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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2) (15/17)

덫(2)

김수현은 운 좋게도 C 미술관 신인 작가 공모전 1차 심사를 통과했다. 미술관에 그림을 제출하라는 이메일을 받아서 크라프트지로 캔버스를 포장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차기주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림 두 점을 옮겨야 해서 택시를 불렀다. 택시 운전사가 짐을 보고 썩 반기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그림과 함께 뒷좌석에 탔다. 번화한 시내에 있는 C 미술관은 최근에 개관한 곳이라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광고가 텔레비전은 물론, 버스 정류장과 포털사이트 메인, SNS 등에 올라왔다.

지금만 해도 차창을 내다보니 빈센트 반 고흐 전시회에 대한 광고가 보였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그림을 전시한다고 뉴스에 나오는 것도 봤다. 어지간히 돈 많고 권력 있는 재벌이 차린 미술관 같았다.

덕분에 외국으로 나가지 않아도 한국에서 반 고흐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으니 고마울 뿐이었다. 공모전 결과와 상관없이 C 미술관에 차기주와 함께 전시회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택시에서 내려 작은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오는 내내 손에 든 그림의 무게에 멈춰 섰다가 걷길 반복한 결과, 미술관에 도착했을 땐 진이 다 빠져 있었다.

김수현은 손등으로 땀을 닦으며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에 공모전 참가 작품을 내러 왔다고 말했다.

“서류 작성 하시면서 들으세요. 9월 25일에 심사 위원분들이 참가작들 검토하실 거고, 27일에 결과 발표합니다. 28일에 그림을 찾아가세요. 당선작 이외의 참가작들은 그 이후에 별도의 고지 없이 폐기합니다.”

“네.”

작성한 서류를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건넸다. 직원이 투명한 스티커에 참가 번호와 그림 제목들을 인쇄했다. 김수현은 그것을 받아 들었다.

직원이 따라오라면서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적힌 전시실로 안내했다. 이미 벽에는 많은 그림이 걸려 있었고 그림마다 밑에 제목과 참가 번호가 적힌 스티커가 부착되어 있었다.

김수현의 참가 번호는 15번이었다. 직원이 빈자리를 안내해줬다. 크라프트지를 뜯어내고 그림을 못 박힌 벽에 걸었다.

“작품 밑에 제목과 참가 번호 붙여주세요.”

김수현은 스티커를 떼서 벽에 붙였다.

“다 되셨습니다.”

“저…… 다른 참가자들 작품 구경해도 되나요?”

“안에 CCTV 있어요. 다른 작품을 훼손하시면 실격 처리되고, 손해 배상 하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직원이 김수현에게 오메가 페로몬을 진하게 묻히길래 수작을 부리나 불쾌했는데 예상과 달리 직원은 깔끔하게 떠났다. 아마 히트가 가까워져서 페로몬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손으로 오메가 페로몬이 묻은 옷을 툭툭 털어냈다.

공모전 참가작들이 전시된 전시실을 쭉 둘러봤다. 의자에 앉아 있는 직원은 혹시 모를 작품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최유정의 작품은 뭔가 유추하며 설치미술 작품을 찾았다.

대리석 조각을 잘하는 그녀라면 이 작품을 출품했을 것 같았다. 김수현은 ‘사랑과 불안’이라는 제목을 가진 조각 앞에 섰다. 앞머리가 풍성하게 긴 남자의 뒷머리는 대머리였다. 기회의 신 카이로스였다. 그의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

원래라면 카이로스는 한 손에는 칼을, 다른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최유정의 조각상에서는 항아리가 들려 있었다. 항아리에서는 과연 돌을 깎아서 어떻게 이런 표현을 했을까 신기할 정도로 물줄기가 실감 나게 흘러내렸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이다.’

김수현이 기억하는 카이로스에 대한 설명은 그러했다. 그런데 최유정은 카이로스를 통해 사랑의 감정을 표현했다. 어쩐지 공감되었다. 기회처럼 사랑도 떠나면 잡을 수 없을 거라는 불안.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건 연애 중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주제였다.

그는 한참을 서서 조각상을 감상했다. 다른 참가자가 그림을 출품하기 위해 전시실에 들어왔다. 친구끼리 왔는지 그림을 벽에 걸고서 둘이 뭐라 뭐라 이야기했다. 김수현은 자리를 피하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다가 작품 걸고 가.”

“응. 누나, 수고해.”

직원이 참가자들과 아는 사이인지 친근하게 대화하고 갔다. 벽에 그림을 건 참가자 중 한 명이 친구에게 한탄하듯 말했다.

“이 공모전 내정자 있대. 아휴, 진짜 세상은 빽이면 다 되는구나.”

“뭐? 정말? 누군데?”

“차기주 가이드였던 김수현. 방금 봤지. 우리 누나가 여기서 일하잖아. 확실해.”

“헐, 대박. 뉴스에 꼰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차기주 건드렸다가 우리 같은 피라미 인생 망가지는 거 순식간이야. 이참에 우리는 김인택 평론가님한테 눈도장이나 찍어보는 거지, 뭐.”

김수현은 커다란 대리석 조각상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들이 떠나고 나서 공모전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미술관을 무슨 정신으로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지하철 역사로 들어갔다.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이라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자리에 앉아서 ‘차기주’를 새겨놓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어쩌면 이 박물관 또한 애초에 차기주가 자신을 위해 지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자신을 당선자로 미리 점찍어놓고 공모전을 열었을 거란 의심도…….

자신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에 대한 공감과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은 예술가의 욕구가 김수현의 안에서 충돌했다. 타인의 눈에는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불공평하게 보일 테지만 김수현은 알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은 탄생 자체가 불공평한 존재라는 걸.

자신은 PL 그룹 오너 가문에서 태어났다. 김 회장이 친아버지가 아닐 거라는 의심은 김아영의 말을 듣고 완전히 걷혔다. 자신은 자신의 집안이 가진 부를 정당히 누릴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어쩌면 매 순간 김수현이 하는 선택에는 PL 그룹이라는 배경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언제나 자신의 실력과 상관없이 그저 태생만으로 버프를 받고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제 와 연인이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걸 배신으로 취급하며 매도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불공정한 공모전으로 인해 피해자가 발생해서는 안 됐다. 김수현은 만일 자신이 공모전에 당선되는 두 명 중 한 명이라면 수상을 포기할 생각이다.

차기주의 후원은 자신이 정말 실력으로 인정받은 다음에 그것이 ‘부당’한 것이 아닌 ‘정당’한 것이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때 받고 싶었다.

최유정이 조각한 ‘사랑과 불안’이라는 조각상을 보고 와서 차기주에 대한 화가 쉽게 누그러진 걸지도 모르겠다. 차기주가 무슨 생각 중인지 그 조각상이 자신에게 말해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메시아가 선배라고 거짓말해도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자신을 왜 강간했냐고 묻는 말에도 아니라고 빡빡 우겼던 그다. 그 모든 게 자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동이라는 걸 이젠 안다.

솔직히 태백산에서 에스퍼들을 풀어서 자신을 잡아가려고 했을 때 또 끌려가서 감금당할 줄 알았다. 그런데 취리히 공항 에스컬레이터에서 마주친 차기주는 그 자리에서 자신을 잡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테디 일행과 실발트 숲으로 도망쳤다. 차기주가 진심으로 자신을 붙잡고자 했다면 절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몰래 뒤에서 이런 공작을 한 차기주의 마음이 무엇인지는 알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는 사냥꾼이 아니었다.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뒤를 쫓는 다정한 추격자였다.

김수현은 지하철 전차에서 내렸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차기주의 집으로 가니까 택시를 탔을 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한 시간 반이나 걸려 벌써 8시 30분이었다.

저녁 식사를 할 때를 한참 지난 시간이라 걸음을 서둘렀다. 집에 들어가기 전, 소매를 끌어당겨 오메가 페로몬 냄새가 남았나 맡아봤는데 희미할 정도로만 남아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거실 불이 꺼져 있었다.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검은 형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김수현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거실 불을 켰다.

“불도 안 켜고 뭐 하고 있었어요.”

“네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요.”

두 번째 생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듯했다. 그의 잘못을 알면서도 김수현은 차기주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첫 번째 생에서도 자신이 자살한 원흉으로 지목되면서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테다.

“미안해요.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했어야 했는데. 혹시 밥 먹었어요?”

“아니, 차돌박이 된장찌개 끓여놨어. 데워줄게.”

차기주가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김수현은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얇은 티셔츠가 등의 윤곽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입술로 날개뼈에 도장을 찍고 손으로 단단한 배를 문지르다가 허리를 놓아줬다.

“배고프다.”

김수현은 식탁에 가서 앉았다. 차기주는 식은 차돌박이 된장찌개를 인덕션에 올려놓은 후 마트에서 장을 봐온 재료로 손수 만들어놓은 반찬을 꺼냈다.

냉장고는 첫날 텅 비어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 열을 맞춘 반찬들과 음료수, 안줏거리들이 들어차 있었다. 밥솥에서 윤기 도는 쌀밥까지 떠 부지런히 늦은 저녁 식사를 차린 차기주는 자리에 앉았다.

“먹자.”

“잘 먹겠습니다.”

김수현이 수저로 차돌박이 된장찌개 국물을 떠보더니 눈을 휘며 웃었다.

“형, 요리 진짜 잘한다. 나한테 장가와요.”

차기주는 화끈거리는 귀를 문질렀다. 그들이 조용히 식사하고 있는데 김수현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수신자를 확인하고는 통화를 끊어버렸다. 그런데도 계속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 전환데. 급하면 받아도 돼.”

“미안해요. 그럼 잠깐 전화 받고 올게요. 먼저 먹고 있어요.”

김수현이 핸드폰을 챙겨서 빈방에 들어갔다. 에스퍼였다면 그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엿들을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의 그는 힘을 잃어서 그 내용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차기주는 엄지에 있는 거스러미를 뜯어냈다.

살점이 찢기며 피가 났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들어간 방문만 쳐다봤다. 엄지를 입 쪽으로 가져가 혀로 핥자 온 입 안에 혈 향이 맴돌았다. 완전히 그를 손에 넣을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통화를 끝낸 김수현이 돌아왔다. 그리곤 자기가 없는 동안 전혀 먹지 않은 차기주와 다시 식사를 이어나갔다. 평소처럼 김수현의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젓가락을 정갈하게 쥔 손을 노려다 보며 차기주가 물었다.

“누구야?”

“형이에요.”

“아아, 김정석 씨. 왜? 결혼해서 잘 사는 것 같더니.”

환영술사였던 아내에게 속은 그는 진짜 아내의 모습을 보고 기겁하며 이혼을 준비 중이었다. 괴수들이 넘쳤던 세상에 살아서 유일하게 좋았던 점이 바로 그거였는데 아쉽다.

“조만간 이혼할 것 같아요.”

“네 형이 여전히 널 괴롭히나 봐.”

“뭐…….”

김수현이 곤란해하며 말을 줄였다. 차기주는 속으로 김정석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상상을 하면서도 부드럽게 눈을 휘며 웃었다. 그가 김정석을 죽이면 두 사람 사이가 끝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는 형을 구하겠다며 차기주의 감시를 따돌리고 집으로 돌아갔던 김수현이다.

그때 다락방에서 우는 김수현을 끌어안으며 차기주는 이 알파를 자신이 온전히 소유한 것만 같아 얼마나 전율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정말 너는 네 형과 통화하고 온 걸까?’

낯선 오메가의 페로몬이 차기주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진하지 않은 탓에 오히려 그것을 맡기 위해 집중하게 됐다. 다른 사람이 생겼냐는 말 대신 차기주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김정석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택했다.

“좋은 오메가 만나서 마음 잡아야 할 텐데.”

“그러니까요.”

“너는 그러지 말고.”

