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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2) (9/17)

보이스(2)

센터에 구금 중인 제네시스 신도들로부터 메시아에 대한 정보를 수집 중인 차기주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건 메시아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신도들을 꾀어냈으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거였다.

메시아는 세뇌 능력을 가진 듯했다. 죽은 아내를 살려줬다는 광신도의 말에, 그의 집을 찾아가 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확인 결과 남자는 혼자 아내가 집에 있다고 믿으며 지냈던 것뿐이었다.

과연 메시아가 천사가 맞긴 한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인간에게 한없이 잔인한 그 존재가 천사라면, 그 천사가 모신다는 신은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마땅했다.

에스퍼들이 진실을 알려줬으나 광신도들은 믿지 않았다. 도리어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흔드는 사탄 취급을 받았다. 이미 단단히 홀린 그들에게 진실 따위는 상관없었다. 다만 메시아가 대학살을 계획 중이라면 그것을 막아야 했다.

도망친 천사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신도들이 메시아를 만났다는 장소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차기주는 신들의 몰락을 뜻하는 ‘라그나뢰크’에서 이름을 딴 TF 팀을 꾸렸다. 그들의 임무는 무사히 메시아를 사살하는 것이었다. 말만 거창하지 사실상 세뇌 능력을 가진 미친 에스퍼 하나를 잡는 거였다.

라그나뢰크 팀을 위해 마련된 사무실 벽에는 서울 시내 지도가 부착되어 있었다. 광신도들의 증언에 따라 붉은 압핀을 꽂았다. 행동반경을 파악하기 위해 압핀들을 붉은 실로 연결했다. 그러자 거대한 오망성이 보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가 월세를 살 거야, 전세를 살 거야. 호텔에나 머물겠지. 범위 따져서 서울에 있는 호텔 다 뒤져봐.”

“예, 알겠습니다.”

지도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차기주는 눈이 침침해 미간을 문질렀다. 손목을 확인하니 불안정 파동 수치가 올라가 있었다. 이왕 페어가 생겼으니 미리부터 컨디션 조절을 위해 가이딩을 받기로 했다.

사실 구차한 변명이고 그냥 그 핑계를 대고 김수현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는 팀원들에게 일을 맡겨두고 센터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감금 중이지만 워낙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김수현이 지금 있을지는 모르겠다.

철제 계단을 오르며 김수현이 이곳에서 쓰러진 차기주의 손을 잡아줬던 일을 떠올렸다. 구름 한 점 없어 푸른 바다 같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결국 자신도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목에 걸고 있는 사원증으로 징벌방 문을 열었다. 김수현이 있을 리 없다고 여겼는데 현관 앞에 운동화가 놓여 있었다. 벽에 기대앉은 채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느라 열중한 얼굴이 보였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김수현은 그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뿐인데, 차기주의 머릿속에 박혀 있던 김수현이 방탕하고 천박하다는 고정관념이 한 꺼풀 더 벗겨졌다. 김수현이 성실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뒤를 내주지 않는 건 아닌데 말이다.

“어? 왔어요?”

불쑥 방문한 차기주를 보고 마치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 김수현이 반겼다. 스케치북을 내려놓은 김수현의 손날은 연필에서 나온 흑연이 잔뜩 묻어 검었다.

김수현이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고 나왔다. 젖은 손을 수건에 닦지 않고 허공에 털다가 바지에 물기를 문질렀다. 그런 점이 엄마 말 안 듣고 놀이터에서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온 아이 같다고 생각해버렸다.

김수현이 핸드폰과 지갑을 챙겨서 청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직 점심 안 먹었죠? 저번에 얻어먹었으니까 이번에는 제가 살게요”

심장이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사람처럼 빠르게 뛰었다. 뱅글뱅글 회전하고 끝없이 올랐다가 아래로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요동에 차기주의 귀가 빨개졌다.

“와, 또 빨개졌네. 인정할게요, 내가 이사님한테 편견 있었다는 거. 첫 만남 때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허세 좀 부려봤어요.”

왜 허세라는 표현을 썼는지 그땐 몰랐다. 김수현은 그보다 나이가 한참 어려서 그런지 감정에 솔직하고 즉흥적이었다. 김수현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더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거 알아요? 이사님 가끔 귀여워지는 거.”

“못하는 말이 없군. 김수현 씨, 난…….”

“알아요, 우리 동갑인 거.”

나이를 착각했구나 싶어 알려주려고 입술을 달싹이는데 김수현이 먼저 선수를 쳤다.

“띠동갑! 얼른 가요. 나 배고파.”

낮에 오니 저녁때보다 레스토랑이 덜 붐볐다. 그들은 듬성듬성 비어 있는 테이블 중 가장 외진 자리에 앉았다. 왜 여기에 사람들이 없었는지 앉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나무 의자는 착용감이 좋지 못했다. 그래도 카페처럼 예쁘게 꾸며져서 사진을 찍기에는 좋아 보였다.

레스토랑 모서리에 놓아둔 커다란 몬스테라 두비아 화분은 잎사귀가 크고 가위로 엉성하게 오려낸 듯 특이하게 생겼다. 그 나무 때문에 온실 화원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창문에서 들이친 오후 햇살이 김수현의 뺨에 내려앉았다. 오렌지색처럼 따스한 빛은 긴 속눈썹의 음영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차기주는 속눈썹이 긴데도 전혀 유약한 오메가처럼 느껴지지 않는 저 알파가 얼마나 강인한 아름다움을 가졌는가, 속으로 감탄했다. 같은 우성 알파임에도 김수현과 차기주는 재질이 달랐다.

차기주는 날카롭게 날을 세운 칼날이나 뾰족한 창처럼 차가운 인상이라면, 김수현은 그 반대였다. 부드럽고 둥근데 깨지지 않는 견고함을 가진 돌 같으며 그 외모가 찬란하였다. 그리고 그가 아는 돌 중 가장 아름다운 돌은 다이아몬드이니, 그럼 김수현은 그 보석과도 같은 사람이거니 싶었다.

딱딱한 타일로 된 바닥에 구두 밑창을 딱 붙인 채 메뉴판을 기다렸다. 괴수 앞에서도 떨지 않았던 에스퍼는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청년 앞에서 긴장했다. 맞은편에 앉은 김수현이 냅킨으로 싸둔 포크와 나이프를 건넸다.

“고마워.”

낮이라 실내조명을 절반밖에 켜지 않았는데도 열기가 느껴졌다. 제 귀가 빨개진 줄도 모른 채 덥다며 넥타이 고리에 손을 넣어 밑으로 잡아당겼다. 검은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이 걸어왔다.

“메뉴판 보시고 메뉴 결정하시면 벨 눌러주세요.”

“이사님, 뭐 드실래요?”

식탁보 밑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인지 궁금했지만 굳이 허리를 숙여 식탁보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 메뉴판을 살폈다.

