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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1) (10/17)

회전목마(1)

PL 그룹 전무 김정석의 결혼이 아무런 발표 없이 급작스럽게 진행되었다. 언론에 밝혀진 바로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GU 그룹 회장과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감정을 발전시켰다고 했다.

그런 것치고는 신랑 김정석의 얼굴이 완전히 죽상이었다. 꼭 결혼이 아니라 단두대에 오르는 사형수를 보는 듯했다. 그는 목에 맨 나비넥타이를 끌러버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부는 20살은 족히 많은 어머니뻘 오메가였다. 아버지는 정말 그가 죽었다고 취급하고 팔아치운 거였다. 당장이라도 이 결혼식에서 도망치고 싶었으나 별장 주변을 경호원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김 회장은 그가 오랫동안 김수현을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계단에서 굴러 자살하려던 게 들키자마자 급하게 혼처가 잡혔다. 김 회장은 김정석에게 이왕 죽을 작정이었으니 자기한테 보탬이나 되라고 했다.

김정석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아버지의 횡포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끝내 원치 않는 결혼은 진행되었고, 결혼을 준비할 때 소심한 반항으로 표식을 남겨두었다.

이름이 적힌 의자마다 게스트들이 앉아 있었다. 네 사람씩 짝지어 앉은 테이블 위에는 결혼식과 어울리지 않는 노란 금잔화가 장식되어 있었다. 꽃말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예쁜 장식에 불과할 테지만, 그 꽃은 ‘이별의 슬픔’을 뜻했다.

몇몇 하객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뭐 이런 꽃을 좋은 날 뒀냐며 투덜거렸다. 김수현은 김정석이 보내는 메시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매끄러운 대리석 같은 뺨이 볼록해지도록 웃고 있었다. 김정석은 김수현의 저런 표정을 본 적 없어서 조금 충격받은 얼굴로 옆자리에 누가 앉아 있나 쳐다봤다.

차기주였다. 저 망할 좆 같은 새끼가.

그는 마치 자신의 연인을 빼앗긴 것처럼 분개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런다고 새신랑인 김정석이 대외적으로 동생으로 알려진 김수현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잘 차려입은 하객 중에서 유독 김수현만 빛이 났다. 주인공은 신랑과 신부인데, 김수현만이 잡지 화보에 나오는 모델처럼 고고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시선을 끌었다.

그의 시선은 레드카펫을 따라 면사포를 쓴 신부가 들어서자 방향을 바꿨다. 머메이드 드레스가 Y자로 우아하게 파여 있어 신부의 풍만한 가슴이 돋보였다.

김정석은 가는 허리와 큰 골반 때문에 굴곡진 오메가의 몸매를 보고 감탄했다. 드레스에 달린 진주와 보석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났다. 어떻게 아들이 셋이나 딸렸다는 오메가가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지?

그는 계속 방 안에 갇혀 있다가 별장에 끌려와 늙은 신부와 결혼하게 되었지만, 지금 상황이 퍽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석은 자기가 언제 이 결혼을 못마땅해했냐는 듯 표정을 풀었다. 잠시 하객석에 앉은 김수현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달콤한 페로몬을 풍기는 오메가에게 금세 시선을 빼앗겼다.

결혼식이 진행되고 김정석은 맹세의 키스를 하기 위해 신부의 면사포를 들어 올렸다. 그는 주름살 하나 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남몰래 감탄했다. 기쁨으로 가득한 신랑의 얼굴은 마치 이 결혼이 진정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김정석이 본 신부의 모습은 실제가 아닌 환영술로 만들어진 허상이었다. 하객들은 잘생기고 어린 신랑과 달리 두툼한 뱃살로 드레스가 터질 것 같은 중년의 오메가가 불도그처럼 축 처진 볼살로 웃는 걸 보며 그녀를 속으로 욕했다. 정말 안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 * *

웨이터들이 쟁반에 샴페인을 든 채 사람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하객들은 백합, 리시안셔스, 글라디올러스, 칼라와 같은 하얀 꽃으로 장식한 꽃 터널 아래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아영은 비슷하게 생긴 오메가 세 명이 오늘 신부인 GU 그룹 회장의 아들들이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속으로 아버지를 욕했다. 어머니를 닮아 아들 모두 키가 작고 주먹코가 달린 엄청난 박색이었다.

이번 생에도 아버지는 그녀와 무슨 거래를 했던 게 분명했다.

첫 번째 생에서는 자살한 김정석 대신 김수현이 저 늙은 오메가와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그때 아버지가 얻은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식을 팔아서까지 얻고자 하는 게 있는 그가 환멸스러웠다.

회귀를 거듭하면서 바뀐 것도 많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도 이렇게 남아 있었다. 바로 아버지와 늙은 오메가의 거래 같은 거.

김아영은 피로연에 참석하기 위해 파란색 실크 드레스를 입은 늙은 신부에게 다가갔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회장님?”

“무슨 일이지?”

“저희 아버지와 무슨 거래를 하신 건지 여쭙고자 합니다. 회장님과 아버지의 거래를 못마땅해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오빠의 일이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을 너그럽게 이해해주세요.”

박가현은 자기 딸뻘인 김아영을 보고 온화하게 웃었다. 그러나 늙은 오메가가 아무리 기품 있게 행동해도 자기보다 어린 알파를 탐욕스럽게 원하는 존재라는 걸 아는지라 김아영은 떫은 차를 마신 듯 인상을 펼 줄을 몰랐다.

“내가 센터에서 일하지는 않지만, 환영술을 사용할 수 있는 에스퍼거든. 김 회장님이 아직도 사모님을 많이 그리워하시더라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아영은 뒤돌아서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는 죽은 아내가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자식들을 몇 번의 생에 걸쳐 팔아치웠던 거다. 그녀는 그나마 이번에는 김수현이 소모되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며 동생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다.

김수현이 차기주와 나란히 얼굴을 맞대고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김수현이 웃는 걸 지켜보며 잘생겼다고 수군거렸다. 처마 밑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뾰족하고 차가운 차기주의 표정 또한 김수현 앞에 있으니 봄 햇살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어떻게 저 새끼를 보고 웃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마치 빙글빙글 제자리를 도는 회전목마처럼 아무리 방해하고 시간을 되돌려도 차기주와 김수현이 어떻게든 연인이 되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김아영은 아주 오래전, 김수현이 태어난 밤을 떠올렸다.

* * *

아버지가 오랫동안 미국 지사에서 일하느라 집에 들르지 않은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런데 어머니의 배는 점차 부풀어 올랐다. 김정석과 김아영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그저 동생이 생긴다는 사실에 기뻤다.

남매는 동생이 태어나면 장난감도 선물해주고 맛있는 것도 양보할 거라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머니는 불안감 가득한 시선으로 허공만 보며 넋을 놓아버린 탓에 아이들의 수다에 대꾸해주지 않았다.

밤 11시 50분. 푹신한 양탄자가 깔린 거실에 놓인 트리에서 꼬마전구들이 반짝거리며 알록달록한 빛을 냈다.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놓인 상자는 산타 할아버지가 놓고 간 것들이었다.

김아영은 자정이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크리스마스가 되자마자 선물을 열어보겠다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그저 퇴근해야 하는 비서가 미리 사다가 놔둔 선물이었을 텐데 말이다.

늦은 시간에 졸린 눈을 비벼가며 참는데 안방에서 희미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으으으. 으으읏. 살……살려주……세요.”

번개가 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졸음이 사라진 아이는 다급하게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침대 위에서 커다란 배를 끌어안은 임산부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엄마. 엄마 아파요?”

“아기가 나올 것 같아. 아영아, 얼른 비서 아저씨 불러.”

김아영은 핸드폰으로 단축 번호 3번을 꾹 눌렀다.

“아저씨, 엄마가 동생이 나오려고 한대요.”

―곧 가겠습니다, 아가씨.

비서가 전화를 끊었다. 김아영은 침대에서 몸부림치는 엄마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고사리손으로 커다란 배를 쓰다듬었다.

“아가야, 엄마 아프게 하지 마.”

그러자 놀랍게도 임산부의 산통이 가셨다. 어머니는 단번에 딸이 가진 신묘한 능력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이 배 속의 아이 또한……. 산모는 자신에게 배 속의 아이가 찾아온 것이 역시 범상치 않은 기적임을 느꼈다. 한순간에 깨달음은 얻은 산모는 김아영에게 부탁했다.

“아영아, 혹시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네가 반드시 네 동생을 지켜야 해. 알았지? 자, 약속하자.”

김아영은 엄마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녀는 딸을 끌어안았다. 이게 아마도 그녀가 딸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인사일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직감했다. 새로 태어날 아이를, 이 기적의 산물을 안아보지도 못할 거란 생각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비서가 휠체어를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사모님을 저택 현관에 세워둔 자동차 뒷좌석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았다.

김아영도 재빨리 조수석에 따라 탔다.

“아가씨, 아가씨는 집에 계세요. 제가 사모님은 병원에 잘 모셔다드릴게요.”

“나도 엄마랑 같이 갈 거예요. 엄마랑 동생 지켜주기로 약속했단 말이에요.”

비서는 어린아이와 말싸움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조수석은 주니어 카시트가 없어, 아가씨를 뒷좌석에 있는 사모님과 함께 태웠다. 김아영은 엄마의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주며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엄마, 많이 아파?”

“아니야. 우리 아영이가 아프지 말라고 해줘서 안 아파.”

김아영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김아영의 어머니는 극심한 통증으로 점점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먼 하늘에서 누군가 그녀를 굽어보는 환상이 비쳤다. 자동차 안이라 아무것도 없는 자동차 천장만 있을 뿐인데 말이다.

“비서님, 라디오 좀 켜주세요. 벌써 시간이 됐네요.”

그녀의 말에 비서는 자동차 대시보드에 있는 시계를 보고 12월 25일이 되기 1분 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사모님이 이 와중에 그걸 대체 어떻게 아셨나 신기해하며 그는 라디오를 틀었다.

산모의 두 다리 사이에서 아이의 머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캐럴이 흘러나왔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 백성 맞으라.

온 교회 다 함께 일어나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하여라. 다 찬양 찬양하여라.

“으애. 응애.”

아이 울음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산모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안아보지도 못한 채 창백한 얼굴로 단명했다. 김아영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캐럴을 듣는 순간, 어째서인지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차올라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핸드폰에서 단축키 1번을 꾹 눌렀다. 호텔 방 안에서 조촐하게 점심을 먹던 중인 김 회장이 어린 딸의 전화를 받았다.

“아빠! 동생이 태어났어요!”

잔뜩 들뜬 딸과 달리 서울에서 11,058km 떨어진 타국에 가 있는 김 회장은 당혹감과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오랫동안 잠자리를 가지지도, 심지어는 얼굴도 보지 못한 아내가 아이를 낳다니? 어린 딸의 오해이길 바랐으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가 이것이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권을 챙겼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동생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 김아영은 본인의 진정한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성경에서 말하길 은총 받은 동정녀에게 수태고지를 하고, 양아버지 요셉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는 임무를 맡은 천사는 가브리엘이라고 하였다. 신께서 인간의 태를 빌려 지상에 내려보냈던 첫 번째 메시아 가브리엘은 자신의 일을 해냄으로써 자신이 천사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아영은 그녀가 한 결정적인 역할로 인해 아버지가 김수현을 학대하는 것 같아 오랫동안 괴로웠다. 김 회장은 김수현이 갓난아기 때부터 죽이려고 들었고 그녀는 동생을 보호했다.

그녀는 축복으로 태어난 김수현을 불결해하며 증오하는 김 회장을 설득하려고 했으나, 인간의 눈에는 유치원생의 말이 그리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는 듯했다.

김 회장과 그녀의 말싸움 소리는 단단한 안방 문을 뚫고 문지방을 넘어섰다. 김수현이 6살 때였다. 남동생을 아꼈던 김정석은 자신의 남동생이 사생아라고 믿게 된 날부터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아영은 어머니와 약속한 대로 집에서 동생을 자식처럼 지켜냈다. 호시탐탐 김수현을 노리는 김정석을 경계하고,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는 김수현이 안쓰러워 물심양면 챙겼다.

그녀는 타락한 인간들을 심판해야 하는 메시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태를 빌어 태어난 탓에 가족만은 소중히 여겼다. 신의 임무는 완전히 등한시하며 가족만을 지켰다.

그런 그녀가 인류를 멸망시키고 하늘로 돌아가 신께 임무를 완수한 상으로 소원을 빌게 된 건, 모두 김수현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이미 사라져버린 생이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자신의 동생이 서재에서 총을 쏴서 자살한 그날 얼마나 많은 피들이 서재를 뒤덮었는지.

탕! 총소리가 공기를 찢을 듯 사납게 울렸다. 방에서 김수현에게 입힐 스웨터를 짜고 있던 김아영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가 달아나는 참새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집에서 들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못했던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빠르게 달렸다.

이게 무슨…….

열린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커튼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녀는 하얀 커튼이 바람에 날리다 내려앉은 뒤 드러난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아아, 아니야. 이럴 순 없어.

“수현아!”

바닥에 쓰러진 김수현의 가슴에서 계속 피가 흘렀다. 상처를 손으로 틀어막았으나 이미 맥박이 뛰지 않았다.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부른 구급차와 경찰차가 시끄러운 사이렌을 울리며 집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피에 젖은 손으로 그들이 서재에 올 때까지 동생의 상처를 지혈했다. 부질없는 짓이었지만 혹시 이러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슬픔을 모조리 눈물로 환산한 것처럼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경찰들이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김수현이 쓰러진 자리를 따라 하얀 시체 보존 선을 그렸다.

