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심판(1)
개인 엘리베이터를 탄 김아영은 호텔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대형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명이라곤 테이블에 놓인 주홍빛 불꽃을 뿜어내는 아로마 캔들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등진 이윤석이 야경을 보며 와인을 마셨다. 펜트하우스 객실이 어두워 상대적으로 도시의 불빛이 더 환하게 보였다. 마치 우주에 떠다니는 무수히 많은 별 사이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한때 천사였던 ‘빛나는 샛별’이 추락하여 ‘루시퍼’가 되었다. 그의 하얀 손에 들린 와인 잔에 피를 닮은, 섬뜩할 정도로 붉은 와인이 출렁였다.
“왔어요, 누나?”
인기척을 느낀 그가 뒤돌아 반갑게 맞이했다. 김아영은 침을 꿀꺽 삼키며 발아래 쓰러진 시체를 눈으로 쳐다봤다.
“아, 신경 쓰지 마요. 차기주가 내 핸드폰을 위치 추적하고 있더라고요. 파리가 꼬여서 잡은 것뿐이에요.”
“그래, 조심해야지.”
이윤석이 웃으며 한잔하겠냐고 물었다. 김아영은 차를 가져왔다며 손을 흔들었다. 오디오 벡터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 아리아」가 흘러나왔다. 성량이 풍성한 소프라노가 유리를 깨트릴 것처럼 높은음으로 노래했다.
“누나, 그거 알아요? 수현이가 차기주를 정말 많이 좋아하나 봐요. 네임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요. 수현이는 가이드가 아니라 에스퍼인데.”
김수현이 징계 심사를 받는 차기주를 구하기 위해 대회의실에 뛰어 들어간 일이 이윤석의 귀에도 도달했다. 김아영은 이윤석의 정보력에 속이 철렁, 내려앉으며 놀랐다.
그를 에워싼 노래에서 끊임없이 복수를 이야기해서일까? 큰 소리를 내거나 물건을 깨부수는 것도 아닌데 조용히 입꼬리를 들어 올린 이윤석에게서 엄청난 분노가 느껴졌다.
소프라노가 자라스트로를 향한 분노를 표출했다. 맑은 목소리는 다양한 음역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김아영은 오페라에 가려진 이윤석의 목소리를 듣고자 귀를 기울였다. 베타인 그의 입술에서 아름다운 알파에 대한 갈망이 느껴졌다. 오메가 페로몬이 함유된 화장품을 바른다고 오메가가 되는 건 아닌데 말이다.
어둠 속에서 유독 광택이 흐르는 입술이 움직였다.
“롱기누스의 창을 손에 넣었어요.”
“잘됐네. 어서 차기주를 죽이자, 윤석아.”
“누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 차기주 죽이고 하늘의 심판을 열 생각이에요.”
“뭐? 그럼 다 죽잖아. 나랑 수현이는 어쩌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리 말했다가 아차 했다. 어차피 악마가 된 이윤석은 하늘의 심판을 열 수 없었다. 이미 술에 취한 이윤석은 그녀의 표정에 드러난 당황스러움을 걱정이라 여기며 피식 웃어넘겼다.
“누나는 천사잖아요. 알아서 천계로 돌아가세요. 난 임무를 완수하고 신께 소원을 빌어 수현이를 챙겨서 올라갈게요.”
한 번 시간을 되돌린 적 있었던 김아영은 신께서 두 번이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이윤석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이윤석이 차기주를 죽여주지 않으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생겼어요. 세 번째 메시아에게 전화가 왔는데 수현이가 망친 게 그녀의 계획이었더라고요.”
김수현의 누나인 김아영은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스레 숙연해졌다. 두 손을 모아 쥐며 아무렇지 않은 척 이윤석에게 물었다.
“세 번째 메시아도 지상에 내려와 있었어? 누구야?”
“라파엘이요. 인간 이름으로는 황지윤.”
김아영은 황지윤 파트장이 세 번째 메시아였다는 사실에 어깨가 튀어 올랐다. 그녀와 가끔 마주치긴 했지만, 거기까진 몰랐다. 어쩐지 자신을 볼 때마다 의뭉스럽게 웃어서 이상하다 싶었다. 라파엘이 여성체로 변한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해 몰라봤다.
“이 일로 차기주가 대외적으로 가이딩 중독자가 아니게 되었잖아요. 황지윤이 어떻게든 가이딩 중독 재검사를 받게 하겠다는데, 재검사는 차기주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야 하는 거라 쉽지 않을 것 같대요.”
“그런 거라면 나한테 방법이 있어. 차기주와 우리 수현이를 갈라놓아서 가이딩만 못 받게 하면 되는 거지?”
“네. 무슨 방법 있어요?”
김아영은 김수현에게 진실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그 앤 지금 자신이 소설에 빙의했다고 믿고 있을 테다.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믿고 의지하는 김수현이라면 두 번째 삶에서 차기주가 김수현을 강간했던 일을 말해도 믿어줄 게 분명했다. 김아영은 두 눈에 흙이 들어와도 둘 사이를 허락해줄 마음이 없었다.
김수현이 차기주에게 경멸을 느끼며 도망치려고 하면 문정인에게 또 도와달라고 하면 됐다. 황지윤이 같은 편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차기주의 눈을 피해 해외로 도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계산을 끝낸 그녀는 같은 아군에게조차 동생이 차기주에게 강간당했었다고 말할 수 없어서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그런 게 있어. 아무튼 가능해.”
이윤석은 김아영이 김수현에게 무슨 말을 할지 짐작했지만, 모르는 척 해맑게 웃었다. 차기주를 꼭두각시로 가지고 논 장본인이 그인데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정말 든든하네요. 가이딩 못 받은 차기주를 롱기누스의 창으로 찔러 죽이는 건 일도 아니죠. 누나, 잘 부탁드릴게요.”
김아영은 걱정하지 말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차기주를 죽이는 게 이윤석의 몫이라면, 김수현과 차기주 사이를 원수지간으로 만드는 건 그녀의 몫이었다.
* * *
가이드 대기실에 모인 가이드들은 금색 실로 화려하게 자수를 놓은 쿠션으로 배를 가린 채 소파에 앉아 케이크를 포크로 조각내 먹었다. 가이드는 오메가이거나 베타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드물게 알파인 김수현은 언제나 대화의 화두로 올라섰다.
“저번에 복도에서 마주쳤는데 진짜 잘생겼더라고요.”
“맞아요. 거기다가 성격도 좋은 것 같던데. 진짜 아쉽다. 에스퍼였으면 한번 자빠트리는 건데.”
“에이~ 그건 아니죠. 에스퍼여도 뒤에 넣어달라고 하지 않겠어요.”
가이드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알파끼리 페어를 맺었으니 둘 중 하나가 성기를 삽입당하는 포지션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들은 그 역할을 가이드인 김수현이 맡았으리라고 봤다.
성소윤은 따라 웃으며 와인 오프너로 샴페인 코르크 마개를 따 다른 가이드들의 크리스털 잔에 술을 채웠다. 하얀 거품이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영롱한 황금빛 술 안에서 기포가 퐁퐁 솟아오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설해가 감자칩 봉지를 뜯었다. 그녀는 다른 가이드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만 붕 뜬 것처럼 행동했다. 성소윤이 힐끔 곁눈질하며 진설해에게 과자 봉지를 놓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진설해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손에서 감자칩을 놓았다.
가이드들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그녀를 성소윤이 모임에 끼워줬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가이드들은 진설해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분위기 파악 못한다며 가이드들이 그녀에게 싸늘한 눈짓을 보냈다. 성소윤이 중재자로 나섰다.
“자자, 다들 설해 씨한테 너무 모질게 굴지 말고 그만 받아줘요. 어디 이사님 가이드가 못 된 게 설해 씨 잘못인가요? 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있어서 그런 거지.”
성소윤은 진설해를 보호해주는 것처럼 굴었지만 실상 뜯어보면 깔아뭉개는 거였다. 가이드들은 계속 차기주에게 찝쩍대며 페어를 맺고 싶어 한 진설해를 못마땅해하며 째려봤다.
“어디 그게 인연의 잘못이겠어요? 사람이 뭔가 이상했던 거겠지.”
진설해는 억지를 부리며 괴롭히는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왜 자신이 이런 장소에 불려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성소윤이 다른 가이드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해서 오긴 했지만 별로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복수만 끝내면 그린란드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굳이 다른 가이드들의 오해를 풀거나 친해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설해 씨, 나 오렌지 주스 좀 가져다줘.”
가이드들 사이에서 여왕벌 노릇을 하는 가이드가 부탁했다. 본인이 일어나 냉장고에서 꺼내 오면 되는데 굳이 가장 안쪽에 앉아 테이블을 벗어나기 힘든 진설해에게 시켰다.
이건 일종의 서열 정리였다. 진설해는 짜증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가이드들의 무릎과 테이블 사이의 좁은 틈을 힘겹게 빠져나갔다. 등 뒤에서 키득거리며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주먹을 말아 쥐며 그냥 가이드 대기실을 나가버릴까 하다가 겨우 참아냈다.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낸 그녀가 잔에 주스를 따라 테이블로 돌아왔다. 오렌지주스를 부탁한 가이드가 그것을 받아서 그대로 진설해의 머리에 쏟아부었다.
“하여간 어지간히 나대. 매칭률 검사하다가 에스퍼가 중간에 가버린 건 네가 처음이야. 도대체 얼마나 못났으면 에스퍼가 그래. 그래놓고 자존심 없이 차기주 이사 가이딩 중독 치료하겠다며 가이딩실에서 세 시간을 기다려? 너 때문에 우리 가이드들이 창피해서 못살겠어.”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가이드들은 진설해가 에스퍼를 갖겠다며 한 추한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에스퍼보다 가이드 수가 현격히 적고, 에스퍼들은 가이드들에게 제발 가이딩해달라며 매달리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진설해만 저 혼자 돌연변이처럼 굴었다. 단체에 속하면 그 분위기를 따라야 하는 법이었다. 어디에 가든 무리에 섞여 들어가지 못하는 모난 돌은 정을 맞기 마련이었다.
“할 말 다 했으면 이만 가볼게요.”
진설해는 더 이상 이런 피곤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가이딩 대기실을 나서는데 성소윤이 뒤쫓아 나왔다.
“설해 씨, 괜찮아요?”
안 괜찮았지만,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한테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진설해는 이만 가보겠다는 인사만 전했다.
“가이딩실에서 씻고 있어요. 내가 새 옷 가져다줄게요.”
“고마워요, 소윤 씨.”
성소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기숙사가 아닌 서울에서 출퇴근하는 진설해가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거란 계산이 맞았다. 그녀는 진설해가 가이딩실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하는 동안, 새 옷을 가져다 놓고 사원증을 훔쳤다.
그리고 진설해의 핸드폰으로 김수현에게 문자를 보낸 후 그 내용을 지웠다. 핸드폰을 제자리에 두니 아주 감쪽같았다.
계획은 간단했다. 진설해의 핸드폰으로 김수현을 불러서 살해하고 현장에 진설해의 사원증을 버려두는 거다. 다른 가이드들이 진설해의 살인을 뒷받침해주는 증언을 해줄 게 분명했다. 진설해에게는 충분한 살해 동기가 있었다.
차기주를 갈망했으나 김수현 때문에 얻지 못했고 가이드들 사이에서는 그 일로 왕따를 당했다. 김수현과 차기주가 네임이 생겼다는 사실에 질투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진설해가 우발적으로 김수현을 살해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진설해가 아무리 부정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성소윤은 가이드들에게 진설해를 만날 때마다 김수현을 죽이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어서 무섭고 안쓰럽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해뒀다. 이미 동료들 사이에서 정신병자로 낙인찍혔으니 조사를 하면 증인들이 넘쳐날 터였다.
그러게 사회생활은 잘해야 하는 법이다.