차기주는 곧 테이블 아래에서 난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건 신발 벗는 소리였다. 양말만 신은 발이 차기주의 바짓단을 살짝 걷어 올렸다.

발끝이 발목을 살짝 문지르더니 바지를 걷어 올렸다. 종아리뼈를 훑는 감각에 메뉴판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조금이라도 입술을 떼면 신음을 흘릴 것 같아 꾹 참았다.

“이사님, 사실 제가 결혼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거든요.”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된 알파가 결혼 압박에 시달리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재벌의 경우는 더욱 신중하게 정략결혼을 하지 않던가?

“아시죠? 저 재벌 아들인 거. 일종의 비즈니스 같은 거죠, 뭐. 그렇지만 난 자유로운 영혼이라 그런 거에 묶이고 싶지 않아요.”

차기주는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수려한 외모에 감탄하고 있는데 대뜸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냐고 물었지. 제대로 걷지 못하는 걸 걱정하니, 다리가 아니라 엉덩이가 문제라며 자기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 아냐고 자랑질을 해댔었고.

그 치기 어리고 허영심 가득한 말에 사람을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봤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그가 바람둥이일 거란 인상은 얼마 가지 못했다. 방에 홀로 앉아 진지한 얼굴로 그림을 그리는 걸 보고 나니 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이제는 자신이 아는 김수현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근거 없는 믿음마저 생겨버렸다. 뜬금없이 어디서 나온 믿음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차기주는 김수현이 아주 어설픈 연기를 한 것 같았다. 눈꺼풀을 가리던 편견이 떨어져 나가자 허풍을 떠는 애송이가 보였다.

김수현은 무언가에 잔뜩 겁먹고 있었다. 가끔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 것과 연관이 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다.

김수현이 허리를 테이블 쪽으로 숙였다. 차기주도 허리를 자연스럽게 숙여서 테이블 중간에서 그와 만났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귓가에 다가온 그가 속삭였다.

“알파랑 사귄다고 하면 끌고 가서 늙은 오메가랑 결혼시킬 것 같은데, 이사님은 보통 알파가 아니잖아요. 내 든든한 방어막이 되어줄 것 같다고 할까나.”

테이블에 올라간 차기주의 손을 김수현이 감싸듯 잡았다.

“참 이상해요. 난 내가 진설해 씨를 좋아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 정작 심장이 뛰는 건 이쪽인데.”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냐고 물을 수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이 너무나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진설해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데 심장은 차기주에게 뛴단다.

건실한 알파라는 건 역시 오해인 걸까? 이건 바람둥이만이 할 수 있는 양다리에 대한 합법적인 면죄부인 걸까?

32살이 되도록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그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가 사람의 감정을 알아가야 할 시간에 실험실에 갇힌 채 배가 갈려서, 전쟁을 명분 삼아 학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인간 병기로 굴려져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종업원이 따뜻하게 데운 모닝빵을 가져다줬다. 그들은 언제 바짝 붙어 앉았냐는 듯 상체를 뒤로 물렸다. 식당 안은 빵 굽는 고소한 냄새로 가득해 혀 밑에 저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김수현이 종업원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과 해물 샐러드, 트러플 오일을 넣은 매시트포테이토, 뉴질랜드 양고기 스테이크를 시켰다. 메뉴를 메모판에 적은 종업원이 등을 돌렸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천장 선풍기 바람에 김수현의 머리카락이 산들거리며 흔들렸다.

차기주는 그 순간 마치 자신이 버려진 땅에 피어난 들꽃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들꽃을 발견한 김수현에게 선택받은 것처럼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아, 나는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피어 있었던 거였구나.

이 감정의 동요를 숨기기 위해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센터 심문실에 갇혀서 고문받던 광신도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그들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세뇌에 빠져 메시아의 능력이 전부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전투 중 메시아가 차기주에게 했던 말이 그냥 폭언이 아닌 세뇌 능력을 사용한 것이었다면, 김수현과 가깝게 지내는 건 아주 위험한 짓이었다.

세뇌에 걸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지만, 정말 세뇌에 걸린 거라면 그가 김수현을 온전히 사랑하게 되는 순간, 김수현을 강간하는 참사가 일어날지도 몰랐다. 들뜬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때마침 김수현이 고른 음식들이 테이블에 올랐다. 복숭아뼈를 발끝으로 까딱거리며 문지르는 이 알파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김수현을 갖고 싶으나 가져서는 안 됐다. 그건 이기적인 애정이었다.

정말 사랑하면 상대를 위해 떠날 줄도 알아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이미 그른 것이란 생각이 들어 혀를 약하게 깨물었다.

수심이 깊은 줄 모르고 발을 들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별 볼 일 없는 관심인 줄 알았던 감정은 생각보다 아주 많이 깊었다.

이집트 남쪽에 가면 다합이라는 휴양지가 있다. 아름다운 바다 풍경으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곳이었는데, 특히 다이버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곳에는 블루홀이 있었기 때문이다.

블루홀은 해저 동굴이 붕괴했거나 해저 암석의 용해로 움푹 구덩이처럼 파여 만들어진 지점으로, 약 130m의 깊이의 심해인 그곳에는 처음 보는 고대어와 바다 식물이 살았다.

수많은 다이버는 블루홀에 잠수하길 원했다. 달에 착륙한 위대한 우주인의 첫걸음과 같이 다이버들에게 블루홀의 방문은 뜻깊은 무언가였다. 인간이 아주 오래전부터 미지의 영역인 우주를 알고 싶어 했듯 다이버들에게 있어 바다는 또 다른 하늘이었고, 그들은 탐험을 나서길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블루홀은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수심이 깊어지는 곳이었다. 북극의 오로라처럼 세상을 뒤덮은 아름다운 블루 커튼과 낯선 고대 생명체의 아름다움에 취해 자연을 만들어낸 신에게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을 땐, 이미 늦은 것이다.

이 아름다운 광경은 그들이 얼마나 깊이 내려왔는지 모르게 만들 뿐 아니라, 질소 중독을 일으켜 다이버에게 엄청난 에너지와 자신감을 선사했다. 그럼 용감해진 다이버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깊이를 가진 바다로 잠수해 들어가게 되고 그렇게 자기가 잠수할 수 있는 최고 기록을 경신한 순간,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폐가 찌그러지며 죽게 되는 것이었다.

다합 블루홀에 가면 바다로 들어가기 전, 암석에 120명이 넘는 다이버들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그 경고를 보고도 다이버들은 황홀경에 이르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

차기주는 블루홀에 뛰어든 어리석은 다이버가 된 기분이었다. 더는 김수현이라는 바다에 깊게 빠져들어서는 안 됐다. 적어도 메시아를 찾아내 이 세뇌를 풀기 전까지는.

“왜 안 드세요?”

포크에 새우를 꽂은 그가 물었다. 양고기가 담긴 접시를 앞으로 밀어주기에 고맙다고 인사했다.

“고마워. 잘 먹도록 하지.”

“그 노땅 말투 뭐예요.”