“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 못 믿어요?”

“농담이야.”

마음에도 없는 김정석 걱정을 한 차기주는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로 날라 물로 대충 헹궈서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그는 김수현이 씻으러 들어간 욕실에 소리 없이 접근했다.

욕실 밖에 벗어둔 옷들이 뱀의 허물처럼 뭉쳐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들어 얼굴에 처박고 냄새를 맡았다. 역시 잘못 맡은 게 아니었다. 김수현에게서 다른 오메가의 냄새가 났다. 이걸 어디서 맡아본 것 같아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생각에 잠겼다.

오메가 냄새를 머릿속에 입력한 그는 김수현의 옷을 가져가 쓰레기통에 버렸다. 새 잠옷과 속옷을 바구니에 넣어서 욕실 문 앞에 놔뒀다. 차기주는 물소리를 들으며 굳게 닫힌 문을 한참 동안이나 노려봤다.

오늘 왜 늦었냐고 물어야 하는데 이 빌어먹을 걱정이 목을 조여서 말을 하지 못했다. 남편의 외도를 알면서도 이야기를 꺼냈다간 이대로 이혼할까 봐 덮는 심정이었다. 그는 다른 욕실에서 샤워를 끝마치고 침실로 들어갔다.

먼저 씻은 김수현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차기주는 화장대 앞에 앉은 그의 뒤에 서서 드라이기를 빼앗았다.

“내가 해줄게.”

차기주는 김수현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살 흔들며 찬 바람이 나오는 드라이기로 말렸다. 그사이에 차기주의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져 잠옷 어깨가 젖어 들었다.

김수현은 거울로 촉촉하게 젖은 차기주를 훔쳐보며 얼굴을 붉혔다.

“이제 자자.”

침대로 걸어 들어가는 그에게 의자를 돌려 앉은 김수현이 물었다.

“콘돔 아직 도착 안 했어요?”

“응, 5일 정도 더 걸릴 것 같아.”

“그…… 그럼 그냥 하면 안 되나?”

김수현은 자신만 섹스를 밝히는 것 같아서 창피했다. 하지만 차기주와 하는 건 너무 기분이 좋았다. 잘 숙성된 위스키처럼 위험한 페로몬을 두른 알파를 못 본 척하기에 김수현의 피는 너무도 뜨거웠다.

김수현은 천천히 발끝으로 차기주의 바짓단을 올렸다. 다리가 위로 올라가면서 무게 축이 이동했다. 그리곤 화장대 의자를 두 손으로 짚은 채 중심을 잡았다. 하얀 발은 잠옷 바지의 중심부를 꾹 눌렀다. 차기주가 그 발을 들어 올려 발등에 입을 맞췄다.

날카로운 눈매는 먹이를 노려보듯 자신을 쳐다봤다. 김수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차기주의 잠옷 바지 안에서 페니스가 살짝 발기했다. 차기주가 김수현의 발을 내리고 잠옷 상의 단추 중 가장 위의 것을 뜯어냈다.

거울에 동그란 김수현의 뒤통수가 비쳤다. 차기주는 양손으로 잠옷을 붙잡고 옆으로 찢었다. 단추가 사방으로 날아가며 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그냥 벗기지 뭐 하는 짓이에요.”

그는 손으로 김수현의 몸을 턱에서부터 훑어 내렸다. 일자로 곧게 뻗은 쇄골을 문지르고 근육으로 모양이 각지게 잡힌 가슴을 움켜잡았다.

“수현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윽한 울림에 김수현은 사정감을 느끼고 무릎을 모았다. 차기주를 올려다보는 하얀 목이 길게 늘어졌다. 목젖이 크게 위아래로 출렁인다.

“자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이래.”

그렇게 말한 차기주는 김수현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받치고 격정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말랑한 입술을 핥다가 입을 벌리고 들어온 혀가 잇몸을 훑고 입천장을 공략했다. 목구멍으로 들어올 것처럼 깊숙이 파고든 혀 때문에 김수현의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가 쫙 펼쳐졌다.

차기주가 입 안의 붉은 점막을 혀로 간질였다. 눈앞에 하얀 별이 튀었다. 그의 엄지가 가슴에 붙은 유두를 둥글게 뭉갰다.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아주 작은 신체 부위에서 전류가 흐르고 그 감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숨쉬기가 버거워질 때쯤 차기주의 혀가 빠져나갔다. 김수현은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김수현을 아이처럼 번쩍 안아 든 차기주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조차 제 발로 걷게 할 생각이 없다는 듯 김수현의 몸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차기주는 전부 뜯어져 너덜너덜한 김수현의 것과 달리 아직도 얌전히 잠겨 있는 잠옷 상의 단추를 한 개씩 느리게 풀어나갔다. 그의 손을 따라 김수현의 시선도 아래로 내려갔다. 잠옷 상의 단추를 다 풀었을 땐 김수현의 시선도 바지가 있는 곳에 도달해 있었다.

잠옷 바지 위로 그 형체가 융기되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고무줄 바지와 드로어즈 밴드를 한꺼번에 밀어서 내리자 갇혀 있던 좆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거대한 성기의 끝에는 투명한 쿠퍼액이 맺혀 있었다.

좆 기둥에 혈관이 불끈불끈 곤두선 모습은 참으로 흉악했다. 김수현은 알파의 좆을 보고 침을 삼키는 주제에 본능적으로 팔을 뒤로 보낸 채 엉덩이 걸음으로 도망쳤다. 그가 물러난 만큼 차기주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바지 내려. 오늘 너 재울 생각 없으니까.”

평소처럼 약간 도발한 것뿐인데 무엇이 그의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일까. 김수현은 기대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으로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제 귓가에까지 들리는 기분이었다. 잠옷 바지를 벗은 하얀 다리가 침대 위에서 가위처럼 벌어졌다.

차기주는 손가락을 걸어 김수현의 드로어즈를 밑으로 잡아당겼다. 분홍색 성기가 잔뜩 발기한 채 젖어 있었다. 그가 톡 하고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왈칵, 쿠퍼액이 쏟아져 내렸다. 음란한 몸에 대한 수치심으로 김수현은 ‘곧 러트예요’ 하며 거짓말했다.

당연히 안 통할 말이었다. 징벌방에서 러트를 보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러트가 오겠는가. 김수현은 대놓고 코웃음 치는 차기주가 얄미워 눈을 세모꼴로 떴다.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연 차기주가 러브젤을 꺼냈다. 김수현은 약간 삐지긴 했지만 두 다리를 더 넓게 벌리고 오금에 팔을 걸어서 고정했다. 엉덩이 사이에 파묻혀 있던 구멍이 잘 보이는 자세였다.

차기주는 러브젤을 짜 손바닥의 온기로 데웠다. 아무리 체온과 비슷한 온도라고 해도 젤이 뒤에 닿으면 김수현은 거북함을 느낄 터였다. 적어도 찬기를 빼주고 싶었다. 질척거리는 손가락을 구멍에 밀어 넣었다. 알파의 뒤는 이런 용도로 달린 게 아닌지라 벌써 몇 번이나 섹스를 했음에도 쉬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김수현이 상처 입지 않도록 손톱을 잘 다듬어놓은 손가락을 이용해 내벽에 러브젤을 충분히 묻혔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아랫배가 홀쭉해지고 경련하는 게 보였다.

“흐읏, 으.”

김수현이 차기주와의 키스로 부은 입술을 물어뜯었다. 김수현의 하얀 앞니를 보며 차기주는 빠르게 손목을 털었다.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굴었던 구멍이 이완되면서 손가락을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그는 손가락 개수를 늘려 안을 쑤셨다.

김수현이 침대 시트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빳빳했던 천에 회오리 모양으로 주름이 생겼다. 팔을 걸어 벌린 무릎 사이가 자꾸만 좁아지려고 했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무릎을 놓게 한 뒤, 그의 두 다리를 어깨에 걸쳐 구멍만 보이는 자세로 만들었다.

차기주는 분홍색 구멍 안에서 손가락을 가위처럼 벌려대며 빈틈이 생길 때마다 러브젤을 밀어 넣었다. 질척거리는 마찰음이 침실을 가득 채웠다. 잔뜩 들린 하체 때문에 김수현의 뺨과 콧등에 쿠퍼액이 떨어졌다.

김수현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구멍이 벌려지는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차기주가 부드럽게 풀린 구멍에 좆을 맞췄다. 주먹처럼 큰 귀두가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느라 기껏 안에 넣어둔 투명한 젤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이 모습만 보자면 마치 알파의 좆을 받아내기 위해 스스로 몸을 적시는 오메가와 다를 바 없었다. 김수현은 엉덩이골을 타고 젤이 흐르는 이상하고 찜찜한 감각에 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미끄러운 내벽으로 좆이 막힘 없이 전진해 들어왔다. 김수현은 더 이상 몸을 말고 있는 자세를 유지할 수 없어 차기주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매달렸다. 그러자 김수현의 허리를 붙잡은 차기주의 손이 그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구멍이 가장 두꺼운 좆 뿌리를 물기 위해 찢어질 듯 늘어났다. 팽팽해진 구멍에 곧이어 강한 타격이 가해졌다. 두 사람의 하체가 틈 없이 붙으면서 김수현은 차기주가 좆질을 할 때마다 그의 사타구니에 엉덩이를 맞아야 했다.

“아, 아. 아앗!”

빠르게 흔들리는 몸에 맞춰 김수현의 교성도 박자를 탔다. 내벽 주름을 드드득 긁는 좆은 움직일 때마다 전립선을 건드렸다. 여러 차례 한 관계로 인해 평범한 알파와 달리 비대해진 전립선은 김수현을 쉽게 느낄 수 있는 몸으로 바꿔놓았다.

차기주의 좆질에 맞춰 김수현의 좆이 흔들리며 묽은 액을 떨어트렸다. 매끄러운 피부 위에 쿠퍼액이 진주처럼 굴러다녔다. 배 안쪽이 빠짝 긴장하며 좆을 강하게 조였다. 차기주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오르가슴에 전율하는 김수현을 기다려줬다.

그의 눈은 자신한테 박히면서 절정에 이르는 연인의 모습을 빠짐없이 살폈다. 터질 듯 붉어진 얼굴과 가쁘게 오르내리는 가슴, 곤두선 젖꼭지와 긴장으로 선명해진 복근, 그리고 정액을 뱉는 예쁜 성기까지.

사진을 찍듯 김수현의 모습을 작은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눈에 담은 차기주는 김수현에 대한 타는 듯한 갈망을 느끼고 다시 거칠게 피스톤질을 시작했다. 어깨에 걸쳐놓은 다리가 차기주의 날개뼈를 때리며 버둥거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얄팍한 뱃가죽은 천으로 구렁이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흔적을 내보였다.

마치 그의 기둥이 배꼽까지 닿은 것처럼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김수현의 허리가 발작하듯 튀었다.

“아아아. 아아.”

원래라면 닿아서는 안 되는 결장이건만 그곳마저 범해버렸다. 김수현의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뜨거운 쇠꼬챙이로 뒤를 후비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가운데 믿기지 않게도 짜릿한 쾌감이 온몸을 적셨다.

사정으로 가라앉았던 김수현의 성기가 도로 빳빳하게 섰다. 투명한 전립선 액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좆에 달라붙은 뜨거운 내벽이 요동쳤다. 차기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김수현의 허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으으. 응.”

김수현은 간헐적으로 허리를 튕기다가 천천히 진정되어갔다. 차기주는 한참이나 김수현의 배 속에 머물며 점막의 조임을 느꼈다. 구멍에서 느릿하게 좆을 빼내는 행위에도 예민해진 점막이 자극받았다.

알 수 없는 점액질을 흠뻑 뒤집어쓴 김수현은 구멍을 죄며 차기주가 빠져나가는 걸 막았다.