* * *
김수현은 진설해에게 온 문자를 받고 센터 주차장으로 향했다. 거친 비포장도로를 올라야 하는 자동차들은 평범한 승용차보다 차체가 높고 바퀴가 커다랬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진설해가 보이지 않아 두리번거리며 찾는데 자동차 유리창에 자신의 뒤쪽으로 몰래 다가오는 형체가 비쳤다. 손에 칼을 들고 있는 성소윤이었다.
김수현은 들고 있던 에코백을 열어 두꺼운 전공 서적을 꺼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온 성소윤이 휘두르는 칼을 전공 서적으로 막아내고 그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악!”
성소윤이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김수현은 다른 무기는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 성소윤의 팔을 뒤로 꺾어 결박한 채 몸에 올라탔다.
“뭡니까.”
“젠장, 젠장!”
이렇게나 쉽게 당해버릴 줄 몰랐다. 같은 가이드라며 힘없는 존재로 착각한 탓이었다. 우성 알파인 김수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그녀를 제압해버렸다.
김수현은 분해서 아스팔트 위에 이마를 찧어대는 성소윤에게서 진설해의 사원증을 찾아냈다.
“진설해 씨 핸드폰으로 날 불러낸 게 성소윤 씨예요?”
“…….”
김수현은 단도 이외에는 별다른 무기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핸드폰으로 차기주에게 연락했다.
“이사님, 여기 주차장인데 에스퍼들 좀 보내주세요. 성소윤 씨한테 기습당할 뻔했습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고작 이런 일로 걱정시키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한때 김수현은 에스퍼 팀을 총괄하는 팀장이었다. 뭐 그 사실은 이제 자신만 아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네, 멀쩡해요.”
―최대한 빨리 보낼게.
전화 통화를 끊은 김수현은 성소윤에게 왜 자신을 죽이려고 했는지 물었다.
“수현 씨, 수현 씨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 큰 해악을 끼치는 존재예요. 수현 씨만 죽으면 인류는 구원받을 수 있어요. 수현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신께서 사탄과 사통한 죄를 용서해주실 거예요.”
들어볼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광신도에게 무슨 논리가 있다고 물었을까 싶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차기주가 에스퍼들을 직접 끌고 왔다. 그는 김수현 밑에 포박된 성소윤을 보고는 구두로 손가락을 지그시 짓밟았다.
“아아아악!”
“피아노 쳤다는 사람이 왜 이래. 손가락 열 개 다 날려줘?”
“으아아! 아파. 아파.”
차기주는 아파하는 성소윤을 보고도 발에 몸무게를 실었다. 김수현이 그녀의 위에서 일어나자 에스퍼들이 무기로 사용된 단도와 진설해의 사원증을 회수해갔다. 팔이 등 뒤로 돌려진 채 수갑이 채워진 성소윤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차기주를 노려봤다.
“너만 없으면 돼. 너만 없으면 우리 인간은 용서받을 수 있단 말이다.”
그 누구도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에스퍼들에게 붙들려 질질 끌려가면서도 그녀는 흐느끼며 찬송가를 흥얼거렸다. 그 기괴한 모습에 김수현은 섬뜩해져 팔뚝을 손으로 문질렀다.
“많이 놀랐지? 얼굴 창백한 것 좀 봐.”
차기주는 김수현이 칼을 보고 겁에 질린 줄 알았는지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았다. 과보호를 받는 기분도 나쁘지 않아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김수현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센터 생활 갑갑하지?”
“갑자기 그건 왜요?”
“메시아만 처리하면 집에 보내줄게. 밖에서는 이번처럼 광신도가 덤벼들어도, 메시아가 보내는 괴수가 달려들어도 내가 지켜줄 수 없어.”
차기주는 김수현이 방에서 벗어난 바람에 성소윤에게 습격당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센터 생활을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서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그렇지만 센터 생활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등하교할 때마다 헬기를 타는 건 힘들지만 그림 그리기에 최적화된 장소에서 아버지 없이 지내는 것과 차기주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건 좋았다.
누나한테는 미안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와 다시 맞닥뜨려야 해서 싫었다. 김수현은 차기주의 가슴에 얼굴을 처박고 웅얼거리는 소리로 물었다.
“나랑 동거할래요?”
“……정말 그래도 되겠어?”
“안 될 건 또 뭐가 있겠어요.”
“고마워, 수현아.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그들은 카메라 감독에게 큐 사인이라도 받은 배우처럼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어 입술을 겹쳤다. 퇴근하려고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있던 김 비서는 이 분위기에 차를 몰고 나가면 차기주에게 찍힐 것 같아서 자동차 시동을 켤 수 없었다.
설마 오래 기다리겠나 싶은 마음으로 기다렸다. 5분이 지나도 키스가 멈추지 않았다. 김 비서는 핸드폰을 음소거로 바꾸고 핸드폰 게임을 했다. 한 시간이나 주차장에서 서로의 입술을 빨아대는 알파들 때문에 그동안 넘을 수 없었던 레벨 99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김 비서는 입술이 퉁퉁 부어 있는 김수현과 신체 회복 능력으로 멀쩡한 차기주가 이제야 떠나는구나 싶어 핸드폰 게임을 종료했다. 그런데 김수현의 어깨를 끌어안고 가던 차기주가 잠시 뒤돌아 김 비서를 째려봤다.
관음증 환자 취급하는 시선에 김 비서는 울상을 지었다.
* * *
징벌방 문이 거칠게 열렸다. 칼에 찔릴 뻔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김아영은 당사자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김수현의 몸을 샅샅이 쓸어내렸다. 그림 그리기에 몰입해 있었던 그는 붓을 빼앗기고 다치지 않았노라 보여주기 위해 천천히 제자리에서 돌아야 했다.
어디 한 구석 다치지 않은 걸 본 김아영이 어울리지 않게 욕을 내뱉었다.
“그 미친 X이 누굴 건드려. 그딴 X은 다시 사회에 나오지 못하게 사지를 갈가리 찢어서 죽여야 해.”
“누나…….”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김아영이 고아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시뻘게진 눈으로 씩씩거렸다.
“나 정말 안 다쳤어. 그런 사람 때문에 누나가 더러운 말 입에 올리는 거 싫어.”
“내 동생, 이리 와. 이게 다 차기주 때문이야.”
김아영이 자기보다 큰 김수현을 끌어안겠다며 까치발을 들어서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여 안긴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님이랑 이 일이 무슨 상관이라고 그 사람 욕해.”
“너 몰라서 그래? 성소윤이 차기주 가이딩 못 받게 하겠다고 너 죽이려고 한 거야. 취조실에서 다 자백했어.”
애초에 성소윤 같은 이상한 사람을 들인 센터가 이해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성소윤의 돌발 행동은 예견된 일이었다. 차기주를 죽이고 싶어 하는 제네시스라는 단체에 소속된 신도였지 않은가.
“그거야말로 이사님이 잘못한 거 아니잖아. 도대체 누나는 왜 이렇게 이사님을 싫어해. 물론 이사님이 나한테 잘못한 것도 있지만 이젠 정말 잘해준단 말이야.”
김아영은 답답한 소리나 하는 김수현의 머리를 놓았다. 그러더니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퉁퉁 두드렸다. 김수현은 갑자기 자해하는 누나의 손목을 붙잡아 말렸다.
“수현아, 너 회귀한 거 기억하고 있지.”
“……어? 그걸 누나가 어떻게…….”
자신만 회귀한 기억이 있을 거라고 여겼던 김수현은 당황해 말을 잇지 못했다. 김아영이 해줄 말이 있다면서 그를 침대에 앉혔다. 김수현은 힐끔 천장에 달린 감시 카메라를 쳐다봤다.
김아영도 감시 카메라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는지라 핸드폰을 꺼내 시끄러운 헤비메탈 노래를 틀었다. 그녀는 동생의 옆자리에 바짝 앉아 손으로 귓가를 가리고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우리 세계는 두 번의 회귀를 했어. 이번이 세 번째야.”
그건 김수현도 아는 바였다. 다만 두 번째 생은 첫 번째 생과 달리 기억이 파편처럼 나뉘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김아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차기주를 사랑하게 된 동생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너 두 번째 생에서 차기주에게 감금된 채 계속 강간당했어.”
그녀의 말은 소설 『농락』에서 본 내용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기억 속 자신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옥탑방에 살았던 고등학생이었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지방으로 돈을 벌러 떠난 누나가 있었다.
선배와 자신은 옥탑방에서 난 화재로 죽었다.
자신의 기억과 김아영의 기억이 일치하지 않았다. 실감하지 못해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김수현에게 김아영이 확인 사살을 날렸다.
“네가 미치고 나서야 차기주가 풀어줬어. 아버지가 제네시스를 후원했다는 이유로 우리 집은 망해서 아주 허름한 옥탑방에 살게 되었고. 넌 그 집이 태어날 때부터 살았던 곳이라 착각하며 네가 고등학생이라고 믿었어.”
“아…….”
이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농락』에 나온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차기주가 메시아와 손을 잡은 줄 모르는 누나가 보기에는 자신이 미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미쳐서 기억이 이상해진 게 아니라 차기주가 메시아와 손을 잡고 자신을 세뇌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소설은 끝내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자살 시도만 하는 김수현을 갖기 위해 차기주가 세뇌 능력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하며 끝났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설의 제목처럼 차기주가 정말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니. 손이 덜덜 떨리며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입 안이 바짝 마른 나머지 쓴맛이 느껴졌다.
충격을 받은 김수현을 끌어안고 김아영은 연신 등을 쓸어줬다.
“수현아, 도망쳐. 절대 차기주를 믿어선 안 돼. 그가 쓰고 있는 가면은 다 가짜야.”
“하지만…… 하지만 누나. 그게 난…… 난…….”
우연히 화장실에서 만난 알파에게 억제제를 주며 도와줬던 친절한 차기주가 떠올랐다. 우리의 인연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에 머무를 수 있었으나, 첫 만남 이후 우리는 계속 서로를 갈망하게 되어 끝내 섹스 파트너로나마 이어졌었다.
무효화 능력에 가이딩 효과가 있는 줄 몰랐던 자신과 차기주는 그 문제로 상처뿐인 관계를 끝내야만 했다. 그리고 차기주는 김수현이 해적에 의해 죽을 뻔하고 나서야 그를 사랑하는 걸 인정했다. 정석훈이 총을 들고 난리 치지만 않았어도 우린 동거하며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좋은 파트너로 살았을 터였다.
그런데 왜 두 번째 삶에서는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일그러져버린 걸까. 도망치려고 하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겁주면서 찾아내는 그 포식자 같은 성정이 문제였던 걸까. 눈시울이 매워지더니 결국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알아, 너 힘든 거. 이 진실을 받아들이기 아픈 거.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외면한 채 있을 수는 없었어.”
김아영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김수현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가득해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기 말에 상처 입은 동생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저 자신이 지켜낼 미래의 동생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뿐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믿는 신념을 위해 뭐든지 하는 성소윤과 다를 바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성소윤은 손에 칼을 들었고, 그녀는 입에 독을 발랐다는 것뿐.
“황지윤 파트장이 너 도망칠 생각이면 도와준댔어. 해외로 나가서 지내다가 차기주가 가이딩 중독 치료하면 들어와. 차기주는 널 사랑하는 게 아니라 가이딩 중독으로 집착하는 거니까.”
차기주가 자신을 사랑하는 건 가이딩 중독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아는데 주변에서 한결같이 같은 말을 하니까 흔들렸다. 김수현은 차기주가 자신을 강간했다는 사실보다 기억을 조작하면서까지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슬펐다. 꼭 그렇게 물건처럼 소유해야만 했던 것일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타인에게 사랑하라 감정을 강요하는 건 도리어 차기주가 김수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강간당한 기억이 있다면 이런 배부른 생각을 하지 못할 테지만 아직은 그 점에서 배신감을 느꼈다. 깊게 생각에 빠진 김수현에게 그녀가 말했다.
“수현아, 난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집에서 그를 유일하게 아끼고 보호해줬던 절대적인 지지자이자 가족인 그녀가 하는 말은 타인이 내뱉는 말보다 몇백 배 더 큰 힘을 지니고 있었다.