김수현이 기겁하며 꼭 자기 상사처럼 말한다며 학을 뗐다.

“내가 김수현 씨 상사지, 그럼 뭐라고 생각한 거야. 우리가 페어를 맺었다고 해서 너와 내가 동등하다고 여기진 마. 센터는 직급이 있는 회사야.”

그는 일부러 그들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이러면 보통 차기주에게 두려움을 느끼며 다음번에 만났을 때, 어색하게 굴곤 했으니까. 하지만 김수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냅킨으로 입가에 묻은 샐러드 소스를 닦아내고 그걸 테이블에 놔뒀다.

“내가 먼저 예의 없이 굴었어요. 미안해요.”

“……그러면 내가 속 좁은 사람 같잖아.”

정말 할 말 없게 만든다. 김수현은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알파였다. 요즘 애들같이 가볍게 굴다가도 어느 순간 드러나는 성숙한 모습에 사람 됨됨이가 괜찮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말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 때문에 가벼운 사람인 척 꾸며내는 건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문득 그가 무슨 사연을 가지고 이 센터에 감금된 척 연극을 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관심을 꺼야 하는데 자꾸만 궁금해지는 건 위험한 신호였다.

“안녕하세요. 혹시 두 분 어제저녁에도 오지 않으셨어요?”

차기주 이사와 페어 김수현을 알아본 종업원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든 채 다가왔다. 사실 어젯밤부터 세 사람이 한 테이블에 앉은 일 때문에 직원들 사이에서 이야기가 무성했다.

차기주 이사의 전 페어 가이드 진설해는 현재 김수현의 가이드였다. 그런데 김수현은 차기주 이사를 에스퍼 능력으로 가이딩해주는 페어 에스퍼다. 남편, 남편의 애인, 이혼한 아내. 이렇게 세 사람이 있는데 남편의 애인이 이혼한 아내와 사귀는 꼴이라는 말이다.

이만큼 막장도 없는 것 같은데 정조 관념이 없는 가이드와 에스퍼라 그런지 셋의 사이가 좋아 보였다.

“재방문 이벤트 중인데, 괜찮으시면 기념사진 찍어드릴까요?”

레스토랑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식사를 하던 사람들은 대화를 멈추고 차기주 이사가 앉은 테이블을 쳐다봤다. 김수현이 흔쾌히 찍어달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기주의 옆자리에 앉은 김수현이 간 크게도 차기주와 어깨동무했다.

“그럼 찍습니다. 하나, 둘, 셋.”

플래시가 터졌다. 서서히 백색 필름지에 색이 나왔다. 시간이 지나자 아무것도 없는 필름지는 사진이 되었다. 햇빛 좋은 창가 테이블에 앉은 차기주와 김수현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사진을 찍은 것과 다르게 무척 다정해 보였다.

“사진 잘 나왔네요. 이거 봐요.”

김수현이 보여준 사진을 보고 차기주는 욕심이 생겨 주먹을 말아 쥐었다.

“식사는 더 이상 안 할 것 같은데 이만 일어날까요?”

김수현이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코르크로 된 게시판에 사진을 압핀으로 꽂아두고 계산대로 향했다. 차기주는 재빨리 게시판에서 사진을 떼어내 양복 재킷 주머니에 숨겼다. 꼭 남의 것을 훔친 도둑처럼 심장이 뛰었다.

가져서는 안 될 걸 욕심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제 정말 그에게서 관심을 끊을 거니 괜찮을 거다.

* * *

차기주는 사진을 챙긴 이후, 한 번도 징벌방에 있는 김수현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시시때때로 김수현을 떠올렸다.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김수현이 떠오를 때면, 창밖 푸른 하늘을 내다보는 것으로 낮선 충동을 참아냈다. 블루홀에 빠져 죽는 다이버를 떠올리면 그리움쯤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적어도 더 깊이 빠져들고 있지는 않기에.

그렇지만 바다 날씨가 변덕스럽듯 차기주의 감정도 풍랑 위에 떠밀리는 조각배처럼 요동쳤다.

어느 날은 바다를 닮은 하늘을 보면 이 낯선 충동을 참을 수 있었고, 다른 날에는 똑같은 하늘을 보고도 계단을 기어서 오르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귀를 만졌던 김수현의 맑은 웃음소리가 떠올라 참을 수 없었다.

차기주는 멈췄던 서류 작업을 이어나갔다. 종이가 손가락에 사락사락 감길 때마다 부드러운 김수현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는 결국 참다못해 손에서 서류를 내려놓았다.

어차피 붙잡고 있어도 집중되지 않아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딱 한 번만 보고 오자. 딱 한 번만. 그는 김 비서에게 김수현의 행방을 물었다.

“김수현 씨라면 산책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왜 그러세요, 이사님. 호출할까요?”

차기주는 안경 안에 가득한 김 비서의 의아함도 보지 못할 만큼 다급한 발걸음으로 이사실을 벗어났다. 한번 얼굴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으니까 그동안 어떻게 참았나 싶은 정도로 보고 싶어졌다.

다급하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속으로 눌렀다. 구두로 바닥을 탁탁 두드리며 기다리다가 그 짧은 기다림도 참지 못해 비상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쿠다당탕. 쫓아오는 건지, 쫓기는지 모를 발걸음 소리가 비상계단을 가득 메웠다. 차기주는 1층에 내려오고 나서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시치미 뚝 떼고 특유의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센터 건물을 벗어났다.

잘 꾸며진 정원에는 수많은 에스퍼와 가이드가 봄을 즐기기 위해 산책을 하고 있었다. 차기주의 눈은 바삐 움직이며 오직 한 사람만을 찾았다. 햇볕이 강렬한 오후 2시, 김수현은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태양이 오직 저 알파만 비추기 위해 존재하는 조명처럼 느껴질 만큼 햇살 아래 있는 그가 특별해 보였다. 이 얼마나 멍청한 착각이란 말인가.

그는 파릇파릇한 까까머리처럼 돋아난 잔디 위에 피크닉 담요를 깔고 앉아 있었다. 김수현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땀이 흘러 등에 달라붙은 셔츠 때문에 김수현의 속살이 살짝 비쳤다.

그의 머리 위에 떨어진 분홍색 벚꽃 때문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귓가 근처에 떨어져서 그런지 마치 귀에 꽃을 꽂아놓은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잘생긴 외모가 더욱 돋보였다. 이렇게 사람을 홀려 얼마나 많은 아무개의 짝사랑 대상이 되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차기주는 거침없이 그가 있는 쪽으로 접근했다가 코앞에 도달하고 나서야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얼마나 김수현에게만 집중하고 있었으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전 페어 가이드를 못 볼 수 있단 말인가.

“이사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건 차기주가 진설해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피크닉 담요에 펼쳐놓은 도시락에는 귀여운 곰돌이 틀에 넣고 찍어낸 주먹밥과 계란말이, 문어 모양으로 자른 소시지가 담겨 있었다. 아기자기하고 정성이 담긴 요리였다.