“지금 말고 이따가 나가요.”

“나도 사정해야 해서. 최대한 빨리 나갈게.”

차기주는 단번에 몸을 뒤로 물렸다. 계속 물고 있던 게 사라진 줄도 모르고 내벽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좁아 들었다. 그가 나가면서 긁힌 점막들이 꿈틀거리며 녹아내려 물처럼 변한 러브젤을 흘렸다. 김수현은 양쪽 옆구리에 옅은 멍을 매단 채 아아, 소리 없는 감탄을 내질렀다.

차기주는 그것이 정액을 받아먹겠다는 건 줄 알고 입에 좆을 물렸다. 뭐라 해명도 해볼 틈도 없이 없이 많은 양의 정액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버렸다. 차기주는 고양감에 취해 색색 숨을 내쉬는 김수현을 내려다봤다.

약속이라도 한 듯 흥분과 애정에 전율하는 두 몸이 맞붙었다.

* * *

새벽 3시.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 김수현은 그 호칭이 가진 묵직함에 거친 정사로 욱신거리는 몸을 움직여 전화를 받았다. 그는 같은 침대에서 잠든 차기주가 깰세라 재빨리 침실을 깨금발로 나왔다.

“여보세요.”

―……뭐 하냐.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아버지는 미친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세요. 보통은 지금 잘 시간입니다.”

―아아, 그렇군. 벌써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어.

눈으로 보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이나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피로에 지친 아버지의 얼굴이 상상되어서 뾰족하게 세운 가시를 가라앉혔다.

―정석이 조만간 이혼할 거다.

“네, 어제저녁에 전화 와서 들었어요.”

―행동거지 조심해. 네 형 홀리지 말고.

김정석에게 문제가 있는 건데 꼭 김 회장은 자신이 형을 유혹한 것처럼 말했다. 역겨운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끊을게요.”

―모든 게…… 모든 게 다 네 잘못이다. 네가 태어나 내 아내가 죽고, 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널 키웠어. 그 나이까지 호강하면서 살았으면 은혜 갚아라.

“그 호강 누리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요. 하시고 싶은 말이 뭐예요.”

김수현은 아버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대범하게 굴었다. 아마 아버지의 손에 골프채가 들려 있는 걸 봤으면 절대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다. 자신은 집에서 나온 뒤로 꽤 많이 변했다. 세 번이나 힘든 삶을 살고 이겨낸 지금의 자신이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는 그때와 같겠는가. 그러니 아버지를 눈으로 보지 못해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아니라 성장을 통해 단단해진 것이다.

―내일 A 호텔 레스토랑으로 나와라. 오랜만에 밥 한 끼 먹자.

무서운 아버지에게 철벽을 두르고 스스로를 지키고 있던 김수현의 눈이 커졌다. 김 회장이 먼저 건네는 화해의 손에 괜한 기대가 피어올랐다.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 전혀 상상한 적 없어서 말을 더듬거렸다.

“그 몇, 몇 시에 만날까요?”

―내일 강의 있을 거 아니냐. 몇 시에 식사 시간이야.

“1시요.”

―그래, 그때 만나자꾸나. 새벽에 전화해서 미안하다. 그만 자라. 이만 끊으마.

김수현은 김 회장과 이런 대화를 한 게 믿기지 않아서 꺼진 핸드폰 액정을 계속 들여다봤다. 그가 왜 이런지 알 수 없었다.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침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밟는 것처럼 가벼웠다.

에스퍼의 능력이 사라진 차기주는 잠귀가 어두운 편이었다. 그가 베개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어디 갔다 와?”

“잠깐 화장실 다녀왔어요.”

그의 시선이 핸드폰을 쥔 손으로 향했다.

“하, 이것들이 안 되겠네.”

김수현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며 침대로 들어갔다.

“나 때문에 깼죠. 얼른 자요.”

“……그래, 수현이 너도 잘자.”

차기주는 등을 돌리고 어둠을 응시했다. 형형한 눈빛은 살벌하게 때를 기다렸다. 김수현의 숨이 고르게 변할 때까지 참았다가 협탁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었다. 김수현의 엄지손가락을 화면에 가져다 대 핸드폰 잠금을 열었다.

새벽 3시에 누구랑 몰래 전화하고 왔나 통화 목록을 확인했다. 아버지. 설마 진짜 김 회장은 아닐 것이다. 여태 김수현이 아버지와 친근하게 통화하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심지어는 자기 아들이 센터 징벌방에 갇혔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도, 그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안부도 물어오지도 않은 것이 김 회장 아닌가.

도청 파일에 따르면 김아영은 김 회장에게 김수현의 출생의 비밀을 말했으나 그가 믿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김 회장에게 김수현은 그냥 아내를 죽이고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러니 갑자기 아들이 보고 싶어서 전화할 리 없고, 다급한 일 때문에 전화했으면 김수현이 아무렇지 않게 잠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불안은 의심과 불신을 낳는 어머니였다.

차기주는 자신의 핸드폰에 김수현이 바람피우는 오메가의 번호를 저장했다. 그 번호가 오늘 늦게까지 만나고 온 페로몬 주인공의 것일 거라 굳게 믿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날뛰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 한가운데를 미친놈처럼 뱅글뱅글 돌며 중얼거렸다.

“아닐 거야. 바람이라니. 수현이가 그럴 리 없어. 아니…… 정말 그럴까?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김수현같이 잘난 알파가 같은 알파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차기주는 김수현을 믿었다가 불신하길 반복하다 쓰레기통에 버린 김수현의 옷을 꺼냈다. 코를 박고 냄새를 살폈다. 스쳐 지나가는 정도로는 지금까지 오메가 페로몬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이건 적어도 포옹은 한 것이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옷을 붙들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나랑 격정적인 잠자리를 가졌듯 그 오메가랑도 그랬을까? 오늘은 페로몬이지만 다음에는 립스틱 자국이면 어쩌지? 그 오메가는 김수현이 당연히 나랑 헤어진 줄 알고 만나는 걸까?’

자신이 완벽한 커플 사이에 낀 이물질이라고 해도 그는 절대 김수현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차기주는 구겨진 옷을 손으로 움켜잡았다가 세제를 듬뿍 넣어서 세탁기에 돌렸다. 그는 빨래 예상 시간이 줄어들어가는 타이머를 지켜봤다. 그 옷에서 오메가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면, 마치 그 페로몬이 묻었던 것조차 없었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숭고한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탈수가 끝난 젖은 빨래를 건조기에 넣었다. 그리고 또다시 빨래가 건조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 차기주는 그 지루한 시간이 자신을 몹시도 비참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수록 어떻게든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는 김수현의 바람이 오히려 기정사실이 되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마른빨래에서는 더 이상 오메가 페로몬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는 기껏 깨끗하게 세탁하고 건조한 옷을 도로 쓰레기통에 넣었다.

유치하고도 처절한 발악이었다.

* * *

그가 김수현에게 커플 추적 어플을 깔지 않은 건 순전히 죄인이라는 신분 때문이었다. 만일 김수현과 두 번째 생에서 그런 일이 없었다면 차기주는 바로 따져 물었을 것이다.

‘도대체 오늘 왜 늦게 들어온 거야. 그 오메가 페로몬은 뭐고.’

그렇다면 그 잘생긴 얼굴로 자신을 유혹해 격렬한 섹스를 한 게 사랑인지, 벌인지 헷갈리지 않았겠지.

‘왜 식사 중에 온 전화를 들어가서 받아. 정말 네 형이 전화한 거 맞아? 나랑 섹스해놓고 새벽에 몰래 나가서 전화 받은 건 뭐야. 그래놓고 왜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거짓말했어! 아버지라고 저장된 번호로 당장 전화해볼까?’

차기주는 미술관에 출근해 제 자리에 앉아서도 마음은 딴 곳에 가 있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배신감에 사무쳤고, 울부짖고 싶은 마음과 달리 정적인 눈으로 핸드폰에 저장해둔 오메가의 번호를 노려봤다.

그는 수천 번 망설이다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러버렸다.

―전화 받았습니다.

예상과 다른 딱딱한 상대방의 전화 예절에 차기주는 손가락으로 볼펜을 돌렸다.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한 강박적인 손놀림과 달리 차분한 목소리가 물었다.

“부재중 통화가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그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차기주가 이렇게 말하면 ‘잘못 걸었나 봅니다’ 하고 끊어버릴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남자가 “메모 남기겠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하며 고용인들이 할 법한 응대를 했다.

상황 파악을 하느라 눈을 내리깔았다.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차기주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께 연락 왔다고 전해드리겠습니다, 차기주 이사님.

“아! 아닙니다. 제가 직접 회장님 핸드폰으로 연락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들어가십시오.

정중한 인사와 함께 통화가 끝났다. 깨달음을 얻은 차기주의 얼굴에서 어둠이 걷혔다. 핸드폰에서 통화 목록을 지우고 새벽에 아들한테 전화한 정신병자 아버지를 속으로 욕했다. 종일 온갖 상상을 하며 시달렸던 그는 이제야 배고픔을 느꼈다.

관장실을 나와 간단하게 미술관에 있는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으려고 했다. 그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미술관 로비에 나왔다가 카운터를 돌아봤다. 익숙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미진 씨, 억제제 좀 먹어. 페로몬 샌다.”

“앗, 저 그렇게 페로몬 많이 나왔어요? 열성이라 조절이 잘 안 되더라고요.”

미진이라는 직원이 억제제를 찾아서 먹었다. 어제 하루 동안 지옥에 있었던 차기주는 천국에 도착했다. 그는 실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가렸다. 자신이 행복해하는 걸 누가 볼세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카페에 들어섰다.

차기주가 들어서자마자 다들 그를 알아보고 쳐다봤다. 그 시선들은 그가 카운터에 섰을 때도 떠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에스퍼와 가이드가 괴수를 무찌르는 세계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차기주는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초인이었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자신 또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들도 알게 되리라. 그는 따뜻한 커피와 에그 샌드위치를 받아서 테이블에 앉았다. 차기주를 지켜보던 아이는 포크로 생크림 케이크를 푹푹 찔러서 완전히 뭉개버렸다.

‘김수현도 같은 메뉴를 먹던데…… 재미있네.’

아이는 교주님이 말씀하셨던 예배 내용을 떠올렸다.

차기주를 죽이지 못한 메시아는 신도들을 버리고 하늘로 등천하셨다. 그분의 눈부신 날개를 본 신도들은 제발 자신들도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했으나 소용없었다. 하늘의 심판은 실패하였고 게이트는 완전히 닫혀버렸다.

그리하여 원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신도들은 떠나버린 천사를 돌아오게 만들 방법을 궁리했다. 그것은 바로…….

* * *

김수현은 약속보다 약간 늦게 A 호텔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그에게 직원이 다가와서 친절을 베풀었다.

“김수현 씨 맞으시죠?”

“아, 네.”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레스토랑 어디를 둘러봐도 중년의 알파가 보이지 않았다. 김수현은 5분 늦었다고 아버지가 떠나버린 건가 정신없이 눈을 굴리며 그를 찾았다. 직원의 등을 쫓으면서도 알 수 없는 찜찜함에 ‘설마’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우아한 쇼팽의 「녹턴」 2번이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하게 레스토랑 안을 흘렀다. 김수현은 직원을 따라 걷다가 멈칫했다. 트위드 재킷을 걸친 오메가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 테이블은 다른 테이블과 달리 꽃장식이 놓여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달짝지근한 꽃냄새가 진동했다.

그녀는 하얀 손을 흔들며 마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자신을 반갑게 맞이했다. 김수현은 직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잘못 안내받은 것 같습니다. 전 아버지와 식사 약속이 있어서 온 겁니다.”

“제대로 오신 거 맞아요. 처음 뵙겠습니다. 소지영이에요.”