진설해가 입에 올렸을 때는 차기주의 감정을 의심치 않았건만 땅속 깊게 박힌 줄 알았던 마음의 주춧돌이 흔들렸다. 김수현은 첫 번째 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차기주가 정말 가이딩 중독인지, 단지 그것 때문에 자신을 곁에 둘 뿐 사랑하진 않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줘.”
“그래, 잘 생각했어.”
그녀는 김수현의 마음이 벌써 돌아선 것처럼 웃었다.
그렇지만 김수현에게서 갑자기 차기주에 대한 애정이 손바닥 뒤집듯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지금 그를 흔드는 건 차기주가 자신을 억지로 취했다는 범죄 사실보다 차기주가 진짜 자신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그 여부가 컸다.
만일 그가 차기주에게서 도망친다면 그건 차기주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일 것이다. 김수현을 사랑한다는 걸 증명하는 방법으로는 그것만큼 확실한 게 없으니 말이다.
가이딩 중독 증세에서 벗어난 차기주가 자신을 버리고 진설해에게 간다면, 김수현은 깨끗이 이 사랑을 정리하고 다른 좋은 인연을 위해 떠날 생각이다.
일단 오늘 저녁 식사 시간에 살짝 떠보기로 했다. 차기주가 회귀한 기억을 가졌는지, 아닌지 직접 묻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날 진짜 사랑했나요? 그런데 어떻게 강간할 수 있었어요? 내 기억을 조작한 건 내 의사는 필요 없다는 거잖아요. 내가 진짜 이사님을 사랑하든, 안 하든 쉽게 갖고 싶은 마음뿐인 거 아니에요?’
감정이 격해지지 않았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나 보다. 소설 속 내용이 아닌,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그 일은 거대한 생선의 가시처럼 삼키기 아픈 것이었다.
김아영이 이만 가보겠다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생각에 잠겨 배웅하러 나오지 않는 동생을 보며 발을 떼지 못하다가 징벌방을 나섰다.
창살이 달린 창문 너머로 붉은빛이 들이쳤다. 노을이 살금살금 방 안까지 걸어 들어왔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수록 붉게 물들었던 하늘은 짙은 남색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밖이 컴컴해졌다.
조명을 켜지 않은 실내는 어둠 속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잠금장치가 해체되는 기계음이 들리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불도 안 켜고 뭐 하고 있어.”
차기주가 어두운 공간으로 걸어 들어왔다. 평소에는 철제 계단을 밟는 발걸음 소리만으로도 그의 방문을 알아차려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곤 했었는데,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얼마나 자신이 넋 나가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가 이불을 들어 김수현의 머리에 뒤집어씌웠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화내려고 하는데 조명 불이 켜졌다.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밝아지면 눈이 아플까 보호해준 것이다.
이렇게나 다정한 당신이 왜. 도대체 왜 그랬단 말인가.
“오늘 기분 안 좋은가 보다. 마침 네가 좋아할 만한 영화 DVD 가져왔어. 같이 보자.”
누가 어르신 아니랄까 봐 DVD를 구해왔다. 그냥 텔레비전을 켜면 영화나 드라마를 결제할 수 있는데 말이다. 평소에는 몰랐던 그와 자신의 나이 차이가 이런 사소한 곳에서 느껴져서 방금까지의 고민이 무색하게 웃음이 나왔다.
이불을 통과한 빛에 눈이 익숙해진 김수현은 고개를 빼꼼히 드러냈다. 양복 재킷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어둔 그가 와이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빨간 고무장갑을 손에 낀 그는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싱크대에 쌓인 머그잔을 설거지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소리와 그의 넓은 등이 불안한 마음을 안정케 했다. 메시아가 자신을 선배라고 했던 건 다 거짓말이었던 거다. 눈앞에 그토록 찾았던 선배를 두고도 김수현은 나이가 다르다는 단순한 사실에 사로잡혀 몰라봤다.
침대에서 일어나 싱크대로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목이 움츠러들어 짧아진 게 보였다. 자신을 무서워해서 이러는 건 아닐 테고 긴장한 것이리라. 왜 그는 나이도 어린 자신을 어려워하는 걸까.
차기주의 뒤에 서서 그의 허리를 두 팔로 휘감았다. 배터리가 다 된 로봇처럼 머그잔에 수세미를 문지르던 손이 서서히 멈췄다. 김수현은 그가 애써 바지 안에 넣어놓은 하얀 와이셔츠를 끄집어내고 그 안에 손을 넣었다.
탄탄한 배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손이 슬금슬금 가슴 쪽으로 접근했다. 와이셔츠가 차기주의 가슴을 움켜잡은 김수현의 손에 걸려 끝까지 말려 올라갔다.
공기 중에 노출된 젖꼭지가 서늘함에 뾰족하게 선 게 느껴졌다. 그 앙증맞은 게 귀여워서 손가락에 끼우고 돌렸다.
“윽.”
고무장갑에서 미끄러진 머그잔이 싱크대에 나뒹굴었다. 그가 싱크대 턱을 잡고 자신의 손을 받아냈다. 김수현은 가슴을 만지는 손과 달리 놀고 있는 왼손으로 벨트를 풀었다. 지퍼를 내리고 바지 안에 갇힌 드로어즈 밴드를 잡아 내렸다.
엄지와 중지를 굽혀 좆을 잡은 채 흔들었다. 두꺼운 기둥 때문에 한 손으로는 절반밖에 감싸지지 않았다. 문득 아르헨티나 수컷 오리가 세상에서 가장 큰 페니스를 가졌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물론 고래와 같이 덩치가 큰 생명체와 비교하면 훨씬 작지만, 자기 몸길이와 성기의 비율로 따지면 아르헨티나 오리를 따라올 생명체가 없다고 했다. 차기주는 전생에 자기 몸길이만큼 큰 페니스를 가진 오리였을 것이다.
“으, 김수현.”
뒤에 버티고 선 김수현은 차기주의 목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피가 흘러 와이셔츠 목깃이 붉어졌으나 곧 언제 다쳤냐는 듯 멀쩡해진 피부를 혀로 핥았다.
그들의 관계에 있어서 받아내는 포지션은 늘 김수현이었지만 이번에는 김수현이 불룩 솟은 좆을 차기주의 엉덩이에 문질렀다.
자신의 것은 바지 안에 갇혀서 차기주의 뒤를 꿰뚫어줄 수 없음에도 빨간 귀를 보자 욕구가 절로 충족되었다. 수줍음 많은 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며 손목을 움직였다. 뻑뻑한 성기를 계속 훑어내자 쿠퍼액이 나왔다.
거칠게 손을 흔드는 와중에 차기주의 엉덩이에 하체를 부딪쳤다. 몸이 앞으로 밀리지 않기 위해 싱크대 턱을 붙잡은 차기주의 손이 하얗게 질린 게 보였다. 김수현은 그 손 위에 왼손을 겹쳤다.
“손목이 떨어질 것 같거든요. 그만 싸요.”
정력이 좋아서 좋긴 하지만 이건 문제다 싶었다. 차기주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불거졌다. 뒤에 붙어 있어서 침대에서만 짓는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질끈 감은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손에 한꺼번에 많은 양의 정액이 쏟아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르가슴을 느끼는 덩치 큰 알파가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의 속내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살을 부대끼는 게 행복했다.
그리고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그의 진심이 궁금하고 또 의심스러워졌다. 원래 빛이 강하면 그만큼 그림자도 커지는 법이니까.
김수현은 질척한 손을 쏟아지는 수돗물에 씻었다. 차기주가 열을 가라앉혔는지 고개를 들었다. 옆으로 비켜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갑자기 관계를 가졌는데도 전혀 동요하지 않아 혹시 자신만 즐겼나 싶었다.
감정이 상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를 피했다. 차기주는 설거지를 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처럼 머그잔을 마저 물에 헹궈냈다. 젖은 빨간 고무장갑을 벗어낸 그가 손을 씻곤 냉장고 문을 열어 식자재를 꺼냈다.
그는 그렇게 말없이 요리를 시작했다. 그의 다정함이 좋았는데 혹시 죄책감 때문에 저러는 건 아닐까 하는 고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를 오해하고 싶지 않았다. 김수현은 당근을 채 썰고 있는 이의 넓은 등을 보고 물었다.
“혹시 나 강간한 거 기억나요?”
차기주는 당근을 썰어야 하는데 실수로 손가락을 벴다. 도마 위에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김수현은 당근 조각을 손가락으로 착각하고 놀라서 차기주의 손을 낚아챘다. 다행히 손가락이 잘린 것은 아니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칼질하는데 어디다가 한눈을 팔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널 왜 강간해요.”
차기주가 텅 빈 눈으로 대답했다. 어지간히 당황했는지 갑자기 존댓말을 썼다. 김수현은 그의 손을 붙잡고 아일랜드 식탁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구급상자를 찾으러 가구 서랍들을 뒤지는데 그가 말렸다.
“다 나았어. 그만 찾아.”
그는 싱크대에서 피를 씻어냈다. 당황해서 에스퍼라 다쳐도 금방 낫는 걸 잊었다.
“사람이 걱정하면 그 걱정 좀 받아달라고요. 아무리 회복된다지만 안 아픈 게 아니잖아요.”
차기주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도마에 있는 피에 젖은 당근을 버렸다. 도마를 설거지한 그가 냉장고 문을 열고 쪼그려 앉았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서 우나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손에 집은 양파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진 거였다.
도마에서 달그락거리며 칼질하는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감정의 동요 따위 없다는 듯 양파를 써는 그를 보자 화가 폭발할 것 같았다.
‘미안하다는 소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왜 그랬는지 이유라도 말해주든가.’
그동안 두 번째 생에 대한 기억이 있었으면서 모르는 척, 아무 말 없이 자신과 연인 사이가 된 것도 괘씸했다.
“그만해요. 나 밥 안 먹을 거니까.”
차기주는 칼을 씻어 싱크대 하부 장에 있는 칼꽂이에 꽂았다. 지문 인식으로 여닫을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걸 처음 봤을 때는 감금당한 자신이 그를 공격할까 봐 저래놓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반대였다.
어쩌면 그는 자신을 이곳에 가둔 순간부터 2회차 생을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징벌방을 고친 것도, 자신이 수도 없이 자살 시도 했던 걸 기억해서……. 그런 자에게 속아서 몸도 주고 마음도 줬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슬퍼졌다. 어리석은 자신을 탓하며 차기주를 그린 캔버스를 찾았다.
페인팅 나이프를 들고 캔버스에 내리꽂았다. 유화 물감이 덧발라진 캔버스를 찢는데 그가 자신의 손에서 페인팅 나이프를 빼앗았다.
“화내고 싶으면 나한테 해. 네 그림에 하지 말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사님은 어떻게 이 순간까지 냉정할 수 있어요?”
“넌 내가 괜찮아 보여? 방금까지 내 목을 물고 좆을 흔들어주던 연인이 날 지옥에 처박았는데? 혹시 날 비참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랬으면 성공이야.”
차기주가 그림 도구 중 자해 도구가 될 만한 것들을 쓸어 담았다. 작업실에서 연필과 붓, 페인팅 나이프를 챙겼고 화장실에 뛰어 들어가서는 칫솔과 면도기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놓친 게 없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안을 헤집었다.
거기에 왜 수저와 젓가락이 들어가는지는 차기주 뇌를 들여다보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절대로 무기가 될 수 없을 물건까지 한데 모였다. 마치 자신의 주위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듯 구는 차기주가 어이없어서 빈정거렸다.
“그거 가지고 되겠어요? 캔버스 틀을 부숴서 내가 목이라도 찌르면 어쩌려고요.”
그가 그것까지는 생각 못 했는지 정신없이 물건을 쓸어 담다가 멈춰 섰다.
“그래, 캔버스는 네가 진정되면 돌려줄게.”
차기주가 벗어둔 양복 재킷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에스퍼들이 징벌방 문을 열고 들어와 물건들을 가지고 나갔다. 캔버스도 차례대로 빠져나갔다. 물감과 크레파스만 남겨졌는데 그림은 대체 어디에 그리라는 건지 싶었다.
