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1)
어느 날 갑자기 게이트와 함께 생겨났던 에스퍼와 가이드의 힘은 모습을 드러낸 천사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천사를 목격한 인류는 하루 동안 그 어떠한 죄도 짓지 않았다. 살인, 강간, 폭력과 같은 물리적인 죄부터 시작해 따돌림 같은 정신적인 죄까지.
사람들은 이날을 2차 대변혁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 평화가 영원하면 좋았겠지만 사람들은 서서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했다는 듯 에스퍼와 가이드들에게 퇴사 자유권을 주는 안건을 통과시켰던 한국의 이능력 센터 SP는 다른 나라보다 한 발자국 앞서 해체 소식을 전했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변화에 적응하느라 몸살을 앓는 중이었다. 한때 에스퍼와 가이드였던 자들은 계속 자기네 단체의 존립을 고집하며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언제 또다시 게이트가 열릴지 모른다면서 사람들을 선동해 겁줬다.
물론 그건 빙산의 일각이었다. 힘을 잃은 에스퍼들이 은밀히 게이트를 다시 열 방법을 찾는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천사가 집행유예로 목숨을 살려준 게 아깝게도 인간은 변함없이 탐욕스러웠다.
어쨌든 능력자들은 사라졌고 가장 강한 에스펴였던 남자의 퇴사는 아주 평범했다. 이사실에 있던 개인 소지품을 상자에 집어넣고 자동차 트렁크에 넣는 게 끝이었다. 차기주뿐만 아니라 센터에 소속되었던 모든 직원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냈던 요새를 떠날 준비를 마쳤다.
주차장에서 만난 김 비서가 차기주에게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사님.”
“김동훈 씨, 이제 나 이사 아닙니다. 우리 다음에 만나면 술이나 하죠.”
김동훈이 웃으면서 안경테를 손으로 밀어 올렸다.
“저 술 먹으면 아내가 뽀뽀 안 해줍니다. 술 말고 커피나 마셔요.”
그렇게 말하는 김동훈은 후련한 듯하면서도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센터 소속 비서팀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앞으로 뭘 해먹고 살아야 할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막대한 연봉을 받은 능력자들과 달리, 일반인이었던 비서들은 대기업에 다니는 평범한 비서들 수준의 월급을 받고 다녔다. 그러니 여생을 위해서라면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다.
차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운전석에 올라탔다. 김수현의 그림 도구와 캔버스를 옮겨야 해서 G*겐의 뒷좌석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채워져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김수현이 그를 쳐다봤다.
“잠깐 속초에 있는 동물 호텔 좀 들러요.”
“다람쥐 때문이야?”
무릎 위에 소중하게 케이지를 올려두고 있는 김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기주는 시동을 걸었다. 수풀이 우거진 태백산에서 내려가며 그들은 바퀴가 돌에 걸릴 때마다 몸을 들썩거렸다. 이제 센터가 없어진 태백산은 다시 등산객들에게 공개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에스퍼와 가이드가 일했던 센터는 관광 명소가 될지도 모르겠다. 도슨트가 20XX년까지만 해도 에스퍼라는 존재가 손에서 불과 번개를 뿜고 무거운 바위를 한 손으로 나를 수 있었다고 설명해주면, 우리의 시절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거짓말하지 말라며 믿지 않는 날이 오겠지. 부디 그런 나날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미리 목적지를 찍어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 속초로 향했다. 김수현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동물 호텔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기쁨으로 가득한 얼굴로 동물 호텔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김수현을 알아본 직원이 당황스러워하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김수현은 조금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다람쥐 찾으러 왔는데요. 반려인 김수현이에요.”
“저…… 그게 고객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깐 안쪽으로 들어오시겠어요?”
직원은 상담실로 김수현을 안내했다. 차기주는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면서 누군가 맡기고 간 개와 고양이, 고슴도치, 토끼 등을 구경했다. 행복한 얼굴로 상담실에 들어갔던 김수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나왔다.
“무슨 일이야.”
차기주는 살벌하게 직원을 째려봤다. 김수현이 고개를 저으며 케이지를 꼭 끌어안았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으나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냥 가요.”
“다람쥐 찾으러 온 거라며.”
“차에서 이야기해드릴게요.”
차기주는 주차해둔 차에 올라타자마자 조수석 쪽을 쳐다보며 설명을 요구했다. 김수현이 울어서 그는 매우 속상했다. 김수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떼어냈다.
“아무래도 다람쥐는 평범한 다람쥐가 아니라 괴수였던 것 같아요.”
“뭐? 그게?”
김수현이 돌봐주었던 다람쥐는 괴수라고 하기에는 퍽 얌전하고 귀여운 소동물이었다.
“직원이 CCTV를 보여줬는데 호텔 케이지 안에서 갑자기 없어졌어요.”
김수현이 자기 핸드폰으로 찍어온 영상을 보여줬다. 투명한 방 안에서 열심히 도토리를 먹고 있던 다람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영상이 찍힌 시간을 보니 하늘의 심판이 열리고 능력자들로부터 힘이 없어졌을 때와 일치했다.
차기주는 이럴 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와 같이 감정에 서툰 존재에게는 일반적인 상식조차 어렵게 느껴졌다.
“태백산으로 돌아가서 다람쥐 한 마리 잡아줄까?”
김수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발치에 케이지를 내려놓고 차기주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하필 그가 성기를 수납해두는 장소라 그의 성기가 그대로 김수현의 곧은 손에 문질러졌다.
“됐어요. 우리 앞으로 많이 바쁠 텐데 신혼이나 즐기도록 해요. 다람쥐 밥 챙겨주겠다고 흐름 끊기는 거 별로예요.”
“하여간 진짜.”
차기주는 꾸짖듯 째려봤지만 사실은 김수현이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그리곤 자동차 시동을 켜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김수현이 갑자기 “아! 저기, 저기 좀 가봐요” 하며 다급하게 차를 멈춰 세웠다. 차기주는 왜 그러나 싶어 김수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살폈다. 닭강정을 사기 위해 사람들이 긴 줄을 선 게 보였다.
차기주는 기분이 묘했다. 천사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하늘로 돌아간 동시에 능력자들이 한순간 사라졌다. 세상은 혼란과 함께 눈 깜빡할 사이 변해버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마치 인류가 멸망할 뻔한 적 없었다는 듯 일상은 금방 정상 궤도로 복귀한 것이다. 다람쥐가 사라졌다고 울어놓고 금세 털어버리는 김수현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과거 따윈 전부 쉽게 잊고서 앞으로 나아갔다.
문득 인류 멸망의 위기도 이처럼 쉽게 잊혔는데 자신이 죽어도 김수현은 그 사실조차 바람결을 따라 흘려보내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의 죽음마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넘겨버린다면, 그렇게 잊힌 자신은……. 차기주는 작은 걸 확대 해석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음식을 사기 위해 줄을 서봤다. 그는 적극적으로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미식가가 아니어서 한 시간이나 줄을 서고도 닭강정을 손에 넣었다며 좋아하는 김수현이 신기했다.
그들은 서울에 있는 차기주의 저택으로 내려갔다. 김수현이 본가로 가지 않아도 된다면서 차기주의 집에서 함께 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스위스에서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수많은 취재진에게 시달리고 센터를 해산시키느라 김수현의 방을 따로 준비해두지 못한 것이 걱정이었다.
저택 지하 주차장에 G*겐을 세우고 뒷좌석 차 문을 열어 짐들을 꺼냈다. 에스퍼의 힘이 있을 땐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던 것들이 이젠 제법 묵직했다. 차기주는 일상 속 이런 사소한 순간마다 자신이 능력을 잃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무력감이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그럴 때마다 하얀 섬광이 자신을 비추는 환상을 봤다. 차기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수술대에 누워 있던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김수현이 멈춰 선 그를 의아해하며 쳐다봤다.
차기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부지런히 짐을 날랐다. 두 알파가 작정하고 짐을 옮기니 일이 금방 끝났다. 차기주는 낯선 장소에 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김수현에게 혹시 마음에 드는 방이 있으면 작업실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방들을 열어보던 김수현이 차기주의 침실을 발견하고는 커튼으로 가려둔 창문으로 다가갔다. 커튼을 걷은 그는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정원 풍경이 아닌 밋밋한 벽돌이 나왔다.
그는 모스크바 연구소에서 탈출할 때까지 계속 연구원들에게 관찰당하는 삶을 살았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방에 유리만 있으면 감시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침실에서만큼은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있고 싶다는 생각에 밖에서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하도록 집을 고쳤다.
“여기 왜 이래요?”
김수현은 누가 봐도 이상한 벽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꼭 오랫동안 감시당한 사람 같아요.”
“……설마. 그럴 리가.”
김수현이 내뱉은 말에 차기주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무리 구해달라고 울부짖어도 빠져나올 수 없었던 지옥에 대한 기억이 어느새 등골이 서늘해지도록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는 오래된 그 과거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커튼을 쳐 창문을 가렸다.
“배고프지? 얼른 씻고 밥 먹자.”
“맥주 있어요?”
“오랫동안 집에 안 들어와서 없을 텐데. 잠깐만.”