“아니야. 아니라고. 우리 수현이 안 죽었단 말이야.”

아무도 김아영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녀의 하나 남은 형제마저 완전히 숨이 끊긴 까닭이었다. 경찰들은 그녀를 서재에서 내보냈고, 구급대원들은 김수현을 들것에 실어서 날랐다.

경찰은 책상 위에서 유서를 발견했다. 죽을 이유가 없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이 모든 게 차기주 때문이란다. 그녀는 그 새끼도 자신의 동생처럼 죽어 마땅하다고 여겼다. 왜 자신의 소중한 동생만 죽어야 한단 말인가.

짝사랑의 슬픔에 총으로 자살한 젊은 베르테르처럼 김수현은 예민하고 감수성 있는 알파가 아니었지만, 이미 김수현을 잃은 슬픔에 반쯤 정신이 나간 김아영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김아영은 차기주를 찾아가 욕설을 퍼부었다. 차기주는 김아영의 욕을 차분하게 들어줬다.

본인이 김수현을 자살하게 만든 원흉이라는 소리에 고개를 숙인 채 그가 눈물만 뚝뚝 흘려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동생의 장례식을 치렀다. 초대하지도 않은 차기주가 뻔뻔하게도 동생의 빈소에 발을 들였다. 김아영은 그에게 굵은 소금을 뿌렸다. 그래도 그가 물러나지 않자 조문객들에게 나눠줄 펄펄 끓인 뜨거운 육개장을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센터 이사에게 엄청난 모욕을 주고도 무서워하지 않는 김아영을 김 회장이 혼내며 말렸다. 정작 차기주는 아무 말 없이 허리를 숙이고 고인이 된 김수현을 만나러 갔다.

그는 말끔한 제복 차림으로 찍은 영정 사진 앞에 한참이나 쓸쓸한 소나무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가 향로에 향을 꽂았다. 사랑해 마지않는 이에게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건네며 가슴 아픈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런 차기주의 몰골은 하수구에서 뒹굴다 나온 시궁창 쥐보다 초라했으나 그 누구도 그를 불쌍하게 여기지도 비웃지도 않았다. 이 나라에서 에스퍼들을 통제하는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이를 누가 감히 불쌍히 여기고 또 누가 감히 비웃는단 말인가.

그것이 차기주가 짊어져야 할 힘의 무게이자 외로움이었다. 그리고 그는 유일하게 자신을 한 명의 사람으로 취급해줬던 연인을 잃었다.

“네놈이 준 돈 따위 필요 없어, 이 살인마 새끼야.”

김아영은 차기주가 빈소를 떠나려고 할 때 그가 내놓은 조의금 봉투를 갈가리 찢어서 얼굴에 던졌다.

차기주가 그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아영은 양심에 찔렸다. 자신 때문에 차기주가 죽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메시아가 임무를 완수하기만을 기다리던 신께서 이르시길, 이제 때가 왔노라 하였다. 가장 큰 걸림돌이 알아서 죽어줬다.

그녀는 날갯죽지에서 하얗고 커다란 날개를 꺼내 펼쳤다. 가브리엘에게는 수많은 별명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옥좌 왼쪽 자리에서 신을 섬기는 그녀를 두고 종교인들은 ‘수태를 알린 천사’, ‘자비의 천사’, ‘묵시의 천사’라 하였다.

그녀는 그녀가 가진 이름과 달리, 자비라고는 없었다. 그녀는 한꺼번에 게이트를 열어 괴수들이 쏟아져 나오게 했고 차기주를 잃은 인류는 전멸하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참되게 기뻐하며 천사를 부르시니, 부름을 받은 가브리엘은 등천하였다.

옥좌 앞에 무릎 꿇고 천사는 고개를 조아렸다. 신께서 임무를 무사히 완수하였으니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노라 했다. 가브리엘은 죽은 오빠와 동생을 이번에는 꼭 지키고 싶었다. 그녀는 시간을 되돌려달라고 신께 청하였다.

신은 진노하며 어찌하여 임무를 완수해놓고 처음부터 다시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가브리엘은 가족이 너무 소중하여 그렇노라 답하였다. 신께서는 혹시 자신의 천사가 인간을 사랑하게 되었나 그 속내를 들여다봤다.

천사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것과도 같았다. 알아선 안 될 것을 아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마음은 여전히 깨끗하기만 하였다. 인간의 태를 빌려 태어나게 해 사사로이 인연에 집착하는 것뿐이었다.

신은 정순한 천사에게 알겠노라 하였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그냥 시간만 되돌려주면 안 된다며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녀가 말하는 세계는 알파도 오메가도, 신도 없는 곳이지만 신이 만든 세계와 같았다. 특이한 점이라면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걸 혐오하는 사회풍토가 있었다. 천사는 김수현이 그 속에서 자라다가 그녀가 쓴 소설을 읽었다고 믿게 해달라고 했다.

가브리엘은 그러면 김수현이 차기주를 만나게 되어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신께서는 가브리엘에게 물었다. 너의 소설 제목이 무엇이냐고. 그녀는 『능력자들』이라고 알리며 허공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글자가 새겨진 양피지를 꺼냈다.

그녀의 소설에서 김수현은 진설해를 짝사랑하는 조연이었고, 차기주는 진설해를 사랑하는 주인공이었다. 김수현은 완벽한 사랑을 하는 커플에게 밀려나 늙은 오메가와 결혼하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가브리엘은 그 내용 때문에 김수현이 차기주와 진설해를 피해 다닐 거라고 믿었다. 또한 남자와 남자가 사랑하면 안 되는 세계에서 살다가 왔다고 믿을 테니, 같은 알파를 사랑해 상처받는 일도 없을 거라 확신했다.

설령 소설 내용 때문에 진설해와 동생이 이어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오메가인 진설해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면 축복해줄 일이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모르겠다. 두 번째 생에서 김수현은 늙은 오메가에게 장가를 가기 싫다며 센터에 가서 에스퍼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 능력을 밝히며 차기주의 페어가 되었다.

차기주는 김수현을 감금했고, 그가 그녀의 동생을 강간한다는 소문이 센터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녀가 개입함으로써 더 최악의 시나리오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센터에 테러한 제네시스를 후원했다는 게 알려져 차기주로부터 보복당했다.

PL 그룹을 빼앗기고 그들은 무일푼이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재벌로 살아온 아버지는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하고 매일 소주를 마시며 없는 살림을 때려 부쉈다.

센터에 감금되었던 김수현은 풀려났다. 작은 옥탑방에 세 사람이 부대끼며 지낼 수 없어서 그녀는 자신이 나가 돈을 벌고 오겠다며 집을 나왔다.

동생은 강간당한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상태였다. 그들의 집이 원래부터 가난하다고 착각했지만, 김아영은 부정하지 않았다. 재벌이었던 기억이 있어봤자 지금 상황을 견디기가 더 힘들어질 뿐일 테니까.

그냥 애초부터 다 쓰러져나가는 옥탑방에서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에게 매 맞으며 컸다고 믿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센터로 돌아가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의 조건으로 돈을 요구했다. 오만한 공주님의 추락에 에스퍼들은 조롱하기 바빴다.

그녀는 스스로가 창녀인지, 가이드인지 모르게 될 정도로 지독한 행위를 이어가며 돈을 벌었다. 김수현에게는 지방에 있는 공장에 취업했다고, 돈을 많이 벌어서 집에 돌아가겠노라 거짓말했다. 김수현은 그녀의 말에 누나가 보고 싶다고, 매일 기다린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동생을 위해서라도 힘을 내야 했지만 그녀는 한계점에 도달해버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 생명의 죽음은 세계의 죽음과 같다. 그러니 자신이 죽는 것도 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럼 다시 소원을 빌어서 잘못된 것들을 다 바로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손목을 그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사그라지는 생명력을 느끼며 현기증과 고독에 젖어갔다. 그녀는 그렇게 슬픔과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그리워하다가 죽었다.

신께서 자살한 천사에게 물었다. 어째서 하라는 임무는 안 하고 죽었냐고. 가브리엘은 답했다. 한 생명이 끝나는 것은 세계가 멸하고 우주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 자신은 신께서 내린 임무를 완수한 거라고.

우문현답과 전혀 반대되는 대답이었다. 현명한 물음에 어리석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신께서는 다시는 이런 속임수를 쓰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가브리엘의 답을 납득하였다. 천사는 신께 자신이 임무를 완수했으니 소원을 들어달라고 했다.

신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이미 그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느냐고, 그런데 지상으로 내려가 또다시 임무를 수행하려는 건 가브리엘의 선택이라고 했다. 그녀는 지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자아만 남겨지게 되었다.

신은 첫 번째로 임무를 완수했으나 동시에 실패한 그녀를 대신해 임무를 보냈던 두 번째 메시아를 들여다봤다. 아무래도 인간의 아이로 태어나게 해서 가브리엘이 임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 같아 두 번째 메시아는 인두겁을 둘러서 지상에 내려보냈다.

루시펠이 하늘의 심판을 열어서 인간들을 벌하였다. 역시 이 방법이 맞았다. 신은 하늘로 올라온 천사를 칭찬하며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나의 천사 루시펠, 무엇을 원하느냐. 네가 임무를 훌륭하게 해냈으니 약속대로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사랑하는 아버지, 저는 시간을 되돌리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또다시 같은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소원을 빌려는 것이냐?’

“예, 그러합니다.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를 지켜주고 싶습니다.”

두 번째 메시아도 첫 번째 메시아와 같은 소원을 빌었다. 그러나 루시펠은 가브리엘과 달리 인간을 사랑하고 욕정을 느끼고 있었다. 신은 크게 분노하였다. 그의 화는 끓어오르는 화산과 같이 뜨겁고 북극의 빙하와 같이 차가웠으며, 바다의 심해와 같이 깊었다.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다. 신은 자신이 아끼는 천사들에게 ‘엘’을 붙임으로서 미카엘, 가브리엘, 루시펠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인간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천사가 죄를 지었기에 그는 루시펠에게서 이 ‘엘’ 자를 빼앗았다.

두 번째 메시아의 하얀 날개에서 깃털이 빠져나갔다. 풍성한 하얀 깃털로 둘러싸여 있던 날개는 이제 뼈만 앙상하게 남은 흉측한 몰골이 되었다.

타락한 천사는 지상에 추락하여 ‘루시퍼’가 되었다. 그 당시 혼으로만 존재했던 가브리엘은 그녀가 ‘예술인의 밤’을 통해 만나고자 했던 천사가 악마가 된 줄도 모른 채 동생을 구할 생각에 또다시 두 번째 메시아와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도무지 김수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차기주를 다시 사랑할 수 있는지, 동생의 잘못을 뜯어말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오늘 만나기로 한 두 번째 메시아는 그녀가 첫 번째 메시아였다는 증거를 달라고 했고, 그녀는 소말리아 해적에게 한국 어선이 납치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대로 이루어지자 그는 그녀가 첫 번째 메시아라는 말을 믿고 약속 장소에 나와주기로 했다.

김아영은 초조하게 약속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께서 어리석은 천사를 내려다봤다. 재개발을 위해 문 닫은 교회에는 뿌연 먼지가 우주의 별처럼 떠다녔다.

메시아는 실연의 아픔으로 제네시스 신도인 가이드들을 불러 위로받는 중이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강하게 빨아들였다. 가이드들은 메시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의 팔뚝에 가슴을 비볐다.

다리 사이에 무릎 꿇고 앉아 그의 성기를 빨던 가이드가 고개를 들어서 입을 벌려 보였다. 붉은 입 안에는 정액이 담겨 있었다. 천사의 정액을 먹겠다며 다른 가이드가 달려들어 입을 맞추고 타액을 나눴다.

농염한 질척거림으로 가이드들은 방 안의 온도를 높였다. 열댓 명은 되는 무리가 알몸으로 뒤엉켜 추접하게 섹스를 이어나갔다. 그중 한 명이 비싼 샴페인을 메시아의 몸에 붓자 그의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황금빛 방울을 먹겠다며 여럿이 달려들어 혀를 내밀었다.

소돔과 고모라가 여기 있는데, 메시아는 태평하기만 했다. 그는 에스퍼였다.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께서도 이해해줄 터였다. 그를 에스퍼로 만든 것 또한 신이기에.

그는 재미난 구경을 하다가 유리 테이블 위에 가이드 한 명을 엎어놓았다. 제법 잘생긴 데다가 알파라서 눈을 게슴츠레 뜨고 보면 김수현을 떠올리게 했다. 구멍에 억지로 좆을 처박으며 가슴에 쌓인 앙금을 풀었다.

어째서 김수현이 자신을 거절한 걸까. 차기주가 자기를 강간한 새끼라는 것도 모르고 어울리니 걱정돼 죽겠다. 그는 알파가 구멍으로 피를 흘리자 움직임이 좀 더 수월해져 빠르게 허리 짓을 했다.

향로에 넣어둔 대마초가 타면서 나는 연기에 실내는 뿌옜지만, 그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이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환각 상태에서 가이드들은 이 짓을 숭고한 의식이라고 착각했다.

“으으읏. 교주님. 교주님!”