고데기로 말아놓은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어깨까지 흘러내렸다. 과하지 않게 한 눈화장은 옅은 분홍빛이 돌았고, 입술 또한 립스틱을 바른 줄 모르게 제 혈색처럼 좋아 보였다. 투명한 피부와 큰 눈, 웃을 때마다 치아가 다 드러나 보이도록 큰 미소가 매력적인 오메가였다.

“회장님이 그냥 나오라면 수현 씨가 도망칠 거라고 하더니, 우리 선본다는 걸 결국 숨기셨나 봐요.”

김수현은 자신도 모르게 맞선을 보러 온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버지에게 기대를 건 게 잘못이었다. 김정석이 곧 이혼한다니 이번에는 자신을 팔아치우려는 것 같았다. 그는 이 자리에 나온 오메가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알아서 차마 무례하게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허리를 숙이고 인사했다. 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올린 두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아무리 너희가 남매로 지내도 결국 남이다. 너 때문에 내 딸 혼삿길 망칠 일 있어? 어서 결혼해서 그동안 키워준 은혜 보답이나 해.”

첫 번째 생에서 그는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한 뒤 늙은 오메가에게 팔아치웠다. 자신은 강제로 러트가 오는 주사를 맞았고 지금은 형의 전 아내가 된 GU 그룹 오메가 회장과 원치 않는 관계를 맺었다.

그랬던 아버지다. 그런데 무엇을 바란 것일까.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었고 자신은 영원히 그에게 아들로서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지영 씨와 결혼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김수현은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소지영은 두 손을 내저으며 미안해했다.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수현 씨 사진 보고 제가 욕심을 부렸어요. 이상형이라 그만. 그…… 차기주 이사님 가이드셨다는데 두 분…… 연인이신 거죠?”

“네.”

소지영은 광대가 볼록해지도록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말 멋진 분끼리 만나시네요. 잘 어울리세요.”

김수현은 소지영이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경계심을 풀고 앞에 놓인 물을 들이켰다.

“괜찮으시면 이왕 온 김에 저랑 식사하고 가시면 안 될까요? 김 회장님한테는 제가 수현 씨 거절한 걸로 할게요. 그게 제 자존심도 지키고, 수현 씨도 곤란해지지 않는 최선 같은데.”

“배려해주셔 감사합니다.”

소지영은 직원을 불러서 주문했다. 김수현도 그녀와 같은 메뉴를 시켰다. 그들은 직원이 물러나고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대화했다. 김수현과 같이 서양 미술학을 전공하고 있는 그녀는 말이 잘 통했다.

맞선 상대로 만나게 된 그녀였지만 오랜 친구처럼 편했다. 사실 같은 분야를 공부해서 이 이 자리가 즐거운 거라면 같은 과 동기들과 이야기하는 자리가 더 즐거웠을 테다. 전부 소지영이 순순히 맞선을 파투 내줘 이 자리를 불편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는 거였다.

김수현이 선본다는 정보를 입수한 김아영은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섰다가 즐겁게 웃는 동생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차기주에게 부채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예쁘고 착한 오메가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길 누구보다 바랐지만, 차기주가 오늘 일을 모르고 버림받는다면 그 죄책감을 씻을 수 없을 터다.

김아영은 차기주에게 전화해 당장 오라고 했다. 차기주는 맞선이라는 소리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김수현이 바람피운다는 오해를 풀었건만 그러기도 잠시, 맞선을 본단다. 그는 에스퍼 능력이 사라져서 텔레포트를 못 한다는 게 이 순간만큼은 끔찍이도 아까웠다.

차를 몰고 호텔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이미 김수현과 소지영이 디저트로 나온 라즈베리 무스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차기주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김아영은 빼꼼히 상황을 관찰했다.

“수현아.”

김수현은 차기주를 보고 뜨끔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차기주는 김수현 맞은편에 앉은 오메가를 내려다봤다. 영원히 김수현이 떠날까 봐 두려워하고,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덫을 놓는 자신은 과연 그와 행복할 수 있을까. 차라리 이 생을 접고 김수현이라도 행복할 수 있도록 놓아주는 게 낫지 않나 생각했다.

소지영은 자신을 향한 차기주의 슬픈 눈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현 씨, 식사 잘했어요. 제가 빠져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먼저 가요.”

“네, 지영 씨. 오늘 고마웠어요.”

차기주는 아무 말 없이 서 있기만 했다. 레스토랑에서 시선이 모였다. 다들 차기주 이사라고 소곤거렸다. 센터가 해체되었다는 게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김수현은 그가 배신감에 이성을 잃고 자신의 멱살을 잡아도 이해해줄 생각이었다. 자신이었어도 차기주가 맞선을 보면 그렇게 화냈을 거다. 그런데 차기주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소지영이 떠나간 자리에 앉을 뿐이었다.

“뭐라 말해봐요. 설명할 테니까.”

“뭐라고 물어. 널 책망하는 말밖에 되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물으라는 거죠. 왜 형을 두고 맞선 보냐고, 화내고 욕해야죠.”

김수현은 무기력하게 눈을 내리깔기만 하는 차기주 때문에 속에서 천불이 치솟았다.

“아버지한테 속아서 왔어요. 같이 점심 먹자고 해서 왔는데 맞선 자리였더라고요. 몰랐지만 미안해요.”

김수현은 상처받은 연인을 위로하기 위해 테이블 위에 있는 차기주의 손에 손을 덮었다. 차기주가 슬쩍 밑에 깔린 손을 빼냈다.

김수현의 말을 믿지 않는 건 아니었다. 새벽에 전화한 건 정말 김 회장이었고 김수현은 약속한 자리가 이런 자리인 줄 몰랐을 테다. 그렇지만 우리의 관계는 영원히 이렇게 자신 한쪽만 마음 졸이고 전전긍긍하며 이어질 것이 뻔했다. 두 사람 모두 기억을 완전히 잃고 새롭게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되지 않는 한.

그래서 차기주는 김수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덫을 준비해뒀다. 그렇지만 그 덫에 김수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그건 아주 가느다랗고 끊어지기 쉬운 거미줄 같은 것이었다. 거미줄은 곤충밖에 잡을 수 없다.

토끼가 아무리 순하고 약한 초식동물이라 해도 거미줄에 잡혀 거미에게 잡아먹히지는 않는다. 강인한 영혼을 가진 김수현은 사자이고 늑대이니 그 미약한 덫에 걸려도, 어느 순간 술술 떨쳐내고 떠나버릴 수 있다.

그러니 차기주는 강인한 알파에게 자신을 위해 기꺼이 거미줄에 걸릴 나비가 되어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김수현에게 허락받아야 진정한 덫이 완성되는 거다.

“응. 네 말 믿어.”

차기주는 김수현에게 할 말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뇌다가 입 밖으로 냈다.

“수현아, 사실 난 널 위해 미술관을 차렸어. 그리고 공모전을 열었지. 네가 참가할 수 있도록 네 친구를 섭외했고 넌 내 계획대로 공모전에 참가했어.”

김수현은 자신을 위해 차기주가 그랬다는 걸 알아 분노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가 자신에게 진실을 말할 용기를 가졌다. 그 순간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네 아버지가 너의 정략결혼을 준비하는 건 네 형이 이혼하면 PL 그룹 주식이 떨어져서야. 넌 아무것도 모른 채 아버지가 억지로 결혼시키려고 했다며 반감을 품고 의절할 테고, 난 가격이 내려간 PL 그룹 주식을 사서 네 아버지를 압박할 생각이었어. 널 뒤에서 지켜내고 집에서 버림받은 널 가지려고 했지.”

차기주의 계획은 그냥 김수현이 잘되길 바라고 그를 지키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걸 엄청난 악행처럼 말했다.

“네가 돌아갈 곳 없어진 채 내 미술관에서 후원받으면, 결국 진실을 알게 되고서도 날 떠날 수 없을 거라고 여겼어. 정말 비열한 생각이지만 수현아, ……부디 나의 덫에 걸려줄래?”

김수현은 이토록 로맨틱한 협박이 어디 있을까 싶었다. 원래대로라면 차기주의 계획을 알게 된 자신이 직접 수상을 거부하려고 했다. 그게 다른 공모전 참가자들을 위한 일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그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그가 차린 미술관이고, 자신을 위해 그가 계획한 덫이니까.

“네. 좋아요.”

김수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린 차기주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워냈다. 울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언제나 귀만 빨개지던 차기주가 말이다.

처음 보는 모습에 김수현은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미안, 너무 기뻐서.”

“그…… 우리 위에 올라갈래요? 이왕 호텔 온 김에 숙박도 하고 가요.”

“하여간 넌 은근히 엉큼해.”

의자를 조용히 끌고 일어난 차기주는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 평소의 차가운 인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김수현은 차기주가 그냥 집에 돌아가려는구나 싶어 내심 서운했다. 그들이 탄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갔다.

로비를 지나쳐 가려는데 차기주의 발걸음이 김수현의 것과 방향을 달리했다. 그가 프런트 직원으로부터 펜트하우스 키를 넘겨받았다. 김수현은 호텔 키를 받아 자신에게 걸어오는 차기주를 보며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느꼈다.

이 호텔은 이번 생에 그들이 처음 만난 장소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들은 마음껏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차기주를 떼어내려고 진설해와 작당한 곳인데 말이다. 김수현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잡아서 차기주와 탔다.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갈 때 부유감을 느꼈다. 몸이 떠서인지 마음이 들떠서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 구름을 걷는 듯한 기분이라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 * *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메뉴판을 내린 김아영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하마터면 자신으로 인해 또다시 김수현과 차기주가 엄한 오해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뻔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함께하는 행복을 쟁취한 건 그들의 사랑 덕분이지, 김아영의 참견 덕분이 아니었다.

좋은 의도이건, 나쁜 의도이건 아무리 동생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연애에는 참견해선 안 되는 거였다. 김아영은 그걸 무려 3번이나 같은 삶을 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드시 차기주에게 사과하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녀는 나중에 다시 차기주를 만나기로 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건 몹시 무서운 일이었지만, 방금 그녀가 본 차기주의 용기로 인해 김아영에게도 용기가 생겨났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는 마음을 굳힌 대로 C 미술관을 방문했다. 차기주가 자신의 행동을 아니꼽게 보면 김수현과 헤어지도록 이간질을 한 것처럼 비칠 수 있는 일이었다. 죄인은 의기소침하게 관장실에 들어섰다.

그녀를 본 차기주는 보고 있던 서류를 정리했다.

“앉으시죠.”

김아영은 핸드폰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소파에 앉았다. 센터에서 차기주를 보필했던 김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관장님, 어떤 차로 준비해서 올릴까요.”

“냉수로 부탁하지.”

테이블 앞에 차가운 냉수가 놓였다. 김아영은 뜨끔했다. 차기주가 장례식장에서 뜨거운 육개장을 끼얹은 일을 기억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듯 차기주도 기억하겠지. 그녀는 곱게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앞니로 꾹 말아 물었다가 뗐다.

“미안해요, 차기주 씨.”

“…….”

“징벌방을 도청해서 알 테지만, 내가 차기주 씨를 그동안 오해했습니다. 어제 일도 돕고자 했던 건데 하마터면 두 사람 사이에 오해만 만들 뻔했네요. 앞으로 내 동생을 잘 부탁드립니다.”

김아영은 소파에서 일어나 차기주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가 컵에 든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야말로 그동안 우리 수현이를 위해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었습니다. 김아영 씨, 수고 많으셨습니다.”

차기주가 맞은편에서 그녀에게 허리를 굽혔다. 비록 잘못된 방법이었지만 김아영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외롭고 힘들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는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녀의 인생에서는 언제나 김수현이 최우선이었다. 이전까지 그녀의 삶은 김수현을 위해 돌아갔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김수현을 최우선으로 살아갈 사람이 생겼으니까. 엄마가 어깨에 올려두고 떠난 짐이 드디어 내려갔다. 이제 김아영의 인생에서는 그녀가 최우선일 것이다.

