를 없애버릴 것처럼 검었던 물속과 달리 형광등으로 밝은 수족관 밖에 서 있는 그를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그자는 실험체 384가 살아오면서 본 것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유리 벽을 사이로 마주한 손바닥에서 찌릿한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실험체 384의 주위로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특수하게 경화된 유리 벽이 깨지고 수족관 가득 차 있던 물이 넘쳐흘렀다. 수족관에 있는 물이 연구실을 휩쓸었다.

실험체 384가 보고 있던 자는 어디론가 가버린 건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아니 애초부터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정신을 잃은 실험체 384는 깨진 유리 벽 구멍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휩쓸려 떠밀려 나왔다. 연구원들은 갑작스러운 물난리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통제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연구소장 이고르의 눈에 광기가 스쳤다.

그가 세운 가설처럼 일반인을 에스퍼로 만들 수 있었지만, 그 능력은 아주 형편없었다. 그런데 실험체 0에게 고작 각막을 이식받은 실험체 384는 에스퍼 등급 측정에서 놀라운 결과를 보였다.

이 정도라면 A급 에스퍼였다. 이고르의 눈이 불쾌한 희열로 번득거렸다.

* * *

이식 수술을 받은 실험체는 한 달 동안 깨끗한 장소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회복 과정을 거쳤다. 실험체 384는 그 달콤한 시간이 독인 줄도 모르고 영원할 거라 착각했다. 다시는 철창 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연구원들이 질문하고 피를 뽑아가면 순한 양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예정된 시간은 끝이 나버렸다. 그는 감시자들에게 끌려가 도로 철창 안에 갇혔다. 쓰레기와 오물이 뒤엉킨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예민해진 코가 자극받아 코피를 흘렸다. 실험체 384는 코를 손으로 틀어막은 채 배 속에 든 음식을 토했다.

더러운 시멘트 바닥으로 쏟아진 토사물을 본 실험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손으로 주워 먹었다. 감시자들이 철창 밖에서 짐승 같은 실험체들을 보며 키키키 비웃었다. 야비한 얼굴에는 잔인한 우월감이 가득했다.

자기들과 달리 깨끗한 실험체 384를 보는 실험체들의 시선에는 질시와 부러움, 호기심이 가득했다. 실험체 384는 왜 한 달이 지나면 다시 철창 안으로 이식자를 돌려보내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희망이라는 걸 주기 위해서다. 다른 실험체들은 잘 보살펴진 실험체 384를 보고 자기가 당해야 하는 불합리하고 비인도적인 실험을 바라게 될 것이다. 그럼 연구원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 그들의 의도대로 실험체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들의 무서움을 깨달은 실험체 384는 원래 그가 머물던 구석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엔 이미 실험체 399가 있었다. 한 달 동안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이제 와 실험체 399에게 자신의 자리이니 돌려달라고 할 수 없었다. 이건 철창 안의 룰이니 자신도 따라야 했다.

좁은 철창 안을 빙 둘러 빈자리를 찾았다. 벽 모서리에 자리가 있어서 거기에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러다가 철창 안에서 우두머리로 활동하는 실험체 147과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숙여서 시선을 피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 실험체들은 순서에 맞춰서 이식 수술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처럼 철창에 들어와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에 있는 실험체들에게 자세히 말해줬다. 그도 그 덕분에 무슨 수술을 받아야 에스퍼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385 순번 이후의 실험체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려고 자신을 힐끔거렸다. 이제 자신이 그 역할을 위해 이곳에 들어온 것임을 자각한다.

“384, 밖은 어때? 뭐 하고 온 거야? 옷 정말 멋지다. 나도 그런 옷 입어보고 싶다.”

실험체들에게 옷은 딱 한 벌뿐이었다. 1년에 한 번 있는 목욕 시간에 그것을 빨아 입는 실험체들은 없었다. 하나뿐인 옷을 빨면 그나마 추위를 막아주는 거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멀쩡한 환자복을 입은 자신을 부러워하는 실험체들에게 옷을 빼앗길까 봐 손으로 단추를 움켜잡았다. 147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 말해봐. 밖에서 잘 지냈나 보지? 얼굴에서 광채가 흐르네.”

“먹을 거 줘? 빵 먹었어? 좋겠다. 나도 빨리 나가고 싶어.”

“수술은 어때? 하나도 안 아파?”

그는 자신을 둘러싼 얼굴들을 보며 코와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실험체들은 원래 피부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땟국물에 절여져 있었다. 어떻게 산 자에게서 이런 썩은 내가 날 수 있는 걸까. 편안한 환경에서 지냈던 짧은 일상이 자신을 망가트린 게 분명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철창 안에서 버틸 수 없었다. 그동안 돌아왔던 다른 실험체들처럼 말이다.

그들이 다시 이식 수술을 받으러 철창을 나갈 때 왜 행복해 보였는지 단번에 이해됐다. 한 달이라도 쾌적한 환경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자는 결코 과거와 똑같은 인내심을 가질 수 없었던 거다.

폭신한 매트리스 침대와 따뜻한 실내 공기, 입 안에서 살살 녹는 급식은 달콤한 악마의 과실이었다. 그 악마의 과실을 맛본 자는 철창 안에 적응하지 못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 먹지 않는다. 저딴 걸 먹느니 굶어 죽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들을 보고 한때 실험체 384는 자기들만 손해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코웃음을 칠 수 없었다. 자신이 그 배부른 자들과 똑같은 마음이 되었으니까.

유일하게 계속 이식 수술을 받고도 멀쩡한 실험체 147이 신기했다. 그는 어떻게 이 지옥에서 버틸 수 있는 걸까. 수술과 회복을 반복하며 이 안을 들락날락하는 실험체 중 그만 유일하게 여태 살아남았다.

차기주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야, 384. 너 능력 각성 했어?”

자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147이 물었다.

“아니요.”

“옷 벗어.”

“네?”

“옷 벗으라고, 이 새끼야. 귓구멍에 침을 뱉어줘야 제대로 들을래?”

실험체 384는 자신의 깨끗한 옷을 약탈하려는 실험체 147에게서 옷을 사수하고자 두 팔을 X자로 교차해 어깨를 끌어안았다. 우두머리는 부하들한테 턱짓했다.

“밟아.”

실험체 147을 따르는 무리가 한꺼번에 실험체 384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잔뜩 웅크린 그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다.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옷은 순식간에 검은 때가 낀 손과 발에 더러워졌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코피가 흘렀다. 멍든 부위에서 홧홧한 열이 났다. 건드리기만 해도 뼈가 울릴 만큼 아팠다.

기절한 실험체 384에게서 옷을 빼앗은 부하들은 우두머리에게 약탈품을 바쳤다. 실험체 147은 다른 실험체에 비하면 깨끗한 옷을 벗어서 부하에게 하사했다. 그리고 자신은 밖에서 들어온 새 옷의 먼지를 털어서 입었다.