메시아에게 뒤를 내주는 알파는 괴로워하면서도 천사와 섹스하면 축복받을 거라는 일념으로 참아냈다. 구멍이 찢어져서 아파하는 모습을 본 다른 신도들은 메시아에게 은총을 받는다며 부러워했다.

그들 중 오메가들은 메시아를 유혹하기 위해 가랑이를 벌리고 자위했다. 손가락이 질퍽한 내벽을 쑤시는 소리와 탁한 공기, 살과 살끼리 부딪쳐 철벅거리는 마찰음이 호텔 펜트하우스를 가득 채웠다. 메시아는 알파의 배 속에 사정하고 나왔다.

가이드들은 그의 좆에 묻은 피와 약간의 정액을 서로 핥겠다며 무릎을 꿇고 기어 왔다. 메시아는 자신이 이렇게 매력 넘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데, 김수현은 왜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정으로 몸이 나른해진 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양주병의 주둥이를 손에 잡았다.

잔도 없이 벌컥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는데 사기꾼이 다가왔다.

“메시아, 오늘 첫 번째 메시아를 만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아, 그랬던가.”

메시아는 어느새 그에게 달려와 발정 난 개처럼 몸을 비비는 가이드들을 밀어냈다. 첫 번째 메시아를 만나서 어떻게 차기주를 죽일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지상에 가족이 있어 천계로 돌아갈 마음은 없다면서도 첫 번째 메시아는 차기주를 무척 싫어했다.

천사 둘이 협력하면 차기주 하나 죽이지 못할 리 없었다. 메시아는 주섬주섬 바닥에 벗어둔 옷을 주워 입다가 휘청거렸다. 사기꾼이 얼른 팔을 붙잡아서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응. 나 안 취했어.”

“그래도 인간 세계에서는 술을 마시고 운전하면 안 됩니다. 제가 차로 약속 장소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메시아는 사기꾼의 도움을 받아 옷을 챙겨 입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니 이 호텔을 운영하는 최 사장이 먼저 타고 있었다. 그는 이윤석을 보고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차기주의 측근으로 알려진 최 사장 또한 제네시스 신도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이윤석이 먼저 내렸다. 샴페인이 담긴 샴페인 잔처럼 샹들리에가 찬란하게 빛나는 로비를 걸었다.

사기꾼이 빨간 스포츠카 운전석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맸다. 이윤석은 조수석에 앉아 길게 하품했다.

“약속 시간에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속도를 낼 테니 혹시 속이 안 좋으시면 말씀해주세요.”

부아앙앙. 최대 출력 390마력 스펙을 가진 플랫 엔진이 포효하듯 내는 소리가 주차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곡선이 세련된 빨간색 스포츠카가 달팽이관처럼 회전하는 언덕을 통과해 호텔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도로에 진입한 스포츠카가 난폭 운전을 해대니 주변 차들이 알아서 피해 갔다. 이윤석은 창문을 내리고 시원한 바람을 코로 들이켰다. 누가 처음 이런 차를 끌고 다니면 애인이 생기기 쉽다고 했는지 찾아내야 했다. 하여간 인간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니까.

그들은 약속 장소인 교회 앞에 도착했다. 재개발을 위해 임대가 빠진 터라 흉흉한 폐건물처럼 보였다. 안에 아직 첫 번째 메시아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불투명한 하얀색 선팅지로 가려진 창문은 그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흰돌교회라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름을 가진 교회 문을 밀었다. 불량 학생이나 노숙자와 같은 이들이 아지트로 사용했는지 교회 안에는 더럽고 해진 매트리스 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다 먹은 파인애플 통조림에는 재떨이처럼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버려진 사람이나 건물이나 그 끝은 이토록 비참한 것이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그는 자신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그리 과대평가했다.

먼지로 뒤덮인 환풍구는 프로펠러가 고장 나 멈춰 있었다. 어두운 교회 안에 유일하게 들어오는 빛은 고작 그 환풍구 틈 사이뿐이었다.

등을 보인 채 서 있던 여자가 뒤를 돌아 이윤석을 봤다. 그는 순간적으로 놀라 뒷걸음질 쳤다. 김수현의 누나가 첫 번째 메시아였다니. 아, 그래서 차기주를 그렇게 증오했던 거였군. 가브리엘의 시선에서 보면 차기주가 자기 동생을 강간하던 쓰레기인데 사귄다니 걱정되었던 거다.

그는 그녀에게 그런 게 아니라는 변명을 해주지 않았다. 우린 충분히 같은 편이 될 만했으니까. 먼지가 쌓인 바닥을 하얀 운동화가 밟아 나갔다. 발밑에서 자잘한 돌이 바스락 밟히는 소리가 났다.

“넌…… 우리 수현이 친구잖아.”

“안녕하세요, 누나. 전에 인사드렸죠.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게 인사드릴게요. 두 번째 메시아 루시펠이에요.”

김아영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메시아가 이미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에 허탈해져 웃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여기 너무 공기가 안 좋아. 그런데 저 사람은 같이 온 거니?”

“아, 제 신도예요. 믿어도 될 만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교회 문을 열고 나왔다. 깨진 복도 창문에서 들이친 햇살이 계단참을 얼룩덜룩하게 비추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등 뒤에 선 메시아의 그림자가 비쳤다. 마치 다양한 색의 유리 조각으로 하나의 그림을 이룬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받으면 교회 바닥에 그림이 어른거리는 것처럼.

김아영은 본인의 그림자 옆에 서 있는 그림자를 보고 섬뜩해서 뒤돌았다. 그곳에는 선량하게 웃고 있는 이윤석이 있었다.

“미안한데 날개 좀 볼 수 있을까. 나도 보여줄게.”

그녀는 혹시 몰라서 오프숄더 원피스를 입고 왔다. 얇은 카디건을 벗어 팔에 들고 날개뼈에서 하얀 날개를 꺼냈다. 함께 온 신도는 놀란 눈으로 김아영을 쳐다봤다.

메시아가 천사라며 포교 활동을 해 제네시스 신도들을 모은다는 걸 알았기에 그녀에게 있어 그건 굉장히 의아한 일이었다. 이윤석은 그동안 자기 신도에게 날개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걸까? 대체 왜?

평범한 인간인 이윤석의 인두겁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하얀 머리칼과 붉은 눈을 가진 메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게이트 안에서 날개에 화상을 입었기 때문에 꺼내지 않았다.

“날개는?”

“다쳤어요. 대신 제가 천사라는 증명을 할게요. 가브리엘, 저는 하나님 보좌의 근위병이었고 저의 수호성은 금성입니다. 제 이름의 어원은 루키페르. ‘빛을 가져온 자’에서 따왔으며 이사야서 14장 12절에 나온 헬렐(*빛나는 것)입니다.”

이보다 정확한 자기소개는 없었다. 인간은 쉬이 알 수 없는, 천계의 이야기들이었으므로. 메시아를 경계했던 가브리엘은 그와 계단을 함께 내려가기 위해 옆으로 비켜섰다.

“의심해서 미안해.”

메시아는 괜찮다며 그녀의 옆에 섰다. 김아영은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서 술과 불과 재의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 그 독한 지상의 악취로도 감출 수 없는 향이 희미하게 코를 찔렀다. 그건 바로 유황 냄새였다.

김아영의 팔에서 짧은 솜털이 싸아아 일어났다. 천사는 얼른 날개를 어깻죽지에 집어넣었다. 그녀의 옆에 선 메시아에게서 유황 냄새가 난다는 건 그가 이미 지옥에 속한 악마라는 의미였다.

두려움으로 분홍색 립스틱을 바른 통통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을 본 이윤석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요? 추워요?”

메시아가 본인이 입고 있던 바람막이 점퍼를 벗어서 김아영의 어깨에 올려놨다.

“누나는 어떻게 차기주를 죽일 생각이에요? 난 내 능력으로 힘들 것 같아서 오클라호마 교도소를 이용하려고요. 거긴 무슨 특수한 자기장이 흘러서 에스퍼랑 가이드가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면서요? 차기주를 교도소에 보내버리고 죽이면 되지 않겠어요?”

김아영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맞아. 타락한 천사면 어때. 차기주만 죽이면 수현이도, 우리 집도 이번엔 다 괜찮을 거야.’

그녀의 힘만으로는 차기주를 죽일 수 없었다. 가브리엘의 권능은 예언과 계시였다. 그 밖에는 4대 속성 중 물을 담당하고 있어 홍수를 일으키거나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었다.

동정녀의 출산을 알리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으면서 지천사 계급이 되었을 뿐, 딱히 전투에 관련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알지만 공통의 적을 가지고 있는 악마와 천사는 한 팀이 되어야 했다.

그녀는 메시아의 계획에 보탬을 더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차기주를 미국에 있는 오클라호마 교도소에 무슨 수로 보낼 수 있겠는가. 그가 아무리 학살하고 다녀도 그건 불가능했다. 그 누구도 그를 재판장에 세울 수 없었다. 그러니 이런 방법을 써야 했다.

“좋은 생각인데 좀 더 쉽게 가자.”

김아영은 메시아에게 오클라호마 교도소에서 에스퍼와 가이드의 능력이 사라지는 이유는 특수한 자기장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 롱기누스의 창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기주를 감옥에 보내는 것보다 창을 훔쳐서 그를 찔러 죽이는 게 더 빠를 거야.”

“고마워요. 누나. 나 누나 아니었으면 진짜 그 새끼한테 또 고문당하다가 죽었을 거예요.”

메시아는 안개로 몸을 휘감아 다시 인간 모습으로 변했다. 김아영은 유황 냄새에 머리가 찡하고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으나 가까스로 오심을 참아냈다. 천사와 악마가 대화하는 내용을 유심히 듣고 있던 최유다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동생의 말대로 정말 천사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만, 아무리 천사여도 그의 동생을 괴수로 변하게 해서 죽게 했으면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이미 신께서는 배신자의 이름을 알고 있을 거다. 유다란 이름을 가진 사기꾼은 등 뒤에서 검지와 중지를 꼬았다.

여러 사람의 손을 탄 쇠창살이 번들거린다. 잿빛 시멘트 벽에는 좁은 공간을 활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못으로 고정해놓은 접이식 침대가 네 개 매달려 있었다. 꺼끌꺼끌한 초록색 담요를 덮은 금발 머리가 그 침대에 누워 질겅질겅 종이를 씹어 먹었다.

화장실은 가림막 없이 세면대와 변기가 노출되어 있었다. 치약, 비누와 같은 단출한 세면도구만 비치되어 있을 뿐 바깥에서처럼 보디 워시와 샴푸를 쓰는 호사를 누린 순 없었다. 한국에서 온 중년인은 푸른색 죄수복 상의 주머니에 넣어뒀던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남자의 딸, 진설해였다. 남자와 함께 지내는 금발 머리가 아는 척 말을 건네온다. 나중에 자기가 출소하면 가이드인 딸을 소개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오클라호마 교도소에서 대장인 테디는 좁은 방 한편에서 웃통을 벗은 채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를 했다.

근육질의 몸을 타고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후욱, 후욱. 테디가 뜨거운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남자의 딸에게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바깥에 그와 페어를 맺은 가이드가 있다고 들었다.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은 걸 보면 이미 버림받은 것 같았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테디에게 말할 만큼 간이 크지는 않았다. 팔을 바꿔서 팔굽혀펴기를 끝마친 테디가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이 방에서 가장 고령인 노인이 테디의 발등에 앉아 다리를 잡아줬다. 테디가 상체를 일으켜 세울 때마다 배에 있는 식스팩이 불끈거리며 요동쳤다. 넓은 대흉근도 꿈틀거리며 부풀었다. 신체 자체가 위협적으로 보이는 에스퍼였다.

비록 이 오클라호마 교도소에서는 그 누구도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만일 테디가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이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다. 살인 청부업자였다는 그는 150명이나 되는 표적을 살해했다.

돈이면 뭐든지 다 하는 무서운 놈으로, 한 번은 테디를 보고 반한 고객이 돈을 주며 애널 섹스를 하고 싶다니까 알파인 그가 흔쾌히 뒤를 대줬다고 했다. 정말 돈이면 못하는 게 없는 악당이었다.

테디가 운동을 끝내고 쇠창살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교도관님, 샤워하러 가고 싶습니다.”

샤워장에 가는 시간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테디는 언제든지 그가 원하는 시간에 샤워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그가 이 교도소 안에서도 마약을 팔 수 있는 엄청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재소자들에게 마약을 팔고, 상대적으로 약한 에스퍼들을 협박해 매춘시키는 그는 교도소에 수용된 이래로 1,000만 달러를 벌었다고 했다. 그는 그걸로 교도소장에게 집도 사주고 교도관들에게 차도 뽑아주며 톡톡히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샤워하고 돌아온 테디가 얄팍한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 올려 사진을 꺼냈다. 아무 곳에 던져놓아도 그의 사진에 감히 손댈 사람은 없지만, 그는 항상 저렇게 꼭꼭 숨겨놨다. 거구의 알파는 침대에 누워 자기 손바닥보다 작은 사진을 하염없이 들여다봤다.

그 사진 속 주인공은 그의 가이드였다.

* * *

취침 시간이었다. 교도소 전체가 불을 꺼 어두웠다. 희미하게 창문으로 달빛이 새어 들어와 어렴풋이 사물의 실루엣만 보였다. 바닥을 끌며 걷는 구두 소리가 들리더니 쇠창살 사이로 교도관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봐. 24601. 잠깐 나와봐.”