김수현은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버지에게 오는 문자를 차단하여 자신 몰래 선을 보게 한 일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는데 설마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대학교까지 사람을 보낼 줄 몰랐다.

강의실에 들어온 경호원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방을 챙겨서 일어났다. 다른 학생들의 시선에 얼굴 가죽이 뚫릴 지경이었다. 무리에 섞여 들지 못한 채 바다의 부표처럼 둥둥 떠다니는 생활을 앞으로도 벗어나지 못할 듯싶었다.

집에서 보낸 자동차에 올라탔다. 인도를 따라 심은 플라타너스 나무를 구경하는 동안 익숙한 건물들과 가게의 상호가 지나갔다. 이제 곧 집에 도착하려나 보다.

창밖을 내다보던 김수현은 문득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메시아가 지상에서 사라지면서 바뀐 여러 가지 것들 중에는 김수현이 잃어버렸던 유년기 시절 기억을 찾았다는 점도 있었다.

메시아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해서 잊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 기억을 간직할 만큼 자신이 강하지 못해서 잊고 산 듯싶었다.

기억 속에서 자신은 누나와 정원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아버지가 이른 시간에 돌아왔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해외에 나갔다가 그 시각에 한국에 온 것 같다. 짐이야 비서진들이 들고 나르니, 그가 빈손으로 대문을 넘어도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자신은 너무 기뻐서 두 팔을 벌리고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마치 못 볼 걸 본 것처럼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끌어안아주지 않는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어린 나이였지만 깨달았다.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반면 누나가 “아빠” 하고 부르자 그가 웃으면서 누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누나의 뺨에 입을 맞추며 “내 딸, 잘 놀고 있었어?”라고 했다. 아버지는 누나를 안아서 집으로 들어갔다. 자신은 정원에 남겨진 채 아버지에게 못 받은 애정을 유모에게 달라며 팔을 내밀었다. 그녀에게 안겨서 집에 들어가는 보상을 받았지만, 눈물은 젖살 가득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기 시작한 건 아주 작은 사건에서부터였다. 공부하는 형을 구경하는데 그가 자신에게 필통에서 지우개를 꺼내서 선물로 줬다. 자신은 그 별거 아닌 게 너무 좋아서 손에 꼭 쥐고 집에서 일하는 어른들한테 자랑하고 다녔다.

“형아가 줬어요. 이제 내 거예요.”

저녁 식사 자리에서 형은 그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을 귀여워했다. 누나도 웃으면서 자신을 사랑스럽다는 듯 쳐다보고 자신의 밥그릇 위에 반찬을 올려줬다. 그 자리에서 웃지 않는 사람은 오직 아버지뿐이었다.

아버지가 밥을 먹던 자신의 멱살을 잡고 식탁 의자에서 끌어 내렸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놀란 형은 아버지를 말렸고, 누나는 자신에게서 아버지를 떼어내기 위해 그를 밀쳤다. 그는 냉엄한 눈으로 형과 누나의 것 중 무엇 하나도, 그게 아무리 하찮고 버린 것이라 할지라도 김수현이 가질 수 있는 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유모에게 정원에서 얇은 나뭇가지를 꺾어오게 했다. 얇은 나뭇가지가 번쩍 위로 올라갔다가 종아리 위로 강하게 내려앉았다. 아버지에게 있어 자신은 형, 누나와 무언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가 굵어지기도 전에 그게 차별이라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자신은 집에서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알게 되었다. 같은 반 친구들도, 그 친구의 부모님들도 자신에게 이상한 질문을 했다.

“너 알고 있어?”

주변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문들이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 아래에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자신은 어머니가 다른 알파와 외도를 해서 낳은 아들이라고 했다. 다들 더러운 사생아를 호적에 올리고 키워주는 김 회장님이 대단하다고 그랬다. 누나는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그냥 위로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아버지가 때리면 맞았고, 그가 자신을 증오하면 수긍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자신은 불온의 씨앗이 아닌 세상을 구하기 위해 태어난 성모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못한 폭력에 더 이상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때리려고 하면 막을 것이고, 자신을 욕하면 되돌려 줄 거다.

성처럼 높게 담벼락을 쌓아 올린 저택 앞에 자동차가 멈춰 섰다. 오는 동안 굳게 결심한 것과 달리,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버지의 주먹에 뺨을 맞았다.

“정신이 있어? 없어?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망쳐. 더럽게 알파랑 붙어먹는 걸레 새끼 주제에 감히 내 얼굴에 먹칠을 해!”

손으로 찢어진 입가를 문질렀다. 엄지에 피가 배어 나왔다.

“아버지, 세상이 멸망하려고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러세요.”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너 때문이야. 넌 존재만으로 해악을 끼쳐. 내가 사랑하는 오메가를 살해하고, 차기주랑 붙어먹으면서 메시아의 숭고한 임무를 망쳤어.”

아버지가 메시아를 후원한 걸 들켜 두 번째 생에 집이 망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자기가 센터의 주적을 숭배했음을 드러낼 줄 몰랐다.

살의로 가득한 김 회장이 김수현의 목을 졸랐다. 눈에 핏줄이 터진 채 그가 저주를 퍼부었다.

“죽어, 죽어! 너만 아니었어도 메시아께서 살려주셨을 거야!”

메시아가 누굴 살려준다는 것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이자 아버지가 사랑한 아내의 이야기였다. 김수현은 주먹으로 김 회장의 명치를 때려서 그를 떼어냈다. 콜록 기침하며 아픈 목을 손으로 감쌌다.

“아버지에게 나는 단 한 번도 아들이었던 적 없죠. 그런데 왜 남을 자기 사업 하겠다고 팔아먹으려고 합니까! 전 당신 뜻대로 정략결혼 하지 않을 거고, 어머니도……! 나한테 살해당한 게 아니라 그냥 사고였을 뿐이에요. 난…….”

졸린 목은 큰 소리를 내자 따끔거리며 아파왔다. 김수현은 눈을 부릅뜨고 김 회장을 노려봤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흘렀다.

“난……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태어난 구세주예요. 더러운 불륜의 흔적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구했다고요.”

김 회장은 김수현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만일 그가 그 사실을 믿고자 했다면 진작 김아영의 말을 듣고 김수현을 아들로 받아들였어야 했다. 김수현이 죄악의 씨앗이 아닌 구세주라면 그는 원망할 존재를 잃는 거였다. 그리고 김 회장은 원망할 대상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애꿎은 아들에게 풀어냈다. 그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아버지, 난 오랫동안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싶었어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지. 그랬으면 아버지도 행복하고 어머니도 안 죽고, 다들 좋았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요. 이건 아버지가 나한테 가스라이팅한 생각일 뿐이고, 난 역시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김 회장은 뺨이 퉁퉁 부어오른 김수현의 눈매가 문득 자신과 똑같이 생겼구나 싶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었다. 메시아가 지상을 떠나버린 이상, 아내를 살릴 방도는 없었다. 그는 이제 아내의 죽음을 수긍하고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을 테니 김수현을 죽을 때까지 원망하며 무너지지 않으리라.

“그동안 키워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김수현은 아버지에게 허리를 숙여서 인사했다. 그가 자신에게 쌀 한 톨만큼의 애정도 주지 않았다고 그동안 받은 경제적 도움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김수현은 이것으로 자신이 그에게 해야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겼다. 김수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이 있는 언덕에서 걸어 내려갔다.

그동안 그에게 맞은 만큼 자신도 되갚아주겠다며 그를 때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어떠한 이유로든, 설령 자신이 진짜 사생아였다고 해도 아버지는 자신을 학대해서는 안 됐다. 아마 아버지도 그걸 알기에 자신을 끝까지 붙잡지 않는 것일 테다.

자신의 복수는 그가 저지른 죄를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들 한 명을 잃었다.

* * *

공모전 작품을 모아둔 전시장으로 평론가 김인택과 아트갤러리 편집장, 한국미술관 관장이 들어섰다. 그들은 천천히 작가의 이름이 없는 작품들을 살피며 채점표에 점수를 적었다.

차기주 이사가 말한 김수현의 작품을 본 셋은 허탈해져서 웃었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그림 앞에 서서 작품을 바라봤다.

“전 결정했습니다.”

“저도요.”

“차기주 관장이 괜한 조바심을 냈군요.”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채점표에 점수를 적었다. 세 사람이 준 점수의 합계는 300점 만점에 293점이었다.

* * *

아침에 일어난 차기주는 가볍게 러닝을 하고 집에 들어가기 전, 우편함에 들어 있는 우편물과 서류 봉투를 챙겼다. 그는 샤워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 우편물들을 확인했다. 자신을 죽이네 마네 하는 협박 편지들은 경찰서에 증거품으로 내기 위해 잘 모아두고 노란 서류 봉투를 뜯었다.

『아트갤러리』라는 관계자들만 볼 수 있는 미술 잡지가 들어 있었다. 이 잡지는 시중에서 판매하지 않고 오로지 『아트갤러리』에서 엄선한 소수에게만 배포했다.

그는 왜 이걸 자신에게 보냈나, 서류 봉투에 적힌 보내는 사람을 살폈다. 차기주의 청탁을 거절했던 김인택이었다. 그는 잡지 커버를 장식한 늙은 평론가의 얼굴을 째려보고 첫 장을 넘겼다.

한때 가이드였던 이가 그린 그림이라서 그럴까. 작가 김수현의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본인 또한 「DIVE」 그림처럼 물속에 다이빙한 듯한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받았다. 작가의 전직이 특별한 만큼 짧게나마 에스퍼와 가이드란 존재에 대해 언급할까 한다.

2차 대변혁 이후, 에스퍼와 가이드의 힘이 게이트와 함께 사라졌지만 그 이전까지 에스퍼에게는 파동 에너지라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등급에 따라 그 힘의 크기도, 부작용도 달랐는데 작가 김수현이 페어를 맺었던 차기주는 인류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였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감히 그들의 관계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에스퍼들은 힘에 비례해 위험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니, 등급이 높을수록 자신의 가이드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고 한다. 쉽게 풀이하자면 페어 에스퍼에게 김수현은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김수현에게도 에스퍼가 그랬을까? 일반적으로 가이드에게는 에스퍼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김수현은 그들의 관계에 균형을 이루게 해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답이 이 그림의 존재의 의의다.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힘을 측정할 때도, 서로의 파동이 맞는지 매칭률을 측정할 때도 모든 검사를 물속에서 진행한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능력자들을 다이버라고 부르곤 했다.

「DIVE」는 그러한 작가 김수현의 정체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물속에 빠진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체를 목격한 사람처럼 환희에 젖은 표정을 짓는다.

그의 표정으로 인해 액자는 거대한 수족관 프레임으로 변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림을 보는 사람을 자기 그림에 끌어들이는 마법을 펼친다.

이 마법을 통해 그림을 보러 온 관람객은 다이버가 바라보고 있는 존재가 된다, 이때 다이버가 보고 있는 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일 수도, 다이버를 보고 있는 ‘그’일 수도 있다. 본인은 다이버가 얼굴에 드러낸 경이롭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감히 단언하고자 한다.

「DIVE」에는 호수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져 죽었다는 나르키소스 신화가 영리할 정도로 잘 숨겨져 있다. 다이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Narcissus’라고 하얀 글씨가 적혀 있다. 수선화를 뜻하는 영어를 거울에 비춰서 보듯 좌우를 반전해 표기해뒀다.

