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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심판(2) (13/17)

하늘의 심판(2)

징벌방에서 벗어난 김수현은 문정인이 모는 픽업트럭을 타고 태백산에서 내려갔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 때문에 창문이 몇 번인지 모를 만큼 나뭇가지에 두들겨 맞았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지나는 바퀴가 충격을 온전히 흡수하지 못해 몸이 통통 튀어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으면 자동차 천장에 머리를 박았을 것이다. 헬기가 편한데, 하고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

도마뱀이 쏜살같이 나무 기둥을 기어올랐다. 뿔이 달린 수사슴은 숨어 있던 덤불을 파헤치며 달아났다. 새들이 까악까악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스스스. 바람에 나뭇잎만 나부낀다. 갑자기 동물들이 천적을 만난 것처럼 도망친다.

혹시 태백산에 게이트가 발생한 것일까. 안절벨트를 풀고 혹시 모를 상황이 오면 차를 버리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나무 위에 사람의 형체가 비쳤다.

“차 멈춰요.”

“예? 왜 그러세요?”

“당장 차 멈추라고, 문정인!”

단호한 김수현의 으름장에 문정인은 팀장님께 혼난 것처럼 겁을 먹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픽업트럭이 멈추자마자 김수현은 차 문을 열고 뛰어나와 수사슴이 숨어 있던 덤불로 들어갔다.

나무 위에서 김수현을 지켜보던 에스퍼들이 아래로 내려섰다. 손에 들고 있던 그물을 덤불 위에 던졌다. 그러나 김수현은 덤불을 빠져나와 돌멩이를 주워 들었다. 에스퍼들을 속이기 위해 돌멩이를 엉뚱한 장소에 던지고 반대쪽으로 달렸다.

모든 에스퍼가 차기주처럼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잔가지에 얼굴을 긁혀가며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후욱, 후욱. 거칠게 숨을 쉬며 사방을 주시했다.

이 개새끼가 시간을 가지자고 했는데 말을 콧구멍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청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이윤석에게 전화했다.

“윤석아, 나 좀 구하러 와줘.”

김수현은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핸드폰을 아무 데나 던졌다.

―지이잉잉. 지잉잉잉.

핸드폰에서 들리는 진동음이 목덜미를 잡아챌 듯 가깝게 들렸다. 금방이라도 추격대가 자신을 찾아낼 것만 같은 공포에 식은땀이 흘렀다.

핸드폰 진동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까지 덤불에 파고들어가 낮은 포복 자세를 유지하며 기었다. 혹시라도 공포로 인해 페로몬이 새어 나오지 않게 조심했다. 덤불이 작게 움직이는 걸 감지한 에스퍼들이 몰려왔다.

허리에 차고 있던 삼단봉을 빼 든 그들이 덤불을 푹푹 찔러댔다. 김수현의 얼굴 바로 옆에 삼단봉 끝이 파고들었다가 빠져나갔다. 가만히 숨을 고르며 인기척을 숨겼다. 그런데도 에스퍼들은 의심을 풀지 않고 덤불을 손으로 뒤적거렸다.

남방 주머니에 있던 다람쥐가 절망에 빠진 김수현의 얼굴에 주둥이를 문지르더니 덤불을 벗어났다. 그러곤 에스퍼의 군화를 일부러 건드려 주의를 끌었다. 자신이 덤불을 움직인 주범이라 밝히듯 말이다.

메시아에 의해 원죄가 사해진 다람쥐의 지능은 평범한 동물의 수준이 아니었다. 다람쥐는 그동안 자신을 사랑해줬던 김수현을 위해 힘껏 바짓단을 타고 기어올라 에스퍼의 코를 앞니로 깨물었다.

“아, 씨발. 이 쥐새끼는 뭐야.”

에스퍼가 다람쥐를 손으로 떼어내 바닥에 던졌다. 다람쥐는 바들바들 짧은 팔다리를 떨다가 죽은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잘못 본 것 같은데요. 저쪽으로 가보시죠.”

“오늘 안에 햄스터 못 찾으면 다들 좆 되는 거야. 정신 바짝 차리고 산을 이 잡듯 뒤져.”

에스퍼들은 다른 수색대에 무전기로 못 찾았다는 말을 전달했다. 김수현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가 낙엽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덤불에서 일어났다. 다람쥐가 얼른 일어나 김수현에게 달려왔다.

그는 다람쥐를 손바닥에 올리고 입을 맞췄다.

“고마워, 다람쥐야.”

다람쥐는 행복했다. 나쁜 놈 빼고 우리만 같이 살았으면 싶었다. 열심히 메시아 님께 자신들을 구하러 오라고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런데 떠난 줄 알았던 에스퍼들이 나무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함정을 파놓고 김수현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그들은 마치 짐승을 사냥하듯 손에 들고 있던 그물을 김수현에게 던졌다.

“얌전히 계시면 다치지 않습니다, 김수현 가이드.”

김수현은 이대로 끝났구나 싶어 눈물을 흘렸다. 차기주가 자신의 의견을 존중해준 줄 알았다. 이대로 시간을 가져서 그가 가이딩 중독을 치료하고 자신이 그의 사랑을 확인하기만 하면, 우린 계속 연인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척해놓고 에스퍼를 풀어서 잡아 오게 했다. 더 이상의 교섭은 없었다. 이젠 전쟁이었다.

김수현은 손으로 낙엽을 움켜잡으며 눈을 부릅뜨고 에스퍼들을 노려봤다. 그물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눈이 에스퍼들의 마음 한편을 섬뜩하게 했다. 고작 가이드인데 왜 이런 기분이 드나 싶어 그들은 애써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그물을 걷어 올리며 김수현을 꺼내려는데 주먹이 코를 짓뭉갰다. 에스퍼들은 김수현을 상처 없이 잡아 가야 했다. 그들은 그를 제압하기 위해 능력을 끌어올렸다가 당황했다. 그 어떠한 파동 에너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아무 능력도 없는 일반인이 된 것이다.

김수현은 패닉에 빠진 에스퍼의 다리에 발을 걸어 넘어트리고 삼단봉을 빼앗았다. 자기네 능력만 믿고 신체 훈련을 게을리하는 건 몇 번을 회귀하든 똑같았다.

1회차에 그들의 팀장으로서 수없이 그들과 대결했던 김수현은 이미 상대의 약점을 꿰뚫고 있었다. 저놈은 무릎 근육이 약하고, 이놈은 주먹을 휘두를 때 빈틈이 많았다. 김수현은 에스퍼의 무릎 뒤를 걷어차서 넘어트리고, 큰 몸을 우둔하게 움직일 때 옆구리를 가격했다.

어차피 무효화 능력을 거둬들이면 뼈가 부러진 것쯤은 순식간에 회복할 놈들이라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문정인은 뒤늦게 김수현을 쫓아왔다가 입을 떡 벌렸다. 추풍낙엽처럼 에스퍼들을 쓰러트린 김수현이 예전에 만났던 그 김수현이 맞나 싶었다.

“가요, 이제.”

다람쥐는 김수현의 어깨 위에서 제가 에스퍼들을 다 무찔러놓은 것처럼 풍성한 꼬리를 탱탱 흔들며 앞발을 권투 경기를 하듯 휘둘렀다. 픽업트럭으로 돌아간 그들은 대화 없이 산에서 내려갔다. 문정인은 운전을 하는 내내 룸미러로 조수석에 앉은 김수현을 힐끔거렸다.

“뭡니까.”

“팀장님, 엇 아닌데. 이 주둥이가 왜 이러지?”

문정인은 저도 모르게 김수현을 팀장님이라고 불렀다가 손바닥으로 입을 때렸다. 김수현은 피식 웃었다.

그들이 탄 픽업트럭은 괴수의 검은 혓바닥처럼 길게 늘어진 고속도로 위에 무사히 안착했다. 평평한 도로에서 바퀴는 안정적으로 굴렀다. 다람쥐는 창밖을 내다보며 메시아 님을 오매불망 기다렸다.

‘메시아 님, 저희 여기 있어요.’

붉은 스포츠카가 픽업트럭의 맞은편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왔다. 빠아아앙앙. 클랙슨을 길게 누르는 굉음이 고막을 찔렀다. 스포츠카는 상대 운전자의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헤드라이트를 정면으로 쏴댔다.

문정인도 받은 대로 되갚아주기 위해 클랙슨을 주먹으로 때렸다.

“야, 이 새끼야, 운전 똑바로 해.”

붉은 스포츠카가 픽업트럭을 지나는 듯싶더니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고 회전했다. 스키드마크가 부메랑 모양으로 도로 위에 새겨졌다. 자동차 바퀴의 고무가 타면서 나는 연기를 몰며 붉은 스포츠카가 돌아와 픽업트럭 앞을 가로막았다.

문정인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서 주행을 멈췄다. 천사의 날개처럼 스포츠카의 차 문이 위로 올라가며 운전석에 앉아 있던 운전자가 내렸다.

평범한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그가 조수석 창문에 노크했다.

“수현아, 데리러 왔어.”

다람쥐는 신나서 덩실덩실 춤을 췄다.

‘메시아 님! 메시아 님!’

작은 짐승의 환영을 받으며 이윤석은 내려간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먼지 구덩이에서 구른 몰골의 김수현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머리카락에 붙은 낙엽을 세심한 손길로 떼어줬다. 구해달라는 소리를 하자마자 어디에 있는지 말하지도 않았는데 센터가 있는 태백산 쪽으로 달려왔다.

김아영에게 들은 대로 자신의 친구는 메시아였다. 수현은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 눈을 내리깔았다. 창문에서 몸을 물린 이윤석이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김수현은 시중받는 도련님처럼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수현 씨, 어디 가세요?”

“문정인 씨, 차기주한테 프락치 제안받으셨죠.”

“아, 아, 아닌데요.”

“내가 아는 차기주는 그런 놈인데 문정인 씨가 아니라고 해봤자 내가 믿겠습니까.”

오늘 문정인은 조폭처럼 강직한 생김새와 달리 허술하고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다. 아마 김수현이 보이는 놀라운 대처 능력 때문에 당황한 것도 있겠지만, 저번과 달리 숨기는 게 있어서이리라.

첫 번째 생에서도 문정인은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이었다.

“차기주한테 가서 전하세요. 다시 나랑 만날 땐 한 대 맞을 각오 하라고.”

김수현은 급하게 운전석에서 내려 따라오려는 문정인에게 무효화 능력을 걸은 다음, 명치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커헉. 헉. 커억.”

제대로 급소를 맞은 문정인이 허리를 격하게 굽히고 토악질을 해댔다. 김수현은 후련한 얼굴로 이윤석이 몰고 온 빨간 스포츠카 조수석에 앉았다. 이윤석은 좁은 공간에 김수현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야한 거 하고 싶다.’

악마는 혀로 입술을 날름거리며 김수현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바른 립글로스를 먹어치웠다. 다람쥐는 김수현의 목에 뺨을 비비며 애정을 표했다.

“뭐 해. 빨리 가. 에스퍼들 쫓아오겠다.”

“으응.”

이윤석은 찌질하게 말을 더듬은 걸 속으로 후회하며 액셀을 밟았다. 최고 속력 325km/h에 달하는 스포츠카는 납작한 몸체를 고속도로에 붙이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리 차가 빠르게 달려도 과도한 아드레날린 분비로 인해 이윤석 본인은 전혀 체감할 수 없었다. 김수현은 이러다가 사고가 날까 봐 자동차 계기판으로 속도를 확인했다.

“이윤석. 속도 좀 줄여. 이러다가 교통사고 나겠어.”

이윤석은 천천히 자동차 속도를 늦추며 시속 180을 유지했다. 이것도 빠른 속도였지만 도망 중인 걸 고려하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갈비뼈가 뻐근해지도록 숨을 들썩였다.

자신의 사랑은 숭고하다. 그러니 김수현의 목숨을 구해줬다고 무턱대고 벗겨 먹지 않을 거다. 자신은 차기주와 달리 김수현의 몸만 노리는 게 아니라 사랑받고 싶은 것이니까.

이윤석은 바지 아래로 불룩하게 좆을 세우고 입술을 잘근거리며 씹었다. 혹시나 김수현이 자신의 상태를 눈치채 바지 지퍼를 내리고 좆을 빨아주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핸드폰 좀 빌리자.”

조수석에 앉은 김수현이 이윤석에게 바짝 다가왔다. 이윤석의 목젖이 꿀렁거리며 침을 삼켰다.

“안녕하세요, 파트장님. 저 김수현입니다. 소식 이미 들으셨을 테지만 저 지금 당장 해외로 나가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그럼 공항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정중하게 통화를 끝낸 김수현은 운전 중인 이윤석의 바지 주머니에 핸드폰을 도로 넣어줬다. 두툼하게 부푼 좆이 혐오스러웠지만 모르는 척 덤덤하게 조수석에 앉아 창밖만 내다봤다.

