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전목마(2)
성소윤은 센터의 에스퍼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차기주에 대한 소문을 흘렸다. 가이딩 중독 증세로 인한 차기주의 집착을 순진한 김수현이 사랑이라고 착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정말 차기주의 가이딩 중독 증세가 심했던 건지 어느 순간 가이딩 중독 검사 결과까지 그 소문에 따라붙었다.
성소윤이 가이드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초췌한 얼굴을 한 진설해가 들어왔다. 아버지 장례식을 치렀다고 하더니만 부스스한 머리칼과 검은 눈 밑, 하얗게 각질이 일어난 색 잃은 입술까지 몹시 피폐한 몰골이었다.
“이런…… 설해 씨 괜찮아요?”
오늘 처음 만난 진설해였지만 성소윤은 친한 척 말을 걸었다. 진설해에 대한 가이드들의 평은 잔인할 정도로 박했다. 차기주 이사와 페어를 맺고 싶어서 검사실까지 함께 들어가 다이빙했다가 퇴짜 맞은 일 때문이었다.
가이드 망신을 다 시켰다고 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자기라면 차기주 이사의 페어가 될 수 있었을 거라는 듯 떠들어댔었지.
차기주와 페어를 맺고 싶어 하는 가이드들은 대부분 권력과 돈에 눈을 뜬 부류이던데, 진설해도 그런가 싶어 성소윤은 진설해를 유심히 살펴봤다.
손톱은 손질되어 있지 않아 거스러미가 일어났고, 미용실을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인지 머리카락이 어깨쯤에서 사방으로 뻗쳐 있지만, 워낙 미인이라 그런지 그마저도 소탈하게 비쳤다. 별로 차기주에게 목맬 스타일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의외였다.
소문에는 김수현이 가이딩 검사에서 A급 등급을 측정할 때 1초 만에 파동을 잠재웠다고 했다. S급 등급 측정을 안 하긴 했지만, 그건 차기주의 가이드가 되기 싫어서이지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검사관이 가이딩 검사를 통해 보여준 김수현의 능력이라면 능히 S급 등급이 나왔을 거라고 말했을 정도니까.
센터에 있으면서 성소윤도 제네시스를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정보를 캐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정보들을 통해 내린 결론에 따르면, 김수현처럼 능력 좋은 가이드가 차기주 옆에 있어서는 안 됐다. 하늘의 심판을 열 때 차기주가 빌빌거리며 바닥을 기다가 죽어야 메시아께서 인류를 멸망시키고, 우리 신도들도 무사히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
성소윤이 생각하기에 김수현 한 명만 제거하면 술술 풀릴 일이었다. 그녀는 직접 김수현을 제거한 뒤 진설해에게 누명을 씌워서 빠져나가면 됐다. 진설해가 차기주의 가이드 자리에 눈멀어 김수현을 살해했다고. 차기주도 골로 보내고, 인간을 상대로 사랑에 빠진 메시아도 신의 임무에 전념하게 될 테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였다.
새삼 아무리 가이드가 부족해도 그렇지 어떻게 적을 센터의 심장부까지 들어오게 하나 싶어 놀라웠다. 하여간 황지윤 파트장도 웃긴 사람이었다. 자기네 센터를 망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황지윤 파트장이 아무리 애써봤자 성소윤에게 갑자기 없었던 애사심과 자신을 받아준 센터에 대한 소속감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경조 휴가라고 하더니 왜 출근했어요.”
진설해가 퀭한 눈으로 성소윤을 들여다봤다. 뭔가 눈치챈 것 같진 않은데 괜스레 도둑이 제 발을 저리듯 뜨끔해져 눈을 피했다. 생긴 것과 달리 음침한 가이드였다.
“나 알아요, 성소윤 씨 제네시스 멤버인 거.”
“그래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이 센터에 있던가요?”
“종교에 미친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 전부 잊고 평범하게 살아요. 순교자라도 되기 위해 여기 있는 거겠지.”
성소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놓쳐 뜨거운 커피를 흘렸다.
“아뜨.”
그녀가 바닥에 종이컵을 떨어트리자 진설해가 성소윤의 손목을 잡고 끌고 갔다. 성소윤은 진설해가 혹시라도 자신이 밀정이라는 걸 고발하려고 이러나 싶어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발바닥을 바닥에 딱 붙였다. 식은땀이 흘러내려 귀밑머리가 얼굴에 달라붙었다.
“설해 씨,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나 완전히 내 종교 털어냈어. 내가 이 센터에서 무슨 짓을 한다고 그래.”
이대로 센터장실이든 이사실이든 어디든 위험한 곳으로 끌려갈 거란 예상과 달리 성소윤은 화장실로 끌려 들어갔다. 진설해가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고 찬물에 그녀의 손을 집어넣었다. 거울 속에서 두 오메가의 눈이 마주쳤다.
“들키고 싶지 않으면 내 종교라는 지칭은 사용하지 말아요.”
뜨거운 커피에 덴 피부에서 열감이 빠져나가며 통증이 가라앉았다. 수챗구멍으로 물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와 비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가 고요한 화장실을 가득 채웠다. 진설해는 성소윤의 손목을 놓고 화장실 칸막이를 거칠게 열어젖혔다.
이곳엔 그들밖에 없었다.
“왠지 우린 같은 목적을 가진 것 같네요. 그렇죠, 성소윤 씨?”
그런 말을 하는 진설해는 라이벌인 김수현을 처리해 차기주를 가지려는 욕심 많은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성소윤은 의아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가는 길이 같다면 상대방이 왜 그 길을 가야 하는지 알 필요는 없었으니까.
“난 황지윤 파트장님을 통해 차기주 이사의 가이딩 중독에 대해 지적하며 나와 가이딩할 수 있도록 유도할게요. 내가 차기주 이사 가이딩하면 성소윤 씨가 김수현 씨한테 바람 좀 넣어줘요.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나도 김수현 씨 살살 긁어볼 테니까 둘이 흔들어보자고요.”
성소윤은 수도꼭지 물을 잠그곤 물기에 젖은 손을 핸드 드라이어 밑으로 넣었다. 시끄러운 기계 소리에 묻혀 목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이왕이면 가이딩 중독 때문에 차기주가 김수현을 사랑하는 거로 하죠.”
“좋은 각본이에요.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지만.”
진설해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성소윤이 뒤돌아 손을 내밀었다.
“김수현 씨 암호명이 햄스터라면서요? 우리 함께 햄스터를 우리에서 탈출시키자고요.”
성소윤은 김수현을 죽일 생각이었지만 마치 차기주와 그를 떨어뜨려 놓는 것 외에 다른 꿍꿍이는 없다는 듯 밝게 웃었다. 진설해는 가볍게 내밀어진 성소윤의 손을 잡지 않았다. 그 덕에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줄 안 성소윤의 표정이 굳어갔다. 진설해는 덤덤하게 그 오해를 풀었다.
“다음부터는 핸드 드라이어에 손 말리지 말아요. 차라리 난 재채기에 손을 말릴래요.”
“그게 무슨.”
“그 기계, 누가 청소하는 걸 한 번도 못 봤거든요. 아마도 바람이 나올 때마다 세균이 와르르―.”
진설해는 손을 모았다가 펼치며 세균이 퍼지는 모양새를 흉내 냈다.
“아, 씨. 내 손.”
성소윤은 항상 이용하던 핸드 드라이어였지만 진설해 말을 듣자 자신이 변기통에 손을 넣었다가 뺀 기분이었다. 막 말린 손을 자동 분사되는 물비누로 박박 문질러서 닦았다. 진설해가 벽에 기댄 채 거울에 비친 손을 씻는 성소윤과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수현 씨한테 우리 계획이 아주 잘 먹히겠네요. 잘만 사용한 핸드 드라이어인데 고작 내 말 몇 마디에 죽을 것처럼 굴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핸드 드라이어는 하루 세 번 소독하니까.”
진설해는 먼저 화장실을 나왔다. 차기주와 연인이 되면서 자유로워진 김수현이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그녀는 방금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다녀온 사람 같지 않게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사정을 아는 김수현은 어색하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괜찮으세요?”
“그럼요. 어렸을 때 헤어진 아버지인데, 교도소 들어간 이후로 한 번도 연락한 적 없어서 그런가. 그냥 모르는 어른이 돌아가신 것 같아요.”
“아, 그…… 다행이네요.”
김수현이 불편한 마음을 숨김 채 애써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진설해는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기색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원래 차기주를 떼어내기 위한 계략을 함께 짠 협력 관계였다. 그러니 이렇게 대화를 하는 것도, 그녀가 은근슬쩍 차기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 소식 들었죠? 차기주 이사, 가이딩 중독 증세 심해서 김수현 씨한테 더 이상 가이딩받으면 안 된다는 거.”
“……네?”
“김수현 씨가 일반적인 가이드가 아니어서 더 심한가 봐요.”
진설해가 가까이 다가와 입을 손으로 가린 채 귓속말했다. 김수현의 심장은 쿵, 발끝으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결국 우리 계획대로 돌아가서 다행이라며 기뻐했다.
김수현은 아무 문제 없었다는 차기주의 말을 믿었다. 단순히 자신이 진짜 가이드가 아니라서, 에스퍼라서 가이딩 중독도 걸리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차기주가 거짓말을 했다.
“조만간 황지윤 파트장이 차기주 이사한테 연락 넣을 거예요. 나한테 가이딩받다 보면 차기주 이사도 김수현 씨가 말했던 그 ‘운명적 사랑’을 느끼지 않겠어요?”
김수현은 진설해가 차기주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기주는 진설해의 아버지를 구하지 못했고, 장례식에 다녀온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렇지 않았다고 했다.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는데. 그 거짓말에 담긴 의도를 생각해보게 됐다. 그녀는 아버지를 구해주지 않은 차기주에게 원한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차기주로부터 자신을 떼어내려는 거겠지.
그녀와 세웠던 계획이 자신과 차기주의 숨통을 조이는 목줄이 되었다.
진설해는 자기 말을 들은 김수현이 차기주의 가이딩 중독 소식에 충격을 받아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미 첫 번째 생에서 진설해와 페어를 맺은 차기주를 사랑한 적 있었던 김수현이었다. 즉, 차기주가 자신을 가이딩 중독으로 인해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물론 차기주는 김수현과 달리 회귀하기 전을 기억하지 못하니 지금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김수현은 이미 겪어본 아픔을 또 겪게 될까 봐 그게 더 걱정되었다.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 가이딩 중독으로 인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그 이후의 문제였다.
과연 자신은 차기주가 유일하게 그를 가이딩할 수 있는 진설해와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 질투심을 느끼지 않고 차기주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러지 못할 거다.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건 이미 뼈저리게 겪어서 알고 있는 바였다. 김수현은 자기 스스로조차 놀랄 만큼 질투가 심했다. 어쩌면 그때처럼 현재의 자신도 진설해에게 가이딩을 받은 차기주를 들들 볶으며 괴롭힐지도 모른다. 아니, 이건 확실했다. 자신이 또다시 차기주를 상처 입힐 거라는 것을, 김수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가이딩하면서 키스를 했는지 물을 것이고, 그녀와 손을 잡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죄인을 심문하듯 알아낼 게 뻔했다. 그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자신은 절대 믿어주지 않을 거다. 손톱으로 할퀴고 더러운 걸레라며 모욕하고 끝내는 수치스럽게 자위시켜 정액의 농도를 검사하겠지.