감시자들은 철창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묵인했다. 실험체들은 그런 실험체 147을 아주 대단하다고 여기며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토끼 우리 안에서 대장 토끼가 되어봤자이다. 토끼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실험체 147은 저녁 식사 때 자기 몫의 좋은 음식 쓰레기들을 자기 부하들에게 나눠줬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부하들은 실험체 147에게 배운 대로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실험체 147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감시자들이 철창을 열어서 그를 데리고 갔다. 우두머리는 샤워실에서 깨끗이 씻고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주 보기 드문 우성 오메가였다. 한때는 그게 다른 실험체들과 달리 매일 씻을 수 있고 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서 받은 척할 수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싶었지만 나중에서야 그 연관성을 알 수 있었다.

실험체 147은 어느 날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다들 그가 아파서 그런 거라고 여겼지만, 감시자는 “씨발, 이 새끼 임신했나 봐!” 하면서 욕했다. 짜증이 잔뜩 난 감시자들이 실험체 147의 손목을 잡아서 끌고 갔다.

겁에 질린 실험체 147은 살려달라고 빌었다. 실험체들에게 그 사건은 나름 큰 충격이었다. 그동안 감시자들은 실험체 147만은 특별 취급 해줬기 때문이었다. 그가 철창 안에서 막강한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그 이유도 없지 않아 있었다.

“임신? 그게 뭐지?”

“바보야, 임신은 전염병이야. 그래서 끌고 나간 거야.”

의무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실험실에서 자란 실험체들은 임신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있었을 때 끌려온 실험체들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임신은 아기를 가졌다는 거야. 그동안 실험체 147은 알파들에게 다리를 벌려 남창 노릇을 하며 특별 취급을 받고 좋은 대우를 받은 거였어.”

“말도 안 돼! 실험체 147은 완전 무섭다고.”

실험체들의 대화 수준은 아주 형편없었다. 배움을 받지 못한 이들이 대화를 나눠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우리한테나 무서웠던 거지.”

실험체 384는 실험체 147에게 옷을 빼앗기고 알몸으로 지내고 있었다. 다들 그가 추위에 얼어 죽을 거라고 여겼지만 그는 멍든 몸을 최대한 웅크려 살아남았다. 실험체 147에게 앙심을 품었던 그지만, 그 말을 듣자 원망이 빠르게 녹아내렸다. 실험체 147 또한 자신들과 같은 피해자였을 뿐이었다.

실험체 147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제법 사회에서 살다 온 실험체들이 말하길 낙태 수술을 받고 폐기되었을 거라고 했다. 실험체 384 또한 그럴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두 번째 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철창에서 나왔을 때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급식을 받기 위해 식당에 간 그는 거기서 실험체 147을 만났다. 그는 비쩍 마른 몰골로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실험체 147이 자리에 앉자 다른 실험체들이 손가락 고리를 만들어 다른 손가락을 쑤셔넣으며 성행위를 흉내 냈다.

“어디서 더러운 걸레 냄새 안 나?”

“이런. 왜 밥 먹는 곳에 걸레가 놓여 있지?”

그곳에 있는 실험체들은 자기네들을 불구로 만든 연구원들에게 표출해야 하는 분노를 같은 실험체인 147에게 쏟아부었다. 그의 머리 위에 음식을 받은 식판을 뒤집었다. 실험체 147은 이식 수술을 받는 척 바깥에 나가면 이런 대우를 받고 있었던 거다. 그가 이식 수술을 받지 않는 건 무언가 편법을 부려서가 아니었다. 우성 오메가인 실험체 147을 알파 연구원들이 성욕을 해소하는 용도로 써먹었기 때문이었다.

실험체 384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울고 있는 실험체 147의 앞자리에 앉았다. 실험체 384는 묵묵히 자신의 식판에 있는 음식을 먹었다. 다른 실험체들이 실험체 384를 보고는 저 녀석이 누구인지 모르냐면서 괜히 오지랖을 부렸다.

“저 새끼는 연구소에 있는 알파들한테 구멍을 팔아서 더러운 목숨을 보전하는 배신자라고.”

“그럼 너희는 거부할 수 있어?”

“뭐?”

“이식 수술. 거부할 수 있냐고. 만일 그걸 거부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병신이 되지 않았을 거잖아.”

“이잇!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새끼가 죽으려고!”

이식받은 한쪽 팔이 썩어서 절단해야 했던 실험체가 남은 손으로 자신의 멱살을 잡았다. 실험체 384는 의자가 뒤로 밀려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험체 147도 거부할 수 없었던 것뿐이야, 자신을 강간하는 알파들을. 그게 왜 잘못이야? 나는 내가 이식 수술을 받는 게 나의 잘못으로 인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 우리 모두가 그렇지. 그러니 실험체 147 또한 마찬가지야.”

멱살을 잡은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자기네 잘못을 안 실험체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실험체 147이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지금 상황에서는 ‘고마워’가 맞았다. 그러니 그가 미안하다고 사과한 건 이 일을 말한 게 아니었다. 실험체 384의 깨끗한 옷을 힘으로 빼앗은 그 일을 말하는 거였다.

“나도 힘이 있으면 그랬을 거야. 이해해.”

실험체 384는 무덤덤하게 답했다. 실험체 147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그렇게 한참을 눈물 흘렸다.

실험체 384의 두 번째 수술은 다리뼈였다. 뼈 이식이 가장 큰 부작용을 일으켜 불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 겁났다. 수술을 받기 전날, 잠이 오지 않아 컴컴한 밀실에서 천장만 바라보다가 날을 샜다.

감시자가 자신을 데리러 와 휠체어에 태웠다. 각막 이식을 하러 갈 때는 그러지 않아서 덜컥 겁이 나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감시자는 앞으로 어떻게 휠체어를 밀어야 하는지 알려줬다. 멀쩡한 두 다리가 있는데도 수술실까지 휠체어 바퀴를 밀어서 이동했다.

바지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감시자는 눈물에 젖어 색이 짙어지는 바지를 보고도 빨리 움직이라는 재촉이나 했다. 그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수술 중이라는 붉은 등이 켜졌다. 수술복을 입은 연구원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철판으로 된 수술대는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옆자리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그는 입에 산소호흡기를 끼고 자는 중이었다. 그자의 손목에 수많은 줄을 연결해 약물을 주입하고 있었다.

자신도 저렇게 되는가 싶어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까마귀처럼 검은 머리칼을 가진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고 있자 연구원이 빨리 드러누우라고 화냈다. 큰 소리에 어깨를 움츠리고 수술대 위에 올라갔다.

“옷 벗어.”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알몸을 보인다는 데에 수치심을 느끼기에는 수술에 대한 공포가 너무 컸다. 닭살이 돋을 것처럼 서늘한 수술실에서 굼뜬 손짓으로 상의 단추를 풀었다.