작가가 자기 자신과 동일시할 만큼 아끼는 대상. 작가 김수현이 자기 자신만큼 아낄 대상이 이 세상에 있다면 그건 바로 그림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아닐까. 그의 하나뿐인 에스퍼가 「DIVE」 앞에 서서 그림을 본다면 얼마나 감동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자기를 향한 작가의 열렬한 고백을 받은 남자의 표정까지가 이 그림의 완성일 것이다.

차기주는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그림의 해석을 집중해서 읽느라 눈꺼풀을 깜박이는 일조차 잊었다. 눈이 뻑뻑해지다 못해 물기가 맺혔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종이 한 장 넘기는 게 뭐가 그리 힘겨운지 한참이 지나고서야 겨우 다음 장을 펼칠 수 있었다.

평범한 뒷모습을 그린 그림에 붙은 「시작과 끝」이라는 제목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뒷모습의 주인을 잃으면 나의 세상 또한 잃게 될 것 같은 제목이 아닌가. 넓은 등을 가진 사내는 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천의 묘사에서 에곤 실레의 에로티시즘 같은 관능미가 느껴진다.

화실에는 작은 창문이 있어서 햇살이 새어 들어온다. 빛과 어둠의 음영이 남자의 실루엣을 더욱 생동감 넘치게 한다. 「DIVE」에 비하면 「시작과 끝」은 어찌 보면 평범(?)한 잘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을 보고 화가의 자화상이라는 감상을 내놓은 자신에게 C 미술관 공모전을 함께 심사했던 아트갤러리 편집장, 한국미술관 관장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DIVE」가 관람객들이 김수현을 보는 남자의 시선으로 그림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면, 「시작과 끝」은 남자를 보는 김수현의 시선이라는 해석이었다.

왜 그런지 두 심사위원에게 물었다. 그들의 손끝이 가리키는 데에는 남자의 붉은 귀가 있었다. 남자는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캔버스를 보고 있는 거였다. 그런 남자를 지켜보는 시선에 자신을 대입하자 가슴 한편에 따스함이 퍼져나갔다.

뒤통수를 누가 강하게 친 기분이었다. 캔버스에 그려놓은 김수현의 자화상을 보고 남자가 설레고, 그런 남자를 보며 김수현이 설레는 연쇄적인 로맨스를 「시작과 끝」이라고 명명했다니.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이 세상 모든 것이라는 고백이 이 그림의 민낯이었다. 두 사람이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였다는 걸 알긴 했지만 실제로 그들이 이렇게나 정열적인 사랑에 빠졌음에 놀랐다.

이제 그들은 파동 에너지라는 특수성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니다. 필자는 「DIVE」 작품을 설명하면서 에스퍼에게는 김수현의 가이딩이 꼭 필요한데, 그러한 제약이 없는 김수현에게도 에스퍼가 없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럼 이제 독자는 알 것이다. 김수현이 이 그림들을 통해 얼마나 절절하게 자신의 에스퍼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는지.

베토벤이 작곡한 「엘리제를 위하여」와 쇼팽이 첫사랑에게 바쳤던 「피아노 협주곡 1번 2악장 로망스」, 샤갈의 「에펠탑의 신랑 신부」, 고야의 「알바 공작 부인」, 클림트의 「에밀리 플뢰게」 등.

수많은 예술가는 자신의 사랑을 작품으로 표현해왔다. 김수현 작가의 연애편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받으며 훌륭한 작품으로 기억되리라. 그러니 부디 차기주 관장은 이 그림들을 독점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차기주는 잡지를 덮으며 벅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내리눌렀다. 당장 3층에 있는 작업실로 뛰어 들어가 김수현을 거칠게 안아버리고 싶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천천히 호흡하며 『아트갤러리』 잡지를 가지고 서재로 이동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김수현의 그림에 좋은 평론을 써달라고 해서 그를 스타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는가. 김수현은 차기주의 도움 없이도 하늘의 별이 될 천재였다.

그런 천재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해 손에 더러운 흙탕물을 묻힐 뻔했다. 김인택 평론가가 차기주의 청탁을 거절해준 게 고마울 정도였다.

우편으로 받은 잡지를 책상 서랍에 넣고 자물쇠로 잠갔다. 핸드폰으로 『아트갤러리』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편집자님, 접니다, 차기주. 이번 달 나온 잡지 100부 구매하겠습니다. 자택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는 혹시라도 분실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잡지를 대량으로 구매했다. 통화가 끝난 차기주는 책꽂이를 가득 메우고 있는 책들을 뽑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잡지를 보관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차기주의 머릿속은 온통 자신을 향한 김수현의 사랑으로 도배되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제자리를 뛰어다니고 싶은 충동이 들어 몇 번이나 피식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렇게나 들뜬 자신이 낯설고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이렇게 감정에 휘둘리는 건 지금의 육체를 만들어준 에스퍼와의 만남 이후 오랜만이었다. 실험실에서 겪었던 일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그자 또한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살았다.

차기주는 자신에게 ‘차기주’라는 이름과 한국으로 오는 계기를 준 ‘바로나’의 얼굴을 떠올려봤으나 안개가 낀 듯 흐릿했다. 그는 결국 못 참고 김수현을 보기 위해 서재를 뛰쳐나갔다. 지금 당장 두 팔로 김수현을 가득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그가 갑자기 왜 이러냐고 물으면 자신은 자랑할 거다. 네 그림을 아주 유명한 평론가가 인정해줬다고. 그런데 그것보다 난 네가 날 사랑하는 게 너무 기뻐서 미칠 것 같다고 말이다. 신나게 계단을 뛰어 올라와 놓고 막상 작업실 앞에서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작업에 방해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방문에 노크했다.

“수현아, 들어가도 돼?”

차기주는 안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한 번 더 노크했다. 그래도 응답은 없었다.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유화 물감이 묻은 캔버스가 그늘에 놓여 있었다. 독한 유화 물감 냄새를 빼기 위해 창문을 열어둔 채 김수현은 사라졌다.

차기주는 창밖을 내다봤다. 창문 너머로 저택 뒤에 있는 작은 공터를 열심히 모종삽으로 파는 김수현의 모습이 보였다. 에스퍼가 아닌 일반인의 눈으로는 그런 김수현을 자세히 볼 순 없었다. 그저 무엇을 하는지나 알 정도였다.

곧장 김수현이 있는 뒤뜰로 갔다. 밀짚모자를 쓴 김수현은 목에 건 수건으로 구슬땀을 닦아냈다. 직접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김수현을 보자마자 키스를 퍼부어버리려고 했는데 막상 입에서는 덤덤한 어조의 말만 나왔다.

“내가 뭐 도와줄 거 있어?”

“아니에요. 형은 집안일 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텃밭 가꾸는 건 내 일이에요. 저기 그늘에 가서 앉아 있어요. 금방 끝나요.”

흙을 모종삽으로 퍼낸 김수현이 작은 구덩이에 토마토 모종을 넣고 손으로 흙을 다졌다. 열심히 토마토 모종을 심은 그가 물뿌리개를 가져와 땅에 물을 줬다. 가을 햇살이 온화한 토요일, 차기주는 이 순간이 무척이나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이런 삶이 올 거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예전의 그는 그저 불안정 파동 에너지를 잠재워줄 가이드가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절망으로 괴로워했다.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일부러 쌀쌀맞게 굴었다. 자신이 죽고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그게 어떤 고통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자신이 처음 소중히 여겼던 사람, 바로나가 죽었을 때 차기주는 폭주했다.

세월이란 지우개로 다 지운 줄 알았는데 그자의 마지막 유언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우린 다시 만날 거야.”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듣고도 고개를 갸웃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한국말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죽은 자는 살아 돌아올 수 없다. 토마토의 푸른 잎사귀에 징그러운 거미가 기어와 앉았다.

“형, 이거 봐요.”

“거미가 좋아?”

“무섭긴 한데 이 녀석이 해충을 다 잡아먹어주거든요. 거미는 생김새와 달리 아주 좋은 곤충이래요. 이 친구만 있으면 내 토마토가 해충 피해 없이 잘 자랄 거예요.”

김수현은 거미가 있어서 농작물이 잘 크겠다며 기대를 걸었다. 차기주는 나무 그늘에서 거미가 거미줄을 뿜어내며 집을 짓는 걸 구경했다. 토마토 줄기와 잎 사이사이에 작은 거미집이 생겼다. 바람에 가느다란 거미집이 요트의 하얀 돛처럼 펄럭였지만 끊어지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일했더니 배고프다. 오늘 저녁 반찬은 뭐예요?”

“삼겹살 사다놨어.”

손에 끼고 있는 목장갑을 벗은 김수현이 장갑을 부딪쳐 흙을 털어냈다. 그는 모종삽과 물뿌리개를 들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그림자가 멀어지지 않을 만큼 천천히 그 뒤를 쫓았다. 그렇다고 그림자를 밟을 만큼 가깝게 다가가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미행하듯 오는 차기주에게 김수현이 손을 뻗었다. 차기주는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내일 공모전 발표날이죠.”

“수현아, 마음 바뀌었으면 내 덫에 걸려주지 않아도 돼.”

차기주는 김수현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의 그림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그를 사랑하기에 마지막으로 그에게 도망칠 기회를 줬다. 자신 같은 놈에게 그는 너무 과분했으니까. 차기주는 아까 텃밭에서 본 거미와 같았다.

다리가 여러 개 있고 온몸에 솜털이 있어 징그럽고 무서운 거미. 아무리 거미가 해충을 잡아먹고 인간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로운 존재라고 할지라도, 혐오의 대상임은 분명하다. 그처럼 차기주도 오랫동안 센터에 몸담고 있으면서 괴수로부터 세상을 지켜냈다.

그 결과, 차기주는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스스로를 시한부라 생각해 친한 사람을 두지 않은 것과 별개로 말이다. 김수현이 차기주의 연인이 되면 항상 의문 어린 시선을 받을지도 모른다.

‘왜?’

재벌 집에서 태어난 완벽한 알파가 도대체 뭐가 모자라서 같은 알파를 사귀나 싶겠지. 차기주가 두려워하는 건 자신으로 인해 김수현이 이러한 의문인 척하는 편견과 혐오에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요. 내 마음 변할 리 없으니까.”

차기주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김수현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고선 정작 진심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김수현이 씻으러 간 사이 고기 불판을 꺼내 식탁에 버너를 두고 고기 불판을 얹었다.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사이, 빠르게 싱크대에서 상추와 깻잎을 씻었다. 어제 김수현이 열심히 수확해놓은 것들이었다. 이 기적 같은 일들이 소소한 일상으로 느껴질 만큼 반복되다 보면 자신은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있을까?

차기주는 씻고 나온 김수현이 머리카락을 덜 말린 걸 보고 목에 걸어둔 수건을 빼앗았다. 그러곤 동그란 머리통을 수건으로 문질러 물기를 말렸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김수현은 머리카락이 헤집어지면서도 젓가락으로 구워진 삼겹살을 집어 먹었다.

차기주는 손에서 수건을 치우고 제 자리에 가서 앉았다. 햄스터처럼 볼이 볼록해지도록 맛있게 먹는 김수현이 귀여워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익숙해진 그였다.

* * *

C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연 신인 작가 모집 공모전이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수상자는 김수현, 최유정이었다.

발표가 나기 전부터 차기주 관장의 가이드였던 김수현이 내정자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김수현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그 누구도 김수현의 수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단상 위에 차기주가 올라섰다. 플래카드에는 ‘제1회 신인 작가 공모전 수상자. 김수현. 최유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먼저 자리를 빛내준 귀빈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C 미술관은 앞으로도 재능 있고 가능성 있는 신인 작가를 발굴해 그들을 후원하며 한국 미술사에 도움이 되어나가겠습니다. 수상자 김수현, 최유정 작가는 단상 위로 올라와 주세요.”