그 말을 끝으로 차기주가 폭풍이 휘몰아치듯 물건이 사라진 이곳을 떠났다. 대신 30분 뒤, 김 비서가 음식을 포장해서 왔다. 비닐봉지를 뒤져보니 말랑한 실리콘 수저만 나왔다.
“나 설마 또 감금당한 거예요?”
“아닙니다.”
김 비서는 말과 달리 김수현의 사원증을 훔쳐서 달아나버렸다.
“저, 저, 저 망할 안경! 도둑이야!”
도와달라고 외쳐도 누가 와주겠는가. 사원증을 빼앗긴 채 갇힌 김수현은 허탈해져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긁어서 부스럼 만들지 말고 도주부터 할걸 그랬다.
도망친 차기주한테 잔뜩 열받은 김수현은 빨간 물감을 묻힌 손을 문질러 바닥에 글을 적었다. 그 개자식이 붓까지 가져가서 이게 뭐란 말인가.
차기주 당장 와!
CCTV로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테니 이 글을 볼 거라 여겼다. 그러나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글자를 추가했다.
비겁한 새끼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기다렸다. 붉은 물감이 묻든 말든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톡톡 팔뚝을 두드리며 불편한 심기를 티 냈다. 인내심이 점점 짧아지는 게 느껴졌다.
30분 뒤 김수현은 ‘씨발 개새끼 발기부전 걸려라’라는 욕을 남겼다. 그런다고 그가 돌아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후회할 짓 말고 당장 오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고 시원한 맥주 캔을 꺼냈다. 사실 술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성을 잃었다는 신호이긴 했다.
김수현은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차가운 맥주를 빠르게 마셔서 머리가 찡하게 울렸다. 눈을 찡그리고 침대까지 걸어갔다.
일단 이것으로 차기주가 회귀 전 기억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누나가 거짓말한 게 아니었다. 정말 어쩌자고 차기주는 그런 짓을 저지른 걸까.
다 마신 맥주 캔을 침대 밖에 던져버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놈에게 우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척했다.
그러다가 정말 어이없게도 진짜 자버리고 말았다. 조용해진 실내에 잠금장치가 풀리는 기계음이 울렸다. 조심스럽게 구두를 벗은 검은 양말을 신은 칼발이 발걸음을 뗐다. 차기주는 한숨을 내쉬며 물감으로 더러워진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는 화장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셨다. 바닥 청소를 하고, 새 수건으로 김수현의 물감 묻은 손을 닦아줬다. 술에 취해 발그레한 뺨을 보면 영락없는 술꾼이다. 손가락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닦아낸 그는 우렁각시 노릇을 하고 그렇게 가버렸다.
아침이 되어 술이 깬 김수현은 누군가 왔다 간 흔적에 씩씩거리며 베개를 던졌다.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로부터 2주 동안 김수현은 착실하게 주중에는 대학교에 강의를 들으러 가고 나머지 시간에는 징벌방에 갇히는 생활을 반복했다. 수업 중에는 자동차 안에서 기다리던 에스퍼가 강의실 안까지 쫓아 들어와 어디로 샐 수도 없었다.
식사를 가져다주는 김 비서에게 차기주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바쁘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이런 식이면 페어 계약이고 뭐고 헤어지는 거라며 화내봤지만, 김 비서가 그것까지 차기주에게 전해줬는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니 말이다.
너무 답답해서 혹시 2회차에 감금된 자신도 도망간 차기주를 부르기 위해 자해한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떻게 하면 이 겁쟁이를 데려와 대화할 수 있을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다이빙했다. 차기주에 대한 빡침을 담아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때리자 베개 밑에 있던 리모컨이 눌렸는지 텔레비전에서 빛과 음성이 흘러나왔다. 짜증 내며 전원을 끄려고 하는데 뉴스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오클라호마 교도소 탈옥 사건으로 충격에 빠졌던 미국에서 비극적인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지난달 감옥을 탈옥했던 테디 외 일당 3명이 A고등학교 학생 5명을 살해했다는 소식입니다.
뉴스에서 나오는 정보는 놀라웠다. 학생 B가 평소에 자신을 괴롭혔던 가해 학생들을 살해해달라는 이메일을 테디에게 보냈다. 테디는 돈만 주면 뭐든지 해주는 해결사였다. 테디는 3만 달러에 일반인에 불과한 불량 학생들을 죽여줬다. 정말 돈이면 뭐든 하는 집단인 것이다.
테디 무리는 숙련된 A급 에스퍼들로만 이뤄져 국제 안보 연합 소속 에스퍼들과 인터폴이 추격하고 있음에도 꼬리를 못 잡고 있다고 했다.
김수현은 핸드폰으로 테디에 대해 검색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항상 핸드폰을 빼앗지 않는 차기주를 생각하면 핸드폰 정보도 이미 보고 있다는 의심을 해봐야 했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끄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으면 만날 생각을 하게 만들면 됐다. 제 발로 직접 찾아오게 해주겠다. 물론 차기주에게 쉽게 잡혀주지는 않을 거다. 그의 속을 바짝 태우고 인내심이 바닥까지 떨어져 속내가 다 드러날 때쯤 다시 만날 거다.
자신의 일인데 자신이 몰라서는 안 됐다. 차기주에게 정당하게 사과받고 자신을 강간한 이유를 들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두 번째 삶에서 메시아를 통해 자신을 세뇌했는데 굳이, 내숭을 부리고 자신에게 다정하게 굴 이유가 없었다. 세뇌당한 자신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 사랑할 테니까.
이건 차기주가 우리의 관계를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어 했다는 뜻이다. 가장 합리적으로 의심 가는 상황은 메시아가 가진 세뇌 능력이 차기주에게도 발동했다는 거다.
만일 이 가설이 맞는다면 차기주가 자신을 강간한 건 자발적인 행위가 아닌 것이다. 그 또한 자신과 같은 피해자일 뿐이다. 분명 그건 그 자신도 알고 있을 텐데 아무 말 안 하고 꼭꼭 숨으려고 드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차라리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빌기라도 하든가.
메시아 새끼를 반드시 족쳐야겠다는 분노가 단전에서부터 끓어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교회에서 만나 자기가 선배라고 거짓말을 했을 때 그냥 반 죽여버릴걸 그랬다.
후회해봤자 이미 지난 일이었다. 일단 징벌방에서 탈출하는 게 급선무다. 핸드폰으로 누나에게 연락했다. 2주면 참을 만큼 참았다.
“누나, 나 갇혔어.”
―안 그래도 누나 매일 징벌방 문 앞에서 에스퍼들과 대치 중이야.
자신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에스퍼들이 문 앞을 지키고 서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있나 보다. 김수현은 자신을 구해주기 위해 나선 김아영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일단 차기주한테 나 가이딩 필요하니까 들어온다고 해.”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이 잠시 후 열렸다. 이렇게까지 꼬아서 가야 할까 싶긴 하지만 겁쟁이가 자신을 안 만난다고 하니, 그를 만나려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김아영이 들어와 핸드백에서 검은색 락카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CCTV를 찾아내 카메라 렌즈에 페인트를 분사했다. 하여간 누나도 보통 성격은 아니었다.
그녀는 저번처럼 핸드폰으로 시끄러운 헤비메탈 음악을 틀었다.
거칠게 일렉트릭 기타 줄을 뜯는 소리와 8옥타브는 될 것 같은 로커의 고음, 지진이라도 일으킬 듯한 드럼의 울림이 한데 모이자 바로 옆에서 이야기해도 잘 듣지 못할 만큼 강렬한 소음이 되었다.
김수현은 김아영과 나란히 붙어 아일랜드 식탁 의자에 앉았다. 귀에 입을 대고 계획을 속삭였다. B군에게 접근해 테디의 이메일을 알아내라는 말을 전해 들은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범죄자들과 어울리는 건 위험해.”
“그러면 차기주한테서 나 도망치게 도와줄 에스퍼가 이 지구상에 있어? 난 없을 것 같은데?”
“……한번 알아볼게. 문정인 에스퍼라면 해줄지도 몰라.”
김수현은 자신을 구해주러 왔으나 결국 차기주가 무서워 되돌려놓았던 그 못난 에스퍼를 기억 속에서 찾아냈다. 그를 조력자로 쓰는 데 있어서 대가가 없었을 리 없었다. 아름다운 데다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김아영을 원하는 에스퍼들은 많았다.
문정인도 그 에스퍼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녀와 페어를 맺겠다며 자신을 데리고 적당히 도망치는 시늉을 하겠지. 그럼 누나는 그 대가로 가이딩을 핑계 삼는 그와 잠자리를 하게 될 테다. 그건 죽어도 싫었다.
“난 그 새끼 내 매형으로 모실 생각 없어. 잊었어? 잠든 나를 징벌방에 버리고 간 놈이야. 썩은 동아줄을 붙잡아서 뭐 해. 어쩌면 그때 차기주한테 프락치로 섭외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부탁해.”
“……그럼 어떡해. 누가 널 여기서 빼내주냐고.”
김아영은 이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테디 일당 같은 흉악한 범죄 집단과 동생이 함께 다니면 어느 순간 그건 도피가 아닌 납치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시울을 붉혔다.
메시아가 롱기누스의 창으로 가이딩을 못 받아 약해진 차기주를 죽일 때까지만 참아달라고 말할까 했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김수현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누나, 사실 나 이사님 싫어져서 도망치는 거 아니야.”
“뭐?”
김아영은 그게 무슨 미친 소리냐며 진저리 쳤다. 그것도 모자라 김수현의 손을 떨쳐내며 흥분을 못 이겨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메시아 알지? 차기주 죽이려는 센터의 주적. 그 미치광이한테 세뇌 능력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2회차 생에서 차기주가 날 강간한 것 같아.”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김아영은 여태 차기주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자신의 소중한 동생을 고통스럽게 했으니까. 그래서 죽이고 싶었다. 악마와 손을 잡고 롱기누스의 창까지 손에 넣게 정보를 넘겼다. 그런데 자신이 차기주를 오해한 거라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놈이 네 감정을 가지고 놀며 얼마나 널 괴롭혔어. 네가 괴로워서 총으로 자살까지 했잖아. 내가 흑, 그때 서재에서 죽은 널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어떻게 누나를 두고 죽어! 이 나쁜 놈아!”
그녀는 원망을 담아 김수현을 주먹으로 때렸다.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그녀의 말을 듣던 김수현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나 자살 안 했어. 누나, 나 자살한 줄 알았어? 정석훈이랑 실랑이 벌이다가 오발탄에 맞은 거였어.”
김아영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느라 입을 크게 벌렸다. 김수현은 자신이 죽은 뒤, 그 죽음이 자살로 위장되었다는 사실에 표정을 굳혔다. 게이트 안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죽어 가슴 한편에 응어리처럼 맺혀 있던 정석훈에 대한 미안함이 싹 가셨다.
“설마 나 죽고 정석훈이 차기주한테 죄 뒤집어씌웠어?”
“그게…… 네가 유언에 다 차기주 때문이라고 써서. 당연히 난 차기주 때문인 줄 알았지.”
어느새 두 사람은 귓속말 없이 대화하고 있었다. 도청하고 있던 에스퍼는 녹음을 시작했다. 시끄러운 헤비메탈 록을 제거하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난 유언 같은 거 쓴 적 없어. 죽을 생각 따위 전혀 없었으니까.”
김수현은 일그러진 얼굴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차기주와 난 연인이었어. 그 사람이 나한테 잘못한 건 전혀 없었다고. 우리 사이, 누나한테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 그런데 정석훈, 이 미친 새끼가 뜬금없이 알파도 되면 자기도 되는 거 아니냐면서 찾아와 총을 가지고 자살 쇼를 벌였어. 난 그거 말리다가 휘말려 죽은 것뿐이야.”
김아영은 장례식장에 찾아온 차기주에게 뜨거운 육개장 국물을 부었던 일이 떠올라 눈을 질끈 감았다. 그건…… 어차피 회귀해서 사라진 일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죄가 없는 게 아닐까?
‘그래, 맞아. 난 잘못한 게 없어.’