“우리가 너 기다려주려고 모인 사람들인 줄 알아!”

연구원의 호통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른 고무줄 바지를 내렸다. 연구원은 말초동맥의 산소포화도, 심전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장치와 환자 감시 장치, 호흡을 평가할 수 있는 가스 분석기 등을 자신에게 매달았다.

“옆으로 누워.”

커다란 바늘이 척추에 꽂혔다.

“아아, 아파. 아파요.”

그들은 자신의 울음소리에도 조용히 하라고 할 뿐이었다. 연구원은 하반신을 마취시킨 자신을 똑바로 눕혔다. 성기에는 소변줄이 꽂혔다. 허리 밑으로 완전히 감각이 사라졌다. 연구원들은 자신의 다리를 자기 멋대로 움직였다.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은 것이다.

잔뜩 겁을 먹은 탓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영원히 걷지 못할 거란 생각에 울고 싶었다.

그들이 다리에 대고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피부가 잘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위이잉잉, 전기톱이 뼈를 절단하였다.

각막 이식 수술을 할 때가 떠올랐다. 메스가 자신의 눈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전신을 지배했다. 수술에 대한 공포는 좋은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으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눈처럼 서서히 자신의 안에서 켜켜이 쌓이고 있었던 거다.

눈이 잔뜩 내리던 기차역에서 자신의 손을 놓았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기차에 함께 올라타던 자신을 밀쳤다. 엉덩방아를 크게 찧은 자신은 힘껏 일어나 기차를 쫓아 달렸다. 엄마, 엄마!

다섯 살 아이는 떠나는 기차를 잡을 수 없었다. 달리던 자신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닥에 넘어졌다.

기차 유리창에 눈꽃처럼 뿌옇게 살얼음이 낄 만큼 추웠다. 기차 안에 앉아서 빨간 코로 휴대용 술통을 기울이던 아저씨와 부모님과 함께 놀러 가 신난 아이의 미소, 바람에 휘날리던 엄마의 검은 머리칼. 그때 본 풍경을 바늘로 새기듯 속이 콕콕 아파온다.

엄마는 그게 언제였든 언젠가 자신을 버렸을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이름 없이 그저 ‘아가’라고만 불려왔기 때문이다. 왜 하필 그때 버려졌는지는 궁금하긴 했다. 태어난 직후에 버려도 됐는데 말이다. 왜 제게 이런 기억을 남긴 걸까.

역무원은 버려진 자신을 경찰서에 보냈고, 경찰은 자신을 보육원으로 보냈다. 보육원은 얼마인지 모를 돈을 받고 자신을 모스크바에 있는 이 연구소에 팔았다. 그렇게 발로 차면 굴러가는 돌처럼 자신은 어른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결국 실험체가 된 거였다.

구질구질하고 비루한 삶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에 있는 실험체들 또한 자신과 비슷하게 버려졌다. 자신만 특별하게 불우한 게 아니라 스스로를 동정할 수조차 없었다.

떠나는 엄마를 따라잡기 위해 달렸던 그날이 지그시 감은 눈꺼풀 안에서 되살아났다. 눈보라가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흉흉한 소리를 내며 어린아이의 뺨을 사납게 할퀸다. 콧물이 나오다가 얼어붙고 빨갛게 튼 볼 위로 눈물이 흐른다.

엄마. 엄마.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그녀가 탄 기차는 멀리 하얀 설원에 놓인 레일을 따라가 버린다.

연구원들은 실험체 384의 잘라낸 다리뼈에 실험체 0의 다리뼈를 넣었다. 실험체 384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만일 실험체 384가 실험체 0의 신체를 잘 받아들인다면 수술 당일에도 뛸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실험체 384는 불구가 되는 거였다.

* * *

마취에서 풀려난 실험체 384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리가 꿈쩍하지 않았다. 상체를 비틀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니까 누군가가 말렸다.

“움직이지 마. 누워 있어.”

그러나 자신은 그자가 하는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젠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엄마가 사용한 언어와 비슷한 걸 보면 한국어일 것이다. 절망에 빠진 와중에도 그의 하얀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잘생겨서 어쩔 수 없었다.

“이제 나 다리 병신이 된 건가요?”

그는 에스퍼 검사를 할 때 수족관 밖에 서 있던 이였다. 당연히 연구원이라고 생각해 그에게 물었다.

“미안. 나 네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겠어. 아직 한국어 못하는 거지?”

“러시아어 몰라요? 왜 한국어를 사용해요.”

서로의 언어가 달라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몇 마디 주고받다가 실험체 384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그가 자신을 달래기 위해 등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기주 넌 멋진 어른으로 자랄 거야.”

뭐라고 떠드는지는 몰랐지만, 파도처럼 일렁거리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실컷 울고 나니 배가 고팠다. 수술받기 위해 계속 굶었기 때문이다.

언제 밥을 먹으러 갈 수 있나 철문을 쳐다봤다. 그는 깁스한 자신의 다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물었다.

“당신은 누구예요? 저번에도 나 에스퍼 검사 하는 거 보러 왔죠? 연구원인가요?”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실험체 384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이라고 했다.

“■■■? 그게 뭐예요? 이름인가?”

그는 이번에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차기주.”

“차기주? 그게 뭔데요? 난 실험체 384예요.”

“차기주. 난 ■■■.”

연구원 중에서 미친 사람이 있던가? 왜 자신을 ‘차기주’라고 부르나 싶다. 한국어로 알려준 그자의 이름은 너무 어려워서 자신은 바로나라고 부르기로 했다. 엄마처럼 머리카락이 새까만 까마귀 같은 사내이니 말이다.

“바로나, 나는 언제부터 밥을 먹을 수 있어요? 배고파요.”

CCTV로 실험체 384를 지켜보던 감시자는 그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걸 지켜보다가 연구소장에게 가서 보고했다. 소문에 의하면 실험체 384가 A급 에스퍼로 각성했다고 했다. 그동안 한 실험 중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였다. 그런 귀한 실험체에게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었다.

보안 문제로 창이 없는 실내에는 평범한 사무실처럼 책상과 컴퓨터가 놓여 있었다. 안경을 낀 매부리코의 중년 남자가 감시자의 인사에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뗐다.

“뭐지?”

“실험체 384가 깨어났습니다.”

“그딴 사소한 거 일일이 보고하지 마.”

짜증 난 연구소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감시자는 침을 꼴깍 삼키고 입을 뗐다.

“허공에 대고 대화를 나누는 게 아무래도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혼자서 떠든다고? 미친 건가?”

“정확한 판단을 세울 수는 없지만 계속 관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고르는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생각에 잠겼던 그는 감시자에게 그러도록 하라며 허락을 내렸다.

“지금 배고프다는데 어떡할까요? 방귀는 자면서 뀌었습니다.”

“먹이도록 해. 잘 먹어야 회복도 빠르겠지.”