장발장과 죄수 번호가 같은 테디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테디를 교도관실로 데려간 교도관이 자기 핸드폰을 내밀었다.

“네 가이드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대. 전화해봐.”

루게릭병에 걸린 테디의 가이드는 나날이 사지가 굳어가 결국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테디는 ‘오시리스의 눈물’이라는 아이템을 구매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었으나 한없이 부족했다.

모든 병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려낸다는 아이템의 소유주는 세계적인 인터넷 쇼핑몰의 CEO로 그의 개인 재산만 1,893억 달러에 달했다. 온갖 인맥을 동원해 그 남성, 존 에버시와 점심 약속을 잡은 테디는 ‘오시리스의 눈물’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존은 당연하지만 팔지 않겠다고 했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공평함 때문에 세계적인 갑부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런데 ‘오시리스의 눈물’이 한 번 더 생의 기회를 준다니 팔 생각 따위 가질 이유가 없었다.

테디는 간절하게 자신의 가이드가 걸린 병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존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테디는 할 수 없이 존을 죽이고 아이템을 뺏기로 했다. 그를 지키는 수십 명의 에스퍼들이 테디를 공격했고 도망치는 그를 추격했다.

도피 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테디는 총 다섯 번의 암살을 시도했고, 존을 죽이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존의 아들을 납치할 수 있었다.

테디는 인질과 ‘오시리스의 눈물’을 교환하길 요구했다. 그런데 이 비열한 장사꾼은 그냥 넘길 수 없다며 10억 달러를 달라고 했다. 그 가격에 아이템을 살 생각 없으면 자기 아들을 죽이라며 말이다.

할 수 없이 테디는 온갖 의뢰를 받으며 돈을 모았다. 불법적인 일이든 뭐든 돈이 되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했다.

존의 아들은 임무를 할 때마다 끌고 다녔더니 어느새 스톡홀름증후군에 걸려 테디의 추종자가 되어버렸다. 어디 가지 말고 자기를 기다리라는 말에 그의 가이드를 돌보며 출소만을 기다리고 있을 지경이었다.

교도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자 존의 아들 조셉이 전화를 받았다.

―테디.

그를 반기는 목소리에도 테디는 먼저 가이드의 안부부터 물었다.

“레이첼이 얼마나 안 좋은 거야.”

―점점 몸의 경직이 심해져서 이제 물도 제대로 못 마셔요. 얼마 전에 병원에서 목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삽입했어요.

테디는 이마를 손으로 감싼 채 눈물에 젖은 눈을 가렸다.

―병원에서 그랬는데 이러면 음식 섭취가 힘들어서 얼마 못 살 거래요. 호스로 유동식을 넣어주고 있긴 한데 자꾸 레이첼이 토해서…….

조셉의 설명을 들은 테디는 결국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그는 한참 울다가 레이첼을 바꿔 달라고 했다.

“레이첼. 레이첼. 내 목소리 들려? 금방 ‘오시리스의 눈물’을 사서 갈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죽더라도 반드시 널 살려낼 거니까.”

조셉은 테디의 눈물 어린 말을 들으며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키득키득 웃어댔다. 이미 죽은 시체에 핸드폰을 대주던 조셉, 아니 아이템을 사용해 어려진 존 에버시는 어떻게 자기가 납치한 인질을 믿고 사랑하는 연인을 맡길 수 있나 싶어 테디를 속으로 비웃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남자였다.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는 테디가 간절하게 레이첼에게 말을 걸어왔다. 존은 손톱 밑에 낀 이물질을 빼내며 기다리다가 핸드폰을 회수했다. 어차피 평생 테디가 교도소 밖으로 나올 일은 없었다.

존은 상냥한 목소리를 가장하며 말했다.

―테디, 이만 전화 끊을게요. 레이첼이 실례를 한 것 같아요. 기저귀를 갈아야겠어요.

“조셉, 정말 고마워. 내가 밖에 나가면 꼭 너한테 사례할게.”

―뭘요. 테디가 좋아서 돕는 거라고요.

테디는 조셉과 통화를 끝내고 한참 핸드폰을 손에 쥐고 오열했다. 교도관이 따뜻한 밀크티를 타서 내밀었다.

“이거 좀 먹고 진정해봐. 얼마나 상태가 안 좋대?”

“많이 안 좋은 것 같아요. 목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넣었대요.”

“아이고야, 내 어머니도 돌아가시기 전에 그랬는데……. 조만간 묘비에 꽃을 바치러 가야겠다.”

교도관은 자기 이야기를 하며 테디를 동정했다. 그렇다고 그의 친절을 진심으로 믿으면 안 됐다. 테디는 거칠게 눈물을 닦아내고 핸드폰을 교도관에게 돌려줬다. 따뜻한 밀크티를 다 마시고 죄수복 주머니를 뒤졌다.

“전화 잘 썼습니다. 교도관님, 이건 작은 제 성의입니다. 어머님께 꽃을 바치러 가시면서 제 몫으로 한 송이 놓아주십시오.”

테디는 고무줄로 돌돌 만 100달러 지폐를 찾아내 교도관에게 건넸다. 그러곤 실실 쪼개는 교도관과 함께 교도관실을 나왔다. 열쇠 꾸러미를 휘휘 돌리는 게 어지간히 기쁜가 보다.

테디는 미로처럼 복잡한 복도를 걸어 감방으로 돌아왔다. 철커덩, 쇠 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철문이 잠겼다. 그는 낡은 매트리스에 누워 눈을 감고 레이첼을 머릿속에서 그렸다. 여태 2억 달러밖에 모으지 못했다.

남들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거금이었으나 아이템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교도소라는 한정적인 장소에서는 큰 수입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이곳을 벗어날 탈옥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뜨끈한 눈두덩에 팔뚝을 올리고 눈물을 흘려보냈다.

* * *

오클라호마 교도소장실은 학교 교장실처럼 평범하게 꾸며져 있었다. 소파에 앉은 최유다의 무릎이 테이블에 닿을 정도로 테이블이 낮았다. 그는 앞에 놓인 커피를 들었다. 따뜻한 커피를 입에 머금고 쓴물을 삼켰다.

“우리 교도소를 견학하고 싶다고요? 죄송하지만 저희는 일반인에게 교도소를 공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교도소장은 포마드를 치덕치덕 발라 잘 닦은 구두처럼 광이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두피에 딱 붙여 놓았다. 인중에 쥐꼬리처럼 자란 턱수염은 양 갈래로 나 있어서 그가 얇은 입술을 움직여 말할 때마다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얼굴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건 아주 형편없는 짓이었지만 전형적인 간신배 같은, 비열한의 관상이었다. 딱 봐도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탐관오리가 되었을 것 같았고 현대에서는 강한 놈에게는 약하게, 약한 놈에게는 강하게 살 놈 같았다.

“혹시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신 교도소장님께 제 존경을 표할 수 있으면 그래도 될까요”

교도소장은 한국에서 온 동양인이 돈을 내봤자 얼마나 가져왔겠는가 무시하는 눈빛이었다. 최유다는 바닥에 가지런히 놓았던 트렁크 가방을 낮은 테이블에 올리고 비밀번호를 돌려서 가방을 열었다.

“으허어어.”

지폐 다발을 본 교도소장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가 경기를 일으키듯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가 손으로 지폐를 가져가 코로 냄새를 맡았다. 가짜 10만 달러는 중국에서 SS급 위조지폐 제작단에게 맡기면 1만 달러에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은 미국 달러에 사용된 잉크와 활판을 똑같이 제조해 가짜 지폐를 찍어냈다. 교도소장이 위조지폐 감별기를 가져와 지폐를 넣었다. 그가 입이 째지도록 웃었다.

“하하. 이렇게 전 세계의 안전을 위해 수고하는 제 노고를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편하게 견학하다가 돌아가세요. 교도관을 안내인으로 붙여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편하게 저 혼자 둘러보고 싶습니다.”

교도소장이 혹시 범죄자를 빼내려는 건가 싶어 의심 어린 눈초리를 했다. 최유다는 얼른 말을 바꿨다.

“하지만 그런 호의를 베풀어주신다니 감사히 도움을 받겠습니다.”

교도소장이 경계심을 조금 누그러트린 게 보였다. 최유다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힌트를 얻어가고자 미끼를 던졌다.

“그런데 교도소장님, 혹시 기독교를 믿으시나요?”

“예, 왜 그러시죠?”

최유다는 교도소장실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쳐다보며 마치 그걸 보고 질문하는 것처럼 꾸며냈다.

“갑자기 주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로마군이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요.”

교도소장은 최유다가 뚫어지게 보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십자가를 보고 대답했다.

“롱기누스의 창입니다.”

“아, 그렇구나. 혹시 어느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지 아시나요?”

“롱기누스의 창은 13세기에 반으로 쪼개진 후, 반은 프랑스 대혁명 속에서 사라지고 나머지 반은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그럼 사라진 건 못 찾겠네요.”

“안타깝게도요.”

교도소장은 왜 이딴 질문을 하나 하는 떫은 표정이었다. 최유다는 모르는 척 그에게 인사를 하고 교도관을 따라나섰다.

오클라호마 교도소는 에스퍼들이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를 정확히 모른 채 이곳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무도 롱기누스의 창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찾아내는 것이 문제였다.

최유다는 교도관을 따라 교도관실과 의무실을 구경했다. 이런 곳에 롱기누스의 창이 있을 것 같지 않아 관심 없었지만, 신기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도관은 목에 매달고 있는 출입증으로 복도마다 있는 자동문을 열며 내부를 돌아다녔다.

그를 따라 복잡하게 얽힌 내부를 돌아다니며 쇠창살 안에 갇힌 에스퍼들을 구경했다. 혹시 창고나 비품실이 있냐고 물었다. 교도관이 그런 것도 궁금하냐면서 상자를 가득 쌓아놓은 컨테이너를 구경시켜줬다.

옆에 사람이 있어 안을 뒤질 수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여긴 아니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컨테이너를 나왔다.

계속 돌아다니며 몰래 보물찾기를 하는 건 엄청난 정신력을 소모했다. 그렇지만 포기해선 안 됐다.

전 재산을 털어 위조화폐를 샀고 비행기표를 끊었다. 메시아가 다른 신도를 보내 이곳에서 롱기누스의 창을 찾기 전, 그가 먼저 찾아내야 했다.

교도관에게 이번에는 재소자들이 설렁설렁 공을 차며 운동하는 운동장을 안내받았다.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최유다를 향했다. 그는 에스퍼들이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지만 범죄를 저지르고 들어온 흉악범들이 무서워서 눈을 내리깔아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메마른 흙에 잡초가 듬성듬성 자란 운동장에는 초록색 페인트를 칠한 벤치가 놓여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 있던 중년의 한국인이 그를 끈질기게 쳐다봤다.

최유다는 그 남자를 단번에 알아봤다. 남자는 최초로 게이트를 연 죄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게이트를 연 게 아니라 최초로 발견한 것뿐이라고 주장했으나, 그 사건이 벌어지고 괴수들이 쏟아져나와 전 세계가 초토화됐기 때문에 인류에게는 책임자가 필요로 했다.

다행히 능력자들이 생겨나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아니었으면 세계는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반가워하는 기색이 완연한 그 얼굴을 무시하고 교도관을 따라 걸으며 바쁘게 운동장을 살폈다.

롱기누스의 창이 바위에라도 꽂혀 있으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조금도 수상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땅에 깊숙이 파묻혀 있으면 그가 아무리 눈으로 봐도 찾아낼 수 없을 테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땅을 내려다봤다.

재소자가 공을 찼다. 공이 철조망까지 날아가 녹색 철망을 철렁 흔들었다. 그들을 감시 중이던 교도관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공을 주우러 가는 재소자를 쫓아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유다는 어떻게 롱기누스의 창을 찾나 눈앞이 깜깜했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옥상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위에서는 뭘 하고 있는 건가요?”

“방수 페인트를 칠하는 중인데 구경 가실래요?”

한국에서 온 부자와 교도소를 탐방하느라 근무에서 빠진 교도관은 선뜻 호의를 베풀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 빛에 달궈진 옥상은 구두 밑창이 녹아서 쩍쩍 바닥에 달라붙을 정도로 뜨거웠다. 목에 수건을 맨 재소자들이 멜빵으로 된 작업복을 입고 페인트 롤러를 문지르고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곳을 채우는 그들의 얼굴은 고온에 시뻘겋게 달아올라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햇볕이 따가워 눈을 찡그린 채 일하는 재소자들을 본 최유다는 트럭을 몰았던 그의 동생을 떠올렸다.

무거운 짐을 몇 번이고 들고 내려야 하는 그의 동생은 여름만 되면 온몸에서 쉰내가 날 만큼 땀을 흘렸다. 사람들은 그런 동생을 벌레처럼 하찮게 취급했다. 동생은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 때문에, 퇴근하고도 편의점에 시원한 맥주 한 캔 사러 가지 못했다.

최유다는 교도관에게 작업 중인 재소자들에게 시원한 맥주를 사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 에스퍼들은 밖에 나갈 일이 없어서 인맥 만들어 봤자예요.”

일반인들은 만나기 힘든 에스퍼들이다. 아무리 범죄자가 되었어도 인맥을 쌓기 위해 가끔 찾아오는 사람이 있나 보다. 하긴 에스퍼 한 명만 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으면 세상을 살면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최유다 또한 그런 속물 중 하나처럼 보였으리라.