쿡쿡 찔리는 심장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무 죄 없는 차기주를 죽이려고 했으면서 자신은 죄가 없다니? 웃기는 소리다.
이 모든 사실을 안 그녀는 더 이상 차기주를 죽일 수 없었다. 이전처럼 차기주를 증오할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신께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할 의지를 잃은 천사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어깨뼈가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두 손을 뒤로 보내 등을 감쌌다. 김아영은 날개뼈 안에 감추고 있던 날개를 꺼냈다. 소중한 날개를 살피는데 투명하고 거대한 손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아,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날개는 안 돼요.”
“누나,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하늘에서 구름이 걷힌다. 그리고 오직 김아영에게만 보이는 손이 내려온다. 김수현은 겁에 질린 누나를 끌어안고 달랬다. 어떻게, 대체 어디서 날개가 나타난 것이냐 물을 정신도 없었다. 헤비메탈 록이 나오던 핸드폰에서 어느새 성가대의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아직 이차 성징을 거치지 못해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아볼 수 없는 맑은 목소리가 노래를 부른다. 신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악기는 인간의 목소리이기에 그것을 빌려 세계는 신께 경외를 표한다.
―할렐루야
끊임없이 신을 찬양하는 목소리.
―전능의 주가 다스리신다
―할렐루야
김수현은 아일랜드 식탁에 놔둔 핸드폰을 손에 잡았다. 그것을 끄기 위해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도 작은 기기 안에서 끊임없이 천상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능의 주가 다스리신다
―할렐루야
헨델이 작곡한 「메시아」였다. 김수현은 어떻게든 노래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핸드폰에서 배터리를 뽑아냈다.
―전능의 주가 다스리신다
―할렐루야
이제 인정해야만 한다. 이건 그냥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아니었다. 김수현은 배터리와 분리된 핸드폰을 놓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 무엇도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김아영의 어깨뼈에 달려 있던 날개가 뜯겼다.
“으아아아, 아버지!”
한때 가브리엘이었던 천사는 날개를 잃고 인간 김아영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잃어버린 신성함과 영광에 슬퍼하며 무릎 꿇고 빌었다. 신께서 장난감 집을 보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징벌방 안을 들여다봤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차기주를 죽이고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다시 천계로 돌아가고 싶어요.”
신은 진작 이랬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이미 인간의 감정을 알게 된 가브리엘이었다. 그가 그동안 그녀에게서 위대한 이름 ‘엘’을 회수하지 않은 건 그녀가 세계를 멸망시키는 톱니바퀴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김아영에게는 차기주를 죽여야 한다는 의지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너는 더 이상 천사가 아니다.’
“저는 천사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감정 따위 버리겠습니다.”
‘그렇다면 네 동생을 죽여라. 그는 인류의 존폐와 관련된 열쇠다. 네 동생만 죽이면 모든 게 연계되어 이 세상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세 번째 메시아는 김수현을 위해 시간을 되돌릴 일도 없으니 드디어 내 뜻이 바로 서겠구나.’
허공에서 투명한 빛이 모여들었다. 김아영은 손을 뻗어 그 빛을 잡았다. 빛이 창으로 변했다.
‘이 세상을 구할 구세주를 죽여라. 그러면 날개를 돌려주마.’
김아영은 자신을 걱정하는 눈과 마주했다. 동생이 설명을 바라고 있었다.
“누나, 이게 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허공에서 창이 나타난 거야. 찬송가는 또 뭐고.”
“수현아, 누나가 다 이야기해줄게. 누나는 사실 이 세상을…….”
‘멸망시키러 온 천사야’라는 뒷말은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손에 들린 창을 눈 근처에 위치하게 들었다. 의식을 창 끝에 집중하고 왼쪽 다리를 전방에서 후방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왼쪽 다리를 뒤로 차고 오른쪽 다리를 앞으로 끌었다.
하반신이 앞으로 향한 상태로 상체를 비틀어 창을 던졌다. 몸 전체가 창에 딸려가듯 끝까지 던지는 데 힘을 실었다.
김아영이 창을 던진 곳은 징벌방을 들여다보고 있던 신의 시선 끝이었다. 그녀가 던진 창이 천장에 박혔다.
‘역시 너는 이제 완벽한 인간이로구나.’
신의 음성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는 신께 완전히 버림받았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손을 뒤로 보내 등을 만져봤으나 매끄러울 뿐이었다.
“……누나, 정신 차려.”
김수현은 등을 손톱으로 긁어대는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김아영은 천장에 박힌 창을 올려다보다가 뽑아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내려온 첫 번째 메시아였지만 이젠 그 역할이 바뀌었다.
찬송가가 흘러나오던 핸드폰은 언제 그랬냐는 듯 검게 죽은 화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김아영은 도청을 방해하는 용도로 틀어놓은 헤비메탈 록이 꺼졌다는 걸 신경 쓰지 못한 채 말했다.
“수현아, 잘 들어.”
그녀의 이야기는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난 구세주의 탄생을 알렸던 20년 전 크리스마스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갔다. 김수현이 죽고 그녀가 세상을 멸망시켜 회귀하고, 두 번째 생에서 소원을 빌기 위해 자살했다는 이야기까지. 두 번째 메시아가 시간을 되돌려 세 번째 생이 만들어진, 여태까지의 모든 진실을 밝혔다.
“넌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난 구세주야.”
“말도 안 돼.”
김수현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뒷걸음질 쳤다.
“우리 메시아들이 널 사랑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어. 그 또한 신의 의지였어.”
김아영은 인간이 되고 나서야 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분께서 인류를 멸망시키라 하셨으면서 동시에 세상을 지킬 구세주를 자신의 동생으로 태어나게 하고 지키게 했는지 말이다.
그녀는 김수현을 사랑했기에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시간을 되돌려 세상을 구해냈다. 만일 김수현이 죽지 않았다면 동생과 행복하게 지내느라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고 살았을 것이다.
두 번째 메시아 루시펠의 경우도 김수현을 사랑하게 되어 시간을 되돌려 세상을 구해냈다. 김수현은 존재 자체만으로 세상을 구해냈기에 ‘구세주’로 불리기 마땅한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은 김수현이 ‘살아 있다’라는 경우였다.
앞으로 어떤 전개가 펼쳐질지 모르겠으나 김수현으로 인해 이 세상은 결국 또다시 구해질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신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신은 완벽한 존재이다. 신에게는 부족함이나 불확실함은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죄를 지은 인간을 벌하고자 하는 신의 의지가 있다면, 자신이 만든 인간을 지키고자 하는 또 하나의 의지 또한 함께했다. 어느 한쪽의 의지만 가진다는 건 또 다른 것에 대한 결핍을 의미한다. 하지만 신에게는 결핍이 없었다.
그리하여 신이 인류를 멸망시키라 천사를 내려보내고, 인간에게 에스퍼와 가이드의 힘을 줘서 살아남을 수 있게 돕는 모순이 발생했다. 김아영은 신께 두 번째로 받은 숨겨진 임무를 이제야 깨달았다.
“난 세 번째 메시아를 이 창으로 죽이든, 설득해 천계로 돌려보내든 어떻게든 처리할게. 그러니 수현이 넌 두 번째 메시아에게 있는 롱기누스의 창을 빼앗아.”
전투형 천사가 아닌 라파엘은 치유 능력을 이용해 센터의 가이드팀 팀장이 되었다. 그녀는 전면으로 나서서 차기주를 노리지 않았다. 이번에 가이딩 중독자라며 김수현과 차기주를 분리해 무력화시키겠다는 작전을 세운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성소윤이 김수현을 죽이겠다며 급습한 일도 황지윤과 연관되어 있을지 몰랐다. 김수현만 없으면 차기주가 가이딩을 못 받는다는 결과물은 똑같지 않은가.
황지윤은 간사하게 주변을 움직여 적을 궁지에 모는 스타일이었다. 그녀가 아는 친구 라파엘이라면 어떻게든 그랬을 것이다. 김아영은 손에 쥔 창을 꽉 움켜잡았다. 천사였을 땐 동료이자 친구였다고 해도 자신의 동생을 건드리는 건 용납 못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제발 알아듣게 말해.”
김아영은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김수현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많이 혼란스러울 터였다. 그렇지만 그는 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이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가 견뎌야 할 무게였다.
“두 번째 메시아는 이윤석이야.”
놀란 눈이 부릅떠졌다. 김수현은 어딘지 이상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밝고 쾌활한 친구를 떠올렸다. 성당에서 자기가 선배라고 했던 하얀 머리칼과 붉은 눈을 가진 사내와는 도저히 일치되지 않았다.
“윤석이가 널 좋아하는 거 알지?”
“…….”
왜 메시아가 그런 거짓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 녀석은 선배인 척해서라도 자신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거다.
그렇다. 선배였던 차기주는 김수현을 속이는 메시아를 보고도 변명하지 못했다. 그건 그만큼 그가 자신을 강간했다는 치명적인 죄를 숨기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차기주에게서 도망치는 걸 도와달라면서 이윤석을 데리고 다녀. 그리고 기회를 봐서 롱기누스의 창을 훔쳐. 차기주를 죽이지 못하게 해.”
김수현은 감당할 수 없이 많은 진실이 휘몰아치는 탓에 얼굴을 손으로 감싸 가렸다.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동안 그가 겪었던 모든 회귀가 어째서 일어났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이윤석을 설득해 차기주와 싸우지 않게 말리는 거야. 그렇지만 최악의 상황에는 네 친구를 죽여야 해. 수현아, 할 수 있어?”
“할 수 없어도 어떡해. 해야지.”
“그래, 이래야 내 동생이지.”
그녀는 창을 들고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문을 향해 걸어가는 순간, 그보다 먼저 밖에서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두 사람의 시선은 동시에 현관문에 모였다.
* * *
진설해는 가이딩실 침대에 누워 있는 에스퍼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성기가 빠져나가면서 안을 채우고 있던 정액이 흘러내렸다.
독을 생산하는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약속대로 1급 유독성 독을 생산해 유리병에 담아주었다. 그녀는 작은 유리병을 손에 쥐었다.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걸 어디에 쓰려고 달래요. 나 이거 걸리면 큰일 나요.”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 이름 거론될 일 없으니까.”
“아, 씨. 내가 미쳤지. 미쳤어.”
에스퍼는 독을 주고 후회하는지 성질을 부리며 벗어둔 팬티와 바지를 꿰입었다. 그러곤 진설해에게 다시 돌려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지훈 씨, 혹시 당신 가이드가 당신의 네임을 가지는 일을 상상해보셨어요? 우린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거예요. 우리를 반씩 닮은 아이를 낳고 영원히.”
에스퍼가 내밀었던 손을 주먹 쥐어서 회수했다.
“제발 들키지 마요.”
“고마워요.”
에스퍼가 뒤돌아 먼저 가이딩실을 떠났다. 진설해는 담배를 입술에 물었다. 라이터에 불을 붙이고 담배 끝에 가져다 댄 채 숨을 들이켰다. 숨을 내쉬니 입 밖으로 뿌연 연기가 빠져나갔다.
양복 재킷에 넣어둔 오르골을 꺼내 태엽을 감았다. 맑은 금속 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차피 가이드로 살아가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몸을 굴리는 신세였다. 목적을 위해 잠자리하는 일에 자괴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성소윤 덕분에 차기주에게서 김수현을 떼어내는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차기주도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을 느껴보면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게 될 테다.
후일담이라면 성소윤은 진설해의 사원증을 훔쳐 살인사건을 조작하려고 한 죄와 더불어 김수현에 대한 살인미수로 25년 형 징역을 살게 되었다.
살인미수치고는 처벌 수위가 세다. 김수현이 차기주의 페어 가이드이자 네임이 발현한 가이드라는 점을 들어 재판부가 가중처벌 한 탓이었다.
진설해는 김수현에게 별 유감이 없지만, 차기주가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김수현이 죽어야 한다고 여겼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운 그녀는 멀쩡한 재떨이를 버려두고 나무 테이블 위에 비벼서 담배를 껐다. 그러곤 가이딩실에 딸린 샤워실로 걸어 들어가 찬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에서 더러운 몸을 씻어냈다.