이고르는 감시자를 보내고 책꽂이로 위장한 비밀의 문을 옆으로 밀어서 움직였다. 회색 철문을 여니 미로처럼 복잡한 통로가 나왔다. 이곳의 지도를 외우지 않은 낯선 침입자가 들어선다면 미로에 갇히게 될 터였다.

그는 홍채 인식으로 몇 번이나 미로에 달린 문을 열고 나서야 실험체 0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실험체 0은 약물에 의한 코마 상태였다.

연구원들은 이 실험체 0의 신체를 이식해 여러 후천적 에스퍼를 만들고 있는 거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후천적 에스퍼들는 등급이 몹시 떨어지긴 하지만 그들을 이용하면 또 다른 후천적 에스퍼들을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3세대는 폭주 속도가 진짜 에스퍼에게 신체를 물려받아서 에스퍼가 된 2세대보다 매우 빨랐다. 그런 것들은 자살 테러에 써먹고 버리는 용도였다. 고작해야 한 달짜리 목숨. 조국을 위해 바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영광인 것이다.

이고르는 실험체 384에게 잘라준 다리뼈가 회복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바짓단을 걷어 올렸다. 상처 부위가 분홍빛으로 아물어가는 중이었다. 아주 느린 속도였다. 실험체 0의 신체를 빼내는 작업을 계속할수록 실험체 0의 회복이 더뎌졌다.

무한정으로 에스퍼의 몸이 회복되는 건 아니라는 증거였다. 이고르는 실험체 0의 다리 상처에 입맞춤했다. 이렇게나 아름답고 강한 생명체를 계속 보고 있으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고르는 이제 이자를 깨워야 할 때임을 알았다. 그러지 않는다면 실험체 0은 회복되지 못하고 죽어버릴 거다. 깨어난 실험체 0이 허락도 없이 자기 신체를 도려낸 자들에게 복수할지도 몰랐지만 이고르는 그런 전개 따위는 고려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내였다. 자신이 실험체 0을 좋아하면 실험체 0도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망상에 사로잡힐 만큼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이고르는 자기 혼자서 이 동양인 에스퍼와 연애를 하는 중이기도 했다.

실험체 0을 대신할 새로운 대타를 구하고 있지만 마땅치 않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A급 에스퍼를 납치하기 위해 후천적 에스퍼들을 보내봤지만 죄다 죽어나갔다. 등급이 가장 높게 측정된 B급 녀석들을 여럿 보내도 마찬가지였다.

신체 회복 능력이 좋으려면 무조건 A급 에스퍼를 사냥해야 하는데 B급 에스퍼로는 그게 불가능했다. 실험체 384는 A급으로 각성한 듯 보이지만 아직 그가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 그 능력부터 알아보고 인간 병기로 개발해야 했다.

실험체 384로 A급 에스퍼를 납치해오면 후천적 에스퍼를 만드는 ‘아프로디테 프로젝트’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이식 수술을 수백 번 해 본래의 신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바꾼다면 실험체 384는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S급, 어쩌면 SS급 에스퍼로 각성할 수도 있었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실험체 0의 신체를 이식받을수록 파동 에너지가 강해져야만 했다.

실험체 384에게 각막 이식 수술을 하고 그 결과가 좋아 다른 실험체에게 같은 이식 수술을 해봤지만, 에스퍼로 각성하기는커녕 눈이 멀어버렸다. 이고르는 각막 이식이 다른 신체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부작용이 작은 게 아니라 실험체 384가 특별한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 가설을 증명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식 수술 중 다리뼈를 받아들이는 게 가장 부작용이 컸는데 두 번째 수술을 실험체 384에게 받게 했으니 그 결과를 지켜보면 알게 될 것이다. 과연 실험체 384가 특별한 체질인지 아닌지 말이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으나 계속되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식 수술 부작용이 계속 나타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최대한 많은 이식 수술을 통해 실험체 384를 인류 최강의 에스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고르는 잠들어 있는 실험체 0이 있는 방에서 나왔다. 복잡한 미로를 통과해 원래 자신의 연구소장실에 들어섰다. 그는 책상에 앉아 멈췄던 업무를 처리했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집중하느라 깜빡이는 걸 잊었던 눈이 충혈되고 아팠다. 머리를 식힐 겸 컴퓨터로 잠든 실험체 0을 지켜봤다. 산소호흡기를 낀 이 아름다운 동양인이야말로 프로젝트 이름과 어울리는 아프로디테라고 생각했다.

* * *

실험체 384는 실험체 174와 매일같이 식당에서 만나 함께 식사했다. 철창 안에서 모두의 위에 군림했던 무서운 우두머리와 자신이 이렇게나 친근하게 대화를 나눈다는 게 신기했다. 실험체 174는 생각했던 것보다 여리고 겁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실험체였다. 다른 실험체를 속일 만큼 연기력이 뛰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식판 가득 파스타와 으깬 감자를 담은 그는 수저로 음식을 입 안에 퍼 날랐다.

으깬 감자를 먹으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안에서 지워진 줄 알았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와 자신이 먹는 식사는 언제나 삶은 감자였다. 그녀는 냄비에서 하나뿐인 포크로 감자를 꺼내 식탁에 올려두고 배고플 때마다 먹으라고 했다.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빈민촌에 있던 우리 집은 집주인이 벽돌로 직접 지은 곳이라 무엇 하나 튼튼한 게 없었다. 창문 틈으로 사나운 바람이 숭숭 들이쳤고 문마다 경첩이 삐거덕거렸다. 조잡한 현관문은 언제든지 힘 좋은 사내가 와서 잡아당기면 뜯길 것만 같았다.

마을에는 그런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옆집에서 부부 싸움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 그 소리가 다 들렸다. 골목은 빈민들을 가두기 위해 만든 미궁 같았는데 늘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악취가 길에 눌어붙어 있었다.

엄마는 과일을 외상으로 받아서 시내에 있는 드라이브스루에서 판매했다. 그렇게 과일을 팔아서 돈을 벌면 외상값을 갚고 빈민촌을 관리하는 불곰 타투를 한 자들에게 일정 금액 가져다 바쳐야 했다. 그동안 자신은 텔레비전이 있는 표도르 아저씨네서 온종일 있었다.

표도르 아저씨는 과자와 음료수를 파는 슈퍼 주인이었다. 그는 엄마를 좋아해서 자신을 자기 아들 취급 했다. 텔레비전으로 공부도 시켜주고 말하는 법도 가르쳐줬다. 손님이 오면 대신 돈 계산을 시켜보기도 했다.

자신은 엄마가 없는 동안 슈퍼에서 파는 과자 한 봉지를 까먹거나 빵과 우유를 얻어먹으며 끼니를 때웠다. 반면 집에 돌아온 엄마는 투박한 손으로 식탁에서 얼음처럼 딱딱해진 감자를 손으로 쥐고 허겁지겁 먹곤 했다.