그는 동생이 생각나서 그렇다며 교도관에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뭐 돈만 내준다며 저 녀석한테 못 줄 것도 없죠.”

재소자들은 일하는 내내 최유다와 교도관의 대화를 신경 쓰며 힐끔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으나 처음 보는 동양인이 그들에게 무언가 사줄 것처럼 보였다.

교도관이 호루라기를 꺼내서 불었다.

“잠깐 휴식. 이분께서 너희들에게 시원한 맥주를 사주겠다고 한다. 감사 인사 올려라.”

더위에 지친 재소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최유다는 교도관과 함께 시원한 캔 맥주를 비닐봉지에 챙겨서 돌아왔다. 재소자 한 명이 최유다에게 같이 와서 마시자고 제안했다.

그는 바닥에 엉덩이를 대면 익을 것 같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재소자들이 하하하 크게 폭소하며 박스를 뜯어 만든 돗자리에 자리 하나를 내줬다. 이 분위기에서 더 거부하면 안 될 것 같아 종이 박스 위에 앉았다.

그새 미지근해진 맥주를 한 모금 입 안에 머금었다. 재소자들이 관심을 보이며 누굴 만나러 왔냐고 물었다.

“역시 테디겠지?”

“당연하지. 테디가 아니면 누굴 보러 오겠어.”

롱기누스의 창을 찾으러 온 거라고 대답할 수 없어 머뭇거리는 사이 재소자들이 엉뚱한 오해를 했다. 테디라니?

“테디는 분명 탈옥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 이곳에서 그는 왕이니까. 도대체 감옥 안에서 마약을 팔고 매춘업을 해서 얼마를 번 거야.”

최유다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경청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테디는 바깥 세계에서 살인 청부업자로 활동했다고 한다. 전설적인 킬러인데 돈이면 뭐든지 다 한다고 했다.

그들이 그에게 테디를 소개해준 것은 아니었으나, 몇몇이 자기가 얼마나 테디랑 친한지 떠들어댄 덕에 자연스럽게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다.

김이 빠져 오줌 같아진 맥주를 다 마신 최유다는 캔을 손으로 찌그러트렸다. 박스를 깔고 앉았는데도 엉덩이가 따끈했다. 교도관에게 조용히 테디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역시 당신도 그놈이 용건이었군.”

교도관은 범죄와 연루되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경멸 어린 시선으로 최유다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가 따라오라며 앞서 걸었다. 이미 구경한 감방들이었지만, 이번에는 만날 사람이 있었기에 빙 둘러서 가지 않았다.

교도관이 감방 철문을 열었다. 상의를 탈의한 채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던 알파가 희번덕이는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최유다는 힉, 숨을 들이마셨다. 무시무시한 살기를 지닌 범죄자와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24601. 이런 일로 자꾸 외부인 들어오게 하지 말란 말이야.”

마틴은 이곳의 교도관과 재소자는 물론 교도소장까지 쩔쩔매는 테디를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에스퍼들 위에 군림하려고 일부러 이곳에 지원해서 온 자격지심 넘치는 병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테디는 벗어둔 죄수복 상의를 꿰어 입었다. 큰 키의 그가 일어나자 천장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했다. 마틴은 교도소장에게 테디가 의뢰받을 수 있도록 협조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순순히 테디를 데리고 나왔다.

다시 철문을 열쇠로 잠갔다. 교도관실에 그들과 함께 가니, 이미 와서 소파에 쉬고 있던 교도관들이 몸을 일으켜 자리를 피해줬다. 최유다는 테디와 단둘이 남겨졌다. 그들은 작은 원형 테이블에 앉았다.

“의뢰?”

재소자들의 수다에 따르면 테디에게 의뢰를 하는 건 한두 푼이 드는 게 아니라고 했다. 약속한 돈을 내지 못하면 의뢰인을 위해 일하는 조직원들이 목을 싹 베서 장기를 다 팔아치운다고 했다. 의뢰인 한 명으로 부족하면 그 가족들까지 건드린다고 그랬다.

이런 엄청난 범죄자에게 돈도 없는 자신이 간 크게 의뢰를 할 수는 없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는 사기꾼이었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 손을 깍지 끼어서 테이블 위에 올렸다.

테디는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를 보고도 겁먹지 않고 여유롭게 구는 의뢰인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테디에게 의뢰할 정도면 이미 세계적인 부자이니, 그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하늘을 찌르듯 높은지 몰랐다.

“테디, 당신이 만약 탈옥할 생각이 있다면 제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최유다는 자신에게 아주 엄청난 방법이 있는 것처럼 능청을 떨었다. 재소자들에게 테디가 이 교도소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교도소 내에서 왕국을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기에 이 방법이 먹힐까 긴가민가했다. 그렇지만 모든 범죄자는 원해서 이곳에 갇혀 있는 게 아니었다.

테이블에 앉은 거구의 상체가 앞으로 다급하게 쏠렸다.

“뭐야. 말해. 어떻게 여기서 탈옥할 수 있다는 거지? 여기선 에스퍼들의 능력이 사라진다는 걸 몰라서 그래?”

테디가 싸우려는 것처럼 최유다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사기꾼인 그는 한눈에 알아차렸다. 재소자들에게 한껏 우상화된 이 범죄자가 사실은 이 교도소를 몹시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걸. 그 비밀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최유다는 테디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이 손 놓으시죠. 내가 당신을 안 도우면 어쩌려고 이래요.”

“……그 미안해. 내가 많이 흥분했어.”

테디가 최유다의 멱살을 놓고 넓은 어깨를 옹송그리며 눈치를 봤다. 자신이 그냥 떠나버릴까 봐 긴장했는지 바지에 손바닥을 문질러 식은땀을 닦아냈다.

“내가 사는 나라에는 일거양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두 세계의 최고(Best of both world)라고 하더군요,”

최유다는 잠시 뜸을 들였다. 상대방이 초조해서 먼저 무엇인지 물어오면 그가 이 관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

“도대체 우리의 이득이 뭔데. 내가 교도소를 탈출하고 계속 네 사업을 봐줬으면 싶은 건가? 그래?”

역시나 대어가 미끼를 물었다. 그런데 생각보다도 테디의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반응이 격했다. 어지간히 이곳을 나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자기 자유를 팔아치우지 않을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최유다에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맞아요. 앞으로 날 위해 당신께서 일해주셨으면 싶습니다. 그럼 이곳을 나갈 방법을 알려드리죠.”

“씹. 뜸 들이지 말고 말해.”

테디가 육중한 근육질 다리를 달달 떨었다. 그의 무릎에 부딪혀 조잡한 원형 테이블이 흔들렸다. 만일 차라도 떠놨으면 물을 쏟았을 테다. 최유다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눌러서 테디가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가 자신의 통제에 따르면 테디와의 게임에서 최유다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조용히 초록색 눈을 들여다봤다. 테디가 다리 떨기를 멈추고 최유다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좋습니다. 그럼 나와 거래를 하겠습니까?”

“그래. 할게. 뭔데. 어떻게 하면 돼?”

최유다는 아무것도 없는데 있는 척해야 했다. 그렇지만 사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할 때 상대방을 보다 잘 속일 수 있었다. 그 무엇도 없는 데에서 싹을 틔운 거짓말로는 완벽히 누군가를 속일 수 없었다.

더군다나 테디처럼 유명한 범죄자라면 탈옥 후 최유다에 대해 알아보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이 범죄자를 속이는 공격이자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종의 방어책이기도 했다. 만일 거짓 신분과 사연을 사용했다가 들키면 보복을 하러 올 테니 말이다.

“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온 천사 메시아 님을 보좌하는 최유다라고 합니다. 신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은 벌하고 용서를 구하는 인간은 구원해 이 세상을 정화하고자 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교도소 밖으로 나가면 우리 ‘제네시스’ 단체를 알아봐도 좋습니다. 나의 조직은 실재하고, 천사께서도 함께하시니까요.”

“그게 무슨 개소리…….”

황당함을 느낀 테디는 분노를 느끼고 최유다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동양인은 자기보다 머리가 두 개나 큰 알파에게 들려 허공에 발이 떴지만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오클라호마 교도소에서 에스퍼들이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여기에 롱기누스의 창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서 죽인 로마인의 창이죠.”

“젠장, 그 미친 소리 좀 그만해.”

“믿기지 않겠지만 믿으세요. 당신이 이곳을 나갈 방법은 그거 하나뿐이니까.”

최유다의 말이 맞았다. 테디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이대로 가면 레이첼은 그가 탈옥하기 전에 죽을지도 몰랐다. 테디는 최유다의 멱살을 놓았다. 짧게 기침한 왜소한 체구의 남자가 목을 문지르고 의자에 앉았다.

“어딘가에 묻혀 있는 롱기누스의 창을 찾으세요. 반으로 부러진 창입니다. 그걸 찾으면 교도소장에게 절 만나겠다고 해요. 제가 롱기누스의 창을 가지고 이곳을 벗어나겠습니다. 그 뒤로는 당신의 힘만으로도 탈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딴 게 사실이라고? 롱기누스라면 성경책에 나오는 거잖아.”

“실존하는 창이기도 하죠.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 창을 얻었었다고 역사에 기록된 걸 보면 말이죠.”

다큐멘터리에서 보긴 했다. 그렇지만 진짜 신을 죽였던 창이 존재하고 그것 때문에 에스퍼들이 능력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천사가 인류를 심판할 거라고? 차라리 똥물을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하는 게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는 최유다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일단 무슨 속내인지 파악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속했다는 ‘제네시스’에 관해 물었다.

“네가 속한 조직은 어떤 곳이지? 왜 롱기누스의 창을 찾는 거야.”

“그게 왜 궁금하죠? 나는 롱기누스의 창이 필요하고, 당신은 이 교도소를 탈출해야 합니다. 우린 같은 편이에요. 내가 속한 ‘제네시스’가 어떤 곳인지는 테디가 밖에 나가서 직접 알아보세요.”

최유다는 테디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곧 있으면 ‘제네시스’의 광신도들이 이곳을 쳐들어와 롱기누스의 창을 찾을 거다. 그 전에 테디를 움직여야 했다.

뒷머리를 문지르며 고민하던 테디는 천사라든지, 롱기누스의 창이라든지 하는 이야기들이 믿기지 않았지만 속아서 나쁠 건 없다 싶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버리긴 하겠지만 어차피 교도소 안에 갇혀 있으면 썩어서 버려야 하는 게 시간이었다.

“좋아. 애들을 풀어서 찾아보지.”

최유다가 손을 내밀었다. 테디는 이 꺼림칙한 존재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그 손을 잡지 않았다.

* * *

교도소 안 재소자들의 움직임이 수상했다. 무언가 찾는지 어슬렁거리며 창고를 뒤지거나 운동장의 땅을 팠다. 교도관들은 혹시 저것들이 탈옥하려는 건가 싶어, 의심의 눈초리로 살폈다.

테디에게 롱기누스의 창에 대해 들은 부하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그게 유일한 희망이기에 온종일 부러진 쇳덩어리를 찾는 데에 골몰했다.

그러나 아무리 교도소를 뒤져도 그 신을 죽였다는 창은 찾을 수 없었다. 이게 사기 아닌가 싶은데 낯선 땅에서 온 자가 아무런 이득도 없는 거짓말을 왜 하겠는가 싶기도 했다.

과연 어떻게 해야 롱기누스의 창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숨겨져 있으니 못 찾는 것일 테지만 단서라고는 에스퍼의 능력의 힘을 없앤다는 것뿐이었다.

테디는 제소자들이 한 공간에 모여 대화할 기회를 노렸다. 가구 제조를 하는 작업장에서 망치로 못을 두드려 박았다. 모스 신호였다. 보스가 보내는 암호를 재빠르게 알아차린 부하가 재소자들의 노역을 감시하고 있던 교도관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아이고, 우리 교도관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어깨가 왜 이렇게 뭉치셨을까. 다 우리가 교도관님 속 썩여서 그렇죠?”

“이 새끼들이, 알면 얌전히 지내. 요즘 너희 움직임 수상해.”

교도관이 손에 들고 있는 두꺼운 몽둥이를 들고 부하의 가슴을 푹푹 찔렀다. 부하는 성질나서 교도관을 두들겨 패고 싶었지만 웃으면서 오메가 재소자 하나를 붙여줬다.

“예쁜아, 우리 교도관님이랑 저어어어기 가서 어깨도 주물러주고, 그러다가 좆도 만져주고, 알지?”

오메가 재소자가 교도관에게 다가와 유혹적인 페로몬을 뿜어냈다. 교도관은 크흠, 헛기침하며 오메가를 데리고 작업장을 나갔다. 부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망을 보다가 후다닥 테디에게 달려왔다.

테디는 의자를 만들던 목재를 손에서 놓고 교도관이 서 있던 앞으로 나왔다.

“이야기는 들어서 알 것이다. 우린 지금 아주 특별한 철 조각을 찾고 있다. 에스퍼의 능력을 없애는 힘이 있다고 하니, 유난히 몸이 무거워지거나 힘이 사라지는 느낌이 드는 곳을 말해봐. 여러 사람이 똑같이 느낀다면 바로 거기 있는 거니까.”

테디의 발상에 부하들이 과연 보스라며 추켜세웠다. 재소자들은 교도소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신체에 변화를 느낀 장소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다들 제각각이었다.

이곳에 있을 때 가장 몸이 무거웠다며 다수의 의견이 모인 장소가 있긴 했으나, 옥상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날씨가 더운 탓에 방수 페인트를 칠하며 지친 것뿐이었다.