차기주는 센터 생활을 위해 비워뒀던 냉장고 문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었다. 역시나 생수병 하나 남기지 않고 버리고 가서 텅 빈 채였다. 김수현이 이럴 줄 알았다면 마트에 들러서 장을 좀 볼걸 그랬다며 차기주 어깨 너머로 냉장고를 훔쳐봤다.
그는 미약한 수치심을 느끼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 앞으로 이 안을 신선한 채소와 과일, 매주 새롭게 만든 반찬들로 꽉 채워둘 것이다. 이제 그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 연인과 동거하는 것이니 말이다.
“근처에 편의점 있어요?”
“글쎄.”
“뭐야,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편의점 갈 일이 없었어서 모르겠네.”
“하여간 무슨 재미로 살았나 몰라. 이젠 내가 형 사는 재미 좀 붙여줄게요.”
“형?”
차기주가 김수현 앞에서만 표정이 다양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토록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매번 신선한 충격을 주는데 어떻게 조각상처럼 한 표정만 짓고 있겠는가.
되바라진 표정으로 무려 12살이나 많은 자신에게 따져 묻는 김수현을 내려다봤다.
“그럼 형이지, 차기주 씨라고 불리고 싶어요? 이제 형, 이사님 아니잖아요. 연인끼리 상사 부하 놀이 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야, 그냥 형이라고 불려본 게 처음이라서 당황했어.”
차기주는 자꾸만 형이라는 단어가 귓가에 맴도는 기분이었다. 호칭 하나 바꿨다고 이렇게나 가까운 사이로 느껴지다니.
김수현은 빨개진 차기주의 귀를 보고 참을 수 없어 손을 뻗었다. 말랑한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거기에 입술을 맞췄다. 김수현의 다정한 행동에 아까까지만 해도 차기주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김수현이 자신의 존재 또한 다람쥐처럼 털어버릴까 걱정한 게 무색하도록, 지금 이 순간 그는 평온을 느꼈다.
검은 눈동자 안에는 오직 자신만이 가득했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본다는 사실에 마음이 벅차고 설렜다.
“그거 알아요? 편의점에 가면 맥주도 있고, 콘돔이랑 러브젤도 있어요.”
“잠깐만, 어디 있는지 검색 좀 해볼게.”
그는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주변 위치를 검색했다. 203m 떨어진 곳에 편의점이 있었다. 가을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면 좋을 것 같았다. 김수현이 속초에서 산 닭강정 박스를 냉장고에 넣고는 벌써 현관에 가서 자신을 기다렸다.
차기주는 자신을 향해 뻗어진 손을 맞잡고 집을 나섰다. 한 번도 신경 써서 관리해본 적이 없어 황무지에 가까운 정원을 걸었다. 미세한 흙이 피어올라 검은 구두의 윤광을 흐렸다. 내일 인테리어 업자를 불러서 돌을 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김수현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한 듯싶었다.
“여기다가 토마토랑 오이, 상추 같은 거 심으면 좋겠다. 그렇죠?”
우리의 생각은 이렇게나 다르구나. 그리고 그렇게 다른 우리는 서로에게 끌리는구나. 차기주는 작게 미소 지었다. 그리곤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 뻔뻔함으로 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돌아온 김수현이 씻겠다며 1층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차기주는 2층에서 씻고 거실로 내려왔다. 편한 홈웨어를 입고 계단을 내려온 그는 샤워 가운만 걸친 채 소파에 누워 있는 김수현 때문에 아찔한 정신을 겨우 붙들었다.
벌어진 샤워 가운 사이로 보이는 가슴과 허연 허벅지가 군침을 돌게 했다. 김수현은 텔레비전에 집중한 채 영화를 결제하고 있었다.
“왔어요?”
옆으로 누워 있던 김수현은 뒤늦게서야 차기주의 존재를 인지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느슨하게 묶은 허리띠가 풀릴락 말락 하게 매듭을 유지하고 있었다. 샤워 가운이 커서 한쪽 어깨가 흘러내렸다. 차기주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냉장고에 있는 닭강정을 꺼내 식탁에 올려뒀다.
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접시를 모아둔 장식장 앞에 섰다. 한참을 고심하던 그가 고른 건 나폴레옹 3세가 사용한 의자 등받이에서 모티브를 얻은 까나쥬 무늬가 그려진 접시였다. 황금빛으로 등나무 무늬를 엮은 듯한 패턴이 접시에 프린팅되어 고급스러워 보였다.
적당량의 닭강정을 덜어낸 그는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에 접시를 놓았다.
김수현에게서는 언제나 맡았던 작약꽃 향기가 아니라 샌달우드의 진한 향을 베이스로 한 부드러운 라벤더, 상쾌한 타라곤과 타임꽃 냄새가 났다. 그리고 지금 차기주에게서도 똑같은 향이 나고 있었다. 그야 이 냄새가 바로 그가 사용하는 보디 워시의 향이었기 때문이다.
소파에 앉아 있는 김수현의 다리가 점점 벌어졌다. 차기주는 차마 그 사이를 보기 위해 고개 숙이는 추접한 짓을 저지를 수 없어서 소파 밑으로 내려갔다. 마치 아무런 의도도 없는 사람처럼 김수현을 뒤로한 채 얼굴은 텔레비전에 고정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나온 불빛 때문인지 표정 없는 얼굴이 약간 들뜬 것처럼 보였다. 차기주는 차가운 맥주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캔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손목에서부터 팔뚝까지 흘러내렸다.
“이사님, 배고프세요?”
“넌?”
김수현이 차기주의 허벅지에 발바닥을 문질렀다.
“저는 배고파요. 그래서 배 터지게 먹어보려고요.”
차기주는 닭강정을 찍은 포크를 놓쳤다. 김수현이 그를 두 다리로 옭아매고 등줄기에 좆을 문질렀기 때문이었다. 뒷덜미며 어깨에 문질러지는 좆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차기주는 맥주 옆에 놔둔 러브젤을 챙겨 들곤 손에 듬뿍 짰다. 손가락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김수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차기주를 감싼 다리를 풀고 소파에 누웠다. 그러곤 그가 자기 가랑이 사이에 들어앉기 좋게 무릎을 세운 채 벌린 자세를 취했다.
차기주는 젖은 손으로 김수현의 은밀한 구멍을 건드렸다. 근래 섹스하지 못한 탓에 그곳은 첫 경험 때처럼 꽉 다물려 손가락 하나 삼키지 못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구멍 주름을 누르며 괄약근을 이완시켰다.
할 수만 있다면 알파 페로몬에 풀어서 돕고 싶지만, 같은 알파에게는 통하지 않을 일이었다. 오히려 그들 사이에서 페로몬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김수현에게 본능적인 거부감만 불러일으킬 게 뻔했다.
김수현보다 현실적인 차기주는 그들이 앞으로 보내야 할 러트와 2세 문제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는 슬픈 이별을 지레짐작하며 연인의 뒤를 천천히 이완시켜나갔다. 그때가 되면 이토록 아름다운 알파가 한때나마 자신의 사람이었음에 감사하며 그 추억을 품은 채 살아가면 될 것이다. 끈적한 행위와 어울리지 않는 어둠이 차기주를 물들여갔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벌어진 구멍으로 밀려 들어갔다. 검지 손톱을 삼키자 손가락까지 넣는 건 순식간이었다. 러브젤로 흠뻑 젖은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가 쿨쩍이는 소리를 냈다. 김수현이 으으, 괴로워하며 소파를 손으로 쥐어뜯었다.
차기주는 손가락을 움직이던 걸 멈추고 잠시 기다렸다. 김수현이 검지 둘레에 익숙해졌는지 가볍게 엉덩이를 흔들었다. 차기주는 검지와 중지를 겹치고 구멍을 쑤셨다. 손톱을 짧게 자른 손 끝으로 내벽 주름을 문질러 자극을 가했다.
“하읏.”
김수현이 허리를 튕겼다. 느슨한 허리끈 매듭이 결국 풀렸다. 잘록한 허리와 배꼽이 차기주를 유혹하듯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는 연신 구멍을 쑤시면서 다른 손으로는 러브젤로 범벅이 된 구멍 주위를 어루만졌다.
“으으, 읏.”
앓는 소리를 내는 김수현의 젖꼭지가 미세하게 부풀어 있었다. 차기주는 혀로 마른 입술을 핥으며 구멍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그도 모르는 사이 빠르게 쑤시고 있었는지 안을 적시던 젤은 하얗게 유화되어 거품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는 미끄러운 손으로 콘돔 포장지를 뜯다가 실패해 입에 물고 뜯어냈다. 콘돔을 착용한 그는 김수현의 구멍에 금방이라도 찔러 넣을 것처럼 좆을 맞댔다. 충분히 풀어줬다고 여겼는데 성기의 선단을 구멍에 맞추니 들어갈 생각을 안 했다.
이대로 넣었다간 찢어질 것 같아, 차기주는 김수현의 엉덩이를 손으로 움켜잡고 콘돔을 낀 성기를 그 배에 문질렀다. 피부가 하얀 뱃가죽 위에 구렁이 같은 걸 얹으니 미관상 그리 좋지 못했다.