동물 호텔에 들러 다람쥐의 장기 숙박을 맡긴 김수현이 공항 입구로 들어가려는데 늦은 밤에 선글라스를 낀 수상한 남자가 있었다. 벌써 센터에서 자신을 찾으러 에스퍼가 온 건가 싶어 주춤거리며 출입문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남자가 쓰레기통에 종이 가방을 통째로 버리고 가버렸다. 김수현은 빠르게 쓰레기통으로 뛰어가 종이 가방을 꺼냈다.

가짜 여권과 10달러짜리 지폐가 여러 장 들어 있는 갈색 가죽 지갑, 비행기표 두 장이 나왔다. 아마 원래대로라면 이 비행기표는 문정인의 것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가짜 여권이 그의 것인 걸 보면 말이다.

그 밖에도 갈아입을 옷이 있어서 얼른 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흙과 낙엽에 더럽혀진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깔끔한 검은 티와 청바지를 입고 화장실 칸막이에서 나오는데 세면대 위에 부착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김수현은 빠르게 세수하고 젖은 손으로 머리칼을 정리했다. 이런 몰골로 공항에 오는 내내 이윤석을 경계하며 도도하게 굴었다니. 우습다.

이윤석이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와 괜히 손을 씻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윤석아, 나 이제 해외로 나갈 생각이야.”

“어어, 그렇구나. 나도 마침 해외여행 갈 생각이었는데. 같이 갈래?”

“나 차기주 가이드인 거 학교에 소문나서 알고 있지?”

“으응.”

이윤석이 고개를 푹 숙이고 손톱끼리 부딪쳐 손톱을 짧게 뜯어냈다. 발그레하게 뺨이 물들어서 왜 저러나 싶었다.

“수현아, 사실 나 A급 에스퍼로 각성했어. 네 에스퍼한테서 도망치는 거지? 내가 도와줄게.”

자기 정체가 들킨 줄도 모르고 이윤석은 뻔뻔한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왜 부끄러워했는지 알 것만 같아 기가 찼다. 자기랑 같이 다니다 보면 자신이 평범한 가이드들처럼 섹스로 가이딩이라도 해줄 줄 아나 보다.

생각해보면 이윤석의 모든 것이 가짜였다. 그가 자신을 잘 알고 있다며 피자 가게에서 소름 돋는 말을 한 것도 어쩌면 그때부터 선배라는 사기를 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자신이 피하자 작가라며 소설을 써서 보여준 것이겠지.

그래서 이윤석의 모습으로는 선배 노릇을 할 수 없으니, 메시아일 때 선배라며 노트를 보여준 것일 테다. 그렇게 얻은 사랑이 진짜일 리 없는데도.

세뇌를 걸어서 자신의 기억을 조작했던 차기주도, 타인의 인생을 훔쳐서 사랑받으려고 했던 메시아도 똑같다. 김수현은 짙은 혐오를 숨기기 위해 손바닥에 찬물을 받아 한 번 더 세수했다.

“물론 차기주 같은 엄청난 에스퍼한테 A급 에스퍼는 별거 아니겠지만, 나한테 아주 특별한 무기가 있거든. 혹시 롱기누스의 창이라고 알아? 성경에 나오는 신을 죽인 창.”

이렇게 대놓고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할 줄이야. 그러나 그에게서 롱기누스의 창을 빼앗는 게 김수현의 목적이므로 김수현은 물기에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매끈한 뺨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턱에 대롱대롱 맺혔다.

손등으로 물을 쓱 닦아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설마 그걸로 차기주 이사를 죽이게?”

“아니, 그건 아니고. 내가 왜 살인하겠어. 그냥 널 지켜줄 수 있다고.”

이윤석은 두 손을 내저으며 당황했다. 누가 보면 이 모습이 진짜인 줄 알 거다.

“무기는 어디 있어? 지금 가지고 있어?”

“아니, 믿을 만한 사람한테 맡겨뒀어.”

씨발. 하마터면 욕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잠을 잘 때든, 술을 처먹이고 정신을 잃게 하든 이윤석의 빈틈을 노려서 롱기누스의 창을 빼앗으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아랫입술을 빨았다가 놓았다. 붉은 입술이 더욱 통통해졌다.

“그래. 그런데 날 따라다니면 너도 위험해질 수 있어.”

“걱정하지 마. 나 위험한 거 좋아해.”

말을 참 생각 없이 한다. 위험한 게 좋다니? 김수현의 눈썹이 들어 올려진 걸 본 이윤석은 얼른 말을 바꿨다.

“그게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을 지키는 거니까. 무섭고 두려워도 괜찮은 거야.”

부끄러워하며 티셔츠 밑단을 잡아당기는 이윤석은 정말 사랑에 빠진 스무 살처럼 풋풋해 보였다. 그가 목덜미를 손으로 문지르며 배시시 웃었다.

“이런 곳에서 고백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 사랑 좀 슬프다.”

김수현은 이윤석에게 조금의 애정도 없었지만,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자신에게 온통 거짓만 늘어놓은 메시아인데 그 거짓 속에서도 진심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 모든 거짓말에는 자신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깔려 있었다.

김수현은 순수할 정도로 맹목적인 그의 애정이 요령 없게 느껴졌다. 그동안 이윤석이 저지른 잘못들이 조금 이해되기도 했다.

‘어쩌면 너에게는 내가 첫사랑인지도 모르겠다.’

김수현은 이윤석에게 동정심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한결 누그러진 기세로 “따라와” 하고 말했고 이윤석은 신나서 그 뒤를 졸졸 쫓았다.

“여권은 있어?”

“으으응, 아마도?”

이윤석이 석연치 않게 대답했다.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아마도는 뭐야.”

“있어! 나 여권 있어!”

이윤석은 혹시라도 자신을 버리고 갈까 봐 여권이 있다고 거짓말했다. 어차피 여권 검사를 할 때 세뇌 능력을 사용하면 됐다.

“좋아. 그럼 이 비행기표는 네가 가져.”

* * *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에 거의 맨몸으로 도착한 김수현은 막막했다. 인천 공항에서 댈러스까지 12시간 동안 비행기 날개만 쳐다보며 왔다. 계속 앉아 있어 관절이 뻣뻣하게 굳고 허리가 아픈데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혼자 힘으로 도망쳐야 했다.

에스퍼들이 한국에서 따라오는 건 금방일 것이다. 센터 소유의 전세기가 있다는 걸 아는지라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일단 사냥개 수준으로 끈질긴 에스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조력자들이 필요했다.

뉴스에서 봤던 A급 에스퍼로만 이뤄진 해결사 테디 일당에게 의뢰를 맡길 생각이었다. 그들이 범죄자라는 걸 알지만 제정신 박힌 에스퍼라면 차기주에게서 도망친 자신을 보호해줄 리 없었으니까.

그가 국제 사회에서 얼마나 영향력 있는지는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도 없이 T 잡지에서 매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뽑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각 나라에 있는 센터에 도움을 청하면 에스퍼들이 자신을 잡겠다며 개처럼 달려들 게 분명했다.

누나에게 B군을 통해 테디의 이메일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해뒀으니 지금쯤이면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전화해서 알아봐야겠다.

“핸드폰 좀 줘봐.”

이윤석의 핸드폰으로 김 회장 집에서 일하는 조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구십니까.

“조 실장님, 저 수현인데요. 혹시 누가 집에 있나요? 전화 좀 바꿔주세요.”

―도련님, 회장님께서 화나셨습니다. 센터에서 도망치셨다면서요. 지금 에스퍼들이 저택에 찾아와 감시 중입니다.

조 실장이 옆에 누가 있는지 소곤거리며 말했다. 그러다가 누군가 수화기 너머에서 핸드폰을 빼앗아갔는지 조 실장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김수현.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저음의 목소리가 동굴에서 울려 퍼지듯 귓가에 닿아 간지러웠다. 동시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차기주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그의 목소리가 너무 섹시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함께 보냈던 지난 밤이 떠올랐다.

어쩜 이런 순간까지도 자신은 이 알파에게 이렇게 미쳐 있는 걸까. 무거운 캐리어를 끈 공항 안의 인파가 빠르게 지나가는 모습이 잔상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정작 지금 이곳에 없는 차기주만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나 눈앞에 서 있었다.

190cm를 훌쩍 넘는 키를 가진 그는 섬섬옥수 같은 손을 가지고 있는 것과 별개로 뼈대가 굵었다. 남보다 반 뼘 큰 어깨 때문에 검은 양복 재킷이 꽉 낀 모습은 답답해 보이기는커녕 신체 자체가 무기인 것처럼 위험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가 즐겨 입는 원 버튼 재킷은 클래식했고,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와 팔뚝 선을 돋보이게 했다. 간결한 선으로만 이뤄진 양복을 입은 모습은 언제나 완벽해 보였다. 첫 번째 생에서 출근을 하기 전, 자신이 그의 노치드 라펠 스타일의 양복 재킷 깃을 정돈해주며 목에 넥타이를 매줬던 아침이 떠오른다.

얼마나 그에게 시선을 줬는지 차기주는 전투복만 입는 자신이 자기 양복을 부러워하는 거라 착각해 그날 점심시간에 양복 세트를 훈련실로 보내줬었다.

혹시 그도 자신처럼 우리가 첫 번째 생에서 했던 사랑을 기억하고 있을까.

“혹시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영화 『로마의 휴일』 결말 알아요?”

첫 번째 생에서 차기주가 그 영화를 본 적 없다고 해서 함께 봤었다.

―아니.

“그거 기억해내면 돌아갈게요. 영화를 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거나 인터넷으로 내용을 알아내는 게 아니라 그 내용을 기억해내야 돌아갈 거라고요.”

자신은 그때 먹은 스파게티의 맛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데 차기주는 모른단다. 김수현은 통화를 끊어버리고 이윤석에게 물었다.

“미안한데 핸드폰 유심칩 좀 바꿔도 될까?”

“설마 차기주한테 전화한 거야?”

“아니, 우리 집에서 일하는 실장님한테 했는데 차기주가 받네.”

“어쨌든 이 폰은 이제 추적당할 거야. 버려야 해.”

이윤석이 제 손으로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김수현은 몇십 달러밖에 없는 상황에서 핸드폰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쓰레기통에 버린 핸드폰을 주워 분해해 유심칩을 빼냈다.

공항 서비스 센터에 들러 직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직원은 친절하게 모바일 유심칩을 구매하는 법을 안내해줬다. 김수현은 안내에 따라 통신사와 전화번호를 바꿔서 휴대폰을 새로 개통했다.

별거 아닌 일에도 자신을 우러러보는 듯한 이윤석의 시선에 민망해져 괜히 코끝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누나한테 전화해 테디에게 의뢰할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치밀하게 세운 계획은 아니었어도 그가 쫓아오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도망치느라 버거웠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자신이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 했다.

“움직이자. 여기 계속 있는 건 위험해.”

김수현은 이윤석을 데리고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을 벗어났다. 공항 앞에 대기 중인 택시를 타자마자 지친 몸을 자동차 시트에 뭉갰다.

“저렴한 모텔로 가주세요.”

“예산이 얼마인데 무턱대고 싼 곳을 찾아.”

“하루 10달러요.”

“그 예산으로 지낼 만한 곳은 식스 댈러스 정도밖에 없어. 잘 생각해봐. 정말 거기 데려다줘?”

김수현은 난생처음 가본 속초 모텔을 떠올렸다. 말라비틀어진 비누와 화장실 타일마다 피어 있는 곰팡이, 더러운 먼지가 코팅처럼 눌어붙은 테이블까지 모든 게 최악이었다. 그렇지만 돈이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이윤석에게 물었다.

“이윤석, 너 얼마 있냐.”

어두운 골목으로 순진한 학생을 끌어들여 돈을 빼앗는 불량 청소년 같은 대사였다. 이윤석이 지갑을 꺼내 뒤적거렸다. 현찰은 없고 신용카드만 있었다.

“네 신용카드로 호텔비 좀 긁자. 나중에 한국 돌아가면 갚을게.”

“응. 그런데, 수현아. 우리 도망 중인데 신용카드 쓰면 바로 걸리지 않을까?”

“네 카드를 차기주가 어떻게 알아.”

김수현은 돈을 빌려주기 싫어서 그러나 한쪽 입꼬리를 약간 샐그러지게 움직였다. 이윤석은 곤란하다는 듯 경직된 얼굴로 어설프게 웃었다. 핸드폰을 추적해낸 차기주는 메시아가 이윤석이라는 걸 알 터였다.

자기가 해놓은 거짓말 때문에 김수현한테 진실을 말하면 설정이 꼬여 입만 뻐금거렸다. 이윤석인 모습으로는 작가라고 해놓고 메시아일 때는 선배라고 했다. 그러니 둘을 동일 인물이라고 하면 그동안 한 사기가 죄다 들킬 게 뻔했다.

“네 에스퍼가 질투가 엄청 많은지 내 핸드폰을 해킹해서 우리 집까지 찾아온 적 있었거든.”

김수현은 이윤석의 새로운 거짓말을 들으며 저 멍청이가 차기주한테 덜미를 잡혔었구나 속으로 혀를 찼다.

“어떻게 할 거야? 식스 댈러스 가, 말아?”