이대로 롱기누스의 창을 못 찾는 걸까 좌절하고 있던 찰나, 멸치처럼 마른 체형의 오메가가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테디가 매춘업을 시키고 있는 놈 중 한 명이었다.

“저……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뭔데?”

“제가 매일 밤 성경책을 읽으면서 위안으로 삼거든요.”

서론이 길었다. 테디의 굵은 눈썹이 찌푸려진 걸 본 오메가가 히이익, 겁에 질려 희한한 비명을 지르며 식은땀을 흘렸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제 잘난 맛에 살던 흉악범이 1년 동안 재소자와 교도관의 성욕 처리를 해주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서 말하지 못해? 그래서 뭘 아는데!”

“그…… 그게. 마태복음 24장 32절에서 33절에 이런 문구가 나오거든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오메가가 하는 말에 이해할 수 없어서 다들 “뭔 소리래?”하고 수군거렸다. 오메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용기를 냈다. 에스퍼 능력만 되찾으면 그는 죽여야 할 놈들이 많았다.

“이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인데 마침 교도소 운동장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가 있어요.”

테디는 이거다 싶어 무릎을 쳤다. 내일 운동 시간을 노려 그 나무 밑을 파봐야겠다.

* * *

재소자들이 축구를 하겠다며 공 하나를 두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다섯 명이 뭉쳐서 걷느라 잠시 교도관의 시야를 가렸지만, 곧 지나갔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교도관은 그에게도 같이 공을 차자고 제안하는 재소자들을 째려보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엉뚱한 짓 하기만 해. 아주 너희들 다 독방에 가둘 거니까.”

화가 잔뜩 난 교도관에게 끝내주게 잘생긴 오메가가 다가왔다. 그가 교도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안겨 왔다.

“교도관님, 무서워요. 화내지 마세요.”

“으.”

달짝지근한 페로몬 냄새에 교도관은 참지 못하고 오메가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열성 알파였던 교도관은 우성 오메가의 유혹에 러트가 일어나버렸다. 교도관은 그대로 바지를 벗고 사람들 앞에서 오메가를 범하기 시작했다.

눈이 돌아갔으니 지금 작업에 들어갈 때다. 부하들이 교도관의 주위를 둘러싸 시야를 가렸다. 테디는 부하 몇 명을 데리고 무화과나무 아래에 섰다. 삽 같은 도구는 무기로 쓸 수 있어서 소지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맨손으로 딱딱한 땅을 파냈다. 돌가루에 손톱이 깨지기도 했으나 다들 죽자 살자 나무뿌리가 드러나도록 갈고리 손을 휘둘렀다. 그렇게 팔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깊게 땅을 파고 나니 오크나무 상자가 나왔다.

테디는 떨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부러진 창이 들어 있었다. 그는 얼른 롱기누스의 창을 숨기기 위해 바지를 벗었다. 허벅지 안쪽에 부러진 창을 대고 부하들이 옥상 페인트칠을 할 때 훔친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 고정했다.

도로 바지를 입자 감쪽같았다. 나무상자는 구덩이에 도로 넣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땅을 다지기 위해 발로 몇 번이나 두드려 흔적을 지웠다. 운동 시간이 끝났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테디 패거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운동장을 벗어났다.

* * *

최유다는 이렇게나 빨리 테디에게 연락받게 될 줄 몰랐다. 다시 교도소를 찾아온 그를 교도소장이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그야 당연했다. 이게 다 돈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짜 화폐를 더 유통하기 위해 사채까지 끌어 썼지만 후회는 없었다.

동생의 복수를 끝내는 날, 모든 걸 끝낼 것이다. 이 비참한 삶을 계속 영위한 건 오로지 메시아를 죽이기 위함이다.

“테디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교도소장님, 자리 좀 피해주십시오.”

최유다는 빼곡하게 10만 달러를 채운 서류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열었다. 교도소장이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그럼요. 편하게 비즈니스 하다가 가세요.”

이미 교도소에서는 테디와 최유다가 불법적인 일을 하는 걸로 소문이 난 듯했다. 그 오해를 굳이 해명하지는 않았다. 교도관과 함께 교도소장실에 방문한 테디가 큰 키를 구부려 문을 넘었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덩치였다. 굳이 에스퍼의 능력이 아니어도 맨손으로 사람을 찢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절 불렀으니 그걸 찾으셨나 보군요.”

테디가 갑자기 바지를 벗었다. 최유다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허벅지에 붙인 마스킹 테이프를 떼어내니 쇳독이 오른 허벅지 안쪽 살이 시뻘겋게 부어 있었다. 가려움을 참고 이걸 교도소에서 가지고 나가줄 최유다를 기다린 것이다.

테디는 롱기누스의 창을 건넸다. 녹이 슬고 낡은 뭉뚝하기만 한 쇳조각이었다. 그 누구도 이게 창이라고 말하면 믿지 않을 테지만, 최유다는 저 오래된 고철이 얼마나 중요한 무기인지 알았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건네받아 재킷 안쪽에 만들어둔 비밀 포켓에 집어넣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테디는 탈옥 잘하세요.”

롱기누스 창을 얻은 최유다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교도소장실을 나서려고 했다. 테디가 가려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유다는 그와 악수했다.

교도소 주차장에 세워둔 렌터카를 타고 최유다가 빠져나갔다. 교도소 안에 있던 재소자들은 그들의 파동 에너지가 돌아온 걸 느꼈다. 그때부터는 아비규환이었다. 살아 있는 지옥도가 이곳일 것이다.

다들 쇠창살을 맨손으로 구부려서 감방을 빠져나왔다. 교도관들은 손짓 한 번에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재소자들 사이에서 원한이 있던 관계는 서로를 죽이겠다며 에스퍼 능력을 사용했다. 탈옥만이 목적이었던 테디는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녀석들을 집어 던졌다.

사람이 바람개비처럼 돌면서 날아갔다. 오클라호마 교도소 최고의 악인이었던 테디였지만, A급 에스퍼인 테디는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다시 에스퍼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어도 그 누구도 그와 대적할 수 없었다.

교도소 밖에서도 테디를 따르겠다며 부하 몇 명이 그의 뒤에 붙었다. 테디는 정문을 향해 당당히 걸었다. 모르긴 몰라도 미국의 범죄율이 이제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예정이었다.

적어도 그가 ‘오시리스의 눈물’을 살 수 있을 때까지.

진설해는 서울에서 태백산까지 출퇴근 생활을 하고 있었다. 처음 입사했을 당시에는 동료들에게 거리도 먼데 그냥 기숙사를 이용하지 그러냐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뿐만 아니라 페어가 없으면 가이드든, 에스퍼든 자기 집을 따로 두고 회사에 오갔다.

아무리 태백산에 거대한 센터를 지어놓고 불편함 없이 살게 해줘도 결국 편리한 감옥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였다.

한밤중 어둠 속에서 눈을 빛내는 짐승처럼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를 몰고 잿빛 도로를 계속 달리다 보면 드물었던 차도에 자동차들이 나타났다.

도심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자동차들이 도로를 빽빽하게 채웠다. 고속도로 위에 멈춰 선 그녀는 핸들을 두드리며 시간을 보냈다.

센터 동료들이 자유를 찾아 집을 따로 둔다면 진설해는 달랐다. 그녀는 언젠가 돌아오겠다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린란드 해안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설원을 뛰어다니며 수렵 사냥을 하는 이누이트족과 함께 자란 그녀는 어려서부터 늑대를 이끄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자신을 꼬마 이누이트라고 믿었다. 다른 이누이트처럼 순록 털가죽으로 만든 아트쿠스 상의를 걸쳤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가죽 바지를 입었으며, 순록 가죽으로 만든 장화를 신었기 때문이었다.

동물 뼈로 만든 반지하 집 ‘닌류’는 고래의 턱뼈로 들보를 가로놓아서 만든 집이었다. 천장은 고래 갈비뼈와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마른풀을 깔고 잔디와 모래를 뿌려 단단히 다졌다.

아무리 북극에 있는 섬이어도 여름은 있었고 햇볕도 비쳤다. 지붕에 구멍을 뚫어 집 안에 햇빛이 들이치게 했다.

물론 모든 그린란드인이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처럼 살지는 않았다. 도시인들은 현대식 집을 짓고 슈퍼에서 장을 봤다.

그래서 전통적인 이누이트 방식의 집에서 사는 아이였던 진설해는 요즘 그린란드인이 아닌 이누이트 원주민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그녀는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는 삶을 살았으나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신기했으며, 이누이트 중에서 제일 사냥을 잘하고 싶다는 꿈을 가진 꼬마였을 뿐이었다.

그녀가 기르던 늑대의 이름은 하쿤이었다. 늑대는 가족적인 동물이기에 한번 자기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인간을 공격하지 않았다. 어린아이 따위 한 입 거리였을 텐데도, 하쿤은 입질 한 번 하지 않고 귀찮게 치대는 아이와 잘 놀아줬다.

눈밭 위를 달리는 썰매에서 그녀는 동물 뼈에 구멍을 내서 만든 보호경을 끼고 달렸다. 직선 가르마를 두 갈래로 나눠서 머리를 땋고, 눈에 반사된 햇빛에 피부가 타서 붉은 얼굴을 가진 그녀는 진정한 이누이트의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찾아왔다.

“안녕, 꼬마야. 우리는 한국에서 온 에스퍼인데 혹시 이렇게 생긴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 아니?”

그들이 아빠 사진을 보여줬다.

“우리 아빠예요.”

“그렇구나. 혹시 아빠가 있는 곳까지 안내해줄 수 있어?”

“네. 따라오세요.”

그녀는 에스퍼가 이누이트처럼 한 종족의 이름인 줄 알았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가끔 방송국 손님이 오는 것처럼 그들도 그런 줄 알고 순순히 아버지에게 안내했다.

그러나 에스퍼들이 동물 뼈로 나무를 깎고 있던 아빠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손으로 천둥을 만들고 불을 뿜는 신이었다. 아이는 아낫쿡(*주술사)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런 신묘한 힘을 사용하는 자라면 분명 엄청난 아낫쿡일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하는 엉터리 영어에 에스퍼들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한국 아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린란드에서 자라니 완전 이누이트 같군. 네 아버지는 죄를 짓고 벌을 받기 싫어서 도망친 한국인이란다, 꼬마야. 우리는 범죄자를 잡아가기 위해 온 에스퍼고. 아낫쿡 따위가 아니라.”

에스퍼들이 진설해의 아버지를 데려가려고 했다. 그녀는 덩치가 큰 어른들에게 매달려서 막았다. 닌류를 벗어난 아이와 아이의 아버지가 위험해 보인다 싶었는지 자상한 하쿤이 으르렁, 이를 드러내며 에스퍼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쿤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면 그 어떠한 사냥감도 단숨에 목숨을 잃곤 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에스퍼들의 손짓 한 번으로 늑대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하얀 눈밭 위에 그녀의 사랑하는 친구가 조각조각 나서 흩어졌다.

“하쿤! 하쿤!”

그녀는 아직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펄떡거리는 살점들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갓난아기 때부터 그녀를 키워준 동반자를 죽인 에스퍼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아마록(*늑대 신)이시여, 나의 늑대를 죽인 저들을 지하 세계로 데려가 주세요.”

“이런. 꼬마야. 네 개를 죽인 건 미안한데. 혹시 근처에 가이드 없을까.”

능력을 사용한 에스퍼들은 파동 에너지가 날뛰어서 힘겨워했다. 진설해는 그것이 아마록께서 내리는 벌인 줄 알고 눈을 부릅뜨며 째려봤다.

“빨리. 빨리 가이드. 가이드 어디 있어?”

에스퍼들이 아버지를 내팽개치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진설해에게 나오는 안정적인 힘에 이끌려 다가왔다.

“뭐, 뭐야. 오지 마!”

아이는 두려움으로 눈밭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때 부족장이 마을 청년들을 끌고 나타났다.

“외지인은 우리 부족 아이를 건드리지 마라.”

사냥을 잘하는 이누이트 아이는 무리에서 사랑받았다. 그런 아이와 아이의 아버지를 괴롭히는 외부인들에게 이누이트 어른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에스퍼들은 하쿤을 죽였던 것처럼 죄 없는 이누이트들을 죽였다.

진설해는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죽는 걸 목격했다. 에스퍼들은 과도하게 능력을 사용한 부작용으로 죽은 고래의 사체가 가스 때문에 폭발하듯 죽었다. 눈처럼 사람의 살점이 후드득 땅으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넋이 나간 딸에게 진실을 고백했다. 부녀는 살아남은 이누이트들에게 ‘재앙을 불러오는 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쿤의 시체는 언제나 그렇듯 모든 걸 덮어주는 눈송이가 내려앉아 그 자리에 묻혔다.

마을에서 쫓겨나 설원을 헤매고 있던 그들을 한국에서 온 또 다른 에스퍼들이 찾아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갔다. 뜻밖에도 가이드라는 게 밝혀지면서 황지윤 파트장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황지윤은 아이에게 선택권을 줬다. 센터에서 교도소에 들어간 아버지를 기다릴 건지, 아니면 자기가 주는 집에서 아버지를 기다릴 건지. 아이에겐 오로지 아버지를 기다린다는 선택지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그리 물었다.

그녀는 집을 달라고 했다. 그러자 황지윤이 혼자 살려면 한국 사회에 잘 녹아내려야 한다면서 앞으로 학교에 다니라고 했다.