그는 김수현의 위에 엎어져 상체를 겹쳤다. 말랑한 입술을 빨며 하체를 움직였다. 배 위에서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좆이 바깥이 아닌 안에 들어 있었다면, 김수현은 배가 찢겨서 죽어버렸을지도 몰랐다.
김수현은 묵직한 성기가 주는 압박감에 숨쉬기 힘들어하면서도 차기주의 입술을 배고픈 짐승처럼 물어뜯고 빨아댔다.
차기주의 갈급함이 옮겨왔는지 김수현은 그를 빨리 받아내고 싶어 초조해했다. 김수현은 자신의 배꼽을 집요하게 문질러대는 좆을 잡아 멈춰 세웠다.
그는 차기주의 어깨를 눌러 아래로 내려보냈다. 그리곤 스스로 엉덩이를 들어서 차기주의 하체에 비볐다. 그 저속하고 노골적인 움직임에 차기주의 관자놀이에 굵은 혈관이 불거졌다.
차기주는 손으로 김수현의 구멍을 만지며 들어갈 만한 상태인지 확인했다.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구멍이 손가락을 강하게 빨아들였다. 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딱딱하게 경직된 좆을 잡아 구멍에 맞췄다. 천천히 귀두를 넣자 원래라면 닫혀 있어야 하는 좁은 틈이 벌어지고 구멍의 주름이 팽팽해졌다. 알파는 오메가와 달리 알파와 성교하기에는 불리한 신체 구조였다. 그렇지만 김수현은 충분히 이 고통을 감내할 만하다고 여겼다.
좆에 의해 팽창한 구멍이 홧홧하게 달아오르고 쓰라렸다. 김수현은 손으로 차기주의 등을 긁었다. 예전이었다면 금방 피가 멈추고 회복되어야 했을 등은 붉게 파인 채 치유되지 않았다.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김수현은 손가락 끝에 힘을 풀고 주먹을 꽉 쥐었다.
차기주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김수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강하게 구멍 안으로 성기를 박아 넣었다.
“아!”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동시에 눈물이 나도록 좋았다. 차기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나 양면적인 감정을 느끼게 했다. 김수현은 더 이상 그에게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주먹 쥔 손을 풀지 않은 채 차기주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 고동 소리가 바짝 붙은 김수현의 가슴에 울려 퍼졌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설렘 가득한 심장박동이 하반신을 뜨겁게 데웠다. 김수현의 발기한 좆이 차기주의 배를 찔렀다. 차기주는 부드럽게 움직임을 이어갔다.
그는 김수현의 배 속을 쑤셨고 또 한편으로는 김수현의 좆이 그의 배에 문질러지게 했다. 김수현은 앞뒤로 가해지는 자극에 정신 못 차리고 신음했다. 알파끼리의 섹스는 누군가 한 명이 오메가의 역할을 자처해야 했지만, 이렇게나마 김수현도 알파로서의 본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좁은 내벽을 훑고 지나가는 성기에 전립선이 걸렸다. 차기주는 퍽, 강하게 안을 파고들며 김수현의 양 허벅지를 붙잡아 삽입하는 힘에 김수현의 몸이 위로 밀려나지 않게 고정했다.
부드러운 혀가 김수현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아이가 간식을 먹기 전 자기 것이라고 침을 바르는 것처럼 소유욕이 가득 담긴 행위였다. 작약꽃 향기가 진한 보디 워시 향기를 뒤덮을 만큼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테이블에 방치된 맥주가 미지근해지는 것도, 틀어놓은 드라마 속 내용이 결말에 다다른 것도, 두 사람과는 상관없었다. 두 연인의 행위는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김수현이 구멍을 조이며 사정하자 차기주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일어났다. 하얀 정액이 묻어 더러워진 남색 티셔츠를 X자로 팔을 교차해 뒤집어 벗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외복사근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김수현은 넋을 놓고 깊게 파인 쇄골과 크고 우람하지만 강인해 보이는 대흉근을 바라봤다.
아래에 깔린 채 봐서 그런지 차기주의 근육이 자신의 것보다 커 보였다. 자기보다 잘난 알파에게 뒤를 내주는 게 자존심 상할 만도 한데 김수현은 이런 남자를 자신이 가질 수 있어서 행운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어지간히 사랑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 손을 뻗어 완벽한 대리석 조각 같은 몸을 어루만졌다. 차기주의 냉엄한 눈이 자신에게 내리꽂힐 때면 가슴이 서늘해졌다가도 곧바로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구나, 알게 되어 웃음이 나왔다.
저 솔직한 귀를 자신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기주를 이루는 그 무엇도 빼놓을 수 없이 소중하니까.
김수현은 공평하게 차기주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올려놨다. 그가 손가락 사이로 가슴살이 삐져나오도록 김수현의 가슴을 세게 움켜잡았다.
“빨리, 윽. 박아봐요. 감질나게 굴지 말고.”
“너 정말!”
그는 자기를 도발하는 김수현의 말에 화난 것처럼 입술을 깨물었지만, 김수현이 아플까 조심스럽던 움직임을 버린 채 대범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사람들 틈에 서 있으면 남들보다 키가 큰 김수현이었지만 차기주에게 비하면 대형견 앞에서 왈왈 짖는 중형견에 불과했다.
차기주가 작정하고 허리를 흔드니 무거운 소파가 끼익대며 바닥에 끌렸다.
“아아, 아. 흐읏, 응.”
김수현은 다리에 힘이 풀려 차기주가 박는 대로 흔들렸다. 자꾸만 벌어지는 입에서는 침이 긴 꼬리를 그리며 떨어졌다. 내벽이 조였다가 풀리며 성기에 달라붙었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좆을 손으로 잡고 가볍게 만져줬다.
“흐으, 흣. 으.”
구멍이 좆을 잘라먹을 것처럼 오그라졌다. 그 강한 자극에 차기주는 눈썹을 찡그린 채 사정했다. 김수현은 배 속을 범람하는 뜨거운 물줄기에 놀라서 차기주를 바라봤다.
“형, 콘돔 끼지 않았어요?”
“왜 그러는데.”
“잠깐 나와봐요.”
차기주가 뒤로 물러났다. 구멍을 틀어막고 있던 거대한 좆이 빠져나가자 괄약근이 망가진 것처럼 닫히지 않았다. 선명한 붉은빛의 내벽이 율동하는 게 보였다. 차기주는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이 싼 정액으로 더럽혀진 배 속을 확인했다. 정액으로 범벅이 된 콘돔은 사이즈가 맞지 않았는지 찢겨 있었다.
김수현이 자기 밑을 보고 혀를 찼다.
“그냥 콘돔 없이 해요. 할 때마다 찢어지면 잘못하다가 안에 콘돔 들어가겠어요.”
“괜찮겠어?”
“네, 콘돔이 안에 들어가서 병원에 가는 사태만큼은 피하고 싶거든요.”
콘돔 없이 하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라는 태도였다. 차기주는 만일 자신이 김수현과 헤어질 경우, 김수현이 어떤 상대를 만나게 될지 몰라 걱정되었다. 자신이야 특수한 경우 때문에 김수현과 섹스하기 전까지 성 경험이 없었지만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이가 어려서라고 쳐도 김수현이 동정인 것 또한 아주 이례적인 경우였다. 알파와 오메가들은 발정기를 핑계로 몹시 난잡한 생활을 했으니까. 차기주는 김수현이 만날 오메가가 성병이 있어서 김수현에게 그 병을 옮기게 될 가능성을 염려했다.
“콘돔은 꼭 껴야지. 그러다 나쁜 병에 걸리면 어쩌려고.”
“형도 나도 사생활 깨끗하고, 우리끼리만 자고, 섹스하기 전에 깨끗하게 씻는데 왜 걱정해요. 내가 오메가였어도 콘돔 없이는 섹스 못한다고 했을 거예요?”
차기주는 할 말을 잃었다. 첫 번째 생에서 차기주는 알파 커플에게 미래가 없다고 여겼다. 김수현이 가정을 꾸릴 수 있게 헤어져주는 게 그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김수현은 알파 콤플렉스가 생겼었다. 그런데 그때 생긴 콤플렉스가 여전히 김수현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김수현과 그가 첫 번째 생에서 겪었던 갈등을 또다시 겪게 될지도 몰랐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는 차기주를 보고 김수현이 말했다.
“아니겠지! 내가 오메가였으면 어떻게든 임신시키려고 들었겠지. 배 속에 어떻게든 정액을 가득 채우려고 했겠지! 비켜요.”
차기주는 화난 김수현이 그대로 가버릴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김수현은 떠나지 않았다. 대신 차기주를 밀치고 소파에 눕혀서 그 위에 올라탔다.
“화가 나요. 내가 알파인 게 화날 때는 오직 형이 나한테 벽을 칠 때뿐이에요. 어떻게 날 그렇게 슬프게 만들 수 있어요? 내가 알파인 게 그렇게 싫어요?”
“아니야. 그럴 리 없잖아. 나 때문에 네가 소중한 가족을 만들 수 있는 미래를 잃는 것 같아서 그런다고 했잖아.”