벚나무 밑에 앉아 있어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분홍색 꽃잎이 휘날렸다. 도시락 안에 떨어진 꽃잎에 시선을 주다가 그는 진설해에게 되물었다.

“진설해 씨는 여기 어쩐 일입니까.”

고작 같이 도시락을 먹는 것뿐이다. 김수현은 그에게 가슴이 뛴다고 했다. 그러니 이건 평범한 식사일 터였다. 차기주도 가끔 김 비서와 사내 식당에서 급식을 받아먹었다. 둘의 경우가 엄연히 다르지만 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어쩐 일은요. 내 페어 에스퍼와 데이트 중이지.”

하늘에 뜬 구름이 흐르면서 잠시 태양을 가렸다. 환했던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 잠깐 사이에 온도가 급격히 떨어질 리 없는데 차기주는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모자라 신경은 땅에서 말벌이 기어 나와 윙윙 벌침을 쏘아대는 것처럼 예민해졌다.

구름이 드디어 지나갔다. 세상은 다시 밝아졌다. 그 찰나의 순간이 차기주에게는 더없이 길게 느껴졌다. 차기주는 햇살이 눈부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여기고 싶었는지 모른다.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그저 눈이 시린 것뿐이라고.

“이사님, 용건 없으시면 저희끼리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진설해는 차기주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가이드이자 오메가인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기 알파를 탐내는 자를 알아본 것이다.

차기주는 자신이 그 말에 뒷걸음질 쳤다는 걸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구두에 밟혀 납작 눌린 풀이 일어서지 못했다.

“남 데이트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눈치껏 빠져주시겠어요?”

그가 자리를 피하지 않자 진설해가 더욱 노골적으로 그를 내쫓으려고 했다. 차기주는 이게 이렇게까지 타격받을 만한 일인가 싶었다. 페어가 다정하게 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차기주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 스스로가 그렇게 지내본 적이 없었을 뿐이지. 그걸 정말 다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사이라는 것이, 마치 배신당한 것처럼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풀벌레 울음소리, 넓은 잔디밭에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의 수다가 모조리 음 소거되었다. 삐이이.

주전자가 끓어올라 뜨거운 김을 주둥이로 뿜어낼 때 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는 떨어지면 죽을지도 모르는 높은 폭포에 친구와 함께 구경을 갔다가 등이 밀쳐지는 배신을 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눈이 김수현을 향했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차기주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응축되어 있었다. 김수현은 그 눈을 보고도 차기주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데이트를 하고 있는 게 맞았고, 그들에게 있어 차기주는 무려 두 번이나 그것을 방해하려고 한 방해꾼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래, 설해 씨, 수현 씨랑 잘 놀다 들어가.”

차기주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수백 개의 바늘이 꽂힌 듯 아파오는 마음과 달리, 목소리가 전혀 흔들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러지 말고 이사님도 같이 꽃놀이해요.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이대로 아무 말 안 할 것 같았던 김수현이 돌연 차기주를 붙잡았다. 진설해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서운한 티를 냈다. 차기주는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구두를 정갈하게 벗어두고 피크닉 담요에 걸터앉았다.

윤택이 흐르는 질 좋은 검은 구두 위로 분홍색 꽃잎이 떨어졌다. 차기주는 자신을 향한 김수현의 시선을 느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차기주의 귀가 있었다.

부끄러워진 차기주가 손으로 가리려고 하니까 김수현이 “보기 좋아요”라고 말하며 둘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게 무엇인지 빼고 말했다. 진설해는 모르는 그들만의 추억이 있다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좋았다.

유치하면서도 추한 질투였다. 진설해는 두 알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끊어내고자 도시락에 있는 문어 모양 소시지를 이쑤시개로 찍어서 차기주에게 내밀었다.

“이사님, 드세요.”

차기주는 이쑤시개를 뱅뱅 돌리다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소시지를 입에 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눈앞으로 단정한 손이 뻗어왔다. 슬쩍 눈을 치켜들어서 보니 김수현이었다.

마치 그때처럼 귀를 만질 듯 다가오는 손길에, 차기주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벚꽃 향기 때문에 달짝지근하게 느껴지는 건지, 같은 알파라면 불쾌해야 할 김수현의 페로몬이 달갑게만 느껴졌다.

여름에 푸른 기와로 된 처마 아래 앉아 수국이 잔뜩 피어난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맑은 하늘에 여우비가 쏟아져 따스한 햇볕과 시원한 비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날씨 속에서 짙어진 꽃향기를 맡는 기분이었다.

“꽃잎이 묻어서요.”

자신의 말랑한 귓불을 만질 것처럼 굴었던 손가락에는 분홍색 꽃잎이 달라붙어 있었다. 차기주는 자신이 한 착각이 창피해 더욱 귀를 붉혔다. 타오를 듯 붉어지는 차기주의 귀를 바라보던 김수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귀를 덥석 잡아버렸다.

“하, 진짜 이 아저씨 때문에 돌아버리겠네.”

김수현이 내뱉은 묵직한 한 문장이 마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진설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 이상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탓이었다. 차기주는 벚나무 그늘 밑에 김수현과 둘만 남겨지게 되었다.

잔뜩 화가 나 돌아갔으니, 김수현과 진설해의 페어가 깨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김수현은 자신이 작은 충동을 이기지 못해 차기주의 귀를 만진 걸 후회하지 않았다.

“이사님도 이만 인정하세요. 나한테 끌리죠?”

차기주는 그러면 안 됐다. 아직 메시아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세뇌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김수현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만 뻐끔거려질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당황해서 목을 손으로 감쌌다.

“왜 그래요?”

‘사실 난 지금 세뇌가 걸려 있어서 널 사랑하면 안 돼.’

그는 몇 번이고 이 말 한마디 내뱉기 위해 기를 썼다. 아닐 거라고, 그냥 오해일 수도 있다고 여겼던 세뇌 사실이 결국 진실로 밝혀졌다. 답답한 마음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혹시 나 혼자 착각한 거예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만약 차기주가 김수현을 사랑한다고 인정해버리면, 그는 김수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이다. 그 백발의 천사만 찾으면 세뇌를 풀 수 있을 텐데 그전까지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어서 답답했다.

지금 그는 바다에 빠진 왕자를 구해주고도 목소리를 잃어서 정체를 밝힐 수 없었던 인어공주와 같은 마음이었다.

“아, 씹. 쪽팔리네. 미안해요. 방금 한 말은 잊어요.”

김수현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바람에 뒤엉킨 것처럼 부스스한 머리를 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갈게요.”

얼마나 다급하게 가는지 운동화 뒤축을 꺾어 신은 채 자리를 떴다. 차기주는 피크닉 담요 위에 차갑게 식은 도시락과 함께 남겨졌다. 여전히 꽃비는 아름다운데 그는 이 휘날리는 꽃잎 속에서 사랑을 놓쳤다.