그릇과 식기를 사용하지 않는 삶은 참으로 비천했다. 연구실에서 수술 후 몸을 회복하기 위해 식당 의자에 편하게 앉아 식판에 밥을 받아먹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번 물꼬를 트자 그 밖의 다른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다 하다니. 이런 걸 여유라고 하는 거겠지.’

제 배 부른 처지가 수술대에 올려지는 대가로 받은 거라고 생각하자 우스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인제 와서야 철창 안에 갇힌 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궁금해졌다. 자신을 기차역에 버린 엄마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자신의 눈에는 엄청난 부자처럼 여겨진 표도르 아저씨였지만 그래봤자 우리와 같이 근근이 살아가던 빈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짝사랑하는 친절한 이웃을 받아주지 않고 아들도 버리고 멀리 떠나버린 것이겠지. 그러니 새로운 곳에서는 잘 살길 바랐다.

계속 멍때리며 머릿속에서 희뿌연 엄마의 얼굴을 되뇌고 있는데 실험체 174가 자기 말을 듣고 있냐고 물었다.

“아니. 안 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

“엄마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어. 그런데 매일 잊지 않기 위해 생각했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나 봐. 하루라도 게을리 굴었으니 이렇게 흐릿한 얼굴로만 기억에 남은 거겠지.”

실험체 174는 실험체 384가 처음 연구소 철창 안으로 들어왔던 날을 떠올렸다. 이미 7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 한 아무리 그립고 보고 싶은 존재여도 잊을 수밖에 없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나도 날 버린 부모님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 어쩔 수 없지.”

세월. 시간이 아닌 세월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훅 와닿았다. 짧은 팔다리를 가졌던 아이는 어느새 길쭉한 자작나무처럼 길어졌다. 아마 엄마가 지금의 자신을 보면 몰라보지 싶었다.

먹먹해지는 마음에 으깬 감자를 입에 밀어 넣었다. 실험체 174가 테이블 위로 상체를 숙였다.

“384, 사실 나 애인 생겼어. 저기서 지금 널 죽여버릴 것처럼 노려보고 있는 알파야.”

“뭐?”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서 그 연구원의 얼굴을 보려고 하자 실험체 174가 자신을 말렸다.

“쳐다보지 마. 그는 지금 동료와 같이 있어.”

자신의 귀에 속삭이는 실험체 174의 목소리는 어딘가 들뜬 듯하고 달짝지근하게 느껴졌다. 반면 사나운 연구원의 시선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등을 할퀼 것처럼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연구원의 알파 페로몬이 적의를 가지고 자신에게 경고했다. 자기 오메가한테서 당장 떨어지라고.

동료 연구원들이 갑자기 무슨 일이냐며 실험체 174의 연인에게 물었다. 그 틈에 자신은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힐끔 곁눈질로 쳐다봤다.

“나 그의 아이를 가졌어.”

“그걸 어떻게 알아?”

이 짧은 물음이 실험체 174에게 얼마나 큰 모욕감으로 다가갈지 무심한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러 연구원의 욕구를 풀어주고 있는 실험체 174로서는 당연히 자기를 더러운 남창 취급하는 것처럼 들릴 말이었다.

표정이 굳은 실험체 174가 터틀넥을 내려서 자기 목을 보여줬다.

“미안. 난 글씨를 읽을 줄 몰라.”

“블라디미르가 나한테 각인을 했어. 난 그의 아이밖에 가지지 못해.”

“아!”

연구원들이 바보도 아니고 섹스할 때 실험체 174에게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실험체 174에게 아이가 생겼으니 그건 의도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이미 애 아빠들 사이에서 모종의 대화가 오간 것이겠지.

실험체 384는 감탄하며 맞은편에 앉은 실험체 174를 쳐다봤다. 자기 오메가와 다른 알파가 계속 얼굴을 맞대고 있자 결국 참다못한 블라디미르가 동료들을 버리고 실험체 384에게 다가와 어깨를 밀쳤다.

“발렌틴, 이 알파랑 무슨 사이야.”

발렌틴? 실험체 384는 입을 벌리고 이름이 있는 발렌틴을 쳐다봤다. 발렌틴이 친한 친구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실험체 174가 낯설고 또 연구원들과 똑같은 자유와 권리를 가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름을 잃은 실험체 384는 이름이 너무 부러웠다.

“친구라고? 그래도 너무 가까이 붙어 있지는 마.”

질투에 미친 블라디미르는 실험체 384를 노려봤다. 동료들이 무슨 일이냐며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왔다. 발렌틴은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게 누구야. 우리 예쁜이잖아.”

“킥킥. 임신했다고 하더니 가슴에 살 오른 것 좀 봐.”

연구원이 뒤에서 발렌틴의 가슴을 움켜잡으며 희롱했다. 식당 안은 연구원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실험체들의 조용한 숨소리밖에 흐르지 않았다.

“야, 네가 이X 아빠 아니야?”

“너야말로 애 아빠 아니야?”

저속한 말들이 연구원들 사이에 오고 갔다. 하얀 가운을 입은 두 알파가 서로를 팔꿈치로 때리며 장난쳤다. 진짜 애 아빠인 블라디미르는 모욕감을 참기 위해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발렌틴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자신을 향한 조롱을 받아냈다.

“그만하세요.”

그 자리에서 인내심이 가장 짧은 이는 자신이었다.

“뭐야. 어떻게 쥐새끼가 말을 하지?”

쥐새끼라고 자신을 비하한 건 실험실 쥐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무런 배움을 가질 수 없었던 실험체 384였지만 주워들은 건 있었다.

“이것 봐. 알파 주제에 꽤 곱상한걸. 이참에 이쪽으로 갈아탈까.”

“자기 멋대로 애나 배는 오메가랑 다르게 이쪽은 아무리 사정하고 노팅해도 귀찮을 일 없잖아. 좋네.”

실험체 384의 턱을 잡아 들어 올린 연구원이 자신의 얼굴을 돌려보며 눈독을 들였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과 달리, 엄마의 돈을 뜯어 가던 불곰 타투가 새겨진 마피아 똘마니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긴 생체실험 따위를 하는 자들에게 너무 많은 걸 바란 건지도 몰랐다.

“감히 누가 멋대로 임신하랬어!”

연구원이 의자에 앉아 있던 발렌틴의 뺨을 때렸다. 강한 힘에 그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연구원들은 임신중절수술을 하는 것도 귀찮으니 자연 유산을 시켜주겠다며 발렌틴 위에 올라탔다.

정말 알파인 자신을 욕보이려는 건지 연구원 두 명은 달라붙어서 옷을 벗기려고 들었다. 다른 실험체들이 식판을 버리고 빠르게 식당에서 도망쳤다. 발렌틴이 행복한 표정으로 소개했던 블라디미르는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실험체 384는 그가 얼마나 비겁하고 대책 없는 자인지 깨달았다. 여러 연구원의 성욕을 처리해주던 오메가를 임신시켜놓고 그를 책임지고 보호할 방법은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니. 그는 그냥 알파가 가진 욕망대로 오메가를 임신시켰을 뿐이다.