“잠시만요.”

김수현은 얼른 핸드폰으로 택시 기사가 말한 댈러스에 있는 모텔을 검색했다. 호텔 사이트에서 별 5점 만점에 1점을 받고 있었다. 리뷰를 보니까 식사를 제공하지 않고 침대에서는 머리카락과 콘돔이 발견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화장실에는 비누와 샴푸조차 없다고 했다. 당연히 수건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옆방에서 말하는 사람의 대화 소리가 다 들려서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는 리뷰도 보였다.

그런 내용을 보고도 싸구려 모텔을 찾을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속초 모텔보다 더 후진 모텔을 가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이번 생의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도련님이었다.

“비즈니스호텔로 가주세요.”

택시가 차도에서 방향을 바꿨다. 붉은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댈러스 마켓 센터가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갔다. 택시 기사가 데려다준 비즈니스호텔은 외관이 멀끔했다. 돈 걱정을 하기에 앞서 편하고 깨끗한 곳에서 쉴 수 있겠다 싶어 안심되었다.

택시에서 내려 호텔 프런트로 걸어갔다. 직원에게 가장 저렴한 방에 머물고 싶다고 말했으나 하루 숙박료가 20달러가 넘었다.

“투 베드룸으로 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싱글룸을 두 개 잡고 싶었지만 그러면 가진 돈이 금방 거덜 날 게 분명했다. 호텔 키를 넘겨받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방문을 열자마자 침대에 뛰어 들어가 푹신한 매트리스에 엎어졌다.

빳빳하게 펴진 하얀 이불에서 청결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고된 전투 훈련을 받은 기억이 있는데도 그림만 그리며 곱게 지낸 몸은 생각만큼 따라주지를 않았다.

“나 잠깐 마켓에 들러서 옷 좀 사 올게.”

“카드 쓰면 안 되잖아. 돈 가져가.”

지갑을 뒤져서 이윤석에게 100달러를 줬다. 황지윤이 해외 도피를 도와준 건 고마운데 경비를 너무 적게 준 것 같다. 김수현은 벌써 얄팍해진 지갑을 닫았다.

김수현은 호텔 방문이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눈두덩에 팔을 올리고 한숨 돌렸다. 그러고 보니 테디에게 의뢰를 맡기려면 또 돈이 문제였다.

누나한테 돈을 부쳐달라고 할 수 없으니 어쩌나 생각해보다가 오래전 차기주에게 받은 스위스 계좌를 떠올렸다. 자기 가이드가 되어주면 1조 원을 주겠다고 했었지.

농담인가 싶었는데 자신이 에스퍼라는 걸 알고도 페어 계약을 하자 진짜 스위스 계좌를 만들어서 비밀번호와 함께 알려줘 놀랐었다.

“그래, 그 돈으로 테디를 고용하고 이참에 섬 하나 사서 몇 달 지내다 오는 거야.”

그때쯤이면 차기주의 가이딩 중독도 사라져서 자신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 알아볼 수 있을 터다. 돈 나올 구멍이 생기자 긴장이 풀리며 잠이 몰려왔다.

자신이 잠든 줄도 몰랐던 수현은 배가 고파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침대 밑에서 자는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이윤석과 눈이 마주쳐 식겁하며 상체를 들었다.

“너 뭐야. 왜 거기 있어?”

“그냥 너 자는 모습 보고 있었어.”

김수현은 이쯤 되면 왜 이윤석이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만남은 전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을 만나기 위해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관심도 재능도 없는 한국대 서양 미술학과에 들어왔다.

“넌 내가 왜 좋아?”

그런 질문을 받을 줄 몰랐는지 이윤석의 눈이 커졌다가 금세 웃음과 함께 가늘어졌다.

“그냥 처음 본 순간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였어.”

“……이런 외모가 흔한 건 아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

“너도 아는구나, 너 잘생긴 거.”

“모르는 게 이상하지.”

김수현은 부끄러워서 괜히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뒤엎었다. 이윤석은 말없이 이탈리아 클래식 슈트를 입고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던 두 번째 생에서의 김수현을 떠올렸다. 첫 번째 메시아가 시간을 되돌린 탓에 신께서 자신더러 인류를 벌주고 오라며 이 세상에 내려보냈었지.

“이 자리를 찾아주신 모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김정석 전 전무이사를 대신해 PL 그룹을 잘 이끌어가는 전무가 되겠습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슬픈 눈동자를 가진 그를 보면서 처음으로 가슴이 뛰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왜 자신이 그 순간의 김수현에게 사로잡혔는지 알 것 같다.

인간의 감정이 미숙한 이윤석은 꾸준히 책을 통해 학습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쇼펜하우어가 쓴 책을 읽은 기억이 났다. 그는 그의 책, 『비극의 탄생』을 통해 ‘비극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 비극은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동인(motive)을 제공한다’라고 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감정을 모르는 천사라 할지라도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등장하는 햄릿처럼 처절했던 김수현을 보고 마음이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너를 통해 감정이라는 걸 처음 배웠으니까 네가 나에게 특별한 건 당연해.”

이윤석이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김수현에 대한 이윤석의 마음이 한층 깊어졌다.

“차기주는 너에게 가이딩만 원하지만, 난 네가 날 가이딩해주지 않아도 널 좋아할 거야.”

김수현의 눈은 잔을 휘둘려 향을 피워낸 와인처럼 크게 흔들렸다.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인간적인 마음이 갔다. 물론 사랑은 아니었다.

사람을 괴수로 만드는 희한한 능력을 지닌 존재인데도, 그와 함께 점심시간마다 대학교 근처 맛집을 찾아다니던 시간이 헛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자신의 마음 한편에 소중한 친구로 자리매김했으니 말이다.

“피곤하다. 나 씻고 올게.”

“응. 갈아입을 옷이랑 속옷 사 왔어.”

김수현은 이윤석이 준비한 옷과 속옷을 받아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 속에 죄책감을 지닌 남자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봤다.

롱기누스의 창을 빼앗으면 메시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차기주는 그를 죽이는 걸까. 그들이 안 싸우고 그냥 서로를 무시하고 지내는 건 안 될까.

김수현은 복잡한 머릿속을 식히기 위해 샤워기 밑으로 들어가 찬물 세례를 맞았다.

* * *

이윤석의 핸드폰으로 테디의 이메일 주소를 검색해봤지만,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다크웹에 접속해야 해서 접근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몇 시간째 끌탕하니까 이윤석이 도대체 뭘 찾냐고 물었다.

“혹시 뉴스 봤어? 오클라호마 교도소에서 탈출한 에스퍼 테디가 돈만 주면 의뢰를 맡아준다고 하더라고. 이메일로 날 지켜달라는 의뢰를 맡기고 싶은데 연락할 방도가 없네.”

“그거라면 내가 한번 알아볼게.”

이윤석은 김수현에게서 핸드폰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김수현을 따라 미국에 오긴 했지만 원래 이윤석도 최유다가 롱기누스의 창을 찾았다고 해 그와 오클라호마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아공간을 소환할 수 있는 A급 이상의 에스퍼라면 몰라도 사기꾼은 그냥 일반인이었다. 뾰족한 금속을 숨기고 비행기에 탈 수 없었다. 중요한 무기인 만큼 자신이 직접 픽업하러 가기로 했는데 김수현과 자신은 역시 운명인 것 같았다. 이렇게 함께 미국에 오게 되다니!

사기꾼한테는 지금 자신이 댈러스에 있으니 이쪽으로 오라고 하면 될 것이다. 그놈처럼 유능한 범죄자라면 테디인지, 테디베어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지 모르니 겸사겸사 물어보기로 했다.

“안녕, 사기꾼아.”

―메시아 님.

“나 지금 댈러스에 있는 비즈니스호텔에 있거든. 창을 가지고 이쪽으로 와.”

―예, 알겠습니다.

이윤석은 전화가 끊기기 전에 말을 덧붙였다.

“혹시 너 테디라고 알아? 유명한 범죄자던데. 돈만 주면 다 들어준다고 뉴스에 나왔대.”

―무슨 이유로 찾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최유다는 수화기 너머에서 숨을 죽였다.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상황을 이끌 수 있을지, 그 계획을 구상했다.

김수현과 메시아에게 테디를 보내놓고 차기주에게 장소를 알려준다. 차기주와 메시아가 대치할 때 테디가 메시아의 뒤통수를 친다.

가짜 롱기누스의 창을 가진 메시아가 차기주를 찔러봤자 차기주에게는 큰 부상이 아니다. 도리어 메시아의 움직임만 봉쇄될 뿐. 그때를 노려 최유다가 진짜 롱기누스의 창으로 메시아를 찌르는 거다.

체크메이트. 완벽한 복수다.

시나리오를 완성한 최유다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었다.

―내 가이드가 드디어 차기주한테서 도망쳐 나한테 왔거든. 그런데 차기주가 미련을 못 버리고 싫다는 사람을 쫓잖아. 그래서 수현이가 자길 숨겨달라는 의뢰를 테디한테 맡길 거래. 내가 메시아인 걸 몰라서 나한테 보호해달라고 말을 안 하네.

“아아, 그렇군요. 확실히 테디는 세계적인 에스퍼 범죄자죠.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응.

메시아와 통화하는 내내 테디를 모르는 척하던 최유다는 전화를 끊고 바로 테디에게 연락했다. 그를 교도소에서 꺼내준 은혜를 돌려받을 때가 되었다.

* * *

김수현은 파인애플을 50달러어치나 사 온 미친놈을 혼내고 할 수 없이 그걸 저녁밥 대신 먹었다. 맞은편에 앉은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맛있지?’ 하며 칭찬받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설마 내가 하와이안 피자를 좋아한다고 파인애플 장사를 할 것처럼 잔뜩 사 온 건 아니겠지?’

이런 멍청이가 제네시스의 교주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차기주도 은근히 속 빈 강정이다. 고작 이런 놈 하나 못 잡아서 쩔쩔매다니.

이윤석이 거친 파인애플 껍질을 벗기고 연한 속살을 잘라주면 김수현은 얌체처럼 냉큼 포크로 집어 먹었다. 입은 하나인데 파인애플도 먹어야 하고, 이윤석에게 생각이 있냐 없냐 화도 내야 해서 바빴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호텔 방 문이 열렸다. 김수현은 테이블을 뒤엎어 방패 삼았다. 벽과 거실 창이 면접한 모서리에 놓인 스탠드를 챙겨서 갓등을 뽑아내고 입구를 향해 던졌다. 침입자에게 스탠드 조명이 닿기도 전에 벽으로 날아가 박살 났다.

“의뢰인이 과격하네.”

차기주는 키가 커도 근육이 섬유조직처럼 탄탄하게 짜여 세련되고 훤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그와 비슷한 키임에도 테디의 근육은 과장되게 부풀어 있어서 골렘처럼 우람하고 거대했다.

파인애플 껍질을 까는 반복 노동을 하던 이윤석이 기회는 이때다 싶어 과도를 놓고 테디의 뒤에서 나온 최유다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수현아, 여긴 내 친구 최유다라고 해!”

하도 사기꾼이라고 불러서 이름을 까먹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최유다는 한쪽 입꼬리가 삐뚤게 올라가는 걸 감추기 위해 입을 손으로 가리고 헛기침했다. 독사와 같은 눈빛은 눈꺼풀을 곡선으로 접으며 가렸다.

워낙 감정을 숨기는 데에 노련한지라 최유다는 어느새 이윤석에게 호감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김수현은 예민하게 반응한 걸 머쓱해하며 엎어버린 테이블을 바로 세웠다.

그 위에 놓여 있던 파인애플 과육들이 바닥 카펫을 더럽혔고 스탠드 조명은 부서졌다. 변상해줄 돈이 없어서 이윤석의 친구라는 최유다를 빤히 쳐다봤다.

“얼마 있어요?”

“네? 우리 방금 만난 사이인데 지금 저 삥 뜯으세요?”

“……제가 스위스 계좌에 1조가 있는 사람입니다. 대신 변상해주세요.”

테디는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해 최유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물었다. 김수현이 대신 나서서 대답했다.

“그쪽들이 갑자기 잠근 문을 따고 들어와서 내가 호텔 기물을 파손했잖아요. 대신 변상해주세요.”

“설마 거지는 아니겠지? 차기주 가이드라고 들었는데. 난 의뢰인이 인간 말종 개새끼인 건 용납해도 거지새끼인 건 용납 못 해.”

김수현은 이윤석의 지갑에서 꺼낸 신용카드를 자기 것인 양 보여줬다.

“지금 쫓기는 중이라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내 의뢰비는 어떻게 지급할 생각이지?”

“스위스 은행에 돈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찾아서 드릴게요.”

“그렇다면 내 의뢰는 차기주로부터 널 보호해주는 것과 스위스 은행까지 이동할 때 모든 경비를 대주는 것이겠군. 두 가지나 되는데 감당할 수 있겠어?”

테디는 팔짱을 끼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표정은 네까짓 것이 감히 날 고용할 수 있겠냐는 듯 오만했다. 김수현은 조심스럽게 얼마를 생각하고 왔냐고 물었다.