그게 맞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의 감정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눈에서 빛이 사라진 차기주는 정갈하게 벗어둔 구두를 신지도 않은 채 김수현을 쫓아갔다.

욕심을 버리고 진설해와 잘되라고 응원해주려고 했건만, 김수현의 순진한 고백에 그에 대한 사랑이 폭주해버렸다.

천사가 건 저주가 차기주의 몸을 지배했다. 손가락 하나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다가 가위에 눌린 듯 몸이 말을 듣지 않는데 제멋대로 팔이 나갔다.

김수현은 밝은 표정으로 차기주를 뒤돌아봤다가 그대로 머리채를 붙잡혔다.

“악! 아파. 이사님, 이게 무슨 짓이에요.”

‘수현아, 내가 드디어 널 사랑하나 봐. 내 감정인데 내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그 천사가 건 저주가 이렇게 알려주네.’

차기주가 난폭하게 김수현의 머리채를 붙잡고 끌고 가는 모습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거친 손길에 머리카락이 몇 가닥 뽑혀 나간 김수현은 아파서 그 손을 떼어내려고 했으나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에스퍼라는 차기주를 멈출 수는 없었다.

김수현은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어졌다. 차기주는 자꾸만 자신의 손을 쳐내려는 김수현의 뺨을 때렸다. 커다란 손에 맞은 뺨이 붉어졌다. 금세 김수현의 코에서 코피가 흐르고 맞은 입가가 찢어졌다.

“살려주세요. 이거 놔요. 제발요.”

김수현이 아무리 애원해도 차기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엘리베이터 계기판에 숫자가 변하는 것만 지켜보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김수현을 끌고 나갔다. 철제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차기주는 징벌방 문을 열자마자 김수현의 목에 걸려 있던 사원증을 빼앗았다. 좁은 공간도 아닌 그곳은 김수현의 비명으로 채워졌다. 차기주는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해 속으로 피눈물을 쏟았다.

차기주는 김수현의 구멍에 좆을 밀어 넣는 순간, 깨달았다. 김수현은 그냥 방탕한 척 허세를 부렸던 거였다.

차기주는 그가 첫 만남에 부상을 숨기기 위해 한 거짓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김수현이 얼마나 자존심 강한 알파인지도 알아차렸다. 이런 그를 강간했으니 그들의 미래에는 파국밖에 없을 게 분명했다.

천사는 차기주에게 진정한 복수를 이뤘다.

* * *

차기주는 김수현이 이번에는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에 급한 일도 제쳐두고 징벌방으로 달려갔다. 센터에 있는 의사들이 상처를 꿰맨 손목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 벌써 5번째 자살 시도였다. 이번엔 싱크대 하부 장에서 가위를 꺼내 손목을 그었다고 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제 손목을 그었다는 사실에 몹시 분노했다. 김수현은 손목이 화가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김수현에게 분노하기보다 메시아의 세뇌를 이겨내지 못하고 김수현을 이렇게까지 몰아간 스스로가 증오스러웠다.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김수현의 미소가 그리웠다. 왜 그땐 몰라봤을까. 김수현이 그토록 자신에게 호감을 표했던걸.

미움을 받고 나서야 김수현이 얼마나 차기주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한때 같은 마음이었을 테다. 그는 양복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언제나 넣고 다니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손으로 박살 낸 미래를 안타까워했다.

기념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종업원의 말에 선뜩 옆자리에 왔던 김수현이었다. 김수현이 차기주의 옆자리로 와서 사진을 찍어줄 일 따위, 이제 다시는 없을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역겨우니까 그 상판 치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여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차기주는 거칠게 넥타이를 잡아당겨 교수형에 처하는 죄인처럼 스스로의 목을 조였다.

‘제발 말해. 모든 게 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말하라고.’

졸린 목으로 숨만 컥컥거렸다. 끝내 세뇌는 풀리지 않았고 그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김수현이 자신에 대한 분노로 삶의 의지를 놓지 않게 못된 말을 쏟아낼 뿐.

“네가 그런다고 내가 풀어줄 것 같아?”

“뭐래, 미친 새끼가. 네가 안 보내준다고 내가 못 나갈 것 같아?”

김수현은 붕대가 감긴 손으로 차기주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순순히 자신을 깔고 앉아 목을 조르는 손길을 받아냈다.

“죽어! 이 더러운 강간마 새끼야, 죽어!”

‘너의 손에 죽을 수 있다면 행운일 거야.’

차기주는 눈을 감았다.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않고 싶었으나, 다친 김수현의 고통 어린 신음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차기주는 세상에서 자신을 제일 증오하는 알파를 사랑했다. 그는 넥타이가 목줄이라도 된 것처럼 잡아당겨 김수현의 다치지 않는 손에 쥐여줬다.

“힘껏 당겨봐. 계속하다 보면 죽일 수도 있겠지.”

“흐으윽, 흑. 흐으.”

김수현은 손에 쥔 넥타이를 당기는 대신 울음을 터트렸다.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리며 한없이 연약한 모습으로 주저앉았다.

“왜 그랬어. 왜. 도대체 왜 그랬어, 이 나쁜 놈아.”

‘내 심장을 너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 심장은 너를 향해서만 뛰어, 수현아. 이걸 보면 넌 내 사랑을 알아줄까?’

지금의 그가 김수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은 김수현에게 있어 그저 농락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그건 메시아에게 목소리를 빼앗긴 그가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진심이었다.

차기주를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하는 김수현은, 그 증오심을 원동력 삼아 살아갈 것이다. 비록 이 방식이 그들 사이를 더욱 악화시킬지라도 그는 괜찮았다. 김수현이 살아만 있어준다면.

처음 김수현과 잤을 때, 차기주는 놀랍게도 회귀 전의 기억을 되찾았다. 기억 속 김수현은 에스퍼 팀의 팀장으로서 멋지게 임무를 수행해냈다. 센터 에스퍼들은 아직 나이가 어린 김수현을 동경하며 몹시 따랐다.

차기주와 김수현은 첫 번째 생에서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그들은 능력 무효화가 가이딩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아주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차기주는 김수현을 밀어냈고 김수현은 자기가 밀린 만큼 차기주를 당겼다.

결국 항복한 건 차기주였다. 그는 진설해와 페어를 깨고 죽을 각오로 김수현의 연인이 되었다. 기적처럼 김수현의 능력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어서 이제 마음 놓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찰나의 행복을 뒤로한 해, 김수현이 집에서 자살해버렸다. 차기주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한 유언만 남긴 채.

그는 김수현을 사랑한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미움보다 김수현이 자신 때문에 자살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차기주는 제 가슴을 갈라 심장을 뜯어냈다. 김수현을 잃었으니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제 심장을 스스로 터뜨려 자살했다.

어째서 이 세상의 시간이 거슬러 올라갔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우리의 관계가 그때보다 더 최악이라는 것밖에…….