차기주를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다는 건 김수현이 다시 벼랑 끝까지 몰아넣어진다는 걸 의미했다. 김수현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난……. 난 이사님이 설해 씨한테 가이딩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진설해는 김수현과 차기주를 이간질하려는 주제에 김수현을 걱정하는 척했다.
“수현 씨, 혹시 마음이 바뀐 거예요? 그러지 마요. 지금 차기주 이사 제정신 아니라고요. 이사님의 감정, 진짜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죠? 그리고 제가 가이딩하지 않아도 조만간 징계위원회가 가이딩 중독 문제로 이사님 소환해서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받게 할 거예요.”
김수현은 손톱끼리 부딪쳐 긴 손톱을 뜯어냈다. 진설해는 눈을 빠르게 내려 김수현의 초조함과 불안함이 담긴 손동작을 확인했다.
“그동안 이사님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바랐잖아요. 우리의 계획대로 되는 것뿐이에요.”
김수현은 할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어디서 남의 남자한테 치근덕대냐고 버럭 화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자신은 그녀의 이간질이든, 징계위원회 소집이든 다 막아낼 것이다. 그렇게 맘먹었다. 두 번 다시 그들이 페어를 맺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차기주의 눈길이 진설해에게 오랫동안 닿지 않길 바랐고, 그가 다른 오메가와 키스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자신 이외에는 타인과 대화하면서 웃거나 바람에 날아온 꽃잎이 상대의 뺨에 달라붙어도 떼어주어서는 안 됐다.
김수현은 다시 한번 자신에게 온 기회를 첫 번째 생에서처럼 질투로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기습당하지 않았다면 차기주는 김수현을 위한 선택이라며 계속 받아주지 않았겠지.
진설해는 말도 없이 도망치듯 떠나버린 김수현을 보며 한쪽 입꼬리를 비딱하게 올렸다. 모든 게, 자신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 * *
김수현은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계획을 세웠다. 일단 자신이 학교에 갈 때 무조건 보호해주는 에스퍼가 따라붙으니, 강의 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에스퍼를 따돌리고 타투숍에 들러야 했다. 이건 그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었다.
김수현은 미술 인문학 강의를 듣기 위해 502호 강의실 단말기에 학생증을 대고 들어갔다. 출석 체크만 하고 가버리는 학생들 때문에 조교가 강의실에 들어와 일일이 이름을 불러 학생들이 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그렇지만 강의가 끝나고는 인원수를 세지 않았다. 그러니 수현은 학생증을 이윤석에게 맡겨놓고 강의가 끝날 때 대신 단말기에 찍어달라고 부탁하기만 하면 됐다.
김수현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자리 잡았다. 어두운 남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옆자리에 앉은 이윤석에게 학생증을 건넸다.
“나 이따가 강의 도중에 빠져나갈 거거든. 끝나고 대신 학생증 센싱해줘.”
“어디 가게?”
대답할 수 없어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 교수님이 들어왔다. 이윤석이 찜찜한 표정으로 김수현의 학생증을 챙겼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지난 한 주 잘 보냈어요? 오늘은 그림 속 숨겨진 암호에 관해 공부해볼 겁니다.”
강단에 선 교수님이 빔프로젝터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스크린에 크게 띄웠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도중 돌발적인 발언을 하고 열두 사도가 그에 대해 반응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었다.
교수님이 PPT를 넘기자 요한복음 13장 20절에서 26절까지의 내용이 나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겠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며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보게 하였다.
그 제자가 예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칼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었다.’
“여러분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 과연 유다는 누구일까요? 화가는 유다에 대한 단서를 그림 속에 숨겨뒀습니다. 이유까지 정확하게 맞추는 학생에게는 이번 수업의 리포트 면제권을 주겠습니다.”
교수의 제안에 학생들이 미친 듯이 손을 들었다. 자기가 하겠다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드는 학생들의 열과 성의에 교수가 그렇게 리포트가 싫냐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교수는 벌을 서듯 두 손을 든 학생을 가리켰다. 학과 점퍼를 입은 학생이 그림에서 가장 수상한 인물을 지목했다.
“칼을 든 사람이 유다 같아요.”
아아―. 학생들 사이에서 “내가 저 정답을 말하려고 했는데” 하는 아쉬움 섞인 야유가 터져 나왔다. 야구 모자를 쓴 학생은 의기양양하게 정답을 확신했다. 뒤를 돌아보며 “미안하다, 얘들아” 하며 너스레를 떠는 걸 보니 사교적인 성격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예수님을 칼로 찌르려는 것 같아요.”
학생의 대답에 교수가 웃으면서 설명했다.
“참 그럴듯한 추측이에요. 하지만 이자는 베드로입니다. 나이프가 예수의 반대편을 가리키고 있으니, 그 칼날은 예수를 향한 것도 아니고요. 예수가 체포될 때 겟세마네에서 일어날 폭력을 암시하고 있는 거랍니다.”
다른 학생이 손을 들었다. 교수의 허락을 받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는 인물이 유다 같아요. 손가락 욕을 하는 걸로 보여요.”
그녀의 말에 학생들이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교수가 “가운뎃손가락이 아닌데요” 하고 말하니까 그녀가 “심의에 걸렸나 보죠” 해서 학생들을 두 번 웃겼다. 교수마저 웃음을 참지 못해 잠시 뒤를 돌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도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의심할 것임을 예시하고 있어요. 거기 핸드폰만 보는 학생. 누가 유다 같아요?”
여자 친구와 SNS 메시지를 주고받던 학생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당황해 손에서 핸드폰을 내려놓고 스크린에 맺힌 그림을 쳐다봤다.
“예수님 옆에 앉은 여자요.”
“요셉은 제자 중 가장 막내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를 어리고 아름답게 그려 그런 오해를 종종 받고 있죠.”
교수는 서로 자기가 말해보겠다는 학생들이 부쩍 줄어든 강의실을 훑어봤다. 그러다 수업을 듣는 내내 친구를 쳐다보느라 앞은 쳐다볼 생각을 하지 않는 학생을 불렀다.
“거기 짝사랑 중인 학생.”
이윤석은 자신을 부르는 줄도 모르고 대꾸하지 않았다.
“파란색 후드티 입은 학생.”
그제야 저를 부른 거였구나 싶어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이윤석은 어떻게 교수가 자신이 짝사랑 중이라는 걸 알아봤나 신기해하며 쳐다봤다.
“학생은 누가 유다 같나요?”
교수님의 주목을 받아버린 이윤석 덕에 덩달아 그 시야에 잡힌 김수현은 입술을 짓씹으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윤석은 그림 속에서 가장 햇빛에 많이 그은 얼굴을 가진 제자를 지목했다. 그 제자의 의심스러운 점은 제자 중에서 그놈만 숨으려는 듯 몸을 낮추고 있다는 점과 탁자를 팔꿈치에 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제자들 중 유일하게 식탁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있는 걸 보아하니 식탁에 소금을 쓰러트린 범인은 그가 분명했다.
“근동 지방에서는 소금을 넘어뜨리는 행위가 곧 주인을 배신한다는 의미예요. 그런데 탁자에 팔꿈치를 댄 제자가 한 명 있네요. 그가 유다입니다.”
“오, 정확하게 맞혔어요. 아주 잘 알고 있군요. 학생 이름이 뭐예요.”
“이윤석입니다.”
“학생은 오늘 내주는 리포트를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 조교는 적어둬.”
김수현은 교수가 조교에게 말하기 위해 뒤를 돈 순간, 가방을 챙긴 채 보폭을 낮추고 뒷문으로 달렸다. 무사히 강의실을 빠져나와 긴장으로 벌렁벌렁 뛰는 심장을 쓸어내렸다.
숙였던 허리를 펴고 빠르게 복도를 달렸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에스퍼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얇은 티셔츠 위에 받쳐 입은 베이지색 니트를 벗어 로커룸에 넣어뒀다. 가방도 알아볼 것 같아 지갑만 달랑 챙겨 들었다.
김수현은 창문을 넘어 인문사회관 건물 뒤로 나온 뒤 학교 셔틀버스를 타고 교문까지 빠르게 이동했다. 이번에 그를 따라다니는 에스퍼는 정석훈처럼 실력 있는 자가 아닌지, 걸리지 않고 무사히 대학교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인터넷으로 검색해둔 타투숍으로 향했다. 밤이 되면 술집과 음식점, 클럽을 다니는 사람들 덕에 북적거린다는 거리는 대낮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수현은 인도를 걸으며 아직 열지 않은 가게들을 둘러봤다.
낡은 건물에 있는 타투숍의 유리창에 ‘Tattoo Parlor’이라고 적힌 붉은 네온이 반짝거렸다. 유리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방울 소리가 찰랑 울렸다.
차례를 기다리는 손님 한 명이 소파에 앉아 타투 관련 잡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빤히 쳐다봤다.
“안녕하세요. 예약하셨나요?”
김수현은 인사를 건네는 직원에게 대답했다.
“아니요. 혹시 당일에 타투 못하나요? 가볍게 레터링으로 이름 타투만 할 건데.”
“아…… 그게 지금 작업 들어가야 할 타투가 오래 걸릴 거라…… 몇 시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예, 앉아서 기다리겠습니다.”
김수현은 소파에 앉아 바로 옆에 놓인 책꽂이에서 타투이스트의 포트폴리오를 집어 들었다. 같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김수현은 타투이스트의 작업물들을 보며 신선한 충격에 빠졌다.
수현이 그림을 그리는 대상인 캔버스는 사물이기 때문에, 오로지 화가의 시각과 감정만이 그림의 주체가 되곤 했다. 캔버스가 그림에 제 의사를 담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러나 타투이스트가 그동안 작업해온 포트폴리오에서는 아름다워지겠다며, 때로는 남에게 강하게 보이겠다며 생살을 바늘로 긁고 색을 집어넣은 작품의 대상, 인간의 열망이 느껴졌다.
타인을 구하다가 생긴 소방관의 화상 흉터 위에 타투를 새긴 작품은 감동적이기도 했다.
타투는 타투이스트 혼자만의 작품이 아닌 도화지가 된 이의 사연 또한 담긴, 여러 사람이 주체가 되는 작품인 것이다.
오늘 김수현이 할 타투는 차기주의 이름 석 자뿐이었지만 사진 속 타투들에 매료되어 한참 동안이나 넋을 놓고 구경했다. 뚫어지게 포트폴리오 북을 보고 있는데 직원 휴게실에서 전자레인지로 편의점 스파게티를 돌리는 냄새가 대기실까지 풍겨왔다.
타투이스트가 커튼이 쳐진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옆머리를 다 밀어버리고 닭 볏처럼 머리를 길렀는데 그 긴 머리를 땋아 내린 것이 아주 개성 넘쳐 보였다. 그는 목과 어깨, 팔뚝까지 다양한 모양의 타투를 가지고 있었다.
타투이스트는 고개를 직원 휴게실을 향해 돌리고 있어 김수현을 보지 못했다.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경수 씨, 내가 오늘 작업 오래 걸린다고 예약 없이 오는 손님 받지 말라고 했잖아.”
“하지만 사장님, 저 얼굴을 보고 어떻게 돌아가라고 해요.”
“무슨 얼굴. 엄청 불쌍해? 오늘 타투 못하면 죽는대?”
타투이스트가 고개를 돌려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김수현을 보더니 단숨에 조용해졌다. 크흠, 목을 가다듬고는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예약 없이 오셨다고 하셨죠? 레터링 타투로 이름 새기는 건 간단하니까 예약자분께 양해 부탁드리고 먼저 해드릴게요. 구준호, 괜찮지?”