“2억 달러.”

“네? 제정신이세요?”

“싫으면 이만 가고. 호텔 주위에 에스퍼들이 쫙 깔렸던데 끌려가면 영원히 가축처럼 갇혀 살려나?”

“거짓말하지 마세요. 여기 오는 동안 아무도 절 잡으러 오지 않았다고요.”

“차기주 말 한마디에 움직일 에스퍼들이 전 세계에 깔렸어. 네 에스퍼는 널 지금 간 보는 중이고.”

사자는 토끼를 사냥하는 데 있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테디는 어깨를 으쓱하며 ‘보여줄까?’ 물었다. 김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있어. 진짜 죽이려는 거 아니니까.”

테디가 손을 뻗었다. 거실에 있던 유리창이 터지면서 고층 호텔 방에 강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김수현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창밖으로 던지려는 손목을 붙잡았다. 무릎을 세워 그의 불알을 깨버리려고 하는데 얼음송곳이 테디에게 날아들었다.

그가 손을 휘저어 얼음송곳을 날아온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

“어때. 널 지키는 게 쉬워 보여?”

테디가 김수현을 놓을 것처럼 티셔츠를 잡은 다섯 손가락 중 새끼손가락을 펼쳤다. 그다음은 초시계를 재며 사람을 압박하는 것처럼 약지를 폈다. 이대로 가면 손가락들이 다 펴져서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네 목숨값은 얼마일까. 이제 2억 달러가 아니야. 3억 달러.”

“씨발, 이 좆 같은 새끼가.”

김수현은 테디의 손목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욕했다. 이윤석은 김수현의 멱살을 잡은 테디의 목에 과도를 겨눴다.

“그 손 놔.”

“야, 이윤석. 손을 놓으라고 하면 어떡해. 나 추락하는 꼴 보려고 그래?”

“추락?”

이윤석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되물었다. 김수현은 뺨을 스치는 강한 바람을 느끼고 있어서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모든 게 환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영술 에스퍼가 자신의 눈을 속이고 바람 에스퍼가 보조하면 이 정도 연출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무효화 능력을 호텔 방 전체에 방사했다. 그러자 테디와 최유다 말고도 세 명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나 호텔 거실 창이 깨져 아래로 떨어지는 상황이 아니었다. 안전한 방 안에서 추락한다고 겁먹고 테디의 손목에 매달렸던 거였다.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군.”

테디가 김수현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어찌 들으면 에스퍼들의 능력을 무효화시킨 일에 놀란 것처럼 들리지만, 그게 아니었다. 김수현은 롱기누스의 창이 가진 힘을, 그 존재만으로 무효화시킨 것으로 모자라 에스퍼들의 능력까지 없앤 것이다.

자기가 한 무효화까지도 무효화시킬 수 있는 절대적인 무효화.

만일 김수현에게 평범한 에스퍼와 같은 신체 능력만 있었어도 차기주에게서 보호해달라는 의뢰 따윈 맞기지 않았을 테다. 테디는 김수현의 능력에 놀라지 않은 척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값을 베팅했다.

“어때? 우리 팀의 실력. 3억 달러에 계약하겠나?”

“네. 좋아요.”

김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자기가 가진 팀의 실력을 과시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무례하고 과격한 방법이었지만 그들의 능력만큼은 믿음이 갔다.

어차피 차기주한테 얻은 공돈이었다. 또한 그런 큰돈이 있어도 실감 나지 않아 테디에게 준다고 해봤자 속 쓰리지 않았다. 만일 김수현이 돈에 눈이 트인 사람이었으면 절대 성사되지 못할 거래였다.

“짐 챙겨. 당장 스위스부터 가지.”

테디가 손으로 목에 겨눠진 칼날을 밀어서 치워냈다. 이윤석은 당장이라도 그를 찔러 죽일 것처럼 노려봤다.

“유다, 창은 어디 있지?”

이윤석이 테디를 주시하며 최유다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내밀었다. 최유다는 골동품 가게에서 구한 가짜 롱기누스의 창을 건넸다. 진짜보다 그럴듯하게 칼날이 살아 있고 창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옆면에 음각 무늬가 세심하게 새겨 넣어진 창은 범상치 않아 보였지만 그 실체는15달러짜리 제품일 뿐이었다.

김수현은 이윤석이 창을 맡겨뒀다는 사람이 최유다였구나 싶어 그 가짜 롱기누스의 창을 유심히 봤다. 어떻게든 저것을 훔쳐야 했다. 김수현의 마음도 모르고 이윤석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부러진 창의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테디는 돈만 벌면 됐으므로 이윤석의 적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변장 도구를 구해왔으니 갈아입도록 해. 네 대역은 우리 쪽 환영술사가 할 거야.”

김수현은 테디의 팀원에게 건네받은 가방에서 금발 가발을 들어 올렸다.

“나보고 여장하라고요? 이 덩치에?”

“여장이 아니라 로커인 척하라는 거야. 마침 이 호텔에 무명 밴드 멤버들이 돌아다니더라고.”

이런 요란한 복장을 하면 금방 들키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종이 가방에 담긴 옷들을 꺼내 보며 망설이는 김수현에게 테디가 말했다.

“사람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 원래의 너랑 전혀 다른 스타일을 하면 대부분 몰라볼 거다. 거기다가 이미 에스퍼들은 호텔 로비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댄 밴드 멤버들을 본 상태야. 그들과 같은 옷을 입으면 유심히 관찰당할 일도 없어.”

김수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종이 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해골이 그려진 하얀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그 위에 검은 가죽 재킷을 걸쳤다. 무릎이 찢어진 타이트한 가죽 바지를 입은 다음에는 미역 줄기 같은 금발 가발을 썼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니까 확실히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김수현을 보고 이윤석이 “헤―” 하고 입을 벌렸다.

“수현아, 너 완전 섹시해. 할리우드 록스타 같아.”

테디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러세요?”

“원본의 머저리 같은 느낌이 전혀 안 살아. 일단 진짜 밴드 멤버 녀석들한테 함께 호텔을 나와달라고 부탁하도록 하지.”

김수현은 테디를 따라서 호텔 방을 나왔다. 밴드 멤버들과 아는 사이라 부탁하러 가는 것 같았다. 그가 아래층에 있는 패밀리룸 526호의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누구세요?”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음악에 맞춰 록 밴드 멤버들이 격렬하게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에 맥주병을 들고 소파를 뛰어다니며 노래하는 금발 머리 로커와 눈이 마주쳤다. 김수현과 똑같은 복장을 한 보컬이었다.

테디가 방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올라간 로커의 뺨을 주먹으로 갈겼다. 그가 코피를 흘리며 그대로 기절했다. 밴드 멤버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드럼을 치던 남자가 의자를 가져와 테디의 등을 내리쳤다. 나무 의자가 부서졌는데도 테디는 보디 스프레이와 땀 냄새가 뒤엉켜 악취를 풍기는 로커에게 일정한 속도로 주먹을 휘둘렀다.

김수현은 이 밴드 멤버와 테디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이였음을 깨달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이 녀석과 함께 호텔을 떠나도록 해. 허튼소리 했다가는 이 녀석의 성대를 도려낼 테니까 너희의 리더를 구하고 싶으면 조용히 굴어.”

영문도 모른 채 얻어터진 리더를 구하기 위해 밴드 멤버들이 코를 훌쩍이며 테디의 지시에 맞춰 악기를 챙겼다.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는 커다란 검은색 기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멨고, 드러머는 드럼 스틱을 챙겼다.

김수현은 괜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쳐서 미안한 마음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테디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긴 그러니까 돈이면 뭐든 다 들어주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록 밴드 멤버들과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들은 김수현이 뭐 하는 놈인가 쭈뼛거리며 쳐다봤다.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띵. 맑은 소리가 나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입을 꾹 다문 김수현은 록 밴드 틈바구니에 숨어서 호텔 로비를 지나쳤다.

* * *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로비 한편에는 카페가 있었다. 주홍빛 전구가 달려 있고 70년대 재즈바를 흉내 내며 레코드판을 전시해놓은 그곳에 앉아 있던 에스퍼 한 명이 두유 라테를 마시며 힐끔 록 밴드 멤버를 쳐다봤다.

그뿐만 아니라 로비 한가운데에 큰 나무 장식 아래에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 관광객인 척하던 에스퍼도 그들을 봤다. 아내와 여행을 온 신사 흉내를 내고 있던 에스퍼도, 호텔 직원으로 변장한 에스퍼도 그들을 봤으나 그 누구도 김수현을 알아보지 못했다. 사진으로 본 단아한 생김새와 긴 금발을 풀어헤친 로커의 이미지가 워낙 달랐기 때문이었다.

김수현은 테디의 예상대로 아무런 방해도 없이 호텔 정문을 나설 수 있었다. 또한 김수현 외의 인물들은 에스퍼들의 관심 밖이라 무리 없이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일행들은 주차장에서 검은색 SUV를 타고 호텔 문에 멈춰 섰다.

김수현은 빨려 들어가듯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 부하들에게 김수현과 합류했다는 소식을 전해 받은 테디는 로비에서 팔짱을 끼고 상황을 주시했다.

최유다에게 부탁받은 게 있어서 차기주가 그들을 쫓아올 수 있도록 꼬리를 붙이고 가야 했다. 이러다가 차기주에게 정체가 발각되면 그야말로 좆 되는 거지만 이번 한 번만 도울 셈이었다. 최유다가 무사히 동생의 원수를 죽일 수 있도록 말이다.

밴드 멤버들이 호텔을 나섰다가 바로 돌아오는 걸 본 에스퍼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각 구역에 잠복한 동료들에게 무전을 했다. 직원으로 변장 중인 에스퍼가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춘 층수가 7층인 걸 보면 김수현이 방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리라.

김수현의 환영을 덮어쓴 부하가 계단을 통해 호텔 로비에 내려왔다. 가짜 김수현으로 로비에 있는 에스퍼들의 눈을 속여 도망치는 시간을 더 벌기 위함이었다.

테디는 소식을 들은 차기주가 차로 이동해 오려면 좀 더 기다려야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다. 언론에는 밝혀지지 않은 텔레포트 능력이었다.

차기주가 나타난 주위로 대리석 바닥이 원형 모양으로 깨지고 바람이 회오리쳤다. 호텔 손님들은 놀라서 도망쳤고, 차기주를 알아본 직원들이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한 방송을 했다. 마치 호텔 로비 한복판에 괴수라도 나타난 것처럼 야단법석이었다.

인간 중 가장 강한 에스퍼라고 하더니만 테디조차 차기주를 보는 순간, 자신이 그동안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는 개였다는 걸 깨달았다.

차기주의 서늘한 검은 눈이 공간을 훑었다. 테디는 저도 모르게 오금이 저리는 걸 경험했다. 그는 재빨리 호텔 기둥 뒤에 숨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뛰었다. A급과 S급은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르다고 하더니만 차기주 앞에서는 맥을 못 추겠다.

비상구를 빠져나오던 부하와 차기주의 눈이 일직선으로 마주쳤다. 차기주는 공포 영화 속 하얀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살인마와 같은 광기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겁에 질린 부하가 비상계단을 다시 오르기 위해 비상구로 뛰어 들어갔다. 순식간에 따라잡은 차기주는 부하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가 부하의 목덜미를 손톱으로 그어 올리며 피 냄새를 맡았다.

“우리 수현이가 아닌데. 너 누구야.”

“살, 살려주세요.”

부하가 김수현이 아니라는 걸 차기주는 단번에 알아봤다. 어떻게 알아봤을까.

“대답할 때까지 네 신체를 하나씩 도려낼 거야.”

테디는 슬그머니 비상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차기주가 손으로 빼낸 눈알을 뒤로 던졌다. 테디의 가슴을 맞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부하의 푸른 동공이 신발 콧등에 부딪혔다. 그는 이를 악물고 비상계단에서 울리는 비명을 피해 도망쳤다.

저런 놈에게서 김수현을 도망치게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최유다도 메시아에게 복수하기 전에 메시아를 차기주의 손에 잃게 될 것이다.

차기주는 피에 젖은 손가락을 가짜의 옷에 문질러 닦아내곤 얼굴을 감싼 채 고통스러워하는 에스퍼를 바닥에 던지듯 놓았다.

가짜를 보자마자 함정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비상계단으로 따라오는 놈이 한패이겠다 싶어 겁을 줘서 도망치게 했다. 빠르게 도망치는 쥐새끼를 따라다니면 우리 수현이를 만나겠구나 하는 생각에 차기주는 활짝 꽃같이 웃었다.

접선 장소에 테디만 나타났다. 그의 부하들은 환영술사가 어디 갔냐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봤자 부고 소식이나 전해 들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검은 SUV에 올라탄 테디가 마른 손바닥으로 연신 얼굴을 쓸어내렸다. 무언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해 겁에 질린 사람 같았다. 언제나 범죄자들의 우위에 섰던 그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부하들은 속으로 동요했다.