차기주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김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글쎄요. 기억 안 나는데요? 첫 번째 생에서 말한 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그 말은 무효예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잘근거리며 차기주의 페로몬 샘이 있는 부위를 씹는 김수현에게 그는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래, 그럼 무효로 하자. 난 너에게 우리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넌 네가 알파인 게 싫지 않은 거야. 알았지?”
김수현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위생적인 문제가 있으니까 그래도 콘돔은 사용하자.”
“왜요? 나 두고 바람피우게요?”
김수현은 벌써 화가 풀렸는지 차기주의 가슴에 누워버렸다. 이럴 때면 그가 냉정하고 딱 부러진 성격 같아도 감정에 휘둘리는 예술가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아닌 거 알잖아.”
“알았어요. 그럼 해외 직구로 3XL 사이즈 구입해요.”
그렇게 그들은 금세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미 해본 소모적인 싸움이었고 차기주는 이 문제에 대해 첫 번째 생에서 답을 얻은 상태였다. 그러니 같은 문제를 가지고 또다시 얼굴을 붉히고 서로에게 상처 주는 싸움을 이어나가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아무리 가시밭길이 깔린 미래가 그들을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도망쳐선 안 됐다. 그저 지키는 것 외에 이 사랑을 어찌할 방도가 없다는 걸 알지 않는가.
만약 첫 번째 생에서 김수현이 임무를 수행하다가 해적에게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아마 차기주는 끝까지 우리를 위한다며 김수현과 재결합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번 생에서도 이 문제로 또다시 두 사람은 이별했을 것이다. 그는 도돌이표에 마침표를 찍어준 회귀 전 기억을 되찾은 것이 불행하면서도 감사했다.
그는 애써 긍정적인 상상을 해봤다. 김수현과 함께라면 자신이 걱정하는 모든 것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김수현이 아버지에게 결혼 압박을 받지 않고, 러트가 와도 두 사람은 굳건할 것만 같았다.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알파 커플은 이제 에스퍼와 가이드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 뾰족한 시선을 받아내야 할 테지만, 두 사람은 그 편견과 차별로에도 굴하지 않고 서로를 계속 사랑하고 아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만일 차기주에게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건 전적으로 김수현 덕분일 것이다.
그의 위에 올라탄 김수현이 차기주의 성기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뭉근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김수현이 차기주의 배를 손으로 짚고 그를 내려다봤다. 차기주는 손으로 좆을 잡아서 김수현을 도왔다. 김수현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두 번째 교접이라고 삽입이 이전보다 수월했다. 기름칠을 한 볼트와 너트처럼 그들의 몸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김수현의 어깨에서 완전히 흘러내린 샤워 가운이 팔꿈치에 걸렸다. 차기주는 늘씬한 알파의 아름다운 몸을 눈으로 탐닉했다.
이토록 자비로운 존재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다. 만일 차기주였다면 아무리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를 강간한 새끼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세뇌로 인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김수현의 강인함은 육체적인 데서 오는 게 아니라 강한 영혼에서 오는 거였다. 차기주는 그런 그가 너무 부럽고 멋졌다.
김수현의 엉덩이가 위로 들어 올려질 때마다 좆에 점막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게 느껴졌다. 자신으로 인해 김수현이 뒤로 쾌락을 얻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사실이 유치할 정도로 기뻤다.
차기주는 손을 뻗었다. 김수현이 유순하게 속눈썹을 내리깔고 그의 손바닥에 뺨을 맡겼다.
“수현아, 정말 미안해.”
“됐어요. 어차피 기억 못해요.”
차기주가 뜬금없이 꺼낸 사과를 김수현은 알아들었다. 그리고 정말 별거 아닌 것처럼 대꾸했다. 그렇지만 만약 김수현이 그 일을 진짜로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그가 무엇에 대해 사과를 한 건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 생의 일은 평생 김수현의 연인으로 살면서 차기주가 속죄해야 할 죄였다.
허벅지 근육이 단단해지도록 기승위를 하던 김수현이 지쳤는지 소파 등받이를 손으로 짚었다. 차기주는 그런 김수현의 허리를 끌어안고 일어섰다. 그는 입술을 맞추며 김수현을 아래로 깔았다.
몸을 맞춘 채 움직여 자극이 갔는지 김수현이 차기주의 등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그는 깃털처럼 가벼운 키스로 연인을 달랬다. 그리고 짐승과도 같은 섹스를 이어나갔다. 적당한 크기의 유두를 손으로 꼬집으며 쉴새 없이 하체를 움직였다.
배 속에 부어둔 정액이 굳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김수현의 내벽을 좆으로 문질렀다. 반창고를 붙인 뒤꿈치가 그의 엉덩이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깊은 삽입에 김수현은 하으읏,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발긋한 뺨이 사랑스러웠다. 그에게서 어디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은 없지만 차기주는 정신없이 혀로 그 뺨을 핥았다. 개처럼 구는 차기주가 귀찮을 만도 한데 김수현은 얼굴이 온통 침으로 도배되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어느새 텔레비전에서 드라마가 끝나고 광고가 나왔다. 차기주는 반짝이는 눈으로 김수현을 바라봤다. 사랑해, 사랑해. 꼭 그렇게 외치는 듯한 차기주의 눈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빛났다. 김수현은 문득 이 완벽한 순간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감정을 자신의 안에 잘 저장해뒀다. 자신을 향한 차기주의 눈빛이 얼마나 따스한지 손끝으로 눈꺼풀을 만져서 느껴보았다. 얇은 눈꺼풀에 있는 희미한 푸른빛 실핏줄과 얇은 속쌍꺼풀을 손으로 기억해두고 코를 만졌다.
캔버스에 이미 그려진 그림을 만지듯 차기주의 눈두덩에서 코로 이어지는 곡선을 손으로 덧그렸다. 먹의 농담으로만 그리는 수묵화의 산처럼 붓의 힘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 밑으로 내려가 인중과 입술 산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남자답게 굵은 턱선을 가졌는데 신기하게도 정면에서 보면 갸름한 얼굴이 되었다.
“다 만졌어?”
“네.”
“그럼 뭐 좀 먹어. 너 점심 먹고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김수현은 차기주의 성기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묽은 정액을 내보냈다. 차기주가 기다리라며 무릎까지 내리고 있던 바지를 끌어 올려 입었다. 그는 화장실에서 따뜻한 물을 받은 대야를 가져왔다. 온기가 남은 젖은 수건이 체액으로 더럽혀진 김수현의 하복부와 사타구니, 엉덩이 사이를 꼼꼼히 닦았다.
김수현은 벗은 것과 진배없는 샤워 가운을 여미고 소파 아래에 앉았다. 푹신한 카펫을 깔아뒀는데도 엉덩이가 아파서 코끝을 찌푸렸다. 차기주가 그런 김수현을 번쩍 들어서 자기 무릎 위에 앉혔다.
괜히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는 자세였다. 차기주에게 머리를 기댄 채 냉장고 찬기가 완전히 가신 닭강정을 달라고 조르자 그가 닭강정을 포크로 찍어서 김수현의 입에 넣어줬다. 그걸 받아먹은 김수현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가 사레가 들려서 기침했다.
“천천히 마셔.”
“미지근해지고 김 빠지니까 맥주에서 오줌 같은 맛이 나요.”
“와인 가져다줄까?”
“됐어요. 이따가 그림 그릴 거라서.”
김수현은 식사 수발을 받으며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뉴스에서 마침 제네시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천사의 존재는 인간에게 다시 한번 죄를 짓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신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신앙심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범죄율은 하늘의 심판 전보다 50%로 급감했다는데 종교적 이유로 일어나는 테러 행위는 크게 늘었다.
메시아가 하늘로 돌아가버리자 제네시스 신도들은 자기네가 구원받아야 한다면서 수제 폭탄으로 테러 행위를 자행했다. 인류를 말살시키고 하늘로 올라가겠다며 말이다. 경찰들은 그들의 아지트를 급습해 제네시스 신도들을 체포했지만, 그 제네시스를 우상시하는 아류 단체들이 계속 생겨난다는 게 문제였다.
조직은 끊임없이 새끼를 치고 광신도들은 테러를 일삼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경찰은 물론 군인까지 동원해 그들을 잡아들이고 있었고 인터넷에서는 제네시스와 천사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김수현은 메시아가 적으로 여겼던 차기주를 그런 광신도들이 찾아와 해코지할까 봐 걱정되었다. 유심히 뉴스를 보는 김수현과 달리 차기주는 그의 입에 닭강정을 넣어줄 뿐이었다.
배부른 김수현은 그만 먹겠다는 말 대신 차기주의 바지 안에 손을 넣어 좆을 잡았다.
원래 신혼 때는 눈만 마주쳐도 배를 부딪친다고들 했다. 알파인 그들이 결혼을 할 수는 없으니, 동거가 결혼 생활이라 생각하면 우린 방금 결혼한 부부였다.
한 손으로 기둥을 다 잡을 수 없었지만 열심히 흔들었다. 김수현은 차기주가 빨리 발정하도록 그의 귓가에 헐떡이는 소리를 냈다.
“하아, 하아. 형, 좋아요?”