소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손님이 혀를 찼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딱 네 취향이다 싶었어.”
직원 휴게실에서 직원이 쟁반을 들고 나왔다. 스파게티 냄새가 나서 쳐다보니 직원이 김수현에게 그걸 내밀었다.
“기다리느라 힘드시죠? 이거 드시면서 기다리세요.”
단골로 보이는 손님이 직원에게 “고작 10분 기다렸다. 10분! 난 두 시간 기다렸는데 물 한잔도 안 떠주냐?”라며 뭐라고 했다. 김수현은 차례를 양보해준 고마운 손님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양보를 안 해. 알았어요. 먼저 들어가요.”
김수현은 소파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손님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타투이스트를 따라 커튼 너머로 들어갔다. 손님이 멋대로 스파게티를 먹었는지 직원이 뭐라고 하면서 둘이 투덕거리며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수현은 어색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모르며 시술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타투를 한다는 게 급격하게 실감 나고 말았다.
벽에는 타투 도안을 코팅해 붙여놓았고, 큰 선반에는 여러 색의 잉크 병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쪽 벽면에 설치된 세면대와 도구 소독용 고압 멸균기, 의료 물품 폐기 용기, 그리고 분홍색 시트를 뒤집어씌워 놓은 베드가 괜스레 무섭게 느껴졌다.
여태 긴장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 마른침이 꿀떡 넘어갔다.
“레터링 타투로 이름을 새기신다고 하셨죠?”
“네, 애인한테 깜짝 이벤트 하게요.”
“아! 애인 있으셨구나.”
그가 아쉽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부위는 어디에 하실 생각이세요?”
“검지 옆면이요. 중지와 맞닿아지는 쪽.”
타투이스트가 김수현의 손을 가져가 손가락을 살폈다.
“마취 연고 발라드릴 테니까 글씨체 고르고 계시겠어요?”
타투이스트가 건네는 묵직한 스크립트 북을 건네받았다. 수많은 글씨체를 보다가 아주 깔끔한 글씨를 발견했다. 맑은 고딕체였다. 차기주처럼 미끈하게 잘 빠진 차가운 인상의 문체라 맘에 들었다.
“이걸로 할게요.”
“애인 이름은 뭐예요?”
“차기주요.”
“하하, 신기하다. 애인분이 불편하겠어요.”
차기주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에 타투이스트는 김수현의 애인이 에스퍼 차기주와 동명이인일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김수현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고 “맞아요” 하며 맞장구를 쳐줬다.
“잘 안 보이는 데 타투를 새기기는 하지만 혹시 애인이랑 헤어지면 피부과 가서 레이저로 지우면 돼요. 물론 고생은 꽤 해야 할 거예요.”
피부에 글자를 새기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됐다. 김수현은 아직 이름을 새기지 않아 하얗기만 한 손가락 옆면을 보며 답했다.
“후회 안 할 거예요.”
“다들 그렇게 말하고 후회하더라고요.”
타투이스트의 웃음에는 ‘네가 당해봐야 알지’ 하는 심보가 붙어 있었다. 사랑에 빠져 애인의 이름을 타투로 새겼다가 헤어져 후회하는 이들을 얼마나 많이 봐왔는지, 이 일을 하는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글씨 크기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적당한 크기로 부탁드릴게요.”
“이 정도는 어떠세요?”
그가 보여주는 도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수현은 손가락에 마취 연고가 스며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의자에 앉았다. 타투이스트는 멸균 포장한 라텍스 장갑을 뜯어 손에 착용하고 헤드형 확대기를 움직여 타투를 새길 손가락을 확대했다. 타투 도구를 감싼 비닐 포장을 여는 소리가 낯선 일에 대한 공포를 몰고 왔다. 마치 어두운 골목길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쫓기는 것처럼 심장이 조여들었다.
타투이스트가 발판을 밟아 의자 기울기를 조절했다. 김수현은 손가락이 마비된 사람처럼 굳어 가만히 자세를 유지하며 차마 어떻게 타투를 새기는지 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 * *
손가락에 ‘차기주’가 새겨졌다. 웬만한 사람들은 남의 손가락 사이를 들여다보지 않을 테니 가장 노출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숨기기 좋은 부위이기도 했다. 타투이스트는 타투를 받고 나서 관리가 중요하다며 주의 사항을 적어놓은 종이를 건넸다.
“약국에 가서 비*텐 연고를 사서 발라주세요. 3일이 지나면…….”
주의 사항을 읽는 김수현에게 그가 10일 정도 술, 담배, 격렬한 운동을 피하라고 했다. 그 밖에도 한참이나 주의 사항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생각보다 타투는 사후 관리가 복잡하네요.”
“아무런 대가 없이 얻어지는 건 없죠.”
타투이스트의 말에 김수현은 종이를 보기 위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차기주를 다른 이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네임인 척 타투를 새겼다. 차기주를 보호하기 위해 하는 일이니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수현은 흔적이 남지 않도록 용의주도하게 현찰로 결제를 마친 뒤 타투 가게를 나왔다. 이름 세 글자가 새겨진 손가락이 자신의 신체가 아닌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빠르게 택시를 잡아타고 대학교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강의를 듣고 자신을 보호, 감시하는 에스퍼와 합류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루가 지나갔다.
* * *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던 차기주는 기지개를 한 번 켰다. 온종일 일하느라 이사실에 갇혀 있었다. 비서들과 나눠서 작업하긴 했지만, 그들만 철야 작업을 시킬 순 없었다. 차기주도 비서진도 며칠째 새벽 3시까지 서류 작업을 하고 아침 7시에 출근해 일하고 있었다.
에스퍼인 차기주마저 정신적인 피로에 허덕이는데 일반인인 비서들은 더할 테다. 마음 같아서는 이딴 유치한 짓은 하지 말라고 서류를 쌓아 올린 수레 차를 돌려보내고 싶었으나 이 고약한 괴롭힘이 어디까지나 정당한 업무의 기틀 안에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가 그것들을 돌려보내면 차기주 이사가 가이드들을 탄압하려고 했다는 둥, 온갖 말들이 나올 게 분명했다. 중상모략을 워낙 잘하는 황지윤이지 않은가.
오랫동안 글자를 읽으며 눈꺼풀을 깜빡이는 걸 잊었더니 눈이 뻑뻑했다. 잠시 손에서 서류를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긴 한숨을 내쉬며 미간 사이를 문질렀다.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단순히 스트레스 때문에 파동 에너지가 요동치고 있었다.
위험 경고 알람이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바람에 시계 자체를 꺼둔 상태였다. 김수현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순식간에 몸이 가뿐해질 걸 아는데도 황지윤의 계략에 빠져 가이딩 중독자 취급받으며 주시당하고 있었다.
그가 가이딩 금지령을 거부하고 김수현에게 가이딩을 받으면 역시 위험한 가이딩 중독자라며 몰아세울 게 불 보듯 뻔했다. 그 핑계로 가이드 팀이 김수현을 데려가버리면 그땐 센터고 뭐고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괴수를 상대하는 것보다 사내 정치질에 휘둘리는 게 백만 배는 더 힘들었다.
“하아, 지친다.”
잠시 휴식을 취한 그는 다시 볼펜을 손에 잡았다. 그렇게 다시 서명을 휘갈기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그는 당연히 비서일 거라 생각해 굳이 고개를 들어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기주는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차기주 이사님. 징계위원회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센터에 소속된 에스퍼는 검은 제복을, 가이드는 하얀색 제복을 입었다. 그러나 징계위원회가 입는 제복은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잘못을 저지른 센터의 가이드와 에스퍼들을 처단하기 위해 군에서 파견한 에스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남색 제복은 어깨에 금빛 견장이 올려져 있었고 단추도 금빛으로 찬란히 빛났다. 가슴에는 황금 독수리 배지가 달려 그 소속을 알렸다. 번쩍번쩍 윤광이 흐르는 군화가 책상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심각한 가이딩 중독이라는 의사의 소견이 있었음에도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지 않는 건 사내 규정상 처벌 사항입니다.”
“일이 많아서 잠시 가이딩을 미뤘습니다.”
“이사님을 가이딩해줄 가이드가 3번 가이딩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석하세요.”
“거절합니다. 나에겐 이미 페어가 있고 그 사람을 상처 줄 만한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차기주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키가 큰 우성 알파는 흉흉한 페로몬을 뿜으며 징계위원회와 대치했다. 험악해진 분위기에 징계위원회 소속 군인들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 들었다.
“그걸로 날 죽일 수 있겠습니까. 미사일이라도 가져오고 겁주든가.”
“……차기주 이사님, 협조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듣기 싫다는 듯 가볍게 손을 휘휘 저었다. 염동력이 남색 제복을 입은 사내들을 벽으로 처박았다. 커헉, 고통에 찬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차기주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징계위원회 소속들은 가끔 착각을 해. 센터 직원들을 처벌할 수 있다고 해서 나까지 벌할 수 있다는.”
차기주는 벽에 부딪혀 숨을 헐떡이는 징계위원장의 가슴을 발로 찼다.
“갈비뼈를 부러트렸으니까 함부로 움직이지 마. 폐라도 찔려서 죽으면 귀찮게 시말서 써야 하잖아.”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겨우 시말서 쓰기 귀찮다는 말이나 해대다니. 징계위원장은 벽에 기댄 채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고통으로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차기주를 매섭게 노려봤다.
“차기주 이사님,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아 중독을 치료하든지, 방공호에 들어가 폭주에 대비하십시오. 긴급 상황 발생 시 징계위원회는 영장 없이 범죄를 저지른 에스퍼를 체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딴 협박이 무서울 것 같습니까. 네?”
차기주는 발로 쓰러진 남자를 툭툭 차며 비웃었다.
“이미 오클라호마 교도소가 먹통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에스퍼를 처벌할 수단이 없어진 이 시국에 내 도움 없이 이 나라가 멀쩡하겠어요? 예?”
정중한 존댓말과 달리 비아냥거리는 듯한 뉘앙스였다. 차기주는 자기네 대장이 맞고 있는데도 저지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징계위원회 소속 군인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지금부터 내가 나한테 반기를 드는 놈들을 고문할 생각인데 어때요. 받으실래요?”
차기주는 책상에 놔둔 볼펜을 가져와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푹, 푹. 끔찍한 소리만이 조용한 이사실을 가득 채웠다. 징계위원장은 고통으로 눈앞에 하얀 섬광이 번쩍번쩍 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곤 의식할 새도 없이 하찮은 볼펜 따위에 겁먹은 채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다.
차기주는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아낸 뒤 침착한 얼굴로 냉정한 말을 내뱉었다.
“볼펜에 찔린다고 안 죽습니다. 아까 그 당당한 태도는 어디 갔습니까. 다시 한번 그 뚫린 입으로 지껄여봐,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받으라고.”
푹. 푹. 살점이 뚫리는 소리가 망치로 고기를 다질 때처럼 무자비했다. 볼펜을 뽑아낼 때마다 벽에 피가 튀었다. 군인들은 차기주의 심기를 거슬렀다가 똑같이 보복당할까 봐 두려워 고개를 숙인 채 복종하는 개처럼 서 있었다.
징계위원장은 차기주가 손을 들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차기주는 상대가 눈을 뜨길 기다리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슬며시 눈을 떴을 때, 기습적으로 허벅지에 볼펜을 꽂아 넣었다. 참으로 악랄한 방식이었다.