김수현은 머릿속이 이윤석에게서 롱기누스의 창을 빼앗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해 그런 테디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그들이 탄 차가 몸체는 작아도 최대 250km/h 속도로 난다는 제비처럼 빠르게 공항으로 달렸다.

차기주는 눈 부신 햇살을 가려줄 선글라스를 낀 채 여유롭게 오픈카를 몰고 그들을 따라갔다. 테디는 차창으로 그 모습을 봤지만, 이번 의뢰가 깨지면 ‘오시리스의 눈물’을 살 수 없어서 입술을 꾹 말아 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다. 그렇게 놀랄 것 없다. 사람의 눈알을 빼내는 저 미친놈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인 자신이다.

테디는 애써 차기주에 대한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댈러스 포트워스 국제공항에 도착한 SUV에서 내렸다. 김수현을 잘 챙겨 스위스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무릎이 앞좌석 등받이에 닿을 정도로 이코노미석 좌석 간의 간격이 비좁았다.

김수현은 이리저리 불편한 몸을 비틀다가 새삼스레 자신이 온실 속 화초 같다는 생각을 했다. 냉소적으로 자기 평가를 하고 있는데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고객님, 좌석 업그레이드를 해드리겠습니다.”

“어째서요?”

“황지윤 파트장님께서 연락해주셨습니다. 따라오시죠.”

김수현은 이코노미석 칸에서 매너 없이 신문을 활짝 펼친 고객이 있어서 힐끔 쳐다봤다. 아무래도 차기주 같았다. 스튜어디스를 따라 통로를 지나면서 은근슬쩍 차기주의 무릎을 자신의 무릎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앞 칸으로 넘어가는 소리를 듣고 신문을 접어서 내렸다. 그는 김수현이 눈치챈 줄도 모른 채 황지윤이 도망 중인 자기를 어떻게 알고 좌석 업그레이드를 해준다고 생각할까, 김수현을 순진하게만 여겼다.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뒤로 돌려 테디를 쳐다봤다. 덩치가 큰 알파가 땀을 뻘뻘 흘리며 스튜어디스에게 와인을 달라고 했다. 와인 한 잔을 단숨에 마셔버린 테디는 좌석 손잡이를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이윤석이 옆자리에 앉은 최유다에게 자기도 좌석 업그레이드를 해달라고 팔을 잡아당겼다. 누가 보면 어린아이인 줄 알겠다. 저런 순진무구함과 달리 이윤석은 사람을 괴수로 변이시켜서 사람들을 공격하는 악당이었다.

차기주는 스튜어디스에게 따뜻한 커피를 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게 커피를 건네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다가 결국 차기주에게 커피를 엎질렀다. 그는 옅은 화상을 입은 피부가 화끈거렸으나 이 정도는 어차피 회복될 거라 신경 쓰지 않았다.

젖은 바지를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오래전 실험실에서 펄펄 끓는 기름에 던져졌던 일이 떠올라 잠시 손이 멈췄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아봐 무서워한 건데 누굴 탓하랴. 괜찮다며 손을 들었다. 다행히 검은 바지는 커피 얼룩이 보이지 않게 말라갔다.

좁은 공간이 숨통이 옥죄이듯 갑갑했으나 차기주는 말없이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김수현이 도망치니 잡으러 가긴 하지만, 사실 그는 아직 김수현을 만날 용기가 없었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도 모른 채 그를 잃지 않겠다며 쫓는 것일 뿐.

김수현 일행은 취리히 공항에서 내렸다. 차기주는 그들이 비행기에서 다 내리고 나서야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기 위해 줄을 선 김수현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차기주는 문득 참을 수 없이 그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는 이 정신 사나운 인파 속에 숨어 있으면 김수현이 자신을 못 찾지 않을까 하는 자기합리화를 끝냈다. 그러곤 맞은편으로 텔레포트해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김수현과 차기주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서서히 가까워졌다.

김수현은 이윤석과 이야기를 하느라 차기주를 보지 못했다. 이윤석이 먼저 차기주를 발견하고는 김수현의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

이윤석이 대답하지 않아 이상함을 느낀 김수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차기주를 발견했고, 드디어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차기주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김수현에게 쓰레기 새끼라며 매도당하고 버려질까 봐 무서운데, 이렇게라도 얼굴을 보니까 좋았다. 그는 김수현과 다른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보는 이 짧은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김수현은 에스컬레이터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을 밀치고 빠르게 뛰어 도망쳤다. 차기주는 멍하니 그런 김수현의 검은 뒤통수를 구경했다.

김수현이 도망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기억이 뒤엉켰다. 메시아를 두들겨 패서 세뇌 능력을 빌린 다음 김수현이 그 일을 잊게 만들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자신이 이미 그 짓을 하다가 김수현과 함께 죽었고, 그 이후로 시간이 돌려져 벌써 세 번째 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또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된다. 새로운 기억을 가진 김수현은 전혀 행복해하지 않았다. 좁은 옥탑방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기만 했다.

차기주는 공항에서 벗어나는 김수현을 그대로 놓쳐줬다.

* * *

테디는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차기주를 따돌리기 위해 산에 숨어들자는 제안을 했다. 비행기에서 계속 와인을 마시더니 손을 덜덜 떨어서 걱정되긴 했지만, 이 주정뱅이가 에스퍼들과 경찰들도 피해 다닌 뛰어난 실력자라니 김수현도 믿기로 했다.

“좋아요. 그곳으로 이동하죠.”

일행은 바로 취리히시에 있는 실발트 숲으로 숨어들었다. 도시에 있는 숲이어서 만만히 봤는데 나무를 베거나 부러진 나무를 제거하지 않고 유지해 원시림에 가까웠다. 확실히 이런 곳에 숨어 있으면 찾기 힘들 듯했다.

그렇지만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는 법이었다. 아무래도 밤을 보내기에는 만만치 않을 듯싶었다. 자연적으로 쓰러진 나무들과 그 주위의 활엽수들로 인해 숲을 걷기 힘들었다.

얌전히 냉전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던 김수현은 차기주가 괜히 쫓아와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조용히 분노했다.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긴 했으나 이동 경로를 지워야 해서 일부러 험한 길을 가야 했다. 우거진 숲속에는 너도밤나무가 곧게 자라나 있었다. 나무줄기 부분이 코르크처럼 갈라지지 않고 만질만질해 마치 대리석 기둥이 세워진 숲의 신전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나무줄기에 이끼가 끼어서 고색창연한 물푸레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테디가 실발트 숲에 들어오기 전에 산 등산용품이 든 배낭을 내렸다. 순식간에 땅에 텐트 핀을 박은 그가 능숙하게 텐트 천막에 폴대를 끼웠다.

이 터널형 텐트는 높이 220cm, 넓이 300cm, 길이는 무려 4m 35cm이나 되는 다인용이었으나 13kg밖에 되지 않아, 크기에 비해 가벼운 축에 속했다. 시골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비닐하우스처럼 생겼는데 어두운 계열의 군복 무늬 천막이어서 숲속에서 은신처로 사용하기 좋았다.

테디가 나뭇잎을 주워 어두운 텐트 천막 위에 뿌렸다. 어두울 때 멀리서 보면 못 찾을 것 같았다. 셸터를 구축한 테디와 일행들은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텐트 천장에 캠핑용 할로겐램프를 매달아 주홍빛이 여섯 명의 얼굴에 일렁였다.

조셉이 가방에서 초코바를 찾아 먹으라며 나눠줬다. 고열량이라 세 개만 먹어도 하루치 열량을 채우긴 하겠지만 부피가 작아서 배가 차지는 않는 식사였다.

김수현은 초코바를 두 개쯤 먹다가 물려서 그만 먹었다. 이윤석은 맛있는지 벌써 자기 몫을 다 먹어치웠다.

“왜 안 먹어?”

“너 부족해 보이는데 이것도 먹어.”

이윤석이 포장을 뜯지 않은 초코바를 받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수현은 굳이 왜 안 먹고 소름 돋게 간직하냐며 따지지 않았다. 롱기누스의 창을 훔치려면 미인계라도 써야 할 판이었다. 뾰족한 경계심을 내보이는 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윤석의 허리춤에 매달린 창살을 어떻게 보여달라고 하나 머뭇거리고 있는데, 시선을 느낀 그가 먼저 그것을 풀어서 보여줬다. 자신에 대한 경계심이 전혀 없는 행동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에스퍼들이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대. 내가 이걸로 차기주를 쫓아줄게.”

김수현은 창 옆면에 새기진 음각 무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이윤석의 목에 겨눈 채 무효화 능력으로 이윤석의 능력을 없애버렸다.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어서 최대한 빨리 롱기누스의 창을 훔쳐서 달아나야 했다.

“수현아, 나 싫어?”

이윤석의 목에 무기를 들이댄 건 자신이지만, 그에게 그런 말을 직접 들으니 괜히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자신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는 게 죄는 아니었지만 마치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친구를 이용해먹은 중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그것보다 그의 목에 창날을 겨눈 게 더 큰 죄인데 말이다.

이윤석은 자기를 위협하는 자신의 행동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김수현은 애써 눈물에 젖은 눈을 피하며 말했다.

“네가 메시아라는 걸 알아.”

“……어떻게?”

충격으로 커진 눈이 김수현을 올려다봤다. 그 모든 걸 지켜보던 테디와 최유다는 조용히 눈빛을 주고받았다.

김수현은 테디에게 어서 밧줄을 가져오라고 했다. 밧줄을 꺼내 온 테디는 이윤석의 손목을 등 뒤로 돌려서 꽁꽁 묶었다.

“네가 두 번째 생에서 차기주한테 날 강간하라고 세뇌한 것도 알아.”

“아니야!”

이윤석이 발작하듯 부정했다. 김수현은 “아니라고?” 하며 입꼬리를 삐딱하게 끌어 올렸다.

“아니. 맞긴 하지만 정말…… 정말 그렇게 될 줄 몰랐어.”

큰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들어가며 점점 작아졌다. 이윤석은 이 상황이 억울해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차기주가 널 좋아하게 될 줄 몰랐어.”

“네가 건 세뇌. 좋아하는 사람을 강간하라는 거였구나.”

김수현은 자신의 온 삶을 통틀어 가장 최악의 순간이 바로 차기주가 자신을 사랑하게 된 기적 같은 시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창 밑에 달아놓은 나무 손잡이 때문에 단검 같기도 한 무기를 고쳐 잡았다.

이윤석의 하얀 얼굴에 쉼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가 정말 알고서 세뇌를 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자신에 대한 사랑 또한 진심 같았다.

“숫자 1,000까지 세고 움직여.”

“그거 왜 훔치는데? 내가 차기주를 다치게 할까 봐 그래? 널 감금하고 강간한 새끼인데?”

“아니, 난 나를 위해 이 창을 훔치는 거야. 너 세상을 멸망시키러 온 메시아라며. 난 살고 싶어. 그리고 난 살아남아서 내가 사랑하는 모든 걸 지켜낼 거야.”

김수현은 고개를 돌려 테디에게 외쳤다.

“테디, 지금 당장 이동할 겁니다.”

무효화 능력을 사용하느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그의 관자놀이에서 미끄러져 턱에 맺혔다.

“무슨 상황이지? 네 친구 아니었나?”

“당신은 의뢰나 신경 쓰세요.”

이윤석은 떠날 준비를 하는 김수현을 바라보며 애걸복걸 매달렸다.

“1,000까지 숫자 세면 너 따라가도 돼? 나 정말 말 잘 들을게. 나쁜 짓 안 하고, 그냥 네가 차기주한테 잡혀가지 않도록 널 지키기만 할게.”

저렇게까지 구니까 안쓰러웠다. 김수현은 날강도처럼 빼앗은 창을 배낭에 잘 넣어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부터 숫자 세.”

이윤석은 빠르게 숫자를 셌다.

“하나, 둘.”

달아나던 김수현이 뒤를 돌아보며 크게 외쳤다.

“천천히 세!”

이윤석은 눈물과 함께 콧물을 들이켜며 조금 느려진 속도로 숫자를 셌다. 김수현이 자신을 버리고 가서 너무 슬펐다. 그는 파동 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어서 손목을 묶은 밧줄을 끊지 못하고 있다가 120까지 셌을 때 힘이 돌아온 걸 느꼈다.

당장 김수현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1,000까지 세지 않으면 그가 자신을 정말 많이 싫어하게 되어서 영영 얼굴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롱기누스의 창을 차기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훔쳤다니까 그건 기뻤다.

울다가 웃다가 하며 손목을 묶은 밧줄을 뜯어냈다. 그는 텐트 안에서 아주 조용한 가운데 숫자를 세었다. 1,000이라는 숫자는 컸지만, 그것만 세면 김수현을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반드시 세야 했다.

“506, 507…….”

* * *

최유다는 가짜 롱기누스의 창을 훔쳐 달아난 김수현의 행동을 비웃으며 혀를 찼다. 사냥꾼을 피해 달아나는 사슴처럼 달리던 김수현이 최유다를 보고 흠칫 놀랐다. 이윤석과 친구로 알려진 자신이 이윤석을 버린 일에 대해 복수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앞 보고 달려요. 넘어집니다.”