발칙한 도발에 그가 넘어갔다. 김수현은 손에 뱉어진 정액을 만지며 점도를 체크했다가 아차 싶었다. 과거의 자신이 진설해에게 가이딩을 받고 돌아온 그를 믿지 못해 했던 짓이었다. 슬쩍 차기주의 눈치를 봤지만 다행히 기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도 자신도 아직 회귀 전의 기억에 휘둘리고 있었다. 이미 사라진 일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하건만 그게 쉽지 않았다.
김수현은 자신이 차기주에 대한 의심으로 미쳤던 시간의 잔재를 마주하고 솔직하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이제는 믿어요, 형이 진설해 씨와 자지 않았다는 거.”
차기주는 괜찮다며 김수현의 손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줬다. 그는 속으로 ‘수현이가 언젠가 그 일도 기억해내겠지’ 하고 생각해버렸다.
김수현에게 용서받았음에도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받은 거라 그런지 차기주는 마냥 행복하게 웃을 수 없었다. 시한폭탄이 아직 터지지 않았다고 해서 안전한 건 아니니 말이다.
* * *
아침 7시, 김수현은 자동으로 배가 고파져서 깨어났다. 항상 차기주가 출근을 하기 전 자신에게 밥을 먹이러 징벌방에 온 탓이었다. 그는 하품하며 침대에서 기지개를 켰다.
그림을 그리다가 침대에 들어올 때 분명 아무렇게나 벗어둔 것 같은데, 어느새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슬리퍼를 꿰신었다. 푸른색 체크무늬 잠옷을 입은 그는 방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로봇 청소기의 개수를 손가락으로 셌다.
“다섯 대나 되네.”
눈에 보이는 것만 셌는데도 그랬다. 바닥은 그렇다 치고, 가구나 전자기기 같은 살림에 먼지가 내려앉는 건 어떻게 청소하나 싶었는데, 마주하게 된 광경은…… 정말 의외였다. 차기주가 먼지떨이를 들고 청소하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자기 공간을 결벽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보통 저 정도면 자기의 공간에 타인을 들이길 꺼리는 게 정상일 텐데, 자신과는 아무렇지 않게 동거를 하고 한 침대에서 잤다. 김수현은 좋으면서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일어났어? 좀 더 자지. 강의 10시잖아.”
“그냥 일어난 김에 아침 먹게요. 이사님, 아니 형이 매일 7시에 나 밥 먹이러 와서 이때 되면 배고파지더라고요.”
“그래, 식탁에 앉아 있어. 식사 준비해둘게.”
“어제 냉장고 다 비운 것 같은데 뭐 먹을 거 있어요?”
김수현은 식탁 의자를 끌어서 앉으며 부엌을 살폈다. 장식장에 접시와 컵을 모으는 차기주의 취미가 의외여서 놀랐다. 그의 삶에 온전히 들어와서 속속들이 바라본 그의 모습은 의외로움의 연속이었다. 그가 냉장고 문을 열고 편의점에서 사 온 달걀과 킬바사 소시지를 집었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들고 두꺼운 킬바사 소시지를 구웠다. 전기밥솥에서는 갓 지은 밥을 뜨고 샐러드는 진공 포장한 것을 뜯어 별자리를 암시하듯 흑백으로 양과 별을 그려놓은 접시에 소복하게 담았다.
“잘 먹을게요.”
김수현은 앞으로 같이 살면서 굶어 죽을 걱정은 없겠다 싶었다. 솔직히 차기주가 이렇게나 살림을 잘하는지 몰랐다. 매일 그의 집을 청소해주는 고용인들이 오고 누군가 해주는 밥을 얻어먹고 살 줄 알았다. 물론 매일 제게 직접 요리를 해주긴 했지만 말이다.
그가 빈 접시를 가져가 싱크대에서 물로 헹구고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김수현은 등을 돌린 차기주가 설거지하던 모습만을 알아서,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의 믿음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다.
하긴 이 최첨단 시대에 이렇게나 큰 집을 혼자서 관리하려면 기계의 도움은 필수였다. 동거 하루 만에 차기주의 뜻밖의 모습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깨달았다.
차기주도 자신과 동거하면서 몰랐던 점을 점점 알아가게 되겠지.
“커피 줄까?”
“네.”
그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능숙하게 커피를 내렸다. 정말 못하는 게 없었다. 김수현은 식탁 테이블에 팔을 괴고 그런 차기주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향긋한 원두 냄새가 오늘 좋은 하루가 시작될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커피 마시고 잠깐 눈 붙여. 너 그림 그린다고 네 시간밖에 안 잤어.”
“그럼 형은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편의점에서 장 보고 집 청소한 거잖아요.”
“난 이제 백수야. 난 너 학교 가면 낮잠 잘 수 있지만, 넌 강의 들어가서 졸래?”
이럴 때 보면 연상은 연상이다 싶었다. 잔소리하는 거 봐라. 김수현은 따뜻한 커피를 호호 불며 눈을 피했다.
“방금 커피 마셨는데 잠이 오겠어요.”
“커피 냅이라고 잠 모자란 사람들한테 필요한 낮잠 방법이야. 커피 마셔도 바로 자면 아데노신 같은 피로 물질은 사라지고 커피 각성 효과로 개운하게 깰 수 있어.”
말발로는 차기주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김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러 가자며 김수현을 번쩍 안아 들고 계단을 올랐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로봇 청소기가 침실만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늦게 잠든 김수현을 깨우지 않기 위해 청소 불가 지역으로 지정했기 때문이었다.
차기주는 침대에 김수현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줬다.
“9시까지만 자. 차로 데려다줄게.”
“하암, 나 안 졸린데.”
김수현은 하품하면서도 자신은 전혀 졸리지 않다고 주장했다. 차기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응. 잘자, 수현아.”
차기주는 로봇 청소기 소리가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침실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는 소파 커버를 벗기고 세탁기에 넣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김수현의 화가 활동을 서포트하기 위해 사둔 미술관의 큐레이터에게 온 이메일을 확인했다.
빈센트 반 고흐 작품을 전시하고 싶다는 기획안이었다. 차기주는 반 고흐의 작품을 빌리기 위한 비용과 계약서를 보고 승인했다. 유명한 화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신생 미술관은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업무를 마무리하고 이번에는 자신의 연인을 천재 화가로 둔갑시켜줄 유명한 평론가에게 청탁 이메일을 보냈다.
차기주는 예술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실력이 아닌 작가의 스토리와 백그라운라고 생각했다. 유명한 평론가가 훌륭하다고 하면 훌륭한 작품이고, 형편없다고 하면 형편없는 것이다. 캔버스에 점 하나 찍고도 수십억을 받아내는 건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사기지만, 미술판에서는 성과였다.
예술이란 이토록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였다. 차기주가 오랫동안 센터 이사로 지내면서 얻은 거라고는 돈뿐이었다. 연인의 그림을 비싼 가격에 사 명성을 쌓아주고 유명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가치가 PL 그룹과 김 회장으로부터 김수현을 보호해줄 것이다.
차기주는 노트북을 끄고 책상을 정리했다. 한국에서 센터 소속 에스퍼로 활동한 이래, 한 번도 빼지 않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이 최첨단 시계는 시간을 확인할 때밖에 쓰이지 못할 테다. 불안정 파동 에너지 수치 0. 그는 수치 확인을 끝으로 두꺼운 손목시계를 풀었다.
이제 굳이 시계를 24시간 동안 차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시간은 가끔 핸드폰으로 확인하거나 집에 걸린 벽시계를 보고 알면 될 일이었다.
그는 에스퍼들이 분신처럼 차고 다녔던 시계를 드레스룸에 있는 액세서리 수납장에 넣어두고 침실로 향했다. 커피를 마셔서 잠을 못 잔다고 말하더니만 수현은 잠에 취해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차기주는 침대에 걸터앉아 잠든 김수현을 봤다.
“용기 내볼게. 설령 네가 다 기억해내 날 버린다고 할지라도 널 원망하지는 않을게.”
어쩌면 그는 평생 김수현의 옆에서, 김수현이 '그 기억'마저 되찾을까 두려워 불면의 밤을 지샐지도 몰랐다. 김수현이 그 기억을 되찾는 날은 당장 내일일 수도, 두 사람이 늙어서 죽을 날을 앞둔 70년 뒤일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기보다 오전 9시가 될 때까지 그 무엇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사랑하는 연인을 눈에 담기로 했다.
“수현아, 일어나. 학교 가야지.”
“선배, 5분만요.”
김수현이 차기주를 선배라고 부르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김수현의 등을 토닥여줬다. 김수현이 지금 옥탑방 꿈을 꾸고 있나 보다. 그 허상이 너무나 행복해서 차기주도 그때의 기억을 되찾은 뒤로 종종 꿈꾸곤 했다.
김수현이 그 그리운 호칭을 입에 담으니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것만 같았다. 우리의 두 번째 생이 아픔만 있었던 건 아니었지 싶다. 비록 그것이 온통 거짓이었다고 할지라도.
“일어났어?”
어느새 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김수현이 차기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손으로 김수현의 앞머리를 시원하게 넘겨서 반듯하게 잘생긴 이마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시원해요.”