“어차피 에스퍼이지 않습니까. 금방 회복되는데 왜 쫄고 그래요. 응?”
부하들에게 버려진 징계위원장은 또다시 머리까지 들어 올려진 팔을 보고 차기주의 바짓자락에 매달렸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용서해주십시오. 다시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제발. 차기주는 피로 범벅이 된 볼펜을 징계위원장의 제복 앞주머니에 넣고 칭찬을 하듯 손으로 가슴을 토닥였다.
“배려 감사합니다. 징계위원장님, 이만 가보시죠.”
축객령이건만 그 자리에 있던 징계위원회 소속 군인들은 주어진 임무도 잊은 채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하들은 양쪽에서 징계위원장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고 부축해 도망쳤다. 그들이 지나친 자리에 선혈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캐나다의 정신과 의사 로버트 헤어는 인간의 탈을 쓴 채 숨어 사는 괴물을 알아내기 위해 PCL―R 검사를 만들었다. 검사자와 괴물이 면담하는 동안, 검사 등급 진단 훈련을 받은 사람과 제3의 보증인이 항목별로 점수를 매기는 방법으로 시험이 치러졌다.
차기주는 이 시험에서 40점 만점에 40점을 받았다. 그는 이 인류를 위협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도 잔혹한 미친놈이었다. 그러나 차기주라고 해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타인을 고문하면서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건 그가 오랫동안 모스크바 연구소에서 받은 실험의 영향이었다. 오래전의 차기주는 상식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괴물이 되기 이전에 한때는 사람이었기에, 일하느라 연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차기주는 이사실에 딸린 개인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고 손을 닦았다. 얼른 서류 작업을 마무리하고 징벌방으로 돌아가 김수현과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세면대 수챗구멍으로 물과 섞여 분홍빛으로 흐릿해진 피가 흘러들었다. 그는 거울 속 얼굴을 보며 턱까지 흘러내린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피를 보고 흥분한 탓에 가슴이 힘차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살짝 과민 반응한 감이 없지 않았노라 반성했다. 황지윤에 대한 분노를 애먼 데 풀어버렸다. 또다시 그가 사이코패스라는 소문이 사내에 돌아다니겠지. 자신이 자꾸 이러니 그 영악한 여우를 완전히 눌러놓지 못하는 것이다.
차기주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고 화장실을 나왔다. 검은색이라 티가 나진 않지만 피가 묻은 양복 재킷을 벗고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김수현을 만나러 가는데, 타인의 피로 더럽혀진 옷을 입고 갈 수는 없었으니까. 선명한 근육이 옷을 벗고 입느라 움직이는 동작에 따라 꿈틀거렸다.
의류 관리기에 들어 있는 예비용 정장을 꺼내 갈아입은 그는 와인 셀러에 보관 중이던 보르도 와인 한 병을 집었다. 코르크 마개를 빼내고 피가 튄 벽과 바닥에 와인을 뿌렸다.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긴 했지만 적어도 청소하는 직원에게 피를 보여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는 다시 책상에 앉아 사내 전화기를 들어 3번을 눌렀다. 환경 미화팀과 연결된 번호였다.
“여기 이사실입니다. 와인을 쏟았습니다. 청소 부탁드립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태백산을 오르다 보면 볼 수 있는 돌탑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는 서류들 중 하나를 빼냈다. 이미 반려했던 서류들을 또다시 보내온 거라 망설임 없이 손에 든 서류를 ‘반려’라고 적혀 있는 박스 안에 던져 넣었다.
그렇게 서류를 처리하기를 한참, 서류들 사이에 끼어 있던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위험하게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분실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결재판에 끼워져 있지도 않은 서류를 살핀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차기주는 즉시 사내 전화를 연결해 진설해 아버지의 행방을 알아보게 했다.
“죽었다고?”
오클라호마 교도소에서 탈옥 후 집으로 돌아간 남자는 자신을 쫓아온 에스퍼들의 존재에 압박감을 느끼고 자살했다고 했다. 그 죽음에 있어 차기주의 잘못은 전혀 없었지만, 이 보잘것없는 종이 쪼가리를 빨리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책임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깍지 꼈다.
현재 센터는 오클라호마 교도소에서 탈출한 범죄자들을 검거하느라 비상사태였다. 그 와중에 가이드 팀이 한시가 급하다면서 수레 차에 실어 보낸 서류들은 죄다 쓸데없는 내용뿐이었다. 가이드 대기실을 넓혀달라, 금요일에는 직원 식당에 뷔페를 제공해달라……. 너무나도 명백하게 차기주의 발목을 붙잡고자 하는 수작인 것이다.
만약 응급실에 교통사고가 나서 복부에 거대한 파편이 박히고 다리가 절단된 채 피를 철철 흘리는 환자가 들어왔다고 가정해보자. 의사라면 당연히 위급한 환자를 먼저 처치할 테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순간 교통사고 환자는 죽을 테니까.
그러나 동시에 손가락을 다쳐서 응급실에 병원장 아들이 왔다. 고작 살짝 베여놓고 아파서 죽는다며 난동을 부린다. 의사는 앞으로 병원에서 계속 의사 생활을 하려면 병원장 아들부터 치료해야 한다. 레지던트에게 병원장 아들을 맡기고 다른 환자를 보면 후환이 안 좋을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작위적인 예시이긴 하나 이런 가정 속에서 의사는 둘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 밀려날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 병원장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히면 이대로 의료계에 종사하기 힘들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제 의사가 처한 상황에 차기주를 대입해보자. 가이드들이 신처럼 믿고 따르는 황지윤과 척을 지는 건 병원장 아들을 버리고 교통사고 환자를 살리는 일과 같다.
의사가 당장 교통사고 환자를 선택하면 그 환자 한 명은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병원장 아들을 치료해 계속 병원에 몸담고 있으면 그 교통사고 환자와 같은 환자들을 앞으로 무수히 살려낼 수 있겠지.
그가 현장이 아닌 황지윤이 내준 서류 무덤을 택한 건 그러한 이유였다. 가이드들이 보이콧하며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해주지 않겠다고 나서면 곤란하니까. 에스퍼들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끊임없이 생산되는 게이트를 청소하고 안전지대를 유지할 수 있다.
차기주는 이 작은 일을 빌미로 센터 내부에 균열이 생기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황지윤은 특별사면 신청서를 굳이 무수한 서류 더미 속에 숨겨뒀다. 도대체 황지윤이 무슨 함정을 판 것일까 추리해봤다.
진설해는 회귀 전과 달리 김수현과 페어를 맺지 않았다. 김수현을 가이딩해주는 건 오로지 누나 김아영뿐이었다. 그런데 황지윤은 진설해를 자기 장기 말로 선택했다.
왜 자신과 그녀 사이에 원한을 만들어냈을까. 진설해가 뭘 할 수 있다고. 어쨌든 목적은 차기주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그는 두 팔을 휘둘러 책상에 쌓아놓은 서류들을 바닥으로 쓸어버렸다. 잿빛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수많은 하얀 종이들이 그 위를 덮었다.
차기주는 최선을 다해 센터를 유지하고자 했다. 탈옥한 에스퍼 범죄자들 때문에 정신없는 현장을 버리고 책상에 앉아 있는 게 센터의 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건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차기주는 에스퍼들에게 있어 힘들 때 혼자 편하게 사무실에서 엉덩이나 뭉개는 놈이 되었고, 가이드들에게는 이미 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황지윤이 이렇게까지 센터를 완전히 장악하고 싶어 하니 그냥 넘겨줘버릴 셈이었다.
이사실에서 걸어 나오는 차기주를 본 김 비서가 비서실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이사님, 어디 가세요?”
그 짧은 물음 안에는 아직 처리해야 하는 서류가 많은데 농땡이를 치는 거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가엔 밤샘 작업으로 인해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차기주는 비서실 책상 위에 볼링 핀처럼 세워둔 에너지 드링크와 커피 캔을 한 번 보고 김 비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김 비서, 서류 작업할 거 없어. 전부 가이드 팀에 반납하고 와. 비서 팀 당분관 쉬어. 나 장기 휴가 갈 거니까.”
“이사님! 이사님!”
차기주는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김 비서를 뒤로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가이딩 중독 치료를 하겠다며 담당 가이드로 진설해를 붙였었지. 혹시 자신이 그녀에게 가이딩을 받게 해서 김수현이 오해하게 만들 생각이었던 걸까?
진설해는 차기주에게 앙심을 품었으니, 없는 말을 지어내며 잠자리라도 한 것처럼 김수현에게 떠들지도 몰랐다. 그가 징계위원회에 굴복하지 않고 가이딩실을 방문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는 5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는 부유감과 함께 김수현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철제 계단을 올랐다. 구두 굽이 미끄럼 방지를 위해 우둘투둘하게 돌기가 있는 철제 계단과 만나며 카랑카랑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계단을 오르며 보는 하늘은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푸르렀다. 이곳에 쓰러져 괴로워하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이가 떠올랐다.
회귀 전 메시아에게 걸린 세뇌로 김수현과 자신이 겪어야만 했던 시련과 고난을 떠올리자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기억을 잃은 수현이 자신을 학교 선배라 믿으며 불 속에서 끌어안아주었던 기억도, 그런 자신을 안은 팔이 새까맣게 타버렸던 것도. 전부 생생하게 떠올랐다.
시간이 어떤 이유로 되돌려졌는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있어 회귀는 기적처럼 얻은 기회였다. 고작 이런 유치한 이간질로 그 기회를 잃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밟았다. 목에 걸어둔 사원증으로 잠금장치를 열었다.
이젤 앞에 앉아 있는 김수현의 둥글게 숙인 등이 보였다. 수현이 얌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걸 보자 안도감이 몰려왔다. 화가를 애인으로 둔 탓일까. 김수현은 잿빛 세계에서 자신이 볼 수 있는 유일한 색이란 생각이 들었다. 표현마저 김수현을 닮아가는 것 같았다.
김수현이 손에 들고 있던 4B 연필을 내려놓았다. 차기주의 시선은 그 대단치 않은 행동에 매료되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왔어요?”
차기주는 유심히 김수현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평소와 같은 김수현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겠지.
“오늘은 일찍 왔네요. 우리 외식해요.”
“그래, 손 씻고 와.”
김수현은 손가락 사이에 타투를 해서 손을 씻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물티슈로 문신을 피해 손을 문질러 흑연을 닦아냈다. 차기주는 평소와 달리 화장실에서 손을 씻지 않는 김수현을 눈치챘지만 큰일은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가이드 검사를 통해 센터 가이드 팀 소속이 된 김수현은 사원증을 챙겼다. 김수현이 먼저 센서에 사원증을 대고 징벌방을 나왔다. 이제 더 이상 김수현은 감금당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차기주는 대충 발을 욱여넣어서 신은 김수현의 운동화 끈이 풀린 걸 발견했다. 기꺼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운동화 끈을 묶어줬다. 김수현은 차기주의 검은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혹시 이사님, 나한테 거짓말한 거 있으세요?”
덜컥, 어색하게 굳어버릴 뻔한 행동을 애써 이어가며 차기주는 고민했다. 무언가 아는 것일까? 너무나 많은 일들이 마음에 걸렸다. 차기주는 회귀 전에 자신의 의지였든 아니었든 김수현을 강간했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고, 현재 가이딩 중독이 심각하다는 것도 숨겨야 했다. 무엇 하나 연인 앞에서 떳떳해질 수 없는 약점들이었다.