이전 생에서는 메시아라는 존재가 없었다. 두 번째 생에 접어들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걸 보면 회귀는 그놈과 관련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찾으면 다시 시간을 되돌려달라고 할 셈이었다. 그래서 김수현을 강간하기 전으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붉은 꽃다발을 들고 언젠가 용기가 없어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전할 거다.

“사랑해서 그랬어.”

천사는 영악했다. 천사가 건 세뇌를 들은 것은 차기주뿐이었고, 자신은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으니 그 누구도 김수현에게 차기주의 사정을 전해줄 수조차 없었다. 그가 천사에게 저주받았다는 건 오직 차기주만 아는 비밀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김수현에게 사랑을 고백해봤자 상대를 기만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다. 참 완벽한 덫에 빠졌구나 싶었다. 김수현은 차기주로 인해 점점 망가져 가는데 김수현을 향한 그의 사랑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김수현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헛소리하지 마, 이 더러운 새끼가.”

김수현의 성격이 만만치 않은 탓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차기주는 손으로 침을 훑어 내렸다. 그러곤 김수현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매트리스 위에 내던졌다. 그가 괴물이 되는 순간은 대중잡을 수 없었다. 이성의 통제를 잃은 육체가 날뛴다.

차기주는 울음과 비명이 섞인 공간 속에서 그 자신이 끔찍한 괴물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을 저주한 천사를 잡으면 반드시 찢어 죽이겠노라 다짐했다.

* * *

“이사님, 이런 식으로는 메시아 절대 못 찼습니다.”

광신도들이 메시아를 만난 장소를 뒤져봤으나 그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혹시 우리 쪽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건가 의심될 만큼 메시아는 그의 손아귀로부터 쏙쏙 빠져나갔다.

차기주는 어떻게든 망가진 김수현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에 초조했다. 메시아란 존재가 정말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이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든, 세뇌로 사람 머리를 가지고 놀든. 다 좋으니 반드시 찾아내 지금의 그 자신과 김수현, 그들의 관계를 원래 대로 되돌릴 거다.

“그럼 미끼를 던져. 물고기가 안 물면 물 때까지 낚싯대를 던져야 할 거 아니야. 절대 못 찾긴 왜 못 찾아. 그럼 어쩌려고. 이대로 그 천사가 인류를 멸망시킬 때 어디 있었냐고, 한참 찾아다녔다고 말하게?”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한다는 걸 알면서도 차기주는 성난 걸 참지 못했다. 어차피 가이딩 중독으로 김수현을 감금하고 강간 중이라는 소문이 도는 마당에, 이미 바닥 친 이미지가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제네시스 신도가 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연기하며 교회 위주로 미끼 뿌려. 하나는 물겠지.”

“예, 알겠습니다.”

정석훈이 고개를 숙였다. 교회에 보낼 미끼를 준비하기 위해 TF 팀 사무실을 나섰다.

* * *

나무로 된 긴 예배 의자는 기름을 먹인 듯 반들반들 잘 닦여 있었다. 멀리서 보면 도미노를 세워둔 것처럼 빼곡하게 교회 안을 채운 예배 의자에 누워 있던 메시아는 색색의 유리 조각들로 천사들을 그려놓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바라봤다.

햇빛이 실내에 들이칠 때면 바닥에 천사들이 빛 그림자로 어룽거리며 마치 지상에 강림한 것처럼 맺혔다.

메시아는 저 천사 중 루시펠, 자신도 있겠지 하며 구경했다. 배 위에 포도가 담긴 그릇을 올려놓고 수달처럼 과일을 따 먹고 있는데 이 교회 신도인 듯한 사람이 들어왔다.

“신이시여, 이 타락한 인간의 원죄를 깨끗이 씻으시어 심판의 날, 저를 인도해주소서.”

제네시스의 교리와 일치하는 기도였다. 방만하게 누워 있던 메시아는 배에서 포도 그릇을 치웠다.

“안녕, 너 혹시 구원받고 싶어? 난 신께 인간의 원죄를 씻어내라는 임무를 받고 지상에 내려온 천사야. 메시아라고 불러.”

신도가 그를 돌아봤다. 메시아는 이 특별한 외모가 인간들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알아 굳이 자신의 날개를 꺼내지 않았다.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어디선가 들려온 섬뜩한 목소리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메시아는 재빨리 뒤돌았다. 차기주가 예배당으로 들어서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메시아는 그에게 팔이 뜯겨나가고 배가 뚫려 내장이 뽑힌 경험이 있어서 무서웠다. 어쩜 신께서는 저런 큰 실수를 저지르신 걸까.

완벽한 그분께서 차기주와 같은 끔찍한 오점을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오류를 바로잡고자 자신이란 존재를 내려보내신 것이겠지만. 그와 자신의 힘에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었다.

메시아는 날갯죽지에서 날개를 꺼냈다. 입고 있는 티셔츠의 등 쪽이 찢겼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차기주에게 그는 한주먹 거리도 안 됐다. 지금 당장 도망쳐야 했다.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려고 했는데 신도인 줄 알았던 에스퍼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사슬을 만들어냈다.

“으,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발목에 사슬이 감겨서 교회 천장 높이 날아오르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사슬로 메시아를 잡은 에스퍼가 또 다른 사슬을 꺼내 들었다. 에스퍼는 이번에 메시아의 날개를 붙잡았다.

“안 돼. 날개는 건드리지 마!”

목숨처럼 소중한 날개였다. 힘의 원천이라 다치면 잘 낫지도 않았다. 메시아는 바로 날개를 날갯죽지에 숨기고 땅으로 떨어졌다. 1미터나 되는 높이에서 예배 의자 위로 떨어져 피부가 찢기고 뼈가 어긋났다.

“으, 윽. 아파.”

차기주는 추락한 메시아에게 다가가 그의 눈알을 바로 손가락으로 파버렸다. 세뇌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끔찍한 비명이 목사의 설교가 웅장하게 퍼지도록 설계된 교회 안을 울렸다. 메시아는 손으로 텅 빈 눈을 감싸고 피눈물을 흘렸다.

“야, 네가 나한테 건 세뇌 능력 때문에 내가 아주 좆 됐거든.”

“뭐, 설마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생긴 모양이지? 아하하. 재미있네.”

메시아는 고통에 찬 와중에도 차기주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그에게 죽을 만큼 미움받았을 거란 생각에 더없이 즐거워졌다.

“이딴 새끼가 무슨 천사라고.”

차기주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제작한 M-7 군용 대검을 꺼내 M16 소총에 끼웠다. 총과 칼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어서 에스퍼를 고문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무기였다. 날붙이의 길이가 25cm밖에 되지 않았던 군용 대검은 소총에 장착되어 공격 길이가 늘어났다.

“퇴근해.”

“예, 수고하십시오.”

미끼로 사용된 에스퍼는 차기주에게 꾸벅 인사를 올리고 예배당 문을 닫고 갔다. 차기주는 눈을 회복한 메시아가 눈두덩에서 손을 내리자마자 한 가지 게임을 제안했다.