진설해는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 이누이트식 이름을 버렸다. 그녀는 그린란드에 살 때 ‘내리는 눈’이라고 불렸다. 그래서 아버지의 성 씨를 따르고 이름은 눈 ‘설(雪)’과 움직일 ‘해(㧡)’를 붙여서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다.

아이는 고래 뼈로 지어진 집에서 콘크리트로 지어진 집으로 터전을 옮겼다.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새로운 ‘닌류’를 찾아오지 못해서 헤매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니까 황지윤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가, 한국에는 주소라는 게 있단다. 너도 이제 주소를 읽는 법을 배우고 길을 찾을 줄 알아야 해. 네 아버지에겐 네가 살게 된 집 주소를 적어서 줬으니까 만일 교도소를 나오면 널 만나러 오실 거야.”

그 말이 진설해에겐 유일한 희망이었다.

* * *

도어록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는데 낡은 남자 구두가 보였다. 놀란 그녀는 거실로 뛰어 들어갔다. 부엌에서 앞치마를 맨 아버지가 김치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 광경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모습을 바라만 봤다. 그린란드에서 물고기를 구워줄 때와 달리 아버지의 피부색이 많이 밝아졌지만, 그건 진설해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빠?”

그녀의 아버지가 뒤돌아서 딸을 바라봤다. 진설해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트렸다.

“아빠! 아빠!”

진설해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어릴 때 딸과 헤어지고 성장 과정을 사진으로만 지켜봐 온 아버지는 한국말을 능숙하게 하는 그녀가 약간 낯설면서도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차기주 이사가 아빠 빼내준 거예요?”

차기주의 수하로 들어가 말을 잘 들은 탓에 아버지가 풀려난 건가? 그녀는 차기주에게 당했던 끔찍한 고문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구부려 숨겼다.

오랜만에 아버지의 품에 안긴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비비며 어리광을 부렸다. 한국에 오니 세상 모든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를 죄인 취급하며 욕했다.

텁텁한 매연 공기와 길거리를 거니는 수많은 사람, 복잡한 인간관계와 어려운 학교 공부, 피부를 태울 듯 뜨거운 여름 해…….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그 모든 것보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죄인 취급한다는, 그 사실이 진설해는 더 괴로웠다.

“그 사람이 왜 아빠를 빼내. 아직 뉴스 못 봤구나. 아빠 탈옥한 거야.”

“……네?”

진설해는 너무 놀라서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그가 지금 뉴스에서 오클라호마 교도소 사건이 나온다며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틀었다. 어느 채널을 틀어도 그 이야기밖에 나오지 않았다. 칙칙한 감색 정장을 입은 앵커가 정확한 발음으로 사건을 브리핑했다.

오클라호마 교도소에서 갑자기 에스퍼 능력을 억제하던 힘이 사라져 범죄자들이 탈옥했다는 소식이었다. 지금 세상 밖으로 나온 에스퍼 범죄자들이 각종 범죄를 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특히 한국은 백사회와 흑사회 조직원들이 전부 풀려나 피해가 심각할 것이란다.

탈옥한 에스퍼 범죄자들의 얼굴이 뉴스에 공개되었다. 그중에는 최초의 게이트 발견자였던 진설해의 아버지 또한 있었다. 그녀는 이 끔찍한 표적 놀이가 또 시작될 거라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도대체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내 아빠를 가지고 그러는 거야. 이 세상이 망가진 건 아빠 탓이 아니란 말이야! 흐윽, 으욱.”

자신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아는 아버지는 무거운 마음으로 우는 딸을 지켜봤다. 그는 딸에게 어렸을 때밖에 해줄 수 없었던 밥을 마저 차려주기 위해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는 한 번도 한국 사람인 딸에게 김치찌개를 먹여본 적 없었다.

그가 교도소를 나오면서 굳게 결심한 게 있었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딸은 계속 죄인의 딸로 살아가야 했다. 세상의 돌팔매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니 따뜻한 밥 한 끼만 먹이고 이 세상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그가 억울해도 첫 번째 게이트 발견자라는 낙인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괴수들이 튀어나오는 게이트를 열어서 이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는 씻을 수 없는 죄인일 뿐이었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달군 프라이팬에 달걀물을 풀어서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요리를 해보지 못해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마지막 식사를 딸에게 따뜻하게 먹이고 싶어서 우는 그녀를 얼른 식탁에 앉혔다. 착한 딸은 의자에 앉아 아버지가 준 뜨끈한 밥을 수저로 떠서 먹었다.

“아빠, 밥 맛있다.”

“많이 먹어, 우리 딸, 그리고 아빠가 미안해.”

교도소 안에서 항상 딸 얼굴을 직접 한 번만 더 보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젓가락으로 못생긴 계란말이를 딸의 밥 위에 놓아줬다.

“꼭꼭 씹어 먹고. 회사 생활은 어때. 힘들지는 않고?”

“황지윤 파트장님이 좋은 분이라 잘 다니고 있어요.”

“그래, 그분이 참 좋은 분이신 것 같더라. 정말 천사 같은 분이시지.”

아버지는 ‘진설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지게 된 딸을 애틋하게 바라봤다. 이누이트족의 언어에는 ‘훌륭한’이라는 말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지 않고 자기 존재 자체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설해야. 진설해.”

한국 이름으로 딸을 불렀다. 그녀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배시시 웃었다.

“맞아요. 전 여전히 내리는 눈이에요, 아빠.”

“정말 멋진 이름이야.”

그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린란드에서 쌀알처럼, 때로는 눈의 여왕이 입는 아름다운 드레스의 레이스처럼 펄럭이던 눈보라가 떠오르곤 했다.

하얀 눈은 에스퍼들을 피해 결국 북극까지 도달한 도망자가 가진 엄청난 두려움을 순식간에 얼려버렸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김은 그의 감탄이었고 열광이었으며 동시에 전율이기도 했다.

딸의 이름을 ‘내리는 눈’이라고 지은 건 그때 그가 느낀 엄청난 자연의 경이감에 대한 찬사였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는 생각했다.

그때 그가 보고 위안을 얻었던 눈이 ‘진설해’라는 이름을 부를 때면 생각난다고. 만약 이누이트들에게 ‘훌륭한’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있었다면 ‘진설해’이지 않았을까 하고.

진설해는 식사를 끝내고 조용히 핸드폰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차기주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뉴스에서 본 내용 때문에 입술을 물어뜯다가 황지윤에게 전화했다.

―설해 씨. 무슨 일이야.”

“파트장님, 아버지가…….”

―그래, 탈옥하셨다는 소식 들었어.”

“혹시…….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 아버지 공개수배 좀 풀어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드릴게요.”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허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황지윤이 잠시 말을 잇지 않아서 안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일단 특별사면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평범한 범죄도 아니고 설해 씨 아버지는 1차 대변혁의 원흉으로 전 세계인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으니까. 그래도 힘 써볼게.

“감사합니다. 파트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의 진설해와 통화 내내 다정한 목소리로 대화한 것과 달리 황지윤은 무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파트장실에는 차기주가 보낸 전신 거울이 방치되어 있었는데 책상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거울 프레임에는 ‘Gnothi Seauton(너 자신을 알라)’라고 적혀 있었다. 차기주가 가이딩 중독 검사에 얼마나 화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녀가 센터에 입성한 이래로 그들 사이는 한 번도 좋았던 적 없었다. 그들은 철천지원수 사이였고, 사람들은 그게 황지윤이 가이드의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 애써서 그렇다며 차기주를 악인 취급했다. 워낙 표정과 말이 없는 사내라 다들 쉽게 차기주를 오해했다.

그렇지만 그건 그녀가 차기주에게 덧씌운 이미지일 뿐이었다. 센터에서 단 한 사람도 차기주의 사람이 남지 않게 말이다.

긴 머리를 질끈 동여 묶은 여인은 거울 속에서 짧은 머리의 사내로 바뀌어 있었다. 황지윤은 첫 번째 메시아와 두 번째 메시아가 임무를 완수하고 시간을 되돌린 탓에 신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내려온 세 번째 메시아였다.

황지윤은 남성체일 때는 라파엘, 여성체일 때는 라파엘라라고 불렸다. 라파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약’이란 뜻으로 그녀, 그는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힘은 에스퍼에게 사용하면 가이딩을 하는 것처럼 보였기에 라파엘은 적의 심장부 깊숙이 파고들어 와 순조롭게 센터의 가이드 파트장이 될 수 있었다.

이 세계는 같은 시간을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회전목마처럼 제자리만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인류를 이제 멈추고자 했다. 다만 공격형 천사가 아닌 그녀가 차기주를 죽이는 건 굉장히 요원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차기주의 약점을 찾기 위해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

황지윤은 차기주의 가이드를 이용해 그를 폭주 상태로 만들어 죽이기로 작정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검은 수작이 드러나지 않게 잘 숨어서 주변 인물을 휘둘러야 했다.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해. 잘 안 될지 모르는데. 인사는 나중에 받을게.”

황지윤은 진설해에게 미안하다는 듯 머뭇거렸다.

“차기주 이사가 특별사면 신청서에 서명해줄지, 안 해줄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너무 기대하지는 마.”

그녀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발을 한 발 뺐다. 그 몇 마디에 진설해가 가슴을 졸이는 게 눈앞에 그려졌다.

“그래, 이만 들어가……. 아 참. 잠깐만.”

―네?”

황지윤은 전화를 끊는 척하다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진설해에게 부여했다.

―이번에 차기주 이사의 가이딩 중독 검사 나왔는데. 하아, 결과가 너무 안 좋아. 완전히 뇌가 미친 상태라네. 이러다가 수현 씨 큰일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설해 씨가 수현 씨 좀 챙겨줘. 가이드끼리 챙겨야지. 혹시 무슨 일 벌어지면 구해주고. 알았지?

“네. 그럴게요.”

일단 씨앗만 뿌려두면 됐다. 이 씨앗을 발아시키고 싹을 틔우는 건 서로에 대한 ‘오해’가 해줄 것이다. 그녀는 책상에 놓인 컴퓨터로 진설해 아버지를 특별사면해달라는 신청서를 작성해 프린트했다.

파트장실에서 나와 탕비실에서 커피를 탄 그녀는 문이 열린 비서실에 노크했다.

“어? 파트장님, 뭐 시킬 일 있으세요?”

황지윤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비서에게 건넸다. 비서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기뻐했다. 이 별것 아닌 행동이 쌓이고 쌓여 그녀를 착한 사람이라고 규정지어줬다. 차기주와 달리 사회화가 잘된 세 번째 메시아는 살짝 미소 지으며 본론을 꺼냈다.

“윤 비서, 안 바쁘면 에스퍼 팀한테 보낼 서류 좀 다 가져와줄래?”

“잠시만요.”

비서가 당장 서명이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서 그녀에게 줬다. 고작 다섯 개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러지 말고 이미 반려된 것들도 가져와보라고 했다.

“저번에 보니까 가이드 숙직실에 에스퍼 출입 못하게 하자는 요청서 있지 않았어?”

“아, 아. 네! 맞아요. 기억하셨군요.”

윤 비서가 역시 우리를 생각해주는 건 황지윤밖에 없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우리 한 번 더 도전해보자. 가만히 있는다고 우리 처우가 뭐 달라져? 이참에 차기주 이사 야근도 시켜보고.”

“아아, 넵! 히히.”

황지윤을 따라 비서도 좋다며 웃었다. 비서는 신나서 철제 캐비닛을 열어 오래 묵혀둔 서류 더미를 끄집어냈다. 이걸로 엿을 먹이겠다는 듯 아예 수레를 가져와 서류 더미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에스퍼 팀과 가이드 팀의 불화를 조성한 건 다 세 번째 메시아인 그녀의 작품이었다. 가이드들은 그녀에게 선동당해 정작 괴수로부터 그들을 지켜줄 에스퍼들을 적대시했다.

황지윤은 비서가 서류를 챙길 동안 파트장실에 들어가 진설해 아버지에 대한 특별사면 신청서를 가져왔다. 그리고 바쁜 비서가 신경 쓰지 못하는 틈에 서류 더미 안에 그걸 끼워 넣었다.

차기주가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이 많은 서류를 다 읽어보려면 이 주는 족히 걸릴 테고, 그녀가 숨긴 서류를 발견할 때쯤 진설해의 아버지는 범죄자 신분으로 붙잡혔을 것이다.

황지윤은 자신이 아무런 관련도 없는 척 진설해와 차기주의 악연을 만들어냈다. 이제 진설해가 김수현에게 차기주의 가이딩 중독증에 대해 언급하며 그를 흔들기만 하면 됐다.

차기주가 억지로 김수현을 감금해두고 있다가 요즘 사이가 좋아졌다고 하니, 몸정이라도 들어서 그런가 본데 그들 사이에 싹튼 애정은 그 정도 의심만으로도 충분히 짓밟힐 테다.

김수현이 몇 번이나 도망치려고 했다는 건 센터에서 일하는 능력자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일이었다. 자기 가이드가 사라졌다면서 대학교에 에스퍼들을 투입해 봉쇄하고 찾았다지.

김수현이 또다시 차기주를 믿지 못해 불화가 생기고 도망치려고 하면, 황지윤은 필사적으로 김수현을 도와서 차기주에게서 떼어낼 거다. 가이딩을 받지 못한 차기주는 가이딩 중독 증세가 심하니 금방 폭주해 죽겠지.