“글쎄, 없는데.”
“흐음, 뭐 그래요.”
김수현이 순순히 넘어가 주었음에도 차기주는 평소와 달리 자신의 표정이 무너졌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혹시 곤란한 일 있으면 말해요. 도와줄게요.”
그 의미심장한 말에 차기주는 바짝 긴장했다.
‘설마 진설해를 만난 걸까? 진설해한테 헛소리를 듣고 나에게 실망해버린 건 아니겠지?’
차기주는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변명했다가 되레 김수현에게 자신의 가이딩 중독을 자백하게 될 가능성을 계산했다. 지금의 김수현은 자신이 가이딩 중독이라는 걸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러니 함부로 말을 꺼내는 것은……. 꿀꺽. 침을 삼킨 그는 목을 죄는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헐거워진 와이셔츠 옷깃으로 식은땀이 미끄러져 내렸다.
김수현은 아무 말 못하는 차기주가 귀여워 손을 뻗어 창백한 뺨을 감쌌다.
“은근히 쫄보라니까. 그냥 한번 물어봤어요.”
* * *
두 사람은 센터 부지 내에 식당이 몰려 있는 쇼핑몰 건물로 들어갔다. 다양한 브랜드가 입점해 있는 쇼핑몰에는 퇴근 후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하나씩 들고 다니는 직원들이 몰려 있었다. 1층에 있는 명품 매장에서는 능력자들을 위한 한정판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지라 그걸 사기 위해 사람들이 줄 서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양옆이 유리로 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온갖 말소리와 북적이는 인파 때문에 일행을 놓치기 딱이었다. 차기주는 김수현을 잃어버리지 않게 손을 맞잡았다.
“수현아, 뭐 먹을래?”
마침 에스컬레이터를 내리자마자, 그 앞에 천연 효모 종으로 빵을 만드는 빵 가게가 있었다. 화덕에서 빵 굽는 냄새가 참으로 고소했다. 김수현은 차기주를 그곳으로 끌고 갔다.
“여기 빵 먹어봤어요?”
“아니.”
“여태 센터에서 일하면서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거예요.”
김수현은 이사실에 박혀서 일만 했을 차기주가 떠올라 혀를 찼다. 무작정 그를 끌고 들어가 무화과 깜파뉴와 시금치 치아바타, 흑임자 바게트를 구매했다.
“이따가 빵에 버터 발라서 와인이랑 같이 야식으로 먹어요.”
김수현을 데리고 센터를 벗어나려고 했던 차기주는 “야식이라면 밤에 먹을 텐데” 하며 늦은 시간까지 연인과 함께 보낼 모습을 상상했다. 기회가 왔는데 놓칠 수는 없었다. 그는 오늘 밤이 아닌, 내일 아침 일찍 센터를 벗어나기로 했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손목에 건 쇼핑백을 빼앗아서 챙겨 들었다. 두리번거리던 김수현이 유리 케이스 안에 진열된 디저트를 보더니 그쪽으로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이런 걸 보면 아직도 어리지 싶었다.
“이사님 밤 좋아하잖아요. 이거 몽블랑 크림으로 만든 타르트래요.”
김수현은 고민하지 않고 바삭한 타르트지에 얇은 국수처럼 뽑아낸 몽블랑 크림과 삶은 밤을 올린 디저트를 여러 개 구매했다. 차기주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았다고 눈을 반짝 빛내는 김수현의 옆모습을 홀린 듯 봤다가 문득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김수현과 만나온 이래로 자신이 밤을 좋아한다는 걸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회귀 전 기억을 찾은 걸까? 왜 자기를 강간했다고 원망하지 않지?’
섣부른 판단일 수 있었다. 최대한 나쁜 가능성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애써 생각을 버렸다.
차기주는 이번에도 타르트가 든 민트색 종이 박스를 대신 들었다. 김수현이 고급 식자재를 모아둔 슈퍼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돌진했다. 이렇게 신나 하는데 진작 데려올걸 싶었다.
“이사님, 여기 와인 엄청 많아요.”
김수현이 프로세코 와인을 골랐다. 이탈리아 소도시 발도비아데네에 위치한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로컬 와인인데, 차갑게 칠링해서 먹으면 기포가 퐁퐁 올라와 무더운 날의 더위가 가시곤 했다.
단맛을 엑스트라 드라이로 고르는 것까지 차기주의 취향이었다. 마트 안에 있는 장난감 코너에 온 아이처럼 신이 난 김수현이 와인 코너를 꼼꼼히 살폈다. 아마로네 와인을 발견했을 때는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한 것처럼 굴어서 지금 상황도 잊고 몰래 웃을 정도였다. 아, 귀여워.
“슈퍼에서 이런 고급 와인을 팔다니. 과연 센터답네요. 근데 그거 알아요?”
와인 병을 손에 든 김수현이 은근히 몸을 밀착하며 차기주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와인, 이사님 정액 맛이랑 비슷하더라고요.”
“너!”
아마로네는 ‘쓰다’라는 뜻의 아마로에서 파생된 단어로 ‘위대한 쓴맛’이라는 의미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살았다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북쪽의 발폴리첼라에서 생산되었고, 발폴리첼라는 ‘셀러가 가득한 계곡’이라는 뜻을 가질 만큼 오래된 양조장이 모여 있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와인은 발폴리첼라, 레치오토, 아마로네 이렇게 세 가지였다. 같은 포도를 사용해도 숙성하는 방식에 따라 향과 맛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포도밭에서 제때 포도를 수확해 발효하면 발폴리첼라 와인이 되고, 포도를 말려서 발효하면 아마로네, 잘 익은 포도를 발효하다가 중간에 단맛을 위해 숙성을 멈추면 레치오토가 되었다.
셋 중 아마로네가 가장 드라이하고 쓴맛이 강했다. 정액이 씁쓸하다는 소리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할 줄이야.
차기주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숨겼다. 김수현이 뭘 이런 걸 가지고 부끄러워하냐는 듯 쇼핑 카트에 와인을 집어넣었다. 그는 지금 지내고 있는 방공호에서 이 와인을 본 것 같아 쇼핑카트에 넣어둔 걸 바로 뺐다.
“왜요, 나 이거 마실 건데.”
“이미 있어서. 나중에 가져다줄게.”
방공호에서 지내면서 누군가 숨겨둔 와인을 하나둘씩 마시는 재미로 사는지라 와인 맛이 바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 안에 단침이 고였다.
“그럼 이제 안주만 사면 되겠다.”
김수현이 쇼핑 카트를 밀며 와인 안주 코너로 향했다. 치즈와 버터, 생햄과 카나페용 크래커 등 와인과 같이 먹기 좋은 먹거리를 골라 집었다.
쇼핑을 끝마친 그가 계산대 컨베이어 벨트에 프로세코 와인과 각종 와인 안주를 올려놓았다. 김수현이 의기양양하게 차기주를 돌아보며 “초대받았으니까 선물용이에요” 라고 말했다. 그의 공간에 들어가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차기주는 어쩔 수 없이 “그래” 하고 자신의 귀엽고 발칙한 애인을 방공호에 초대했다. 12살이나 어린 알파를 애인으로 뒀으니, 김수현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려줘야지 싶었다.
차기주는 슈퍼에서 산 비닐봉지까지 한 손에 들었다. 김수현이 자기도 나눠서 들겠다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김수현의 손은 그림을 그려야 하는 귀한 손이지 않은가.
저녁 식사로 김수현이 뭘 먹을까 싶었는데 수많은 메뉴를 보고도 고작 김밥집으로 들어갔다. 물론 평범한 분식점에서 파는 김밥이 아니긴 했지만, 데이트하러 와서 이런 걸 먹나 싶어 차기주는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더 좋은 거 먹어.”
“비싼 것보다 좋아하는 거 먹을래요.”
메뉴를 고르면 음식점 직원이 즉석에서 김밥을 말아줬다. 김밥 위에 소금 간을 한 밥을 깔고, 아보카도와 연어, 양파 샐러드와 케이퍼를 넣었다. 두 번째 김밥에는 구운 삼겹살을 세 줄이나 올리고 쌈무와 쌈장을 묻힌 청양고추, 구운 마늘을 함께 쌌다.
김수현은 우동 두 그릇을 추가했다. 차기주는 김밥을 먹는 내내 김수현이 맛있게 먹는 모습에 정신 팔려 젓가락질을 늦췄다. 김수현은 그런 차기주를 보고는 테이블 밑으로 손을 넣어 그가 성기를 수납해둔 허벅지를 쓸었다.
차기주의 귀가 순식간에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개졌다. 김수현은 자신을 보느라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차기주의 입에 김밥을 넣었다.
“꼭꼭 씹어 먹어요. 이따가 힘쓸 일 많으니까.”
“누가 보면 내가 아저씨랑 사귀는 줄 알겠어. 네 나이에 맞게 좀 굴어.”
“변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했는데 무슨 엉큼한 상상을 한 거예요.”
“정말 안 해?”
“아니요, 할 건데요.”
김수현은 장난치는 게 재미있다는 듯 짓궂게 웃었다. 차기주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김수현은 얼음 같은 차기주가 자신 앞에서만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는 게 좋았다. 자신만이 그에게 특별하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몰랐다.
그렇게 가벼운 말장난을 치며 대화하다가 식사가 끝났다.
김수현은 차기주에게 센터의 어디서 지내냐며 물었다. 차기주는 선뜻 방공호에서 지내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기숙사에 들어가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지만, 다른 에스퍼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그냥 그곳에서 줄곧 지내고 있었다.
그는 말없이 김수현을 자신이 머무는 거처로 안내했다. 깊은 구덩이에 있는 사다리를 타고 그들은 더 깊은 땅속으로 내려갔다. 김수현은 왜 땅속에서 사냐며 혹시 암살을 대비하기 위해서냐고 물었다.
은행 강도가 와도 절대 열지 못할 것 같은 거대한 문을 본 김수현은 표정을 굳혔다. 사람이 아니라 무기를 보관하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차기주는 모르는 척 비밀번호를 누르고 핸들처럼 된 손잡이를 돌려서 방공호를 열었다. 김수현은 그가 민망하지 않도록 애써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실내를 살폈다.
“우주선 안 같아요. 아니다. 와인 창고인가?”
와인 상자를 쌓아놓은 걸 발견한 김수현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먼지가 쌓인 나무 궤짝에서 와인 병을 꺼내 보며 라벨을 확인했다.
“와, 대박. 이런 호사스러운 두더지 생활이라면 할 만하겠네요.”
김수현이 종종 와서 와인을 마시겠다며 아까 사지 못한 아마로네 와인을 찾아냈다.
“손 씻고 와. 먼지 묻었잖아.”
“물티슈는 없어요?”
차기주는 오늘따라 김수현이 왜 손을 안 씻나 싶어서 유심히 손을 관찰했다. 잘 보이지 않는 검지 옆면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내…… 이름? 너무 놀라 사지가 뻣뻣하게 굳었다. 김수현이 에스퍼라는 걸 아는 차기주는 그게 네임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센터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분명 김수현의 손에 있는 제 이름을 보고 네임이라고 생각하겠지.
‘혹시 수현이가 나한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는 걸까? 그러니까 갑자기 타투를 새긴 거겠지?’
자신을 구하겠다며 타투를 새겼을 김수현이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차기주는 감정의 동요가 없는 편인데도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입을 손등으로 가려야 했다.