“잠 깼으면 얼른 일어나.”
김수현이 세수하러 가겠다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물소리를 들으며 차기주는 드레스룸으로 건너가 김수현의 옷을 골라서 돌아왔다. 상의는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입고 그 위에 베이지색 꽈배기 니트 조끼를 걸치는 조합으로, 하의는 연한 색의 청바지로 준비했다.
그는 씻고 나온 김수현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가방을 준비해뒀다. 김수현은 차기주가 시종처럼 옆에서 수발을 들고 있음에도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누려왔던 권리였기 때문이었다.
베이지색 양말을 신은 김수현이 크로스 가방을 건네받았다.
“나 오늘 수업 5시에 끝나요.”
“데리러 갈게.”
그들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함께 검은 세단에 올라탔다. 아침에 밥을 먹이고 옷 준비를 해주고 등교까지 시켜주는 일상은 연인이라기보다는 보호자의 아침처럼 느껴졌다. 자기를 과보호하는 차기주가 매우 흡족했던 김수현은 차에서 내릴 때, 운전석으로 상체를 숙여 차기주와 키스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고급 자동차에서 김수현이 내리자 주차장을 지나가던 학생들이 쳐다봤다. 더 이상 가이드가 아닌 김수현이 차기주와 함께 있는 걸 의아하게 여기는 눈빛이었다. 그 속에는 알파끼리, 그것도 전 세계에 1%밖에 없다는 잘난 우성 알파끼리 붙어먹는 걸 혐오하는 시선도 있었다.
김수현은 그 모든 시선을 뒤로한 채 당당하게 미술 학관으로 들어갔다. 사물함을 열고 교재를 꺼내는데 문득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윤석이 없어서였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더니만.
천사가 되어 하늘로 돌아간 그가 떠올라 입술을 깨물며 사물함 문을 닫았다. 같은 학과에 딱히 친한 동기가 있는 건 아니어서 앞으로 최유정과 쉬는 시간이 겹치지 않으면 밥을 혼자 먹게 생겼다.
이제라도 친구를 만들어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미 무리가 만들어져서 그 사이에 끼기 힘들 것 같은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뭐 혼자 밥을 먹는다고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니 정 어쩔 수 없으면 앞으로 혼자 밥을 먹기로 했다. 한숨을 내쉬며 교재를 챙겼다. 학생증으로 단말기에 출석 체크를 하고 강의실에 들어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무심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김수현의 옆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았다. 푸른색 후드티를 입은 학생이 김수현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교수님이 말해줬기 때문이었다. 조교가 수업 전에 들어와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출석 체크를 했다.
“이윤석. 이윤석 안 왔어?”
넋을 빼두고 있던 김수현은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었다. 이윤석이 천사라는 걸 모르는 학교에서는 당연히 학생이 무단결석한 걸로 비칠 테다. 그의 정체를 밝히기보다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기로 했다.
“조교님, 앞으로 이윤석 학교 못 나옵니다. 유학 갔어요.”
“아니, 무슨 유학을 학교에 말하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가버리니.”
조교가 투덜거렸다. 원래라면 교수님들과 면담하고 자퇴 신청서에 서명받은 뒤, 그걸 학과 사무실에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다. 강의실에 들어온 교수님께 조교가 이윤석의 이야기를 전하고 자리에 앉았다.
조교는 스크린에 빔프로젝터를 켜 PPT를 띄웠다. 교수가 김수현 쪽을 쳐다보고는 강의를 시작했다.
* * *
다음 강의까지 공강 시간이 한 시간이나 비었다. 간단히 끼니를 때우기 위해 중앙 도서관 건물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렀다.
카운터 테이블에 놓인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끊임없이 샷을 내렸다. 에스프레소 기계 위에 올린 머그잔은 그 열기로 따뜻하게 데워졌다.
케이크와 쿠키, 샌드위치 등을 넣어둔 유리 진열장에 달린 조명은 더욱 디저트가 맛있어 보이게 했다. 김수현은 계산대에 서서 에그 샌드위치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아이스 바닐라 라테랑 티라미수 케이크랑 치즈 머핀도 주세요.”
“선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최유정이 끼어들어서 메뉴를 더했다. 김수현은 그녀 것까지 함께 계산했다. 아르바이트생들이 분주하게 커피를 제조했다. 빠르게 에스프레소를 뽑고 우유를 꺼내는 아르바이트생을 보던 김수현과 최유정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카페 안이 번잡스러워 자리가 빈 곳에 아무렇게나 앉다 보니, 커피 원두와 머그잔, 텀블러를 전시해둔 선반 바로 앞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 자꾸 사람들이 오가서 불편했다. 김수현은 “자리가 별로네요” 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사람들이 진짜 텀블러를 구경하려고 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럼요?”
“그야 널 보러 오는 거지. 이제 에스퍼와 가이드가 사라졌다니까 자기들한테 기회가 올까 싶을 걸. 신데렐라가 되고 싶은 오메가가 우리 학교에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니까.”
신랄한 최유정의 말에 오메가들이 어깨를 움찔거리며 구경 중이던 물건을 놓고 가버렸다. 그녀가 종이 빨대로 바닐라 라테를 쭉 들이켰다. 대학교 내에 있는 카페와 어울리지 않는 초등학생이 한 명 보였지만, 최유정은 대학교를 구경 오는 외부인들이 많아 그러려니 넘어갔다.
“수현아, 윤석이 갑자기 학교 그만둔 거 너한테 고백했다가 까여서 그래?”
“네? 아닌데요.”
“너희 학과에는 그렇게 소문난 것 같더라고. 이윤석이 평소에 널 오죽 좋아했어. 그 정도는 되어야 나를 만하다 이거지.”
최유정의 말에 김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천사라고 말할 수도 없고 이거야 원.
“넌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거 안 좋아하니까 내가 너희 학과 채팅방에 말해둘게. 헛소리 지껄이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누나가 왜 우리 학과 채팅방에 있어요?”
“너희 과대가 자발적 아싸 왕자님 챙겨달라고 나 초대하던데?”
김수현은 눈썹을 손으로 긁적거렸다. 왕자님 노릇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소설에 빙의한 줄 알고 학교 동기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것뿐이었다. 거기다가 PL 그룹 막내라는 신분 때문에 동기들과 선배들뿐만 아니라 교수님들까지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기도 했다.
“뭐, 어쨌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학과 게시판에 신인 작가 공모전 떴더라. 봤어?”
“아니요.”
“C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전속 작가 계약하는 공모전이래. 혹시 계속 그림 쪽으로 진로 나갈 거면 참가해보는 거 어때.”
김수현은 핸드폰으로 학과 홈페이지에 들어가 게시판을 찾았다. C 미술관에서 신인 작가 공모전을 여는데 거기에 뽑히면 전시회도 열어주고 창작 지원금도 받을 수 있었다. 조건은 1년에 최소 두 개의 작품을 완성하는 것. 이 정도면 어렵지 않았다.
꼼꼼하게 공모전 요강을 읽어봤다. 전속 계약을 맺으면 1년에 최대 5천만 원이나 창작 지원금을 줬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신인 작가 양성에 제일 힘을 쏟는 V 아트조차도 1년에 2천만 원을 줄 뿐인데 말이다.
“참고로 나도 C 미술관 공모전에 설치미술 분야로 참가하려고. 우리 같이 당선되어서 전시회 열었으면 좋겠다.”
최유정이 치즈 머핀을 먹으면서 하는 말에 김수현은 감동했다.
“선배, 알려줘서 고마워요.”
“응,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주변에 무심한 성격인 김수현이 혼자였다면 아마 학교에 다니며 강의나 열심히 듣다가 졸업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최유정과 친해진 덕에 이렇게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창작 지원금을 받으면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을 터였다. 김수현은 당장 목표를 공모전으로 정했다.
* * *
국립 박물관 건물은 한산했다. 초중고 학생들이 체험학습을 위해 단체로 몰려올 때 빼고는, 오래된 도자기와 왕관, 머리 장식 같은 것에 흥미를 보이는 건 외국인들뿐이었다.
차기주는 약속 장소인 ‘분청사기·백자실’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국보와 보물 등 조선을 대표하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분청사기는 회흑색 태토 위에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뒤, 유약을 씌워서 구운 조선 초기의 도자기였다. 투박한 생김새를 가진 도자기의 표면에는 무늬 모양을 긁어내 백토나 자토를 넣어 선을 표현했다. 그때 쓰이는 무늬 모양으로는 버드나무, 국화, 모란, 덩굴, 연꽃 등의 식물 모양과 새와 용 같은 동물 모양, 구름과 바람 같은 추상적인 문양 등이 있었다.
반면 백자는 분청사기와 달리 표면이 몹시 매끄럽고 그 생김새가 우아했다. 1,3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구워낸 고급 도자기인데, 특히 달항아리는 제작하기 어려워 몇 점 없었다.
차기주는 유리 진열장 너머 조선시대에 만들었다는 달항아리를 구경하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섰다. 하얀 달처럼 빚어놓은 커다란 항아리가 뭐가 그리 신기하고 대단해서 저리 빤히 쳐다보는지 알 수 없었다.