그럼 그녀는 굳이 게이트를 열어서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나서지 않아도 됐다. 손을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었다. 차기주가 폭주하려고 할 때쯤 하늘로 올라가 폭발 위협으로부터 몸을 피하기만 하면 된다.

황지윤은 비서가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복도 벽에 기댄 채 지켜보다가 파트장실로 돌아갔다.

* * *

늦은 밤, 아버지는 딸의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갔다. 침대 밑에서 잠든 진설해를 한참 지켜보다가 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도저히 딸을 혼자 두고 죽을 수 없었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세상으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할 텐데도 이 질긴 목숨 뭐가 그렇게 아깝다고…….

숨을 죽이고 울었는데도 주름진 입술을 비집고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든 줄 알았던 진설해가 그를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아빠, 혹시 지금 나쁜 생각 했던 거 아니죠? 파트장님이 아빠 특별사면해주실 거랬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어떻게 용서받겠어. 이건 죽어야 끝나는 죄야.”

“왜 잘못도 없는 아빠가 죽어야 해요? 아빠까지 스스로를 죄인 취급하지 말란 말이에요!”

진설해가 이불을 걷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아버지에게 자길 버리고 떠나려고 한 화를 풀었다.

“나 두고 죽기만 해요. 나도 바로 따라가버릴 테니까. 하쿤도, 아빠도 이제 다 없는데. 내가 뭐 하러 살아요. 나도 확 죽어버릴 거야!”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어떻게 자식이 부모 앞에서 죽겠다고 해. 칼루팔릭이 바다로 데려간다!”

칼루팔릭은 이누이트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이었다. 바다에 사는 그들은 긴 머리에 녹색 피부, 긴 손톱을 가졌다. 부모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바다에 데려가 키운다는 전설이 있어서 아이가 말썽부릴 때, 부모가 겁주기 위해 언급하곤 했다.

이제 칼루팔릭 따위는 없다는 걸 알게 된 진설해였지만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북국의 괴물 이야기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시 눈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고래 뼈로 기둥을 세우고 천장에 잔디와 모래를 깔아 집을 지을 거다.

늑대를 동생처럼 키우며 썰매를 타고 설원을 다릴 거다. 자유롭게 눈밭을 가로지르며 순록을 사냥하고 싶다.

“기다려줘요. 제발 기다려달라고요. 차기주 이사가 특별사면 허락만 해주면 우리 다시 그린란드로 돌아가요. 파트장님이 가이드 퇴사할 수 있게 센터 규정도 바꿨어요. 나랑 아빠, 한국 떠날 수 있다고요.”

아버지는 딸의 바람과 같은 것을 바랐기에 그 말을 듣고도 자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다시 설원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그린란드에 가면 어떻게 살지 희망으로 가득한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곳으로 되돌아가봤자 정작 그리운 이들은 에스퍼들에게 살해당해 없는데 말이다.

활기 넘치는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던 그들은 끔찍한 과거가 떠올라 목소리에 점점 힘을 잃었다.

진설해는 다시 기운을 내기 위해 그린란드 설원에서 이누이트 꼬마 친구들과 했던 사냥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 기억나요? 내가 매번 미약스보다 물고기를 더 많이 잡았잖아요. 그런데 그 녀석이 분해하면서 나중에 크면 자기가 나보다 물고기를 더 많이 잡을 거라고 하는 거 있죠? 그러면서 만일 그럴 때가 오면 나보고 결혼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 생각난다. 네가 잔뜩 화냈잖아. 난 네가 미약스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때 왜 미약스의 청혼에 싫다고 대답했어? 너보다 키가 작기는 했어도 그만하면 미남이고 이글루를 얼마나 잘 만들었니.”

“맞아요. 미약스가 그린란드에서 제일 잘생기긴 했죠. 그땐 창피해서 그랬던 것뿐인데……. 안 그래도 요즘 종종 그냥 좋다고 말할걸 그랬나 후회해요. 나 바보 같죠?”

부녀는 그렇게 오래전 추억을 공유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창문으로 해가 떠오르고 나서야 진설해는 아버지가 자신이 모르는 사이 자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었다.

그녀는 긴장으로 딱딱하게 솟은 어깨를 내리고 희미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우리 수다 떨다가 밤새웠다. 아빠, 얼른 방에 들어가서 주무세요.”

“회사는 출근 안 해도 돼?”

“조금 늦게 출근하지, 뭐. 지각할 거면 확실히 해버릴래요.”

“그래. 그럼 조금이라도 눈 붙여.”

진설해는 핸드폰으로 알람을 다시 맞추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가 방을 나서는 아버지의 등을 보자 불안해져서 급하게 붙잡았다.

“나 자는 사이에 죽으면 안 돼요.”

“미안하다. 내가 정말 못된 마음 품었어.”

아버지는 절대 딸에게 죽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방문을 닫았다. 진설해는 안도하며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녀는 핸드폰 알람이 울리기 전, 초인종을 눌러대는 소리 때문에 얕은 잠만 자다가 일어나야 했다.

진설해의 눈 밑에 짙은 음영이 생겼다.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빗으며 현관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그녀는 대답이 없어서 외시경을 통해 문밖을 내다봤다. 검은 제복을 입은 에스퍼들이 서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문 여세요, 진설해 가이드.”

에스퍼들이 주먹으로 현관문을 쾅쾅 두드렸다. 그녀는 공황 상태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톱을 앞니로 물어뜯었다. 겨우 잠들었던 아버지는 자기를 붙잡으러 온 에스퍼들로 인해 과거 자신 때문에 죽어야 했던 늑대와 이누이트들을 떠올려버렸다.

그는 현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딸을 보며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문밖에서는 에스퍼들이 거칠게 문고리를 흔들었다.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소중한 늑대의 머리가 터지는 장면이 무한으로 반복되었다. 그리고 상상 속 늑대가 점차 딸의 얼굴로 변해갔다.

“제151조 범인 은닉과 친족간의 특례. 벌금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를 은닉 또는 도피하게 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진설해 가이드. 범죄자를 숨겨주는 것도 엄연히 죄입니다. 문 여세요.”

교도소에 오랫동안 있었던 아버지는 자기 때문에 딸도 징역살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에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오랫동안 세상을 망친 범인 취급받으며 망가진 자존감과 높아진 죄의식이 그를 부엌으로 이끌었다.

그는 딸과 약속을 해놓고선 식칼을 손에 들고야 말았다. 진설해는 문밖에 있는 에스퍼들을 신경 쓰느라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자기가 죽어야만 딸도 해방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식칼을 자신 쪽으로 겨눴다.

뾰족한 쇠붙이는 동물의 뼈보다 날카로웠다. 왼쪽 가슴에 식칼이 박혔다. 쿨럭. 기침이 나왔다.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들은 진설해는 뒤돌았다가 비명을 질렀다.

“아빠! 아빠. 아빠. 아니야. 아니야. 나랑 약속했잖아요. 고향으로 돌아가자며!”

그는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로 두려움에 가득한 딸의 얼굴을 바라봤다.

“Quna.”

마지막 숨결에 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 위로 눈이 쌓이는 듯한 추위를 느꼈다.

드디어 집에 돌아간다. 그는 하얀 눈밭에 서 있었다. 닌류 앞에서 늑대 하쿤이 그를 보고 반가운 듯 짖어댔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 눈에 반사된 햇빛에 피부가 탄 어린 소녀가 어서 오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진설해의 아버지는 그리웠던 추억 속으로 뛰어갔다.

그녀는 검은 양복을 입은 채 아무도 찾지 않는 장례식장에 앉아 있었다. 영정 사진조차 놓여 있지 않은 제단에 놓인 향로는 쉴 새 없이 향을 태워 올렸다. 국화꽃 향기 지독한 이곳, 그 어딘가에 정말 아버지의 영혼이 있을까.

차라리 안 계셨으면 좋겠다. 앙쿠타(*죽음의 신)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지하 세계에 가셨길 바랐다.

진설해는 자신의 손바닥을 하염없이 들여다봤다. 비누 크기만 한 오르골은 놀이공원에 가면 있는 회전목마를 본떠 만든 것이었다. 아무런 칠도 되어 있지 않은 오직 나무로만 이뤄진 오르골이었다.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작품이었다.

집에 놓인 아버지의 허름한 가방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옷 몇 벌과 담배 반 갑, 라이터, 자신의 사진. 그리고 회전목마 오르골. 고작 그게 그의 전 재산이자 이 세상에 남겨진 그의 흔적이었다.

어린 시절 헤어진 아버지는 교도소 안에서 어린 딸에게 선물해줄 오르골을 만들었던 듯했다. 조각칼에 손가락을 찔려가며 만들어냈을 이 오르골은 몇 번째 작품인지 모르겠으나 꽤 정교했고 작은 태엽을 돌리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그리운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 노래는 이누이트족 코퍼 지파의 전통 노래였고, 항상 걱정에 찬 이누이트에 관한 내용이었다.

겨울에는 신발과 바닥 창에 쓸 가죽을 구하느라 노심초사하고, 여름에는 순록 가죽과 바닥에 깔 모피를 구하느라 조바심을 낸다.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 얼음에 뚫어놓은 구멍 옆에서 기다릴 때는 물고기가 잡히지 않을까 봐, 설령 물고기가 낚싯바늘을 물어도 자신의 바늘이 약해서 도망칠까 염려한다.

잔칫집에 가서 춤을 출 때는 자신의 노래를 잊어버릴까 안절부절못하는 이누이트는 항상 걱정을 안고 산다.

마지막 구절에 가면 정말 인생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지 질문하는 가사가 나왔다. 그럼 여럿이 모여서 춤을 추며 부르는 노래인 만큼 다 같이 이렇게 답했다.

항상 힘든 일은 있었지만, 자신의 가슴은 아직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새벽이 밝아오고 태양이 하늘의 지붕 위로 올라오면 행복하다고.1)

아버지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 많았을 것이다. 궁금할 것도 많았을 것이고. 우린 앞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해야 했다. 이 짧은 노래가 그와 자신이 나눌 대화를 대신할 수 없었다.

진설해는 창백한 민낯으로 눈물을 흘렸다. 뉴스에서는 인류를 위험에 빠트린 범죄자가 죽었다며 좋아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사람들은 축배를 들고 역시 정의는 승리한다고 말하겠지. 그녀는 만일 신이 있다면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죄 없는 사람을 마녀사냥 해서 죄인으로 만든 그들이 과연 살 가치가 있을까. 만일 그녀에게 차기주와 같은 힘이 있다면 바로 이 지구상에서 인간들을 모조리 말살해버렸을 거다.

웅성거리는 소란이 사념에 빠진 자신을 깨웠다. 기자들이 장례식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병원 경호원들이 막아주고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이곳을 찍겠다며 밖에서 터지는 플래시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그 누구도 아버지를 위해 조문하러 와주지 않는다. 여기에 찾아왔다가는 자기까지 엮어서 인류의 적이 될까 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손바닥에 올려둔 오르골을 양복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구두를 신고 빈소를 떠나려고 하는데 검은 양복을 입은 황지윤이 오는 게 보였다. 진설해의 눈은 크게 떠졌다.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고였다.

“설해 씨, 많이 힘들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파트장님.”

“아니야. 당연히 부하 직원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와야지. 내가 휴가 신청 해뒀어. 장례 치르고 푹 쉬다 나와.”

황지윤이 조의금이 든 하얀 봉투를 진설해에게 건넸다.

“받아둬. 가이드 팀 팀원들이 낸 조의금 모았어.”

진설해는 돈 봉투를 움켜잡고 고개를 숙인 채 울었다. 황지윤이 그녀를 안아주며 등을 쓸어내렸다.

“하아, 진짜 속상하다. 차기주 이사가 특별사면만 허락해줬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급격하게 차기주에 대한 적의로 돌변했다. 진설해는 황지윤의 말에 갈 길을 잃고 분출될 줄 모르던 분노를 한곳으로 모을 수 있었다.

“그런 냉혈한이랑 수현 씨가 페어라니 너무 걱정된다니까. 수현 씨는 자기 에스퍼가 어떤 인간인지도 모르고 좋다며 지내니 원. 아휴, 나도 참. 이 와중에 이런 소리 해서 미안해.”

황지윤이 진설해를 안았던 팔을 풀며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진설해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황지윤은 금방 장례식을 떠났다. 그렇지만 황지윤이 던지고 간 씨앗이 진설해의 안에서 발아되기 시작했다.

“행복해? 감히?”

차기주는 행복해서는 안 됐다. 가이딩을 받지 못해 사지가 뒤틀리고 피를 토하고 내장이 녹아내려서 죽어야 했다. 진설해는 자신에게 모진 고문을 가하며 아버지를 교도소에서 빼줄 것처럼 굴었던 차기주를 떠올렸다.

그가 몸서리치게 싫어서 자꾸 도망쳤던 김수현에게 어서 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차기주가 김수현을 진짜로 사랑하는 게 아닌 가이딩 중독 증세에 걸린 것뿐이라는 걸. 그녀는 결단을 내리자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니 독기가 충만한 눈이 되었다. 거친 발걸음으로 걷다가 양복 재킷 주머니에 넣었던 오르골이 건드려졌는지 금속 편이 퉁겨지며 맑은 소리를 뱉었다.

<4권에서 계속>

미주

1) 이누이트족 코퍼 지파의 전통적인 노래, 류시화 옮김.

에스퍼×에스퍼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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