“왜 그래요?”
김수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답하고 물티슈를 찾아서 줬다. 그림을 그리고 나서 손을 씻지 못한 것도 다 타투 때문이었다. 차기주는 자신이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심히 숨을 내쉬었다.
김수현이 자신을 구해준다니 외압을 받아도 얌전히 참아야겠다.
“와인 잔은요?”
김수현이 손을 닦아내고는 와인 오프너로 코르크 마개를 땄다. 차기주는 서랍장을 열어서 와인 잔을 찾았다. 뒤를 돈 차기주는 폐가 찌부러지는 듯한 격통을 느꼈다.
식탁이 있는 천장에는 레일을 따라 LED 조명이 달려 있었다. 화사한 조명을 받은 김수현은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처럼 생동감 넘쳤다. 단아한 이마와 높은 코, 적당한 입술을 가진 완벽한 얼굴 굴곡에 몰입해 정신없이 바라봤다. 김수현이 가진 아름다움에 숨이 막혔다.
몇 초 동안 굳어 있던 차기주는 간신히 와인 잔 두 개를 김수현에게 건넸다. 그들의 손끝이 미세하게 스쳤다. 일부러 그랬는지 김수현이 눈웃음을 쳤다.
수현은 우아한 걸음으로 식탁에 걸어가 딱딱한 나무 스툴 의자에 엉덩이를 살짝 걸친 채 긴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부잣집 도련님답게 김수현은 능숙하게 디캔터에 와인을 부어서 향을 열었다.
차기주는 방공호에 있던 유리병 통조림을 가져왔다. 올리브오일에 말린 방울토마토를 넣어둔 걸 젓가락으로 집어서 카나페 크래커에 올렸다. 생햄은 따로 접시에 치즈와 담아서 뒀다. 그는 김수현이 내미는 와인 잔을 받아 들었다.
김수현은 손끝으로 붉은 와인이 담긴 볼과 술잔 바닥을 잇는 가느다란 스템을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은근한 유혹이 침을 마르게 했다. 미인의 손짓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차기주는 와인 잔을 돌려 스월링하고 바짝 마른 입 안에 와인을 머금었다.
도수가 높은 와인이라 한 모금만으로도 금세 술기운이 올랐다. 코끝까지 과일 향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타닌의 쓴맛과 시큼한 맛이 혀에 부드럽게 휘감겼다. 마지막에는 소주처럼 진한 알코올 맛이 났다.
진하고 강하며 시크하다. 와인에 대한 감상인지, 김수현에 대한 감상인지 모를 생각을 하며 와인 잔을 내려놓은 차기주가 짭짤한 하몽을 집어 먹었다. 김수현이 와인 잔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지하라 서늘해서 그런지 와인 컨디션이 좋네요. 그래서 사람 살기에는 안 좋을 것 같은데. 이사님 왜 여기서 지내요?”
“원래는 서울에서 출퇴근했는데 수현이 널 센터에 가두면서 여기서 지내게 됐어.”
“기숙사 방도 많은데 센터 이사가 무슨 이런 데서 지내요.”
차기주는 김수현이 속상해하는 걸 느꼈다. 그게 몹시 기껍고 마음을 들뜨게 했다.
“왜 웃어요. 난 지금 심각한데.”
“그냥. 좋아서.”
“하여간 은근히 싱거워.”
“싱거우면 소금 줄까.”
“아저씨, 재미없거든요!”
와인을 한 잔 걸친 두 사람은 유치한 농담을 하며 놀았다. 취기에 실실 웃음이 흘러나왔다. 차기주는 에스퍼의 신체 회복 능력 때문에 취기가 왔다가도 금방 회복되었지만, 자신과 달리 뺨이 달아오른 김수현에게 취해 정신이 몽롱한 건 마찬가지였다.
술이 들어간 김수현은 스킨십에 있어 대범해졌다. 차기주의 손등에 손을 겹쳤다.
김수현은 문득 검지 옆면에 새긴 타투 때문에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걸 떠올렸지만 ‘에라 모르겠다. 이미 먹어버린 거 어쩌냐’ 하고 배 째라는 심정으로 걱정을 버렸다. 지금이라도 기억해냈으니 앞으로는 안 마시면 되는 거 아닌가.
자신을 향한 눈빛을 마저 사로잡기 위해 김수현은 와인 잔을 들었다. 살짝 입술에만 술을 적셔서 평소보다 붉어 보이게 했다. 차기주는 손으로 김수현의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 하얀 이가 보였다. 김수현은 혀를 내어 그의 엄지를 핥았다.
두 사람의 코가 가까워졌다. 김수현은 차기주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입 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와인의 쓴맛이 밴 점막을 혀로 문지르다 보면 단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손이 다급하게 김수현의 옷을 벗기려고 들었다.
티셔츠가 끌어 올려지며 서늘한 방공호의 기온이 배에 닿았다. 자연스럽게 몸이 움츠러들었다가 곧 턱 끝까지 올라간 티셔츠에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위로 올렸다. 추위를 느낀 맨살 위로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차기주가 매끈했던 피부 위에 생긴 닭살을 어루만졌다. 뭉근한 마찰열에 살갗이 금세 가라앉았다.
“추워?”
“이사님이 덥게 해주세요.”
차기주는 잠시 멈칫했다.
어느 순간부터 김수현이 한층 능글맞아진 것 같은데 착각이 아니었다. 꼭 회귀 전 자존심이 강했던 그 알파를 다시 마주한 것만 같았다. 센터에서 에스퍼로 활동했던 김수현은 참 당당하고 멋졌다.
메시아의 세뇌에 걸려 어떻게든 밀어내려는 차기주의 마음도 모르고 자신이 좋다며 먼저 다가왔었지. 차기주가 다가오는 김수현을 피해 한 발 뒤로 물러나면, 김수현은 보란 듯이 그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이번 생에도 마찬가지였다. 김수현이 먼저 손을 내밀어줬기에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지, 아니었으면 그는 끝까지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걱정으로 김수현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쪼옥, 쪽. 김수현이 강하게 차기주의 입술을 빨았다. 수현의 손가락이 차기주의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와 뒤통수를 눌렀다. 입술끼리의 접촉이 더욱 깊어졌다. 진득하게 키스를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능숙하게 와이셔츠 단추를 푸는 게 바람둥이 같아도 차기주는 알았다.
그에게 김수현이 처음이듯 김수현에게도 차기주가 처음이라는 걸. 김수현은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자신만은 회귀 전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이번엔 사랑하는 알파를 오해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 회귀 전 기억은 오직 자신만이 떠올리길 바랐다. 김수현에게 그 어떤 아픈 기억도 존재하지 않도록.
함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었던 캐주얼 다이닝 레스토랑, 테이블 밑에서 구두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설렜다. 쿵, 심장이 내려앉고 호흡이 가빠진다.
복숭아뼈를 문질렀던 양말 신은 발 대신, 지금은 김수현의 손이 부지런히 그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등에 머물던 손이 순식간에 미끄러져 내려와 벨트를 풀었다. 차기주도 넋 놓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김수현의 청바지 버튼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그들은 잠시 키스를 멈추고 숨을 골랐다. 하아. 하아. 뜨거운 호흡에서 와인 냄새와 더불어 발정 난 알파의 페로몬이 풍겨왔다. 상식적으로 같은 알파인 그들은 서로를 혐오하며 상대의 페로몬을 역겹게 느껴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상식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 어떠한 오메가의 페로몬보다도 당장 눈앞에 있는 알파의 페로몬에 짙은 갈증을 느꼈으니까. 히트사이클을 맞이한 오메가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릴 알파로 태어났음에도 그들은 그 본능을 거부할 만큼 서로를 원했다.
김수현이 먼저 차기주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차기주는 무릎 꿇은 김수현의 머리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김수현은 주먹을 입에 구겨 넣는 것처럼 무식하게 성기의 선단을 물었다. 입가가 한껏 벌어져 아팠지만, 혀끝에 닿은 쿠퍼액을 맛보니 참을 수 없었다. 손으로 좆 기둥을 잡고 가볍게 위아래로 쓸었다.
그러곤 차기주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숨을 헐떡이는 걸 올려다봤다. 두꺼운 목덜미에 곤두선 혈관이 섹시했다. 시선을 내려 단단한 가슴 근육에 예쁘게 자리 잡은 갈색 유두와 거칠게 숨을 쉴 때마다 선명해지는 복근을 눈으로 훑어내렸다.
김수현은 성기에서 손을 떼어내고 본격적으로 삼키기 시작했다. 침을 삼키며 목젖을 찌르는 귀두를 기도로 조이자 단단한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김수현은 얕게 눈웃음치며 그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차기주의 손이 김수현의 뒤통수를 누르며 그 얼굴을 좆 뿌리까지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입술이 흥분으로 탱탱해진 불알에 뭉개지고 코끝이 검은 음모에 비벼졌다. 간지러우면서 까칠한 감각에 흥분감이 올라왔다. 숨을 쉬기 힘들어 그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탁 때리자 머리채를 쥐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다. 기도로 넘어간 탓에 목울대에 그 윤곽이 드러났던 좆이 김수현의 입에서 빠져나왔다. 침으로 칠갑한 좆이 흉흉하게 위로 곤두서, 수현이 손으로 장난스레 툭 쳐도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침대로 가요.”
김수현이 먼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큰 키의 미남은 뒷모습조차 완벽했다. 그리스 시대에 태어났으면 수많은 철학자가 이 아름다운 청년을 위해 아테네 광장에서 시를 낭송하며 고백했겠지.
차기주는 아름다운 뒤태를 눈으로 핥듯이 구경하다가 침대에 도달한 순간 김수현을 끌어안았다. 김수현의 아랫배를 손으로 쓰다듬고 단번에 좆을 손에 쥔 그는 수현의 귓가에 입술을 문지르며 뜨거운 숨을 불어 넣었다.
“여기 젤 없어. 한 발 빼.”
그윽한 목소리에 김수현은 오르가슴을 느끼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김수현의 사타구니 사이로 좆을 집어넣은 차기주가 천천히 피스톤질 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강직된 김수현의 좆을 문지르며 그가 눈앞에 있는 도톰한 귓불을 입에 물었다.
하아, 하아.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는 두 사람의 소리가 한데 섞였다. 와인을 보관하기 좋을 정도로 서늘한 방공호 안이 따뜻하게 느껴질 만큼 겹친 부위가 뜨거웠다. 차기주는 하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페로몬 샘을 아무리 깨물어도 각인을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송곳니로 여린 피부를 꿰뚫고 피를 냈다. 차기주는 자신의 알파를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알파 페로몬을 그 상처에 쏟아부으며 마킹했다.
허억, 그 순간 김수현의 허리가 격하게 앞으로 꺾였다. 아무리 차기주의 페로몬이 감미롭게 느껴진다고 해도 알파의 몸은 그것을 거부했다. 차기주는 바로 페로몬을 거둬들이고 김수현을 살폈다.
“괜찮아?”
“내가 오메가도 아닌데 왜 마킹을 해요.”
“……널 온전히 갖고 싶으니까.”
차기주는 손에서 놓친 좆 대신 질척하게 뿌려진 정액을 훑어 손에 넣었다. 김수현은 불안함을 느끼는 차기주가 안타까웠다. 물론 자신이 계속 도망치려고 하긴 했지만, 회귀 전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는 아무 문제 없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아주 잘 지냈다고. 그럼에도 차기주는 불안해했다.