최유다가 말했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던 김수현은 쓰러진 나무 기둥에 발이 걸릴 뻔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그는 일단 도망치고 최유다는 나중 문제로 미뤄두기로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팔뚝에서 솜털이 돋아났다. 나무에서 지저귀는 새들이 날개를 푸덕거리며 날갯짓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치 천적을 만나 도망치는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쫓는 발소리가 바스락거리며 들렸다. 메시아? 차기주? 김수현은 알 수 없었다. 나무뿌리에서 나무 기둥으로 위로 스르륵 기어오르는 뱀이 어둠을 꿰뚫고 노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발밑에 채는 나뭇가지와 잎사귀들 때문에 조금만 삐끗해도 걸려 넘어질 판이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테디의 등만 보고 따라갔다. 덤불을 지나는 짐승의 소리 같은 게 점점 가까워졌다. 있는 줄 몰랐던 동물들의 다양한 울음소리가 야생에 떨어진 수현을 압박했다. 나무 옹이마저 귀신의 얼굴처럼 보일 만큼 무서움으로 판단력이 흐려졌다.

밤에 숲속을 지난다는 건 그런 일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발을 떼는데 누군가 발을 붙잡았다. 기겁하며 아래를 확인하니까 발이 굵은 덩굴줄기에 끼어 있었다. 손으로 덩굴줄기를 풀어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공기 중에서 물비린내가 느껴졌다.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니 피부에 달라붙은 이파리가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속눈썹에 맺힌 땀이 눈꺼풀을 깜빡일 때면 눈물처럼 뺨을 타고 미끄러졌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은 그들은 한참 숲속을 헤맸다. 운동화 안에서 물집이 터진 발꿈치가 쓰라렸다. 김수현은 정수리 위로 떨어진 잎사귀를 손으로 쳐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속에서 쓴 물이 넘어오도록 강행군을 한 결과, 실발트 숲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질 체력 때문에 무릎을 손으로 움켜잡고 허리를 숙인 채 숨을 헐떡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차기주를 따돌리려고 숲에 왔더니, 네가 친구를 배신했잖아. 그딴 골동품이 뭐라고 훔친 거야.”

테디는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베어버릴 것처럼 기분이 나빠 보였다. 하긴 고생해서 텐트를 세워두고 그 비싼 걸 숲에 버려두고 왔다. 애초의 목적이었던 차기주도 자신들이 따돌렸는지도 알 수 없다.

“은행 문이 열리는 대로 의뢰비를 찾아서 지급할게요.”

“좋아. 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니 휴식을 취하도록 하지.”

김수현은 탈수증과 굶주림으로 죽을 것 같았다. 초코바 두 개로는 극심한 체력 소모를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었다. 숲에서 들었던 인기척이 들릴까 뒤돌아봤으나 숲을 나오니 느낄 수 없었다.

어둠을 담요처럼 두른 검은 형체는 숲을 벗어나지 않고 자신을 지켜봤다.

“날 호텔로 데려가 주세요.”

“그러지. 비싼 의뢰비를 내는 의뢰인이니 알아서 모셔주겠어.”

테디가 바닥에 쓰러진 김수현을 업었다.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느낄 수 없었던 뾰족한 나뭇가지에 긁힌 팔과 얼굴이 뒤늦게 쓰라려 왔다.

물집 가득한 발은 운동화 안에서 불이 붙었다. 테디의 어깨에 김수현의 머리통이 툭, 놓였다. 정수리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이 그제야 바닥으로 떨어졌다.

* * *

다시 눈을 뜬 김수현은 자신이 요구한 대로 호텔 방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 운동화조차 벗지 않은 채 짐짝처럼 침대에 던져진 상태였다. 퉁퉁 부어 잘 벗겨지지 않은 운동화 때문에 끈을 다 풀고 나서야 신을 벗을 수 있었다.

테이블에 앉은 테디는 권총을 손질하고 있었다.

“깼나? 안 일어나면 깨우려고 했어. 이제 은행 문이 열릴 시간이야.”

“씻을 시간 좀 주세요. 갈아입을 옷도요.“

“그렇지 않아도 곱게 자란 도련님이 왜 그 말을 하지 않을까 싶었지. 저기 가져다 놨어. 씻어.”

김수현은 자신을 무시하는 말에 기분 나빠하며 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니 긴장으로 뭉쳤던 근육들이 풀어졌다. 깨끗한 옷을 입으니까 한결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쓰라린 발 때문에 뒤뚱거리며 걸었다. 뒤꿈치가 까졌다며 자신을 위해 블로퍼 뮬을 준비해뒀던 차기주가 떠올랐다.

그는 어디까지 자신을 쫓아왔을까. 취리히 공항에서 만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 자신을 못 찾은 걸까. 차라리 테디에게 거액의 의뢰비를 내지 않게 그가 빨리 자신을 찾아줬으면 좋겠다.

그가 에스퍼들을 풀어서 자신을 잡으려고 한 것 때문에 화난 게 우습게도 온갖 고생을 다 하고 나니까 막상 그가 보고 싶었다. 거기다가 차기주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강간했다는 사실을 알아버려서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왜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도망쳐버린 걸까. 김수현은 차기주의 속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테디는 돈 받을 생각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울리지 않게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김수현은 뒤꿈치에 반창고를 붙이고 양말을 신었다. 흙이 묻어 더러운 운동화를 툭툭 털어서 다시 신었다.

호텔 조식을 먹은 김수현은 테디의 재촉에 스위스 은행 문이 열리는 시간에 맞춰서 방문했다. 은행 직원이 신분 확인을 위해 서류 뭉치를 가져왔다. 영어로 된 서류를 읽어가며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고생하고 나서야 은행 직원이 그들을 금고로 안내했다.

차기주가 센터에서 지내는 방공호의 문 같은 걸 직원 두 명이 동시에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열었다. 김수현은 자신이 본 게 믿기지 않았다.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가 은행 직원에게 재빨리 물었다.

“내 돈은 어디 있죠?”

“차기주 에스퍼가 당신의 이름으로 맡긴 전부입니다.”

등골에 서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흉악범 에스퍼 테디에게 3억 달러라는 의뢰비를 준다고 데려왔는데 돈은 없고 검은색으로 칠한 그림만 있었다. 전시회에서 자신이 그린 모작을 보고 차기주가 이렇게 말하긴 했다.

“러시아 화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그림을 모사한 작품이네. 진품은 추정 가격만 1조 원으로 평가받고 있지. 네가 내 가이드가 되어준다면 네 그림을 그 가격에 사줄게.”

당연히 1조 원을 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차기주는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진품을 자신의 금고 안에 넣어뒀다. 현찰이 많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한테서 도망칠 수단으로 쓰일 거라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다.

“이 차기주 개새끼가!”

김수현의 고함을 들은 테디가 김수현을 밀치고 금고 안을 살폈다. 테디가 검은 칠만 된 그림을 보고 이게 뭐냐고 분노했다.

“금고에 10억 달러가 있다며. 그런데 왜 저딴 쓰레기 같은 그림만 있는 거야! 말해! 말하라고! 그 돈이 어떤 돈인 줄 알아?”

“진정하세요, 테디. 저건 말레비치의 그림인데 10억 달러의 가치가 있는 그림이에요. 원하시면 의뢰비로 드리겠습니다.”

“닥쳐! 누굴 병신으로 아는 거야. 저런 그림은 다섯 살 먹은 아이도 그리겠어. 네가 돈을 안 주면 네 에스퍼에게라도 받아내면 돼.”

자신의 멱살을 잡은 테디에게 직원이 난동을 부리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다. 테디가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분노를 삭였다. 김수현은 자신의 뒤로 바짝 다가온 테디가 등에 가져다 댄 총을 느끼고 침을 꼴깍 삼켰다.

누나의 말대로 범죄자에게 의뢰를 맡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서 축이며 테디와 함께 은행을 나섰다.

테디가 부하들에게 렌터카를 가져오라고 했다. 김수현은 뒷좌석에 거칠게 태워졌다. 최유다는 그때까지도 누구의 편인지 알 수 없게 나서지 않았다. 최유다는 자신의 편도 아니지만, 테디의 편도 아닌 것 같았다.

조셉이 자신의 손목을 테이블 타이로 묶었다. 김수현은 이런 위기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에스퍼 훈련소에서 배웠기에 겁에 질린 척 가만히 있었다. 지금 풀려나봤자 테디에게서 총을 빼앗지 않는 한 죽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은행을 벗어나자마자 렌터카를 쫓는 차량이 보였다. 테디는 그 차량에 차기주가 타고 있을 거라고 여겨 빠르게 루체른을 벗어났다. 뒤에서 추격해오는 차량을 피해 한 시간쯤 달리다 보니 기차역이 나왔다.

암석이 쌓인 강을 따라 자동차로 달린 그들은 넓은 평야와도 같은 산 밑자락에 도착했다. 사용을 중지한 케이블카가 레일에 흉물스럽게 매달려 있었다. 어느새 천사의 산이라고 불리는 엥엘베르그까지 도달해버렸다.

테디는 차기주의 차량을 따돌렸다고 여겼는지 그곳에 멈춰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네 에스퍼 핸드폰 번호 뭐야. 불러.”

대답하지 않자 테디가 발로 김수현의 정강이를 찼다.

“윽.”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활화산처럼 구는 테디를 자극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김수현은 차기주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줬다. 테디가 전화를 받은 차기주에게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네 가이드를 내가 데리고 있는 건 알고 있겠지? 목숨을 살리고 싶으면 3억 달러를 가져와. 그러지 않으면 당장 죽여버리겠어.”

테디는 어리석었다. 차기주에게 이런 짓을 하고도 살 수 있다고 여기다니.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았다.

―좋아. 기다리도록 해. 수현이 손끝 하나 건드리면 네놈들 배를 갈라 내장을 다 뽑아버릴 줄 알아.

김수현은 괜히 일을 크게 벌인 걸 후회했고 차기주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가 먼저 에스퍼들을 보내 자신을 잡으려고 하니까 자신도 테디를 고용하게 된 것이 아닌가. 그가 그러지만 않았으면 김수현은 조용히 이윤석을 불러내 롱기누스의 창을 훔치고 그의 가이딩 중독이 치료되었을 때쯤 돌아갔을 거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테디는 돈을 준다는 차기주의 말에 바로 존에게 전화를 걸었다. 테디의 머릿속에는 목을 뚫고 호스로 유동식을 먹는 자신의 가이드만이 선명할 뿐, 나머지는 블라인드로 가린 듯 흐릿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그 돈을 받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를 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차기주와 통화가 끝나고 조용했던 차 안에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테디의 고개가 뻣뻣하게 굳은 채 삐거덕거리듯 옆으로 돌아갔다. 조셉이 핸드폰을 꺼내서 받았다.

“여보세요.”

테디는 귀에 댄 핸드폰을 내리고 조셉에게 물었다.

“어째서 네가 그 전화를 받는 거야.”

조셉은 아직도 그 사실을 몰랐냐는 듯 그를 비웃었다.

“그야 내가 존 에버시이니까.”

김수현과 최유다만이 무슨 상황인지 모른 채 그 둘을 쳐다봤다. 테디는 그제야 존이 ‘오시리스의 눈물’을 사용해 젊어져 여태 자신을 속여왔다는 걸 깨달았다. 뒤통수가 얼얼해지다 못해 머리통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 말인즉슨 이제 테디의 가이드는 영원히 루게릭병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의미였다. 테디는 제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떨어짐과 동시에 권총을 빼 들어 그대로 존에게 발사했다. 미치광이 재벌은 허무하게 살해당했다.

차 안에서 들린 총소리에 뒤따라오던 차에서 이윤석이 뛰어내렸다.

“수현아!”

김수현은 폭주해서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려고 드는 테디에게 무효화 능력을 사용한 후 발로 손을 차버리고 테디의 머리에 박치기했다. 이마에 붉은 멍이 생길 만큼 강하게 부딪쳐 어지러웠다.

그런데도 오클라호마 교도소에서 열심히 신체를 단련한 테디에게서 권총을 빼앗을 수 없었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죽으려면 너나 죽어!”

김수현의 외침에 테디가 빙그레 웃었다. 테디는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피가 차 안에서 사방으로 튀었다. 운전대에 앉은 테디의 마지막 부하가 비명을 지르며 자동차 문을 열고 도망쳤다.

뒷좌석은 정방향과 역방향 자리가 11자로 마주 보고 있었다. 머리가 터져 죽은 테디의 맞은편에 있던 김수현은 충격으로 눈을 부릅떴다. 최유다는 붉은 피로 칠갑한 창문을 내려 바깥을 살폈다.

메시아인 이윤석은 물론이고, 차기주까지 도착해 뒷좌석 문을 열려고 했다. 최유다가 세운 계획은 엉망이 되었지만 결국 싸움을 할 개 두 마리가 모이긴 했으니, 둘을 싸움 붙이면 됐다. 최유다는 김수현의 배낭을 챙겨 유유히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김수현이 무사한지 살피느라 그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최유다는 배낭 지퍼를 열어 가짜 롱기누스의 창을 꺼내 이윤석에게 다가갔다.