블라디미르가 베푸는 다정한 행동과 말에 넘어간 발렌틴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실험체 384는 임신한 오메가에게 주먹을 휘두르려는 연구원의 손목을 자르고 싶다는 강한 바람을 가졌다. 그러자 정말 연구원의 손목이 누가 칼로 잘라낸 것처럼 떨어져 나갔다.

“으아아. 아아. 씨발. 이게 뭐야. 내 손!”

피를 철철 흘리는 연구원이 자기 손목을 붙들고 오열했다. 연구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실험체 384에게 향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방금 그 일이 자신이 해낸 것이라는 걸.

에스퍼 능력에 대해 자각을 하자 자신의 안에 내재된 파동 에너지가 느껴졌다. 실험체 384는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가벼운 바람이 그의 손을 떠나자 발렌틴 위에 올라탄 연구원의 몸 위를 칼날처럼 회전하며 조각조각 갈아버렸다.

살점과 피, 뼛조각이 비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구원들은 겁에 질려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붉은 사이렌이 울렸다. 경고음을 듣자 솜털이 쭈뼛 섰다. 그건 위험을 알리는 동시에 자신을 사냥하라는 신호였다.

여기 있는 자들을 다 죽이면 연구소에서 탈출할 수 있을 테다. 그렇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힘이 모자란다는 느낌이 들었다. 에스퍼로 이뤄진 군인이 식당 안으로 들이닥쳤다. 사람 머리통만 한 불덩이가 허공에 수십 개 떠다녔다.

“여기서 죽을 생각이냐.”

실험체 384는 앞으로 나선 연구원을 응시했다. 그가 연구원들 사이에서 우두머리인 듯했다.

“아니면 살고 싶어?”

그의 물음에 실험체 384는 우물쭈물 대답했다.

“살고 싶어요.”

“왜 연구원을 살해했지?”

“그가 발렌틴을, 아니 실험체 174를 모욕하고 때려서 유산하게 하려고 했어요.”

“이런. 죽어 마땅한 놈을 죽였군.”

그의 말에 실험체 384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자기소개했다.

“나는 모스크바 연구소에서 아프로디테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는 소장 이고르라고 한다. 실험체 384, 나는 너의 적이 아니야.”

순진한 실험체 384는 온화하게 미소 짓는 이고르를 보고 경계심을 풀었다. 그가 군인 에스퍼들에게 불덩이 좀 치우라고 했다. 그와는 말이 통할 것 같았다. 실험체 384의 표정은 급격히 밝아졌다.

“만일 네가 우리 연구원들을 살해하지 않고 순순히 아프로디테 프로젝트에 참가한다면, 저 오메가에게는 자유를 주마. 어차피 임신한 오메가를 계속 연구소에 데리고 있을 순 없지. 그렇지?”

그가 하는 제안에 실험체 384는 발렌틴을 돌아봤다. 발렌틴이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실험체 384를 쳐다봤다. 제발, 제발, 제발. 발렌틴이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런 발렌틴과 달리 블라디미르는 불안한 표정으로 식당 안을 두서없이 둘러봤다.

“발렌틴에게 겨울엔 따뜻하게 난방되는 집도 주세요.”

“그럼, 그러고말고. 어때, 나와 손을 잡을 거니?”

실험체 384는 발렌틴을 구하면 자신이 연구소에서 더 험하게 다뤄질 거라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그건 그가 발렌틴을 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계속 에스퍼의 신체 조직을 이식받는 수술을 받게 될 터였다.

그러다가 다른 실험체들이 그러했듯 병신이 되거나 더미가 될 것이다. 그러니 이고르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한 사람이라도 이곳에서 살려 보내는 게 나았다.

“네, 좋아요.”

그의 대답에 발렌틴이 울음을 터트렸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384.”

자신은 그를 위해 희생하지 않았다. 발렌틴은 울 필요도, 자신에게 미안해할 이유도 없었다. 이고르가 감시자에게 발렌틴을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그들을 따라가던 발렌틴이 자신을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손을 촐랑거리며 흔드는 모습에서 발렌틴의 본래 나이가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보는 그의 모습이 밝아서 좋았다. 이고르는 실험체 384에게 앞으로는 자신의 명령 없이는 그 누구도 죽일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은 그 말이 함부로 살인하면 안 된다는 의미일 거라고 생각했다. 직접 만나본 연구소장이 생체실험을 하는 자답지 않게 착해서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연구원을 따라가면 네 깁스를 풀어줄 거다. 진정한 에스퍼가 된 걸 축하한다, 실험체 384.”

실험체 384는 휠체어 바퀴를 손으로 밀며 연구원을 따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이고르가 네 다리는 멀쩡하니 걸어도 된다고 했다. 속는 셈 치고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깁스해서 양다리의 높이가 다르기는 했지만 쩔뚝거리며 걸을 수 있었다.

연구원을 따라간 처치실에서 전동 톱으로 석고 깁스를 잘랐다. 다리뼈를 이식받은 다리에 상처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수술받은 하루 만에 완전히 회복된 것이다. 신기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땅을 밟았다.

“내일은 팔 이식 수술을 받을 거야. 무리하지 말고 쉬어.”

첫 번째 수술과 두 번째 수술 사이에는 기간이 꽤 있었다. 그런데 세 번째 수술은 회복 기간도 없이 너무 바로였다. 불안한 마음에 파동 에너지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끔찍한 두통과 눈이 빠질 것 같은 압력이 얼굴로 모여들었다.

“우엑, 케엑.”

진료 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격하게 허리를 꺾고 바닥에 토사물을 쏟아냈다. 연구원은 짜증 난 듯 청소부를 불러서 빨리 치우라고 소리를 질렀다. 청소부에게 향하는 성이 꼭 자신을 책망하는 것 같아서 위축된 채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방금 네가 에스퍼 능력을 사용한 부작용이야. 어쩔 수 없지 뭐.”

“부작용이요?”

“에스퍼들은 파동 에너지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 그런데 능력을 사용할수록 에스퍼 안에 내재된 파동 에너지가 불안정해지면서 에스퍼의 신체에도 영향을 끼치는 거야.”

실험체 384는 에스퍼들은 무적인 초능력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약점이 있었다니.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건지 걱정되고 두려웠다.

“네가 힘을 사용할수록 네 몸에 나타나는 부작용은 강해질 거야. 평범한 에스퍼라면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되지만, 후천적 에스퍼들은 가이딩이 통하지 않아. 그러니 함부로 힘을 난발하지 않도록 해. 네가 힘을 써야 하는 순간은 연구소에서 명령을 내렸을 때뿐이야.”