세상 사람들은 가장 강한 에스퍼라고,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그였지만 김수현에게 있어 차기주는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자신 또한 차기주를 온전히 소유할 수 없어 불안감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알파라 그의 아이를 낳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각인을 할 수도 없었다. 결혼도 할 수 없었고 페어 관계가 아니었다면 세상으로부터 기이한 커플 취급이나 받게 되었을 터였다.
게다가 가이드인 척 센터의 눈을 속이고 있긴 하지만 본래 김수현은 에스퍼였다. 손가락에 타투를 새기는 것 이외에는 차기주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설령 알파일지라도 진짜 가이드였다면 차기주의 네임이 몸에 나타나 그를 가이딩 중독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었겠지.
김수현과 차기주는 무엇 하나 서로에게 이로울 게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 전부 상관없다고 생각할 만큼 차기주가 좋았다.
김수현은 서늘하게 식은 침대 시트 위에 엎드렸다. 뺨으로 부드러운 시트 감촉을 느끼며 엉덩이를 바짝 치켜세웠다.
“이사님, 이러다가 기껏 구한 윤활제 굳겠어요. 빨리 발라요.”
“하아, 미치겠다. 도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워오는 거야.”
“야동.”
“너…… 야동 이야기 한 번만 더 해.”
차기주는 엄하게 꾸짖으며 김수현의 뒤편에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회귀 전에 당신이랑 실컷 뒹굴며 실전으로 익힌 거라고는 말할 순 없지 않은가. 김수현은 차기주가 구멍 위로 정액을 펴 바르길 기다렸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게 닿았다. 말캉한 입술이 구멍에 짓이겨졌다.
“뭐예요!”
당황한 김수현을 아랑곳하지 않고 차기주가 혀로 구멍 주름을 정성스럽게 핥기 시작했다.
“으으. 씨발, 진짜 미쳤어.”
“고운 말.”
“알았어요. 알았어.”
김수현은 숨을 불규칙적으로 내뱉었다. 차기주가 움찔거리는 구멍에 혀를 넣고 예민한 점막을 문질렀다. 뒤가 빨리는 감각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파도가 몰아치는 것처럼 수현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건드리지도 않은 젖꼭지가 가려워 찬 기운이 남아 있는 침대 시트에 문질러봤지만 소용없었다. 배 속에 용암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온몸이 달아올랐다.
구멍을 빨던 차기주는 엉덩이 골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발정 페로몬을 내뱉는 김수현의 하얀 등에 연한 분홍빛이 돌았다. 구멍에서 혀를 빼내고 정액을 모아둔 손을 가져와 손가락 두 개에 골고루 정액을 묻히고 구멍에 집어넣었다.
“흐읏.”
손가락을 왔다 갔다 하며 내벽에 있는 주름을 문질렀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끊어먹을 것처럼 죄어오는 안이 느껴졌다. 차기주는 탄력 있는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이로 깨물었다. 파드득 허리를 떨며 김수현이 우는 소리를 냈다.
“그냥 넣으라고요. 흑, 왜 자꾸 안 넣고 이상한 짓을 하는 거야.”
김수현이 자기 나이에 맞게 굴 때면, 차기주는 김수현의 순진한 모습이 귀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소리 내서 웃으면 화낼 것 같아 애써 웃음을 참으며 김수현의 좆을 손으로 잡았다. 뒤를 쑤시면서 동시에 좆을 흔들어주자 수현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쏟아져 나왔다.
“아으윽, 아니야. 아아.”
김수현이 고개를 저으며 침대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모습이 야하기 짝이 없었다. 곧이어 쏟아지는 정액을 받아낸 차기주는 아직 뻑뻑한 뒤에 다시금 그것을 흘려 넣었다. 사정한 직후라 미끌거리는 정액이 더해지자 구멍을 쑤시기가 한결 수월했다.
손가락을 뽑아낼 때마다 뽀얀 백탁 액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럼 차기주는 다시 그것을 긁어서 구멍에 넣어주며 안을 넓혔다. 지독하리만치 강렬한 작약꽃 향기가 방공호를 가득 채웠다. 차기주도 덩달아 음심과 집착으로 얼룩진 페로몬을 흘려댔다. 그는 손가락으로 잔뜩 희롱해댄 탓에 벌렁거리는 구멍을 들여다봤다. 손가락을 가위질해서 벌려놓은 그곳은 붉은 점막으로 차 있었다.
이 좁은 틈에 들어갈 구석이 있다는 것에 새삼 신기해하며 구멍에서 손가락을 꺼냈다. 미끄덩거리는 손을 대충 침대 시트에 문질러서 닦아낸 그가 김수현의 골반을 단단히 잡고 귀두를 구멍에 맞추었다.
천천히 앞으로 밀고 들어가자 그새 꽉 다물어진 구멍이 팽팽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김수현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차기주의 것은 같은 우성 알파치고도 컸다. 웬만한 오메가도 받아내기 힘든 것을 애액도 흘리지 못하는 뒤로 받아내려니 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한꺼번에 넣고 배 속을 쑤시다 보면 기분 좋은 곳이 건드려져 고통이 덜하다는 걸 이미 회귀 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김수현은 숨을 멈추고 단번에 하체를 내려앉았다. 차기주는 성기를 잘라 먹을 것처럼 조여오는 구멍에 작게 신음했다. 고통스러운 것은 김수현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움직여요.”
“하지만, 후. 너 지금 아플 거 아니야.”
“그, 러니까 움직이라고요. 그 큰 좆 가지고 콱콱 박아줘야 나도 조금이나마 고통을 잊을 거 아니에요.”
차기주는 최대한 김수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엉덩이 살을 양손으로 잡아 구멍을 옆으로 늘렸다. 굵고 긴 성기가 내벽을 쓸며 빠져나갈 때마다 안이 홧홧하게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밀조밀한 주름이 잡힌 내벽은 알파의 성기를 품느라 다리미질한 듯 펴져버렸다.
차기주가 거칠게 움직이자, 수현의 구멍 속 깊숙한 곳에 자리한 혹이 귀두에 짓눌렸다.
“아!”
침대 시트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김수현이 반응했다. 차기주는 쉬지 않고 전립선을 귀두로 문질러댔다.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나온 쿠퍼액이 내벽에 덧칠해지며 제 영역을 표시했다. 김수현은 탄탄한 배 위로 윤곽을 드러낸 차기주의 좆을 손으로 문질렀다.
“도발하지 마. 지금 간신히 참는 중이니까.”
“이사님, 혹시 느껴져요?”
차기주는 자꾸만 뱃가죽 너머로 내벽을 가득 채운 좆을 만져대는 김수현 때문에 이를 악문 채 허리 짓을 이어갔다. 튼튼한 알파의 신체로도 밀려날 만큼 거친 추삽질이었다.
김수현은 구멍을 조이며 좆을 세웠다. 전립선을 중점적으로 자극하는 차기주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사정하고 말았다. 이제는 흐르는 정액조차 물처럼 묽어진 채였다.
“흐으, 응. 으응. 읏!”
김수현은 차기주가 움직이는 박자에 맞춰 신음을 내뱉었다. 땀이 맺힌 등줄기에 가벼운 입맞춤이 내려왔다. 도로 허리를 편 차기주가 김수현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개가 흘레붙듯 천박한 자세로 접합부에서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정사를 이어갔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깨끗한 연분홍빛 좆이 흔들리는 모습을 홀린 듯 바라봤다. 그가 좆으로 내벽을 긁어내릴 때마다 김수현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사정해댔다.
그는 잡은 다리를 옆으로 넘겨 김수현을 똑바로 눕혔다. 교접된 채 자세를 변경하느라 자극이 갔는지 김수현이 울먹이며 차기주의 어깨를 때렸다. 차기주는 화사하게 웃는 낯으로 면죄부를 샀다. 김수현이 자신의 얼굴을 몹시 좋아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차기주도 김수현 못지않게 김수현의 얼굴을 좋아했다. 알고 보면 그들은 서로의 외모에 홀린 속물인 것이다. 그 생각에 차기주는 웃음 지었다. 그렇지만 사람이 가장 먼저 상대방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바로 외모였다.
그러므로 얼굴을 보고 반한다는 건 상대방에게 첫눈에 반한다는 로맨틱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기적이기도 했다. 차기주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김수현의 배 속에 머물러 있었다. 내벽이 쫀쫀하게 좆에 달라붙어 물어뜯는 걸 느끼며 머리털이 쭈뼛거리는 쾌감에 전율했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물건이 빠져나가자 김수현은 마치 내장이 뽑혀 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에 몸을 떨었다. 허벅지 뒤쪽이 쥐가 난 것처럼 딱딱해진 채 경련했다. 차기주가 빠져나가니 아주 커다란 돌덩이를 빼버린 것처럼 배 속이 허했다.
질척한 점액질이 구멍에서 새어 나와 침대 시트까지 흘러내렸다. 차기주는 손으로 대충 좆을 훑어서 사정하곤 침대 옆에 있는 협탁에서 티슈를 뽑아 손을 닦았다.
김수현은 지쳐서 사지에 힘을 풀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차기주가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가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왔다. 곧 물에 적신 수건으로 더럽혀진 배와 가슴을 꼼꼼히 닦아내는 손길이 느껴졌다.
젖은 수건이 회음부와 좆을 문지를 때 구멍이 움찔거리며 반응했지만, 기력을 다 소진해서 무엇도 더 할 수 없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수현아, 잘 자.”
이마에 도장처럼 입술이 찍혔다. 그것을 끝으로 김수현은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김수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차기주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식탁에는 ‘잠시 나갔다 올게’라고 적힌 노란 메모지와 함께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자신과 잠자리를 하고 자리를 비울 사람이 아닌지라 의아했다.
수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수저로 오므라이스를 떠서 먹었다. 입 안이 꺼끌꺼끌해 입맛이 없었지만, 케첩으로 하트가 그려져 있어서 도저히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깨끗이 오므라이스를 비우고 그가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이는 아이보리색 니트와 하늘색 청바지를 입었다. 자기는 까마귀처럼 온통 검은 옷만 입으면서, 양말까지 베이지색으로 맞춰주는 센스를 가진 남자였다. 김수현은 자신의 알파가 얼마나 세심한 사람인지 되뇌며 양말까지 마저 신었다.
이제 이곳을 나갈 차례인데 방공호의 문을 여는 방법을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비밀번호를 모르니까 아무리 문고리를 돌려도 열리지 않았다.
‘혹시 여기 갇힌 건가? 이제부터 아무도 모르는 감금 생활 시작인가?’ 하며 헛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당연히 차기주가 돌아온 줄 알았는데 모르는 얼굴이 보였다.
“누구세요?”
김수현의 질문에 상대방이 되물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세요? 아, 김수현 가이드겠구나. 혹시 여기 갇혔어요?”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차기주가 방공호에서 생활한다는 걸 알고 와인을 찾으러 오지 못했던 와인 주인이었다.
가이딩 중독에 걸린 차기주가 다른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지 않아 징계위원회 사람들이 그를 찾아갔다. 그러나 차기주가 징계위원장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내쫓았다.
당연히 윗선에서는 난리가 났다. 차기주가 저러다 폭주하면 어떡하냐며 말이다. 그 이야기가 대통령에게까지 닿자 결국 국제 안보 연합(International Security Unions)에서 오늘 징계 심사를 열었다.