또렷해진 정신으로 그 누구보다 확고하게 목표를 되새김질했다. 샤워를 끝낸 그녀는 젖은 몸을 대충 수건으로 말리고 옷을 입었다.
가이딩실을 나와 센터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양복 재킷 주머니 한쪽에는 독약이, 다른 쪽에는 오르골이 굴러다녔다. 문 앞에서 죽치고 있는 에스퍼 두 명이 방문객을 보고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독약을 쥔 채 그들에게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김수현 가이드 만나러 왔는데 들어가도 되죠?”
“무슨 일로 오셨죠?”
“황지윤 파트장님 심부름하러 왔어요.”
에스퍼들은 심부름이 무엇인지 물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그녀는 잠시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가 의심을 살까 봐 얼른 대답했다.
“김수현 가이드한테 발현한 네임, 사진으로 찍으러 왔어요. 전산 기록에 남겨야 해서요.”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오래는 안 됩니다.”
에스퍼가 자기 사원증으로 문을 열어줬다. 그녀는 김수현 혼자 있을 거란 생각으로 발을 디뎠다가 실내를 보고 멈칫했다. 김아영의 손에 창이 들려 있었다. 김아영이 손을 얼른 뒤로 숨겼으나 키가 작은 탓에 뒤로 우뚝 선 창은 가려지지 않았다.
천장이 살짝 금 가 있는 게 창으로 부순 듯 보였다. 설마 천장을 통해 도망치려고 한 걸까? 그렇게나 비효율적이게? 하긴 밖에 서 있는 에스퍼 둘을 저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보다는 탈출 확률이 높겠다.
김수현은 밖에 서 있는 에스퍼들이 창을 볼까 봐 얼른 진설해의 손목을 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문고리를 놓으니 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무슨 상황인지 궁금하긴 한데 관여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듣지 않을게요.”
김아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걸 어떻게 가지고 나가나 고민하는데 김수현이 화구통을 가져왔다. 큰 도화지를 돌돌 말아서 넣고 다니는 용도였다.
김수현은 화구통에 창을 넣어봤다가 창대가 길어서 도로 꺼냈다. 그는 아일랜드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 가 식탁 다리에 창대를 끼우고 빠르게 잡아당겼다. 나무로 된 창대가 식탁 다리에 부딪히며 부러졌다.
에스퍼 팀 팀장으로 살았던 기억이 많은 도움이 됐다. 에스퍼 훈련소에서 익힌 훈련 방법을 통해 쉽게 창대를 부러트린 그는 화구통에 창을 숨기고 김아영에게 넘겼다.
“조심해, 누나.”
“응, 너도.”
김아영이 징벌방을 빠져나갔다. 김수현은 부러진 창대를 매트리스 밑에 넣고 진설해를 쳐다봤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진설해는 양복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독약 병을 손으로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시선 또한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사방을 옮겨 다니는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김수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는 그녀의 행동이 몹시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차…… 차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그래요.”
김수현은 경계심을 품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보리차를 꺼내 잔에 따랐다. 왜냐하면 뜨거운 물도 충분히 무기로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김수현이 나쁜 맘을 품었다면 적의 얼굴에 뜨거운 찻물을 끼얹어 시야를 빼앗고 목에 칼을 꽂아 바로 사살해버릴 터였다.
가이드인 그녀는 에스퍼처럼 훈련받지 않아 그럴 수는 없을 테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지금 진설해는 정석훈이 총을 들고 서재에 찾아왔을 때처럼 불안해 보였다.
김수현은 공격에 대비하며 진설해와 마주 앉았다. 갑자기 그녀가 자신에게 왜 적의를 품고 나타났는지 유추해봤다. 빠르게 퍼즐을 맞춰 나갔다. 우리가 함께 움직이게 된 이유가 얼마 전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진설해가 차기주의 가이드가 되어야 했던 이유, 아버지. 그녀의 아버지는 공개수배 중 에스퍼들의 추격에 압박감을 못 이겨 자살했다.
저번에 만났을 땐 차기주가 가이딩 중독이라 자신을 사랑하는 거라고 이간질하더니, 그것이 안 통하자 직접 죽이러 온 모양이다.
차기주에게 복수하려면 자신을 죽이는 것만큼 확실한 게 없긴 했다. 아마 성소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 걸 보고 그 사실을 깨달았겠지.
김수현은 여전히 주머니에서 빼지 않는 그녀의 손을 확인하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만일 주머니에 총이나 칼이 있다면 어떻게 방어해야 하나 하고. 아일랜드 식탁을 그녀 쪽으로 밀어버리고 깨진 찻잔으로 진설해의 대동맥을 긋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있는데 그녀로부터 생뚱맞은 부탁을 받았다.
“수현 씨, 저기 모기 날아다녀요. 좀 잡아주세요.”
그는 뒤돌아서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벽을 확인했다. 진설해는 얼른 독약 병을 꺼내 김수현의 찻잔에 부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진설해는 재빨리 병을 주먹에 쥐어서 감췄다. 제자리에 앉은 김수현은 나중에 잡겠다고 했다. 진설해는 어떻게든 김수현이 보리차를 마시게 하려고 연거푸 자기 앞에 놓인 걸 들이켰다.
“목이 많이 마르시나 봐요.”
“네.”
진설해는 김수현이 제발 보리차를 마시라고 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찻잔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거 알아요? 설해 씨, 에스퍼 훈련소에 들어가면 암살 대비 훈련을 받아요. 그중 독살에 관해 공부할 때, 의심스러운 사람이 연거푸 무언가를 마시며 식음을 유도한다면 독살을 의심하라고 하죠.”
“…….”
눈앞에 있는 존재가 얼마 전까지 평범한 미대생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도대체 에스퍼 훈련소는 언제 들어가서 그런 걸 배운 걸까. 가이드 소속인 그가 어떻게?
“제 보리차 좀 마셔보시겠어요?”
진설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눈물이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보리차 안으로 섞여 들어갔다.
“날 죽이려고 한 게 차기주 이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예요?”
“……수현 씨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전 그놈을 찢어 죽이지 않으면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고요! 차기주, 그 개새끼도 나만큼 괴로웠으면 좋겠어요. 아니, 나보다 더!”
김수현 또한 김아영이 누군가로 인해 죽었다면 진설해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건 차기주가 아니었다. 슬픔에 빠진 채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녀는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도청 중이던 에스퍼들이 징벌방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이 군화를 신은 채 실내로 들어섰다.
김수현은 얼른 앞에 놓은 찻잔을 손으로 감싸고 무효화 능력을 사용했다. 에스퍼들이 진설해의 팔을 뒤로 꺾어서 바닥에 엎어놓고 수갑을 채웠다. 찻잔에 든 보리차는 증거품이라며 가져갔다.
진설해는 맨발로 징벌방에서 끌려 나와 머리가 산발이 된 채 지하실로 밀어 넣어졌다. 지상층에 있는 취조실과 달리 이곳에 들어온 죄인은 살아서 나갈 수 없었다.
첫 번째 고문은 빛이었다. 일주일 동안 잠을 재우지 않는다고 들었다. 두 번째 고문은 몸이 옴짝달싹할 수 없이 좁은 공간에 가둔 채 일주일 세워두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무릎이 망가진다고 들었다. 세 번째 고문은 수백 마리의 벌이 있는 공간에 갇히는 거였다. 그렇게 벌에게 계속 물리면서 일주일이 지나면 컴컴한 방에 보내졌다. 그곳에서는 물도 음식도 주지 않아 죄인은 천천히 아사해 죽어갔다.
들었던 대로 강렬한 조명 때문에 눈이 아팠다. 진설해는 눈을 감아도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 때문에 괴로웠다.
그녀는 몇 시간 만에 피폐해진 몰골로 눈을 감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빛으로는 사람이 죽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척 고통스러웠다. 일주일만 지나도 그녀의 눈은 멀어버릴 터였다.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갇혀 있으니, 시간 개념이 사라져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배가 고프긴 하지만 극도로 고프지 않은 걸 보면 하루나 이틀이 지난 건 아니었다.
검은 군화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에스퍼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겨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취조실로 이동할 겁니다. 똑바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진설해는 자신이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취조실로 올라간다는 사실에 ‘살았다’라고 생각했다.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눈물을 질질 흘리며 걸었다. 파르르 얇은 눈꺼풀을 떨면서 들어 올렸다.
취조실에는 이미 차기주가 와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다목적 절단 가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가락을 잘라내기 위함이리라. 그녀는 주먹을 말아 쥐고 그 앞에 앉았다.
어린 시절 첫 사냥을 나서는 딸에게 아버지는 이누이트족의 전설을 이야기해줬다.
악령들이 가득한 아디번에 사는 거인 소녀가 있었다. 거인 소녀, 세드나는 기회만 있으면 고기를 움켜쥐고 마구 먹어대는 난폭한 아이였다.
어느 날 그녀는 배가 고프다며 부모님이 잘 때 그들의 팔다리를 먹기 시작했다. 놀란 부모는 세드나를 작은 배에 태워 바다에 버렸다. 세드나는 살겠다며 뱃전을 붙잡았지만 아버지는 세드나의 손가락을 잘라내 바다에 빠트렸다.
세드나의 손가락들이 바다에 빠지자 고래와 물고기 등으로 변했다. 아버지는 우리 이누이트가 사냥하는 이유가 잠든 사이에 세드나한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물고기도 귀여운 물범도 불쌍하지 않아 진설해는 첫 사냥을 잘 해낼 수 있었다. 어른들에게 훌륭한 사냥꾼이라고 인정받은 자신은 잔뜩 신이 났다.
아킨이 물범의 가죽을 벗겨서 자신의 몫으로 줬다. 고기는 다 같이 나눠 먹는 것이었다. 자신은 썰매를 타지 않고 하쿤과 설원을 폴짝폴짝 뛰어 닌류로 돌아갔다.
“아빠, 내가 세드나의 손가락을 가져왔어요. 이제 아무리 깊은 잠에 들어도 안전해요.”
“내 멋진 내리는 눈. 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냥꾼이 될 거다.”
아버지가 자신을 번쩍 들어 올리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손가락이 사라지면 태엽을 감을 수 없기에 양복 재킷 주머니에서 오르골을 꺼냈다. 태엽을 감아 마지막일지 모르는 이누이트의 노래를 들었다.
* * *
조명이 어두운 방에 헤드폰을 낀 에스퍼가 있었다. 도청 장비와 연결된 전선들이 뒤죽박죽 바닥을 가로질렀다. 각종 조절 단추가 달린 콘솔은 소리를 지정해 크게 키우고 줄이는 기능이 있었다.
그는 컴프레서로 과도한 사운드를 압축해 듣기 좋게 만들고 시끄러운 헤비메탈 록은 제거했다. 탄산이 빠진 음료수 캔을 들어 마시며 귓속말하는 남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귀가 좋은 그는 아주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해 노트에 빼곡히 그들의 대화를 적었다. 그러나 이내 헤비메탈 록이 끊기고 주파수가 맞지 않을 때 나는 지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만 났다.
에스퍼는 헤드폰을 귀에 더 밀착시키기 위해 손으로 눌렀다. 그런데 갑자기 수십 번 들어도 들리지 않았던 음성이 흘러나왔다. 김수현과 김아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허억, 이게 뭐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유소년 합창단이 노래를 부르는 듯한 앳된 소리였다. 그들의 가느다란 미성을 듣자 하늘의 문이 열리는 환상이 보였다. 빛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데 꼭 신을 영접한 기분이었다. 에스퍼는 눈앞에 아기 천사들이 날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봤다.
순식간에 빛이 사라지고 어두운 밀실로 돌아왔다. 그는 너무 놀라 다시 녹음 파일을 되돌려 들어봤으나 찬송가를 부르는 대목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일이었다. 에스퍼는 노트에 적은 내용만 보고서로 작성해 차기주에게 올렸다.
* * *
“파트장님, 지금 뵐 수 있을까요?”