“메시아, 만일 네가 5분 동안 여기서 벗어날 수 있으면 널 그대로 놓아주지.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넌 나한테 건 세뇌를 풀고 내 소원을 들어줘야 해.”

“흥, 내가 왜 네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데. 싫어.”

메시아는 차기주가 정말 싫었다. 인간계에 내려와 배운 내기와 도박은 좋았지만, 그것도 차기주와 하는 거라면 하고 싶지 않았다.

“넌 나와 이 게임을 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난 지금 당장 널 죽여버릴 테니까.”

꿀꺽. 하얀 피부를 가진 천사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차기주는 메시아가 말귀를 알아들었다고 생각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

술래잡기가 기습적으로 시작되었다. 메시아는 차기주와 거리를 벌린 다음, 날아서 창문을 통해 달아나려고 했다. 그런데 차기주가 팔을 쭉 뻗어 군용 대검으로 메시아의 어깨를 찔렀다. 메시아의 고통 어린 신음에 차기주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 * *

메시아가 감정에 휘둘려 차기주에게 이메일을 보낸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발신 전용 메일이라 할지라도 평범한 사람이나 추적 못하지 차기주처럼 커다란 단체의 수장으로 있는 존재에게는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알리는 짓과 다름없었다.

메시아가 이메일을 보낼 때 사용한 핸드폰의 정보 또한 손에 넣었으므로 이동 또한 언제든지 추적할 수 있었다. 차기주는 메시아가 있는 곳을 가리키는 GPS를 보고 차를 몰았다.

오래된 교회 주차장으로 낯선 자동차가 들어섰다. 메시아는 자동차 바퀴에 자갈이 튀는 소리를 듣고 새로운 신도가 왔나 나가봤다가 차기주를 보고 식겁했다.

회귀하기 전 그들은 이 교회에서 만났었다. 자기한테 건 세뇌를 풀라며 자신의 몸을 난도질했던 차기주를 떠올리니, 멀쩡한 사지가 괜히 아파오는 것 같았다. 메시아는 어깨를 손으로 감싼 채 벽 뒤에 숨었다.

재빨리 김수현에게 ‘1004’ 번호로 문자를 보내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렸다. 김수현이 있으면 차기주는 메시아를 무자비하게 고문할 수 없었다. 그는 재수 없게도, 김수현 앞에서는 내숭쟁이가 되었으니까.

[김수현 씨가 찾는 선배가 어디 있는지 말해줄게요. 당장 오세요.]

양복을 입은 차기주의 손에는 총도 칼도 없었지만, 메시아는 알았다. 저놈은 그 손이 곧 무기라는 걸. 그는 수틀리면 상대의 팔을 뜯어내고 눈알을 파냈다. 배를 가르고 내장을 뽑아내 입에 쑤셔 박으며 왜 안 죽냐고 조롱하기도 했다.

두려움이 허리 아래로 내려왔다. 모양 빠지게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렸다. 메시아는 자신을 고문하러 온 사신을 맞이했다. 어차피 도망갈 수 없었다. 자신이 여기 있는 걸 알고 왔을 텐데, 차기주 같은 놈이 제 사냥감을 놓칠 리 없지 않은가.

교회 구석에서 벌벌 떠는 메시아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멈춰 섰다. 차기주는 구두로 툭툭 메시아의 발을 찼다.

“우리 오랜만이지.”

“……으흐, 으.”

메시아는 차기주에 당한 고문들이 떠올라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 당겼다. 차기주가 그런 메시아의 행위를 돕겠다는 듯 하얀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너만 입 닫으면 수현이가 회귀 전 일을 어떻게 알겠어. 그렇지?”

“넌……. 넌…… 날 죽일 수 없어.”

“아니, 난 널 죽일 수 있어. 지금의 난 세뇌에 걸려 김수현을 강간하지도 않았고 이 자리에서 널 죽이기만 하면 앞으로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으니까. 깔끔하게 끝내줄게.”

차기주가 메시아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다섯 손가락이 목을 부러트리기 위해 오그라졌다. 메시아는 숨이 꺽꺽 넘어가면서도 겨우 “김수―”라고 말할 수 있었다. 김수현에 대해 무언가 말하려는 메시아로 인해 차기주는 잠시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메시아는 미친 듯이 기침을 뱉다가 겨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김수현이 여기로 오고 있어. 내가 죽으면 범인은 너라고 했어.”

“……하, 수현이가 왜 널 만나러 와. 이게 돌았나. 둘이 언제부터 연락했어?”

차기주는 메시아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걱정이 되긴 했다. 그는 괴수를 죽이는 에스퍼이지 살인마가 아니었다. 메시아는 사람이 아니지만 생긴 건 똑같으니 혹 그 장면을 목격하면 오해할지도 몰랐다. 인류에 나타난 괴수 중 가장 아름다운 괴수의 이름은 천사였고, 그는 그런 존재를 자신이 죽였을 경우, 김수현에게 어떻게 보일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도 언젠가 널 죽여야 해. 인류를 멸망시키겠다며. 신께 받은 임무는 변함없은 거 아니야.”

메시아는 위기를 넘기기 위해 차기주의 눈을 들여다봤다.

“너는…… 이아아아.”

차기주는 세뇌에 걸리지 않기 위해 손가락으로 다시 메시아의 붉은 눈을 파냈다. 메시아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느라 예배 의자에 부딪히다가 넘어졌다. 차기주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의 뒤에 섰다.

“한 번 당했는데 두 번은 안 당하지. 내가 바보도 아니고.”

하얀 얼굴과 머리칼 때문에 피를 흘리자 온몸에 피 칠갑을 한 것처럼 보였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가린 메시아는 차기주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너 같은 새끼는 결국 수현이한테 버림받을 거야. 수현이는 날 사랑할 테니까.”

“무슨 개소리야.”

차기주는 코웃음을 치며 약해 빠진 메시아의 뺨을 부러 손등으로 기분 나쁘게 때렸다.

“이게 무슨.”

경악하는 목소리가 뒷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당황한 차기주는 예배당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수현의 눈은 피로 온통 물든 메시아를 향해 있었다. 그는 불에 덴 사람처럼 피 웅덩이에서 떨어졌다. 그래봤자 메시아를 이렇게 만든 범인은 차기주라는 결론만 나오는데 말이다.

메시아는 김수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현아, 왔구나.”

김수현은 자신을 친한 척 부르는 메시아를 경계했다. 신체 회복 능력으로 눈알이 다시 생긴 메시아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눈을 떴다. 새로운 눈으로 제일 처음 본 상대가 이토록 아름다운 알파라니.

아픔이 가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든 해괴망측한 몰골로 메시아는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노트를 아공간에서 소환해냈다. 그를 선배로 만들어줄 증거를 다람쥐를 통해 차곡차곡 모아 조작했다.

“이거 읽어봐. 난 네가 찾던 선배야. 너와 난 사랑하는 사이였어. 내가 널 만나러 옥탑방에 올랐던 거 기억하지?”