국제 안보 연합은 1차 대변혁 이후 게이트 발생과 괴수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로, 국가들의 연합체였다. 아무리 차기주 이사라도 해도 국제 안보 연합에 밉보일 수 없으니 새벽부터 불려 간 것이다.
남자는 그 틈에 와인을 옮길 생각이었다. 차기주도 그렇고, 남자도 그렇고 아침에는 출근하고 저녁에는 퇴근하는 회사원이었다. 시간이 겹치지 않는 이때가 절호의 기회였다.
남자는 가이딩 중독으로 미쳤다는 차기주의 가이드를 동정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이제 다 괜찮아질 거예요. 지금 이사님 징계 심사 중이거든요.”
김수현이 감금당했다고 착각한 남자는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네? 징계 심사요? 어디서요?”
남자는 대회의실에서 열린다고 알려줬다. 김수현은 그를 밀치고 방공호에서 뛰쳐나가 사다리를 타고 굴을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허벅지가 터질 것처럼 달렸다. 센터 본관 건물에 들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운 좋게도 바로 1층에 있어서 탈 수 있었다.
김수현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대회의실까지 달려가 무턱대고 문을 열었다. 테이블에는 황지윤 파트장 및 에스퍼 팀 팀장과 가이드 팀 팀장이 앉아 있었다.
그 밖에도 평소에 보지 못했던 남색 제복을 입은 무서운 얼굴들이 보였고, 벌집처럼 나뉜 화면에서는 전 세계에 흩어진 국제 안보 연합 국장들의 얼굴이 송출 중이었다. 차기주는 죄인처럼 ‘ㄷ’ 자로 놓여 있는 테이블의 중앙 공터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직원이 김수현을 내쫓으려고 했다.
“차기주 이사님은 가이딩 중독자가 아닙니다.”
김수현의 말에 화면에 있는 국장 중 한 명이 영어로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들의 귀에는 동시 통역되는 이어폰이 끼워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차기주 이사님의 페어 가이드 김수현입니다. 오늘 징계 심사는 가이딩 중독 때문에 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김수현은 이 순간을 위해 타투를 했다. 김수현은 검지를 뺀 나머지 손가락들은 접은 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은 마치 강의 시간에 본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도마와도 같았다.
손가락에 새겨진 차기주 이름을 본 사람들이 술렁였다. 화상 통화를 하고 있던 국장들도 당황해서 비서로 보이는 사람에게 무언가 말했다.
금발 머리 국장이 왜 네임이 생겼는데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느냐고 차기주에게 물었다. 차기주는 멋지게 자신을 구해주러 온 김수현을 돌아봤다. 김수현은 자기 손가락만 보여주면 모든 일이 해결될 줄 알았는지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제는 차기주가 수습할 차례였다. 김수현이 충분히 멋진 역할을 해냈으니 말이다.
“네임이 발생하면 에스퍼와 가이드의 신체를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제 네임은 좆에 생겨버렸거든요.”
“…….”
황지윤은 속으로 ‘미친 새끼’ 하고 욕했다.
“다른 사람에게 좆을 보여주기 싫어서 네임이 생겼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저 ISFP입니다. 내향형이라 수줍음이 많습니다.”
“ISFP? 그게 뭐야?”
황지윤은 옆자리에 앉은 가이드 팀 팀장에게 묻자 가이드 팀 팀장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대답했다.
“MBTI 심리테스트에서 나오는 유형 중 하나인데, ISFP는 성인군자 형입니다. 주로 따듯한 감성과 겸손함을 갖춘 사람들이 그 유형이에요.”
“절대 아닌데?”
“네, 딱 봐도 사기 치는 거예요. 네임이 없나 봐요.”
차기주는 가이드 팀 팀장을 쳐다봤다. 그녀가 뜨끔해서 얼른 손을 내리고 시치미를 뗐다. 차기주가 못 믿겠으면 직접 보여주겠다며 바지 벨트를 풀었다.
“그렇게 궁금하시면 제 자지를 보여드리죠. 그럼 믿으시겠습니까?”
“와아, 미친 새끼.”
황지윤은 차기주의 똘기에 순수하게 감탄해 손뼉을 쳤다. 그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 징계 심사가 더 이상 무용하다는 걸 알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제 안보 연합 국장들은 물론, 센터 간부들까지 네임이 생겼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몰아간 차기주가 대단할 뿐이다. 화면 속에서 국장들이 알겠다며 그를 말렸다. 금방이라도 바지를 내릴 것처럼 굴었던 차기주는 지퍼를 올려 바지 앞섶에 살짝 드러났던 회색 드로어즈를 감췄다.
그렇게 징계 심사가 흐지부지 막을 내렸다. 애초에 가이딩 중독을 명분으로 차기주에게 징계를 내리려고 했는데, 가이딩 중독이 아니라니 물러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차피 진짜 네임이 생기지 않았다면 이건 미봉책일 뿐이었다. 차기주를 검사하면 어차피 다 나올 터였다. 황지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김수현을 보며 싱그럽게 웃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수현 씨. 난 무조건 가이드 편이니까.”
가이드 팀 팀장은 황지윤의 말에 뿌듯해하며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쫓았다.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시끄럽게 들렸다.
국제 안보 연합 국장들의 얼굴이 나오던 화면이 꺼진 대회의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남색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김수현을 힐끔 째려봤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건 차기주와 김수현뿐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두 팔을 뻗어 꼭 끌어안았다.
“수현아, 오늘 너무 멋졌어.”
차기주는 예상대로 활약해준 김수현이 기특했다. 혼자 심부름을 보낸 유치원생이 무사히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는 손으로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안 놀라요? 이사님은 나 에스퍼인 거 알잖아요.”
“놀랐어. 네임이라니. 어떻게 된 거야?”
차기주는 김수현이 자신의 활약을 자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줬다. 김수현은 자기 손가락을 보여주고 까치발을 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설해 씨가 이사님이 가이딩 중독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징계위원회가 이사님을 소환할 거라고도 하고. 그래서 내가 이사님 구하려고 몰래 강의 빠지고 타투 새겼어요.”
진설해가 김수현을 흔들기 위해 했던 공격이 도리어 정보만 제공한 셈이었다.
“그랬구나. 정말 고마워. 수현이 네가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야.”
김수현이 활약하지 않았어도 차기주가 크게 처벌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누가 감히 그에게 벌을 내릴 수 있겠는가.
대외적으로 S급 에스퍼라고 알려졌지만 차기주는 SS급 에스퍼였다. 세계 각국의 정상, 국제 안보 연합 국장, 센터에 있는 심복까지 다 아는 비밀 같지도 않은 비밀이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지구 따위 반토막이 날 거라는 걸 알면서 그의 신경을 거스를 리가 없다. 제발 한 달만 근신당해달라고 빌면 들어주는 선에서 끝났을 일이다. 황지윤이 굴복하지 않고 계속 시비를 걸어오겠지만, 그거야 지금처럼 무시로 일관하면 그만이었다.
차기주는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구했다고 좋아하는 김수현 때문에 가슴 한편이 뻐근해졌다. 그는 이런 순간 키스를 하지 않으면 어느 때 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입술을 겹쳤다. 김수현이 차기주를 밀쳐 테이블 위에 넘어트렸다.
저돌적으로 그의 바지를 벗겨내려고 들어 차기주는 잽싸게 손으로 벨트를 잡아 사수했다.
“왜요?”
꽤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CCTV 있어. 다른 사람들 봐도 괜찮으면 하고.”
김수현이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더니 얼굴이 빨개져 도망쳐버렸다.
“하여간 귀여워 죽겠다니까.”
차기주는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대회의실을 가장 마지막으로 나섰다.
* * *
그들의 소식은 점심시간이 되자 직원 식당에 모인 에스퍼와 가이들을 통해 센터 전체에 퍼졌다.
식판에 밥을 받아 테이블에 앉았던 김아영은 김수현에게 네임이 생겼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손에 들고 있던 수저를 놓쳤다.
“아영 씨, 놀랐어? 하긴 이사님 가이드가 아영 씨 동생이라고 했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선배 가이드가 하는 말에 김아영은 멍해진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수현이가 네임이 생긴 척해서 차기주가 가이딩 중독이어도 진설해에게 가이딩을 받지 않을 수 있게 된 거야.’
김아영은 가이드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 끝자락에 앉은 성소윤과 진설해를 쳐다봤다. 자신의 동생은 언제나 차기주의 곁에 머무는 진설해 때문에 아주 오랫동안 슬퍼해야만 했다. 그런데 회귀를 하며 두 번이나 반복된 일이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왜 3회차 생에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으나 이대로 가면 김수현과 차기주가 살림이라도 차릴 기세였다. 반드시 말려야 했다.
김아영은 식판을 버려두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핸드폰으로 김수현에게 연락해 어디 있는지 다급히 물었다.
―나? 이사님이랑 꽃놀이 나왔어, 누나. 왜?
“꽃놀이?”
가을에 무슨 꽃놀이를 하는가 싶었지만 일단 동생이 있는 자세한 위치를 알아냈다.
―제일 큰 벚나무 밑에 있어.
그녀는 직원 식당을 나왔다. 센터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김수현을 찾았다. 이전 생, 차기주가 김수현의 머리채를 잡고 무자비하게 끌고 갔던 그 벚나무 아래에서 두 사람이 웃고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장이라도 차기주가 김수현을 끌고 징벌방에 데려가 강간할 것 같았다. 김아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그러나 마땅한 게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땅에 굴러다니는 돌 중 뾰족한 것을 찾아서 손에 쥐었다. 차기주가 허튼짓을 하면 이 돌로 그의 머리를 내리찍어 죽여버려야겠다고, 이번에는 반드시 김수현을 지킬 거라고 다짐했다.
천천히 돗자리가 깔린 벚나무 밑으로 다가갔다. 다른 나무들은 다 낙엽이 지고 있건만, 유독 이 벚나무만 분홍색 꽃잎이 비처럼 내리는 아름다운 봄날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
“하아, 하아. 이사님, 더는 힘들어요.”
억지로 벚나무에 꽃이 피어나게 한 에스퍼가 돗자리에 쓰러졌다. 방공호에 있는 와인을 밖으로 나르다가 걸린 남자였다. 차기주는 사람을 부려먹어 놓고는 남자를 굴려서 돗자리 밖에 버렸다.
“가서 가이딩이나 받아.”
“너무해앵~”
“징그러운 소리 내지 마. 혀 잘라버리기 전에.”
차기주가 경멸스럽다는 듯 말하고는 턱짓으로 김아영을 가리켰다.
“마침 저기 가이드 있네.”
에스퍼가 김아영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김아영 가이드, 영광입니다.”
에스퍼는 두 손바닥을 옷에 문질러 닦고 김아영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그 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차기주가 김수현의 입에 토끼 모양으로 깎은 사과를 넣어주는 것만 뚫어지게 봤다.
‘차기주, 네가 이래서는 안 되지. 어떻게 저지른 죄가 있는데 수현이한테 사랑받을 수 있어!’
김수현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하는 거였다. 진실을 알려줘야 했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는 존재였다.
차기주가 회귀하기 전의 기억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가 김수현을 두 번이나 지옥 속에 밀어 넣은 악인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으니까.
풍성한 벚나무가 바람에 휘날렸다. 그곳에서 차기주에게 적의를 가진 이는 김아영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벚꽃이 피었다는 소리에 구경을 나온 사람들 틈바구니에 숨어 그들을 지켜보던 이가 뒤돌았다. 금속 편이 튕기며 낡은 오르골 소리가 짧게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