김아영은 카디건으로 창을 둘둘 말아 숨긴 채 파트장실에 방문했다. 화구통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김아영이 계속 들고 다니기에는 눈에 띄었다.
뜬금없이 사무실에 놓여 있는 전신 거울에 잔뜩 어깨가 솟은 채 걸어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김아영은 더욱 카디건 뭉치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아영 씨, 무슨 일이야?”
김아영은 파트장실 문을 닫으며 책상에 앉아 있는 황지윤에게 다가갔다.
“라파엘.”
“……이런, 루시퍼가 말한 모양이네.”
엄지로 이마를 문지른 황지윤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너 루시펠이 타락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연락한 거구나.”
“응, 내 손을 더럽혔다가 나 또한 타락하면 어떡해. 지상에서 천사로 지내다가 돌아가야지.”
황지윤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거울 속에 서 있는 남자는 완벽하게 황지윤과 똑같이 따라 움직였다. 거울에 비친 황지윤의 모습은 남성,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황지윤의 모습은 여성이었다. 라파엘의 본체는 남성체인 동시에 여성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황지윤은 새로운 걸 탐구하는 학자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김아영을 기웃거렸다. 그런 황지윤의 행동에는 인간을 깔보는 천사의 오만함이 미약하게나마 담겨 있었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김아영은 기분이 나빴다. 한때 자신도 저랬을 거란 생각에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런데 설마 가브리엘 너까지 타락할 줄이야. 아니, 이건 타락보다 더 안 좋은 건가? 완전한 인간이 된 것 같은데.”
황지윤은 김아영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품평회를 열었다.
“인간의 태를 빌려 태어나서 그런가? 껍데기가 변하지는 않았네.”
김아영은 카디건으로 숨기고 있던 창을 빼 들었다.
“라파엘,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김아영은 황지윤의 목에 창을 들이밀었다. 금방이라도 피부를 찢고 그 숨을 끊어버릴 것같이 날카로운 칼날에 형광등 조명이 비쳐 아른거렸다.
“신께서 이 세상을 구할 구세주를 죽이라며 나에게 주고 가셨어. 그러나 난 수현이를 죽이지 않을 거야. 그것 또한 신의 의지이니까.”
황지윤은 목젖을 실룩거리며 힘겹게 침을 삼켰다. 긴장한 그녀가 조심스럽게 창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김아영이 사나운 목소리로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쳤다.
“넌 천사 중 가장 똑똑하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야.”
“그래, 그분께서는 완벽하시지.”
“널 죽이고 싶지 않아. 천상계로 돌아가 줘.”
“하지만 가브리엘. 네가 인간이 되고, 두 번째 메시아는 악마가 되었어. 내가 사라지면 누가 하늘의 심판을 열지? 우리는 신께 받은 임무를 완수해야 해.”
“신께서는 인간을 보호하고자 하셔. 네가 협조해주면 인류를 구할 수 있어. 그리고 넌 또 다른 신의 의지를 따른 것이기에 임무를 완수했다며 소원을 빌 수도 있겠지.”
김아영은 자신이 이런 말을 하면 라파엘이 천계로 돌아갈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래서 아군이었던 적이 더 무서운 거다. 이렇게나 약점을 꿰뚫고 있으니 말이다.
라파엘은 치유의 힘을 가진 천사였다. 유혈 사태는 천사의 본능에 반하는 일이었다. 아무도 죽이지 않고 천상계로 돌아가고도 신께 임무를 완수했다며 상을 받을 방법이 있다니. 충직한 천사는 흔들렸다.
황지윤은 가만히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좋은 선택이었으면 싶었다.
“내가 아니어도 네 번째 메시아가 내려올 거야. 아마 이번에는 미카엘이겠지. 그는 우리와 차원이 달라. 전투형 대천사니까. 아무리 차기주여도 이길 수 없어.”
미카엘의 이름은 ‘누가 하나님과 같으랴’라는 의미였다. 그는 신을 가장 빼닮은 강력한 대천사이자 천사들의 우두머리였다. 하나님의 말을 전파하는 가브리엘, 갓 태어난 샛별 루시펠, 치유의 힘을 가진 라파엘과는 격이 다르다.
“게이트를 완전히 닫을 거야. 천사와 악마가 지상에 더 이상 머물지 않으면 지구는 다시 예전처럼 에스퍼와 가이드가 사라진 채 평화로워지겠지. 그 힘은 신이 인간에게 스스로를 지키라며 부여한 힘이니까.”
“너…… 정말 인간이 됐구나. 영원히 천상계로 돌아갈 마음이 없어.”
“그래, 그러니까 너라도 돌아가. 라파엘, 그리고 지상에 내려오려고 하는 미카엘을 붙잡아줘.”
라파엘이 천상계로 돌아가고 루시퍼가 죽으면 지구에서는 게이트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터였다. 김아영은 이제 인간이기 때문에 이 문제와 무관한 존재가 되었고.
가능하다면 이윤석 또한 천계로 돌려보내 주고 싶었지만, 그는 위로 올라가봤자 유황불이 들끓는 지옥에서 고통받게 될 뿐이었다.
차라리 지상에 머무를 때 롱기누스의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게 나았다. 신께서 이윤석을 자신처럼 인간으로 만들어주면 좋을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황지윤은 한때 천사였던 인간 김아영을 지켜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김아영은 더 이상 창을 겨누지 않았다.
“그래, 돌아갈게. 그 대신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행복해, 가브리엘?”
김아영은 황지윤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라파엘은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는 친구였다. 그녀는 입꼬리를 최대한 위로 끌어 올리고 답했다.
“응.”
“그래, 그럼 됐어. 어차피 나도 돌아가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니까 꺼져줄게.”
라파엘은 생각보다 잘 설득당해줬다. 물론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이밀고 협박한 거긴 하지만.
황지윤은 오랜만에 같이 차라도 마시자면서 커피 믹스를 가져왔다. 그녀들은 사무실 한편에 마련된 손님 응접용 소파에 앉았다.
김아영은 무릎 위에 창을 올려두고 달콤한 커피 믹스를 입에 머금었다. 종이컵 끝단을 이로 살살 물어서 펴내고 있는데 황지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그냥 무턱대고 올라갔다가는 네가 생각한 계획이 엉망이 될 거야. 알지? 내가 미카엘을 아무리 붙잡아도 한계가 있어.”
“응. 차기주에게 이 창을 주고 메시아를 죽이라고 할 거야. 어차피 그들은 서로를 주적으로 여기고 있어.”
“쉽지는 않겠네. 둘 다 신을 죽이는 창을 가지고 있으니.”
“수현이한테 이윤석이 가진 창을 빼돌리라고는 했는데…… 솔직히 가능할 거라고 보고 있지는 않아.”
황지윤은 호호, 불어가며 커피를 마셨다. 완벽한 계획을 위해서는 루시퍼가 죽는 순간, 라파엘이 천상계로 올라가야 했다. 지상으로 하강하는 미카엘을 붙잡고 못 내려가게 해야 완전히 천상계와 지상계가 연결된 통로가 닫힐 테니까.
“커피 잘 마셨어. 난 이만 차기주한테 무기나 주러 가야겠다.”
“그런데, 가브리엘. 너 그 녀석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임무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걸로 아는데.”
김아영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그녀는 차기주에게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일에 대해 오해해서 미안했노라고 사과해야 했다.
“아아, 알겠어. 그래, 가봐.”
황지윤은 김아영에게서 무슨 감정을 읽어냈는지 모르겠지만 손을 휘휘 저으며 밝은 표정으로 보내줬다. 김아영은 파트장실을 나와 곧장 차기주가 있는 이사실로 향했다.
그녀는 그가 앉아 있는 책상에 카디건 뭉치를 올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김아영 씨.”
“롱기누스의 창과 대적할 수 있는 또 다른 필멸의 무기예요.”
차기주는 노란색 카디건에 그런 능력이 있겠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오클라호마 교도소에 있는 범죄자 에스퍼들이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 건 그곳에 묻혀 있는 롱기누스의 창 때문이었어요.”
차기주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성경에 나오는 무기의 이야기를 대뜸 꺼내는 김아영의 정체를 그는 방금 도청 기록지를 보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쉽게 넘겨선 안 되는 정보였다.
회귀하기 전 기억이 있는 차기주는 메시아가 진짜 천사의 날개를 꺼내는 걸 봤기 때문에 그녀가 가브리엘이라는 사실도 믿을 수 있었다. 그는 카디건을 헤치고 창대가 부러져 식칼처럼 짧아진 창을 찾아냈다.
“메시아가 롱기누스의 창을 가지고 이사님을 죽이려고 해요. 이사님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죽이려고 찾으셨죠. 그와의 싸움에서 이기세요. 그게 이 세상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에요.”
그는 아공간에 김아영이 전달해준 창을 넣었다.
“이 계획에서 김수현 씨는 뺍시다. 이윤석이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숨겼던 건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이윤석은 센터 에스퍼들이 잡으러 갈 겁니다.”
김아영의 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움찔 놀란 그녀는 신발 안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낮게 턱을 수그렸다. 굳은 듯 잘 움직이지 않는 입을 벌리고 억지로 뻣뻣해진 혀를 움직였다.
“내 동생을 계속 가둘 건가요?”
“안전해질 때까지 보호하는 겁니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징벌방을 탈출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걸 묵인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였다.
“메시아를 죽이고는 풀어줄 건가요?”
“……생각해보겠습니다.”
김아영은 눈을 부릅뜨고 차기주를 노려봤다. 입 안에서 혀를 굴려 침을 모으고 그의 얼굴에 뱉었다. 그가 손으로 뺨에 튄 침을 털어냈다.
“나가보세요. 난 지금 당신 동생한테 독을 먹이려고 한 진설해 씨 손가락을 자르러 가야 하니까.”
그는 일부러 김아영을 겁주기 위해 잔인한 말을 한 것이다. 그녀는 다리를 후들후들 떠는 주제에 주먹으로 차기주의 뺨을 때렸다.
의자가 바닥에 드르륵 끌리는 소리를 냈다. 김아영은 차기주가 제자리에서 일어난 것뿐인데 겁먹어 뒷걸음질 쳤다.
그는 뾰족한 눈매와 어울리는 서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할퀴듯 곁눈질하다 이사실을 나가버렸다. 쿵. 거칠게 문이 닫혔다. 김아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를 뒤로한 채 취조실로 간 차기주가 부하에게 절단 가위를 가져오게 했다. 테이블에 앉아 진설해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검은 가죽 장갑을 꼈다.
취조실에 들어온 진설해는 자기 앞날을 아는 사람처럼 양복 재킷 주머니에서 오르골을 꺼내 태엽을 감았다. 그는 생소한 노래에 맞춰 가위의 다리를 움직였다.
진설해의 비명으로 오르골 소리가 들리지 않아 어느새 태엽이 멈춘 줄도 몰랐다. 하도 몸부림쳐 의자에서 떨어진 그녀의 주위로 피 웅덩이가 번져나갔다. 차가주는 바닥에 버려진 열 손가락 중 세 번째 손가락을 집어서 진설해의 입에 물렸다.
“보리차를 검사해봤는데 독이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진설해는 그럴 리 없었기에 어깨를 움찔움찔 떨었다.
“맞아요, 진설해 씨. 이미 당신이랑 잔 에스퍼가 자백했습니다. 이건 우리 수현이가 당신을 살리겠다고 독을 없앤 거겠죠. 설마 이런 것까지 무효화할 줄이야.”
그는 피에 젖어 묵직해진 가죽 장갑을 벗어서 진설해의 몸 위에 떨어트렸다.
“이걸로 봐드리겠습니다. 사표는 수리했으니, 이만 떠나셔도 좋습니다.”
검은 구두가 뚜벅거리며 멀어졌다. 취조실 문이 열리며 복도에서 새어 나온 빛줄기가 쓰러진 그녀에게까지 닿았다. 진설해는 입에 든 세 번째 손가락을 뱉었다. 꿈틀거리며 벽에 기대 상체를 일으켰다.
손가락만 잘린 거다. 그러니 멀쩡한 다리로는 걸을 수 있다.