“메시아 님, 제가 롱기누스의 창을 되찾아왔습니다.”

이윤석은 충실한 신도의 헌납에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챙겼다.

“어서 차기주를 죽이고 김수현 씨를 지키세요.”

“맞아. 내가 수현이를 지켜야 해!”

‘이윤석’이라는 인두겁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하얀 머리칼과 붉은 눈을 가진 메시아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곳은 루체른 호수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지점에 있는 광활한 산악 지대였다. 나무들로 녹색 갓을 쓴 티틀리스산과 빙하 지대인 하넨산이 동시에 보이는 이 아름다운 자연에 나타난 메시아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신비로웠다.

메시아가 차기주에게 창대가 없는 창을 휘둘렀다. 차기주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손목을 잡고 도리어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둘의 몸이 깊숙이 붙게 되자 차기주는 무릎을 세우고 메시아의 배를 가격했다.

메시아는 붉은 눈으로 차기주를 쳐다보려고 했으나 이미 숨겨진 힘을 알고 있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메시아는 손목을 비틀어 빼려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차기주에게 붙들려 얼굴을 주먹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다. 최유다는 양복 재킷을 더듬어 비밀 포켓에서 진짜 롱기누스의 창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놀랍게도 롱기누스의 창은 김수현과 함께 있자 그 효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건 뭐든지 다 뚫어버리는 창과 뭐든지 막아버리는 방패의 싸움이었다. 에스퍼 능력을 무효화시키는 롱기누스의 창과 뭐든지 무효화 해버리는 김수현이란 방패.

테디와 조셉이 총으로 죽은 걸 보면 김수현이 롱기누스의 창의 힘을 없애서 에스퍼 능력은 사용할 수는 있어도 에스퍼의 신체 재생 능력은 발휘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최유다는 메시아가 차기주를 찔러서 손이 묶이기만을 기다렸다.

한편 차 안에서 있던 김수현은 테이블 타이에 묶인 손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몸통 쪽으로 빠르게 끌어당겼다. 단단한 테이블 타이가 단숨에 끊어졌다. 김수현은 얼굴에 튄 피를 외투를 벗어 거칠게 닦아냈다.

만일 에스퍼 팀 팀장으로 활동하며 괴수들과 에스퍼 범죄자들을 사살하는 임무를 해보지 못했다면, 오늘 이 일이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자신을 폐인으로 만들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김수현은 차 문을 열고 나왔다가 전투 중인 메시아와 차기주를 발견했다. 일반적인 동체 시력으로는 그들의 움직임을 제대로 쫓을 수 없었다. 김수현은 괜히 그 사이에 끼어들어 사고를 일으키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익숙한 작약꽃 냄새에 차기주가 김수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메시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창으로 차기주의 배를 찔렀다.

“이제 수현이는 내 거야.”

창을 두 손으로 잡은 메시아에게 최유다가 달려들었다. 최유다의 눈에는 복수를 이룰 수 있다는 환희가 가득했다. 낡은 쇠 쪼가리가 메시아의 옆구리에 꽂혔다.

“아.”

창을 잡고 있던 메시아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메시아는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가짜 롱기누스의 창을 진짜라고 믿는 김수현은 차기주에게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울었다.

“안 돼, 이사님. 흑, 죽지 마. 죽지 마요.”

차기주는 눈을 끔뻑거리며 아파해야 하는 타이밍이다 싶어 연약한 척 김수현의 허벅지에 머리를 놓았다. 김수현이 흐느껴 울며 차기주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그는 지금 김수현에게 무슨 말을 하든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아차렸다.

“수현아, 미안해. 내가 널 강간해서. 정말…… 정말 미안해.”

창이 꽂힌 살이 평소보다 느리게 아물고 있었다. 차기주는 손으로 복부에 꽂힌 창을 뽑아냈다. 환부가 벌어지면서 더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알아요. 알아. 용서할게요. 흑, 안 돼. 죽지 마요.”

김수현이 차기주의 배를 손으로 막은 채 오열했다. 그의 부상을 슬퍼해주는 김수현을 메시아는 씁쓸하게 바라봤다. 메시아의 몸에서 파동 에너지가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피가 멈추지 않아서 어지러운 가운데 웃고 있는 최유다가 눈에 들어왔다. 최유다의 배신을 이해할 수 없음에도 이해되었다.

자신이 이 지상에 내려와 저지른 수많은 악행과 연관되어 있겠지. 메시아는 매운 코를 들이켜 마시며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김수현을 갈망했다.

“수현아, 내 날개가 얼마나 멋진지 알아? 아마 내 날개를 보면 나한테 반할걸.”

메시아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김수현에게 보여주기 위해 어깨뼈에 숨겨둔 날개를 펼쳤다. 그러나 그가 아는 화려한 깃털은 없고 앙상한 뼈가 드러난 날개에는 검은 피막만 있어 꼭 박쥐의 날개 같아 보였다.

“아아, 그렇구나. 난 이미 타락했던 거였어.”

메시아는 눈을 감았다. 김수현을 사랑해 시간을 되돌려달라는 소원을 빌었을 때, 루시펠은 날개에서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메시아는 그때 신에게 위대한 ‘엘’를 회수당해 루시퍼가 된 것이었다. 루시퍼는 인간을 사랑해 타락했으나 이런 비참한 외면 속에서 죽는구나 싶어 자신의 꼴이 참 우습다고 여겼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피식 웃었다.

차기주가 죽는 줄 알고 우는 김수현은 한참 울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손이 뺨에 내려와 감쌌다. 눈물이 맺힌 시야에 행복하게 웃는 차기주의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요? 그거 롱기누스의 창이래요. 곧 죽는다고요.”

“글쎄, 평소보다 회복이 더디긴 한데 방금 피가 멈췄어.”

에스퍼의 능력을 사라지게 하는 롱기누스의 창이 가까이 있어도, 그 힘을 상쇄하는 김수현이 안아주고 있어서 차기주의 부상은 느리지만 치유되어갔다. 김수현은 차기주가 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기뻐서 그에게 입을 맞췄다.

“이사님 입으로 말해주세요. 메시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강간하라고 세뇌를 걸어서 날 강간하게 되었다고. 당신이 사실 날 사랑해 그런 비극이 우리에게 벌어진 거라고.”

차기주는 모든 사실을 아는 김수현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온 눈에는 희미하게 붉은 기가 돌았다. 차기주는 버림받는다는 두려움으로 보이지 않았던 김수현의 사랑을 이제야 볼 수 있었다.

“너 다 알고 있었어?”

“네.”

“그런데 왜 도망친 거야?”

“이사님이 날 피했잖아요. 그래서 도망치면 잡으러 오겠거니 했죠.”

자신이 싫어서 도망친 줄 알았던 연인이 사실 겁쟁이인 그를 끌어내기 위해 도망쳤던 거란다. 그것도 모르고 차기주는 우울함과 불안 속에서 부정적인 미래를 상상하였다. 어두운 구덩이에 빠진 자신을 빛의 세계로 끌어 올리는 듯한 말이었다.

김수현에게서 그 말을 듣자 놀랍게도 첫 번째 생에서 김수현과 화장실에서 만난 첫 만남이 떠올랐다. 수현과 휴일에 스파게티를 먹으며 본 영화의 제목과 내용까지도.

“방금 『로마의 휴일』 결말이 생각났어. 앤 공주와 조는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갔지. 네가 그 영화를 보고 몰래 우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우리와 그들은 다른데 말이야.”

차기주의 말에 김수현은 그가 자신과 사랑에 빠졌던 생을 떠올렸음을 알아차렸다. 김수현은 피에 젖은 와이셔츠를 걷어 올려 완전히 아문 상처를 확인했다. 뒤늦게 차기주에 대한 걱정으로 내버려뒀던 메시아를 기억해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쓰러진 메시아의 날개에 달린 검은 피막에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김수현은 둘 다 똑같이 찔렸는데 전혀 다른 결과에 자신이 가졌던 게 가짜였다는 걸 눈치채게 되었다. 진짜는 메시아의 옆구리에 박힌 저 낡은 쇳조각인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으나 그는 피가 멈추지 않아 피 웅덩이에 버려져 있는 불쌍한 악마에게 다가갔다. 메시아는 그것만으로도 기쁜지 바들바들 입술을 떨면서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수현아, 나 보러 와줘서 고마워.”

“이 바보야, 고맙긴 뭐가 고마워. 너 지금 피가 안 멈춰. 위험하다고.”

“응, 이게 진짜 롱기누스의 창인가 봐. 유다가 배신했어. 아니 유다는 신을 찬양하는 자이니 이 모든 게 신께서 계획한 일이겠지.”

메시아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최유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언제부터 자신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이 모든 게 신의 뜻대로 움직인 거라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이제 영혼이 더 이상 껍데기에 붙어 있을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서서히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영혼과 육체를 잇는 실이 가닥 가득 끊기고 있었다. 이번에 하는 말이 자신이 김수현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한마디일 것이다.

“수현아, 지켜줄게. 그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김수현은 처절한 메시아의 다짐에 차마 그에 대한 원망을 가질 수 없었다. 비록 그로 인해 자신은 연인에게 끔찍한 짓을 당했지만, 그 일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고였다. 기억도 없고, 이미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 상처 때문에 소중한 이들을 상처 줄 만큼 김수현은 여리지 않다.

강인한 이는 자신을 지옥에 빠트린 악마를 위해 신께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이 불쌍한 악마를 구원해주세요.”

메시아는 자신을 위해 빌어주는 김수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꺼풀을 닫았다. 창백한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김수현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단숨에 메시아의 옆구리에서 창을 뽑아냈다. 그리고 바로 무효화 능력을 메시아에게 쏟아부었다.

진설해가 보리차에 탄 독도 무효 처리가 되는 걸 봤다. 어쩌면 부상도 무효가 될지 몰랐다. 김수현은 롱기누스의 창을 잡은 손바닥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고 손을 펼쳤다. 분명 잡고 있었던 창이 별 무리가 되어 사라지고 메시아의 상처가 감쪽같이 아물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피막이 사라지고 흉악한 날개뼈에 눈부신 하얀 깃털이 풍성하게 피어났다. 천사의 산 엥겔베르그에 정말 천사가 나타났다. 김수현의 무효화 능력은 롱기누스의 창과 만나 무려 신께서 루시펠에게 ‘엘’을 빼앗은 일까지 무효로 처리해버렸다.

천사로 복권한 그는 하늘로 올라가 나팔을 풀었다. 그러자 루시펠의 모습을 지구 어디에 있어도 밤하늘의 별처럼 볼 수 있었다.

* * *

그린란드에 도착한 진설해는 고어텍스 패딩을 입었는데도 추위를 느꼈다. 어렸을 때 자신이 이누이트라고 여겼을 때는 칼바람에 볼이 터져도 콧물 한번 훌쩍이면 이겨낼 수 있었는데 도시에서 지내며 어지간히 약해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꽃잎처럼 휘날리는 눈 사이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을 확인했다. 한때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늑대와 함께 살았던 닌류는 고래 뼈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를 잡으러 온 에스퍼들에게 늑대와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패딩 모자를 깊게 눌러썼는데도 삐져나온 진설해의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숨을 뱉을 때마다 하얀 김이 눈앞에서 연기처럼 아른거렸다. 그 그립고도 아름다운 과거를 되찾으려면 그녀는 게이트에 들어가 괴수가 되어야 한다.

망설임은 없었다. 추악한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괜찮다. 걸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나는 눈밭에 발자국이 남았다.

진설해는 준비해온 칼로 빙판을 내리찍어서 구멍을 내고 손가락 열 개를 담아둔 지퍼백을 패딩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살얼음이 낀 핏물과 뒤엉킨 손가락을 물고기잡이를 하기 위해 뚫어놓은 듯한 구멍에 쏟아 넣었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났다. 하얀 머리칼과 붉은 눈을 가진 그는 샛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무지갯빛 오로라가 그의 등 뒤에서 펄럭였다. 설마 벌써 자신이 게이트에 들어온 건가 혼란스러웠다. 손바닥에 칼로 작은 상처를 내봤다. 그러나 피가 멈추지 않았다.

진설해는 이곳이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직 자신은 인간이었다. 차가운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손가락을 앙쿠타가 발견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아빠, 보고 싶어요.”

그녀는 얼음 구멍에 대고 외쳤다. 손으로 짚고 있는 얼음 구멍 주위가 빠르게 금이 갔다. 아아. 진설해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산소 방울이 위로 올라간다.

놀랍게도 세상이 앞뒤로 뒤바뀐 기분이었다. 똑같은 설원에 서 있었으나 다르게 느껴졌다. 하늘에 있던 천사가 보이지 않았다.