차기주는 본인 앞에서 사칭을 하는 간 큰 메시아를 보고 어이가 없어졌다. 그나저나 몰랐던 사실이다. 김수현이 세뇌당했을 당시를 기억해 자신을 찾아다녔다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기억이 온전하지는 못한 듯했다.

차기주는 혹시 선배라는 단서를 통해 김수현이 회귀 전의 모든 일을 기억해낼까 봐 심장이 조여들었다.

메시아가 피에 젖어 붉게 물든 얼굴로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차기주가 스스로 선배임을 밝히지 못할 걸 아는 거다. 그는 저 사악한 존재가 정말 천사인가 의심스러웠다.

진실을 말하지 못한 채 이대로 손 놓고 메시아에게 김수현을 빼앗길까 봐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제 정체를 말했다가 김수현이 나중에 이전 생을 온전히 기억해내면 모든 게 엉망이 될 터였다. 차기주는 김수현이 회귀 전 세뇌로 만들어낸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미칠 것 같았다.

김수현이 완전히 기억을 찾으면 차기주는 버림받을 게 분명했다. 그들은 다시 원수가 될 거고, 김수현은 앞으로 제게 영원히 웃어주지 않겠지. 죄인의 고개는 한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김수현은 메시아로부터 노트를 받아서 꼼꼼히 읽었다.

그 안에 담긴 증거들은 김수현의 기억과 놀랍도록 일치했다. 한두 가지만 맞는 게 아니라 여러 개라 의심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니 메시아는 그동안 찾았던 선배가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수현에게는 갑자기 러트가 찾아와 화장실에 갇힌 알파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차기주와의 기억 또한 또렷이 존재했다. 그의 사랑을 쟁취하고자 심장을 사포로 긁어내는 듯한 고통을 견뎠었다.

김수현의 눈은 자길 선택할 거라는 기대로 환하게 웃고 있는 메시아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향해 뻗어진 피에 물든 손을 붙잡지 않았다.

첫 번째 생에서 함께 영화를 보다가 파스타를 먹고 키스했던 연인이 옆에 있었다. 자신은 전혀 선택받지 못할 것이라고 단념한 사람처럼 고개 숙인 차기주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 이 상황 설명이 필요한데 이사님 나한테 말해줄 수 있어요?”

“……아니.”

차기주는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피했다. 꼭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엄마에게 혼나고 싶지 않아 모르는 척 입을 다문 것 같았다. 김수현은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그냥 넘어갈게요” 하고 말했다.

“……정말? 정말 이 상황이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긴 한데 말할 수 없다면서요. 그러니까 그냥 모르고 넘어가겠다고요.”

김수현의 선택은 차기주와 메시아 둘에게 모두 충격적이었다. 차기주는 자신이 사랑한 이 알파가 얼마나 강인한지 다시금 깨달았다.

김수현은 노트를 메시아에게 건네며 작별을 고했다.

“선배, 미안해요. 난 이 사람이 좋아요.”

메시아는 거짓말을 하고도 김수현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건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 혹시 김수현이 세뇌로 만들어진 기억을 완전히 기억해낸 건가, 그래서 차기주가 진짜 선배인 걸 아나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차기주는 메시아의 두 눈을 손으로 가렸다.

“또 눈알 뽑히고 싶으면 쳐다보든가. 수현아, 절대 붉은 눈을 쳐다보지 마. 세뇌 능력이 있어.”

“아, 네. 근데 이사님. 혹시 둘이 천적이라 한 명만 살아남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건 아니죠?”

아무리 메시아를 거절했어도 김수현은 한때 사랑했던 과거의 연인이 죽길 원치는 않았다. 그러나 소설 『농락』에서 메시아는 차기주의 적으로 나왔었다. 그들의 전투 장면은 실제로 작가가 경험했나 싶은 정도로 치열하고 현실감 있었다. 이젠 그게 정말 소설이었는지도 모르게 되었지만.

차기주가 선배를 죽이겠다고 하면 어떡하나 김수현은 걱정되었다.

메시아는 기회를 틈타 교회에서 달려 나갔다. 차기주가 재빨리 뒤쫓으려 했으나 김수현에게 허리를 붙잡혔다.

“솔직히 난 잘 모르겠어요, 메시아가 선배라는 거. 근데 너무 증거가 명확하니까 믿을 수밖에 없잖아요. 이사님, 선배는 한때 날 불행으로부터 구원해준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이번은 그냥 넘어가 줘요.”

차기주는 김수현이 입에 올린 ‘구원’이라는 단어에 설레고 또 미안했다. 과연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러놓고 ‘구원자’라는 말을 들어도 될까 싶었다. 그건 그를 사랑하고 믿어주는 김수현을 기만하는 행위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진실을 말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김수현의 앞에서 차기주는 그 누구보다도 작고 소심하고 조심스러워졌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온종일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즐거운 일인 동시에, 상대에게서 오지 않는 문자 하나 때문에 지옥에 처박히기도 하는 잔인한 일이었다.

상대방의 작은 행위에 일희일비하며 휘둘리는 것. 그런 상태의 차기주가 감히 진실을 입에 올릴 용기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여전히 목소리를 잃은 인어였다. 정신병원에 불을 지른 메시아가 감시 카메라에 대고 그를 ‘인어공주’라고 조롱했던 게 떠올랐다.

“그 이유 때문이라면 그럴게. 메시아와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지만 참을 수 있어.”

“정말요?”

“응. 그런데 둘이 언제부터 연락한 거야?”

“감금당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요. 저한테 ‘1004’라는 번호로 문자를 보냈더라고요.”

“잠깐 봐도 될까.”

김수현은 그동안 받은 문자를 찾아서 차기주에게 보여줬다. 차기주가 내용을 읽어보고 다시 김수현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김정석 씨를 구하러 집에 돌아갔던 거였구나. 난 네가 그때 나한테서 도망치려고 한 줄 알았어.”

김정석과 함께 계단을 구를 뻔한 날, 김수현은 진설해와 몰래 만나 차기주를 어떻게 떨어낼지 모의했었기에 은근히 양심에 찔렸다. 그렇지만 이제 그럴 일은 없었다.

황지윤 파트장이 차기주의 가이딩 중독을 운운하며 자신으로부터 떼어내준다고 했는데, 아직 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차기주에게 이상이 없는 듯했다. 그 계획은 그렇게 폐기된 것이리라. 그럼 이제 아무 문제 없었다.

김수현은 차기주의 손을 잡고 교회를 벗어났다. 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의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메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가이딩을 몇 번 하지 않았으니 가이딩 중독일 리는 없었다.

“최근에 가이딩 중독 검사한 적 있죠? 결과 어떻게 나왔어요?”

차기주는 멈칫했다가 아무런 일 없다는 듯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별거 없었어.”

주차장 바닥에 깔린 자갈이 자동차 바퀴에 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건 마치 파도가 방파제에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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