고통으로 말을 듣지 않는 몸을 벽에 붙이고 겨우 일으켰다. 그녀는 피에 젖은 손등으로 테이블에 올려둔 오르골을 만질 수는 없어서 개처럼 입으로 물었다. 에스퍼가 취조실에 들어와 의료용 핀셋으로 절단된 손가락을 집어 지퍼백에 담았다.
“접합 수술을 받으면 일상생활 정도는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가 김수현에게 독을 먹여서 죽이려고 한 건 큰 죄였다. 하지만 차기주 이 사이코 새끼는 사람의 손가락을 다 잘라버리고 접합 수술을 준비해뒀다. 사람을 가지고 놀아도 정도가 있지, 이 얼마나 악랄한 행태인가.
차기주에 대한 증오로 이를 악물었다가 오르골의 존재를 떠올려 턱에서 힘을 뺐다. 에스퍼는 진설해의 뭉뚝한 손등을 붕대로 감아 지혈했다.
“수술을 빨리 받을수록 좋습니다. 가시죠.”
그녀는 고통으로 신음을 삼키며 발을 뗐다. 진설해의 소식을 전해 들어 복도에서 기다리던 황지윤이 에스퍼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이야기하고 싶은데.”
“지금 진설해 씨는 손가락 접합 수술 받으러 가야 합니다.”
“잠깐만 비켜달라고 했습니다. 차지훈 에스퍼, 앞으로 가이드들한테 가이딩 받고 싶지 않은가 보죠?”
황지윤이 잔뜩 굳은 얼굴로 에스퍼에게서 지퍼백을 빼앗아 들었다.
“설마 진설해 씨가 손가락 병신 되게 수술도 안 받고 도망가겠습니까?”
“5분 드리겠습니다.”
“10분.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럽니다. 앞으로 다시는 못 만날 테니까요.”
에스퍼는 볼 안쪽을 잘근잘근 씹어 피를 냈다. 진설해가 혹시라도 도망치면 그가 차기주의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한다. 그렇지만 황지윤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그녀의 말처럼 가이딩해줄 가이드들이 없어질 테다.
“걱정하지 말아요. 저기 화장실에 들어가 있을게요.”
황지윤은 서럽게 우는 진설해의 등을 가볍게 밀어 화장실로 넣었다. 그녀는 진설해의 손등에 감긴 피에 젖은 붕대를 벗겨냈다. 그저 고통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손가락을 자른 차기주의 미친 짓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치유의 힘이 하얗게 빛나며 상처 부위를 감쌌다. 절단된 단면에서 뼈가 자라나고 근육과 피와 살점이 메워졌다. 빠르게 회복된 손가락에 진설해가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굽혔던 허리를 펴고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황지윤을 봤다.
진설해는 그녀의 계략대로 움직이다가 망가진 것이니 이 정도는 해줘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악마와 천사가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잘 들어, 설해 씨.”
황지윤은 진설해 이전에 성소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봤다. 똑같이 취조실에서 손가락이 잘리고 접합 수술을 받았다. 그 후 재판에 넘겨져 25년 형을 받아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재소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들었다.
차기주가 성소윤이 자살할 때까지 괴롭히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단지 자신의 페어에게 우습지도 않은 실력으로 칼을 들이밀었다고 말이다. 성소윤처럼 진설해도 그런 식으로 처리될 것이다.
그는 잔인한 자였고 자비를 몰랐다. 황지윤은 미리 화장실 칸막이 안에 넣어둔 가방을 찾아 그 안에 든 옷을 끄집어냈다.
“가만히 있어. 변장해야 하니까.”
가위로 진설해의 머리를 짧게 다듬어줬다. 소년처럼 변한 그녀에게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하고 알파 페로몬 향수를 뿌려줬다. 겉보기에 티 나지 않는 7cm 키높이 운동화까지 신으니까 꼭 멋진 알파 여성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변한 진설해에게 어두운 색상의 쿠션 팩트를 건넸다.
“얼굴에 칠하면서 들어.”
황지윤은 손가락이 담긴 지퍼백을 진설해의 코트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말했다. 이건 그녀가 오랫동안 진설해를 지켜봐 왔기에 건네는 작별 선물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새로운 닌류를 찾아오지 못하면 어쩌냐고 걱정했던 아이의 붉은 얼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책가방을 메고 집에 돌아온 아이는 황지윤에게 서툰 한글로 편지를 적었다. 아이를 돌봐주던 가사 도우미가 건넨 편지를 받았을 땐 당황했었다.
왜 자신에게 인간 아이가 이런 걸 주나, 쓰레기 같은 종이를 버릴까 했다가 그냥 책 사이에 꽂아뒀었지.
감스함미다. 빠트장임. 아빠가 봇고 싶습미다. 울찌 안케슴미다. 그래또 아빠가 빠리 도라와쓰며 조케슴미다.
황지윤은 인간을 사랑할 수도, 동정할 수도 없는 천사이지만 어쩐지 이용만 해먹고 이대로 진설해를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찜찜하고 걸리는 게 많았다.
그녀는 진설해에게 그린란드에 만들어놓은 게이트의 관리자가 되는 법을 알려줬다.
이누이트족에게는 바다의 여신 세드나와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죽음의 신 앙쿠타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부족마다 약간씩 주인공의 신분과 이야기 구조가 달랐는데, 그중 황지윤이 구상한 게이트는 이 전설을 따른 것이다.
바닷새에게 구애받은 세드나는 그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남편은 집에 먹을 것을 구해다 주지도 않고 그녀를 학대하기만 한다. 세드나는 몇 년이 흐르고 참다못해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위를 죽이고 딸과 배를 타고 그곳을 탈출한다. 바닷새를 모시고 있던 부하들이 뒤늦게 우두머리가 죽은 걸 알아차려 그들을 쫓아와 폭풍을 일으킨다. 아버지는 저 혼자 살겠다며 딸을 바다에 던진다. 세드나는 뱃전을 손으로 붙잡았으나 아버지에게 손가락이 잘려 바다에 빠진다. 세드나의 손가락들은 물고기, 물범, 고래 등으로 변한다.
폭풍이 물러나고 세드나는 배에 올라선다. 바다의 여신이 된 그녀는 개를 풀어 아버지를 죽인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는 지하 세계에 떨어져 죽음의 신이 된다.
황지윤은 모든 설명을 끝냈고 익숙한 이야기에 진설해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네 그린란드 집에 돌아가면 이렇게 해. 알았지?”
“저보고 괴수가 되라는 건가요?”
“인간에게나 괴수이지, 우린 원죄를 씻은 자라고 여겨. 선택은 설해 씨 몫이야.”
그 한마디가 모든 걸 설명해줬다. 황지윤은 인간이 아니었다.
진설해는 황지윤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구릿빛 얼굴과 어두운 입술 색을 가지게 된 그녀는 거울 속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변한 모습에서 눈을 뗐다.
“이만 가봐.”
“파트장님, 감사합니다.”
진설해는 코트 주머니에 넣은 오르골을 꼭 쥐었다가 놓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늙지 않는 황지윤을 단순히 동안이라고 여겼지만, 그녀는 메시아처럼 인간의 탈을 쓴 괴수의 왕이 분명했다.
진설해는 애써 그 생각을 떨쳐내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복도 벽에 기댄 채 서 있던 에스퍼는 알파 페로몬 냄새와 짧은 머리, 어두운 피부색, 달라진 옷차림, 멀쩡한 손가락에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 말았다.
다급한 마음에 뛰지 않기 위해 마음속으로 ‘천천히’를 수없이 되뇌었다. 센터 건물을 벗어난 그녀는 곧장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에 올라탔다. 태백산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마주하자마자 바로 공항으로 달렸다.
* * *
잠금장치가 풀리는 기계음이 울리고 징벌방의 문이 열렸다. 차기주였다. 그토록 만나고자 날뛸 때는 오지 않더니만 두 끼를 굶으니까 바로 죽을 포장해서 왔다.
“오랜만이에요.”
“식기 전에 먹어.”
김수현은 목적이 있으므로 순순히 아일랜드 식탁에 앉았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듣고 싶지 않아.”
차기주가 초점 없는 시선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와이셔츠로 감싸인 팔뚝이 뻣뻣하게 굳다 못해 경직되어 실룩거렸다. 숨을 내쉬면서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게 누가 봐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김수현은 그에게 손을 뻗었다. 차기주가 눈에 띄게 흠칫하며 놀랐다. 김수현은 손바닥으로 그의 차가운 뺨을 감싼 채 물었다.
“날 사랑해요?”
“……그래.”
“그렇다면 왜 날 강간했는지 말해줘요. 정말 이사님이 날 사랑했다면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강간할 수 있어요. 그 감정이 가이딩 중독 현상 때문이 아닌 거 확실해요?”
차기주는 본능적으로 마른 입술을 안으로 빨아 침을 묻혔다. 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양복바지에 문지르며 끝까지 거짓말했다.
“나는…… 나는 널 강간하지 않았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이상한 꿈을 꾸고 나를 의심하는지 모르겠어.”
“세계가 세 번이나 같은 시간을 반복하고 있어요. 그런데 자꾸 기억나지 않는다고 잡아뗄래요? 다 기억하잖아요. 나도 기억하는데 이사님은 기억 못한다고요?”
차기주는 당황해 뒤로 물러났다.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벌떡 일어난 그는 허공을 보며 손을 안쓰러울 정도로 떨었다. 김수현은 누가 봐도 겁에 질린 차기주를 올려다보며 다시금 물었다.
“대답해줘요. 난 이사님이 날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만이 중요하니까.”
“널 사랑해.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왜 자꾸 그 일을 끄집어내는 거야.”
고함을 지른 차기주는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다가 돌연 눈꺼풀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멍하니 멈춰 섰다. 김수현은 그토록 강인한 차기주가 자신 앞에서만 이러는 게 답답한 동시에 그가 책임을 회피하려 드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정말 날 사랑한다면 우리 잠깐 시간을 가져요.”
자라처럼 움츠러든 목이 앞에 앉은 김수현을 피해 옆으로 돌아갔다. 김수현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피하는 그는 침을 평소와 달리 자주 삼켰다. 엄지를 검지로 반복적으로 긁는 그에게 김수현은 담담한 어조로 통보했다.
“나랑 떨어져 있는 동안 가이딩 중독 치료받으세요. 멀쩡해진 채로 다시 만나서 그때도 날 사랑한다면 우리 전에 말한 것처럼 동거해요.”
김수현은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그에게 강간당한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를 미워하려고 해도 그 실감 나지 않는 일 때문에 차기주와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 그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지만 알고 싶을 뿐이었다.
“이사님, 내 말 듣고 있어요?”
김수현은 텅 빈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버림받을 거야. 버림받을 거야. 버림받을 거야. 버림받을 거야.’
차기주의 안에서 ‘버림받을 거야’라고 외쳐대는 개미가 바글바글 기어 다녔다. 검은 점들이 무수히 많아져 그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미안, 수현아. 다시 한번만 말해줘. 못 들었어.”
정신이 나가 있던 차기주는 김수현이 말하는 게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다. 김수현은 차근차근 자신과 시간을 가지자고 말했다. 그들이 떨어져 있는 동안, 차기주가 괜찮아지면 다시 만나자고.
차기주는 제대로 알아들은 것처럼 초점 잃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징벌방을 나서니 에스퍼들이 김수현을 붙잡지 않았다. 흰 티 위에 걸친 남방 주머니에 다람쥐를 넣은 김수현은 차기주를 옥상에 내버려두고 철제 계단을 내려갔다.
차기주는 징벌방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에스퍼들은 보호해야 했던 김수현이 감금에서 풀려나자 차기주의 눈치를 살핀 뒤 자리를 떴다. 오직 차기주만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수현아?”
그는 분명 자신과 함께 김수현이 방에서 나왔고, 그를 뒤로한 채 떠났는데도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징벌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곤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인 식은 죽과 아무도 없는 공간을 돌아봤다. 화장실 문을 열고, 침대 밑을 살폈다.
그 어디에도 김수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