김수현과 최유정은 차기주의 부름에 단상 위로 돌아갔다. 그가 직원에게 트로피를 건네받아서 그들에게 전달했다. 언론사에서 온 기자들이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원래라면 미술관에서 부른 기자 한두 명만 왔을 테지만, PL 그룹 자제이자 차기주의 가이드였던 김수현이 수상자라는 소식에 1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다. 김수현은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 세례에 눈이 아파서 눈살을 찡그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괜찮아져 찌푸렸던 눈을 떴다. 차기주가 김수현의 앞을 가리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 속에 서 있는 김수현은 차기주의 넓은 등에 머리를 박았다.

이래 놓고 자신을 놔주겠다니. 자신이야말로 절대 그를 못 놔준다.

“더 이상의 사진 촬영은 허가하지 않겠습니다. 사진기 내리세요.”

차기주의 말에 기자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김수현은 최유정과 함께 단상에서 내려갔다. 이제 그들을 보러 온 지인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닐 차례였다.

김수현은 말끔한 양복 차림으로 서서 손님을 맞이했다. 한국대 학생이 무려 두 명이나 당선된 공모전이었기에 한국대 교수들과 학생들이 축하해주러 왔다.

“수현아, 축하한다.”

학과장이 김수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감사합니다.”

김수현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친구들도 너나 할 것 없이 한꺼번에 축하한다는 소리를 쏟아냈다. 그러던 중 이런 말이 나왔다.

“김수현 사기캐인 줄 알았지만, 너무 불공평해. 잘생기고 우성 알파에 집도 재벌 집인데 천재라니.”

“혹시 알아? 인생 3회차인지.”

“하하하하.”

우스갯소리로 한다는 걸 알았지만 김수현은 뜨끔해 어색하게 웃으며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파묻힌 최유정은 후배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김수현은 거칠고 굳은살 박인 그녀의 멋진 손에서 시선을 뗐다.

이제 숨 좀 돌리나 싶었는데 어느새 자신을 찾아온 과대가 꽃다발을 건넸다.

“수현아, 축하해.”

“와줘서 고마워. 뭘 이런 걸 다 가져왔어.”

김수현은 장미 꽃다발을 껴안은 채 고개를 파묻고 냄새를 맡았다.

“고마워. 향기 좋다.”

솔직히 여러 알파와 오메가들이 내뿜는 페로몬 때문에 꽃향기를 전혀 맡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입바른 소리를 했다. 과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도대체 고맙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하는 거야.”

과대가 웃으면서 부끄러우니 그만하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렇지만 김수현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동기들로부터 이렇게 큰 축하를 받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친하게 지내지 않는 탓에 초대장을 돌릴 때도 별 기대 없었다. 그런데 얼굴을 모르는 미술 관계자들 몇몇을 제외하면 모두가 한국대 학생들과 교수들이었다. 덕분에 회장은 거의 학교 졸업 무도회 같은 분위기였다.

“수현아, 사실 다들 너랑 친해지고 싶어 해. 이번 기회에 모두 너랑 친해지겠다며 벼르고 왔거든. 이따가 시상 파티 끝나고 같이 술 마시러 가자.”

언제나 술 모임을 거절했기 때문일까. 과대의 부연 설명이 길었다. 김수현은 자신이 학교생활로부터 도태될까 봐 과대가 최유정을 통해 소식을 전해주고 있었다는 말을 떠올렸다.

“응, 좋아. 앞으로도 끼워줘. 동거인이 있어서 술자리에 자주는 못 나가겠지만 나도 너희랑 친해지고 싶어.”

김수현의 말에 저들끼리 대화하는 줄 알았던 동기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다가와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들이 내뱉는 말은 김수현이 술자리에 나와줘서 기쁘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어느 정도 축하 인사가 마무리되어가는 분위기였다.

김수현은 미술 관계자들과 대화 중인 차기주에게 접근했다. 그와 대화하던 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열렬한 시선이었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 손으로 쓸어봤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형, 나 학교 사람들이랑 뒤풀이하러 가야 해요. 오늘 늦을 것 같아요.”

“데리러 갈게. 너무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차기주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그와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서 “오오~” 하는 감탄사가 왔다. 왜 저러지?

자신의 시선을 느낀 중년의 남자가 악수를 청했다.

“평론가 김인택이라고 합니다. 김수현 작가 작품을 보고 이번에 팬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제가 쓴 칼럼 읽어보셨나요?”

“네? 칼럼이요?”

김수현은 그 물음을 김인택이 자기를 알고 있냐고 묻는 거쯤으로 착각했다. 김인택은 자기가 보낸 『아트갤러리』 잡지에 실린 칼럼을 읽어봤냐고 물은 것뿐이었지만 이 때문에 그는 김수현에게 무척이나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라는 인상으로 남았다.

“아아, 네. 평론가님의 글은 언제나 최고예요. 저는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계속 이야기들 나누세요.”

김수현은 대충 두리뭉실하게 말해 상대를 추켜세우고 자리를 떴다. 그것만으로도 김인택은 자기 칼럼을 읽어준 김수현에게 감동한 눈치였다. 잡지 이야기 한다는 걸 깜빡했던 차기주는 김수현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웃었다.

오랫동안 차기주의 비서였던 김동훈의 눈이 커졌다.

“차기주 관장님도 사람이셨네요. 센터 이사이셨을 때보다 훨씬 보기 좋습니다.”

차기주는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를 손으로 매만져 확인했다.

“그렇네요. 저도 이런 제가 신기합니다.”

김수현은 그를 불안정 파동 에너지로부터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제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이제 차기주도 더 이상 과거의 잔해에 파묻혀 괴로워하며 지내지 않아도 됐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 김수현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라면 뭐든지 괜찮을 것 같다고.

* * *

PL 그룹 김정석 전무와 GU 그룹 회장의 결별 소식이 뉴스를 도배했다. GU 그룹 회장 측에서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술집에서 성매매를 했고 집에 매춘부들을 끌어들였다는 인터뷰를 했다. 그 증거가 이혼 재판 과정에서 증거품으로 제출되었다. 김정석 측에서는 아내가 환영술로 외모를 속이고 결혼했다는 점을 들며 사기 결혼을 주장했다. 재판부는 이를 인정해 혼인 취소를 받아들였다.

그 어떤 승자도 없는 진흙탕 싸움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명예를 땅에 처박고 남남이 되었다.

주식 시장이 열릴 때만을 기다리던 차기주는 오늘을 위해 고용한 투자증권 회사 직원들에게 PL 그룹 주식을 매수시켰다.

일주일 동안 사들인 PL 그룹 회사 주식 지분은 20.8%. 회사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봐도 되는 결과였다. 차기주가 주주 몇 명과 손만 잡으면 진짜 회사를 가질 수 있었다.

김 회장 측에서도 떨어진 주식을 사서 회사 방어에 나섰겠지만, 차기주가 가진 막대한 재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김 회장은 뜬 눈으로 자기 회사를 강탈해가는 찬탈자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테다.

김수현이 그의 주머니 사정을 걱정하며 스위스 계좌에 보관 중인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돌려준 덕이었다. 1조. 차기주가 페어가 되어준 김수현의 몫으로 준 그림의 가치는 그러했다.

그리고 차기주는 그것을 김수현이 아버지에 대한 복수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로 환전해준 것뿐이었다. 알려주지도 않은 그의 핸드폰으로 김 회장의 연락이 왔다.

―이, 이, 미친 새끼야, 감히 누구 회사를 꿀꺽하려고 해!

“김 회장님, 말 함부로 하시지 마시죠. 길거리에서 비명횡사시킬까 했다가 우리 수현이 생각해서 목숨 붙여둔 겁니다.”

차기주가 아무리 평범한 일반인이 되었다고 해도 그가 가졌던 권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권력자들과 유지한 카르텔은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저 별로 바라는 거 없습니다. 수현이가 어떻게 살든 내버려두세요.”

―……정말 그거면 됩니까.

“설마 그럴 리가요. 당신 회사를 사는 데 내가 돈을 얼마나 투자했는데.”

그는 좁은 옥탑방에 스스로를 가둔 두 번째 생의 김수현을 떠올렸다. 김수현은 자기 몸에 생긴 멍을 가리기 위해 한여름에도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었다.

“수현이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십시오. 때려서 미안하다고. 기간은 일주일입니다. 그 안에 사과하지 않으면 PL 그룹을 갈가리 찢어 공중분해 해버리겠습니다.”

차기주는 김수현에게 자존심 강한 김 회장이 사과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결국 자기 자존심 때문에 평생을 일궈온 회사를 잃는 어리석은 자가 될 거라고.

그러나 3일 뒤, 김 회장이 차기주와 김수현이 동거하는 집에 찾아왔다. 김수현은 굳은 얼굴로 아버지에게 여길 왜 왔냐고 눈살을 찌푸렸다.

“미안하다. 수현아, 아버지가 잘못했다. 내가…… 널 많이 미워했어. 널 미워해야 내가 살 것 같아서 그랬다.”

김 회장은 사과하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당당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누가 보면 전통찻집에서 다도를 하기 위해 무릎을 꿇은 줄 알겠다.

“인제 와서 왜 사과하세요.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고.”

김수현은 잔뜩 화가 나서 자기 방에 들어가버렸다. 차기주는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김 회장이 힐끔거리며 일어날 눈치를 보자 “기다리세요” 하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수현이가 다시 나올 때까지, 그 사과를 받아줄 때까지 무릎 꿇고 계셔야 합니다. 사과란 상대가 받아줘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일방적인 통보이죠.”

한국 재벌을 대표하는 회장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몰골이었다. 차기주는 그를 약 올리기라도 하듯 거실 소파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가며 마셨다. 마음에 안 들면 김 회장의 얼굴에 커피를 끼얹으려고 했는데 커피를 다 마실 동안 그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방에 들어갔던 김수현은 한 시간쯤 지나 눈가가 새빨개져서 나왔다. 그의 손에는 골프채가 들려 있었다. 계단을 내려선 김수현이 김 회장에게 다가왔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아프고 두렵고 슬펐는지 아세요? 아버지도 한번 당해보세요.”

차기주는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놓고 김수현의 당찬 행동을 응원했다. 풀 스윙을 하는 것처럼 골프채가 위로 올라갔다. 김 회장이 눈을 질끈 감고 무릎에 올린 주름진 손을 꾹 움켜쥐었다.

그러나 강한 타격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김 회장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골프채 헤드가 얼굴 앞에 멈춰 있었다.

“지금 이 느낌 평생 잊지 말고 사세요. 그동안 아버지가 저한테 저지르셨던 폭력이니까.”

김 회장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주름진 얼굴이 흠뻑 젖도록 눈물을 쏟아냈다.

“당신이 가진 나약함이 아들을 잃게 만든 겁니다. 가세요, 우리 두 번 다시 얼굴 보지 말아요.”

김수현의 축객령에 김 회장이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건지 그가 쩔뚝거리며 현관까지 걸어갔다. 김수현은 마음이 약해지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김 회장이 자신에게 사과하러 올 일은 없을 테니, 그 모든 건 차기주의 선물일 것이다. 김수현은 도어록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를 듣고 차기주를 돌아봤다.

“고마워요, 형.”

“……내가 한 짓인지 어떻게 알았어?”

김수현은 차기주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는 절대 나한테 사과할 사람이 아니거든요.”

저택에 불려가서 뺨을 맞고 온 자신을 보고도 무슨 일이냐고 언급하지 않아서 뭔 일을 꾸미는구나 싶었다. 뒤에서 은밀하게 김 회장을 겁박해 무릎 꿇린 차기주는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김수현은 이 악인을 몹시도 사랑했다. 까치발을 들어서 그의 턱에 입을 맞추자 그가 김수현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받치고 안아 들었다. 김수현은 다리를 차기주의 허리에 감아서 코알라처럼 매달렸다.