집에 장식장까지 마련해놓고 찻잔 세트와 그릇을 모으는 사람치고 차기주의 눈은 진짜 보물을 보고도 무심했다. 그는 전형적인 예술을 모르는 이였고, 그가 그릇에 집착하는 건 단순히 그게 ‘사람 취급’을 의미하는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 실험실에서 살았던 어린 실험체들에게는 그릇이라는 게 없었다. 감시자가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양철통을 주고 가면 실험체들은 그것을 손으로 주워 먹고는 했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이 찻잔이라든가 접시와 같은 것에 물과 음식을 담아 먹는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그는 그릇을 사용하지 않았던 자신이 짐승 같고 미개하게 느껴졌다.
차기주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는 용도로 비싼 명품 도자기를 사용하는 것일 뿐 그것에게 매료되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 태어나 마주한 것 중 그가 아름답다고 여긴 건 김수현뿐이었으니까.
“이제 관장님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편한 대로 부르시죠.”
평론가 김인택은 달항아리를 앞에 두고도 감동하지 않는 차기주를 쳐다봤다.
“만일 제가 이사님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직까지 사람들은 차기주를 센터 이사로 인식하고 있었다. 단체를 해체한 것과 별개로 그가 가진 막대한 재산이 권력을 유지해줬다.
“아마 다른 평론가가 그 일을 하게 되겠죠.”
“이사님의 가이드님, 아니 이제는 평범한 신인 화가가 된 그분은 이사님이 뒤에서 이러시는 걸 아십니까.”
“굳이 알 필요가 없을 텐데요.”
김인택은 이게 예술가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차기주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수현이가 그림을 그리면 내가 비싼 가격에 사줄 거고, 그 가치는 이미 매겨진 겁니다. 그걸 예쁘게 포장해 작품의 가치를 높게 말해주는 것뿐인데 왜 그게 우리의 사이를 갈라놓을 것처럼 겁주는 겁니까.”
김인택은 예술가에게는 자신의 작품을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음을 설명했다. 그 과정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힘으로 이뤄내지 않으면 가치 없다는 것 또한. 차기주는 아직도 그게 무슨 문제인지 모르는 듯했다.
“만일 이사님께 고등학생 아들이 있다고 치죠. 이사님이 이러시는 건 공부를 못하는 아들에게 100점을 맞게 해주겠다고 학교 선생님께 뇌물을 줘서 미리 시험지를 구해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아이의 미래가 그렇다고 잘될까요? 아이가 100점짜리 가짜 시험지를 받고도 행복하겠습니까.”
차기주는 왜 이게 나쁜 짓인지 공감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뒤에서 수작을 부리면 김수현이 싫어할 거라는 것만은 알게 되었다. 절대 들키면 안 되는 뒷바라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김인택 평론가께서 솔직하게 평론해주시죠. 그럼 문제없는 거 아닙니까.”
“제 평론을 받고 아예 붓을 놓는 작가들도 있었습니다.”
“수현이가 누군가의 혹평 때문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면 그건 그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면 나는 그가 새롭게 좋아하는 일을 찾을 때까지 도우면 되고요.”
“좋습니다. 그 어떠한 해코지도 없을 거라고 약속해주시죠.”
차기주는 팔짱을 낀 채 달항아리를 전시해둔 유리 진열장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봤다.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은 데에 대한 불만으로 입매가 굳어 있었다.
김수현이 어서 빨리 유명한 화가가 되어 PL 그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건 사실 그의 본심을 숨기고 있는 허울일 뿐이었다.
이건 그가 아버지와 완전히 척지고 돌아갈 곳을 잃게 만들기 위한, 그를 영원히 소유하기 위한 자신의 우아한 덫이었다. 언제 김수현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감이 원동력이 되어 차기주를 움직이게 했다.
“그래요, 약속하겠습니다.”
차기주는 먼저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자신이 말한 것과 다르게 저 병신 같은 평론가 말고 다른 놈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동차에 올라타자마자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번호를 저장해놓지 않았지만, 익히 아는 번호였다. 차기주는 초록색 통화 버튼을 스와이프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연락한 걸 보면 성공한 모양인가 봅니다.”
―네. 저랑 같이 공모전 참가서 작성해서 넣었어요.
“그래요. 수고했습니다, 최유정 씨.”
김수현이 친하게 지내는 조소과 선배 최유정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줬다. 수현이를 공모전에 끌어들이는 것의 대가로 차기주가 내건 조건은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미대생이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유혹이었을 테다. 더군다나 C 미술관 전속 작가가 되어 전시회도 열고 창작 지원금을 받으면 미술계에서 촉망받는 작가 취급을 받게 될 터.
그녀가 원한다면 뉴욕 진출 또한 돕기로 했다. 최유정은 영리하며 현명한 오메가였다. 그녀의 형질이 몹시 거슬리긴 하지만 혹시 김수현과 학교에서 몰래 연애라도 할까 그 또한 감시 중이니 걱정 없었다.
만일 그 둘이 호텔이나 모텔에 들어가면 바로 최유정을 처리해버리면 됐다. 이런 자신조차 용서하고 받아준 김수현이 어리석은 거였다. 그는 김수현이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떠한 짓도 할 수 있는 악인이었다.
김수현에게 보이는 다정함은 오직 연인에게만 보이는 내숭이었다. 차기주는 C 미술관을 목적지로 내비게이션을 설정했다. 지하철 역사에서 나오면 바로 보일 만큼 가까운 곳에 커다란 미술관 건물이 있었다.
그는 센터가 해체되고 직장을 찾느라 힘들다는 김동훈을 고용해 큐레이터 일을 맡겼다. 김 비서는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미술관 일에 적응하느라 힘들어 보였지만,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차기주가 들어선 걸 본 김동훈이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김 큐레이터, 나 이제 이사 아닙니다.”
“입에 이사님이 붙어서 그만. 죄송합니다.”
김동훈이 고개를 꾸벅이고 사과했다. 차기주는 대답하지 않고 관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뒤를 졸졸 쫓는 발걸음은 센터에서 독재자로 군림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차기주는 관장실에 놓인 책상에 앉아 리모컨으로 투명한 유리창을 불투명하게 바꿨다. 문을 닫고 들어온 김동훈은 김수현이 제출한 공모전 서류를 건넸다. 그는 종이를 넘겨보며 포트폴리오를 살폈다.
“김수현 씨, 원서 접수 확인했고요. 1차 예선을 위해 그림을 미술관에 제출하라고 전달했습니다.”
“좋습니다. 다른 참가자들도 그림 제출을 위해 들락거리느라 당분간 분위기가 어수선할 겁니다. 김 큐레이터는 신경 써서 직원들 입단속 시키세요. 내가 관장이라는 소리가 직원들 입에서 나오면 그 누구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이사님.”
김동훈이 깊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차기주는 또 이사라고 부르네, 하며 혀를 찼다. 오랫동안 부른 직급이니 아무래도 버릇이 든 것이다.
“그 입, 조심하세요. 난 센터 이사가 아닌 미술관 관장입니다.”
“넵. 조심하겠습니다.”
김동훈이 혹시라도 김수현과 마주쳤다가 말실수라도 하면 곤란했다. 머리가 좋은 김수현이 차기주의 속내를 꿰뚫지 못할 리 없었다. 아무튼 드디어 김수현을 위한 덫 설치 1단계가 끝났다. 이제 2단계로 돌입할 차례다.
2단계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손쓸 수 없을 만큼 망가트리는 거였다. 김정석이 조만간 GU 그룹 오메가 회장과 이혼할 것 같았다. 결혼식장에서는 마약이라도 했는지 늙고 못생긴 오메가를 눈에서 꿀 떨어지게 바라봐서 이상하다 싶더니만, 환영술사였던 회장에게 속은 거였다.
하늘의 심판으로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늙은 아내를 본 김정석은 기겁하며 집에서 도망쳐 나와 본가로 들어갔다. 김 회장은 죽은 아내의 환영을 보여주는 대가로 GU 그룹 오메가 회장에게 아들을 바친 것이었기에 더 이상 그 결혼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아내 쪽이 이혼하지 않겠다고 해서 재판이혼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 아마 PL 그룹 쪽에서 힘을 써서 둘이 이혼을 하긴 할 것이다. 두 회사의 주가가 일시적으로 하락할 테니, 그때 PL 그룹의 회사 주식을 왕창 매수할 생각이었다.
김 회장은 회사를 빼앗기기 싫으면 차기주에게 굽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김 회장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김수현과 관계가 틀어질까 봐 참고 있었다.
두 번째 생에서 김수현은 술 마신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김 회장을 계속 아버지 취급했었다. 그게 얼마나 답답하고 화났는지 모른다.
거기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그걸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었다. 자신이 매를 맞아도 잘 참으면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해줄 거라고 착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그렇게 맞았을 리 없다.