연구원은 실험체 384가 연구소에서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알았지만 각성한 에스퍼에게 알려줘야 하는 매뉴얼을 읊었다. 에스퍼의 힘을 각성한 이상 일반인은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약점을 말해 죽지 않으려면 자신들의 실험에 동참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줘야 했다.

“그럼 난 이제 죽는 건가요?”

“그렇지 않아. 이식 수술을 받고 에스퍼 등급이 상승하면 불안정 파동 에너지가 원위치 되니까.”

“살려면 수술대에 오르라 이거죠.”

“그래, 말귀를 잘 알아듣고 똑똑하구나.”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발을 들인 것이다. 실험체 384는 주먹을 무릎 위에서 말아 쥐었다.

“가이딩도 못 받는데 뭐 하러 우리를 에스퍼로 만드는 거예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폭탄들인데. 나라에서 이 쓸데없는 실험을 허락해줬어요?”

실험체 384의 질문은 아프로디테 프로젝트의 오점을 꿰뚫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이 실험은 실패했다. 연구원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원래의 예상대로라면 후천적 가이드들도 선천적으로 에스퍼로 각성한 자들처럼 가이딩을 받을 수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이론에서는 가능한 게 실제로는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에 올리는 보고서의 가이딩을 못 받아 죽은 사망자 수를 줄일 용도로 실험체들은 전쟁터에 보내졌다. 연구소는 그들을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을 수 있는 인간 병기로 둔갑시켜 막대한 연구 지원금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짓도 점점 반복하다 보니까 위에서 큰 성과가 없다고 여겼고 이만 연구소를 폐쇄하길 바랐다. 이고르 소장은 연구소 폐쇄를 막기 위해 실험체 384를 세계 최초의 S급 에스퍼로 각성시켜 자신의 실험이 성공했음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래봤자 실험체 384는 가이딩을 못 받아 시한부였다. S급 에스퍼, 나아가서는 SS급 에스퍼가 된다고 해도 가이딩을 못 받아 언제 죽을지 모르니 반쪽짜리 성공이고 말이다.

실험체 384가 아무리 이식 수술을 받아도 에스퍼 등급을 높이지 못하면 이대로 불안정 파동 에너지를 정화할 길도 없었다. 실험체 384는 다른 실험체들처럼 똑같이 전쟁터에 보내져 죽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연구원은 자신의 동료 한 명이 죽었다고 실험체 384를 원망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그들이 실험체 384에게 하는 짓이 훨씬 악랄하고 잔인했다.

“그건 네 알 바가 아닐 텐데. 어서 돌아가.”

싸늘한 목소리로 연구원이 실험체 384를 내쫓았다. 감시자가 진료실을 나온 그와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철문이 달린 밀실로 밀어 넣어졌다. 유리창이 난 그곳에는 침대 하나가 달랑 놓여 있었다.

실험체 384는 침대에 가서 누웠다. 멀쩡해진 다리가 신기해서 한쪽 무릎 위에 올리고 발목을 까딱거렸다. 그러고 노는데 바로나가 말을 걸었다. 물론 배우지 못한 언어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 여기 있어요?”

실험체 384는 허공을 보고 혼잣말했다. 연구원들은 실험체 384의 혼잣말을 녹음했다. 방 안에서는 유리 너머를 볼 수 없고, 유리 너머에서는 방 안을 볼 수 있게 유리에 특수 필름을 붙여놓아 실험체 384는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정신과 의사가 실험체 384에게 해리성 인격장애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며, 좀 더 관찰할 필요가 있음을 연구원에게 전했다.

“어차피 내 말 못 알아듣죠? 나도 그래요. 그러니까 내 멋대로 말할래요.”

“다리 다 나았네?”

“발렌틴은 여기서 무사히 나갈 것 같아요. 참 잘됐죠.”

“기주야, 어서 도망쳐. 지금 네 힘이라면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어.”

“바깥세상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냥 좁은 골목과 더러운 잿빛 건물만 떠올라요. 엄마는 기차를 타고 어디에 갔을까요? 부자랑 재혼하면 좋겠는데 그럼 날 찾으러 다시 기차역에 왔을까요?”

서로 언어가 달라서 대화가 되지 않은 채 그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그가 안 되겠는지 실험체 384의 손바닥을 펼쳤다.

избавление. 미래의 자신이 러시아 사전에서 찾아낸 단어를 실험체 384의 손바닥에 그림을 그리듯 따라 그렸다. 탈출이라는 단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험체 384는 문맹이었다.

“하하하. 뭐예요. 간지러워요.”

“잘 좀 느껴봐. 내가 뭐라고 적는지 모르겠어?”

“나랑 장난치고 싶은 거예요?”

실험체 384는 자신과 놀아주는 거라 여기고 바로나의 손바닥을 간지럼 태웠다. 그렇지만 영혼은 간지럼을 느끼지 못했다. 연구원들은 저 혼자 좋다고 까르르 웃는 실험체 384를 냉정한 시선으로 관찰했다.

과연 저런 정신이상자에게 아프로디테 프로젝트를 계속해 큰 힘을 쥐여줘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내부에서 갈리기 시작했다. 연구소 소장 이고르는 정신 상태 따위 무슨 상관이냐며 강하게 계획을 밀어붙였다.

“유일하게 이식 수술에서 아무런 신체적 부작용을 보이지 않은 실험체인데 저걸 포기하자고? 우리가 사회로부터 떨어져나와 이 실험을 위해 바친 세월은 어떻게 보상받을 건데.”

이고르의 말에 연구원들은 숙연해졌다. 국가에 이바지하겠다는, 괴수로부터 세계를 지켜내겠다는 사명감으로 모였던 그들은 어느새 ‘불가능’이라는 걸림돌에 넘어지면서 초심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삶을 바친 만큼 세상에 놀라운 성과를 보여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는 결실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동안의 노력과 시간과 희생당한 실험체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결과물이 필요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연구원들은 불쌍한 고아들을 생체실험 한 악당에 불과했다.

역사는 힘 있는 자의 편에서 서술되는 것이다.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모험가로 후대에 알려졌지만, 그곳에 오랫동안 살고 있던 원주민들에게는 자기네를 학살한 자에 불과했다. 그처럼 연구원들이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는 연구 결과에 따라 달라졌다.

“다들 걱정하지 말게. 실험체 174는 혹시 몰라 보험으로 지하실에 가둬뒀으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소장님. 풀어준다고 하셨잖아요.”

순진한 연구원 하나가 질문했다. 이고르는 그런 것도 모르냐는 듯 그를 한심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실험체 384에게 실험체 174는 소중한 존재야. 나중에 말을 듣지 않으면 그놈과 아이 목숨을 가지고 협박하면 돼. 우린 실험체 384의 목줄을 쥐고 있어. 그런데 무얼 두려워하지? 저놈이 정신병으로 폭주해 이곳을 날려버릴까 봐?”