침실에 들어선 차기주가 침대에 김수현을 눕히고 입을 맞췄다. 김수현은 차기주의 허리를 감았던 다리를 풀었다. 바지를 벗겨내는 그의 손에 묻은 다급함에 작게 웃었다.

매일 섹스를 하는데도 그는 자신을 가지는 일에 있어서 늘 조급함을 느꼈다. 다리에 딱 달라붙은 청바지를 벗겨내느라 차기주의 팔뚝에 힘줄이 곤두섰다. 차기주가 청바지를 벗기자 드러난 하얀 다리를 보고는 못 참고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는 김수현의 복숭아뼈를 살짝 물었다가 혀로 문질렀다. 입술이 천천히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허벅지 안쪽에 붉은 꽃잎처럼 키스 마크가 수놓아졌다. 김수현은 드로어즈 안에 갇힌 페니스가 불편했다. 사실 가장 불편한 곳은 구멍이었다.

오메가가 아님에도 기대감으로 움찔거리는 구멍을 느끼며 김수현은 얼굴을 붉혔다. 회음부까지 다가온 차기주의 얼굴이 사각 드로어즈를 위로 걷어 올리고 사타구니를 혀로 핥았다.

“으.”

차기주가 여린 속살을 강하게 빨았다가 놓았다. 허벅지를 빨렸을 때와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삼각팬티처럼 잡아당겨진 드로어즈의 다리 구멍으로 성기가 삐져나왔다. 차기주의 혀가 귀두를 문질렀다.

김수현의 무릎 사이가 좁아지려고 했다. 차기주는 손으로 이를 저지하며 김수현의 좆 기둥을 목구멍까지 깊숙하게 처넣었다. 그의 목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마다 김수현의 좆은 점점 젖어 들어 먹음직스럽게 번들거렸다.

차기주는 군침을 삼키며 분홍빛을 띤 성기에 입을 맞췄다. 드로어즈 밑단을 돌돌 말듯 걷어 올려 불알까지 드러냈다. 입에 탱탱한 불알을 넣고 혀로 굴렸다. 뺨에 찰싹 달라붙은 성기에서 쿠퍼액이 흘러내렸지만 차기주는 불알을 빠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드로어즈 틈새를 파고들어 구멍을 건드렸다. 침입을 막기 위해 꾹 조여드는 그곳을 살살 달랬다. 그러자 구멍이 익숙하다는 듯 엄지손톱 하나를 받아들였다. 입으로는 불알을 강하게 빨고 구멍 안에 들어간 손가락으로는 내벽 주름을 건드렸다.

“하읏.”

김수현은 사타구니에 얼굴을 처박고 있는 차기주의 머리채를 쥐었다. 그의 뺨에 달라붙어 있던 성기가 왈칵 쿠퍼액을 쏟아냈다. 차기주는 입에서 불알을 뱉고 젖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냈다.

“미안해요, 형. 휴지가 어디 있지?”

그가 허리를 뒤틀고 침대 밖에서 휴지를 찾으려는 김수현을 붙잡았다. 거추장스럽던 드로어즈를 벗겨내고 아이보리색 니트를 목 위로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김수현은 차기주의 밑에 깔려 그를 올려다봤다.

차기주는 몸에 타투로 새긴 것처럼 매일 입고 다니는 와이셔츠의 단추를 위에서부터 풀기 시작했다. 단추가 풀릴 때마다 김수현의 시선이 와이셔츠 안쪽으로 쏠렸다.

단단한 가슴 근육이 그를 향한 수컷의 정욕을 한껏 부풀린다. 차기주의 위협적인 상체를 감춰주던 와이셔츠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갔다. 김수현의 배는 당장이라도 구멍에 좆을 처넣고 싶은 갈망으로 긴장해 11자로 외복사근을 나누는 선이 진해졌다.

김수현은 손으로 차기주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으.”

차기주의 성기가 바지를 뚫고 나오려는 것처럼 부풀었다. 눈썹을 찡그리고 괴로워하던 차기주가 바지 지퍼를 내렸다. 침대 밑에 두 사람이 벗어둔 옷가지가 난잡하게 흩어졌다.

김수현은 상체를 세우고 차기주의 성기에 달라붙었다. 두 손으로 좆을 쥐고 그가 자신에게 해줬듯 입에 넣고 빨았다. 차기주의 손은 펠라를 하기 위해 침대에 엎드린 김수현의 뒤쪽으로 향했다. 그는 구멍에 손가락을 넣고 천천히 늘려나갔다.

손가락에 달라붙어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는 구멍 때문에 차기주는 흥분으로 몸을 굳혔다. 그 덕에 그의 엉덩이에는 아폴로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그의 것을 물고 있는 입을 향해 거칠게 밀어붙였다. 이가 성기의 표피를 살짝 긁었지만, 그 아픔마저 쾌락으로 느껴졌다.

김수현이 뿜어내는 뜨거운 호흡에 차기주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흐. 수현아, 김수현.”

그는 김수현의 구멍에 손가락을 깊숙이 넣고 내벽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온 신경이 성기와 손가락에 쏠린 것만 같았다. 김수현의 구멍을 늘리기 위해 열정적으로 쑤시던 손가락을 빼냈다.

아무런 점액질이 나오지 않는 뻑뻑한 알파의 구멍이 그렇게 탐날 수가 없었다. 차기주의 성기를 빨던 김수현이 고개를 들었다. 입을 벌려 붉은 입천장과 혀를 보여내곤 그 안을 굴러다니는 정액을 손바닥에 뱉어냈다.

김수현이 보인 돌발 행동에 차기주의 눈이 커졌다. 손을 뒤로 보낸 김수현이 구멍에 차기주의 정액을 흘려 넣었다.

“흐응, 흐읏.”

차기주는 자신의 페로몬이 응축된 정액을 뒤에 바르며 발정하는 김수현 때문에 머리가 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유혹하듯 엉덩이를 흔드는 김수현을 들어 올렸다. 김수현이 제게 기댈 수 있도록 그 몸을 돌린 차기주는 흠뻑 젖은 구멍에 좆을 맞추고 그대로 김수현을 내리꽂았다.

“아아, 아아아.”

김수현이 차기주에게 눕듯이 기대며 신음했다. 둘은 몸을 겹친 채 앉아서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차기주는 고개를 내려 초승달처럼 우아한 목선에 키스를 퍼부었다. 부드러운 입맞춤과 달리 하체는 난폭한 짐승처럼 이리저리 날뛰었다.

성기에 꿰뚫리는 김수현은 자지러지며 교성을 내질렀다. 김수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혀로 핥아 맛보니 그리 달 수가 없었다. 그는 지치지 않고 피스톤질을 해나갔다.

김수현의 성기가 픽픽 정액을 뿜었다. 차기주는 좆을 흡입하는 내벽이 좁아 드는데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앗, 아니야. 안 돼. 그만. 형! 흑, 나 가고 있잖아요.”

김수현이 고개를 도리질 치며 흐느꼈다. 차기주는 자신의 성기가 들어 있는 뱃가죽을 손으로 눌렀다.

“아파. 흑, 아파.”

아프다고 우는 김수현의 좆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짧게 끊기듯 나오던 정액이 포물선을 그리며 침대를 더럽혔다. 배부른 사자처럼 차기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잔인하게 배를 짓누르던 손이 떨어져 나간다.

김수현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서럽다는 듯 우는 그의 날개뼈에 입을 맞추며 차기주는 멈췄던 추삽질을 이어나갔다. 침대를 짚은 김수현의 손 위에 손가락을 겹쳐서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하게 결박했다.

완전히 감싸듯 올라탄 차기주 때문에 김수현은 보이지도 않았다. 엇갈리듯 침대에 무릎 꿇은 다리만이 두 사람이 흘레붙고 있음을 알렸다. 뜨거운 체온으로 인해 그들의 피부가 땀에 젖어 반질거렸다.

진한 작약꽃 향기를 코로 깊이 들이마신 차기주는 제 페로몬을 풀었다. 그들의 페로몬이 뒤섞여 전혀 다른 냄새를 조향해냈다. 성기를 빠듯하게 물고 있는 구멍은 계속된 마찰로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체력의 한계에 다다른 김수현은 머리를 침대에 처박았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골반을 잡고 하체만 높게 치켜들었다. 전립선을 어린아이 주먹만 한 귀두로 박박 긁고 짓누를 때마다 김수현의 좆이 묽은 액체를 흘렸다.

“으으, 그만해요. 죽겠어요.”

색욕에 취해 있던 차기주는 그제야 제정신을 차렸다. 그는 구멍에서 물러나 꼬리뼈 위에 자신의 좆을 가져다 대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좆을 처박아댔다. 많은 양의 정액이 한꺼번에 사출되어 김수현의 하얀 등을 덮었다.

사정한 좆은 귀두를 퉁퉁하게 부풀렸다. 노팅이었다. 숨이 턱 막히도록 지독한 알파의 페로몬 때문에 김수현은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그런데도 좆은 식지 않았다. 김수현은 뒤돌아서 자신의 위에 올라탄 차기주를 살폈다. 붉은 귀를 제일 먼저 확인했다. 표정이 없는 그의 감정이 유일하게 드러나는 부위였기 때문이다.

그다음에는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한 얼굴을 봤건만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차기주의 눈은 분홍빛으로 짓무르고 얼굴 근육이 흐물흐물하게 풀려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달큼한 숨이 빠져나왔다.

그는 지금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수현은 차기주의 밑에서 빠져나와 그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형, 지금 어떤 얼굴인지 알아요? 너무 예뻐서 아무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김수현은 노팅으로 경직된 차기주의 좆을 손으로 감쌌다.

“으, 수현아. 놔.”

차기주가 괴로워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지만 김수현은 두 손으로 성기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노팅을 견디지 못하는 몸이니 이렇게나마 돕고 싶었다. 김수현은 차기주의 노팅이 풀릴 때까지 손으로 좆을 쥐고 있었다. 손목이 저릿할 때쯤 손안에 든 성기가 물렁물렁해졌다.

지친 그들은 온갖 체액으로 더럽혀진 것도 개의치 않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차기주는 김수현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김수현의 손을 가져가 살폈다.

“손 괜찮아?”

“그냥 계속 쥐고 있어서 저린 것뿐이에요.”

중세 시대에는 알파의 좆에 가시가 있어서 오메가가 아닌 자들이 노팅을 당하면 배가 터져서 죽을 거라는 믿음을 가졌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니 중세 시대 사람이 아닌 차기주는 제 손이 멀쩡하다는 걸 알 것이다. 그냥 이 핑계로 손 한 번 더 잡아보는 거지 싶었다.

그가 김수현의 두 번째 손가락 안쪽을 문질렀다. 자기 이름이 새겨진 부위였다.

“안 지워지네.”

“당연하죠. 타투잖아요.”

“만일 이게 진짜 네임이었으면 진작 사라졌겠지.”

차기주가 김수현의 손을 가져가 두 번째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수현아, 나도 네 이름을 새기고 싶어.”

차기주의 바람을 들은 김수현은 그와 손가락을 깍지 끼었다.

“내일 같이 가요. 제가 실력 좋은 타투이스트를 알고 있거든요.”

김수현의 말에 그가 웃었다.

* * *

유리창에 붉은 네온사인이 달린 타투 가게 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섰다. 밀대로 바닥을 청소하고 있던 직원과 커피를 마시던 타투이스트의 눈이 차기주를 보고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놀라다 못해 경악이 어린 표정을 본 김수현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차기주한테 ‘김수현’ 새기러 왔어요.”

엄지와 마주 보는 차기주의 두 번째 손가락 옆면에 반듯하게 ‘김수현’이 적혔다. 이제 둘이 손을 잡고 있으면 서로의 이름이 겹치게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김수현이 도망칠까 봐 덫을 칠 필요가 없었다.

차기주는 온전한 김수현의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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