차기주는 멍으로 얼룩졌던 몸을 떠올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김수현을 온전히 소유하기 위한 덫이긴 하나, 김 회장으로부터 김수현의 독립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김수현에게 안정적인 수입과 명성을 안겨줌으로써 아버지로부터 자립할 힘을 줄 것이다. 그리고 김 회장이 김정석의 이혼으로 손해 입은 회사의 수입을 메우겠다며 김수현을 다른 재벌 집 늙은이에게 팔아치우려고 할 때, 손에 넣은 막대한 주식을 앞세워 나설 생각이었다.
김 회장이 막내아들의 결혼을 추진할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지만, 결혼만큼 즉각적으로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업은 드물었다. 결혼 이외의 방법으로 회사 주가가 오르려면 제품 판매가 급증하거나 신제품을 발표하는 등의 이슈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제품은 개발하는 데에만 몇 년씩 걸리고 제품 판매량도 회장의 마음대로 증가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가장 쉬운 것은 정략결혼을 통해 주주들에게 기대심을 줘서 주가를 올리는 방법이었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자신을 강압적으로 이용하려는 아버지와 다투다가 사이가 틀어지기만을 기다리면 됐다. PL 그룹에서 버림받은 김수현에게는 화가로서 살아가는 길밖에 남겨지지 않는다. 그렇게 차기주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이다.
만일 김수현이 두 번째 생에서 겪은 ‘그 일’을 떠올려 자신에게 헤어지자고 한다면, 차기주는 자신이 스폰서였다는 정체를 드러내고 김수현을 협박할 셈이었다. 그 어떠한 것도 자신에게서 김수현을 빼앗을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김수현 본인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한집에서 부부처럼 지내도 그와 자신은 각인하거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알파 커플이었다. 완벽하게 상대방을 옭아맬 방법이 없는 차기주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저 구렁텅이로 밀쳐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구렁텅이에서조차, 차기주는 김수현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 * *
차기주는 C 미술관을 유명하게 해줄 전시회 준비 때문에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 관장과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그런 다음 그림에 걸린 보험 서류를 살폈다. 그림은 비행기로 한국에 건너온 후 무진동 특수 차량으로 미술관까지 옮겨올 예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반 고흐 미술관에서 요구한 그림의 훼손을 최소한으로 시킬 온도와 조명 밝기를 지킨다고 해도, 오래된 그림이라 언제 어디에서 변형이 올지 몰랐다. 그렇기에 암스테르담에서 떠나기 전 그림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한국에 도착해선 그림과 사진을 대조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반 고흐 미술관이 그림에 훼손이 없다고 판단하면 전시회를 열게 될 것이다. 이때 피치 못할 사고로 천문학적인 액수의 그림에 훼손이 생기면 그 복구 비용 또한 엄청났다. 보험은 이 돌발 상황을 위해 꼭 필요한 안전장치였다.
업무를 끝내고 나니 벌써 6시였다. 김수현이 먼저 집으로 돌아왔을 시간이다. 부랴부랴 서류 가방을 챙기고 주차장으로 빠르게 내려갔다. 마트에서 장을 보려고 계획했는데 그러면 함께 저녁 식사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신호가 걸릴 때마다 초조해하며 차를 몰아 집에 도착한 시각은 7시였다. 김수현은 낮에 에그 샌드위치만 먹은 터라 배가 고파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꺼내 마시고 있었다.
“미안, 늦었어.”
“어디 갔다가 와요? 이제 백수라면서요.”
“……취업했어.”
“어디요?”
“그…… 여러 가지 하는 회사야.”
차기주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피하고자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서류 가방을 두고 양복 재킷을 벗었다. 그가 편한 홈웨어로 갈아입는 걸 김수현이 문틀에 기대서 지켜봤다.
“위험한 일은 아니죠?”
“응. 사무직이야.”
“뭐 그럼 다행이긴 한데. 형도 참 일 중독자네요. 나 같으면 몇 달 쉬고 취업할 텐데.”
김수현은 급하게 취업한 차기주를 걱정하며 스위스 은행에 넣어준 그림을 팔아야 하나 속으로 생각했다. 그 그림을 사느라 전 재산을 탕진한 게 분명했다. 혹시 빚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
실감도 나지 않는 그림 가격을 생각하면 그 의심은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차기주가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건 상상되지 않았지만, 혹여 그가 숨긴 문제가 있을까 싶어 김수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어디서 돈 빌렸어요? 빚 있으면 말해요. 우리 집 부자예요.”
차기주는 뜬금없이 빚 타령을 하는 김수현이 웃기기만 했다.
“빚 있으면 어쩔 건데.”
“정말 있어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말레비치 그림 당장 옥션에 내놓아요. 이번 주에 스위스 다녀와서 옥션 들르고, 빚 갚은 다음에 혹시 모자라면 은행에 대출 알아보고…….”
김수현이 손가락을 꼽아가며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차기주는 그게 너무 웃겼다.
“김수현, 수현아. 걱정하지 마. 나 빚 없으니까. 오히려 제법 돈 많은 부류에 속해.”
검은 티셔츠를 입은 차기주는 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김수현을 끌어안았다. 작약꽃 향기가 아련하게 코끝을 맴돌았다.
“사실 네 애인이 SS급 에스퍼라 전직 세계 정복자였거든. 그래서 세계 정상들을 괴수들로부터 보호해주는 조건으로 받은 검은돈을 엄청나게 모아뒀어.”
“……농담이죠?”
“응, 농담이야.”
진담이었다. 그렇지만 차기주는 겁먹은 김수현의 콧등에 살짝 입을 맞추며 과거의 일을 부정했다. 김수현이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고용한 테디는 그 능력이 A등급밖에 되지 않아서 범죄자가 된 것이고, 차기주는 SS급이어서 세계적인 영웅이 된 것뿐이었다.
그들의 차이는 그것밖에 없었다. 물론 그는 양지의 사람으로 남아 있는 대가로 가이딩을 못 받는 체질 때문에 자신의 등급을 한 단계 낮추고 덜 위험한 척해야 했고, 대통령에게는 버튼 없는 핵폭탄 취급 받아야 했으며,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야 했지만 말이다.
“배고프지. 미안. 마트 들른다는 걸 깜빡했어. 일단 배달시켜 먹고 같이 마트에 장 보러 가자.”
“그래요, 뭐 먹을래요?”
“파스타 먹을까.”
“왜요? 먹다가 키스하게? 그냥 지금 하지.”
“요망하긴.”
그들에게 파스타란 같은 면발을 물어 기스를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음식이었다. 김수현은 까치발을 하고 차기주의 목에 팔을 걸었다. 가볍게 닿은 입술에서 맥주 냄새가 나서 차기주가 빈속에 술 먹으면 못 쓴다는 잔소리를 했다.
“배고픈 걸 어떡해요. 어쩜 집에 라면도 없어요. 그건 진짜 너무하다.”
“앞으로는 너랑 살 거니까 냉장고도 꽉 채워놓고 팬트리에 라면도 가져다 놓을 거야.”
김수현이 차기주의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내가 같이 살길 정말 잘했네. 그동안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산 사람을 내가 구해준 거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해요.”
“응. 고마워, 수현아.”
차기주는 김수현의 어깨를 감싼 채 거실로 나왔다. 김수현이 패브릭 소파에 묻은 하얀 얼룩들은 어떻게 없앴냐고 물었다.
“소파 커버는 벗겨서 세탁하고 소파는 전용 세제를 뿌리고 습식 청소기로 빨아들였어. 어때? 깨끗하지?”
“습식 청소기요? 그건 또 뭐예요?”
김수현에게 청소기는 브러시가 돌아가며 먼지를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차기주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김수현으로 인해 들떠서 습식 청소기를 가져왔다. 공기청정기만큼 덩치가 큰 본체에 긴 주름이 잡힌 호스가 있었다.
물통에 물을 넣고 브러시로 빨아들이면, 브러시에서 물을 뿌리고 강하게 흡입해 오염 물질을 제거했다. 단점이라면 사용 후에 어느 정도 축축함이 남아 선풍기로 말려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 이런 거 처음 봐요. 형, 청소하는 거 진짜 좋아하나 봐요.”
“내가?”
차기주는 자신이 청소를 좋아하는 줄 몰랐다. 단지 저택에 아무도 들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스스로 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수현은 차기주가 청소를 좋아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네. 보통 사람들은 소파를 청소한다는 생각을 안 하고 산다고요. 이런 전문적인 청소기까지 구매해 청소하는 거면 진심이라고 봐야죠.”
갇혀 있던 철창 안은 언제나 더러웠다. 화장실은 칸막이 없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는데 그냥 땅에 구덩이를 파놓은 게 다였다. 거기에 열댓 명이나 되는 실험체들이 오줌과 똥을 싸대니 구더기와 파리가 끼었다.
감시자들이 식사로 음식물 쓰레기를 던지고 가면 남은 찌꺼기들이 썩은 내를 풍기고는 했다. 땟국이 줄줄 흐르는 그들은 가축보다 못한 신세로 지냈다. 차기주는 그곳의 더러움과 끔찍한 악취가 정말 싫었다.
‘그렇구나. 난 청소하는 걸 좋아해.’
김수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가 가진 무딘 감정으로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제 차기주의 좁은 세상에는 좋아하는 게 두 개나 생겼다. 첫 번째 김수현, 두 번째 청소다. 모두 김수현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