이고르가 연구원들 앞을 걸어 다니며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하나같이 시선을 내리깔며 자신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실험체 174의 목에 나타난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주인이 실험체 384라고 생각했다. 러시아 남자 이름 중 가장 흔한 이름이 낳은 오해였다. 운명의 장난과도 같이, 실험체 384의 이름 또한 블라디미르였으므로.

7년 전, 실험체 384의 신원은 경찰서에서 확인되었었다. 그렇지만 부패 경찰은 제대로 일하지 않고 돈을 받고 보육원에 아이를 팔았다. 그리고 블라디미르는 보육원에서 연구소로 팔리게 된 것이다.

어린 자신을 아기라고 불러서 엄마가 자기한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는 생각은 실험체 384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에 대한 애칭을 엄마한테 버림받았다는 충격으로 곡해하고 상황을 각색했다. 기억이란 개인의 감정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었고 기록과 달리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었다.

기차에 엄마 손을 잡고 올라탔던 아이는 지나가던 행인에게 밀쳐져서 넘어졌을 뿐이었다. 경악한 엄마를 태우고 기차가 출발해버려 한국계 러시아인 블라디미르는 실험체 384가 된 것이고 말이다.

“우리한테는 실험체 384가 각인한 오메가가 수중에 있어. 불안정 파동 에너지가 많아지면 그놈한테 이식 수술을 해보고, 그러다가 등급이 높아지지 않으면 전쟁터에 보내서 알아서 죽길 기다리면 돼. 실험체 384를 통제하는 데 우린 아무 문제 없다는 뜻이라고. 알아들었으면 이만 가서 볼일들 봐.”

연구소장이 먼저 감시실을 빠져나갔다. 연구원들도 제 볼일을 보기 위해 그곳을 나왔다. 실험체들에게 줬던 더미의 신체 부위를 다시 더미에게 돌려줄 경우, 어떤 변화가 벌어지는지에 대한 생체실험이 남아 있었다.

* * *

세 번째 이식 수술은 두 팔이었다. 어깨에서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의 팔을 가져다 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제대로 팔이 연결되지 않고 괴사할 테지만, 실험체 384는 재생 능력을 가진 A급 에스퍼였다.

타인의 신체도 자기 신체인 것처럼 연골과 신경다발과 뼈와 살과 피부가 이어 붙여졌다. 연구원들은 경이로운 재생 능력에 감탄하며 아주 위대한 괴물을 탄생시킨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된 기분에 도취되었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에서 마취가 깬 실험체 384는 어깨가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으아아아. 아파. 아악! 아파. 살려줘. 살려주세요.”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실험체 384는 침대 난간을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머리로 벽을 쿵쿵 박기도 하며 수술에 성공했다고 자화자찬했던 오만한 연구원들을 겁에 질리게 했다. 바로나가 그런 실험체 384 앞에 나타났다.

“기주야, 차기주.”

차기주란 낯선 이름. 자신의 이름이 아닌 희한한 발음으로 그가 자신을 불렀다. 퉁퉁 부은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차라리 어깨에서부터 이 가짜 팔을 뽑아내면 덜 아플까 싶었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왼손으로 오른쪽 팔을 잡았다. 실험체 384가 가짜 팔을 뜯어내려고 하자 그가 그런 384를 말렸다.

“금방 괜찮아질 거야. 내가 안 아프게 해줄게.”

까마귀처럼 까만 머리칼을 가진 그가 고개를 숙여서 실험체 384의 오른쪽 어깨에 입맞춤했다. 어째서 계속 자신을 찾아오고 걱정해주냐는 물음이 고통으로 가득한 신음에 뭉개져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사랑해. 미래의 내가 널 사랑해.”

실험체 384는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가슴 한편을 따뜻하게 번져오는 울림이 안정감을 몰고 왔다. 식은땀으로 환자복이 흠뻑 젖어 들었다. 자신과 같은 인종으로 보이는 그의 눈은 밤하늘처럼 까만 동시에 별이라도 떠 있는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만약 엄마가 옆에 있었으면 한국어를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그가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지 물어보고 자신의 말도 전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아쉬웠다. 땀에 젖어 가닥가닥 달라붙은 앞머리를 다정한 손길이 커튼을 젖히듯 걷어냈다.

반듯한 이마에 입맞춤한 그가 뜨거운 인두로 지지듯 고통스러운 왼쪽 어깨에도 키스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고통이 확 줄어들었다.

“내 눈, 내 다리, 내 팔. 모두 너에게 줄게.”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 *

산소호흡기를 입에 씌운 채 누워 있는 실험체 0의 잘린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봉합해놓은 다리는 여전히 다 아물지 않았고 팔 또한 쉽게 회복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실험을 통해 실험체들이 후천적 에스퍼가 될 수 있었던 건 그가 자신의 능력을 잠깐이나마 빌려줬기 때문이었다. 가이딩을 못 받는 건 그게 그들의 힘이 아니어서이다.

힘의 근본은 그였다. 가이딩을 못 받아 생긴 불안정 파동 때문에 전쟁터에 떠밀려간 실험체들은 폭주해서 죽거나 적군에게 죽었다. 그러면 그들이 일시적으로나마 가졌던 힘은 다시 그에게 돌아왔고 그는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기주를 살리기 위해 그는 자신의 힘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미래에서 자신은 그를 열렬히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자신이 죽어야 이 실험체 384가 살고, 그래야 이 실험체 384가 차기주가 되어 미래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끝을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걸 실험체 384에게 내주고 떠날 일만 남았다. 절단된 어깨에서 피가 멈추지 않자 이고르가 지혈제를 가져왔다. 실험체 0에게 가루 형태의 지혈제를 뿌리고 붕대를 감았다. 하얀 붕대는 금방 붉게 물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아프로디테, 왜 회복하지 못하는 거냐.”

쌕쌕. 고운 숨만 내쉰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실험체 0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고르는 이대로 아름다운 동양인 에스퍼가 죽어버릴까 봐 초조함을 숨기지 못했다. 손톱을 물어뜯다가 연구소 내부에서만 통화할 수 있는 사내 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실험체 0의 어깨가 지혈되지 않아. 이러다가 과다 출혈로 죽겠어. 봉합 수술 준비해.”

그는 실험체 0의 얼굴에 하얀 시트를 덮어씌우고 고정해놓았던 침대 바퀴 잠금장치를 풀었다. 침대를 혼자 밀고 비밀의 장소에서 나온 이고르에게 연구원들이 합세해 함께 침대를 밀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실험체 0은 절단한 어깨 부위에서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게 봉합 수술을 받았다.

가파르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는 금방이라도 그가 죽어버릴 신호처럼 들렸다. 연구원들은 하루를 꼬박 실험체 0의 곁을 지켰다. 다행히 큰 고비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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