진설해는 자신의 옷차림이 달라진 걸 손으로 만져서 확인했다. 어린 시절처럼 순록 털가죽으로 만든 아트쿠스 상의를 걸치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가죽 바지를 입고, 순록 가죽으로 만든 장화를 신고 있었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곱게 어깨까지 흘러내린 그녀는 현실에서 잊힌 고성처럼 고래 뼈만 남았던 터를 쳐다봤다. 드디어 자신이 게이트 안에 도착했나 보다.

자신이 기억하는 그대로 이누이트 마을 사람들과 아버지가 고래 갈비뼈와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마른 풀을 깔고, 잔디와 모래를 뿌려 단단하게 다져놓은 튼튼한 닌류가 있었다.

하쿤이 멍하니 있는 자신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그리웠던 늑대의 목을 끌어안았다. 범고래 가죽을 벗기고 있던 아버지가 웃으면서 어서 오라며 자신을 반겼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에스퍼들에게 살해당한 이누이트 마을 사람들이 오늘 잡은 사냥감을 나눠 먹기 위해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 속에는 진설해의 첫사랑 미약스도 있었다.

그는 어릴 때와 달리 자신보다 키가 컸고 어깨에 북극곰의 털가죽을 짊어지고 있었다. 미약스가 자신을 보며 ‘내리는 눈’ 하고 불렀다.

이곳은 진짜일까. 거짓일까. 더 이상 그녀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비록 이곳에서 그녀가 괴수라 할지라도 이렇게나 완벽한 세상인데 그렇게라도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사실을 깨달은 ‘내리는 눈’은 자신보다 큰 사냥감을 잡거든 결혼해달라고 청혼했던 미약스에게 힘차게 달려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돌아왔어.”

그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잘 다녀왔어.”

이곳은 분명 이누이트족들이 믿는 죽은 자들이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는 쿠들리분(*천국)이리라.

* * *

하늘에 나타난 천사 루시펠은 나팔을 불어서 인간들에게 하늘의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그는 타락한 인간이 갱생의 여지가 있는지, 그렇지 않아 멸망시켜야 하는지 공명정대하게 판결해야 했다.

천사는 지상에 있는 동안 온갖 나쁜 인간을 만나보았다. 그러나 나쁜 자가 있는가 하면, 자신으로 인해 지독한 가시밭길을 걷게 되었으면서도 그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주는 선량한 자에게 용서받기도 했다.

“인간들은 들어라. 신께서 타락한 너희에 대한 심판을 나 성스러운 샛별, 천사 루시펠에게 맡겼으니 죄지은 자들은 두려워하라.”

천사의 음성은 그 크기가 크지도 작지도 않게 모든 사람의 귀에 들어갔다. 인종과 언어가 달라도 그들은 마치 바벨탑이 무너지기 전처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인간은 신에게 도달하고 싶다는 욕구로 하늘 높이 바벨탑을 지었다. 그러나 그 탐욕에 분노한 신은 탑을 쌓아 올린 인간들의 말을 서로 달라지게 하고 바벨탑에 번개를 내리쫓아 무너트렸다.

루시펠로 인해 잠깐이긴 하나, 인간은 그들이 저질렀던 수많은 원죄 중 ‘탐욕과 오만’이 얼마나 큰 죄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인간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제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 여겨 눈물을 흘렸다.

제네시스의 신도들은 메시아 님께서 종말을 선언하고 자신들을 신께 인도할 거라며 연신 찬송가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런 지상의 일과 달리 천사는 그동안 자신이 본 인간의 죄를 적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것이 얼마나 긴지 별처럼 떠 있는 천사의 발아래 땅까지 내려왔다.

세계 곳곳에 있는 게이트들에서 구구궁 진동이 울렸다. 게이트 안에 들어가 괴수를 잡고 있던 에스퍼들은 재빨리 그곳을 탈출했다. 그들은 오래전 지상에 발생했던 최악의 재난, 1차 대변혁을 떠올렸다.

에스퍼들은 이제 곧 게이트가 열리고 지상에 괴수가 나타나 인간을 모조리 몰살할 거라며 절망했다.

“그리하여 나 루시펠, 신을 대리해 판결한다. 인간의 죄가 크나 선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 기대할 만하다 판결하였다. 하여 인류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앞으로 너희가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겠다. 하늘에는 나뿐만 아니라 인간을 벌하기 위한 천사가 앞으로 네 명이 더 있다. 그러니 방심하지 말고, 죄지은 인간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는 자비로움에 감사하라.”

만일 김수현이 큰 죄를 지은 그를 용서해주지 않았다면, 악마 루시퍼는 지상에 머물며 점점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루시펠의 이런 판결은 김수현의 영향이 컸다. 그는 차기주와 함께 자신을 올려다보는 김수현을 내려다보며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초코바를 손에 움켜잡았다.

루시펠의 말이 끝나자 두루마리가 빠르게 돌돌 말려 올라갔다. 그는 지상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의 심판을 지켜보던 라파엘 또한 빠르게 날갯짓해서 루시펠과 함께 천계로 향했다.

그런데 금발 머리 대천사 미카엘이 지상에 내려오고 있었다. 라파엘은 미카엘의 목에 팔을 걸고 빠르게 비상해 천계로 데리고 들어갔다. 지상에 천사들이 다 사라지게 되자 게이트도, 천계와 연결된 통로도 닫혔다.

“미쳤어? 이게 무슨 짓이야. 신께서는 인간을 멸망시키라고 했어. 그런데 뭐? 집행유예?”

미카엘은 구름 위에 올라선 루시펠을 노려봤다. 라파엘의 팔을 떨쳐낸 대천사는 통로가 닫혀 내려가지 못했지만, 만일 아주 조금의 틈이 생기면 인간들을 죽이러 지상으로 내려갈 것만 같은 눈이었다.

라파엘은 김아영이 가지고 있던 창을 떠올렸다. 그게 미카엘을 죽이라며 신께서 뿌려둔 씨앗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차원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창이 어디 있나 살폈다. 그러다가 에스퍼들이 아공간이라고 부르는 천계의 창고에 있는 걸 발견했다. 드디어 다 끝났다.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당장 판결 취소해.”

“제 판결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미카엘.”

왕좌에 앉은 거대한 신께서 말싸움하는 세 천사를 굽어보았다. 천사들은 즉시 싸움을 멈추고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라파엘은 잽싸게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신께 인사 올립니다. 라파엘, 무사히 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라파엘은 김아영에게 들은 말에 모든 도박을 걸었다.

‘어찌하여 너는 인간을 죽이라는 나의 명령을 듣고서 세상을 구해놓고 임무를 완수했다고 하느냐.’

신의 물음에 라파엘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께서는 완벽하시기에 죄를 지은 인간을 벌하고자 하시는 동시에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아끼시어 보호하고자 에스퍼와 가이드라는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신께서 주신 또 다른 임무를 완수한 것입니다.”

라파엘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신께서는 자애롭게 미소 짓고 계셨다. 천사는 신에게서 전달받은 따뜻한 감정이 심장에서부터 번져오는 걸 느꼈다.

‘그래, 무사히 임무를 잘 수행했다, 라파엘. 약속대로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루시펠은 이미 소원을 들어줬으니, 또 들어주지 않을 것이야.’

루시펠은 공손하게 신께 인사를 올렸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아버지.”

라파엘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신께 소원을 빌었다.

“한때 우리와 같은 천사 가브리엘이었던 인간 김아영이 그 수명을 다해 죽거든 다시 천사로 복권하여 천계에 돌아오게 해주세요.”

신은 이미 라파엘이 그 소원을 빌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입꼬리를 조용히 휘었다.

* * *

김수현은 천사들이 하늘로 돌아가자 몸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를 감지했다. 그건 김수현뿐만 아니라 모든 에스퍼들과 가이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차기주는 믿기지 않아 자신의 손을 쥐었다가 폈다 하며 연약한 인간의 신체를 움직여봤다.

“이사님…… 파동 에너지가 사라졌어요.”

“나도 느꼈어.”

차기주는 믿기지 않았다. 태양 아래 있어도 눈이 시리지 않고, 바람이 불어도 칼날로 피부가 저미는 것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무효화 능력으로 가이딩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렇게 무딘 감각이 본래 인간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김수현을 바라봤다. 김수현은 가이딩 중독에서 벗어나, 혹시라도 차기주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건가 불안한 기색으로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난 더 이상 이사님께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게 되었어요.”

김수현의 말에 그가 “아니” 하고 부정했다.

“하지만 이사님, 더이상 제 가이딩이 필요하지 않잖아요.”

차기주가 난생처음 눈물이 고인 눈을 부드럽게 휘고, 붉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차가운 가면 같던 평소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그의 미소는 달콤했고 인상은 부드러웠다.

“널 사랑해. 가이딩과 상관없이 난 줄곧 널 사랑해왔어.”

김수현의 안에서 몰아치던 불안의 파도가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이보다 확실하고 진실한 사랑의 증거가 있을까. 그는 무효화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데도 자신을 필요로 하였다. 이제 차기주가 갈구하는 건 그의 고통을 앗아가는 신비한 힘이 아닌 오직 김수현의 행복일 것이다.

“나도 사랑해요, 이사님.”

김수현과 차기주는 피로 얼룩진 몰골이었지만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들은 떨어져 있는 동안 그리웠던 연인의 페로몬을 한참동안 맡다가 고개를 들어 키스했다.

* * *

철제 울타리로 둘러싸인 무덤가로 들어서는 이가 있었다. 그는 맨손으로 봉분과 그 주위에 자란 잡초를 뽑아내고, 더러워진 비석에 물을 뿌려 닦았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온 맥주 캔을 깐 그가 술을 둥근 흙더미 위에 뿌렸다.

“생각해보니까 넌 소주보다 맥주를 더 좋아했었지.”

무덤가에 바람이 불었다. 누웠던 잔디가 일어나며 사아아아 파도 소리를 냈다.

“형이 널 미워해서 버려뒀던 게 아니야. 그땐 나도 어렸고 힘들었어. 상황이 나아지면 너랑 병원도 같이 다니고, 흡. 좋은 옷도 사주고 맛있는 것도 먹이고 그러려고 했어.”

이미 죽은 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피부병으로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고, 그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동생은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알아, 변명인 거. 난 그냥 너보다 내가 소중했던 거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우리가 짐이었던 것처럼 나도 널 짐으로 여긴 거야.”

최유다는 죽어가는 메시아를 보면서 깨달았다. 저자를 자신이 죽여도 자신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는 걸. 그의 죄는 동생이 살아 있을 때 돌보지 않은 못된 형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걸 알았기에 그는 메시아가 다시 살아나도 억울하거나 분하지 않았다.

그는 튼튼해 보이는 나뭇가지에 밧줄을 걸었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가 날개를 펴고 날아간다. 하얀 깃털이 초록빛 잔디 위에 떨어진다.

푸른 하늘을 자유롭게 비행하는 저 새가 과연 천사들이 있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새는 산을 떠나 도시에 도착한다. 차도 위에는 자동차가 가득하고, 인도를 걷는 사람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송어 무리 같다.

높은 빌딩 사무실, 김 회장의 책상에는 죽은 아내의 사진이 놓여 있다. 그는 일하다가 이따금 아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잔을 기울여 위스키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었다. 스모키향이 입 안 가득 배면 도로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는 유리 창문이 가득한 위험한 빌딩 숲을 빠져나와 나무가 모여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김아영에게 문정인이 분홍색 편지 봉투를 내민다. 그녀는 그것을 거절하며 돌아선다. 문정인이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큰 소리로 운다.

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그런 문정인에 대해 소곤거린다. 김아영은 뒤돌아 자신보다 한참 큰 남자가 애처럼 우는 몰골을 본다. 그의 손에 든 연애편지를 작은 클러치백에 넣은 김아영이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문정인은 울음을 그치고 도도한 공주님의 뒤를 졸졸 따른다.

잠시 나뭇가지에 앉아 휴식을 취했던 새는 그곳을 떠난다. 그러다가 우연히 도시의 번화가에 도달한다. 배고픈 새는 보도블록 틈 사이에 낀 먹이를 먹기 위해 내려와 부리로 쫀다. 엄마의 손을 잡고 걸어가던 아이가 새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엄마는 안 된다고 말린다. 아이 울음소리를 들은 새는 푸드덕거리며 날아가 버린다.

아이와 엄마가 지나가자 그들에게 가려져 있던, 낡은 건물 유리창에 ‘Tattoo Parlor’이라고 적힌 붉은 네온이 드러난다. 가게 유리문을 열고 김수현과 차기주가 안으로 들어간다. 방울 소리가 청명하게 찰랑 울린다.

밀대로 바닥을 문지르고 있던 직원과 잠시 커피를 마시고 있던 타투이스트는 손을 잡고 들어오는 알파 커플을 보고 입이 떡 벌어진다.

타투이스트는 자신의 이상형처럼 생긴 알파가 연인의 이름을 손가락에 타투로 새긴 걸 기억하고 있었다. 설마 그 차기주가 ‘그 차기주’였다니. 뒤늦게 깨닫는다.

놀란 타투이스트에게 김수현이 말한다.

“이번에는 차기주한테 ‘김수현’ 새기러 왔어요.”

<완결>

에스퍼×에스퍼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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